엄승원은 눈을 떴다.
골이 지끈지끈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으나, 눈앞에 얇은 막이 한 겹 드리워진 듯 시야가 뿌옜다. 그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목구멍이 답답하고 입 안도 텁텁했다. 가래침을 모아 내뱉고 싶었지만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얼굴에 테이프가 붙은 채였다.
엄승원은 몸을 흔들었다. 철제 의자 다리가 바닥을 찍었다. 두 팔은 팔걸이에 수갑으로 묶인 채였다.
상황을 파악하자 심장이 발등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절망감, 두려움, 의문.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엄승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팔은 묶였지만 다리는 자유로웠고, 입은 막혔지만 눈앞은 볼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살폈다.
8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가구가 얼마 없어서 넓어 보였다. 고개를 들자 천장의 형광등 조명에 눈이 부셨다. 벽은 조명만큼이나 흰 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벽을 따라가던 시선이 유일한 출구인 철문에 멎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무거워 보였다.
여기가 어딜까. 엄승원은 불안했다. 불안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부자들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의 지하 금고? 아니면 대저택의 지하 현금 창고?
엄승원의 시선이 바닥에 꽂혔다. A3 사이즈 회색 타일이 눈에 들어왔다. 벽만큼이나 깨끗했다. 타일과 타일 사이 하얀 시멘트에도 먼지 하나 없었다. 잘 관리된 시설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리모델링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그렇게 철저히 관리해야만 하는 시설이 대체 어딜까.
한쪽 귀퉁이에는 철제 좌변기와 개수대가 있었다. 역시나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깨끗했다. 새것 같았다.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승원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깨달았다. 왼쪽 벽 전체가 거울이었다. 엄승원은 저 유리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지금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매직미러.
이곳은 취조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누군가’가 곧 등장할 타이밍이었다. 잡혀 온 사람이 정신을 차렸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엄승원은 고개를 돌렸다.
옆구리에 노트북을 낀 남자가 들어왔다. 백팔십 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엄승원은 남자가 입은 옷을 알아보았다. 풍기 교육대 기동복이었다. 대테러 진압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목덜미의 단추를 풀어 헤친 데다 소매를 걷어 올려서 언뜻 후줄근해 보이지만, 분명 풍기 교육대 기동복이었다. 레플리카 제품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어서 알았다.
엄승원은 눈을 크게 떴다. 진치우 부대장이 책상 위에 노트북을 쿵, 떨어뜨렸다. 열 손가락을 쫙 펼친 그가 씩 웃었다.
“잘 잤냐?”
“읍읍! 부으읍!”
“아, 깜박.”
입을 틀어막았던 테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곧장 소리를 지른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신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아니면 살려 주세요.
영화는 영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엄승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별안간 목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치우. 풍기 교육대 부대장. 직급은 중령. 공화당의 삼룡으로 꼽혔던 대일전자 막내아들. 당시 재벌 3세 ‘황금 라인’으로 불리던 재계의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사교계에 데뷔했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진혜림 부사장의 영향이 컸다. 물론 동급인 ‘황금 라인’ 사이에서는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엄승원은 의자를 질질 끌어당겨 앉는 진치우를 바라보았다.
“초면에 충고 하나 하지. 좁은 길에서 사람 마주치면 닥치고 벽에 붙어. 특히 너 같은 돼지 새끼는, 숨이 섞이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니까.”
“예?”
“경희가 전해 주래.”
“예…?”
진치우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신예나의 밑에서 일하는 비공식 조사원, 구은하의 어릴 적 이름이 경희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뭣 하러 늘어놓겠는가. 그는 매직미러 너머에서 한 손에는 치킨, 한 손에는 콜라 캔을 들고 책상에 두 발을 떡하니 올려놓은 채 헤드폰을 쓰고 감시 중인 구은하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았다.
오늘 구은하의 임무는 비교적 간단했다. 자택 주변에서 뻗치기. 엄승원을 옮기느라 고생한 호월루의 보안 요원에게, 진치우는 다음 분기 공개 채용 일정과 접수 서류 목록을 알려 주었다. 내정자라도 구색은 맞춰야 했다.
엄승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제가 왜 여기 있는, 아니 그전에 제가 왜.”
“천천히 말해.”
“저를 왜 납치했느냔 말입니다!”
진치우가 노트북을 열었다.
“신고가 들어왔어.”
“예에?”
“아저씨, 여기 근처에서 여자애들 건드렸지?”
“뭐라고요?”
“어린 여자애들한테 말 걸고, 사진 찍고. 아저씨 그거 다 범죄야. 알아?”
“무슨,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엄승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 그런 적 없습니다!”
진치우가 노트북과 함께 가지고 들어왔던 검은색 무선 마우스가 엄승원의 정수리를 스치고 날아갔다. 플라스틱이 타일 벽에 부딪혀 박살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엄승원은 입을 다물었다. 진치우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알아듣네.”
“…….”
“근데 묵비권은 행사하지 마. 내가 성격이 좀 급해서.”
엄승원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육하원칙에 맞춰서 설명할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순종적으로 굴어야 했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가고 싶다면.
“엄승원 씨, 아니 엄 기자님.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쇼. 댁이 지금 혼자 살고, 딱히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도 없고, MVP 잘못 건드려 가지고 일선에서 완전 나가리 됐다는 거 아니까. 혹시 뭐 내가 기자라서 못 건드릴 거다, 저 무식한 군바리를 혀로 구워삶을 수 있을 거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앉아 있으면 곤란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성격이 급하거든.”
엄승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니면 이쪽을 불안하게 만들려는 셈인지 모르겠다.
“아, 눈 돌리지 말고. 나 말할 때 누가 시선 피하는 거 싫어해.”
어쩌란 말인가. 똑바로 보면 건방진 놈이 어딜 째려보냐고 화낼 거면서.
진치우가 테이블에 지퍼 백을 올려놓았다.
“당신 거 맞지?”
내용물을 확인한 엄승원이 진치우를 바라보았다.
“맞다, 아니다. 대답하쇼.”
“…맞습니다.”
어느 방향, 각도에서 봐도 자기 지갑이었다. 골목길에서 여자와 부딪혔을 때 떨어뜨린. 지갑은 펼쳐져 있었고 내용물이 전부 빠져나온 채였다. 신분증. 카드. 명함. 구겨지고 귀퉁이가 누렇게 변색된 영수증과 얼마 안 되는 현금.
“이것도. 당신 거 맞지?”
두 개째 지퍼 백에는 엄승원의 사원증이 들었다. 파란 목걸이 줄이 달린 카드. 엄승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 번째 지퍼 백은 부피가 컸다. 가방에 들어 있던 노트북이었다. 엄승원은 신께 감사했다. 강인우에게 USB를 건네줘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걸 아직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쯤 살아서 눈뜨지 못했겠지. 콘크리트로 꽉 채운 드럼통에 갇혀서 강이나 바다 깊숙이 가라앉거나,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 의문의 교통사고 희생자가 되거나, 집 앞에서 의문의 괴한에게 칼을 맞거나. 그것도 아니면 라이플에 소음기를 낀 저격수의 표적이 되거나.
엄승원은 머릿속을 잠식하는 끔찍한 상상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어쨌거나 살았으니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백업 파일 따윈 없었다. 네트워크 접속 기록, 임시 저장 파일, 전부 깨끗하게 정리했다. 애초에 최금호와 관련된 일에는 외장 하드를 사용했다. 그건 강인우에게 자료를 넘기기 전에 폐기했다. 어떻게든 찾아내 복구를 시도한다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완벽하게 복원될 가능성도 낮고,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플래터를 완전히 긁어 놓았으니까.
엄승원은 진치우가 내민 증거품 중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았다. 유미현과 강인우와 관련된 단서를 기계에 남긴 적 없었다. 통신 기록은 남아 있겠지만 어차피 대포로 밝혀질 연락처들이었다. 엄승원은 자신보다 그들이 더 보안에 철저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치우가 팔짱을 끼자 팔뚝에 근육이 불거졌다.
“왜 여기 주변 서성대?”
“여자애들 때문 아닙니다. 저 그런 변태 새끼 아니에요.”
“그럼 이유가 뭐야?”
엄승원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리게 생겼다.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총살은 면하겠지만, 이 나라에서 풍기 문란은 중죄였고 성범죄는 풍기 문란 처벌 제1 순위였다. 교도소에서도 최하위 계급이 성범죄자였다.
“여기 알짱거리는 이유가 뭐냐고! 엉!”
“그….”
엄승원은 뻣뻣하게 굳은 혀를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진치우의 손바닥이 테이블을 내려치는 게 빨랐다.
“말해! 난 성격이 급해. 그런 내가 똑같은 말을 세 번째 하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엄승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성격이 급하다는 진치우의 말은 참이었다. 그는 빌어먹을 다혈질에 폭력성이 다분했다. 때려죽인 시위자들 머릿수가 열이 넘어간다는 소문은 뜬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저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변명과 핑계를. 하얀 거짓말을. 인과 관계를 짜 맞추고, 이음매를 매끄럽게 다듬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일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팩트만 가지고서는 기자 노릇을 해 먹을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상황을 자극적으로 연출하는 재주가 있어야 이 바닥에서 인정받았다. 특종은 팩트만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류연비….”
“뭐야?”
“저는, 그… 류연비 조사하고 있습니다!”
진치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엄승원은 의자에 묶인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리와의 전쟁이 한창인 중국에서는 중간급 간부들이 윗선을 보호하고 가족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 자살했다. 엄승원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킬 가족 따위 없었고, 유미현이나 강인우에게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 둘의 이름을 내뱉지 않는 건 물론 충성심이 아니라 보복당할 위험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정류진은 아니었다. 보복당할 위험도 없었고, 좌천되어 재기를 꾀하는 기자가 노릴 만한 소재로 충분했다.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세상은 아직 류연비를 기억했다.
최고의 거짓말은 거짓과 진실을 섞는 것이다.
그 옛날 어느 책에서 읽은 문구를 떠올리며, 엄승원은 살기 위해 말했다. 성질 급한 진치우는 벌써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그게, 참… 아시지 않습니까? 저 완전 나가리 돼서요. 뭐 하나라도 굵직한 거 써내지 않으면….”
엄승원은 힘겹게 웃었다.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해요. 당신의 뜻에 반박할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그 담뱃불을 내 오른쪽 눈에 처박을까, 왼쪽 눈에 쑤셔 박을까 가늠하는 표정은 짓지 말아 줄래요?
회색 연기를 뿜어낸 진치우가 말했다.
“고만 떨어. 정신 사나워.”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잖습니까. 그게…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정식으로 체포하셨어도 응했을 텐데요.”
체포에 순순히 응했을 거라는 얘긴 나는 거리낄 게 없다는 의미도 되었다. 진치우는 당당했다.
“말했잖아. 내가 성격이 급하다고.”
“예?”
“그냥 연습 좀 했어. 일종의 훈련 같은 거지. 사수대 애새끼들 날이 갈수록 발이 빨라져서. 이해하지? 난 기자님이 우리 사정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똑똑한 화이트칼라잖아?”
엄승원은 속으로 한탄했다. 이 막 나가는 군바리는 체포와 납치를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왜, 그럼 안 되냐? 표정이 좆같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 기름때 좔좔 흐르는 덩어리 새끼야.”
“…….”
“왜, 내 말이 기분 나빠?”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내가 꽤 점잖아. 최근에 일이 하나 있었거든. 알지? 내 차. 테러당해서 완전 작살났잖아. 기억하지?”
“예, 예.”
“내 차 이름이 뭐였지?”
“예?”
진치우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철제 의자가 나뒹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손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의자 자리를 잡더니, 타일 바닥을 미친 듯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의자가 천장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철제 프레임이 우그러지는 게 보였다. 방금 시공한 것처럼 깨끗한 타일에 금이 가고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가! 성격 급하다고!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엄승원은 질린 표정으로 진치우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머릿속 공포 탐지기인 편도체가 경고했다. 조심해. 저 새끼 진짜 정신병자야.
***
송풍구에 달린 카츠 클락의 은색 바늘이 자정을 가리켰다. 기우희는 지마의 서지운에게 정차를 명령했다.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크기도, 모양도 다른 세 대의 차가 나란히 멈췄다.
신해범이 차폐막을 넘어 사수석으로 왔다. 당연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류진을 안고 있었다. 기우희는 재빨리 사수석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신해범은 능숙하게 정류진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몇 번 뒤척인 끝에 편한 자세를 찾은 그가 말했다.
“뒷자리는 더워서.”
차폐막 너머에는 권세혁이 있었다. 수면제와 THC 성분에 취해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체온 조절은 여전히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오한을 호소하는 통에 그가 있는 곳은 에어컨을 켤 수가 없었다.
기우희는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신해범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빙긋 웃었다. 정류진은 눈을 감은 채 그의 품에 늘어져 있었다. 얼굴이 해쓱했다. 눈 밑은 까맣고.
“우리 꼬꼬 많이 피곤했나 봐.”
“어린애 뒤치다꺼리는 힘들지요.”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싫다는 듯 찌푸려지는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지로 관자놀이 흉터를 연신 쓸어내렸다. 기우희도 의자 등받이를 젖히고 누웠다.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시간 운전으로 목과 어깨가 뻣뻣했다.
류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놀던 신해범이 불쑥 말했다.
“아직 심문 중이라는데.”
“정말 유미현 쪽 사람이라면 미끼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제거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MVP 잘못 건드려서 나가리 된 놈이라는데.”
기우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일 그만둬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없겠군요.”
“그렇지.”
펜대 굴리는 놈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신해범이 누누이 하던 말이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지식인을 거꾸러뜨리는 방법은 프로파간다 낙인을 찍는 거였다. 지식인들 힘의 원천은 대중의 신뢰였고, 그걸 잃은 순간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종이에 문장 몇 줄 끼적거리는 일뿐인 무능력자로 전락한다.
신해범의 손이 류진의 목덜미로 옮겨 갔다. 시선은 차창 너머를 향했다.
“내가 우리 엄 기자님 작품을 좀 찾아봤는데, 공채 출신이라더니 확실히 글발은 좋아. 그런데 너무 감정적이야. 뭐랄까. 직업은 기잔데 감성은 소설가? 하긴, 글 쓰는 직업군이야 워낙 스펙트럼이 넓으니까.”
류진이 뒤척거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면서 우네요.”
신해범은 말없이 류진의 엉덩이를 추켜올렸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류진이 불편한 듯 뭐라고 웅얼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슬픈 꿈이라도 꾸나 보지.”
“무서운 걸까요?”
“고향으로 가는 게?”
“서 병장은 긴장한 눈칩니다.”
신해범은 잠자코 웃기만 했다. 류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기우희는 계기판 위에 올려놓은 라이터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운전석 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덮쳐왔다. 장마철의 습하고 눅눅한 공기였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신해범이 류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
“깬 거 알아. 눈 떠.”
“…….”
“여기서 해도 괜찮긴 한데, 기 소령 농땡이 안 피우는 사람이거든. 진짜 담배만 피우고 올 텐데 나는 오 분 안에 해결할 자신 없다. 내가 무슨 토끼도 아니고.”
“…….”
목덜미를 만지던 손이 내려갔다. 어깨를 더듬고 등줄기를 쓸어내리던 손이 벨트를 풀어서 헐렁해진 제복 바지 속으로 쑥 들어갔다. 거침없이 속옷 안으로 침입한 손가락이 움직였다.
류진의 감은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신해범이 속삭였다.
“우리 정 이병 엉덩이 보들보들.”
볼깃살을 주무르던 손이 엉덩이 골로 들어왔다. 신해범의 손끝이 구멍을 지분거렸다. 류진은 실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하지 마….”
“넌 꼭 행동으로 보여 줘야 말을 듣더라. 가끔은 진짜 닭을 훈련해도 너보단 쓰임새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하던 신해범이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명치에 꽂힌 주먹이 보였다.
“뭐야?”
한없이 가소로웠다. 신해범은 류진은 마른 손목을 붙잡아 비틀어 꺾었다.
“아악!”
“잠이 확 깨지?”
“아파, 놔!”
“급소를 노린 건 알겠어. 그런데 힘이 많이 부족해.”
“놔, 놔…!”
“원래 이 정도로 악력이 없어? 아니면 운동 안 해서 몸이 녹슬었냐?”
“이거 놓으라고!”
“꼭 힘을 써야 말을 듣지.”
빠져나가나 싶었던 손이 도로 팬티 속으로 파고들었다. 엉덩이를 세게 붙잡혀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류진은 숨을 참고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하지 말랬다.”
그 해쓱한 얼굴이 제법 독 오른 삵 같아서, 신해범은 흡족해졌다.
“나 우리 꼬꼬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
“계속 궁금해해. 묻지 마.”
“함영재 어떤 놈이야?”
류진의 눈초리가 한층 매서워졌다.
“그런 걸 왜 묻는데.”
“이기려면 상대방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 해.”
“이미 충분히… 조사했잖아.”
“제삼자의 눈으로는 보기 힘든 게 있거든. 사소하고 자잘한 거. 굳이 기록으로 남길 필요 없어 보이는 거.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그런 자투리 정보가 모여서 결정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해?”
힘없이 늘어진 류진의 손이 떨렸다. 신해범은 그 마른 손을 붙잡아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기억나는 거 아무거나 좋아. 나한테 말해 봐.”
“그런 거….”
없다고 말할 참이었다. 하지만 곧장 이어진 신해범의 말에 류진은 내뱉으려던 말을 삼켰다.
“우리가 이길 수 있게.”
류진은 신해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매끈한 턱과 갈매기 모양 윗입술을 주시했다. 알고 싶었다. 지금 신해범이 진심인지. 정말로 당신과 나를 ‘우리’라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이길 수 있게… 라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믿음직하게 느껴지잖아.
류진은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삼키고, 조그맣게 한숨 쉬었다.
“알고 싶은 게 뭔데. 내가 당한 얘기는 안 해.”
“그래. 그건 함가 놈한테 듣지 뭐.”
“뭐?”
“내가 너한테 궁금한 건 함영재에 대해서야. 그놈의 성격. 습관. 말투. 기호. 플러스로 흡연자인지 아닌지, 주량은 어느 정도나 되고 주사는 어떤지. 선호하는 브랜드는 있는지. 있다면 왜인지.”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는 작전과 거꾸러뜨리려는 작전은 의외로 시작점이 같았다. 상대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뜻밖의 감동과 의외의 두려움을 줄 수 있었다.
류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게 궁금하다고? 무슨 소개팅 나가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신해범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소개팅. 이름하여 데스 미팅.”
B급 공포 영화 타이틀 같았다. 류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나 그 새끼 잘 몰라. 애초에 알고 지내는 사람도 아니었어.”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내가 기억하는 게 있어도 지금은 바뀌었을 거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벼락부자나 신데렐라가 사교계에서 따돌려지는 이유지.”
“그건 차별이잖아.”
“너와 내가 수없이 겪어 왔던 일이고.”
신해범의 손이 류진의 뺨을 만졌다. 류진은 그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말해 봐.”
분홍색 입술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듣고 비웃지 마.”
“누구? 함영재?”
“아니, 나 말이야.”
“내가 우리 꼬꼬를 왜 비웃겠어?”
류진은 은근슬쩍 허벅지를 주무르는 신해범의 손을 붙잡았다.
“만지지 마. 약속하면….”
“약속하면?”
“말할게. 기억나는 것들만. 그런데 틀려도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마. 그러면 다시는, 다시는 당신이 원하는 거 안 들어줄 거야.”
“우리 꼬꼬는 협박도 참 귀엽게 한다.”
신해범이 순순히 손을 거뒀다. 허벅지를 만지던 손이 골반으로 옮겨 갔다. 옷 위로 쓰다듬는 손길이 거북했지만, 류진은 꾹 참았다. 전적에 비하면 신사적이었다.
“그 새끼는.”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새끼는 부자였어. 좋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어.”
기사에는 또래의 불량 패거리라고 나왔지만,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함영재는 이미 스무 살이었다. 열일고여덟이 주축인 미성년자 그룹에서 은퇴할 나이였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여전히 작은 세상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싶었거나, 고교를 졸업하고 진로가 정해지지 않아 허공에 붕 뜬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학도, 취업도, 그렇다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 남는 게 시간이요, 듣는 게 남들 이야기일 터였다.
류진도 그 당시 함영재의 귀에 들어갔던 ‘남들 이야기’ 중 하나였다. 문제는 어지간한 이야기에는 심드렁하던 함영재가 류진에게는 전에 없이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나한테 잘해 줬어.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 겉보기와는 다르게.”
신해범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명품 신발이랑 모자, 반지 같은 거. 광성에서야 흔하지만 우리 지역에선 구하기 어려웠거든. 값도 값인데 택배로 시켜도 오래 걸려서…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신해범은 광성 토박이였지만 직할시 바깥 사정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끼어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술이랑 음식 같은 거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돈이 많다는 게 느껴졌어.”
신해범이 손을 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자 류진의 말에 속도가 붙었다. 목소리에 힘도 실렸다. 언제나 싫다고 생각했던 신해범의 체온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의지가 됐다. 함영재를 떠올릴 수 있는 힘을 줬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기우희가 돌아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타는 대신, 신해범에게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밤하늘이 제법 좋습니다. 에어컨도 계속 쐬면 머리 아프니, 잠깐 나오시지 않겠습니까?”
일에 관해서가 아니라면 뭔가를 제안하는 일이 드문 그였다. 의문은 기우희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성재경으로 인해 풀렸다. 성재경은 양손 가득 살림살이를 들고 있었다. 바닥에 깔 은박 담요, 스팀 쿠커, 물통과 종이컵.
류진은 신해범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가고 싶었다. 밤하늘을 구경하면서 성재경과 놀고 싶었다. 하지만 신해범이 허락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좋지. 잠도 안 오고 거북한데, 따뜻한 차 한잔하면 속이 풀리겠어.”
류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재경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제가 레몬 티를 준비했습니다.”
“고맙지만 인스턴트 차는 끊기로 했어. 설탕이 너무 많아서.”
기우희와 성재경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두 사람의 생각은 일치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 소리래?
“그럼 어떤 걸….”
신해범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직접 우려낸 차가 좋겠군.”
“예?”
“신선한 재료로 우려낸 차 말이야. 그런 걸 마시고 싶어.”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풍기대 안에서라면 모를까, 외부에서는 라면이고 전투 식량이고 가리지 않는 신해범이었다. 음식이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했고, 만약 모자란다면 부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식사를 양보하기도 했다. 까다로움과는 백만 광년 떨어져 있던 신해범이 별안간 신선한 재료 타령을 했다. 이 밤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류진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정 이병?”
기가 막혀서.
마가목 열매가 탐이 나면 내놓으라고 하면 될 것이지, 그걸 꼭 저렇게 돌려 말한다. 사람 여럿 곤란하게 만들면서.
류진은 한숨을 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주면 되잖아.”
“그렇지.”
신해범은 대단히 만족했다. 뒷좌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비닐봉지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류진의 엉덩이를 팡팡 때리기까지 했다. 냅다 걷어차고 싶었지만, 권세혁이 깰까 봐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성재경이 휴대폰 불빛으로 바닥을 비추며 비닐봉지를 찾는 걸 도왔다.
“류진아, 찾았어?”
“여, 여기.”
“얼른 나와.”
“응.”
성재경의 뒤를 따라 빠져나가려는데 권세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이마는 땀범벅이었고, 나쁜 꿈이라도 꾸는 양 꼭 감은 눈꺼풀이 경련했다. 류진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권세혁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그렇게까지 쏘아붙였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간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온 걸까. 아니면 정말 권세혁이 한심해서, 바보 같아서, 안타까워서였을까.
‘형, 내가 함영재 죽여 주면 얼마나 용서해 줄 수 있어?’
류진은 약 기운에 절어서 잠든 권세혁의 얼굴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반의반?’
권세혁은 정말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반의, 반의반?’
류진이 권세혁을 미워하고 원망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 미움의 부피가 줄어들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류진은 가끔 그에게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곤 했지만, 이해와 용서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성재경이 스팀 쿠커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낯선 조리법이라 걱정스러웠지만, 마가목 열매는 충분히 우러났다. 류진은 뜨거운 차를 종이컵에 나누어 따랐다. 성재경이 먼저 맛을 보았다.
“어때?”
“건강에 좋은 맛이다.”
맛없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나무 향이 진했다. 성재경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잠깐만 있어 봐.”
기대마로 뛰어갔다 온 성재경의 손에는 설탕이 들려 있었다.
“대장님이 요리하시니까 이런 게 좋아.”
설탕을 넣으니 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성재경은 종이컵을 들고 잽싸게 기우희에게로 갔다. 류진은 잠자코 신해범의 몫을 챙겼다. 주차지 건너에 넓은 들판이 있었다. 키 큰 잡풀 사이로 은박 담요를 깔고 앉은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가갔다. 다행히 돌부리나 물웅덩이는 없었다. 신해범과 기우희가 평지를 잘 찾아 자리를 깔았다.
기우희는 은박 담요 위에 앉아 있었고, 성재경은 그런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공손히 종이컵을 내밀었다. 신해범은 담요에서 삼 미터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류진은 신해범에게 다가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여기….”
그가 집게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신해범은 통화 중이었다. 휴대폰 너머에 있는 사람은 진치우였다. 대화 도중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
“그 번호 알아봐. 어차피 명의 도용 대포겠지만. 상대는 아직 엄이 우리한테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야. 위치 추적해 보고 나한테 회신해.”
통화는 금방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치우는 신해범 없이는 일을 못 하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류진은 누가 더 멍청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기우희에게 말을 걸었다.
“소령님, 그, 저, 맛이 어떠세요?”
“어떠십니까.”
“마, 맛이 어떠십니까?”
“먹을 만하다.”
“그런데 지금 뭐 하시는….”
기우희는 라면 상자를 엎어 놓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류진이 코를 킁킁거렸다. 마가목 냄새 때문에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대마였다. 특유의 시큼 찌릿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기우희는 달빛이 비치는 방향으로 라면 상자를 돌려 가며 열심히 대마를 말았다.
“안 되네.”
기우희가 볼펜을 팽개쳤다. 상자에서 떨어진 볼펜이 류진의 무릎으로 굴러왔다.
“그거 제가….”
“할 수 있어?”
“그냥 배웠습니다.”
“나도 옛날에 애들이 하는 거 봤는데. 좀 자세하게 봐 둘 걸 그랬나.”
옛날에?
의문도 잠시, 기우희가 라면 상자를 류진 쪽으로 밀었다. 휴대폰 라이트를 켠 성재경이 다가왔다. 기우희의 작업물을 본 류진은 왜 작업이 잘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가장자리 종이 틈새가 자꾸만 벌어졌다. 타액을 묻히지 않아서 그렇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는 기우희와 성재경의 옆에서, 류진은 대마를 말았다. 신해범이 줬다는 이파리는 처음부터 잘게 찢어져 있었다. 류진은 신문지를 작게 잘라 담배처럼 만 뒤 한쪽을 돌돌 말아서 봉했다. 그 속에 대마 잎을 털어 넣었다.
볼펜으로 속을 꾹꾹 눌러 가며 야무지게 채워 담는 게 요령이었다. 문제의 가장자리는 침을 발라 봉했다. 완성된 대마는 어두운 데서는 정말 담배처럼 보였다.
“우와.”
성재경이 감탄했다.
“신기하다.”
“그래?”
“직접 마는 거 처음 봐. 우리가 압수하는 증거품은 대부분 고체라서. 소령님, 그렇지 않습니까?”
“거의 벽돌이지.”
류진은 완성한 대마초를 기우희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계속해.”
“예?”
“어차피 네가 할 일이었다. MVP 응급 처치 약이니까.”
류진은 머뭇거리며 신문지를 찢었다. 날짜가 지난 자강도의 지역 신문이었다.
“마을 회관에 많이 쌓여 있더라.”
성재경이 말했다. 류진은 권세혁에게 대마초를 물려 주던 신해범을 떠올렸다. 그리고 의문의 산불에 대해서 생각했다.
신해범은 산불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화전을 일구기 워해 지른 불이라고 했다. 금단 증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권세혁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대마초를 태울 때 나는 특유의 냄새, 그리고 신해범이 소지하고 있던 대마. 그건 분명 일반적인 화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을까?
의문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대마를 말았다.
세 개째가 완성될 무렵 신해범이 돌아왔다. 그는 류진이 만들어 둔 대마를 보더니 감탄했다.
“팔아도 되겠는데.”
“팔았어. 클럽에서.”
무심코 말하다가 멈칫했다. 지금은 함께 있지만,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쫓고 쫓기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어쨌든 마약은 불법이었다. 류진은 살며시 라면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안 할래….”
지켜보던 세 사람이 웃었다. 성재경이 류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류진아. 안 잡아가.”
신해범은 웃겨서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마가목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말했다.
“색다른 맛이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
“어릴 때 할머니가.”
류진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가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신해범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숙연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성재경이 나섰다. 그는 이번 작전 이후에 예정된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간호 사관 학교 생도들의 견학, 호월루에서 보내 주기로 한 강아지들, 여름휴가와 전 직원들에게 특별 지급되는 휴가비, 그리고 충용절 행사.
대마를 말던 류진이 중얼거렸다.
“충용절….”
총통과 정부인의 결혼기념일을 그렇게 불렀다. 그날이 돌아오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과자며 사탕이며 떡 같은 주전부리들을 나누어 주곤 했다. 어린 시절 류진은 그날을 무턱대고 좋아했다. 연말에 동사무소에서 나누어 주는 내년 달력을 받으면 가장 먼저 가족의 생일과 기일에 표시하고, 충용절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담배를 피워 문 기우희가 말했다.
“귀국 일자가 잡힐 것 같습니다.”
“권이 그러던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공군에서 움직임이 보입니다. USAF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멀뚱멀뚱 앉아 있는 류진의 옆구리를 신해범이 쿡, 찔렀다.
“아!”
“권일혁이 돌아온다.”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권주혁과 유미현을 비롯한 소수의 측근만이 아는 정보였다. 대중은 권일혁 총통이 어려서부터 앓아 온 만성 두통이 심해져 일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총통은 백조교 사태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서 불안을 호소했다. 곽재헌이 숙청당한 이유도 측근을 신뢰하지 않는 총통의 편집증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백조교 교주의 영혼이 총통에게 달라붙어 저주를 내렸다고도 했다.
“심장 수술?”
류진은 외과적 지식이 없었으나, 그게 동네 소아과에서 진료를 볼 수 있는 감기나 배앓이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신해범이 기지개를 켜며 담요 위에 드러누웠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안 뒈졌다는 건 확실하네.”
“…….”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범이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웃기지 마. 그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 되는 놈이야. 마취 상태로 쿨쿨 자다가 편안하게 저승행? 절대 안 되지.”
신해범다운 소리였다. 그리고 류진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튼 충용절 행사, 총통이 참여하든 안 하든 간에 우리가 가게 될 거야. MVP도 참석해야 하고… 우린 권의 블랙 워터니까.”
지금은 아카데미로 바뀐 미 민간 군사 기업의 이름이다. 권주혁이 풍기 교육대를 구상할 당시 이 ‘블랙 워터’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서 뭘 하는데?”
“병풍이랑 잡일. 그냥 고급 노예라고 생각하면 된다.”
신해범의 신랄한 표현에 기우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생각해 두신 대원이 있으시면 팀에 넣겠습니다.”
“봐 둔 사람은 없지만, 두 명 더 추가하지. 올해는 MVP가 있으니까. 내가 그쪽에 붙을 테니 기 소령은 권을 마크해.”
“알겠습니다. 부대장님은 올해도 열외입니까?”
“그러는 게 좋겠지.”
류진이 신해범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왜?”
“그 행사, 신룡관에서 하는 거야?”
“그래.”
“나도 끼워 주면 안 돼?”
“뭐?”
“…총통 실물 보고 싶어.”
신해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꼬꼬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는데.”
“그냥 보기만 할게. 멀리서.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 그냥….”
별안간 얼굴을 붙잡혔다. 신해범의 양손이 류진의 뺨을 감쌌다. 내려다보는 시선. 류진은 입을 다물었다.
“기쁘다.”
신해범의 머리 위에 달이 떠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지난 MVP 때처럼 했다간, 권주혁 아가리에 머리부터 쑤셔 넣어 줄 거야.”
저질이지만 효과적인 협박이었다. 신해범은 고개를 끄덕이는 류진을 내려다봤다. 조그만 얼굴이 달빛에 희게 빛났다. 대마를 마는 데 집중하느라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붉었다.
신해범은 처음으로 부하들이 방해된다고 생각했다. 딱 키스할 타이밍이었다. 사람이 가장 센티해진다는 새벽에, 사방에는 달빛이 가득하고, 키 큰 잡초들이 모습을 가려 준다는 이점도 있었다. 시간, 분위기, 환경 삼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신해범은 류진에게 입 맞추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일어나지. 아침에 출발하려면 조금이라도 자 둬야 해.”
“예!”
성재경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류진은 완성한 대마를 신해범에게 건넸다. 그가 웃으면서 담뱃갑을 열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대마 여남은 개가 들어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뭐. 이거?”
“자강 1도에서 가져온 거지?”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다?”
“냄새가 그렇게 났는데, 모르는 사람이 바보지.”
권세혁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예외로 치겠다.
신해범이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원래 보폭이 넓은 데다 속도까지 붙어, 웬만큼 빨리 걸어서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류진은 거의 뛰어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왜 아무도 체포 안 했어?”
“그럴 시간 없으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 당신이 시간 없다고 범죄를 눈감아 줄 사람이야?”
“그럼 귀찮아서라고 해 두자.”
“그게 더 말이 안 되는데.”
“거 되게 삐약거리네.”
“무슨 이유가 있는 거지? 당신이 일부러 봐줬을 리는 없고, 거기 사람들하고 무슨 딜이 있었던 거지? 권세혁 몰래?”
신해범이 우뚝 멈췄다. 류진도 나란히 멈추어 섰다. 뒤돌아본 그의 표정이 싸늘했다.
“이병 나부랭이 주제에, 나한테 뇌물 수수 혐의를 씌우려고 하는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난 그냥 궁금해서….”
“요즘 살 만 한가 보다? 남 일에 관심을 다 가지고.”
이죽거리며 앞서가던 신해범이 뒤돌아보았다.
“왜 안 와?”
“왜 나를 따돌려?”
“뭐야?”
“권세혁한테 일러바칠까 봐 그래? 나 그런 짓 안 해.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다 까발리고 도망갔어.”
신해범이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당신을 믿길 원한다면, 당신도 날 믿어야 해. 우리라고 그랬잖아.”
“그 말이 마음에 들었나 봐?”
“좋은 게 아니라!”
양 주먹을 움켜쥔 류진이 소리쳤다. 습한 바람이 불어와 수풀이 흔들렸다. 류진의 머리카락과 통 넓은 셔츠 소매가 흔들렸다.
신해범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꺼풀을 감았다 뜨면 사라질 것 같았다. 정류진은 그랬다. 자고 있으면 죽을까 봐, 떨어져 있으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불안해하느라 매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신해범은 활짝 웃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유머 감각을 키워 왔다.
“확 잡아먹어 버릴까 보다.”
“장난치지 마. 진지하게 말하잖아!”
“별다른 이유 없어. 그냥 귀찮아서야.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대충 증거만 없애고 덮은 거지.”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럼 뭐가 말이 되는데?”
신해범이 다가왔다. 그는 류진의 팔을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종잇장 같은 몸이 끌려왔다.
“조그만 대마밭 하나 찾아내 봤자 얻는 것도 없어. 오히려 그걸 인제 찾았냐고, 그간 주민들과 내통하다가 일이 틀어져서 배신한 거 아니냐고 의심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야.”
“그런…!”
“이 바닥이 원래 괴상하게 돌아가. 너도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겠지.”
신해범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진치우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보고받아라.
“비 와?”
- 엉. 거긴 안 오냐? 조용하네.
신해범은 조용히 웃었다.
“보고해.”
- 엄승원 휴대폰에 그 번호, 대포 맞다. 선불 폰이야. GPS, 와이파이, 데이터 전부 꺼져 있고 통제 센터에서 전파는 잡았는데 위치 파악하기 전에 끊겼어. 일단은 기지국 반경 2km 내이긴 한데… 범아, 이 새끼 말로는 류연비 조사하던 중이었다네. 그거밖에 없다고 박박 우기는데 이거 수상하지? 아무래도 냄새가 나지?
“연결이 끊겼어?”
-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아. 전원이 꺼졌다.
인상을 찌푸린 신해범이 발을 굴렀다. 그의 군화에 풀들이 짓이겨졌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네. 신호 범위에 잡히는 위치라는 거.”
- 어떡할까. 가장 가까운 기지국 중심으로 수색?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도심인데 좀 걸리지. 그런데 범아, 이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하나? 통화 기록 보니까 지역이 우리 관할이다, 이거.
신해범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잡초로 우거진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선 송전탑이 보였다. 그의 눈이 리벳으로 연결된 금속 트러스를 훑어 올라갔다. 달빛에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전력 케이블을 노려보며, 신해범이 말했다.
“설치다가 권이나 헌병대에 알려져서 좋을 것 없어. 평범한 기자가 대포 폰 소지자랑 커넥션 있는 것도 이상하지.”
신해범은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그놈, 유미현 끄나풀일 가능성이 커. 네 방식대로 알아봐.”
- 알았다.
전화가 끊어졌다. 류진이 신해범의 팔에 매달렸다.
“무슨 소리야? 얼버무릴 생각 마, 나 다 들었어. 누나 이름이 왜 나와? 기자라니 누구야? 설마 아직도 나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진치우가 잡은 거야? 뭐야? 뭔데. 말해 봐. 말해 줘….”
필사적으로 말하는 얼굴이 창백했다. 고운 이목구비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신해범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휘청대는 류진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인지 말해 줘!”
“넌 걱정하지 마. 말했지. 내가 다 해치워 준다고. 난 절대로 안 져. 상대가 누구든, 몇 명이든, 목적이 뭐든. 난 절대 겁내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무서워하지 마.”
신해범은 품에서 류진을 떼어 내고,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키스할 타이밍이었다. 신해범은 기회가 없어도 만들어 내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건 물론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류진의 입술 위로 신해범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는 류진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어깨와 허리를 꽉 안았다.
라면 상자와 은박 담요를 챙기던 성재경이 우뚝 멈췄다. 물론 기우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성재경의 무릎 뒤를 차서 정신을 차리게 만든 뒤, 조용히 기대마로 복귀시켰다.
기우희는 진압 차량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차 문을 열기 전 무심코 주변을 둘러본 순간, 그는 오랜만에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왕자님.”
권세혁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을까? 거리가 있어 대화를 엿듣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붉은 호랑이>들의 대화 유출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권세혁은 기우희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저 멀리 달빛 아래 입 맞추는 신해범과 류진을 바라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