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이 되던 해, 목검을 선물 받았다.
생일날 아침이었다. 눈을 뜨니 머리맡에 검은 좌대가 놓여 있었다.
권세혁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외조부의 방에 있는 칠검 좌대보다는 한참 작지만, 같은 장인이 만든 물건이었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문 채 하늘로 솟구치려는 모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목검을 떠받친 건 옥으로 만든 뿔이었다.
권세혁은 바닥에 새겨진 황금빛 한자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거수마룡(車水馬龍). 흐르는 물과 같은 수레, 하늘을 오르는 용처럼 보이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수레와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위풍당당한 행렬.
매끈하게 잘 빠진 적갈색 목검에는 이미 주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권세혁은 땀을 잘 흡수하는 검은 천으로 동여맨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는 있었지만,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버텨야 했다.
외조부는 자기 방에 있는 무기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모든 물건들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고, 열쇠는 외조부의 방 금고 속에 들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열쇠 개수를 세며 철저하게 관리했다.
외조부는 권세혁이 무도에 관심을 보이는 걸 좋아했으나 수련은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았다. 무도장의 연습용 목검과 죽도를 만져 본 경험을 빼면, 권세혁은 지금껏 이렇다 할 무기를 잡아 보지 못했다.
외조부는 모든 무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검을 잡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의 손에 날붙이가 들어가면 반드시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런 외조부가 자신만의 목검을 만들어 선물해 준 것이다. 그건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인정받을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였다.
권세혁은 목검을 든 채 방을 뛰쳐나갔다. 잠옷 바람에 맨발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침 세숫물과 차를 가져오던 고용인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권세혁은 고용인의 부름을 무시했다.
긴 복도를 다다다 뛰어갔다. 3월,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올 때였다. 하지만 메말라 있던 나뭇가지에 하나둘 새순이 맺힐 때이기도 했다. 고용인들이 살뜰하게 돌보는 정원에는 이미 꽃이 피어났다.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눈송이를 닮은 목련. 겨우내 정원을 삭막하지 않게 지켜 줬던 동백과 매화도 꽃잎을 활짝 펼쳤다. 동장군이 옷자락을 여미고 떠나갈 시기였다. 권세혁의 생일이었다.
아침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이쳤다. 창문마다 달아 놓은 연꽃 모양 종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권세혁은 외조부와 맞닥뜨렸다. 위험을 감지한 순간 재빨리 멈춘 덕분에 충돌은 피했으나 면박은 피할 수 없었다. 사내가 돼서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꾸짖음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권세혁은 배시시 웃으며 목검을 끌어안았다.
외조부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갸름한 얼굴, 평균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흰 피부에 연보라색 셔츠가 잘 어울렸다. 그는 목검을 꼭 안은 권세혁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외조부는 그를 소개해 주었다. 이제부터 네 개인 검술 지도 사범이 될 거라고 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굳셀 강(强)에 솔개 연(鳶)을 써서 강연이라고 하며, 성은 이 씨라고 알려 주었다. 어머니가 바다 건너 한국 사람이고 열두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고 했다. 자신의 고향도 이곳처럼 커다란 배가 드나들고 외국인이 많은, 번화한 항구 도시라고 했다.
권세혁은 활짝 웃었다. 남자가 한 것과 똑같이 자신을 소개했다. 세상 세(世), 현 왕가의 돌림자인 클 혁(奕)을 써서 권세혁. 이강연은 과연 큰 사람이 되겠다며 하하 웃었다.
이강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검을 잡는 방법. 허리에 차는 방법. 검을 든 채 상대방에게 인사하는 방법. 이강연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권세혁은 왜 외조부가 자신의 첫 사범으로 이 젊은 남자를 골랐는지 깨달았다. 검술 실력이 출중할 뿐 아니라 마음이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수련 전후로 반드시 십 분 내외의 명상을 했다. 동작 하나를 가르칠 때마다 의미와 유래를 함께 알려 주었다. 하루를 길게 쓰고, 머리와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면 일찍 일어나는 게 좋다는 말도 했다.
권세혁은 이강연의 가르침 이상을 해냈다. 이강연이 여섯 시에 일어나라고 말하면 새벽 다섯 시에 깨어났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장을 다섯 바퀴 돌라고 말하면 일고여덟 바퀴를 돌았다. 줄넘기는 아침저녁으로 오백 번을 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스승의 칭찬을 받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언젠가 이강연을 사범님이 아닌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고 싶었다. 이강연 또한 권세혁을 지도하는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 개인 사정을 이유로 수련을 빠뜨리지도 않았다. 권세혁은 자신이 이강연의 삶에서 제1 순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세혁이 생존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강연은 그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쓰던 방은 텅 비었다. 깨끗하게 치워진 것으로 모자라 아예 벽지와 가구까지 바뀌어 있었다. 무도장은 리모델링을 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아무도 이강연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왜 일을 그만두었는지.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오래지 않아, 권세혁은 이강연에 대해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돌아온 뒤 집 안에서 없어진 사람은 이강연뿐만이 아니었다. 없어진 사람 중 누가 범인과 내통한 자인지, 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라진 자인지는 구분이 불가능했다.
권세혁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은 어렸고,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으니까.
지금은 아니었다. 권세혁은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왕자님.”
기우희가 다가왔다. 권세혁은 그의 부름을 무시하고 냅다 뛰었다.
“왕자님!”
기우희의 목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았다.
권세혁은 멈추지 않았다. 앞만 보고 내달렸다. 인기척을 느낀 신해범이 몸을 돌렸다. 그가 류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처음 배구를 시작했을 때, 코치는 공이 안면으로 날아와도 피하지 않는 법을 가르쳤다. 권세혁의 약점은 수비였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했다.
한때 국가 대표로 활약했고, 수많은 선수를 훈련시킨 코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권세혁은 자신을 적대시하는 상대방을 꺼렸다. 그래서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 날아오는 공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권세혁은 신해범을 똑바로 보았다.
원망이 두려움을 앞질렀다. 배신감이 타올랐다. 권세혁은 주먹을 쳐들었다. 신해범의 얼굴로 주먹을 내리꽂는 그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대장님!”
성재경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신해범의 고개가 돌아갔고, 권세혁은 수풀을 헤치고 다가오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분노하는 자는 눈빛만으로도 경고할 수 있었다.
오지 마. 썩 꺼져 버려.
성재경이 멈춰 섰다. 뺨을 얻어맞은 신해범도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류진은 신해범의 등 뒤에 있었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은 신해범의 넓은 어깨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설명해요.”
권세혁이 말했다.
“변명할 기회 줄 때 설명해요. 내가 다 봤으니까 발뺌할 생각 말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주먹에는 땀이 괴었다. 권세혁은 자기보다 신해범이 더 긴장했기를 바랐다. 그가 실수를 인정하고 류진에게 사과하기를 바랐다. 실수라면 용서할 수 있었다, 작전 중 음주를 했다 하더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쾌락에 흔들릴 수 있다.
“왜 대답을 못 하는데!”
권세혁이 소리쳤다. 그의 몸이 휘청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은 채 이어 말했다.
“좋게 말할 때 류진이 형한테 사과해요. 그럼 없던 일로 해 줄 수 있어.”
신해범은 무표정했다. 그의 눈에서 어떤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권세혁은 화가 났다. 꼴 보기 싫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의연하고, 당당해서 멋지다고 생각했던 신해범이 지금 이 순간에는 징글징글했다.
“왕자님.”
신해범이 입을 열었다. 그는 대답이나 해명이 아니라 질문을 했다.
“정 이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왕자님의 말씀 여하에 따라 결정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건방진 태도야! 지금 내가 장난치는 것 같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신해범은 류진을 한 번, 그리고 고개를 돌려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정류진 이병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권세혁의 입술이 벌어지고, 눈동자가 확장됐다. 신해범은 자신을 중심으로 앞뒤에 있는 두 애송이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데 풍기대 전 직원들에게 지급될 하계 휴가비 총액을 걸어도 좋았다.
바람이 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날렸다. 신해범은 고개 숙인 권세혁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침묵.
신해범은 뒤에 있는 류진을 염려했다. 애송이는 침묵을 견디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상처 입은 사람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신성의 안위조차 걱정한 머저리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원수의 아들놈을 걱정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신해범은 힐끗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지금 류진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불안. 초조. 두려움. 그리고 경악.
‘괜찮아.’
신해범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눈매를 휘면서 웃어 주었다. 사랑과 신뢰가 깊어지는 데에는 역경이 필요했고, 그 장치가 함풍 2도였다. 거기에 뜻밖의 연적까지 하나 출연하면 이야기가 한층 풍성해진다.
신해범은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곧바로 돌파구를 찾아내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권세혁의 몰락을 위해서라면, 그는 기꺼이 사랑의 패배자가 될 자신이 있었다.
문이 열렸다. 진치우가 천장을 걸어 들어왔다. 천장?
엄승원은 눈을 똑바로 뜨려고 애썼다. 진치우가 천장을 걷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가죽 혁대로 묶인 두 발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분명 피가 통하지 않아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발이 괴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넘친 피가 콧등을 타고 눈까지 들어왔다.
엄승원은 실눈을 뜬 채 진치우를 올려다보았다.
“흐으….”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진치우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쪼그려 앉았다. 그가 엄승원의 얼굴로 연기를 뿜었다.
“배웠다는 새끼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아니….”
“아니긴. 아저씬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이쇼?”
반말과 경어를 섞어 쓰는 진치우의 비꼬는 어조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사람은 화가 날 때나 역경에 부딪혔을 때 본색을 드러내니까.
“류연비 조사한다고 치자. 뭣 때문이야? 호기심? 흥미? 아니면 설마 취미인가?”
거꾸로 매달린 탓에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엄승원은 최선을 다해 혀를 움직였다.
“뭔가 오해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너는?”
“그 친구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 정류진 알고 있네.”
엄승원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런데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야.”
절망감이 엄습했다. 상황은 엄승원이 예측한 최악의 경우로 흘러갔다. 풍기대에 얄팍한 속임수는 먹히지 않았다. 정류진 다음으로 윤곽이 드러날 사람은 그를 자신에게 알려 준 강인우였다. 이곳이 풍기대의 악명 자자한 지하실이 맞다면, 지금쯤 그도 이곳에 있을….
아니, 아니다.
엄승원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번뜩였다. 강인우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유미현을 배신하고 신해범에게 붙었다. 나를 팔아넘겼다. 증거는 최금호 자료가 담긴 USB. 그거라면 신해범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한 증거였다.
돌이켜 보니 그랬다. 처음부터 강인우는 지나치게 협조적이었다. 자신에게 돌아올 마땅한 이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승원의 취재는 실질적으로 강인우에게 이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풍기대 안에서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라 곤란했을 것이다. 그는 프락치였다. 자기 정체를 아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강인우가 유미현의 처우에 불만을 가졌다면. 마음이 바뀌어서 줄을 바꿔 잡았다면. 정류진 이야기는 미끼였다. 자신을 풍기대로 끌어들이기 위한, 강인우의 미끼였던 것이다.
이 씨발 놈의 새끼! 잘해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엄승원은 눈을 부릅떴다. 진치우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야려? 너 내가 좆같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미 늦었다. 진치우의 주먹이 명치에 꽂혔다. 엄승원은 입을 벌린 채 헐떡거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생각하지 마. 생각이 많아지면 망설이게 돼. 망설이면 시간이 지체되지. 아저씨가 어쭙잖은 정보 몇 개를 손안에 쥐고 굴리면서 이럴까, 저럴까 해 봤자 상황은 바뀌는 거 없어.”
“허억, 헉….”
시간이 느려지고 세상이 멀어졌다.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진공 상태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진치우가 개수대에 걸쳐 놓은 젖은 수건을 가져왔다. 그는 저항하는 엄승원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수건을 쑤셔 넣었다.
“으읍! 으브읍!”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러기에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자 이제 정류진 나왔고, 다음은 누굴까? 우리 워밍업 한번 하고 이야기 시작합시다.”
“으으읍! 으부으으읍!”
엄승원은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각오한 적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됐다. 그는 기자였다. 정보화 시대의 갑이었다. 여론을 형성하는 힘의 소유자였다. 비록 세상의 흐름을 한 번에 바꾸지는 못하지만,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엄승원은 자신의 힘이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누군가를 정상으로 올려놓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건 거저 얻은 힘이 아니었다. 학생 시절 학업에 충실하고 대학 시설 운동권과 철저히 담을 쌓은 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이룩한 쾌거였다.
그는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목표를 정하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추진력도 있었다. 남들이 꺼리는 사건을 적극적으로 취재했고, 세상에 알렸으며, 권력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미현의 부름은 의미가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엄승원은 분노와 모욕,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의 모든 노력과 커리어가 무력으로 짓밟혔다. 이건 공권력이 아니었다. 앙갚음이었다. 풍기 교육대의 꺼림칙한 과거를 캐서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가하는 보복이었다.
수건을 문 엄승원의 얼굴로 고춧가루 탄 물이 들이부어졌다. 진치우는 엄승원을 정육점 고기처럼 다뤘다. 얼렸다가, 녹였다가, 어느 부위를 도려낼지 가늠하듯 가느다란 쇠막대기로 툭툭 건드리다가 별안간 푹 쑤셨다. 남성조차 희롱당했다. 진치우는 엄승원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 부하 중에 진성 또라이가 하나 있는데, 좆에 쇠젓가락 꽂고 전류를 흘려 보내면 불구가 될지, 어떨지 궁금해하더라.”
진치우에게 준법정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딴지를 훑는 쇠붙이를 느낀 순간 엄승원은 결심했다. 훗날 있을 유미현의 보복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진치우가 더 무서웠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가까이 다가오는 권세혁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류진은 몸을 돌리고,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뭐 해?”
“…안 때려?”
“내가 형을 왜 때려.”
권세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의 발밑에 구겨진 담요가 떨어져 있었다. 류진은 잠자코 담요를 주워 먼지를 털어 낸 다음, 착착 개켜서 권세혁에게 내밀었다. 그는 담요를 받았다.
“고마워.”
“화 안 내?”
“내가 왜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류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권세혁이 질문했다.
“해범이 형 좋아해?”
“뭐? 아냐.”
“그럼 해범이 형이 짝사랑하는 거네.”
류진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신해범이 머리통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가 자신을 여… 연모한다고 말한 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였다. 그것 또한 계획의 일부이리라.
류진은 신해범을 싫어하지만, 그의 설계 능력은 믿었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눈앞에 자기 계획이 모조리 까발려진다 해도 상황을 무마할 돌파구를 찾을 사람이었다. 류진이 아는 신해범은 그랬다.
깍지 낀 손을 다리 사이에 둔 권세혁이 말했다.
“맞지? 형은 감정 없는데, 해범이 형이 혼자 좋아하는 거지?”
“나도 몰라….”
“자기 일인데 몰라?”
“내가 그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
“형 마음이 어떤지 묻는 거야.”
권세혁은 멀뚱히 서 있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응? 형 마음은 어떤데? 해범이 형 좋아, 싫어?”
싫었다.
그러나 류진은 권세혁 앞에서 솔직할 수 없었다. 신해범이 싫다고 말하면 이유를 물을 테니까. 거기에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나 그 인간한테 고문당하고 강간당했어. 그 새끼가 나 돌림빵도 했어.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몰라. 모른다고.”
류진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하기 싫어. 그런 질문 하지 마.”
침묵이 내려앉았다. 권세혁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 괴로웠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생각났다.
꿈속에서 신해범과 류진이 섹스했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권세혁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누운 채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자기가 언제부터 류진을 그렇게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언제부터 류진이 형을 성적으로 생각했을까.
늦은 밤 호월루로 향하던 길, 엑스터시가 든 담배 케이스를 되찾기 위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운전하던 그때, 강도라도 당한 것 같은 모습으로 불쑥 튀어나온 류진과 만났다. 춥고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트렌치코트와 구두를 벗어 주고, 호월루까지 태워다 주었다.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류진이 공급책을 자청했을 때 기뻤다. 그가 뮤지컬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는 입을 옷을 고르느라 하루를 고민했다.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 대보며 뭣도 모르는 동생에게 조언까지 구했다.
시위에 휘말려 제5 중앙 병원으로 갔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중학생을 구하려다 군인에게 얻어맞는 류진을 봤을 때, 진심으로 살의가 솟구쳤다. 류진이 중학생을 시켜 약만 전해 주고 사라져 버렸을 때는 화가 났다.
하루가 멀다고 전화와 메시지를 해 댔다. 전화를 안 받거나 답장이 늦게 오면 불안했다. 언제나 류진을 생각했다. 그를 곁에 두고 싶다, 함께 있고 싶다는 욕구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래서 부탁했다. 신해범에게.
그런데 그 신해범이, 믿었던 ‘해범이 형’이 류진을 낚아챌 줄은 꿈에도 몰랐다.
권세혁은 눈을 감은 채 어금니를 악물었다. 신해범은 멋진 사람이었다. 앞으로의 정치 인생에 롤 모델로 삼을 만큼. 부럽다는 사실조차 솔직하게 털어놓기 어려울 만큼. 총통의 아들인 자신도 그럴진대 류진의 눈에는 신해범이 어떻게 비칠까. 출신 성분의 장벽조차 극복하고 우뚝 선 위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훗날 두툼한 위인전의 주인공이 될 만한.
‘생각하기 싫어. 그런 질문 하지 마.’
왜 신해범을 생각하기 싫다는 걸까?
그에게 끌리는 자기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권세혁은 뜨거운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가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정말 생생했지만, 자기가 류진을 그렇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왔을 때 권세혁은 보고 말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수풀에 몸이 가려지긴 했지만, 분명히 신해범과 류진이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들판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키스했다. 그건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생각하니, 그간 있었던 일들의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신해범의 카디건을 걸쳤던 류진. 자강 1도에서 마가목 열매를 산 류진. 그건 신해범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자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그렇게 말하던 신해범을 위해서.
권세혁은 비로소 류진이 ‘넌 대체 뭐 하는 새끼냐’ 하고 쏘아붙인 이유를 깨달았다. 류진은 꾸준히 자신과 신해범을 마음속으로 비교해 왔다. 그러니 자기가 뭘 해도, 뭐라고 말해도 한심해 보였을 것이다. 비교 대상이 신해범이니까
그래도.
그렇다 할지라도.
왜 하필이면 신해범이냐고.
왜!
“형, 진짜 해범이 형 안 좋아해?”
“그렇다니까!”
“그럼 나는?”
권세혁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그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쉼 없이 눈꺼풀을 깜박이는데, 옆자리에 류진이 와서 앉았다.
마른 손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런 건 왜 묻는데.”
“그냥 대답해.”
“명령이냐?”
“부탁이야.”
권세혁은 자기 어깨를 쓰다듬는 류진의 손등을 봤다. 붕대는 풀었지만 두툼한 밴드가 붙어 있었다.
권세혁은 벽을 더듬어 실내등 스위치를 켰다. LED 불빛이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환해진 시야에 류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형.”
권세혁은 류진의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관자놀이 흉터를 드러냈다.
“하지 마.”
류진이 뿌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권세혁은 관자놀이 흉터를 쓸고, 솜털이 보송한 귀에 무수한 피어스 자국도 만졌다.
“해범이 형한테 말할게.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자기보다 계급 낮은 사람한테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네가 대장님 때린 건?”
“그게 왜?”
“나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할 텐데, 너 없을 때 날 가만두겠냐?”
류진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거기 소령님이랑, 성 중사님이랑 다 있었잖아. 물론 넌 그 사람들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부하들 앞에서 완전 개망신당한 건데, 대장님이 가만있겠냐? 날 잡아 죽이려고 할걸.”
“안 그럴걸. 형 좋아한다잖아.”
권세혁은 피식 웃었다.
“애초에, 그게 왜 형 때문이야? 자기가 욕정 주체 못 하고 설친 걸.”
“그래서 사과 안 할 거야?”
“아… 진짜.”
권세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류진이 타일렀다.
“선빵 친 새끼가 먼저 사과하는 게 맞아.”
“선빵은 그쪽에서 먼저 쳤지! 그것도 완전 도둑질!”
“웬 도둑질? 대장님이 네 물건 훔쳐 갔냐?”
“그런 말이 아니고…! 아, 몰라. 짜증 나.”
권세혁이 고개를 흔들자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류진은 권세혁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대장님한테 사과해. 그래야 나중에 네가 떳떳해.”
“나 잘못한 거 없어.”
“언제는 존경한다며.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며.”
“이젠 아냐.”
“네 목표는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가 보다?”
“아! 좀!”
류진이 웃었다. 권세혁은 손가락 사이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형은 내가 사과하면 좋겠어?”
“응.”
“해범이 형 좋아해서는 아니지?”
“너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입을 찢어 버린다.”
권세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류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류진의 몸이 휘청했다.
“아!”
두 사람은 의자 위로 쓰러졌다. 류진의 위에 올라타 한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감싼 채, 권세혁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참을 웃었다.
“야, 숨 막혀! 아, 뼈 부러져, 새끼야!”
“와, 너무 무서워. 정말 무시무시한 협박이야.”
“장난치지 마라.”
“사과할게.”
권세혁은 류진의 목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형이 시키는 대로 할게. 해범이 형한테 사과한다고.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간지러워.”
류진은 권세혁의 어깻죽지를 쓰다듬었다.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두툼한 장딴지는 애써 무시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닐 테니까. 좁은 의자 위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하는 수 없다.
“좋냐? 좋아?”
“좋아. 형이랑 있으니까.”
권세혁은 류진의 셔츠 깃을 만지작거렸다.
“형 목이 되게 가늘다. 길고….”
권세혁의 손가락이 류진의 목에 닿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길고 가는 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얇은 피부 아래서 뛰는 맥이 느껴졌다.
“힘주면 부러질 것 같아.”
“하지 마라.”
권세혁은 순순히 손을 거뒀으나, 그의 다갈색 동공에 웃음기는 없었다.
지마에서 잠을 자던 서지운은 영문도 모른 채 기대마로 쫓겨났다. 성재경이 수건에 찬물을 적셔 왔다. 그는 진압 차량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며, 류진이 권세혁을 잘 달래 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조용히 해.”
기우희가 성재경의 손에서 수건을 낚아채 신해범의 뺨에 댔다.
“운동을 겉멋으로 한 건 아닌가 봐. 턱 빠지는 줄 알았어.”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럼 웃지. 울까?”
신해범이 한탄했다.
“가뜩이나 울고 싶은 놈, 뺨 때리지 말아 줘.”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하나가 숙맥이면 다른 하나는 꾼이어야 진도가 나가지. 둘 다 누룽지 맹탕이니 여태껏 소꿉장난만 치잖아.”
“예?”
“한심해서 소금 좀 쳐 준 거야.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만 뭐, 어떤가? 나 때릴 때 MVP 표정을 기 소령이 봐야 했는데. 방자한테 춘향이 뺏긴 이몽룡 같았다니까.”
“…….”
“모르나? <춘향전>. 한국 고전 소설.”
“압니다. 대장님 뜻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겁대가리 없는 애새끼라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기 소령이 날 이렇게 걱정해 주다니, 감동이 물결쳐. 꼬꼬가 기 소령 반만큼만 내 생각 해 줬으면 좋겠는데.”
수건을 뒷좌석으로 집어 던진 신해범이 등받이를 젖혔다.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웠다. 젖은 수건으로 가슴팍을 얻어맞은 성재경은 얌전히 수건을 개켜 정리했다. 그 모습을 룸 미러로 본 신해범이 피식 웃었다.
“나 때문에 험한 꼴 봤어.”
“아닙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지. 기 소령 자네도.”
“알겠습니다.”
혼자 남은 신해범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면서, 자기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꼴불견.”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맞으면 자동으로 주먹이 튀어 나가게 훈련된 몸이 왕자님의 귀한 얼굴을 후려치지 않은 건 그 자리에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류진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꼬꼬야, 알아? 네가 있어서 나를 다잡을 수 있었어.
신해범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진치우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엄승원 작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신해범은 담배 연기를 내뱉고 전화를 받았다.
“빠르기도 하셔라.”
-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왜?”
- 아닌가? 미안. 목소리 쩌렁쩌렁 울리는 데서 소리 지르고 쇼 했더니 귀가 먹먹하다.
신해범은 조용히 웃었다.
“혼자서 고생 많다.”
- 네가 거기서 용쓰는데 나도 일해야지. 경희가 도와줘서 수월했다. 그리고 엄승원, 불었다. 류연비는 개뿔이고 최금호 파고 있었어. 이 새낀 버틸 깜냥도 없으면서 아가리 털어서 사람 더 열 받게 만들어.
“배후는?”
- 유미현. 휴대폰에 대포 번호는 강인우. 범아, 너 복귀하면 돗자리 깔아라. 그릇이니 주전자니 고물상 노릇보다 그게 좋겠다.
“사람 얼굴 안 보인다고 막 던지네. 복귀하고 봅시다, 진 중령.”
- 농담도 못 받아먹어? 왜 목소리 깔고 지랄이야.
짤막한 웃음이 오갔다. 신해범은 미소 띤 얼굴로 빠르게 이어 말했다.
“최금호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았는지 파악해. 구체적으로. 오늘 안에 끝낼 수 있겠지?”
- 알았다.
“강인우 대포 폰, 지금 먹통이랬지? 엄승원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몰라.”
- 그 새끼 오늘 당직이야. 어떻게, 끌고 내려와?
“무슨 그런 소릴.”
강인우가 엄승원의 노출을 윗선에 알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목적은 유미현에게 경고하는 일이니까. 신해범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보고하든, 의혹을 제기하든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움직임이 없어도 상관없어. 제정신이 박혔다면 풍기대를 탈주하지는 않을 테니.”
- 그래도….
“불안하면 믿을 만한 놈 붙여서 마크해. 그리고 호월루에 연락 넣어.”
- 예나? 걔를 갑자기 왜?
신해범은 지금 친구가 뭘 하고 있을지 알았다. 취조실 밖에서 소파에 비딱하게 드러누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손가락 사이에 타들어 가는 담배를 끼우고 다리를 덜덜 떨어 대고 있겠지. 안 봐도 훤했다.
신해범은 룸 미러에 부은 턱을 비춰 보며 말을 이었다.
“대어를 낚을 땐 줄을 길게 풀어야 해. 무턱대고 당겼다간 낚싯대 부러지고 손목 결딴난다.”
- 뭔 소리야?
“신 사장한텐 내가 말해 두지.”
진치우와의 통화를 마친 뒤, 신해범은 담배를 새로 피워 물었다. 눈앞에 흩어지는 회색 연기를 바라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유미현, 난 당신 꿍꿍이를 알아. 그쪽이 보낸 프락치도 처리했지. 한 방 먹은 기분이 어떠신가? 화나겠지? 어처구니없이 발각돼서 황당할지도 몰라.
그런데 원래 세상일은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아무리 철저하게 계산하고, 분석하고, 예측해도 허점이 발생하는 것처럼. 당신도 이래저래 치이는 입장이니 동의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인제 그만 장난치고, 서로 진실한 대화를 한번 나누어 보는 게 어때?
신해범의 다음 통화 상대는 호월루였다. 낡아빠진 구형 휴대폰은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는 하도 눌러서 숫자가 닳아 버린 3번 버튼을 길게 눌렀다. 신호음은 짧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 연지동입니다.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신해범은 입을 열었다.
***
함풍 2도 기전구 청곡동 20-7.
류진은 고향 집 주소를 기억했다. 태어나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었다. 넓진 않아도 아늑했고, 겉은 초라해 보여도 안에 들어가면 깜짝 놀랄 정도로 깔끔했다. 류진은 지금도 고향 집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성인의 어깨높이만큼 올라오던 돌담, 까맣게 칠한 대문에는 파란색 우유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는 키가 크고 뼈가 튼튼해져야 한다며 매일매일 우유를 마시게 했다. 하지만 우유 배달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서비스로 주고 가던 ‘칼슘&영양 뼈 튼튼 요구르트’는 누나가 독식했다. 정말 그랬다. 노골적으로 누나를 편애하던 할머니마저 가끔은 동생에게 양보하라고 타박했을 만큼.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오른쪽으로 열 바퀴 돌려야 물이 나오던 조악한 수도와 플라스틱 대야 두 개가 놓였다. 류진은 그 대야의 색깔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하나는 흰색, 하나는 연두색이었다.
지붕은 붉은 기와였다. 물론 진짜 기와는 아니었다. 슬레이트를 기와 모양으로 여러 장 겹쳐 올려 그럴듯해 보이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보면 조악했지만, 멀리서 보면 그럴싸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매년 봄이 돌아오면 지붕 보수 작업을 했다. 그래서 장마철에 물이 샌 적은 없었다. 추운 계절의 결로도 마찬가지였다.
류진은 집이 낡고 오래되어서 싫다는 친구들의 불평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자랐다. 비를 막아 주는 지붕,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벽, 따뜻한 바닥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누나.
류진은 차창에 달라붙었다. 지역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 주변으로 포도밭이 넓게 펼쳐졌다. 군데군데 과일을 파는 행상도 눈에 띄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앞으로 오 킬로미터였다.
운전석에서 기우희가 말했다.
“십 분 뒤에 도착합니다.”
신해범은 출발할 때 갈아입은 기동복을 재점검했다. 진압 장비를 전부 갖추지는 않았으나, 방탄모와 곤봉은 챙겼다. 착장을 점검한 그가 턱짓으로 권세혁을 가리켰다. 남들 다 일어난 시간에 마취 총 맞은 사람처럼 곯아떨어지더니, 정오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신해범은 류진을 재촉했다.
“깨워.”
류진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도착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왕자님을 저런 상태로 주민들 앞에 나서서 할 건가? 정 이병.”
신해범의 단호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류진은 자기 허벅지를 베고 누운 권세혁을 내려다보았다.
“세혁아.”
창백한 얼굴에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걷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으….”
“일어나. 다 왔어.”
잔뜩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래도 눈은 떴다. 류진은 이제 됐느냐는 표정으로 신해범을 봤다.
밤새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말짱했다. 애초에 소리만 요란했을 뿐 신해범에게는 큰 타격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류진은 묻고 싶었다. 매번 남을 때리기만 하다가 맞아 본 기분이 어떠냐고.
하지만 지금 신해범을 보면, 어제 일은 깨끗하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저게 진정한 프로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조금 슬프지 않나.
류진은 도로 눈을 감아 버린 권세혁의 어깨를 흔들었다.
“세혁아. 일어나. 일어나야 해.”
“그리고 계속 주의를 주려고 했는데, 되도록 왕자님께 경어를 쓰도록. 다른 사람 앞에서는 특히. 알았나?”
“예.”
오만상을 찡그린 권세혁이 일어났다.
“아, 머리 깨질 거 같아.”
운전석의 기우희가 어깨 너머로 진통제를 던졌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약상자는 권세혁의 머리에 명중했다.
“악!”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아, 누나. 잘 좀 보고 던져요.”
“다음부턴 주의하겠습니다.”
류진이 생수를 따서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뭐야? 갑자기 웬 극존칭?”
“제가 주의 주었습니다. 주민들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요.”
권세혁은 대놓고 혀를 찼다.
“우리끼리 있을 땐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나, 류진이 형한테 존댓말 듣기 불편해요. 그건 해범이 형이 좀 이해해 줬으면 하는데.”
“본디 말이라는 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기 마련….”
“꼰대처럼 왜 그래요 갑자기!”
류진은 생수를 든 채 움찔했지만, 신해범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자후를 내지른 권세혁이 더 놀란 표정이었다. 어색한 침묵. 이내 신해범이 빙그레 웃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의 자비로움을 악용하려는 자들을 멀리하기 위함이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권세혁은 여전히 뚱했다. 그는 작전에 나선 이후 제대로 몸을 씻은 적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한 십 분, 아니 오 분이라도 뜨거운 물에 푹 담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 대체 몇 시간째 차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돌려 말하지만 대마 냄새가 신경 쓰인다는 의미였다. 이곳에는 샤워 부스도, 로션이나 향수도, 구겨진 옷을 펼 다리미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손질할 헤어 젤이나 왁스도 마찬가지였다. 권세혁이 구시렁거렸다.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함영재를 볼 순 없어요. 류진이 형 체면이 있지.”
류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신해범은 그 당혹스러운 얼굴에 담긴 속마음을 파악했다. 네가 멋 내서 뭐 할 건데?
“규정상, 풍기 교육대 대원들은 근무 중에 민간 숙박업소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예에?”
권주혁이 싸질러 놓은 똥이었다. 그는 풍기 교육대의 품위가 손상된다는 이유로 신룡관의 승인을 받지 않은 ‘B급’ 민간 숙박업소의 이용을 엄금했다. 예외의 경우는 있었지만 세 명 이하의 소수 인원, 사복 차림, 풍기 교육대원이라는 사실을 노출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이 존재했다.
경제특구로 불리는 몇몇 지방 거점 도시에는 신룡관의 승인을 받은 ‘A급’ 숙박업소가 있었으나, 사실상 그쪽으로 장기 근무를 나가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진급에 목숨을 거는 대원들은 만에 하나라도 흠 잡힐 일을 만드느니 차라리 풍찬노숙을 하겠다는 쪽이었다. 융통성 없는 자가 꼭대기에 앉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신해범은 권주혁의 ‘똥’을 적극적으로 치우지 않았다. 대장 취임 첫해에 식당을 갈아엎은 파격적인 행보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개선 의지가 없었다. 기우희가 이 부분에 대해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신해범은 말했다.
직할시 밖에서 풍기 교육대 정식 대원은 지나치게 눈에 띈다. 금품을 노리는 무장 강도단, 혹시나 있을 반정부 단체 단원의 타깃이 되기 좋다. 민간 숙박업소에는 별의별 사람이 드나든다. 개중에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이 몇이나 될지 모른다. 물론 법은 우리에게 유리하지만, 죽거나 다친 이후에 정당방위가 무슨 소용이겠냐.
신해범은 그렇게 주장했다.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더라도 경비 태세를 갖추고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낯선 곳에서 안심하고 자는 것보다 안전하다. 낯선 이가 제공하는 음식을 무심코 받아먹을 확률도 낮고.
기우희는 납득하고 물러났다. 장기 임무를 부담스러워하던 대원들도 이해해 주었다. 그렇게 끝난 얘기였다. 그런데 그걸 똥 싸지른 놈의 혈육인 새파란 애송이가 도로 끄집어내고 있으니 분기가 탱천했다. 신해범은 웃음으로 분노를 승화시켰다.
“도착하는 즉시 쉴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최대한 좋은 데로 해 줘요. 류진이 형 피곤하니까.”
권세혁은 노골적으로 류진을 들먹였다. 신해범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 애송아, 점수 따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정작 당사자는 좌불안석인 거 안 보이냐?
신해범은 에어컨 소리에 신경을 집중한 채, 연신 물을 마시는 권세혁을 관찰했다.
확실히 살이 빠졌다. 고교를 막 졸업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지금은 젖살이 빠졌다고 둘러댈 수 있는 수준이고, 예민한 인상이 무턱대고 순한 인상보다야 낫지만, 눈이 꺼지고 뺨이 패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원래 몸은 안에서부터 썩는다. 부드러울수록 부패에 취약하니까.
서지운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기우희 컴버, 돌다리 행진 허가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