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호환 下 (15/39)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할 때가 있다. 솜털이 곤두서고, 피부에 정전기가 흐르는 느낌.

류진은 뒤돌아 남자의 목을 때렸다. 동시에 칼날이 옆구리를 스쳤다. 기동복이 찢어졌다. 그래도 피부는 지켰다. 류진은 무기를 치켜들었다. 끝이 번들거리는 철제 곤봉이 눈썹에 흉터가 선명한 남자의 얼굴을 가리켰다.

“영재 형.”

3년 만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남자의 오른쪽 눈썹 흉터가 꿈틀거렸다. 3년 전, 류진이 죽을힘을 다해 휘두른 술병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생긴 상처였다. 유리 파편이 눈에 박혔으면 좋았으련만. 함영재는 이마와 눈썹 부위의 찰과상 외에는 멀쩡했다.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는 술병으로 얻어맞고 나서도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함영재가 움직일 때마다 피와 술이 섞인 액체가 얼굴로 뚝뚝 떨어졌었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을 기억한다.

“나 기억해?”

함영재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열여덟의 류진은 세상이 강자에게 너그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운까지 따를 줄은 몰랐다. 함영재는 운이 정말, 더럽게, 빌어먹게 좋았다. 그는 장애를 입지도 않았고 유치장에 갇히지도 않았다. 사건이 그에게 남긴 유일한 상처는 눈썹의 조그만 흉터뿐이었다. 그나마도 앞머리를 내리면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구태여 감추지 않는 건 흉터가 훈장으로 통하는 바닥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직도.

다행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새사람이 되지 않아서.

류진은 곤봉으로 상대를 겨눈 채 방탄모 끈을 풀었다. 신해범이 본다면 적에게 총을 넘겨주는 꼴이라고 나무라겠지만, 숨고 싶지 않았다. 함영재의 눈앞에 자신을 똑바로 드러내고 싶었다.

타일 바닥에 철제 방탄모가 떨어졌다. 텅 소리가 났다. 류진은 재차 물었다.

“나 기억해?”

함영재의 입이 다물렸다. 그의 왼뺨이 씰룩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함영재의 왼쪽 입술을 쭉 잡아당긴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류진은 그가 현란한 스냅으로 나이프를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의도보다는 습관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함영재는 옛날부터 날붙이를 지니고 다녔다. 그때는 조악한 잭나이프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 같았다.

류진은 한다희가 말해 준 함영재의 정신 나간 취미를 기억했다. 그는 아지트에 과녁판을 하나 걸어 놓은 뒤, 괴롭힐 상대를 그 앞에 세우고 빌헬름 텔 놀이를 했다. 그러나 빌헬름 텔은 세기의 명궁이었고 함영재는 인터넷 통신 판매로 캠핑용 장비나 사들이는 애송이였다. 한다희는 사람이 다치지 않는 게 기적이라고 했지만, 글쎄, 정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을까?

무슨 짓을 했어도 잘난 집구석에서 무마해 줬을 테지.

“아직도 양아치 짓 하고 다녀?”

함영재의 시선이 류진을 훑었다.

“이야, 우리 공주….”

그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빈정거렸다.

“출세했네. 이제 나 같은 건 좆 밥으로 보이겠다아?”

낭창한 몸에 헐렁한 군복. 공포의 대명사인 풍기 교육대 기동복이 다른 의미로 잘 어울렸다.

“근데 얼굴이 많이 상했다, 공주야.”

“나 그렇게 부르니까 좋아? 재밌어?”

어이쿠, 씨발. 함영재가 키들거렸다.

“못 본 사이에 암캐가 다 됐네, 우리 공주우.”

함영재는 입맛을 다셨다. 미련은 접었으나 여전히 아쉬웠다. 얌전하게 굴었으면 충분히 공주 대접해 주면서 끼고 다녔을 놈이었다.

“광성 갔다더니 진짜였냐?”

많은 일이 있었다.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다.

“때깔 좋아진 거 봐. 연예인 다 됐다? 우리 공주는 언제 데뷔해?”

“벌써 AV 출연했어. 근데 형은 못 볼걸.”

함영재가 피식했다. 족제비 같은 얼굴에 야비한 미소.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 티셔츠 밖으로 이두박근이 불뚝거렸다. 그의 두 팔을 뒤덮은 도깨비 문신이 류진을 향해 웃었다.

선제공격. 류진은 곤봉으로 함영재의 어깨를 내려찍었다. 그가 휘청하는 틈을 노려 나이프를 든 손목을 때렸다. 뻑 소리와 함께 거버 나이프가 날아갔다. 타일 벽에 부딪힌 칼이 세면대 밑으로 들어갔다.

“새끼가!”

로우 킥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교차 스텝을 밟으면서 빠르게 들어오는 킥을 막지 못했다.

“헉.”

숨이 턱 막혔다. 내장이 꼬이고 목구멍에서 쓴 물이 솟구쳤다. 류진은 두 발짝 물러났다. 옆구리를 시작으로 몸통에 뜨거운 기운이 번졌다.

함영재가 정면에서 돌진해 왔다. 류진은 곤봉을 휘둘렀다. 페이크였다. 함영재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틈을 노려 귀밑 턱에 주먹을 날렸다. 잽. 턱관절이 으깨지는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함영재가 주춤했다. 류진은 투스텝으로 물러났다가 상대방의 옆구리를 노리고 킥을 날렸다. 무릎이 부드럽게 회전했다.

아슬아슬하게 가드에 부딪쳤다. 함영재의 팔꿈치에 워커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미친년이!”

멱살을 움켜잡혔다. 분노로 돌아간 눈이 보였다. 류진은 함영재의 무게와 악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공주 년 오냐오냐했더니 겁대가릴 상실했어.”

변기가 있는 칸으로 내던져졌다. 좌변기에 등을 부딪쳤지만 아프지 않았다. 폭발하는 아드레날린 덕분이다. 류진은 튕기듯 일어나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 끄트머리가 함영재의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간발의 차이로 일격을 피한 그가 우측에서 치고 들어왔다. 가드를 올릴 틈도 없었다.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을 젖히는 순간, 함영재의 왼손이 뺨을 강타했다.

류진은 칸막이에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졌다. 등으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헉.”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장기가 터진 것만 같았다. 목구멍에서 피가 솟았다. 류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머리 위에서 함영재가 비웃었다.

“종잇장 같다, 너.”

멱살을 붙잡혀 끌어 올려졌다.

“큭…!”

류진의 두 발이 허공에 떴다. 함영재는 류진을 칸막이 밖으로 내던졌다.

“아악!”

세면대에 허리를 부딪치고 나가떨어졌다. 뚜벅뚜벅 걸어 나온 함영재가 쓰러진 류진의 멱살을 붙잡아 또다시 끌어 올렸다.

체격에 자신 있는 놈들이 육탄전에서 반드시 쓰는 기술이 있다. 업어 치기. 함영재는 고함을 지르며 힘으로 밀어붙였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뒤통수가 깨지고 척추가 조각나는 자기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싸움에는 체격도 기술이었다. 기술이 달리면 진다. 당연한 사실인데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류진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 돌았다. 함영재가 기합을 내지르며 마른 몸을 세면대에 내리꽂으려 했다. 류진은 함영재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두 다리로 그의 몸통을 휘감았다. 상체를 최대한 세우고 매달렸다.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 씹…!”

함영재의 두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고 떼어 내려 했다. 류진은 버텼다. 두 팔로 함영재의 목을 조르며, 죽을힘을 다해 매달렸다. 등과 옆구리를 마구 때리는 주먹이 아팠지만 어금니를 악물고 견뎠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함영재의 거친 숨이 느껴졌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시뻘게진 얼굴이 상상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좆만 한 새끼!”

함영재의 주먹이 등을 강타했다. 세면대에 부딪힌 부위였다.

“아악!”

경추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류진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함영재가 류진의 어깻죽지를 붙잡고 화장실 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바람에 문이 쾅 닫혔다. 류진은 주룩 미끄러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함영재가 달려들어 문고리를 잠갔다. 철컥, 하는 소리와 쿠당탕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한발 늦은 신해범이 문과 충돌했다. 진동이 류진의 뒤통수와 등에도 전해질 정도였다.

“씨발.”

함영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류진의 머리를 자근자근 밟았다.

“저 새낀 뭐야.”

“정류진!”

신해범의 목소리였다. 함영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고리가 요란하게 흔들리더니 파열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곤봉으로 문고리를 내려치는 소리였다.

류진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문 너머에 신해범이 있었다.

“아윽!”

함영재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너 짝패냐?”

그다운 표현에 웃음이 났다. 류진은 입가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히죽거렸다. 신해범은 문을 때려 부술 기세로 치고, 차고, 흔들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고, 그만한 육체가 부끄럽지 않은 힘을 가졌다. 그러나 잠긴 철문을 통과하는 재주는 없었다.

함영재가 거버 나이프를 되찾았다. 류진은 곤봉을 잡기 위해 팔을 힘껏 뻗었으나, 곤봉은 함영재의 발길질에 차여 저만치 날아갔다.

“흐으… 흐윽.”

숨을 쉴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공주야.”

함영재의 손에서 거버 나이프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엎어져 있는 류진의 위에 올라타 칼날을 목 빗근에 대고 눌렀다.

“나 너 좋아했다.”

“지랄.”

“씨발 년이 사람 진심 무시하네.”

“좋아해서 그 짓 했냐! 미친놈아!”

“너 같은 년은 좆나 굴려야 마음이 편해!”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함영재는 근본부터 글러 먹은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의 변명 따위,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공주야아….”

류진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함영재가 움켜쥔 양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뺨을 핥아 올리는 혓바닥이 느껴졌다.

“나이 처먹고 더 이뻐졌다.”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함영재의 혀가 따라왔다. 뺨을 핥던 혓바닥이 귓불과 귓바퀴를 척척하게 만들었다.

“아직 안 막혔네.”

“꺼져.”

“이거 형이 뚫어 준 거잖아.”

함영재의 혀끝이 피어싱 구멍을 건드렸다.

“하지 마!”

“근데 귀를 왜 이렇게 걸레짝 만들었어. 하나만 뚫었을 때 이뻤는데.”

“씨발 새끼, 꺼지라고!”

기동복 단추가 함영재의 칼끝에 걸렸다.

“너 그때 간지럽다고 웃었잖아. 기억 안 나?”

“내 탓 하지 마, 쓰레기 새끼야!”

벌어진 옷깃 사이로 칼이 들어왔다. 차가운 금속이 쇄골을 훑었다.

“왜 이렇게 떨어?”

류진은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를 버둥거렸다. 붙잡혔어도, 숨이 차고 힘이 빠져도 계속 움직여야 했다. 살아 있으니까. 우그러진 곤봉을 내던지고 소화기로 문고리를 내려치는 문밖의 남자처럼. 신해범처럼.

“가끔 네가 그리웠다.”

“지랄.”

티셔츠를 찢은 칼이 맨살을 더듬었다. 등 뒤의 함영재가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신음을 냈다. 하반신은 노골적으로 밀착시켰다. 류진은 고개를 숙이고 바르르 떨었다. 엉덩이 사이에 묵직한 살덩이가 와 닿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그러게 왜 튀어. 서방님 올 때까지 집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

함영재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한테 대 주면서 살면 편했잖아.”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함영재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귀가 멀어 버렸으면 좋겠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도록.

함영재가 입맛을 다셨다.

“좆나 이뻐해 줄 자신 있었는데….”

굉음과 함께 철문이 떨어져 나갔다. 함영재의 등을 덮친 철문을 신해범이 걷어찼다.

무자비한 발길질에 함영재가 나가떨어졌다. 맞은편 벽까지 날아가서 부딪혔다. 소화기를 내던진 신해범이 포탄처럼 날아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함영재의 어깻죽지를 쥐어 일으켜 세웠다. 신해범의 주먹이 함영재의 안면에 꽂혔다.

“커헉!”

함영재의 코뼈가 부러지고 피가 터졌다. 연이어 주먹을 휘두르는 신해범은 맨손이었다. 맨손으로도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는 힘의 소유자였다.

민은지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권세혁이 류진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풀어 헤쳐진 옷깃이 피로 물들었다. 거버 나이프에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형! 류진이 형!”

“죽여.”

“뭐? 뭐라고?”

“죽여 줘.”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온몸의 뼈가 조각난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몸이 망가지든, 아니 이미 망가져 있든 어떻든 상관없었다. 함영재를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떻게 돼도 괜찮았다.

이모가 정신병원에 갔다.

자신이 <백사자>와 손을 잡고 이곳을 등진 대가였다.

함영재는 약자를 먹이로 삼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에게 인기 아이돌 류연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탑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표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뤘다. 그리고 자신이 더는 손안에 쥐고 주무를 수 있는 약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함영재는 다른 이를 찾아냈다. 찾아내서 찢어발겼다.

신해범과 눈이 마주진 류진이 소리쳤다.

“죽여! 죽여 버려! 죽여 줘! 죽여!”

광기에 가까운 부르짖음이었다. 신해범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함영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신해범의 싸늘한 눈이 함영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표준화했을 때 깡패, 양아치, 어깨라는 항목에 맞춤하는 놈이었다. 대가리를 터뜨려 뭉개 버려도 아무런 감흥 없을 상대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해범은 함영재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함영재는 모욕과 학대를 견딜 줄 아는 정류진이 미쳐서 날뛰게 만들었다. 그 비결을 좀 배우고 싶었다.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원수에게서 배울 줄은 안다. 신해범은 빙그레 웃으며 함영재 앞에 앉았다. 도깨비 문신이 빼곡한 그의 팔을 비틀어 꺾었다.

“아아악!”

신해범은 함영재의 손목, 팔꿈치, 어깨 관절까지 으스러뜨렸다. 꺾고 비틀고 뽑았다. 물론 신해범은 의사도, 의대생도, 하물며 무면허 의료 시술자도 아니었다. 그래도 인간의 몸을 해체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제군.”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군은 묵비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도 상실하였으며….”

류진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좁고 지저분한 화장실 바닥에 내장까지 쏟아 낼 기세였다.

“형, 괜찮아. 괜찮아. 류진이 형. 이제 괜찮아.”

그를 안은 권세혁이 애원했다. 그만 울라고, 탈진하면 안 된다고. 신해범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때려치우자.”

그는 쓰러진 함영재의 앞에 앉아 주먹을 쳐들었다. 장난 좀 쳐 보고 싶었는데 안 되겠다.

“그냥 죽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하나하나 물어볼 생각이었다. 정류진에게 함영재에 관해 물어본 것처럼, 함영재는 정류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함영재가 정류진을 폭행한 일에 관심이 있었다. 분노와 흥미가 뒤섞인 가학적인 관심이었다. 정류진과 하성록, 하신성 부자의 관계를 알았을 때만큼이나.

함영재는 정류진에게 처음으로 손댄 놈이다.

그 생각만 하면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류연비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열여덟 살 정류진. 병아리 털처럼 보드라운 머리카락과 구멍 하나 없이 통통한 귓불을 가졌던 정류진. 정말이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열여덟의 정류진은 어떻게 울었는지. 정말 함영재를 형이라고 불렀는지. 집에 보내 달라고 애원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당할 때 교복이었는지, 사복 차림이었는지. 속옷 색은 뭐였고 양말은 어떤 걸 신었는지. 어떤 소지품을 지녔는지.

전부 알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

신해범은 자기가 모르는 류진의 모습을 누군가가 안다는 게 질투 났다. 그 ‘누군가’가 보잘것없는 깡패 새끼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끝내주는 마블링을 자랑하는 최상품의 소고기를 돼지 삼겹살과 목살도 구분 못 하는 날건달에게 빼앗긴 5성 호텔 요리사가 된 기분이었다.

신해범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손등이 까져 피가 났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그는 신음하는 함영재의 멱살을 움켜쥐고 세면대로 끌고 갔다. 마개를 닫고 물을 틀었다. 놈의 얼굴을 처박자 수면에 피거품이 끓었다.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찍어 눌렀다. 한참이 지났다. 함영재가 더는 꿈틀거리지 않게 됐을 무렵, 신해범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기절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세면대에서 흘러넘친 물이 타일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함영재의 머리에서부터 붉은 피가 번졌다. 신해범은 무심하게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바 아니었다.

“…해범이 형.”

권세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번들거리는 두 눈이 있었다.

사람도 아니군.

신해범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땀과, 물과, 피로 흥건한 손바닥이 얼굴을 적셨다.

그는 방탄모를 벗어 던졌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정 이병은 괜찮습니까?”

“많이 다쳤어요.”

권세혁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류진을 품에 안고 일어선 그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이 사태에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이렇게 된 책임 말입니까?”

신해범이 함영재의 머리를 찼다. 권세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쳐요? 류진이 형 다쳤잖아. 울었잖아.”

역시 내가 같이 들어갔어야 했어.

권세혁의 한탄을 들은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뒤돌아선 권세혁의 등에 대고 물었다.

“왕자님이라면 결과가 달랐겠습니까?”

“그래요.”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권세혁의 사자후에 민은지가 움찔했다. 이 난장판을 보고도 기절하지 않는 기특한 아이였다. 민은지는 권세혁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병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안다고, 오빠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신해범은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권세혁의 품 안에서 류진은 탈진했다. 민은지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그의 팔을 잡아 조심스럽게 가슴에 올려 주었다. 권세혁은 신해범에게 일갈했다.

“따라오지 마요.”

“명령입니까?”

“불복하면 사형이야.”

신해범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실 순 없습니다.”

억울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가져가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최상급 소고기가 날건달의 손에 구른 것도 화나는데, 빼앗아 온 고기를 깨끗하게 씻고, 소금 치고 후추 치고 미디엄으로 구운 다음 신선한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으려는 찰나 구경하던 개새끼에게 접시째 빼앗긴 격이었다.

신해범은 함영재의 등을 지그시 밟았다. 이걸 권세혁의 등이라고 상상했다. 그러지 않으면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왕자를 함영재의 옆에 나란히 묻어 버릴 것만 같았다.

“어차피 병원 가면 설명회에는 늦어요.”

“왕자님.”

“중요한 일이잖아요. 끝까지 마무리해요.”

“권세혁 왕자 전하!”

“내 말 못 알아들어요?! 저 새끼만 조지고 끝낼 거야?!”

고개를 돌린 권세혁이 말했다.

“해범이 형, 지금 되게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

“제가 말입니까?”

“류진이 형 정말 좋아하는구나.”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발가벗겨진 채 광장 한복판에 선 기분이었다. 정류진에 대한 감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권세혁의 입으로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 묘했다.

신해범은 세면대를 부서져라 움켜잡았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으니 비로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일 망치지 마요.”

함영재를 피떡 만들었다고 계획을 망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물길을 막고 있는 바위를 하나 치웠다고 황무지를 개간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권세혁은 역할 분담을 요구했다. 하나는 문화 회관으로 돌아가 꾸민 일을 실행에 옮기고, 다른 하나는 다친 정류진을 보호하자고.

왜 화가 나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정류진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지 못한다는 게 억울했다. 씨발, 빌어먹을, 우라질!

신해범은 숨을 골랐다. 지금 자기가 억울함을 느끼는 게 이상했다. 기우희와 대원들에게는 자신이 필요했다. 풍기 교육대 입사 설명회에 권세혁은 꼭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권세혁에게 류진을 넘겨주는 게 드라마의 올바른 줄거리였다. 히로인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있어야 할 건 왕자님이지, 사악한 간신이 아니니까.

“…….”

신해범은 자신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여기서 권세혁을 막아서면 자폭이었다. 두 가지 일을 다 망치는 길이었다.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옳은 판단 한 겁니다.”

권세혁은 그대로 달려 나갔다. 군화와 하이힐 소리가 멀어졌다. 그에게 안긴 류진도 멀어졌다. 신해범은 함영재의 뒤통수를 자근자근 밟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옳은 판단 한 겁니다.’

과연 권씨 핏줄이었다. 이 집안 사람들은 협박을 설득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다만 신해범에게 있어서 기우희는 아군이고, 권세혁은 원수라는 점이 달랐다.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약한 전파 충돌이 발생했다. 신해범은 시계를 확인했다. 기우희가 초조해할 생각을 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방탄모는 두 개였다. 신해범은 류진이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만치 날아간 곤봉도 보였다. 자기 것은 문고리를 내려치다 망가뜨렸으니, 저건 분명 류진의 무기였다.

“칠칠찮긴.”

장비를 줍는 신해범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런 소읍의 단점은, 사람 간의 경쟁과 음모가 지역의 문화적 특징으로 둔갑한다는 점이지요.”

나이 지긋한 의사가 일어났다. 허리를 툭툭 두드리는 몸짓이 아무래도 진료를 보는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지만, 치료를 받고 난 류진은 한결 편해 보였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온몸의 시퍼런 멍에 비하면 기적이었다. 부득불 치료실로 따라 들어온 잉어 문신은 ‘맞는 법을 아시네’ 하고 말했다가 권세혁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문 너머에서 민은지가 오빠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따위 말을 하느냐, 난 그냥 농담이었다, 하는 말들이 오갔다. 남매의 실랑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둥근 회전의자에 구겨 앉은 권세혁이 한숨을 토했다. 백발의 의사가 말했다.

“젊은 아이니 회복이 빠를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

“예… 저 근데, 그냥 이름 부르셔도 됩니다.”

“왕자님께 그런 결례를 범할 수는 없지요.”

“그냥 제가 어색해서 그래요.”

“실은 제 외손자가 풍기대에 있습니다.”

권세혁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의사 가운으로 향했다. 서인섭.

“혹시 서지운 병장의… 외조부님 되십니까?”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예. 손자가 며칠 전에 한 번 내려왔었습니다.”

함풍 2도 설명회 이전, 서지운이 조사 차원에서 고향에 방문했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때 서지운이 받은 대접은 형편없었다.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했다고 들었다.

“그놈이 이곳 경찰서로 발령받아 왔을 때, 다들 기뻐했습니다. 집안의 경사라고 했지요.”

개천에 용이 난 셈이었다. 집안사람들이 서지운에게 거는 기대는 엄청났다. 그러나 서지운은 고향을 박차고 나갔다. 개천의 용을 부러워하던 이웃들은 일제히 태도를 바꿨다. 부러움과 동경의 시선이 실은 불같은 질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주민들은 서지운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고, 그의 가족들을 동네 변두리로 몰아냈다. 외손자가 고향을 떠난 뒤 서인섭의 병원도 쇠락했다. 원래도 협소한 동네 소아과였다. 그마저도 한 명 있던 간호사를 내보내고 사실상 영업 중단 상태였다. 문은 열어 놓았으나 환자가 없었다.

“서 병장은 이런 상황을 압니까?”

서인섭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자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건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뜻이었다.

“지난번에 그리 매몰차게 대한 건, 행여나 녀석이 고향으로 돌아올까 봐 걱정되어서였습니다.”

서인섭은 그 말을 손자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권세혁은 나이든 의사의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꼭, 선생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주름진 피부가 장진에 있는 외조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의사의 손과 군인의 손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전자는 사람을 살리는 손, 후자는 사람을 죽이는 손이었다.

“혹시, 그래서 저희를 받아 주신 겁니까?”

“저는 이 아이도 알고 있습니다.”

서인섭은 침대에 누워 있는 류진을 바라봤다. 예전 간호사가 있었으면 혈관 주사를 안 아프게 놓아 줬을 텐데, 하고 안타까워했다.

“류진이 형을 안다고요?”

“연우라는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아… 예. 그렇겠군요.”

“자주 울었습니다.”

“예?”

“올 때마다 울었지요. 주사기를 무서워해서요. 예방 주사 맞을 때, 감기 걸렸을 때… 제 누나는 그렇게 의젓했는데. 한 번은 제 무릎에 토를 했습니다. 자기가 더 놀라서 울더군요. 주사 잘 맞으면 사탕을 하나 줬는데, 꼭 딸기 맛을 골랐습니다.”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묻는 사람이 하도 많아 기억하게 됐습니다.”

권세혁은 입을 다물었다. 작은 동네에서 류연비 같은 연예인이 나왔으니, 류진은 원하지 않는 관심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받았을 터였다.

고개를 돌린 곳에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보였다. 권세혁은 서인섭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서지운의 가족이 아니었어도, 류진을 모르더라도, 아니 권세혁 자신이 왕자가 아니었어도 치료를 거절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어떻게 왕자님과… 인연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고생을 많이 한 아이입니다. 모쪼록 힘 있는 분께서 살펴 주십시오.”

권세혁은 류진과의 인연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가능한 어른답게 처신하고 싶었다. 신해범 같은 어른과 경쟁해야 하니까.

“혹시 신경 안정제가 있습니까?”

“안정제요?”

“제가 긴장성 두통이 있습니다. 이게 만성이라… 본대에서 출발할 때 약통을 챙겼어야 했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아… 예.”

서인섭은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두통이 어느 정도 지속되느냐, 통증이 쿡쿡 쑤시느냐 아니면 누가 머리를 내리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냐. 권세혁은 최대한 정직하게 대답했다. 나이든 의사가 상대라서 다행이었다. 젊고 눈이 밝은 의사라면 들켰을지도 몰랐다.

서인섭이 약을 가져왔다. 그는 약국이 멀어서 간단한 상비약은 구비해 놓는다고 했다. 의약 분업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나, 권세혁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납작한 종이 상자에는 알약 여덟 개가 들어 있었다. 권세혁은 비닐봉지를 뒤져 지폐를 한 움큼 내밀었다. 서인섭은 카운터에 거스름돈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나갔다. 문 너머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세혁은 누워 있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얼굴이 맞아서 엉망이었다. 뺨의 시퍼런 멍, 터진 입술.

화장실에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남자. 그자가 함영재였다. 권세혁은 류진이 그렇게 발악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내가 죽여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해범은 클럽을 나섰다. 함영재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지갑과 차 키를 찾아냈다. 골목길에 주차된 차량 중 노란색 BMW가 눈을 반짝이며 인사했다.

신해범은 인사불성이 된 함영재를 질질 끌어다 트렁크에 처넣었다. 종이 상자로 가득 차 있어서 자리가 좁았다. 그는 함영재의 부러진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기절한 함영재가 신음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막 출발하는데, 기우희가 폭발물 설치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신해범은 귀와 어깨에 무전기를 끼운 채 후진했다.

“MVP와 병아리 열외.”

신해범은 권세혁과 류진의 부재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무전을 끝내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진동했다. 신해범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진치우였다.

“보고가 아니라면 나중에….”

- 보고다. 엄승원이 20시에 강인우와 접촉한다.

엄승원은 최금호에 대한 조사를 마쳤고, 더는 유미현에게 협력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인우를 통해서 전달하려 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맞아서 울퉁불퉁해진 얼굴, 퉁퉁 부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러넘치는 모습이 육즙 짜내는 고기 같았다며 진치우는 킬킬 웃었다.

신해범은 피식 웃었다. 언젠가부터 사람 패는 일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살이나 하는 게 세상에 이로울 것이다.

“장비는 갖췄어?”

- 3종 세트 풀 장착시켰다.

GPS, 녹음기, 카메라. 실제로 엄승원을 감시할 사람으로는 구은하와 호월루의 보안 요원 넷이 동원됐다. 허튼짓을 한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날려 버릴 것이다.

“그래도 돼?”

- 벌써 설계 끝났지.

권세혁 왕자 팬클럽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하고, 커리어가 끝장나 버린 엄모 기자의 자살 사건으로 스토리텔링 할 준비가 이미 끝났다.

“내가 없으니 우리 치우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네.”

- 내가 이 정도다, 새끼야.

“여기서도 좋은 소식 들려주지.”

- 기대한다. 12층에서 보자.

“그래. 12층에서 만나.”

진치우에게 군인의 삶을 제안한 건 신해범이었다. 그는 지하 108층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라는 진치우에게 햇빛을 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높은 곳으로 함께 올라가자고 설득했다.

- 범아.

“왜?”

- 몸조심해.

“갑자기 뭐야. 치우, 너 내 컬렉션 손댔냐? 뭐 깨 먹었어?”

- 아니거든 미친놈아!

진치우가 쯧, 혀를 찼다.

- 내가 폭발물에 좀 예민하잖아.

“아아….”

신해범은 픽 웃었다.

“알았다. 조심할게.”

- 아 진짜 조심하라고. 나 어제 이빨 빠지는 꿈 꿨다고.

“위? 아래?”

- 아래.

“그럼 나 아냐.”

신해범은 룸 미러로 뒤쪽을 바라보았다.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은데.”

- 뭔 소리야?

시동을 걸었을 때 자동으로 켜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안내 음성을 내뱉었다. 적벽돌이 인상적인 문화 회관이 코앞이었다.

“형님 일하러 간다. 끊어.”

- 너만 일하냐? 나도 바빠!

발끈하기는. 그러지 않아도 애쓴다는 거 아는데.

휴대폰 너머 진치우는 평소보다 긴장한 듯했다. 그렇다고 믿음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진치우에게는 자기 나름의 릴렉스 방법이 있었다.

그게 바로 믿음직한 대장님의 목소리를 듣는 거지.

신해범은 빙그레 웃으며,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여튼 새끼, 혼자 바빠요.”

진치우는 액정의 ‘통화 종료’ 네 글자를 응시하며 투덜거렸다. 사실 누가 먼저 끊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친구 탓을 하기로 했다.

파오훼이 시절 신해범은 지독한 구두쇠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지 않고 훔쳤다. 전투 식량과 음식 재료, 생활용품을 가리지 않았다. 장교 전용 화장실에서 휴지를 훔쳐 와 소대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파오훼이 대원들은 신해범을 의적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진치우의 눈에는 그냥 도둑질이었다.

몇 번을 말렸는지 모른다.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닌데 그런 추잡한 짓 좀 하지 말라고. 그러나 신해범은 도둑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몫의 비품이었다고, 저놈들이 가로채 간 걸 되찾아 온 건데 뭐가 나쁘냐고 도리어 따져 물었다.

신해범이 도둑질을 그만둔 건 최금호가 죽고, 본격적으로 권주혁의 라인을 타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기우희는 신해범이 답답한 군 생활에서 일탈을 위해 도둑질을 했다고 여겼다.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려 도벽이 생겨 버린 수험생처럼. 하지만 진치우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에 신해범은 우울증 환자였다. 직업 학교 문턱에서 꿈이 좌절되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놈이었다. 도둑질은 신해범이 자해 대신 생각해 낸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진치우는 멀쑥하게 차려입은 엄승원의 어깨를 털어 주며 말했다.

“우리 기자님이 걜 너무 악마화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아… 예에….”

“신해범도 사람이라고. 기자님 눈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개새끼로 보이겠지만. 걔 생각보다 여려. 섬세하기도 하고. 오죽하면 취미가 찻잔 모으기겠어? 은근히 예술적인 놈이라니까.”

엄승원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찻잔 모으기와 예술성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진치우의 두 손이 양어깨를 퍽! 세게 내리쳤다.

“억!”

옷 위로 맞았는데도 얼얼했다. 어깨에 시퍼렇게 멍이 들 것 같았다.

“기자님, 잘할 수 있지?”

진치우가 활짝 웃었다.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이 저렇게 완벽한 치아를 처음부터 가졌을 확률은 낮았다. 앞니 네 개는 새로 해 넣었으리라.

엄승원은 진치우가 듣는다면 당장에 뒤통수가 박살 날 말을 삼키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함께 탑승한 진치우가 말했다. 그는 엄승원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잘해. 잘하면 우리 엄 기자님 평생소원 성취하게 해 드릴게. 내가 지금 당장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마는, 복귀하는 날에 딱, 어? 신 준장이랑 우리 엄 기자님 12층 사무실에서 독대하게 해 준다니까. 그러니까 어깨 좀 펴요. 표정 관리도 하고. 응? 원래 사람이 살다 보면 줄을 바꿔 잡기도 하는 거야. 사회생활 할 만큼 해 본 분이 왜 이렇게 새가슴이실까.”

“…….”

진치우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해범이 그놈,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

“하긴 걔가 인상은 사나워도, 사람 끌어들이는 매력은 있지.”

엄승원의 어깨가 움찔했다.

“저는 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래요? 단순 호기심치고는 조사를 많이 하셨던데. 나중에 자서전 의뢰해도 되겠어.”

엄승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긴지 모를 일이었다.

신해범은 함영재의 BMW를 폭발물이 설치된 지마 옆에 주차했다. 크고 긴 기대마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아직 참석자들은 오지 않았다. 설명회를 준비한 인원과 몇몇 풍기대원들만이 드나들었다. 기우희와 성재경은 회관 안에 있었다. 대장 없이 리허설하느라 진땀 뺐을 두 사람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신해범은 고개를 좌우로 꺾고 손목을 가볍게 흔드는 스트레칭을 했다. 운전석에서 내려 트렁크로 향했다. 함영재는 죽어 가고 있었다. 치료받지 못한다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거야말로 신해범이 바라는 바였다. 그리고 류진도.

‘죽여! 죽여 버려! 죽여 줘! 죽여!’

끝내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때 류진은 신해범이 원하는 인간상에 한 발짝 다가선 것처럼 보였다.

신해범은 함영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감은 눈꺼풀이 자줏빛이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피 섞인 타액이 늘어져 트렁크 바닥을 적셨다. 신해범은 함영재의 부러진 팔을 보았다. 뼈를 완전히 조각냈으니, 살아도 평생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전업 깡패가 장애를 안고 사느니 일찍 죽는 게 낫겠지.

신해범은 트렁크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일어나.”

“…….”

“깬 거 알아.”

“…….”

“무릎뼈도 박살 내 줘?”

함영재의 눈꺼풀이 열렸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신해범의 손바닥에 막혔다. 신해범은 담뱃불을 그의 눈꺼풀에 가져다 댄 채 웃었다.

“질문이 있어.”

함영재가 눈을 껌벅껌벅했다. 고문과 취조에 익숙한 신해범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뭐든지 다 할게요. 살려만 주시면.

“정류진 좋아했나?”

함영재의 동공이 팽창했다.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상황을 정리하고 이해하느라 머릿속이 꽤 바쁠 터였다. 신해범은 함영재가 가능한 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머리칼을 그러쥐고 잡아당기며 겁박했다.

“대답해. 예스, 노?”

함영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혼란스러운 대뇌에서는 지금 ‘노’라고 대답하는 게 생존에 가까운 대답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류진에 대한 신해범의 감정을 모르기에 선택한 대답이었다.

“그래?”

“우그으으으윽!”

함영재의 이마 정중앙에 담뱃불이 지져졌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몸부림칠수록 신해범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바이크로 꼬셨었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눈빛이 날아왔다. 신해범은 픽 웃었다.

“아침마다 학교에 태워다 주겠다고. 바이크 모는 법도 가르쳐 주겠다고.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꼬드겼지. 쉬워 보였나? 정에 굶주려서 약간의 친절만 베풀어도 좋아하는 게?”

신해범은 함영재의 충혈된 눈을 응시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게 해 줬지? 술도 먹이고. 다음은… 처음부터 그럴 셈이었나? 아니면 홧김에?”

신해범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동영상을 촬영했지. 사진도 찍고.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빌미로 약점 잡을 생각이었으니까.”

“…….”

“다른 놈들한테도 손 대게 해 줬지? 네 차례가 끝나고 나서. 아니, 처음부터 함께였나? 저항하는 정류진 팔다리를 잡고, 입에 술을 처넣고, 옷을 찢어 벗기고… 박제하는 기분이었겠군. 기분 좋았나?”

신해범은 손바닥을 뗐다. 함영재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클럽 화장실에서 군홧발에 차였을 때 갈비뼈가 부러졌고, 부러진 뼈가 내장을 찢었다. 내출혈. 끓는 피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함영재는 입술 밖으로 흘러넘치는 피를 핥았다.

“기분… 좋았느냐고?”

혀에 백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좋았지. 아주 맛이, 있었지.”

“류연비의 팬이었지? 그의 결백을 믿는다고 말했었고.”

“그래.”

“그건 진심이 아니었지?”

“네, 가… 뭘 알아.”

“잘 알아. 나한텐 인간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기술이 있어. 그건 나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작용하지.”

함영재가 피식거렸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신해범의 얼굴이 담겼다.

“정류진 처음 봤을 때 어땠나?”

“숨이 막혔어.”

“너무 똑같아서?”

함영재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핏덩어리가 울컥 쏟아졌다. 멱살을 쥐고 있던 신해범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

“거부할 수 없는 년이었어.”

“증거물은 어디 있나?”

함영재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그는 신해범을 조롱하듯 내뱉었다.

“보고 싶어?”

“경찰에 제출했어도 사본이 남아 있겠지. 증거를 두려워했으면 처음부터 남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더러운 새끼.”

“너나 나나.”

신해범은 함영재의 일갈을 부정하지 않았다. 겨우 그런 도발에 발끈하기에는 자기혐오가 뿌리 깊었다.

“없어.”

함영재가 말했다.

“꼰대가 다… 없애 버렸어.”

신해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1124. 그 숫자 기억해?”

정류진의 생일 날짜였다. 함영재가 물어봐서 대답해 줬다고 했다. 그 대답을 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으리라. 꿈에도 상상 못 했으리라.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형이 돌변할 줄은.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며, 그만하라고 울부짖는 입을 틀어막을 줄은.

신해범은 함영재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현금과 카드, 신분증과 영수증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신분증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함영재는 뜻밖에 단정한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잘랐고, 목까지 셔츠 단추를 꼭 채워 입었다. 이목구비는 지금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류연비 포토 카드를 지갑에 넣고 다녔다지?”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미소는 곧 사라졌다. 함영재의 신분증을 빼낸 자리, 투명한 필름지로 막힌 그 공간에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한 사진은 반으로 접힌 채였다. 신해범은 사진을 펼쳤다.

류진이 거기 있었다.

열여덟 살 때의 류진이었다.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 늘어져 있었다. 교복 넥타이로 눈이 가려졌고, 두 팔은 머리맡의 쇠 파이프에 묶여 있었다. 교복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가 목까지 올라갔고, 양말과 운동화만 온전했다. 그마저도 신발 한 짝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해범의 시선이 사진에 박혔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가 흔들렸다.

사진 속 류진은 의식이 없었다. 얼굴이 더러워진 채 기절해 있었다. 가슴, 옆구리, 허벅지가 온통 퍼렇고, 보랏빛이고, 붉었다. 붙잡혀서 쉼 없이 굴렀을 터였다. 지쳐서 기절할 때까지. 정신을 놓아 버린 뒤에도.

벌어진 입에는 구겨진 지폐가 한가득 물려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함영재가 질문했다.

“잘 나왔지? 그거… 딱 한 장, 뽑아 놓은 거거든.”

“…….”

“가져도 돼. 대신.”

“살려 달라고?”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사진을 접어서 기동복 앞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듯 가슴팍을 두 번 두드린 다음, 피우던 담배를 함영재의 왼눈에 쑤셔 박았다.

“끄아아아…!”

신해범은 두 손으로 함영재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게를 실어서 힘껏 눌렀다. 트렁크에 든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송장 주제에 저항이 제법 거셌다. 신해범은 함영재의 허리를 깔고 올라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신해범은 살인에 익숙했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지만, 두 손으로 사람 목을 졸라 죽이는 일은 처음이기에 필사의 힘을 다했다. 손가락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손안에서 뼈가 부스러지는 느낌.

세차게 뛰던 맥이 멎는 순간의, 희열.

신해범은 목 꺾인 시체를 내팽개쳤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상자를 집어 드는데 밑이 터졌다. 쯧. 신해범은 혀를 차며 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포장된 CD였다. 타이틀은 없었다. 정체불명의 CD가 커다란 박스 한가득 들었다.

의문은 다른 상자에서 풀렸다. 살갗을 노출한 여성들이 외설적인 포즈를 취한 포스터가 묶음으로 들어 있었다.

신해범은 온통 살색으로 가득한 포스터와 CD를 번갈아 보았다. 이놈이 열일곱 살짜리를 클럽 댄서로 고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실장이라는 놈은 마약을 하고.

신해범은 시신을 지마로 옮겼다. 폭발물이 설치된 차 트렁크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CD와 포스터는 뒷좌석에 채웠다. BMW에 있는 것들을 죄다 옮기고 나니 설명회가 시작하기 십오 분 전이었다.

신해범은 회관 뒷문을 찾아 들어갔다. 불이 꺼져서 어두컴컴했다. 다행히 공중화장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놀랍게도 온수가 나왔다. 신해범은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얼굴에도 핏방울이 튀었다. 옷에도 묻었으나 검은 옷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냄새가 나겠지만… 뭐. 생리 첫날이라고 둘러대면 미친놈인 줄 알고 어련히 꺼지겠지.

신해범은 거울을 봤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방금 살인을 저지른 남자였다.

그는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만졌다. 긁힌 상처에서 가느다랗게 피가 배어 나왔다.

‘죽여! 죽여 버려! 죽여 줘! 죽여!’

네 소원 들어줬다.

기뻐하면 좋겠구나.

“벌써 가니?”

강인우는 몸을 돌렸다. 방문 앞에 오은정이 섰다. 과일 접시와 포크가 얹힌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와 살갗이 비쳐 보이는 얇은 카디건 차림이었다. 강인우는 침대 위에 펼쳐 놓은 브리프 케이스를 닫았다.

“속옷 가지러 잠깐 들렀습니다.”

“풍기 교육대 본관이면 집에서 출퇴근해도 되지 않니? 지금 지내는 원룸보다 여기가 더 가깝잖아.”

“지내던 데가 편합니다.”

“난 군대 말투 적응이 안 되더라.”

오은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희미하게 버베나 향이 풍겼다. 강인우는 백육십 센티미터 남짓한 어머니가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아직 안 들어오셨어.”

“그래요.”

강인우는 침대에 앉았다. 엄승원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하늘이 꾸물꾸물했다. 밤이 늦게 찾아오는 여름은 비의 계절이었다.

오은정이 강인우 옆에 앉았다. 손바닥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모자지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도 여름이었는데.”

“기억해요.”

강인우는 눈을 깜박였다. 오은정과 처음 만난 계절도 여름이었고, 지금 같은 장마철이었다. 습한 공기가 얼굴과 목덜미에 진득하게 달라붙던 날이었다.

오은정은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났다. 강인우는 당황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쭉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집에 갑자기 젊은 여자가 들어앉았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나를 싫어했지?”

강인우는 픽 웃었다.

“인제 와서 무슨.”

“표정에 다 드러났어, 너.”

오은정은 강인우의 팔을 건드리며 웃었다.

“내가 네 눈치를 얼마나 봤는지 아니.”

“결혼식 왜 안 한다고 했어?”

“…아버지가 그런 것도 말씀하셨어?”

“지금이라도 식 올리자고 해. 은행에 눈치 보인다고 입때껏 면사포도 못 썼잖아. 벌써 몇 년이야….”

“그쪽 사풍이 워낙에 보수적이라.”

강인우의 입술이 비틀렸다.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신랄한 말투가 튀어 나갔다.

“그러면, 그렇게 직장 사람들 눈치 보느라 결혼식도 못 올려 줄 거였으면, 애초에 어린 여자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오은정은 대꾸하지 않았다. 매서운 눈초리로 창밖을 노려보는 아들의 손을 잡아 줄 뿐이었다. 강인우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내가 나이 먹는 게 싫어.”

“인우야.”

“내 얼굴이 아버질 닮아 가는 게 싫다고.”

오은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잘못 없어. 넌 그 사람과 같지 않아.”

“난 내가 어머닐 닮았으면 좋겠어. 날 낳아 준 어머니 말이야. 그런데 생각이 안 나. 내 어머니 얼굴이 생각이 안 난다고. 그 인간이 당신이랑 결혼하면서 어머니 흔적을 전부 치워 버렸어. 결혼 앨범이고, 가족사진이고 할 것 없이 다. 전부. 내 머릿속에서 어머닐 지우려고 갖은 수를 다 썼어. 자기가 미워하는 여자라고 나한테까지…!”

강인우는 오은정의 품속에서 신음했다.

“누나 같은 여자를 데려와서 엄마라고… 웃기지도 않아.”

호성동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오은정은 스물세 살이었다. 교사를 목표로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다.

강인우는 아버지가 혐오스러웠다. 딸 같은 여자를 데리고 사는 늙은이가 추잡스럽고 창피했다. 그는 아버지의 재혼이 학교에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오죽하면 악몽까지 꿨다. 꿈속에서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 특히 여자 학우들의 뜨악한 시선에 몸부림치다 눈을 뜨면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속옷과 침대보는 오줌으로 축축하고.

어린 강인우의 일상은 난파선처럼 위태로웠다. 학부모가 동원되는 연례행사가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가까운 친구들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강인우는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밖에서 놀고, 밖에서 먹고, 그러다 자고. 새살림 차린 아버지는 그 모든 걸 사춘기의 방황이라고 치부하고 내버려 두었다. 대신,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에는 상식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양의 과제를 내주어 밖으로 돌지 못하게 했다.

오은정은 강인우의 어머니 행세를 하려 들지 않았다. 강인우 또한 그를 어머니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은정은 호성동 집에 들어올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지만, 배가 불러오기도 전에 유산했다. 그의 몸에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어떤 불행은 예고 없이, 이유도 없이 찾아왔다.

그때 오은정의 옆을 지킨 사람은 겨울 방학을 맞아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강인우였다. 두 사람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가사를 봐주는 고용인은 해가 지기 전에 퇴근했다. 아버지는 자정이 넘어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날은 강인우의 생일날이었다. 오은정은 그의 삶에 두 번 다시 없을 선물로 축하해 주었다. 아버지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새어머니와의 사이는 데면데면하면서, 정작 그가 낳은 여동생은 그렇게 싸고돌다니.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유리에 맺힌 얼굴상이 이지러졌다. 강인우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인혜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했다. 강인우는 딸이 자기처럼 끈기가 없지도, 공부에 심드렁하지도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꿈꿀 수 있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강인우는 지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 애의 진짜 아버지니까.

만찬의 끝은 홍화 꽃잎을 우려낸 차였다. 신예나는 얇은 태블릿을 유미현 앞으로 밀어 놓았다. 유미현의 손가락이 화면에 닿자 누가 봐도 찍어 놓은 듯 닮은 류씨 남매의 사진이 떴다.

유미현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떠올랐다.

“곽의 전성기에, 류연비는 대표적인 친정부 인사였지.”

데뷔 자체가 검열국의 문화 지원 사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류연비가 연습생 신분으로 있었던 기획사는 입사할 때부터 재정 상태가 나빴고, 경제 사범으로 몰린 대표가 헌병대에 구속되어 신인 데뷔는커녕 소속 가수들의 컴백 일정까지 줄줄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 암울한 시절을 회상하는 류연비의 인터뷰도 있었다.

‘아침에 연습하러 갔는데 친구가 안 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연습생은 휴대폰 금지라서. 연락처도 모르고. 종일 궁금해하다가 퇴근할 때 살짝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퇴사했대요. 맥이 쭉 빠지죠.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밥 먹고 장난치고 했는데. 서로 힘든 거 아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말이라도 해 주고 가지 싶고….’

신예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류연비 소속사 재정이 나빠진 건 검열국의 지나친 규정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문화 산업 전반에 퍼져 있는 선정성….”

“선정성은 무슨. 그냥 자기들 입맛에 안 맞는 노래 하니까 화풀이한 거지.”

유미현이 웃었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집구석은 없어. 마음에 안 들면 일단 구속하고 보는 거야. 혐의는 나중에 생각하고.”

“그게 가능한가요?”

“이 나라 경제법은 허점이 많아. 이래도 말이 되고, 저래도 말이 되지. 있는 놈들이 재산 모으려고 만든 법인데 오죽하겠어?”

“그럼, 류연비 소속사 대표도….”

“거기 대표는 보석금 왕창 내고 풀려났어.”

유미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로비도 있었겠지.”

검열국의 예체능인 육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 회사에서 키우는 연습생들을 검열국이 주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소속 가수의 노래와 앨범 콘셉트를 사전에 보고하겠다. 예술인으로서의 자유와 긍지를 모조리 저당 잡히겠으니 목숨만 살려 달라.

“…….”

“친척이 엔터 사업에 다리 걸치고 있어서 아는데, 그 시기에 대형이고 중소고 상관없이 기획사에서 데뷔 준비하던 연습생이 대거 이탈했다고 들었어.”

“회사 방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군요.”

실제로 그 시기에는 현역 가수들의 은퇴도 많았다. 비극의 ‘원 히트 원더’ 세대.

유미현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류연비는 그 시절의 최대 수혜자야. 물론 본인의 실력도 있었지만, 동 세대의 다른 재능 있는 사람들이 꿈을 포기한 덕분에 그만큼 성공했던 거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난 그래서 걔가 싫지 않았어.”

유미현이 태블릿 속 류연비의 얼굴을 더듬었다.

“멋있잖아. 쥐뿔도 없는 게 성공하려면 그 정도 깜냥은 있어야지. 정치적 올바름만 쫓다가는 깡통 차기밖에 더하겠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연지동, 류연비 스카우터에 대해서 알아?”

신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류연비가 고난의 연습생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를 전폭적으로 서포트했던 프로듀서의 영향이 컸다. 그는 류연비를 스카우트한 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류연비가 스타덤에 오르자 업계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춰 버렸다.

“업계에서는 류연비와의 불화설이 유력한 원인으로 제기됐어. 그런데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뭐… 묻은 거지. 아무래도 스태프와의 불화설은 연예인 이미지에 문제가 되니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거군요.”

유미현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그것도 엔터 업계에서 퍼진 소문이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좀 더 심각한 얘기가 돌았지.”

“어떤?”

“류연비의 정계 입문을 반대하던 스카우터를 제거했다고.”

“류연비가 직접… 말입니까?”

“정황상 곽이 유력한 용의자였어. 물론 그걸 입 밖에 내는 멍청이는 없었지. 나도 그땐 고만고만한 수준이었거든.”

“…….”

“충격받은 표정이네, 연지동.”

신예나는 웃으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류진의 말간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말이야.”

유미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연지동이 류연비 얘기를 할 때 죄짓는 표정이라서 그래.”

혀 밑에 탄식이 고였다. 신예나는 낭패감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류연비와 개인적인 인연이라도 있었나?”

“그럴 리가요.”

신예나는 둘러대지 않았다. 유미현에게 거짓말을 해 봤자 신뢰만 깎아 먹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유미현이 들고 있는 태블릿으로 향했다. 유미현의 시선 또한 신예나의 눈을 따라갔다.

그곳에 있는 건 류연비가 아니었다. 류연비와 꼭 닮은 그의 동생이었다.

“착한 아이라서요.”

“착한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이라.”

두 여자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애는 어디서 주워 왔나?”

“반정부 조직 <백사자> 소속이었습니다.”

유미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신예나는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

“풍기 교육대 본관에서 진치우 부대장이 테러당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죽은 조직원의 복수라고.”

“아아.”

기억하다마다. 유미현은 <백사자>의 조직원을 심문 도중 사망에 이르게 한 풍기 교육대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건 실질적으로 풍기 교육대를 소유하고 있는 권주혁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데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그 일을 한 아이입니다.”

“그래?”

“절차대로라면 즉결 처분감이었지만, 신 준장은 처음부터 다른 계획을 염두에 뒀던 모양입니다.”

유미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인계는 예나 지금이나 건재한 전략이었다. 인간의 감정, 명쾌한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위험 부담이 높았으나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냈다.

귀신, 괴물, 도깨비, 악마 등 무시무시한 타이틀을 획득한 역사 속 수많은 영웅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감정에 휘둘려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건 역사를 배우는 후손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니 묘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MVP가 류연비 음악을 듣긴 하지.”

“수석께서 그런 걸 다 아십니까?”

“나도 조사라는 걸 하는 사람이야, 연지동.”

유미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신예나는 그가 권세혁을 만만하게 보지 않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상황에 총통이 급사하기라도 하면 자연스레 권세혁이 권좌에 등극할 테고, 권세혁의 뒷배인 권주혁이 가장 먼저 제거하려 들 사람은 신룡관의 ‘넘버 쓰리’일 테니까.

신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빙그레 웃었다. 평소에 신해범이 자주 하는 제스처였다.

“둘이 풍기대에서 세트처럼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유미현은 강인혜가 보내 준 사진들을 떠올렸다. 권세혁에게 소녀 팬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강인혜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풍기 교육대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사진 찍는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하는 걸 보면, 타고난 포토그래퍼의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강인혜의 포커스는 권세혁에게만 맞춰져 있어서, 그간 유미현은 왕자 옆의 ‘따까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눈에 확 띄는 미인이건만.

“이래서 관심사가 중요하다는 거야….”

신예나는 어느새 미적지근해진 차를 마셨다.

“풍기 교육대의 주가가 급락하면, 수석께서 사십 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 주십시오.”

“내게 종이 쪼가리 주식을 사라는 말이군.”

“주식이 아니라 풍기 교육대를 사시는 겁니다. 싼값에 최정예 사병 집단을 마련하시는 거지요.”

유미현이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을, 신예나는 똑똑히 보았다.

“풍기대를 사 달라….”

“그렇습니다.”

“나한테 군대는 필요 없는데.”

“<백사자>를 믿으십니까?”

이번에는 유미현이 당황할 차례였다. 물론 눈에 띄는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신예나는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만났고, 별의별 주제를 가지고 대화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요령이 있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상대의 속을 엿보는 일이었다. 지금 상대방이 기쁜지 슬픈지. 놀랐는지 태연한지. 제어하려 해도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반응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동공, 땀구멍, 근육, 호흡, 손짓.

포커페이스에 점수를 매긴다면 유미현은 10점 만점에 9점이었다. 하지만 신예나는 호월루의 주인이었다. 권주혁 군벌의 정치 자금 세탁조였다. 호월루는 화천 지구 개발이 시작되면 고속 도로가 뚫릴 자리였다. 그 노른자위 땅을 깔고 앉아 정보를 수집하고, 몰려드는 아첨쟁이를 솎아 내며, 인맥의 촘촘한 그물을 짜는 정치적 해결사였다.

신해범의 계획은 신예나가 물어다 준 정보, 그가 설계한 인맥을 바탕으로 짜였다. 과거 신영산 회장에게 신지희 상무가 있었듯이.

“하성록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세에는 줄을 바꿔 서는 일도 재주야.”

“줄을 바꾸는 것과 변절은 다릅니다. 전자는 다른 뜻을 품은 것이고, 후자는 동지를 고의로 적의 아가리에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정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예나가 자조했다.

“수석께서는 신해범 준장을 군부가 낳은 괴물이라고 부르신다지요.”

“군부의 힘을 앞세워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맞습니다. 신 준장은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나라를 움직이는 건 군대고, 권주혁은 군권을 장악한 자였다.

“뛰어난 지혜를 갖춘 개인이 기지를 발휘해서 집단을 쳐부수는 경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간인은 군인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니까요.”

체력과 스피드, 기술과 무기, 행동력과 통제력. 소수의 진압 팀이 대규모 시위대를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신예나는 찻잔을 움켜잡았다.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자 찻물이 넘쳐 하얀 테이블보를 적셨다.

“각하께는 군대가 필요합니다. 권을 몰아낸 뒤 <백사자>에게 통치권을 빼앗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무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야.”

“폭력을 멈추게 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이곳은 군부 독재 국가였다. 정신 나간 독재자가 철혈의 성을 쌓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였다. 자본과 민주주의의 힘만으로는 그를 몰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삼룡 처형식으로 증명됐다.

“수석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권력의 맛을 아는 자들은 조용히 물러나는 법을 모릅니다.”

유미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 신예나는 <백사자>를 버리고 신해범과 손을 잡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기우희도 얻을 수 있고, 만에 하나 하성록이 정권을 잡기 위해 끌어들일 중국 세력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그림자가 깔렸다.

“수석께서 망설이는 이유를 압니다. 신 준장이 그간 보여 준 행보 때문이겠지요.”

권주혁의 개였다. 신해범이 권주혁에게 보인 충성은 대외적인 요소에 국한되지 않았다. 신해범은 권의 비공식 포주였다. 선천적 성불구자로 가학적인 성적 욕구를 가진 권주혁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자와 한배에 탄다는 생각만으로도 목뒤가 뻐근하게 땅겨 왔다. 자존심이 진흙탕에 처박혔다.

유미현은 선착장에 서 있었다. 낚시꾼 신예나가 배를 가져왔다. 그가 내밀고 있는 낚싯대는 신해범이었다. 그 끝에 달린 미끼는 기우희고.

낚시꾼이 말했다.

“진흙탕 속 진주를 건지려거든, 손을 더럽힐 각오를 하셔야지요.”

강당은 설명회를 들으러 온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통로에 접이식 의자까지 갖다 두었음에도 자리가 부족해 서 있는 사람이 많았다. 휴대폰을 비롯한 전자 기기는 입장 전 강당 입구에서 모두 수거해 보관했다. 풍기 교육대 설명회 내용은 외부로 유출할 수 없었다. VIP석 참석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해범은 육중한 오크 기둥을 가로질러 무대로 향했다.

연단에 선 순간, 마이크를 세팅한 사람이 기우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해동문국 남자 평균 키를 훨씬 웃도는 신해범이 서서 말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볼륨도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앞으로도 완벽할 것이다.

신해범은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함풍 2도 주민 여러분, 그리고 멀리서 찾아와 주신 국민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입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신해범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대원들도 일제히 몸을 굽혔다. 박수 소리가 높아졌다. 감탄과 경외의 웅성거림도 들려왔다.

고개를 들 때, 무대와 가장 가까운 VIP석에 앉은 함현수와 눈이 마주쳤다. 신해범은 턱짓으로 국기를 가리켰다. ‘총통 각하에 대한 맹세’를 올릴 때 엉뚱한 곳을 보거나 제대로 거수경례를 하지 않으면 왕실 모독죄로 간주되었다.

애국가에 이어 장엄한 선전 가요가 울려 퍼졌다. 신해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마찬가지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씌워 주었다.

그는 가면 쓴 얼굴로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썼다. 풍기 교육대로서 일할 때는 본래의 자신을 숨겨야 했다. 생각과 감정을 철저히 분리하고,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했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고 싶거든.

가면을 쓴 대원들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념품과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몰래카메라나 휴대폰을 숨겨 들어온 자들이 있는지 감시했다.

신해범은 꼼꼼하게 좌석을 훑었다. 사람들을 앉힐 때, 여자와 아이들을 무대 기준 왼쪽 출구와 가까운 자리로 배치하라고 말해 두었다. 노골적인 차별이었으나 이유는 있었다. 폭탄과 함영재의 시체를 실은 차가 오른쪽에서 들이받을 테니까.

석벽은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의 폭발물이었다. 민간인 사상자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기우희가 공들여 만든 자료는 공개하지 못했다. 스크린 한가운데가 칼로 북 그어져 있었다. 행사를 준비한 도우미 대표, 차혜진은 그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그는 리허설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스크린이 멀쩡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현장에 있었던 다른 대원들도 같은 증언을 했다.

신해범은 이 문제에 대해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권세혁에게 망신당한 함현수의 깜찍한 복수일 게 빤했다.

신해범은 무용지물이 된 레이저 포인터를 세게 쥐었다.

“직할시는 진입 장벽이 높은 지역입니다. 물가와 집값이 전국에서 가장 높지요. 하지만 그만큼 인프라가 뛰어나고 사회, 경제, 문화 수준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합니다.”

팔락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 설명회는 직할시에 대한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개인의 능력이 특출 난 사람이라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설령 있다고 한들, 출신 성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 사회에서 빛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앉아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더 큰 세상, 더 많은 기회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신해범은 미소를 머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국가 1급 정치 사범의 아들입니다.”

힘든 대사였다.

“원칙대로라면 특수 공무원 신분은커녕, 정규 교육 과정조차 마치기 어려운 출신 성분의 소유자입니다.”

힘드니까 더 웃어야 했다. 신해범은 풍기 교육대를 출범시킨 권주혁을 찬양했다.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열린 가치관, 자비로운 사고방식을 칭송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어든 대원이 바람잡이 노릇을 잘했다. 순진한 주민들 눈에는 설명회를 보기 위해 타 지역에서 달려온 열정 넘치는 젊은이로 보일 것이다.

신해범은 활짝 웃음으로써 대중의 호응에 화답했다. 그래 웃자, 웃어. 아주 주둥이가 귀에 걸릴 때까지 웃어 버리자. 어차피 진심도 아닌데 죄책감 느낄 필요 없잖아.

나 이해할 수 있지, 아버지? 우린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였잖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였잖아.

“저는 제가 받은 혜택을, 가능한 많은 분께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청산유수가 이어졌다. 풍기 교육대는 현장 업무의 강도가 높다. 하지만 그만큼 대우가 좋다. 기본급은 말 그대로 기본일 뿐, 품위 유지비와 안전 수당이 동일 직급의 어떤 부대보다 높게 책정된다. 이직 시 인정받는 경력도 업계 정상급이다. 가산점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진급 시험도 면제받는다.

바람잡이가 질문했다.

“임무 수행 중 부상당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국가 1급 상이용사 대우입니다. 직할시 외곽의 2층 주택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직계 가족은 공공 기관 면접시험을 면제받습니다. 물론 연금도 지급됩니다. 보상금과 연금 테이블은 나눠 드린 자료를 참고해 주십시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해범은 좌중을 둘러봤다.

정성현이 와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옷에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신해범은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올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조카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쌀쌀맞게 굴더니, 인제 와서 마음이 바뀌셨나?

신해범은 정성현을 비웃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직원 성별 격차가 큰데 이유가 있나요?”

바람잡이가 아닌 이의 질문에 신해범은 미소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성 대원의 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신해범은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현장직 여성 지원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채용에 있어 성별로 인한 차등은 결코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전산실을 비롯해 기우희 소령이 총괄하는 11층 사무동에는 여성 직원이 다수 근무하고 있습니다.”

기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에게 이목이 쏠린 틈을 타 성재경이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신해범은 성재경이 강당을 벗어나는 모습을 확인한 뒤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편적인 쉬운 단어로 정확히 설명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너무 가벼워 보여서도 안 됐다. 게다가 듣는 이들이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중요했다.

확실히 군중 앞에서 말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얼굴 상처를 감추기 위해 특수 분장을 했다. 가까이서 봐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감쪽같았지만, 진치우는 못내 불안한 듯 큼지막한 뿔테 안경을 쓰도록 했다. 엄승원은 이 무거운 안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우대 멀쩡한 사람도 단숨에 꺼벙이로 만들어 버리는 디자인도 그렇고, 콧등에 맺히는 땀 때문에 자꾸 미끄러져서 불편했다.

강인우가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었다. 본인도 방금 왔다는 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테이블 위의 음료가 새것인 걸 보니. 엄승원은 그가 쓴 나이키 볼 캡의 하얀 로고를 응시하며 떠듬떠듬 말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끝까지… 제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책임까지 느끼고 계십니까.”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강인우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수석께서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그건….”

“이건 그간 고생하신 답례입니다.”

테이블 위에 흰 봉투가 놓였다. 현금. 엄승원은 이걸 어떻게 진치우 몰래 빼돌릴까 생각하다가, 잘못되면 이번에야말로 요단강 건넌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래도 진치우의 용돈벌이가 되어 주기는 싫었기에 봉투를 도로 밀었다.

“괜찮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

“그, 부정한 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기자님. 지금 너무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예?”

“자리가 덥습니까? 에어컨과 가까운 데로 옮길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원래 몸에 열이 많습니다.”

엄승원의 손안에서 손수건이 구겨졌다.

살면서 거짓말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거짓말에 익숙했다. 직업 특성상 상대방의 주의를 늦추고 신뢰를 끌어내기 위해 사소한 거짓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했다. 필요하다면 신분을 위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가 이 업계 관련자인데, 로 시작하는 것들. 요령만 알면 들키지 않는 거짓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건 진짜였다. 엄승원은 한 번도 자기가 영화의 주요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파이 노릇이라니. 엄승원은 <007>의 제임스 본드가 아니었다. <본 시리즈>의 제이슨도 아니었다. 그들처럼 될 수도 없거니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엄승원은 당장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 자신의 낡은 맨션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몇 달째 빨지 않아 꿉꿉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 있기를.

“기자님.”

“…….”

“기자님?”

“아, 예!”

엄승원은 고개를 들었다. 강인우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더럭 겁이 났다. 강인우가 모든 걸 알아차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테이블 밑에서 총을 꺼내 자기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강인우는 총을 꺼내는 대신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기자님께서 만나자고 하실 줄 몰랐습니다. 전화나 메시지로 얘기하실 줄 알았거든요.”

엄승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얼굴 보고 해야지요. 통신 수단이 편하기야 하지만, 요즘 세상에 도청이나 위조 가능성도 있고….”

강인우가 피식 웃었다. 엄승원은 눈을 내리깔고 목뒤를 만졌다. 이런 씨발, 지금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손바닥에 식은땀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강인우가 등받이에 몸을 묻은 채 팔짱을 끼었다.

“지금 신해범이 가 있는 함풍 2도는 류연비의 고향입니다. 정류진과 MVP도 함께 갔지요. 풍기 교육대 설명회야 연중행사지만, 함풍 2도 출장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우연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올 초에 승인된 사업 계획서상 이번 분기 설명회는 함풍 2도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럼….”

“정류진 때문이냐, MVP 때문이냐. 제가 알기로 MVP는 함풍 2도 같은 낙후 지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예. 저도 그쪽 고향은 장진이라고 압니다.”

무심하게 대꾸하던 엄승원은 퍼뜩 깨달았다. 정류진의 풍기 교육대의 공식 스케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 최종 결정권을 가진 신해범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

“역시 그냥 심부름꾼이 아닌 모양이지요.”

강인우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엄승원의 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한번 다녀오시지 않겠습니까?”

“예?”

엄승원이 눈을 부릅떴다. 실시간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니터링 중이던 진치우의 입술도 벌어졌다.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저 프락치 새끼?

“정류진에 대해 알려면 류연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류연비의 신상은 많이 알려졌지만, 그건 스캔들 전 얘깁니다. 한창 시끄러웠을 때 류연비의 행적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졌습니다. 정보 통제가 아주 잘 되었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고향과는 관련이 없을 텐데요. 류연비는 데뷔 전부터 직할시에서 살았습니다. 소속사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요.”

“기자님은 직장 생활에 넌더리 난 적 없으십니까?”

이건 또 무슨 삼천포로 빠지는 소리인가. 엄승원은 눈을 찡그리고 되물었다.

“예?”

“저는 힘들고 지칠 때 추억의 장소를 찾아갑니다. 어릴 때 살던 고향 집이라던가.”

호성동. 오은정. 강인우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지가 눈치를 챈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는 고교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강인우는 기숙사가 있는 사관 학교로 도피했다. 아버지의 눈앞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집안의 경제권을 쥔 남자를 아직은 이기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강인우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집을 드나들었다. 오은정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알 만도 했다. 서른다섯 살, 한참 전에 어른이 된 남자가 집에 들어오며 아버지부터 찾는 경우가 어디 있다고.

강인우는 아버지로 인해 호성동 집이 불편했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가게 되는 때가 있었다.

불우한 가정사에 대해 가능한 언급을 피하던 슈퍼스타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인생의 오점이지만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 없애거나 감춰 버리기에는 소중한 것.

강인우는 류연비에게도 그런 게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마뜩잖은 표정을 지은 엄승원이 말했다.

“류연비의 고향 집은 전소되었습니다. 스캔들에 원한을 품은 스토커가 불을 질러서. 집터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이건 제가 관계자에게 들은 얘기인데.”

강인우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엄승원은 셔츠 단추로 위장한 초소형 카메라를 들킬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강인우의 다음 말은, 엄승원만 아니라 진치우도 얼이 빠지게 할 만큼 뜻밖의 것이었다.

“함풍 2도에 류연비가 살아생전 숨겨 놓은 물건이 있습니다. 그걸 기자님이 찾아 주신다면 정류진의 입을 여는 건 물론이요, 신해범에게 단독 인터뷰 이상의 요구도 할 수 있습니다.”

류연비가 죽기 전에 남긴 유품.

백사율이 말하길, 정류진은 <백사자>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공연히 그런 소리를 하고 다녔다. 가혹한 조직 문화에서 자신을 지켜야 했을 테니까. 자신을 괴롭히거나 덮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도 필요했을 테고.

처음에는 다들 솔깃해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관심은 떨어졌다. 정류진의 주장에 허점이 많았던 것이다. 류연비가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면 정류진이 과연 <백사자>에 들어왔을까?

정류진은 천문학적인 빚을 갚아 준 하성록에게 팔린 거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류연비의 돈이 있었다면 정류진은 그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었다. 돈이 아니라 권주혁의 약점이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게 있었으면 애초에 류연비가 죽었을 리도 없었다. 죽기 전에 어떻게든 세상에 드러냈을 테니까.

정류진이 조직 내부의 분란 종자가 된 지금, 류연비의 유품 이야기는 어린애 허풍이었다는 설이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백사율도 반쯤 농담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강인우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돈이든 권의 약점이든, 일단 알고 있으면 이익이었다. 쓰임새는 손에 넣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다만 불확실한 정보를 맹신할 수는 없었다. 풍기 교육대에 적을 둔 이상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강인우는 엄승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자진해서 유미현과의 커넥션을 끊었다는 사실이 좋은 구실이었다. 미끼를 하나씩 던져 주며 실컷 부려 먹은 다음 적당한 때에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강인우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는 엄승원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중 스파이를 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겉모습 때문만이 아니었다. 엄승원은 속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어떻습니까.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기는 합니다만….”

진땀 빼는 모습이 안쓰럽기보다는 한심했다. 어찌나 땀을 많이 흘리는지, 들고 있던 손수건이 다 젖었다.

강인우는 속으로 한탄했다. 처음 만났을 땐 눈치 빠르고 감 좋은 사람이었는데, 변절을 하더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스스로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강인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다 녹아서 밍밍했다.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 합니까?”

이번에도?

상관없었다. 류연비의 유품 이야기야, 정류진이 가는 곳이라면 다 퍼졌을 소문이었다. 신해범이 함풍 2도로 날아간 걸 보면 알았다.

“그게… 말입니다.”

강인우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엄승원의 안경이나 셔츠 단추에 두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카메라 렌즈를 숨기기에 좋은 위치였다.

강인우는 엄승원이 자신과의 커넥션을 노출했음을 알았다. 발신자 추적은 수사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젯밤, 대포 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엄승원이었고 아무 말 없이 끊겼다. 강인우는 곧바로 역추적했다. 신호는 풍기 교육대와 가장 가까운 기지국에서 왔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마크가 붙었다. 사복을 입었지만 누가 봐도 군인인 남자가, 당직 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부터 호성동 본가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따라붙었다.

강인우는 유리창을 통해 바 테이블에서 카페라테를 홀짝이며 소설책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응시했다. 대학생 같은 옷차림이었다. 책에 몰두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 제법 출중한 정찰꾼이었다. 하지만 헌병대 특수사 출신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엄승원의 변절은 예상 범위 밖이었다. 새삼스레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했다.

‘높은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저분한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요. 그리고 자기 손에는 더러운 걸 묻히지 않고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치들은, 그 누군가가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돌려 버립니다.’

엄승원은 ‘높은 사람들’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풍기 교육대인가. 강인우는 엄승원의 선택이 그저 우스웠다. 유미현이 싫어서 신해범의 아가리로 기어들어 가다니.

엄승원은 무식한 놈이었다. 기자로서의 책임감도 없었다. 그의 직업 정신을 뒷받침하는 건, 궁금한 건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는 호기심과 자신의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뿐이었다. 프로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좋은 기자는 아니었다.

강인우는 엄승원을 이용하는 데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너도 날 팔아넘겼으니 피차 쌤쌤이었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민은지가 마지막까지 류진을 걱정하며 글썽거렸다. 권세혁은 편의점 비닐봉지에서 지폐를 한 장씩 꺼내 귀가하는 아이들 손에 쥐여 주었다. 담배나 술은 사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그들이 인근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으로 직행할 것임을 권세혁은 알았다. 사람은 알면서도 바보 같은 짓을 할 때가 있다.

서인섭이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권세혁은 그가 하얀 가운을 옷걸이에 걸어 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회색 체크무늬 반소매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 갈색 구두가 나름대로 챙겨 입은 차림새였다.

“어디 가십니까?”

“회관에요. 늦었지만 풍기 교육대 설명회에 가 볼까 합니다.”

병원을 닫는다고? 권세혁의 심장이 철렁했다. 엉거주춤 일어선 그를 향해 서인섭이 웃었다. 안심하라는 듯.

“금방 올 겁니다. 잠깐 들여다보기만 할 거라….”

서인섭은 외손자의 얼굴을 멀리서라도, 잠시뿐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문은 열어 두고 가겠습니다. 모쪼록 편히 쉬십시오.”

“그래도 됩니까?”

“예전에는 대문도 열어 놓고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래도 요즘이랑은 다르죠.”

“왕자님이 예서 가져가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서인섭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래 봐야 비뚤어진 카라를 바로잡고 플라스틱 참빗으로 백발을 빗어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권세혁은 신선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나이를 먹을까? 얼굴에는 주름이 지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고.

서인섭의 자그마한 뒷모습에 외조부가 겹쳐졌다. 비록 서인섭보다 십 센티미터 이상 크고, 몸집은 두 배에, 여전히 꽉 잡힌 근육을 유지했지만, 새하얀 백발을 빗어 넘기는 모습은 깜짝 놀랄 정도로 닮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 때렸다.

“제가 집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왕자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늙은이 마음이 든든합니다.”

“대신 오실 때 먹을 것 좀 사다 주십시오. 돈은 드리겠습니다.”

서인섭이 만류했으나, 권세혁은 그의 주머니에 지폐를 쑤셔 넣었다. 기계에 고액지폐가 부족해 되는 대로 뽑았더니 돈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이 왜 장지갑을 사는지 알 것 같았다.

정장 구두와 같은 색깔의 중절모를 챙겨 쓴 서인섭이 몸을 돌렸다. 권세혁은 문밖까지 따라 나가 배웅했다. 한번 외조부를 떠올리니 자꾸만 두 사람이 겹쳐 보였다.

서인섭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권세혁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던 서인섭이 도로 나타났다. 벽에 등을 부딪치고 나가떨어졌다.

권세혁의 입술이 벌어졌다. 구르듯이 달려가 쓰러진 노인을 부축했다.

서인섭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회색 체크무늬 셔츠가 붉었다. 빨간 물감이 든 물 풍선에 맞은 것처럼 피가 번지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찢어진 셔츠 틈새로 자상이 보였다. 깊었다. 검붉은 피가 꿀렁이며 흘러넘쳐 상처를 막은 권세혁의 손등을 적셨다. 문짝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권세혁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여기 숨어 계셨구먼.”

권세혁은 고개를 들었다. 침입자들을 노려보았다.

“…뭐야, 니들.”

쇠붙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권세혁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힘없이 늘어진 노인을 부축하느라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간발의 차로 쇠 파이프를 피한 권세혁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비아냥거리는 깡패들을 노려봤다.

“니들 뭐냐고.”

흉흉한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이건 보복이었다.

권세혁은 허리께로 손을 옮겼다. 긴장을 완전히 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곤봉이 있어야 할 위치에 제대로 있었다.

“니들, 나 누군지 몰라?”

비웃음이 왁자했다. 권세혁의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이…!”

깡패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섰다. 안경알이 커피색인 보잉 선글라스를 쓴 행색이었다. 날이 안으로 둥글게 휘어진 카람빗을 들고 있었는데, 칼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왕자님요. 우리가 무식하다, 무식하다 하지만 신계동 왕자님 용안도 몰라볼 만큼 무지렁이는 아니오.”

껌을 질겅질겅 씹어서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요. 딴 놈팡이는 몰라도 우리 신계동 왕자께선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거든.”

“뭐라고?”

“왕자께서 아직 어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는 신룡관 어르신이랑 한솥밥 먹는 식구요, 식구.”

놈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오래됐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던 병원 바닥에 단물 빠진 껌이 붙었다. 권세혁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다달이 상납금 갖다 바쳤으면 알아서들 지나갈 것이지, 왜 남의 영업장에 쳐들어와 행패요?”

“상납… 뭐?”

“모르는 척 마오. 올해만 들어서 최가 세 배를 올렸소, 세 배.”

남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중지가 이상하게 짧았다. 권세혁은 남자의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 나간 채 아물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최라니. 그게 누군데.”

“지금 모르는 척하시는 거요?”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명령이다!”

남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최석준 전 정무국장 말이오.”

신룡관 어르신과 한솥밥. 상납금. 최석준이 세 배를 올렸다. 권세혁은 남자의 말을 재구성했다. 어렴풋이 윤곽이 드러났다.

“하하….”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정을 떠나기 전, 신해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본도 없는 것들이 명문가 족보를 사서 귀족 행세를 하며 지역민들을 수탈하고, 위협하고, 감히 총통 각하의 권위에 도전하려 합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근본 없는 깡패 놈들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었다. 권세혁은 전 정무국장 최석준을 기억했다. 그와 만난 적도 있었다. 명화각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숙부의 오랜 친우이자 신해범에 버금가는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말에 호의적으로 대접했다. 최석준은 장래의 총통 각하를 만나 가문의 영광이라고 웃었다. 그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났다.

시간을 끌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건 구조대를 기다려서가 아니었다. 지금 권세혁에게는 무전기가 없었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쇠사슬이 날아와 손모가지를 후려칠 터였다.

무엇보다 권세혁은 함영재의 행방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걸 눈앞의 깡패들에게 말해 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장 얻다 빼돌렸소.”

함영재가 살아 있다고 믿는 한, 저놈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테니까.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시간을 벌어 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혼자라면 충분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은 왕자 신분이었다. 서인섭을 모른 척하고, 류진을 넘겨주면 저들도 옳다구나 하고 물러설 터였다.

하지만 권세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류진을 방패막이로 쓰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신해범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이 지역 경찰이 함씨 일가와 한패라는 건 서지운이 말해 준 바 있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싸우면 된다. 나 혼자서.

이미 저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권세혁은 서인섭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상처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었다. 찔린 부위도 좋지 않았다.

“…….”

힘없는 노인이었다. 제압하고 싶었다면 주먹 한 대로도 충분했을 텐데. 서인섭의 상처는 가슴팍의 자상 하나뿐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두 팔과 허벅지에도 칼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서인섭은 허벅지를 찔린 시점에서 저항 의지를 잃었지만, 가슴을 찔리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두 팔로 급소를 방어했다.

최초의 공격만으로도 제압하기에는 충분했을 텐데.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야.”

“그건 그짝 생각이고.”

권세혁은 싱거운 미소를 흘렸다.

“깡패 새끼들답다.”

“뭐요?”

“인해 전술을 할 거면 대가리 수나 꽉 채워 오든가. 쪽팔리게 다섯이서 뭐냐. 배구도 여섯이서 한 팀인데.”

선글라스 남자가 이마를 긁었다. 개기름이 번들번들했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오?”

쇠사슬이 날아왔다. 끄트머리에 뾰족한 날붙이가 달려 있었다. 폭주족들이 자주 쓰는 무기였다. 권세혁은 친구를 따라 구경 갔던 오토바이 치킨 레이스에서 비슷한 무기를 본 적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표적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거리용 무기였다. 별로 폼 나 보이지도 않고, 갖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이렇게 보니 반가웠다.

“우리가 장난치는 거로 보이오?”

“웃긴데 어떡하라고. 내가 그런 거 참아야 해?”

사실은 웃기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았다. 저들의 모든 행동이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무리로 몰려다니는 것도, 처음부터 무기를 꺼내 드는 것도, 별것 아닌 도발에도 분통을 터뜨리며 날뛰는 행동거지도.

쇠사슬이 휙휙 돌아갔다. 날붙이가 공기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다. 권세혁의 품속에서 노인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꿈이었기를 바라는 것처럼.

서인섭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기동복을 적셨다.

체온이 떨어져 갔다. 핏기 없는 얼굴은 땀투성이였다.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 밖으로 가쁜 숨이 튀었다. 권세혁은 목덜미를 스치는 한기를 느꼈다. 서인섭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침입한 깡패의 칼에 맞아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권세혁은 죽어가는 노인을 복도의 간이 의자에 눕혔다. 구부러진 무릎을 펴려고 그의 다리를 잡은 순간 깨달았다. 방금 한 사람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니다. 이런 건 억울한 죽음도 못 된다. 이건 그냥 개죽음이다. 

목 안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끓었다.

권세혁은 곤봉을 쳐들었다.

“알았다.”

그는 인정했다. 지금은 혼자서 싸워야 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목덜미에 식은땀이 솟을 만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하지만 권세혁은 두렵지 않았다.

서인섭이 죽었다. 친절을 베풀어 준 고마운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권세혁은 진심으로 서인섭에게,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서지운 병장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겠다. 물론, 저 무뢰한들을 바닥에 들러붙은 껌 덩어리처럼 뭉개 버린 다음에.

장식장이 깨지면서 유리가 쏟아졌다. 권세혁은 크리스털 감사패로 상대방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감사패에 새겨진 서인섭의 이름 위로 붉은 피가 쫙 튀겼다.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무너져 내렸다. 권세혁은 감사패를 내던지고, 피 묻은 손을 가슴팍에 문질러 닦았다. 

정면에서 나이프가 찔러 들어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권세혁은 한 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깻죽지를 움켜쥐었다. 있는 힘껏 벽으로 집어 던졌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쓰러진 남자는 목이 옆으로 꺾였다. 그는 다리를 몇 번 버르적거릴 뿐 일어나지 못했다. 권세혁은 남자의 손에서 나이프를 빼앗아 들었다. 날붙이가 생겼다.

“이 새끼가!”

두 명이 좌우에서 동시에 찔러 들어왔다. 매서운 상단 차기가 안면을 노렸다. 권세혁은 왼쪽에서 달려든 놈의 다리를 낚아채 옆구리에 끼우고 반 바퀴 돌렸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놈은 동료의 발차기에 턱주가리가 작살났다.

아군의 안면에 자살골을 처넣은 남자는 당황했다. 권세혁은 그의 쇄골에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가능한 한 깊이.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 목을 노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걸 칼 맞은 당사자는 잘 알 터였다.

“헉.”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권세혁은 그의 몸에서 나이프를 뽑았다. 상처에서 솟구친 피가 권세혁의 목에, 얼굴에 튀었다. 더럽고 불쾌했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는데 굵은 쇠사슬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

“큭!”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사슬 끝에 매달린 날카로운 쇠붙이가 팔뚝을 찢었다. 곤봉을 쥔 오른팔, 어깨와 가까운 상단이었다. 찢어진 옷 틈새로 피가 솟았다. 뜨거웠다. 권세혁은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곤봉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왼손으로 글씨는 못 써도, 무기를 휘두를 줄은 알았다. 생애 첫 검술 스승이 이도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권세혁은 오른팔을 늘어뜨린 채 공격 자세를 취했다.

“너.”

차갑게 내뱉었다.

“이리 와, 씨발 새끼야.”

권세혁의 시선이 우두머리의 갈색 선글라스에 꽂혔다. 반투명한 안경알 너머 쥐처럼 찢어진 눈매가 휘어졌다. 비웃고 있다. 권세혁은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았다.

“최석준이 잘해 주든?”

“왕자님이 어려서 아직 뭘 모르는 모양인데….”

“뭘 모르는 건 니들이야.”

권세혁은 벽을 짚고 섰다. 오른팔에 경련이 일었지만 무시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상처가 깊었다. 그런데도 신기하리만치 아프지 않았다.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이 통증을 무디게 했다.

권세혁은 선글라스를 노려보며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좁아터진 우물에서 사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없지. 니들 뒷배 최석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냐. 끽해야 숙부한테 붙어서 콩고물이나 주워 먹는….”

“그렇게 생각하시오.”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다, 깡패 새끼야.”

선글라스 남자가 다가왔다. 한 손을 꽂은 바지 주머니가 유난히 불룩했다. 권세혁은 그가 주머니에 칼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앙다문 턱이 바르르 떨렸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복도에 진동했다.

“왕자님께 충고 하나 해 드려도 되겠소.”

“아니. 넌 나한테 지랄할 자격 없어.”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소.”

그럼 왜 물어봤냐, 씨발 새끼야.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권세혁의 고함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빨랐다.

“우리한테 무서운 건 총통 각하도, 법도 아니오. 가까이에 있는 주먹이지. 왕자님도 머리가 크면 이해할 거요. 새우에게는 북극곰보다 물범이 더 무서운 존재요.”

권세혁의 입술이 엉망으로 비틀렸다.

“그걸 지금 충고라고 하고 자빠졌냐.”

곤봉을 휘둘렀다. 남자가 상체를 뒤로 젖혔다. 곤봉 끄트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선글라스 테를 스쳤다. 권세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빌어먹을 선글라스를 깨부수지 못하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저놈은 대체 뭘 잘했다고. 잘못했으면 무릎 꿇고 자비를 구걸할 일이지, 뭘 잘했다고 야생 생태계를 들먹이면서 나불나불….

감히 누구한테!

권세혁은 눈을 부릅떴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야가 흔들렸다. 출혈 때문이다. 다친 팔이 아프지는 않았으나,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서 힘이 빠졌다. 육체가 의지를 배반하는 순간이었다.

“일행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글라스 남자의 말에 소름이 전신을 내달렸다.

“어딜.”

권세혁은 방문 앞을 막아섰다. 닫힌 문 너머에 류진이 있었다. 죽은 서인섭에게는 미안하지만, 서지운에게도 죄라는 사실을 알지만, 망자의 시체를 개떼에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 문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 문 너머에 류진이 있었다. 류진은 아직 의식도 찾지 못했다.

“꺼져.”

“중요한 사람인가 보오.”

“꺼지라고, 개새끼야!”

쇠사슬이 날아와 문을 찍었다. 권세혁은 두 손으로 사슬을 움켜잡았다. 죽을힘을 다해서 끌어당겼다. 이제는 줄다리기 싸움이었다. 권세혁의 맨손바닥에서 불이 일었다. 괜찮았다. 손가락이 다 부러져도 상관없었다.

힘겨루기라면 지지 않는다.

특히나 지금 같은 때에는.

질질 끌려오던 남자의 발이, 서인섭이 쏟아 낸 피 웅덩이에 미끄러졌다.

“커헉!”

쓰러지며 끌려온 놈의 안면에 주먹을 꽂았다. 목에 쇠사슬을 감아 당겼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권세혁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전에 없던 살의가 솟구쳤다.

“죽여 버리겠어.”

토착 조폭, 깡패, 폭력배, 쓰레기, 인간 말종. 권세혁은 마구 내뱉었다. 그게 누구를 향한 폭언인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갈색 선글라스가 최석준으로, 최석준이 권주혁으로 변했다.

눈꺼풀 안으로 땀방울이 스몄다. 따가운 눈을 깜박이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갈색 선글라스가 권세혁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았다. 그러나 남자의 목을 조르고 있던 권세혁은 양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권세혁은 제 옆구리를 파고드는 상대의 주먹을 무기력하게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곧, 내장이 뭉개지는 것 같은 통증이 몸을 덮쳤다.

“흡!”

권세혁은 쇠사슬을 놓치고 비틀거렸다. 그래도 문 앞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

“안 돼!”

연이은 킥에 오래된 나무 문짝이 경첩째 떨어져 나갔다. 쾅!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섬뜩했다.

“못 가.”

권세혁은 문간을 잡고 버텼다. 얼굴로, 몸으로 주먹이 마구 날아왔으나 이를 악물고 견뎠다. 놈을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없었다. 안에 류진이 있었다.

“여긴 못 지나간다고!”

권세혁은 상대방의 허리를 끌어안고 밀어붙였다. 여기서 쓰러질 수 없었다. 다섯 중 넷을 해치웠지만, 나머지 하나를 끝장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건 류진을 지키지 못한 거였다.

말로만 지켜 준다고 나불대는 것만큼 한심한 인간이 또 없다.

두 사람은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권세혁은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다. 시야가 흔들려 자꾸만 헛손질했다. 그건 선글라스가 벗겨진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권세혁은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그의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너 나 못 죽여.”

남자의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면 네 물범이 북극곰한테 찢겨 죽으니까.”

권세혁은 남자가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까부터 카람빗을 쓰지 않는 걸 보면 알았다. 바닥을 구르는 와중에 어딘가로 날아가 버려서, 지금은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지만.

“함씨 놈이랑 뭔 사이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런 놈 밑에서 일해?”

신해범은 클럽에 있던 전원을 사살했어야 했다. 잔챙이들을 살려 준 대가로 서인섭이 죽고 류진이 위험해졌다.

신해범이 생존자를 남겨 둔 이유를 안다. 그에게 총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세혁은 신해범이 클럽에서 함영재를 제압할 때 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물론 그는 곤봉만으로 함영재를 때려잡았다. 하지만 총을 썼다면, 총만 있었다면 류진은 지금보다 덜 다쳤을 것이고 현장에 있던 잔챙이들도 죽여서 뒤탈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놈의 총만 있었더라도….

권세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해범이 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데 화가 났다.

이건 직무 태만이다.

내가 군법은 잘 모르지만, 아무리 목욕탕이 목적이었다지만, 그래도 작전 중에 군인이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니 명백한 근무 태만이다.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은 그렇다. 신해범은 내게 알량한 용돈 몇 푼이 아니라, 탄창이 꽉 차 있는 총기를 줬어야 했다!

권세혁은 신해범에 대한 분노를 눈앞의 적에게 쏟아 냈다.

“함영재나, 그런 놈 밑에서 일하는 너나 똑같아!”

남자가 비웃었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소리.”

“감히 왕족을 능멸하다니!”

엎치락뒤치락 바닥을 구르던 끝에, 두 사람은 간이 의자에 부딪혔다. 의자 다리에 가슴을 정통으로 부딪친 권세혁이 신음했다. 그를 깔고 앉은 남자가 말했다. 입술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딴생각하시네.”

남자가 주먹을 쳐들었다. 권세혁은 눈을 부릅떴다. 아까 부딪친 충격으로, 서인섭의 시신이 의자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바닥을 더듬던 손에 의자 다리가 잡혔다. 있는 힘껏 흔들자 간이 의자가 앞으로 기울어지며 서인섭의 시신이 남자를 덮쳤다.

“큭!”

망자의 셔츠 앞 주머니에는 볼펜이 들어 있었다. 권세혁의 눈에는 주머니에서 비스듬히 빠져나오는 볼펜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권력자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암살자는, 도저히 무기라고 상상할 수 없는 물건을 무기로 쓴다.

남자의 울대뼈 바로 밑에 박아 넣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솟구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권세혁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사실은 이강연의 가르침이었다.

도저히 무기라고 생각되지 않는 물건.

일을 저지르기 전에는 흉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물건.

“크… 어, 아….”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권세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제 목에 꽂힌 볼펜을 잡아 빼려고 했다.

권세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양손으로 볼펜을 움켜쥔 남자의 뒤에 류진이 서 있었다. 서인섭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명패를 들고.

‘눈 감아.’

류진은 그렇게 말했다. 권세혁은 시키는 대로 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얼굴로 튀는 핏방울을 느꼈다. 뜨끈하고 질퍽했다.

신해범은 강당의 둥그런 벽시계를 한 번, 손목의 바쉐론 콘스탄틴을 한 번 확인했다. 어느새 이십일 시 정각이었다. 캠프파이어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하늘이 재촉하고 있었다. 오늘 밤 폭우가 쏟아질 예정이었다. 신해범은 일기 예보를 맹신하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기상청의 예측에 감탄했다. 거침없이 몰려드는 회색 구름이 당장이라도 비를 퍼부을 기세였다.

신해범은 레이저 포인터로 VIP석의 함현수를 겨누었다. 남자의 벗어진 이마에 빨간 점이 찍혔다. 중국에서는 이게 암묵적인 퇴장 명령이라고 들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치들이 많아, 진행자가 조속히 행동하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고.

신해범은 마이크를 빼 들었다. 찢어지는 소음이 허공을 갈랐다. 함현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따지려는 기세였다.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라고? 갑자기 무슨…!”

“고인 물에 있으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면 생각이 편협해지죠. 새로운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부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형체 없는 규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지요.”

“대체 무슨 소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함현수가 대답할 틈은 없었다.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창밖을 내다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고 소리쳤다. 회관 벽이 무너졌다고도 했다.

벽에 박힌 지마에서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우드 플로어링 바닥이 진동했다.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우르르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크 기둥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고, 천장에서는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군중이 동요했다. 웅성거림이 커지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전기를 든 기우희가 신해범에게 다가섰다.

“대장님.”

성재경은 임무를 완수했다. 안전하게 탈출하여 기대마에서 대기 중이었다. 신해범은 그가 지마 트렁크에 쑤셔 박힌 시신을 발견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많이 놀랄 테니까. 그건 사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지마에는 함영재의 시신뿐만 아니라 그의 사업 아이템도 가득했다. 장작이 많아서 활활 잘 타오를 거라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캠프파이어다. 힘으로 상황을 종결하는 자들의 비정한 캠프파이어.

강당은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서지운을 비롯한 대원 다섯 명이 일사불란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권주혁의 눈치를 봐 가며 했던 인명 구조 훈련이 도움이 되었다. 당황하지 말고 머리를 숙여라. 앞사람의 어깨를 잡고 신속하게 빠져나가되 뛰지 마라. 여자와 아이, 노인을 살피고 부상자가 있다면 도와라. 기본적인 사항을 반복해서 외치는 것만으로도 생존 확률이 높아졌다.

신해범은 강당을 둘러봤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우드 플로어링 바닥 위로 떨어졌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걸레짝이 된 지마에서 세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이 솟구쳤다. 돌풍이 차량을 해체하고 강당 유리창을 깨뜨렸다. 비명. 고함. 울음. 신해범은 차가운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밤색 창문틀에 불이 붙었다. 자두색 벨벳 커튼에 불씨가 옮겨붙자 순식간에 불길이 번졌다. 불은 모든 것을 없애기에 딱 좋은 수단이었다. 전부 태워 버리고 재만 남기니까.

최금호를 죽일 때도, 자강 1도의 대마밭도, 정류진의 복수도. 신해범은 스스로가 참 일관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우희가 소화기를 휘둘러 퇴로를 확보했다. 그가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해범은 무대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막 출구를 빠져나가던 서지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린아이를 업고 있었다. 신해범은 아이가 안전하게 부모의 품에 안기기를 바랐다.

함현수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 이, 이, 이게 다 무, 무슨 일이야!”

“테러인 것 같습니다.”

“뭣이?!”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셔야 합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근처에 안전한 장소가 있습니다.”

함현수와 그의 부인을 비롯해 VIP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신해범을 따랐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은 맹목적인 신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해범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며 비틀대는 함현수를 둘러업기까지 했다. 목덜미에 달라붙는 숨이 역겨웠지만 꾹 참았다. 최대한 이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VIP로서의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신해범은 함씨 일가의 특권 의식에 감사했다. 이들의 착각에, 오만에, 자기들만 보호받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금방 도착합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차라리 집으로 가는 게….”

신해범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설명했다. 테러의 표적과 목적, 의도가 불분명한 지금 자택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장소라고.

함현수는 바로 수긍했다. 따라오는 일가족 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 생각이 없거나, 경황이 없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지경이거나. 신해범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함현수를 고쳐 업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곧 통구이가 될 신세니까 참았다.

수풀 너머 예배당의 지붕이 드러났다. 함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농지거리를 해 댔다.

“영재 그놈이 신기가 있나. 이런 일 생길 줄 알고 코빼기도 안 비쳤나?”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의문의 테러였다. 몇 사람이 죽었는지, 다쳤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설명회에는 오지도 않은 제 자식새끼 안위를 걱정한다.

신해범은 기우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함현수의 이마를 깨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신해범 또한 기우희와 같은 생각이었다. 함현수는 신해범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제 자식새끼만 소중한 놈. 예컨대 하성록.

하성록을 생각하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응?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신 준장?”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영재 놈한테 신 준장 같은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 말이야.”

세상에. 죽은 함영재가 들으면 트렁크 뚜껑 박차고 뛰어나올 소리였다. 신해범은 웃음을 참으려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오래된 건물 화장실에서는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가 났다. 이런 데서 양치질을 했다간 먹은 걸 토해 버리고 말 것이다. 권세혁은 온몸에 묻은 피 냄새가 화장실 악취를 감춰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씻어.”

류진이 말했다.

“너 얼굴이 피투성이야.”

“내 위로 쓰러졌으니까.”

권세혁은 어푸어푸 세수했다. 아무리 씻어도 피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그는 손톱 밑에 낀 피를 벗겨 내기 위해 거품도 잘 나지 않는 싸구려 비누로 손을 벅벅 문질렀다. 목과 얼굴, 귀 뒤까지 꼼꼼하게 닦았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 빙하수처럼 차가운 물에 씻어야 했다. 그나마 여름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만해.”

물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권세혁! 그만하라고.”

“어?”

“얼굴 가죽 다 벗겨지겠다.”

권세혁은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찬물에 얼어서 벌겠다. 코와 턱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류진이 수건을 내밀었다.

“닦아.”

“…….”

“뭘 바보같이 보고만 있어?”

“형, 나, 사람 죽였어.”

“알아.”

“나 괜찮은 거야?”

류진은 권세혁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이상했다.

“세혁아.”

그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류진은 권세혁이 얼굴의 물기를 닦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눈치챘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겠지.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류진은 잠자코 손을 뻗어 권세혁의 팔을 잡았다. 병원에 있는 도구로 응급 처치만 해 놓은 오른팔이었다. 제대로 치료하려면 칠십 바늘은 꿰매야 할 상처였다. 출혈이 심했다. 척 보기에도 얼굴이 백지장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너무 처참해.”

“따지자면 네가 죽인 거 아냐. 치명상은 내가….”

“내가 죽였어. 서지운 병장 할아버지도, 저 깡패들도. 다 내가 죽였어. 그러니까 누가 물어봐도 형은 입 벙긋하지 마.”

권세혁은 류진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무조건 나한테 미뤄. 아니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형 혼수상태였다는 거 증명해 줄 사람 많아. 해범이 형도 알고, 그 애들도 진술 필요하면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형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죄책감도 느끼지 마.”

상대방이 당부하는 말을 들으면, 당사자의 마음에 무엇이 돌덩이처럼 얹혔는지 보인다.

류진은 권세혁의 뺨을 만졌다.

“너 괜찮아?”

“그럼, 괜찮지.”

괜찮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류진에게는 권세혁의 머리와 몸이 따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장님한테 전화하자. 여기로 차 보내 달라고.”

“싫어.”

“네가 말 안 해도 돼. 내가 할게.”

권세혁이 류진의 팔을 잡았다.

“하지 마. 필요 없어.”

“세혁아.”

“딴 사람한테 도움받고 싶지 않아!”

류진이 움찔하는 모습을 본 권세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형이랑만 있고 싶어.”

“…그래. 알았어.”

“소리 질러서 미안.”

“아냐.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류진은 권세혁을 부축해 세면대에 앉게 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딱딱해진 그의 손은 덜덜 떨렸고, 잘 펴지지도 않았다. 간신히 손가락을 열어 보니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쇠붙이에 쓸려 피가 났다. 손톱은 깨져서 덜렁거리고.

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괜찮아. 나 통뼈야.”

울면서,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느라 권세혁은 바빴다. 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응급 처치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병원이라서 다행이다, 하기에는 억울한 인명 피해가 있었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권세혁의 환영식 날, 인파에 떠밀려 넘어진 자신을 붙잡아 준 서지운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려 애썼다.

“애들은?”

“집에 갔어.”

“그 애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애들 보내고 한참 지나서… 들이닥쳤으니까.”

권세혁이 빠르게 이어 말했다.

“함영재, 그 새끼는 화장실에 늘어져 있는 거 봤어. 아마 죽었을 거야. 죽어도 싼 놈이니까 더 생각할 것도 없어.”

“…….”

권세혁이 고개를 들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

“내가 죽여 주겠다고 했는데. 미안. 더 빨리 들어갔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밖에서 노닥거리느라 늦었어. 미안해… 나, 형한테 점수 따기는 틀렸다. 그치?”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고개 숙인 권세혁의 머리를 끌어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너 나한테 미안해할 이유 없어.”

“내가 있었으면, 함영재 새끼는 형 털끝 하나 못 건드렸을 거야.”

목소리에 분노가 역력했다.

“난 신해범처럼, 그렇게 바보같이 안 해…!”

“이제는 형이라고 안 부르냐?”

“안 불러! 그렇게 불러 줄 자격도 없는 인간이야!”

피로 물든 수건을 비틀어 짜던 류진이 고개를 돌렸다. 권세혁을 노려보았다.

“엉뚱한 데 화풀이하지 말랬지.”

“형은 내가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여?”

“그래.”

류진은 말을 멈추고 싶었다. 신해범을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마음도 모르는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누구한테 화가 나는지 천천히 생각해 봐.”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누가 잘잘못 따지자고 했어? 지금 그럴 상황이냐?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한 상황이었다.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찬물에 손을 씻었다.

언제 눈을 떴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일 힘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저 권세혁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명패를 집어 들었고, 남자의 후두부를 내리쳤다.

가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이 온통 피 칠갑이었다. 권세혁의 얼굴도, 류진의 두 손과 얼굴도 온통 붉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류진은 명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깨를 씨근거리며 밭은 숨을 쉬었다. 시체들 밑에 깔린 권세혁의 어깨를 붙잡고 질질 끌어냈다.

그는 피를 뒤집어쓴 얼굴로 실실 웃었다.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류진은 권세혁을 건물 화장실로 끌고 가며, 그가 정말로 미쳤을까 봐 두려워했다. 원수를 죽여 주겠다고 호기롭게 말하는 것과 실제 살인을 경험하는 건 달랐다.

오늘은 권세혁의 인생에 남을 역사적인 날이었다. 자기 손으로 저지른, 생애 첫 살인이었다.

류진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 질문했다.

“우리, 회관으로 가야겠지?”

“응.”

“…가자.”

류진은 병원으로 돌아갔다. 권세혁이 터벅터벅 따라왔다.

창고를 뒤져 보디 백 하나를 찾아냈다. 구석에 뭉쳐져 있어서 잔뜩 주름지고, 고무 냄새가 진동하며, 먼지를 흠뻑 뒤집어썼지만 구멍 뚫린 데 없이 멀쩡했다.

보디 백을 펼치자 먼지가 솟았다. 권세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윽.”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귀퉁이에 곰팡이까지 피었다. 하지만 류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숨을 참아 가며 서인섭의 시신을 수습했다. 어금니를 악문 권세혁이 다가와서 거들었다.

“이 사람, 형 어렸을 때를 기억하더라.”

“응.”

“형은 어때? 이 사람 기억나?”

“아니.”

“어렸을 때 여기 병원 다녔다며.”

“넌 네 탯줄 자른 의사 선생 기억하냐?”

권세혁이 입을 다물었다. 류진은 묵묵히 움직였다. 서인섭의 눈을 감겨 줄 때 그가 서지운 병장의 친척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죽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누나처럼. 할머니처럼.

“나 부모님 얼굴도 기억 못 해.”

류진은 덤덤하게 말했다.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응….”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서인섭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 사람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개새끼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류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온 세상을 불태워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신해범은 자신을 파괴하는 법밖에 몰랐다. 하루가 일 년 같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싫었다. 개방형 교도소에서 사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었다.

총통이 왜 자길 죽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권력의 끄트머리에 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문자는 대상자를 고립시킨다. 그가 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도록. 그건 몸과 마음을 동시에 부수는 일이었다. 총통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반역자들을 처벌했다. 죽은 자는 죽어서, 산 자는 살아서 고통받게 만들었다. 그 형벌의 이름은 연좌제였다.

예배당은 어두웠다. 전기가 끊긴 지 오래되었으니 당연했다. 신해범이 이곳을 고른 건 인가에서 멀고, 버려져서 방치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이며 문짝이 멀쩡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조금만 손보면 쓸 만한 건물이 왜 입때껏 방치되었는지는, 서지운이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에 류연비 가족이 다니던 교회였다. 류연비가 어린 시절 쳤다는 피아노 한번 만져 보겠다고 달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교회는 이전하고, 아예 류연비 문화관이라는 명패를 내걸고 전시장처럼 꾸며 놓았다.

서지운은 이곳의 소유주가 누군지는 몰라도 입장료와 기념품 장사로 제법 돈맛을 봤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철 장사였다. 문제의 스캔들 이후 함풍 2도는 급격히 쇠락했다. 개발 계획 취소와 지역 예산 삭제 등 신룡관의 정치적 보복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류연비 한 사람이 함풍 2도 전체를 관광 사업으로 먹여 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지몽매한 것들은 화살을 약자에게만 돌렸다.

“시, 시, 시, 신 준장, 이, 이, 이게 무슨!”

기우희의 단검이 남자의 목을 관통했다. 함현수가 동생이라고 부르던 남자였다. 친동생인지 아닌지, 호칭만 그렇게 부르는 사이인지는 알 바 아니었다. 연좌제는 융통성이 없는 법이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신해범은 M4 카빈에 소음기를 끼웠다. 애용하는 리볼버는 은밀하게 사람을 죽이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구조상 소음기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돌격 소총은 권총보다 살상력이 좋고, 정확성도 높았으며, 무엇보다 사정거리가 길었다. 일행 중 무기를 소지한 자가 있을 때 근거리 교전에 유리했다. 미리 숨겨 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었다.

매달리는 부인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젊은 남자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손가락 움직임 한 번으로 사람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로웠다. 드릴처럼 회전하는 총알이 남자의 후두부를 관통했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머리 반이 날아간 시체가 쓰러졌다.

“시, 신 준장!”

바깥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출입구를 봉쇄했다. 창문을 깨고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총알에 머리통이 으깨졌다.

신해범은 무표정하게 타깃을 조준했다. 함현수가 웃기게 생겼다고 비웃은 고글은 어둠 속에서도 시야가 확보되는 암시경이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이 잘 보인다는 뜻이다.

함현수는 신해범이 바로 옆에서 탄창을 장전해도 의심하지 않았다. 테러범이 이곳으로 쳐들어온다면 머리통을 날려 버리라고 주먹을 흔들며 응원하기까지 했다. 신해범은 사람 좋게 웃으며 예, 예, 했다. 기우희가 ‘여자가 군 생활하기 힘들지 않으냐’고 집적대던 남자의 경정맥을 끊어 버리기 전까지는.

이곳에 들어온 사람 중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함씨 성을 가진 전원의 명줄을 끊어 놓아야 했다. 오늘의 처형식이 개인의 복수가 되지 않으려면. 권주혁이나 최석준의 시선이 정류진에게 향하지 않게 하려면.

신해범은 눈을 부릅뜨고 처형식에 집중했다. 함풍 2도에서 5대째 살아왔다는 함현수는 자신의 가족이, 일가친척이 도륙당하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았다. 신해범이 회까닥 돌아 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피 끓는 부르짖음이 시작되었다. 죽일 놈, 썩을 놈, 악마 새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누가 이러라고 시켰느냐. 죽어서도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놈! 이 천하에 몹쓸 놈!

신해범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대원 둘이 함현수를 제압하고 그의 몸을 단단히 결박했다. 피를 토해 내며 저주를 퍼붓는 입은 구태여 막지 않았다. 그런 걸 두려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학살이 끝났다. 신해범은 용케 밖으로 나가서 죽은 사람들을 예배당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대원들을 지켜봤다.

“너를 씹어 먹고 말 것이다, 이 죽일 놈드으을!”

기우희가 고글을 벗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목청도 좋아.”

귀마개를 빼내 주머니에 넣은 그가 함현수에게 다가갔다. 아래를 향한 총구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철컥.

예배당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 대던 함현수는 제 이마에 총구가 닿자 재깍 입을 다물었다.

허으으, 허으으, 울음 섞인 숨소리가 거칠다.

기우희의 총신이 함현수의 목덜미로 향했다.

“좋은 거 있네.”

총신이 금목걸이를 잡아당겼다. 체인이 굵은 금목걸이였다. 못해도 10돈은 되어 보였다. 기우희가 미소를 머금었다.

“나 이거 가진다.”

함현수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기우희는 군화로 목걸이 고리를 비틀어 빼냈다. 이건 기념품이었다. 살인을 기념하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분증 따위보다 값나가는 패물을 챙기라고 조언한 사람이 바로 신해범이었다.

목걸이를 빼앗긴 함현수가 이를 득득 갈았다.

“이 개 같은 년! 죽일 년! 오살할 년!”

“너무 그러지 마쇼. 공짜로 받아 간다는 거 아니니까.”

기우희는 주머니를 뒤졌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기우희표 수제 폭탄 목걸이. 지마에 설치한 폭발물과 같은 재료로 만들었다.

발동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웃었다. 누르면 바로 터지는 영화적인 연출을 해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일 분 정도의 시차가 있었다. 시간 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더 세심한 기술력이 필요했다. 기우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신해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장님.”

처형식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 이 쳐 죽일 노오오옴…!”

함현수가 짖어 댔다. 듣다 못한 대원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마룻바닥에 처박았다.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대장님?”

신해범은 십자가 앞에 서 있었다. 피로 물든 십자가와 그곳에 매달린 남자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시체의 옷가지를 뒤지는 일은 전쟁터에서나 하는 줄 알았다. 류진은 최대한 시신과 닿지 않게 조심하며 죽은 남자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낡은 가죽 지갑과 빈 담뱃갑, 껌이 나왔다. 어깨 너머에서 권세혁이 물었다.

“뭐 해?”

“차 키.”

“운전하게?”

“그럼, 너 그 몸으로 걸어갈 수 있어?”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류진은 자기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몰랐다.

권세혁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지금 이 사태는 권세혁의 잘못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나 몰라라 혼자서 도망가지 않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상식적으로 그래야 했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누그러들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권세혁이 대꾸했다.

“알았어. 기다릴게.”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다.

“너도 참 미련하다.”

반대쪽 주머니에서도 차 키를 찾지 못한 류진이 말했다.

“그냥 도망이나 가지. 너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싸워, 싸우길? 겁도 없이. 내가 못 일어났으면 어떡할 뻔했어.”

“…….”

“너 진짜 죽을 뻔했어. 알아?”

류진은 권세혁을 등지고 말했다.

“깡패가 괜히 깡패냐. 무식하고 겁대가리 없으니까 깡패지. 대장님 얘기 못 들었어? 여기선 지들이 왕이야. 옛날부터 그래 와서 물불 가리는 게 없어. 무서운 게 없다고.”

차 키는 남자의 셔츠 앞 주머니에서 나왔다.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시체를 뒤집은 순간 류진은 기절할 뻔했다.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믿을 수가 없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권세혁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그 새끼가 자기 입으로 말했어. 자기네는 신룡관 어르신과 한솥밥 먹는 식구라고.”

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함영재 집안의 뒷배가 권주혁의 측근인 최석준 전 정무국장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놀랄 거리도 못 되었다. 좁아터진 세상에 나쁜 놈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류진은 차 키를 신문지로 벅벅 문질러 죽은 남자의 피를 닦았다.

“내가 왕자가 아니라 총통이었어도 그랬을까?”

고개를 든 권세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 나이가 좀 더 많았으면? 지금 신해범 정도로.”

“헛소리하지 말고 일어나. 가게.”

권세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최석준이 상납금을 올렸다고 했어. 기존의 세 배나.”

깡패들의 습격은 그 일에 대한 보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영재의 행방을 찾는 건 구실일 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잖아.”

류진이 권세혁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잔뜩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됐어. 생각하지 마. 지금 그런 생각 하면 네 머리만 아파.”

“형.”

권세혁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형을 괴롭힌 놈들이랑 한패일까?”

“뭐?”

“생각해 보니까 그래. 최석준, 숙부님이랑 엄청 가까운 사이야. 그 인간이 깡패들한테 걷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겠어. 숙부, 나한테 돈 엄청 썼어. 여기저기 행사 다니고, 방송 나가고, 그럴 때마다 드는 경비가 다 어디서 나왔겠냐고.”

최석준의 부수입이 권세혁 자신의 이름 알리기에 쓰였다면. 그렇다면 함영재의 ‘아우’들이 분노하는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배신감.

물론 권세혁은 그들이 느끼는 분노에 관심 없었다. 그러나 최석준의 부수입이, 깡패들의 상납금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진이나 서인섭 같은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 낸 결과였다.

권세혁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형을 괴롭힌 사람이야? 그래?”

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권세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 아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일어나기나 해.”

“근데 왜 나한테 화내?”

“내가 언제?”

“화내고 있잖아. 아까부터 계속. 쌀쌀맞게 말하면서 나 쳐다보지도 않잖아…!”

“야, 그건!”

류진은 한숨을 쉬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건 내가… 아니 네가. 혹시라도 네가 잘못됐으면 어쩌나 싶어서.”

말하면서 깨달았다. 깨닫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류진은 망연자실했다. 내가 권세혁을 걱정한다니.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갈색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기어코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이 시작이었다.

“형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내가 가만있었어야 했냐고.”

권세혁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무릎에 이마를 찧어 대면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흐느꼈다.

류진은 아연했다. 권세혁은 오른팔의 상처를 수습할 때에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다 자기 잘못이라는 둥, 형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라는 둥 본인이 모든 책임을 다 지겠다는 듯이 굴었다. 그랬던 권세혁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나 억울해. 씨발, 진짜 좆나 억울해….”

류진은 도로 쭈그려 앉았다. 흐느끼는 권세혁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뭐가.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억울해… 억울하다고….”

“형한테 말해 봐. 말을 해 줘야 알지.”

“억울해에… 허엉… 나 진짜 억울해….”

권세혁은 하늘을 보며 울었다. 긴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통곡했다.

“내가 왜 나쁜 놈이 되냐고. 내가 왜, 내가 왜! 난 형한테 잘해 주고 싶은 거밖에 없는데. 좋아하는데. 진짜, 진짜 많이 좋아하는데….”

“그래 알아. 네 마음 알아.”

류진의 한숨이 깊었다.

“누가 너한테 나쁜 놈이래? 내가 언제 그랬어? 아니잖아. 왜 혼자 상상해서 울고 그래, 바보같이. 그만해. 그만하고 눈물 뚝 그쳐….”

말하는데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그만 울라니까….”

그렇게 말하는 류진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빌어먹을, 쪽팔리게.

신경질적으로 눈 밑을 문질러 닦았다. 손등이 축축했다. 몇 번을 닦아도 그대로였다. 류진은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한 놈은 하늘을 보고, 한 놈은 땅을 보고 우는 광경이 처절하기보다는 우스웠다. 그래서 웃었다.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울다가 웃다가 했다. 이게 무슨 코미디인가 싶었다.

누나에게는 미안하고, 신해범에게는 비웃음 실컷 살 것 같고, 그랬다. 역시 자기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질 않는다고 뻐길 신해범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류진은 바닥에 뒹구는 신문지를 찢어 코를 팽! 풀었다. 울고 나니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야, 권세혁.”

“억울하다고… 나 진짜 억울하다고….”

“로봇이냐? 뭘 자꾸 억울하다고 앵앵거려.”

“어,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오….”

“너 진짜 그렇게 억울하냐?”

“억울해. 억울해.”

“멍청한 새끼. 내가 너를 함가 놈이랑 한패라고 생각했으면, 그럼 애초에 너하고 친구를 했겠냐?”

권세혁의 통곡이 멎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류진을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 안 미워해?”

“진짜 부탁이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그러라고 달린 대가리 아니냐.”

권세혁이 훌쩍였다. 류진은 손에 쥔 신문지를 뜯어 나눠 주었다.

“받아. 휴지 대용으로 쓸 만해.”

코를 풀고 눈물을 훔친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 미워하지 마. 형.”

“그래.”

“난 진짜 착한 애야…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야.”

“그래. 알아. 너 착해.”

류진은 권세혁에게 다가갔다. 한 손으로는 그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넌 착해.”

그래서 문제였다. 권세혁은 착한 놈이었다. 착한 사람은 이용당하고, 분풀이당하고, 빼앗기는 세상이었다.

“넌 착한 애야.”

“진짜?”

“그래. 진짜. 그러니까 이제 좀 일어나. 정신 차리고. 저 가방… 우리 같이 옮겨야 해.”

보디 백을 나누어 들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가며 류진은 앞으로 권세혁이 빼앗기게 될 것들을, 그가 쏟을 눈물의 총량을 생각했다.

“나 혼자서 업어도 되는데.”

“너 팔 다쳐서 안 돼.”

“진짜 괜찮은데… 형이 더 아프잖아.”

“안 아파. 발밑이나 조심해.”

“그런데 형, 운전할 수 있겠어?”

“초보 운전 무시하냐? 그래도 팔 다친 너보다는 내가 나아.”

회색 봉고차 앞에서 류진은 숨을 골랐다. 승용차나 지프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다가 그나마 트럭이 아닌 데 감사하기로 했다.

보디 백을 뒷좌석에 실은 권세혁이 조수석에 탑승했다. 류진은 시동을 걸었다. 권세혁이 재차 물었다.

“진짜 운전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출발하는 순간 차체가 덜컹, 했다. 등받이에 몸을 딱 붙인 권세혁이 왼손으로 안전벨트를 움켜쥐었다. 꿀꺽.

“야. 괜찮거든?!”

“아, 알아. 아는데, 음, 그냥, 그래도 내가 한 손으로 운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그런 생각 집어치워. 회관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자.”

권세혁은 잠들지 않았다. 진통제 기운에 눈이 감겼지만 허벅지를 때려 가며 졸음을 참았다. 핸들을 껴안다시피 해서 운전하는 류진은 불안하고, 귀엽고… 귀여웠다. 권세혁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삶이 팍팍할수록 종교가 득세한다. 신은 인간의 나약함을 노리니까. 열 개의 종교 중 아홉이 첫해에 망해도, 열 개의 예언 중 아홉이 틀려도, 살아남은 하나의 종교와 들어맞은 한 개의 예언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믿음으로 남아 심장에 뿌리를 내린다.

백조교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종교는 아니었다. 이전부터 국민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져 있던 민간 신앙이었다. 구미호를 숭배하고 어린아이를 죽이는 인신 공양 풍습을 정당화하는 명백한 사이비 이단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도시 괴담 수준의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권일혁의 집권 이후,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나빠짐에 따라 백조교 신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백조교는 교세를 빠르게 확장했다. 조직의 체계와 서열이 정립되고, 각 지역에 지부가 창설되었다. 심지어 신룡관이 있는 직할시에도 비밀 지부가 존재했다.

당시 교주는 60대의 미혼 여성으로, 이름은 홍유화였다. 그는 자신이 태조(太祖) 권정호의 피를 이은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근거 없는 낭설이요, 조금만 자세히 살펴봐도 허점투성이인 거짓말이었으나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믿었다.

신자들은 홍유화를 유일신으로 추대했다. 진짜 신에게 나라를 되돌려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촌구석의 까막눈 필부들까지도 글을 배워 백조교의 혁명 선언문을 읽을 정도였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던 홍유화는 정작 신도들이 내는 헌금 액수에 따라 불로장생, 부귀영화, 면죄를 차등 적용했다. 교단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신의 명령’을 받았다며 공공시설이나 광장에 무차별 테러를 일삼았다. 신도들을 합동 결혼시킨 뒤 출산의 의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행은 배교자로 낙인찍혀 가족을 잃은 한 내부 고발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홍유화는 자신의 친위대를 조직하여 데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백조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교주의 명령에 불복하는 신도들을 살해함으로써 본보기를 보였다.

고발자는 그간 ‘묻지 마 테러’로 수사가 종결된 몇몇 사건들의 배후가 백조교라는 사실도 밝혔다. 그간 벼르던 권일혁의 머리꼭지가 돌아 버렸다. 그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당시에는 혁명 선언문이라고 불리던 백조교의 삐라를 갈기갈기 물어뜯었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핏발 선 눈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았다지.

그때의 권일혁과 지금 함현수의 눈은 얼마나 비슷할까?

신해범은 기우희가 넘겨준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권일혁 총통은 희생자의 목에 화약을 거는 방식을 선호했다. 머리가 깨끗하게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교수형, 참수형은 집행자의 실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은 이상 지저분하게 끝나기 십상이었다. 목뼈가 단숨에 부러지지 않아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거나, 깨끗하게 베이지 않거나.

과거에 신해범은 죽은 아버지의 목 절단면이 깨끗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고통 없이 한 번에 갔다는 뜻이니까.

신해범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매달린 예수의 얼굴로 연기를 뿜었다.

나는 당신 안 믿어.

독재 국가에도 종교의 자유는 있었다. 그 교리가 괴이할 뿐. 이 나라에서 세계 각국의 모든 종교는 권씨 왕가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데 합당한 이유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성모 마리아도, 예수도, 알라도, 부처도 권정호의 후손들을 신의 목소리로 인정했다네.

신해범은 궁금했다. 권일혁 총통은 백조교가 사이비였기 때문에 혐오했을까? 홍유화가 왕가의 후손을 사칭해서가 아닐까?

만약 백조교가 권일혁 총통을 추앙하면서 반사회적,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면 총통은 그들을 탄압했을까?

글쎄.

권일혁 총통이라면 홍유화를 끌어들여 ‘철혈일성’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비 교주는 독재자만큼이나 사악하니까.

신해범은 피로 물든 십자가를 등지고 함현수에게 걸어갔다.

“이노옴….”

핏발 선 눈이 흉흉했다. 신해범은 피식 웃었다.

“흥청망청 즐길 땐 좋았지.”

함현수가 턱을 떨며 뭐라고 외쳤다. 앞니가 깨지고 입 안에 피가 차서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래도 함영재라는 이름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해범은 속으로 비웃었다. 왜 함현수는 자기 아들이 복수할 거라고 생각할까? 우리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 비자금 통장까지 마련해 줬을 만큼, 내가 멀리 떠나서 다 잊고 살길 바랐는데.

“여기로 올 때.”

회색 연기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회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나 몰라라 했지. 나랑 내 가족들만 무사하면 그만이니까.”

함현수의 모습에 하성록이 겹쳐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아들의 손목만을 잡아끌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찌나 급했는지 캐리어 바퀴에서 불꽃이 다 튀었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신해범은 쭈그려 앉은 채 어깨를 떨며 키득거렸다. 생각할수록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한 번쯤 돌아보지 그랬어. 그럼 눈치챌 수도 있었잖아.”

충격으로 열린 지마 트렁크에 함영재의 시신이 있었다. 회관 주변에 그의 BMW도 주차되어 있었다. 조금만 주변을 살폈더라면, 이곳의 책임자로서 조금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정신머리가 박혀 있었더라면 ‘신 준장 같은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 따위의 개소리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놈이이이이!”

함현수가 몸부림쳤다. 자식 잃은 부모의 발악은 생각보다 격렬해서, 그를 붙잡았던 건장한 대원 둘이 뒤로 나자빠졌다.

함현수는 곧장 신해범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지만 팔이 묶여, 자유로운 건 머리뿐이었다. 박치기. 신해범은 안면을 가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아비가 자식보다 낫소.”

폭탄 목걸이를 휘날리며 함현수가 날아갔다. 피 묻은 주먹을 좌우로 꺾은 기우희가 대원들에게 일갈했다.

“니들 죽을 준비해라.”

혼비백산한 대원들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신해범은 바닥에 철퍼덕 앉은 채 웃었다. 기우희가 일으켜 준 다음에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머리를 잘못 맞아 사람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을 때쯤 신해범이 웃음을 뚝 그쳤다.

“왔어?”

그가 한 손을 들었다. 기우희는 신해범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쿨쿨 잘 줄 알았는데. 우리 정 이병 생각보다 회복력이 좋아. 아니면 내 생각보다 복수 의지가 뚜렷했나?”

정신력이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가 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식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복수가 남의 손에서 끝나 버린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을 때.

신해범은 예배당 문짝에 매달리다시피 기대선 류진을 바라보았다.

봉고차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지만, 류진은 태어나 자란 동네의 지리를 기억했다. 어디 긁어도 상관없으니 사람만 안 치면 된다는 생각도 초보 운전자에게 용기를 부여했다. 류진은 10시, 2시 방향으로 핸들을 움켜잡은 채 눈을 부릅뜨고 운전했다.

클럽에서 회관까지는 차로 금방이었다. 길도 막히지 않았다. 비록 좁고 험하고 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인 데다 낡은 봉고차에서는 덜덜거리는 소리까지 났지만, 류진은 용기를 내 액셀을 밟았다.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권세혁이 차창을 올렸다.

“형,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

“뭐?”

류진은 갓길에 정차했다. 송풍구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고무 타는 냄새는 타이어와 팬 벨트, 가죽 타는 냄새는 브레이크 이상이라고 배웠다.

“괜찮은데, 왜?”

“아니 밖에서. …뭐 타는 냄새 나는데.”

권세혁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여기서도 화전을 하나 보네. 어째 우리는 가는 곳마다….”

“화전?”

류진은 핸들을 잡은 채 창밖을 보았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미처 몰랐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여럿이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데 어찌나 급한지, 정차 중인 봉고에 부딪히고도 그냥 내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저 잠시만요!”

류진은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 있습니까?”

“불났답니다. 큰불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자가 말했다. 그도 아직 자세한 상황은 모르는지, 연신 불이 났다는 소리만 되풀이했다. 조수석의 권세혁이 끼어들었다.

“어디요?”

“문화 회관요.”

남자는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류진의 손을 뿌리쳤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모양새가 위태위태했다.

“문화 회관이면….”

류진이 아는 한, 이곳에서 문화 회관이라고 불리는 장소는 한 군데였다.

액셀을 힘껏 밟았다. 시속 160km부터 180km까지 넘나들었다. 초보 운전자가 낡은 봉고차로, 사람 많은 길에서.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류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신해범이 문화 회관에 있을 것이다.

“형, 형! 너무 빨라. 너무 빠르다고!”

류진은 클럽 화장실에서 본 신해범의 싸늘한 옆얼굴을 기억했다. 함영재를 죽여 달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그때 류진은 진심이었다. 함영재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만 있다면 추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상관없었다.

안전 바를 움켜쥔 권세혁이 소리쳤다.

“속도 줄여! 이러다 사고 나!”

들리지 않았다. 봉고차는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뭐든 밀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질주했다. 핸들을 움켜잡은 두 손이 얼얼했다.

“류진이 형!”

문화 회관이 보였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붕이 꺼지고 서까래가 무너져 불씨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새카맣게 탄 벽돌이 땅바닥에 뒹굴었다.

소방 구조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민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화재를 진압하려 했으나, 좀처럼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폭발이었다. <백사자> 시절 여러 종류의 폭발물을 접해 본 류진은 알았다.

“으아아악!”

권세혁이 비명을 내질렀다. 땅바닥에 타이어가 죽 미끄러졌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차를 피했다.

류진은 핸들에 얼굴을 박았다. 봉고차는 목표 지점에서 반 바퀴 회전한 뒤에야 간신히 멈췄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 권세혁이 외쳤다.

“형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했어?!”

핸들에 얼굴을 박은 채, 류진은 킥킥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예전 일 생각난다.”

“뭐?”

“네가 나 칠 뻔했잖아. 호월루 근처에서.”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그때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어서.”

권세혁은 대꾸하지 못하고 류진만 바라보았다. 귀신이라도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류진은 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모래를 뿌려도 안에서부터 둥근 불 폭탄이 터져 나왔다.

이건 화전이 아니었다. 담뱃불이나 애들 장난이 대형 화재로 번진 참사도 아니었다. 의도적인 폭발 테러였다.

류진은 저 불길 안에서 신해범이 걸어 나오는 환상을 보았다. 환청까지 들렸다. 테러는 이렇게 하는 거란다, 애송아.

“류진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재경이었다.

“형!”

류진은 성재경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는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불의 냄새였다.

큰 손바닥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열외라며.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다른 사람들… 대장님은?”

“대장님, 소령님 두 분 다 올라가셨다.”

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재경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중요한 일이란 거 알아. 하지만 넌 지금 열외 상태야. 왕자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못 간다고?”

“무슨 뜻인지 알아서 다행이다.”

성재경은 진압 차량과 기대마를 마을 어귀에 옮겨 두었다며, 그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나더러 그냥 차에서 대기하라고?”

“넌 오늘 작전에서 열외됐어. 다른 명령은 받은 적 없다.”

성재경의 손아귀 힘이 세졌다. 말을 듣지 않으면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는 표정이었다. 류진은 멍하니 성재경을 응시했다.

“형, 이러지 마.”

“류진아.”

“오늘 나한테 중요한 일이야. 형도 알잖아.”

“류진아….”

“나 갈래. 가서, 그 새끼 어떻게 죽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래.”

“그래 알아. 아는데, 대장님이 직접 널 열외시켰어.”

성재경이 전에 없이 강한 힘으로 류진을 잡아끌었다. 언제나 사람 좋게 웃던 얼굴이 냉정했다.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군인에게 상명하복은 절대적이었다. 전쟁 상황, 작전 중에 불복한다면 뒷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군사 재판이나 받으면 다행이겠다. 불복종은 그 자리에서 총살당해도 할 말 없었다.

“미안하다.”

성재경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은 나쁜 놈이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류진이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형, 형! 싫어. 나 안 가. 못 가! 이거 놔줘!”

“류진아, 내 말 좀 들어!”

말하는데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성재경의 머리 위로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성재경 중사.”

권세혁이었다. 성재경은 고귀한 ‘왕자님’이 딱 한 번 소개한 자기 이름을 기억한다는 데 놀랐다. 저렇게 묵직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지금 누굴 억지로 끌고 가는 거야.”

“왕자님, 이건.”

말하는데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성재경은 코를 싸쥐었다.

“대장님 명령입니다. 정류진 이병과 왕자님은 이번 작전에서 열외입니다.”

기가 막히는군. 권세혁이 비웃었다.

“누가 누굴 열외 시킨다고?”

성재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지엄한 군법에도 예외는 있었다. 국가 원수나, 그에 준하는 결정권자가 개입하는 경우였다.

류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땀을 비 오듯 흘렸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길이었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산길이었다. 함현수를 둘러업고 온 신해범은 알았다. 아무리 혼자라고 해도 뛰어 올라오기 쉽지 않은 길이라고.

함영재에게 두들겨 맞아 아픈 몸으로 용케 여기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왔다는 생각을 하니 감격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신해범은 두 팔 벌려 류진을 환영했다.

“어서 와.”

류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피범벅 십자가를 등지고 서 있는 신해범은 사탄 같기도, 타락한 신부 같기도 했다.

홀린 듯 한 걸음 다가갔다. 깨진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신해범의 얼굴을 비췄다. 흰 얼굴에 튄 핏방울이 문신 같았다. 곳곳에서 진동하는 화약 냄새, 피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넘어 신해범에게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몸이 삐거덕거렸지만 류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와 만나고 싶었다. 신해범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 일념 하나로 미친 듯이 뛰어올라 왔다. 권세혁과 성재경의 부름도 무시했다. 머릿속이 신해범으로 꽉 차 버렸다. 함영재를 종잇장 찢어발기듯이 날려 버리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신해범은 함풍 2도에 직접적인 원한이 없었다. 함영재는 류진의 원수였지, 신해범의 주적이 아니었다.

끽해야 두들겨 패고 겁이나 줄 거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따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 지금, 류진의 눈앞에서, 지옥의 한가운데 선 신해범이 증명해 주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발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몸은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친 부하를 대장이 걱정하는 게 뭐가 문제야?”

“기대하게 하잖아.”

신해범은 자꾸만 류진을 기대하게 했다. 풍기 교육대 사람들과 동지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자기만 눈 딱 감고 신해범을 용서하면 그토록 갈구했던 동료와 친구들이 생긴다고 믿게 했다. 그가 신해준이라는 사실도 빌어먹을 여지를 남기게 만들었다.

“그건 네가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야.”

나를 봐. 신해범이 말했다.

“내가 한 일을 봐. 이런 짓을 하고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만큼 뻔뻔해져야 해.”

“…….”

“너 지금 나한테 고맙지?”

“…….”

“솔직하게 말해 봐.”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해범이 싱글싱글 웃었다.

“함영재한테 넌 좆 밥이었지. 나한텐 아니었고. 그 새끼 지금 어디 있게? 문화 회관 쑥대밭으로 만든 차 트렁크에 있어. 머리털 한 올 안 튀어나오게 꽉꽉 눌러 담아서 돌진시켰다. 밑에서 활활 잘 타고 있지? 시체 화장하는 일에도 돈 드는데 잘됐네. 그렇지 않냐?”

“…….”

“여기 죽어 나자빠진 사람들도 말이야. 너였으면 분명 해내지 못했을 거야. 왜냐면 넌 마음이 약하니까. 바짓가랑이 잡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봐줬을 거라고.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말이야. 안 그래? 내 말이 틀려?”

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해범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 분했다.

“하지만 난 그런 실수 안 해.”

류진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고맙다! 아주 고마워서 미치겠다, 이 개새끼야!”

신해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피와 철 냄새가 진동하는 손으로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면 안 돼.”

“뭐라고?”

“아쉬워해야지. 원망해야지. 내 일인데 왜 당신이 빼앗아 가, 하고 분해해야지.”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너였으면 그럴 거야.”

“난 당신이랑 달라.”

“우린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어.”

류진은 손을 뻗어 신해범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는 웃으면서 순순히 끌려왔다.

“난 당신이랑 똑같아지지 않을 거야.”

목이 메었다. 속에서 뜨겁고 몽글몽글한 덩어리가 치밀었다.

“나, 나,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고….”

“왜 이렇게 떨고 그러냐. 마음 아프게.”

“그런 말 좀 하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날 헷갈리게 하지 마!”

류진은 신해범이 싫었다. 증오스럽고 미웠다. 그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저주의 인형을 만들어 사흘 밤낮 난도질을 해도 모자랐다.

하지만 신해범은 자길 괴롭힌 것만큼이나 처절하게 복수해 주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멱살을 흔들었다. 그가 흔들리기를 원했다.

“당신은 내가, 내가…!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몰라.”

류진은 노력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신해범에게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려고. 그가 이따금 보여 주는 인간적인 모습에 정 붙이지 않으려고. 증오하는 마음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이건 누구보다 신해범이 바라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학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게 아닌가. 자기가 ‘이쯤 되면 살 만하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그런데 이상했다.

신해범은 유머 감각이라는 핑계로 자꾸만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웃고 떠들고, 선물을 주고 음식을 만들어 줬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 어느 쪽이 본심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나쁜 머리로는 도저히 추론이 불가능해서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랬건만 재미란다. 자기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지 말란다. 그건 그냥, 그냥….

류진이 절규했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소리잖아!”

사람을 바보 취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말이었다.

“난 바보 아냐. 못 배운 거 인정하고, 생각 짧은 거 다 인정하는데,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진 않아! 나 닭대가리 아냐!”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신해범 앞에서는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주장의 근거를 들어 가면서, 빈틈없는 논리로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들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 번만….”

류진은 신해범이 무서웠다.

“딱 한 번만 더 물어볼게.”

무서운 만큼 증오했다.

“나한테 안 미안해?”

증오심의 부피만큼 신해범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지.

분노는 인간을 행동하게 만들지만, 분노만으로는 이토록 오랜 시간 질주하기 어려웠다. 인간은 증오심만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글쎄….”

바카디를 병째 들고 마시는 것 같았다. 목구멍이 홧홧하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느낌.

류진은 신해범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전쟁의 냄새가 났다.

“…뭐라고 말할까.”

피와 철의 냄새를 풍기는 신해범이 말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네가 그 머저리 같은 질문을 관둘까.”

“함영재 왜 죽였어?”

“네가 빽빽 울어 댔잖아. 그 새끼 안 죽이면 네가 날 죽일 것 같더라.”

신해범이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쓸었다.

“여기 온 거… 함영재 죽인 거. 이 사람들 다 죽인 거. 애초에 이런 계획 세운 거, 나한테 미안해서,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아니야?”

“군인이 사적인 감정 가지고 일하면 곤란한데. 나 이래 봬도 프로페셔널이야.”

가면이 이기죽댔다. 류진은 주먹으로 신해범의 가슴을 쳤다. 그에게는 별반 타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고 싶었다. 견고한 가면을 한 꺼풀이라도 벗겨 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나한테 미안한 마음 없냐고!”

“없어.”

명쾌해서 잔인한 대답이었다. 권세혁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자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하고 말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이게 신해범이 주장하는 진짜 자신의 모습이었다.

“없다고 입이 닳아지게 말하잖아. 이 닭대가리야.”

강한 힘이 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류진의 가슴팍에 신해범의 주먹이 닿았다. 쿵. 가벼운 마찰이었지만, 심장을 해머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신해범이 주먹을 펼쳤다. 류진은 그가 쥐고 있던 물건을 보았다.

“기왕 왔으니, 마무리나 하고 가라.”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리모컨에는 빨간색 플라스틱 버튼이 붙어 있었다.

“마무리?”

“저거.”

신해범은 바닥을 기고 있는 핏덩이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두 팔이 뒤로 묶인 함현수가 마룻바닥을 벌레처럼 기었다. 그의 목에 걸린 폭발 장치가 바닥에 부딪혔다.

신해범이 류진의 뒤로 돌아가 한 팔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건 전통적인 처형 방식이야. 구식이지만 확실하고, 의미가 분명하지.”

“무슨 의미?”

“내부 숙청. 권세혁 왕자는 함풍 2도의 토착 조폭들과 관계한 최석준 전 정무국장을 자기 군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포.”

기계를 든 류진의 손을 신해범의 큰 손바닥이 감쌌다. 빨간 버튼에 두 사람의 엄지손가락이 겹쳐졌다. 신해범이 힘을 줬다.

“눌러.”

화살 같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류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은 이내 전신을 휘감았다.

이상했다. 함현수는 죽이고 싶은 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여도 연민 한 톨 느껴지지 않을 인간이었다. 모든 판이 완성됐고,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신해범이 손에 쥐여 준 기회였다. 그런데 왜… 나는 망설이고 있지.

“아!”

숨이 턱 막혔다. 신해범의 이가 귓바퀴를 씹었다.

“아파, 하지 마.”

“버튼 누르라고.”

“이걸 하면.”

류진이 고개를 돌려 신해범을 봤다.

“내가 이걸 하면, 권세혁한테 문제 생겨?”

“적이 생겨.”

사실은 이미 생겼다고 봐야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니.

류진은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아득했다. 뿌예졌다가 뚜렷해졌다가, 기우뚱 기울어졌다가 완전히 뒤집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현기증 때문에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신해범이 지탱했다. 류진은 그의 강한 두 팔에 기댔다.

“권세혁은… 걔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권세혁은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지금은….

‘형, 나, 사람 죽였어.’

류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걔는 정말 착한 애야….”

그래서 문제였다.

‘형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죄책감도 느끼지 마.’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에서 권세혁은 무너졌다. 출혈이 심해 얼굴이 창백했다. 권세혁을 부축한 성재경이 류진을 불렀다. 돌아오라는 소리였다.

그건 성재경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권세혁의 바람이기도 했다. 돌아오라고.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말라고.

나를 버리고 신해범에게 가지 말라고.

버리고 올라왔다. 올라가는 길인데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땅을 박차고 달리는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류진이 자신을 목 졸라 가며 올라온 길 끝에, 신해범이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셨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누구도 완전하게 미워하지 못할까.

신해범의 눈을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권세혁의 외로움에 동화되지 말았어야 했다. 분노에 삼켜지는 게 두려워 한 발짝 두 발짝 물러났던 것이 결국은 이렇게 됐다.

상처받는 게 싫은 만큼, 남에게 상처 주는 것도 무서웠다.

“네가 왜 망설이는지 알아.”

신해범이 속삭였다.

“나처럼 되기 싫다 했지. 그래도 이만큼 왔으면, 이만큼 했으면 좀 알아들어. 너 이렇게 살면 안 돼. 권주혁 오나홀로 인생 마감하기 싫으면 정신 차려. 마음 독하게 먹으란 말이야. 처음만 어렵지 나중엔 괜찮아져!”

신해범에게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처음에만 어렵지, 나중에는 괜찮아져. 그 말로 자꾸만 일어나려는 신해준을 때려눕혀 왔다.

“쉬운 일 아니란 거 안다.”

신해준을 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형체가 없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총질이나 칼질로 해치울 수 없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장담컨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해냈으니 너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무지막지한 논리가 아니었다.

신해범은 류진을 믿었다. 정류진은 신해준보다 강했다. 그러니 장차 어떻게 성장할지 알 만했다. 아끼는 컬렉션 전부 걸고 장담하는데, 서른셋의 정류진은 서른셋의 신해범보다 강할 것이다.

손가락에서 뚝 소리가 났다. 발동 버튼이 눌렸다.

“잘했어.”

신해범은 류진의 관자놀이에 키스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대피할 시간은 육십 초에 불과했다. 기우희를 비롯한 대원들이 무기를 챙겨 들고 일사불란하게 철수했다.

“대장님!”

“응, 가.”

와락 울음을 토해 내는 류진의 귀에 대고, 신해범은 위로하듯 망자의 전언을 흘려 넣었다.

“신해준은 너한테 잘못했대.”

예배당 밖으로 몸을 날렸다. 흙먼지가 날려 시야가 자욱했다. 신해범은 자기 몸의 모든 면적을 이용해 류진을 덮었다. 흐느끼는 얼굴 앞에 손목시계를 보여 주었다. 초침이 무섭게 움직였다.

“귀 막아.”

밝은 빛이 터졌다. 굉음이 세상을 흔들었다. 예배당의 깨진 창문 밖으로 불길이 치솟았다가 이내 안으로 수그러들었다. 새카만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죄 많은 인간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머릿속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신해범이 침을 삼키라고 말해 주었다.

“소리가 커서 그래.”

“이건 언제 익숙해져?”

“글쎄다. 이건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니라서.”

류진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팔꿈치로 신해범의 옆구리를 쳤다.

“아야. 왜?”

“무거워.”

“응?”

“무거우니까 비키라고!”

“아, 그래.”

신해범은 순순히 비켰다.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은 그가 두 손을 탁탁 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류진이 말했다.

“당신도 모르는 게 있어.”

“그래? 뭘까? 들으나 마나 닭 우는 소리일 것 같은데?”

“당신의 전부가 분노는 아닐 거야.”

바람이 불었다. 불씨가 날렸다. 신해범을 노려보는 류진의 얼굴 위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비였다.

달을 가린 먹구름이,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응? 뭐라고? 안 들려.”

신해범은 귀를 후볐다. 아무것도 나온 게 없는데도 귀지를 털어 내는 양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진지하게 듣지 않는 척하려고.

유치하긴!

류진은 바닥의 모래를 그러쥐고 신해범을 향해 뿌렸다.

“똑바로 들어!”

“어휴 알았다, 알았어. 네가 대장 해라.”

신해범이 두 손을 들고 항복 제스처를 취했다. 백기 하나만 쥐여 주면 딱이었다. 류진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왜? 이걸로 안 돼? 아주 그냥 무릎이라도 팍 꿇을까?”

“지금 장난쳐?”

“아니? 나 지금 진지해.”

류진은 또다시 모래를 움켜쥐었다. 아까보다 많은 양을, 정확히 신해범의 얼굴을 겨냥해서 뿌렸다.

“으악! 야!”

고른 이를 내보이며 웃던 신해범이 모래를 먹고 나뒹굴었다. 류진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신해범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 쓰러뜨렸다.

“당신은, 사실은, 세상 누구보다 신해준을 사랑해.”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신해범이 비웃을 틈을 주지 않으려고.

“사람은 분노만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거든. 당신 마음속에는 죽은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있어. 당신은 예나 누나를 걱정하고, 부하들을 아끼고, 그리고 사실은 신해준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해.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지. 그래서 멈출 수가 없는 거야. 여기서 멈추면 진짜 미안해지니까. 죄책감에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미치지 않으려면 유머 감각을 키워야 한다는 말. 신해범은 자신의 장난질이 본심을 감추기 위한 눈속임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고백했다.

신해범이 웃으려 했다. 뭐라고 말하려 했다. 류진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흐… 하하.”

“그리고 당신은 날 좋아해.”

“이제 알았어?”

“장난이 아니야! 당신은 진심으로 날 좋아해. 사실은 내 손에 죽고 싶지도 않아. 당신은 말이야, 설계자니 뭐니 하면서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사실 그냥 다 개소리야.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사실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 용서를 빌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무너질 것 같으니까. 나한테 무너지면, 신해준도 다시 돌아오니까. 당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벌어지니까.”

신해범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에 모래가 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류진은 그의 본심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 신해범은 눈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긴다. 가면에도 눈구멍은 뚫려 있었다.

류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랬어.”

“…….”

“속을 뻔했잖아.”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약한 건 내가 아니었다. 진짜로 약한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용서를 빌 용기가 없어서 같은 자리에서 맴맴 돌고, 필사적으로 이 얘기 저 얘기 갖다 붙이고, 그렇게 연기할 거였으면 완벽하게라도 하든가. 진심을 고스란히 내보이면서 일일이 의미 부여하지 말란다. 기가 막혀서. 사람이 얼마나 만만했으면. 나를 얼마나 닭대가리 멍청이로 봤으면….

“한심한 놈.”

“큭.”

신해범이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찐따 새끼.”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입술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가 뱉어 내는 허탈한 웃음을 씹어 삼키고 싶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피와 쇠 냄새가 씻겨 나갔다. 류진은 달려온 풍기대원에게 양팔을 붙들렸다. 발버둥을 쳤지만, 맥없이 질질 끌려갔다.

류진은 기우희 앞에 세워졌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하극상.”

“소령님….”

“이 꽉 물어라.”

폭탄 같은 주먹이 왼뺨을 강타했다. 목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얼굴뼈가 함몰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펀치였다. 류진을 붙잡고 있던 대원까지 휘청거릴 정도였다. 기우희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서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사람들 보는 데서는.”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예….”

신해범은 여전히 땅바닥에 뻗었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장대비도 그의 처절한 웃음을 감추지는 못했다.

류진이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 준 대원이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 소령님 아니었으면 너 우리한테 뒈졌어.”

“죄송합니다.”

“웃냐? 웃어? 미친 새끼야, 지금 웃음이 나와?”

류진은 자기가 웃는다는 사실을 지금 알았다. 대원의 사나운 목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말단 주제에 대장의 멱살을 잡아 깔아뭉개고, 목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얻어맞은 놈이 헤실헤실 웃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 하하.”

뭐야 이 새끼? 진짜 돌았나?

“아하! 아하하하하! 아하하!”

대원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류진은 고개를 쳐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온몸을 푹 적셨다. 인생 최초의 쾌감이 척추를 강타했다. 내가 이겼다.

내가 신해범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신경 안정제를 씹어서 삼켰다. 약 기운이 빨리 돌게 하려고.

“왕자님.”

성재경이 생수를 내밀었지만, 권세혁은 받지 않았다. 입천장과 혀, 뺨 안쪽에 달라붙는 쓴맛을 느끼고 싶었다. 마음을 후벼 파는 통증을 지독한 쓴맛으로라도 덮고 싶었다.

류진은 신해범과 함께 내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했다. 나무둥치에 기대어 쉬던 권세혁은 신해범이 코피를 한 바가지 쏟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했다. 그는 피로 누적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웃었다. 태연한 모습에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신해범의 옆구리에 꼭 달라붙은 류진을 붙잡지도 못했다.

“왕자님, 얼른 오십시오.”

성재경조차 기우희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권세혁은 혼자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괴감과 질투로 엉망인 표정을 들키지 않으니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권세혁은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려고 노력했다. 한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앞서가는 류진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 늦게나마 도착한 소방 구조대의 활약으로 화재는 진압되었다. 현장은 문화 회관과 예배당 두 곳이었다. 피해 규모는 문화 회관이 훨씬 컸으나 사망자는 예배당 쪽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시체들이 끊임없이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들 전원이 문화 회관에서 VIP석에 앉아 있던 함씨 집안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지겠지만, 시신을 덮어 가려 놓은 탓에 주민들은 아우성이었다. 젖은 땅에 일렬종대로 누운 시신 중에 가족, 친구, 연인이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불안이 빗줄기와 함께 세상을 적셨다.

함풍 2도 지역 경찰은 이만한 참사 현장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현장 경험이 별로 없었다. 기본적인 체계도, 대응 매뉴얼도 갖추지 못한 관계자들로부터 기우희가 지휘권을 넘겨받기는 순두부 삼키기보다 쉬웠다. 게다가 이쪽에는 권세혁 왕자의 이름도 있었다.

신해범은 진압 차량 안에 틀어박혔다. 과로한 몸으로 비까지 맞아서일까. 가벼운 코피라고 생각했던 출혈이 좀처럼 멎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열까지 올랐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운 신해범은 은박 담요를 뒤집어쓴 채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창백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손발이 차갑고 깜짝 놀랄 정도로 딱딱했다. 석고상 같았다.

류진은 기우희가 주고 간 상비약을 뜯었다. 신해범을 일으켜 앉히는 게 바위를 들어 올리는 일보다 힘들었다.

“입 벌려.”

신해범은 꿈쩍하지 않았다.

“입 벌리라고.”

“으으응.”

“아잇, 좀…!”

류진은 신해범의 턱을 붙잡았다. 입을 벌리고 혀 위에 약을 올려놓으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좀! 약 먹어야 하니까!”

신해범이 희미하게 웃었다. 고개가 자꾸만 한쪽으로 쓰러졌다. 피로 물든 거즈가 늘어났다. 류진의 손가락도 붉게 물들었다.

“정신 좀 차려. 어?!”

어떻게든 신해범의 입을 벌리려고 애를 쓰는데, 커다란 손이 허리에 닿았다. 등허리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은근했다.

류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 와중에.

“장난치지 마!”

신해범은 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류진의 목에 비볐다.

“약 먹여 주라.”

“그러려고 하잖아. 근데 당신이 협조를 하나도 안 하잖아…!”

“입으로.”

“뭐?”

“네 입으로 먹여 줘.”

해열제를 콧구멍에 쑤셔 박아 버리고 싶었다. 코를 막은 거즈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헛소리를 하더라도,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니까.

류진은 약을 입에 넣었다. 물도 한 모금 머금었다. 신해범의 멱살을 움켜잡고 돌진했다.

잠깐이면 된다. 약이 위에서 녹아 혈류로 퍼지기 시작하면 신해범은 원래대로 돌아올 터였다. 자기가 열에 들떠서 늘어놓은 헛소리는 기억도 못 할 것이다.

류진은 신해범의 목울대가 제대로 꿀꺽, 움직이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 입술을 뗐다.

“아직 안 끝났어.”

두 번째 약도 먹였다. 진정제는 권세혁이 내준 약이었다. 그는 기대마에서 오른팔의 상처를 치료받고 있었다. 성재경은 응급 처치 덕분에 상처가 덧나지는 않겠지만 흉터는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흠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에 남을 지렁이 같은 흉터를 상상하면, 류진은 명치가 쿡 찔리는 듯했다.

“이제 누워.”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엄살 피우지 마!”

류진은 신해범의 몸을 옆으로 돌려 눕혔다. 그리고 약이 효과를 발휘하기를 기다렸다.

“꼬꼬야.”

“…….”

“나 춥다.”

“기다려. 담요 덮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나아질 거야.”

“그래도 사람 체온만 할까?”

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해범을 안아 주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담요 밖으로 드러난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류진은 조심스레 한 손을 뻗었다. 긴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더듬자 신해범이 어깨를 움츠리고 웃었다.

“간지러워.”

“아무것도 안 했거든.”

“안 하기는.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싶다고 말을 해. 뒤에서 음흉하게 손장난하지 말고.”

“안 만지고 싶어!”

류진이 손을 거두자 신해범이 말했다.

“나 어깨 좀 잡아 주라. 꼬꼬야.”

“…….”

“응? 꼬꼬야.”

안 해 주면 밤새 꼬꼬댁거릴 인간이었다. 류진은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담요로 감싸인 신해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에 안심이 됐다. 신해범의 생존에 안심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류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해범이 살아 있음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두운 차 안에서 신해범의 숨소리는 여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노크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 이병. 안에 있나?”

기우희였다.

“예!”

“잠깐 나와 봐.”

“예? …예.”

신해범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 주고 일어났다. 류진은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빨리 와.”

무시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니까.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서운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

“착하다, 우리 꼬꼬.”

“지랄….”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진압 차량 밖에서 기우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옆얼굴이 지독하게 피곤해 보였다.

팀이 박살 나 버렸다. 신해범은 쓰러지고, 기우희는 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것 같고. 하지만 초전 박살이었다. 류진은 물웅덩이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응시했다. 창백하고 초췌한데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기우희가 잿빛 연기를 훅 내뿜었다.

“곧 출발할 건데, 꼭 너를 만나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가족이라고 주장하는데 맞나?”

“가족이요?”

“정성현이라는데.”

“아!”

류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곧 다시 숙여 버렸다.

“이모부… 맞습니다.”

“너 혼자서는 안 되고, 성 중사가 동행할 건데 괜찮나?”

안전과 보안.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신예나에게 맡긴 돈을 받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돈을 송금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계좌 번호. 아직 첫 월급도 타기 전이지만, 앞으로 돈 많이 벌 거니까. 많이 많이 벌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모자를 벗으면서 다가오는 정성현을 보는 순간, 류진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었다. 오죽하면 성재경이 드리워 준 검정 우산 밖으로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빗물에 젖으면 우는 걸 들키지 않을 듯해서.

아니었다. 똑같이 비를 맞고 있는데도, 류진은 정성현이 운다는 걸 알았다. 눈물과 빗물은 분명히 달랐다.

“연우, 아니, 류진아… 너 이놈 자식아.”

“죄송해요.”

“너 얼굴이…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냐, 너….”

“죄송해요.”

“이, 이… 내가, 내가 너….”

정성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류진을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에 키는 자란 것 같은데, 몸은 예전만도 못하게 종잇장이었다. 젖살이 쑥 내려 얄팍해진 얼굴과 길고 가느다란 모가지가 죽순 같았다. 거친 바람이 불면 휙 꺾여 버릴 것 같은 몸이었다.

후회와 자책이 장마철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내가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야. 내가 너를 찾았어야 했는데. 내가 못나서, 이 속 좁은 사람이 너를 원망해서… 미안하다.”

신예나의 날 선 목소리가 줄곧 가슴에 박혀 있었다. 사실은 그 애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느냐고.

부정할 수 없기에 도망쳤다. 도망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성현은 아이의 가족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덮기 위해 아이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으며,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류진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게 분명해졌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문화 회관이 불길로 휩싸였을 때, 그는 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홀로 남을 아내가 눈에 밟혔다. 조카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찾아왔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 기회 같아서.

정성현은 가슴을 쳤다.

“무섭다, 무서워… 나도 내가 정말 무섭다. 내가 어떻게 너한테.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네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는 무릎을 꿇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축축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황급히 주저앉은 류진이 이러지 말라고 울먹였지만 정성현은 일어서지 않았다.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힐까 봐 힘껏 소리쳤다.

“네 인생 살아. 류진아… 다 잊고, 나랑 네 이모도 잊어버리고, 그냥,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네 맘 가는 대로. 그렇게 살아라.”

마주 앉은 류진이 흐느꼈다. 조막만 한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며 정성현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네 삶을 살아라. 이곳에서의 비참한 일들은 잊어버리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라. 날아서 가라.

개명하기로 결정했을 때, 정성현이 절에서 받아 온 이름은 도진(道進)이었다. 주지승이 내놓은 몇 개의 이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기만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하지만 새 이름에 본래의 성씨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또 이름에 칼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제 와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정성현은 자기가 좀 더 강하게 주장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미안하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

“아니에요. 아니야. 왜 이모부가 그런 말을 해요….”

비가 내렸다. 장마의 끝자락을 장식하듯 무섭게도 퍼부었다.

성재경이 다가와 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 이병.”

이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성현도 지금 류진이 어떤 신분인지 알고 있었다. 아이는 군인이었다. 이만큼의 시간을 얻은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정성현은 류진의 손을 놓았다.

“건강하게….”

건강하게만 지내라.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류진은 성재경에게 이끌려 걸어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았다. 정성현은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그도 젊은 시절 의무 복무를 했다. 늑장 부리면 상관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다는 사실을 알았다.

건장한 군인과 비교하니 더 말라 보이는 조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정성현은 나무를 짚고 섰다. 비통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다. 이제 겨우 과거로부터 한 발짝 벗어난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거든.

기우희는 잿더미가 된 문화 회관 앞에 섰다. 비를 맞으면서 담배를 피우는 그의 시선은 조부의 시신을 앞에 두고 통곡하는 서지운 병장에게 꽂혔다. 서지운의 곁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소령님.”

성재경은 기우희 곁으로 갔다. 방금 류진과 정성현이 나눈 대화 내용을 보고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저, 그런데 소령님.”

“왜?”

기우희가 담배를 짓밟아 껐다.

“무슨 문제 생길 것 같아?”

“아닙니다. 정 이병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뭐.”

“그냥…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기우희는 짜증을 냈다. 빗소리와 울음소리, 고함이 한데 뒤엉켜 성재경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성재경은 눈을 내리깔고 말을 돌렸다.

“MVP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정 이병이 응급 처치를 잘하긴 했는데, 그래도 흉터는 남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나중에라도 큰 문제로 번지면….”

“죽을 정도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기우희가 손을 휘저었다. 가 보라는 뜻이었다. 성재경은 멋쩍게 웃으며 돌아섰다. 늘 그랬듯이 한 손으로 뜨거워진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하지만 그는 몇 발짝 못 가 멈췄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저, 소령님….”

“뭐!”

기우희가 발을 굴렀다. 빗방울이 세게 튀었다. 성재경은 선 자리에서 입술을 달싹거리고, 목뒤를 매만지고, 양손을 쥐었다 펴며 망설이더니 돌연 몸을 돌리고 뛰어가 버렸다.

“저거 왜 저래?”

기우희는 비에 젖은 성재경의 등을 응시했다. 원래도 패기 넘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얼간이처럼 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공간을 양분하던 차폐막을 시원하게 걷어 올렸다. 기우희는 무전기를 신해범의 턱 밑에 가져다 댔다. 얼굴은 반쪽이 되었어도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쌩쌩한 신해범이 출발 명령을 내렸다. 은박 담요 밖으로 긴 다리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꼬꼬는?”

“기대마로 갔습니다.”

권세혁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열이 심하다고 했다. 오른팔의 상처가 덧난 건 아니었으나, 성재경을 비롯한 대원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만에 하나라도 왕자가 잘못되면 삼대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수분을 보충하고 약도 먹었지만, 권세혁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도무지 체온이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팔다리가 통나무처럼 뻣뻣해서 쉼 없이 주물러 줘야 했다. 오버도스 증상이었다.

신해범이 인상을 찡그린 채 읊조렸다.

“우리 꼬꼬도 다쳤는데.”

함영재에게 얻어맞아 기절까지 한 류진이 권세혁의 간병인 노릇을 한다는 데에 신해범은 불만이었다. 전시 상황에도 병자가 병자를 간호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지 멀쩡한 대원들이 널려 있는데. 심지어 그들은 류진보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프로였다.

“그런데도 한사코 정 이병만 찾더군요.”

“애새끼 고집이 대단하구만.”

기우희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 이병이 마음을 다잡아서 다행입니다. 정성현과 만나고 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뭐?”

“…아.”

기우희는 몸을 돌리고 진압 차량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신해범의 주의를 돌려 주길 바랐지만, 류진과 관련된 일을 무심코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기우희는 운전석 헤드를 붙잡아 당기는 아귀힘을 느꼈다. 등 뒤에서 신해범이 속삭였다.

“기 소령….”

납량 특집이 따로 없었다. 밀폐된 차 안, 은색 구명 담요를 뒤집어쓴 최고참이 바로 등 뒤에서.

“소령 달고 살 만해졌지? 요새 치우도 담배 끊는다고 난린데, 이참에 다 같이 건강 생각해서 금연할까?”

“정 이병의 이모부가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친척이 맞는지 정류진 이병 본인에게 직접 확인했고, 당사자가 만남을 희망해서 십오 분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성재경 중사가 함께 갔습니다.”

“대화 내용은?”

“하잘것없는 잡담이었습니다.”

운전석 등받이가 흔들렸다. 기우희가 소리쳤다.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앞으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네 맘 가는 대로 살아라. 그렇게 말했답니다.”

“용서를 빌었어?”

“정 이병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신해범이 픽 웃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신파가 따로 없네.”

“…….”

“류연비 얘기는 안 하고?”

“언급 없었습니다.”

“그래.”

신해범은 의자에 앉았다. 착실하게 안전 바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대장으로서의 체통이고 뭐고, 배 째라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지만 오히려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 통제가 신해범의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민간 기업에서 왜 전직 군인을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체 생활 잘하고, 성실하고, 깍듯하니까. 그런 고급 인력을 보유 중인 우리 풍기 교육대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군벌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그러니까 생각 잘해, 유미현 씨.

신해범은 눈을 감았다. 약 기운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잠깐 눈 좀 붙인다.”

“예. 푹 쉬십시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휴지 조각이 된 지마는 현장에서 폐차했다. 인근 고물상 주인이 선뜻 가져가겠다고 나섰다. 연쇄 폭발로 부품은 온전한 것이 없고, 트렁크에서 시체까지 나온 차를 어디에 쓰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쇠똥도 거름으로는 쓸모가 있는 세상이었다. 고철값 정도는 챙겼겠지.

류진은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권세혁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닦아도, 닦아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러다 탈수 증상이 올 것 같았다.

“추워. 형, 나 너무 추워….”

권세혁은 자꾸만 춥다면서 엉겨 붙었다. 몸은 이렇게나 뜨거운데.

“괜찮아. 치료도 받았고, 약도 먹었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기대마 맨 뒷자리에 간이 침상을 마련했다. 간이 침상이라고 해 봤자 의자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 권세혁을 눕힌 것에 불과했다. 다리가 길어서 권세혁의 발이 자꾸만 창문에 닿았다.

류진은 그의 머리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권세혁이 정신을 잃지 않게 하려고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기대마에 탑승한 대원들은 한 칸이라도 더 앞으로 가려고 눈치 싸움을 했다. 류진은 어이가 없었다. 권세혁이 멀쩡할 때는 어떻게든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 보려고 애쓰던 자들이, 사람이 아프니까 멀리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자기 탓이 될까 봐, 혹은 괜히 불똥이 튈까 봐 몸 사리는 건 알겠는데 인간적으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성재경조차도 입 꾹 다물고 앞만 보는 마당에, 이병 나부랭이가 나서 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왜 나 버리고 갔어.”

권세혁이 헐떡였다. 류진의 손을 제 가슴께로 끌어당기며.

“계속 불렀단 말이야.”

“미안해. 내가… 급해서.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신해범이 걱정됐어?”

“아니.”

류진은 쓸쓸하게 웃었다.

“대장님은 강하니까. 내가 걱정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럼 왜?”

“꼭 알아야 하는 게 있었어.”

“함영재 죽었는지?”

“처음에는 그랬는데… 나중엔 다른 게 더 중요해졌어.”

“그게 뭔데?”

류진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권세혁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방이 누군지 정확하게 아는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괜찮아. 몰라도 돼.”

류진은 권세혁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지금은 네가 아파서… 생각하기 힘드니까, 그냥 쉬어.”

권세혁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만사 다 포기한 사람처럼 웃어 재끼던 신해범이 생각났다. 그 순간 류진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신해준을 포기하지 않아서,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더는 신해범이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바위였다. 곳곳에 크랙이 있어 마음만 강하게 먹는다면 충분히 타고 오를 수 있는 바위.

암벽 등반에 관심이 있던 곽현우가 말했었다. 손가락을 겨우 끼워 넣을 만한 핑거 크랙이 사람 몸도 들어갈 수 있는 침니로 변하는 데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그때는 ‘그래서 어쩌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말뜻을 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반드시 틈이 있고, 그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진다는 의미였다.

‘한심한 놈. 찐따 새끼!’

류진은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피곤이 정수리를 짓누르고 온몸이 뻐근하고 얼얼한데, 심장은 팔딱팔딱 뛰었다. 이런 게 바로 호승심일까?

류진은 권세혁 위로 몸을 숙였다.

“세혁아.”

아주 작게. 다른 대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파도 견뎌. 힘들어도 버텨야 해. 물 많이 마셔.”

“형, 나 힘들어… 온몸이 아파. 어지럽고….”

류진은 숨을 삼켰다. 신해범에게 대마를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는 기꺼이 건네줄 터였다. 하지만 류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권세혁을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권세혁이 가족들과 만찬을 즐기러 호월루를 방문했던 날. 권세혁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신해범의 지시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날의 잘못된 선택으로 두 사람이 망가졌다. 권세혁은 마약 중독자가 됐고, 자신은 원수의 아들을 동정하게 되었다.

바로잡아야 한다. 신해범의 원래 설계대로.

약으로 폐인을 만들어야만 권세혁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신해범이 순순히 공급책이 되어 준 건 그게 뜻밖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그런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권세혁의 평판을 망치는 거라면 섹스 동영상으로도, 지금까지의 약물 복용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용서한다는 헛소리는 아니다.

단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다 보면 철로를 이탈해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평생 후회하게 될 수도 있었다. 류진은 남은 생애 전부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기 싫었다.

<사기>에 나오는 어떤 재상은 누구도 못 넘볼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밤마다 자객이 찾아들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으로 비단 침상 위에서도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신해범이 무서워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 그래서 자꾸만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겠다는 것이고.

류진은 신해범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다 같이 죽자는 식의 무지막지한 가치관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류진은 그를 살리고 싶었다.

신해범은 살아야 했다. 살아서, 독재자를 처단한 영웅과 그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악당으로서의 삶을 감당해야 했다. 도망가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내 버린 사람은 하신성으로 족했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어떻게 됐든, 제2의 정류진이 나오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권세혁 또한 살아야 했다. 죄 많은 왕조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껏 누리고 살아온 만큼 피눈물이 나겠지만, 극복하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다.

앞으로 많은 걸 극복해야 할 권세혁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형. 내가 우, 웃긴 얘기 하나 할까.”

“말하지 마. 머리 아프잖아.”

“말하고 싶어.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래. 뭔데?”

“옛날에 외조부님이 얘기해 준 건데, 중국에 유명 군벌들 있잖아. 중화민국 초기 집권자들. 그 사람들 별명이 되게 웃기다?”

왕자는 농지거리도 고급스럽게 하는구나. 류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별명이고 나발이고, 난 그 사람들이 누군지도 몰라.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어. 남의 나라 위인들이 밥 먹여 주냐?”

“오패부, 풍국장, 손전방… 다 몰라?”

“위안스카이는 알아.”

권세혁이 키득댔다.

“세계사 시험 볼 때 한 명만 외웠지? 답안지에 쓰려고.”

“그게 뭐? 그러면 안 되냐?”

정곡을 찔린 류진이 발끈했다.

“무, 문제만 맞히면 장땡이지 뭘 굳이 다 외우려고 들어. 시험 기간에 꼭 그런 애들 있더라.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거까지 다 외워서 잘난 척하는 애들.”

“그건 잘난 척이 아니지. 걔네가 공부를 열심히 한 거지.”

“네가 그런 타입이었지? 딱 보니까 견적 나온다.”

“혀엉.”

중화민국 초기, 군벌들의 대립은 대륙의 혼란을 가중했다. 국민들은 각 군벌의 거두(巨頭)에게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붙임으로써 권력자들을 희화화했다. 오늘날 신룡관의 ‘빅 브라더’ 권주혁에게 ‘고(자)라니’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고, ‘숙청 여제’ 유미현이 혈궁항아(血宮姮娥)로 불리는 것처럼.

손등으로 이마를 짚은 권세혁이 쌔근쌔근 숨을 내쉬었다.

“위안스카이는 참모 총장이었던 풍국장을 경계했어. 이 사람을 어떻게 감시할까 생각하다가, 미인계를 쓰기로 한 거야.”

“…….”

“풍국장은 위안스카이가 소개해 준 여자와 결혼했어. 여자는 당연히 위안스카이에게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고. 풍국장은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대. 그래서 붙은 별명이 호도장군(糊塗將軍). 미련한 바보라는 뜻이래.”

“…….”

“안 웃겨?”

“응.”

권세혁이 입을 다물고 모로 돌아누웠다. 류진은 품속으로 파고드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왜 안 웃겨?”

“불쌍하잖아.”

“바보라고 놀림당해서?”

“그것도 그런데… 진짜 좋아했을지도 모르잖아, 자기 아내를.”

권세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류진은 눈을 꼭 감고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형, 나한테서 손 떼지 마.”

“알았어.”

류진은 권세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땀을 닦아 주고, 뺨과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권세혁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진정제가 듣는다는 사실에 류진은 안도했다. 긴장이 풀리니 눈이 감겼다. 권세혁을 보살피며 슬쩍 한 알 집어 먹은 진통제 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류진은 권세혁이 머리를 허벅지에 얹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앉은 채 자는 선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꿈을 꾸었다.

권세혁이 나오는 꿈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흠뻑 뒤집어쓴 권세혁이 류진 앞에 섰다. 총을 들고 있었다. 그가 권총으로 자신을 겨누며 말했다. 부릅뜬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게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었다. 일그러진 표정과 세차게 떨리는 몸이 보였다.

류진은 깨달았다. 그가 모든 걸 알아 버렸다.

‘그래서 그때….’

권세혁이 말했다.

‘그래서 풍국장을 불쌍하게 여겼구나.’

총구가 떨렸다.

‘나도 동정했어, 류진이 형?’

“헉.”

눈을 떴다. 흔들리는 차 안이었다. 류진은 눈을 깜박깜박했다. 이곳이 기대마 안이고, 지금은 풍기 교육대로 복귀하는 중이며, 권세혁은 자기 무릎 위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졌다.

“깼어?”

앞자리의 대원이 돌아보았다. 차 안이 어두워서 이목구비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성재경이었다.

류진은 큼큼 헛기침했다.

“응. 형은 안 자?”

“자다가 깼어.”

“미안. 나 때문이야?”

“아니.”

성재경은 입을 다물고 웃었다. 그는 권세혁을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류진은 자기 때문에 그가 된서리를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미안해, 형. 나 때문에… 맞은 데 괜찮아?”

“너 때문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냐.”

“지금 말고 아까… 코피 났잖아.”

성재경이 고개를 홰홰 저었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다 잊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미안해.”

“네가 쳤냐?”

“그건 아니지만.”

“그렇지? 인제 그만해라. 사과받기도 민망하다 야.”

“응….”

성재경이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류진은 그의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권세혁을 조심스럽게 의자에 눕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내려왔다. 성재경의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형 옆에 앉아도 돼?”

“나야 뭐 상관없는데….”

성재경은 권세혁을 걱정하고 있었다. 류진은 잠깐이면 괜찮을 거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동안 우리, 계속 얘기 못 했잖아.”

류진이 웃었다. 성재경은 망설였지만 이내 못 이기는 척 창문 자리로 이동했다.

***

진치우는 거짓말을 잡아내는 일에 능숙했다. 거짓말 대회가 열린다면 금메달은 따 둔 거나 다름없는 친구를 둔 탓이다. 그는 사람이 거짓을 발설할 때, 어지간해서는 숨기지 못하는 신체 징후들을 빠르게 눈치챘다. 눈 깜박임. 시선 처리. 손 모양. 목소리의 떨림이나 긴장한 표정까지.

그 또한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지금 신예나가 골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진치우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호월루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지금 갈게.”

- 지금? 여기로?

“영업 끝났지?”

- 정리 중이긴 한데… 오빠 오프 아니잖아. 해범 오빠랑 우희 둘 다 출장 중인데, 오빠는 자리 지켜야지.

“괜찮아. 일조점호 끝나고 복귀해도 돼.”

- 그래도.

“지금 간다.”

진치우는 신예나가 대답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천성이 남 이야기를 들어 주기만 하는 아이다. 자기가 고민하는 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서. 말 많은 수다쟁이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 신해범보다야 백배 낫지만, 그렇게 살다간 속병 들기 십상이었다.

진치우는 거침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일조점호는 부관에게 맡겼다. 오렌지색 크라이슬러에 올라탄 그는 신예나의 단아한 얼굴을 생각하며 액셀을 힘껏 밟았다.

호월루 별관은 오랜만이었다. 진치우가 신해범 없이 혼자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껏해야 손님으로 와서 식사나 하면 모를까. 신해범은 거짓말의 달인인 만큼 눈치도 빨라서, 자신이 조금만 신예나와 가까워지려 하면 도끼눈을 뜨고 의심했다. 그러니까 더 신경이 쓰인다는 사실은 모르나.

진치우는 동백실로 들어갔다. 신예나가 블라인드를 올려놓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진치우는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인테리어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 같았다.

“술 마셨어?”

“반주 약간? 유미현이랑 식사했거든.”

“그 여자가 여길 왜?!”

“놀라지 마. 해범 오빠한테 전화 왔었어.”

신예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초대장 한 번 보냈는데 바로 오더라. 안 그래 보이는데 사실은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니면 은근히 켕기는 데가 있든지.”

“머리통이 제대로 달려 있으면 하성록을 완전히 믿진 않겠지.”

진치우는 컵에 물을 따랐다. 녹아 가는 얼음도 몇 개 집어넣었다. 신예나 앞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목이 탔다. 긴장 때문에.

아직 태양이 뜨기 전이었다. 어둑한 세상을 호월루의 붉은 가로등이 밝혔다. 신예나의 얼굴도 그 빛을 받아 붉었다. 말투가 평소보다 살짝 느리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우리랑 같이한대?”

“확답은 안 줬는데 거의 넘어온 것 같아.”

“거의라니.”

“속보 뜨는 거 보고 결정하겠대.”

“쓸데없이 시간 끄네.”

“지킬 게 많은 사람은 소극적이지.”

진치우가 컵을 탁 내려놓았다.

“그 여자는 사람들 눈치를 너무 봐. 모든 연령층의 지지율을 얻으려고 하잖아. 여기가 무슨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투표로 정치할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예산 다 퍼 주고. 자기 군벌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복지 재단 같은 거나 만든다고 설치고 다니잖아. 지지율 높이려고. 해동문국의 아웅산수지가 되고 싶은 모양인데, 자기가 그럴 출신 성분이 돼?”

한숨에 노기가 섞였다. 진치우는 거칠게 이어 말했다.

“우리 어릴 때, 공화당 연합한다고 사기업들 다 같이 힘들 때. 그때 혼자만 스리슬쩍 빠져서 토지 공사랑 거래 따내던 게 어디야. 유미현 그 여자 집구석 아냐. 손바닥 비벼 가며 여기다 줄 대 저기다 줄 대, 박쥐 짓을 기똥차게 하더니 돈은 많이 모았나 보더라. 그 여자 정치하는 것도 배가 불러서 그래. 독재 정권 부역자 주제에 깨끗한 척, 청렴한 척. 아주 그냥 좋은 건 혼자 다 해.”

“우희가 그래?”

“갑자기 걔 이름이 왜 나와?”

“아니면 됐고.”

신예나가 후후 웃었다.

“그래도 유미현, 본인은 나름대로 깨 있는 사람이었어. 정치범으로 감옥도 갔다 왔잖아. 십 년도 더 전이지만.”

“꼴랑 2년 갔다 온 거? 그게 고생 축에나 드냐? 생색은….”

“몸 사리는 스타일이긴 해. 안정성 따지고, 지저분한 일 하기 싫어하고. 우희만 빼 가려고 하는 것도 자길 받쳐 줄 명분 때문이겠지. 유미현 집안은 족보를 아무리 뒤져도 정치권이랑은 거리가 멀거든.”

“핏줄은 무시 못 한다는 거지?”

“왕조의 멸망을 용납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으니까.”

“기 소령 없었으면 누구 세우려고 했을까? 권 왕조랑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기가 직접 나서진 못했을 거 아냐.”

“어디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애 하나 찾아냈을 수도 있고….”

“있고?”

“가짜로 만들어도 그만이고.”

“에이, 야, 아무리 유미현이라도 설마 그렇게까지는.”

“언제 심장 터질지 모르는 총통이 자기가 싸질러 놓은 애들을 기억하겠어? 어느 날 갑자기 장성한 아이가 떡하니 나타나도 그러려니 할걸. 유전자 검사 조작이야, 유미현한테는 문제도 아니고.”

무섭다 무서워… 진치우가 중얼거렸다. 신예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계에 오래 있으면 머리가 굳나 봐. 거물급이라는 사람 머리 굴리는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야.”

“왜?”

“죽은 곽재헌 말이야. 생전에 백조교 믿었다는 소문이 짜해. 워낙 루머 많은 사람이라 주의 깊게 안 들었는데, 증거가 하나둘씩 나오는 모양이더라고.”

“어디서 나오는 말이야?”

“곽재헌 게이트 수사 지휘했던 사람들. 지금 한창 명퇴하는 시기거든. 총통도 자리보전하고 있겠다, 그 바닥 사람들이랑 더 지지고 볶을 일도 없겠다. 술 들어가고 흥에 겨우니 하나둘씩 이야기보따리 푸는 거지. 정치 관심 없는 애들도 곽재헌, 류연비 얘기는 재미있어하잖아.”

“백조교는… 교주 죽고 망한 거 아니었나.”

“그만한 종교가 쉽게 없어지나.”

백조교의 교리에는 허점이 많았다. 남은 신자들도 홍유화가 죽은 뒤 마땅한 후계자를 옹립하지 못했다. 세력은 축소되고, 간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중앙 정부의 힘이 덜 미치는 지방으로 흘러들어 간 자들은 백화교, 백선교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교 활동을 했다.

이름도, 교리도 다르지만 백조교를 뿌리로 하는 시점에서 이미 똑같은 사이비 광신도 집단이었다.

“곽재헌의 지지율은 백조교 대학살 이후에 급상승했어. 총통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그땐 공포 정치에 반감을 느낀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말이야….”

신예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치우가 잽싸게 다가와 불을 내밀었다. 창밖으로 연기를 뱉어 낸 신예나가 말을 이었다.

“집단에는 리더가 필요하거든. 열너덧 살짜리 애들도 우리 학교가 최고네 어쩌네 하는 마당에. 특히나 종교인들은 말이야, 신앙심이 굉장히 맹목적인 거라서. 비종교인들이 뜨악할 만큼 믿음이 강해. 믿고 따를 대상이 없어지면 극도의 불안함을 느끼지.”

진치우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믿고 따를 누군가가 없어지면 불안함을 느낀다. 어째 찔리는 말이었다.

“곽재헌이… 신(新)백조교의 리더로 추대됐다? 그래서 총통이 그를 죽였다?”

“추대될 계획이었다, 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결국 못 됐으니까.”

“류연비는 대체 무슨 죄냐?”

신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회색 연기를 뱉어 낼 뿐이었다.

바람이 비에 젖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사실은….”

“응?”

“나, 류연비가 아무것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

진치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류연비가 뭘 알았는데?”

신예나는 유미현의 말을 떠올렸다. 곽재헌의 전성기에 류연비는 대표적인 친정부 인사로 손꼽혔다고.

“류연비가 곽재헌 캠프의 얼굴마담, 마스코트 역할만 하는 게 아니었다면?”

“랄라랄라 노래나 하는 연예인이 뭘 안다고.”

“중요한 건 환경이야. 물론 처음에는 캠페인 참여 정도나 했겠지. 하지만 오빠, 사람들 많이 하는 얘기 있잖아. 큰 사람이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그건 사람이 큰물에서 있다 보면, 자연스레 큰 걸 바라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류연비는 절대 멍청한 애가 아니었어. 연예계 ‘원 히트 원더 세대’에서 살아남은 것만 봐도 알지.”

“류가 곽을 갖고 놀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아예 불가능한 이야긴 아니야. 신예나가 중얼거렸다.

류연비는 톱스타이기 전에 가난한 집의 소녀 가장이었다. 어디서든 자기 몫을 독하게 챙겨야 했다. 험난한 연예계에서 자길 받쳐 줄 배경에 목말라할 수밖에 없었다.

“배경이라.”

진치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부녀 관계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야. 당사자가 나타나서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 그리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잖아. 류연비가 곽이랑 진짜 불륜이었든, 친아버지처럼 따랐든, 이용해 먹으려고 했든…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을 거야.”

신예나는 곧바로 당부했다.

“류진이한테는 얘기하지 마. 내가 이런 생각 한다는 거 알면 슬퍼할 거야. 걔한테 류연비는 거의 성역이니까.”

진치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자신 없다. 그 새끼가 나한테 얼마나 까부는데.”

“류진이가? 오빠가 괴롭히는 거겠지.”

“아니거든! 걔 우리 발키리 작살내고도 나한테 따박따박 대드는 새끼거든. 사람 열 받게 만드는 게 수준급이야.”

“오빠가 먼저 잘해 줘. 사람 정 고픈 애라 조금만 잘해 줘도 마음 여는데, 왜 그렇게 매몰차게 굴어.”

“그 새끼 사람 차별 장난 아니야. 기 소령이랑 성재경한테는 간이고 쓸개고 빼 줄 것처럼 굴면서, 나나 범이 놈한텐 아득바득 개기더라. 반말에 욕질에 아주 그냥…!”

진치우가 씩씩댔다.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어, 내가 미쳤다고 그런 놈한테 잘해 주냐?”

신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피웠다. 한동안 동백실 안에는 빗소리, 바람 소리,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문득 생각난 듯 신예나가 입을 열었다.

“오빠도 일했잖아.”

“아, 엄승원. 경희가 말하던?”

“은하 본명 부르지 좀 마. 싫어하는 거 빤히 알면서 자꾸 그런다.”

“입에 붙어서 그래, 입에 붙어서. 범 새끼도 가끔 헷갈리는데 뭐.”

“오빠 치매 검사 좀 받아 봐라. 요새 조기 치매 심각하대.”

“야!”

신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웃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신해범이 유머 감각을 키우라는 말을 자꾸 하나 보았다.

진치우는 새 담배를 꺼내려다 고개를 젓고 도로 집어넣었다.

“강인우 알지, 하성록이 보낸 프락치 새끼. 걔가 류연비 유품에 관심 있더라. 엄한테 찾아보자고 하던데 무슨 생각인지. 하성록이 시켰나? 아님 유미현?”

하성록 쪽일 가능성이 컸다. 류진이 <백사자>에서 지냈으니까. 서경제약과 대일전자의 비자금을 꿀꺽한 하성록이라면, 분명 류연비의 유품도 탐낼 터였다.

신예나는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비에 젖은 나뭇가지 하나를 뚝 꺾었다.

“진짜로 있긴 한가? 류진이 이모부는 아는 게 없다는데.”

“지도 아리까리하니까 엄승원한테 떠넘긴 거겠지.”

“그 기자는 믿을 만해?”

“멍청해.”

미소 지은 진치우가 손가락을 제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약간 모자란 것 같기도 하고.”

“설마. 그래도 현역 기자님이신데.”

“제 딴에는 거짓말도 하고, 머리 굴러가는 소리는 들리는데, 그래 봤자 범 새끼 손바닥 위야.”

“오빠는 자기 상관을 참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아.”

“사실인데 뭐. 엄 씨 그놈, 말본새만 번드르르하고 내실은 없는 놈이야. 연기력은 빵점이고, 줏대도 없고, 겁까지 많아. 변절하는 속도가 스물세 살짜리 애송이보다 빠르더군.”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곽현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언짢았다. 이게 다 정류진 때문이다. 진치우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유미현이 사람 보는 눈 있어. 딱 일회성 노가다용이야.”

“우리는 뭐라고 생각할까? 유미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냐.”

“하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키득거렸다. 이럴 때면 서로가 전우라고 느껴졌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각자의 전투를 마친 뒤 같은 공간에서 함께 담배를 태우는 시간. 이 정도면 괜찮았다.

“창문 닫아라. 비 쏟아진다.”

“응.”

신예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칠 줄 알았던 빗줄기가 난데없이 굵어져 방 안으로 빗물이 마구 들이쳤다.

기우희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광성 진입이 코앞인데,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졌다. 휴식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신해범은 차라리 잘됐다고 말했다. 함풍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전 대원이 입때껏 요기도 못 한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종이 같은 파운드 케이크나 씹어 먹었겠지.

“그래도 빨리 복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지금이 전시 상황도 아니고.”

신해범은 빗길을 오래 달린 차량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로 기우희를 설득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는 장시간 이동 시 주어진 휴식 시간을 반드시 지키는 편이었다.

“다음번에는 운전병 교대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조직 차원에서 대형 면허도 따게 하고….”

신해범은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거 알아, 기 소령? 보통 사람은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도 힘들다는 거?”

“예?”

“진짜야. 오랫동안 한군데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얼마나 아픈데.”

기우희는 무슨 그런 핑계를 대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든 사람이 자네 같은 베스트 드라이버는 아니라는 뜻이야.”

“…….”

“장기 임무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려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더 나은 이동 수단이 있어야 한다고. 헬기 같은 거.”

신해범이 씩 웃었다.

“나중에 혼자서 작전 지휘하게 되면, 이동 시 휴식 시간 꼭 넣어. 애들이 쉬는 시간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화장실도 가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옆 사람이랑 잡담도….”

“여기가 군대입니까, 캠핑장입니까?”

“왜 이래. 자네도 담배 피워야 하잖아.”

“…알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중얼거린 신해범이 은박 담요를 뒤집어썼다.

“소령도 눈 붙이지?”

“무전 잡겠습니다. 쉬십시오.”

기우희는 운전석 의자만 뒤로 젖혔다. 무전기는 배 위에 올려놓았다. 두 팔로 머리를 받치고 와이퍼가 움직이는 정면을 주시하는데, 뒤에서 신해범이 말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해, 기 소령.”

“…….”

“이번 임무에서 내가 추한 꼴 많이 보였지. 자강에서도 그렇고, 함풍에서는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이해해 줘서 고마워. 자네가 정류진 챙겨 주지 않았으면 걔 분명 린치당했을 거야. 우리 대원들이 나를 어지간히 좋아해야 말이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저런 말을 하다니, 어지간히 뻔뻔하지 않고서야… 우희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그래서 말인데,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기우희 소령, 기대마에서 우리 꼬꼬 좀 데려와 주면 안 될까?”

“외로우십니까?”

“스트레이트로 들어오네.”

“너무 마음 주지 마십시오.”

기우희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해범은 알아들었다. 은박 담요를 뒤집어쓴 채 키득키득 웃는 걸 보면 알았다.

“늦었어. 우리 꼬꼬한테 벌써 마음 다 줘 버렸어. 기 소령, 나 상사병으로 죽어도 모른 척하지 마.”

신예나가 평소에 자주 하는 말이 생각났다. 어이구, 진상….

기우희는 한숨을 쉬고 차 문을 열었다. 뒤에서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우산 가지고 가!”

검은색 우산을 펴려는 순간,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양손으로 머리를 가린 정류진이 와악 소리쳤다.

“소, 소, 소령님.”

기우희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예, 예?”

“아니. 무슨 일이지, 정 이병?”

“아, 저, 보고를.”

안에서 신해범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 꼬꼬가 왔어? 나랑 텔레파시가 통했나?”

두 사람의 실랑이를 관전하는 참관객이 될 생각은 없었다. 기우희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류진이 말했다.

“소령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한테? 네가?”

주눅 든 류진이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우희는 한숨을 쉬었다. 뒷자리의 신해범이 대놓고 실망했다.

“꼬꼬는 기 소령 진짜 좋아하네….”

이러다간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가 탄생할 것 같아, 기우희는 재빨리 류진을 사수석으로 불러들였다.

“일단 타라.”

담요를 박차고 일어난 신해범이 운전석과 사수석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꼬꼬가 기 소령한테 할 말이 있다고? 뭐야? 뭔데? 나도 좀 알자. 명색이 대장인데, 부하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지. 그래야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책을 찾을 거 아냐. 내가 대원들 간의 친목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다 보면 자잘하게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잖아. 그럴 때 중재해 주는 것도 대장의 역할이잖아. 내 말 맞지, 기 소령?”

“예. 그렇습니다.”

“역시 자네하곤 말이 통한다니까. 그러니까 기 소령, 우리 꼬꼬한테 표정 좀 풀라고 말해 줘.”

기우희는 멍하니 차창을 응시했다.

“표정 풀라신다.”

“…예.”

“기 소령, 좀 더 귀여운 표정 해 보라고 말해 줘.”

“귀여운 표정 지으라신다.”

“소, 소령님….”

기우희가 기계 같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정 이병.”

“저는 그, 그런 거….”

“기 소령. 정 이병한테 영창 가고 싶으냐고 물어봐 줘.”

“그만해! 그만하라고!”

류진이 주먹으로 의자를 내려쳤다. 얼굴, 귀, 목, 암팡진 주먹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류진에게는 미안하지만, 기우희는 신해범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찌르면 즉각 반응이 온다. 그게 또 보기 싫지가 않았다. 그래서 성재경도 정류진을 귀여워하나 보았다.

“난 소령님께 할 말 있어서 온 거니까!”

류진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알았다. 유치한 복수였다. 자기 밑천 드러난 게 쪽팔려서. 자기가 기우희를 따른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신해범은 군에서 가장 혹독한 괴롭힘이라는 ‘네 위로 내 밑으로’를 실천하는 중이었다.

약을 먹여 주는 게 아니었다. 간호해 주는 게 아니었다. 남극에 맨손으로 던져 놔도 살아남을 것 같았던 인간이 아파하는 모습이 이상해서 돌봐 준 결과가 이거였다. 쌩쌩해진 신해범이 여봐란듯이 설치고 있었다.

“저 말하는 거 봐. 대장한테 반말 찍찍, 소리 버럭버럭. 저 귀염둥이 관등 성명이 어떻게 되나? 아주 군기가 다 빠져 버렸군. 이야, 어느 부댄지 몰라도 잘 돌아간다.”

“대장님, 이제 그만하십시오.”

기우희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신해범은 연신 류진을 놀려 댔다.

“복귀하면 엉덩이 팡팡 때려 줘야겠어. 아니 그냥 취조실에 집어넣고 보리죽만 줄까? 한 사흘 동안. 단백질이 부족해서 비실비실해질 때쯤 꺼내서 12층으로 데려오는 거야. 몸에 힘이 없으면 입도 잘 벌어지겠지? 기 소령 생각은 어때?”

이제 신해범의 막말은 음담패설로 흘러갔다. 그의 입을 막으려면 다른 얘기로 기우희의 주의를 끄는 수밖에 없었다. 류진은 자기도 모르게 기우희의 팔을 잡았다.

“성 중사님께서!”

“성재경?”

기우희가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류진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소리 듣다가 날 새우겠군.”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소령님께서 중사님을 조금 달래 주시면… 아, 안 되겠습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병?”

“그게!”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

“그러니까 재경이 형이, 아니 성 중사님께서, 지금 조금, 제가 이런 말 할 군번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알면 하지 마.”

“소령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기우희뿐만이 아니었다. 신해범이 당장이라도 턱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류진을 보았다.

“나 쟤 저런 말 하는 거 처음 봐.”

신해범이 놀라거나 말거나, 류진은 주먹을 쥐고 외쳤다.

“성 중사님이 그, 근무 연장을 안 하실지도 모릅니다!”

“뭐야?”

기우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정류진의 말은, 성재경이 풍기 교육대를 퇴사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기우희는 본능적으로 성재경의 근속 연수를 떠올렸다. 풍기 교육대는 통상 ‘허리’라고 불리는 중간 계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한번 임관이 되기만 하면 진급 기준이 까다롭지 않았다.

심지어 성재경은 <붉은 호랑이> 소속으로 같은 대원들 사이에서 특혜를 받아 왔다. 그는 이미 풍기대 장기 복무 대상자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전 대원이 긴장하는 연말 심사도 성재경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근무 실적, 시험 성적, 신체 등급 전부 상위권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진치우가 따로 신경을 쓰겠다고 언질을 주기도 했었다. 5년이고, 7년이고, 10년이고 이곳에 있고 싶다고 호언장담하던 놈이었다. 기우희는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정 이병.”

“예?”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제정신인가?”

“…예?”

“보아하니 중사가 사적인 이야기 좀 털어놓은 모양인데, 그걸 상관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일러바치다니.”

“그, 그런 게 아니라…!”

“작전상의 보안만 보안이 아니야. 대원들 간에 벌어지는 일이나 소문도 보안이다. 단체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소령님, 그게 아니라, 저는 그게!”

“변명은 집어치워. 지금 네 무책임한 발언으로, 성 중사는 이곳에서 나갈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어.”

기우희는 거침없이 말했다.

“소문은 발이 빨라. 와전되기도 쉽지. 군대는 그 어느 곳보다 폐쇄적인 조직이다. 전우애로 똘똘 뭉친 만큼 이탈자를 용서하지 못해. 부상자도 일하기 싫어서 꼼수 부린다는 소리를 듣는 판에.”

류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기우희가 쐐기를 박았다.

“실망이군, 이병. 고인 물이 무섭다는 걸 자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지옥행 판결을 받은 망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까. 신해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류진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어 버릴 것 같았다.

“자… 잘못… 잘못했습니다. 소령님.”

“알면 주의해. 두 번은 예외 없다.”

“예.”

류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담배를 꼬나문 기우희가 운전석을 박차고 나갔다. 그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우산을 바라보며 류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은박 담요를 뒤집어써서 인간 셸터처럼 보이는 신해범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정꼬꼬 사고 쳤네.”

“…….”

“어쩐지, 요새 기가 너무 살았다 싶었어. 기 소령 원망할 필요 없다. 소문이 무서운 거라서 그래. 알잖아, 너도.”

“…….”

“울지 마, 꼬꼬야. 왜 이런 거로 눈물을 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났다. 신해범이 손을 뻗어 류진의 턱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죄송해서… 소령님 원망하는 거 아냐.”

“그래.”

“재경이 형 혼나면 어떻게 해? 나 때문에 이상한 소문 나면?”

“글쎄.”

“진, 진짜 몰랐어. 그런 것도 보안인지. 진짜 상상도 못 했어… 어떻게 해…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한번 울음보가 터지자 걷잡을 수 없었다. 신해범은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정류진과 기우희에게 혼나고 눈물 질질 짜는 정류진이 동일 인물 맞나 싶었다.

“성 중사가 그렇게 좋냐?”

“형 좋은 사람이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주, 주, 죽… 안 돼!”

신해범은 사수석을 박차고 나가려는 류진의 팔을 잡았다.

“가지 마.”

신해범은 움직일 때마다 요란하게 바스락거리는 은박 담요를 걷어치우고, 류진을 뒷자리로 끌어당겼다. 종잇장처럼 마른 몸을 꼭 끌어안았다.

“놔! 지금 장난칠 때야?!”

신해범은 류진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는 류진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기 소령, 안 그래 보여도 은근히 성재경 챙겨. 처음으로 포섭한 자기 사람이니까.”

“…….”

“중사가 내색은 안 했겠지만, 부사관이 여러모로 고달픈 직급이야. 그래서 우리가 더 신경 써.”

“못 믿겠어….”

“아, 진짜야. 성재경한테 말 함부로 하다가 장기 복무 탈락하고 전역한 놈도 있어. 못 믿겠어? 복귀하면 11층 가서 물어봐라. 너 거기 직원들 좋아하잖아.”

타닥타닥, 빗방울이 천장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 때문이야.”

“왜? 성재경이 뭐라고 했는데?”

“충격받은 거 같았어.”

“무슨 충격.”

“불난 거랑… 그 새끼들 죽은 거. 그리고 권세혁한테 맞았어. 내가 말을 안 들어서.”

“원래 중간이 힘든 법이지.”

“재경이 형, 진짜로 전역하면 어떡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가 기업형 군대긴 하지만, 체제까지 사기업이랑 똑같은 건 아니거든.”

“재경이 형 진짜 고민한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내가 말해 봤자 소용이 없으니까. 나중에라도 소령님이 얘기해 주면… 재경이 형, 기 소령님 진짜 좋아해. 엄청나게 존경해. 그러니까….”

“기 소령이 성 중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작은 뒤통수가 끄덕끄덕했다. 신해범이 쿡쿡거렸다.

“안 되는 짬으로 대가리 굴리면 이렇다니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설프더라도 뭔가를 해 보려고 애쓰는 게, 자포자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신해범의 손가락이 류진의 관자놀이를 지분거렸다.

“나한테는 뭐 할 말 없어?”

“있어.”

“오. 뭔데?”

“권세혁한테 약 안 줄래.”

“…응?”

“그리고 복귀해서 약물 중독 치료 받게 해 줘.”

신해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혔지만, 류진은 방금 한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

“못 들었어? 권세혁 병원 보내자고.”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신해범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짐작이 갔다.

“우리 꼬꼬 머릿속의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거 같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류진은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 더는 신해범이 두렵지 않았다.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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