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현이 쓰는 호두나무 책상 위에는 고풍스러운 집무실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조악한 소품이 하나 있었다.
높이 15cm, 지름 10cm. 노란색 바탕에 빨간 필기체로 ‘Sweet'라고 적힌 원통형 틴 케이스. 쿠키나 사탕이 들었을 법한 이것의 용도는 쓰레기통이었다. 책상 밑에 휴지통을 두지 않는 유미현은 파쇄기나 재떨이로 처리할 수 없는 휴지, 면봉, 메모 따위의 자잘한 생활 쓰레기를 여기에 넣고 뚜껑을 닫아 버렸다.
원세영은 그 틴 케이스가 싫었다. 집무실 미관을 해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세영이 보기에, 그건 트랩이었다. 자기 물건에 타인이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유미현이 사무실에 들어와 이것저것 만져 보는 손님을 골탕 먹이기 위해 설치한 함정.
실제로 유미현은 틴 케이스를 자주 비우지 않았다. 원세영에게도 치우지 못하게 했다. 뚜껑이 밀려 나올 정도로 쓰레기를 꽉꽉 채워 놓다가, 손버릇 나쁜 손님이 무심코 뚜껑을 열면 갑자기 튀어나온 쓰레기에 당황하게 만들었다. 유미현은 비싼 양복 위에 코 푼 휴지나 화장품 찌꺼기가 묻은 물티슈를 떨어뜨리고 황망해하는 손님을 보며 즐거워했다.
점잔 떨던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세영은 자기가 집무실 쓰레기도 제때 치우지 않는 덜렁이로 비치는 게 싫었다. 그는 자신이 프로페셔널이라고 자부했다. 감옥에서도 남들과 달랐다.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삶을 추구했다. 공부와 운동. 죄수들에게 부과되는 엄청난 양의 사역을 소화하면서도 사회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원세영은 생계형 잡범이었다. 정확한 죄목은 절도였다. 생활고에 지쳐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고, 운이 나빴다고 얼버무리기에는 상황이 복잡했다. 잡범 중에는 사람 잡아먹는 것과 몸 파는 일만큼은 피하려다 전과자가 된 여자가 많았다.
황마에는 신입 재소자가 생활실이라고 불리는 5평 남짓한 방을 배정받기 전, 교도소에 적응하는 차원에서 모범수들과 함께 지내는 시기가 있었다. 모범수들의 공간인 만큼 방이 넓고 쾌적했다. 적게는 여덟 명, 최대 열두 명까지 부대끼며 사는 생활실에 비하면 머릿수도 적었다.
무엇보다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자다가 목이 졸려 죽거나, 쌀 포대를 뒤집어쓴 채 맞아 죽거나, 벽에 갈아 날카롭게 만든 수저에 눈알이 뽑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심지어 죄수들과 커넥션이 있는 교도관이 사제 음식을 가지고 방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중립 안전지대라고 불렀다.
유미현은 그곳의 왕초였다. 사역도 안 하는 여자가 어떻게 모범수가 되었는지는 나중에 알았다. 그는 교도관에게 쿠데타를 예고한 대가로 중립 안전지대를 얻었다. 문맹에게는 글을 가르치고, 단기수들은 가능한 외부 통근시켜 한 푼이라도 더 벌게 해 주려는 유미현을 싫어하는 재소자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였다. 그에게는 배신자, 위선자, 그리고 기만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물론 원세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유미현이 중립 안전지대의 결정권자라는 사실이었다.
그 방에는 백혈병으로 오늘내일하는 재소자가 한 명 있었다. 원세영은 그의 침대를 노렸다. 유미현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라면, 이 정글에서 삶의 질을 약간이라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무슨 짓도 할 수 있었다. 유미현이 출소하던 날에도 똑같이 맹세했다. 나를 잊지 말라고. 난 사람 잡아먹는 일, 몸 파는 일만 빼고 다 할 수 있어요.
아침에 출근하니 책상 위에 애프터눈 티타임 초대권이 있었다. 유미현이 다달이 VIP 요금을 지불하며 이용하는 그랜드 힐튼 호텔의 행사였다. 장소는 41층 스카이라운지. 약속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원세영은 오전 업무를 몰아치듯 해치웠다. 유미현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호성동 남매를 특별히 아끼는 그가, 왜 금일 약속에 자신을 대신 보내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짐작이 가니까.
며칠 전 연지동과의 만찬 이후, 유미현은 언더그라운드 스케줄을 전부 취소하고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적림부 회의를 비롯한 공적인 자리에만 모습을 드러낼 뿐 나머지 시간에는 집무실에서 주야장천 모니터만 들여다보았다. 뭘 하는지는 직속 비서관인 자신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원세영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유미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에 따를 준비가 되었다. 하성록과의 커넥션을 형성할 때에도 처음에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강인혜가 친오빠를 이용해 반정부 단체를 흡수한다는 설계를 내놓았을 때 확신이 섰다. 강인혜는 대물이었다. 유미현이 차차기 수석 전략가로 찍어 둔 이유가 있었다.
유미현이 자기 군벌의 취약점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은 데에는 고작 스무 살인 강인혜의 영향력이 컸다. 올해 제1 종합 대학 입학 축하 행사에 참여했던 유미현은 자신에게 가차 없이 질문을 쏟아 내는 강인혜를 눈여겨보았다.
광성대라고도 불리는 제1 종합 대학은 명문대 특성상 기득권층 자녀들이 팔 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소굴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벗지 못한 이유는 정치 외교학과 때문이었다. 현재 다수의 공공 기관에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아이스크림튀김’을 다수 배출한 학과였으며, 유미현의 최종 학력이기도 했다.
원세영은 유미현이 강인혜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황마에서 기우희를 바라보던 시선이 딱 저랬다. 강인혜는 유미현의 자금 운용력과 국민 지지율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어디까지나 학생 수준이었지만 정치권이 아닌 일반인, 그것도 젊은 세대의 신선한 시각이라는 점에서 유미현의 마음을 움직였다.
원세영은 4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롤온 향수를 꺼내 손목 안쪽과 귀 뒤에 발랐다.
문이 열리자 달콤한 디저트 냄새가 훅 끼쳤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이 다가와 초대권 좌석을 확인했다. 원세영은 뷔페식으로 꾸며진 홀을 둘러보며 눈대중으로 강인혜를 찾았다. 헛수고였다. 원체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이라,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입때껏 풍기대에 체포되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애를 누가 운동권 중핵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원세영의 자리에서는 신룡관 지붕이 내려다보였다. 거대한 황금색 원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빛 기와를 촘촘하게 쌓아 올린 황룡이었다. 중앙에 용의 머리가 있었다. 여의주를 문 용은 당장이라도 승천할 것 같았다.
원세영은 시선을 돌렸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이는 신룡관 대신, 오랜만에 갠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비추는 도시를 보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 고층 빌딩의 숲. 매끈하게 잘 닦인 도로가 빌딩 사이사이를 누비며 스카이라인을 향해 뻗어 나갔다. 부자들은 아스가르드로 향하는 포털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태블릿을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충용절 행사에 들어갈 얼음 조각과 꽃길 장식을 골라야 했다.
포트폴리오를 넘겨 보던 원세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적지 않았는데, 적림부에 뒷돈을 대고 심사에 오른 업체들을 유미현이 모조리 거절해 버린 탓이다. 결국 꽃길은 청각 장애인을 고용하는 민간 업체에, 얼음 조각은 조수 두 명을 데리고 일하는 인간문화재의 손에 맡겨졌다. 유미현으로서는 현명한 결단이었으나 원세영은 골치가 아팠다. 약간 흠만 있어도 가차 없이 물어뜯길 테니까.
사진을 확대해 보며 꼼꼼하게 체크하느라, 고급 호텔에는 어색한 옷차림의 소녀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아 버린 것도 몰랐다. 소녀가 작은 주먹으로 유리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 전까지는.
“세영 언니.”
“아. 왔니?”
강인혜는 물 빠진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이었다. 어깨끈과 모서리에 때가 탄 에코 백을 메고 있었다. 그가 나이키 볼 캡을 벗자 짧게 친 커트 머리가 드러났다.
“수석님 안 오셨네요.”
“왜. 나라서 실망했어?”
강인혜가 씩 웃었다.
“조금?”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
“장난이에요. 저는 세영 언니가 더 편한 거 아시잖아요.”
원세영은 웃으면서 태블릿을 뒤집어 놓았다.
“잘 지냈어?”
“그냥저냥요.”
강인혜는 5단 트레이의 마지막 칸에서 스트룹 와플을 집었다.
“좀 먹을게요. 아침 굶었거든요.”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젊어서 고생하면 골병든다.”
“언니가 벌써 그런 소리를 해요?”
피식 웃은 강인혜가 창밖을 보며 뺨을 오물거렸다. 원세영은 잠자코 그를 관찰했다. 못 본 사이에 젖살이 쑥 내렸다. 몸피보다 큰 티셔츠를 입어서 그런가, 마른 체구가 더 가냘파 보였다. 실제로도 살이 많이 빠졌을 터였다. 학생 운동은 고달픈 일이었다.
“오빠는요? 언니랑 연락돼요?”
“대위님 너한테도 연락 안 하시니?”
“보안 때문이겠죠. 보도 관제 때문에 함풍 2도 갔던 사람들은 집에도 못 간다잖아요. 입 잘못 놀리면 삼대가 골로 가는데. 오빠도 뭐, 요새 풍기대가 뒤숭숭하니 덩달아서 몸 사리는 거겠죠.”
딱히 서운하지는 않아요. 강인혜는 그렇게 말하며 초코칩 쿠키를 반으로 뚝 갈랐다.
“저도 뉴스 보고 놀랐어요. 함풍 2도 배후가 최가라면서요. 깡패들한테 뒷돈 받고 있었다는데 권은 모르쇠 하고. 그런데 솔직히 그 얘길 누가 믿어요? 언니는 믿어요? 그 둘, 저 태어나기 전부터 형님 동생 하던 사이 아니에요?”
강인혜의 목소리는 작고 말하는 속도도 빨랐다. 그래도 발음이 분명해서 알아듣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권은 지금 꼬리 자르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계동 왕자 의외더라구요. 총통 안 되면 연예인 할 줄 알았는데. 풍기대 가서 철들었나? 완전 ‘범죄와의 전쟁’이에요.”
“범죄와의 전쟁?”
“그게요, 그냥 저희끼리 하는 말이긴 한데, 왕자가 중앙 감독조 같은 걸 만든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즉위하기 전에 지방 세력 좀 밟아 놓고, 신룡관 고인 물들 걷어 내고. 권은 완전 뒤통수 맞은 거죠. 키워 주려고 군대도 편한 데 보내 놨는데 아주,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혔네요. 역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나 봐요.”
공채 설명회를 위해 함풍 2도를 방문한 풍기 교육대는 그곳의 토착 조폭 세력을 일망타진했다. 그 과정에서 토착 조폭과 최석준 전 정무국장의 커넥션이 드러났다. 그에 풍기대에서 의무 복무 중인 총통 후보, 권세혁 왕자가 격분했다.
토착 조폭 일가는 즉결 처형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권주혁과 최석준의 커넥션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최석준은 가까운 친척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발을 빼려고 했고, 권주혁은 그런 최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형을 집행한 신해범 풍기 교육대장의 기자 회견이 꺼져 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권세혁 왕자의 부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최석준에 대한 여론은 빠르게 나빠졌다. 부상이란 오른팔의 자상이었다. 칠십 바늘을 꿰매야 할 정도로 환부가 컸다.
왕자는 풍기 교육대 본관의 개인 집무실에서 소속 군의관에게 집중 치료를 받았다. 복귀를 기다리던 팬클럽이 왜 왕자를 중앙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느냐고 극렬하게 항의했으나, 신해범 풍기 교육대장은 보안을 이유로 그들을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권세혁 왕자를 치료한 자는 군의관 최유신이었다. 그는 풍기대가 함풍 2도에서 복귀한 이후 퇴근을 하지 않았다. 몸을 사리는 건 최유신뿐만이 아니었다. 함풍 2도 설명회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대원들 전원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풍기 교육대의 정보 통제가 얼마나 잘되는지 다시 한번 입증됐다.
쿠키를 먹으면서 말하던 강인혜가 목이 막혀 콜록댔다. 원세영은 재빨리 망고주스를 건네주었다. 주스를 마신 강인혜는 가슴팍을 여러 번 두드리고 나서, 들고 온 에코 백을 열었다. A5 사이즈 다이어리가 나왔다. 홀로그램 표지 안으로 빽빽하게 스크랩된 뉴스 기사가 보였다.
<함풍 2도 지역 수사 ‘전면 비공개’ 결정… 진실은 미궁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