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희의 11층 사무실은 깔끔했다. 사무에 꼭 필요한 집기들이 지금보다 더 바람직한 위치를 찾을 수 없는 자리에 알맞게 놓여 있었다.
“인테리어 잘해 놨네. 깔끔하고.”
신예나는 윤이 나는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유리 테이블 위에 2030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는 패션 잡지가 덩그러니 놓였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잡지를 집어 들었다. 기우희와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이거 샀어?”
“아니. 의무실에서 훔쳤어.”
“나 보라고?”
기우희는 대답하지 않고 얼음을 꽉 채운 유리컵에 탄산수를 따라 내밀었다.
“땡큐.”
신예나는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어우 시원하다, 하고 활짝 웃었다. 그가 다리를 꼬자 연둣빛 원피스 자락이 살랑거렸다.
“요새 류진이 어때? 함풍 2도 다녀오고 못 봤어.”
“빨빨거리면서 자기 일 해.”
“바탕이 성실한 애 같아. 뭘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안 해.”
“그런 것 같더라.”
신예나는 개구쟁이 소녀처럼 웃었다.
“나 잠깐 누워도 돼?”
“그러든가.”
“실례 좀 합니다~!”
기지개를 켠 신예나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굽이 높은 샌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기우희도 소파에 털썩 앉아 두 팔을 등받이에 걸쳤다. 내친김에 다리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간부로서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짓이니까.
천장을 올려다보던 신예나가 불쑥 고개를 돌렸다.
“강아지 어때? 마음에 들어?”
“건강해 보이네.”
“동물 수첩이랑 다 가져왔으니까 살펴봐. 뭐 내가 얘기 안 해도 어련히 잘하겠지만.”
“모견은 괜찮아?”
“백구가 왜?”
“새끼들이랑 갑자기 떨어졌잖아. 분리 불안 없나 해서.”
“괜찮아. 다들 씩씩해. 아 원래 일곱 마린데, 한 마리가 유난히 작고 힘이 없더라고. 젖도 계속 물려고 하고… 하나 정도는 엄마가 키우는 게 낫겠다 싶어서 가게에 두기로 했어. 오빠도 알아.”
“그래.”
신예나가 몸을 일으키자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여신 같네. 기우희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신예나가 가져온 한 무더기의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저건 다 뭐야?”
“강아지 용품.”
“개 팔자가 상팔자구만. 저게 다 개들 물건이야?”
“전부 다는 아니고….”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수상했다. 기우희는 신예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마침내 그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류진이 옷 좀 사 봤어.”
“…….”
“그렇게 비싼 거 아냐. 별로 많지도 않아. 뭐 내가 쉬는 날 외출해서 딱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쇼핑하다가 눈에 띄는 거 한 벌 두벌 사 모으다 보니까 저렇게 됐어. 한참 여름인데 벌써 가을옷 걸더라.”
신예나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은 신해범과 비슷했다.
“류진이 한창 멋 부리기 좋아할 나인데, 칙칙한 제복만 입고 다니는 거 나는 별로야.”
“나한테 변명 안 해도 돼.”
“알아. 그래도 오빠들한텐 말하지 마. 괜한 오지랖이라고 할 게 빤해.”
기우희가 피식 웃었다. 강아지들 든 켄넬에, 동물 용품에, 저 쇼핑백들까지 바리바리 싣고 왔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좋아하겠네.”
“오빠들 모르게 전해 줘.”
“직접 안 만나고?”
“나 바로 들어가야 해서. 류진이도 일하느라 바쁠 테고,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래.”
“혹시 부담스러워하면 생일 선물 앞당겨서 주는 거라고 전해 줘. 아, 옛 직장에서 이렇게 질척대면 안 되는데.”
괜한 능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신예나가 정류진을 몹시 보고 싶어 한다는 것도.
기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쪽에 나란히 놓인 켄넬로 다가갔다. 이동장 하나에 두 마리씩 들어가 있었다. 소파에 엎드린 신예나가 말했다.
“혼자 두면 무서워할까 봐.”
“문 열어도 돼?”
“사무실 어지럽힐 것 같은데.”
“괜찮아. 뭐 망가뜨릴 것도 없어.”
이동장을 열자 새하얀 솜뭉치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쌍둥이처럼 닮은 백구가 둘이었다.
“귀엽지?”
“…그러네.”
흙과 풀 냄새 물씬 풍기는 산에서 뛰어놀았을 강아지들은 삭막한 실내 환경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래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지, 이곳저곳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기우희는 나머지 켄넬도 열었다. 백구 넷, 점박이 둘. 도합 여섯 마리의 강아지가 사무실에 뿔뿔이 흩어졌다.
기우희는 소파에 앉아 턱을 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데.”
“개 키워 봤어? 뭐가 보여?”
“시골에서는 한 집 건너 개를 키워. 보안 장치보다 성질 있는 똥개 한 마리가 싸게 먹히니까.”
늙으면 식량으로 쓸 수도 있고. 기우희는 뒷말을 삼켰다. 신예나에게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기우희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려다 빨빨거리는 강아지들을 보고 도로 집어넣었다. 대신 유리컵에 든 얼음을 아드득아드득 씹어 먹었다.
“난 잡종이 좋아. 튼튼하잖아.”
“그런가?”
“일단 유전병 걱정은 없지.”
기우희는 강아지들을 관찰했다. 개는 혈연과 서열을 중요시하는 집단이었다. 지금은 한데 어울려 뒹굴어도, 저 솜덩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낼 터였다. 그건 나쁜 게 아니었다. 군거 생활의 기반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우두머리를 뽑고 집단의 체계를 구축하여 다른 종(種)에 대항하려는 본능은 개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부견은 어때?”
“음… 그게 있잖아.”
신예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쟤들 예방 접종 하러 갔을 때, 수의사한테 사진 보여 줬거든. 그냥 무슨 종인지 궁금해서. 근데 뭐, 멀리서 밤에 찍은 거라 전문가도 잘 모르더라고. 셰퍼드 계열인가 싶긴 한데 정확한 건 직접 봐야 안다고 하구. 아, 그런데 수용소에서 탈출한 개일 수도 있대.”
“수용소?”
“왜 그 야견 단속반에서 투견장 한창 돌아다니던 때 있었잖아. 그런 데서 싹쓸이한 개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
신예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새끼는 입양 보내고, 노견은 잡아먹고, 나머지는 실험용으로 팔아먹고 한다는데. 관리하는 사람들이 대충대충이라 힘 있는 애들은 어떻게 철창 뜯고 도망가기도 한대.”
사람과 개의 인연은 2만 년이 넘었다. 식육목 개과 짐승의 강한 턱이 퇴화될 정도로 사육의 역사가 길었다. 개는 인간보다 멍청하지만 다른 동물들보다 똑똑했으며, 무엇보다 훈련을 통해 길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를 이용했다. 지킴이로, 사냥용으로, 애완용으로, 식용으로. 목적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사육하고 훈육하고 교배시켰다.
신예나는 인간이 개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짓이 투견이라고 생각했다.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에게 동족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행위가 역겨웠다. 싸움은 직접 하는 거였다. 이기든 지든, 돈을 따든 잃든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니라.
신예나가 투견 문화를 혐오하는 데에는 교배 문제도 있었다. 철저하게 싸움을 위해 개량시킨 개는 보기에도 기괴했다. 그런 개들은 싸움에서 이겨도 오래 살지 못했다. 소와 싸우기 위해 창출되고 개량된 견종인 불독의 수명은 다른 종의 반 토막이었다.
미친 우생학 신봉자들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도 품종 개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스티프와 그레이트데인, 세인트버나드와 핏불테리어….
신예나는 별관 뒷마당에서 백구와 코를 비비며 놀던 흑구를 떠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이라서 흑구라고 부르긴 하지만, 확실히 종잡을 수 없는 생김새였다. 뾰족한 귀와 뭉뚝한 주둥이, 굵은 목과 두툼한 가슴. 투견으로 개량된 품종이라기에 손색없는 외모였다.
기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빙성 있네.”
“확실히 훈련받은 개 같긴 했어. 인기척 느끼면 바로 피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 손에서 큰 개는 혼자서 사냥하고 그런 거 못 하잖아.”
“사냥을 했어?”
“그러더라. 나 일 마치고 별관 갔다가 기겁했잖아. 세상에, 배 쩍 갈라진 토끼 사체가 뒷마당에 널브러져 있는데 진짜….”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지 신예나는 어깨를 떨었다.
“새끼들 먹이라고 갖다 둔 거 같아.”
“감동적이군.”
“감동적이야? 난 기절하는 줄 알았는데.”
“개가 사람보다 낫다.”
신예나가 피식 웃었다.
“이름은 어떻게 지을 거야? 뭐 정해 둔 거 있어?”
“호월루에서는 뭐라고 불렀어?”
“그냥 첫째, 둘째, 했어. 태어난 순서대로. 어차피 보낼 거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몇 개 생각을 해 봤는데.”
“오, 뭔데?”
신예나의 반짝반짝한 시선을 느끼며, 기우희는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개그 욕심 있어. 강아지들 이름을 대짱, 중짱, 소짱으로 짓자 하데. 나 무슨 아귀찜 얘기하는 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신해범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기우희가 경쟁자가 되면 곤란했다. 평소 과묵하고 차갑던 사람이 하는 개그가 더 웃기니까. 그는 조만간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위트 있는’ 상관 자리를 두고 그와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지금 들어가는 길이야. 이따 봐.
신해범은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기자님?”
“아, 예.”
엄승원은 집게와 젓가락을 들고 백숙과 씨름 중이었다. 생긴 건 산적인데 하는 행동은 귀부인이다. 신해범은 장승희에게 이런 메뉴를 대접했다간 뚝배기를 머리에 쓰고 풍기대 주차장을 오리걸음으로 걸어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엄승원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았다.
“주십시오.”
엄승원은 신해범이 시원시원하게 살을 발라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긴 건 귀족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군바리였다.
“드십시오. 이열치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호월루는 생선 요리로 유명하지만 고기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며, 신해범이 사람 좋게 웃었다.
“먼 길 가시는데 몸보신하셔야지요.”
“예….”
수저를 들면서도 떨떠름했다. 그렇다고 거절할 만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허기진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엄승원은 기름이 동동 뜬 뽀얀 국물을 한 입 먹어 보았다.
“아, 시원하다.”
신해범이 활짝 웃자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입니다.”
그는 엄승원 앞으로 오색 종지를 밀어 주었다. 고춧가루를 풀어서 먹으면 더 시원하다는 말과 함께. 엄승원은 신해범을 그대로 따라 했다.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신해범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형님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저를 각별히 챙겨 주셨죠.”
엄승원이 수저를 든 채 신해범을 쳐다보았다. 그가 최금호와 형님, 아우 하던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미현에게 건넨 자료에도 그 내용이 들어 있었다. 파오훼이 시절 신해범은 최금호를 받쳐 주었고, 최금호는 출신 성분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해범을 아꼈다. 물론 각자의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으니.
진급을 둘러싸고 가족과 친척, 동문에 조상, 옛날 옛적 고향 친구 할아버지 인맥까지 싹싹 긁어모아 줄을 대는 치열한 정치판이 군대다. 그곳에서 신해범과 최금호, 두 사람은 서로를 나름대로 이용했다.
그리고 최금호 쪽의 쓰임새가 먼저 다했다.
“필요 없어져서 죽인 겁니까?”
엄승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꼭 그래야 했습니까?”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었지 않느냐.
엄승원은 신해범의 우뚝 선 콧날을 주시했다. 고집과 뚝심이 느껴졌다. 남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빙 둘러 돌아갈 가시밭길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자의 기백이었다.
엄승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해범을 동경했다. 그가 겪어 온 일련의 불행까지 부러워할 정도로.
신해범은 미소를 띤 채, 식사용 물수건으로 입술을 꾹 눌러 닦았다.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건 독주머니를 물고 사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살아가는 내내, 그러니까 말하고, 울고 웃고, 먹고 자는 매 순간순간 독이 몸속으로 흘러들어 오지요.”
식후 차가 들어왔다. 시원한 쑥차가 기름진 음식이 들어간 속을 씻어 내렸다. 전통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신해범은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 작전 때, 그러니까 함풍 2도 설명회 전에 다른 데를 잠깐 들렀습니다. 자강 1도라고, 제가 그 ‘파오훼이’ 시절에 갔던 곳입니다.”
“자강 1도….”
벌써 몇 년 전이었다. 오지로 파견 나간 군인들의 열악한 생활 환경, 극단적인 임무를 수행한 뒤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신룡관은 응당 자기네가 해야 할 일을 국민에게 떠넘겼다. 너희들 지켜 주는 사냥개다. 너희가 밥 챙겨 주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 닦아 줘라.
엄승원은 기억을 더듬었다. 서경제약의 아들 ‘신해준’이 아니라 군인 ‘신해범’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게 그때였다. 당시 계급은 중사로 기억한다.
중앙 헌병대 특수 임무 소대. 지금은 고기 방패라는 멸칭을 안다.
“그 일이 최금호와 관련이 있었습니까?”
“최를 비롯한 헌병대 간부들이, 저희 소대원들의 몫이었던 포상금을 가로챘습니다.”
“포상금이 있었습니까?”
“기자님이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저도 그 사실을 늦게 알았고, 알았을 때는 이미 최가 증거를 없앤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에 구걸한 겁니다.”
엄승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구걸이라니. 신해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그때 신해범은 대중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군부의 개든 뭐든, 빼어난 미남이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약한 부분을 자극했다. 소대장을 대신해 부하들을 현장에서 이끌었다는 사실 또한 ‘비운의 영웅’ 이미지를 뒷받침했다.
“군에서는 별도의 보상이 없었습니까? 국가 유공자라든지.”
“죽어야만 인정되는 국가 유공자 말입니까?”
“요새는 심사가 많이 유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어쨌든.”
신해범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때 국가 유공자는 사망자만 인정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살은 제외였고요.”
엄승원은 고개를 숙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택이 확대된 건 유 수석이 책임자가 된 다음부터입니다.”
“예….”
신해범은 생각해 본 적 있었다. 군인을 좋아하지 않는 유미현이 왜 자청해서 국가 유공자 지원 재단을 맡았는지. 국가로부터 외면당하는 자들이 가여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 푼의 보상이 절실한 자들의 목숨 줄을 움켜쥐고 싶어서라면 모를까. 어쩌면 다음과 같은 심리를 노린 걸지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인데, 야, 우리 진짜 큰일 당하기 전에 유미현 수석한테 잘 보이자.
신해범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지금도 정신적 후유증은 보상 범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허어….”
“안타까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같아도 혜택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놈이 진짜 정신병인지, 연기하는 건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신해범의 목소리는 자조적이었다.
“구걸하고 보니 억울하더군요. 내가 왜 이 고생을 하지? 저 새끼가 포상금만 돼지처럼 처먹지 않았어도 우린 치료받을 수 있었는데? 그놈이 자살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
“뭐 이런 얘깁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담배 피우십니까?”
엄승원은 신해범이 내민 담뱃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미현의 분부로 최금호에 대해 조사하면서, 엄승원은 무의식중에 최금호를 야망 있는 부관에게 억울하게 죽임당한 가엾은 상관으로 생각했었다.
왜 그를 조사하면서 자강 1도 사건과 연관 짓지 못했을까?
왜 포상금의 존재를 몰랐을까?
당연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는 문제의 당사자, 최금호가 모조리 없앴을 테니. 돈을 나눠 먹은 다른 간부들과 함께.
“흡연 안 하십니까?”
“…괜찮습니다. 주십시오.”
이래서 양측 말을 다 들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엄승원은 처참한 기분으로 담배를 피웠다. 신해범이 내민 라이터는 흔한 물건이었다. 고급 담배와 싸구려 라이터. 그런 부조화조차 신해범에게는 매력으로 느껴졌다.
엄승원은 빠끔빠끔 입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이제 의문이 좀 풀리셨습니까?”
“예….”
“자강 1도 이야기를 더 해 드리지요.”
신해범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담배를 피우는 그에게서 엄승원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힘들 만도 했지요. 생선 내장도 못 발라내는 애새끼들 데리고 그 오지에서, 맨땅에 막사 치고 지내면서 배를 얼마나 곯았겠습니까. 위에서는 지원이 있었다는데 막상 현장으로 떨어진 건 없었습니다. 모르지요, 누구 배 속으로 들어갔는지.”
총통의 포상금처럼.
“오죽하면 막사보다 땅속이 따뜻해서, 야밤에 퉁퉁 부은 손가락 불어 가며 삽질까지 했겠습니까. 원, 누가 보면 무슨 참호를 저렇게 파 대나 싶었을 겁니다.”
“…….”
“토착민들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 가난하고 무식해서 이용당해도 인품 하나만큼은 저기 신룡관 집무동에 들어가도 떳떳할 사람들이에요. 뭐 우리가 처음부터 대우받았다는 얘긴 아닙니다. 원체 사는 사람만 사는 지역이라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죠. 친해지려면 확실히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엄승원은 목을 긁었다. 목뒤에서 자꾸만 식은땀이 솟아 그런가, 근질근질한 게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었다.
“뻗치기 시작하고 이틀째였나.”
웬 노인네가 막사로 찾아왔다. 직할시에서 출발할 때 가져온 깃발을 바위 틈새에 끼워 놓았는데, 용케 그걸 보고 산 중턱까지 올라왔다. 신해범은 당황하지 않고 노인을 자신의 조촐한 막사로 불러들였다.
“씹으면 종이 맛이 나는 핫도그 빵이랑 끓인 우유를 대접했습니다. 그게 그나마 나은 먹을거리였거든요.”
노인은 초록색 완장을 차고 있었다. 바짝 마르고 허리가 구부정해 볼품없는 체구였다. 하지만 신해범은 그가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눈빛이 형형하고, 어깨가 튼튼했으며, 무엇보다 손바닥이 무수한 굳은살 때문에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포수였습니다. 젊어서 곰이며, 범이며 많이 잡았다더군요.”
그때는 민간 사냥 단속이 지금만큼 철저하지 않았다. 사냥꾼 등록제도 없었다. 밀렵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노인은 자기가 만지던 총들이 중국 동북 지구의 총포사에서 몰래 들여온 밀수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젊은 치기에 닥치는 대로 사냥을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산의 생태계를 파괴하여, 먹을 것 없는 산짐승이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덮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무분별한 수렵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개척단에서 제명되었다. 그때 노인과 반대 의견을 내며 적극적으로 사냥을 독려했던 자가 당시 자강 1도를 제 입맛대로 주물러 대던 조폭 우두머리였다.
신해범은 노인이 느끼는 죄책감과 책임감을 짐작했다. 그래서 군인들을 돕고 싶다는 노인의 청을 받아들였다.
신해범은 담배를 물고 빙그레 웃었다.
“노인장은 제 소대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산의 지리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으니까. 사냥을 그만둔 후에도 약초를 캐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돌산을 오르내렸으니까.
노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었다. 그는 자기 손바닥에 들러붙은 쇠와 피 냄새가 싫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총은커녕 활 잡는 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냥꾼으로서의 핏줄은 어디 가지 않았다.
노인과 그의 딸, 아들은 손재주가 좋았다. 올가미를 짜고 덫을 놓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신해범은 그들에게 배운 방법으로 생애 첫 사냥에 성공했다.
“산토끼였습니다. 네 마리였는데 한 마리를 노인장 집에 가져갔어요. 제 딴에 성의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파오훼이 소대와 자강 1도 주민들의 첫 교류였다.
“배운 게 많았습니다.”
사냥꾼은 과시를 위해서 동물을 해치지 않았다. 새끼나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어미는 잡을 수 있어도 놓아주었다. 노인은 주저했지만, 술이 들어가고 신해범이 과거의 일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젊은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이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곰을 잡아 온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곰은 버릴 게 없는 짐승이라더군요. 분뇨까지 약으로 쓴답니다. 내장으로는 순대를 만들고요. 곰 피와 다진 혓바닥 살에 찹쌀이랑 당면까지 넣어서, 아주 두툼하니 먹음직합니다.”
“하하….”
엄승원은 식사를 마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쎄 저희한테 돼지를 잡아 대접해 주지 뭡니까. 자기네도 식량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돼지를요?”
“피까지 마시라고 하는 걸 거절하느라 혼났습니다.”
그래도 뱀술은 마셔야 했다.
“시골 사람들이라 그런지, 보양식에 대한 지식이 남다르더군요.”
그날은 흡사 축제였다. 비록 건물은 슬레이트 지붕에 칠이 다 벗겨질 정도로 낡았고, 장소가 좁아서 옆 사람의 어깨와 허벅지가 몸에 닿을 정도로 딱 붙어 앉아야 했지만, 불편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특별한 것도 없이 즐거웠다.
엄승원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목에서 시작된 가려움증이 팔까지 번져 담배를 들 수가 없었다.
“자살한 놈 이야기를 해 드리자면….”
신해범은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말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원래부터 잔정이 많은 놈이었습니다. 오지랖도 넓고. 그날 대접받은 돼지고기에 감격을 해 가지고서는 온 마을을 싸돌아다녔죠. 어디 물 새는 데 없느냐, 문짝 고칠 데 없느냐, 뭐 그런.”
신해범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는 힘겨웠던 군 생활에서 몇 안 되는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당사자도 엄승원도 알았다.
엄승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파오훼이 소대원이 집단으로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건 그들이 학살당한 현지인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주고받았다는 데서 기인했다.
살아생전 친하지 않았으면 죽음에 슬퍼할 일도 없었다.
“불러서 주의를 줄까도 싶었지만… 내버려 두었습니다. 어차피 저흰 떠날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그 멍청한 놈의 새끼가 말입니다. 마을 아가씨 하나랑 눈이 딱 맞아 버렸지 뭡니까.”
이해했다. 젊고 건장한 군인들이 또래의 마을 여자들과 분위기를 만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진지한 사이였습니까?”
“그랬습니다.”
아. 엄승원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류진은 새삼스레 의무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최유신이 없었고, 지금처럼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눈을 감고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보리차도 맛있고.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사람들이 의사 안 믿는 거요.”
“무식한 거 티 내려니, 한다. 그래 봤자 자기 손해지 뭐.”
“하하.”
“그렇게 웃으니까 좋네.”
“네?”
“그냥 보기 좋다고.”
“…감사합니다.”
“의료 수가 때문에 그래. 돈 없으면 병원 못 가니까. 의사고 간호사고 다들 돈 보고 환자 진료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하는데, 뭐 솔직히 할 말 없다. 난 종합 병원 안 갈 거야. 힘든 건 둘째 치고, 그 험난한 정치질을 견딜 재간이 없어.”
“의사가 정치를요? 병원에서요?”
“그게 표현이 정치질이라는 거지. 굳이 병원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집단을 가든지….”
최유신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됐다. 말해 봤자 내 얼굴에 똥칠이다.”
“저는 괜찮아요.”
류진이 웃으면서 보리차를 마셨다. 최유신은 딱딱한 하드커버를 손가락으로 토도독 두드리며 참 그림 된다,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걱정돼요.”
“나 왜. 왕자 눈 밖에 나서 모가지 날아갈까 봐?”
“아뇨!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저라면, 만약에 제가 의산데, 공부 많이 해서 의사 됐는데, 다른 사람들이 말 안 들으면 화날 것 같아요. 그렇잖아요. 진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너 진짜 착하다.”
“네?”
“환자들이 다 너 같았으면 좋겠다. 그럼 의사 노릇도 할 만할 텐데.”
“네에?”
“아냐, 아냐. 넘어가.”
최유신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근데 나 진짜 괜찮다. 이게 한두 명도 아니라 이제는 뭐, 내 팔자려니 한다. 신해범이 걔도 죽어라 내 말 안 듣거든.”
“왜요?”
“걘 정신과 의사들이랑 웬수 졌잖아. 자강 1도 사건 때문에.”
류진에게도 익숙한 지명이었다. 함풍 2도를 가기 전에 들렀던 곳이었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노파의 싸늘한 눈초리를 기억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자림 산성을 구경했고, 거기서 본 제사 같은 의식이 신기했다. 그리고… 불이 났었다.
신해범은 마을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는 거라고 했다. 그때 류진은 신해범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권세혁의 몸 상태가 나빠 경황이 없기도 하고, 또… 회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당황하지 않아서. 마치 사전에 그러기로 합의가 된 일처럼.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자강 1도에서의 산불도 수상했다. 마치 예행연습 같았다. 마치 화재의 규모와 진압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기 위한… 내가 신경과민일까.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따뜻했던 보리차가 미지근해졌다.
“우리 군사 학교에서 만났거든. 새파란 까까머리 어린애들 사이에서 아저씨 둘이 마주쳤는데, 딱 보는 순간 알았다. 쟤하곤 엮일 수밖에 없겠구나.”
“네….”
“밖에서 만났으면 달랐을 거다. 근데 내가 겪어 보니까 알겠더라. 중요한 건 출신 성분이 아니라 환경, 그리고 경험. 진짜 이거 두 개야.”
“잘했어요? 학교에서?”
“누구. 신해범이?”
류진이 끄덕였다.
“잘했지. 시험이든 훈련이든. 뭐든 다 일등이었어. 당연하지. 이미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온 놈인데. 애초에 입학 목적이 달랐어. 걘 이미 군인이었고, 진급에 필요한 학력 때문에 온 거였으니까. 대학원생이 고등학교로 돌아간 셈이지.”
“그 정도였어요?”
“늦깎이라고 다 인정해 주는 거 아냐. 나는….”
최유신은 말끝을 흐렸다. 내 얘긴 굳이 안 해도 되지?
“개인 훈련도 대단했지만, 그놈 진가는 팀 대항전에서 빛이 났어. 다들 그놈이랑 한 팀이 되고 싶어서 난리였다. 신해범 밑으로 들어가면 우승은 떼 놓은 당상이다, 이런 느낌. 뭔지 알겠냐? 오죽하면 그놈 팀원 자리를 가지고 쌈박질까지 해 댔다니까.”
“너무 과장하시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 아냐.”
“그렇게 좋기만 한 사람은… 아닌데….”
확실히 류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나?”
“아뇨, 재밌어요. 더 해 주세요.”
적을 이기려면 적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류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최유신의 말을 경청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어. 신해범 그놈이 워낙에 눈에 띄고 혼자 너무 잘하다 보니까, 밸런스라고 할까, 그런 게 처음부터 안 맞았지. 무리해서 그놈 페이스에 맞추려다가 삐끗해서 부상 입는 놈들도 많았다. 내가 항상 힐러 노릇 해 가지고 알아. 아주, 진짜, 그 미련한 것들이 새벽에 차력 쇼를 하다가 다쳤는데 의무실은 못 가겠으니 만만한 날 깨워서 응급 처치해 달라고 하는데, 야 진짜 뚝배기를 깨 버리고 싶더라.”
류진이 웃었다.
“그래도 선생님이랑 잘 어울려요.”
“야 인마! 내가 애새끼들 뒤치다꺼리해 주는 사람이냐.”
“신해범은 무슨 역할이었어요?”
“걔? 뭐였을 거 같냐?”
군사 학교 시절 신해범은 팀의 사령관이자, 전략가이자, 돌격 대장이었다. 그와 한 팀이 되면 조금 뒤처지는 생도도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항상 끌어 주는 역할이라 힘들기도 했을 텐데, 신해범은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도들의 동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도 있었고.
“너무 혼자서 다 한 것 같은데요.”
“그럴 능력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한 사람에게 부담을 줬겠죠.”
“응?”
최유신의 눈이 커졌다. 놀란 건 류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꽤 인기가 좋았죠.”
신해범은 자랑 맞습니다, 하고 넉살 좋게 웃었다.
“어린애들한테요. 이상하게도 저는 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습니다.
“예… 좋으셨겠습니다.”
“좋았습니다. 좋아서 눈이 콱 멀어 버렸지요.”
신해범의 입매가 비틀렸다.
“저는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우리가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동안에 놈들은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그놈들이 우리가 자리를 뜬 사이에 민간인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엄승원은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저와 놀던 아이 중에 아버지가 조폭에게 맞아 죽었다는 아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전 그 애를 죽은 제 아버지와 똑같은 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주제에 아직도 아이 유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승원은 신해범의 차에서 본 하트 모양 키 링을 떠올렸다.
‘제가 귀여운 사람이다 보니 귀여운 걸 좋아합니다.’
헛소리는….
신해범은 고개 숙인 엄승원의 정수리를 주시했다.
“지금 제가 무슨 얘길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예….”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토끼 사냥 말입니다. 하지만 그걸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날은 살갗에 닿는 공기가 유난히 꿉꿉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대원들이 술렁거렸다. 시간이 늦어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헤드라이트를 켜는 순간 절규와 비통의 신음이 사방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엄승원은 신해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만에 신해범이 입을 열었다.
“우리 소대는 제정신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용감무쌍한 군인들로 대중 앞에 나서야 했으니, 뭐 별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시체 같은 낯짝에 분칠해서라도 사람 꼴 만들어야죠.”
망가진 헝겊 인형에 솜을 채워 넣고 꿰맸다. 맞춤한 천이 없어 덕지덕지 얼기설기 기워졌지만, 속이 어떤 모양이든 알 바 아니었다. 대중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았다. 중요한 건 화려한 제복과 위풍당당한 훈장이었다. 그 속에서 썩어 가는 군인들의 정신 상태는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그렇게 자강 1도 양민들의 죽음은 잊혔다.
신해범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강 1도를 재건하는 데는 국가의 힘이 필요했다. 최금호에게 이야기하고 보고서도 올린 이유는 그가 소대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포상금을 차지했으니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거라는 계산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밤새워 만든 보고서는 형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기되기 일쑤였습니다.”
최금호는 오히려 신해범을 협박했다. 자강 1도 들쑤시지 마라. 어차피 내버려 두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한다. 가만두면 조용히 지나갈 일을 뭐 하러 크게 키워 자기 얼굴에 먹칠하냐.
신해범은 눈을 감고 최금호의 목소리를 회상했다.
‘너만 죽고 끝나면 다행이지. 야, 이거 잘못되면 너, 나, 그 위에 중대장까지 싸그리 옷 벗는다. 너 이제 출셋길 트였는데 망칠 거야? 평생 고기 방패 소리 들으면서 장교들 뒤 닦아 주고 싶어?’
‘내 말 똑바로 들어. 너 입 다물어야 해. 정 못 참겠거든 나중에 성당 가서 고해 성사하든지 말든지 그건 네 자윤데, 지금은 제발!’
우리만 생각해.
우리만 생각하자.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신해범은 ‘우리’만 생각했다.
토끼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최금호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엄승원의 어깨가 처졌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군요.”
“아뇨,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사실을 은폐하고, 돈이 없어서 사람 죽고. 결국 모든 문제는 돈으로 귀결됩니다. 애초에 최가 왜 그렇게 출세에 목을 맸겠습니까? 돈 벌려고 그랬겠지.”
최금호는 군에서의 인맥을 가진 간부들과 포상금을 나눠 먹음으로써 파오훼이 소대 탈출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고기 방패 소대장으로서 동기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군복을 벗지 않았던 최금호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디로 가고 싶어 했을까.
신해범이 샐쭉 웃었다.
“이제 의문이 풀리셨습니까?”
엄승원의 한숨은 무겁고 깊었다. 신해범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너무 불쌍한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민간의 도움은 있었으니까요.”
국민 성금과 신해범의 사비. 그러나 이미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친 다음이었다.
신해범은 서른하나에 풍기 교육대장으로 취임할 때, 진치우와 기우희를 비롯해 전입을 희망하는 파오훼이 소대원 몇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들 중 아직까지 군부에 몸담은 자는 없었다. 하나둘씩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인생이 끝장나기 전에 군복 벗어던지고 광성 땅을 등졌다. 기껏 ‘파오훼이’를 은폐한 보람도 없이.
“해가 바뀌기도 전에 그렇게 되니, 무슨 자강 1도의 저주라도 받았나 싶더군요.”
“그, 그런….”
“아닙니다. 결국 그놈들이 미치거나 죽거나 떠나 줘서 여태 ‘파오훼이’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제가 고마워해야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유미현은 알아냈다. 이래서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하나 보았다.
신해범은 새 담배를 피워 물었다. 확실히 그때부터였다. 정신과 의사들을 불신하게 된 건. 살아남은 파오훼이 소대원 중 상담 치료와 약으로 호전된 놈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치료 시기를 놓쳐서 효과가 미미했다고….
핑계 대지 마. 정신병은 암 말기가 아니야.
신해범은 담배 연기를 세게 뱉었다.
“이건 저를 이해해 달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저는 용서를 구걸하지 않습니다.”
엄승원은 자리에 똑바로 앉아 있기 힘들었다. 명치가 답답하고 팔다리가 저렸다. 목에서 시작되어 팔로 번진 가려움이 가슴팍과 배에까지 느껴졌다. 마치 두드러기 같은….
두드러기?
무릎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신해범의 손아귀가 덮쳐 왔다.
“으아!”
상이 뒤집어지고 식기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미처 다 먹지 못한 잔반이 바닥에 흩어졌다. 뚝배기며, 접시며, 너나 할 것 없이 나뒹굴었다. 찻잔 하나는 맞은편 벽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엄승원은 멱살을 붙잡힌 채 숨을 들이켰다. 신해범이 차갑게 웃었다.
“제가 역겨우십니까?”
이상했다.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상을 뒤엎어 버렸는데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엄승원은 신해범이 사전에 메뉴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그랬다. 식사도 일반 식당보다 빨리 나왔다. 흡사 미리 조리해 두기라도 한 듯이….
호월루에 온 게 처음이라 으레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먼 길 가시는데 몸보신하셔야지요.’
몸보신이 아니었다. 엄승원의 머릿속에, 차가운 땅에 파묻힌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신해범이 목장갑 낀 손을 탁탁 털었다. 현장은 오랜만이군.
“어, 떻게.”
전신이 미친 듯이 가려웠다. 시뻘건 발진이 순식간에 목까지 올라왔다. 엄승원은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은 채 헐떡거렸다.
구치소에 들어갈 때 감염병 검사를 거쳤다. 앓고 있는 질환이나 복용 중인 약이 있는지, 혹은 알레르기가 있는지 묻기에 대답했던 기억이 났다.
그 정보가 진치우를 거쳐서 신해범의 귀에 들어갔다.
“스테로이드가 필요해 보이는군요.”
신해범이 주머니를 뒤졌다. 엄승원은 입을 벌리고 헐떡거렸다. 개미와 지렁이, 굼벵이가 살갗을 마구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옻… 오리… 그거.”
“맞습니다. 옻나무 오리백숙.”
한약재 냄새가 진해서 몰랐다. 고춧가루도 풀어 먹었고.
엄승원은 신해범이 들고 있는 지퍼 백을 노려보았다. 조그만 지퍼 백에 담긴 동그랗고 납작한 흰색 알약이 필요했다.
“제발….”
애원이 절로 나왔다. 신해범이 지퍼 백을 흔들었다.
“정직한 기록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엄승원의 퉁퉁 부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분홍색 찐빵 같았다. 그는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입술은 보랏빛이고. 생각보다 알레르기 증상이 심했다. 시간을 더 끌면 안 되겠다. 이 행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경고였지, 그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딜 가든, 무슨 일을 하든. 그러니 저를 등쳐 먹을 생각일랑 마십시오.”
진치우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의 협박은 어디까지나 보험이었다. 배신에도 중독성이 있으니까.
단숨에 일으켜 앉혀졌다. 엄승원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신해범이 내미는 약과 물을 허겁지겁 받아먹었다.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탓에 신해범은 엄승원의 입 속으로 손가락 세 개를 쑤셔 넣어야 했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보안 요원이 들어왔다. 신예나로부터 사전 지시를 받은 그는 엄승원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알레르기가 진정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꺼운 팔뚝에서 혈관을 단숨에 찾아내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솜씨가 좋군.”
“감사합니다.”
신해범은 방석을 깔고 누워 있는 엄승원의 뺨을 툭, 쳤다. 실눈을 뜬 그가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으어어어… 신음했다.
신해범은 병실 호수를 확인했다. 진치우가 보낸 메시지에 적혀 있던 번호와 일치했다. 그는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 고쳐 잡고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갈색 문을 두 번 노크했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크는 무슨. 들어와라.”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도 켜지 않아 어둑한 1인용 병실에는 진치우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보호자용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소리가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기계 고장은 아니었다. 볼륨을 0으로 맞춰 놓은 거였다. 잠든 환자가 깰까 봐.
“오지 말라니까.”
“어떻게 그러냐. 어머니 아프시다는데.”
“울 엄마 골골대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주무셔?”
“방금.”
“식사는 좀 하시고?”
“그냥 그렇지 뭐….”
방음이 잘 되는 병실은 조용했다. 미약한 에어컨 소리조차 거슬릴 정도였다. 창가에 놓인 물방울 모양 가습기에서 연기가 퐁퐁 쏟아져 나왔다.
신해범은 테이블에 수국 꽃다발을, 침대 밑에 과일 바구니와 오리백숙이 든 쇼핑백을 내려놓은 뒤 침대로 다가갔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주무신다고 했잖아. 눈깔은 폼이냐?”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지. 난 누구랑은 달리 예절 바른 아들내미니까.”
“지랄한다.”
환자의 팔 안쪽에 피멍이 무수했다. 신해범의 시선을 느낀 진치우가 이불을 슬쩍 끌어 올려 환자의 팔을 가렸다.
“동정맥루 땜에.”
진치우의 모친은 혈액 투석을 받고 있었다.
장기간의 수감 생활로 쇠약해진 김효성은 예전부터 줄곧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 왔다. 짧으면 이 주, 길게는 반년까지. 진치우는 언제나 제1 중앙 병원의 1인실을 고집했다. 그에 따르는 비용은 기꺼이 감수했다.
“엄 기자 배웅하고 오는 길이다.”
“살 좀 빠지지 않았냐?”
“별로.”
신해범은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잠든 김효성과 진치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가 말했다.
“치우 넌 갈수록 어머니 닮아 간다.”
“원래 둘째가 어머니 닮는대.”
“나도 어머니 닮았는데.”
“넌 반반이고, 새끼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대일전자의 진혜림 부사장이 처형당했을 때, 재계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요양 중이던 진화영 회장은 뇌혈관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딸의 처형 소식을 접하고 혼절한 뒤 깨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갔다.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나, 사실상 국가에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김효성은 대일전자 평사원 출신이었다. 평사원 출신으로 로열패밀리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하성록과 같았다. 그러나 하성록이 결혼 후에 더욱 활발하게 유성식품 경영에 참여한 반면, 김효성은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내조에 전념했다.
경영 일선에서 오랫동안 물러났던 그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하이에나들로부터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 공화당의 몰락을 짐작했던 딸이 마련해 놓은 궁여지책에도 손대지 못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하성록을 믿었으나, 같은 평사원 출신이라는 의리로 사교계에서 친분을 쌓았던 하성록은 그를 배신했다. 김효성은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당시 경제 사범에게는 최고형이었던 27년 형을 구형받았다.
김효성은 항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변호사를 설득했다. 정치범을 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총 맞아 죽으면 나 한 사람이야 편하겠지만, 남은 아이들은 어떡하라고.
김효성은 살아남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삶을 내던졌다. 비록 27년형을 다 채우지는 않았지만, 김효성은 아들들이 출세하기 전까지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한 그의 몸은 관절 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다. 오랜 감옥 생활로 면역 체계가 망가진 그는 신부전증 외에도 갖가지 질환으로 고생했다. 하지만 김효성도, 진치우도 신해범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진치우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신해범에게 늘 뭉뚱그려서 말했다. 치료 시기를 놓쳐서, 나이가 들어서.
“노환이 다 그렇지 뭐.”
“구십 먹고도 멀쩡히 걸어 다니는 사람 있더만.”
“그런 사람이 어딨냐?”
“있어. 외국 뉴스에서 봤어.”
“뭔 해외 토픽 같은 걸 가지고. 그런 게 흔하면 뉴스에 뜨겠냐?”
진치우가 웃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홍삼 팩을 꺼내 신해범에게 던졌다.
“뭐야?”
“처먹어라. 과일은 귀찮아서 못 깎아 준다.”
“밥부터 먹지 그래?”
신해범은 웃으면서 쇼핑백을 가리켰다. 호월루에서 싸 온 오리백숙이 진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승원에게 대접한 특식만큼은 못하지만, 몸에 좋은 한방 약재를 가득 넣었으니 여름철 몸보신은 톡톡히 될 터였다.
진치우는 백숙을 맛있게 먹었다. 이마의 땀까지 닦아 가며 열심히도 먹었다. 신해범은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엄승원 함풍 내려갔다.”
“아. 응.”
진치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저질을 계속했다.
“우리 옛날얘기도 했다.”
“옛날얘기?”
“최금호.”
“갑자기 그 새끼 이름을 왜 꺼내. 밥맛 떨어지게.”
“그 새끼 관련해서, 지금껏 너한테 얘기 안 한 게 있어.”
“…뭔데.”
신해범은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마땅히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
“그러니까 뭔데.”
“정말이야. 일부러 감춘 거 아니다.”
“그건 내가 들어 보고 판단할 테니까 말해.”
“처음부터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진치우는 플라스틱 수저를 든 친구의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지간한 사람은 모를 만큼 가느다란 떨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렴, 저놈이랑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그래도 한때는 형님 동생 하던 사이인데. 내가 좆나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의지했던 사람인데. 출세하고 싶어서 손바닥에 불나게 여기저기 비비고 다니는 꼴 못 본 것도 아니고. 난 그 인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알어.”
진치우는 밥을 한술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퍽퍽한 오리 살을 씹어 삼킨 그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땡전 한 푼 못 받았잖아.”
그는 신해범이 뭐라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괜찮아. 그때도 말했지만 괜찮아. 나랑 기 소령한테 미안할 거 없어. 나나 걔나 총통이 내린 포상금 받느니 혀 깨물고 뒈지는 게 나았고. 애새끼들 속인 건 마음 안 좋긴 한데, 그래도 성금 모아서 치료받게 해 줬으니까 됐어. 그 돈 다 누가 모아 왔는데. 야, 넌 할 만큼 했어.”
“포상금 가로챈 거 모른 척할 테니까 지원하자고 했어. 자강 1도.”
백숙을 떠먹는 진치우의 시선은 볼륨을 줄인 텔레비전을 향했다. 총천연색의 실내 스튜디오에서 연예인이 떼거리로 나와 토크쇼를 했다. 자막이 워낙 잘 돼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내용을 따라갈 만했다. 진치우는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는 데 익숙하기도 했다.
“그런데 안 된대.”
신해범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냥 내버려 두면 해결될 일 들쑤시지 말래. 또 뭐라고 했더라? 나만 죽으면 끝나는 일도 아니라고 그랬나?”
자기에게 불똥이 튀지 않으면 지원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최금호의 말마따나, 양민 학살은 하급 군인 몇 명이 옷을 벗는다고 무마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죽인 거냐?”
“응.”
마침내 고기 한 점, 국물 한 방울까지 해치운 진치우가 말했다.
“기 소령은 알았냐?”
“그러니까 같이했지.”
가스 폭발 사고 ‘위장’은 기우희의 전문 분야였다. 어머니 배 속에 잉태된 순간부터 투쟁해 온 전사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래. 알았다.”
“화 안 내?”
“내가 뭐 잘났다고 화를 내냐?”
진치우는 빈 그릇을 쇼핑백에 던져 넣었다.
“사고였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애초에 너랑 기우희가 한 짓 같기는 했어. 방법이 걔가 지 엄마 죽인 거랑 똑같잖아.”
“근데 왜 지금까지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서.”
진치우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 핵폐기물 쓰레기야 나도 좆나게 싫어했고, 애초에 네가 하는 일에 내가 왜 의문을 갖겠냐?”
신해범이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 대고 눌렀다.
“감동이다. 치우.”
“지랄하네.”
병실 이곳저곳의 잡다한 생활 쓰레기를 쇼핑백에 모아 담으며, 진치우는 목구멍의 뜨거운 덩어리를 삼켰다. 지금 친구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이런 모습일 터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별로 관심도 없는 척. 평소에 투덜거리던 자기 모습 그대로.
최유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한 사람한테 부담을 준다는 게?”
“…….”
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해범을 옹호한 자신에게 놀라서.
최유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제나 팀의 리더로서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는 신해범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신해범이 처했던 상황에 자기 자신을 대입해 버렸다. 자기라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를 이끄는 대장 역할이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그게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응? 뭐냐니까?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야?”
류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아주기잖아요.”
“몰아주기?”
“한 사람한테 다 시키는 거요.”
신해범을 변호하는 건 아니었다. 죽어도 그건 아니었다. 다만, 최유신은 자기들이 팀이라고 했다.
팀원끼리 힘을 합쳐서 역경을 헤쳐 나가기에 팀이었다. 능력 있는 한 사람을 방패로 내세우고 자기들 몸 사려서는 안 됐다. 그건 같은 팀이 아니라 짐이었다. 내버려야 할 짐.
최유신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야. 그래도 우리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어색함은 감출 수 없었다. 류진은 재빨리 저자세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아니 뭐… 괜찮아.”
때마침 들려온 노크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한참을 더 어색한 분위기로 있었을 터였다.
최유신이 고개를 쭉 빼고 말했다.
“문 안 잠겼습니다!”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류진이 재빨리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소령님.”
“너 여기 있었냐.”
“건조기 다 돌리고 잠깐… 이제 가 보겠습니다. 말씀 나누세요.”
“아니, 그냥 있어. 어차피 너한테도 용건 있었다.”
기우희는 들고 온 한 무더기의 쇼핑백을 류진에게 떠안겼다.
“이게…?”
“뭐냐?”
최유신이 쇼핑백에 관심을 보였다. 기우희는 서슴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그가 미리 만들어 둔 시원한 보리차를 꺼내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거 비위생적이게 참.”
최유신이 종이컵을 건네줬으나 기우희는 무시했다. 그는 다 마신 보리차 병을 개수대로 휙 던져 넣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빈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군화 신은 두 발이 침대 밖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류진이 돌아본 최유신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 저 진상….
류진은 기우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장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기우희를 보면서 깨달았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최유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
“거기 의사.”
“뭐.”
“이따 후문 주차장으로 가 봐. 대충 건강해 뵈긴 한다만, 강아지들 상태가 어떤지는 전문가가 봐야 알지.”
“내가 수의사냐?”
“동물은 못 보나?”
“아니 사람이 무식하다, 무식하다 해도 정도가 있어야 그러려니 하지. 이건 뭐….”
최유신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지만, 류진의 목소리는 밝았다.
“강아지들 지금 밖에 있어요?”
“그래.”
“11층에 있는 줄 알았어요. 호월루에서 직접 오셨다고….”
“아까 갔다. 너 만나고 가라고 했는데 바쁜 애 귀찮게 하지 말라더라. 대신 그거, 다 네 거니까 가져가서 봐라.”
류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왜, 연지동 얼굴 못 봐서 서운해?”
“아뇨… 괜찮습니다.”
류진은 품에 안은 쇼핑백들을 내려다봤다. 기우희가 힌트를 줬다.
“하나씩 천천히 입어 봐.”
“우와, 좋겠다야.”
최유신이 감탄했다.
“신 사장 씀씀이 후하네.”
“그쪽 건 없으니까 신경 꺼.”
“아 누가 뭐래?”
기우희와 최유신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콩트처럼 들렸다. 류진은 쇼핑백을 침대에 내려놓고 살펴보았다. 제일 큰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는데, 최유신이 한번 입어 보라고 말했다.
“저기 캐비닛 열면 거울 있어.”
“괜찮습니다. 이따가….”
“입어 봐. 혹시 안 맞으면 사이즈 바꿔야 하니까.”
“저… 정말 죄송한데 지금 빨래 정리하러 가 봐야 해서요. 이따가 입어 보겠습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류진이 후다닥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빨래 바구니에 쇼핑백까지, 짐이 많아 한 번에 들기 어려웠다.
“동작 그만.”
기우희의 서늘한 목소리에, 류진의 손이 딱 멈췄다.
“너 그거 반품할 생각이지.”
류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마라. 연지동이 기껏 가져온 건데, 돌려받으면 엄청 서운해할 거다.”
“그래, 선물을 그대로 돌려주는 건 예의가 아니지.”
최유신이 거들었다.
“특히 옷 같은 건 마음에 안 드니까 도로 가져가라는 거 같잖아.”
“그런 거 아닙니다!”
“알아. 근데 준 사람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야.”
“하지만 저는 이미, 이미… 너무 많이 받았는데요.”
“어른이 주시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틀에 박힌 소리도 기우희가 말하니 듣기 싫지 않았다. 신해범이었다면 다를 것이다. 류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쇼핑백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입어라도 봐. 나중에 정말 부담스러워서 돌려주더라도, 선물해 준 사람 성의 생각하면 그 정돈 해야지.”
그리고 막상 입어 보면 마음이 바뀔 거다. 기우희가 웃었다. 최유신이 쇼핑백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라, 야. 보니까 다 브랜든데 좋은 옷인가 부다.”
류진은 머뭇거리며 쇼핑백을 열었다. 간절기용 트렌치코트였다. 따뜻한 캐러멜색. 펼쳐서 몸에 대어 보니 무릎 밑으로 살짝 내려오는 기장이었다. 소매 길이는 맞는데 품이 약간 컸다. 류진이 움직이자 트렌치코트 자락이 펄럭펄럭했다. 최유신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게 그건가 보다. 오버핏. 마른 애들이 저렇게 입는 게 좋대. 체형 커버되고….”
“댁은 뭐 알고 얘기하는 거요?”
“암요! 제가 또 패션 잡지 보는 남자 아닙니까. 요즘은 관리하는 남자가 대세야.”
기우희가 담배를 피우며 피식거렸다. 그놈의 패션 잡지. 아무래도 최유신은 자기 의무실에 드나드는 블랙홀의 존재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거울 앞에 선 류진은 옷을 앞뒤로 살펴보며 어색해했다.
“좀 큰데….”
“괜찮아, 괜찮아. 저렇게 입는 게 유행이야.”
“그런가요?”
기우희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진짜 유행 맞아?”
“아 왜. 귀엽구만.”
“펭귄 같은데.”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류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최유신이 기우희를 타박했다.
“잔칫집에 똥물을 뿌려라, 아주.”
기우희가 턱을 치켜들며 ‘뭐’ 했다. 패션에 대한 두 사람의 철학은 정반대였다. 자기 체형에 맞는 스타일을 구축하는 자와 유행을 따르는 자. 기우희는 ‘그 옷은 너한테 안 어울려’를 넌지시 돌려 말했다.
“정 이병, 다른 것 좀 입어 보지.”
“아! 예.”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요란했다. 다음 옷은 라이더 재킷이었다. 언뜻 검은색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푸른색이었다. 지금 입은 제복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거울을 보던 류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게 괜찮네.”
기우희의 평가도 후했다. 옷자락을 만져 본 최유신이 단숨에 때려 맞혔다.
“양가죽이다. 이건 진짜 비싸 보이는데.”
“그러게. 명품 옷 입으니까 우리 꼬꼬 연예인 같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류진은 호월루 이름이 적힌 큼지막한 쇼핑백을 달랑달랑 흔들고 있는 신해범과 눈이 마주쳤다.
“몸보신하고 싶은 사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알이 뻑뻑하고 목이 말랐다. 권세혁은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류진이 누웠던 자리는 텅 비었고, 눌린 베개와 구겨진 시트만이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일어나 앉는데 등줄기가 저릿저릿했다. 권세혁은 앉아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두통 때문에 시야가 어질어질했다.
소금 푼 물을 텀블러에 가득 채워 마셨다. 한 통을 전부 비웠다. 토기를 참으려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권세혁은 침대 밑으로 들어간 휴대폰을 찾아 류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나 지금 일어났어. 형 어디?」
빨래하러 간다고 했었나. 권세혁은 세탁실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전송하려다가 말았다. 이런 식으로 굴면 류진이 싫어할 것 같았다. 집착하는 듯이 보이니까.
권세혁은 책상 밑에 처박아 둔 보스턴백을 끄집어냈다. 전자 담배를 가지고 방을 나섰다. 복도에도 창문이 있었지만,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데가 좋을 것 같았다. 방은 안 된다. 류진이 돌아왔을 때, 방구석에 틀어박혀 담배 뻑뻑 피우는 남자를 보면 기분이 안 좋을 테니까.
2층 비상구로 갔다. 문을 잡아 여는 순간 안쪽에서 ‘어’ 소리가 들렸다. 권세혁은 재빨리 말했다.
“경례는 됐습니다.”
강인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자님.”
“편하게 피우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함풍 2도 설명회 전에 만난 강인우 대위였다. 류진의 룸메이트.
권세혁은 그가 혼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계단에 냄새가 진동했다. 급하게 손을 내리고 몸을 튼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점심시간은 끝났을 텐데.
물론 권세혁은 그런 걸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공범이 된 것 같아 묘하게 기분 좋았다. 자신의 손에도 길쭉한 전자 담배가 들렸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권세혁은 비상구를 나서려는 강인우를 불러 세웠다.
“같이 피워요. 강 대위 그렇게 가면, 꼭 내가 쫓아내는 거 같잖아.”
강인우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옅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권세혁에게도 불을 내밀었지만, 그에겐 라이터가 필요 없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당연히.”
권세혁은 어깨를 쭉 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어 섰다. 깡패한테 칼 맞았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다.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왕자가 되어서는 깡패에게 당하느냐고 비웃음깨나 샀을 터였다.
당당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일 것이다.
강인우는 권세혁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가요?”
“일대 다수였잖습니까. 왕자께서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압니다.”
“…….”
“왕자님께선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거기 있었던 사람이 신해범 준장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죠. 일대 다수고 나발이고, 팔다리에 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끝냈을 겁니다. 그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 한들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겁니다.”
“지금 날 위로해 주는 겁니까?”
강인우는 담배 연기를 내뱉은 뒤 입을 열었다.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신해범 대장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이라… 뭐, 싸웠느냐고요?”
강인우는 웃음을 삼켰다. 제 딴에는 좀 더 정중하게 물어보려 했다. 어른다운 표현으로 에둘러서. 왕자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권세혁은 강인우의 망설임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그렇게 티 나요? 싸운 거?”
강인우는 태연하게 담배를 피웠지만, 담배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해범과 권세혁의 사이가 틀어졌다. 적어도 신해범에 대한 권세혁의 신뢰는 예전 같지 않았다. 최석준 때문일까.
강인우는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사람들은 신해범과 권세혁, 둘이 힘을 합쳐서 최석준을 쫓아냈다고 인식했다. 장승희가 신해범의 손을 들어 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권세혁은 거칠게 연기를 내뿜었다.
“사람이 한결같을 수는 없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최석준 숙청의 여파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동안 신해범은 헌병대에 붙들렸고, 권세혁 왕자는 부상을 이유로 언론의 관심을 피했다. 둘 다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함풍 2도 사태의 주역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조용했기에 추측성 루머가 넘쳤다. 무수한 소문들 가운데 신해범과 권세혁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두 사람 중, 힘의 균형이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느냐는.
신해범과 권세혁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대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물론 권세혁은 줄곧 신해범을 존경하는 인물로 언급해 왔고, 신해범 또한 권세혁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하지만 계급도, 나이도, 성장 과정도 다른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한마디로 물과 기름이었다.
지금까지 그 둘을 섞어 준 건 권주혁이었다. 그가 유화제였다. 하지만 지금 권주혁 군벌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는 권세혁과는 달리 신해범은 권주혁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숙부와 조카 사이에 끼인 신해범은 어떤 일을 해도 한쪽에서는 칭찬을, 다른 한쪽에서는 원망을 들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 차이가 두 사람 간의 불화를 야기하지 않았나… 강인우는 추측했다. 풍기 교육대 주가 폭락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유라. 글쎄요. 강 대위가 맞춰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 무얼 알겠습니까.”
강인우는 자신을 낮추고 하하 웃었다.
“강 대위님, 몇 살이라고 했죠?”
“서른다섯입니다.”
“결혼했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머리가 멍해졌다. 다행히 왕자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강인우는 이런 질문에 익숙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나이쯤 되면 ‘여자 친구 있어요?’ 보다 ‘결혼하셨나요?’를 더 많이 듣는다.
강인우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일 열심히 했나 보네요.”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강인우는 요령 좋게 얼버무렸다. 일하면서도 만날 사람들은 다 알아서 만나는데 저는 참, 그게 어렵네요, 하고 우는소리도 빼놓지 않고 덧붙였다.
“애인은요?”
거봐.
“하하, 아직….”
강인우는 말끝을 얼버무리는 ‘척’하면서 권세혁의 눈치를 살폈다. 다음 말은 아마도 ‘왜요? 강 대위 정도면 괜찮은데?’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강인우의 예상과는 달리 권세혁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마침내, 권세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습니까?”
“…….”
“좋아해 본 적은요?”
강인우는 혀 밑에 고이는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집요하게 캐묻는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자기가 해당 부분에 대해서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떠보는 이유는 상대방이 비밀을 지킬 만한 상대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이고.
“누굴 좋아해 본 적은 있습니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해요?”
강인우는 권세혁을 응시했다. 보이지 않는 공을 손바닥에 쥐고 굴리는 기분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결심한 뒤에 따라오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감정은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들어요.”
“많이 변합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강인우는 딱 잘라 대답했다.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였죠.”
“연적은 있었습니까?”
무심코 대꾸하려던 강인우의 입술이 다물렸다. 권세혁이 뭔가를 아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간담을 서늘케 했다.
설마….
강인우는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끄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혓바닥이 뻣뻣했다. 오은정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지만, 그건 비밀을 거래에 써먹는 자들 때문이었다. 강인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딸의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인혜에게는 은행장이라는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필요했다. 비록 한집에 살지만 서먹하고, 각방을 쓰고, 식사도 따로 하면서 각종 모임에서만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는 쇼윈도 부부일지언정 그들은 이혼하지 말아야 했다.
강인우는 강인혜가 사회에서 정립한 ‘이상적인 가족 형태’에서 벗어난 가정의 딸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자기가 어린 시절에 겉돌았던 테이블을 기억했다. 도자기 인형들의 모임. 그 애들은 하나같이 성적이 좋았고, 학교 선생들이 조심스럽게 대했으며, 식사 예절이 몸에 배어 있었다. 자국어를 포함해 삼 개 국어 정도는 유창하게 구사했고, 소리 없이 웃었으며, 완벽하게 교정된 치아를 갖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중산층 집안에서 사이좋은 부모님의 보호 아래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자란 아이들.
강인우는 그 애들이 거북스러웠다. 끼어 있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완벽하지 않은 집안 환경에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그 사실을 누가 걸고넘어지면서 무리에서 쫓아낼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 불편한 감정들이 십 대 시절 내내 강인우를 괴롭혔다. 누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딸이 자기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연적이라….”
강인우는 조그맣게 신음했다. 그에게 연적이란 아버지였다. 그 사실은 왕자가 아니라 총통이 다그쳐도 말할 수 없었다.
강인우는 과감하게 한 발짝 내디뎠다.
“왕자님. 제가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정류진 이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류진이 형이 왜요?”
“그를 각별하게 여기시는 듯해서요.”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소문은 당사자만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권세혁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뽀얀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연기가 흩어지고 권세혁의 얼굴이 강인우의 시야에 나타났을 때, 그는 뜻밖에도 웃고 있었다.
“떠드는 건 자유죠. 문제는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없느냐지.”
말은 공기를 통해 번지는 바이러스와 같았다. 감염 범위가 넓고 빠르게 퍼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이 보안을 중요시하는 특수한 환경이라는 사실이었다.
권세혁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강인우는 즉각 물러섰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뜻이 느껴졌다. 권세혁은 입꼬리를 샐쭉 올렸다.
“보안이 중요한 거야, 내가 말 안 해도 강 대위가 더 잘 알겠죠.”
“예.”
“나 한 사람한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잖아요. 알죠?”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밖이 시끄러운데, 혹시 그것도 내 소문 때문인가?”
강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호월루에서 온 손님 때문입니다.”
“호월루?”
“군견 후보생들을 데려왔습니다. 풍산개 새끼 여섯 마리라는데, 저도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강아지?”
불쑥 흥미가 솟았다. 강아지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후문 주차장 공터에 사육장이 마련된 거로 압니다.”
강인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를 뜨고 싶은가 보았다. 권세혁은 순순히 그를 보내 주었다.
“수고해요.”
“예.”
문이 닫혔다. 권세혁은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웠다. 강아지라. 신해범이 그런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지 몰랐다. 류진이 형 오면 같이 구경 가야지.
류진은 백숙을 먹지 않았다. 밀봉된 플라스틱 그릇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보리차만 홀짝거렸다. 그는 신해범이 휴지통에 던져 넣은 호월루 쇼핑백을 도로 꺼내 접힌 부분을 손바닥으로 눌러 펴고, 그릇과 일회용 반찬 통을 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해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냐?”
“지금은 배불러. 나중에 먹을래.”
“지지리 궁상을 떨고 앉았다.”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그가 오 무서워, 우리 꼬꼬는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겠어, 능청을 떨었다. 상대해 줄 필요성도 못 느꼈다. 류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들어야 할 게 많았다. 한 팔로 플라스틱 바구니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옷과 백숙이 담긴 쇼핑백을 주렁주렁 든 채 휘청거리며 의무실을 나섰다.
신해범이 뒤따라왔다. 류진은 걸음을 재촉했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왜?”
“뭐.”
신해범이 툭 내뱉었다.
“나도 탈 건데. 왜, 안 돼? 이 엘리베이터가 네 거냐? 너 말고 아무도 못 타?”
류진은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서 할 일이 산더미였다. 유치하게 구는 신해범에게 에너지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신해범의 실루엣조차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깨에서 시작해 등을 타고 내려가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길도.
“하지 마라.”
“…….”
“하지 말라고 했다!”
신해범이 씩 웃었다.
“이제 봐 주네.”
“그러고 싶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손에 들린 쇼핑백들을 낚아채, 먼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안 타?”
신해범이 재촉했다. 류진은 눈을 내리깔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신해범은 2층에서 내리려는 류진을 붙잡아 벽으로 밀쳤다.
“왜 이래! 비켜!”
아무리 때리고, 밀치고 발로 차도 소용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을 단숨에 12층으로 데려다줬다.
“설명해.”
자리에 앉은 신해범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책상에 던졌다. 평범한 라이터처럼 보이지만 캠코더 기능이 있는 이 물건은 류진이 호텔에서 사용한 초소형 카메라였다.
“뭘….”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바구니를 안은 팔이 떨렸다. 세탁물이 무거워서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았다.
“뭘 설명하라는 건데.”
“몰라? 그럼 같이 보면서 얘기하자.”
신해범이 PC를 켰다. 모니터를 돌려놓으려는 찰나에 류진이 외쳤다.
“잠깐!”
“이걸 섹스 영상이라고 찍어 왔냐?”
류진은 말이 없었다. 신해범이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는 류진이 변명하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이렇게 찍히도록 의도했단 뜻이었다.
기우희가 준비한 카메라는 두 개였다.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벽만 찍었다. 다른 하나는 욕실 쪽이었는데, 화면이 수건으로 반 이상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식별이 가능한 건 목소리 정도였는데 그런 거야 얼마든지 가짜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얼굴 대문짝만하게 나온 사진이나 영상도 위조된 거라고 발뺌하는 마당에.
“…….”
“변명해, 정류진.”
“…….”
“할 말 없어? 그럼 담당자 쪼아야지.”
“아냐!”
류진은 빨래 바구니를 내던지고 신해범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전화기를 붙잡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알아.”
“근데 왜 모르는 척해?”
“…미안해. 잘못했어.”
“일부러 그랬지? 왜 그랬어?”
“…….”
“내가 맞춰 볼까? MVP랑 섹스 더 하고 싶어서.”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좆나 밝히는 년.”
진치우나 할 법한 모욕적인 소리였다. 류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귓구멍 막혔냐? 송곳으로 후벼 파 줘? 좆나 밝히는 년, 왕자 좆 맛이 너무 좋아서 눈깔에 뵈는 게 없지?”
“다시 말해 봐.”
신해범이 비웃었다.
“욕먹는 게 좋아? 근데 난 무한 반복되는 녹음기가 아니라서. 내가 욕하는 거 듣고 싶으면, 음, 바지 벗고 여기로 기어 올라와.”
그는 자기 책상을 탕탕 쳤다.
“다리 쫙 벌리고 눈웃음쳐 봐. 욕하면서 박아 달라고 해. 그럼 얼마든지 해 줄 테니까.”
류진은 주먹을 휘둘렀으나, 신해범의 얼굴 근처까지 가지도 못하고 막혔다. 신해범이 싸늘한 눈으로 류진을 노려보았다.
“뭐. 박아 준대도 불만이냐?”
“씨발 새끼! 개새끼! 길 가다 교통사고나 당해라!”
“우리 꼬꼬는 저주도 참 소박하게 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따위로 말해! 씨발 새끼, 엔조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엔조이 너나 해라!”
신해범이 웃었다.
“삐졌어?”
“지랄!”
류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걸론 제대로 찍었어.”
“그런데 다른 건 왜 엉망이야.”
“나도 뭐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지.”
행여 신해범에게 빼앗길까 봐, 류진은 재빨리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당신한테 필요하지만 없는 거. 그래야 내가 안전하지.”
“뭐로부터 안전해지고 싶은데?”
“몰라서 물어? 당신이 날 배신할 수도 있잖아!”
아주 잠깐 흔들렸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류진은 신해범의 이목구비에 웃음이 스며드는 모습을 보았다.
“이야, 우리 꼬꼬가 진짜….”
“원한다면 보여 줄 수 있어. 그래도 전송은 안 돼. 당신 뒤통수치겠다는 소리 아니야. 그냥, 그냥 나한테도 뭐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건 이상해.”
그건 대등하지 않잖아. 난 당신 꼭두각시가 아니야.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신해범이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아들었으면 방금 나한테 한 말 사과해.”
“뭐. 밝히는 년이라고 한 거?”
“그래! 빨리 사과해!”
“알았다.”
신해범은 두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이고 서더니, 이마에 책상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알면 됐어.”
“이제 허리 펴도 돼?”
“그러든가 말든가.”
안심한 류진이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바구니를 똑바로 세우고, 흩어진 빨랫감을 챙겨 담았다. 그때 소리도 없이 책상을 훌쩍 뛰어넘은 신해범이 류진의 등을 덮쳤다.
“아악!”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
신해범은 류진의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하지 마!”
바지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휴대폰이 바닥을 빙글빙글 돌았다. 류진이 손을 뻗었으나 신해범의 팔이 더 길었다. 휴대폰의 둥근 모서리가 신해범의 손끝에 닿은 순간이었다. 그는 별안간 손을 거두고 소리쳤다.
“야!”
신해범의 등에 올라탄 류진이 그의 귀를 물어뜯었다. 귀가 찢어지지는 않았으나, 동백실에서의 참사가 생각나 신해범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팔을 뒤로 뻗어 자신의 등에 매달린 류진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마른 몸을 낚아채 바닥에 깔아뭉갰다.
“이! 이… 이잇! 개새끼!”
신해범은 류진의 어깨를 잡았다. 똑바로 눕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몸을 팔다리로 찍어 눌렀다.
“애쓴다, 정류진.”
“무거워… 비켜.”
류진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오른손에 휴대폰이 쥐여 있었다.
“용케 잡았다?”
“비켜! 숨 막혀!”
신해범은 류진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눌렀다.
“아!”
“난 네가 다리 벌리고 있는 상상 하면 행복해지더라.”
“미친 개변태 새끼! 꺼져!”
신해범은 류진의 오른손을 잡았다. 휴대폰이 그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머리 굴리는 건 좋은데, 밑천을 너무 쉽게 까잖아.”
“비키라고!”
“앞으론 더 당당하게 말해. 내가 안 된다고 해도 끝까지 우겨. 그리고 네 밑바닥 드러내는 소리는 하지 마. 가진 패가 하나뿐이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거야. 차선책이 없으니까.”
“…….”
“그래도 잘했어. 아무나 함부로 믿지 않는 건 좋아.”
“…꺼져. 변태 새끼야.”
“근데 있잖아.”
헉. 류진은 숨을 들이켰다. 신해범의 손이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뜨거운 체온이 옷 위로도 느껴졌다.
“동영상 보여 주기 싫으면, 요 예쁜이나 좀 보여 줘라.”
“싫어! 꺼져!”
“자꾸 꺼지라고 하지 말고.”
신해범의 손이 바지 속으로 쑥 들어왔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겠다. 귀찮아서, 흘러내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여태 그냥 입고 다닌 게 문제였다.
“싫어! 싫다고! 건들지 마!”
허리를 좌우로 비틀었다. 다리를 버둥거리며 신해범을 밀어내려고 했다. 거부하면 할수록 짓누르는 무게가 더해졌다. 류진은 신해범의 밑에 깔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좀 보기만 한다니까.”
“당신이 언제는…!”
저항이 무색하게 바지가 쓸려 내려갔다. 신해범은 혀를 차며, 팬티를 붙잡고 버티는 류진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악!”
그는 류진의 양 손목을 붙잡은 채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었다. 보드라운 체모에 뺨을 비비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꼬꼬야 안녕?”
류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해범은 그의 성기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고 주물렀다.
“볼수록 괜찮은 물건이야. 너도 운이 좋았으면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이라는 걸 꾸릴 수 있었을 텐데.”
애도 낳고. 신해범이 웃었다.
“너 닮았으면 예쁠 거야. 여자애든 남자애든. 근데 성격이 류연비면 어떡하지?”
“닥쳐! 씨발 새끼, 닥치고 꺼져 버려 미친놈아!”
“우리 예쁜 꼬꼬를 두고 내가 어떻게 꺼지냐.”
“우리 누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개새끼야!”
“알아. 걔 성격 더러운 거.”
“아니야!”
“너한텐 좋은 누나였겠지. 나한텐 완전… 음….”
신해범은 귀두부터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즉각 흥분하는 성기가 느껴졌다.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제는 잘 느끼는 류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해범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라면서 허리를 앞으로 내미는 건 뭔데. 신해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일부러 입소리를 크게 냈다. 타액으로 흠뻑 젖은 성기를 류진의 눈앞에 보여 줬다가 다시 도로 입에 넣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한참을 빨았다. 정액을 내보내려는 귀두 끝을 혀끝으로 누르고 있으니 류진의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으아. 아. 앗. 앗.”
류진의 군화가 바닥을 차고 긁었다. 신해범은 쉽게 사정시켜 주지 않았다. 버둥거리는 류진의 허벅지를 꽉 잡아 바닥에 누르고,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의 성기를 빨았다. 체모까지 타액으로 푹 젖고서야 류진은 하반신을 덜덜 떨면서 사정할 수 있었다.
“아… 하아….”
신해범이 고개를 들었다.
“기분 좋지?”
그가 입술을 핥으면서 위로 올라왔다. 류진은 상의를 걷어 올리는 신해범의 손을 막지 못했다.
“여기도 꼬꼬가 있네.”
신해범은 류진의 유두에 번갈아 입을 맞추고 웃었다.
“안녕 꼬꼬들아?”
“나 안 해.”
“뭘?”
“나, 당신이랑 그거, 안 해….”
“그거가 뭔데?”
류진이 울먹거렸다.
“안 해. 안 할 거니까 저리 가…!”
“네 엉덩이 사이에 내 좆이 들어가서 앞뒤로 움직이는 행위를 말하는 거지? 그거 이름이 섹스야. 자 말해 봐, 섹스.”
류진을 덮쳐누른 신해범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신음 소리까지 내는 모습이 부정할 수 없는 유사 성행위였다.
“변태 새끼!”
“응. 기분 좋다.”
신해범의 팔꿈치가 류진의 귀 옆에 나란히 놓였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원래 보일 듯 말 듯 한 게 더 섹시해. 그거 알았어?”
“개소리…!”
“나랑 할 때랑은 완전히 다르던데.”
버둥거리던 류진의 몸이 굳었다. 신해범의 엄지가 관자놀이 흉터로 향했다. 류진은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집요하게 흉터를 쓰다듬었다.
“너 목소리 되게 섹시하더라.”
“그런 말 하지 마.”
“피드백이야. 들어.”
버둥거리던 류진의 움직임이 멎었다. 찌푸린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뭐?”
“내가 걔였으면 넣기도 전에 싸 버렸을 거야.”
신해범은 그렇게 말하고 류진을 뒤집었다. 냅다 앞으로 기어가려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잡아 바닥에 눌렀다. 이마를 찧은 류진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이고, 이런.”
신해범의 손바닥이 류진의 엉덩이를 갈겼다.
“개새끼야!”
“하도 먹음직스러워서 진짜 먹을 수 있는 건지 확인 좀 해 봤다.”
“못 먹어. 그러니까 좀…!”
“이걸 왜 못 먹어?”
뽀얀 엉덩이를 움켜쥐고 비틀며 신해범이 웃었다.
“벌써 몇 놈이 맛봤는데. 그래도 내가 제일 많이 먹을 거야. 왜냐면 나는 요리사잖아. 요리사는 자기가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 딴 놈들은 요리사가 그릇 내줄 때까지 숟가락 쭉쭉 빨면서 기다리든지 말든지.”
신해범이 킥킥거렸다.
“이건 진짜 특등품이야. 정말 귀한 손님한테만 대접할 거야.”
볼깃살을 주무르는 손길이 거칠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류진은 헐떡거리며 앞으로 기었다. 움켜쥔 휴대폰이 바르르 떨렸다.
“동영상 보여 줘. 네 휴대폰으로 찍은 거.”
“으….”
“물건을 봐야 믿지. 일 엉망진창으로 해 놓고 겁나서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나, 당신한테, 흑, 거짓말 안 해….”
“증명해 봐. 말로는 뭔들 못 하냐?”
“보여 주면.”
류진의 어깨가 흔들렸다. 창백한 얼굴이 뒤돌아보았다.
“보여 주면 안 할 거야?”
희고 보드라운 엉덩이를 주무르던 신해범은 숨을 삼켰다. 쟤가 저런 얼굴이었던가. 저렇게 눈꼬리를 살짝 휘면서 상대방을 떠볼 줄 아는 녀석이었던가.
어린애처럼 울부짖는 것밖에 못 하는 줄 알았다. 몸으로 거래하는 법이라곤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 천치인 줄 알았다. 지금은 아니다. 신해범은 류진을 바라보았다.
“아프단 말이야. 어제 그렇게… 해서. 그리고 당신은 원래, 원래 심하게 하잖아. 매번 나만 힘들고 아프잖아!”
“저번엔 기분 좋았잖아.”
왜 내가 변명처럼 말하고 있지? 신해범은 궁금했다. 하지만 곧,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는 류진의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에 힘을 넣었다. 검지로는 부어 있는 구멍 입구를 쓸었다.
“보여 줘.”
“그럼 안 하겠다고 약속해.”
“봐서?”
“그딴 게 어딨어!”
양손으로 휴대폰을 감싸 쥔 류진이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알았어.”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류진의 등으로 엎어졌다.
“아윽…!”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덤프트럭이 뒤를 덮친 듯했다. 류진은 엉덩이 사이에 비벼지는 묵직한 살덩이를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은근한 목소리로 신해범이 말했다.
“같이 보자.”
신해범이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류진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꼼짝하지 않았다.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이 느껴졌다. 최대한 바닥에 몸을 붙여 보았지만, 신해범은 꾸역꾸역 손가락을 움직여 유두를 만졌다.
“기대된다.”
“개, 거지 같은, 소리….”
“아이 떨려.”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류진은 어깨를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 고개를 아무리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신해범은 집요하게 관자놀이 흉터를 건드렸다. 핥고 빨고, 송곳니로 긁기까지 했다.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떨어졌다. 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신해범은 휴대폰을 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안 돼!”
“안 뺏어, 안 뺏어. 우리 꼬꼬가 직접 보여 주는 게 중요하니까.”
“안 한다고 약속해. 당신이 먼저 해.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들 생각하면, 당신이 그 정도는 먼저 약속해야 해.”
“그래. 약속할게.”
신해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간 안 한다고 약속해.”
“진짜지….”
“진짜로. 강간 안 해. 약속한다. 자, 손가락.”
류진은 코앞에 있는 손가락을 무시했다. 부쩍 유치해진 신해범의 장단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이거.”
류진은 휴대폰을 가로로 들었다. 신해범이 달아오른 성기를 엉덩이에 비벼 댔지만, 강간당하는 것보다야 반찬감이 되는 게 나았다. 등 뒤에서 집요한 시선이 떨어졌다. 류진은 신해범이 어떤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지 알았다.
“보면서 하든지 말든지… 나한텐 하지 마.”
신해범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깜찍한 정류진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옜다, 이거나 보면서 자위해라, 이 발정 난 짐승 새끼야.
권력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런 권력에도 약점은 있다. 바로 시간이다.
평화로운 시간은 권력을 나태하게 만든다. 혁명가는 독재자가 힘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을 노린다. 그가 게을러지기를 기다린다. 독재자가 현상 유지를 위해 쏟아붓던 에너지를 더는 투자하지 않을 때, 그는 과거에 미처 토벌하지 못한 정적의 핏줄에게 허리를 맞는다. 혹은 이미 목을 비틀어 땅에 묻었다고 생각한 정의가 관짝을 부수고 솟아올라 징벌의 철퇴를 내리기도 한다.
나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다.
신해범은 류진의 손을 잡았다. 깍지 낀 손가락이 땀 때문에 미끄러졌다. 그는 재차 류진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단 일 초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예쁘다.”
정액이 말라붙은 뽀얀 엉덩이를 보며 신해범이 말했다. 그는 류진과의 약속을 지켰다. 삽입하지 않고서 갔다. 볼깃살 사이에 성기를 끼워 넣고 빠르게 마찰시키는 방법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마른 몸이 흑, 흑 소리를 내며 앞으로 밀렸다. 후려치는 힘이 버티는 힘을 압도했다. 대리석 바닥에 쓸린 류진의 팔이 벌게졌다.
“안 되겠다.”
신해범은 류진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힘주어 안으면 부서질 듯 마른 몸, 소중하게 아껴 주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질겅질겅 씹어 삼키고 싶었다. 그 몸뚱어리를 꽉 안고 마운팅했다.
류진은 납작하게 짓눌린 채, 신해범이 시키는 대로 두 손으로 휴대폰을 부여잡은 채 무자비한 허리 짓을 견뎌 냈다.
“사, 살살. 좀 천천히, 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참아.”
신해범의 목소리가 급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류진은 가쁜 숨을 터뜨리며 키득거렸다. 신해범을 기만하는 게, 이렇게 짜릿한 기분일 줄 몰랐다. 중국 가서 맹수 조련사를 해 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그중에서도 가장 흉포한 신해범을 안달복달하게 했으니 어떤 맹수라도 길들일 자신이 있었다.
까칠한 음모가 볼깃살에 비벼졌다. 마찰열 때문에 붉어진 엉덩이를 신해범의 큰 손이 후려갈겼다. 류진이 어깨를 확 움츠렸다.
“아!”
찌릿찌릿한 통증이 경추를 타고 올라왔다.
“왜?!”
“잘 안 보여. 똑바로 들어.”
신해범이 귀를 물어뜯었다. 그 순간 엉덩이에 뜨끈한 액체가 쏟아졌다. 정액이 말라붙은 엉덩이가 또다시 축축해졌다. 골 사이로 흘러드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류진은 이를 악물고 두 팔에 힘을 줬다. 그래, 저 짐승이 이만하면 많이 참는다. 엎드린 자세도 마음 편했다. 발기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했다. 신해범의 뜨겁고, 큰 손이 앞으로 뻗어 오기 전까지는.
골반을 어루만지던 손이 슬금슬금 아랫배를 건드렸다. 류진은 무릎과 허벅지에 힘을 줬다. 차가운 바닥에 하반신을 꼭 붙였다. 어떻게든 가리고 싶었다.
“왜 또…!”
“너도 가야지.”
“난 됐어. 필요 없으니까 당신이나 실컷….”
“으으응. 아냐.”
신해범이 칭얼거렸다.
“너 자지러질 때 얼마나 예쁜데.”
그는 집요하게 손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몸을 들치고 자기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체모를 가차 없이 당기는 손길에 류진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신해범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제법 단단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흐… 아파….”
“이제 기분 좋아질 거야.”
류진이 허리를 비틀었다.
“싫다니까! 왜 자꾸 그래!”
등 뒤에서 신해범이 웃었다. 관자놀이 흉터를 핥는 혀가 느껴졌다. 그의 혓바닥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하반신이 욱신욱신했다. 류진은 한 손을 뒤로 뻗어 신해범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는 잠자코 맞아 주며 빙글빙글 웃었다. 관자놀이 흉터를 건드리면 류진이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버튼을 누가 만들었게? 바로 나야.
“이, 잇! 싫다니까! 싫…!”
“어떻게 만져 주면 좋아? 흔드는 거? 주무르는 거?”
“됐다고! 당신이나 실컷, 아!”
“같이 가자.”
신해범이 입맛을 다셨다. 류진은 숨이 막혀 헐떡거렸다. 내 몸이 이상하다. 이게 다 신해범 때문이다. 신해범의 손이 유륜을 쓰다듬고 손끝을 세워서 유두를 누르면,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않았던 신체 부위가 불쑥 솟아올라 존재감을 드러냈다.
위쪽만 이런 게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랫도리였다. 신해범이 장난감처럼 만지고, 치대고, 잡아당기는 이….
류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쁘다.”
훌쩍거리는 류진의 귀에 대고, 신해범이 속삭였다.
“너 진짜 예뻐.”
“지, 랄.”
“진짠데.”
신해범의 시선은 휴대폰에 못 박혀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휴대폰 볼륨을 높였다. 마침 촬영 감독이 바뀌었다. 류진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은 권세혁이 카메라 렌즈를 높이 올려 류진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다리를 활짝 벌린 채 그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한눈에 담겼다.
아슬아슬하게 팽창한 구멍을 찢어발길 듯 거칠게 드나드는 성기가 보였다. 쿨쩍대는 소리,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류진은 눈물, 콧물,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빨갰다. 이상했다.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권세혁의 눈에는 내가 저렇게 보였겠구나.
류진은 눈을 감았지만, 신해범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류진의 성기를 흔들며 키득거렸다.
“왜, 예쁜데.”
“이상해.”
“괜찮아. 섹시해.”
“이상해! 이상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누가 더 좋아?”
신해범의 질문에 정신이 멍해졌다.
“뭐?”
“나랑 하는 거랑, 쟤랑 하는 거랑 뭐가 더 좋냐고.”
숨소리가 거칠다. 말하는 속도가 빨랐다. 신해범이 흡, 소리를 내더니 류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부르르 떨었다.
뜨뜻한 정액이 엉덩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진짜 못 넣어?”
“안 하겠다고 약속했어. 당신 입으로 분명히 말했어.”
“네가 원하면 강간이 아닌데.”
송곳니가 목에 박혔다. 류진은 신음을 삼켰다.
“안 돼. 절대 안 돼. 싫어. 하지 마. 안 하기로 약속했어.”
“돌아 버리겠다.”
“대, 대장은 부하한테 한 약속 지켜야 해.”
신해범이 큰 소리로 웃었다. 와락 터지는 웃음에 류진은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너무 일렀다는 걸, 등에 맹수를 업고 헐떡대면서 맹수를 길들였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걸,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거침없이 파고드는 순간에 깨달았다.
“이 개새끼! 개새끼야!”
류진의 손에서 휴대폰이 빠져나갔다. 신해범이 빼앗아 갔다. 류진은 맥없이 손을 휘저었으나 소용없었다.
영상은 아직 재생 중이었다. 권세혁의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류진이었다. 신해범은 휴대폰을 대리석 바닥에 내팽개쳤다. 액정이 깨지든 말든 신경 안 썼다. 그는 자기 밑에 깔려 있는 류진에게만 신경 썼다.
“우리 꼬꼬….”
마른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 꼭 아크릴판에 박제 당한 개구리 같았다.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뒤로 당겼다. 눈을 질끈 감은 류진이 신음했다.
“나쁜 새끼.”
“언제는 아니었냐?”
“믿었는데.”
약속했잖아. 강간하지 않겠다고 그랬잖아.
류진이 울부짖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신해범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꼴을 보고도 좆이 식기는커녕, 부피를 더해 간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먹는 모습만 봐도 서는 것을.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칼을 놓아주었다.
“질투 나서 그래.”
“미친놈아. 이 나쁜 놈아.”
“진짜 섹시하다 정류진.”
그런 말 하면 내가 좋아할 것 같냐. 울음 때문에 뭉개진 발음도 사랑스러웠다.
빡빡해서 삽입이 쉽지 않았다. 어제 성관계를 한 몸인데도 그랬다. 신해범은 쿡쿡 웃으며 류진의 엉덩이에 묻은 정액을 훔쳐 구멍에 발랐다. 대퇴부와 사타구니로 흘러내린 것까지 그러모았다.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살덩이가 밀려 들어갔다. 아직 다 넣지도 않았는데 울음소리가 높았다.
“아파. 아프다고. 나 아프단 말이야 개새끼야….”
신해범은 눈을 질끈 감고 신음했다. 충분히 봐주고 있었다.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천천히 하는 중이었다. 약속을 깬 건 자신이니 이 정도 편의는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못 참겠어.”
“나쁜 새끼. 거짓말쟁이. 사기꾼. 야비한 놈… 아, 아악!”
한숨을 삼켜 가며 조금씩 밀어 넣던 성기를 세게 꽂았다. 퍼억, 소리와 함께 마른 몸뚱이가 앞으로 확 밀렸다. 신해범은 류진이 겨드랑 밑에 팔을 끼워 헐떡이는 몸을 끌어 내렸다.
“아아아… 악.”
그는 류진의 입에 자기 손가락을 물렸다. 혀라도 씹을까 봐 걱정됐다.
“예뻐.”
그만 까무러쳐. 밖에서 들으면 내가 사람 잡는 줄 알겠어. 신해범의 속삭임에 류진이 그의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아야야.”
신해범은 곧장 보복했다. 한 손으로 류진의 등허리를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한 뒤 성기를 뺐다가 한꺼번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불알이 엉덩이에 퍽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흐윽. 으윽. 시어어….”
고개를 떨군 류진이 흐느꼈다. 신해범은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엉덩이에 체모를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이흐나…!”
“뭐? 사기꾼이라고?”
“나흔 노마!”
“너무 좋아서 말도 못 하네.”
신해범이 킬킬 웃었다.
“너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
류진은 그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난 죽을 거 같다… 꼬꼬야….”
신해범은 허리 짓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멍과 입 안을 동시에 범하는 기분이었다. 이리저리 도망치는 혀를 붙잡아 슬쩍 잡아당기니 류진이 숨을 쉬지 못해 헥헥거렸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기둥에 착 달라붙어 빈틈없이 꽉꽉 조여 주는 내벽만큼이나.
복상사로 죽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이 엉덩이에 좆을 꽂아 본 놈들은 알 것이다. 그놈들은 날 비웃지 못할 것이다. 신해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류진의 군화가 바닥을 찼다. 신해범은 문득, 이 모습을 위에서 찍는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넓은 등에 가려져 정류진은 두 팔과 다리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바지가 발목에 걸린 채 두 발을 동동거리며 ‘박히고 있는’ 정류진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었다. 다른 놈이랑 뒹군 거 말고.
나랑 하는 거.
나랑만….
신해범의 목 빗근에 핏줄이 섰다. 불뚝거리는 핏줄을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 우묵하게 들어간 쇄골에 맺혔다.
“앗. 앗. 아으. 아아….”
내벽을 할퀴듯이 휘젓는 감각에 류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울었다. 차라리 주먹으로 얻어맞고 발로 차이는 게 나았다. 담뱃불이 얼굴을 지질 때도 이것보다는 괴롭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신해범이 몸속을 휘저을 때마다 내장이 눅진눅진 녹아내렸다. 그가 벌려 놓은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아픔보다 쾌락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류진은 신해범의 밑에 깔린 채 목 졸려 죽어 가는 사슴처럼 낑낑거렸다.
“아프기만 해? 아직도? 아직도, 그래?”
“흐아… 으아아….”
박히고, 쑤셔지고, 흔들리고. 류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에서 타액이 흘러내려 뺨을 적신 눈물과 섞였다. 전립선을 아무렇게나 누르고 찧어 대는 움직임에 눈앞에서 별까지 번쩍였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바닥에 사정했다. 몇 번에 걸쳐서 희멀건 정액을 쏟아 냈다. 등에 올라탄 맹수의 격렬한 움직임에 정액이 핏, 핏 튀었다. 부끄러워할 틈도 없었다. 사정하는 와중에도 핏줄이 투둑투둑 불거진 성기가 내벽을 때려 댔다. 숨 쉴 틈도 없이 자극이 왔다.
몸속에 뜨뜻한 감각이 퍼졌다. 류진은 바닥에 뺨을 대고 늘어졌다. 차가운 대리석에 뜨거운 얼굴을 식혔다. 등 뒤에서 신해범이 신음했다.
“정말 좋다….”
뜨거운 손가락이 눈두덩을 더듬었다.
“많이 우네.”
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자기가 누운 곳이 천장인지, 바닥인지조차 헷갈렸다. 어쩌면 그냥 허공에 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 신해범이 종용했다.
“안에다 싸 달라고 말해.”
류진은 힘없이 웃었다. 벌써 안에다 싸질러 놓고, 여태 안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 상태로는 할 수밖에 없었다. 신해범이 원하는 게 뭐든, 하라는 대로 해 버리고 벗어나는 게 유일한 살길이었다. 류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해 줘.”
“크게.”
“안에다, 해 줘!”
“중요한 게 빠졌어. 그리고 나한테 반말하지 마.”
“개새끼…!”
“응. 예쁘다.”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고, 드러난 목덜미에 키스했다.
“안에다… 싸 줘.”
“반말하지 말라고 했지.”
몸속에서 성기가 꿈틀거렸다. 신해범이 허리를 슬쩍 뺐다가, 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푹 꽂아 넣었다.
“흑!”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가슴으로 이동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유두를 힘껏 잡아당겼다. 류진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안에다 싸 주세요…!”
신해범이 웃는 소리는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가 내는 목울음 같았다. 그의 동작에 맞춰서 마구잡이로 흔들리며, 류진은 진짜로 사람 잡아먹는 맹수 우리에 던져져도 지금만큼 무섭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해범은 한참이나 흔들어 댄 끝에 정액을 쏟아 냈다. 정액을 뿌리면서도 허리를 앞뒤로 흔들어 가능한 깊은 곳까지 젖게 했다. 눅진눅진하게 풀어진 내벽에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빼낸 그가 참았던 숨을 토하며 목덜미를 깨물었을 때, 류진은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묽은 액을 사출했다. 정액이라고 하기 애매할 정도로 옅고 양도 적었지만, 그래서 신해범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꼬꼬야.”
신해범은 늘어진 류진의 몸을 뒤집었다. 빨개진 얼굴로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숨이 콱 막혔다. 가엾거나 안쓰러워서가 아니었다.
류진의 젖은 입술에 좆을 물리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신해범은 그의 체액으로 더러워진 바닥을 보았다. 지금 당장 청소하고 싶었다. 자기 혓바닥으로.
강아지들의 보금자리는 성재경이 함풍 2도로 출발하기 전부터 만들던 공간이었다. 후문 주차장 쪽에는 약간의 면적이 부족해 주차 공간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공터가 있었다. 담벼락과 맞닿은 화단을 없앤 뒤 땅을 평평하게 다지고 칸막이를 설치한 다음 개집까지 들여놓으니 제법 그럴듯한 공간이 완성되었다. 다만 성재경은 군견 후보생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휴가 아닌 휴가를 떠났다.
개집 앞에는 이미 구경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일반 직원들 틈에 정식 대원들까지 보였다. 권세혁은 후문 입구에서 서성이다 결국 2층 방으로 되돌아왔다. 강아지 보려다가 내가 구경거리 되게 생겼다.
이따가 류진이 형 오면 같이 구경 가야지. 지금은 좀 그렇고, 일반 직원들 퇴근한 저녁쯤에….
권세혁은 텀블러에 온수를 채웠다. 소금을 넣고 잘 섞이도록 흔들었다. 짜디짠 물을 마시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강인우가 말한 소문이 신경 쓰였다. 류진은 알고 있을까. 아마 알 것 같았다. 함풍에서 복귀한 뒤 방에만 틀어박힌 자신과는 달리 류진은 풍기대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심지어 강인우와 룸메이트였다.
아마 모르는 척해 주는 거겠지.
모르는 척해 주는….
권세혁은 한숨 쉬었다. 류진이 너무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시바삐 장진에 내려가야 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표를 주는 게 목적이었다. 이미 육체관계를 맺었으니 누가 반대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외조부야말로 누구보다 일부일처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 아닌가.
사춘기도 맞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평생을 바쳐 사랑할 사람이 아니면 정을 주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거기에는 성별, 나이, 출신 성분 같은 제약이 없었다. 권세혁은 두렵지 않았다. 후사야 동생이 있지 않은가. 무혁이의 자식을 입양해서 키우면 그만이었다.
권세혁은 오히려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동생은 총통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네 자식을 총통으로 키워 주겠다고 하면 좋아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어머니였다.
권세혁은 소금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할 터였다. 너, 그 애가 너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면 어떡하려고. 네 돈이나 지위나 그런 거 보고,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작정하고 달려든 거면 어떡하려고?
한마디로 대답하자면,
상관없었다.
의도야 어쨌든, 지금 류진이 형은 나를 좋아하니까.
그가 방으로 초대한 사람은 신해범이 아니었다. 권세혁은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날 류진은 스스로 몸을 열고, 버거운 행위를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받아 냈다.
권세혁은 확신했다. 류진은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자신의 출신 성분, 혹은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앞에서 끌어 줘야 한다. 그러면 그도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믿음이….
무심코 고개를 돌린 권세혁의 시야에, 벽에 덩그러니 기대어 놓은 기타 두 대가 들어왔다.
“아, 저거.”
사 놓고 손대지 않은 지가 며칠째였다. 케이스를 여니 하도 오랜만이라 낯설게까지 보이는 악기가 나타났다.
권세혁은 서툴게 기타를 안았다. 손가락으로 줄을 퉁겨 보았다. 류진이 가르쳐 준 운지법을 떠올리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류진은 신해범의 책상 위에서 흔들렸다. 양쪽 오금이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혹사당한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원망스러운 아랫도리는 반응해 왔다. 손을 뻗어 가리려고 해 봤지만, 신해범은 비웃듯이 류진의 마른 손을 쳐 냈다.
땀으로 촉촉해진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어떡하지. 너무 예쁜데.”
류진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빌었다.
“그만해, 이제… 그만. 제발.”
“많이 힘들어?”
“힘들어 죽을 거 같아!”
“음….”
신해범이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였다. 있는 대로 예민해진 내벽이 비명을 질렀다.
신해범은 류진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자극 때문에 단단해지긴 하지만, 더는 정액이 나오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물방울 같은 것이 귀두 끝에 질금질금 맺히는 정도였다.
“아직 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니, 야… 이제 그만…!”
“아냐. 너 아직 더 쌀 수 있어.”
류진의 주먹이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신해범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류진이 버둥거리는 통에 밖으로 밀려 나온 성기를 다시 퍽, 끝까지 꽂아 넣으면서 웃었다. 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안에 싸 놨던 정액이 튀었다.
“싫어….”
류진의 한쪽 팔이 책상 밑으로 툭 떨어졌다.
“신해범, 나, 진짜, 너무… 힘들어….”
신해범은 류진이 울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안이 부드러워서 좋은데.”
“그럼 빨리 싸….”
빨리 싸고 끝내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성기가 내벽을 긁었다. 기둥에 돋은 핏줄이 불뚝거리는 것까지 느껴졌다. 류진은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긴장한 두 다리가 뻣뻣하게 굳고, 아랫배에 경련까지 일었다.
“이것 참.”
신해범이 손바닥을 펼쳐 복부를 눌렀다. 그의 뜨거운 손바닥 자국이 피부에 남을 것만 같아서 류진은 맥없이 흐느꼈다.
“기분 좋지?”
“지, 랄…!”
신해범이 허리를 살짝 뒤로 빼더니, 곧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세게 처박았다. 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끝까지 들어왔다. 헉. 류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엉덩이 살갗이 쓸려서 따가웠다.
“읍! 으! 아, 앗. 앗. 아!”
몸속을 사정없이 때리는 감각에 류진이 울었다. 신해범은 키득거리며 허리를 움직였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몸이 접히는 감각에 류진이 비명을 질렀다.
“키스해 줘.”
“무… 뭐?”
“얼른.”
그가 재촉했다.
“연습. 애새끼랑 할 때 써먹으라고.”
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해범에게 키스라니… 싫었다.
“얼른.”
그가 허리를 흔들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속을 짓이기는 감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뭐라도 할 수 있었다. 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간다고 해도.
류진은 힘겹게 팔을 뻗었다. 말라서 나뭇가지 같은 두 팔이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 울어서 새빨개진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신해범이 고개를 숙였다.
일 초라도 더 빨리 가까워지고 싶었다.
향수 냄새. 담배 냄새. 그 사이에 섞인 희끄무레한 땀 냄새. 신해범의 입술은 뜨겁고 촉촉했다. 거칠고도 집요했다. 부딪치기만 하고 재빨리 떨어지려 했는데, 신해범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류진은 입을 벌린 채 맥없이 흐느꼈다.
“또 울어.”
입술을 뗀 신해범이 웃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쌕쌕거리는 류진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차분히 호흡했고, 대단히 만족해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라는데, 왜 나는 아직도 당신한테 지기만 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난데? 난 당신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왜 나는 여전히….
“권세혁이 나랑 결혼하고 싶대.”
착각일까? 신해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꾸 장진 가자고 그러는데. 뭐라고 대답해?”
보내 줄 거야?
신해범의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상냥하게 눈물을 닦아 준 그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 좀 주라.”
미처 몰랐다. 신해범이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권세혁은 부스스 일어났다. 두 팔에 감각이 없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뉘엿뉘엿 태양이 지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낙조에 넋을 빼앗겼다. 그런데 지금 몇 시야?
“헉.”
권세혁은 벌떡 일어나 섰다. 뒤에 있던 류진이 배시시 웃었다.
“넌 하루 종일 잠만 자냐?”
“아냐. 안 잤어.”
“그럼 엎드려서 뭐 했는데?”
“뭐… 뭐 하긴! 기타 연습했지!”
“아하. 연습…….”
류진의 눈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기타와 책상 한쪽에 밀쳐져 있는 교본으로 향했다. 권세혁은 황급히 손등으로 턱을 닦았다. 다행히 침은 안 흘렸다.
“늦어서 미안.”
류진이 뭔가를 내밀었다.
“먹을래?”
오리백숙이었다. 다 식어서 국물에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무심코 거절하려던 권세혁은 류진의 긴장한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데울게. 형은 앉아 있어.”
류진은 이불이 뭉쳐진 침대에 앉아, 전자레인지 앞에 선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여기.”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난 물 많이 마셔서 배불러.”
권세혁은 류진의 손에 플라스틱 수저를 쥐여 주었다. 나무젓가락도 툭 떼서 그릇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류진은 조금 망설이다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속에 퍼졌다. 맛있었다.
“소금 같은 건 없나?”
권세혁이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장조림과 가지튀김이 든 일회용 반찬 통을 꺼내던 손이 멈칫했다.
“왜?”
“이거 호월루에서 사 왔어?”
류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장님이 사다 주셨어.”
“안 먹길 잘했네.”
“응?”
“아냐, 형 많이 먹어. 형은 진짜 많이 먹고 살 좀 쪄야 해. 근데 형….”
권세혁의 손이 다가왔다.
“눈이 왜 이렇게 부었어?”
“그래 보여?”
“엄청 심해.”
시원한 손가락이 달아오른 눈꺼풀을 만졌다. 류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울었지?”
“아냐.”
“아니긴. 누구야? 누가 형 건드렸어?”
누구긴 누구야 신해범이지. 네가 가서 그놈 아랫도리를 콱 뭉개 버려. 류진은 내뱉을 수 없는 말을 기름진 국물과 함께 삼켰다.
“응? 누구냐니까?”
“아, 그만해!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더라!”
쏘아붙이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권세혁은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류진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놓았다. 동생에게 해 주던 습관인가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숙 한 그릇을 다 먹어 치웠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릇째 들고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동안 권세혁은 쇠고기 장조림을 조금 집어 먹었을 뿐, 다른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맛있게 먹었어?”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류진은 허겁지겁 사과했다.
“미안. 너 점심도 안 먹었을 텐데….”
“생각 없다니까 자꾸 그런다.”
권세혁은 서툰 솜씨로 그릇을 정리했다. 쇼핑백에 빈 그릇과 수저, 젓가락을 쓸어 담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류진이 쇼핑백과 함께 가져온 빨래 바구니를 보더니 불쑥 말했다.
“혹시 뭐 물어보는 사람 없었어?”
“뭘?”
“나에 대해서나, 형에 대해서나. 아니면 우리 둘 다.”
류진은 권세혁이 쳐다보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세탁물을 침대 위에 쏟은 뒤 종류별로 나눠 개키기 시작했다.
“너희 엄마 귀에 들어갈까 봐 그러지?”
권세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응. 걱정돼.”
“한심하긴. 야 이 마마보이야, 그러면서 무슨 결혼이 어쩌고 증표가 어쩌고 헛소리했냐? 무슨 왕자가 간이 그렇게 작아. 그래서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겠냐? 하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권세혁에게서 그 힘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바로 자기였다.
류진은 잠자코 빨래 개기에 집중했다. 확실히 요령이 중요했다.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어난다. 나중에 혼자 살 때 도움 되겠어. 나도 내가 이렇게 정리를 잘하는 성격인지 몰랐다니까?
신해범은 미래를 설계하려면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분하지만, 그 말에 동의한다. 류진은 빨래를 접으면서 생각했다.
잘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나마 자신 있었던 사격도 폼이 엉망진창이었다는 사실을 풍기대에 와서야 알았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총기를 만지지 못했다. 실력이 다 녹슬었을 것이다. 아니다, 총 쏘는 법 같은 건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낫다. 심천에서는 자기소개서에 당당하게 적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질 거니까. 밤에 일하지 않고,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게 해 주는 그런 직업.
확실히 군인은 아니었다.
신해범은 돈을 많이 벌지만, 잠도 못 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사람이 몸은 하난데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저러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이다. 굳이 나한테 죽여 달라고 생떼 쓰지 않아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형? 왜 그래?”
“아냐.”
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잡생각을 떨쳐 내려 다른 생각을 했지만 결국 원점이었다. 권세혁도, 신해범도 생각할수록 절망적이었다.
그래도 기우희는 좋았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게 고마웠다. 성재경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예나도 좋았다. 신해범과 친척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옷 선물도 고맙고, 강아지들도 빨리 보고 싶었다. 백구를 닮았을까? 강아지들이 날 따라 줄까?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권세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류진을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어.”
침대에 양팔을 벌리고 누운 권세혁이 말했다.
“강 대위가 물어보더라. 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여기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도나 봐.”
“무슨 소문?”
“형 몰랐어?”
“뭘….”
권세혁은 자기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류진도 소문의 당사자였다. 소문은 당사자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는다. 당사자가 문제를 파악하고 수습하려 나섰을 때는, 이미 소문이 기정사실로 굳어져 버린 다음이다. 권세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형을 편애한다는 소문 말이야. 아직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은 모르나 본데, 그래 봤자 시간문제야. 보안이라고 해도….”
권세혁이 이불깃을 그러쥐었다.
“이미 말 나오기 시작했으면 뚫린 거나 다름없지.”
“내가 위험해질 것 같아?”
“그래. 그러니까 시간이 없어. 나랑 장진에 가자.”
또 그 소리였다.
“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 증표라는 게 나한테 있으면 내가 안전해지냐? 너희 엄마가 날 못 건드리게 돼?”
“응.”
당당한 대답에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류진은 개키던 수건 끝자락을 매만졌다.
“형,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다 내가 알아서 해.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돼.”
권세혁의 말에는 이상한 효과가 있었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믿어 버리게 되는 힘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류진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누나도 그랬다. 지금 권세혁이 한 말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누나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잘 먹은 백숙이 올라올 것 같았다. 류진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권세혁이 벌떡 일어나 류진이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너무 급하게 먹었나?”
권세혁이 걱정하는 말을 듣는 게 힘들었다.
“속 좀 괜찮아?”
권세혁이 이온 음료를 내밀었다. 벤치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턱을 얹고 있던 류진은 희미하게 웃으며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응. …고마워.”
“뭘 이런 거 가지고.”
가로등 불빛 아래 검은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권세혁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류진의 머리칼을 만졌다.
“왜?”
“아, 미안.”
손을 거둔 권세혁이 벤치에 앉았다. 해가 저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밖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
“보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니까. 앞으론 조심할게.”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류진이 대꾸했다.
“조용하다.”
“밤이잖아. 야간 근무자들 빼고는 다 집에 갔지.”
“요즘 네 팬클럽도 되게 줄었다?”
“못 오게 해서 그렇지, 뭐.”
권세혁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오래갈 것도 아니었어. 방송으로 얻은 인기가 그래. 거품이야. 한번 팍 솟아올랐다가 활동 뜸하면 푹 꺼지지. 별로 미련 없어.”
“그래?”
“응. 내가 진짜 연예인 할 것도 아니고. 그냥 경험이라고 생각해.”
날벌레들이 새하얀 가로등 불빛에 몰려들어 윙윙거렸다. 권세혁은 반팔 셔츠 밖으로 드러난 류진의 가느다란 팔을 바라보다가, 살짝 잡았다.
“응?”
“형만 나 좋아해 주면 돼.”
권세혁의 시선은 정면의 어느 허공에 꽂혀 있었다.
“내 팬은 정류진 한 사람으로 만족해.”
“…….”
“난 정말 그거면 돼.”
류진은 음료수를 마셨다. 분명 시원한 이온 음료인데, 뜨거운 보리차라도 마신 것처럼 목구멍이 홧홧했다.
자신의 한쪽 팔을 붙잡은 권세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담담한 표정이나 차분한 목소리로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었다. 설렘이었다. 류진의 손에서 음료수 캔이 구겨졌다.
“형?”
“강아지 보러 가자.”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류진이 권세혁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군견 후보생들 말이야. 오늘 왔는데, 나 아직 못 봤거든.”
“아….”
“혹시 몰랐어?”
“아니. 알고 있었어.”
권세혁은 류진을 따라 웃었다. 먼저 구경 가자고 말하려 했는데, 하는 생각은 넣어 두었다. 그와 생각이 일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우리 앞은 한산했다. 철조망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류진이 중얼거렸다.
“자나?”
“그런가 봐. 하나도 안 보여.”
“밥은 먹었을까?”
“담당자가 어련히 챙겨 줬겠지.”
권세혁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강아지들은 집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새끼들이라 잠이 많은가, 아니면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지친 걸까.
그는 쪼그려 앉은 류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철망에 손가락을 걸고 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류진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형이 더 귀여워.”
“뭐?”
권세혁이 무릎에 턱을 대고 빙긋 웃었다.
“저런 강아지보다 형이 더 귀엽다고.”
“놀고 있네.”
류진이 눈을 내리깔았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안 봐도 알아.”
권세혁의 서늘한 손가락이 뺨에 닿은 뒤에야, 류진은 자기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피하지 마.”
“…….”
“괜찮아. 보는 사람 없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난 강아지들은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서로의 숨결과 체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는 순간, 어둠 속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튀어나와 깡! 하고 짖었다.
“으악…!”
“형!”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휘청이는 순간에 어깨를 잡아 준 권세혁이 없었다면.
“우, 우와…”
류진은 입을 벌렸다. 조그만 백구가 눈을 깜박깜박했다.
“귀엽다.”
권세혁이 중얼거렸다. 주먹만 한 얼굴로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깜찍했다. 솜으로 만든 인형 같았다.
“우리가 깨웠나 봐.”
류진은 강아지들에게 미안해졌다.
“화났으면 어떡하지?”
“에이, 설마….”
백구가 철망에 앞발을 대고 낑낑댔다. 류진은 안에 있는 강아지 수를 세어 보았다. 총 여섯 마리였다.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이었다.
호월루의 백구가 보고 싶었다. 무거운 몸으로 마당을 걸어 다니던 모습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해졌다. 새끼 낳는 것도 못 봤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류진은 백구가 출산할 때 많이 고생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훌쩍이는 류진의 모습에 권세혁이 흠칫했다.
“형 왜, 왜 그래?”
“아냐.”
“혹시 울어?”
“아니라니까! 그냥….”
기분이 이상해. 류진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강아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권세혁은 류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 류진이 형.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쩐대.”
“안 약해.”
“괜찮아. 내가 데리고 살 거니까.”
어깨를 쓰다듬는 손바닥이 따스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 류진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형은 어릴 때 꿈이 뭐였어?”
권세혁다운 질문이었다. 류진은 그런 거 없었다고 웅얼거렸다.
“음악 선생님은 어때? 형 나 기타 가르쳐 줬잖아.”
“선생은 아무나 하냐? 그리고 요즘 세상에 누가….”
음악 같은 걸 돈 주고 배운다고.
입 안에서 말이 부서졌다. 권세혁은 잠자코 류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나한테는 안 물어봐?”
“보나 마나 총통이었겠지.”
“그렇긴 한데, 사실 그건 내 꿈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나 엄마 희망 사항이었어. 왜 학교에서 진로 희망 조사서 쓰잖아. 그때 부모님이 희망하는 장래 직업, 본인이 희망하는 직업 쓰는 칸이 따로 돼 있잖아.”
“그랬나?”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물론 류진에게는 그런 종이 쪼가리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새 학기가 싫었다. 학생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 어른, 특히 부모님이 개입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하다못해 성적표도 부모님이 확인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권세혁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술가가 되고 싶었어.”
“풉.”
“웃지 마.”
“중국 영화 너무 많이 봤구만.”
“그런 거 아냐.”
“견자단? 성룡? 나도 알아. 우리 할머니도 그런 영화 좋아해서 동네 할머니들이랑 같이 보셨어. 그 뭐냐, <취권>? 난 어른 돼서 술 먹으면 다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싸움의 고수 막 그런 거….”
권세혁의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 밖으로 드러난 귀가 빨갰다. 목덜미도. 뺨도.
“괜히 말했어.”
류진이 그의 옆구리를 쳤다.
“야, 괜찮아. 원래 다들 그럴 때가 있는 거야.”
“진짜 괜히 말했어….”
“알았어. 소문 안 낼게.”
“머리 아프니까 건드리지 마.”
“핑계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대마 자리 근처, 아스팔트로 완전히 덮이지 않은 모서리 공간에 강아지풀이 한 무더기 피었다.
“형! 위험해!”
“괜찮아!”
류진의 모습이 커다란 버스 사이로 사라졌다. 곧 나타난 그의 손에는 강아지풀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이걸로 뭐 하자고?”
“이렇게 하자고.”
류진은 철망 안으로 강아지풀을 집어넣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백구가 달려들었다. 흑요석 같은 눈을 끔벅이는 녀석이 강아지풀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귀여워. 류진이 웃었다.
“너도 해 봐.”
권세혁이 풀을 흔드는 속도는 류진보다 빨라서, 고개를 흔들던 점박이가 배를 드러낸 채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헥헥거리면서도 다시 달려드는 모습이 활기찼다.
“귀엽긴 하다.”
어느새 권세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솜뭉치 같아.”
“응. 너무 예뻐.”
“얘들이 진짜 커서 군견이 될까?”
“훈련 잘 시키면? 지금은 귀여워도 다 크면 엄청나게 멋져질 거야.”
“사냥개랑 군견이랑 많이 다른가?”
“다르지!”
류진이 손가락을 꼽았다.
“경비도 하고, 수색도 하고, 인명 구조도 하고….”
“마약도 찾고.”
“응. 마약도 찾, 어?”
“농담.”
권세혁이 웃었다. 류진은 그의 어깨를 퍽 때렸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넌!”
“왜. 나 이제 당당해. 약 끊었잖아.”
그는 양손을 펼쳐 보이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당당하다기보다는 자괴감을 털어 내려 애쓰는 것 같아서 류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권세혁. 너 소금물 말고 보리차 마실래?”
“웬 보리차?”
“소금물보다 그게 더 맛있잖아.”
“내가 그걸 맛으로 먹는 줄 알아?”
권세혁은 단칼에 거절했다.
“됐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해독이고, 소금물이면 충분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목소리만큼 눈빛도 강렬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지금 네가 뭘 착각하고 있다면 냅다 화낼 것 같아서, 류진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시무룩한 류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권세혁이 말했다.
“내가 무술가 되고 싶었다는 거. 중국 영화 때문은 아냐. 나한테 엄청 좋은 선생님이 있었거든.”
“학교에?”
“아니, 외조부님이 따로 붙여 주셨어.”
개인 과외로 무술 선생이라. 차원이 다른 권세혁의 성장 과정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네. 네가 그렇게 느낄 정도면.”
“형이랑 좀 닮았어.”
“어?”
“물론 스승님 때문에 형 좋아한단 거 아냐. 그런 건 절대로 아냐.”
“누가 뭐라고 그랬냐?”
“형이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오해는 무슨….”
류진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지끈지끈한 손등을 반대쪽 손바닥으로 덮었다. 일전에 권세혁이 물어뜯은 부위였다.
최유신의 세심한 관리 덕분일까. 상처는 생각보다 빨리, 덧나지 않고 잘 아물었다. 딱지가 가장자리부터 부서지듯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문 자리에도 상처 자국은 선명하게 남았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뚜렷하게 잘 보였다.
면역력이 약하면 흉이 잘 진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생각해 봤는데, 난 후계자한테 일찍 자리 물려주고 퇴임하면 좋을 거 같아. 이거 이상한 거 아냐. 우리 외조부님도 더 일할 수 있었는데 은퇴하셨거든. 젊을 때 고생 많이 하셔서. 말년은 고향에서 조용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셨을 거야.”
“…….”
“어렸을 땐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
활짝 웃는 권세혁의 얼굴 위로 하얀빛이 쏟아졌다. 권세혁이 태양처럼 미소 지었다.
“나 은퇴할 때까지만 기다려 줘.”
광성 생활을 정리하면 장진으로 가자. 그가 말했다.
“형한테는 별관을 줄게. 방음실로 고쳐서 기타 학원 여는 거야. 난 맞은편 가옥에 도장 만들어서 문하생들 키우고. 이런 강아지들도 키울 수 있어. 우리 집 정원 넓거든. 인공이지만 연못도 있고, 정자도 기와지붕 얹은 걸로 지어 놔서 올라가면 온 동네가 훤히 다 보여. 연못에 수박이랑 참외 담가 놨다가 꺼내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
“그래.”
“나 지금 노인네 같아?”
“아냐. 그냥 말해.”
팔을 뻗어 류진의 어깨를 끌어안은 권세혁이 싱글벙글했다.
“형 동물 좋아하지? 말만 해. 강아지, 토끼, 새, 다 키울 수 있어. 위험한 건 내가 다 치울게.”
“위험한 거?”
“나 옛날에 유괴된 적 있다고 했잖아. 그때 이후로 집안 경비가 더 삼엄해졌거든.”
원래도 사병이 많아 분위기가 살벌한 대저택이었다. 거기에 발전한 현대 문명의 힘이 더해졌다. 사각지대라고는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설치된 CCTV, 담벼락에 흐르는 전류, 경비 드론,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서 외부인의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출입문까지.
권세혁은 조금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옥 같긴 해.”
류진은 말을 아꼈다. 권세혁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설계했고, 그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이라고 여길 정도로.
하지만 자신이 계획한 미래는 엉성했다. 신해범이 대놓고 비웃을 정도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아는 게 없어서 그렇다.
권세혁은 아는 게 많았다. 그래서 상상의 폭도 넓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권세혁의 계획을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현실성이 떨어져. 구체적이지도 않고. 계획이란 자고로 앞뒤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순서, 시간, 예산, 계획에서 어긋난 상황을 대비한 보험, 이렇게 딱딱 정리되어 있어야지.’
나한테는 이랬는데.
괜히 목구멍이 뜨끈해져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세혁아.”
“응?”
류진의 두 손이 권세혁의 뺨을 감싸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은 순간, 류진은 과감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권세혁의 치열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런했다.
류진은 그 고른 치열을 핥고, 따뜻한 입천장을 핥고, 놀라서 움츠러든 권세혁의 혀를 톡톡 건드려 보기도 했다. 그의 타액을 거리낌 없이 삼키면서 생각했다. 너의 정액을, 타액을, 눈물과 피를 받아들여서 내가 변할 수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강인우는 차창을 올렸다. 담배를 차량용 재떨이에 비벼 끄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묻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 권세혁을 떠보기 위해서 지어낸 가짜 소문이.
유미현이 그랜드 힐튼의 VIP 담당 지배인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장승희, 신해범, 권세혁 세 사람이 디너를 함께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그렇게 뜻밖의 뉴스는 아니었다. 장승희는 함풍 2도 사태 이후 대표적인 친(親)풍기대 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이고, 그런 장승희가 신해범과 식사하는 자리를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권세혁도 동석했다.
문제는 두 번째 사실이었다. 디너를 함께한 세 사람은 그랜드 힐튼에 투숙했는데, 이때 권세혁 혼자만 다른 방에 묵었다. 장승희와 신해범은 같은 방에 들어갔다. 유미현은 장과 신이 체크아웃한 시간이 각각 다르다고 덧붙였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두 사람이 밀회를 즐겼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강인우는 두 명의 유명 인사가 조용한 호텔 방에서 앞으로의 정치 방향을 토론했을 뿐이라는 소리를 믿을 바보가 아니었다. 그건 유미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인우가 아는 신해범은 기회주의자였다. 타고난 승부사이기도 했다. 장승희를 뒤에 업은 신해범이 손진우, 오두경 따위의 잔챙이들 눈치를 볼 리가 없었다. 그들의 영향력이 미미하다는 건 풍기 교육대 주가가 금방 회복세로 돌아선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과거 누군가의 정치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두둑한 배짱과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이었다면, 오늘날에는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바로 자본이었다.
어닝 쇼크 직전의 풍기 교육대를 구제해 준 자본가의 정체가 장승희라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승희를 앞세운 장두현이었다.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사병 집단을 보유한 장두현이 기어코 권주혁의 풍기 교육대에 손을 뻗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지금껏 두 거물이 충돌한 일은 없었으나, 그건 권세혁 왕자 즉위라는 공공의 목표 때문이었다. 권주혁이 조카의 신변을 보호하지 못할 경우 장두현이 직접 나서리라는 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장두현은 욕심이 많은 자였다. 아홉을 갖췄더라도 남의 하나를 빼앗아 기어코 열을 채우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약탈자였다. 동시에, 자신이 갖지 못하는 건 애매하게 밀고 당기느니 부수어 버리는 극단적인 성질의 사내이기도 했다.
정략결혼으로 얻은 아내가 낮은 출신 성분의 남자와 도망쳤을 때, 장두현은 부산까지 쫓아가 기어코 불륜남을 잡아 왔다. 지금은 절판된 수기에 그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강인우는 어린 시절 그 책을 읽었다. 그걸로 독후감 대회에서 상을 탄 것이 떠올리기도 메스꺼운 인생의 수치였다.
장두현이 딸을 앞세워 풍기 교육대를 손에 넣으려 한다. 강인우는 그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암만 그래도, 권세혁과 한 지붕 아래 사는 신해범이 그 어머니와 불륜을 저지르겠냐고?
신해범이라면 가능했다. 포주 노릇으로 출세한 그 버릇이 딴 데 가겠는가. 장승희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젊고 건장한 남자들을 쫘르륵 줄 세울 능력이 있는 놈이었다. 설령 장승희가 원하는 게 자기 자신이라 해도.
강인우는 다른 쪽에 신경이 쓰였다. 신해범과 함께 체크아웃한 사람은 권세혁과 정류진이었다. 그 둘이 밤새 호텔을 배회했을 리는 없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신해범과 함께 체크아웃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어른들이 밀회를 하는 긴 시간 동안 뭘 했을까. 그 둘이서.
유미현은 정류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류진이 권세혁과 함께 밤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방에 누가 먼저 들어갔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권세혁과 정류진이 한방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각들은 작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채였다. 강인우는 관찰자였다. 일련의 사건 중, 어느 쪽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기에 냉정하게 바라보고 판단하는 게 가능했다. 상상력은 괜찮은 무기였다. 근거 없는 의심도 아니었다. 미끼도 던져 봤다. 많은 정황이 권세혁과 정류진의 사이를 의심하라고 경종을 울려 댔다.
그리고 바로 지금.
강인우는 자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기쁨이나 희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곧장 다음 질문이 떠올랐다. 권세혁과의 관계는 정류진 자신의 의지인가, 아니면 신해범에게 이용당하는 중인가.
후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정류진은 조직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권세혁과 정류진이 키스하는 모습에 넋을 빼앗겨, 강인우는 유미현이 자기에게 털어놓지 않은 정보가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인터넷으로 구입한 홍삼을 가지러 1층 로비로 내려갔던 진치우는 올라올 때 혹을 하나 달고 왔다. 뾰로통한 표정의 류진이었다. 오늘따라 더 짙어 보이는 눈 밑 그림자를 거울에 비춰 보던 신해범은 거울에 비친 류진을 보고 활짝 웃었다.
“꼬꼬 안녕? 좋은 아침이야. 어젯밤엔 잘 잤어?”
진치우가 빈정거렸다.
“미친놈이 지랄하네.”
“난 우리 꼬꼬한테 질문했는데?”
“염병. 야, 얼굴에 분칠 고만하고 이 홍삼이나 처먹어.”
“병원 가져갈 거 아냐?”
“이벤트 기간이라 투 플러스 원이다. 서비스는 우리 먹자고.”
진치우가 힘차게 박스 테이프를 뜯었다. 완충재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지는 그를 바라보던 류진이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눈 밑에 컨실러를 바르던 신해범이 되물었다.
“무슨 말?”
“저거.”
류진이 턱짓으로 진치우를 가리켰다.
“사무실 어지르고 있잖아.”
“괜찮아. 이따가 혀로 바닥 핥으면서 기게 해 줄 거야.”
“미친놈들이 쌍으로 지랄한다!”
진치우가 집어 던진 홍삼 팩에 따귀를 얻어맞은 류진이 휘청했다.
“개새끼야!”
그는 홍삼 팩을 이로 뜯어 마시면서 웃었다.
“미안. 일부러 그랬다.”
“나쁜 새끼.”
“그러게 왜 까불어? 넌 나한테 비비려면 십 년은 멀었어, 새꺄. 존만 한 년이 애새끼들 다 보는 데서 아는 척이야. 쪽팔리게….”
“아는 척?”
신해범이 몸을 돌렸다. 컨실러에 이어서 립밤을 들고 있었다.
“뭔 소리야? 아는 척이라니?”
진치우가 하소연했다.
“아니 범아. 내가 진짜 저 새끼 때문에 애들 보기 쪽팔려서 못 살겠다. 세상에 어느 이병이 부대장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거냐? 쟤 나한테 경례도 안 했어. 그것도 로비에서, 응, 그 사람 많은 데서 택배 상자 들고 걷는 것도 쪽팔려 뒈지겠는데 저게 따라오면서 쫑알쫑알….”
“누가 보면 총통인 줄 알겠네. 권세혁도 저 지랄은 안 한다.”
류진이 중얼거렸다. 그게 또 진치우의 귀에 들어갔다. 신해범은 바르던 립밤을 내팽개치고 달려가, 당장이라도 류진을 바닥에 메다꽂을 기세인 친구의 앞을 막아섰다.
“아침부터 열 내지 말고 대화로 해결해.”
“네가 자꾸 감싸니까 저년이 나를 좆 밥으로 보잖아!”
“누가? 내가?”
신해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쟤를 감싼다고?”
“그럼 아니냐?!”
“내가 쟬 사랑하긴 하지만, 공사 구분 못 하는 머저리는 아냐.”
신해범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윙크했다. 진치우는 친구의 기행을 애교로 웃어넘겨 줄 만한 배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미련 없이, 망설임도 없이 마시던 홍삼 진액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에이 씨발, 드럽다 새꺄!”
신해범은 지그시 눈을 감고 뺨에 튄 홍삼 진액을 닦아 냈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더럽다니. 그게 상관한테 할 소린가.”
“그러게 왜 장난을 쳐?!”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렇지.”
분위기를 파악한 진치우가 머쓱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튀었냐?”
“…….”
“뭐! 뭐! 안 죽어 새끼야! 이게 뭐 독이냐?”
자리에 쭈그려 앉은 진치우가 한 움큼 뽑은 탁상 휴지로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진은 속으로 웃었다. 사실은 폴짝폴짝 뛰면서 만세 삼창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면 신해범이 뿌듯해할까 봐 내색 못 했다.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는 류진의 위로 신해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치우한테 무슨 말 했어?”
“뭐 물어볼 거 있어서.”
“나한테 얘기해도 되잖아.”
“굳이….”
류진은 말끝을 흐렸지만,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눈 딱 감고 물어보기로 했다.
“우리 월급날이 언제야?”
“응?”
“하계 휴가비도 다 지급됐다고 하던데… 난 소식 들은 게 없어서.”
“무슨 소식?”
류진이 소리쳤다.
“돈 말이야! 돈! 나 아무것도 못 받았다고! 당신이랑 계약서 쓴 다음부터 계속!”
신해범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가지고 있어.”
“뭐?”
“네 급여, 내 계좌로 들어온다고. 휴가비든 상여금이든 보너스든 뭐든. 다 나한테 들어와.”
“왜?”
“너 은행 계좌 없잖아.”
류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계좌 만들어 오면 입금해 준단 뜻이지? 알았어. 오늘 점심때 나갔다 올게. 나 외출증 좀 끊어 줘.”
진치우가 피식 웃었다.
“내가 쟤 저럴 줄 알았다. 세상에 어느 이병 나부랭이가 장군한테 외출증 끊어 달라고 사무실까지 쫓아 오냐.”
류진이 홱 돌아봤다.
“지난번에 해 줬잖아. 벌써 잊어버렸어? 치매냐?”
“그건 MVP랑 나간다니까 해 준 거고, 등신아!”
진치우의 말을 무시한 류진이 몸을 돌려 신해범을 보았다. 그는 진치우와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신해범은, 처음에 근로 계약서까지 써 준 신해범은….
“입금 같은 소리 하네.”
류진의 얼굴이 굳었다. 신해범은 자기 지갑에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뭐야?”
“그거 써.”
류진은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신해범의 서명이 떡하니 있었다.
“이거 당신 카드잖아.”
“보다시피.”
“당신 카드를 왜?”
“방금 말했잖아. 그거 쓰라고. 돈 필요해서 올라온 거 아냐? 아침 댓바람부터 치우 놈 앞세워서? 그렇게 급했냐?”
신해범은 류진이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보면 알겠지만 그거 블랙이다. 국립 은행에서 골드 다음가는 등급이지. 한도도 크고 혜택도 좋아. 포인트도 엄청 쌓였을 텐데 뭐, 필요하면 써도 괜찮아. 난 치우처럼 그런 거에 집착하는 타입 아니거든. 사람이 쓸 땐 확실하게 써야지. 절약은 평소에 하는 거고. 사람이 조그만 돈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시야가 좁아져. 사회생활 하면서 짠돌이로 소문나는 거 순식간이다?”
“설교 필요 없어. 이 카드도 필요 없고! 계좌 만들어 올 테니까 제대로 내 월급 넣어 줘.”
“줄 때 받아. 나중에 후회하고 울지 말고.”
신랄한 말투에 울컥했다. 류진은 카드를 꽉 쥐었다.
“내가 거지 같아?”
“거지라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신해범이 팔짱을 끼고 섰다.
“우리 꼬꼬 자존감이 왜 또 곤두박질쳤어?”
“당신 말하는 게 그렇잖아. 내가 지금 구걸하는 거야?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
류진은 쥐고 있던 카드를 신해범의 가슴팍에 내던졌다.
“난 내 몫만 가질 거야. 더 준대도 싫어.”
“내가 널 잡아 둘 방법이 돈밖에 없어.”
신해범이 눈을 내리깔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은 그가 떨어진 카드를 주웠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거 써, 꼬꼬야. 너 출신 성분 때문에 계좌 만드는 거 복잡해. 떼 오라는 서류도 많을 텐데 그냥 내 카드 쓰는 게 편해. 응?”
달래는 목소리. 류진은 잠자코 고개를 돌렸다.
“…외출증이나 끊어 줘.”
“미친놈들. 드라마를 찍고 자빠졌네.”
진치우의 목소리였다. 신해범이 쿡쿡 웃었다.
“좀 멋졌어?”
“멋지긴 개뿔. 너 지금 좆나 웃겨.”
류진은 궁금했다. 왜 이 상황에서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 나인지.
성큼성큼 다가온 진치우가 류진에게 홍삼 팩을 안겼다.
“처먹어.”
“이딴 거 안 먹어도 돼.”
“여기서 누가 널 거지 취급하냐?!”
난데없는 고성에 숨이 막혔다. 류진은 진치우를 노려보았다. 그도 지지 않고 살벌한 눈빛으로 맞섰다.
“너도 가만 보면 자격지심이 장난 아냐.”
“뭐라고?”
진치우가 한 손으로 류진의 멱살을 움켜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류진은 발버둥을 치면서 저항했으나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이미 알았다.
이번에는 신해범도 끼어들지 않았다.
류진의 눈 밑이 붉어졌다. 진치우의 팔뚝에 불끈거리는 근육이 눈물 날 정도로 부러웠다.
“우리가 너한테 참 좆같이 굴었지. 난 빌어 처먹을 살인자고, 저 한심한 새끼는 강간범. 알아. 네가 죽을 때까지 우리 용서 안 해도 좆나 이해해. 그럼 곽재헌 아들놈, 진짜 개죽음당한 거니까.”
이가 갈렸다.
“그럴 거야.”
류진이 진치우의 손등을 할퀴었다.
“당연히 그럴 거야!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용서 안 할 거야!”
“그러고 싶으면 힘을 키워!”
진치우가 소리쳤다.
“네가 뭐 잘났다고 떠먹여 주는 걸 뱉어?! 얻다 대고 강짜야! 그놈의 자존심 좀 갖다 버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내쏘았다.
“범이 새끼든, 왕자 놈이든 뼈까지 발라 먹을 생각은 안 하고 뭐? 내 몫만 챙겨? 지랄 염병.”
기관총을 쏴 대는 것 같았다. 진치우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랬다. 류진의 부릅뜬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야, 범아, 네가 이 새끼 별명 하나는 잘 지었다. 이거 진짜 닭이야. 닭대가리, 소 대가리, 말 대가리야 이거! 지능이 아주 한 자릿수야! 그렇게 고생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신해범은 잠자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진치우가 흥분해 날뛰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류진에게서 과거의 자기 모습을 보고 있었다. 타인을 미워하는 법을 모르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았던.
평범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약탈당한 사람은 지금 자리에 안주해서는 안 됐다. 세상에는 싸우지 않으면 계속해서 빼앗기기만 하는 계급이 있었다. 진치우는 자기가, 한때 대일전자의 어린 왕자로서 사교계의 한 축이었던 자기가 그 최하위 계급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복수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건 ‘홀어머니 옥바라지’를 참작해 광성 거주권을 박탈하지 않은 총통에게 감사해서가 아니었다. 복수 의지를 불태울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였다.
신해범은 진치우의 한 줄기 희망을 가차 없이 짓밟아 주었다. 지금 그가 있는 자리가 어딘지 똑똑히 알려 주었다. 현실의 계급을 전두엽에 박아 넣은 다음, 복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기자. 자갈밭에 구르고 흙탕물을 마시자.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니까. 치우, 그놈들이 왜 우리를 밑바닥까지 떨어뜨렸는지 알아?
증오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라서. 사는 데 급급하면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못해.
옛날부터 말은 참 잘하는 놈이었다. 신해준이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류진이 버둥거렸다.
“이거 놔! 개새끼야! 신해범한테는 찍소리도 못 하면서 만만한 나한테만 지랄이야!”
“그래 씨발! 범 새끼는 무서워서 만만한 너한테 지랄한다. 근데 이거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꼰대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딴 소린 자기 자신한테나 해!”
“진짜라고, 씨발!”
진치우의 근육질 어깨가 씨근거렸다.
그는 신해범처럼 말하는 법을 몰랐다. 돌이켜 보면 낯 뜨거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뱉고, 그걸 상대방이 고스란히 믿게 만드는 재주가 진치우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자주 오해를 샀다.
하지만 진심은 언젠가는 전해진다. 진치우는 류진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나 네가 잘됐으면 좋겠다.”
그는 내뱉듯이 말하고 뒤돌아섰다.
“네가 진짜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진치우가 박차고 나간 사무실에, 신해범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랑 말은 아이큐 두 자릿수인데.”
바닥에 주저앉은 류진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저걸 농담이라고.
신해범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내렸다. 류진은 그가 자신에게 내미는 머그잔을 살폈다. 하얀 민무늬 컵에 풍기 교육대 다섯 글자만 덜렁 적혀 있었다.
“나도 예쁜 컵에 줘.”
“나 죽으면 실컷 갖다 써.”
“개소리….”
류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가 들어간 카페라테였다.
“자.”
신해범이 테이블 위에 카드를 내려놓았다. 아까 류진이 집어 던진 블랙 카드였다.
“이거 가져가.”
“…진치우 왜 저러는지 알아?”
“몰라. 너 좋아하는 거 아냐?”
신해범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연적이 몇 명이냐. 아, 머리 아파.”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신해범이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널 여기 잡아 둘 방법이 돈밖에 없어. 너한테 섹스 동영상 있는 것처럼.”
“어떻게 그 두 개가 같아? 당신은 나보다 가진 게 훨씬 많아.”
“우리 꼬꼬랑 만나기 전까진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능숙하게 담배를 피워 물면서 다리를 꼬는 거만한 자세는 신해범에게 잘 어울렸다. 건장한 체격에 팔다리도 길어서 그렇다.
류진은 머뭇머뭇 신해범을 따라 했다. 상체를 뒤로 젖히고, 팔을 등받이에 걸친다. 다리는 왼쪽을 꼬는 게 낫나, 오른쪽이 낫나? 그런 류진을 바라보던 신해범이 킥킥 웃었다.
“사랑해.”
“기가 막혀….”
“알면서 왜 그래?”
“세상에 누가,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뭐 어때서.”
“좆나 건방지잖아!”
권세혁도 당신처럼은 안 해. 류진은 속에서 맴도는 말을 커피와 함께 삼켰다. 빈 머그잔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자 테이블이 흔들렸다. 류진은 신해범이 눈썹이 꿈틀하는 모습에 만족했다. 좋다. 이 정도면 꽤 카리스마 있었다.
“좀 더 비굴하게 해 보란 말이야! 당신이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지금 내가 당당해서 열 받은 거냐?”
“그럼! 당신 같으면 화가 안 나겠어? 죄지은 놈이 당당한데?!”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알았다. 우리 꼬꼬는 내가 무릎 꿇고, 눈물 펑펑 쏟으면서 장미 꽃다발 내미는 걸 원하는구나?”
“지랄! 누가 그딴 거 해 달래? 나는 적어도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류진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신해범에게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해범은 여전히 당당했다. 당당한 표정과 목소리로, 보란 듯이 턱을 쳐들었다.
“허세야. 보면 모르겠어? 사랑하면 배신이 무서워지는 법이야.”
“그게 날 무서워하는 태도야?”
“쥐뿔 가진 게 없어도, 아니 가진 게 없을수록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동해야 해. 그러면 의심받거든. 쟤 혹시 믿는 구석이 있나? 뒤에 누가 있는 건가? 이런, 잘못 건드렸다가 역풍 맞는 거 아냐?”
“그게 효과가 있어?”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인간일수록 눈치가 빠르거든. 의심을 잘하지. 우선 그렇게 해서 시간을 번 다음, 대책을 생각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 하는 것처럼?”
“내가 이러는 것처럼.”
류진은 떨리는 무릎을 꽉 움켜잡았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대책을 세웠어?”
“이거.”
신해범이 턱짓으로 가리킨 건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였다.
“신용 카드는 사용처를 고스란히 자세하게 실시간으로 알려 주지.”
“날 감시하겠다?”
“지금껏 잠잠하다가 돈 얘기 꺼낸 거, 장진에서 쓰려고 그런 거잖아.”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류진이었다.
“아직은 내 손바닥 위다, 꼬꼬야.”
“그래도 내가 이겨.”
“당연히 네가 날 이겨야지. 누가 키웠는데.”
신해범이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껐다. 류진은 그 모습도 눈에 담았다.
“네가 이기는 건 시간문제야. 문제는 그 과정이 험난하다는 거지. 그래도 포기하지 마. 절대로 포기하지 마. 힘들 때마다 날 쳐 죽이는 상상을 해 봐. 없던 용기도 솟아날 거다.”
“…….”
“그때 되면 네 월급 따위는 생각도 안 날걸? 당연하지. 그보다 엄청난 재산이 네 손에 들어오는데. 내 차, 집, 예금 통장, 부동산…전부 네 거야. 이야, 우리 꼬꼬 출세했다. 완전 인생 역전이다.”
장난하는 목소리에 부아가 치밀었다. 신해범의 카드를 낚아챈 류진이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계속 그런 식으로… 끝까지… 해 봐. 내가 당신 뜻대로 해 주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류진의 등 뒤에서, 신해범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주친 사람이 하필이면 진치우였다. 복도 창문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그가 류진을 불러 세웠다.
“존만이. 카드 가져가냐?”
“나한테 신경 꺼.”
“하여튼 개싸가지. 말본새 하고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욕하며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을 때, 류진은 애꿎은 카드 키를 벽에 긁으며 진치우를 노려보았다.
“왜 따라와?”
“쥐약 처먹었냐? 내가 널 왜 따라가? 착각도 유분수지.”
“그럼 어디 가는데.”
진치우는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팔짱을 꼈다.
“진압 팀 훈련 지도하러 간다.”
“훈련 지도?”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애초에 난 애새끼 빤스 빨래나 하는 너랑은 클라쓰가 달라. 클라쓰가. 아, 넌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c. l. a. s. s. 우리말로 수준이라는 뜻이야. 자 따라 해 봐. 클라쓰으.”
“지랄한다.”
“뭐?”
“들렸어?”
속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류진이 중얼거렸다.
“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유식한 척하고 싶으면 영어 사전 찾아보면서 공부해. 신해범이 하는 소리만 따라 하지 말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한 발짝 내디디려는 순간 우악스러운 손이 어깨를 밀쳤다. 진치우였다. 류진보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그가 낄낄거렸다.
“뭐 하냐, 안 타냐?”
“진짜 유치하게…!”
“원래 유치한 새끼가 이기는 거야!”
그래도 문을 닫아 버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류진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진치우와 같은 공간에 있기는 싫지만, 타지 않으면 겁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심 궁금했다.
“진압 팀 훈련이 뭔데?”
“말하면. 네가 아냐?”
“나는 왜 그런 거 안 해?”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범 새끼한테 물어봐.”
“내가 언제 따졌다고 그래? 왜 항상 말을 그렇게 해?”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서로를 찢어발길 기세로 노려보던 둘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진치우가 툭 내뱉었다.
“할 일 없냐?”
“구경도 시켜 줘?”
“MVP는 뭐 하는데?”
“걔 아직 안 일어났는데?”
진치우는 요란하게 헛기침했다. 질문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삼십삼 년 인생에서 처음 알았다.
그는 2층에서 내리려는 정류진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1층에서 내려라.”
“내 방 여긴데.”
“…….”
“아, 왜 이래!”
“네가 구경시켜 달라며!”
진치우가 꽥 소리치는 순간,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짠 하고 열렸다. 제복 차림의 군인 다섯이 서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던 그들은 진치우를 보고 일제히 경례했다.
“그래, 좋은 아침. 수고들 해라.”
류진은 입을 벌렸다. 조금 전까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악을 써 대던 진치우가 별안간 풍기 교육대 부대장의 근엄함을 뽐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최대한 숙인 채 진치우의 뒤를 따라 내렸다. 앞서가던 그가 투덜거렸다.
“아, 나 범 새끼한테 한 소리 듣는 거 아냐.”
“왜?”
“지금 걔가 시키지도 않은 짓 하는 거잖아. 아, 씨발, 야, 너 이거 문제되면 범 새끼한테 해명 잘해. 괜한 오해 사게 만들면 그날이 너 뒈지는 날이다.”
“말을 해도 꼭….”
류진은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내가 참는다. 진치우가 하나 양보했으니까, 이쪽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게 맞다.
그래. 하나 주고 하나 돌려받고. 이게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러니까 현우 형, 안심해. 나 이 사람 용서한 거 아니야.
“훈련 어디서 해?”
본관에서 나온 직후, 진치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류진은 속도를 내 그를 따라잡았다.
“지금 어디 가는데?”
“훈련을 훈련장에서 하지 어디서 하겠냐?”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진치우는 후문 주차장으로 갔다. 훈련장이 어딘가, 두리번거리는 류진에게 마스터키를 던졌다. 엉겁결에 키를 받은 류진이 멍하니 서 있으니 진치우가 닦달했다.
“뭐 해! 운전해, 새꺄!”
핸들을 잡았다는 기쁨은 출발한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부서졌다. 류진은 진치우의 무자비한 폭언에 시달리면서, 도중에 몇 번이나 가드레일에 지프를 박아 버릴까 하는 충동에 시달렸다. 진치우가 앉은 조수석만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실행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의 훈련장이 풍기대 본관에서 멀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십 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외벽이 그물 같은 메탈로 덮인 5층짜리 건물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진치우가 쭉쭉 스트레칭을 했다.
“초보 운전 티 팍팍 난다. 브레이크를 왜 그렇게 밟아? 토할 뻔했네.”
기진맥진해서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진치우의 의도가 그런 거라면 완벽하게 성공했다. 류진은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았다.
5층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진치우는 이 건물 자체가 도시형 모의 훈련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재 진압 훈련을 한다고 치자. 어떤 미친놈이 불났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겠냐? 그런 건 애초에 배제하고 설계한 거야.”
진치우는 <수영장> 팻말이 붙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수영할 줄 아냐?”
“응.”
“물에 뜨는 정도겠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오. 자신 있으시다?”
“개헤엄은 아니니까.”
진치우가 씩 웃었다. 불안함이 류진의 뒤통수를 스쳤다.
“하는 거 보면 알겠지.”
양쪽 철문이 힘차게 열렸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빛이었다. 넓은 실내 수영장을 가득 채운 새하얀 조명. 그리고 냄새가 났다. 콧등이 시큰해질 정도로 지독한 소독약 냄새. 그다음은 소리였다. 거대하고 묵직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류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풀이 컸다. 50미터 8레인. 수심도 오 미터나 됐다. 하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건 넓은 풀이 아니었다. 기계였다. 좌우에서 거대한 프로펠러가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면에 파도가 일었다. 바람이 몹시 강했다. 멀리 떨어졌는데도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진치우가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저기 봐.”
천장이 높아서 소리가 울렸다. 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저게….”
두 개의 프로펠러는 철근으로 연결돼 있었다. 풀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철근에 12인승 버스 한 대가 매달린 채였다. 버스는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수직 하강했다. 물속으로 처박혔다. 거대한 물보라가 두 사람이 선 자리까지 튀었다.
류진은 진치우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버스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 기동복 차림의 풍기대원들이었다. 각종 보호구를 착용해 몸이 무거울 터였다. 산소통이나 구명조끼 같은 안전 장비는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안전띠까지 한 채였다.
“입수!”
누군가의 목소리가 수영장에 울려 퍼졌다. 류진은 아연한 표정으로 진치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씩 웃었다.
“물에 빠진 차에서 탈출하는 훈련.”
“위험하잖아…!”
“쉬우면 그게 놀이지, 훈련이냐?”
진치우는 귀찮다는 듯 류진의 손을 뿌리쳤다. 프로펠러는 버스가 완전히 잠기고 난 다음에 멈췄다. 바람이 멎고, 수면이 잔잔해졌다.
계기판 앞에 서 있던 대원이 다가와 진치우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속도가 어쩌고, 시간이 어떻고 하는 말은 류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류진은 구르듯이 달려가 풀을 들여다보았다. 물에 잠긴 버스의 윤곽은 흐릿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잠기고 십 초가 흘렀다. 이십 초가 넘었다. 삼십 초, 사십 초… 일 분이 다 될 동안, 아무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류진은 진치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큰일났… 습니다!”
“엉?”
“못 나오고 있어요!”
“염병하네.”
진치우가 코웃음 쳤다. 타이머를 들고 있던 대원도 황당한 표정으로 류진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건 류진도 마찬가지였다. 진치우는 왜 저렇게 태평해? 부하들이 익사해도 상관없다 이거야? 이런 게 풍기 교육대 훈련이야?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쳐?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재차 외치는 류진의 얼굴로 물보라가 튀었다. 난데없이 물세례를 받은 류진이 타일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에서 진치우가 소리쳤다.
“야! 거기 있지 말고 나와! 방해돼!”
“…….”
“어이구, 저 등신!”
진치우의 욕지거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류진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익숙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강인우가 서 있었다. 그가 방탄모를 벗자 류진의 몸 위로 물이 쏟아졌다.
“이런!”
강인우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나, 이병?”
강인우의 뒤로 푹 젖은 군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먹이를 발견하고 늪에서 기어 나오는 악어들 같았다.
“장진에 가야겠습니다.”
권세혁이 말했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내가 짠 계획을 알고는 있어라. 그래도 명색이 풍기 교육대장님이니.
“류진이 형이랑 같이요.”
그렇게 말하는 권세혁의 표정은 당당했고, 목소리는 뚜렷했으며, 행동거지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신해범은 바깥의 희미한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간호 사관 학교 방문을 앞두고 실시하는 검열은 현장 대원들은 물론, 일반 직원들의 신경까지도 곤두서게 했다. 날짜상으로는 고작 하루였으나 간사 생도들은 그 하루만으로 풍기 교육대 전체를 평가했다.
진치우가 성재경의 공백을 메우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신해범은 알았다. 작은 것 하나라도 책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 역시. 그래서 신해범은 대원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친구를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12층까지 기합 소리가 들릴 정도면, 견학 당일도 전에 대원들의 목이 쉬어 버릴 게 틀림없었다.
조국을 위해! 절대 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