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편의점 앞 현금 자동 지급기 앞에 섰다. 취재비가 들어와 있었다. 혹시나 기대했건만, 역시 예상한 그 금액이었다. 엄승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현금을 꺼냈다.
진치우는 한꺼번에 큰 금액을 입금해 주지 않았다. 여관에 지불하는 숙박비와 식대, 교통비를 제외하면 수중에 남는 돈으로는 양말 한 켤레 사 신을 수 있을까 말까 했다. 그나마도 신해범의 결제가 늦어지면 반나절 이상 손가락 빨며 기다리기 일쑤였다.
입금이 늦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엄승원은 택시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폐를 세어 건네주었다.
“여기.”
젊은 택시 기사가 씩 웃었다.
“좋냐?”
“좋지 그럼. 역 앞에서 주야장천 뻗치기 안 해도 되는데.”
함풍은 직할시에 비해 인프라가 부실했다. 전철이 다닌다는 게 마을의 자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버스는 겹치는 노선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나마도 짧으면 이십 분, 길게는 삼십 분까지 목 빠지게 기다려야 했다.
자연히 택시를 부르는 횟수가 많아졌다. 잔액은 밑 빠진 독의 물처럼 새어 나갔다.
상황을 설명하고 추가 비용을 요구했더니, 진치우는 ‘이 돼지 새끼가’로 시작해서 ‘남의 돈이라고 아까운 줄 모른다’로 끝나는 무자비한 욕설을 쏟아 냈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이라면 환멸이 나 당장에 사직서를 집어 던졌을 테지만, 엄승원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차근차근 진치우를 설득했다. 노력한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엄승원은 이제 택시가 출발한 순간부터 눈알이 빠져라 미터기만 쳐다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아예 차고지를 찾아갔다. 택시 기사들과 피나는 흥정 끝에 함풍에서 자신과 함께 다녀 줄 사람과 계약했다.
엄승원은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다.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는 만에 하나 취재 도중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될 것이고, 체격에 비해 인상이 순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격이 참 좋았다. 나이를 트자마자 깍듯하게 형님 대접해 주는 것도 그렇고, 취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도 그렇고. 마침 식성도 잘 맞았다.
비록 취재비가 넉넉지 않아 칼같이 더치페이를 해야 했지만, 엄승원은 그와의 동행이 마음에 들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이따금 튀어나오는 군대 말투였는데, 그런 건 여타 장점들에 비하면 흠도 아니었다.
엄승원은 비닐봉지에서 망고 맛 하드를 꺼내 건넸다.
“덥다. 먹고 가자.”
“고맙소, 형님.”
남자는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엄승원도 같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조수석 대시 보드에 잘 보이게 부착된 택시 면허증에 적힌 이름은 성지한이었다.
하드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엄승원이 말했다.
“취재 마치고 나랑 같이 직할시로 올라가. 거기 가족들도 다 있다며.”
“갈 때 되면 어련히 가겠지.”
“쉬려고 내려왔다면서 일해서 어쩐대?”
“처음에야 노니까 좋았지. 며칠 비비고 있으니까 허우대 멀쩡한 놈이 놀면 뭐 해, 싶더라고.”
“지도는 쉬면서 외웠어?”
“혼자 있는데 생각하기 싫어서.”
택시에 내비게이션이 탑재되었지만, 성지한은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기계를 쓰지 않았다. 아예 내비를 꺼 놓고 다녔다. 일하는 중에는 개인 휴대폰도 잘 꺼내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아날로그적인 성향이었다.
엄승원은 그래서 더 가산점을 주었다. 성지한은 기계에 의존하지 않는 대신 함풍 2도의 지리를 완전히 외우고 있어서, 어지간하면 현지인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엄승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문화 회관 폭발 화재와 함씨 일가 몰살 사건으로 인해 이곳 현지인들은 외부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함풍 2도는 예전에도 한바탕 고초를 치른 적이 있었다. 류연비 때문에.
이번 일이 그때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더라도, 엄승원이 함풍 2도에 도착한 시기는 이미 광성의 취재진이 휩쓸고 간 다음이었다. 현지인들의 경계심은 최고조였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인근 상가로 들어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하나같이 ‘나가요. 나가’ 하는 반응이었다.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냉대도 반복되니 지치고 맥이 빠졌다. 엄승원은 함풍 2도로 내려온 뒤 신해범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진치우는 위로나 격려를 기대하기 힘든 상대였다. 그렇다고 옛날 직장 동료들에게 전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엄승원은 성지한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되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함씨 일가의 부정과 중앙 정부의 힘이 덜 미치는 지역에 뿌리 깊은 토착 세력을 파헤치는 것이라고 둘러댄 게 미안할 정도로.
다 먹은 하드 막대기를 비닐봉지에 담은 성지한이 까만 캡을 고쳐 썼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
“문화 회관. 어제 갔던 데.”
“뭐 더 둘러볼 필요가 있나? 그냥 잿더미던데.”
엄승원은 비닐봉지 매듭을 꽉 묶어서 뒷좌석으로 던졌다.
“볼 수 있을 때 봐 둬야지. 철거하기 전에.”
현장을 여러 번 보아야 한다.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사실이 윤곽을 드러내니까.
엄승원은 데세랄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어제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폐허가 된 문화 회관은 한여름 뙤약볕 아래 녹아내리는 과자 집 같았다. 벽과 기둥은 무너졌고, 불에 타서 원래 색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벽돌 잔해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파란색이었던 대문은 그을고 우그러졌다. 바닥이 덜 무너진 2층의 벽 한쪽이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했으나 폭발의 충격 때문에 금이 가 있었다. 균열은 바깥에서도 보일 만큼 깊었다.
엄승원은 액정을 들여다보는 성지한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카메라를 감추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보여 줘도 상관없었다.
문화 회관을 살펴보는 일은 헛수고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속여 넘기기 위한 눈속임도 아니었다. 어느 지역이든 회관이라는 곳은 거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존재하고, 따라서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드나들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명칭, 구조, 시설의 변화는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열린 장소라는 것.
류연비의 고향 집이 전소한 이상, 그의 측근이 함풍 2도에 뭔가를 감추었다면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장소보다는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는 오픈된 공간일 확률이 높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엄승원은 자기가 ‘류연비의 측근’이었다면, 본인 또한 제거당할 가능성을 고려했으리라 생각했다.
오직 자기만 찾아갈 수 있는 장소라서야, 영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테니까.
택시가 출발했다. 엄승원은 카메라 전원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가운 햇빛에 눈이 부셨다. 주민 대다수가 대중교통에 의지하는 곳이라 그런지 아침에도 길이 한산했다. 포장도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아쉽긴 해도, 뙤약볕 길을 걷는 주민들로부터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으면 저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빵빵한 에어컨, 믿음직한 운전기사. 엄승원은 마치 신해범이 된 기분이었다.
***
장진으로 내려온 뒤 장마 전선이 물러갔다. 곧이어 찌는 듯한 폭염이 시작됐다.
바다와 접한 항구 도시는 습도가 높아, 내륙에서만 살던 류진에게 숨이 턱 막히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권세혁은 이만한 더위가 오래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가을 날씨가 된다고. 그러나 항구 도시의 여름은 풍기대에서 보낸 꿉꿉한 장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부터 별났다. 실내는 에어컨 덕분에 시원했지만, 밖으로 나서면 숨이 턱 막히는 고온 열기가 덮쳐 왔다. 권세혁이 고향 냄새라고 표현하는 바다 냄새가 늘 공기 중에 은은하게 떠도는 듯했다.
류진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한자나 영어가 별로 없어서 읽기 쉬운 소설책이었다.
오전 열한 시였다. 시곗바늘이 정각을 가리켰다. 권세혁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류진은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 복도 끝에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삼, 이, 일….
“류진이 형!”
류진이 예상한 타이밍에 권세혁이 나타났다. 여덟 개의 문짝에 승천하는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는 정확히 용의 배 부분, 중간 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팔다리에 더운 공기를 휘감고.
귀가하자마자 곧장 이 방으로 직행한 것이다. 류진은 권세혁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큰소리는. 내가 어디 가냐?”
수박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서 내밀었다.
“먹을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고용인이 방으로 갖다준 화채였다. 권세혁은 씩 웃으면서 테이블로 다가왔다.
“응. 먹을래.”
그는 포크가 아니라 류진의 손목을 잡고 수박을 덥석, 베어 물었다.
“미지근해.”
“얼음 녹아서 그래. 원랜 시원했는데.”
“형 다 먹지 그랬어. 나 기다리지 말고.”
잠시 후 노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금색 쟁반을 든 남자가 들어왔다. 깨끗한 흰색 반팔 셔츠에 검은 바지를 차려입은 젊은 남자는 장신에 건장한 체격을 갖춘 미남이었다. 이름이 윤태금이라고 했다.
그가 든 쟁반에는 길쭉한 크리스털 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아이스크림과 시럽, 과일이 들어간 파르페였다.
“도련님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저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왕자님께서 제대로 예우를 갖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류진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화채를 먹어서 배가 부르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근사한 간식이었다.
권세혁이 류진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파르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윤태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저 사람은 정확히 하는 일이 뭐야? 다른 사람들하고는 옷이 다른데.”
가사를 맡아 하는 고용인들도 검은 하의에 흰색 상의를 입었으나 현대 스타일로 개량한 전통 의상이라 몸에 꼭 맞는 정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류진이 보는 윤태금은 언제나 핏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정장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권세혁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보안 설비 담당자야. 옛날엔 없었는데 새로 뽑았나 봐. 저 형 누나가 우리 엄마랑 친하다네.”
“아….”
권세혁이 입을 벌렸다. 류진은 잠자코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주었다.
“보안 설비가 정확히 뭐야?”
“뭐 자기 말로는 시큐리티 어쩌고, 저쩌고 거창한데 그냥 방범이지. CCTV나 출입 통제 그런 거 있잖아. 나 광성 간 사이에 집이 많이 바뀌었다 싶었는데, 그게 다 저 형 작품이더라고.”
“그럼 기술자야?”
“그런가 봐. 외조부님한테 지원받아서 이것저것 개발하는 거 같던데… 근데 형. 혹시 윤태금한테 관심 있어?”
“아냐! 넌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권세혁이 투덜거렸다.
“어째 신해범 닮았단 말이야.”
“그래도 너한테 잘해 주잖아.”
“외조부님 때문이지. 신해범이 숙부님 때문에 나한테 잘해 주는 것처럼.”
신해범에 대한 권세혁의 적의는 장진에 내려온 뒤 한층 심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누그러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류진은 그 사실이 의아했으나, 기우희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했다. 이곳은 권세혁의 홈그라운드이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긴장이 풀어지고 자신감이 솟구친다. 총통 후보로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때와 상황도 다르고.
한마디로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류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권세혁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입장과 기분을 고려했다. 그게 다른 왕족, 귀족들과 다른 점이었다. 권세혁은 덮어놓고 뻐기거나 잘난 척하지 않았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출신 성분 따지지 않고 예의를 차렸다. 한마디로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한번 적으로 인식한 상대에게는 가차 없었다.
또한 그는 경험을 통해서 학습했다. 예전 같았으면 권세혁은 순순히 윤태금을 따랐을 터였다. 권주혁의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신해범을 믿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권세혁은 무턱대고 윤태금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상대방의 호의를 의심하게 되었다.
류진은 능숙하게 권세혁을 달랬다.
“나 저 사람한테 관심 없어. 난 네가 아침부터 뭐 하는지 더 궁금해.”
그가 빙그레 웃었다.
“준비하는 거야. 형한테 내 증표를 주려고.”
장진에 도착한 첫날, 도착한 새벽을 포함하여 이틀을 내리 잔 권세혁은 삼 일째 되던 날에 스스로 일어났다. 류진보다도 먼저였다.
그는 옆자리의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난 류진의 뺨을 쓰다듬으며 ‘더 자’ 하고 말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서인지 목소리가 맑았다.
‘어디 가는데?’
‘금방 올 거야. 더 자고 있어.’
권세혁은 행선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류진은 잠이 안 깨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을 나가는 권세혁의 뒷모습을 좇았다. 풍기대에서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늘어지던 놈이 별안간 새벽 다섯 시에 알람 시계의 도움도 없이 벌떡벌떡 일어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우희는 권세혁이 별관으로 간다고 했다. 바로 문이 닫혀서 내부까지 따라 들어가지는 못했다며, 이 괴성(怪城)의 미로 같은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려면 보름은 있어야겠다고 혀를 찼다.
괴성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대저택이었다. 평수만 1200, 높이 5층, 대지 면적은 1800평에 달하는 이 호화 저택은 <정진수의헌(正進水毅軒)>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통미가 느껴지는 이름과는 영 딴판이었다.
나무와 기와가 주재료인 전통 가옥을 기조로 했다는 점에서는 호월루와 비슷하지만, 정수헌은 근본적인 건축 양식부터 많은 요소가 호월루와 달랐다.
호월루는 산의 일부인 듯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정수헌은 바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흑룡이 땅을 집어삼키고 그대로 똬리를 튼 것 같았다.
저택은 와인 창고가 있는 지하 동굴에서부터 옥상까지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었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한 대씩이었다. 연회장, 다이닝 룸, 바 등 공용 공간은 바닥이 회전식이었는데 전통식 침실과는 달리 비앙코 카라라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두 마리 용이 기둥을 휘감은 거대한 벽난로는 유럽 문화유산 같았다.
호화스러운 건 실내뿐만이 아니었다. 헬기 이착륙을 위한 전용 비행장, 장두현의 개인 서재를 겸하는 장서관, 손님의 출입은 불가능한 전통식 별관, 외국의 최고급 호텔을 연상시키는 수영장… 류진은 집에 삼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위압적인 건 담장이었다. 5층 건물을 겹겹이 둘러싼 새카만 담. 까마득하게 높고, 전류가 흐르며, 팔 미터 간격으로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컥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수헌은 주인과 고용인들의 생활 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서 동선이 겹치지 않았다. 거주자는 많은데 눈에 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림자가 많은 집이었다.
류진과 기우희는 권세혁의 손님이었으므로 ‘주인’의 생활 공간인 정수헌 본관으로 안내받았다. 3층이 전부 손님방으로 꾸며졌는데, 류진에게는 제일 넓고 좋은 방이 배정되었다. 권세혁이 정수헌의 자기 방에서 지내지 않고 류진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함께 내려왔던 네 명의 풍기대원들은 정수헌에서 하루만 지내고 직할시로 돌아갔다. 집주인인 장두현도 자리에 없었다. 윤태금은 그가 본인 소유의 사냥터로 원정 사냥을 떠났다고 했다. 권세혁은 자신의 방문에도 곧바로 귀환하지 않는 외조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류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 외조부님 귀환하신대.”
“오늘?”
“곰 잡았대. 하여튼 정정하셔.”
“고, 곰?”
“자세한 건 아직 못 들었어. 뭐 금방 알게 되겠지. 어차피,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따로 있잖아.”
권세혁이 류진의 손을 잡았다. 장진에 온 뒤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한 그는 안색도 좋았고, 담배도 전보다 덜 피웠으며, 식사량도 늘었다. 그 덕분인지 오른팔의 자상도 빠르게 호전되었다. 심지어 요즘은 소금물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나 지금 설레서 미칠 거 같아.”
류진을 향해 미소 짓는 권세혁의 얼굴은 태양처럼 밝았다. 그러나 류진은 마주 웃기 힘들었다. 장두현을 만난다.
신해범은 약속한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호월루에 도착했다.
별관 문은 열려 있었고, 신예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잡지를 읽는 중이었다. 신해범이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해범은 사촌 동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신예나의 품에 안겨서 잠시 쉬었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신해범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켄넬을 꺼내 들고 대청마루까지 걸어갔다. 백구는 잔뜩 웅크린 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형제자매를 잃고 최유신의 보호를 받던 녀석은 결국 모견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신예나는 강아지를 꺼내 품에 안았다. 최유신과 하채경이 식음을 전폐한 강아지를 어떻게든 살찌우려고 노력했으나, 신예나가 안은 백구는 등뼈가 만져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미친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았다. 신해범은 피식 웃었다.
“고맙다.”
“뭐가?”
“제대로 짚어 줘서. 사람이 생겨 먹은 대로 살아야지, 미친 짓 한번 했다가 곤욕 거하게 치른다.”
신해범은 일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외부에 홍보가 이루어져 은폐할 수도 없거니와, 괜히 군견 키운다고 설치다가 귀한 예산 날렸다는 권주혁의 비난도 피해 갈 생각이 없었다. 예전부터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은 익숙했다.
내심 기대하는 부분도 있었다. 권주혁 총통 보좌관과 권세혁 왕자의 사이가 틀어진 지금, 권세혁이 소속된 풍기 교육대의 방향성을 확실히 해야 했다. 신해범은 지금이 권주혁과 거리를 벌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유미현이 마음이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서도록.
그렇게 생각하면, 강아지들의 죽음이 백 퍼센트 잃기만 한 장사는 아니었다.
신해범은 풍기 교육대 내부에 도는 소문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 강아지들 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으며, 우리 대장이 12층 사무실에서 대차게 깨졌다는 이야기였는데,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을뿐더러 성급하게 추진한 프로젝트와 관리 부실로 말 못 하는 짐승만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대장님도 불쌍해. 다 잘해 보려고 그런 건데 뭐. 나쁜 건 우리 대장이 아니고 강아지들 해코지한 범인이지. 내부자일 확률이 높다는데 진짜야? 여태 못 잡은 걸 보면 바깥사람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는데?
신해범은 그 모든 소문을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범인이 누군지는 알았다. 지금 당장 그를 체포하지 않는 건 아직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인우가 같은 범행을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강인우의 목적은 처음부터 강아지들이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지금은 몸을 사릴 때였다. 전직 헌병대 특수사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이치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언제나 만약의 경우는 있었고, 대원들과 직원들의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신해범은 풍기 교육대 내부의 음식과 식수를 외부에서 조달해 오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건물 내부의 모든 정수기를 철거하고 생수를 들여왔으며, 직원 식당 조리실은 모의 훈련장으로 옮겨갔다. 도시락 형태로 완성된 음식은 하채경이 직접 운전하는 기대마에 실려 본관으로 들어왔다.
“번거롭기도 하다.”
이야기를 들은 신예나가 한숨 쉬었다. 신해범은 픽 웃었다.
“그 새끼는 알려나.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 힘들게 하는지.”
“다른 사람들 생각했으면, 애초에 그런 짓도 안 해.”
신예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강인우 독한 사람이다. 철두철미하고. 오빠도 조심해야겠어.”
“이보다 더 조심할 수 없을 만큼 조심하고 있어.”
“자만하지 말고!”
“예. 예.”
뒷마당에서 짖는 소리가 났다. 모래 먼지를 날리며 뛰어온 까만 강아지가 댓돌에서 점프했다. 대청마루로 떡하니 올라온 녀석이 신해범의 허벅지에 앞발을 얹고 헥헥거렸다.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 흑요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두 눈. 흑구는 신예나의 품에 안긴 백구를 보았다. 자꾸만 주둥이를 들이밀며 냄새를 맡으려고 했다.
“알아보나 봐. 하긴, 그렇게 오래 헤어져 있었던 건 아니니까….”
“얘가 그 개야?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새끼?”
“응. 많이 컸지?”
“제일 작고 약하다며.”
신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얜 엄마 젖도 안 뗐고, 하나 남은 놈이라고 신경 좀 썼거든. 또 여기가 산이잖아. 공기 좋은 데서 뛰어다니고 노니까 튼튼해지지.”
멀리서 또 하나의 흙먼지가 일었다. 엄마 백구였다. 새끼들을 낳고 기운이 없어졌다던 녀석도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대체 개들한테 뭘 먹인 거야?”
“사랑과 배려. 지속적인 관심.”
“…….”
“아, 뭐어!”
신해범이 웃었다. 처마 그늘 밖으로 햇살에 빛나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장마가 물러간 요즘, 하늘은 꾸준히 맑았다.
낮과 밤이 일교차가 커지는 시기였다. 아침과 한낮은 여전히 덥지만 밤이면 제법 쌀쌀한 바람에 얇은 외투로 손이 뻗치는 계절이었다. 곧 가을이 온다. 추풍낙엽의 계절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신예나가 말했다.
“장진은 푹푹 찐대. 지금 한창 더울 땐가 봐.”
“걔는 왜 자꾸 너한테 메시지 보내?”
“질투는.”
“맞는 말이라서 반박은 못 하겠네.”
두 마리의 강아지는 서로의 꼬리를 쫓으면서 놀았다. 마당을 뱅뱅 돌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모견을 따라 뒷마당으로 가는 것이리라.
신해범은 팔랑팔랑 흔들리는 백구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내가 부족해서 네 자식 다섯을 황천길로 보냈다.
두 번 다시 욕심내지 않으마.
“류진이 걱정 안 돼?”
“기 소령이 같이 있어.”
그래서 걱정 안 한다는 건지, 아닌지.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예나가 굽 높은 신발을 고쳐 신었다.
“청승 그만 떨고 가자, 밥 먹으러.”
두 사람은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신해범의 시선은 하늘 높이 치솟는 인공 분수로 향했다. 부서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났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신해범은 기왕 호월루에서 먹는 밥, 2층의 테라스 좌석에서 즐기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약석은 1층이었다. 넓지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안쪽 방이었다. 하나 있는 창문까지 굳게 닫혀서 흡사 밀실처럼 느껴졌다. 신해범은 붉은 식탁보로 덮인 원형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꽤 넓은 간격을 두고 배치된 의자는 세 개였다. 특정 하나를 상석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초대한 사람도, 초대받은 사람도, 파티의 호스트도 모조리 평등한 자리였다. 평등.
신해범은 조용히 읊조리며 창문과 가장 가까운 의자를 골라 앉았다.
풍기대에서 가지고 내려온 가을옷은 장진에서 입기에 아직 더웠다. 권세혁은 몇 번이나 쇼핑을 가자고 했지만 류진은 거절했다. 결국 권세혁이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본인이 중학생 때 입었던 옷들을 가지고 왔다.
오래된 옷이지만 원단이 좋고 보관이 잘 되어 있었다.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으로만 고른 덕분인지 지금 입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권세혁과 윤태금이 옷가지를 침대 위에 펼쳐 놓고 이게 낫네, 저게 낫네, 팽팽하게 설전했다.
“류진이 형은 파스텔 톤이 잘 받는다니까. 얼굴이 하얘서.”
“그래도 검은색이 낫지 않을까요?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니까요.”
“풍기대에서 계속 그런 옷만 입고 살았다고. 지겨워, 지겨워.”
윤태금은 검정 칼라 티를, 권세혁은 연노란 반팔 셔츠를 고집했다. 류진은 두 사람이 떠들게 내버려 두었다.
류진의 시선은 권세혁의 어린 시절 앨범에 꽂혀 있었다. 윤태금이 가져온 책자형 앨범 속 권세혁은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을 만큼 어렸다.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카락과 도자기같이 매끄러운 뺨이 유럽풍 비스크 인형 같았다.
어릴 때부터 갈색이었구나. 눈동자 색도.
“형 뭐 해?”
“으악!”
“뭘 그렇게 놀라.”
권세혁이 푸시시 웃었다. 올리브색 셔츠가 잘 어울렸다. 그는 류진에게 반팔 셔츠와 칼라 티를 동시에 내밀었다.
“뭐가 더 마음에 들어?”
“음….”
류진은 눈을 굴렸다. 권세혁을 지나쳐 옷더미를 향해 다가갔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옷 중 눈에 확 띄는 파란색 티셔츠를 찾아냈다.
“이거.”
“아, 그 옷.”
“자주 입었어?”
“입으면 잘 어울린다는 소리 들었어.”
권세혁은 파란 티셔츠에 어울리는 바지를 찾아 주었다. 권세혁이 중학생 때 입었던 옷임에도 불구하고 기장이 길어서, 윤태금이 급한 대로 바짓단을 롤 업 시켰다. 능숙하게 시침 핀을 꽂는 모습을 보며 류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보안 담당자가 못 하는 일이 없다.
“마음에 드십니까?”
윤태금은 류진을 거울 앞으로 안내했다.
“형 벨트 필요해?”
“괜찮아. 안 헐렁해.”
“그래도 하나 걸쳐.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거야.”
권세혁이 검은 가죽 벨트를 매 주었다. 류진은 지척에서 느껴지는 권세혁의 숨결에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 가깝다.
“…….”
“왜?”
“나한테는 아무 말이 없네.”
“어?”
권세혁은 웃기만 했다. 그가 고개를 흔들자 희미하게 로션 냄새가 풍겼다. 지금까지 풍기던 냄새와는 다른 향이었다. 시원하고, 포근한….
“아냐. 형 신발은 뭐 신을래? 내 신발 중에서 맞는 거 있나?”
신발 상자를 여닫는 권세혁의 등 뒤에서 윤태금이 살짝 언질을 줬다.
“칭찬을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아아. 네.”
“예전부터 느꼈는데, 도련님은 말투가 군인 같지 않군요.”
“여긴 풍기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기우희 소령님은 여기서도….”
“소령님은 저 같은 사람과 비교될 분이 아닙니다.”
윤태금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렇군요. 제가 실례했습니다.”
류진이 미처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윤태금이 말했다.
“그래도 제가 왕자님 어린 시절 사진 보여 드렸으니 된 거죠?”
“…….”
윤태금은 이런 게 문제였다. 류진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앨범 더 있나 찾아보고, 또 보여 드리겠습니다.”
“꼭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제가 지금 근신 중이거든요.”
윤태금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붙잡았다.
“근신이요?”
“네. 매형의 비즈니스에 폐를 끼쳤거든요. 여기 와 있는 것도 따지자면 그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음, 뭐라고 할까.”
한마디로 이곳 사람들에게 점수를 따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류진의 관심사는 그쪽이 아니었다.
매형이라면, 윤태금의 누나는 결혼했다는 뜻이었다.
“누나 이름이 뭐예요?”
“윤금강이라고 합니다. 쇠 금(金)자에 굳셀 강(强).”
“이름이 멋져요.”
이쯤이면 응당 돌아와야 할 질문이 없었다. 윤태금은 류진의 호구 조사를 하는 대신 잠자코 웃기만 했다.
류진은 그가 자신의 가족 관계를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권세혁이 말해 줬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얼굴로 알아봤을 수도….
발렌시아가 박스를 든 권세혁이 다가왔다.
“형, 이걸로 해.”
“이것도 네가 신던 거야?”
“응, 근데 밑창 깨끗해. 사 놓고 한 번도 안 신었나 봐.”
류진은 새삼스레 놀랐다. 옷가지가 많으면 그럴 수도 있구나.
살짝 헐렁한 느낌은 있었지만, 신발은 류진의 발에 잘 맞았다. 권세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앞으로 그거 신고 다니면 되겠다.”
무전을 받은 윤태금이 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가 쓰는 무전기는 류진이 호월루나 풍기대에서 보던 것보다 작고 얇았다. 휴대폰과 비슷해서 자칫하면 헷갈리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기우희가 복도 끝에서 기다렸다. 제복을 입은 그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류진은 잠자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기우희는 류진에게는 마주 끄덕여 주었으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윤태금은 매몰차게 무시했다.
권세혁이 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나 아직도 화났어?”
“…그런가 봐.”
진압 차량 때문이었다. 윤태금은 일행이 도착한 첫날부터 기우희가 가장 아끼는 ‘무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기우희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윤태금은 야외에 주차된 진압 차량의 주포를 만져 보다 기우희에게 딱 걸렸다.
만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불쾌할 수는 있어도. 하지만 그때 윤태금의 손에는 어떤 자료가 들렸다. 기우희는 그것이 탱크의 전개도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챘다.
윤태금은 자기가 설계한 것과 비교해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했으나, 기우희는 믿지 않았다. 권세혁이 중재하여 브로커 오해는 풀었지만 여전히 기우희는 윤태금을 불신했다.
바깥에는 이미 많은 고용인들이 나와 있었다. 권세혁이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류진은 그가 사람들과 고향 사투리로 말하며 장난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밝고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 지금 권세혁은 평범하고 행복한 스무 살짜리 남자애 같았다.
“긴장해.”
기우희가 속삭였다. 류진이 대답했다.
“예.”
“겉과 속이 다른 늙은이다. 속지 마.”
“예.”
“네가 잘못되면 그 책임을 내가 진다.”
기우희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주의해야 하는 상대였다. 제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한들, 현역에서 물러났다 한들, 예나 지금이나 장두현은 거물이었다. 류진은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땅울림이 느껴졌다.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졌다.
“형! 다 왔대!”
권세혁이 달려왔다. 류진은 그에게 팔을 붙잡힌 채 애매하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은데, 속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오자마자 형부터 소개해 줄게.”
권세혁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온다. 오고 있다. 그 사람이 오는 중이다.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 빛이 눈부셨다. 아스팔트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언덕 아래에서 힘차게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선두 차량은 파란색 포드 레인저였다. 짐칸에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싣고 있었다.
류진은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일렉트릭 블루 차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뒤에서 산이 따라왔다. 크고 검은 산….
산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차였다. 거칠고 투박한 배기음으로 도로 가장자리의 아름드리나무들을 버드나무 가지처럼 떨게 만드는, 새카맣고 거대한 악트로스 아머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꽃잎을 활짝 펼친 꽃송이가 찻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식전으로 나온 목련꽃 차다. 꽃차 특유의 은은한 향이 밀폐된 방 안에 가득했다.
오늘 유미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픈 새빨간 정장을 입었고, 정장만큼이나 붉은 립스틱을 칠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냉수를 한 컵 들이켠 그는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며 신해범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유미현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실, 난 준장에게 실망이 커.”
표정은 온화했으나 목소리는 차가웠다. 신해범은 잠자코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 뉘우치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신해범은 유미현을 속으로만 비웃었다. 그의 공격적인 반응은 예상했다. 장승희와의 관계를 사전에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미현은 알 필요도, 굳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사실이었으나 윗선이라는 자들은 늘 그랬다.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남들은 아는데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건 덮어놓고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서인가? 아니면 유미현이 태생부터 이곳저곳 다 손을 뻗쳐야 성에 차는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신해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당당하고 뚜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뭐 자랑할 일이라고요.”
“아는 사람이 행동거지를 그렇게 하고 다녀?”
“꾸지람은 달게 듣겠습니다.”
“말은 잘해.”
“수석 각하도 참. 우리 신 준장 입장을 알면서 그러십니다.”
신예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높았다. 유미현은 썩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으나, 찻잔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투덜거렸다.
“치부를 감춘 사람이 어떻게 큰일을 하나.”
“누구나 감추고 싶은 일 한두 가지는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유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해범이 나섰다.
“확실히 수석께서는 사생활이 깨끗하십니다.”
“자신 있게 말하네. 꼭 조사라도 해 본 것처럼?”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저 남들이 하는 말을 믿을 뿐이지요.”
“신 준장, 의심 많은 사람인 거 내가 잘 알아.”
이게 어디서 내숭을 떨어. 유미현의 붉은 입술이 꿈틀거렸다.
신해범은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호월루가 자랑하는 생선 요리였다. 애피타이저부터 해산물 느낌이 물씬 풍겼다. 뽀얗고 오동통한 살을 드러낸 새우와 레몬 향이 물씬 풍기는 냉채가 오목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신해범은 기분 좋게 포크를 들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진실로 믿고 싶은 사람의 옷자락을 들춰 보지 않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요. 그렇지 않아도 각박한 세상살이, 본인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어찌 남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민답니까. 그건 오만이지요. 과욕입니다. 그건 결국 자신이 발붙이고 뿌리내릴 토양을 썩게 하지요.”
“내 치부를 알아도 모르는 척하겠다?”
“수석님은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 분입니다.”
신해범의 삼지창이 새우를 찍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여튼 말은 참 잘해. 권이 어지간히 잡아 두고 가르쳤나 봐?”
“단칸방에 갇혀서 시사 토론, 스피치 교육 프로그램 반복해서 봤습니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말입니다. 각종 명예 인사들의 축하 연설도 두루 섭렵했지요. 어지간한 명언이라면 누가 말했는지 맞힙니다.”
유미현이 웃었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신해범은 그제야 유미현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먼저 말씀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있나.”
유미현의 시선이 신예나 쪽으로 갔다.
“연지동이 말했듯이, 내가 신 준장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벽창호는 아니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석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신예나였다. 안색이 아까보다 밝았다.
“그런 거야 신 준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믿는다고 안 했어. 신 준장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사방 천지 분간 못하고 좆대가리 휘두르는 애새끼가 아니라.”
신예나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신해범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방 천지 분간 못하고 좆대가리 휘두르는 애새끼….
다른 의미로 양심에 찔리는 말이었다.
애피타이저가 나가고 굴 수프가 들어왔다. 보기에는 맑은데 한입 떠먹으니 묽었다. 겉보기와 속이 다른 요리는 손님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준다고 말한 셰프가 누구였더라.
“수석 각하의 마음을 깊이 새겨,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할까? 응? 나도 어지간히 포커페이스 소리 듣는 사람인데, 신 준장은 얼굴 근육 하나 꿈틀거리지를 않아. 혹시 뭐 챙겨 먹어?”
“종합 비타민과 루테인, 바이오틴, 가르시니아입니다.”
유미현이 웃었다. 아까보다 더 크고 요란한 웃음소리가 천장으로 치솟았다. 테이블의 접시가 흔들릴 정도로 웃어 대던 그가 돌연 얼굴을 굳혔다.
“유머 감각이 있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위기 메이커는 좋은데,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게 해. 언제까지 광대 노릇 할 거야.”
신해범과 신예나, 두 사람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남매였다.
유미현이 수저를 들었다. 굴수프를 음미한 그가 말했다.
“이거 신 준장 많이 먹어야겠다. 굴이 남자한테 좋잖아.”
“하하, 예.”
“그런데 무섭지도 않아? 곽가가 어떻게 됐는지 잘 알면서….”
“그 일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다르긴 한데 덜하진 않아.”
유미현이 말했다.
“중요한 건 말이야, 법전에 구구절절 적힌 법이 아니야. 선례지. 이것저것 복잡한 거 다 치우고 곽재헌 류연비가 불륜으로 총살형 받았다는 판례가 버젓이 있잖아. 신 준장도 이런저런 분쟁 겪어 봐서 알겠지만 사건의 당사자가 누군지는 별로 상관없어. 중요한 건 앞서서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거. 그 죄목이 같다는 거. 재판의 결과. 그것만 딱 보는 거야.”
“남의 결과에 겁먹고 몸 사리는 소인배는 아닙니다.”
“그게 패기나 기합으로 맞설 일이 아니라니까. 누군들 준장처럼 생각하지 않았겠어? 곽재헌이 총살당할 줄 알고 연예인이랑 그 짓거리 했겠냐구우.”
유미현은 말끝을 늘렸다. 비웃음과 조롱의 의미였다.
“패기나 기합으로 해결되는 일보다 아닌 게 훨씬….”
“바로 보셨습니다. 수석 각하.”
“음?”
“제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달그락. 수저를 내려놓은 사람은 신예나였다.
“내 앞에서 그런 말 해 봤자 소용없어. 준장.”
유미현은 냉정했다.
“나는 내가 받아만 주면, 믿어만 주면 목숨이고 가산이고, 마누라 빤스에 딸 아들 손모가지까지 갖다 바치겠다는 놈들로 은하수 다리도 놓을 수 있어. 그리고 난 목숨을 함부로 말하는 걸 싫어하거든.”
“충성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제가 되돌아가기에는 늦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늦었다?”
“예. 저는 이미 늦었습니다.”
세상에 절대 선, 절대 악은 없었다. 절대적인 정의도 마찬가지였다.
신해범은 <백사자>의 하성록을 생각했다. 그는 공화당이 괴멸당한 뒤 국외에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동지를 배신했다. 약자들의 편에 서서 군부의 개들과 무력 투쟁했지만, 그 일에 필요한 자금은 클럽에서 술과 약을 팔아 충당했다. 목숨 바쳐 조원들에게는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고, 순진한 어린애를 꼬드겨 성적으로 착취했다.
하성록을 보고 있으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였다.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면 영웅이 된다. 물론 그 소수는 본인이 아닌 남이어야 한다. 남의 자식은 감옥에 가든, 창부가 되든 상관없지만 내 새끼는 좆나 소중하거든요!
어우, 씨발….
“풍기대에 몸담은 기 소령이 즉위하려면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물러난다. 그건 너무 점잖은 표현인데.”
유미현이 접시 위의 생선을 뒤집었다. 생선 등을 아래로 향하게 만드는 이 행위는 불운을 상징했다.
“차라리 인민재판이라고 하겠어.”
생선과 배를 동일시하는 문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생선이 뒤집히면 배도 전복된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예.”
“연지동.”
신예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자네도 아는 얘긴가?”
“…그만큼 모든 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겠지요.”
유미현이 상체를 뒤로 뺐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주먹이 ‘허어’ 하듯 위아래로 가볍게 움직였다.
신해범은 쐐기를 박았다.
“한 명만 있으면 됩니다. 딱 한 명 말입니다.”
그나마 누가 덜 더럽고 치사한지 가려내는 진흙탕 싸움에서 대중에게 인지도 높은 적폐 세력 하나를 처단해 준다면 해당 후보자에 대한 지지는 치솟을 것이다. 권세혁 왕자는 총통 보좌관의 꼭두각시지만, 기우희 소령은 내부 고발자니까.
기우희는 실제로 자기 대에서 왕가의 핏줄을 끊으려 한다. 그는 이 나라의 마지막 총통이 될 것이다. 신해범은 기우희가 훗날 ‘망한 왕조 최후의 여황제’ 따위로 기억되지 않길 바랐다. 기우희는 무너지는 게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거였다.
처음부터 무너뜨릴 생각으로 시작한 싸움이었다.
“그런 각오라면 신계동과의 관계도 폭로할 수 있겠네.”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
유미현이 말을 이었다.
“신계동과의 관계가 준장의 약점이 되지 않는다면, 좋아. 난 그 일에 개입하지 않겠네. 남녀상열지사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거든.”
“저는 잃는 게 무섭지 않습니다. 폭로를 두려워하는 쪽은 오히려 부인이십니다.”
“그래도 몸 사릴 필요는 있어. 신계동이 누구 딸인데.”
유미현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비볐다. 포도주색 네일이 조명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비빌 언덕이 있는 사람은 부러워.”
신해범은 눈을 내리깔았다. 유미현이 피식 웃었다.
“장승희는 별거 아니지만 장두현은 특별하지. 세상 물정 모르는 놈들이야 이미 은퇴한 늙은이가 무슨 힘을 쓰겠냐고 우습게 보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정치력을 발휘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붉은 입술 사이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샜다. 갑자기 유미현이 피로해 보였다.
유미현은 장승희가 부러운 것처럼 말했지만, 신해범은 알았다. 유미현이 진정 부러워하는 사람은 장두현이었다.
장두현은 대중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광성 거주자가 아니었고, 한물간 늙은이라는 인식 때문에 현역 정치가들에게 견제받지 않았다.
지명도가 높은 공인일수록 심하기 마련인 부담감이 유미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부담감이 유미현의 약점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 강력한 지배자가 아니라 포용하는 영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쉽게 피로해졌다. 소모하는 에너지가 커서.
신해범은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제가 수석 각하의 언덕이 되겠습니다.”
신해범은 정부군 동원이 가능한 별 하나였다. 유미현의 집안은 공화당이 망할 때에도 영리하게 줄을 바꿔 가며 살아남은 부호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세 명이 머리를 맞대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신예나가 말했다. 유미현은 그 셋이 누구냐고 물었다. 신예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대답했다.
“군인, 부자, 선동가.”
“전부 이 테이블에 앉아 있군요.”
그렇게 말한 신해범이 빙그레 웃었다.
“수석께 <백사자>는 필요 없습니다. 저희 풍기 교육대가 그 자리 대신하겠습니다.”
돌려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신해범은 하성록이 죽도록 싫었다. 그가 이뤄 놓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은 실패했다고. 당신이 틀리고 내가 옳았다고. 우리 둘 다 똑같이 더럽고, 치사했지만, 부패한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승리자는 바로 나라고.
지옥은 똑같이 가겠지.
그래도 네가 먼저 가라.
유미현이 차량에 탑승하기 전,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신해범은 습관처럼 미소 지었으나 원세영은 웃지 않았다. 두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이고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존중의 표현이라기보다 ‘나는 당신과 가까워지지 않겠다’라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까만 재규어가 흙먼지를 날리며 멀어졌다. 돌아서는데 따귀에 불이 일었다. 신해범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 소리만 요란하지 별반 아프지도 않았다. 아픈 건 손이 아니라 눈빛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신예나의 시선에 가슴이 찔리는 것처럼 아파서, 신해범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내 앞에서 할 말이니.”
“뭘.”
“…….”
“아, 영양제? 알았어. 사 줄게. 필요하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냐. 치우는 홍삼 먹던데 너도 할래?”
반대편 따귀도 얻어맞았다. 손바닥이 날아오는 방향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신해범은 사촌 동생의 손을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았다.
신예나가 화내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신해범은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누구에게든 혼자 서야 할 시기가 찾아와. 늦든 빠르든.”
“왜 그렇게 사람이 이기적이야?”
“그런가?”
“뭐가 ‘그런가’야? 오빠 정말 이기적이야. 곁에 있는 사람들 생각을 안 해. 괴로운 일, 어려운 일 혼자서 다 하는데 내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야?”
“…….”
“난 오빠 보고 있으면 불안해서 죽겠어. 아주 발밑이 꺼지는 거 같아.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거 같다고.”
“…….”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뭐, 살기를 바라지 않아? 오빠 우리 모르게 혼자서 죽을 날 받아 놨어?”
신예나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지금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어떤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거랑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죽는 건 다른 문제야.”
“나도 알아. 아, 진짜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아는 사람이 말을 그딴 식으로 해? 그것도 내가 듣는 자리에서?”
“…….”
신해범은 우다다 쏘아붙이는 사촌 동생이 폭격기 같다고 생각했다. 이 공습을 멈추기 위해서는 신예나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직업 교육 잘돼? 기생들 내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네가 고생이 많다.”
“우리 신해범 대장님, 요리조리 대답 피하느라 머리 깨질 것 같죠?”
안 먹히네. 신해범은 플랜 B로 갔다.
“우리 꼬꼬는 장진에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있으려나.”
신해범을 흘겨보던 신예나가 말했다.
“얘기 못 들었어? 류진이 오늘 장두현 만난대. 원정 사냥 갔다가 이제 복귀한다더라.”
“알아. 기 소령한테 보고받았어.”
“오빠.”
신해범은 웃었지만, 신예나는 여전히 못마땅한 목소리였다.
“류진이랑 왜 연락을 안 해? 중간에 우희 껴서 얘기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세상에 어느 별 하나가 이병한테 보고를 받냐?”
“그렇게 말하지 말고!”
신예나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신해범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갖가지 냄새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기름 냄새, 타이어 고무 타는 냄새, 먼지와 흙과 물 냄새.
그중에서도 강렬한 건 피 냄새였다. 콧등이 찡해질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선두의 포드레인저와 악트로스 아머드, 뒤따르는 두 대의 육공 트럭에서 진동했다.
땅을 울리며 올라오던 차량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정차했다. 그들이 몰고 온 열풍이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을 덮쳤다.
류진은 숨을 참았다. 올려다본 권세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정면을 주시했다.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포드레인저 운전석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바지에 갈색 컨트리 부츠를 신고 있었다. 긴 팔 셔츠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뚝이 두꺼웠다.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서 갈색이었다.
남자의 손등부터 팔꿈치를 휘감은 문신이 보였다. 전부 보이지는 않았지만 꼬리와 비늘 모양으로 짐작하건대 용이었다.
조수석에서 비슷한 옷차림의 여자가 내렸다. 남자만큼이나 큰 키에 어깨가 넓었다. 민소매 셔츠 밖으로 드러난 두 팔이 강인해 보였다. 여자의 양어깨에도 용 문신이 선명했다.
권세혁이 속삭였다.
“외조부님 사병. 생김새는 저래 봬도 무서운 사람들 아냐.”
“뭐라고 부르면 돼?”
“그냥 편하게 형, 누나 해.”
“그건 좀.”
류진은 저들의 직책이 궁금했으나, 권세혁조차도 정수헌을 떠났던 시간이 길어 헷갈려 했다.
“이따가 물어보고 알려 줄게.”
권세혁은 들떠 있었다. 설레어한다는 게 표정에서도, 목소리에서도 나타났다.
류진은 힐끗 기우희를 봤다. 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정면만 보았다. 류진은 행여 그가 자기만큼 카리스마 있는 사람을 보고 긴장하지 않기를 바랐다. 소령님이 더 멋있어요.
“너 외조부님은 어디 계셔?”
“저기 트럭. 보여?”
권세혁이 팔을 뻗었다. 옆에서 듣던 윤태금이 감탄했다.
“멀리서도 알아보시다니, 과연 왕자님이십니다.”
노골적인 티가 나는 아부였다. 기우희가 조그맣게 쯧, 혀 차는 소리가 류진의 귀에는 들렸다.
권세혁은 윤태금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단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십 미터 밖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장두현이었다. 류진은 지금 권세혁이 그를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알았다. 보는 눈이 많아 어린애처럼 달려들지 못할 뿐.
맞잡은 손에 땀이 괴었다. 항구 도시의 찌는 여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
“응.”
“나 진짜 오래 기다렸어.”
권세혁의 손이 떨려 댔다. 그와 깍지 낀 류진의 손도 함께 떨렸다.
마침내 장두현의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인식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가 알이 큰 보잉 선글라스를 한 손으로 멋들어지게 벗었을 때, 류진은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닮았다. 정말 많이 닮았다.
권세혁의 색소 옅은 눈동자가, 웃을 때 처지는 눈매가, 화려한 이목구비에도 불구 날카롭지 않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 어디서 왔는지 늘 궁금했었다. 유전자의 비밀이 여기 있었다.
장두현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계에서 은퇴하며 의도적으로 행적을 세탁한 탓이다. 뉴스 기사 사진은 찾아볼 수 있었지만, 촬영 시기로 미루어 보아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였다.
직할시에서 장두현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 이유는 함풍 2도 사건 때문이었다. 권세혁의 든든한 조력자로, 아니 최종적인 배후로. 물론 후환이 두렵기 때문인지 사진을 직접 내보내지는 않았다. 최근 장두현의 모습이라고 보도된 사진은 대부분 초점이 나가 흐릿하거나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 과거에 류진이 기자들에게 시달렸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권세혁은 류진의 손을 잡고 장두현을 향해 걸어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려는 류진의 옆구리를 기우희가 쿡 찔렀다.
“…….”
고마웠다. 옆에 있어 줘서. 함께 걸어 나와 줘서.
여기선 기우희가 신해범 대신이었다. 기우희와 함께 있으면 신해범과 같이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용기를 내야 했다. 류진은 목에 힘을 주고, 권세혁과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장두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쇳소리가 섞인 묵직한 저음이었다.
“…마이 컸네.”
권세혁이 사르르 웃었다.
“할배는 그대로다. 하나도 안 늙었다.”
“갯뻘 촌티 싸악 빠져 가꼬는. 사고 치고 내려오니 좋나?”
“사고 친 게 아니라 옳은 일을 한 거제. 딴 사람들 다 뭐라 캐도, 할배는 내한테 그카면 안 된다.”
“문디 짜슥이 뭘 잘했다고 웃나. 어른들 걱정시키지 마라.”
장두현은 표준어와 항구 도시 사투리가 묘하게 섞인 말투, 억양을 구사했다. 장진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표준말을 써야 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리라.
류진은 눈을 내리깔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장두현은 손자보다 십 센티미터쯤 작았다. 하지만 권세혁은 192센티미터의 장신이었고, 장두현은 신고 있는 컨트리 부츠 굽을 빼도 180은 되어 보였다.
류진은 슬쩍 발뒤꿈치를 들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권세혁의 옷을 빌릴 게 아니라 풍기대 제복을 갖춰 입었어야 했다. 기우희처럼. 그러면 운동화가 아니라 밑창이 두툼한 워커를 신었을 테고, 그러면 백팔십 센티미터 정도는….
“할배.”
“푹푹 찐다. 드가자.”
“내가 말했제? 여기가 류진이 형.”
어깨를 감싸는 손이 느껴졌다. 류진은 권세혁을 올려다봤다.
“인사해라. 할배한테 소개한다고 목 빼지게 기다렸다.”
류진은 권세혁과 꼭 닮은 장두현의 입매를 주시했다.
그는 내가 누군지 알까. 권세혁이 설명했을까.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햇살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궜다. 류진은 어깨를 감싼 권세혁의 손을 떼어 내고, 장두현 앞에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펴면서 덧붙였다.
“정류진이라고 합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장두현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자기 앞에 선 류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볼 뿐이었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는데, 장두현의 눈빛은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가웠다.
사위가 떠들썩했다. 장두현의 사병들과 무전기를 든 윤태금, 정수헌에서 나온 고용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장두현의 원정 사냥은 뒷방 노인네가 심심풀이 운동 삼아 즐기는 수준이 아니었다. 드넓은 사유지에 밀수한 야생 동물들을 풀어놓고 사병들로 팀을 꾸려 누가 더 많이 더 위험한 짐승을 사냥했는지 겨루는 일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사냥이 아니라 재미를 위한 학살이었다.
포드레인저 짐칸의 아이스박스를 열어 본 윤태금이 얼굴을 찌푸렸다. 윽, 하고 손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게 했다.
아이스박스는 하나가 아니었다. 악트로스 아머드의 거대한 짐칸에서는 크고 작은 아이스박스가 끝도 없이 나왔다. 앞문에 별이 그려진 육공 트럭 두 대는 저택 뒷길로 빠졌다. 짐칸이 방수포로 가려졌지만 소리로 내용물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각종 쇠붙이, 날붙이.
류진은 트럭이 지나갈 때 짐칸에 타고 있던 사람 중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방수포 사이로 햇볕에 그은 얼굴과 팔뚝의 용 문신을 보았다. 포드레인저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와 비슷한 체격, 문신이었다. 장두현의 사병들은 하나같이 몸에 문신이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방수포를 홱, 끌어당겼다. 하지만 류진은 이미 보았다. 짐칸 안쪽에도 아이스박스가 잔뜩 있었다. 안에는 분명히….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옆얼굴에 기우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류진은 그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 알았다. 참아.
참을 수가….
한참 만에 장두현이 말했다.
“들가서 야그하자.”
“할배, 사람이 인사를 하믄 좀 받아라.”
“안으로 들가서 야그하자고.”
“쪼매 서 있는다고 안 죽는다!”
권세혁이 버럭 소리쳤다. 움찔한 류진이 그의 팔을 잡았으나 권세혁은 이미 화가 나 있었다.
“니 지금 내한테 큰소리쳤나.”
“할배가 사람을 무시하니까 이카지!”
“나가 은제 무시했는데?”
“그라믄 사람을, 사람이 허리 숙여 가며 인사하는데, 대꾸도 안 허고 그냥 위아래로 쓰더이 보는 게, 그게 무시하는 게 아니믄 먼데!”
장두현이 피식 웃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세혁아, 왜 그래. 나 괜찮아.”
“바라. 점마도 괜찮다 안 하나.”
“그믄 형이 할배 면전에 대고 뭐라 하긋나!”
권세혁은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화를 냈고, 장두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섰다. 류진은 권세혁이 왜 화를 내는지 알았다. 예의를 갖춰 인사한 사람에게 아무 대꾸도 없이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하는 건 노골적인 푸대접이었다.
류진에게는 익숙하고,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기까지 한 대우였지만 권세혁은 아니었다.
장두현이 대꾸했다.
“니 내가 바로 안 왔다고 섭해서 이카는 거제? 다 안다.”
“그게 아이고, 류진이 형은 내 손님으로, 나가 부탁해서 온 건데, 할배가 사람을 보고도 무시하니까 이카지…!”
“니 귀한 손님이랑 내를 이렇게 땡볕에 세워 놓고 싶나?”
“내는 할배한테 소개하려고….”
“자식아!”
별안간 장두현의 목소리가 커졌다. 쩌렁쩌렁한 사자후였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볼 정도였다.
권세혁이 목을 움츠렸다. 놀라고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물론 장두현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큰 손자를 겁낼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소리쳤다.
“니 손님 얼굴이 백지장이다!”
기우희가 류진의 어깨를 잡아챘다.
“정 이병.”
“우… 윽.”
“류진이 형?!”
류진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른 쪽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형? 괜찮아?!”
류진은 허리를 굽히고 웅크렸다. 참아 보려고 노력했다. 가슴이 옥죄이고 내장이 뒤틀리는 감각을 어떻게든 욱여넣으려고 애썼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 순간. 류진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 쓰러졌다.
“류진이 형! 형!”
양 팔꿈치가 아스팔트에 쓸렸다. 땅은 태양열 때문에 몹시 뜨거웠다. 살갗이 까져서 피가 맺혔지만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류진은 바닥에 쏟아 낸 토사물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왜 하필.
왜 하필 저 사람 앞에서.
죽고 싶었다.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울어진 시야에 정신없이 달려오는 윤태금의 모습이 보였다. 무전기에 대고 의사! 의사! 이런 씨, 열사병! 열사병! 소리치는 모습이 다급했다.
“형 괜찮아?! 일어나 봐. 내가 업을….”
류진은 고개를 저었다. 권세혁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윤태금의 손에서 무전기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의사 부르지 마. 그냥 혀 깨물고 죽어 버리게. 나 같은 건, 나 같은 건 그냥….
“정류진.”
왼팔을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있었다. 류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서 그런지, 기우희의 얼굴에 신해범이 겹쳐 보였다.
발코니로 나간 기우희는 아자 교란에 손을 얹고 밖을 내다보았다. 3층 손님방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빌딩과 고가 도로 천국인 대도시와는 달리 탁 트여서 창밖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래서 기우희는 정수헌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류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장두현의 주치의는 열사병이라고 했다. 정식 면허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젊은 남자인데, 말투나 행동거지가 윤태금과 비슷해서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그밖에도 많았다. 그나마 정원 관리자나 가사를 돕는 고용인들은 점잖은 편인데, 이 집구석에서 사병이라고 건들거리며 다니는 것들은 하나같이 양아치 냄새가 나서 거슬렸다. 점잖은 어르신 취향으로는 좀 아닌데. 혹시 그건가? 귀족의 슬럼가 콤플렉스.
기우희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 식사는 했나, 소령?
신해범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주위에서 차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가 울리는 걸 보니 운전하며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이상 없습니다.”
- 거기 음식 안 먹는다고 그러던데.
신예나에게 들었나 보았다. 기우희는 조금 멋쩍어졌다.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담배를 꺼냈다.
“제가 조금 예민한가 봅니다.”
- 자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계좌로 돈 부쳤으니까 확인해 봐. 귀찮다고 편의점 음식 같은 것만 먹으면 속 버려. 체력이 중요한데.
“예.”
기우희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오늘 만난 장두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생김새, 분위기, 행동과 말투. 권세혁과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 의외군. 손자랑 사이좋은 줄 알았는데.
“큰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MVP가 조급해하더군요.”
- 무섭겠지. 인정 못 받을까 봐.
“본인은 내색하지 않지만요.”
- 애지중지 자란 어린애는 감정을 못 숨겨. 의연한 척해도, 실제 상황에 부딪히면 본심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
“…사병 규모가 생각보다 작습니다.”
- 작다?
“사람이요.”
기우희는 지금껏 정수헌을 관찰했던 감상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사람보다 기계가 많습니다.”
그는 윤태금을 떠올렸다. 자신을 정수헌의 보안 담당자라고 소개한 애송이. 진압 차량을 넋 놓고 쳐다보던 옆얼굴이 묘하게 섬뜩했다. 그건 단순한 군사 공학자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동경조차 아니었다. 질투와 시기에 가까운 감정이 부릅뜬 두 눈에 소용돌이쳤다. 기우희는 확실히 느꼈다.
“신경 쓰이는 놈이 있습니다.”
기우희는 윤태금의 이름을 전했다. 그러자 신해범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 만난 적 있어. 신룡관 부인의 퍼스널 쇼퍼… 아니, 보석 딜러의 측근이야. 가족. 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보석 딜러요?”
- 윤금강이라고 있어. 독일에서 온.
독일이 출생지인지, 자란 곳인지, 사업상의 거주지인지는 불확실했다. 그거야 차근차근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기우희는 윤태금이 군사 공학에 관심이 많고,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지금의 정수헌은 확실히 그의 작품이었다.
“장두현은 나이가 많습니다. 새로운 걸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배우기는 쉽지 않아요.”
- 그래서 사람을 쓰지. 똑똑하고 야망 넘치는 젊은이를.
시류를 못 읽어서 망하지는 않을 인간이었다. 장두현.
기우희는 휴대폰을 세게 쥐었다. 기계 너머에서 신해범이 웃었다.
- 우리 꼬꼬는 잘 지내?
기우희는 거짓이나 꾸밈을 모르는 부하였다. 그래서 신해범에게 신뢰받았다.
“장두현 앞에서 열사병으로 쓰러졌습니다. 구토는 밖에서 한 번, 방에 들어와서 두 번. 상주하는 의사가 준 약 먹고 지금 잠들었습니다.”
- 허.
“그것 때문에 MVP 기분이… 상했습니다.”
- 기분이 상해? 누구한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 응. 아마 본인도 모를 거야.
신해범이 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내는 규칙적인 군홧발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졌지만, 그것도 잠시뿐 온갖 잡음이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기우희는 신해범을 불렀다.
“대장님?”
- 아, 소령. 통화 중에 미안하군. 좀 시끄럽지?
“무슨 일 있습니까?”
- 지금 진압 팀 출동해. 알지? 화천. 철거 현장 점거하고 농성하는 애들, 공장 노동자들 말이야.
“아직도 있습니까?”
- 쫓아내도 기어 오고, 기어 오고 하지. 그래도 민가 쪽은 잠잠했는데 이번에 대학생들 끼어들면서 게릴라전으로 번진 모양이야. 철거 작업자들이 겁먹고 달아나서 현장이 엉망이래. 미완공 건축물에 여기저기 널린 자재에, 건설 장비도 그대로 남았다 하고.
“그렇습니까. 규모는요?”
-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마, 소령.
신해범은 역할 분담을 확실히 하자고 했다.
- 지금 자네한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우리 꼬꼬니까.
누구보다 이쪽 일에 관심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기우희는 차마 웃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옆에서 떠들던 동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목덜미와 어깨를 따갑게 두드리는 물줄기를 맞으며 강인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금일 진압 팀에서 체포한 시위자 중에는 젊은이가 많았다. 무장 상태였기 때문에 집중적인 타깃이 되었다. 그래도 그곳에 인혜는 없었다. 있었는데 달아났을지도 모르고. 경우가 어떻든지, 강인우는 안심했다. 안심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으나 고통스러운 기분은 잠시였다.
샤워를 마친 강인우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시원한 음료수 한잔 마시자는 팀원들의 제안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침대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터는데 정류진의 빈 책상이 보였다. 그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책상으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정류진은 강아지들이 죽은 다음 날, 권세혁 왕자와 함께 장진으로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강인우는 그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위험을 감지하고 정류진을 ‘의도적으로’ 풍기 교육대 밖으로 보낸 누군가의 조치인지 생각했다.
그때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봐야 했을까? 강아지들을 잃고 상심해 우는 정류진을 조금만 더 자극했으면, 그에게서 뭔가 더 사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었을까?
강인우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울던 류진을 떠올렸다. 길고 가는 목덜미와 마른 손목에 도드라진 뼈가 기억에 남았다. 여릿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낑낑 울었었다.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이라고 했었지.
그 말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때 정류진에게 한 위로는 진심이었다. 위선과 진심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
정류진이 풍기대를 떠나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기다려야 했다. 그들이 장진에서 돌아올 때를.
강인우는 류진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빈 타이레놀 상자와 쓰다 남은 물티슈, 마트에서 흔하게 살 수 있는 로션이 굴러다녔다.
원래부터 소지품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물욕이 없다기보다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어떻게든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최대한 자기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강인우는 류진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책상 밑에는 사다 놓고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생수가 몇 통 남았다. 강인우는 플러그가 빠져 있는 전기 포트기를 바라보았다. 풍기 교육대 숙소에서 개인 전자레인지는 금지였으나, 절전 기능이 있는 포트기 사용은 가능했다. 강인우는 류진이 저 포트기로 물을 끓여 컵라면을 해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전기포트기만큼이나 아끼는 물건은 또 하나 있었다. 강인우는 류진의 책상 구석에 얌전히 놓인 보라색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이걸 두고 가다니 의외였다. 깨질까 봐 그랬나?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브랜드 제품이기는 해도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다. 가장자리가 꽃잎 모양으로 조각된 컵을 다른 사내놈이 썼으면 주책이라고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보라색 컵은 정류진에게 잘 어울렸다.
강인우는 컵을 내려놓았다. 반삭에 가깝도록 짧게 자른 머리가 방 안의 더운 공기에 금세 말랐다. 그는 제복을 갖춰 입고, 더러워진 기동복을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무전기에서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집어 들던 강인우의 움직임이 멎었다.
진압 1팀 장규영 컴버. 추가 포수자 발생하여 현재 귀환 중. 돌다리 행진 허가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