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트로스 아머드와 나란히 서 있으니 풍기대의 진압 차량도 그렇게 거대해 보이지 않았다. 류진은 사수석에 올라타려던 윤태금이 기우희의 발길질에 채여 아스팔트 바닥에 나뒹구는 걸 보았다. 그가 옆구리를 움켜쥐며 아이고 나 죽네, 뼈 나갔네, 우는소리를 했다. 물론 기우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윤태금은 기어코 진압 차량 탑승 허락을 받아 냈다. 물론 사수석은 아니었다. 자강과 함풍에서 성재경의 자리였던 진압 차량 사수석은 마강희라는 이름의 정수헌 사병이 차지했다.
류진은 그의 어깨를 장식한 용 문신을 알아봤다. 파란색 포드 레인저에 탔었던 여자였다. 장두현에게 신임받는 사람 같았는데, 왜 이쪽 팀에 합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우희가 사수석에 태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류진은 마강희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착석하자마자 차폐막을 닫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윤태금이 말했다.
“너무하시네.”
류진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좀처럼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는 윤태금에게 한마디 했다.
“똑바로 앉아.”
“오, 무서운데.”
말은 그렇게 해도 윤태금은 싱글싱글 웃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앉아. 급출발이라도 하면 넘어지니까. 코 깨져서 징징대도 챙겨 주는 사람 없어.”
“어이구, 바라지도 않아.”
류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권세혁이 악트로스 아머드 운전석에 매달려 있었다. 장두현이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뭔가를 말하는 중이었다. 멀어서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권세혁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윤태금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걱정돼?”
“뭐가.”
“왕자님 말이야. 지금 약 기운 떨어져서 컨디션 별로일 텐데.”
류진의 표정이 굳었다.
“프로포폴 생각 없으니까 집어치워. 약 하려면 댁이나 실컷 해.”
“형한테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난 나보다 열두 살 많은 사람한테도 반말해.”
“그게 자랑이냐?”
“자랑이다, 왜!”
류진은 휴대폰을 만지며 투덜댔다. 아무리 벽지라도 특정한 위치에서는 전파가 닿는다는데, 이곳은 줄곧 통화권 이탈이었다. 메시지도 전송 불가,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휴대폰 전원을 켰다 끈 탓에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대체 얼마나 오지인 거야.”
“어차피 휴대폰 필요 없어. 무전으로 소통하니까.”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윤태금이 말했다.
“불필요한 짐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아. 거기 완전 정글이거든. 생존 장비도 무거워서 버리고 싶어지는 마당에. 설마, 심심할 때 할 일 없을까 봐? 아서라. 우리 캠핑하러 가는 거 아니다.”
“세혁인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어.”
“그거야 왕자님이시니까.”
“우리한텐 아니야?”
윤태금이 턱짓으로 차폐막을 가리켰다.
“가서 물어봐.”
“…….”
“아까 왕자님이 너한테 설명해 준 규칙, 그거 진짜 엄청 축약된 거거든.”
“무슨 뜻이야?”
“난 선의의 거짓말을 싫어해. 차라리 내 이득을 위해서 작정하고 상대를 속이는 게 나아. 근데 나쁜 역할 하기는 싫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신도 없어서 선택적인 정보만 전달하는 건 진짜로 비겁하다 이 말이야.”
“권세혁은 그런 애 아냐.”
윤태금이 픽 웃었다.
“그래. 그동안 광성 가 있었던 애가 뭘 알겠냐.”
류진은 윤태금을 노려보았다. 보면 볼수록 신해범 같았다. 둘을 말싸움 붙여 놓으면 볼만할 것이다.
권세혁에게 프로포폴을 주지 않겠다던 말을 믿을 수 없어졌다. 류진이 윤태금을 계속 눈여겨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진압 차량 시동이 걸렸다.
류진은 다급히 차폐막을 두드렸다.
“소령님, 아직!”
권세혁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온몸에 열기를 휘감은 권세혁이 나타났다. 그는 류진의 옆자리에 풀썩 앉으면서 웃었다.
“으하, 낙오될 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했다. 류진은 휴지를 접어서 내밀었다.
“밖에서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권세혁은 빈손이 아니었다.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었다. 류진은 장두현의 트럭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동물 사체로 가득 찬 아이스박스들을 떠올렸다. 설마….
“형, 아이스크림 먹어. 우희 누나! 시원한 거 먹으면서 운전해요.”
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치사하게 자기들끼리만 나눠 먹더라. 제일 큰 걸로 뺏어 왔다.”
권세혁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표정은 신나 보였다.
“사람들이 말이야, 아무리 라이벌 팀이라도 그렇지. 시작하기도 전에 견제를 해. 그것도 치사하게 먹는 거 가지고.”
그는 컵으로 된 하겐다즈를 꺼내 류진에게 내밀었다.
“형은 이거.”
“나만?”
“운전하는 사람은 하드가 먹기 편하잖아.”
“너는.”
“난 하드 좋아해서. 근데 형은 제일 좋은 거 먹어야 하니까.”
권세혁은 막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류진은 아이스크림을 앞자리의 두 사람에게 건넸다.
“고마워. 잘 먹을게.”
하겐다즈 컵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권세혁은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다 못한 윤태금이 한마디 했다.
“저는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입니까?”
“나머진 뭐 똑같아요.”
권세혁이 아이스박스를 가리켰다. 알아서 꺼내 먹든지, 말든지. 시종은 시종답게 알아서 자기 몫 챙겨라.
“맛있다.”
하겐다즈 딸기 맛이었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두 개, 아니 세 개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고 있는데도 먹고 싶은 음식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정신없이 손을 놀리던 류진은 권세혁에게 스푼을 내밀었다.
“너도 먹어 봐. 이거 진짜 맛있어.”
“괜찮은데.”
“얼른. 아 해.”
권세혁은 아이스크림을 받아먹는 대신,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세혁아?”
“잠깐만.”
그는 자기가 먹던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놓았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류진이 권세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 머리 아파? 어지러워?”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나… 잠깐만. 진짜 잠깐만. 말 걸지 말아 봐.”
맞은편의 윤태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
류진도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
권세혁은 한참이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혹시 왕자님… 우십니까?”
류진은 윤태금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표정을 지은 뒤, 권세혁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
“…형한테 미안해서.”
“왜?”
“형한테 자꾸 안 좋은 모습만 보여 주게 되니까.”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두현과 대화하던 권세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없이 필사적인 표정. 류진은 장두현이 또 무슨 소리를 했기에, 이 늙은이가 또 무슨 유전병 운운하며 손자에게 상처를 줬나, 생각했다.
“축사에 통신도 안 되게 해 놓은 거. 개들 그렇게 가둬 놓고, 약 먹이면서 사육하는 게 걸리면 안 되니까….”
윤태금이 시선을 돌렸다.
“불안해.”
권세혁이 말했다.
“내가 아는 곳이 아닌 거 같아.”
권세혁은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류진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수헌과 장두현은 권세혁이 광성으로 가기 전과는 너무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우리 집이 아닌 거 같다고.”
“그래….”
정수헌이 달라진 건 맞았다. 그 원인이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류진은 말없이 창밖만 응시하는 윤태금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정수헌은 변했다. 권세혁의 기억도 그렇고, 옛날에 찍은 사진을 봐도 그렇고.
그러나 장두현은 달라진 게 아니었다. 원래 그랬던 사람이 본색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이제 장두현은 안다. 권세혁이 더는 품 안의 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까지고 자신에게 순응할 줄 알았던 아이가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거였다.
그렇다는 사실을 설명하면 권세혁이 알아 줄까? 이해해 줄까?
아니면 그건 너무 비약이라고 말하면서 웃어 버릴까.
류진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자코 권세혁의 어깨만 쓰다듬었다.
방금 씻어 온 과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조철영은 허리춤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냈으나, 소파 베드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장두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맨손으로 복숭아를 집었다. 물방울이 맺힌 껍질이 불그스름하니 먹음직해 보였다. 제일 안쪽 어금니 두 개를 제외하고는 본래의 영구치를 훌륭하게 유지하고 있는 장두현은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 임플란트며, 틀니며 생명 연장의 일환으로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단단한 과육을 거침없이 씹어 먹었다.
조철영은 하얀 시트에 튄 과즙 자국을 바라보았다. 치아 상태뿐만 아니라 시력도 좋다. 참 여러 가지로 타고난 인물이다.
하지만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조철영은 장두현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예, 대관.”
“니는 우리 세혁이 어떤데.”
“차기 총통 각하 말씀입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함으로써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조철영은 주인의 성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틀에 박힌 대답, 무조건 아부는 절대 금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도 장두현은 좋아하지 않았다.
조철영은 나이프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직 취임하시기 전인데 벌써 인생 계획이 쫙 다 잡혀 있으시니, 장차 이 나라의 장래가 밝습니다.”
“철영아.”
“예.”
“니 참말로 그래 생각하나?”
조철영은 입을 다물었다. 장두현이 웃음을 흘렸다. 키득거리는 그의 입술 밖으로 과즙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조철영이 테이블 위의 티슈를 한 장 뽑아 내밀었지만, 무시당했다. 손등으로 턱을 문질러 닦은 장두현이 말했다.
“밖에 가 정류진이한테, 나가 좀 보잔다 케라.”
“예.”
“세혁이 금마는 떼 놓고.”
“예.”
“들여보내기 전에 니가 함 봐라. 아가 손버릇이 험하더라.”
“알겠습니다.”
조철영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더운 공기가 얼굴에 들러붙었다.
그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병이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어떠십니까?”
“컨디션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관의 컨디션이,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철영은 발소리를 죽이고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정류진은 권세혁 왕자의 예비 약혼자였다. 약혼 자체가 결혼 예정이라는 의미라 표현이 중첩되는 것 같긴 했지만, 윤태금이 붙인 그것보다 더 적합한 수식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조철영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나온 통나무집을 올려다보았다. 장두현은 이곳을 초소라고 불렀으나 거실과 부엌, 침실과 욕실이 제대로 분리된 오십 평짜리 통나무집은 어지간한 별장 못지않았다.
취명강을 건너기 전 마지막 휴식이었다. 물론 장두현에게나 운전으로 쌓인 피로를 푸는 브레이크 타임이고, 다른 사병들은 강을 건널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저 멀리 <힐 스톤 그로우>의 울창한 밀림이 보였다. 간신히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긴장도 채 풀기 전에 다시 왔다. 조철영은 한숨을 쉬며 주머니를 뒤졌다. 돛대였다.
하나 남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풍기 교육대의 진압 차를 찾았다. 정수헌에서 출발하기 전, 장두현의 악트로스 아머드와 나란히 서 있던 모습을 보았다. 뉴스에서나 보던 차라 신기해서 관심이 갔다. 윤태금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도 했고. 아까는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다가갔는데, 별안간 뜨거운 연기가 훅 뿜어져 나와서 기절할 뻔했다.
그 뜨겁고 축축한 감촉이 아직도 얼굴에 생생했다. 조철영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진압 차를 향해 걸었다. 저놈은 탱크로 분류되나? 아니면 완전히 다른 범주에 속하는 특수 차량인가.
아직 그렇게 가까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선이 따갑다. 조철영은 돛대를 모랫바닥에 떨어뜨리고 힘껏 밟았다.
진압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기우희 소령과 눈이 마주쳤다.
조철영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기우희는 사냥 파트너로 가르토를 골랐다. 대관이 기르는 개 중에서 가장 사나운 개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훈련이 되어 있고 야생 짐승을 모는 법도 알지만, 확실히 다루기 힘든 놈이었다.
가르토는 애초에 사냥 목적으로 키우는 개가 아니었다. 혈관에 늑대의 피가 흐르는 그놈의 진짜 용도는 투견이었다. 동족을 물어 죽이기 위해 태어났고 그렇게 길러졌다. 놈은 자기를 선택한 주인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돌변해서 물어뜯을 수 있었다. 조철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중 아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마강희였다.
조철영은 지급받은 총 개수를 확인하던 그에게 다가갔다. 마강희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뭐야?”
“대관께서 도련님 찾으신다.”
“무슨 일로?”
“나야 모르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조철영은 마강희가 편했다. 일단 같은 기수였고, 둘 다 장진 출신이 아니었다. 동향 사람은 아니었지만 똑같이 타향살이를 한다는 점에서 동지애가 생겼다. 중간 관리자가 된 시기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시큰둥한 반응이 조금 쓸쓸했다.
“멀리는 안 갔을 텐데….”
“왕자님이랑 같이 있어?”
“그럴걸.”
조철영이 쯧, 혀를 찼다.
“왜?”
“혼자만 데려오라고 하셨다.”
“왜?”
질문한 사람은 마강희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대화를 엿듣던 기우희 소령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조철영은 헛숨을 들이켰다. 권일혁 총통과 닮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특히 콧대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매도 그렇고.
조철영이 대답하지 못하자, 기우희는 다시 질문했다. 자세하게.
“왜 정류진 이병을 혼자 데려오라고 하셨나?”
“그거야.”
왜 변명하는 분위기가 되는지 모르겠다. 조철영은 기우희를 노려보았다. 광성에서 왔다고 쫄 것 없다. 제 암만 총통의 피를 이었다지만 승계 전쟁 권외의 사생아였다. 기껏해야 차기 총통의 보디가드 노릇이 마지노선일 여자에게 기죽을 필요 없었다. 조철영이 막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였다.
“저를 찾으십니까?”
당사자가 나타났다. 말간 얼굴에 길고 가는 모가지. 뺨과 목덜미에 보송한 솜털. 기우희와는 다른 의미로 사람 숨 막히게 하는 얼굴이었다.
“대관께서 찾으십니다. 잠깐 가시지요, 도련님.”
“싫습니다.”
“예?”
“위험하니까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거든요. 세혁이가.”
기우희가 픽 웃었다. 조철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류진은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가까운 트럭으로 다가갔다. 사냥개 케이지가 내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와 풍경에 요란하게 짖어 대는 개들 틈바구니에서 로카를 찾았다. 축사에서 봤을 때보다는 한결 진정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흥분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우리에서 튀어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에 류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등 뒤에 조철영이 따라붙었다. 류진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누가 건드는 거 싫어합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왕자님 오시기 전에….”
“세혁이 몰래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저는 심부름을 왔을 뿐입니다.”
“맨입으로?”
“…도련님.”
기어코 애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류진은 로카가 든 케이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고개만 돌려서 조철영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개들한테 약 쓰는 거 압니다.”
“대관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사냥의 효율을 위해서요.”
“매뉴얼이라도 있어요? 다 똑같은 소리 하네.”
조철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디까지나 대관께서….”
“세혁이가 불편해해요.”
“정수헌의 주인은 장두현 대관이십니다.”
류진은 조철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흥분제가 있으면 그 반대 성분의 약도 있겠죠. 진정제라든가.”
기우희가 마강희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장두현과 함께 통나무집으로 들어간 사병이 개들에게 주사를 놓는다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흥분제와 진정제를 둘 다 가지고 있다고.
“비밀 보장 약속할게요.”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응시했다.
류진은 조철영이 지금은 망설이고 있지만 결국 자기 뜻대로 해 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서는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을 장두현 앞에 데려다 놔야 했다. 주인에게 야단맞기는 싫을 테니까.
하지만 권세혁이 아끼는 ‘도련님’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무력으로 끌고 갈 방법은 없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마침내 조철영이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뚜껑이 파란색인 조그만 약병과, 포장을 뜯지 않은 주사기를 꺼내 류진에게 건네주었다.
“어떤 개에 쓸 겁니까?”
류진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조철영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련님.”
거칠게 뿌리쳐졌다.
“누가 건드는 거 싫다고 말했는데.”
조철영의 턱이 경련했다. 이게….
한 대 치면 쓰러지게 생긴 애새끼가 뒷배 믿고 까부는 게 수준급이다. 생긴 건 사슴인데 하는 짓은 하이에나였다. 본색을 감추고 왕자 앞에서 연기하느라 아주 죽을 맛이겠구나, 응?
대관은 이런 놈의 본모습을 알아봤기에 내기를 건 것이다. 왕자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럴 만했다. 권세혁은 이제 스무 살, 목숨이 여덟 개라면 사랑에 여덟 개 전부를 걸 나이였다.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안 들린다.
정류진이 기우희에게 뛰어갔다. 조철영은 기우희를 대하는 정류진의 태도가 자신에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깍듯하게 소령님, 소령님….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묘했다. 같은 풍기 교육대 소속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전우애라기에는, 분위기가 좀….
설마.
조철영은 턱을 매만졌다. 혹시 정류진 저놈, 출세에 눈이 멀어 왕자의 첫사랑 노릇 하지만, 본심은 딴 데 있는 거 아냐?
통나무집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조철영은 소지한 무기가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말로 류진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왜요?”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조철영은 류진이 장두현의 눈앞에 리볼버를 꺼내 놓은 사실을 걸고넘어졌다.
“총 꺼낸 건 그쪽도 똑같은데?”
“저는 어르신 밑에서 일하는 병사입니다. 정수헌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고, 유사시에 총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도련님은 왕자님의 손님이시고요.”
세상 어느 손님이 집주인 눈앞에 무기를 꺼내 놓으며 위협하느냐는 뜻이었다.
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 소리가 곧장 권세혁의 귀로 들어갈 것이다.
“난 내 안전을 지키려는 겁니다.”
조철영은 이해 못 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류진의 말이 이곳 장진에서, 아니 진한 땅덩이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안전한 저택인 정수헌이 미덥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어째서입니까? 혹시 정수헌에 머무는 동안 도련님의 일신상에 어떤 위협이 느껴지셨습니까? 아니면 이곳 생활에 불편함이 있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직접 어르신과 왕자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풍기 교육대 군인으로서.”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됩니다.”
류진은 조철영을 노려봤다.
“진짜 이럴 거예요?”
“아까 대관께서는 도련님을 봐주셨지만, 두 번은 안 됩니다.”
“날 봐줬다고요?”
조철영이 턱을 쳐들었다.
“귀족의 눈앞에 무기를 꺼내 놓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그 리볼버, 탄환이 들어 있었지 않습니까?”
조철영은 류진이 대꾸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왕자님이 정수헌에 도착하셨을 때 손님들의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왕자님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대관의 눈에 총기를 보임으로써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한 정수헌을 위협하셨습니다.”
“얘기가 왜 그렇게까지 돼요?!”
류진은 당황했다. 신해범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조철영의 페이스에 말려서 침착함을 되찾지 못했다.
“대관께서는 깊이 상심하셨습니다.”
그건 그 늙은이가 먼저 날 의심했잖아. 소령님한테도 측실 딸년이라고 했잖아.
“왕자님도 아시면 실망하실 겁니다.”
“세혁이는 안 그래요.”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셔도.”
조철영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은 어르신과 왕자님 사이가 틀어진 것 같아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착각?”
“원래 가족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조철영은 뭔가를 체념한 사람 같았다. 그 모습에 류진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진정제도 받았고….
류진은 허리춤의 홀스터를 풀어서 조철영에게 건넸다.
“얘기 끝나면 바로 돌려줘요.”
“물론입니다.”
총을 내준 이유는 장두현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깊이 상심했다’는 말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가 총을 꺼냈다는 이유로 기우희까지 무장 해제를 당할까 봐, 장진으로 출발하기 전 신해범이 빌려준 리볼버 두 자루를 통째로 빼앗기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나중에 돌려받는다고 해도 뺏기는 건 뺏기는 거였다. 그건 기우희에게도 대단한 모욕이었다.
총을 신해범에게 직접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우희는 리볼버를 건네주며, 대장님이 똑같은 총을 두 자루 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류진은 조철영의 손에 쥐어지는 리볼버를 보며 생각했다. 기우희는 자신을 믿고 총을 주었다. 신해범은 기우희가 그러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결정을 한 거다.
그러니까.
“약속 꼭 지켜요.”
류진은 조철영에게 신신당부했다.
방석 한 장 없는 딱딱한 원목 의자에 풀썩 앉았다. 맞은편 소파 베드의 앉은 장두현은 과일을 먹고 있었다. 류진은 그가 맨손으로, 껍질도 안 깐 과일을 씹어 삼키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두 씨를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장두현이 말했다.
“오래두 걸린다.”
“그렇습니까? 열심히 뛰어왔는데.”
“그런 아 치고는 땀 한 방울을 안 흘리네.”
“제가 원래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입니다.”
류진은 뻔뻔하게 굴었지만, 장두현이 바깥의 대화 내용을 다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철영에게 내 총을 압수하라고 말한 게 본인이겠지.
“거두절미허고, 묻자. 니 세혁이랑 섹스도 하나?”
류진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왜 권세혁을 따돌렸는지 알겠다.
“네.”
장두현이 새 자두를 집었다. 한입에 과육 절반이 사라졌다.
“철영이. 나가서 일 바라.”
“대관 어르신.”
“나가라믄 나가 봐.”
“…예.”
목구멍 안쪽이 간지러웠다. 류진은 테이블 밑에서 허벅지를 꽉 쥐었다.
긴장하지 말자. 신해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는 겨우 이런 질문에 동요하지 않는다.
“세혁이가 말 안 하던가요?”
“갸는 숙맥이라.”
숙맥? 류진은 픽 웃었다.
“아닌데.”
장두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류진은 큼큼 헛기침했다.
“실례했습니다. 숙맥이라니, 세혁이랑 안 어울리는 말이라서.”
“잘하드나?”
“네.”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장두현이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았다.
권세혁은 잘했다.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교육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안 다쳤어요.”
장두현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지만, 류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르쳐 준 적 없으십니까? 그럼 세혁이 혼자 터득했나 보군요. 와, 칭찬해 줘야겠는데.”
“지금 니가 하는 말, 내는 몬 믿겠다.”
“세혁이 어릴 때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겠죠. 이해합니다. 제 조부모님도 살아 계셨으면 ‘하하, 애가 뭘 안다고’ 그러셨을 것 같네요. 아니, 아니다, 굳이 조부모님까지 갈 필요도 없죠. 당장 제 누나만 살아 있었어도.”
“니 지금 불안해서 이러제.”
“…….”
“고만 떨어라. 안 잡아먹는다.”
끈적끈적한 눈빛이 달라붙었다.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딱딱한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장두현을 노려보았다. 권세혁과 닮은 외모였다. 이 와중에도 닮았다는 사실이 느껴져서 더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사람 밑에서 어떻게 권세혁이 태어난 거야?
“함 벗어 봐라.”
류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쓰것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이거 참 안타깝네요. 제가 휴대폰을 두고 와서.”
“휴대폰?”
“옛날 분이라 잘 모르시는구나. 요즘 유행입니다, 커플끼리 추억 남기는 거. 거기가 어디였더라. 되게 좋은 호텔이었는데, 세혁이가 앵글을 잘 잡아 줘서 화면이 괜찮게 나왔습니다.”
“니 지금 내랑 장난하나.”
“장난이 아니라요. 진짜 있는 동영상 얘기입니다. 뭐, 다른 사람한테 보여 주고 다닐 만한 게 아니긴 하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믿으시겠다는데.”
류진은 재빨리 덧붙였다.
“아, 물론 영상 보시기 전에 세혁이한테도 허락받으셔야 합니다. 어쨌거나 저희 둘이 찍힌 영상이니까요.”
말하면서 타이밍을 쟀다. 류진은 한없이 불편한 공간을 벗어날 때를 노렸다.
조철영에게 총을 주지 말걸. 아니, 애초에 여기 오지 말걸.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류진은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신해범이라면 후회할 시간에 살 수단을 강구하라고 말할 테니까.
“제가 물어보고 올까요? 지금 말 나온 김에 말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 아시죠?”
류진은 엉덩이를 의자 가장자리에 걸쳤다. 곁눈질로 출입구를 살폈다. 어떻게든 이 통나무집 밖으로만 나가면 됐다.
야생에서 초식 동물은 크고 튼튼한 이빨과 발톱을 가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존재지만, 생존 수단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초식 동물에게는 포식자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빠른 다리가 있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나면 류진은 권세혁과 기우희가 있는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장두현과 단둘이 있지 않을 것이다.
어때, 신해범? 내 계획 괜찮아 보여?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줘!
류진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장두현의 사자후가 통나무집을 뒤흔들었다.
“철영이, 영목이 들온나!”
류진은 의자를 밀치듯 넘어뜨리고 일어났다.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출구는 이미 건장한 두 명의 사병에게 가로막힌 다음이었다.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서는데 조철영의 손아귀가 팔뚝을 붙잡았다.
“건들지 마!”
류진이 어깨를 비틀면서 소리쳤다.
“뭐 하노, 퍼뜩 안 델꼬 오고!”
앞으로 나선 허영목의 커다란 손이 류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한 팔로 류진의 목을 조르면서 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우…!”
쇠 냄새가 나는 손가락을 냅다 물어뜯었다. 그가 아악,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머리가 흔들리는 충격이 오랜만이라 잠시 멍했다. 그래도 신해범에게 맞았을 때처럼 숨이 컥, 막히고 내장이 뒤틀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걸 맷집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비참하고 우스웠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일어나 섰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허영목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나 건드리지 마! 개새끼들아!”
장두현이 배를 쥐고 웃었다. 류진은 그의 입술을 좌우로 벌려 찢어 버리고 싶었다.
“놔! 놔! 씨발, 나 건들지 말라고!”
있는 힘껏 반항했으나 키와 체격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 두 사람을 상대로 벗어나기는 불가능했다. 류진은 장두현 앞에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바닥에 무릎이 부딪치기 무섭게 덜미를 잡혀서 상체가 짓눌렸다.
“익…!”
관자놀이와 뺨에 바닥이 닿았다. 차갑고 딱딱했다.
“흐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 안으로 먼지가 날려 들어왔다. 류진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머리와 어깨가 바닥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하반신이 쳐들렸다.
장두현은 그 모습을 웃으면서 내려다보았다.
“후딱 해라.”
“예.”
조철영의 억센 손이 허리춤을 붙잡았다. 벨트 버클 풀어지는 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이거 노…!”
소리를 지르려던 입 안으로 빳빳한 천 조각이 들어왔다. 풍기대 의무실에도 널린 의료용 삼각 수건이었다. 허영목은 삼각 수건을 단단히 매듭 지은 뒤, 버둥거리는 류진의 등에 올라타 완전히 깔고 앉았다. 그는 앞뒤로 마구 저항하는 마른 팔을 잡아 바닥에 고정시켰다.
조철영의 손길에 바지가 벗겨졌다. 드러난 대퇴부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버둥거리는 류진의 다리를 잡아 벌린 뒤 고개를 들어 장두현을 보았다. 그는 복숭아 과즙을 튀기면서 성을 냈다.
“뭐 하나! 쪼매난 아새끼 하나 잡고 천년을 기다려!”
“죄송합니다, 대관.”
속옷이 끌려 내려갔다. 류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흐으으, 흐으으, 신음했다. 분해서 눈물이 났다.
이 개새끼, 씨발 새끼, 왜 안 와. 내가 이 꼴을 당하고 있는데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이 무책임한 대장 놈아!
조철영의 뜨거운 손이 허벅지를 잡았다. 거칠게 주물러 대는 손길이 끔찍했다. 허영목이 깔고 앉은 등은 부서질 것 같았다.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소용없었다. 지금 류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소파 베드에 여유롭게 앉은 장두현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엉덩이를 움켜잡혔다. 볼깃살이 좌우로 벌려졌다. 조철영의 손가락이 파고드는 찰나, 장두현이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 엎어진 류진의 코앞에 쭈그려 앉았다.
“나가 와 이렇게 화를 내냐믄.”
그는 여전히 과일을 먹고 있었다. 류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참 맛나게 처먹는다, 강냉이 다 털어 버리고 싶게!
류진의 하얀 이마에 과즙이 튀었다.
“니들 맴이 서로 같지가 않아서다. 니는 세혁이 좋다고, 그 아 원망 안 한다고 그랬지마는. 허허, 차라리 나랏님을 속이제.”
“…….”
“어설프게 화전 양면술 쓰지 마라. 웃음 난다.”
“…….”
“니 세혁이한테 마음 없다. 다 보인다. 그 아도 알더라. 자존심이 있어가 인정 안 하고 버티는 거제. 그기 다 니 때문이다. 니가 지금 그 아를 가꼬 놀기 때문에!”
“…….”
“재밌드나? 담번 총통 될 아가 니 좋다고 따라붙는 기, 매달리는 기. 그래 기분 째져가 여태 사람 농락해 왔나!”
과즙으로 끈적해진, 단내가 풍기는 손가락이 류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가 그걸 우예 아는지 말해 주까. 사람 좋아하면 말이다, 상대방 섞갈리게 안 한다.”
끈적끈적한 손가락이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턱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세혁이 금마가 증표 야그 했겄제.”
장두현은 다른 쪽 손으로 류진의 감은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잊어뿌려라. 못 잊겠다믄 나가 잊게 해 줄 수도 있다. 고작 니 같은 아한테 발목 잡히기에 우리 세혁이, 갸는 너무 귀하다.”
류진의 등허리가 경련했다. 조철영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굳은살로 딱딱한 엄지가 구멍 입구를 꾹 누르면서 쓰다듬었다.
저 개새끼… 나쁜 새끼.
자책하지 않으려 했으나, 조철영에게 총을 내준 게 천추의 한이었다.
“용은 봉황을 만나는 거이 세상 이치다. 닭이 용 알을 품으면 우째 되는지 아나?”
장두현이 낄낄거렸다.
“가랑이가 쫙! 찢어져 뿐다!”
류진은 꼭 감았던 눈을 떴다.
장두현의 음담패설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소리를 질리게 들어 봤다. 지금 이 자리에 신해범이 있었다면 장두현 따위는 찍소리도 못 할 것이다. 그 나쁜 놈이 말 하나는 청산유수니까.
“대관.”
조철영의 부름에 장두현이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를 보았다.
“허어.”
정류진은 최근에 성관계를 한 몸이었다. 상대는 정황상 권세혁일 확률이 컸다.
장두현은 혀를 쯧쯧 차며, 류진의 입을 막은 삼각 수건을 풀어 주라고 했다. 조철영이 다가와 매듭을 풀었다.
“치매나 걸려 뒈져! 변태 늙은이!”
장두현은 웃어 버렸다. 류진은 꿋꿋하게 소리쳤다. 자유로워진 다리를 버둥거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누가 그러더라! 남의 고혈 짜내는 늙은이는 치매도 안 걸린다고! 진짜 그 말이 맞아! 맞는 거 같아!”
“허이고.”
“다 이를 거야. 다 말할 거야! 나한테 이런 짓 한 거 알면 가만있지 않을걸?!”
“누가. 세혁이 금마가?”
장두현이 비웃었다.
“갸가 지금 니한테 목맨다고 눈깔에 뵈는 게 읎제?”
또다시 턱을 붙잡혔다. 류진은 장두현의 손가락을 물어 버리려고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그는 손을 피했다.
“퍼뜩 꿈 깨라.”
류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연달아 뺨을 얻어맞았다. 장두현의 솥뚜껑 같은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입술이 터지고, 코 안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입 안의 여린 살이 찢어져 순식간에 피가 차올랐다. 류진은 입에서, 코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나는 안 해.”
“뭐라꼬?”
“나. 세혁이한테. 아무것도 기대 안 해.”
피 때문에 발음이 어그러졌다. 숨소리도 가빴다. 하지만 류진은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장두현이 알아들을 때까지 말할 작정이었다.
“나! 세혁이한테 기대 안 한다고!”
신해범은 자기 스스로 일어섰다. 내리막의 끝에서. 자기 힘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지 않으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슬프지만 그가 옳았다. 누군가에게 기대면 상처 입는다. 신해범이 왜 부하들에게 많은 걸 해 주고도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지, 류진은 알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이 없었다. 설령 자기가 도와 준 사람들이 자신을 욕해도, 비난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었다.
권세혁이 구해 주지 않아도 된다. 이곳이 내 무덤이라도 상관없다. 결국 신해범이 올 테니까.
그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졌다. 몇 번을 죽이고, 죽여서, 지옥 불구덩이에 처넣어도 어떻게든 아득바득 기어서 올라온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그런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나도 엄청, 엄청….
“나도 잘났거든!”
“허?”
“나도 잘났다고! 세혁이만큼! 나도 어디 가서 빠진다는 소리 못 들어 봤어! 노망난 늙은이가 알지도 못하면서!”
많이 빠지는 게 사실이었다. 권세혁의 ‘조건’에 비하면.
하지만 그 조건을 누가 만들었는데?
누가 날 많이 ‘빠지는’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류진은 이를 악물고 씩씩댔다. 벗겨진 하반신이 춥고, 허영목이 깔고 앉은 등이 아팠다. 당장이라도 가슴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세 명을 상대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건 기합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류진은 두렵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눈앞의 장두현이 무섭기는커녕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류진의 눈에는 그의 진심이 보였다.
“세혁이 질투하지?”
“인마가 뭔 헛소리고.”
“질투하잖아. 그래서 지난번에 옷도 똑같이 맞춰 입었잖아. 섹스했냐고 물어본 거, 사실은 나랑 떡 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모를까 봐?”
류진이 발악했다.
“나랑 자고 싶지? 할배 나한테 욕정 하지? 아주 꼴려서 미치겠지? 아니라고 하지 마, 눈만 봐도 알거든. 내가 댁 같은 인간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라서. 줄 세우면 여기서 광성까지 닿을걸?! 씨발 진짜 좆같아서!”
아아악! 류진은 입이 도로 막히기 전에 소리 질렀다.
“난 왜 이딴 개변태들만 꼬이냐!”
장두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권세혁과 닮은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멱살이 움켜잡혔다. 셔츠에서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날씨가 더워 안에 티셔츠를 따로 입지 않았다. 곧바로 드러난 류진의 맨어깨에 장두현의 뜨거운 손이 닿았다.
“놔! 놔! 씨발, 비켜! 나 건들지 마!”
겨드랑 밑으로 허영목의 두 손이 들어왔다. 양다리는 조철영에게 붙들렸다. 두 사람은 버둥거리는 류진을 소파 베드까지 질질 끌고 갔다.
격렬한 몸부림에 의자가 날아가고, 테이블이 쓰러지고, 과일 바구니가 뒤집어졌다.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과일들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마구 짓밟히고 짓이겨졌다.
“큭!”
죽어라 몸부림친 끝에, 류진은 팔꿈치로 허영목의 명치를 찍는 데 성공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류진은 허영목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류진은 주먹을 휘두르며 자기를 깔고 앉으려는 허영목의 복부에 킥을 꽂아 허리를 숙이게 만들고, 바닥에 구르던 자두를 낚아채 그의 눈에 처박았다.
“흐악!”
허영목이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류진은 무릎에 걸린 팬티와 바지를 끌어 올리면서 일어섰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조철영을 피해 다이닝 룸으로 몸을 날렸다.
“아윽!”
팔꿈치와 무릎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아팠다. 그래도 아파할 시간은 없었다. 뒤에서 조철영이 협박했다. 그는 자기 소유의 글록을 빼 들고 있었다.
류진은 피식 웃었다.
“왜? 내 꺼 써 보지.”
조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총 내놔.”
“저항하지 않으면 쏘지 않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랄. 내가 미쳤냐?”
“대관께 무례를 범하지 마십시오.”
“저 늙은이야말로!”
류진이 소리쳤다.
“나한테 끔찍한 짓을 했어! 너희 셋 다!”
부엌으로 온 게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세 사람을 상대로 육탄전을 해서 이길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류진은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코와 입에서 피가 멈추질 않았다.
“살 만하냐?”
“뭐?”
“사투리 안 쓰는 거 보고 알았지. 혼자서 타향살이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씨발.”
피로 물든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
“너 같은 새끼를 동정한 내가 바보지.”
류진은 창문을 곁눈질했다. 쇠창살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통나무집의 창문은 나무틀에 얇은 유리를 끼운 것이었다. 부수기가 어렵지 않고 창가에는 커튼까지 달려서, 파편으로부터 어느 정도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기회는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 번뿐이었다.
“안…!”
조철영이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류진은 성공을 직감했다.
알루미늄 커튼 봉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니스를 발라 광택을 낸 나무 창틀이 통째로 뜯어졌다.
류진은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왼쪽으로 몸을 돌려 후두부와 척추를 보호했다. 땅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팔 하나, 다리 하나쯤 작살 나는 건 감수할 수 있었다.
난데없는 파열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주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류진은 우윳빛 리넨 커튼을 뒤집어쓴 채 비척비척 일어났다.
조철영은 격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협박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총을 꺼내면 내가 겁먹을 줄 알고. 무서워서 도망가지 못할 줄 알고.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류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쯤 창틀이 통째로 뜯겨 나간 창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조철영과 장두현을 생각하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형!”
권세혁이 있었다. 멀리서 그가 뛰어왔다. 잡초투성이 들판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그래도 일어나서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권세혁을 보고 있자니 설움이 복받쳤다.
정말 착한 놈이었다.
총통이나 장두현의 핏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권세혁!”
류진은 목청껏 외쳤다. 권세혁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에게 뛰어갔다. 누가 쳐다보든,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형! 형!”
“묻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류진은 권세혁의 목에 팔을,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렸다. 있는 힘껏 달라붙었다. 권세혁은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 류진을 마주 껴안았다.
류진은 자신의 등을 감싸 안는, 엉덩이를 받치는 권세혁의 손을 느꼈다.
“…말하지 마.”
입술이 부딪치고 혀가 얽혔다. 류진은 장두현이 이쪽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보라고 하는 짓이었다. 이 라이브 키스 쇼는 장두현을 위한 이벤트였다. 저 늙은이는 내가 겁먹고 달아나길 바랐겠지만, 꼼짝 못 하고 울면서 당해 주길 바랐겠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강해졌다.
***
김해국은 검열국 부국장이었다. 문화 예술부 출신으로 권주혁의 총애를 받아 검열국장까지 올랐으나, 최석준이 정무국장에서 쫓겨날 때 함께 적림부에서 공개 심판을 받아 부국장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김해국이 강등된 이후로도 검열국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김해국은 여전히 부국장 신분으로 검열국의 총결정권자 자격을 유지했으며 중앙 위원회 소속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권주혁을 믿었다. 모욕을 참고 기다리면 본래의 직함을 돌려주겠다는 주인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건 없었다. 오히려 최석준이 함풍 2도 사건으로 숙청당했다. 김해국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권세혁 왕자에게 노후를 의탁하려는 권주혁이 자신의 치부를 아는 측근들을 솎아 낸다는 소문이 군벌에 짜했다. 김해국은 그래서 가담했다. 풍기 교육대 지분을 한꺼번에 매각하여 주가를 떨어뜨리는 담합 세력에.
물론 그 시도는 유미현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래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지금 풍기 교육대는 하나의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버티고 있는 셈이었다. 기세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전적으로 ‘우리 신해범 준장’의 결정에 달리지 않았느냐며, 김해국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야 뭐,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았지.”
권주혁보다 너덧 살 연하던가. 불필요하게 수염을 길게 길렀다. 신해범은 그가 찻잔을 기울일 때마다 수염 끝이 찻잔에 퐁당 빠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만남의 장소는 호월루였다. 저녁 일곱 시 정각이었다. 유미현은 신예나를 통해서 김해국을 초대했고 그 자리에 신해범도 불렀다.
신해범은 왜 유미현이 권주혁 군벌에서 최석준 다음가던 실세인 손진우도, 차기 정치국장감으로 거론되는 오두경도 아닌 김해국을 눈여겨보는지 알았다. 국장이든 부국장이든 직함은 상관없었다. 지금 김해국은 언론을 장악하는 검열국의 총책임자였다.
검열국에 존재하는 두 개의 부서, 문화 예술부와 교육부는 같은 검열국 산하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으르렁대는 사이였다. 그리고 김해국은 문화 예술부 출신이었다.
총통은 각 부서의 세력을 균등하게 맞추려고 애썼다. 특히 검열국은 산하에 부서가 단 두 곳뿐이었고, 직무 특성상 보이지 않는 권력 차이가 존재하는 정치국에 비해 수평적이었다. 그 때문에 검열국장은 문화 예술부와 교육부에서 번갈아 가며 임명되었다.
그렇게 임명된 국장에게는 유사시에 자기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 부국장을 임의로 고를 권한이 생긴다. 문화 예술부 국장이 교육부에서 부국장을 뽑을 리는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국장이 임의로 부여한 권력이니 박탈당하기도 쉬웠다. 김해국이 강등당하기 전 부국장을 지냈던 안규원은 문화 예술부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지금 해당 부서의 족보가 꼬였고, 안규원이 김해국과 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직위를 빼앗은 권주혁에게 서운해했다는 건 이 바닥에서 그다지 놀라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원래 줬다 뺏는 게 더 나쁜 거였다.
유미현은 김해국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안규원 일로 김해국은 자기 고향인 문화 예술부에서 평판을 잃었다. 게다가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부서에 마땅한 인재가 없어 기존 국장의 임기가 연장된 사례는 있었으나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고, 부국장으로 강등당한 처지인 김해국으로서는 기대 못 할 요행이었다.
차기 검열국장은 교육부에서 임명됐다. 권주혁도 총통이 정한 순서를 바꿀 수는 없었다. 최근 김해국은 밤마다 잠을 설쳤다. 자신에게 한 품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육부에서 검열국장이 나온다는 사실에.
일각에서는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고, 험한 꼴 보기 전에 알아서 은퇴할 거라는 속 편한 예측을 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김해국에게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정치판에 엉덩이 붙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갓 스물 된 어린 애첩이었다. 지난달에 몸을 풀었는데 아들이란다. 유미현은 붉은 봉투 가장자리에 황금색 테가 둘린 봉투를 내밀며 축하를 전했다. 신예나는 순금 두꺼비를 준비했다. 신해범은 노구를 일으켜 유미현에게 큰절을 올리는 김해국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는 이미 줄을 바꿔 설 준비가 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위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밑에서는 나날이 욕만 먹고 있으니 궁지에 몰린 자가 어디로 가겠는가. 옆 동네 힐끗거리지.
김해국은 그는 난세에 요리조리 줄을 바꿔 잡으며 총통의 수석 전략가, 신룡관의 숙청 여제로 자리매김한 유미현을 강자로 인정했다. 지금은 그런 시대였다. 젊은 시절 운동권에 몸을 던져 수감 생활을 하고, 분가 출신이라는 리스크를 지고도 유미현이 성공했던 이유는 눈치가 빠르고 힘의 흐름을 읽는 안목이 있어서였다. 없는 건 자존심이었다.
유미현에게는 자존심이 없었다. 필요하면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적과도 손을 잡았다. 권주혁에 비해 부족한 지지 기반과 군사력을 그렇게 보충하며 성장했다.
평생을 바쳐 충성할 만한 그릇은 아니다.
그러나 위기를 타개할 수단으로는 충분하다.
대부분의 나이 든 정치가가 그렇듯이, 김해국은 의리를 중요시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지금까지도 생각했다. 권주혁이 최석준만 지켜 줬다면 자신은 유미현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이 나이에 줄을 바꾼다는 건 그동안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니까. 그건 정말 자존심 상하고…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김해국은 힘의 메트로놈이 유미현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권일혁 총통이, 제 자식들조차 치열한 경쟁의 싸움터로 내몬 비정한 아비가 지나치게 세력이 커져 섭정 정치의 가능성이 큰 친동생을 누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유미현 당사자에게는 왕두(王頭)의 뜻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유미현이 옹립할 총통 후보의 이름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해국은 어느 정도 짐작했다. 풍기 교육대의 기우희 소령은 옛날부터 유명했다. 권세혁 왕자와는 다른 의미로. 확실히 안 좋은 쪽으로.
유미현이 제복 입은 신해범을 장식으로 갖다 앉혀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해국은 유미현의 은근한 의사 표시가 마음에 들었다. 하기야, 정치하는 사람치고 도청과 밀정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발달한 게 비유와 상징이었다.
그는 오늘의 ‘비유와 상징’인 신해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대놓고 말하는 자는 드물다. 있다면 보통 두 가지 경우다. 그 자리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 권위자이거나,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게 없거나.
***
“그 인혜라는 애. 왜 자살 시도했을까?”
유미현의 자택에서였다. 신해범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무서워서? 아니면 슬퍼서? …나는 잘 모르겠어.”
그는 취조실에서 진치우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부잣집 아가씨잖아. 정신력이 약해.”
“정신력 약한 애가 할 만한 일들은 아니잖아.”
신해범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겉보기랑은 달라. 강인혜, 굳이 따지자면 내 과야. 너 어렸을 때나 정류진이랑은 비교가 안 돼.”
“오빤 걔가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
신해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유 수석한테 얘기 안 했어? 알면 막을 수도 있었잖아.”
유미현에게 따로 언질을 주지 않은 이유는 첫째, 자기도 과거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그리고 둘째,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일을 해결하는 데 익숙한 유미현을 조금 ‘먹이고’ 싶어서.
얄궂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정 기우희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유미현은 경계선을 넘어야 했다. 신해범은 이번 일로 유미현이 무언가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살하려는 앨 사전에 어떻게 막는데?”
“그냥 뭐, 묶어 놓는다든가….”
“그게 더 잔인한 거 아니냐?”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신예나의 한숨은 길고 깊었다.
“손목 긋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양손 다.”
“응. 바보 같아.”
신해범은 담배를 피우면서 이죽거렸다.
“더 확실한 방법을 골랐어야지.”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쇼하는 걸 수도 있어, 강인혜.”
“뭐?”
강인혜는 자살을 시도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죽을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자기 목숨으로 유미현을 협박하려고.”
신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해범은 그를 달래듯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동정하진 마. 마냥 가엾게 여겼다가 뒤통수 맞으면 기분 진짜 더러울 테니까.”
“…….”
“진짜로 죽을 생각이었으면 더 쉽고, 확실한 방법을 택했겠지.”
확실히 손목을 긋는 행위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손목이 너덜거릴 만큼 깊숙이 후벼 파지 않으면 죽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수석은 걔를 인간적으로 대했어.”
협박이 아니라 회유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미현은 강인혜의 자유를 제한하긴 했으나, 그를 묶어 두거나 꼼짝 못 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니 마음만 먹었으면, 그 좋은 머리로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강인혜는 확실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심한 소리 하지 마. 한순간에 부모님 잃고 가족이 파탄 난 애야.”
“우리는 뭐, 안 그랬나?”
“…….”
“강인혜는 운이 좋아. 내가 우리 지하실에서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보낸 애는 걔가 처음이야. 내가 우리 꼬꼬도 피떡으로 만든 사람인데.”
“자랑이냐?”
신예나의 주먹이 신해범의 견갑골을 때렸다.
“그걸 지금 잘했다고 내 앞에서 말하는 거야? 예, 아주 잘하셨습니다! 잘했어요! 신해범 대장님!”
“네가 걔 우는 거를 못 봐서 그래. 나 그 동영상 보면 아직도 선다. 진짜 예쁘긴 하거든.”
신해범의 등을 퍽, 퍽 후려치던 신예나의 손이 제복 바지로 감싸인 탄탄한 허벅지 사이로 돌진했다.
“헉.”
신해범이 다리를 확 오므렸다.
“치한이야! 여기 변태 있어요!”
“그건 오빠지!”
신예나는 웅크린 신해범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왜 피해? 왜 피해? 아주 그냥 좆을 뭉텅뭉텅 썰어 버려야 해!”
“소 잡는 칼로 가져와. 대접도.”
신예나는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해범이 쿡쿡거렸다.
“신해범 준장님!”
멀리서 원세영이 소리쳤다. 각 잡힌 프라다를 위협적으로 흔들면서 재촉했다.
신예나가 턱짓했다.
“가 봐.”
“담배 한 대 태울 시간을 안 주네.”
“저쪽도 마음 급한가 보지.”
강인혜는 치료 후 유미현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곳 호월루 별관에서 요양할 예정이었다.
신예나가 유미현에게 제안한 방법이었다. 신해범은 반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엄마 노릇에 맛을 들였냐고 핀잔을 줬을 뿐.
신해범은 원세영의 눈에 안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신예나는 그가 초조해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 또한 류진이 걱정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둘이서 쌍으로 발 동동 굴러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신예나는 호월루를 두고 장진까지 내려갈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구은하를 보내긴 했으나, 이미 전파 송신 불능 지역에 있다면 연락이 닿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수헌에서는 장두현과 권세혁이 사유지로 원정 사냥을 떠났다는 소식까지만 전해 주었다. 그 이상은 풍기 교육대장의 신분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언론 통제 때문에 강인우의 존재를 알릴 수도 없었다. 신해범은 안부차 전화했다는 말을 남기며, 왕자께서 귀환하는 즉시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그렇게 말하는 신해범의 입술 안쪽에는 허연 궤양이 돋아났다.
장진으로 내려가기 전에 강인혜를 만나야 했다. 마음은 이미 광성 땅을 벗어났으나, 신해범에게는 유미현과의 거래를 끝까지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유미현 또한 신해범이 장진으로 내려간 동안 풍기대 책임자인 진치우를 엄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행여나 권주혁이 대장의 부재를 기회 삼아 풍기대에 수작질하지 못하도록.
유미현은 강인혜를 손에 넣고 <백사자>와의 관계를 끊었다. 신해범은 비로소 유미현과 한배에 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정류진에게 닥친 위험 때문일 것이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말간 얼굴에, 신해범은 머릿속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조급하게 생각 안 해.”
그는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서두르면 잘될 일도 망치니까.”
“그래.”
“진짜 쓸모는 있나 몰라, 강인혜. 네 생각엔 어때?”
“내가 걜 실제로 만나 보진 못했지만.”
신예나는 내가 들은 얘기가 사실이라면, 하는 전제를 깔고 말했다.
“엘리트야. 성실하고 머리 좋은 애. 뭘 시켜도 중간은 가는 타입이고 데리고 있어서 손해 볼 건 없어. 중간 이상은 해내니까.”
“중간? 겨우 그 정도론 부족해.”
“집단에는 중간이 많아야 해. 아니면 위에서 부담이 커.”
그래서 신해범이 힘든 거였다. 당사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신예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신해범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가.”
“잠깐만.”
신해범은 신예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왜?”
“나 돈 좀 빌려주라.”
“뭐?”
“차에 기름 넣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
신예나의 표정은 당장 내일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뉴스를 접한 사람 같았다.
“장난쳐? 무슨 헛소리야.”
“진짜야. 나 지금 완전 빈털터리, 알거지야.”
신해범이 지갑을 꺼내 벌려 보였다. 검은색 악어가죽 반지갑에 지폐 몇 장과 신분증이 덜렁 들었다. 그리고 가족사진. 귀퉁이가 닳아 빠진 데다 가운데에 선명하게 접힌 줄까지 남은 오래된 가족사진이 신예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통이 넓은 전통복 소매 안쪽의 ‘비밀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 건넸다.
“자.”
“미안. 카드도 없고 현금 인출하러 갈 시간도 없다.”
“왜, 분실? 신고는 했어?”
“꼬꼬 줬어.”
“류진이?”
“맛있는 거 많이 처먹으라고.”
“처먹으라고가 뭐야, 애한테.”
“너도 보고 싶지?”
“응?”
“정류진 살찐 거. 얼굴에도 팔뚝에도, 허벅지에도 토실토실 살이 쪄서 아주 그냥 굴러다녔으면 좋겠어. 말랑말랑하니 주무를 맛 날 거야.”
“채썰기 할 게 하나 더 있었네. 오빠 혓바닥.”
신해범은 지갑을 넣으면서 웃었다.
“고맙다. 아껴 쓸게.”
“팍팍 써! 우리가 어릴 때야 좀 그랬지, 지금 가격표 봐?”
“난 네가 그렇게 말할 때 너무 좋더라.”
그가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진짜 보고 싶다. 우리 꼬꼬 돼지 되는 거.”
“악취미야.”
“괜찮아. 신체검사에서 비만 판정받으면 다이어트 시켜 줄 거야. 내 방식으로.”
상상하기도 싫었다. 신예나는 신해범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다가, 유미현이 차 안에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빨리 가!”
“개들은 잘 지내?”
“가! 다음번엔 류진이랑 같이 와!”
“그래!”
신해범이 활짝 웃었다. 긴 팔을 머리 위로 휘적휘적 흔들면서 자신의 레인지로버로 뛰어갔다.
신예나는 팔짱을 끼었다. 유미현의 차량을 따라가는 레인지로버 후미등을 바라보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웃기는….
힘들 때일수록 웃으라는 말은 이제 지겹다. 유머 감각을 키우라는 소리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 신해범은 자기가 괜찮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을 테지만, 이쯤 되면 알았다.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웃는데도 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예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하신성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실려 와 끝끝내 깨어나지 못했고, 강인혜는 심정지 상태에서 극적으로 깨어났다.
인간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신의 기준은 뭘까. 신해범은 유미현과 원세영의 뒤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강인혜의 멱살을 잡아 이승으로 데리고 온 의료진들은 유미현에게 단단히 입막음을 당했다. 후미진 구석의 개인 병실을 유미현의 개인 경호 팀이 지켰다. 사복 차림의 성인 남자 둘이었는데 우리말이 서툴렀다. 그들과 능숙한 외국어로 대화하는 유미현을 보며 신해범은 속으로 웃었다.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주지 않기 위해 사병을 키우지 않는다더니 외국인 용병들이라.
안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순간 김효성의 병실에 온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으로부터 일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강인혜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자는 건 아니었다.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면 알았다. 신해범은 저 얇은 눈꺼풀 아래서 바쁘게 움직일 눈동자를 생각했다. 초조와 불안.
지금 강인혜는 수년 전 신해범과 같았다. 신해준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지키고 싶어 했던 시절의 미숙한 어린애.
“머리 좋은 줄 알았는데. 연기력은 형편없군.”
“닥쳐요.”
유미현이 실소를 흘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쟤가 저렇다니까.”
“똑똑한 애들이 보통 그렇죠. 사춘기가 늦게 옵니다. 그래서 사고를 더 크게 친다고 해야 하나.”
강인혜가 벌떡 일어났다. 링거 줄이 흔들렸다.
“지금 장난쳐?!”
“말버릇이….”
유미현은 진심으로 화내지 않았다. 오렌지색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호선을 그린 걸 보면 알았다.
원세영은 문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섰다. 신해범은 이 광경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엄마 유미현, 언니 원세영, 딸 강인혜. 나는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삼촌쯤 되겠다. 아빠는 뒈졌고.
기우희가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이 콩가루 집안에 끼지 않겠다고 판 뒤집어엎을까? 진치우는 나는 모르겠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할 것 같고, 정류진은….
정류진은 좋아할 것 같았다. 어디든 끼고 싶어서 발 동동 구르는 놈이니까. 엄마, 누나, 여동생까지 생기면 아주 좋아서 만세 삼창을 지를지도 모른다.
핏기 없이 창백한 강인혜의 얼굴에 정류진이 겹쳐졌다. 애석하게도 빨간 머리였다. 몸에 맞지도 않는 후줄근한 가죽 재킷을 입은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해범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지런히 눈을 깜박였다.
침대로 다가갔다. 강인혜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원세영이 뛰어와 휘청거리는 몸을 받쳐 주려 했으나, 거칠게 뿌리쳐졌다. 저승길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치고는 힘이 장사였다.
신해범은 키득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현실이 무섭냐?”
“…….”
“감당하기 힘들어?”
“…….”
“이런 경험 처음이지? 괜찮아. 다 그렇게 어른 되는 거다.”
“한마디만 더 하면 대가리 터뜨려 버릴 거야.”
“그래라.”
“내가 못 할 거 같아?”
목소리는 제법 매서웠지만, 강인혜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할 수 있을 거 같아. 너는.”
신해범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강인혜의 마른 어깨가 움찔했다.
“있잖아, 내가 새를 한 마리 키우거든. 한주먹거리 주제에 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몰라. 반응도 귀여워. 내가 한마디 하면 솜털 날개 파닥거리면서 부리로 쪼아 대는데 아주 예뻐. 그런데 사진이, 참, 내가 취향이 좀 그래서. 교양 있는 아가씨한테 보여 줄 만한 게 없어서 아쉽네.”
“신 준장 앵무새 키우나?”
“아뇨, 닭.”
“닭?”
“예. 그런데 아직 덜 자라서 병아리나 마찬가집니다.”
유미현과 원세영의 표정이 놀라울 만큼 똑같아서, 신해범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내친김에 한술 더 떴다.
“수놈이라 그런지 알은 못 낳더라고요.”
정신병자 확정이었다. 머리 찍어 보자고 하기 전에 화제를 바꿔야겠다.
“널 살려 준 이유가 궁금하겠지? 혼자서 많이 생각했겠지.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상상하고. 앞날을 가늠해 봤겠지. 근데 그거 다 헛짓거리야. 원래 인생이 그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질 않는다니까.”
“…….”
“내가 어려서 그런 걸까? 인생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계획이었나?”
강인혜가 이불을 그러쥐었다. 링거 꽂힌 손등이 경련했다.
“생각하지 마.”
신해범은 딱 잘라 말했다.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야. 생각이 많아서. 생각이 많으면 걱정이 클 수밖에 없거든. 이것저것 가늠하느라 치고 나갈 타이밍을 놓치지. 안전장치 마련해 놓고 뛰어가 봤자 이미 좋은 건 다 뺏겼어. 껍데기랑 뼈랑 내장밖에 없다고. 그런 걸로 영양 보충이 되겠냐? 너, 굶어 죽기 급행열차 일등칸 타고 싶어?”
고개를 든 강인혜가 노려본 사람은 유미현이었다.
“죽고 싶어요.”
유미현은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부모님 따라서?”
“…….”
“네 아버진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너도 부정하진 않았어.”
“그렇다고 죽기를 바란 적 없어요.”
“그래서 내가 손을 안 쓴 거란다.”
유미현이 다가왔다. 그가 뻗은 손이 신해범의 시야를 이등분했다. 강인혜의 머리칼을 잡아 뒤로 젖힌 유미현이 일갈했다.
“손을 썼어야 했을까?”
응? 유미현이 되물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을까? 네가 나를 치 떨리게 미워하면, 증오하면, 그러면 차라리 살 수 있겠니?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을 수 있겠어?”
증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신해범이 뇌까렸다.
“난 그렇게 산다.”
유미현이 거칠게 손을 거뒀다. 강인혜의 상체가 앞으로 푹 쓰러졌다.
움츠린 어깨가 세차게 떨렸다. 새끼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신해범 그 흔들리는 등에 손을 얹었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은 망가지지. 원래대로 돌아가진 못해.”
깨진 접시를 복구하는 일이 그랬다. 모든 조각을 되찾고, 접착제를 꼼꼼하게 바르고, 세심한 손길로 정교하게 재구성해도 희미한 실금은 남았다. 부서진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깨진 상태로 남아 쓰레기통에 처박히든가, 움직일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파편을 그때그때 이어 붙이며 망가진 채로 달려가거나.
“평생, 평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해요? 잊지 못하고?”
“그래.”
“어떻게…!”
“고통을 기억해. 기억하면 되돌려 줄 수 있으니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강인혜가 말해다.
“당신은 무섭지도 않아요?”
“응. 안 무서워.”
신해범은 절벽이 두렵지 않았다.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알기에. 인간이 느끼는 최대한의 공포와 절망을 한번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러니 추락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브레이크 없이 달렸다. 실패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달리기에 절벽을 지배할 수 있었다.
***
예배당 철거가 늦어진 데는 실질적인 이해관계보다 근거 없는 미신이 더 크게 작용했다. 처형 장소에 함부로 발을 들이면 안 된다. 왜냐? 죽은 함씨 일가의 저주를 받기 때문에.
물론 엄승원은 코웃음 쳤다. 함씨 일가의 저주는 무슨.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약탈한 도굴꾼들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더니 꽥 죽어 버렸다는 ‘미라의 저주’도 아니고.
이 세상에 저주 같은 건 없었다. 엄승원은 세상에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건 없다고 주장하는 ‘문명 신봉자’까지는 아니었으나, 과거에 사람들을 떨게 만든 갖가지 미신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바이러스, 박테리아, 맹독 가스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애초에 미라의 저주가 그토록 유명해진 건 미라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던 관계자들의 피해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 당시 사회적인 문제와 얽혀 있었다. 미라의 저주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당시의 사회는 복잡했다. 잘나가던 사업가가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는 일이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 여기에 의료상의 문제도 추가되었다. 소아 예방 접종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기 전이라 많은 아이가 말라리아, 뇌염, 결핵, 폴리오 등으로 죽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다.
당시의 과학 기술이, 사회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불행으로 저주 이야기를 써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업가와 정치가들. 그들은 대중을 선동하여 속이고, 모함하고, 싸우게 해서 이득을 취했다. 사업가는 물건을 팔고, 정치가는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쌍둥이였다.
“이렇게 말하면 또 무슨 사회에 불만이 그렇게 많으냐고 비아냥거리지. 그래도 난 안 속아. 안 믿어. 그러니까 지한이 너도….”
엄승원은 카메라 끈을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예측할 수 없어서 재미있는 게 사람 인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지금 상황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진정해요.”
“진정…!”
성지한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인파가 장마철 먹구름처럼 밀려왔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성지한은 혀를 찼다. 그의 눈에는 지금 이 상황이 수습되지 않는 게 보였다. 멍청한 지역 경찰 놈들은 도착해서 하는 일이 없었다. 요란하게 사이렌 울릴 줄만 알았지, 현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제대로 막지도 못했다.
수습이 아니라 구경하러 왔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자신의 신분은 성지한이었다.
아직 대학생인 사촌 동생의 이름을 빌려서 택시 회사에 취업했다. 이 사실을 들키면 풍기 교육대원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몰랐다. 기우희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이고. 어쩌면 부정에 가담한 죄로 사촌 동생까지 곤란해질지 몰랐다.
성재경은 어금니를 악문 채, 예배당 안에서 나오는 들것을 응시했다.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군중 속 누군가가 소리쳤다.
“죽었네, 죽었어!”
그 목소리가 시작이었다. 울음과 비탄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머리에 두건을 쓴 젊은 여성이 비명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아이의 어머니라고 했다. 여자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는 작업복 차림이었는데,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리고 하늘만 응시했다.
여자는 식당, 남자는 산업 현장. 둘 다 늦게까지 일하는 서민 노동자였다. 아이를 봐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 지역 대부분의 가족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시간이 남아도는 아이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 원래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한다.
함풍 2도 주민들이 저주받는다고 꺼리는 예배당은, 아이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 일종의 공포 체험 장소가 된 듯했다.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담력 체험을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들도 많았다.
사고 당시 함께 있었던 아이들은 이곳에 드나들기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배당 내부 구조를 외웠고, 다소 위험한 묘기까지 부리면서 놀 정도로 익숙했다. 처음 온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들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바닥이 꺼져 지하실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져 죽었다. 성재경은 웅성거림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민들은 예배당에 지하실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소리다. 완공된 이후에, 누군가가 몰래 만들었다. 왜? 누가? 정확히 언제? 무슨 목적으로?
성재경은 두 번째 들것을 응시했다. 처음에 나온 것보다 훨씬 컸다. 두 번째 시신은 어른이었다. 신장으로 미루어 보아 남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성재경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는 구조대원에게 접근할 타이밍을 노리는데, 별안간 엄승원이 뛰어나갔다.
“형님?!”
“아이고, 미끄러워라!”
한숨 나오는 연기력이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어쩌면 이런 일을 하는 게 처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억!”
“으아악!”
마른 체격의 구조대원은 엄승원과 함께 땅바닥을 굴렀다. 앞에서 들것을 잡아 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뒷사람도 따라 휘청거렸다.
들것이 기울어졌다. 흰 천에 덮인 시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흡!”
성재경은 숨을 집어삼켰다. 구조대원을 짓누르고 몸을 일으킨 엄승원의 얼굴도 새하얘졌다. 고작 천 조각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풍기는 악취가 어마어마했다. 시체 냄새.
엄승원이 그 자리에 엎어져 구토했다. 시신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개중에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혼절하는 사람도, 엄승원처럼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사람 트라우마로 남을 광경이었다.
성재경은 시체라면 여럿 본 풍기 교육대원이었다. 그가 지금껏 봤던 시체 중 가장 지독했던 건 익사체였다. 눈으로 보기에도, 실제로 수습하기에도 가장 힘들었다. 시체 냄새야 한번 맡으면 잊을 수 없다지만 익사체는 특히 심했다. 아무리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해도 표정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물비린내가 있었다.
마주하는 순간 덮쳐 오는 정신적 충격의 강도로 따지자면, 여태껏 익사체가 부동의 일 순위였다.
그 기록을 오늘부로 갱신한다.
이 시신은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얼굴 생김새를 알아볼 정도로 완벽하게 시랍화된 시체라니.
눈앞의 시체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섦과 동시에 눈을 번쩍 뜨고 달려들 것 같았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상태의 좀비처럼.
남자의 이름은 황효제. 과거 류연비를 발굴하고 스타로 키워 낸, 하지만 류연비가 톱스타 반열에 오르자 홀연히 자취를 감춘 프로듀서였다.
엄승원은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코끝에 아직도 시취가 맴돌았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변기를 안고 속을 게워 냈으나, 현장에서 발견된 날것 그대로의 시체를 코앞에서 본 충격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비척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는데 널브러진 잡지가 보였다. 빨간색 새틴 미니드레스를 차려입은 류연비가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진이 실린 페이지였다. 엄승원은 잡지를 발로 차 침대 밑으로 넣어 버렸다. 차라리 황효제의 얼굴을 몰랐다면 좋을 뻔했다.
황효제는 류연비를 발굴해 낸 스타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정작 류연비와는 데뷔 초까지만 함께했다. 실제로 스타덤에 오른 뒤, 류연비는 세 명의 매니저와 번갈아 가며 스케줄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대중의 의견이 분분했다. 그룹도 아닌 솔로 가수의 매니저가 셋이라니 지나친 특혜다, 류연비 정도의 톱스타라면 당연한 대우다. 개중에는 첫 프로듀서와의 불화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류연비가 매니저의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여럿을 고용한다는, 제법 그럴싸한 추측도 있었다.
류연비와 함께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스태프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역할과 능력, 성격, 촬영장에서 보여 주는 모습과 스타의 팬들을 대하는 태도. 심지어 외모까지 대중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황효제는 그 무수한 관심에서도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류연비 본인이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이 식었다. 대중이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황효제에 대한 언급을 피할수록 의혹이 커진다는 걸.
엄승원은 무릎걸음으로 냉장고까지 기어갔다. 생수와 마른오징어뿐이었다. 함께 돌아왔던 성지한은 맥주라도 사 오겠다며 곧바로 나갔다.
엄승원은 그에게 미안했다. 본인이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성지한은 맥주를 사 들고 들어와서,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미안한 표정으로, 내일부터는 데리러 오지 못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말 없었다. 애초에 쉬러 내려왔다는 놈이 마음 써서 돕겠다고 한 거였다. 코앞에서 시체를 보고도 결심이 그대로라면, 성지한은 예수나 부처의 현신일 것이다. 아니면 평범한 택시 기사가 아니거나.
보고할 마음을 먹기까지 오래 걸렸다. 떨지 않고, 두서없이 허둥대지 않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문서로 보고하는 게 편할 텐데. 진치우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메일이나 메시지를 귀찮아했다.
“접니다. 엄승원.”
- 알아, 새꺄! 말해!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뿔이 났나. 엄승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함씨 사람들 죽은 예배당에서. 아무래도 황효제 같습니다.”
- 그게 누군데?
“류연비 프로듀서, 첫 번째 매니저였던 사람입니다.”
버럭 윽박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술 처먹었냐고, 아니면 소설 쓰냐고.
그가 함풍으로 내려온 뒤 진치우는 자신의 개 같은 성질머리를 여과 없이 발산했다. 풍기대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보고받는다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쏟아 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성지한과 비교됐다.
엄승원은 자기가 아는 최대한의 정보를 보고했다. 왜 예배당에 찾아갔는지부터 동네 애들이 놀다가 지하실을 발견했다는 것,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사람이 젊은 모습 그대로, 얼굴 형태까지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고 나니 숨이 찼다. 식은땀까지 줄줄 흘렀다.
진치우는 잠자코 들어 주었다.
- 장난은 아닌 것 같네.
“장난이라니요!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모르십니까?”
- 심각하고 말고야 내가 판단할 문제고. 아직 뉴스 뜬 건 없지?
엄승원은 리모컨을 찾았다. 이리저리 화면을 돌려 보았으나 속보는 없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지역 신문에 짤막하게 <처형장이 된 저주의 예배당, 의문의 시신 발견> 타이틀 정도는 뜨지 않을까. 동네 아이 하나가 죽기까지 했으니.
“예,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도.”
진치우는 엄승원이 ‘그래도 내일쯤에는’ 하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 거봐. 원래 그런 데야.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실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 아직도 그 동네 물정을 몰라?
“예?”
- 환경 자체가 폐쇄적이라고. 언론 통제 뭐 그런 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알아서 쉬쉬하는 데야.
진치우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 나쁘게 소문나서 좋을 거 없잖아. 가뜩이나 옛날엔 류연비 때문에, 최근엔 함씨 그 씹새끼들 때문에 쑥대밭 된 동넨데. 어린애 하나 죽었댔지? 지금 부모 입막음에 한창일걸. 신고나 뭐 그런 거 못 하게.
“아니….”
- 못 믿겠으면 나중에 조용히 접촉해 봐, 당사자들한테.
그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 난 무슨 얘기 오갈지 안 봐도 알겠어. 애새끼 교육 좆같이 시켜서 사고 쳤다고.
“예… 에?”
엄승원은 입을 벌렸다. 당최 그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고가 그렇게 튀지? 아이가 죽었는데, 그 부모를 탓한다고?
- 왜, 못 믿겠어? 하여튼. 은근히 머릿속 꽃밭이야.
당분간 기자 티 내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
진치우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엄승원은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 엄승원은 휴대폰을 든 채 어깨를 움츠렸다. 맥주를 사러 간 성지한이 돌아왔다.
“형님.”
- 뭐야? 누구랑 같이 있어?
엄승원은 당황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진치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지금 누구랑 같이 있냐니까?!
소리 지르지 마라, 다 들린다!
엄승원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진치우가 짖든 말든 전화를 끊을 셈이었다. 그러나 통화가 종료되기 전, 엄승원은 어깨 너머에서 뻗어온 손에 휴대폰을 빼앗겼다.
“엇!”
예상대로 성지한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건 맥주가 든 편의점 비닐봉지만이 아니었다.
성지한은 어깨에 큼지막한 더플백을 걸친 채였다. 엄승원은 그 가방을 성지한의 택시 트렁크에서 본 적 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평범한 개인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물어볼 걸 그랬다.
휴대폰을 빼앗아 간 성지한은, 여태껏 엄승원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대장님, 접니다.”
- …뭐야?
“놀라지 마십시오. 저 성재경입니다.”
엄승원의 입이 벌어졌다. 허둥지둥 벽으로 물러나는 그에게 성지한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형님. 텔레비전 좀 꺼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에, 엄승원은 텔레비전을 껐다.
“사망자 황효제 맞습니다. 엄 기자님과 제가 같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 이런 미친, 야! 너 뭔 짓을 한 거야! 정신 나갔어?!
“자세한 건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너 혼자서 하는 일이야? 아니면 늬들이 나 병신 만드는 거냐?
“저 혼자서 한 일이고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성재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고속 도로 어귀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신해범은 진치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엄승원과 성재경에게 받은 보고를 전달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 내가 내려가 봐야겠는데.
신해범은 곧바로 불허했다.
“너까지 자리를 비우면 안 돼. 기 소령도 없는 상황에서 유미현한테 모든 걸 맡길 순 없어.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
- 그럼, 성재경 그놈한테 맡기자고?
“성 중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믿고 맡길 만한?”
- 한번 박차고 나간 전적이 있는 새끼야. 돼지랑 결탁해서 뭔 수를 꾸밀지 몰라. 기 소령한텐 미안한데, 나 이제 걔 못 믿는다. 아니, 안 믿는다.
“진정해, 치우.”
신해범은 거치대에 고정된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진치우가 어쩌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아랫입술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겠지.
“성 중사, 그래도 우리 사람이야.”
- 아직은 그렇지. 아직은!
“치우.”
신해범은 조그맣게 한숨 쉬었다.
“증원 요청 들어 줘.”
- 뭐야?
“성 중사 말이 맞아. 수사권 확보하는 게 먼저야. 함풍 지역 경에서 묻어 버리기 전에. 엄승원은 현장에서 별 도움 안 되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터널로 진입했다. 무수한 불빛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신해범은 고개를 흔들어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을 털어 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치우. 지금 중사가 고군분투하는 중이야. 부하가 애쓰는데 손 놓고 있을래? 늦기 전에 수사 팀, 진압 팀 꾸려서 헬기 띄워.”
권주혁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함풍 2도 일이었다. 운용 허가는 어렵지 않게 받아 낼 것이다. 그래도… 신해범은 눈썹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유미현에게 풍기대 소유의 항공기 좀 사 달래야겠다. 상주하는 파일럿도 뽑자. 작전 때마다 헌병대에 손 벌리는 거, 인제 지겹다.
진치우는 코웃음을 쳤다.
- 걔들이 퍽이나 어서 옵쇼, 기다리고 있었슴다, 수사권 넘겨주겠다.
“그러니까 진압 팀이 같이 가야지.”
인해 전술은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먹혔다. 머릿수와 화력으로 밀어붙이면 제깟 놈들이 별수 있겠는가.
뛰어난 지혜를 가진 개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집단을 쳐부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지역 경찰은 풍기 교육대를 이길 수 없었다. 개인의 체력과 스피드, 집단의 기술과 무기, 모든 부분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 풍기 교육대 진압 팀은 프로였다. 무장 시위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훈련받은 프로 학살 집단이었다.
터널을 벗어났다. 신해범은 속도를 높였다.
“중사가 연락을 안 했으면 괜찮아. 그런데 증원 요청을 했잖아. 구조 신호를 받고도 모른 척하는 게 아군이야? 지휘관이야?”
- 알았다.
“믿어, 치우. 중사도 함풍에 놀러 간 건 아니잖아.”
- 말이면 뭔들 못 하냐?
성재경은 심기일전을 목표로 함풍 2도에서 택시 기사 생활을 했다. 취직을 위해 대학생인 사촌 동생 명의를 도용했다.
- 그걸 씨발, 잘했다고 칭찬해 줘야 하냐?
“내가 할 말은 없군.”
중고 사이트 거래를 위해 신예나의 이름을 빌린 건 신해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핸들을 두드리며 킥킥 웃었다.
- 범아… 그냥, 네가 함풍 가면 안 되겠냐?
“왜?”
진치우는 성재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신해범은 슬쩍 미소 지었다.
“내가 장진 가는 게 싫어?”
- 어.
“솔직해서 좋다, 치우.”
- 그 새끼가 장진 갔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갔다 한들, 지가 무슨 수로 정류진을 건드려?
진치우의 말이 빨라졌다. 신해범을 설득하려는 의도였다.
- 거기 MVP랑 기우희는 뭐 허수아비냐? 장두현은? 거기 경비가 철통이라며. 아무렴 장진에서 총통 노릇 해 먹는 작자가, 외부인이 접근하는 걸 순순히 내버려 두겠냐? 상식적으로….
“연락이 끊겼어.”
- 원정 사냥 갔다며! 거기가 통신이 안 되는 데라며! 그럼 연락 안 되는 게 당연하지!
“당연해?”
신해범의 주먹이 차창을 후려쳤다. 진치우가 침묵했다.
“뭐가 당연해?”
신해범의 레인지로버 차창은 방탄유리였다. 총알로도 뚫기 어려운 강도의 창문에서 이만한 소리가 났다는 건, 그게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서도 들린다는 건, 신해범이 온 힘을 다해 후려갈겼다는 뜻이었다.
- 범아.
“정류진이 내 전화 안 받는 게 당연해?”
신해범은 속도를 높였다. 제한 속도 규정 표지판이 귓바퀴를 스치는 총알처럼 멀어졌다. 이렇게까지 밟는 건 오랜만이었다. 소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바람이 차체를 조이면서 압박해 오는 느낌. 코너링을 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아, 원심력의 영향을 받은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같은 쪽 귀가 지끈지끈 아팠다. 정류진이 야무지게 쥐어뜯은 부위였다.
“나는 봐야겠어. 정류진 만나야 해.”
- 만나서 어쩔 건데.
“되찾아야지.”
- 뭘?
“내 향수랑 신용 카드.”
진치우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는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 장난하냐?!
“내가 장난으로 일하는 거 봤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 봤어?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그러면 나 섭섭해, 치우.”
- 가서 뭐라고 핑계 댈 건데. MVP가 퍽이나 네 얘기 들어 주겠다. 걔 지금 존만이한테 눈멀어서 뵈는 거 없잖아. 네가 뭔 말을 하든 자기 연애 방해하러 왔다고 생각할 게 빤해. 똑똑한 새끼가 거기까지 생각이 안 닿아? 너도 성재경처럼 엄 돼지 닮아 가냐?!
“그래도 변하는 거 없어. 차선책도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 풍기 교육대 부대장 진치우 중령.”
- …….
“그리고, 나는 되찾기만 하려고 가는 게 아냐. 거기엔 내가 해야 할 일도 있어.”
- 무슨 일?
“우리가 늘 해 왔던 거.”
신해범의 얼굴에 건조한 미소가 떠올랐다.
“받은 걸 되돌려 주는 일.”
강인혜에게 해 준 말이었다. 열네 살 신해준을 만난다면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모욕, 분노, 수치, 공포, 불안.
고통이라는 이름의 종합 과자 선물 세트.
고통을 기억해라.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원수가 내게 준 고통을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되갚아 줄 수가 있다.
차 안을 가득 채운 에어컨 공기에 몸이 차갑게 식었다. 혈관에 냉수가 흐르는 듯했다.
기회는 공평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아 둔다면, 아슬아슬하게 손가락을 스치는 기회를 붙잡아 물어뜯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갈 수 있어.”
권세혁이 말했다. 그는 원정 사냥을 취소하고 정수헌으로 돌아간 뒤, 해가 뜨는 즉시 광성으로 출발하자고 했다.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으니까.”
저 멀리 반짝이는 교두보가 보였다. 장두현의 명령을 받은 관리 팀에서 보내는 신호였다. 취명강 너머에는 산짐승들의 도하를 막기 위해 칠 미터 높이의 전기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두현의 명령 없이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취명강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기우희가 말해서 말았다.
류진은 권세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안 돌아가.”
“형.”
“가자. 가고 싶어. 나 이기고 싶어.”
“할배가 또 형한테 손대면….”
“네가 지켜 줄 거잖아.”
아까처럼. 류진의 웃는 얼굴이 달빛에 빛났다. 권세혁은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유유히 흐르는 취명강을 바라보았다.
“몸 진짜 괜찮아?”
“괜찮아. 정말로.”
일 미터 높이에 있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지만, 류진은 가벼운 타박상 외에는 멀쩡했다. 떨어진 충격으로 팔이나 다리 하나가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기적이었다.
류진은 연신 괜찮다고 말했지만, 권세혁은 못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진짜, 억지로 참는 거 아니지?”
“당연하지. 넌 내가 그렇게 미련해 보이냐?”
권세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바람이 불었다. 권세혁은 류진에게 몸을 기댔다.
강가에 무리 지어 핀 벌개미취가 보였다. 보랏빛 꽃잎을 접시처럼 펼친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조그맣고 가늘지만 어디서든 잘 자라고, 번식력이 왕성해 잡초지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야생화가 류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권세혁은 결정을 내렸다. 장두현에게 소식을 전하러 간 윤태금은 십오 분 만에 돌아왔다.
“도하하신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자.”
권세혁이 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앉았던 바위에서 일어나 진압 차량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수풀 밖으로 나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럴 만했다. 대낮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라이브 키스 쇼를 보였으니. 권세혁은 고개를 푹 숙이는 류진의 손을 흔들었다.
“뭐야, 형? 설마 인제 와서 창피해?”
“아….”
“아깐 그렇게 적극적이었으면서.”
일부러 장난치듯 말했다. 권세혁은 류진의 긴장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괜찮아, 형. 고개 들어. 어깨 펴고 당당하게 걸어.”
어디선가 결혼식 행진곡이 들려왔다.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기뻤다. 어차피 곧 현실이 될 일이었다.
조명이라고는 달빛뿐인 밤이었다. 들꽃과 잡초뿐인 흙길이었다. 그래도 권세혁은 행복했다. 류진과 함께라면 어떤 가시밭길이든 기쁘게 걸을 수 있었다.
류진을 먼저 진압 차량에 태웠다. 뒤이어 올라가려는데 윤태금이 불쑥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왕자님 컨디션 말입니다.”
비상용 약물 한 통이 남았다고 했다. 도구도 챙겨 왔단다.
“혹시 필요하시면….”
혹하는 제의였다.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프로포폴을 맞으면 어깨가 가벼워졌다. 시야를 가린 장막 한 겹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누군가가 몸속에 활기를 불어넣는 기분이었다.
“아뇨. 됐습니다.”
권세혁은 거절했다.
“지금은 기분이 좋거든요.”
류진이 자신에게 달려와 키스했다. 내게 의지했다. 비록 상상 속에서지만, 그와 함께 웨딩 로드를 걸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소령님.”
류진은 차폐막에 손을 얹었다. 출발 준비를 마친 기우희가 돌아보았다.
“괜찮나? 이병?”
“네.”
“정수헌 사병들의 무례는 내가 사과하지.”
마강희였다. 류진은 그가 진심으로 미안해한다는 걸 알았다. 표정과 목소리를 보면 알았다. 그조차도 꾸며 내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신해범 같은 사람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많다면 현실은 지옥 같을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문신 때문에 무서워 보였는데… 기우희와 친한 것도 그렇고,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 듯했다.
“친하게 지내라. 이제 같은 팀인데.”
기우희는 앞만 보고 말했다.
“아, 저 그럼.”
류진은 차폐막에 매달려 빙긋 웃었다.
“저는 정류진이에요. 이병입니다.”
“마강희. 그… 잘 부탁합니다.”
“저는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마강희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류진은 권세혁이 없는 자리에서는 윤태금과도 반말로 이야기한다고 덧붙이며 차폐막을 넘어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 때문에 손바닥이 딱딱했다. 싸우는 사람의 손이었다.
권세혁과 윤태금이 들어와 착석했다. 기우희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출발했다. 스피커를 통해 기우희의 목소리가 내부에 울려 퍼졌다.
“진입.”
장두현 일행으로부터 조금 뒤처졌지만, 브리지 입구에서 바로 따라잡았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오백 미터 떨어진 다른 브리지에서 장두현이 건너고 있었다. 붉은색 적토마가 그려진 악트로스 아머드. 그 거대한 차체의 실루엣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걱정하지 마, 형.”
권세혁이 류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 꼭 이길 거야.”
“응.”
“이기면 저 차도 달라고 할까?”
류진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윤태금이 ‘기왕이면 우리라고 해 주세요’ 하고 꿍얼거렸다.
사수석의 마강희가 돌아보았다.
“문 개방합니다.”
“문이요?”
“저기.”
창문에 달라붙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권세혁이 의자를 밟고 올라갔다. 루프를 밀어 연 그가 류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올라와, 형.”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 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올라섰다. <힐 스톤 그로우> 전체를 둘러싼 전기 철조망에 오백 미터 간격을 두고 설치된 거대한 철문이, 멀리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벌어지는 두 개의 문에 조각된 장식은 여의주를 문 용이었다. 윤태금이 운전석에 당부했다.
“스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저 문에도 전류가 흐르니까.”
기우희의 코웃음이 스피커를 통해 적나라하게 들렸다.
“장난치나….”
“소령, 스피커 끄고 말해.”
권세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류진은 권세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밑에서 윤태금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거, 긴장들 좀 하십시다!”
남자는 시적인 말을 중얼거렸다.
“사냥하기 좋은 밤이구마.”
탕, 소리를 내며 조수석 문을 닫은 강인우가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달이 좋긴 합니다.”
방수포 끄트머리를 단단하게 고정해 준 직원이 손나발을 하고 소리쳤다. 출발!
사장은 거칠게 엑셀을 밟았다. 연식이 오래된 트럭이라 팍팍 밟지 않으면 시원찮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배달에 사용되는 한국산 세렉스는 은색 래커로 꼼꼼하게 칠해 멀리서 보면 미사일이 달리는 듯했다.
강인우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거 교통법 위반 아닙니까?”
“뭐? 뭔 법?”
사장은 크하하하 웃었다.
“여그는 우리 장 대관 어르신 땅이다.”
장두현의 말이 곧 법이라는 뜻이었다. 장가에 빌붙어 살아가는 인간이 할 법한 소리였다.
사장은 철 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달렸다. 거친 말이나 행동과는 달리 주행은 제법 매끄러웠다. 그래도 짐칸에서 들려오는 쇠붙이 마찰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강인우는 일을 시작한 즉시 사장의 눈에 들었다. 그로서는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군에서 차량을 해체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기에 폐차장 일이 어렵지 않았다.
군용 차량은 처리 방법이 까다로웠다. 반드시 지정된 군수업체에서 해체 작업을 거쳐야 했고, 군인들의 엄격한 통제하에 부품을 판매했다. 엔진과 변속기와 냉장재는 제법 비싸게 팔렸다. 서스펜션, 휠, 타이어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고철도 재활용되는 물건이었다. 그 때문에 인근 고물상에서는 어떻게든 군과 거래를 트려고 야단이었다. 경쟁이 치열했기에 담당자는 자기 선에서 상자며 봉투를 쏠쏠하게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출발하기 전, 사장은 강인우의 발밑을 가리키며 건강 음료 상자를 곧 만나게 될 정수헌 사병에게 전해 주라고 말했다.
“저택으로 가는 겁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달렸다. 강인우가 아는 한, 폐차장에서 정수헌까지는 고작 오 킬로미터 거리였다.
사장은 싸구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라이터를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강인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사장은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했다.
“보통은 거기루다가 물건 놓는데, 오늘이 그날이라가. 사냥 날.”
스케줄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하청’은 어쩔 수 없다고, 사장은 무심하게 말했다.
“담당하는 사병 놈이 그리 갔댄다.”
“예….”
“우짜겠노, 싸인 받을라믄 가야제. 물건은 돌아옴서 내리놓드래도.”
“번거로울 텐데요. 대신 확인해 줄 사람은 없습니까?”
사장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짝 사람들 물건 보는 기준이 억수로 까다로운 게 아이다. 그래도 우리는 거래 튼 지 오래됐고, 접때도 말 맞춰 놓은 부분이 있어서….”
어째 설명이 장황했다. 강인우가 대답하지 않자 사장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광성서 왕자 전하 내리오신 거 알제.”
“아, 예.”
“혼자 몸이 아니라카데.”
강인우는 놀란 척했다.
“예?”
“내도 그짝 사병한테 들었다. 결혼한다 켔다더라.”
이번에는 진짜로 놀랐다. 정류진과 권세혁이 어떤 사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인우는 당황했다. 출발지에서 착실하게 정거장을 지나치던 버스가 별안간 노선을 이탈하여 지름길을 통해 종점에 도달해 버린 기분이었다.
“사내애라는데 첩이겠제? 설마허니 후사를 못 보는 총통이 있을라꼬.”
“예… 그렇겠지요.”
“윽수로 미인이라 카데. 내는 안 봐서 몰겠지마는.”
정류진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두현이 모를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내부에서 입단속을 했을 것이다. 왕자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는 사항이니만큼 철저히.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정수헌처럼 눈과 귀가 많은 곳에서는 더더욱.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고, 발 없는 말은 빠르니.
영원한 비밀은 없다….
강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춥나?”
사장이 에어컨을 끄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저, 잠시 눈 좀 붙여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강인우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볼 캡을 눌러쓰면서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뒷문을 열자마자 풍기대원과 마주쳤다. 집 안의 소음을 듣고 살피러 온 게 분명했다.
강인우와 오은정은 누가 봐도 외출하는 차림이었다. 짐은 한눈에 보기에도 멀리 떠나는 사람이었다. 안방에는 강재상이 죽어 있었고.
강인우는 그가 무기를 꺼내기 전에 달려들었다. 총기전은 머릿수로 이기는 싸움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명사수라도 뒤에서 총구를 들이대거나 탄환이 먼저 떨어지면 투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총알에 머리 터져 죽거나.
간신히 비명을 억누른 오은정이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 강인우는 소리쳤다. 나가라고, 차를 향해 달리라고. 오은정은 가방을 안고 뛰쳐나갔다. 그를 잡으려는 대원의 급소를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오은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뛰었다.
강인우는 상대와 함께 거실을 나뒹굴었다. 테이블 다리가 부러지고, 화병이 박살 났다. 벽에 걸린 액자가 떨어져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장식장도 엎어졌다. 그 위에 놓여 있던 탁상 거울, 전화기, 에나멜 은촛대, 동전이나 음식점 쿠폰 등 잡다한 생활 물품을 넣어 놓는 사탕 상자까지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일상이 부서져 나갔다.
‘윽!’
멱살을 붙잡혔다. 강인우는 맞은편 벽으로 날아갔다. 몸이 허공으로 뜬다고 느끼는 찰나에 상대의 어깻죽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떨어지면 안 된다. 곧바로 총을 꺼낼 테니까.
‘이 새끼가!’
또다시 뒤엉켰다. 2층 계단이 있는 곳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온몸이 부딪치고 쓸리고, 유리 파편에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찢겼지만 아프지 않았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이 모든 고통과 시름을 잊게 했다.
강인우는 남자를 깔고 앉았다. 어디에 부딪혔는지 이마가 찢어진 남자는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뒤통수도 터진 것 같았다. 마룻바닥을 적시는 검붉은 액체를 보면 알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쉽다. 덩치 큰 돼지 멱을 딴다고 생각하면 된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기운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바닥에 늘어진 두 손이, 열 개의 손가락이 힘없이 움찔거리기만 했다.
아직 숨이 끊어진 건 아니다. 숨통을 끊는 건 내가 해야 한다.
강인우의 목덜미가 불뚝거렸다.
그는 주먹을 쳐들었다. 상대방의 얼굴 중앙에 꽂아 넣었다.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미약한 저항마저 사라졌다. 강인우는 그의 허리춤에서 빼앗은 권총을 뒤집어 쥐었다. 총신을 움켜쥐고, 손잡이 바닥이 아래로 가도록. 강인우는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가격하며 생각했다. 깔끔하게 보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런데 네 소음기를 못 찾겠다. 감시자 역할을 하면서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다니, 설마 총 쓸 일이 있을까 생각한 거겠지? 한심한 놈.
핏방울이 튀었다. 거친 숨을 뱉느라 살짝 벌어진 강인우의 입 안으로도 들어왔다. 그는 무심하게 난타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서, 강인우.’
아아.
잡혔구나.
한 놈이 더 있었구나!
오은정이 인질이었다. 방금 동료를 잃은 풍기대원은 낭패감에 젖은 표정이었다. 강인우는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풍기대원을 본 강인우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래도 이놈은 훈련 내용을 제대로 숙지했다. 베레타에 소음기가 끼워진 걸 보면.
그 차가운 쇳덩이가 오은정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의 목 위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강인우는 오은정의 뇌수와 피가 맞은편 벽에 흩뿌려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늦었군.’
‘닥치고 벽으로 가.’
‘지원 요청은 했나?’
안 했을 것이다. 힘없는 여자 한 사람쯤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 오은정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온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겠지만, 이미 늦었다.
‘벽으로 붙어. 강인우.’
침착한 목소리만으로는 낭패한 표정을 가릴 수 없었다. 강인우는 피 묻은 입술로 웃었다.
‘안 됐군. 팔이 세 개가 아니라서.’
2층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탄환이 발사됐다. 소음기 때문에 피슉 소리만 났다. 하지만 난간에는 차례차례, 또 분명하게 총알이 박혔다.
강인우가 총에 맞지 않고 2층으로 피신한 건 신의 도움, 아니 오은정의 격렬한 저항 덕분이었다.
계단참 아래서 오은정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목을 쏴 걷지 못하게 만든 대원이 허겁지겁 2층으로 뛰어올라 왔다.
강인우는 기다리고 있었다. 2층의 화장실에서 반쯤 열린 문 뒤에 몸을 감추고. 적이 다가오는 순간, 문짝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딱딱한 오동나무 문에 얻어맞은 그가 휘청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목을 걷어찼다. 베레타가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그가 본능적으로 팔을 뻗는 순간, 강인우는 적의 목에 수건을 감고 힘껏 당겼다. 손등에 뼈와 핏줄이 불거졌다. 푸른 핏줄은 강인우의 굵은 팔뚝까지 뱀처럼 휘감았다.
‘커… 헉!’
아까는 상대의 배 위에 걸터앉았다. 지금은 등이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아니면 죽어 가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그런지 한결 편했다. 그렇다고 쉬운 건 아니었다. 강인우는 죽을힘을 다해 상대방의 목을 졸라야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밀었다. 1층 거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고막을 긁었다.
체격도, 힘도 엇비슷한 상대의 저항은 거셌다. 어떻게든 몸을 굴려서 빠져나가려는 놈을 제압하는 데 힘이 들었다. 이미 앞선 한 차례의 싸움으로 강인우는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우위를 점한 이유라면 하나였다. 그가 더 필사적이기 때문이었다.
1층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오은정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대원의 허리춤에서 낚아챈 무전기 배터리를 빼, 거실 텔레비전에 내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오은정은 근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발목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뛰기는커녕 걷지도 못한다. 총상을 입은 상태로는 비행기도, 배도 탈 수 없다.
강인우는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인우는 있는 힘껏 수건을 당겼다. 손가락 열 개가 부서져도 괜찮았다.
죽어 가는 남자가 보였다. 풍기대에서 조금 더 지냈다면 같은 작전에 투입되었을지도 모르는 상대였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그런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강인우는 굳게 믿었다. 나의 살인에는 이유가 있다고.
이로한과 우승환은 조직의 배신자였다. 숙청 대상이었다. 치워야 할 쓰레기였다. 그리고 지금은, 소중한 가족을 위해서였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 딸이 죽는다. 아내가 죽는다.
가족을 지키지 못하는 남자에게 가장이라고, 아버지라고, 남편이라고 불릴 자격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이건….
‘정당방위다!’
강인우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직업 윤리로 싸우는 사람은, 사활을 걸고 발버둥 치는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한다.
기절해 늘어진 대원의 주머니에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강인우는 쇠붙이를 망설임 없이 희생자의 목에 꽂아 넣었다. 오른쪽으로 강하게 비틀면서 칼을 빼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강인우는 비척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집이 피눈물을 흘렸다.
그는 안방으로 갔다. 방문이 안에서 잠겼다. 강인우는 문고리를 흔들며 오은정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강인우는 문고리를 비틀었다. 마음 같아서는 잡아 뽑고 싶었으나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날 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문에 몇 번 몸을 부딪치던 강인우는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현관 신발장에 철제 화분이 있었다. 강인우의 한 손에 딱 들어오는 반구 형태의 묵직한 화분은 한때 안에 선인장을 키웠으나, 지금은 집에 드나들 때 차 키를 넣어 두는 용도로만 썼다.
강인우는 강재상의 도요타 키를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양손으로 움켜쥔 화분을 높이 쳐들었다. 매끄러운 표면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문고리를 향해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문고리가 부서져 나갔을 때, 강인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화분을 내던지고 문을 걷어찼다.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무 늦었다는 걸.
안에서 밀려 나오는 냄새와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 강인우는 잠자코 눈을 깜박였다. 눈앞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할 시간. 그를 이해할 시간.
오은정은 죽어 있었다.
목을 맸다. 천장에서부터 늘어진 실크 넥타이가 보였다. 남색 바탕에 강렬한 빨간색 줄무늬가 광대 같아서 가족 모두 싫어했다. 강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오은정의 발목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시신이 채 식지 않았다.
십 분, 아니 오 분, 아니 삼 분만 빨랐으면.
강인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일각을 다투는 지금 망연자실할 시간은 없었다. 후회조차 사치였다.
오은정은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차가워졌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강인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안방을 벗어나는데 뒤에서 인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환청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놀라지 않았다. 강인우는 거실에 나뒹구는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치면서 대답했다.
‘우리를 위한 일.’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본래 성격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취명강을 건너 <힐 스톤 그로우>에 진입하기 전 모든 팀에 공평하게 주어진 삼십 분의 작전 타임에서, 류진은 이 멤버 구성이 상당히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권세혁이 사령탑 역할을 기우희에게 순순히 양보한 게 시작이었다. 기우희는 예의상 한 차례 거절했지만 권세혁의 ‘이기고 싶은 싸움에 자존심은 쓸모없다’는 말에 수긍했다. 마강희는 사냥 유경험자였고 윤태금은 엔지니어였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분야에서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리고 류진은.
“꼭 직접 잡아야만 합니까?”
“무슨 소리야, 형?”
“뺏어도 되는 거 아냐? 사냥감.”
빼앗는다는 말이 낯설었다. 하지만 신해범이라면 최우선으로 고려했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꾼이 아니라 약탈자가 되는 것이다. 남의 공적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드는 일.
언뜻 야비하고 비겁하게 들리지만, 류진은 가능한 살생을 줄이고 싶었다. 사냥개를 잃을 가능성도 최소화하고 싶었다. 이건 생존을 위한 사냥이 아니니까. 나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아니니까.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짐승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마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뜻은 아니었다.
“다들 그런 시도를 하지.”
윤태금이 좌중을 둘러보면서 덧붙였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습니다.”
장두현은 점수를 얻기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것 또한 생존 경쟁이라고 여겼다.
비겁하다는 비난을 감수한다면, 스틸은 현명한 작전이었다. 지금껏 많은 사병이 그런 짓을 했다.
남의 취미에 목숨 잃고 싶지 않아서, 일 점이라도 더 많이 따서 주인의 눈에 들려고, 혹은 평소 사이가 나쁜 동료를 견제하고 싶어서. 각자 다양한 이유로 비슷한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형성된 암묵적인 규칙이 ‘셸터에는 경비를 남겨 둔다’는 거였다. 모든 사냥개는 기본적으로 경비견이었다.
“그럼 우리도….”
류진은 가장 작은 개를 남겨 두자고 말했다. 사냥에서 가장 약할 것 같은 개. 그 부분에서 윤태금과 의견이 엇갈렸다.
“그 반대여야죠.”
윤태금은 가르토를 남겨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크고 사나운 개가 셸터에 있으면 외부에서 섣불리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애초에 그놈은 저희가 다루기도 까다롭습니다.”
사냥 중에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기우희가 파트너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을 뜻했다.
윤태금은 거듭 강조했다. 가르토는 사냥용이 아니라 투견용이라고. 물론 사냥하는 법도 알고, 강한 것도 사실이지만 사냥개로 길들인 놈들보다는 충성심이 떨어졌다. 가르토는 주인이 자기보다 약하면 물어뜯을 놈이었다.
윤태금은 권세혁을 보면서 말했다.
“로카는 성적이 좋습니다. 사냥을 해야 할 개라는 뜻이죠.”
권세혁은 시무룩한 류진의 손을 잡았다.
“아는 사람 얘기 듣자.”
“응.”
그때 기우희가 나섰다.
“가르토는 필요해.”
곧바로 반박하려는 윤태금에게, 기우희는 진정제를 꺼내 보여 주었다. 류진이 준 약이었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장비 중에는 블로우건이 있었고.
“여차하면 쏴 버리지.”
윤태금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기우희와 마강희의 설득에 수긍하고 물러났다. 그도 가르토가 전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권세혁은 자기 파트너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럼 더크를 남길까? 그놈도 덩치 크잖아.”
“더크도 로카와 비슷합니다. 실적이 좋은 개는 사냥에 나서야 합니다.”
마강희의 파트너 개는 틸리였다. 셰퍼드 계열 잡종이었는데, 나이든 개는 미련 없이 식용으로 팔아 버리는 장두현이 여태 남겨 둘 정도로 똑똑했다.
“전력에는 큰 보탬이 안 되겠지만 머리가 좋으니까요. 누군가가 전리품을 훔치러 온다면 바로 눈치챌 겁니다.”
마강희는 틸리의 장점으로 지정된 식사시간이 아니면 먹이를 먹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평소에 먹던 것이라도. 안에 이상한 것을 넣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훈련시킬 수도 있습니까?”
마강희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훈련이라기보다는….”
틸리는 나이가 많았다. 녀석은 자기와 함께 자란 친구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여러 번 보았다. 특식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친근한 사람이 주는 먹이라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마취총 앞에서는 소용없겠지만. 경비견을 아예 안 두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권세혁은 만족했다. 그의 만족이 곧 팀 전체의 만족이었다. 마강희가 물러나자 윤태금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막상 사냥이 시작되면 눈앞에 보이는 걸 쫓게 되겠죠. 그래도 익혀 두면 도움이 될 겁니다.”
류진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힐 스톤 그로우>에 서식하는 동물 명단이었다. 사진과 학명 옆에 난이도와 점수 표기가 있었다. 난이도는 최상, 상, 중, 하, 이렇게 네 단계였고 점수는 1점부터 5점까지 존재했다.
분류 자체는 간단했지만 종류가 많았다. 류진은 입을 벌렸다.
“뭐가 많다….”
한 번 보고 외우기에는 어려웠다. 찬찬히 훑어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당황하는 류진에게 마강희는 근수로 생각하면 편하다고 조언했다.
“근수요?”
“크기.”
어려울 때일수록 상식적으로 생각하라고, 그러면 생각보다 쉽게 답이 보인다고 마강희는 말했다.
덩치가 큰 사냥감일수록 잡기 힘들다. 잡기 어려운 짐승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강희는 그 밖에도 여러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사냥 시간이 밤으로 미뤄진 지금, 그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밤의 숲은 짐승들의 천국이었다. 사람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저도 야간 사냥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핸디는 저쪽도 마찬가지예요.”
권세혁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유경험자와 초심자의 차이가 좁아지니, 이쪽에 유리한 거죠.”
권세혁은 자신의 크루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시작도 전에 겁먹으면 끝장이니까.
외조부는 한 번 기회를 줬다. 사냥을 포기할 기회. 충격받은 류진을 돌본다는 핑계로 귀환할 기회를 줬다.
권세혁은 망설였다. 기회를 준다는 말이 경고처럼 들렸다. 여기서 그만두지 않으면,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외조부가 자기 몰래 류진을 불러내 건드렸던 아까처럼.
하지만 여기서 돌아간다는 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외조부가 원하는 대로. 권세혁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발 물러서면 자신은 앞으로도, 무슨 일을 하려 해도 외조부의 눈치를 보게 될 거란 사실을.
왕과 가신의 줄다리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권세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류진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 떠올랐다.
‘나 꼭 이길 거야.’
그건 이 사냥에서 높은 점수를 따겠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낯선 이름이 들렸다. 강인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기현이! 퍼뜩 인나라!”
조수석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사장의 잔뜩 찌푸린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강인우는 볼 캡을 고쳐 쓰면서 밖으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남의 것 같았다.
“깼나? 짐칸에 씨트 걷어라.”
“예.”
백 미터 전방에 통나무집이 많았다. 그는 어느새 장두현의 사유지 안으로 들어왔다.
태양은 산등성을 넘어간 지 오래됐지만, 이곳은 낮처럼 밝았다. 곳곳에 켜진 조명 때문이다. 강인우는 원형 경기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방수포를 걷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차량이 많았다. 다양한 크기의 탑차와 트럭이 섞여 있었다. 개장수나 싣고 다닐 법한 철창도 보였다. 우리는 비었지만 개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장두현이 여기 온 이유가 사냥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사냥개들을 싣고 왔을 것이다. 저 우리에 가둬서.
가장 큰 통나무집의 문이 열렸다. 청바지에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사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휘젓는 모습이 아이 같았다. 그만큼 반가운 존재라는 뜻이리라.
청바지 차림의 남자는 젊었다. 강인우는 그가 자신과 또래거나, 아니면 더 어릴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신해범보다 어릴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다가온 젊은 남자는 사장을 보자마자 핀잔부터 날렸다.
“하이고, 아재. 한 시간만 더 땡겨 오시지.”
“벌써 건너가셨는가?”
“그라믄 여태 비비고 있겄나.”
“쯧쯔….”
사장은 혀를 찼다. 남자가 은근하게 웃었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께. 담번에는 시간 잘 맞춰 오소.”
강인우는 젊은 남자가 아버지 연배인 사장의 어깨를 서슴없이 두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전형적인 갑의 태도였다. 어쩌면 남자는 자기 밑의 사람이 허탕 치고 실망하는 모습을 즐기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한 줌짜리 권력을 실감하고 싶어 하는 치들이 많았다.
아쉬워하던 사장은 강인우를 소리쳐 불렀다.
“기현이!”
“예!”
“가꼬 온나.”
조수석 의자 밑에 건강 음료 박스. 강인우는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상자를 꺼내면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거절은 하지 않았다.
강인우는 박스를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쳐서 내밀었다. 밝은 조명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모자챙이 그림자를 만들어 줘서 다행이었다. 이목구비에 그림자가 지면 생김새를 알아보기 어려우니까.
사장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담번에는 꼭, 대관 어르신을 좀….”
“나야 스케줄 던지는 게 최선이요. 기회를 잡을라믄 아재가 잘해야지.”
남자가 사장에게 눈을 흘겼다. 강인우는 잠자코 짐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방수포를 다 벗기기도 전에, 사장이 까다롭다고 했던 ‘그짝 사람’은 확인 서류에 서명을 휘갈겼다. 물건은 개수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강인우는 속으로 비웃었다. 까다롭기는 무슨. 사장의 목적은 처음부터 딴 데 있었다. 기껏해야 폐차장에서 부품 파는 사람이 장두현을 만나서 뭘 딜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배 생각이 났다.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털어 봤자 먼지만 나오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데, 멀리서 쾅 소리가 들렸다.
강인우는 고개를 돌렸다. 한 통나무집 문이 벌컥 열리면서 웬 남자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그의 옷차림이 엉망이었다. 코피가 터졌는지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안에서 또 다른 남자가 씩씩대면서 걸어 나왔다. 그는 땅바닥을 뒹구는 남자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박치기를 했다. 뻑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사장이 혀를 찼다.
“쌈 났나?”
젊은 남자가 볼펜을 돌려주며 말했다.
“술 처먹고 지랄이다.”
“말려야 안 쓰겄나.”
“일상이다. 내일이면 다 잊어뿐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장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강인우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일방적인 린치였는데 주변에는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강인우는 같은 소속 동료끼리 저래도 되나 생각하다가,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요번 사냥은 을매나 걸리나?”
“후딱 복귀하지. 뭐.”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우덜끼리 야그지만, 인제 스무 살짜리가 뭘 알겠나. 끽해야 토끼 몇 마리 잡아가 덜렁덜렁 가꼬 오겄제. 무서워가 숲 안짝으로는 들어가지도 몬할 기다.”
“오래 몬 버틴다, 이거제?”
“그라믄. 실전이랑 훈련은 다른 기다.”
“그래두 풍기대에서 훈련 받았으믄, 뭐가 다르긴 하것제….”
남자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훈련은 무신. 에어컨 빵빵 터지는 방에서 잠만 퍼질러 잤다 카더라.”
엿듣던 강인우는 웃고 말았다. 왕자의 무능이 이 먼 곳, 항구 도시까지 위명을 떨쳤다.
“금마는 어떤데?”
“아 누구?”
“고 사내애 말이다.”
사장은 생각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돈만 날렸으니 미련이 남는 게 당연했다.
‘고 사내애’ 라면 정류진이겠지. 강인우는 귀를 기울였다.
“진짜 이쁘나? 을매나 이쁜데?”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듯.
“암튼 노친네, 이쁘다면 계집애든 사내애든 눈 벌게져 가꼬 집구석이 개족보가 되든 말든….”
“와. 뭔 일 있었나?”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하따, 남의 집안일에 관심 많소. 고마 신경 끄소! 주디 함부로 놀렸다가 뭔 꼴을 보라꼬.”
말은 그렇게 해도 입은 근질거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인우의 눈에도 보이는 사실을 능구렁이 같은 사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에헤이, 하며 몸을 뒤로 빼는 남자의 청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운을 띄웠다.
“아 먼데? 이 명문 중의 명문, 평안 장씨 어르신 집안이 무신 개족보?”
남자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입을 열었다.
장두현은 손자가 데려온 장래 며느릿감, 정부인이든 첩이든, 어쨌든 호적으로 따지면 며느리가 될 남자아이에게 손을 댔다. 직접적인 행위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으나 하기 직전까지 갔다. 저항이 격렬해 놓치지 않았으면 분명 강간당했을 거라고, 김동균은 혀를 찼다.
“난리도 아녔다. 아가 을매나 급했으믄 창문 깨구 뛰쳐나오드라.”
“하이고… 진짜가?”
“여서 다 봤다. 다 알고서두 입단속하는 거제. 아재도 어디 가서 이런 야그 허지 마라. 우리 얼굴에 똥칠이다.”
“왕자는 뭐라 카드나.”
“말해 뭐 하노. 난리 났제.”
김동균은 권세혁 왕자가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부터 정수헌에서 일했다. 그래서 왕자의 어린 시절 모습은 사진과 풍문으로만 알았다. 듣던 대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왕자님이긴 했으나, 까다로운 면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핏줄이 핏줄이었다. 열 받으면 한 성격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공룡처럼 돌변해서 날뛸 줄은 몰랐다고, 김동균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철영이 형님이랑 영목이 죽을 뻔했소.”
“어르신하고도 대거리했나?”
“안 했긋나?”
평소의 상냥한 목소리, 화사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왕자는 미친 공룡처럼 날뛰었다. 저것들 다 찢어 죽이고, 뼈를 아흔아홉 조각으로 쪼개 장진 앞바다에 둥둥 뜨게 만들어 주겠다며 악다구니를 써 댔다.
“내 살다 살다 그런 욕은 또 첨 들어 봤다. 요새 아들 무섭대.”
“하이고오….”
“그래도 풍기대 소령이랑 금마가 잘 달래드라.”
“어르신이랑 그래 틀어져도 되는 기가?”
“그거이 요번 사냥에서 판가름 나것제. 그럴라구 같이 온 거 아이가.”
팔짱을 낀 김동균이 으름장 놓듯 말했다.
“아덜은 우리 어르신이 심했다 카는데. 내 보기에는 둘이 똑같다. 둘 다 성깔이 보통 아이다.”
“니는 누가 이겼음 하나?”
“나가 무신 말을 하겠노. 동점 떨어져서 이 짓거리 두 번만 안 하믄 된다. 막말로 이거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 아이가. 엄한 사람덜 다치제, 짐승덜 떼거리로 죽어 나가제.”
“허 참.”
“아재, 이 얘기 딴 데서 하믄 안 된다.”
“안다. 주디에 지퍼 딱 채우께.”
강인우는 인기척을 죽였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했다. 밤 말을 엿듣는 쥐처럼,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물처럼.
이쯤 되면 정류진은 횡액이라고 봐야 했다. 어딜 가든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부자간을 넘어서 조손간까지 망쳐 놓는.
정수헌으로 향하는 길에 사장이 말했다.
“금마 얼굴 함 보고 싶어지네.”
그는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강인우가 자진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사장의 목소리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정수헌 사병이 건네준 맥주를 받아 마셔서 그런지 발음이 부정확하고 말끝이 늘어졌다.
강인우는 국도 최저 제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렸다. 초행길에 밤이었다. 달빛과 가로등, 헤드라이트 불빛이 있었지만 세게 밟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운전자가 불안하다는 건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강인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수석의 사장을 힐끗거렸다. 생각보다 술에 약한 사람이었다. 맥주 한 캔에 얼굴이 벌겠다.
“사장님.”
“뭐어.”
강인우는 속도를 높였다. 술에 취한 사장은 달라진 공기를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안전띠도 하지 않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가락인지 모를 노래였다.
“초면에 죄송합니다.”
“뭐가.”
“전부 다 죄송합니다.”
사장이 허허, 웃었다.
“니 아까 퍼질러 잔 거 땜에 그라제. 개안타. 일하믄서, 것두 첫날에 일 배움서 안 힘든 사람이 어딨노.”
“예.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커브에서 핸들을 꺾었다. 사장이 탑승한 조수석이 가드레일에 정통으로 부딪치면서 순식간에 우그러졌다. 전면 유리창에 금이 쩍 갔다. 트럭 짐칸이 열리고 방수포가 날아갔다. 실려 있던 물건들, 갖은 부품과 고철 덩어리들이 튀어나와 도로에 흩어졌다.
트럭은 가드레일을 받고도 반 바퀴를 더 돌았다. 오래된 고무 타이어가 아스팔트 도로에 갈리면서 터져 버렸다. 고무 타는 냄새와 기름 냄새가 훅 끼쳤다. 강인우는 숨을 참았다. 그래도 참사의 냄새가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강인우는 고개를 들었다. 에어백에 피가 묻어 나왔다. 유리 파편에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오은정의 이마에 맺히던 핏방울과 닮았다. 그는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대답할 때까지 물어볼 기세였다. 강하고 똑똑한,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 딸은.
조수석에도 에어백은 터졌다. 그래서 사장은 죽지 않았다. 강인우는 희미하게 눈을 뜬 채 그으으으, 신음하는 사장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금이 간 전면 유리에 처박았다. 숨통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망설임은 없었다. 죄책감도 없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본능은 이성보다 과감하고 즉각적인 결정을 내렸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지금 같은 때에 믿고 따를 만했다.
인혜가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를 위한 일.”
어두운 밤길, 으슥한 산길, 술에 취한 차주.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강인우는 자신에게 행운의 신의 가호가 따른다고 느꼈다.
그는 죽은 사장의 시신을 운전석으로 옮겼다. 블랙박스 메모리는 빼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행히 장두현의 사냥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강인우는 뛰어서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이마가 찢어지긴 했지만 머리를 다친 건 아니었고, 움직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팔다리는 멀쩡했다. 갈비뼈 하나도 금 간 부위가 없었다. 강인우는 전방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내게는 행운의 신이 따른다.
김동균은 사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그 대가로 장두현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비록 일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요는 중간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심지어 김동균은 사장에게 맥주까지 건넸다. 그가 운전해서 정수헌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초행길인 강인우가 핸들을 잡게 된 데에는 그의 책임도 있었다.
강인우는 김동균이 이 사태를 자기 선에서 수습하려고 할 것임을 알았다. 어떻게든.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로, 장두현은 권세혁에게 산악 바이크를 먼저 고를 권한을 주었다. 전부 점검을 마쳤고 기름도 가득 채워 넣은 놈들이었다. 모든 참가자들이 보는 앞에서 공평하게.
장두현은 친절하게 인심까지 썼다. 지금까지 바이크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지만, 만에 하나 문제가 있다면 셀렉트되지 않은 바이크로 교체도 해 주겠다고. 그러니 부담 없이 마음껏 골라 보라고.
산악 바이크는 사륜구동, 이륜구동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류진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몸체가 늘씬하고 날렵하게 빠진 250CC 오프로드 바이크였다.
첫눈에 반했지만, 권세혁은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무게가 가벼워 돌이 많은 산길에서 튀어 오른다는 이유였다.
“형은 나하고 이거 타.”
권세혁은 이 인용 550CC 사륜구동을 골랐다. 기존의 바퀴를 떼어 내고 한 치수 큰 타이어로 개조한 탓에 생김새는 둔해 보이지만 속도나 안전성 면에서 낫다는 윤태금의 조언을 따랐다.
류진은 권세혁이 고른 바이크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바탕에 실버 장식이 들어가 세련된 외관을 제외하면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난 일인용 바이크가 좋은데….”
“나랑 바이크 타는 게 싫어?”
“그런 건 아니고….”
“왕자님 말대로 하십시오, 도련님. 폼 나는 것도 좋지만 안전이 제일입니다.”
류진은 샐샐 웃는 윤태금을 노려보았다.
안전이 제일이라고 말하던 그는 류진이 탐내던 이륜구동 바이크를 차지했다.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는 류진 앞에서 윤태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꼭 한번 타 보고 싶었거든요.”
마강희는 일인용 사륜구동이었다. 매번 같은 모델을 선택한다고 했다. 기우희는 바이크가 필요 없었고, 진압 차량을 몰기 때문에 후방이었다. 선두에서 돌격하는 게 익숙한 기우희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으나 진압 차량을 움직일 사람이 그뿐이었다.
“나하고 같이 타. 형 혼자서는 불안해서 안 돼.”
“불안하긴. 내가 애냐?”
맞은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 사냥에서 장두현과 함께할 사병들이었다. 권세혁이 있는 만큼 대놓고 재촉하지는 않았으나, 눈초리가 따뜻하지는 않았다. 시간을 끌지 말라는 소리 같았다.
하는 수 없었다. 류진은 권세혁 뒷자리에 앉았다.
마강희는 속도에 익숙해지면 일어나라고 했다. 사냥감이 보인다고 무턱대고 몸부터 내밀었다간 낙상하기 십상이었다.
<힐 스톤 그로우> 초입에 스타트 라인이 있었다. 바닥에 그어진 선이 형광 물질로 빛났다. 마찬가지로 번쩍거리는 봉을 든 두 명의 사병이 장두현의 출발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앞으로 나섰다. 높은 단상도, 목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확성기도 없었지만 위엄이 넘쳐흘렀다.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목소리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몸속에 스피커라도 넣어서 다니나? 배 주머니에 새끼 품은 캥거루처럼?
“보지 마라.”
앞자리에 앉은 권세혁이 말했다. 류진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권세혁은 미끄러움 방지 처리가 된 가죽 장갑을 꼈는데, 바이크 손잡이를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할배 쳐다보지 마라. 내한테만 딱 붙어 있어. 그럼 된다.”
“괜찮아. 안 무서워.”
“형…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라.”
“응?”
“군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하는 기다.”
평소 권세혁의 목소리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말투 때문인가?
“알았어.”
류진은 권세혁의 어깨에 뺨을 댔다. 넓고 단단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방탄조끼 너머로도 느껴지는 체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권세혁은 모른다. 지금 자기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어 간다는 걸.
“실패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실패는 생존 의지를 꺾고 도전 정신을 오염시킨다. 실패하지 마라. 지지 마라. 패배는 치욕, 치욕은 죽음! 장가의 이름으로 투쟁해라!”
장두현의 가치관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신해범이 들으면 두 주먹 흔들면서 좋아할 것 같았다. 인생 사전에 패배라는 단어가 없는 인간이니까. 어쩌면 장두현과 신해범, 둘이 조손간이었다면 쿵짝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시동은 아까부터 걸려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과 바이크가 뿜어내는 연기가 먹구름처럼 밤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기관총을 쏴 대는 것 같은 배기음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류진은 권세혁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꼭 잡아라.”
“응.”
“내한테서 떨어지믄 안 된데이.”
류진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그래. 알았어.”
“사랑한다, 형아야.”
“…응.”
권세혁이 웃었다.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마강희와 윤태금이 엄호했고 진압 차량을 탄 기우희가 따라서 치고 나왔다. 원체 몸집이 큰 데다 360도 회전 포를 여섯 개나 장착한 진압 차량의 위세에 눌려 장두현의 정예 사병들은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기우희는 배기구에서 수증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내부의 수조 탱크에 저장된 물을 엔진의 열기로 달궈서 배기구를 통해 뿜어내는 원리였다. 소리가 크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배출해서 적의 시야를 어지럽힘과 동시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큰 작전 때에는 수조 탱크에 합성 세제나 캡사이신을 섞기도 했다. 그러면 한층 위협적인 살인 수증기가 발생한다.
권세혁이 속도를 높였다. 풍압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류진은 사격용 고글을 내려썼다.
“시작부터 너무…!”
“시작이 반이다!”
권세혁이 소리쳤다.
“평지서 기선 제압을 해야제!”
<힐 스톤 그로우> 초입에는 사냥감이 없었다. 배기음과 쇠붙이 소리를 듣고 숲속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난이도 상위에 랭크된 놈들은 원래도 평지보다는 활엽수가 우거진 숲의 중심에 몰렸다. 식육목 갯과 동물들과 멧돼지, 곰. 늪지대에는 악어와 하마, 물소. 그리고 각종 뱀.
물론 평지라고 텅텅 빈 건 아니었다. 어느 구역에든 서식하는 무리가 있었다. 자고로 경사가 심하지 않고 수풀이 우거진 평지는 초식 동물들의 영역이었다.
무전기와 연결된 이어 마이크에서 마강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시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