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의식 속에서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가까워졌다. 뭘까? 사람 말소리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 같기도 하고, 음악 같기도 했다.
신해범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리고 귀가 먹먹했다. 입을 벌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는 물에 잠겨 있었다.
어렴풋이 비명이 들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왠지 아는 사람 같다고 느낀 순간, 마른 두 팔이 물속으로 들어왔다.
멱살을 붙잡혀 끌어 올려졌다. 신해범은 욕조 가장자리를 붙잡고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쿨럭! 커헉!”
물에 노란 위액이 섞여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이다.
“미쳤어! 정말!”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타일 바닥에 주저앉은 구은하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무슨 소리야.”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신해범은 시선을 내렸다. 축축한 타일 바닥에 레토르트 죽이 엎어졌다. 구은하가 호텔 1층 편의점에서 사 온 죽이었다. 편의점 전자레인지에서 데워 왔는지 모락모락 김까지 났다.
“아, 내 밥.”
“몰라! 긁어 먹어!”
“왜 화를 내? 난 그냥 목욕 중이었는데.”
구은하는 기가 찬다는 듯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군인들 사이에선 옷 입고 목욕하는 게 유행인가 봐?”
“어. 최신 유행 하이 테크놀로지야.”
“기가 막혀….”
“나 자살 시도한 거 아냐.”
신해범은 욕조 밖으로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복 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었다. 그는 셔츠를 벗고, 검은 티셔츠도 벗어 던지고, 샤워기를 들어 더러워진 타일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움직이는 게 좋아. 쉬면 잡생각이 많아져.”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 움직여야 할 때 기절하기 싫으면.”
구은하는 커튼을 젖혔다. 커피포트 옆의 전자시계가 오전 여섯 시를 알렸다. 개인에 따라 새벽으로도, 아침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광성은 벌써 서늘한 바람이 부는데 이곳은 아직도 한여름이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따갑다. 구은하는 비닐봉지에서 인스턴트커피와 도시락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나 먹어.”
신해범은 불평하지 않았다. 커피에는 설탕이 듬뿍 들었고 도시락은 밥과 반찬이 죄 섞여 엉망진창이었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다. 전쟁 중에는 진흙 범벅이 된 파운드케이크라도 씹어 먹어야 한다.
그는 도시락을 뚜껑 덮은 변기 위에 올려놓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일회용 젓가락 껍질을 벗기는데 별안간 등허리를 세게 얻어맞았다.
“으악!”
“개야? 밖에 테이블 가서 먹어!”
“여기나 저기나 좁아터진 건 마찬가진데, 무슨….”
신해범이 꿍얼대면서도 욕실을 벗어나 침대로 갔다.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올렸다.
구은하는 자기 몫으로 사 온 구아바주스에 빨대를 꽂았다. 그 모습을 본 신해범이 말했다.
“토마토주스 사 오지.”
“왜?”
“꼬꼬가 좋아해.”
구은하는 정류진의 별명을 아는 어떤 사람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빨대로 주스를 휘저으며 질문할 뿐이었다.
“왜 그렇게 불러?”
실물은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별다른 이야기도 나눠 본 적 없었다. 구은하는 정류진을 헤어 숍 손님으로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류진이 신예나에게, 심지어 신해범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는. 그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나 보았다.
“닭 닮았잖아.”
“잘생기기만 했던데 뭘.”
과연 그 핏줄. 구은하는 뒤이어 나오려는 말을 주스와 함께 삼켰다.
신해범은 도시락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씹지도 않고 삼켜서 목이 메는 걸 다디단 커피로 뚫어 가며 먹었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구은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그렇게 잔소리하더니….”
“많이 추해?”
“추잡하고 꼴 보기 싫어.”
“말이 심하네.”
구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 안 나? 오빠가 나랑 처음으로 밥 먹으면서 했던 소리야.”
“내가 언제?”
“발뺌할래? 예나 언니한테 다 이른다?”
“…너 구빈원 출신이라고 무시당할까 봐 그랬어. 부모 없고 배경 없는 여자애 뜯어먹으려는 놈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거든.”
“식사 예절 배우면 뭐가 달라져?”
“부잣집 아가씨처럼 보이잖아. 개새끼들은 이거에 좆이 쪼그라들어.”
신해범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왜 나였어? 투자할 만한 애라면 나 말고도….”
“투자가 아니라 후원이었고, 이유는 예나한테 물어봐. 난 애초에 키다리 아저씨 노릇에 관심도 없었어.”
“다 예나 언니 생각이었어?”
“걘 내 돈으로 키다리 아줌마 놀이 하는 게 취미야.”
신해범이 웃으면서 눈썹을 긁었다. 까칠한 피부에 눈 밑이 퍼렜다. 타고난 피부가 희고 얇아서, 푸르스름한 혈관이 비치는 다크서클이 심한 케이스였다. 신해범은 맞은편 거울을 보고 한탄했다.
“토 나오게 생겼군.”
“자기 얼굴에 침 뱉으니까 좋아?”
“우리 꼬꼬가 도망가면 어쩌지? 성격도 좆같은 놈이 얼굴 상태도 개 같은데 누가 좋아해?”
“걔가 오빨 좋아하긴 해?”
“내가 좋아해.”
“…….”
구은하는 다 먹은 구아바주스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편의점 비닐봉지와 함께 가지고 들어왔던 쇼핑백을 신해범에게 던졌다. 내용물을 확인한 신해범이 오, 소리를 냈다.
“어디서 났어?”
“오빠 차에서.”
“아.”
“갈아입어. 얼굴에도 뭐 좀 찍어 바르고. 지금 되게 좀비 같아.”
신해범이 어깨를 떨었다. 흐흐흐 소리를 내며 귀신처럼 웃었다.
“전쟁 중에도 예쁘게 죽어요.”
“과장하지 마. 그냥 사람 하나 찾으러 온 거야.”
“그냥 사람이 아니라서 문제지.”
신해범은 주섬주섬 셔츠를 꿰입었다. 자차 트렁크에 한 벌 두고 다니는 사복이었다. 드라이클리닝을 받은 상태 그대로 넣어 둬서 아직도 스팀 냄새가 났다.
단추를 채우면서 거울을 보는데 뒤에서 구은하가 말했다.
“호텔로 바로 온 거 아니지?”
“음?”
“오빠 정수헌 갔었지?”
침묵은 잠깐이었다. 신해범이 웃으면서 뒤돌았다.
“문전 박대 당했어.”
“풍기대에서 왔는데도?”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신해범은 화내지 않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였다.
집주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 집 안에 낯선 손님을 들여놓는 멍청이 경비병은 없다. 그것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온 자를. 권세혁도 장두현이 자리를 비웠을 때 도착했지만 그는 특별한 케이스였다.
그나마 신해범이 정수헌의 검은 문 앞에서 경비병과 대화라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래처 차량이 한 대 들어오기로 사전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은하의 통가죽 트렁크에서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평범한 헤어 디자이너가 가지고 다닐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신해범은 구은하가 장비 점검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애는 자기가 좋아하는 미용사 일만 하면서 살았으면 했다. 이쪽으로 눈 돌리지 말고.
“왜?”
“별로 안 어색하네.”
“총보다는 칼이 더 좋더라, 난.”
“본업이 가위쟁이라서?”
구은하가 피식 웃었다.
“낮에는 머리카락 자르고, 밤에는 목 따고.”
“화려한 인생이시구만.”
칼자루가 목재로 된 나이프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구은하가 말했다.
“예나 언니가 자기 총까지 줬어.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야? 강인우.”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누구나 그렇지.”
“오빠처럼?”
“내가 그래?”
구은하가 차 키를 던져 주었다. 방을 벗어나기 전, 신해범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연락을 시도해 보았으나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밖에 들을 수 없었다. 어젯밤부터 새벽 내내 마찬가지였다. 기우희와 정류진, 둘 다.
불안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강인우가 도주했던 그날의 전화 통화 이후, 정류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매정한 병아리는 메시지 한 통 보내 주지 않았다. 새삼스레 서운하진 않았다. 그저 세상을 때려 부수고 싶어질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정류진의 모습이 MVP와의 섹스 도중이라니.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눈물 나잖아.
신해범은 휴대폰을 움켜잡았다. 강인우가 장진에 왔다는 보장은 없었다. 유미현의 기우일 가능성도 있었고, 본인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해범은 행운에 기대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행운을 간절하게 바랄 때마다 보란 듯이 배신당했기 때문에.
행운의 신이 너무도 미워한 나머지, 별 하나 달고도 은퇴한 정치인의 사병 나부랭이에게 문전 박대 당하는 남자. 그게 자신이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뭐?
그러면 뭐, 내가 질질 짜면서 매달릴 줄 알았어?
어젯밤에 신해범은 두 가지 사실만 확인하고 물러났다. 장두현과 권세혁을 비롯해 풍기대에서 온 ‘손님’들이 원정 사냥을 떠난 게 맞느냐,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나올 때까지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느냐.
경비병은 신해범의 신분증을 본 뒤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무전으로 자신의 방문을 장두현에게 알려 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했다. 경비병은 정수헌의 주인이 사냥 중에 방해받는 걸 싫어하며, 손님의 방문을 인지해도 사냥을 마치기 전까지는 귀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왕자님 때도 마찬가지였다며.
신해범은 단호하게 말하던 경비병의 목소리를, 표정을 기억했다.
예의를 깍듯이 지키면서도 경계심 가득한 태도였다. 신해범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이곳은 장두현 대관의 앞마당. 권주혁 총통 보좌관 휘하의 풍기 교육대는 신뢰할 수 없다.
권세혁 총통 취임이라는 공공의 목적으로 뭉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권주혁과 장두현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장승희가 둘 사이의 쿠션이긴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그는 없었다.
정수헌에 문전 박대 당하고, 구은하가 숙소로 잡았다는 호텔에 도착했을 때, 신해범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흰자에 실핏줄이 다 터진 상태였다. 눈 밑은 시커멓고. 총을 차고 있었던 사병이 좀비 대가리를 날려 버리지 않은 게 용했다.
신해범이 레인지로버 운전석 손잡이를 잡은 순간, 구은하가 말했다.
“내가 운전할게.”
백미러에 얼굴을 비춰 본 신해범이 물었다.
“아직도 심하냐?”
“피로가 화장으로 다 감춰지면 얼마나 좋겠어.”
신해범은 순순히 운전석에서 물러났다. 조수석에 앉은 그가 정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구 소위라고 부를 거야.”
구은하가 웃었다.
“나 군인 된 거야?”
“웬만하면 말하지 말고,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혼자 있으면 신분증 요구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돼?”
“당당하게 해, 당당하게. 너 연기 잘하잖아.”
“하긴.”
구은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기자님은 건강하신가?”
“지방 근무 중이야.”
신해범은 이 자리에 앉았던 류진을 생각했다. 그의 체온, 향기, 어느 것도 남지 않았지만 떠올릴 수 있었다. 시종일관 귀 따갑게 짹짹대던 병아리. 조류 독감 걸렸어도 좋으니까 안전하게만 있어라.
내비게이션 볼륨을 줄인 구은하가 말했다.
“사냥 내기라고 했잖아. 결과가 어떻게 될 거 같아?”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신해범은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장두현은 약속을 안 지킬 거다.”
“왕실의 증표를 걸었는데?”
“왕실의 증표를 걸었으니까 어떻게든 수를 쓰겠지. 기 소령도 장두현을 믿고 사냥에 따라간 건 아니야.”
구은하가 물었다.
“증표가 뭔데?”
“장두현 막내딸.”
“뭐?”
신해범은 피식 웃고 말을 정정했다.
“전투 잠수함 3호. 이름은 어리연. 장승희 총통 부인이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온 서브마린과 자매함이라더군.”
“와우.”
구은하는 감탄했으나, 신해범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병아리 발목에 다이아몬드 족쇄지.”
“류진이가 안 좋아해?”
“좋아하긴. 버겁고 무섭지. 나도 숨이 턱 막혔는데.”
“하긴….”
비록 딱 한 번 만났지만, 구은하가 본 정류진은 얌전하고 소극적이었다. 빼어난 외모가 민망할 정도로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못 보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유난히 그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뛰어난 미모와 상반되는 소심한 태도 때문만이 아니었다.
구은하는 정류진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신예나를 절박하게 쳐다보던 그 눈빛. 그때 정류진은 신예나를 자기 인생에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았다. 그래서 동질감이 들었다.
다시 만나면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그래서 네가 기억에 남았다고. 너는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네 머리카락을 만져 주던 그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고.
구은하는 애써 긍정적인 표현을 썼다.
“착한 애잖아. 류진이.”
“미안하지만 그렇지도 않아.”
“왜?”
신해범은 차창을 절반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나도 안 착해. 걘 그냥,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건방진 애새끼야.”
강인혜, 정류진. 정류진, 강인혜. 두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렸다가 사라졌다. 신해범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사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류진을 상상하지 못했다. 죽은 동물이 불쌍하다고 질질 짜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정류진은 동물을 좋아했다. 호월루의 백구부터 자기 팔뚝보다 작은 강아지까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웃으면서 ‘머리 쓰다듬어 줘’ 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때는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조그만 머리를 본능적으로 쥐어박은 적은 많았어도, 다정하게 쓰다듬은 건 처음이라 스스로도 당황했다. 심지어 그곳에는 다른 부관들도 있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냉철한 지휘관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창밖으로 보이는 태양이 눈부셨다.
“담배 끊어, 웬만하면.”
구은하는 재빨리 덧붙였다.
“예나 언니도 노력은 하더라.”
“불안해서.”
신해범은 불안했다. 시야에서 류진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아서 초조했다. 특정 사람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난다는 건, 본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행이 시작되기 직전의 전조 현상이었다.
다시 찾아간 정수헌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난밤 신해범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정수헌의 검은 문은 요새라는 별칭이 무색하게도 활짝 열린 채였다.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많은 사람이 우왕좌왕했다. 고함, 드잡이질, 신음이 산재했다. 도떼기시장도 이보다는 차분할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들 틈바구니에서 풍기대의 진압 차량을 발견했다.
신해범은 진압 차량으로 돌진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기우희가 한 사병의 부축을 받으면서 하차하는 중이었다.
기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자기가 행운을 관장하는 신에게 미움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힐 스톤 그로우>에서 권세혁 왕자가 실종됐다.
정류진 이병과 함께였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장두현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해범은 잠자코 섰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노트북을 곁에 있는 사병에게 넘겨준 장두현이 손짓했다. 와서 앉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들쑤시고 댕길 필요 없다. 때 되믄 알아서 기어들어 온다.”
장두현은 그렇게 말했다. 흐트러진 백발을 옥 반지 낀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대관께서는 별로 놀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뭘 놀래긋나. 나가 세혁이 성깔머리 모르는 것도 아이고.”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태도는 침착했다. 목소리도 차분하고.
“이 장진 땅에서 움직여 봤자지. 갸는 내 손바닥 안이다.”
신해범은 그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님을 눈치챘다. 장두현은 정말로 권세혁이 정류진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꾀했다고 믿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두현 본인이 정류진을 위험에 빠뜨렸거나, 혹은 그렇게 할 계획이었거나. 권세혁이 외조부의 꿍꿍이를 알아차렸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래도 왕자님께서 사라지셨으니 심려가 크실 텐데….”
신해범은 말끝을 흐렸다. 성급하게 굴면 안 되었다. 이곳은 장두현의 앞마당이었고 자신은 권세혁과 정류진이 실종된 현장인 <힐 스톤 그로우>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지금은 적의 신뢰를 얻어야 할 터였다. 속이 까맣게 타 버리더라도.
“됐다. 그짝이야말로 광성서 와가 피곤할 긴데. 일이 이래 돼서 우짜노.”
“지금 상황에 제 헛걸음이 문제겠습니까?”
장두현이 손짓하자 그의 사병이 다가와 시가 케이스를 내밀었다. 여러 종류가 하나씩 들어 있었는데, 장두현은 개중 가장 굵은 것을 골랐다.
썩둑썩둑하는 커터 소리가 섬뜩했다. 신해범은 자기 쪽으로 굴러오는 쓰레기를 집어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라믄. 광성으로 바루 가나?”
“실은 근처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기왕 왕자님 뵈러 온 거, 이참에 바닷바람 좀 쐬고 해산물도 먹어 볼까 해서요. 대관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저희 풍기 교육대가 하계 휴가철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신해범은 수색 참여 의사를 표명했다.
“제가 한가하게 밀짚모자 주워 쓰고 백사장 거닐 때가 아니군요.”
“외지인이 나설 일이 아이다.”
“대관.”
“와, 세혁이 복무 일수 몬 채울까 봐? 그거는 걱정할 필요 없다. 휴가 끝나기 전에 잡아다가 보낼 텐께, 광성 사람은 중앙 일에나 신경 쓰라.”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해범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 일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냥 복귀한다면, 제가 장군님과 총통 부인 앞에서 어찌 고개를 들겠습니까?”
장두현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신해범은 멈추지 않았다.
“휴가 중이라고 해도 의무 복무 기간에 발생한 일입니다. 제게도 일련의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장군님과 부인께선 저를 믿고 왕자님을 맡겨 주셨습니다.”
침통해서 미치겠다는 표정과 두려움이 역력한 목소리.
“그분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저는 복귀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신해범은 그렇게 말하면서 장두현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장군님은 분명 제게… 단순한 질책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숙인 신해범의 앞에서 장두현이 한탄했다.
“금마도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을 긴데. 인자 둥글둥글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대관만큼이나 정정하십니다.”
장두현이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그의 손등에 불거진 뼈와 핏줄이 신해범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약탈자의 손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쇠와 피 냄새가 났다.
“함풍 야그 들었다.”
“왕자님께 폐를 끼쳐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금마가 뒷일 생각을 헐 수 있었겠나.”
장두현이 시가 연기를 뿜어냈다.
“영특하다, 당알지다, 암만 그래 봤자 지 또래 사이에서 야그지. 세상 나가믄 그냥 아새끼다. 금마가 생긴 건 내랑 똑같은데, 성격은 지 할매랑 똑 닮았거든. 한번 눈 돌면 득달같이 달려든다 안 카나.”
“…….”
“그거 갖고 뭐라 안 한다. 아가 실수 쫌 할 수도 있제. 문제는 옆에서 부추긴 놈팽이지.”
“…….”
“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노.”
“말을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누가 그래 가르치드나? 권주혁이?”
“타계하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장두현이 웃었다. 손가락 사이에 시가를 끼운 채, 쿡쿡거리며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그래두 말하는 거이가 낫제. 우째 눈빛만으로 저짝이 알아주길 바라나. 그거이 교만이다, 교만.”
“중요한 순간의 침묵은 신뢰를 줍니다.”
신해범은 장두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대관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뭐가.”
“저는 두렵습니다. 왕자께서, 제 부하가, 통화권 이탈 지역에서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이, 장진을 다스리시는 대관께서도 찾아내지 못해 패잔병 신세로 귀환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워 오금이 다 저립니다.”
장두현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패잔병 소리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수색 중이다.”
“정말 왕자님이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믄.”
날카로운 시선이 신해범을 주시했다.
“니 생각은 다른가 보제?”
“납치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으십니까?”
“헛!”
장두현이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내는 이런 일이 처음 아이다.”
무덤덤한 목소리에 뼈가 있었다. 남의 집안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벼락출세로 별 하나 단 서른세 살짜리와 조국의 흥망성쇠를 겪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넘어온 허들의 개수가 다르다고. 헤쳐 온 난관의 깊이가 다르다고. 그러니 남의 사유지에서 벌어진 일에 쓸데없는 참견 말고, 광성으로 냉큼 꺼져라.
신해범은 즉각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물러날 수 없기에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대관, 왕자께서 자의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납치를 확신하는 게 아닙니다. 대관께서 말씀하셨듯이, 왕자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다 한들 숙련된 사병들도 두려워하는 <힐 스톤 그로우>에서 조난이라도 당했다면, 무전으로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럴 리 읎다.”
장두현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둥글납작한 시가 커터를 사병에게 건네주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풍기대 아들이 죄 당돌한 이유가 있었구마.”
동문서답이었다.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말하기 곤란하니까.
신해범은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장두현은 정류진을, 어쩌면 기우희까지 제거할 목적이었다. 원정 사냥에서 사고든 뭐든 위장해서. 빌어먹을, 다 같이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왜 몰랐을까? 기우희가 지나치게 자신했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정류진을 지킬 수 있다고?
어쩌면 그 또한 누군가의 꾐에 빠졌을지 모른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팀원이었던 또 다른 두 사람, 윤태금과 마강희의 이름을 용의선상에 올려 두었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단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변수였다. 장두현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 그건 권세혁이 정류진과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권세혁이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거나, 제3 세력이 개입했거나.
신해범은 눈꺼풀을 깜박였다. 건조해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정류진이 지금 당장 이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면, 그는 안구 두 쪽을 다 빼 줄 수도 있었다.
강인우의 소재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대관,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제 출신 성분이 미천하여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는 와 니 혼자서만 발발 떠는 것 같제?”
죽어도 권세혁의 가출이라고 우길 셈인가 보았다. 신해범은 한숨을 삼켰다. 지금 장두현은 단단히 착각하는 중이었다. 상황이 아직 자기 손안에 있다고 믿었다.
신해범은 그가 물고 있는 시가를 빼앗아 주름진 이마에 어여쁜 도장을 찍어 주고픈 심정이었다. 뜨거운 맛 좀 보고 정신 차리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 둘 다 설계 망했어.
“저는 언제나 가능한 최악의 수를 고려합니다. 그래서 납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색하고 싶습니다.”
신해범은 강인우 대신 최석준의 이름을 거론했다. 권주혁에게 버려져 숙청당한 최석준 세력의 잔당이 함풍 2도 사태의 원흉이라고 할 만한 권세혁 왕자에게 원한을 품었을 거라는 가정은 단순한 추측인 만큼 이해관계가 분명했다. 장두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납치라.”
신해범은 장두현의 손을 응시했다. 시가를 잡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세혁이가 다칠 수도 있다는 말이가?”
“송구스럽지만, 그건 문제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뭐라?”
“왕자께서 국외로 피랍될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신해범은 앉은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짰다. 권세혁 왕자에게, 더 나아가 철혈일성 정권에 원한을 품은 최석준의 잔당이 중국에 근거지를 둔 반정부 단체 <백사자>와 결탁한다. 놈들은 권세혁 왕자를 납치해 중국 본토에 감금할 계획을 모의한다. 원정 사냥에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권세혁은 납치된다. 함께 있었던 정류진도 함께.
“왕자께서 중국에 근거지를 둔 하성록의 수중으로 넘어간다면, 그건 이미 해동문국 국경선 안에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왕자님을 안전하게 국내로 송환하기 위해서는 총통 각하께서 중국 정부와 협상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국제적 손실을 감당해야 할지 모릅니다.”
개판이 된 신룡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권세혁의 국내 송환을 추진하는 친권파와 이 틈에 다른 후계자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모습이 그려졌다. 강력한 라이벌이 사라진 틈을 타 재야에서 상황을 엿보던 개, 소, 닭, 말들이 튀어나와 서로 왕이 되겠다며 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 파란의 후계자 춘추 전국 시대에 총통의 비대해진 심장 혈관이 터져 버리기라도 하면.
지도자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는 나라. 사실상 무정부 국가. 거듭되는 내전과 의미 없는 권력다툼에 지쳐 차라리 강력한 독재자의 출현을 기대하게 될 국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권일혁 향수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독재자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근대화를 가로막은 희대의 독재자가 동북아시아의 나폴레옹으로 기억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권일혁은 마땅히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동북아시아 유일의 천연자원 국가 국민이 굶어 죽고, 아파 죽고, 최소한의 안전장치 없이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다 불구 되고, 남의 나라 노예로 팔려 나가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권일혁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떠받들려 자란 추억을 잊지 못하는.
제왕학과 군주론에 뇌가 찌들어 자신을 신이라고 믿어 버린.
죽어도 왕 노릇 해 먹어야겠다는 머리 나쁜 늙은이의 아집이, 과거 OECD 가입 협상까지 진행했던 나라를 여기까지 끌어내렸다.
“나가 그 꼬라지를 두 눈 뜨고 볼 것 같나.”
신해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댁도 똑같아.
장두현의 얼굴에 권일혁 총통이 겹쳐졌다. 아무런 수고 없이 숨만 쉬어도 떠받들어 주는 환경에서 오만해지고 시야가 좁아져서, 사고가 한 세대 전 정쟁 수준에서 멈췄다. 생각이 낡았는데 아무리 신기술을 도입해 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윤태금이 주인 잘못 골랐다. 건방지긴 해도 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제가 수색 팀에 합류하겠습니다. 그간 왕자님과 함께하며 쌓은 인연이 깊습니다. 왕자께서 무탈하게 돌아오시는 그날까지 성심을 다해….”
“세혁이 그 아만 찾으면 된다.”
그러시겠지. 신해범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납치가 사실이라면 그 과정에서 정류진이 죽었기를, 그가 시체로 발견되기를 바랄 장두현의 속내가 훤히 보여서 신해범은 그의 몸뚱이를 벌집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제 새끼만 중한 이기적인 놈들.
장두현은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너무 시끄럽게 맹글어도 안 된다. 뭔 말인지 알제?”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색에 풍기대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소리였다. 여긴 내 앞마당이니까.
새삼스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단적으로 국외 피랍 가능성까지 제기했음에도, 장두현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색하는 것보다 외부 세력이 장진에 들어오는 것을 더 경계했다.
긴 복도를 구은하와 함께 걸었다. 복도 끝에서 기우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해범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릴 해? 정 이병 찾아서 만회할 테니 처벌은 유도리 있게 넘어가 달라, 이렇게 말해야 자네다운 거 아냐?”
기우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옆에 있던 여자가 비틀거리는 기우희를 부축했다. 신해범은 마강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어보았다. 장두현의 횡포에 질려 정수헌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다 기우희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렇다고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건 아니었다. 마강희는 장두현으로부터 정류진을 제거하라는 밀명을 받았을 후보 2순위였다.
그리고 1순위는 이놈.
“준장님, 저 기억하시죠?”
윤태금이었다. 처음 봤을 때와 인상이 달라졌다. 오만하던 표정이 한풀 꺾였고, 자신감으로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는 훨씬 어른스럽고 차분해졌다.
그래, 애송아, 남의 밑에서 일해 본 경험이 어떠냐? 인생살이 생각보다 쉽지 않지?
“저 류진이랑 친했습니다. 꼭 왕자님 사람이어서가 아니고요, 도련님 소리 어색하다고 잉잉거리는 게 귀여워서. 진짜 동생 같아서 챙겨 주다 보니 어느새 형 동생 하고 있더군요. 참… 어떻게 그 예쁜 친구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지.”
거짓말이라는 건 기우희의 표정만 봐도 알았다.
“준장께서 지혜와 힘을 보태 주신다니 기쁩니다.”
나불대는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신해범은 기우희로부터 윤태금이 오버도스에 시달리는 권세혁에게 프로포폴을 투여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신해범에게는 그것 또한 장두현 설계의 일환으로 보였다. 정류진이 없어졌다고 발버둥 치는 권세혁을 약으로 입 닥치게 하려고.
신해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태금은 그에게 따라붙었다.
“게스트 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3층입니다.”
“대관께서 반기지 않는 객이라 이것저것 요구할 처지가 못 돼. 그냥 우리 정 이병이 지내던 방으로 안내해 주면 좋겠군.”
“그 방이 가장 좋은 손님방인데요.”
“…….”
“알고 말씀하신 겁니까?”
신해범은 부드럽게 웃었다. 속으로는 윤태금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으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깁니다.”
부자연스럽게 큰 목소리로 윤태금이 말했다. 신해범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왕자님, 도련님 두 분이 함께 지내셨습니다. 뭐 주로 도련님이 생활하셨죠. 왕자님은 어릴 때 지내시던 방도 따로 있고. 오래 비워 놨어도 거기가 손님방보다는 훨씬 좋거든요.”
윤태금의 말은 신해범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정류진이 있었다. 이곳에서 지냈다. 잠을 자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기도 했다.
생활감이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호텔처럼 고용인의 손이 닿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전체적인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신해범의 눈에 익숙한 가방, 옷 따위의 물건들이 심장에 화인을 쿵쿵 찍었다.
윤태금은 정확히 안내했다. 정류진은 이곳에 있었다.
침대와 가까운 서랍장 첫 번째 칸을 열었다. 익숙한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청회색의 차가운 보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향수를 꺼냈다. 익숙한 그립감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몰래 따라오면 되잖아.’
네가 옳았다.
내가 틀렸어.
하지만 나는 실패에 익숙하거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일에는 자신 있거든. 나는 널 찾아낼 거다. 찾아내서 잘근잘근 씹어 먹을 거야.
신해범의 등 뒤에서, 향수병을 바라보던 윤태금이 샐쭉 웃었다.
기우희의 부상은 악어 사냥에서 비롯되었다. 장두현이 동남아에서 밀수해 온 크로커다일은 성질이 난폭했다.
놈은 자기 영역인 습지에 들어온 사냥개들을 노렸다. 기척을 감지한 사냥개가 으르렁거렸고, 기우희는 악어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진압 차량 헤드라이트를 켰다. 동시에 수면을 박차고 악어가 뛰어올랐다. 거대한 꼬리를 휘두르며 사정거리 안에 있던 가르토를 덮쳤다.
“가르토?”
“소령님의 파트너 개 이름입니다.”
신해범은 셸터를 둘러보았다. 가로 십 미터, 세로 삼 미터의 샛노란 컨테이너에는 아무런 가구도, 심지어 시계 하나도 없었다. 창문은 굵은 창살로 가로막혔고, 환풍구는 두 개 있었으나 날개에 뽀얗게 앉은 오래된 먼지가 이곳은 휴식 공간이 아니라 사냥물 보관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악어라면 피 냄새를 맡고 왔겠지. 팀에 부상자가 있었나?”
“과연 준장님이십니다! 예. 습지로 들어오기 전에 물소를 사냥했거든요.”
늑대의 피를 이은 투견은 용감했다. 다른 사냥개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흑각 뿔에 총알이 튕겨 나와 사냥꾼들이 당황해도 그들을 제치고 대포처럼 튀어 나가 물소의 등에 올라탔다.
“물소는 잡았지만, 그때 가르토 뒷다리가 부러져서요.”
응급 처치를 위해 기우희가 가지고 있었던 진정제를 투여했다. 녀석을 진압 차량에 태우려고 했지만 이미 잡은 사냥감에 덩치 큰 물소까지 밀어 넣으니 자리가 부족했다. 바이크에 태우기에는 저항이 심했고.
신해범은 다른 이유로 분노했다.
“우리 차에 죽은 동물을 집어넣었다고.”
“방수 비닐은 깔았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기우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갔다. 신해범은 태연하게 말하는 윤태금을 노려봤다. 이걸 죽여, 살려?
“절뚝거리면서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오더군요. 그래서….”
피 냄새를 잔뜩 풍기면서 악어 늪에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나타난 악어가 한 마리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신해범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코끝을 맴도는 지독한 피 냄새, 철 냄새, 화약 냄새에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는데 익숙한 듀퐁 소리가 났다.
윤태금이 라이터를 내밀면서 웃고 있었다.
“불 있습니다.”
신해범은 자기 주머니에서 싸구려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윤태금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무하시네.”
“그래서 물소 사냥꾼은 악어 먹이가 됐나?”
“아뇨.”
늑대의 피를 이어받아 동족들과 싸움에서 단련된 그 개는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잿빛 털이 풍성한 꼬리를 물어뜯기고, 삼 미터 넘게 날아가 나무둥치에 부딪혔다. 뒷다리에 이은 두 번째 부상이었다. 녀석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턱을 바르르 떨며 으르렁댔다.
“그때 딱! 우리 류진이가 활약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 류진이.”
“저희 친했습니다. 소령님이 저를 좀 안 좋게 보셔서 그렇지.”
권세혁이 모는 사륜구동 산악 바이크에 타고 있었던 류진은 윈체스터 라이플을 난사하여 악어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수면에 악어의 내장이 둥둥 떠다니는 꼴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모습이 떠올라, 윤태금은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정말 의외로군.”
“그렇죠? 개고기도 못 먹게 생겼는데.”
류진은 가르토를 셸터로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셸터에는 마강희의 파트너인 경비견 틸리가 있었다.
“경비견?”
“사냥감 도둑 때문에요.”
류진은 권세혁과 함께 갔다. 바이크 한 대만 주면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했지만, 권세혁은 위험하다며 그를 혼자 보내지 않았다.
“어쩌겠습니까.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거기서 팀이 갈라졌다. 류진과 권세혁은 다친 사냥개를 데리고 셸터로 갔다. 기우희를 비롯한 팀원들은 사냥을 감행했다.
“그럴 계획이었습니다만….”
윤태금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소름 끼친다는 듯.
“악어가 한 마리 더 나왔거든요.”
기우희의 뒤에서 물보라가 쳤다. 아까 놈보다는 크기가 작은 새끼 크로커다일이었다. 죽은 놈의 새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압 차량에 올라타려던 기우희는 간발의 차로 몸을 피했지만, 무게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그는 마강희의 총질에 희생당한 악어 위로 수직 낙하했다.
“처음에는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본인이 아무렇지 않아 해서.”
그러나 늪지대를 빠져나온 직후, 진압 차량이 갑작스럽게 정차했다. 이마를 짚은 기우희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윤태금은 깨달았다. 온몸에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건 문제도 아니었다는 걸. 기우희는 팀원들을 당황시키지 않고 악어가 득시글한 늪지대를 빠져나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는 걸.
“…기 소령은 그런 사람이지.”
그때 이미 날이 밝고 있었다. 새벽 네 시 반이 넘은 시점이었다.
“다섯 시 정각에 종료였거든요. 이번 사냥이. 시간이 더 있었어도, 소령님 부상이 부상인지라 더 사냥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결과는?”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중요하지. 엄청나게.”
신해범은 담배를 떨어뜨리고 힘껏 짓밟았다. 쾅! 소리에 윤태금이 입을 다물었다.
“내 부하 하나는 대가리가 깨지고, 한 놈은 실종됐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사냥에서 졌다? 그 정도로 했는데 패배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거긴 숙련된 사병들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웃겨?”
왼팔이 덥석 붙잡혔다. 싸늘한 눈빛에 뺨이 떨렸다.
“자네는 내가 우습나?”
“준장님.”
“농담이야.”
신해범이 활짝 웃었다. 방금 ‘내가 우습냐’고 살벌하게 묻던 사람과는 딴판이었다. 불과 일 초 만에 분위기를 바꿔 버리는 재주가 대단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건데.
윤태금은 모았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여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왕자님과 류진이, 아니 정 이병 소재지가.”
“중간에 딴 데로 빠졌을 가능성은 없나? 다른 짐승한테 쫓기거나 해서.”
윤태금이 태블릿을 켜 내밀었다. <힐 스톤 그로우> 위성 지도와 지적도를 번갈아 가며 보여 주었다.
“늪지대에서 셸터까지 멀지 않습니다. 길도 비교적 원만하고요. 중간에 산짐승과 마주쳤을 수는 있지만, 둘 다 무장 상태였고 탄환도 넉넉했습니다. 사냥을 했으면 했지, 당했을 리는 없습니다.”
바이크에 기름도 넉넉했다. 그랬으니 기우희도 안심하고 보내 준 것이다.
신해범은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아무리 끔벅끔벅해도 뻑뻑함이 가시질 않았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짜내고 싶은데,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의 수분을 죄다 빼앗긴 기분이었다. 정류진을 앗아 간 이 숲에게.
신해범은 컨테이너를 박차고 나왔다. 윤태금이 허겁지겁 따라 나왔다.
“아까부터 질문만 하십니다.”
“자네도 질문 있으면 해.”
“준장님은 류진이, 아니 정 이병과 무슨 관계입니까?”
신해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표정을 바꾸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숨 쉬는 일마저 고단했다.
“그냥 상관과 부관이 아니었지요?”
“보안 담당자가 아니라 소설가야?”
“향수 봤습니다.”
윤태금은 과감하게 신해범의 어깨를 붙잡았다. 돌덩이같이 딱딱했다.
“지금 옛날얘기 꺼내는 거 되게 이상한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준장님 샤넬 향수 쓰시죠? 발뺌할 생각 마십시오. 예전에 뵀을 때 확실히 냄새났습니다.”
“개코를 가졌군. 수색 팀의 자질이 있어.”
“정 이병에게서도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신해범은 그제야 뒤돌아봤다. 웃고 있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했다간 비웃음밖에 못 사. 백화점 문만 열고 들어가도 살 수 있는 공산품을 가지고, 무슨.”
“제가 겨우 향수 하나 겹친다고 이런 소릴 하겠습니까?”
“그럼.”
“준장님 얼굴이요.”
“너무 잘생겨서 질투 나나? 그럼 솔직하게 말해. 다시 태어나라는 조언밖에는 해 줄 게 없지만.”
“이보세요!”
“이보세요?”
바뀐 호칭에 웃음만 나왔다. 신해범은 시답잖은 얘기로 시간을 끄는 윤태금의 턱을 후려치고 싶었다. 내 부하들이 다치고 실종됐으니, 장두현의 부하도 그렇게 돼야 한다. 그게 공평하잖아.
신해범이 주먹을 그러쥐는 순간, 윤태금이 내뱉었다.
“지금 준장님 표정이 류진이 표정이랑 똑같단 말입니다.”
“보안 담당자에, 개코에, 독심술까지. 자네 재주가 참 많군.”
“세상에 어느 지휘관이 말단 병사 물건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전쟁터에서 죽은 전우의 유품도 그보다는 간절하지 않을 겁니다.”
“이봐.”
신해범은 웃으면서 왼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대관 어르신이 시키던가? 나랑 정 이병 엮어 보라고? 그렇게 하면 왕자님이 단념할 거라고?”
“무슨 그런! 어르신과 왕자님은 정정당당하게 겨루기로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윤태금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이 사냥을 정당한 대결로 알고 있었다.
“대관 어르신이 류진이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신 건 맞습니다. 그래도 왕자님을 속이실 분은 아닙니다.”
신해범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윤태금을 응시했다. 보기보다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장두현에게 맹목적이라고 해야 하나.
메카닉 군대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 자기 꿈을 펼치게 해 주는 후원자를 지키고 싶은 건가?
신해범은 윤태금에 대한 생각을 보류하기로 했다. 아직 섣부른 확신은 일렀다.
“류진이, 아니 정 이병, 아… 씨발. 모르겠네.”
“이봐.”
윤태금은 한 손으로 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고 신해범을 쏘아보았다. 그 자리에서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씨발! 씨발! 씨발!”
이건 또 무슨 기행인가. 신해범은 어이가 없었다.
“아! 내가 진짜 이런 일엔 안 끼고 싶었는데! 씨발!”
결정했다. 턱주가리 날린다.
신해범이 주먹을 고쳐 쥐며 한 걸음 내딛는 찰나였다. 어른스러운 척, 똑똑한 척, 침착한 척 하지만 결국은 자존심 센 도련님인 윤태금이 빽, 하고 소리쳤다.
“류진이 걔, 처음 와서 왕자님이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하긴 했는데요, 솔직히 제 눈엔 그렇게 안 보입니다. 이게 저 혼자 생각이면 모르겠는데 다른 형님들도 수상하다고 하고. 아, 진짜 미치고 돌아 버리겠네.”
신해범은 코웃음 쳤다. 겨우 그 정도에 ‘미치고 돌아 버리는’ 윤태금이 우스웠다.
나는 이미 미쳤다. 이미 돌았다. 광성 일을 팽개치고, 함풍에서 발견됐다는 시체 한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피 냄새 진동하는 야생 숲 한가운데서 기계광 애송이와 대거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머리 뚜껑 날아가기 직전이다.
신해범의 손바닥에 땀이 괴었다.
한마디만 더 해라.
한마디만 더 하면….
“류진이 마음 딴 데 있다는 거, 알 사람은 다 안다고요.”
“그 상대가 나다?”
“예!”
신해범은 손이 큰 편이었다. 체격에 비해서도 그랬다. 군 생활에 단련된 손바닥은 넓고 단단했으며,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유난히 길었다. 그 커다란 손이 윤태금의 얼굴을 움켜잡고 있었다.
윤태금은 으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이마가, 콧등이, 광대뼈와 턱이 빠개질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신해범의 손목을 잡아 떼어 내려 했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터미네이터 팔을 갖다 붙였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신해범의 피부를 벗겨 내면 정말로 윤기 나는 강철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나면 정 이병에게 사과하도록.”
신해범이 돌아섰다. 사륜구동 바이크에 걸터앉아 뒷좌석을 팡팡 치며 삼 초 안에 올라타지 않으면 낙오시킨다고 소리쳤다.
바닥에 주저앉은 윤태금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불평했다. 지가 별 하나면 별 하나지, 나는 군인도 아닌데 명령이야…!
“안 와?”
신해범은 정말로 출발했다. 정말로 기다려 주지 않았다. 윤태금은 허둥지둥 일어났다. 더러워진 바지 엉덩이를 털지도 못했다.
“갑니다! 가요!”
저 나이에 총통 부인을 모실 정도면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취소다. 다 취소다. 신해범, 저거 완전 깡패 양아치 새끼야!
“아아악! 출발하지 마요!”
두 팔을 풍차처럼 휘저으며 달려오는 윤태금의 모습이 백 미러에 비쳤다.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크 속도를 높였다.
권세혁과 정류진이 소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전기 두 개가 셸터로부터 이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됐다. 완전히 박살 난 채였다. 부서진 무전기에서 튀어나온 내부 회로가 덜렁거렸다.
신해범이 기대했던 휴대폰은 찾지 못했다. 윤태금이 자신 있게 동원한 드론들도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그는 드론 관제 차량이 있으면 더 넓은 범위를 단시간에, 실시간으로 수색 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했다. <힐 스톤 그로우> 수색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하지만 <힐 스톤 그로우> 외곽, 취명강 인근 철조망이 크게 훼손된 상태가 확인되었다. 강과 인접한 철조망은 감전의 우려가 있어 평소에도 전류가 흐르지 않았다. 해당 구획만이 유일하게 고압 전류가 흐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산짐승들이 그걸 알고 탈출을 시도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신해범은 매끈하게 잘린 단면과 훼손 정도를 보아 이것은 사람의 행동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트럭이나 탑차 한 대가 충분히 빠져나갈 크기였다. 짐승이라면 이렇게까지 큰 구멍을 뚫을 필요도 없었다.
윤태금이 장두현에게 보고한 지 얼마 안 되어 장비를 실은 트럭과 사병들이 도착했다. 급한 대로 바리케이드 작업이 시작되었다. 몇몇 사병들은 짐승이 밖으로 벗어났을 가능성을 고려해 수색에 나섰다. 다행히 철조망 밖에 짐승의 흔적은 없었다.
인근에 사람의 흔적이 보이기는 했으나 전부 정수헌 사병들의 것이었다. 지면에 남은 타이어 자국도 정수헌의 차량으로 판명되었다. 인근에 감시 카메라는 없었다. 윤태금은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을 피했으나, 신해범은 짐작했다.
장두현은 자신의 원정 사냥이 국법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냥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힐 스톤 그로우>에 풀어놓은 짐승들이 문제였다. 이곳에는 도저히 야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밀수로 들여온 게 분명한 짐승이 많았다.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장두현은 <힐 스톤 그로우> 인근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는 대신, 자기 사병들로 하여금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게 했다. 그러나 그 순찰조차도 원정 사냥이 진행되는 도중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력 부족은 부차적인 이유였다. 장두현이 사냥 참가자들을 제외한 사병들을 잔류 인원으로 남기는 이유는 참가자가 경비병을 매수하여 부정 행위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신해범은 실종자들이 이곳으로 빠져나갔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장두현은 여전히 태평했다. 그는 아직도 권세혁의 가출에 더 큰 무게를 두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눈치였다.
신해범이 확신하는바, 장두현은 실종자들을 찾는 일보다 이 일이 정수헌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데 신경 썼다. 신해범은 왜 그가 자신을 순순히 수색 팀에 끼워 줬는지 깨달았다. 사건을 아는 외부인을 광성으로 돌려보내 정보 통제망에 구멍을 뚫는 것보다 옆에 두고 써먹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통상 실종 사건의 크리티컬 아워는 실종 직후 사십팔 시간. 이후에는 영구 실종이나 사망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신해범이 겪었던 대부분의 실종 사건은 처참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기우희는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병원으로 이송됐다. 머리를 다쳐 정밀 검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기가 멀쩡하며 지금 당장 수색 팀에 합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신해범의 눈에는 아니었다.
몸이 따라 주지 않는데 의욕이 앞서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없었다. 신해범 자신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구급차를 바라보며 캔 커피를 들이켰다. 블랙인데 아무 맛도 없었다. 맹물을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항상 저 차가 들어오나?”
“그렇습니다.”
윤태금이 대답했다.
“단골 병원이거든요.”
사전에 얘기가 된 기관이라는 뜻이었다. 가급적 조용하게 치료하기로. 의료 기록을 외부에 흘리지 않기로.
사이렌 꺼진 구급차는 왔을 때처럼 조용하게 부상자들을 싣고 나갔다. 사냥에서 사병들이 다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우희의 보고는 과장된 게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구은하가 물었다. 팔자에도 없는 군인 신분이 되어 존댓말이 어색했다.
“괜찮지, 그럼.”
신해범은 웃으면서 한 손을 휘저었다. 이상하게 더웠다. 무심코 이마를 만지니 손가락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창밖을 보던 윤태금이 말했다.
“좀 이상한데요.”
“뭐가?”
“동균이 형님, 이번 사냥에 참가 안 하셨잖아요? 어디서 저렇게 다쳤답니까?”
“그게 누군데.”
신해범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윤태금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강희를 찾는 모양이었으나 그는 기우희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사병 중에 동균이 형님이라고 있습니다. 인근 폐차장이랑 거래 담당하는데, 이번에 취명강 안 건넌 거로 알거든요. 이상하다? 잔류 인원이 뭣 때문에 저렇게 다쳤대?”
신해범이 창가로 다가갔지만 이미 구급차는 떠난 뒤였다. 윤태금이 콧등을 긁적였다.
“뭐 그냥 싸움박질했나 보죠. 쪽팔려서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하고.”
자주 있는 일이라고 했다. 쉬쉬해도 같은 고용인끼리는 다 알았다. 장두현의 주의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병들은 별것도 아닌 일로 치고받고 싸웠다. 지휘관이 없는 곳에 기질이 불같은 놈들을 붙여 놓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 좋아 잔류 인원이지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어서요. 보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들 마음대로죠. 술 먹고, 그러다가 열 오르면 싸움박질하는 거고.”
“가관이군.”
무심하게 중얼거린 신해범은 테이블 앞으로 돌아갔다. 수색 범위는 취명강과, 강과 이어지는 해안으로 좁혀졌다.
장두현은 배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신해범은 장두현의 천하태평인 태도에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누가 보면 권세혁이 어디 있는지 아는 줄 알겠어.
“동균이 형님이요.”
“아! 뭐!”
버럭 소리쳤다. 신해범의 손안에서 항공 지적도가 구겨졌다. 눈이 뻑뻑하다 못해 쓰라려서 모니터도 들여다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자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예?”
머릿속에 퓨즈 하나가 나가는 기분이었다. 신해범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움찔한 윤태금이 창가에서 몸을 뗐다.
“대장님. 진정하십시오.”
구은하가 말렸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윤태금을 겁줘서 쫓아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신해범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윤태금에게 수색 작업은 장난이었다. 자기 장난감들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연습이었다.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왜냐면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으니까. 윤태금에게는.
그러나 신해범에게는 아니었다.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일이 저놈에겐 장난이라고 생각하면, 신해범은 분노로 뇌수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대장님!”
신해범이 걷어찬 의자가 문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나무 의자 다리가 부러지고, 문짝의 용 그림에 보기 흉한 흠집이 났다.
방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신해범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뒤돌아섰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기물 파손, 리모델링 비용 청구해.”
“어제 폐차장 사장이 죽었답니다.”
“뭐?”
“저희 거래처인 폐차장 사장님 말입니다. 동균이 형님이 어제 만났다는데, 돌아가는 길에 사고 나서 죽었답니다. 평소라면 빅뉴슨데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쪽에는 신경 쓰는 사람이 없네요.”
신해범은 이마에서 손을 뗐다. 윤태금의 눈을 보았다.
“트럭 출입을 허가해 준 놈한테서 들었습니다. 전혀 급한 일이 아닌데 물건 다 싣고 굳이 찾아와서 이상하다 싶었답니다.”
흔들림 없이 차분한 시선이었다. 신해범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병원으로 가지.”
“준장님 보시기에는 왕자님 실종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까?”
“자네는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으니 내게 보고했겠지. 아닌가?”
윤태금은 조금 망설이다 되물었다.
“절 믿으시는 겁니까?”
“내가 자네를 믿을 이유는 딱히 없어. 그런데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난 이곳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그러니 아는 사람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 그건 신뢰와는 다른 문제야.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윤태금의 얼굴이 멍해졌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시간 낭비야.”
손가락 빨면서 배가 준비되길 기다리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윤태금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신해범은 가만히 있다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구은하의 앞에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자네는 여기 있어. 소위.”
신해범은 자신을 따라나서려는 구은하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정수헌에서 새로운 소식이 있다면 곧장 보고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윤태금과 단둘이 나가는 게 그를 신뢰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구은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권세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회색이었다. 입술은 퍼렇고, 덜덜 떠는 두 손은 보랏빛이었다. 류진은 강인우가 던져 준 지혈제를 그의 환부에 쏟아부었다.
권세혁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치명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인우는 지혈제와 진통제 외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형… 혀엉.”
“괜찮아. 약 먹자. 먹으면 안 아파.”
권세혁이 고개를 저었다. 류진은 머리맡에 있던 약 봉투를 끌어당겼다.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났다. 두 발과 목에 채워진 사슬은 아무리 잡고 흔들어도 풀리지 않았다.
“세혁아. 세혁아.”
류진은 권세혁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을 벌리고 희고 길쭉한 알약을 밀어 넣으려고 했다. 시도하는 족족 튕겨 나왔다. 들어가도 삼키지 못하고 물과 함께 토해 내기 일쑤였다.
권세혁은 아팠다. 아주 많이.
허벅지의 총상이 다가 아니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뒤에서 절단기를 휘두르던 강인우를 기억했다. 달을 등지고 선 그는 쇠뭉치를 든 도깨비 같았다.
손목을 걷어차인 것까지는 기억난다. 총을 쏘려고 했었다. 셸터에 라이플을 두고 왔지만, 허리춤의 홀스터에 리볼버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강인우가 더 빨랐다.
류진은 목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위액이 솟구쳤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자기 목에서 났다. 류진은 엎드린 채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날아간 총을 붙잡으려고 애쓰는데 등이 묵직해졌다.
덤프트럭이 상반신을 깔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류진은 제 어깨를 붙잡아 당기는 강인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울지 마.’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끔찍한 고통이 정수리를 직격했다. 빠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어깨가 탈구됐다.
류진은 비명을 질렀지만 목에서는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흙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을 적셨다.
숨도 쉬지 못한 채 헉헉거렸다. 저항하지 못하면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원망스러운 목구멍에서는 절명을 목전에 둔 노인이 내는 바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강인우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권세혁에게 다가갔다. 류진은 히익, 히익, 바람 빠지는 고무풍선 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강인우는 쓰러진 권세혁의 사지를 결박했다. 그의 허벅지에서 흘러넘친 피가 땅을 적셨다.
류진은 강인우가 권세혁을 차에 던져 넣는 모습을 보았다. 장두현이 운용하는 2.5톤짜리 탑차였다. 저걸 왜 강인우가 모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권세혁을 짐짝처럼 다룬 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류진은 무릎을 세웠다. 어떻게든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다. 오른쪽 어깨는 빠졌어도, 아직 왼팔이 건재했다. 시간이 지나면 목소리도 돌아올 것이다. 저 앞에 총이 있었다. 저것만 잡으면. 저것만 있으면 강인우의 이마 한가운데 총구멍을 내는 일쯤은…!
할 수 없었다. 류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땅바닥에서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찾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육 평 남짓한 밀폐된 공간.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인기척 하나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류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풍기대에 있어야 할 강인우가 왜 장진에, 그것도 <힐 스톤 그로우>에 있는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차와 무기는 어떻게 구했는지.
권세혁은 어떡할 셈인지.
진통제와 지혈제를 가져왔을 때, 강인우는 자신의 어깨를 맞춰 주었다. 그것 또한 엄청난 격통이었다. 류진은 혀를 깨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금니를 악물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데 강인우가 불쑥 말했다.
‘죽지 마.’
죽지 말라니. 울지 말라니.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 개새끼가 말이나 못 하면!
류진은 미소 지었다. 웃으면서 눈앞을 스치는 강인우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오른손 검지였다. 그는 손가락 피부가 찢어지는 와중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신의 턱을 잡고 비틀어 억지로 입을 연 뒤, 담담하게 손가락을 빼냈다.
류진은 바닥에 엎어진 채 씩씩거리며, 강인우가 손가락에 거즈를 감는 모습을 올려보았다.
‘씨발 새끼. 개새끼. 이 씹어 죽일 놈아!’
‘대위님이라고 안 불러도 된다.’
‘지옥에나 가!’
강인우의 발이 류진의 머리를 짓밟아 눌렀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고서 차갑고 거친 시멘트 바닥을 견뎠다. 꿉꿉하고 축축하고, 곰팡내가 코를 찔렀지만 울지 않았다. 울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녹슨 철문이 열렸다. 흰 마스크를 쓴 강인우가 나타났다. 새삼스레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취가 견디기 힘들어서라는 사실을 류진은 알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쓰레기장에 우리를 처박아 놓고서, 자기만 편하겠다고.
류진은 강인우를 바라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서 내뱉지 못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언제까지 우릴 가둬 둘 거야? 권세혁의 상처가 썩어서 다리를 절단해야 할 때까지?
류진은 강인우를 바라보았다.
“배고파.”
“…….”
“약도 필요해. 얘 많이 아파.”
강인우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뒤집었다.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기름종이로 감싼 옥수수빵, 200ml짜리 우유 한 팩, 500ml 생수 두 통, 그리고 초콜릿바.
초콜릿바?
간식 고맙다, 개자식아.
류진은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사슬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깨끗한 물이 필요했다.
권세혁의 허벅지를 감싼 천 조각을 떼어 내는데 종이봉투가 류진의 뒤통수를 툭 때리고 떨어졌다.
“…….”
약국 상호가 적혀 있었다. 진한 4도 지역 번호였다. 봉투에서는 새 붕대와 거즈, 약이 나왔다.
류진은 진통제를 꺼내 씹었다. 최대한 잘게 씹어서,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섞었다. 권세혁에게 마시게 했다.
“쿨럭! 쿨럭!”
“먹어… 세혁아. 제발.”
먹어야 해. 살아야 해. 아프지 않을 거야. 괜찮아질 수 있어.
두서없이 내뱉는 류진의 뒤에서 강인우는 일회용 주사기 포장을 뜯었다.
“뭐 하는 짓이야!”
류진이 소리쳤다. 주사기를 든 강인우가 권세혁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바늘이 백열등 불빛에 반사돼 빛이 났다. 무슨 약이 들었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류진은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쓸리는 개 목걸이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발버둥 쳤다.
“하지 마! 하지 마! 걔한테 손대면 죽어!”
강인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으로 웅크린 권세혁의 어깨를 걷어차 똑바로 눕혔다. 류진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아파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저렇게 다루다니.
“개새끼야!”
강인우는 류진에게 시선도 주지 않으며 권세혁의 팔을 잡았다. 유난히 두드러진 녹색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피스톨을 누르자 항생제가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권세혁의 상태가 당장 호전되지는 않았다. 약 기운이 돌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네 차례.”
“뭐?”
그는 발버둥 치는 류진의 머리칼을 잡았다. 화장실로 끌고 갔다. 화장실이라고 해 봤자 시멘트벽에 타일을 대충 발라 비닐 커튼으로 분리한, 협소한 공간이었다. 변기와 수도꼭지, 모퉁이가 깨진 녹색 욕조가 초라했다.
“들어가.”
“싫어.”
거부하자마자 멱살을 붙잡혔다. 류진은 맥없이 질질 끌려갔다. 강인우의 손아귀 힘은 신해범 못지않았다.
“벗어.”
“싫어.”
“벗어.”
“싫다고!”
“그럼 입고 씻어라.”
욕조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류진은 아악,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죽어.”
강인우는 위협적으로 샤워기를 휘둘렀다. 수압이 세서 피부에 바늘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그랬다.
류진은 몸을 말고 웅크렸다. 물줄기에 노출되는 신체 면적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 강인우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 마! 하지… 잇, 하지 마!”
“안 죽어.”
강인우는 그 말만 반복했다. 그 한마디만이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류진은 이게 강인우의 본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기대에서의 강인우 대위는 연기였다. 희디흰 삼각 수건을 건네주며 위로해 주던 그는 가짜였다. 위장된 친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동한 자기가 바보였다.
류진은 저항을 멈췄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강인우는 무릎에 코를 박은 채 덜덜 떠는 류진의 머리에 샴푸를 짰다.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지르자 거품이 뭉클뭉클 일어났다. 류진이 킥킥 웃었다.
“왜 웃냐.”
“왜 죽였어?”
“누구?”
“우리 강아지.”
강인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죽였다. <백사자>의 배신자들부터 생물학적 친부, 아무것도 모르는 폐차장 사장까지.
그동안 자기가 해친 많은 생명 중에서, 정류진은 고작 말 못 하는 강아지들의 죽음에 분노했다. 이렇게 멍청한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떻게 알았어?”
“신해범은 모르는 게 없어.”
“그래?”
“그래. 나는 세상에서 그렇게 쓰레기 같고, 야비하고, 못돼 먹고 대가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을 본 적이 없어.”
“그래도 날 막진 못했어.”
통제자의 흔한 착각이었다. 자기가 이 상황을 잘 안다고 믿는 것.
강인우는 신해범이 무섭지 않았다. 출세에 눈이 멀어서 가장 중요한 걸 내팽개친 놈이었다. 자존심도 신념도 없는 양아치 새끼였다. 신해범은 줄을 잘 서서 강해졌기 때문에, 줄에서 이탈하는 순간 무너진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 것이다.
윗선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모든 행동과 결정에 있어서.
“신해범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놈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어. 강아지들도, 너도, 저기 있는 왕자 놈도.”
“아니야.”
“그놈 너무 믿지 마라. 넌 신해범에 대해서 잘 몰라. 그놈이 어떻게 출세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는지.”
“내가 모른다고?”
류진은 눈을 감은 채 키득거렸다.
“헛소리하네. 난 신해범을 세상에서 제일 잘 알아.”
앙다문 턱이 떨렸다. 신해범에 대해서 잘 모른다니, 세상에 이런 모욕이 또 없었다. 그놈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류진의 중얼거림은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에 묻혔다.
“눈 감아.”
얼굴로 거품이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류진은 물속에서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목에 족쇄로 인한 생채기가 많았다. 상처에 물과 거품이 들어가서 쓰렸다. 강인우는 샤워 중에도 족쇄와 개 목걸이를 풀어 주지 않았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안 죽여.”
“그건 알아.”
최소한이지만 약과 먹을 것을 주었다. 곧 죽여서 시체가 될 놈을 깨끗하게 씻겨 줄 리도 없었다.
강인우는 자상한 납치범처럼 굴었다. 류진은 그가 자신을 설득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득이한 이유가 있어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런 나를 이해해 달라고.
그러나 류진은 강인우를 믿지 않았다. 그를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강인우가 권세혁에게 한 짓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절단기로 권세혁의 뒤통수를 내리쳐 정신을 잃게 만들었을 때, 그는 사람 같지 않았다. 거대한 꼬리로 가르토를 날려 버리던 늪지대의 악어를 닮았다.
류진은 쇠사슬을 끌어 쥐었다. 강인우는 나가서 식료품과 약을 사 왔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가게가,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전화도 있을 터였다.
강인우에게 빼앗긴 소지품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리볼버, 휴대폰, 신해범의 카드. 국립 은행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라고 자랑하던 그 블랙 카드가 강인우이 손에 있었다.
“부탁 좀 해.”
“뭔데.”
“콜라 먹고 싶어. 하나만 사다 줘.”
강인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사 달라고 하는 거 아냐. 내 카드로 사. 사는 김에 세혁이 약이랑, 붕대랑, 물이랑… 당신 물건 사도 괜찮아.”
“네 카드야?”
“왜?”
“뒷장에 서명.”
“…….”
강인우는 피식 웃어 버렸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얄팍한 거짓말을. 굳이 서명 때문만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짜리 애송이가 가지고 있을 만한 카드가 아니었다.
“훔쳤냐?”
“아니야.”
“그럼. 신해범이 줬어?”
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화대?”
“뭐야?”
“보스랑 했던 것처럼. 아냐?”
“아니야!”
“그래.”
강인우의 손이 개 목걸이를 움켜잡았다. 류진은 그의 손길에 끌려 일어섰다. 젖은 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어 몸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뭘 봐, 변태 새꺄.”
“보스와는 왜 그랬지?”
류진은 입꼬리 한쪽을 끌어 올렸다. 신해범이 상대방 열 받게 하듯이.
“나 연상 좋아해.”
“뭐?”
“내가 아버지 사랑을 못 받고 커서. 그게 콤플렉스가 돼서. 아버지 나이대 남자들만 보면 눈이 확 돌아가. 아주 미쳐 버려. 하신성도 한 열 살만 더 많았으면 내가 먼저 꼬셨을걸?”
“…….”
“더 솔직하게 말해 줘? 나 당신이랑도 한번 뜨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왜, 늙은이 취급받아서 기분 더러워? 아니야, 당신이 어릴 때 사고 쳤으면 충분히 나 정도 나이의 애새끼 있고도 남아.”
“그만해라.”
“왜, 찔려? 화나?”
“그만하라고 했다.”
“뭘 그만해! 내 기분은 좆같이 만들어 놓고!”
류진은 강인우를 노려보았다.
“조직에서 내 소문 개 같은 거 알아.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그랬어. 누나 얘기 하고 뒤에서 웃고. 씻는데 들어오고 옷 갈아입는 거 훔쳐보고! 화내면 건방지다고 욕하고. 나 하신성 없는 데서 다구리 좆나 맞았어. 그래도 아무 말 안 했어. 짬 차면 선배 된다고 해서. 클럽에서 일 잘하면 월급 올려 준다고 해서. 꾸역꾸역 다 참고 견뎠어. 근데 그래도 안 됐어. 친구도 안 생기고 돈도 못 모았어. 소문만 계속 생겼어. 내 편은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곽현우를 끌어들였다.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서. 그게 너무 큰 욕심이고, 인생의 과오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류진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웃는데 뺨이 축축했다.
“너무하지 않냐?”
딱 한 명이 필요했다. 친구 한 명. 아무리 견뎌도 생기질 않아서 스스로 만들어 보고자 시도했던 것이, 그 한 명의 친구를 영영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신은 보스 방으로 불려 간 적 없지? 바지 벗고 책상 위로 올라간 적 없지? 그거 빨아 준 적도 없지? 그럴 필요 없었을 거야, 당신은 키도 크고 힘세고 머리도 좋으니까. 그런 짓 안 해도 빚 갚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난 아니었어. 난 정말 아니었어….”
류진은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운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안 믿어도 돼. 괜찮아. 어차피 당신 나 싫어하잖아.”
자진해서 다리 벌린 주제에. 저항하지도 않은 주제에. 싫으면 싫다고 말했으면 됐잖아? 네가 편하게 일하려고, 힘든 일 하기 싫어서 뒷구멍 대 놓고 인제 와서 싫었던 척, 아팠던 척? 핑계 대지 마. 이 더러운 남창 새끼야.
그렇게 말해도 괜찮았다. 상처받지 않는다. 신해범에게 들었던 수많은 저질 농담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웃으면서 되받아쳐 줄 것이다. 여유롭고 폼 나게. 그래, 내가 누나 닮아 예뻐서 섹스하자고 달려드는 놈들 천지다. 뒷구멍 팔아서 출세했다. 하씨 부자도 따먹고, 풍기 교육대장이랑도 떡 치고, 이제는 어리고 잘생긴 왕자 잡아서 크게 한탕 해 볼까 한다. 어때, 부럽지? 당신은 이런 거 못 하지? 이것도 다 능력이야, 능력… 같은 소리 하네. 씨발!
제 분을 못 이겨 발을 굴렀다. 강인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류진은 그가 던져 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지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해범은 김동균과 마주 앉았다. 윤태금이 병원 관계자와 이야기한 끝에 안내받은 개인 상담실이었다.
김동균은 신해범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고개를 숙이고 싶겠지만, 목을 단단하게 고정한 부목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신해범은 한동안 말없이 김동균의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패닉 상태였다.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었다. 대부분 죄책감이나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을 다무는 방법을 택했다.
김동균이 그랬다. 신해범은 검사 대기실에 앉은 김동균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 본능이었다. 저 사람과 대화하면 안 돼. 피해야 해.
김동균은 도망가지 못했다.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았다.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의 마음은 담배 한 개비로도 살 수 있었다. 거기에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그동안 거래처에 뒷돈 받아먹은 건 묻어 주겠다는 약속도 더했다.
“어차피 난 광성 갈 사람 아닌가. 왕자님과 내 부하만 찾으면 돼.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일 한두 개 정도야 비밀로 간직하지. 내가 자네를 친구처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준장님….”
“난 자네 같은 사람 싫어하지 않아.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는 그 방식, 나쁘게 생각 안 한다고. 막말로,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안 그래? 기브 앤 테이크도 능력 되는 사람이 하는 거야. 못 하는 놈들이나 도덕적 잣대 들이밀고 수군대지. 그걸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는지 아나? 질투.”
신해범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공범자의 미소였다.
“다 자기가 못 해서 그러는 거라고.”
윤태금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요, 형님. 여기 준장님 말이 틀린 거 하나 없어요. 뭐, 뇌물? 그런 걸로 치면 나도 시장 조사 다니면서 커피, 음료수 얻어먹은 거 다 토해 내야 해.”
신해범은 속으로 웃었다. 이놈도 어지간히 받아 처먹었구나.
비단 김동균, 윤태금 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장진에서 정수헌의 사병이란 왕의 사절단이나 다름없었다. 대접받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게 당연했다. 다 똑같았다. 누가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장두현이 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김동균은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 갈 지경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저 일 그만둘라 합니다.”
“왜. 무서워서?”
“꼭 그래서는 아이고….”
결국은 무섭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김동균은 신변 보호인지 뭔지를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신해범은 미소 지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자네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만 한다면야.”
미안하지만 거짓말이었다. 풍기 교육대 운영 규정을 A부터 Z까지 뒤져 봐도 신변 보호 관련 내용은 없었다. 전례도 없었다. 그러나 신해범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양심 같은 건 <힐 스톤 그로우> 전기 철조망 밑에 파묻고 왔다.
지금 신해범에게 중요한 건 단서였다. 류진의 행방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런 놈은 얼마든지 장두현의 아가리에 집어 처넣을 수 있었다.
“그라믄…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동균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한숨이 길었다. 그는 항구 도시 억양이 짙은 목소리로 한숨만큼이나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류진은 젖은 옷을 입은 채 말렸다. 강인우가 내준 하얀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는 권세혁의 상처를 싸매는 데 쓰였다. 류진은 그의 손발을 부지런히 주무르며 피가 돌게 하려고 애썼다. 수시로 권세혁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고,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인우가 물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나?”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강인우는 녹색 쿠션이 찢어져 완충재가 튀어나온 철제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쫙 벌리고, 등받이를 가슴팍에 끌어안고서. 그나마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착한 애야.”
강인우가 코웃음 쳤다.
“진짜야.”
“그래 봤자 총통 아들이야.”
“그래도 착한 애야. 그러니까 살릴 거야.”
“네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류진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신해범이 올 거야.”
“숲에선 왜 싸우고 있었어?”
“…내가 말실수했어.”
“무슨 실수?”
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그런 것까지 다 얘기해야 해? 당신은 여기가 어딘지도 말 안 해 주면서!”
“하나씩 정보 교환하자. 사랑싸움 이유 말해 주면, 나도 여기가 어딘지 가르쳐 주지.”
“사랑싸움…!”
류진은 부정하지 못했다.
다친 개가 원인이었다. 류진은 가르토를 치료해 주다가 무의식중에 이 개가 신해범과 닮았다고 말해 버렸다. 권세혁은 이유를 물었다.
‘무서운데 용감해서.’
‘…….’
‘자기 덩치보다 큰 짐승도 이기잖아.’
그때 류진은 권세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친 개를 돌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권세혁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미처 몰랐다.
‘신해범이 신경 쓰여?’
그때 대충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류진은 죽은 듯 잠든 권세혁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가 형의 첫 번째가 아니어도 좋다고, 최우선 순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그래도 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나만 봐 달라고 울부짖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형한테 전부를 걸 수 있는데!’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우릴 어떻게 찾아냈어?”
“바퀴 자국을 따라왔지.”
풍기대 진압 차량은 무한궤도로 움직였다. 사냥에 동원된 이동 수단 중에서 유일했다.
“여기는 어디야?”
“내가 질문할 차롄데.”
“뭐? 무슨!”
“방금 대답했잖아. 바퀴 자국 따라왔다고.”
류진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졌다. 강인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는 목뒤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신해범은 왜 좋아해?”
“안 좋아해.”
“그놈 때문에 싸웠다며.”
“얘가 오해한 거야. 난 신해범 안 좋아해.”
류진은 힘주어 내뱉었다.
“신해범이 날 좋아해서 그래.”
“하하.”
“거짓말 아냐!”
“다들 미쳐 돌아가는구만.”
“난 안 미쳤어.”
강인우는 권세혁을 턱짓했다.
“아니, 너도 미쳤어. 저걸 원망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누나의 원수를 갚으려면 얘를 죽여야 해? 그게 맞아? 다른 방법은 없고?”
“없어.”
강인우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게 복수의 완성이야. 날 괴롭게 한 상대방에게, 나와 똑같은 고통을 안겨 주는 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권세혁을 망치고 싶지 않아.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강인우가 툭 내뱉었다.
“네가 마음이 약해서 그래.”
“그래. 늘 나만 머저리지. 약하고. 자존심도 없고.”
“외로워서 그런 걸 거다.”
강인우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로움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져.”
오은정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외로웠다. 정에 굶주렸고 한없이 고독했다. 혼자가 아니고 싶은데 막상 누군가와 어울리려고 하면 두려움이 앞섰다. 오은정은 그랬던 자신에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정류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당신은 외로웠던 적 없어?”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냐.”
나한테는 딸이 있으니까.
강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류진이 두어 살만 더 많았다면. 혹은 아예 어렸다면. 그를 이토록 딸과 겹쳐 보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넌 조직으로 돌아가야 해.”
“그게 날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 마. 절대 아니니까.”
“…신해범 좋아하는 거 맞네.”
“아니라고!”
“실망이야, 정류진.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 줄 알았는데.”
“신해범 안 좋아해. 그리고 그거랑은 별개의 얘긴데, 자존심이 밥 안 먹여 줘.”
강인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건 또 누가 가르쳐 주던?”
“…신해범.”
“미치겠다, 진짜.”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신해범은 나쁜 놈이지만 잘났다. 용감하고 능력이 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원수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나쁜 놈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나 안 가. 그놈 주둥아리에서 보스 소리 듣고 말 거야.”
“보스.”
“그래. 나도 그런 말 들으면서 살 거야. 누굴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 모셔지는 사람이 될 거라고!”
류진은 주먹을 쥐고 외쳤다. 강인우가 비웃든 말든 상관없었다.
신해범은 자기 마음대로 죽지 못한다. 절대로. 지옥은 호호백발 할배가 됐을 때 가든지 말든지. 류진은 신해범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를 입맛대로 가꾸고, 재단해서 써먹을 것이다. 하인으로, 노예로, 돈 벌어 오는 기계로.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하게 만들 것이다. 자존심을 아주 쾅쾅 짓밟아서 지구 내핵까지 처박아 줄 것이다. 평생 좋아하는 마음에 보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난 신해범한테 착취당하는 게 아니야.”
“가혹한 상황에 길든 사람은 벗어날 방법이 있어도 그러지 못해. 누가 붙잡고 끌어올리려 해도 소용없어. 스스로 주저앉아 버리는 거야. 폭력, 강압, 그런 일들에 익숙해져서.”
“내가 그렇다는 말이야?”
“넌 어리고 멍청해, 정류진. 제대로 교육 못 받은 티가 나.”
“뭐라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너처럼 힘들게 자란 사람들이 전부 너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아.”
류진의 이목구비에 분노가 서렸다. 강인우는 멈추지 않았다.
“신해범에게 착취당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보기엔 아냐. 넌 그냥 그놈에게 길들여진 거야. 그래서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해. 넌 여기 있는 게 아니라 조직으로 돌아가야 해.”
“난 멍청이가 아니야. 뭐가 옳고 뭐가 나쁜지는 혼자서도 구분할 수 있어. 왜냐면, 왜냐면 나한텐 자유 의지가 있으니까.”
자유 의지?
강인우는 어디선가 그 말을 들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읽었나… 아니, 아니다.
인혜가 말해 줬다. 모든 국민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그 애가 해 주었다.
“옳고 그름을 구분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
“여기까지 오느라, 나랑 권세혁을 납치하느라 몇 명을 해쳤어? 그 전에는? 보스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몇 명을 다치게 했어?”
“…….”
“결과를 봐.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당신은 살인자야.”
강인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신경 건드려서 네가 얻는 게 뭐냐?”
“난 받은 만큼 돌려줘. 신해범이 그렇게 가르쳐 줬어. 방금 당신이 내 기분 좆같게 했으니까, 나도 똑같이 해 주는 거야.”
류진은 한 손으로 자기 가슴팍을 쿵, 때렸다.
“날 조직으로 돌려보내고 당신이 얻는 게 뭐야?”
“뭘 얻으려는 게 아니야. 내 것을 지키려고 하는 일이지.”
“그래서 나랑 권세혁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래.”
“나쁜 새끼.”
강인우는 이를 부득 갈았다. 신해범의 가르침을 받들어 모시는 정류진 같은 놈에게 나쁜 놈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자식 목숨이 걸려 있는데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자식 목숨?”
목울대에서 숨이 터졌다. 강인우는 자기 입술을 스테이플러로 찍어 버리고 싶었다.
“무슨 소리야?”
그는 스테이플러를 찾아 철문을 뛰쳐나가는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확실히 지금 자신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각성제 때문일 것이다.
과거 <백사자>의 물류 창고였던 이곳에는 유통되지 못한 채 남은 약들이 있었다. 강인우는 엑스터시를 복용했다. 쌓인 피로를 해소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각성제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잠이 달아나고 시야가 선명해졌으며 정신이 뚜렷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강인우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말했다.
“사랑하는 건 희생한다는 거야.”
정류진의 말간 얼굴에 딸의 이목구비가 겹쳐졌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죄책감이 묵직하게 심장을 가격했다.
그는 손을 휘저어 있지도 않은 날파리를 쫓아내는 척했다.
“희생하는 게 사랑이야?”
“그래.”
“그럼 난 얘한테 사랑받은 거네.”
몸을 숙인 류진이 권세혁의 이마에 키스했다.
“나한테 많은 걸 해 줬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네게 진심이었다는 뜻이겠지.”
류진은 고개를 들고 강인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얘는 보내 줄 수 없어?”
“뭐야?”
“그냥 아무 병원 앞이라도. 병원이 안 되면 경찰서, 아니면 무슨 군부대 앞이라도 괜찮아.”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애원조로 나가지 않으려고.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것 없으니까.
“어차피 권세혁, 지금 제정신도 아니잖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진술하고 싶어도 못 할 거야. 아는 게 없으니까.”
생긴 건 이래 봬도 멍청해. 류진이 말했다.
“얘 제대로 하는 일 하나도 없어. 워낙 곱게 커서. 아는 건 많아서 생각하는 스케일은 있는데, 딱 거기서 끝이야.”
“…….”
“계속 데리고 있으면 당신도 곤란하잖아.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얘가 나랑 똑같은 줄 알아?”
“조용히 해.”
“당신이 이 상황 감당 못 하는 거 알아. 애초에 목표는 나였잖아. 권세혁이 아니라….”
“조용히 하라고!”
벌떡 일어선 강인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든지,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든지.
하지만 정류진의 행동은 달랐다. 그는 권세혁을 보호했다. 깡말라서 나뭇가지 같은 팔로 구부리면 등뼈가 두드러지는 마른 등으로. 자기보다 두 배는 크고 단단한 몸을 덮어서 보호하고 있었다.
김동균이 얘기한 폐차장은 정수헌에서 멀지 않았다. 윤태금도 자세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쪽도 쑥대밭이었다. 사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직원들은 공황 상태였다. 신해범은 그날 사장과 함께 물건을 배달하러 갔다는 직원을 찾았다.
“안 나온다는디.”
그만뒀다는 소리였다. 윤태금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벌써요?”
“그런 아들 천지빼까리제.”
남자는 페인트가 벗겨진 안전모를 홰홰 돌렸다. 그렇게 도망간 놈들 한두 명 본 게 아니라며, 젊고 팔팔한 놈이라고 덮어놓고 좋은 게 아니라고 혀를 찼다.
폐차장은 영업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분주했다. 원래도 규모에 비해 직원 수가 적은 사업장이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다른 업장에도 나가는 겸업 노동자로, 남은 일을 마무리하기보다는 상황이 복잡해지기 전에 주급을 챙긴 뒤 발을 빼려고 야단이었다.
윤태금이 붙잡아 세운 이 남자도 자기 소유의 지게차를 빼러 나온 참이었다. 신해범은 윤태금의 어깨 뒤에서 남자를 관찰했다. 보름쯤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삐죽빼죽 자란 수염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중년 남성이었다. 팔다리는 말랐는데 배만 불뚝 튀어나온 게 약주깨나 즐기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죽은 사장이 평소에도 조심성이 없었다고 말했다.
“조심성이 없었다는 게, 운전 습관 말입니까?”
“그라제. 근디 저분을 나가 어데서 본 거 같은데….”
신해범은 윤태금 앞으로 나섰다.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손바닥은 뜨겁고, 땀에 절어 있었다.
“광성에서 왔습니다.”
남자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 아도 광성서 왔다 카데. 말씨가 딱 우리 쓴생님, 장군님 같았는디.”
선생님? 신해범이 쳐다보자 윤태금은 머쓱해했다. 개인적으로 구하는 부품이 있어 몇 차례 드나들면서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중에 해결하기 어려운 서류 업무를 도와준 적이 있다고 했다.
어쩐지. 깍쟁이 같은 윤태금이 먼지 풀풀 날리고 위험한 장비들이 왔다 갔다 하는 장소에 스스럼없이 들어선 것부터 특이하다 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글씨. 나가 원체 남 일에는 관심이 없어 놔서.”
“성이 강 씨는 아니었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임가라고 했든 거 같은디. 기현인가, 기성인가….”
신해범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다.
임기현은 강인우를 마크하다 살해당한 풍기 교육대원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 폐차장에 취업하기 위해서 신분을 도용했을까. 현장에서는 죽은 대원들의 지갑이 발견되지 않았다.
신해범은 남자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잡았다가 놓았다.
“감사합니다. 충분한 대답이 됐습니다.”
윤태금은 남자의 손에 고액권 지폐가 쥐인 걸 봤지만, 모르는 척했다.
레인지로버 조수석에 타려는데 클랙슨이 울렸다. 윤태금은 입술을 쭉 내밀었으나 순순히 뒷자리로 물러났다.
“누가 옆에 앉는 거 싫어하십니까?”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윤태금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신해범은 누군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때 입을 그렇게 삐죽이는 걸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조수석 등받이를 잡은 윤태금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로 됩니까? 뭐 다른 건 안 물어보셔도 돼요?”
“충분해.”
“임기현인지, 기성인지 아는 사람입니까?”
사고사로 처리되는 대부분의 사망자들이 그렇듯, 죽은 사장 또한 평소에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자되었다. 다만 정수헌에 물건 들어간다고 동종 업계 사람들 무시하던 기질이 다분했다는 다소 안타까운 평가가 뒤따랐다. 남자는 구태여 묻지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지금 중요한 건 사장이 죽은 게 아니라, 이 틈에 장진 최고의 거래처를 확보하려고 다들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그래서 수사하지 않는 걸까요?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도.”
신해범은 대답 대신 팔꿈치를 세워 윤태금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가 우어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엄살은.”
“어깨에 힘 좀 빼십쇼.”
“시끄럽다.”
윤태금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 댔다.
“지역경이랑 누가 친하지.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요. 근데요, 전 죄지은 거 없어도 그런 덴 껄끄럽더라고요. 대접해 준대도 왠지 가기가 싫어. 알고 지내고 싶지도 않고. 아, 혹시 마강희 선배님 아시려나? 한번 물어볼까요?”
“자기가 어디 소속인지 잊었나?”
그가 얻어맞은 이마를 문질렀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습니까.”
신해범은 룸 미러에 비친 자기 눈을 보았다. 핏발 선 게 꼭 도깨비나 귀신같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대관 어르신 사유지야 그렇다 치고, 왜 이 근방에는 CCTV가 없나? 정수헌 내부에 설치된 장비는 상당한 수준이던데.”
윤태금이 파하, 소리를 냈다.
“뭐가 웃겨?”
“장담하는데, 사람 오가는 길에 그런 거 달아 놓으면 이틀 내로 없어집니다. 광성에서도 그렇잖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통제가 돼.”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그런데 여긴 아닙니다.”
윤태금의 목소리는 신랄했다.
“암만 여기가 제2의 광성이니, 경제특구니, 국내 최대 항구 도시니 해도, 두루두루 잘 먹고 잘 사는 도시는 아닙니다. 빈부 격차가 커요.”
그는 지금 자기가 사는 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 얘기지만, 범죄율이 무진장 높아요. 절도는 물론이고 온갖 강력 범죄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게 외지에서 인구 유입은 계속되는데 광성만큼 치안 인력이 많지가 않아서 그래요.”
윤태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신해범은 정수헌을 향해서 달렸다. 장두현이 고향의 발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윤태금의 조언을 얼마나 귀담아듣는지는 관심 없었다. 장두현은 상황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관광 사업으로 먹고사는 입장으로서 가능한 조용하게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이 일은 애초에 ‘혈기 왕성한 젊은 왕자의 치정극’ 수준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정수헌에 도착하니 하늘이 새카맸다. 회보랏빛 구름 사이로 윤곽을 드러낸 달을 보는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다.
신해범은 보닛에 손바닥을 짚고 섰다. 뜨끈뜨끈했다. 그 열기조차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피곤했다.
피로감이 느껴진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치밀었다. 이거밖에 안 돼? 이거밖에 안 되니까 매번 뺏기기만 하는 거야. 너처럼 무식하고 약해 빠진 새끼는 약탈당해도 싸. 응, 신해준 바로 너 같은 새끼 말이야.
“준장님.”
윤태금이 다가왔다. 신해범은 자신을 부축하려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왜.”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죠.”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이러다 사람 잡겠습니다.”
“잡힌 건 내가 아니라 내 부하야.”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신해범은 윤태금을 앞세우고 걸어갔다. 장두현의 서재로 가면서 생각했다. 새로운 시나리오. 인과 관계가 분명하고, 아귀가 들어맞는 시나리오.
반정부 사상을 가진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전직 특수 부대원이 다각도로 애썼으나 결국 활로를 찾아내지 못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권세혁이 표적이 된 이유는 그가 중앙 정부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두현 대관의 장손이기 때문이다.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한때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을 요절내고 도주한 자가 눈에 뵈는 게 있겠는가?
신해범은 왼쪽 귀를 매만지며 걸었다. 앞서가는 윤태금의 어깨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평인 어딘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누군가가 귀에 모래시계를 댄 기분이었다. 모래가 다 떨어지면 모든 게 끝난다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하성록이었다.
“대관 어르신. 저 윤태금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장두현은 검정 바탕에 은색 파도 무늬가 휘황찬란한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뒤돌자 가운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신해범은 입을 열었다.
“왕자께선 자의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닙니다. 납치가 확실합니다. 범인에게 문을 열어 준 내부자가 자백했습니다.”
회보랏빛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쏟아졌다. 가까이서 본 장두현의 얼굴에 주름이 더 늘었다. 눈동자는 죽은 고등어 같았다. 신해범은 장두현이 든 구시대의 유물을 보았다.
장두현은 손자를 그리워하는 중이었다. 괴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비난하지는 않겠다. 나도 그러니까.
“최석준이 패가 맞드나?”
“아닙니다.”
“그라믄.”
“강인우라는 자입니다. 저희 풍기 교육대에 대위로 재직했는데,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정직 처리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장진으로 내려온 것 같습니다.”
장두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해범은 그가 말하기 전에 장두현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고개를 숙였다.
매끈하게 잘 닦인 바닥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윤태금의 얼굴이 비쳤다. 그건 곧 정류진의 말간 얼굴로 바뀌었다. 신해범은 목청껏 소리쳤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관 어르신!”
그는 마구 내뱉었다. 언어 중추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하의 잘못은 지휘관의 잘못이다. 광성에서 벌어진 일을 수습하지 못해 왕자 전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이 대역죄인의 사지를 찢어 죽이기 전에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장가를 상대로 인질극을 꾀한 역적의 모가지를 갖다 바칠 기회를 달라.
말하면서 생각했다. 오늘 대사발 더럽게 안 선다고. 이거 다 정류진 때문이다. 그놈 때문에 초조해서, 피곤해서, 혓바늘이 돋고 눈도 제대로 못 뜨겠다. 현기증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혈관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다.
상사병이 뭔지 알겠다. 정류진을 뼈째 갈아 마셔야만 낫는 병이다.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신해범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머리가 깨지는 고통으로도 잊을 수가 없는 그 말간 얼굴이, 허스키한 목소리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뒤흔들었다.
윤태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김동균이 죽어야 하는지. 신해범을 믿고 이야기를 털어놓은 그가, 용의자 강인우를 체포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제공한 그가, 왜 ‘범인에게 문을 열어 준 내부자’가 되어서 그간 정수헌 사병들이 저지른 비리를 모조리 뒤집어쓰고 처형당하게 되는지.
신해범의 대답은 차갑고 명쾌했다.
“본보기지.”
“그러니까 왜 동균이 형님이…!”
“뭘 충격받았다는 표정이야? 자네도 동의한 거 아니었나?”
담배 연기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윤태금은 태블릿을 부채처럼 휘둘러 연기를 밀어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노란 조명탄 불빛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모터보트는 거칠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야간에 고속 주행은 위험했으나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명탄이 번쩍일 때마다 핏줄 터진 흰자위가 보였다. 눈 깜빡이는 방법도 잊어버렸나.
윤태금은 고글을 내려썼다. 바람과 물보라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몸을 꽉 죄는 구명조끼도 답답하고.
신해범이 끄떡없는 건 그가 훈련받은 프로이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저렇게 되려면 삼 년은 걸릴 것이다. 윤태금은 태블릿이 젖지 않도록 팔뚝으로 화면을 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난 구조용 검은 고무보트가 취명강 곳곳에 흩어져 수색 중이었다. 조명탄이 수시로 쏘아 올려졌다. 피슉, 하는 소리를 내며 검은 밤하늘로 치솟았다가 연기를 뿜으며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윤태금은 수색이 장기전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고용인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김동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죽었지만, 본디 책임이라는 게 꼬리 자르기였다. 김동균은 꼬리에서도 가장자리였기 때문에 죽었다. 사태가 장기화하면 또 다른 ‘책임자’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장두현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그 원인 제공자가 지금 바로 저기 있는 신해범이었다. 보트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고글조차 쓰지 않고, 물보라를 그대로 맞으면서 담배는 또 뻑뻑 피워 대는.
신해범은 장두현의 분노를 자극했다. 그는 강인우를 장진으로 끌어들인 자기 잘못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강인우에게 기회를 제공한 건 김동균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왕자가 납치당한 건 내부 고용인들의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신해범은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공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건 괜히 손자에게 사냥을 제안해서 이 사달을 냈다는 장두현의 개인적인 죄의식을 말끔히 씻어 내기에 충분했다. 더 나아가 고용인들에게 왕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우린 다 죽는다는 위기감을 심어 주었다.
그는 공포로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자신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처세술이었다.
윤태금은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도 오래 머물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김동균의 목이 하늘을 날 때 확신했다.
장두현의 결정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처형 방식이 본보기로써 적합하다고 했다. 장소는 정수헌 본관의 앞마당이었다. 싫든 좋든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두현은 짧은 백발을 아무렇게나 흩뜨린 채 앞으로 나섰다. 제구실을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던 환도를 뽑아 들었다. 윤태금은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등 뒤에는 신해범이 섰다.
곱게 다듬어진 잔디에 흩뿌려진 핏자국….
뱃머리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순간 윤태금의 상체가 기울었다. 넋을 놓고 강물을 바라보던 탓이다. 무게가 머리로 쏠리면서 중심을 잃었다.
“엇.”
윤태금은 맥주병이 아니었고, 구명조끼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을 질끈 감고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태블릿이 새카만 물보라에 맥없이 삼켜졌다.
추락한다. 윤태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악…!”
강한 힘이 그를 보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신해범이었다. 요트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이 검은 하늘을 밝혔다. 빛이 신해범의 머리 위에서 부서져 쏟아졌다.
진심으로 감사가 우러났다.
“감, 감사합니다.”
“조심해야지. 나랑 한배 타려면.”
신해범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라이터 달깍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권세혁은 팔꿈치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관자놀이를 찌르는 두통, 메스꺼움, 무엇보다 하반신의 총상에서 견디기 힘든 통증이 올라왔다. 그나마 식은땀 흘리며 견딜 수 있는 건 류진이 씹어서 먹여 준 진통제 덕분이었다.
맞은편 벽에 기대앉은 강인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명이라고는 싸구려 백열등 전구 하나뿐인 방 안에서, 강인우의 얼굴은 이목구비 그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강인우 대위.”
“그래.”
“그 이름은 진짠가?”
“껄끄러우면 스위퍼라고 불러도 괜찮고.”
“유치해.”
“그래도 내 보스가 붙여 준 이름이다.”
“류진이 형은 뭐라고 불렸어?”
“스나이퍼… 가 될 수도 있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류진은 권세혁의 곁에 있었다. 마른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안은 자세로 잠들었다. 권세혁은 그의 어깨에 손을 대려다가 그만뒀다. 류진이 깨어나서 마주할 잔인한 현실이 싫었다.
“저 앤 조직으로 돌아가야 해.”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데?”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래도 짐작은 할 수 있잖아.”
권세혁은 도전하듯 턱을 쳐들었다.
“말해 봐. 류진이 형한테 무슨 짓을 할 건데?”
“교정 절차를 거치겠지.”
“그게 뭔데?”
강인우가 웃었다. 때려죽이고 싶은 미소였다.
움직일 때마다 소름 끼치는 쇠사슬 소리가 났다. 권세혁은 바닥에 늘어진 줄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을까. 개장수한테서 샀나.
잠든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곁에 있는데도 간절하고,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났다. 이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어쩌면 면역 체계가 갖춰진 걸지도 몰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다친 개를 보면서 신해범을 닮았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참을 수가 없었다. 류진은 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동경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진압 차량 안에서 꿨던 꿈이 생각났다. 신해범과 류진이 섹스하는 꿈. 그건 개꿈이 아니었다.
권세혁은 자신에게 예지몽의 재능이 있는지 몰랐다. 몰랐다면 차라리 좋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다. 권세혁은 그랬다. 류진이 누나 일 때문에 총통의 아들인 자길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해도, 신해범이 좋다고 말해도, 그래도.
사랑이니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권세혁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류진이 형을 교정한다는 게 뭐야. 대답해.”
“알면 우리 왕자님 충격받을 텐데.”
“우습게 보지 마. 난 세상 물정 모르는 애새끼가 아니야. 마냥 좋은 것, 예쁜 것만 보면서 살지 않았어.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고충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웃기지 마.”
강인우가 웃으면서 류진을 가리켰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놈. 저놈 하나만 해도 너보다 더 험한 꼴을 많이 겪었어.”
“대답 피하는 데 류진이 형을 갖다 쓰지 마.”
“너희들 닮았다.”
“뭐야?”
“서로 원망을 안 하잖아. 신기하네.”
“그런 소리 들어 봤자 안 기뻐.”
“우리 왕자께선 상당히 선택적인 사람 같아. 지금 상황에선 나보단 정류진을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한테는 오히려 감사해야지.”
“미친놈이…!”
“쟤가 누군지 내가 알게 해 줬잖아.”
움직이는 순간 허벅지가 아파, 권세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관없다고. 류진이 형이 누구든.”
“맹목적이시군.”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돼.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참 대단한 사랑이야.”
강인우는 비꼬았지만, 권세혁은 꿋꿋하게 말했다.
“넌 이런 마음 모를 거다.”
그는 자고 있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이름이 정류진이 아니어도 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게 가짜여도 돼. 나랑 류진이 형 사이를 그런 걸로 갈라놓을 순 없거든.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지금 내가 멀쩡했으면, 넌 벌써 모가지 비틀려 죽었어.”
식은땀이 권세혁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인우는 그게 눈물 같다고 생각했다.
“나를 류진이 형이랑 같이 보내 줘.”
“뭐?”
“다 버릴게. 이름도 신분도. 다 잊고 살게. 아니 그냥 기억을 지울게. 너희 조직에서 무슨 일을 시키든 군말 없이 따를 테니까, 제발.”
강인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권세혁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지금 저런 말을 하는 건,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수를 쓰는 거였다.
저런 형편없는 연기에 속을까 보냐. 강인우는 피식 웃어 버렸다.
“날 속이고 탈출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지.”
“그런 생각 안 했어.”
“진심으로 해 주는 말이야. 왕자님 다리, 그 상처 깊어. 함부로 움직이다가 신경 망가지면 그대로 절름발이 되는 거야.”
“…….”
“장애인은 총통이 못 되지. 이중 국적자나 혼혈도.”
권세혁의 다갈색 동공에 불꽃이 일렁였다.
“그거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왜? 걱정돼? 총통이 못 될까 봐?”
환청이 들렸다. 외조부의 목소리였다.
‘무혁이. 그 아 성장 부진이다.’
동생이 어리고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기만 못하다는 사실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안심한 부분도 없다고는 못 하겠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과 남의 입에서 조롱조로 듣는 건 달랐다.
권세혁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고함에 류진이 눈을 떴다.
“세혁아.”
후다닥 다가온 류진이 권세혁을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강인우는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미안해. 괜찮아. 미안해.
“…잘들 논다.”
강인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철문을 열고 나가자 계단이 보였다. 낡아서 삐걱거렸으나 손잡이를 잡고 싶지는 않았다. 곰팡이가 피고 녹슬어서 지저분했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곧 차모은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조명탄 세 개가 차례로 터졌다. 소멸하는 별처럼 보였다. 윤태금은 인근에 사람이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무슨 일인가, 잠들지 못하고 궁금해할 테니까.
신해범은 갑판 위를 걸었다. 올해 장두현이 새로 장만했다는 호화 요트는 본래의 용도가 무색하게도 수모를 겪었다. 옥색으로 윤이 나는 갑판 바닥에 지저분한 방수포가 쫙 깔리고, 그 위로 쓰레기가 쏟아졌다.
“이게 전부야?”
“예!”
“잘했어.”
“예?”
조철영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조철영의 명치에 시원하게 주먹을 꽂아 넣은 신해범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누구 모가지가 날아갈까. 대관 어르신 칼날에 아직, 김동균이 피도 안 말랐을 텐데.”
“죄송합니다.”
윤태금은 신해범의 시선을 피하려고 움직였다. 결과물은 형편없었다. 탄창이 빈 총, 가장자리가 박살 난 헬멧, 방호 수건과 장갑, 내용물이 없는 휴대용 응급 상자. 물론 가져가서 깨끗하게 닦아 햇볕에 말리면 재사용할 만한 생존 장비들도 몇 개 있었다. 그러나 신해범이 원하는 건 그따위 허섭스레기가 아니었다.
윤태금은 그가 무엇을 찾는지 알았다. 실종자들의 휴대폰. 윤태금이 마지막으로 본 건 전화가 안 된다고 칭얼대던 정류진이 배터리가 아슬아슬한 휴대폰을 아쉽게 만지작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땐 평범하게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인제 와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윤태금은 신해범에게 맞아 죽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진짜로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건 조철영과 허영목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았다. 그 둘이 정류진에게 한 짓을 신해범에게 일러바친 사람이 윤태금 자신이었다.
고자질한 건 두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신해범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차피 신해범은 알게 됐을 터였다. 류진이 창문을 깨고 나온 모습을 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기우희도 모든 걸 보았다.
기왕 숨길 수 없다면 먼저 선수 쳐서 점수 따는 게 나았다. 이게 머리도 꼬리도 아닌 몸통의 생존 방식이다.
신해범이 목을 한 바퀴 돌렸다. 갑판 난간에 손을 얹고 검은 강물을 들여다보던 그가 불쑥 말했다.
“교통 통제는.”
“통행 제한 조치 내려졌습니다. 지금 문 다 닫혔어요. 선착장에서도 움직이는 배들 다 잡고 수색하고 있답니다. 근데 이게 여의치가 않은 게, 원래부터 야간 조업이 많아서. 공개수사가 아니라 협조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요. 그래도 우리 어르신 입김이 안 닿는 데가 없어서 그런가, 지원은 군말 없이 후딱후딱 기어 나옵니다.”
신해범은 눈을 깜박거렸다. 지역경, 해경, 소방대, 민간 어선 협동조합… 윤태금이 말하는 모든 단어가 생소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낯선 대륙의 언어 같았다.
그 말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정신이 멍해서였다. 신해범은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똑바로 서 있으려고 애썼다.
실종 사건을 비공개 수사로 진행한다는 건 민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민간 제보라는 게 열에 아홉은 허위거나 착각이라지만, 의외로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가 확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강인우는 외지인이니 현지인들의 눈에 띄었을 경우를 생각하면 더 아쉬웠다.
그러나 장두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실종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는 즉시 실종자의 신분이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권세혁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장진 밖으로 흘러나갔을 때, 어떤 폭풍이 장진을 쓸어 버릴지는 신해범도 잘 알았다. 장승희와 권주혁.
신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왼쪽 귀가 지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는데 윤태금이 다가왔다.
“잠깐 안에서 눈 좀 붙이시지요. 대관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난 멀쩡해.”
“진짜 걱정돼서 그럽니다. 이러다 송장 치겠습니다.”
신해범은 윤태금의 손을 뿌리쳤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는데 손가락이 경련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손바닥 위에 강인우를 올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이 야심한 밤에 강바닥 뒤져 쓰레기나 건져 올리면서.
“수문이나 빨리 열어.”
“그게 제 마음대로 된답니까? 대관께서 개방을 해 주셔야지….”
취명강에서 바다로 나가려면 수문이 열려야 했다. 그런데 장두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문 열기를 주저했다. 이유는 윤태금도 몰랐다. 신해범은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김동균 일로 정수헌에서 마음이 떠난 윤태금이, 충성의 증거로 조철영과 허영목을 팔아넘긴 그가 인제 와서 몸 사릴 이유는 없으니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아니었다. 우레와 같은 폭포 소리였다.
“그래도 거의 왔네요. 조금만 더 나가면 바다입니다. 문이야 뭐, 가까워지면 어련히 열어 주시겠죠.”
“이 소리는 뭐야?”
“낙정 폭폽니다.”
윤태금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저, 지금 한가하게 경치 구경할 때가 아니라는 건 아는데요….”
“알아서 다행이군. 난 모르는 줄 알았어.”
“그래도 한번 올라가 보십시오. 사람이 못 쉬면 좋은 거라도 봐야지.”
신해범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윤태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저기로 올라가 보십시오.”
“자네나 실컷 구경해.”
“진짜 멋진데요.”
그래 봤자 정류진을 집어삼킨 숲이었다. 경치고 나발이고, 신해범은 <힐 스톤 그로우> 전체를 깡그리 태워 버리고만 싶었다. 애초에 이만한 부지를 사유지로 끌어안은 장두현이 문제였다. 풀어놓은 짐승들도 하나같이 밀수….
“아.”
“왜 그러십니까?”
장두현이 수문을 열기 주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냥에 여기 수중 생물도 포함되나?”
“아뇨. 취명강에서는 낚시를 할 수 없습니다. 악어도 <힐 스톤 그로우> 습지에만 서식하는 거로 압니다.”
신해범은 턱을 안으로 당겼다. 윤태금의 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은 의혹 단계였다. 물증 없이 덤볐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권세혁이 납치당한 마당에 수문 열기를 꺼리는 이유라면 그것뿐이었다. 장두현은 취명강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측근들도 모르게.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윤태금의 어깨 너머, 신호용 섬광탄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터보트 한 대가 있었다. 마강희가 탄 보트였다. 신해범은 그가 뭔가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류진 이병 것이 맞습니까?”
조심스러운 표정의 마강희가 질문했다.
“어디서 찾았지?”
“한 짝은 바위틈에서, 다른 한 짝은 그보다 몇 미터 떨어진 곡류에서 발견했습니다.”
윤태금은 신해범의 표정을 살폈다.
“풍기대 물건 맞습니까? 준장님?”
“그래.”
윤태금은 실종자들의 신발 사이즈를 알았다. 파티를 위해 정류진의 착장을 도와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류진은 체격보다 손발이 큰 편이었지만, 그래도 권세혁과 같은 사이즈 신발을 신을 정도는 아니었다. 풍기 교육대에서 대원들에게 지급하는 군화인 발목 위로 올라오는 검은색 워커는 디자인은 단순했으나, 쿠션과 안감, 밑창 등 전체적인 마감이 사제 신발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우희는 신발을 분실하지 않았고 권세혁의 발 사이즈와는 한눈에 보기에도 차이가 나니, 이건 분명 정류진 것이었다.
윤태금은 신해범의 표정을 살폈다. 가관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축축하고 지저분한 워커 한 쌍을 두 손으로 든 신해범은 보증 서 줬더니 채무자가 날라 버렸다는 소식을 막 전해 들은 사람 같았다.
“그리고….”
마강희는 웬 철창을 하나 끌어냈다.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걸 건져 냈단다. 척 보기에도 지저분하고, 한쪽 귀퉁이가 어그러진 쓰레기였지만, 중요한 건 철창이 아니라 그 속에 든 내용물이었다.
“으악!”
안을 들여다본 윤태금이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 쳤다.
“이게 뭡니까?!”
신해범은 윤태금의 어깨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
이거였다. 장두현이 수문을 열기 주저한 이유.
이미 죽어서 부패가 진행 중인 물고기였다. 썩어 가는 몸뚱이에서 풍기는 악취가 엄청났다. 하지만 신해범은 과거에 요리하면서 각종 어류를 다뤄 봤고, 직접 다뤄 본 것 이상으로 공부했다. 그는 죽은 물고기의 정체를 알아챘다.
“냄새 지독한데요.”
신해범은 오만상을 찡그린 윤태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좋은 거야.”
“예?”
윤태금은 물론, 마강희까지 의아한 표정으로 신해범을 봤다. 신해범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창 앞에 앉았다.
길이가 일 미터를 넘고, 생김새는 상어를 닮았다. 그는 철창 밖으로 삐져나온 길쭉한 지느러미를 응시했다. 어린 시절 꼭 한번 다뤄 보고 싶었던 고기였다. 세계 3대 진미로 일컬어지는, 캐비어를 품은 철갑상어.
신해범은 장두현이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도 바깥의 소음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두현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글라스에 든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둥근 원목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신해범은 장두현이 따라 주려는 술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니 눈엔 여그가 어때 보이나.”
“사람들 인심 좋고 볼거리 많고,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땅입니다. 대관께서 자랑스러워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지금이야 고유 지명으로 불려도. 나 얼라였을 적엔 그렇지도 않았다.”
장진의 과거 지명은 평안(平安)이었다. 행정 구역 개편을 거치면서 ‘장진’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고 진한 4도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장두현이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장진이라는 지역명은 생소했다. 특색이 옅고 소외된 지역일수록 이름을 알리기 어려운 탓이었다. 실제로 대부분 지역은 도명으로 총칭되었다. 자강 1도, 함풍 2도….
오늘날, 수도 광성을 제외하고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은 귀족의 본관이거나 번화한 경제특구였다. 한마디로 잘사는 도시, 부자 동네였다. 개중에서도 장진은 국내 최대의 항구 도시로서 위명을 떨쳤다.
윤태금은 장진의 문제점으로 극심한 빈부 격차와 역동적인 관광 사업에 의지한다는 점을 꼽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었다. 어쨌거나 장진은 진한을 통틀어 가장 잘 사는 도시였고, 근접한 진한 3도와 지역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전쟁 시대에는 함께 싸워 외세의 침입을 막아 내지 않았습니까?”
“케케묵은 옛날 야그다.”
의용군을 모집하여 진한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해적과 맞서 싸웠던 영광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두현은 아쉬워할 자격이 없었다. 가문의 세를 불리는 데 급급하여 인접 지역으로 돌아가야 할 혜택까지 빼앗은 게 누구던가. 대표적인 건이 해역 다툼이었다. 장두현은 어렸을 때, 진한 3도의 바다거북 양식장을 무력으로 빼앗고 항의하는 어부들의 조합을 해체한 전적을 지녔다.
현역 시절, 장두현은 그 일이 젊은이의 치기에서 비롯된 경솔한 행동이라고,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건 말뿐인 사과였고 악어의 눈물이었다. 장두현은 공식 발표 자리에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로 개인 양식장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을 뿐, 진한 3도 피해 어민들에 합당한 보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계에서 은퇴해 장진으로 돌아온 장두현은 아예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진한 3도 어민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혹은 거대 권력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그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자체 무장을 하고 장진 해역으로 넘어왔다. 바다거북이나 값비싼 어패류도 타깃이 되었지만, 그들이 주로 노리는 건 철갑상어였다. 특히 산란기를 맞아 강으로의 이동이 시작되는 시기를 노렸다.
그들은 레이더에 잡히지 않기 위해 나무배를 주로 이용하면서도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해전 전술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장두현이 강력한 해상 병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동안 그들도 나름의 전략을 구축한 것이다.
철갑상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장두현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곧 산란기다. 놈들이 우리 취명강으로 올라올 때란 말이야.”
취명강 수문 바로 앞에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삼중으로 쳐 놓았다. 알을 낳기 위해 강으로 올라오던 철갑상어들이 그물에 걸려 퍼덕거리면, 그때 수문을 열어 안쪽으로 쓸어 담는 식이었다.
“그 일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이곳 사병들은 아니지요?”
“따로 있제.”
장두현은 자세한 설명을 꺼렸다. 신해범은 상상했다. 해적, 아니면 외국인 용병.
“대관….”
신해범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신음했다.
철갑상어는 장두현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건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는 어종이었다. 신룡관에서는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인가를 내주었다. 물론 장두현은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철갑상어를 잡을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을 무차별 사냥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철갑상어는 사냥 시기와 방법,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마릿수가 정해진 생물이었다. 신룡관에서는 특히 철갑상어를 그물로 잡는 일을 금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개체가 잡히기 때문이었다.
그건 철갑상어 멸종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장두현은 모터 달린 그물을 설치했다. 허용치를 훨씬 웃도는 개체 수를 사냥했지만, 매번 그보다 적은 양을 보고했다. 명백한 범법 행위였다. 총통에게 반기를 드는 짓이었다. 밀수로 동물을 들여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밀수는 그나마 자기 돈으로 하는 짓이라지만, 이건….
비공개 수사를 고집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신해범은 기가 막혔다. 장두현에게는 장진 해역으로 넘어오는 진한 3도 어민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장두현은 빈 술잔을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물 걷는다. 걷을 기다.”
철거 작업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대형 모터가 달린 특수 납 그물을 설치한 탓이었다. 게다가 해적 놈들은 정해진 시간에 그물을 걷는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취명강으로 오는 도중, 신원 불명의 소형 선박과 교전이 벌어졌다고 했다. 빌어먹을 진한 3도 놈들이 틀림없었다.
장두현은 취명강을 수색하며 시간을 끌려고 했다. 그러나 신해범은 범죄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수색에 요령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취명강 수색보다 강인우의 도주로를 쫓는 데 중점을 뒀기에 수색 범위를 빠르게 넓혔다.
침묵하던 신해범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발견한 철갑상어는, 어쩌다가 죽은 겁니까?”
“그걸 나가 우째 알겠노!”
장두현은 도리어 성을 냈다. 그는 지난 산란기 때 포획 도중 귀한 철갑상어를 실수로 죽인 어떤 ‘배라먹을 놈’이 자기 몰래 강바닥에 철창을 집어 던진 게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내놓았다.
“지난 산란기라면 최소한 작년이겠군요.”
“그라제.”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관.”
“뭐라?”
“오늘 발견된 철갑상어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부패 정도를 보면 압니다.”
신해범은 장두현의 목울대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봤다.
“최근 장진은 계속 더운 날씨였지요. 심지어 취명강은 본래부터 수온이 높아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철갑상어는 악취가 진동하긴 했지만, 그게 뭔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새카만 먹물 같은 강을 수색할 때 말입니다.”
“무신 말인지 하나도 모르겄다.”
“전문가가 아닌 저도 죽은 물고기가 무슨 어종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철갑상어의 상태가 양호했습니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
“애초에 캐비어를 목적으로 하는 포획 아닙니까? 고기가 죽든 살았든, 배 가르고 알만 꺼내면 되는데 귀한 철갑상어를 왜 강바닥에 내던진단 말입니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해범은 침묵하는 장두현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오늘 찾아낸 철갑상어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주디 닥치라! 니깟 게 무얼 안다고!”
장두현의 손바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신해범은 눈을 깜박이며 테이블에 놓인 손을 응시했다. 값비싼 화장품과 발전한 현대 의학으로 관리한 얼굴은 몰라도, 손은 나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취명강은 철갑상어 양식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대관.”
“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산란기에 우연히 적정 온도가 맞아떨어질 뿐, 취명강은 본래 수온이 높아 냉수 어종인 철갑상어에게 적합하지 않습니다.”
장두현의 얼굴에 패색이 어렸다. 그는 과거에 자기가 했던 약속을 기억했다. 진한 3도 어민들에 사과하는 의미로 개인 양식장을 운영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살다 보믄 맴이 바뀔 수도 있는 거이다.”
“예, 압니다. 저는 그 부분을 추궁하려는 게 아닙니다.”
“니가 내를 추궁한다꼬?!”
신해범은 목에 핏대가 선 장두현이 뒤로 쓰러지기를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장두현은 너무나 건강했다.
“대관께서 양식장을 운영하시든, 말든 그건 감히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신해범은 두 눈을 부릅떴다.
“주인이 헛고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인의 화가 두려워 충언하지 않는 부관은 총살당해도 마땅합니다!”
“니는 내 부관이 아이다.”
“제가 본 철갑상어는 대관께서 취명강에 풀어놓으신 고기로 사료됩니다. 본격적인 사업에 앞서 양식에 적절한 환경인지 보려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최근 장진은 너무 더웠고, 대관께서 생각하신 것 이상으로 수온이 높아져 철갑상어는 폐사하고 말았습니다.”
장두현의 앙다문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해범은 목소리를 낮추고 이어 말했다.
“저는 대관께서 실수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달래듯이.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는 듯이.
“오늘 찾은 고기는 철창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관께서는 죽은 철갑상어를 미처 다 건져 내지 못하신 게 아닙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하나가 분실된 것이겠지요.”
장두현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 건 착각이 아니었다. 신해범은 자기 추측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디테일한 부분은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두현이 대놓고 풍족한 환경에서 양식장을 운영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점, 신룡관의 인가로 포획하는 철갑상어 개체 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그가 자기 소유인 취명강에 철갑상어 양식장을 만들려고 했다는 예측은 현실적이었다.
윤태금도 취명강에서는 낚시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힐 스톤 그로우>의 짐승들을 가차 없이 사냥하는 것과는 다르게.
“혹시 대관, 왕자님이 오셨을 때 바로 귀환하지 않으신 것도….”
“시끄럽다!”
“예.”
신해범은 즉각 입을 다물었다. 장두현은 말을 씹어뱉었다.
“세혁이 금마 도착한 건 정리 끝난 담이었다. 내는 한창 사냥하느라 바빠가, 그짝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예. 그러셨겠지요.”
장두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뭍에서 온 천한 놈이… 물길에 대해가 뭐를 안다고. 니는 주둥이 단속 안 하믄 크게 다칠 기다!”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신해범은 순종적인 태도로 말했으나, 장두현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양식장은 애초에 구두 약속이었고 실제로 실패했으니 큰 문제가 아니더라도, 신룡관에서 허가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철갑상어를 사냥하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남획 죄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장두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권주혁의 똥 기저귀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저깟 놈이 나를 건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으나 지금 그의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저놈 입을 닥치게 해야 한다.
“대관?”
장두현은 오로지 자기가 내놓을 패를 생각했다. 그러느라 본인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기브 앤 테이크’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원인이 눈앞의 ‘똥 기저귀’에게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장두현의 사유지에서 약 이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에 <연운사>라는 절이 있었다. 작은 기와집 세 채로 이루어진 암자였는데, 과거 전쟁 시대에 지역민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기도 했으나 지금은 쇠퇴했다. 현재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곤 나이 든 주지승과 구빈원 출신 장애아 몇 명뿐이었다.
하지만 주지승의 과거 이력이 범상치 않았다. 그는 과거에 유성식품 간부를 지낸 송혜성이었다. 하성록은 그런 인연으로 인근의 밭을 매입했다. 그는 이백 평짜리 단층 건물을 하나 올린 다음 몰딩 도어, 합판, 목재, 철물, PPL 파이프 등의 간판을 잡다하게 내걸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업체도 입주하지 않았다. 당연히 거래도 없었다. 내부도 텅텅 비어서, 언제 철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사실 하성록은 그럴 목적으로 이곳을 만들었다. 중요한 물건은 언제라도 <연운사>로 옮길 수 있도록.
저장고는 지하에 있었다. 삼 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파서, 깊고 넓게 파서, 부자들이 현금 비밀금고로 쓴다는 강철 컨테이너를 집어넣었다. 육 평으로 그렇게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벽에 시멘트를 두껍게 바르고, 궁색하나마 수도 설비도 갖추었다. 임시 은신처로는 쓸 만했다.
강인우가 이곳을 안 건 비교적 최근이었다. 우승환을 청소할 때였다. 그는 자기를 살려 주면 <화이트 스완>의 폐업으로 유통처가 없어진 엑스터시와 LSD 절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위치와 자세한 유통 경로를 안다며 비상용 키까지 보여 줬다.
그때 우승환에게서 빼앗은 열쇠를 간직한 건, 맹세컨대 조직의 돈을 빼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장차 인혜가 큰일을 할 때 지원금을 대 주기 위해서였다. 혁명에는 돈이 필요하니까.
그곳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 몰랐다.
강인우는 어둠을 응시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자 살 것 같았다.
그는 비닐이 너덜거리는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밖을 내다봤다. 이 앞은 경사면이 높고 잡초가 잔뜩 우거져 험한 비탈길이지만, 세월의 흐름에 깎여 나간 절벽과 달빛에 반짝이는 해안선은 꽤 운치 있었다. 호텔이었다면 나름대로 전망이 괜찮았을 자리였다.
바람이 불었다. 뺨에 달라붙는 느낌이 치근치근한 바닷바람이었다.
잿빛 연기를 내뿜으며 강인우는 보스와 그의 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성록이 옳은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망명 초기, 하성록은 중국 기업에 자국 기술을 팔아넘겨서 정착 기반을 마련했다. 출국 당시에도 비자금을 꽤 갖고 있었다는데 공안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뒷돈을 대느라 탕진한 것 같다. 정작 중요한 <백사자> 활동 자금 대부분은 <화이트 스완>에서 나오는 수익금이었다.
하신성도 썩 괜찮은 인간상은 아니었다. 허우대는 멀쩡하나 애초에 반정부 조직을 이끌 만한 재목이 아니었다는 게 간부들의 솔직한 평가였다. 외모는 근사했지만 충동적인 성격에, 조금 애 같은 면도 있었더랬다. 자기 업적은 부풀려서 말하고 남의 수고는 별반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어릴 때 중국에서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그 보상 심리인가? 하기야 보스도 ‘지금 너희가 이만큼 할 수 있는 건 내가 기반을 마련해 줬기 때문’이라고 은연중에 드러내는 편이었다.
리더의 자질이라면 오히려 차모은 쪽이 돋보였다. 성격은 거칠지만 다재다능했다.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인우는 차모은이 <백사자>의 여성 간부로서 하성록의 신뢰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았다.
중국에서 운반책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다. 바닥부터 올라온 사람은 어지간한 일이면 실패하지 않는다.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서일 것이다. 실패의 공포를 아니까.
하지만 하신성을 차기 보스로 내정했던 하성록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었다.
구형 휴대폰이 깜박거렸다. 드디어 도착했다. 강인우는 하도 오래되어 버튼을 손톱으로 세게 눌러야 겨우 문자가 찍히는 휴대폰으로 답장을 보냈다.
「차를 찾아. 제일 키 큰 솔송나무 아래」
희고 낡은 봉고 차였다. <연운사>에서 달에 한 번 식자재를 구입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 차를 빌리면서, 강인우는 실질적인 차주인 농인 남자아이에게 자기 혼다를 주기로 약속했다.
담배를 창틀에 문질러 껐다. 차모은의 답장에는 뜻밖에도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강인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모은이 가져오는 배가 번쩍번쩍 화려한 크루즈 여객선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어선을 개조한 배달용 밀항선. 겉보기엔 지저분해도 경비정이나 해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무장을 갖췄다. 무슨 일이든 다 하는 배였다. 약도 배달하고, 무기도 배달하고, 사람도 실어 날랐다. 그 배의 뒤꽁무니가 맨눈으로 확인될 정도로 망가진 채였다.
「선외기 수리해야 해」
강인우는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찔리는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장두현의 갑작스러운 행패 앞에서도 표정 관리가 되었다. 신해범은 장두현이 집어 던진 봉투, 흰색의 A5 사이즈 봉투에서 튀어나온 사진들을 내려다보았다.
초점은 장승희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래도 함께 찍힌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신해범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여다보았다. 레스토랑 안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한껏 단장한 장승희를 차까지 에스코트하는 자기 모습이 낯설었다.
이건 신해범이 아니었다. 하물며 신해준도 아니었다. 그냥 가면을 뒤집어쓴 광대였다.
장승희와 함께 있을 때, 신해범은 스스로를 자판기라고 생각했다. 이용자가 투입구에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음료수를 토해 내는 자판기.
이런저런 대가를 받고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해 줬고, 필요한 말을 내뱉었다. 이게 자판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장승희는 친부가 자신에게 미행을 붙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알면서도 불장난을 즐길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발뺌해 보았다.
“오해이십니다, 대관. 저는 부인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장두현은 버석하게 말했다.
“내는 딸내미도 안 믿는다.”
“어째서입니까?”
“갸는 내를 닮았지만, 그래도 흐르는 피 절반은 그 여편네 것이다.”
“부인께서는 대관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분이 아니십니다.”
장두현이 집어 던진 술잔이 신해범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때렸다.
묵직한 통증이 번졌다. 마음속에 굴욕이 휘몰아쳤다. 이 노망 난 늙은이, 딸자식 교육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행패야.
“대관께서 입때껏 정정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뭐라?”
“캐비어는 원기 회복에 좋은 보양식이지요.”
장두현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소음에 놀란 조철영이 뛰어들었다. 윤태금도 따라 들어왔다. 둘 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구에 서 있었다. 장두현이 소리쳤다.
“니들은 꺼지라!”
두 사람이 움찔했다. 신해범은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가로 걸어갔다. 조철영은 장두현을 보았으나 윤태금의 시선은 바닥에 못 박혔다. 사진.
윤태금은 장두현이 던진 봉투에서 튀어나와 문 앞까지 날아간 사진을 보았다.
“…….”
코팅된 종잇조각을 주워 든 신해범이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대관.”
신해범은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왕자님을 보필하기 위해서요. 행여 그분의 앞날에 누가 될까 염려되어 부인의 무리한 요구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하나!”
신해범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풀었다.
“대관께서 저를 이리 오해하고 박해하시니, 이 사람 억장이 무너집니다.”
주먹을 쥐자 사진이 구겨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몸이 아프다는 건 살아 있다는 의미였다. 마음이 아픈 건 노력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전자였다.
신해범은 구겨진 사진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는 기꺼이 입을 다물어 드릴 것입니다, 대관. 하지만 이건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입니다.”
장두현의 시선이 구겨진 사진으로 향했다.
이건 양날의 검이었다. 신해범뿐만 아니라 장승희, 더 나아가 권세혁에게도 평생 부정한 여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을지 몰랐다.
“당장은 제가 모든 걸 뒤집어쓰고 죽겠지만….”
소문은 무서운 거였다.
세상에 바람을 한 번만 피우는 사람은 없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장승희 총통 부인을 봐.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데, 젊은 시절에는 더했겠지. 한창때의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총통으로 만족했겠어? 모계 혈통이 짙어 미남으로 이름 날리는 권세혁 왕자도, 사실은 총통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르지.
장두현의 뺨이 실룩거렸다. 그도 결국은 아버지였다. 자식 일에 한해서만큼은 이성적일 수 없는. 몇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허물을 감추기 위해 마음이 급해지는.
“나가 니를 우예 믿노.”
“믿게 되실 겁니다. 제가 왕자님을 찾을 테니까요. 그 대신에.”
장두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대신에?
신해범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장두현이 집어 던진 술잔을 들어 정중히 그의 앞에 내밀었다.
“장가의 전투 잠수함 한 대, 저희 풍기 교육대에 기부해 주십시오. 두 분 평판에 한 점 누가 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장두현이 계산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밑지는 장사니까 얼른 승낙하라고 소리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불안해 보이니까. 거절당하는 일을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장두현이 술잔을 받았다. 신해범은 활짝 웃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충성을 외쳤다. 할배 생각 잘했어. 철갑상어 일도 입 다물어 줘, 불륜 건도 나 혼자 책임이야. 야, 이거 진짜 남는 장사다.
차모은이 입은 남성용 검정 티셔츠에서는 바다 냄새가 났다. 그는 검은 비닐봉지로 감싼 물건을 강인우에게 던졌다.
“뭐야?”
물컹물컹했다. 열어보니 불그죽죽한 고깃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강인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차모은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생간.”
“너나 먹어라.”
봉지를 되돌려 주었더니 차모은이 투덜댔다.
“비위도 약하네.”
“기생충 걱정 안 돼?”
“요즘 세상에 그런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한 조각 집어 먹는 모습을 보았다.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강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 정도야?”
차모은이 다가왔다. 강인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까 피운 것이 돛대였다.
“여기.”
차모은이 건네준 세븐 스타는 일제였다.
“어디서 온 거야?”
“나 일본에 있었어.”
“언제부터 야쿠자하고 거래했어?”
“공안 담당자가 바뀌었어. 고지식해. 예전보다 이가 잘 안 들어가.”
“…….”
“일본이 환율이 좋잖아. 무식하고. 걔네 물건들 하나같이 스펙이 후지거든. 그러니까 애새끼들이 본드랑 시너에 환장하지. 코카인에 석고 퍼 담아도 모르더라?”
강인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보스랑 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정류진 많이 보고 싶어 했잖아.”
그는 대답 없이 생간만 씹어 삼켰다. 강인우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차모은의 태평한 말투가 거슬렸다.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차모은의 배 없이는 장진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차모은이 데려온 세 명의 남자는 창고로 들어오진 않았으나, 창문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며 강인우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대화하는 중이었다.
“일본어야?”
“응, 뭐.”
“언제부터….”
“그냥 일본 지부라고 해 두자. 해외 진출.”
기가 차는 말이었다. 강인우가 아는 한, 지금 하성록은 내부 재정비에 힘을 들이는 중이었다. 배신자를 처단하고 잔챙이를 솎아 내는 시기에 해외 지부를 만들었다는 건 이상했다. 심지어 홍콩, 대만도 아닌 일본이라니.
하성록은 일본어를 못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하성록뿐만이 아니라 해동문국 국민, 특히 기성세대에서 도드라지는 특징이었다. 대한민국을 형의 나라로 여기는 국민정서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해동문국인은 일본인을 신뢰하지 않았고, 하성록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성록은 자신의 부족한 언어 능력과 그로 인한 관리 소홀을 이유로 꼽았다. 중간 관리자에게 전부 맡기는 건 하성록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차모은이 일본 지부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뜬금없었다. 여태껏 <백사자>의 어떤 간부도 독자적인 사업장을 가지지 못했다. 하성록이 허락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만약 누군가가 독립한다면, 첫 스타트는 백사율이 끊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차모은이. 그것도 하성록이 꺼리던 일본에서?
강인우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힘주어 꾹꾹 밟아 짓이겼다.
“약장사가 아니지?”
“…….”
“대답해 봐. 일본에서 약장사하는 거 아니지?”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뭐?”
차모은이 모자를 벗었다. 턱선에 맞춰 싹둑 자른 단발이 흔들렸다. 그는 생간이 든 비닐봉지를 강인우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난 이거 좋아해.”
“치워라.”
“근데 사람이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1년 365일 먹고 살 수 있겠냐? 아니지. 질리잖아. 세상에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살면서 입맛이 바뀔 수도 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사람이 하나만 먹고는 못 산다, 이 말이야.”
강인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 낮춰.”
“약도 팔고 술도 팔고, 남자애들도 팔아. 허탈한 표정 짓지 마. 생판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난 배운 대로 하는 것뿐이야.”
사람이 발전이 있어야지, 발전이.
그렇게 말하는 차모은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강인우는 차모은을 이해하려고 했다. 자기도 어처구니가 없는 거겠지.
그렇게 좋은 쪽으로 해석하느라 차모은의 목소리, 표정, 눈빛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공주 얼굴 함 보자.”
“정류진을 그렇게 불러?”
“넌 뭐라고 부르는데?”
“…정 이병.”
차모은이 킬킬댔다.
“그 새끼 출세했다?”
강인우는 바닥을 열었다. 성인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계단이 나타났다. 퀴퀴한 냄새가 훅 올라와서 숨통이 막혔다. 하지만 괜찮다. 금방 익숙해진다. 무슨 일이든 간에.
“이병 좋아하네. 밥만 먹여 주면 바지 벗을 새끼가 군인은 무슨 군인. 그것도 현우 인생 좆창 낸 풍기대 새끼들하고. 내가 장담하는데, 그 새끼 신진기한테 다 대 줬어. 우리 불쌍한 왕자님. 앞 구멍 뒷구멍 다 헐어서 너덜너덜한 걸레한테 아주 제대로 낚이셨어.”
“신진기?”
신해범과 진치우, 기우희를 통틀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강인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그렇게는 말하지 마라. 그래도 한때 저격수 후보였는데.”
“눈깔 좋은 거 빼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
강인우의 나직한 목소리가 차모은의 가슴에 꽂혔다.
“왜 그렇게 싫어해? 정류진.”
“…생긴 것부터가 좆같잖아.”
“그런가?”
“그래.”
차모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는 계단을 발로 더듬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이곳에 정류진이 있다. 장담컨대 한 번도 좋아해 본 적 없다. 좋아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 그랬다. 순진한 척하기 좋은 얼굴에, 마르고 볼품없는 몸뚱어리를 보고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화가 솟구쳤다.
생긴 게 덜떨어졌으면 성품이라도 순하든가. 좆도 잘난 거 없는 주제에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길 건드린다고 생각하는지 매사에 날카로웠다. 오죽하면 같은 숙소 쓰는 정보조원들도 혀를 내둘렀다. 선배들을 물로 보고, 조장에게도 대들었다. 그런 주제에 곽현우에게는 찰싹 달라붙어서 꼬리를 흔들었다.
형은 똑똑하잖아.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멍청해서 그런 거 못 하는데….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예쁨받으려고 수 쓰는 건지 헷갈려서 더 싫었다. 질투한다는 말 들을까 봐 어디에다 내색도 못 했다.
참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더 어른이니까, 조직의 간부니까, 둘은 가족 일로 이어진 끈끈한 사이니까….
그렇게 참아 준 결과가 곽현우의 죽음이었다.
‘왜 그렇게 싫어해? 정류진.’
강인우는 모른다. 어느 조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그로서는. 조직에서도 감춰진 존재였던 그는.
스위퍼는 <백사자> 조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그러니 조직원들과의 교류도, 동지애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백사자> 안에서 우리는 끈끈하게 뭉쳐야 하는 존재였다. 조가 달라도, 이해관계가 충돌해도, 어쨌든 공공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손을 잡아야 했다. 사적으로는 싫어해도 공적으로는 동지였다.
하신성과는 그게 가능했다. 정류진과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함은 더해졌다. 그리고 결국 그의 예감이 맞았다. 정류진은 <백사자>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놈 때문에 곽현우가, 하신성이, 그리고….
“여기야?”
“그래.”
잠긴 철문 앞에서 강인우를 돌아보며 웃는 차모은의 얼굴은 참담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문이나 따.”
차모은의 발이 철문을 걷어찼다. 안으로 성큼, 들어선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눈앞에 펼쳐진 건 권세혁과 정류진이 뒤엉킨 모습이었다.
“이 걸레 새끼가, 진짜….”
차모은이 소리 질렀다.
“야 이 수캐들아. 포르노 찍냐?!”
류진은 권세혁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두 팔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권세혁이 살았다는 사실에 안심했지만 그의 다갈색 눈동자를 마주 볼 결심이 서지 않아서, 류진은 도저히 권세혁을 놔줄 수가 없었다.
“형… 답답해.”
권세혁이 그렇게 말할 때까지.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권세혁이 고개를 숙였다. 류진의 시선도 덩달아 내려갔다. 권세혁의 손등에는 긁힌 상처가 선명했다. 그 상처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는 이제… 형이….”
“내가 누군지 안다고?”
“그래.”
류진은 기다렸다. 분노가 날아오기를.
날것 그대로의 원망과 증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쇠사슬에 묶여서 주먹질은 여의치 않겠지만, 상대를 상처 입히는 방법은 육체적인 폭행만이 아니었다. 가끔은 말이 주먹보다 더 아팠다.
“세혁아….”
“사과하지 마.”
류진은 깨달았다. 권세혁의 마음에 구멍이 뚫렸다는 걸. 그의 마음이 갈가리 찢어져 버렸다는 걸.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기라는 걸.
“나도 형한테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으니까.”
권세혁의 목소리는 잔뜩 쉬고 갈라져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형이 누구든 똑같아. 내 마음 안 변해. 우리 지금은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것만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류진은 고개를 저었다.
“세혁아, 아니야. 그게 다가 아니….”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세혁아.”
“…….”
“얼굴 좀 들어 봐.”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세혁아… 얼굴 좀 보여 줘. 응? 나 봐 봐.”
권세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지금 그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류진은 몰랐다.
솔직해서 단순했고, 단순해서 파악하기 쉬웠던 권세혁은 이제 없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알고서 시작한 일이었다. 인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후회할 자격도 없었다. 권세혁이 자긴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듯이.
류진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나는 <백사자>에서 일했어.”
“그래.”
“너한테 일부러 접근했고… 너를….”
류진은 입술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얼굴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너를….”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권세혁의 손이 다가와 뺨을 더듬었다. 그제야 류진은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런 말 안 해도 된다.”
“세혁아.”
“말 안 해도 된다. 진짜다.”
권세혁은 바닥만 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두 눈을 류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꼴사납게 흐느끼며 사랑을 구걸하는 자기가 너무 못나 보였다.
“형이 류연비 동생인 줄 모르고 만난 것도 아이고….”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비참했다.
“사실 내는, 형이 신해범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냥 느낌이. 근데 인정하기 싫었다. 나가 그런 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권세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형아야… 내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는 정류진 포기 몬 한다.”
뜨거운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내는 진짜로… 정류진 포기 몬 하겠다….”
차라리 화를 낼 수 있다면 좋겠다. 남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친 상대는 용서할 수 없다고,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류진의 목을 졸라 버릴 수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월루에서의 첫 만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 2막이 열리던 그때가, 류진에게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최후의 방법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라.”
“정말 미안해. 세혁아.”
“사과하지 마라! 형 잘못한 거 읎다! 그냥, 그냥…!”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류진과 함께했던 시간이.
그가 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자신에게 안겼을 때, 그때 류진의 심장은 너무 세게 뛰었다. 갓 태어난 새처럼 팔딱팔딱 힘차게 뛰었다.
처음으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자신에게 해 준 모든 말이, 보여 준 표정이, 웃음이 전부 꾸며진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시위 현장에서 중학생 소년을 구출해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던 일.
자강 1도에서 ‘총통이 되고 싶으냐’고 매몰차게 쏘아붙이던 모습.
아내가 스파이인 것도 몰랐다는 풍국장 이야기에 비웃음이 아닌, 그가 가엾다는 말을 하던 것도.
생애 첫 살인을 저지른 자신을 치료해 주던 류진의 손은 따스하고 다정했었다.
“형은 내한테 진심이었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은 싫은 일도 해야 해. 진심이 아닌 말도 해야 할 때가 있어.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해.”
목이 메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류진은 눈을 부릅뜨고 내뱉었다.
“권세혁. 내가 널 갖고 놀았어.”
“아니야.”
“나 네가 부러웠어. 솔직히 질투했다. 그래서 네가…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공급책이 되었다. 한 번만 복용해도 중독되고 마는 위험한 마약류를 주었다.
“그날 나… 너 훔쳐봤어. 호월루 정원 말고. 그 큰 대문 앞에서.”
울음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했다. 류진은 자꾸만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으며 한 어절, 한 어절 힘겹게 끊어 말했다.
“네가 동생 안아 주는 걸 봤어.”
그때 권세혁은 행복해 보였다.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빛나는 사람은, 류진이 기억하는 한 류연비가 유일했다. 권세혁은 누나의 자리를 빼앗아 거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동생….”
권세혁의 목에 가느다란 두 팔을 감던 아이가 생각났다. 몸집이 아주 작고 낯가림도 심한 듯했다.
권세혁은 그 아이의 세상이었다.
“네가 미웠어. 너희 형제가, 우리 남매 자리를 뺏었다고 생각해서.”
호월루의 직원들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이하는 중요한 손님. 번쩍번쩍 근사한 차량 행렬.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의 단독 에스코트. 그건 국민 톱스타 류연비와 그 동생인 자신의 몫이었을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웃긴데….”
류진은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뜨거운 눈물이 손목 안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권세혁이 미웠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미운 만큼 좋았어.”
살면서 처음이었다. 권세혁 같은 사람은.
그렇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퍼 주는 애정은 처음이었다. 류진은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구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다가도, ‘나는 형이 좋아’ 하고 외치는 듯한 다갈색 눈동자를 보면 마음이 누그러졌다.
“있잖아….”
류진은 손을 내밀었다. 권세혁의 뺨을 더듬자 축축한 눈물이 손가락을 적셨다.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이 창백한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그냥 아는 형…. 아니 더는 형 소리 듣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분수대 앞에서 달빛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그 미소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너를 용서해. 근데 너는 나 용서 못 해도 괜찮아.”
권세혁이 울음을 터뜨렸다. 류진의 표정이, 목소리가 단호해서. 이 이상은 바라지 말라는 뜻이 너무나도 견고해서.
심장이 아팠다. 숨 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전신의 근육이 마비된 듯 가슴이 옥죄어 왔다. 권세혁은 몸을 굽히고 바닥을 기었다.
“세혁아. 권세혁. 정신 차려. 세혁아.”
류진이 웅크린 권세혁에게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그를 바로 눕히고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눈물이 섞이고 숨소리가 엉켰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바로 그때 철문이 열렸다.
날카로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야 이 수캐들아. 포르노 찍냐?!”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못 본 사이 얼굴에 살이 쑥 내리고, 한층 사나운 눈매를 가지게 된 차모은이 서 있었다. 그에게서는 바다 냄새와 피비린내가 났다.
강인우는 철문에 기대고 섰다. 바닥에 짓이겨진 권세혁을 보며 차모은이 데려온 두 명의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니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
“됐다. 조심해라. 저거 귀한 몸이니까.”
턱에 허연 흉터 자국이 있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조심하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손길이 난폭한 걸 보면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권세혁을 제압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친 몸인데도 저항이 거셌다. 재갈을 채우지 않았으면 손가락을 물어뜯겼을 것이다.
정말이지 미친개, 아니 미친 소 같았다.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흥분하면 사자나 호랑이도 배를 찢어 죽인다는 성난 물소가 이럴 것 같았다. 강인우는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권세혁에게 투여한 게 항생제가 아니라 각성제였는지를.
강인우는 권세혁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으로는 어깨 너머의 정류진을 가리켰다.
“아까 말한 거야.”
“으으읍! 읍!”
“교정 절차.”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차모은이 정류진을 구타하는 모습을 보았다.
스킨헤드의 덩치가 정류진을 뒤에서 끌어안아 급소를 보호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차모은이 데려온 남자 중 체구가 제일 컸다. 그에게 붙들린 정류진은 종이 인형 같았다.
개인적인 감정이 다분한 린치였다. 그걸 ‘교정’이라고 표현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차모은의 행동이 곧 보스의 뜻인데.
강인우는 하성록을 거스를 수 없었다. 딸의 안위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권세혁을 가지고 유미현 혹은 장두현과 협상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으나 위험 부담이 컸다. 유미현은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고, 장두현에게는 접근할 방법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역풍을 맞을 가능성을 무시 못 한다.
무엇보다 강인우는 이 이상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최초의 계획에서 충분히 탈선했다. 행운의 신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켜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와 더불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른침을 삼켰다. 나머지는 보스에게 맡긴다. 정류진과 권세혁의 처분은 그가 결정할 것이다.
저놈들이 어떻게 되든지, 나는 딸만 되찾으면 그만이니까.
권세혁의 충혈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는 순간 목이 콱 메었으나, 강인우는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악역이 아니다.
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가 어떻게 악역이 되나.
지금 구타를 가하는 쪽이라고 해서 악인인 게 아니었다. 얻어맞는 입장이라고 선한 것도 아니었다. 선과 악은 복잡한 것이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었다.
정류진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차모은의 악담에 기가 꺾여 버린 탓도 있지만, 구타를 시작하기 전 옷을 벗기는 것과 동시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강인우는 차모은의 잔인성에 놀랐다. 정류진에게 성적인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알고 지시한 행동이었다.
“놔 봐.”
스킨헤드가 물러났다. 정류진이 풀썩 쓰러졌다. 마른 몸뚱어리가 바람 앞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야.”
“…….”
“야. 너 일어나 봐.”
차모은이 일갈했다. 정류진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녀석은 가는 두 팔을 가슴 앞에 엇갈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등을 둥글게 말았다. 각진 어깨와 툭 튀어나온 견갑골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등뼈도.
정류진의 마른 몸 위로 혁대가 내리쳐질 때마다, 권세혁은 내장을 쏟으며 죽어 가는 동물 같은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린 강인우는 권세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재갈을 풀면 어떤 저주의 고성이 터져 나올지 궁금했다.
정류진만 해도 그랬다. 당신은 지옥에나 가라고.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 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내 손을 잡아 줄 테니까.
차모은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바닥에 엎어진 류진의 머리칼을 쥐고 들어 올렸다. 조그만 얼굴이 먼지와 각종 오물, 코피로 지저분했다.
“이 걸레 새끼는 아주 사방팔방 엉덩이 흔들고 다녀. 사람이 대가리가 나쁘면 양심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년은 그것도 없어.”
강인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적당히 해. 애들 상대로.”
“애들?”
차모은이 비웃었다.
“저 눈빛을 봐. 저게 고분고분 말 들을 애새끼야?”
그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권세혁이었다. 강인우는 피식 웃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결딴내 죽일 수 있다면, 지금쯤 이곳의 전원이 사이좋게 강강술래 하며 삼도천을 건널 터였다. 정류진만 빼고.
편두통이 밀려왔다. 강인우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으브으으읍!”
권세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류진에게 손대지 말라는 소리 같았다. 강인우는 권세혁의 축축한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여기서 하는 게 낫다. 보스 앞에서는 상황이 더 나쁠 수 있어.”
본보기라는 게 그랬다. 친자를 잃은 보스를 조금이라도 더 위로하고자 지나친 가혹 행위를 가할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차모은이 교정을 끝냈다고 말하면 조직에서 정류진을 건드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류진을 또 건드리면 차모은이 제대로 ‘교정’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까.
“왕자님은 잘 이해가 안 되지? 근데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경멸하는 눈빛.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훅, 치밀었다. 격렬한 반발심이 강인우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왕자님이 날 그렇게 쳐다보면 섭섭한데.”
권세혁이야말로 악법으로 똘똘 뭉친 나라의 최대 수혜자였다. 국민의 고혈을 흡혈귀처럼 빨아먹으며 살아온 왕실의 한 송이 꽃이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가까이 가면 악취가 진동했다.
강인우는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쳐다보았다가는 권세혁의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처박을까 봐.
그는 차모은에게 다가갔다. 차모은 또한 쓰러진 정류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끝이야?”
“아니. 아직 물어볼 게 남았어.”
“너무 시간 끄는 거 아냐?”
“…….”
강인우는 쓰러진 정류진을 보았다. 옆으로 누운 채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안고 웅크린 자세를 했다. 어머니 배 속의 태아 같았다. 정류진은 본인이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곽현우 때문인 거 같은데, 어지간하면 적당히….”
“죽고 싶냐?”
“진정해. 너무 개인적인 감정 쏟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때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류진의 입술 사이에서.
“잘못했어요….”
강인우는 몸을 숙이고 앉았다. 정류진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조장. 제가… 잘못….”
차모은이 웃었다.
“넌 이런 식으로 나를 병신 만들지.”
“차모은.”
“넌 빠져.”
강한 힘으로 밀쳐졌다. 쭈그려 앉았던 강인우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봐!”
어이가 없어 올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차모은의 표정은 싸늘했다.
“…뭐야.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시끄러워.”
강인우는 벌떡 일어나 섰다. 더는 못 봐주겠다. 이 여자 화풀이 샌드백 만들어 주려고 그 고생 해 가며 정류진을 납치한 게 아니었다.
차모은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스킨헤드 남자가 귀신같이 강인우의 앞을 막아섰다.
“꺼져.”
꺼질 리가 없었다. 그는 차모은의 말만 들었다.
강인우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목덜미와 손바닥에 땀이 솟았다.
불길함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차모은이 휘감고 온 바다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베테랑 청소부의 목덜미를 감아 조였다.
마강희가 잡은 철갑상어는 바다에서 흘러들어 온 정체불명의 죽은 고기로 일단락되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요, 눈 감고 아웅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장두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정수헌에서는 그의 말이 곧 사실이었다.
신해범은 그물을 걷으러 온 자들과 만났다. 모터보트를 타고 가까이 접근했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격노한 장두현을 말려 줬기 때문일까, 그들은 신해범을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대했다. 심지어 무리의 대장인 노란 머리의 젊은 사내는 신해범에게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테레비에서 마이 봤습니다.”
“알아봐 줘서 고맙군. 지금 꼴이 말이 아닌데.”
“하이고마, 아닙니다. 텔레비전보다 실물이 훠배 잘 생기셨습니다.”
신해범은 남자의 기름때 낀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모터보트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흔쾌히 악수했다. 그 순간, 윤태금은 봤다. 신해범의 손바닥에 곱게 접힌 지폐가 있었던 걸. 악수를 마친 남자가 자기 손을 바지 뒷주머니에 한 번 넣었다가 뺀 걸.
“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신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뇌물 먹이는 일에 도가 텄다. 아주 선수다 선수.
속으로 한탄한 윤태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문 안쪽에서 조명탄을 연달아 쏘는 중이었다.
“하늘이 번쩍번쩍해가 좋구만요.”
“밤에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윤태금은 남자가 웃을 때 그의 관자놀이에서부터 뺨, 턱에까지 걸쳐진 선명한 흉터가 실룩거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두운 데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명탄 빛을 받을 때마다 도드라졌다.
키는 작지만 건장한 체격에, 거의 초콜릿색으로 그은 얼굴은 확실히 바다 사람이었다. 뱃사람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해적이었다.
장두현이 이자들을 어떻게 포섭했는지 알겠다. 자기 사병으로, 해군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겠지. 자기 밑에서 일하는 걸 봐서 순차적으로, 능력순으로. 그게 일 년, 이 년, 오 년, 십 년….
장두현은 그런 식으로 사람 피를 말렸다. 윤태금은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에 희망 고문을 면했다. 그러나 마강희와 조철영을 비롯한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수헌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었다. 어디서도 이곳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 살벌한 얼굴의 남자가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윤태금은 선뜻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여유로운 목소리와 태도와는 달리 신해범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계속 움직였다. 손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면 말이라도 계속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교전이 있었다고. 그래도 명색이 같은 도민끼리 참….”
신해범이 혀를 차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요번에는 그짝 아들 아녔습니다.”
장두현에게는 아직 보고하지 못했다고 했다. 너무 불같이 화를 내서. 어차피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교전 상대는 도망갔고, 철갑상어를 잡은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민간 어선이 지레 겁을 먹고 선제공격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평범한 어선이라 해도 최소한의 생존 장비는 갖추기 마련이었다. 바다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생기니까.
“뱃머리부터가 생겨 먹은 게 특이했다 아입니꺼.”
“뱃머리?”
“왜국 배처럼 생겼든데.”
“왜국… 일본 배라고?”
남자는 신해범 정도의 유명인이, 그만한 세력가가 자기 말을 들어 준다는 사실에 감격한 눈치였다. 구태여 묻지 않은 말까지 털어놓는 걸 보면.
“예. 금마 배라먹을 아새끼들이 밍크 잡는다고 작살 포 싣고 넘어옵니다. 일전에 저그, 한국해에서 된통 깨져가 그짝으로는 잘 못 간다 카드만. 만만한 게 우리제. 에라!”
남자가 강에 침을 뱉었다. 윤태금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저 인간이 깨끗한 자연에다가…!
윤태금은 금발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신해범과 이야기한다는 핑계로 그물 철거 작업에서도 손을 떼었다. 직무 태만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신해범은 대장의 말에 귀 기울였다. 뭔가 짚이는 데가 있는 눈치였다.
“일본 배라… 확신하는 이유가 뭐지?”
지폐 한 장이 또다시 남자의 주머니로 사라졌다. 그는 한창 철거 작업에 열중하는 동료를 불렀다.
“인마!”
“와요?!”
“우리랑 뜬 아새끼들. 금마들 왜국어 혔냐, 안 혔냐?!”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신해범이 남자를 모터보트로 불러들였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
“예에, 뭐.”
남자는 서슴없이 배를 옮겨 탔다. 거의 뛰어들어 오다시피 했다. 그 바람에 보트가 흔들려 가장자리에 앉았던 윤태금이 하마터면 강으로 떨어질 뻔했다.
“좀 조심하십시오!”
뒤돌아본 신해범이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조용히 해. 뒤에서 모기처럼 앵앵대지 말고.”
윤태금은 울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까불면 진짜로 머리부터 물속에 처박힐 테니까. 신해범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대관께서는 자네들이 교전한 배가 진한 3도에서 넘어왔다고 하셨는데.”
“지들도 첨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확실히 옛날에 비하믄 왜국 배가 마이 줄긴 했지요. 그래두 즈이들은 심심찮게 봅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는 얘긴가?”
“자주까지는 아니지만서두….”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신해범은 사람 좋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 대관께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네. 꼭 자네들 때문은 아니고.”
“아입니다. 다 지들 잘못입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말고. 그래도 말이야, 오늘 교전한 배에 대해서는 굳이 대관께 이야기 안 하는 게 좋겠어. 아까 역정 내시는 것 자네도 봤지? 지금 좀 잠잠해졌는데, 긁어 부스럼이라도 나면 어쩌나.”
“예에.”
“대신에, 내가 그 일을 좀 처리할까 해.”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빙그레 미소 지은 신해범이 말했다.
“자네들 배에 피해도 있었을 텐데, 내가 상황을 봐서 대관께 말씀드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고 싶어.”
“장군님께서 말입니까?”
“그래. 내가.”
신해범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네들과 싸우고 도망간 배, 어느 쪽으로 갔는지 기억하나?”
그는 홀린 듯 질문했다. 말하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성록의 근거지는 중국이지 일본이 아니고, 일본 배가 장진 해역에 처음 출몰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을 외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랬다.
신해범은 남자의 대답을 들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몇 개의 퍼즐 조각이 손바닥 위에 있는데, 모서리가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강인우는 두 명의 남자에게 팔을 붙들린 채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 시끄러.”
귀를 후벼 판 차모은이 강인우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헉.”
그는 무릎을 꿇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이 콱 막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침하고 보니 눈앞에 위액이 흥건했다.
“너….”
“뭐. 보스가 너 조지라고 시켰냐고?”
차모은이 께느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니. 관짝 닫은 인간이 무슨 명령을, 어떻게 내려.”
“뭐라고?”
“죽었다고. 죽었어. 뇌혈관 터졌는데 뭐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그대로 갔어. 아, 인제 와서 골든 타임이 어쩌고 그런 거 따지진 말자. 시시비비 가린다고 망자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장난치지 마.”
“장난으로 들려?”
“네가 지금 여기 왜 와 있는데. 보스 지시로 온 거잖아. 난 분명 보스하고 얘기했어.”
적나라한 비웃음이 강인우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목소리 들은 적 있어?”
“뭐?”
“너랑 연락한 거 보스 아니야. 기획조장이지.”
강인우는 입을 벌렸다. 입술에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차모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강인우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차모은의 목소리는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태평했다.
“우리가 조직을 정리하고 있거든.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오해는 하지 마. 나랑 기획조장이 보스를 어떻게 했다, 뭐 이런 상상 하면 곤란해. 우리도 나가리 된 건 마찬가지야. 현지 법인 문제하고 뒤섞여서 아주 골치 아프다고.”
강인우는 차모은이 빠르게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고막에서 튕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중국 본사는 기획조장이 현지 애들이랑 해결 보기로 했어. 난 그쪽 일에는 관심 없고, 잘 알지도 못하고. 그냥 서로 깔끔하게 지분 나눠서 갈라진 거지. 뭐 그렇다고 완전히 남남은 아냐. 뒷골목 장사를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손 털기가 그렇게 쉽나?”
미소를 띤 차모은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같이 일한 정 있지. 서로 밑바닥도 다 알지. 우리 상부상조할 거야. 기획조장은 중국에서, 난 일본에서.”
“…….”
“어려워? 요약해 줘? 그래도 명색이 사관 학교 나온 엘리튼데 반응이 영 실망스럽네? 그렇게 충격이야? 너무 놀라서 대가리가 안 돌아가?”
“닥쳐.”
“나가리 돼서 열 받은 건 알겠는데, 나한테 짖지 마. 애초에 좆 달린 새끼들이 설쳐서 이 꼴 난 건데.”
그는 정류진과 강인우를 번갈아 보았다.
“내 인생에 좆나 도움 안 돼.”
“그러면, 그러면 대체 여기 왜 온 거야. 왜…!”
“물건 가지러.”
차모은이 쓰러진 정류진의 뺨을 툭, 찼다.
“아까 말했잖아. 일본서 약장사, 술장사, 그리고 남자애들 장사 한다고. 나 갑부될 거야. 이 세 개를 같이 하는데 돈을 안 벌고 배겨?”
강인우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때려죽이고 싶었다. 전부 다. 모든 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수고, 짓이겨서,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크흐흐, 크하하.
붙들린 양팔이 아팠다. 그런데도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강인우는 어깨가 탈구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몸을 세차게 떨며 웃었다.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미현이 인혜를, <백사자>를 배신한 진짜 이유를 알겠다. 몰랐다면 그건 그거대로 천운이 따른 것이고.
이제 <백사자>는 없었다. 중국의 합법적인 IT 기업체인 <화이트 라이프 스타>와 일본 야쿠자의 비호를 받아 영업하는 클럽 <화이트 스완>뿐이었다. 혁명의 불꽃은 하성록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한때 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부당한 체제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죽었다. 이제 그곳에 남은 건 지저분한 과거를 세탁하고 양지로 나아간 자들과, 더 깊은 수렁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간 쓰레기들뿐이었다.
윤태금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말 가실 겁니까?”
그가 신해범을 올려다보았다. 이륜구동 산악 바이크 한 대, 대형견 두 마리를 실은 모터보트가 출발 직전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젖은 자갈밭에 섰다. 이미 허용치를 초과한 무게 때문에 탑승이 불가능했다.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해범은 일본 배를 추격하고 싶어 했고, 노란 머리 남자는 길잡이로 반드시 필요했다.
“따라올 거면 다른 보트를 타.”
“그럼 저는 마강희 선배님과 가겠습니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필요한 건 없지만 서두르는 게 좋아. 기다려 주지 못하니까.”
“바라지도 않습니다.”
윤태금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대형 컨테이너가 들어오는 큰 선착장으로 간다는 장두현과 정체불명의 일본 배를 뒤쫓는 신해범,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실종자들을 찾아낼지 궁금했다.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쥔 사이였다. 신해범은 장두현의 무지막지한 철갑상어 사냥을, 장두현은 신해범과 장승희 총통 부인의 은밀한 관계를. 실종자들을 먼저 찾아내는 쪽이 칼자루를 쥐게 된다.
사진 속 여성은 분명 장승희 총통 부인이었다. 챙 넓은 모자를 코까지 눌러쓰긴 했지만, 윤태금은 그의 실물을 여러 차례 접했고 신해범과 함께 있던 모습도 보았다.
…역시 그냥 보디가드가 아니었다.
“아니다. 저도 항구 쪽으로 가는 게 나을까요?”
“왜?”
뱃머리에 손을 얹었다. 신해범에게 손짓하자 그가 한숨을 푹, 쉬고 몸을 기울였다. 윤태금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솔직히 좀 그렇잖습니까. 지금 따지자면 일대일인 상황인데. 대관께서 먼저 왕자님과 류진이 찾아내시면, 그럼 우리 완전 새 되는 겁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얻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라도 대관 어르신 옆에 붙어 있어야….”
신해범이 픽 웃었다.
“그러면 안 되나?”
“예?”
“실종자들을 누가 먼저 찾아내는지는 상관없어. 안전하게 구출하는 일이 중요하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십니까? 준장님, 대관께선 류진이 인정해 줄 분이 아니십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면 모를까.”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난 모르겠어.”
“아, 이러니까 제가 아까 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준장님 지금 피곤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시는 모양인데….”
답답했다. 똑똑한 사람도 과로 앞에 장사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윤태금은 줄을 바꾸기로 한 자기 결정이 실수가 아닌지 재고했다. 신해범은 생각보다 내실이 굳건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정말 누구라도 생각할 만한 부분인데. 장두현이 권세혁과 정류진을 먼저 찾아내면, 죽어도 정류진을 차기 총통 부인으로 인정할 생각 없는 장두현이 그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거기다 신해범과 정류진이 어떤 사이인지 알게 되면….
눈앞이 아찔했다. 그때는 이미 왕자의 마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신해범과 정류진은 나란히 왕실 모독죄로 처형당할 수 있었다. 각각 총통 부인과 총통 후보자를 농락한 죄.
“모르겠는데.”
“아, 준장님!”
“목소리 낮춰. 골치 아파.”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래. 지금 그런 거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자네 혼자라고 생각하나?”
윤태금의 이목구비가 팍 구겨졌다.
“지금 저를 길잡이 뱃놈이랑 비교하시는 겁니까?”
“기우희 소령 말이야.”
“소령님은 지금 병원에 계시지 않습니까.”
신해범이 웃었다. 어느새 얼굴이 바뀌었다. 피곤이 뚝뚝 떨어지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자네는 내가, 우리 풍기 교육대원들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는지 몰라. 하나같이 무식해서 몸 쓰는 것밖에 못 하는 군바리 새끼들이거든.”
“…….”
“익숙하단 말이야. 사흘 밤을 꼴딱 새우고, 풀뿌리랑 구근 캐고 나무 속살 씹어 먹으면서 버티는 그런 일들. 외국에서 곱게 자란 자네는 잘 모를 거야. 하지만 우린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사람들이거든. 작게는 고립, 크게는 테러와 전쟁.”
윤태금은 신해범의 비웃음 소리를 들었다.
“상상이 안 되나?”
“예.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모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만약 전쟁을 아는 사람이 로봇 군대 같은 거나 처만들겠다는 소리를 내 앞에서 싸질렀으면, 그 자리에서 대가리 반이 날아갔을 거야.”
보트는 거센 수말을 일으키며 출발했다. 검은 강물을 가르면서 바다로 나아갔다. 가까이 서 있던 윤태금은 채찍 같은 물보라를 그대로 얻어맞았다.
아… 신해범 저 개새끼….
윤태금은 멀어지는 보트 꽁무니를 노려보았다.
좆나 간지 나.
강인우는 팔다리에 쇠고랑을 찬 채, 차모은이 데려온 남자들이 자기 소지품을 뒤지는 모습을 맥없이 바라만 봤다. <연운사>에서 얻은 황색 비닐 가방 하나가 엑스터시와 LSD로 꽉 차 있었다.
알약 하나를 쪼개 가루 맛을 본 차모은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번졌다.
“품질은 그대론데, 생각보다 양이 적다.”
“그게 전부야.”
“니가 처빨았지?”
강인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로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알약 몇 개 주워 먹었다.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대놓고 술장사, 약장사, 남자애들 장사 하겠다고 설치는 차모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에서는 권세혁이 헐떡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쇠붙이 소리가 요란했다.
“아직도 움직이네. 신기하다.”
왕족은 혈관에 흐르는 피가 다른가 봐? 차모은의 비웃음 소리가 아득했다. 그가 권세혁이 정맥에 다이렉트로 꽂아 넣은 모르핀은 아슬아슬하게 치사량을 비껴가는 양이었다. 완전히 짐승 취급이었다.
강인우는 턱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로 이가 엇갈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뭐를?”
“장난치지 마!”
차모은이 웃으면서 정류진을 턱짓했다.
“저건 내 비즈니스용.”
그러고는 엎어진 채 신음하는 권세혁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다.
“이건… 그냥 둬도 죽지 않을까?”
“미친 소리 하지 마. 이 나라 왕자야. 유력 총통 후보라고.”
“그래 봤자지. 겨우 스무 살짜리 애새끼야.”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상항 파악을 못 하는 건 너야, 쓰레기 처리반.”
총구가 이마를 짓눌렀다. 차갑고 딱딱했다. 정류진의 리볼버였다. 반짝이는 은색 총신, 매끈한 나뭇결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얼마나 손바닥에 착 감기는지 강인우는 잘 알았다.
차모은이 탐낸 건 총뿐이 아니었다. 그는 강인우의 모든 걸 가져갔다. 이번 일로 그가 차지한 전리품들. 앞으로의 미래까지도.
“네가 죽어라. 다 뒤집어쓰고.”
권세혁 왕자 납치범, 암살범. 역사책에 이름 석 자 당당하게 올리게 될 거야.
차모은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마치 자기가 선심 쓴다는 듯.
“어차피 네가 친 사고 아냐? 솔직히 어쩔 줄도 모르고 있었잖아. 그냥 막연히 보스가 해결해 주겠지, 난 동생만 찾으면 되니까, 나머진 뭐 어떻게 되든 말든.”
“…….”
“참 이상한 스타일이야. 능력은 되는데 앞에 나서려고 안 해. 보통은 그 반댄데. 능력 없는 새끼가 설치다가 좆 되는 경우는 수두룩하잖아. 근데 능력 되는 새끼가 조용히 일하고 싶어 하는 건 드물거든.”
“하신성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군.”
“누가 그놈 얘기래?”
강인우는 차모은을 노려보았다.
“난 시간을 벌려고 한 거야. 신중하게….”
“뭐.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
차모은이 코웃음 쳤다.
“그럴 여유가 있었다는 것부터 아웃이야, 넌. 진짜 물불 안 가리는 새끼는 이것저것 안 따져. 그리고 이건 내 경험에서 우러나서 하는 말인데,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 보통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이 제일 낫거든.”
비웃음이 강인우의 얼굴을 할퀴었다.
“왕자로 뭘 얻으려고 했냐? 누구한테 딜 넣으려고 했어? 강인혜 데려오는 일쯤이야, 보스가 살아 있었으면 해결해 줬을 거고. 말단들 대우는 좆같아도 우리 뒤통수 갈기는 짓은 안 했잖아. 그 인간이 그래도 상도는 있었어. 말년이 좀 추잡해서 그렇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욕구는 전부 채우면서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푸는 일도 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장두현이 본인의 사유지 일부를 장진 사람들에게 캠핑장으로 제공했듯이.
강인우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성록이 죽었다는 게. <백사자>가 와해되었다는 게. 인혜의 꿈이 박살 나고, 지금껏 그 애가 인생을 바쳐 해 왔던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바라는 건 딸과 다시 만나는 일뿐이었는데.
차모은이 빙글빙글 웃었다.
“너 그 애 정말로 좋아한다. 친동생 맞아? 아무리 늦둥이라도 그렇지, 수상해.”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데 정류진과 눈이 마주쳤다. 강인우는 그가 자신의 말실수를 잊었길 바랐다.
나는 운이 좋다. 행운의 신은 이번에도 내 손을 들어 줄….
“동생 아니에요.”
“뭐야?”
“자식 목숨이 달려 있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분명히 들었어요.”
강인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행운이 다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차모은의 얼굴이 구겨졌다.
“뭔 소리야, 지금?”
“강인혜는 저 사람 여동생이 아니라 딸입니다. 조장.”
강인우는 행운의 신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정류진의 등에 업혀 있었다.
류진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고, 팔꿈치를 세워 일어나 앉았다. 스킨헤드가 쇠사슬을 잡아당겼지만 차모은이 제지했다.
“그냥 둬.”
“조장, 저 할 말 있어요.”
“뒈지기 싫으면 아가리 싸 물어. 넌 내가 묻는 거에만 대답해.”
차모은의 악질적인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그래서 류진은 차모은이 어렵고, 무서웠다.
지금은 아니었다. 차모은은 강해서 아랫사람들에게 쌀쌀맞은 게 아니었다. 그는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거칠게 굴었다. 자기가 남들 눈에 만만해 보일까 봐.
류진은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방울방울 솟는 핏방울을 핥으면서 생각했다. 신해범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조장님 제 말 들어 주셔야 해요.”
“미친년이 얻다 대고 명령이야?”
“현우 형이 조장님을 얼마나….”
차모은의 싸늘한 눈빛이 칼처럼 날아와 박혔다.
“감히 네가 걔 이름을 말해?”
류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뭔데? 너 같은 건 곽현우 이름 석 자 떠올릴 자격도 없어.”
“형은 조장님 좋아했어요!”
곽현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죄스러웠다. 하지만 거기에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작작 씨불여라.”
“조장님 똑똑한 분이세요. 강인혜가 저 사람 여동생이 아니라는 것도 감 잡으셨잖아요. 아까 분명히 말씀하셨죠? 수상하다고.”
류진은 강인우를 바라봤다.
“저 사람이 한 일들은, 저 사람이 강인혜의 친부니까, 평범한 아버지도 아니고 정말 특별한… 관계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었던 헌신이에요.”
“그게 곽현우랑 무슨 상관인데.”
“사실은 조장님도 아시잖아요. 저랑 현우 형, 다른 조원들이 쑥덕대는 것처럼 그런 사이 아니라는 거. 사실은 다 알고 계셨잖아요.”
문제는 소문이었다. 말에는 아주 나쁜 성질이 있었다. 비도덕적이고 자극적인 소식일수록 빨리, 멀리, 과장돼서 퍼졌다. 류진은 그 사실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그건 곽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했다.
친구 이상으로 애틋한 사이였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건 에로스적 성애가 아니었다. 가족애였다.
“미친년이 잘 짖는다. 곽현우 뒈졌다고 지 맘대로네.”
“조장님이야말로, 현우 형 죽었다고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돼요. 현우 형이 좋아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 개좆같은 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형이 조장님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곽현우는 차모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긍지를 잃지 않고 공부했던 그가 차모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류진은 곽현우가 자기를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만 찾아내는 것이 싫었다.
곽현우의 외모는 하신성만 못했다. 체격은 차모은이 매일같이 부대끼는 테러조원들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연애 경험이 없어 말솜씨도 부족했다. 최신 유행도 모르고 유머 감각도 없었다.
류진은 곽현우와 차모은을 이어 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다. 비록 결과는 처참했으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암만 세상에 중요한 게 결과라지만, 그 의도나 과정이 무가치한 건 아니었다.
눈앞의 결과만 보면 결국 이렇게 된다.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너무 먼 길을 돌아간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너무, 오랫동안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차모은의 웃음은 퍼석퍼석했다.
“그래서 지금 뭐가 달라지냐? 걘 이미 죽었어. 우리가 보스로 모시던 사람도 뒈졌고. 나한테 빈다고 뭐가 바뀔 것 같냐? 아서라, 이 또라이 등신 새꺄. 난 네가 싫어.”
난 네가 좆나 싫다고. 차모은이 일갈했다.
그는 류진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까만 머리카락을 움켜쥔 차모은이 손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어쩌면 이렇게 짜증 나게 생겨 먹었지?”
류진은 눈을 감았다. 제발 이러지 말라는, 애원조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신해범이라면 빌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신해범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기에 남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과감한 패를 던질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돼야 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신해범이 올 때까지.
하성록이 죽었다는 소식은 놀라우리만치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신성의 비참한 최후와 맞물려 얼굴 정도는 생각날 법한데, 이상하게도 류진의 기억 속 하성록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진 채였다.
왤까. 왜 슬프지도, 기쁘지도, 하다못해 화도 나지 않을까?
아마 차모은이 무섭지 않은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이래서 애새끼들 장단 맞춰 주면 안 돼. 조금만 봐주면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성질 드럽다… 진짜.”
권세혁의 목소리였다. 류진의 머리를 잡고 흔들던 차모은이 뒤돌아봤다.
“뭐라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뱀파이어 백작처럼 된 권세혁이 말을 이었다.
“을매나 대단한 사정이라 저 지랄을 하나 했는데. 별것도 아이네.”
“뭐야?”
“혼자서 망상 쫌 고만 캐라. 그거 사람 추해지기 딱 좋은 방법이다.”
권세혁이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아리처럼.
“내도 경험에서 우러나 해 주는 말이니 새겨들으라.”
“아, 이래서 내가 애새끼들이 싫어.”
“내가 그냥 애새끼로 보이나?!”
피가 끓어오르는 고함이었다.
“왕자라고 개폼 잡는 거 아이다. 그딴 거 알아줄 것 같지도 않고! 근데 나, 내는 류진이 형한테 화 안 낸다! 뒤통수 거하게 때리 맞았어도 화가 안 난다 이 말이다! 근데 댁네는 뭐고?! 곽현운지 뭐시깽인지 죽은 사람 갖고 엮으면 좋나!”
“저 새끼가.”
차모은이 총을 고쳐 잡았다. 왕자고 뭐고, 당장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좆도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설치면 이래. 꼭 이렇게 사달이 나.”
“좆도 모르는 건 그짝이다.”
“뭐야?”
“아니라잖아!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와 지랄이고?! 첨부터 류진이 형 말 들을 생각 없었제?! 그냥 첨부터 다 정해 놓고, 그거이 참이라고 생각하니까 뭔 소린들 귓방망이에 처박히겠나! 에라이, 드럽다!”
권세혁의 턱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류진은 그의 필사적인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를….
원망하지도 않냐.
“말 많다. 참 말 많아.”
차모은이 리볼버로 바닥을 찧어 댔다.
“내가 겪어 본 애새끼들 중에 우리 왕자님이 제일이야. 아주 독보적이야. 응? 이제 만족해? 왕족은 뭐든 일등이어야 만족하잖아.”
“나가 그래 봐서 안다. 혼자서 망상에 뇌가 찌들어 가지고, 결국 이래 된 거다. 그러니까 내….”
류진은 권세혁의 눈을 보았다.
“내 잘못도 있다.”
“…….”
“원망 안 한다. 분명히 말한다. 내는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런 짓 안 할 기다.”
차모은이 손뼉을 치며 웃어 댔다. 목소리에 경멸이 가득했다.
“눈물 나는 순정이셔. 아주 씨발, <타이타닉>이 울고 가겠네.”
그는 주변 남자들에게 일어로 이야기했다. 너희들, 오늘 일 잘 기억해 둬라. 한 십 년 후에 영화로 나올 테니까. 물론 이놈들이 살아 나간다는 전제하에서!
그 순간이었다. 권세혁의 입에 재갈을 쑤셔 넣으려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물어뜯긴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야 이 병신아!”
권세혁은 고개를 마구 흔들어 재갈을 털어 냈다.
“배 필요 읎나?!”
“배?”
“일본 갈 배! 나가 좋은 걸로 하나 줄 테니까! 이 돌빡 새끼들 좀 끄지라고 말해 줘라! 무거워 뒤지긋다!”
차모은이 강인우를 쏘아봤다.
“뭔 말 했어.”
“아무것도.”
“잡아떼긴!”
차모은의 눈빛이 초조해졌다.
파손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지금쯤 수리를 마쳤어야 했다. 그러나 해안가에 남겨 두고 온 두 명의 엔지니어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수리가 늦어지거나, 혹은 불가능하거나, 최악의 경우 배가 발각되었을 수도 있었다.
차모은의 시선이 권세혁에게로 옮겨 갔다. 가능한 한 태평하게, 무관심하게 말하려고 애썼으나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흔들렸다.
“무슨 배?”
권세혁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강인우는 눈을 깜박거렸다. 정류진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저 사람이 한 일들은, 저 사람이 강인혜의 친부니까, 평범한 아버지도 아니고 정말 특별한… 관계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었던 헌신이에요.’
특별한 관계.
그러니까 할 수 있었던 헌신.
류진의 말을 듣는 순간, 몸속에서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였다. 눈 밑이 달아오르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움켜쥔 주먹에 땀이 고였다. 아버지라는 소리는 평생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타인의 입을 통해서는.
결심한 순간부터 인혜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한 거냐는 꾸짖음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차모은의 신경이 정류진에게 쏠린 사이, 강인우는 권세혁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장진 사투리를 섞어서 빠르게 내뱉었다. 저놈들 타고 갈 배가 망가졌어. 그래서 시간 끄는 거야.
믿을지, 안 믿을지는 권세혁의 자유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별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필사적으로 말하는 동안 자기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던 권세혁이 별안간 차모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강인우는 안심했다.
차모은이 턱짓했다. 손가락을 물어뜯긴 남자가 바닥에 엎어진 권세혁을 일으켜 앉혔다.
“요트다, 요트. 이태리제.”
가명으로 신분을 감추고 구입한 매물이었다. 류진과 전투 잠수함을 보러 갈 때 쓰려고 샀다.
외조부의 허락만 바라보고 준비한 깜짝 이벤트였다. 선실에 샴페인과 폭죽도 잔뜩 사다 놓았다. 갑판에서 웨딩 로드를 걷는 상상을 한 기억이 아주 오래전처럼 아득했다.
“솔깃하제?”
“…….”
“공갈치는 거 아이다. 할배 몰래 사 놓은 거라 아무도 모린다. 류진이 형도 몰맀다. 그쟈?”
차모은이 류진을 노려보았다.
“고만 째리봐라. 이쁜 얼굴에 구멍 난다.”
그제야 류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권세혁을 향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권세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트는 정말 있었다. 장진 앞바다 외곽의 철거를 앞둔 계류장에 갖다 두었다. 장두현이 클럽 하우스 오픈을 목적으로 사들인 부지였다. 그러나 해안 지리상 여건이 좋지 않고, 호텔 사업에 큰돈이 들어가게 되면서 착공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땅은 죄 파헤쳐 놓았으나 과거에 보트 수리, 대여점이 있었던 덕분에 계류장은 형태가 남았다.
권세혁은 차모은의 얼굴을 응시했다. 죽이고 싶은 여자지만, 그가 자기 말을 들어줬으면 했다. 요트는 이렇게라도 쓰여야 했다. 아니면 오함마를 휘두르며 달려가 때려 부수고 싶어질 테니까.
“키는?”
권세혁이 강인우를 쳐다봤다.
“…내 가방. 제일 작은 앞 주머니에.”
차모은이 가방을 뒤졌다. 그가 손을 흔들자 둥근 고리에 걸린 똑같은 모양의 열쇠 두 개가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거야?”
“그래.”
강인우는 권세혁의 의아한 눈빛을 알아챘다. 절대 마주 보지는 않았다. 들킬까 봐 혓바닥이 바싹바싹 말랐다.
차모은에게 간 건 요트 키가 아니었다. 강인우의 혼다 오토바이 열쇠였다. 진짜는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강바닥에 가라앉았다. 고가의 요트 키임을 알았으면 가지고 있을 걸,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저거라도 남아서 다행이었다.
“그거 갖고 가. 가 버려. 구질구질한 인연 여기서 끊자고.”
차모은이 빈정거렸다.
“요트 주인은 우리 왕자 전하신데, 왜 생색은 네가 내?”
왕자 전하. 급격히 바뀐 호칭이 웃겨서 눈물이 났다.
“됐제? 이제 내 좀 풀어라. 안내해 준다 안 카나!”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어?”
차모은이 열쇠를 던졌다가 받으면서 권세혁을 쳐다봤다. 그의 눈이 권세혁의 붕대 감은 허벅다리에 머무르더니 류진에게 옮겨 갔다.
“방금까지 저년이랑 뒹굴었잖아?”
“뒹군 거 아이다! 눈깔이 삐었나!”
“내가 저년 갖다 팔아먹어도 상관없어? 응?”
권세혁은 류진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연기해야 할 때였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자신도 없지만, 지금은 해야 했다. 저놈들을 이곳에서 끌어내야 했다.
꿉꿉한 냄새와 텁텁한 공기. 이곳은 지하였다. 두더지처럼 꼭꼭 숨어 있어서야 발견되기 어려웠다. 밖에서 아무리 수색대를 풀고 인근을 샅샅이 뒤진다 해도.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지하에 갇혀 봐서 안다. 멍하니 앉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권세혁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밖으로 나가서, 어떻게든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 설령 다시 끌려 들어온다 해도. 자기가 이곳에 있다는 단서라도 남겨야 한다. 그래야 산다.
내가 잘못되는 한이 있더라도….
류진은 도망치게 해 줄 거다. 반드시.
권세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능한 비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서워가 그런다.”
“왕자님도 그런 게 있었어?”
“내는 다리병신 되믄 안 되거든.”
“좆나 이기적이네.”
차모은이 빈정댔다.
“쟤 팔려 가는 것보다 자기 안위가 더 중요하다?”
“내는 특별한 사람이다! 다리병신은 총통이 못 된다, 이 말이다!”
차모은의 얼굴에 ‘납득’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야. 공주야. 너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 왕자가 너 팔아먹는다.”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도 들지 않았다.
권세혁은 류진이 울거나 절망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나는 형을 버리는 게 아니라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활로를 찾는 거라고.
“…요트 탈라믄 퍼뜩 가야 할 기다. 신해범이가 올 거니까.”
“뭐라고?”
“신해범이가 온다고!”
“아, 씨발 귀청 떨어지겠네. 뭐야?!”
권세혁은 차모은에게, 아니, 그의 뒤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있는 류진에게 말했다.
“신해범이가 온다.”
작은 얼굴이 끄덕거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권세혁은 분명히 보았다.
류진이 그 이름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신해범의 이름 석 자에 용기를 얻고, 삶의 방향을 찾고, 가능성을 찾아낸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권세혁은 류진이 신해범에게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정류진의 이름 세 글자 앞에서 그렇게 되니까.
검은 하늘이 우르릉거렸다. 지평선에서 밀려온 먹장구름이 달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비라도 내리면 큰일인데….”
신해범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초조해하는 윤태금의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비가 오면 냄새가 사라져서 개들이 추적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빨리 저놈들이 불게 해야 한다. 지금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는 윤태금이 불을 붙여 건네준 담배를 받아 들었다. 니코틴 성분이 혈관 구석구석 돌도록 힘껏 빨아들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어.”
신해범은 시선을 내렸다. 해안가 동굴에 숨어 있다가 백사장으로 끌려 나온 두 명의 남자는 일본인이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척하던 그들은 윤태금이 유창한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윤태금과 같은 보트를 타고 온 마강희가 남자들을 흠씬 두들겨 팼다. 신해범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찢기고, 팔다리가 꺾여도 말은 할 수 있었다. 통역은 윤태금이 맡으면 되었다.
길잡이 역할을 잘해 준 금발 남자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신해범은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웃었다.
“왜?”
남자는 질린 표정으로 말을 떠듬거렸다.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디….”
“뭐, 그랬으면 좋았겠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잘해 줬어.”
“그라믄 지는 인자….”
신해범은 웃으면서 담배 필터를 질겅질겅 씹었다.
“표정이 왜 그런가? 나는 사례를 하고 싶은데.”
그는 지갑을 열었다. 신예나의 카드로 찾은 현금이 아직 많이 남았다. 처음에는 고액지폐 석 장을 꺼냈다가, 두 장 더 끄집어냈다가, 종국에는 남은 현금 전부를 꺼냈다.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가라고 둘둘 말아 남자의 손에 꼭 쥐여 주기까지 했다.
“아이고, 지는 더….”
남자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백사장 모래를 걷어차며 달려간 신해범이 무릎 꿇은 일본인 사내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목,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던 마강희가 헉, 숨을 들이켜며 물러섰다.
마강희가 당황할 정도였으니 윤태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두 팔을 붕붕 휘저으며 뒷걸음질 치다 모래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두꺼운 나무뿌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우와악! 준장님!”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푹신한 백사장이라 뼈를 다치진 않았다. 마강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던 윤태금이 노란 머리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해요! 안 말려?!”
“뭐, 뭐, 나?!”
“그럼 여기서 발 뺄라 했어?! 웃기지 마! 저 새끼들 뒤지면, 아저씨나 우리나 닭 쫓던 개 되는 거야!”
신해범은 미친 도깨비처럼 날뛰었다. 그의 손에 곤봉이나 방망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진즉에 저놈들 머리가 박살 났을 테니.
“내가 왼팔! 선배님 오른팔! 아저씬 뒤에서 끌어안아요!”
“아, 씨발.”
오랜만에 욕해 본다. 정수헌 사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간 마강희는 가능한 비속어를 쓰지 않고 지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체면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신해범이 먼저 실종자들을 찾아내면 게임 끝이었다. 그리고 신해범은 자기를 도와준 부하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윤태금은 그걸 알고서 함께 가자고 한 거였다.
세 사람이 달려들었는데도 제압이 쉽지 않았다. 투우도 이것보다는 점잖을 것 같았다. 금발 남자는 턱주가리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지고, 마강희는 모래판 위에 나동그라졌다. 윤태금만이 신해범의 왼팔에 덜렁덜렁 끝까지 매달렸다. 하지만 그도… 이제 곧… 한계였다.
눈을 질끈 감은 윤태금이 일본어로 외쳤다.
[너희들 생각 잘해! 이 사람 광성에서 유명한 경찰, 아니 군인이야! 순순히 협조하면 너희들은 살려 준다!]
신해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알아들으셨습니까?”
“아니.”
신해범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래도 자네가 헛소리한다는 건 알겠어.”
윤태금은 코피를 쏟으면서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생각했다. 황금 밧줄인 줄 알고 신나서 잡았는데, 구름 위로 올라가니 옥황상제가 아니라 웬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네….
그때였다. 꿇어앉은 남자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신해범에게 산 채로 어깨를 뽑힌 자기 동료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다.
“통역해!”
윤태금은 허겁지겁 백사장을 기어 왔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신해범을 원망할 새도 없었다.
일본인 사내의 말은 장황하고 빠른 데다 간사이벤이라 표준 일본어 회화만 학습한 윤태금이 전부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의사소통 자체는 가능했다.
“뭐라는 거야. 빨리 말해.”
“자기네 나라로 보내 달라는데요.”
신해범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윤태금은 그의 홀스터가 차 있는 걸 보고 숨을 들이켰다. 곤봉이 없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중요한 증인들의 머리통을 터뜨려 버리기 전에 윤태금이 소리쳤다.
“말하겠답니다! 다른 일행 어디로 갔는지!”
고개를 돌린 신해범의 눈이 붉었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죄다 터진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붉은 눈, 눈 밑의 까만 그림자.
달을 집어삼킨 먹구름이 신해범의 머리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한 폭의 저승사자 그림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통역해.”
“예.”
“한마디라도 거짓말하면, 니들은 물론 너희 가족까지 어육기에 대가리부터 처넣는다. 도망가도 지옥까지 쫓아간다. 뭐 해? 순화하지 말고 그대로 전달해.”
“으….”
“해!”
윤태금은 시키는 대로 했다. 자괴감이 장두현 사유지의 낙정 폭포처럼 쏟아졌다. 동시에 정류진과 반드시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신해범을 적으로 돌리면 앞으로 하게 될 모든 일에 발목을 잡힐 것 같았다. 그러니 제발 좀 나타나라. 미래의 베스트 프렌드여.
<힐 스톤 그로우>에서 강인우의 도주로를 특정하기 어려웠던 건, 그가 범행에 이용한 차량이 장두현 소유의 탑차였기 때문이다.
최근 두 번이 사냥으로 쑥대밭이 된 <힐 스톤 그로우>에는 똑같은 바퀴 자국이 여럿이었다. 이동 경로를 추측하기는커녕 차종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번호판도 숫자를 아무렇게나 조합해 갖다 붙인 위조품으로, 장두현이 사냥에 동원하는 대부분의 차가 무허가 미등록 차량이었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부자들의 흔한 꼼수였다. 물론 장두현이 돈이 없어서 가짜 번호판을 붙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동물 밀수와 밀렵 행위가 발각됐을 때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겠지. 현장에서 잡힌 운전자가 모든 걸 뒤집어쓰게.
그래도 장진의 대관씩이나 해 먹는 인간이 하는 짓거리는 콜롬비아 마약상과 똑같다. 나쁜 놈들은 나쁜 짓 하는 방법을 공유라도 하나 봐.
신해범은 바이크 속도를 높이면서 키득거렸다. 자기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뭐라도 생각을 해야 했다. 멍하니 앞만 보고 달리다간 초조함에 회까닥 돌아서 가뜩이나 좁고 험한 지름길, 엉뚱한 나무둥치를 들이받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일본인 사내들이 알려 준 길은 가짜가 아니었다.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산길에 타이어 자국이 고스란히 남았다. 장두현의 탑차 타이어보다 작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으나, 남자들은 준비되었던 차량이 탑차가 아니라 봉고였다고 말했다. 6인승으로 추정되는 하얀 봉고. 옆문에 검은 글자로 선명하게 한자가 적혀 있었다.
‘어떤 한자였는지 써 봐.’
윤태금이 통역했다. 신해범은 백사장에 쓰인 글자를 휴대폰 라이트로 확인했다.
‘절이군.’
연운사. 획수에 차이는 있었지만 그렇게 읽혔다.
인근에 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금발 남자가 한 손을 빼꼼 들었다.
‘그것이 확실하지는 않다마는….’
남자는 올해 서른다섯이었고, 장진 토박이였다. 그는 연운사라는 이름을 안다고 했다.
‘지가 얼라였을 적에 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해요?’
인상을 찌푸린 윤태금이 물었다.
‘지금 우리가 시간이 없다니까!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신해범은 소리치는 윤태금을 제지했다. 이제는 확실한 정보가 아니어도 됐다. 그저 눈앞에 있는 걸 물어뜯을 뿐.
인제 신해범은 이성보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거기에 신중한 생각은 필요치 않았다. 그의 뇌는 충분히 과부하 상태였다.
길이 험했다. 좁고 울퉁불퉁하고 흙먼지가 뽀얗게 날리는 산길이었다. 산악 바이크는 속도가 빠르고 불쑥 튀어나온 바위나 나무뿌리 등을 무리 없이 뛰어넘을 수 있었으나,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온몸을 채찍질당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윤태금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신해범의 등에 매달렸다. 연운사인지 영웅사인지, 뭐가 됐든 좋았다. 실종자들을 찾기만 하면.
그러나 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곳에 산 사람은 없었다.
나이 많은 중이 허리가 꺾인 채 댓돌에 뒤통수를 박고 있었다. 양손은 뭔가를 쥐려는 듯 오므려졌고, 검은자가 뒤로 넘어가 흰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해범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체를 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중이 절명한 자리가 묘하게도 불상 앞이라서 섬뜩했다.
그는 황금빛 불상에 튄 피를 만져 보았다. 아직 굳지 않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연운사에서는 세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됐다. 전부 아이들이었다. 여아 둘은 가슴팍에 총을 맞고 즉사. 조금 큰 남자아이의 시체는 참혹했다. 머리가 깨져 죽은 몸에 방어흔도 많았다.
어린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을까….
죽은 남아의 상반신은 흠뻑 젖었다. 그 이유는 암자 뒷마당에서 알 수 있었다. 약수가 퐁퐁 솟는 바위에 핏자국이 산재했다. 바위 틈새로 스며든 피가 물에 섞여 마치 바위틈에서 피가 솟는 것만 같았다.
신해범은 땅바닥에 뒹구는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손잡이가 깨져 있었다. 허둥지둥 뒤따라온 윤태금이 신음했다.
“이게 대체….”
“힘도 좋네.”
“예?”
신해범이 몸을 굽혀 앉았다. 깨진 바가지를 고쳐 잡았다. 신해범의 큰 손바닥 안에서, 둥근 바가지는 어린아이 머리처럼 보였다.
“이렇게 한 거야.”
그는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범인은 희생자의 머리를 뒤에서 잡고 있는 힘껏 바위에 찧었다. 몇 번이나. 아이의 이마가 깨지고 안면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질 때까지.
“이렇게.”
플라스틱 바가지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렇게.”
윤태금은 한 발짝 물러났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범죄 현장을 재현하는 신해범이 섬뜩했다.
“이렇게!”
길길이 화를 내며 날뛰지 않는다고 괜찮은 게 아니었다. 신해범은 미쳐 갔다. 이곳에 정류진이 없다는 사실에.
“준장님.”
“이렇게 했다고!”
“준장님!”
“그만하십시오, 그만!”
일어선 신해범의 손에는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 날카로운 단면에 베인 손바닥에 피가 맺혔다.
“…….”
신해범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목을 한 바퀴 돌려 스트레칭을 한 그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마강희와 바닥에 꿇어앉은 일본인 남자 둘이 있었다.
신해범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빼 들고 빠르게 두 발 쏘았다. 총성에 놀란 윤태금이 입을 벌리고 쓰러진 남자들과 신해범을 번갈아 보았다.
죽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할 새도 없이.
가까이 있던 마강희는 오히려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손등에 튄 피를 바지에 문질러 닦은 뒤 고개를 까딱하고 자리를 떴다. 연운사를 둘러보던 금발 남자가 총성에 놀라 이쪽으로 오는 걸 막으려고.
마강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해범이 말했다.
“별로 안 어렵지.”
“…예?”
“사람 죽는 거, 죽이는 거. 생선 손질보다 쉬운 거 같아.”
신해범이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는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는 욕지거리와 함께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라이터는 소년의 피로 젖은 바위에 부딪혀 박살 났다. 윤태금이 불을 붙여 주려 다가갔으나, 그도 긴장 때문에 자꾸만 헛손질했다. 신해범이 물었던 담배를 뱉고 웃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이게, 이게….”
웃음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윤태금은 목까지 빨개진 채 씩씩댔다. 종국에는 값비싼 라이터를 던져 버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라이터가 우거진 잡초 사이로 사라졌다.
“이까짓 거…!”
퍽,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세상이 흔들렸다.
윤태금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죽은 일본인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입 속으로 흘러들어와 에퉤퉤, 뱉어 냈다.
“준장님! 위험합니다!”
윤태금은 손을 뻗어 신해범의 옷깃을 잡아당기려 했다. 그러나 신해범은 고마워하기는커녕,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뭐 해?”
“이거 지진… 아, 아닙니까?”
“지진은 무슨.”
비틀비틀 일어난 윤태금은 신해범이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했다.
연운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 화마가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혀가 검은 하늘을 뜨겁게 핥았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순식간에 주변이 연기로 자욱해지고, 지독한 탄내와 불씨가 날아왔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고 있었다.
“폭발이야.”
“제 라이터가요?!”
“유머 감각이 있어 좋군.”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애매한 말이었다.
“준장님!”
윤태금은 신해범이 뛰는 방향으로 허둥지둥 달렸다. 마강희도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금발 남자가 일본인 사내들의 행방을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앉은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팔다리에 묵직한 쇠고랑을 차고 있는데도 그랬다. 차모은이 어찌나 속도를 내는지, 류진은 낡은 봉고차의 바퀴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나뭇가지가 차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했다. 차체가 휘청거릴 정도의 강한 충격도 여러 번 느껴졌다. 차모은의 주행은 거침없다 못해 무모했다.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들이받거나 속도를 올려서 뛰어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전투용 특수 차량은커녕, 엔진이 오늘내일하는 구형 봉고를 이렇게 몰다니. 이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다름없었다.
액셀러레이터를 인정사정없이 밟아 대던 차모은이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씨발! 뭐 이런 개 같은!”
산길을 벗어나기 전에 추격자가 나타났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인근의 사람들은 확실히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연운사>의 땡땡이중과 애새끼들. 아무것도 모르고 문을 열어 주던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이 나중에 증인이 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제거해야 마땅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부자 부모 밑에서 멀쩡하게 태어나기를.
가까운 곳에 수색대는 없었다. <연운사>를 뒤집어엎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래서 방심했다. 씨발… 차모은의 입술 사이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인근에 수색대가 있는 줄 알았다면 컨테이너에 폭탄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를 깨끗하게 없애는 것보다 은밀하게 탈출하는 게 중요하니까. 그러나 인제 와서 후회는 소용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속력으로 도주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쪽은 왕자의 요트를 얻었다. 저놈들에게는 배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일본 해역으로 넘어가면 경비선에 저지당해 추격하지 못할 것이다.
핸들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조수석의 강인우가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뭐야? 뭐가 좋아서 처웃어?”
“넌 죽을 거야.”
“개새끼가!”
차모은이 휘두른 리볼버가 강인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었으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총알을 아껴야 했다. 그리고….
차모은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이쪽에 뾰족한 수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야, 공주!”
“…….”
“정류진 대답 안 하냐! 씨발년아!”
“아!”
류진은 스킨헤드 남자의 손에 머리카락을 붙잡혔다.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갈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공주야.”
룸 미러에 차모은의 부릅뜬 두 눈이 비쳤다.
“너 지금 기대하지?”
“…….”
“왜! 하잖아! 지금 좆나 간절하잖아! 쫓아와라, 쫓아와라, 속으로 열나게 기도하는 중이지?! 솔직하게 말해! 괜찮아!”
차모은이 핸들을 쾅쾅 두드렸다. 뭐라도 부숴 버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류진은 고통을 참으며 룸 미러 속 차모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검은자가 뱀 같았다.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또 한 명 본 적 있다. 권주혁.
“조장님.”
“조장은 얼어 죽을 놈의 조장! 그냥 개 같은 년이라고 불러!”
“멈추세요! 조장!”
“뭐라고?!”
“멈추… 그만해! 다 끝났어!”
“그래! 이제야 본심이 처나오네!”
“진짜 그만해! 세워! 이렇게 가다간 우리 다 죽어! 차 뒤집힌다고!”
“왜?! 끝까지 가자! 가야지! 저 새끼들 끝까지 따라올지, 안 올지 좆나게 궁금하잖아!”
류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자는 넷이었다. 이륜구동 바이크에 각각 두 명씩 타고 있었다. 차모은의 정신 나간 주행에 떨어져 나갔다가도, 곧 다시 따라붙었다.
그러나 바이크는 좀처럼 앞으로 나오질 못했다. 바이크가 갓길로 붙으려는 기세가 보일 때마다 덩치 큰 탑차가 앞을 막아섰다. 탑차에는 차모은의 부하 두 놈과 권세혁이 탔다.
류진은 필사적으로 창문에 달라붙었다. 탑차 뒤로 간간이 보이는 바이크에 시선을 고정했다.
전원이 헬멧을 착용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왼쪽에서 달리고 있는 검은 바이크의 주인이 신해범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았다. 어떻게 그를 못 알아본단 말인가.
저 넓고 단단한 어깨에, 강인한 팔에, 덫 같은 손에 붙잡혀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데.
“웃어? 남창 새끼가, 지금 웃음이 나와?!”
“나 남창 아냐!”
“뭐야?!”
류진은 온몸을 비틀었다. 스킨헤드 남자의 손을 물어뜯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앞좌석으로 돌진했다. 차모은이 앉은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부딪쳤다.
“악!”
낡아 빠진 시트가 앞으로 덜컹, 쏠렸다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차모은이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속도가 줄어들었다. 추격자들과의 간격이 좁혀졌다.
류진은 스킨헤드 남자의 팔에 목덜미를 붙잡혀 버둥거렸다.
“나 남창 아냐! 그런 거 안 될 거야! 함부로 말하지 마! 이제 나도 가만 안 있어! 이제…!”
왈칵 울음이 터졌다.
“당신도 안 무서워!”
“그래.”
뜻밖에 차분한 어조였다.
핸들에 부딪혀 이마가 찢어진 차모은이 뒤돌아봤다.
“이제 착한 척하지 마. 그래야 내 맘도 편하지.”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곧 산길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포장도로로 나가면 아무리 싸구려라도 차량이 우세했다. 오프로드 바이크는 매끈한 길에서 오히려 속력을 내기 어렵다.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만들어진 타이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림길.
산길을 벗어나 도로로 진입해 삼 킬로미터만 달리면 갈림길이었다. 그는 출발하기 전 탑차를 운전하는 부하에게 왔던 길로 가라고 일러두었다. 망가진 배가 있는 해안에 왕자를 떨어뜨릴 셈이었다. 거기서 기술자 두 놈까지 픽업한 다음, 해안 도로를 달려 최종적으로 요트가 있는 계류장에서 전원이 합류할 계획이었다. 최초의 목적이었던 전리품을 가지고.
계류장 위치는 각자의 내비게이션에 확실히 찍어 두었다. 추격자들만 따돌린다면 계획에 차질은 없다. 없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없어야 한다.
차모은의 손바닥에 땀이 괴었다.
추격하는 바이크는 두 대였다. 왼쪽의 검은 놈, 오른쪽의 빨간 놈. 둘 중 하나는 갈림길에서 떨어져 나갈 테니 한 놈만 밀어 버리면 됐다. 마침 조수석에 인간 폭탄도 하나 있고. 강인우.
“정류진, 너 있잖아.”
차모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날 조장으로서 존경하긴 했냐?”
류진은 침묵했다.
“왜 대답이 없어?!”
“어차피 안 믿을 거잖아. 내 말.”
그러니까 더는 변명 안 해. 매달리지도 않을 거야.
류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모은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친해지려고 애썼다. 테러조장으로서 활약하는 모습이 멋있었고, 누나 연배였고, 또 곽현우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를 증오하는 당신에게 이 이상 매달렸다간, 기대했다간,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괜찮다고 말해 준 권세혁의 인생이 너무 불쌍해진다.
나는 이미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았다. 그러니 반대의 경우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에는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류진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신해범은 무서워…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그 신해범이. 그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악마가 쫓아온다. 나를 되찾기 위해서 위험한 추격길에 사활을 걸었다.
류진은 차모은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달을 잿빛 회오리 구름이 덮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무거웠던 구름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투둑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폭우가 되었다. 거친 비바람이 세상을 쓸어 버릴 기세로 휘몰아쳤다. 윤태금은 고개를 들었다. 헬멧을 쓰고도 느껴졌다. 피 냄새를 맡은 하늘이 세상을 씻어 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갈림길에서 신해범은 망설임 없이 봉고를 쫓았다. 윤태금이 반대편이면 어떡하느냐고 소리 질렀다.
“탑차는 눈속임이야.”
“준장님이 어떻게 압니까?!”
“알아.”
강인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장두현의 차는 짐칸이 크고 번호판도 가짜였다. 하지만 절 이름이 떡하니 박힌 봉고는 달랐다. 머리 밀고 승복 껴입고 정중히 합장하면 그놈이 진짜 중인지, 중 행세하는 범죄자인지 알 게 뭔가. 머리 모양이나 옷은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겉모습에 신경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눈속임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었다. 탑차는 마강희가 쫓아갔다. 지금쯤 증원 요청을 했을 것이다. 기우희는 정류진이 장두현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일만큼은 막아 줄 터였다.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신해범은 앞서가는 봉고의 배기구가 심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엔진이 한계였다. 연식이 오래된 차가 이만한 속도를 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가파른 산길에서 뒤집히지 않고 내려온 것만도 기적이었다. 이미 뒷바퀴 두 개가 위태위태했다.
포장도로에 나온 순간, 봉고가 가속하여 거리 차가 벌어지긴 했지만… 곧 따라잡는다. 따라잡을 수 있다. 따라잡아야만 한다.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봉고가 뒤집히거나, 도로를 이탈하여 비탈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기 전에.
“준장님!”
윤태금의 고함에 시선을 돌렸다. 헬멧 속 신해범의 두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개들이었다. <연운사>에서 급하게 추격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두 마리 사냥개가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쫓아왔다.
“저놈들 뭐야.”
“프로라서 그럽니다, 프로!”
“프로 같은 소리 하네. 못 쫓아오게 해! 저러다 심장 터져!”
“지들이 힘들면 떨어져 나가겠죠! 되니까 쫓아오는 거 아닙니까?!”
기가 막혔다. 장두현이 개들에게 뭔 짓을 해 놨는지 알 만했다. 교배도 훈련도 남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아니, 생각할 수는 있지만 차마 혐오스러워서 쓰지 못하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심지어 가르토, 저 잿빛 털의 늑대개는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로카보다 앞서서 뛰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채 혀를 빼물고 내달리는 모습이 야생 늑대 같았다. 사냥개가 아니라.
“보트, 오토바이, 개값까지 물어 주게 생겼군.”
“돈 많이 버시면서!”
“반반씩 하자고.”
“예?!”
허리를 조이는 팔 힘이 강해졌다. 신해범은 지금 자기 허리를 끌어안은 사람이 윤태금이 아니라 정류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에 힘이 조금만 빠져도 튕겨 나갈 것 같은 속도에 윤태금이 비명을 질러 댔다.
“우와아악! 아아악! 사람 살려!”
“시끄러!”
“이거 진짜 미친 짓이에요. 알죠?!”
신해범은 쿡쿡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미친놈과 미친놈의 대결이었다. 더럽고 추잡한 진흙탕 개싸움. 스포츠가 아닌 투견 판에 규칙은 없었다. 팔다리를 물어뜯겨도, 이빨이 부러져 나가도, 단 일 초라도 더 오래 서 있으면 그놈이 이긴다. 나는 내 이름이 전광판에 승리자로 뜨는 광경을 보고 싶다.
신해범은 리볼버를 꺼내 조준했다. 바퀴를 노리고 격발했으나 빗나갔다. 비 때문에 조준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도를 줄일 수는 없었다.
“총알 아껴요!”
윤태금의 말이 맞았다. 신해범은 리볼버를 내렸다. 사격 솜씨도 형편없으면서 뒤에서 바퀴를 노리고 쏴 대는 건 아까운 총알을 낭비하는 바보짓이었다.
앞으로 나가서 운전자를 노린다. 마침 전방에 커브였다. 신해범은 가능한 오른쪽으로 달라붙었다. 원심력의 영향으로 차가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찰나에 가속하여 안으로 파고들 작정이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단숨에 선두를 빼앗지 못하면 차체와 가드레일 사이에 끼어서 인간 쥐포가 될 것이다.
신해범은 리볼버에 남은 탄환 수를 헤아렸다.
대시 보드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대로 부서져 버려도 상관없었다. 피차 서로 한계였다. 추격전에 어울리는 장비를 갖추고 싸우지 못해 아쉽지만, 그래서 개싸움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윤태금의 비명이 길게 울렸다. 헬멧이 가드레일에 부딪혀 갈렸다.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코너를 돈 순간 단숨에 치고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앞바퀴는 봉고와 수평을 이뤘다. 선두를 차지하지 못했다.
신해범은 차와 가드레일 사이에 갇혀 버렸다.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빗물로 축축해진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불뚝거렸다.
아슬아슬한 코너링이 끝났다. 지금부터는 원만하게 쭉 뻗은 직선 도로였다. 신해범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온몸의 관절이 부서져라 속도를 올렸다. 바이크는 아슬아슬하게 앞으로 나갔다가 도로 나란해지기만을 반복했다.
조수석을 노려봤다. 선팅 때문에 실루엣만 보였다. 누굴까. 정류진일 가능성 때문에 함부로 격발할 수 없었다.
봉고가 간격을 좁혀 왔다. 윤태금이 산 채로 타 죽는 돼지 같은 소리를 질렀다.
“준장님! 악! 악!”
태클에 왼쪽 미러 하나가 날아갔다. 하마터면 윤태금의 헬멧에 맞을 뻔했다.
“죽기 싫어어어!”
윤태금은 우는 것 같았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 그는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정류진도 그럴까. 무서워하고 있을까.
최악의 경우, 강인우 쪽으로 마음이 돌아섰을 가능성도 있었다. 친절하게 대해 주면 껌뻑 죽으니까. 신해범은 강인우가 사람 좋게 웃으며 우리 <백사자>로 돌아가자고, 더 귀여운 강아지를 사 주겠다고, 타지도 않을 쓰레기 같은 놈은 잊어버리고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뇌수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지옥이 딴 데 있지 않았다. 바로 여기가 지옥이었다. 정류진이 손끝에서 멀어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한텐 지옥이라고.
“아아악! 악! 누나아아악!”
우측으로 밀려난 바이크가 가드레일에 충돌했다. 마찰열에 불꽃이 튀었다. 흩날리는 쇳가루와 빗방울은 희망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난 항상 그래 왔다.
다 부서진 걸 끌어안고 살아왔어.
두 번째 태클에 남은 미러까지 날아갔다. 윤태금이 누나를 부르짖으며 통곡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만했다. 이 일에 끼어든 걸 후회하겠지.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겁나지 않으니까.
나는 부서진 채로 달리는 데 익숙하다.
봉고차 속도가 느려졌다. 차체가 좌우로 덜컹거렸다. 고의적인 태클이 아니라 차 안에서 생긴 문제였다. 이유는 아마도….
동승자 간의 몸싸움.
신해범은 우측 핸드 그립을 힘껏 쥐고 리볼버를 쥔 왼손으로 조수석을 겨냥했다.
“좀! 어떻게 좀! 아악!”
선팅된 차창이지만 희미하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탑승자가 있는 건 확실했다.
“왜 안 쏴?!”
윤태금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그림자를 피해서 간신히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차창에 금이 쩍 갔다.
“흐익!”
윤태금이 숨을 들이켰다. 차창은 계속 흔들렸다. 마침내 창문 전체에 금이 가고 조그만 구멍이 뚫렸을 때, 신해범은 그 틈으로 누군가의 까만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우와아아악!”
차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윤태금은 비명을 질렀지만 신해범은 부서진 유리 조각이 흡착된 차창에 얻어맞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창문이 없어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조수석에는 강인우가 있었다.
그는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중이었다.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고 웃는 얼굴이 낯설다.
신해범은 강인우의 두 손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안전 바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강인우의 어깨 너머, 핸들을 움켜잡은 여자는 신해범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백사자>의 차모은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상상할 시간은 없었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신해범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신해범!”
아.
“나 여기 있어!”
아.
“나 여기 있다고!”
아….
신해범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히죽거리는 강인우의 귀와 어깨 사이, 그 틈으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악!”
탄환은 차모은의 손등을 관통했다. 순간 핸들을 놓친 그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바이크를 가드레일과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좁혀졌던 거리가 벌어졌다. 신해범은 타이어를 겨냥해 두 발을 더 쏘았다. 윤태금의 비명은 총성 못지않았다.
“으아아악!”
왜 네가 소리 지르고 난리냐. 황천길 문턱까지 갔다가 펑크 난 타이어 덕분에 주저앉은 건 저쪽인데.
신해범은 바이크에서 뛰어내렸다. 앞으로 걸어가며 페이스 실드를 올렸다. 고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시야를 가렸다. 눈꺼풀 속으로 스미는 게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인지, 헬멧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인지 몰랐다.
그의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신해범은 노란 차선에 대각선으로 걸쳐진 봉고를 향해 뛰었다.
뒷문.
목적은 오로지 뒷문이었다. 정류진은 뒷좌석에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마른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싶었다. 눈꺼풀과 콧잔등을 핥고, 두 뺨을 만지고, 입술을 빨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맛본 다음에는 조각조각 해체해서 배 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을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에너지원으로 쓰려고.
“정류진.”
신해범은 헬멧을 벗어 던졌다. 뒤에서 윤태금이 소리 질렀다.
“피! 피! 팔! 어깨! 준장님!”
오른팔이 뜨끈뜨끈했다. 어깨가 가드레일에 쓸린 모양이었다. 상관없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신해범은 총을 겨눴다. 리볼버 총구가 향한 곳에는 스킨헤드의 덩치 큰 남자가 있었다.
정류진의 가는 목을 굵은 팔로 감싸 안은 멧돼지 놈은 기특하게도 칼을 들었다. 신해범은 빙그레 웃었다. 무기는 인질극의 기본이지. 암.
신해범은 빗물에 반짝거리는 남자의 대머리에 휘발유를 듬뿍 바르고 불붙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인간 촛대 같고 멋지겠다.
“너는 내 말 알아듣냐?”
아닌가 보았다. 그러나 통역을 해 줘야 할 윤태금은 겁에 질려 바이크 뒤에 숨어 있었다. 아, 저 쓸모없는 놈….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정류진의 얼굴이 보였다. 조그만 얼굴이 푹 젖었다.
저 창백한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빗물이 아니라 눈물이면 좋겠다. 나를 만나 흘리는 반가움의 눈물. 재회의 기쁨.
“꼬꼬야.”
신해범은 총을 고쳐 잡았다.
“너 내 이름 불렀지.”
“…….”
“나 보고 싶었던 거 맞지?”
“…….”
“솔직히 불안했거든. 네 맘이 바뀌었으면 어쩌나. 강인우 저 새끼가 나보다 주둥이를 잘 털었으면 어떡하나.”
“그런 말…!”
류진이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도 마!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르면서!”
분통이 터졌다. 신해범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신해범은 여전했다. 여전히 이기죽거리고, 기분 나쁜 말 하고, 사람 열 받게 만들었다. 여전히 뻔뻔하고 염치없었다. 저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한결같기도 어려운데. 류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목젖을 지그시 누르는 칼날은 무섭지 않았다. 그보다는 화가 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공포보다 설움이 앞섰다. 류진은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신해범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를 때리고, 할퀴고, 잘생긴 낯짝에 침을 뱉어 주고, 할 수 있는 모든 욕지거리를 쏟아붓고 싶었다. 더는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보고 싶었어.”
“난 아냐!”
“그래. 내가 너 보고 싶었다고.”
“왜 가만있어! 빨리 구해!”
신해범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엿보였다.
“빨리 구해 줘! 나 숨 막혀!”
못 본 사이에 투정이 늘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치는 모습이 예쁘다. 아무 말 못 하고 펑펑 울거나 권세혁을 걱정했으면 기분이 참 더러웠을 것이다.
“뭐 해! 멍청아!”
멍청이 맞다.
“귀먹었어?! 총알 없어?!”
귀머거리도 맞다.
“못 맞힌다고 하지 마! 그딴 핑계 안 먹혀! 내가 당신을 몰라?!”
“내가 뭔데?”
“날 위해서 뭐든 하는 놈!”
못 본 새에 늘어난 건 투정뿐이 아니었다. 정류진은 머리도 좋아졌다.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너는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안다. 앞만 보고 돌진하는 멍청이에,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지만 정류진을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 한계에 달한 몸이 그냥 계속 움직인다.
“신기하지?”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빗방울이 휘날리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봉고차 위에 우뚝 선 늑대가 풍성한 잿빛 털을 휘날렸다. 머리를 위아래로 가볍게 흔드는 놈은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아아악!”
가르토가 스킨헤드 남자의 목을 물어뜯었다. 신해범은 국적과 관계없이 단말마의 비명 소리는 같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부릅떴다.
“커헉!”
늑대개의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남자의 목을 파고들었다. 얇은 피부를 뚫고 근육을 찢었다. 목 빗근을 지나는 굵은 혈관이 상앗빛 송곳니에 걸려 찢어졌다.
비는 내리고, 피는 치솟고.
처참하고 기괴해서 눈을 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저, 저, 저…!”
윤태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늑대는 공동체를 이루는 짐승이었다. 가족 간의 서열을 중요시하는 만큼 의리가 두터웠다. 비록 투견 판에서 뒹굴며 동족의 숨통을 끊어 놓는 일로 질긴 목숨을 이어 왔으나, 조상으로부터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가르토는 악어에게서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의 냄새를 잊지 않았다.
신해범과 정류진에게서는 같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이쪽 길로 따라온 것이다.
윤태금은 고민했다. 가르토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애매했다. 주인을 지킨 경호견? 사람을 물어 죽인 미친개? 극단적인 흑백이 신해범과 닮아 있었다.
쏟아지는 장대비와 뺨을 할퀴는 바람 속에, 신해범과 그의 주위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무릎에 힘이 풀려서. 쏟아지는 비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서. 류진은 그저 눈앞에 있는 신해범의 손바닥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피와 쇠 냄새가 진동했다.
“일어나.”
“…….”
“빗속의 처연한 미인 안 해도 예쁘니까 일어나라고.”
“미친놈.”
신해범은 미친놈 소리를 듣고도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더 이뻐졌어.”
“개새끼.”
어금니를 악무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류진은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자기가 흘리는 눈물이 빗물로 보일 테니까.
“개새끼?”
신해범이 이죽거렸다.
“개새끼는 저놈이지.”
그는 류진이 끌어안은 가르토를 응시했다. 목을 울리며 그르렁대는 녀석은 주둥이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곤두선 목털이 바르르 떨린다.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방금 사람을 물어 죽인 늑대개가 무섭지 않다니.
“그 개 좋냐?”
“왜?”
“사 줄게. 어차피 안락사당할 것 같으니까.”
“왜?!”
사람을 해쳐서가 아니었다. 신해범은 가르토의 왼쪽 앞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인 모습을 보았다. 스킨헤드 남자가 휘두른 칼등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날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상처가 심했다. 허옇게 드러난 다리뼈….
평생 다리를 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장두현은 병신 개를 먹여 살릴 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가르토의 상태를 확인한 류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넘쳤다.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거 같아, 너는. 닭이라서 그런가? 근데 개는 닭의 천적 아니냐?”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빈정거리는 입을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신해범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분명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바닥에 철퍼덕 앉지 마. 거지 같아.”
“뭐라고?!”
“어디 처박혀 있었기에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하냐.”
“그러는 당신은!”
“나 뭐.”
류진은 가르토를 끌어안고 외쳤다. 지금 신해범의 얼굴은 이상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이마와 관자놀이에 달라붙었고, 눈 밑은 푸르뎅뎅하다 못해 시꺼멓고, 뺨은 해쓱하니 며칠 굶은 사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윤기 흐르던 군견이 배고프고 지친 들개가 되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온몸에서 진동하는 쇠 냄새, 피 냄새를 맡았다. 치열한 싸움의 냄새였다.
“당신 어깨에서 피 나.”
“응, 내 피야. 색깔 어때?”
“거지 같아.”
신해범은 굴하지 않고 웃었다.
“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밟았는지 알겠지? 널 구하려고 그랬어. 그러니까 감동 좀 해 줘. 너 때문에 저기, 저놈도 오늘 삼도천 건널 뻔했다.”
류진은 신해범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윤태금이 오토바이 뒤에 숨어 있었다. 저놈이 왜 여기에, 그것도 신해범과 같이 왔을까. 왜 나한테 웃으면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까. 의문이 교차하는 와중에 신해범이 그를 불렀다.
“꼬꼬야.”
신해범의 젖은 손바닥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하지만 류진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왜?”
“나 당신 싫어.”
“내 손이 너보다 깨끗해. 넌 개 만졌잖아.”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왜 걱정했다고 안 해?!”
류진은 신해범이 미웠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자기 피 색깔이 어떠냐는 둥, 자기 손 깨끗하다는 둥, 헛소리만 나불거리는 그가 미웠다.
왜 손만 내밀고 일으켜 주지 않는 건데. 왜 걱정했다는 말을 안 하는데. 왜 혼자서 잘난 척, 멋진 척, 정의의 기사인 척하느냐고.
나는 이렇게 슬픈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울고 싶지 않은데 그랬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었다. 류진은 주저앉은 채, 끙끙거리는 가르토를 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쏟아지는 빗소리도 그의 울음을 완전히 감춰 주지 못했다.
신해범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잠자코 류진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꼬꼬야.”
검은 머리칼이 푹 젖어 있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촉감이 환상 같았다.
“류진아.”
신해범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서럽냐.”
“당신이, 당신이.”
“내가 왜.”
“당신이 나를… 나한테….”
“보고 싶었어.”
목구멍을 막고 있던 구슬이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어.”
“거짓말….”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나는 너 찾으러 온 거다.”
정류진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자기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잖아.”
내가 너덜너덜해진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장승같이 선 이유는 정류진, 오직 너 때문이었다.
네 이름 세 글자로 모든 상황이 설명되었다.
사실은 그를 일으켜 주고 싶었다. 정류진을 품에 꽉 안고 그의 체온을,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로 해치워야 할 대상이 남았다.
박살 난 창문을 통해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연식이 오래된 봉고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다. 운전자는 안전띠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핸들을 움켜쥔 자세 그대로 머리를 박아서, 피가 핸들 라인을 따라서 뚝뚝 흘러내렸다.
조수석에 있어야 할 강인우가 없었다. 안전 바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족쇄가 덜렁덜렁 매달렸다.
수갑 대용으로 쓰기에는 크기도 크고 무거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작정하면 고리를 풀지 않고도 손을 잡아 뺄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상당히 고통스러우므로 아무나 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신해범은 강인우의 무지막지함에 감탄했다. 힘으로 잡아 빼느라 피부가 다 벗겨졌을 것이다. 손가락도 한두 개쯤 부러졌을지 모른다. 양손 다.
“준장님!”
윤태금의 비명이 세상을 찢었다. 신해범은 곧장 몸을 틀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기척을 느낀 게 빨랐다. 총성이 허공을 갈랐다.
“신해범!”
정류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신해범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역시 난 운이 더럽게 없어.
미사일처럼 날아와 머리로 들이받았다. 함께 쓰러진 건 다리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뒤에 정류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인우가 그와 가까워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단 일 센티미터도.
두 남자는 뒤엉켜 굴렀다. 내리막 도로를 데굴데굴 구르며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려고 발버둥 쳤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이었으나 비에 젖어 미끄러웠다. 구르는 몸뚱이에 가속이 붙었다.
신해범은 강인우의 목을 움켜잡아 머리통에 방아쇠를 겨누려 했고, 강인우는 신해범의 얼굴을 누르고 그가 쥔 총을 빼앗으려 했다. 두 남자는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목을 할퀴고, 저항하는 팔다리를 제압해 짓눌렀다. 삽시간에 옷가지가 너덜너덜해졌다.
신해범은 입 안으로 들어온 강인우의 손가락, 이미 큰 상처를 입어 너덜거리는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스킨헤드의 목을 물어뜯은 늑대개처럼.
“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강인우의 복부를 걷어찼다. 저만치 날아간 그가 젖은 아스팔트 바닥을 굴렀다. 신해범은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다. 입 안에 고인 핏물과 함께 물어뜯은 것을 뱉었다.
손톱과 살점이 고스란히 붙은 뼈였다.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후회가 막심했다. 뱉지 말걸. 꼭꼭 씹어서 삼켜 줄걸. 봉합 수술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게.
“흐흐… 흐. 하. 하하.”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데 몸이 오른쪽으로 푹, 쓰러졌다.
오른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가드레일에 쓸린 상처가 벌어졌다. 신해범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에 섞였다.
그는 자신의 왼손 엄지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방아쇠는 검지로 당기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리볼버에서는 약실이 헛도는 소리만 났다. 어딘가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신해범은 자조했다. 역시 행운의 신은 내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맞서 싸우겠다. 총이 안 되면 주먹으로, 팔이 잘려 나가면 다리로.
다리까지 못 쓰게 되면, 몸통으로라도 기어가 숨통을 끊어 놓겠다.
신해범은 일어섰다. 목덜미와 어깨에서 뽀얗게 김이 올랐다. 쏟아지는 비가 몸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오른쪽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다. 강인우와 뒤엉켜 구를 때 그의 주먹에 된통 얻어맞았다. 신해범은 망가진 리볼버를 고쳐 쥐며 생각했다.
저놈은 내 눈이 무사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산 채로 안구 적출당하고 싶지 않으면.
강인우는 죽지 않았다.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었다. 신해범은 총구를 그의 가슴팍에 겨눴다. 찰칵. 예상대로 탄환은 나가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군.”
“…….”
“죽고 싶나?”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걸 왜 네가 정해?”
시작은 멋대로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겠지만, 강인우에게는 대체로 운이 따라 주었다. 그는 실로 행운의 사나이였다. 호성동 자택에서 도주했을 때부터.
솔직히 질투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신의 가호를 받는 놈을 밀어내고 승기를 낚아챈다면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지금껏 운에 의지해 왔던 놈은 땅을 치고 울어라. 현실은 동화도, 신화도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 봐.
신해범은 총을 버렸다. 어차피 못 쓰게 된 고물이었다. 강인우를 깔고 앉아 그의 두개골을 박살 내는 도구로는 쓰임새가 있겠지만, 그 일도 맨주먹이 더 기분 좋을 것 같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리볼버가 가드레일을 넘어갔다. 까마득한 비탈길로 굴러떨어진 총은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강인우는 어둠이 총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느라 미사일처럼 달려드는 신해범을 막지 못했다.
주먹이 얼굴을 강타했다. 그러나 강인우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이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두 사람 다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강인우는 신해범의 목덜미에 두드러진 핏줄이 불뚝거리는 모습을 봤다.
“마지막은 내가 정한다. 탈영병.”
“나는 네 부하가 아니야. 이제 누구의 부하도 아니지.”
강인우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풍기 교육대와 백사자 간의 골은 깊었다. 하성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신해범은 어떤 표정을 할까. 무슨 생각이 들까. 기쁨보다는 허무가 앞선다는 데 남은 신체 에너지 전부를 걸 수 있었다.
“나도 너 같은 부하는 싫어. 트럭째 갖다 바쳐도 사양이야.”
신해범이 킬킬거렸다.
“정류진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 벅차.”
그는 주먹을 고쳐 쥐면서 덧붙였다.
“내가 생각보다 약골이더라고.”
스태미나에 좋은 음식 먹자는 친구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그랬더라면 지금, 강인우를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럽게 만들 텐데.
육탄전은 구질구질하다. 기술이나 스피드로 이기는 건 싸움이 아니라 스포츠. 생존 싸움에서 중요한 건 덩치와 힘이었다. 신해범과 강인우는 신장과 체격이 비슷했다. 이미 다쳤고, 지치고, 기진맥진해 쓰러지기 전이라는 점에서도 같았다. 그래서 더 추하게, 처절하게, 집요하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강인우는 신해범을 깔고 앉았다. 피로 물든 주먹을 쳐들었다.
“패륜아 새끼.”
“너나 나나!”
“나는 달라!”
강인우의 주먹에 턱을 얻어맞았다.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고 다리를 휘둘렀다. 주먹을 휘두르느라 비어 있는 강인우의 옆구리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큭!”
“뭐가 달라?!”
쏟아지는 빗줄기가 칼날 같았다. 신해범은 비틀비틀 일어나 서서, 옆구리를 움켜잡고 뒹구는 강인우의 목을 걷어찼다.
“커헉!”
“난 내 손으로 부모를 죽이진 않았어!”
“넌… 넌 네 부모를 배신했어.”
강인우는 피를 흘리며 웃었다.
“천하의 패륜아, 독재 정권 부역자. 세상이 널 그렇게 얘기해.”
“그래서. 내가 그런 소리에 빈정 상할까 봐?”
충분히 예상했고, 각오한 일이었다. 인제 와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신해범의 발이 강인우의 복부를 내려찍었다. 그는 실험대 위에서 전기 충격을 당한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떨었다.
내출혈을 일으키는 몸뚱이를 깔고 앉았다. 두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부러진 왼손 엄지를 제외한 아홉 손가락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지옥에서 기다려.”
강인우는 눈을 감았다. 더는 저항하지 않는 자의 목을 조르며, 신해범은 머지않은 미래에 자기가 보게 될 지옥문을 생각했다.
악인들의 피로 물든 문. 썩지도 않는 살점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그 문이 열리고 있었다.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이 짖는다. 신해범은 대가리가 셋 달린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대신에 선물을 가져왔다. 이놈도 나 못지않은 악인이니, 이것 먹고 조금만 기다려. 착하지 우리 미친개.
“금방 갈게.”
강인우의 목뼈가 으스러지기 직전, 신해범은 강한 힘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어딜 가!”
류진이었다. 젖은 내리막을 구르다시피 달려 내려온 그가, 와악 울음을 터뜨리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진 신해범의 목을 끌어안았다.
바이크 몸체가 총알을 튕겨 낼 만큼 튼튼해서 다행이다. 윤태금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무릎을 가슴에 딱 붙였다. 전쟁 영화 속 배우들이 왜 이렇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허공에 노출되는 면적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어디 한 군데 잘못되지 않으려거든.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저 또라이 저거 진짜….”
“말 안 통한댔잖아.”
류진이 중얼거렸다. 양팔에 가르토와 로카를 낀 채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모은의 무자비한 총질로부터 개 두 마리, 사람 하나를 끌고 바이크 뒤로 돌아오느라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윤태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핸들에 머리를 박고 기절한 차모은을 구조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차모은에게서는 피와 기름,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운전석에서 끌어냈을 때 그는 의식이 없었다. 머리를 다쳐 피를 한 바가지 쏟았다. 손등에는 관통상이 있었다.
차모은의 체격은 가냘프지 않았다. 타고난 통뼈였고, 팔다리에 근육이 탄탄하게 붙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지기까지 했다. 주변에 들것으로 쓸 만한 도구도 없었고.
윤태금은 살면서 쌀 한 가마니도 자기 힘으로 옮겨 본 적 없는 도련님이었다. 그는 류진에게 손짓하며 도와 달라고 소리쳤지만, 류진은 가르토와 로카를 껴안고 빗속을 뒹구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들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윤태금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보다 개가 중하다 이거지… 생각하는 순간, 엄청난 발길질에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윤태금은 젖은 도로 위에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는데,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지도 알겠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려 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단 소리는 들어 봤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목숨 살려 주는데 냅다 옆구리를 걷어차다니.
정류진이 도와주지 않은 이유를 알 듯했다. 지금 여기가 내 누울 자리가 되리라는 것도.
윤태금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믿었던 신해범은 강인우로 추측되는 덩치와 함께 내리막길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남은 건 정류진과 권총 앞에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개 두 마리뿐이었다.
찰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은커녕 뒤를 돌아볼 엄두도 서지 않았다. 뒤통수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다. 윤태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인생이….
기껏 미남에 천재로 태어났는데.
이렇게 종 칠 줄 알았으면 베풀면서 살걸. 누나한테 어리광도 적당히 부리고.
‘하지 마!’
엎드려 우는 윤태금의 머리 위로 깨진 헬멧이 날아갔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웠던 차모은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뭐 해 등신아!’
정류진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로카가 맹렬하게 짖어 댔다. 윤태금은 엎어지고 넘어지며 오토바이 뒤로 피신했다.
양 옆구리에 가르토와 로카를 낀 류진이 욕을 뱉어 냈다. 씨발.
‘왜? 왜?’
‘나 총 없어.’
‘야 이 바보야!’
‘너는 있냐?!’
윤태금은 류진의 발길질에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그냥 너 나가! 나가서 죽어!’
‘싫어! 싫어! 못 가! 안 가!’
서로의 어깨를 때리고, 엉덩이로 밀었다. 덩치가 작지 않은 바이크였으나 성인 남자 둘에 성견 두 마리까지 피신하기에는 자리가 부족했다. 그리고 윤태금은 확신했다. 정류진은 개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바리케이드 밖으로 밀어낼 것이라고.
저 여자가 기절했기를 바라는 수밖에….
안장 위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총알이 날아왔다.
‘미친놈아, 숙여!’
‘으아아악!’
‘대가리 들지 마!’
윤태금은 공황 상태에서 울부짖었다.
‘진정하고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 대화로!’
‘대화 좋아하고 자빠졌다!’
총성과 함께 탄환이 바이크 몸통에 맞고 튕겨 나갔다. 윤태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했다. 여기서 끝나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이었다.
류진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야.”
윤태금은 코를 훌쩍거리며, 로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떡해.”
“저 사람이랑은 대화로 해결 못 해. 그러니까 함부로 나서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여기 이러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윤태금은 즉각적인 해결을 원했다. 단 일 초라도 빨리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액션 영화는 좋아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꼴사나운 건 알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만 짜, 징징아.”
“형이라고 불러.”
“형이면 형답게 굴어.”
윤태금은 손등으로 뺨을 쓱쓱 닦았다.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류진은 코웃음을 쳤다.
“총 있으면서 가까이 접근 안 하는 이유가 뭐게?”
“모, 모르겠는데.”
“이 오토바이가 필요한 거야. 지금.”
지금 차모은에게 중요한 건 도주였다. 하성록도 죽은 마당에, 자기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면서까지 납치를 강행할 리는 없었다. 마침 강인우가 신해범을 덮침으로써 자폭해 주었다. 이 틈을 타 도망가는 것만이 차모은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동 수단이었던 봉고차가 망가졌다. 타이어가 터졌고, 기름까지 줄줄 샜다. 저걸 타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남은 건 이 오토바이뿐이었다. 아마 차모은이 가장 원하는 건 윤태금과 자기가 오토바이를 버려두고 어디 풀숲으로 숨어들어 가는 상황일 터였다. 그래서 자꾸만 위협 사격을 가하는 것이다.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건 그가 부상자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차모은이라도 저렇게 다친 몸으로는 사지 멀쩡한 남자 둘과 사냥개를 상대할 자신은 없으리라.
윤태금이 ‘살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줘 버려! 바이크 줄 테니까 우리 살려 달라고 하자!”
“멍청아! 이거 내주는 순간 우리 다 죽음이야!”
“왜?!”
류진은 윤태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순순히 내주면 저 사람이 아유 고맙습니다, 하고 좋아할 줄 알아? 진짜 머리에 바람구멍 나고 싶어?”
“그럼 어쩌자고!”
“기다려.”
“언제까지!”
“총알 떨어질 때까지.”
그게 전략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태금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두 손으로는 귀를 덮었다. 문득 손등이 축축해서 옆을 보니 로카가 자기 손을 핥고 있었다.
“저거 내 리볼버야. 탄창 다 채웠어도 여섯 발밖에 없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그렇게 무서워?”
“침착한 네가 더 신기하다, 난.”
“사냥도 했으면서 왜 이래.”
“사냥하는 거랑 사냥당하는 거랑 같냐? 애초에 난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도…!”
윤태금은 말끝을 흐렸다. 류진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미러를 통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모은을 보았다. 그는 방아쇠를 몇 번 당겨 보더니 리볼버를 버렸다.
드디어 탄환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류진은 자기가 차모은과 뒤엉켜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 가늠했다. 당연히 죽을힘을 다해서 싸울 생각이었다. 자기만큼 차모은도 필사적일 것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류진은 궁지에 몰린 사람이 얼마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는지 알았다. 그건 상식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힘이었다. 광성에서 장진까지 한달음에 날아와 자기를 찾아낸 신해범처럼.
그리고 곽현우.
류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차모은을 끝장낼 자신이 없었다.
이제 차모은의 손에는 칼이 있었다. 날이 안쪽으로 휘어진 카람빗 나이프였다.
가로등 불빛에 칼날이 번쩍거렸다. 류진은 차모은이 근접전에도 능하다는 걸 떠올렸다. 피를 철철 흘리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오는 차모은의 모습은 귀신이 따로 없었다.
망가진 봉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차량이 불길로 휩싸였다. 머리를 감싸 쥔 윤태금이 절규했다.
“총알만 떨어지면 된다며!”
“칼 있는 줄 몰랐네.”
“야!”
류진은 오토바이 키를 뽑았다. 벌떡 일어나 차모은에게 소리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공주야.”
“오지 마! 이거 던져 버릴 거야!”
키를 보여 주자 차모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피와 비로 젖은 얼굴이 기괴했다.
“그래. 우리 같이 뒈지자.”
정면에서 찔러 들어왔다. 류진은 황급히 물러났다.
차모은의 움직임은 다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현기증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 무작위로 휘두르는 수준이었으나, 기본 실력이 받쳐 주는 덕분에 무의미한 헛손질은 아니었다. 흥분 상태여서 그런지 힘도 좋았다.
차모은이 내리꽂은 칼이 오토바이 안장 시트에 박혔다. 윤태금이 비명을 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우와아악! 악! 아악!”
“도망가 등신아!”
“으아아악! 아악! 악!”
“미친놈아! 소리만 지르지 말고…!”
윤태금은 공황 상태였다. 그가 내뱉는 절규가 고막을 두들겨 댔다. 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누가 들으면 저놈이 칼 맞은 줄 알겠어.
“키는 나한테 있어. 그러니까 저 사람은 내버려 둬.”
“너 찔러 죽이고, 저 새끼도 죽일 거야.”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해?”
“네가 좆나 싫으니까.”
가슴이 조여 왔다. 차모은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탄환 수를 헤아리지 않고 리볼버를 갈겨 댈 때부터 알았다.
그러나 미쳐 버린 차모은을 가까이서 보는 일은 괴로웠다.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그랬다.
류진은 궁금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보스가 죽고 조직이 공중분해됐어도, 그래도 한때 동료였던 식구를 어떻게 남창으로 팔아 버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는 동안, 그는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을까.
류진은 묻고 싶었다. 차모은이 자신에게 질문했듯이.
자기를 조장으로 존경한 적 있었느냐고?
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인정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당신을 존경했고, 동경했다. 그래서 현우 형과도 이어 주려고 한 거다.
사실은….
귀여움받고 싶었다. 누나라고 한번 불러 보고 싶었다. 그건 <백사자>에서 하신성은 물론 곽현우조차 채워 줄 수 없었던 상실감이었다. 류진은 자기가 연상의 여성에게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류연비 또래의 여자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것만 봐도 눈길이 갔다. 쇼윈도의 여성복을 보면 자동으로 류연비가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신해범과 만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나를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신해범 때문에 인생이 너무, 너무, 너무나 고달파져서.
류진은 웃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울면서 웃었다. 오토바이 키를 든 손을 위로 쳐들었다.
“뺏을 수 있으면 가져가 봐!”
차모은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나이프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그러곤 앞으로 쓰러졌다.
윤태금이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자세로 서 있었다. 물론 손에 든 건 야구 배트가 아니라 길쭉한 나무토막이었다. 굵기가 어린애 허리통만 했다. 저런 건 어디서 났을까. 류진은 입을 벌리고 윤태금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무토막을 내던지고, 쓰러진 차모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류진은 칼을 들고 씩씩거리는 윤태금에게 물었다.
“죽이려고?”
“미쳤냐?”
윤태금은 끙끙거리며 차모은을 돌려 눕혔다. 그의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는 대신 귀를 대고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의식을 잃었지만 숨은 희미하게 붙었다.
“하씨… 죽었으면 어쩔 뻔했냐.”
지극히 상식적인 걱정이라 오히려 낯설었다. 류진은 오토바이 키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뒤에서 윤태금이 소리 질렀다.
“어디 가?!”
류진은 대답하지 않고 뛰었다. 지금 그에게는 윤태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해범이 강인우와 함께 굴러간 방향으로 뛰었다. 비에 젖은 몸이 무거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라는 건 하나였다. 신해범이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쓰러진 강인우의 뒷덜미를 잡고 내리막길을 걸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개선장군처럼 올라와 차모은을 때려눕히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해범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었다. 직접 데리러 가는 수밖에.
내리막길을 몇 번이나 넘어지고, 굴렀다. 팔꿈치와 무릎, 발바닥이 까지고 쓸렸다.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류진은 앞만 보고 달렸다.
장대비를 뚫고 달려간 곳에 신해범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였다. 그는 쓰러진 강인우 위에 올라탄 채였다. 상대방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는데도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금방 갈게….
“어딜 가!”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 온몸으로 부딪쳤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신해범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팍이 맞붙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심장 소리를 느끼고 안심했다. 그는 살아 있었다.
신해범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눈매를 휘며 웃었다.
부르튼 입술이 달싹거렸다.
“우리 꼬….”
류진은 신해범이 말하길 원치 않았다. 입만 열면 헛소리니까. 이런 놈은 말을 못 하게 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류진은 신해범의 멱살을 잡고, 잔뜩 트고 갈라진 입술에 키스했다.
<9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