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금은 젖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팔다리를 대자로 벌린 채 눈을 감았다. 빗방울이 눈꺼풀을 두들겨 댔다.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코끝에 피 냄새, 피 냄새, 휘발유 냄새가 맴돌았다. 온 세상에 연기와 불씨가 날렸다.
차들이 오고 있었다. 탑차를 쫓아간 마강희가 왕자 구출에 성공했고, 그가 요청한 지원군이 도착했음이라.
땅바닥에 누우니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윤태금은 몸 위로 쏟아지는 헤드라이트를 느꼈다. 찰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머리맡에 와서 멎었다.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윤태금은 내심 기대했다. 상대방이 부축해서 일으켜 줄 거라고. 그러나 기대한 친절은 없었다. 기우희는 누워 있는 윤태금의 머리를 걷어찼다.
“악!”
“일어나라고.”
“저 부상잡니다!”
“멀쩡하구만.”
부상자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기우희는 저만치 쓰러진 차모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안 죽었어요.”
“왜, 끝내 버리지.”
“그게 군인이 할 소립니까?”
기우희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낑낑 일어나 앉은 윤태금이 그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차 타고.”
“그런 질문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기우희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시끄럽고 복잡해서 머리 아파.”
“…그러네요.”
주위가 떠들썩했다. 사방에서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렸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이 내는 발소리, 말소리… 윤태금은 눈을 깜박거렸다. 기우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소령님.”
“왜?”
“이것 좀 받아 주시겠습니까.”
기우희는 잠자코 윤태금이 내미는 칼을 받았다. 날이 안으로 휘어진 카람빗이었다.
“저기 쓰러진 사람한테서 뺏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 들고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서요.”
“그런 주제에 사냥은 잘도 했군.”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죠.”
바닥에 주저앉은 윤태금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총은 쏘지만 않으면 괜찮고, 그땐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알았으니까 닥쳐.”
너무하십니다. 중얼거린 윤태금이 히죽 웃었다.
“소령님, 저 일어나게 손 좀.”
“지랄한다.”
“아, 저 진짜 다리에 힘 풀렸습니다. 혼자서 못 일어나겠다고요.”
기우희는 끝끝내 손을 빌려주지 않았다. 윤태금은 비척비척 일어나 섰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내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아.”
윤태금은 한 손을 들었다. 마강희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그의 몸을 적시지 않고 튕겨 나가는 듯해 윤태금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환각까지 보다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마강희는 얼굴에 긁힌 상처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멀쩡했다. 윤태금이 코를 훌쩍이며 그에게 안겼다.
“아, 살살 좀. 죽겠습니다.”
“사지 멀쩡한 놈이 엄살은.”
그래도 한 지붕 식구라고, 마강희는 어깨를 빌려줬다. 윤태금은 평소 그가 쌀쌀맞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걸 취소했다. 기우희에 비하면 이쪽은 성모 마리아였다. 월궁항아였다.
윤태금은 마강희의 도움을 받아 트럭에 올라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타박상 정도는 자가 치료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4.5톤짜리 화물차 짐칸은 넓고, 의료용품이 갖춰졌으며, 바닥에 푹신한 담요가 깔린 데다 천막이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내부에 조명등도 켜서 밝았다.
손등의 생채기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데 문득 생각났다.
“그 아저씨는요? 선배님이랑 같이 간.”
“음.”
“죽었습니까?!”
“죽을 뻔했지.”
금발 남자는 오른팔 골절, 왼쪽 넓적다리 골절이었다. 급커브 구간에서 중심을 잃고 낙상을 입었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 살았으면 됐죠. 저도 머리 깨질 뻔했습니다.”
마강희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차간 거리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었어.”
“상황이 상황이었잖습니까. 저는 선배님 백 번, 천 번 이해합니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가락이 경련했다. 윤태금은 마강희가 겉으로는 의연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쪽도 많이 치열했습니까?”
“상당히.”
“왕자님은 어떠십니까? 설마 그 차에 없었던 건 아니죠?”
“그랬다면 지금 내가 여기 없겠지.”
“하하.”
마강희의 목소리는 푹 잠겨 있었다.
“목숨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야. 그래도 상태가 좋진 않아.”
“혹시 우리 검은 옷 입어야 하는 건….”
악! 윤태금은 얻어맞은 이마를 문질렀다.
“단체 순장 당하고 싶냐.”
“아니 그냥 걱정돼서.”
“조심해라. 너 언젠가 한 번은 주둥이 때문에 피 볼 거 같다.”
권세혁은 살았다. 그러나 빈말로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왕자는 혼수상태에서 긴급 이송되었다. 마강희는 지금쯤 그가 수술에 들어갔을 거라고 했다.
“수술요?”
“허벅지 총상이 심해.”
마강희의 표정은 어두웠다. 육안으로 쓱 보기에도 상처가 심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푹 잠겨 들었다.
현장에서 응급 처치를 한 정수헌 주치의가 지금 장두현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세혁의 회복 여부에 여러 사람 목숨이 달렸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래도 우린 괜찮겠죠. 특히 선배님은 왕자님 구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사자 아닙니까.”
“김동균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벌써 잊었어?”
“아….”
그러니까 우린 여길 떠야 해.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어쨌든 신해범한테 철썩 붙어야 한다고.
마강희가 빠르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윤태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선택권이 없네요.”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윤태금은 한숨을 삼켰다. 신해범의 등에 매달려서 빗길을 질주할 땐 솔직히 후회했는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장두현은 꽉 찬 달이고 신해범은 여명이었다. 이제 기울어질 날만 남은 만월과 밝아 오는 새벽 중에 누구를 택하겠는가.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졌다. 윤태금은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 너머를 응시했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주홍빛 여명이 검푸른 하늘을 밀어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어이.”
어깨를 툭 치는 마강희의 손길에 윤태금은 고개를 돌렸다.
“…….”
그들이 오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서로에게 의지해 걸어 올라오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윤태금의 시야에 담겼다.
신해범과 정류진.
정류진과 신해범.
둘 다 상처투성이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머리카락과 옷이 얼굴과 몸에 착 달라붙었고,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며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해범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병들을 거부했다. 오직 정류진의 부축만 받았다. 윤태금은 그가 미소를 띤 모습에 놀랐다.
“어떻게 저러냐.”
“뭐?”
“신기해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신해범은 지쳤다. 누가 봐도 그랬다. 얼굴도 창백하고 걸음걸이도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저거 보십시오. 입술이 귀에 걸렸습니다.”
신해범의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정류진이 악을 썼다. 정류진이 빽빽거릴 때마다 마른 몸이 휘청거려서, 그 마른 몸에 의지한 신해범도 함께 비틀거려서, 윤태금은 두 사람이 함께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
기우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달려가서 부축하기는커녕 괜찮으냐고 소리쳐 묻지도 않았다. 윤태금은 그런 기우희가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한 손에 카람빗을 움켜쥔 그가 손등으로 뺨을 문질러 닦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기우희가 냉정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는 게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소령님!”
기우희를 발견한 정류진이 멈춰 섰다. 기우희는 그제야 움직였다. 칼을 허리춤의 홀스터에 꽂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그가 신해범의 반대쪽 팔을 잡아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정류진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다.
녀석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미소 지었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엿들을 수 없었다. 빗소리와 다른 소음들 때문에. 거리도 멀고.
“궁둥이에 털 안 나나.”
윤태금이 투덜거렸다. 괜스레 억울했다. 자기가 저 틈바구니에 못 낀다는 사실을 알아서.
왕자 일행이 처음 내려왔을 때 느껴졌던 부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것의 원인을 인제는 안다. 기우희와 정류진 사이, 저곳은 신해범의 자리였다. 권세혁이 아니라.
마강희가 상자에서 물과 약, 붕대를 꺼냈다. 먹을 것도 있었다. 한 손을 입에 대고 확성기처럼 만든 그가 기우희를 불렀다.
“기우희 소령!”
극적으로 상봉한 이산가족 셋이 트럭으로 걸어왔다. 윤태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류진에게 손짓했다.
“안쪽으로 들어와. 어이구, 우리 류진이 몰골이 말이 아니네.”
“왜 이래?”
“비 맞는다. 안쪽으로 들어와.”
살기 위해서 그를 챙겨야 했다. 윤태금은 생수와 초콜릿 바를 챙겼다. 손수 물통 뚜껑을 따고, 초콜릿 바 껍질을 벗겨서 류진의 양손에 각각 쥐여 주었다.
“뭐야?”
윤태금은 활짝 웃었다.
“괜찮아. 먹어, 먹어.”
“…….”
“왜 안 먹어?”
류진은 윤태금을 무시하고 마강희에게 물었다.
“세혁이는요?”
마강희는 조금 난처해했다. 왕자의 부상이 심하다는 사실을 정류진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감춰야 하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고 괜찮은 게 아니니까.
“류진아.”
윤태금은 마강희를 보는 정류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자기 쪽으로 돌렸다.
“뭐, 뭐야!”
“왕자님은 벌써 구출했어. 지금 수술 중이란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딱! 너만 챙기면 돼. 응? 너는 너를 좀 걱정해야 해.”
“뭐라는 거야….”
“스읍! 형 말 들어.”
“형 같은 소리…! 이거 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팔짱을 낀 기우희가 이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머쓱해진 윤태금은 류진의 얼굴을 놔주었다.
“그거 먹어.”
“지금 배 안 고파.”
“그래도 먹어. 우리 에너지 충전해야 해.”
윤태금은 생수와 초콜릿 바를 기우희에게, 또 신해범에게 내밀었다.
“준장님도 이거… 엇.”
신해범의 부상이 심했다.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찢어져 허연 뼈가 드러났다. 왼손 엄지는 골절이었다.
“건드리지 마.”
“아니 이거 좀 심각한데요?”
“호들갑 떨지 마.”
기우희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윤태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신해범의 얼굴 상태는 심각했다. 멍과 타박상은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만, 퉁퉁 부어오른 오른쪽 눈두덩은 뼈나 눈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와….”
“감탄은.”
“준장님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데요.”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 그놈은 어떻게 됐겠어?”
윤태금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신해범이 키득키득 웃었다.
“최소 뇌진탕, 최대 식물인간.”
죽이진 않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윤태금은 한숨을 푹 쉬었다. 뇌진탕에 식물인간이라. 그것도 운이 좋아야 사는 거고, 최악의 경우는 사망이었다. 어쩌면 봉고 운전석에 있었던 그 여자도….
나무토막은 도로 가장자리, 가드레일 바로 밑에 떨어졌다. 숲속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것이 비에 쓸려 내려온 모양인데 그게 왜 하필 자기 눈에 띄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윤태금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뒷맛이 씁쓸했다.
“여기서 쉬고 있어. 난 밖을 살펴볼 테니.”
마강희가 트럭을 끌고 떠났다.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을 느낀 윤태금이 고개를 돌렸다. 기우희였다.
“왜 그러십니까?”
“나와.”
윤태금은 기우희에게 팔뚝을 붙잡혀 끌려 나왔다.
현장은 아직 수습 중이었다. 간밤의 추격전이나 치열했던 싸움의 흔적을 전부 지워야 했다. 아침이 머지않았다. 곧 해안 도로를 오가는 차들이 몰려올 것이다.
우선은 일대에 도로 보수 공사 표지판을 세워 두었다. 산에서의 폭발이나 <연운사>에서 벌어진 참극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수습을 할 수나 있을까. 신해범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날뛰다 저 지경이 됐고, 장두현은 왕자의 부상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텐데.
생각하니 두통이 몰려왔다. 윤태금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산 넘어 산. 호랑이 피해 달아난 곳에 반달가슴곰.
접어 올린 천막을 내려 짐칸 입구를 가린 기우희가 트럭 앞칸으로 갔다. 조수석에 타도 괜찮을지 망설이는데, 그가 뭘 멀뚱멀뚱 서 있느냐고 다그쳤다.
“아, 예. 예.”
허둥지둥 올라탔다. 다행히 자리는 비었다.
윤태금은 전면 유리를 응시했다. 빗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지만 현장은 그럭저럭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여기.”
“아. 감사합니다.”
윤태금은 기우희가 내민 타이레놀과 생수를 받았다. 알약은 씹지도 않았는데 쓴맛이 났다. 기우희는 운전석 문을 열어 둔 채 담배를 피웠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음인지 그가 담뱃갑을 쓱 내밀었다.
무심코 거절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윤태금은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아.”
라이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절에서. 자세한 생각은 하기 싫었다.
“저, 소령님….”
“귀찮게 하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웠다. 마침내 윤태금이 불편해서 미쳐 버리겠다, 싶어질 때쯤 기우희가 불쑥 말했다.
“어디까지 알아?”
“뭘요?”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고? 저기 개들도 안 믿을 소리.”
기우희가 담배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사병들에게 응급 처치를 받는 가르토와 지쳐 잠든 로카가 있었다.
“음… 저는 그냥….”
담배를 든 손가락이 떨렸다. 긴장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 윤태금은 심호흡했다.
“긴장했군.”
에라.
“그냥, 재밌는 것 같습니다.”
“재미? 뭐가?”
“준장님이랑 류진이가요.”
“…….”
“제가 타고나길 호기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에디슨도 어린 시절에 호기심이 엄청 많아서 주변 사람 힘들게 하고 그랬다던데. 뭐 제가 그런 위인에 필적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본론만 말해.”
“재밌는 건 관찰 욕구를 자극하죠.”
“내 상관과 부관을 싸잡아 동물원 원숭이 취급하는군.”
윤태금은 요란하게 기침했다. 담배 연기가 잘못 넘어갔다. 기우희가 혀를 쯧, 차더니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소령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이해했어.”
“…….”
“그런데 난 여전히 네가 싫다.”
“왜 저를 싫어하십니까? 진압 차량 함부로 만진 건 죄송합니다.”
“꼭 그것뿐만이 아니야.”
기우희는 밝아 오는 하늘을 봤다. 곰 같은 덩치로 소년처럼 웃던 놈이 생각났다. 성재경.
“근본적으로 성분이 다른 건 안 섞여.”
“출신 성분 얘깁니까? 보시다시피 저도 귀족은 아닙니다. 뭐 누님 말씀으로는, 우리 어머니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왕족의 외척의 친척의 뭐가 나온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면 남남이죠. 오히려 신분이라면 소령님께서….”
싸늘한 눈빛에 윤태금은 침묵했다.
“호기심, 재미,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는 안 돼.”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십시오. 분위기 좀 풀어 보려고 한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신해범 준장님의 칼 같은 결단력과 즉각적인 위기 대처 능력, 적재적소에 알맞은 처세술에 감동하여….”
“너는 곱게 큰 티가 나.”
“…….”
“손바닥 잘 비비는 타입도 아니고.”
순간 어떤 생각이 윤태금의 뇌리를 스쳤다.
그것에 분명한 형태는 없었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윤태금은 자신을 엔지니어이자, 테크니션이자, 뛰어난 디벨로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감을 신뢰해야 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니까. 과장 조금 섞어서 24시간 내내.
“선착장에서 대관과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지.”
기우희는 신해범이 보낸 감시역이었다. 만에 하나 장두현이 실종자들을 찾아냈을 경우, 그가 정류진을 건드리는 일을 막고자.
그러나 실종자들은 이쪽에서 찾았다. 그렇다고 어젯밤 내내 장두현이 호화 요트 갑판에서 선상 파티를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그 숲에 궁금한 게 있었거든.”
윤태금은 마른침을 삼켰다.
“<힐 스톤 그로우>는 평범한 사냥터가 아니지. 비단 밀수한 동물들 얘기가 아니야. 그곳엔 사람도 묻혀 있어. 장두현 대관의 뜻에 반한 사람들. 그의 비즈니스에 걸림돌이 된 사람들. 정수헌에서도 꽤 있었지?”
“그런 이야기는, 마강희 선배님께서?”
“누구 입에서 나온 소린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궁금한 게 있었어. 기우희가 다시 한번 말했다.
“유령들 시체도 거기 있는지.”
사전적인 의미의 ‘유령’이 아니었다. 총통의 피를 이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외가의 힘이 대단치 않아 승계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는 아이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낳은 여성들.
가명으로 산골 벽지에 숨어 살며, 출생 신고는 기본적으로 한두 해 늦게 하고, 2차 성징이 시작될 때까지는 반대 성별처럼 보이게 옷을 입힌다.
윤태금은 기우희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조금 똑똑하고, 강하고, 운이 좋은 유령이야.”
이제 알겠다. 아까 느낀 게 무엇이었는지.
윤태금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조수석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윤태금이 능청을 떨었다.
“비 그친 줄 알았는데, 아직 내리네요.”
“…….”
“소령님. 전 재미로 일을 한다는 표현이 나쁘다고 생각 안 합니다. 물론 장난처럼 들릴 수는 있겠죠. 하지만 자고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즐기는 놈이라서요.”
그는 검지로 미간을 긁적거렸다.
“이 나라는 말입니다, 좀 더 많은 인재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줘야 할 필요가 있어요.”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한 이야기도 준비되었다. 아까 여명을 배경으로 함께 있던 당신들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그 사이에 끼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사람이 너무… 가벼워 보이니까.
“커다란 선택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알고 있습니다.”
윤태금은 정치가 싫었다. 서로 다른 이념의 대립, 같은 스쿼드 안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신경전, 기 싸움. 그런 것들이 싫었다.
그러나 사람이 큰물에서 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누나가 싫어하는 날건달 같은 말투를 바꾸고, 독단적인 성격을 개선했다. 줄 서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처세술을 익혔다.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여 꼭대기에 설 수 없다면, 뭘 어떻게 해도 몸통이 최선이라면, 어쨌든 누구 하나는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면, 왕두(王頭)가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권세혁과 기우희….
자신은 이미, 장두현과 신해범 중에서 신해범을 골랐다. 지금 상황에서 달리 무슨 선택을 하겠는가?
신해범은 왼손을 좌우로 돌려 보며 웃었다. 분명 다친 건 엄지손가락 하난데, 어찌 된 일인지 부목이 손목까지 닿았다. 오른쪽 어깨도 마찬가지였다. 붕대를 팔꿈치까지 감아 놓았는데 어찌나 친친 동여맸는지 피가 통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팔이 무거워서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놓고 세상 뿌듯해하는 정류진을 보고 있으려니 그의 머리부터 집어삼키고 싶어졌다.
신해범은 남은 붕대와 거즈를 둘둘 말아 정리하는 류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왜?”
“최유신이 이따위로 가르쳐 줬냐.”
“튼튼하게 잘됐는데? 생트집 잡지 마.”
“사람을 아주 미라로 만들어 놨어.”
“어, 어차피 응급 처치잖아. 병원 가서 제대로 해 달라고 해.”
“이게 과대 포장은 아니고, 뭐라고 하냐. 과장 치료? 의료 비품 낭비가 따로 없네. 물자 좀 아껴 써라, 꼬꼬야.”
“불만이면 딴 사람한테 해 달라고 해라!”
류진은 홱 돌아앉았다. 윤태금이 쥐여 주고 간 초콜릿 바, 신해범을 치료하느라 잠시 한쪽에 밀쳐 뒀던 음식을 도로 집었다. 어디까지나 살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하며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목덜미에 달라붙는 시선이 따갑다.
“세혁이 있잖아….”
“살아 있지.”
“그래. 그래서 좆나게 다행이고 안심돼. 당신은 한심하게 생각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근데 지금 그 소리가 아니고, 이제 걔는 내가 <백사자> 조원이었다는 걸 알아.”
“그래.”
“그래?”
혀 밑이 뜨끈해졌다. 류진은 입 안에 남은 것을 꿀꺽 삼켰다.
“대답이 그게 다야?”
“너는 불안한 이유가 뭐야?”
“걔는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미움받는 게 무섭냐, 아니면 친구 놀이 끝난 게 아쉽냐?”
류진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천하태평 신해범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직시해야 했다.
“당신한테도 영향이 갈 거야. 나 같은 걸 왕자한테 붙였으니까.”
“우리 꼬꼬한테 푹 빠져서 눈 뒤집힌 건 MVP 본인이야.”
“날 꼬리 자르기 했다가는…!”
“오. 그 방법은 생각 못 했네.”
“뭐라고?”
“정류진 손절매도 괜찮은데? 원래 내 주종목이 배신 때리기가 맞긴 해.”
“지금 뭐… 라고….”
신해범 쪽으로 몸을 돌린 류진의 얼굴이 창백했다.
“나를… 뭐?”
신해범은 웃기만 했다. 한쪽 눈이 퉁퉁 부은 채 싱글거리는 얼굴이 흐릿하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 때문이었다.
“이, 이, 이 나쁜 놈아.”
“너무 서러워하진 마. 시신은 거둬 줄게. 우리 꼬꼬 사형당하면 박제로 만들어서 가지고 놀아야지.”
죽인다. 죽여 버리겠다.
류진은 신해범에게 달려드는 상상을 했다. 그의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고 싶어졌다. 그러나 상상에서 그쳤다.
팔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와중에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 개… 이 나쁜… 날 속였어. 이 개새끼가….”
그때 신해범이 달려들었다. 류진은 한 손에 초콜릿 바를 쥔 채 쓰러졌다. 나동그라진 류진을 두 팔 안에 가둔 신해범이 킬킬댔다.
“확실히 우는 얼굴이 예뻐.”
“죽어 버려. 죽어. 죽어 버려 이 나쁜 새끼. 후레자식.”
부목을 댄 왼손이 뺨을 쓸었다.
“어쩌면 이렇게 꼬질꼬질한데도 예쁘냐.”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진짜 군침 돌게 생겼어, 너. 홀딱 벗겨 놓고 감상하고 싶은데 여기선 좀 그렇겠지? 갑자기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소리도 그렇고.”
신해범은 그렇게 말하며 류진이 쥐고 있는 초콜릿 바를 빼앗았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맛도 없네. 이게 밥이냐?”
“줘!”
“진짜 맛없다. 이런 걸 초콜릿이라고 하면 안 되지. 그냥 비상용 에너지 보충제라고 해야지. 포장지에 이렇게 써 놓으면 사기야, 사기.”
류진이 두 손을 붕붕 휘저었다.
“안 궁금해! 내놔! 내놔! 왜 남이 먹던 걸 뺏어 가?”
“방금 들은 헛소리는 잊어버려.”
초콜릿 바를 내던진 신해범이 류진의 몸 위로 엎어졌다. 그는 아직 덜 말라 축축한 옷 속으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상의를 단번에 목까지 걷어 올렸다. 피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류진의 젖은 피부에서 희미하게 샤넬 블루의 냄새가 풍겼다.
“내가 원래 좀 미쳤잖아.”
“그딴 변명…!”
“정류진을 버리느니 욕조에 코 박고 죽을래.”
쇄골에 입술을 묻은 그가 키득거렸다. 버둥거리는 다리 사이로 신해범의 몸이 파고들었다. 단단하고 무거웠다. 류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너무 예뻐.”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쇄골을 핥던 혀가 밑으로 내려가더니 뜨거운 입술이 유두를 덮었다.
“으….”
류진은 주먹 쥔 손으로 신해범의 어깨를 때렸다.
“하지 마.”
“으으응.”
젖꼭지를 문 채 미소 짓는 신해범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만, 좀. 조옴.”
“좀 먹어 보자, 배고픈데.”
“난 먹을 게 아니잖아….”
“다른 건 안 먹고 싶어.”
“유치하게 왜 이래, 진짜!”
“내가 유치해?”
신해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유치해지지, 뭐.”
그는 류진의 다리를 넓게 벌리면서 파고들었다.
“이잇…!”
“근육이 없어서 그래.”
오른손으로 마른 허벅지를 움켜잡은 신해범이 말했다.
“뼈밖에 없는 다리로 뭘 하겠어, 이 말라깽이야.”
웃으면서 하반신을 문질렀다. 옷 밖으로도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살덩이에 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곳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천막을 올리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애초에 한 장짜리 자바라 천막은 얇아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소리가 안에서도 다 들렸다.
“하지 마. 하지 마.”
류진이 발버둥 쳤다.
“진짜 하지 마. 여기서 이러면 당신 진짜 쓰레기야. 짐승이야. 진짜 인간 이하라고…!”
“내가 원래 좀 쓰레기잖아.”
가는 목에 얼굴을 묻고 뺨을 비볐다. 매끄러운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게 느껴졌다.
신해범은 이게 좋았다. 류진이 자기를 무서워하는 게. 정복당한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팔다리를, 허리를, 목을 바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리는 게.
하얀 가슴팍에 꼿꼿하게 솟은 유두를 어느 쪽부터 먹을까, 생각하다 둘 다로 정했다. 왼쪽 유두를 입술로 빨면서 오른손으로 반대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 상처가 지끈거렸지만 지금은 통증보다 허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전쟁에서 승패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식량 보급이다. 병사가 배고프면 아무리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하지 마, 진짜… 하지… 아.”
부드러운 살을 이로 잡아당기자 정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땀방울이 긴 모가지를 타고 흐른다. 움푹 파인 쇄골에 담긴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핥아 먹었다. 맛있었지만 갈증을 채우기에는 너무 적은 양이었다.
정류진은 더 많이 울어야 했다. 위로도 아래로도. 펑펑 울고 흐느끼고 사정하다, 끝내 기절해 늘어져 버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허리 아래가 묵직해졌다.
입술을 오므려 젖꼭지를 힘껏 빨았다. 정류진이 낑낑거렸다.
“하지 말라고 했다….”
제 딴에는 협박이겠지. 자기가 으르렁거리는 맹수라고 생각하겠지.
평생 그렇게 착각하고 살아라. 네가 사실은 작고 약한 병아리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놈이 있다면, 입술 벙긋하기도 전에 대가리를 물어뜯어 버릴 테니까.
“너무 무서워서 손발이 덜덜 떨리네.”
“끝까지는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럼 어디까지 되는데. 우리 각하께서 명령해 보십시다.”
긴장한 시선이 부딪쳐 왔다.
“보는 것만….”
“그럼 다 벗어. 속옷까지 싹 다 벗고 다리 벌려. 내가 세 번 뺄 때까지 그대로 있어. 무릎 오므리거나 손으로 가리기 없어.”
“시, 싫어!”
“그럼 얌전히 있으시든가.”
송곳니를 세워 유두를 깨물자 정류진이 악, 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라 아랫입술을 깨무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앞칸에 기우희와 윤태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분리된 공간이지만 큰소리를 내면 들킬 것이다.
근데 솔직히 들켜도 상관없거든. 기 씨든 윤 씨든. 둘 다 내가 명령하면 너를 홀딱 발가벗겨서 밥그릇에 담아 식사하십시오, 하고 대령할 놈들이란 말이야.
“좀…! 사람이 다쳤으면 좀, 가만히 있어! 손가락 못 쓰게 되면 어떡할 거야!”
“배고파서 그러는데 참 야박하다.”
“나한테 이런다고 배가 채워지냐?!”
“채워지고말고.”
강인우와 뒤엉켜 구를 때에는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 강해지고 빨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정류진의 입맞춤 한 번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에 이를 박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왼손을 아래로 뻗었다. 엄지에 댄 부목이 거추장스러웠다. 마음은 이미 녀석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노닐고 있는데. 갈증과 초조함에 혓바닥이 바싹바싹 갈라졌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이며 어깨, 쇄골을 마구 깨물고 핥았다.
“아파, 아프다고….”
유두가 퉁퉁 부어올랐다. 잇자국이 선명한 피부 위에 또다시, 뜨거운 입술이 앉았다
“아. 아.”
고개를 좌우로 젓던 류진이 무릎을 세웠다. 긴장한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린다.
“그만 좀… 으응. 안 돼.”
류진은 잔뜩 발기한 성기를 비벼 대는 신해범의 귀를 붙잡았다. 그제야 고개를 드는 신해범의 눈을 응시했다. 번들대는 검은자에 갈증과 허기가 이글거렸다.
“하지 마. 당신 움직이면 안 돼.”
“배고파서 그래.”
류진은 신해범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눈이….”
오른쪽 눈썹 뼈부터 눈두덩, 눈 밑 광대뼈까지 온통 검붉은 멍이었다. 신해범은 오른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아랫도리를 비벼 대다니.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추잡했다. 그래서 신해범다웠다.
“앞에 보여?”
“정류진 예쁜 얼굴이 아주 잘 보여.”
“잘 뜨지도 못하잖아.”
실명하는 거 아니지? 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쪽 눈이 멀면 반대쪽 눈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다.
“눈깔 하나 없다고 너하고 섹스를 못 할까.”
“미친놈이 진짜…!”
류진은 신해범의 벨트를 움켜잡았다.
“오.”
“시끄러… 가만히 있어.”
더듬더듬 벨트를 풀었다. 헐렁해진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자 신해범의 어깨가 경련했다.
“우와.”
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만이야. 두 번은 절대 없어. 그리고 딴 데 가서 이거 얘기하면 가만 안 둬.”
손바닥이 뜨거웠다. 내용물은 거대하고 두툼하고 딱딱했다. 한 손만으로는 버거워서, 류진은 나머지 한 손까지 신해범의 바지 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움직이지 마. 잘 안 되잖아….”
“머리 터질 것 같아.”
“뭐?”
“멈추지 마!”
류진이 목을 움츠렸다. 버럭 소리쳤던 신해범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계속해. 멈추면 네 손모가지 잘라서 내 좆에 붙이고 다닌다.”
저질스러운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손을 빼고 내 위에서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그랬다간 정말로 손모가지가 절단 날 것 같았다. 류진은 이를 악물고 손을 움직였다.
후회됐다. 모든 게.
신해범에게 키스한 것도, 손가락과 어깨를 치료해 준 것도, 눈을 걱정한 것도, 전부 다.
신해범이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났다.
“나쁜 놈… 이 나쁜 놈아….”
“너무 좋아.”
달아오른 얼굴에 뜨거운 숨이 닿아, 류진은 머리부터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행복해.”
“어?”
“기분 좋아서 미쳐 버리겠다고.”
신해범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지금 당장 정류진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파고들 수 있다면 눈 하나를 영영 잃어도 괜찮겠다고.
그는 거친 숨을 터뜨리며 류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좋다….”
잇자국이 선명한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한 손으로는 부어오른 유두를 만졌다. 허옇고 마른 몸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이끄는 부위였다. 자꾸만 눈이 가고, 빨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아프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도 듣기 좋고.
“아… 하. 으음.”
“기, 기분 좋아?”
“음.”
“내가 자,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좋아.”
사실은 서툴렀다. 마음 같아서는 바지 벗겨 앉히고 뒤에서 끌어안아 다리를 쫙 벌려 놓은 다음, 자위하는 법부터 다시 가르쳐 주고 싶었다. 신해범은 류진을 펑펑 울릴 자신이 있었다. 조그만 얼굴이 새빨개져서 제발 그만하라고, 놔 달라고 싹싹 빌게 만들고 싶었다.
정류진이 울면 나는 선심 쓰듯 엎드려 누우라고 할 것이다. 뽀얗고 탱탱한 엉덩이를 쥐고 주무르면서 귀에 대고 속삭이겠다. 겨우 그 정도 솜씨로 나를 ‘가게’ 할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지금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돼서.
지금은 이놈의 심장 박동과 숨소리만으로 충분해서.
“진짜 좋아…?”
“으음.”
좋다. 널 갈아 마시고 싶을 만큼.
그렇게 말하면 분명히 나쁜 놈이라고 하겠지.
신해범은 욕먹는 게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류진이 여기서 그만두면 뇌가 폭발할 것 같았다.
그는 입을 다무는 대신 코앞에 있는 류진의 보드라운 귓불을 물었다. 귓바퀴를 핥아 올리고 귀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하지 마… 간지러.”
신해범은 쿡쿡 웃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움찔움찔하는 류진이 귀여워서. 은근슬쩍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랫도리가 느껴져서.
“우, 웃긴. 그렇게 좋냐?”
“그래. 좋아.”
귀를 핥던 혀가 관자놀이로 올라갔다. 류진은 오싹한 기분에 어깨를 움츠렸다.
“거기 싫어….”
“일부러 하는 건데.”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너 여기 건드리면 낑낑대잖아. 그게 좋아.”
새끼를 핥아 주는 어미가 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종(種)이 다르다는 사실이었지만 신해범은 개의치 않고 혀를 놀렸다. 호랑이가 병아리 키울 수도 있지, 뭐.
“신해범. 있잖아.”
“왜?”
“지금 기분… 얼마나 좋은지, 말해 봐.”
신해범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다. 지금 그가 어떤 기분인지, 확실히 느끼는지 궁금했다.
처음 손댈 때부터 단단했던 성기는 부피를 점점 키워 갔다. 끄덕거리는 놈을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류진은 용기를 내 한 손으로 기둥을 잡고, 반대편 손을 아래로 밀어 넣어 불알을 주물렀다. 손가락에 까칠한 체모가 엉켰다.
“이거 좋아? 응?”
신해범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넓고 단단한 어깨가 씨근거렸다. 얼굴에 닿는 숨결이 뜨겁다.
“응? 좋냐고… 말을 해.”
신해범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류진은 그가 자기 손에서 흥분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드디어 신해범을 지배하게 된 것 같았다.
“뭐야. 왜 말이 없어.”
기둥을 훑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류진은 신해범에게 귓불을 물어뜯겼다.
“악!”
“까불지 마.”
“이…!”
류진은 손목을 앞뒤로 세게 움직였다. 복수할 생각이었다. 어디 한번 당해 봐라, 이 나쁜 놈. 지금 자기 급소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알려 주마.
신해범은 아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어금니를 악문 채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넓고 단단한 어깨를 떨면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류진이 승리감에 취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신해범은 아파하는 게 아니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였다.
“아! 아!”
그가 무게를 실어 아랫도리를 짓눌렀다. 옷 속에서 손을 빼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류진은 발버둥 쳤으나, 두 손으로 고스란히 받아 냈다.
“아….”
손바닥에 정액이 흥건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도 엉켰다. 신해범의 것은 양도 많고, 냄새도 진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류진에게 말했다.
“계속 주물러.”
“방금 갔잖아…! 난 한 번이라고 말했어!”
“계속 만지라고!”
길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퉁퉁 부은 유두를 잡아당겼다. 사정없는 손길에 류진이 신음했다.
“이거 뜯기고 싶어?”
“아, 아니.”
“그럼 해.”
류진은 훌쩍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발기한 좆을 움켜잡았다. 제 딴에는 아프라고 힘주어 세게 쥐었는데도 신해범은 끄떡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다며 흥흥거렸다.
“흔들어.”
“손목 저려….”
“안 흔들어?”
“이번이 진짜로 마지막이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왜 몰라? 이거 당신 거잖아!”
신해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슴팍으로 더운 숨이 쏟아졌다.
어느새 신해범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를 누르고 있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비벼 댔다. 딱 기분 좋을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류진은 그가 자신의 사정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아…!”
신해범이 눈을 내리깔았다. 류진의 관자놀이 상처에 입 맞춘 그가 빙그레 웃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밑에서 치미는 흥분감에 눈앞이 아찔해, 귓가에 속삭이는 신해범의 저음은 드문드문 끊어져 들렸다.
***
불투명한 욕실 문이 열리고, 구은하의 부름이 들렸다.
“류진아. 씻어.”
류진은 머그잔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일어섰다.
“네.”
일회용 슬리퍼를 찍찍 끌며 나오는 구은하의 바지 밑단이 젖어 있었다. 류진은 수건으로 손을 닦는 그에게 사과했다.
“왜? 뭐가?”
“그냥… 챙겨 주셔서요.”
“응?”
“그게 로비에서도, 엘리베이터에서도. 저 냄새 지독했을 거 같은데. 또 저렇게 목욕물도 받아 주시고….”
“아, 응.”
구은하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 시중 들어서 풍기대에 한자리 꿰차 보려고. 이따가 오빠 오면 얘기 잘해 줘야 한다. 나중에 예나 언니한테도.”
“네?”
“농담이야.”
자세히 보니 웃을 때 인디언 보조개가 팬다.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발랄한 인상이 느껴져서, 류진은 자기도 모르게 구은하를 따라 웃었다.
“여기 계신지 몰랐어요.”
“꽤 다방면으로 일하고 있어. 내가 좀 멀티형이거든.”
구은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적인 자리에 이름 올라가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행동에 제약을 더 많이 받아. 주변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신해범을 말하는 듯싶었다. 류진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트럭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직도 손바닥에 신해범의 정액이 묻은 듯했다.
신해범을 잊기 위해 권세혁을 생각했다. 윤태금은 그가 구조되어 수술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그는 이 나라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다. 대단한 실력을 갖춘 의료진이 총출동해 다치기 전처럼 말끔하게 고쳐 놓을 것이다. 그의 다리는 분명히….
“혹시 옷 벗기 어려우면 도와줄까?”
구은하의 짓궂은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류진은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저었다.
욕실로 들어갔을 때, 뽀얀 수증기가 덮쳐 왔다. 향긋한 비누 냄새도 났다. 샤워기로 머리를 적시고 샴푸를 짜 거품을 내는데 왈칵 눈물이 솟았다.
류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해범이 보고 싶었다. 구은하로는 부족했다.
콧등이 시큰해졌다. 신해범이 보고 싶은 만큼 원망스러웠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호텔에 머물 수 없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차라도 잠깐 마시고 가지. 아니면 커피.
샴푸를 헹궈 내는데 노크가 들렸다. 류진은 허둥지둥 욕조로 들어갔다.
“네, 네!”
“깜빡하고 얘길 못 해서. 저기, 가운이랑 새 속옷 좌변기 위에 뒀거든? 오른쪽에 문 열면 보여.”
미처 다 씻어 내지 못한 샴푸 거품이 뚝뚝 떨어졌다. 어깨까지 차오른 물이 찰랑거렸다.
“감사합니다….”
“뭘. 깨끗이 뽀득뽀득 잘 씻고 나와.”
“네.”
구은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소파로 걸어가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쟤 운다.
신해범에게 할 일이 많다는 건 알았다. 복잡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정류진을 보호하라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혹시 모르니 룸서비스는 이용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으로 조촐하게 허기를 달랬다. No Disturb 버튼을 누르고 돌아와 정류진 몫의 토마토주스를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문득, 신해범이 저 욕조에서 한 짓이 생각났다.
정류진은 울고 있었다. 분명.
애초에 남자애가 목욕을 저렇게 조용히 하나? 사람이 들어갔는데 어째 물소리도 안 들려?
“아!”
노크고 나발이고 중요하지 않았다. 구은하는 냅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정류진이 양손 가득 거품을 모아 들었다.
“어… 어….”
“너 뭐 해?”
“아, 그. 이게. 이거, 여기 누르면 거품이 나와서요. 신기하죠?”
구은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장난칠 때 아니라는 거 아는데 신기해서. 한 번만 해 본다는 게, 거품이 너무 부드러워서. 죄송해요.”
“아냐. 됐어. 씻어….”
“그런데 누나.”
“어.”
“진짜 죄송한데… 신해범 언제 온다는 말 없었어요?”
구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뽀얗게 서린 김 사이로, 발간 얼굴의 예쁜이가 두 눈을 깜박깜박.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구은하는 욕조 가까이 다가갔다.
“왜? 불안하니?”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요.”
“정확히 언제 오는지는 나도 못 들었어.”
“네….”
“그래도 계획 하나는 기깔나게 뽑잖아. 약속도 잘 지키고. 온다고 했으니까 올 거야. 적어도 오늘 해를 넘기진 않겠지.”
“혹시 어떤 사인지 물어봐도 돼요?”
“커플은 절대 아냐.”
류진이 웃었다.
“그건 알아요.”
“나 구빈원 출신이야. 신해범 중사 쥐꼬리만 한 월급에 기생해서 먹고살았지.”
원래도 반 유료 시설이었다. 시설에서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해결해 주는 대신, 아동들은 학업을 마친 뒤 근로 현장에 동원되었다. 그마저도 나이가 차면 약간의 정착 지원금을 받고 퇴소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부모나 친척, 후견인이 있어 입소비를 내주는 아이는 근로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전반적인 생활에서도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래 봤자 밥 밑에 계란프라이 한 장 깔리는 정도였지만….
구은하는 이미 나이도 많고, 근로 현장에서의 평가도 나빠 퇴소 후 미래가 불투명한 자신에게 후원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발 공장, 치약 공장에나 취직하면 잘 풀렸다고 평가받던 세상에 살던 구은하, 아니 구경희에게 ‘헌병대 신해범 중사’는 외계인이나 다름없었다.
“후원자라면 그, 돈을 보내 주는 거죠?”
“맞아. 그 덕에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
류진은 구은하의 뺨에 파이는 보조개를 응시했다.
“처음엔 의심했었어. 안 좋은 쪽으로.”
“아….”
“그땐 나도 어렸잖아. 부모 없다고 무시당하던 애가 무슨 상상을 하겠니. 그리고 후견인 제도라는 게, 뭐 지금은 이래저래 개선됐다고는 하는데, 나 어렸을 때만 해도 귀족이나 부자들이 악용을 많이 했어.”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디 가서 이런 소리는 안 해.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거든. 고아라 심성이 비뚤어져서 좋은 일 하는 사람 의심한다는 소리나 듣지.”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알아.”
구은하가 웃었다.
“그래서 얘기하는 거야.”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가 거품이 동동 떠 있는 수면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물놀이 재밌어?”
“조금… 죄송해요.”
“힘들게 큰 애들이 보통 두 종류로 나뉘어. 죄송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든가, 사람 죽여 놓고도 저 잘났다고 큰소리 뻥뻥 치든가.”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따뜻했다. 류진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는 구은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샴푸 다시 해야겠다. 그대로 남았네.”
“죄송… 아.”
“머리 감기 힘들면 부르지. 내가 이 분야 전문간데.”
구은하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렇게 지저분하지는 않지만, 한번 다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프런트에서 가위를 빌릴 수 있으려나….
“샴푸해 드릴까요. 고객님?”
분명 괜찮다고 할 게 뻔해서, 구은하는 재빨리 손바닥에 샴푸를 짰다.
***
장두현은 머리에 흰 띠를 동여맸다. 눈 밑이 새카맣고 두 뺨은 훌쭉하니 푹 패였다. 늘어진 피부에 검버섯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육중한 악트로스 아머드를 몰며 맹수들을 거침없이 사냥하던 백전노장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신해범의 눈앞에 있는 건 바람이 빠져 쪼그라든 몸피의 오늘내일하는 노인네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쪽만 엉망이면 모양 빠지니까.
자존심이야 옛날에 갖다 버렸지만, 풍채 당당한 장두현 앞에 만신창이가 되어 앉는다고 생각하니 여간 모양 빠지는 게 아니었다. 한쪽이 엉망이면 다른 한쪽도 그에 필적할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패배해도 슬프지 않다.
신해범은 오른쪽 눈을 덮은 안대를 슬쩍 만져 보았다. 권세혁이 극비리에 입원 중인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장두현의 이름으로 대기 시간을 건너뛰고, 솜씨 좋은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왕자께선 아직 의식이….”
찻잔이 오른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신해범은 찻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선 조철영이 온 힘을 다해 따라 낸 국화차였다. 아직 차가 식지 않아서 뜨거웠다. 하지만 신해범은 앉은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안대를 해서 다행이었다. 왕만두처럼 부은 눈두덩에 화상까지 입었다간 그간 훌륭한 셀링 포인트로 썼던 얼굴이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
“…왕자님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라믄.”
“예.”
“니가 지금 여서 내랑 한가하게 차 즐김서 대담을 해야긋나. 안팎으로 잡스러운 소리 안 새게 단도리를 단단히 해야긋나. 함 골라 봐라.”
“대관께서 왕자님 상태를 궁금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또한 왕자님의 옥체가 상한 데에는 수색과 구출이 늦은 저의 책임도 있으니, 제가 직접 대관을 뵙고 설명해 드리는 것이….”
“됐다. 치아라.”
“대관.”
“세혁이, 그 아만 무사하면 된다는 게! 그거이 그래 어렵드나!”
신해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꾸눈에 팔 병신 된 사람 앉혀 놓고 허벅지에 총알 박힌 손자를 걱정하는 마음은 백 번, 천 번 이해했다. 원래 그런 종자들이니 새삼스레 억울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정류진에 대한 모욕은 거슬렸다. 이상하리만치 심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정 이병은 신문에서 더 확실하고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구 소위와 함께 광성으로 이송했습니다.”
“그걸 내한테 말도 없이!”
“제게 지휘권을 일임한 건 대관이십니다.”
신해범은 장두현의 인중을 응시했다.
“그리고 저는 맡은 소임을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명령 하나, 하나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대관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장두현의 가슴이 부풀었다. 신해범은 그가 정류진의 죽음을 간절하게 바랐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자기 선에서 정류진을 감추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권세혁의 몸이 회복되기 전에 손을 썼을 것이다.
“왕자님 납치에 가담한 인원은 전 풍기대원 강인우를 포함하여 일곱. <연운사> 인근의 비어 있는 단층 건물의 지하 컨테이너를 억류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위치를 파악했을 때 이미 목격자들은 살해된 상황이었고….”
신해범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폭발물을 설치해 증거 인멸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일곱 중 다섯이 현장에서 죽었다. 여권 한 장, 신분증 한 장 없는 밀입국자들로 전원 무연고자 처리되었다.
사건을 축소하고 덮으려는 장두현의 재촉이 아니라도 그렇게 됐을 일이었다. 자국에는 그들의 지문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분을 특정할 수 있는 휴대폰을 비롯한 의류와 소지품은 지역 경찰이 아니라 병원 측에서 ‘대관께 말씀 부탁드린다’며 깨끗한 지퍼 백에 꽁꽁 싸매 건네주었다. 윤태금이 정수헌의 보안 담당자로 얼굴이 알려진 덕분에 상황이 한결 매끄러웠다.
<연운사>의 노승과 어린아이들이 생각났다. 일본 놈 둘을 그 자리에서 쏴 죽인 일에 한 점 후회는 없었다. 윤태금에게 총을 쥐여 줬어도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신해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느껴지니까.
자기네 나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던가….
그러면 애초에 이런 델 기어들어 오지 말았어야지. 정류진을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빌어먹을 하성록에게 무슨 명령을 받았든 간에….
신해범은 눈을 감았다 떴다. 현기증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트럭 짐칸에서 정류진과 섹스를 했어야만 했다. 그놈이 울든 말든.
신해범은 류진의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 내리고, 볼록하니 예쁘게 솟은 둔덕에 안달 난 좆을 쑤셔 박는 상상을 했다. 서툰 손가락 장난에 만족해서 구은하가 대기 중인 호텔에 갖다 놓은 게 천추의 한이었다.
“나머지 둘은. 금마들 목숨은 붙어 있더만.”
“생존자는 한 명입니다.”
차모은과 강인우는 거의 비슷한 순간에 나란히 심정지가 왔다. 그러나 차모은이 심장 박동을 되찾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 선고를 받은 한편, 강인우는 중환자실에서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생존하고 있었다.
과연 행운의 사나이였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었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똑같습니다. 강인우가 반정부 단체 <백사자>에 원조를 요청한 증거가 이 여성입니다.”
장두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신해범이 내민 차모은의 신상 명세를 들여다보았다.
“이자에 대해서는 <백사자> 테러조와 교전이 많았던 기우희 소령이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금마 얘기는 됐고.”
장두현은 노골적으로 기우희를 피했다.
“주동자만 알믄 됐다. 잔챙이들은 필요 읎제.”
“어떤 처분을 바라십니까?”
장두현의 이마에 주름이 팼다. 신해범은 조철영에게 턱짓했다. 대관께서 편두통이 심하시니 뭐라도 가져오라고 은근슬쩍 지시했다.
조철영은 순순히 물러났다. 신해범과의 사이가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데 기꺼이 복종하고도 남았다.
평탄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포장 안 된 흙길을 맨발로 걸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잉크를 부어 놓은 것처럼 새파란 하늘에 새털구름이 유유히 떠갔다. 구름 사이로 비쳐 드는 햇볕이 따뜻해, 권세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섰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권세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좌우로 펼쳐진 들판에 들꽃이 지천이었다. 연보라색 꽃잎이 노란 수술을 받치듯이 싸고 있는, 길고 가는 꽃대를 가진 벌개미취였다.
저 꽃을 닮은 사람을 안다.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안다. 그동안 어떤 비밀을 감추었는지도. 내 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삼켰는지도 인제는 안다.
바람이 불었다. 무수한 들꽃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권세혁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길 끝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어린 시절의 쌉싸름한 기억으로 남아 버린 옛 스승이었다. 권세혁은 연신 눈을 깜박거렸다. 물안개나 신기루 따위의 환상이 아닌지 확인하려고.
이강연과 정류진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고, 어느 날 갑자기 끝내 버린다.
나는 아직 한창이었는데.
가붓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돌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권세혁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여긴 꿈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이었다. 무엇을 그리워하고, 원망하고, 갈구하는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세상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이강연을 노려보았다. 긴장하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권세혁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양 주먹을 꽉 쥐고 눈꺼풀을 깜박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차오른 눈물이 저절로 마르기를 바랐다.
세상에는 그런 게 있었다. 시원하게 토해 내지 못하고, 혼자서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것들이.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류진이 가르쳐 주었다.
권세혁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이제….”
더는 어리지 않다. 당신의 부재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어린애가 아니다.
잘못된 건 바로잡고, 잃어버린 건 되찾을 만큼 성장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잘못이다.
권세혁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이야.”
나는 인제 정류진이 누군지 안다.
그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다면. 여전히 그의 얼굴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고, 생사를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면.
권세혁은 옛 스승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강연은 제자의 의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문제를 칼같이 해결하는 스승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가 스스로 생각하길 원했다. 경우의 수를 헤아리고, 결정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장차 큰 힘을 휘두르게 될 사람은 어려서부터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권세혁은 생각했다.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상대라면. 처음부터 욕심낼 자격조차 없었다면.
류진은 용서한다고 했다 동시에, 너는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선택권을 이쪽에 넘김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마음을, 결심을 공고히 했다.
머리도 좋지….
하지만 류진이 형. 나는 형보다 더 교묘한 방법을 찾아낼 거야.
이제 나는 등가 교환의 원리를 이해하니까.
햇살이 먹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돌풍이 비를 몰고 왔다.
권세혁은 자기 세상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모습을 보았다. 춥고 아팠지만 견뎌야 했다. 기존의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발전이 없었다.
따스하고 향기로운 봄날은 갔다. 칼바람이 살갗을 베는 겨울이 온다.
권세혁은 이강연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 연보랏빛 꽃잎이 휘날렸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허공을 힘껏 끌어안았다.
“삽관 제거하겠습니다.”
가슴팍에 깔개 매트가 놓였다. 규칙적인 기계 소리, 자기 몸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거친 바람 소리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침대 곁에서 의사가 파란색 위생 장갑을 착용했다. 권세혁은 나란히 서 있는 외조부와 신해범의 모습이 커튼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몸에 힘 빼고. 편하게 계십시오.”
나이 많은 간호사가 어깨와 팔을 만지며 안심하라고 했다. 권세혁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인중과 턱에 마스크 라인을 따라 붙었던 테이프가 제거됐다. 바람 소리가 위협적인 기계가 입 안으로 들어온다. 누군가가 옆에서 말했다. 숨을 쉬어. 있는 힘껏. 숨을 쉬어.
몸속에서 빠져나오는 호스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권세혁은 창자까지 뽑혀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구역질에 헛웃음이 섞였다.
산소마스크에는 굵직한 튜브가 달렸고, 눈을 제외한 얼굴 대부분을 덮었다. 권세혁은 커튼을 젖히고 달려드는 외조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외조부의 옆에 신해범이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 둘이 나란히 선 마당에, 정작 보고픈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헛구역질 때문에 괴인 눈물이었다. 누구라도 알겠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권세혁은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가오는 외조부의 주름진 손을 물리치고 신해범을 가리켰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른쪽 눈에 안대를 썼다. 검붉은 피멍이 광대뼈까지 덮었다. 권세혁은 몸을 숙인 신해범의 귀에 속삭였다.
“류진… 형….”
“왕자님.”
그는 외조부의 눈치를 봤다. 류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권세혁은 힘겹게 들어 올렸던 눈꺼풀을 도로 감았다. 고개를 좌우로 젓는데 뇌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신해범은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에나 썼을 법한 극존칭으로, 멀거니 서 있는 외조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해 주었다.
“왕자님은 좀 더 쉬셔야 되겠습니다.”
“…그래라.”
덤덤하지만 차가운 목소리였다. 권세혁은 외조부가 자신에게 실망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실망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권세혁은 문을 닫는 신해범의 등을 응시했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곳에서 류진과 함께 있었던 게, 내가 아니라 저 신해범이었다면.
아니… 신해범까지 생각할 것도 없다.
놈들에게 차량이 두 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류진과 각각 다른 차에 타게 될 줄 알았으면 다른 계획을 세웠을까?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권세혁은 불안했다. 만약 더 나은 선택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던 거라면. 그때 내 생각과 행동이 최선이 아니었다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의 수십 년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한 최선의 결정을 내려 탑승객 전원의 목숨을 살린 기장도 연방 교통 안전 위원회의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언론에서는 그가 영웅이냐, 도박사냐를 두고 제각기 떠들어 댔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자의 처우도 그럴진대, 만약 나 때문에 정류진이 다쳤다면. 설마 죽었다면.
누구도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하겠지.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신해범이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권세혁의 귀에 꽂혔다.
“정 이병은 무사 귀환했습니다.”
“지금, 어디.”
신해범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기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그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당연한 질문이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권세혁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신해범의 멱살을 움켜쥐어 벽으로 밀어붙이고픈 심정이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의 몸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왕자님. 질문 하나 올리겠습니다. 정류진 이병의 과거 이력을 알고도 그 마음이 변치 않으십니까?”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가, 또다시 뿌예지기를 반복했다. 권세혁은 신해범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 화살을 꽂아 넣듯이.
“그래.”
“현재 혼수상태인 강인우를 제외한 관계자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
“아직 대관께서는 정류진 이병에 대한 사실을 모르십니다. 강인우의 처벌 또한 왕자님의 결정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외조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었다.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 줘라. 나는 네게 그런 걸 가르쳤다.
권세혁은 붕대를 두껍게 감아 돌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워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잊었던 분노에 불이 붙었다. 산 채로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절절히 느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길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소리나 들으면서, 권세혁은 막연하게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류진과 만나기 전으로?
아니….
<힐 스톤 그로우>에서 강인우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로. 부질없는 생각인 걸 알지만 만약 기회를 준다면, 권세혁은 강인우의 머리통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자신이 있었다.
따끈해진 몸을 닦고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은 뒤, 구은하가 준비해 준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변을 느낀 건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테이블에 늘어놓은 쓰레기를 치우는데 갑작스럽게 구역질이 치밀었다.
“류진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류진은 구은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밀려오는 토기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류진은 가운을 걸친 상태 그대로 욕실로 돌진했다.
아직 타일 바닥에 물기가 축축했다. 변기를 잡고 머리를 숙이기가 무섭게 방금 먹은 음식물이 쏟아졌다.
“류진아!”
구은하가 다가왔다. 류진은 그를 밀어내려 했다. 이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시큼한 냄새 때문에 토기가 더 심해졌다. 류진은 변기를 끌어안고 계속 구역질했다. 먹은 걸 전부 토해 내고, 누런 위액까지 육안으로 확인할 만큼.
구은하가 세면대 물을 틀었다. 주저앉아 흐느끼는 류진을 일으켜 세면대 앞으로 데리고 갔다.
“괜찮아. 이게 후유증이 늦게 와서 그래. 에이그, 내가 잘못했다. 따뜻한 죽 같은 거 사 올걸. 괜히 너 좋아하는 거로 고르려다 낭패 봤다. 응? 류진아 괜찮아. 이거 누나가 잘못한 거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울어. 괜찮아. 울어도 돼. 네가 약해서가 아니고 놀라서 그래.”
류진은 세면대를 붙잡고 울었다. 신해범이 필요했다. 권세혁에게는 감히 의지할 수 없었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체 변화를, 저미는 가슴을 위로하고 달래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해범뿐이었다.
왜 나를 이런 데다 처박아 놓고….
구은하는 좋은 사람이지만, 신해범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류진은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구은하가 황급히 쭈그려 앉았다.
“류진아.”
머리를, 목덜미를, 어깨와 등을 부지런히 쓸어 주는 이 손이 신해범의 것이었다면.
신해범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한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왜 내가 당신 같은 걸 그리워해야 하는데. 왜 내가 당신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렇게 꼴 보기 싫을 땐 끈질기게 달라붙어 사람 괴롭히더니, 이제 좀 써먹어 볼까 하니까 꼬리 말고 도망을 쳐?
류진은 차갑고 축축한 타일을 짚었다. 두 팔과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섰다.
신해범이 돌아오면 죽여 버리겠다. 아니,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패 주겠다.
“이제 좀 괜찮아? 진정됐어?”
“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위, 위가. 쪼그라들어 있다가 갑자기 밥 먹어서 그런가 봐요.”
“역시 죽을 사 왔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저 정말 괜찮아요.”
힐끗 거울을 봤다. 기껏 머리 자르고 말끔해진 얼굴에 선명한 눈물 자국이 두 줄 남았다. 류진은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괭이 같다.”
“네?”
“고양이. 고양이들 세수 이렇게 하잖아.”
“아….”
류진은 구은하를 따라 웃었다. 빌어먹을 신해범 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기분을 나아지게 할 만한, 다른 생각….
“하성록이 죽었대요.”
“어?”
세면대에서 물이 흘러넘쳤다. 구은하는 멍하니 류진을 응시했다. 창백한 낯빛에 허망한 표정이, 꼭 갈 길 잃은 어린 유령 같았다.
“하성록이요. <백사자>의 보스가 죽었대요.”
류진은 구은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과 한번 내뱉은 말은 손바닥으로 틀어막을 수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권세혁은 산소마스크를 벗었다. 기계의 도움 없이도 숨 쉴 수 있었다. 제대로 말도 하고 싶었다. 기도 삽관 때문에 목이 부어서 아팠지만, 알아듣지 못할 만큼 발음이 어눌하지는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두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끔찍한 쇳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말하려고 하면 헛구역질이 나고,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커튼 너머의 외조부도 신경 쓰였다. 권세혁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눈치 빠른 신해범이 볼펜과 종이를 가지고 왔다. 권세혁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볼펜 쥔 손을 움직였다.
우리 협력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