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자들이 있어도, 언젠가는 밝혀지고 마는 게 진실이라는 놈이다.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앎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가르토가 새집으로 가는 날, 류진은 호월루의 강아지들이 부견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허술하게 관리한 음식물 쓰레기 때문이었다. 기름에 튀겨 낸 치킨 뼈는 생닭과 달라서 개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휴무일에 한낮까지 늘어져 자던 신예나는 꾸무럭꾸무럭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가 봉변을 당했다.
“저쪽에 늘어져 있었어.”
류진은 신예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때 백구는 죽은 개의 얼굴을 부지런히 핥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죽은 걸 알면서도 안 짖은 거 같아. 우리가 사체를 치울까 봐.”
그날은 전체 휴무일이었다. 호월루에는 직원들이 없었다. 숙식하는 기생들은 살아 있는 개도 무서워했다. 신예나는 주방에서 대형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나왔지만 선뜻 사체에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헤어진다는 사실을 직감한 백구와 강아지들이 맹렬히 짖어 대기 시작한 것도 문제였다.
“그때 인혜가 도와줬지.”
류진은 자기가 한 사람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렸다는 사실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다. 류연비의 동생으로서, 타인의 가십을 까발리는 데 혈안이 된 치들에게 시달렸던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류진은 강인혜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지내는 거 어떻대요?”
“뭐….”
신예나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지금은 약 먹고 자.”
강인혜는 만성 불면증이었다. 호월루에 처음 왔던 날부터 그랬다. 강인혜는 유미현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고, 그걸 본인의 나약함, 무지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자가 치료가 독서란다. 책 읽기. 류진은 강인혜의 불면증이 치료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책만 봐도 졸음이 쏟아졌는데….
“공부를 좋아하더라. 그러니까 명문대 다녔겠지.”
과거형이었다. 강인혜는 휴학을 권하는 유미현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자퇴를 선택했다.
“여기서 일을 하겠다네. 공짜로 지내는 건 싫다고.”
“아….”
“너도 그랬었지?”
류진은 멋쩍게 웃었다.
“저야 뭐.”
“요즘 애들은 다 성실해. 공짜로 뭐 얻으려고 안 해.”
“그럼 좋은 거잖아요.”
“나는 안 그랬는데.”
“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신예나가 류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누구 등에 착 달라붙어서 빨대 꽂는 거 좋아했어. 예를 들면 저 사람.”
신예나의 시선 끝에는 신해범이 있었다. 그는 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르토를 호월루에 들이는 건 괜찮지만, 백구를 비롯해 강아지들과는 아직 합사를 시킬 수 없으니 생활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는 신예나 사장의 엄명이 있었다.
류진은 울타리를 조립하는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그가 오늘을 위해 휴일을 반납했음을 알았다.
끈이 헐렁한 운동화에 청바지, 흰 셔츠를 입은 신해범은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대학생이었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한 손에는 커피, 반대쪽 옆구리에는 얇은 노트북 한 대 끼고 잔디밭을 거니는 캠퍼스 킹카.
신예나는 만약 그가 대학에 갔다면 정치 외교나 경영을 전공했을 거라고 말했다.
“요리는요?”
“글쎄. 외삼촌이 허락 안 하셨을걸.”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경제약이 건재했다면, 그래서 신해범이 대기업의 수장 자리를 이어야 했다면 본인이 원한다 한들 요리사는 어림도 없었다.
볼 캡을 벗어 마루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흔들어 주었다. 류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을 주물렀다.
“요샌 자도 자도 졸려요.”
“키 크려고 그러나? 남자애들은 늦게까지도 크잖아.”
그렇다면 좋겠지만, 가능성은 적었다. 피곤한 이유는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일 것이다.
신예나가 과일을 가져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류진은 신해범에게 다가갔다. 십자드라이버와 씨름하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뭐 해?”
“애꾸라서 힘드네.”
“잡아 줄게.”
“저리 가. 위험해.”
류진은 신해범이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에서 드라이버를 빼앗았다.
“꼬꼬야?”
“등신. 이런 것도 할 줄 몰라.”
“내가 못 하는 게 아니라….”
“변명은.”
류진은 신해범에게 울타리를 잡게 했다. 나사못이 반쯤 들어간 구멍에 드라이버를 댔다. 힘주어 누르면서 한쪽으로 빙글빙글 돌리니 못이 고정되었다. 울타리가 연결되었다.
“됐지?”
아직 더 해야 할 것이 남았지만, 류진은 뿌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신해범은 자리에 없었다.
“어디 가?!”
그는 신예나가 제게 맡긴 중차대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아니 류진에게 떠넘기고 그늘이 드리워진 대청마루로 달려가 드러누웠다. 사람이 뛰는 것에 덩달아 신난 강아지 둘이 신해범을 따라 마루에 올랐다.
못 보는 사이에 제법 자란 흰둥이와 검둥이는 나란히 한이, 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예나는 녀석들의 이름과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목걸이를 주문 제작해서 걸어 주었다.
“뭐 해?!”
류진은 드라이버를 든 채 씩씩댔다. 신해범의 다리를 걷어차지 않는 건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가 입은 청바지가 고가의 브랜드 제품이기 때문이었다. 세탁비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해.
신해범이 능청을 떨었다.
“그놈도 이름 새로 지어 줘야지?”
“가르토가 어때서?”
“이젠 그 집 개 아니잖아.”
신해범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투견으로서의 삶이 절대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지도 않을 테고.
“내가 지어도 괜찮아?”
“그럼 누가 해?”
“소령님이랑 상의할래.”
“기 소령이 개 작명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해 보이냐? 그리고 기 소령, 딴건 몰라도 작명에는 재주 없어.”
대짱, 중짱, 소짱 중에 하나 고르라고 안 하면 다행이었다. 신해범은 고민하는 류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장담하는데 네가 짓는 게 나아.”
“그럼… 준이.”
“엉?”
“준이.”
“갑자기 친근해지네.”
정말 모르는지, 눈치챘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건 신해범의 눈을 보면 알았다. 류진은 후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신예나가 나타났다.
“뭐야? 벌써 울타리 완성했어?”
“아니. 좀 쉬었다 하자.”
“뭐래. 가서 일해!”
신해범은 양 옆구리에 한이와 명이를 끼고 버텼다. 신예나의 힘으로는 그를 대청마루 아래로 끌어 내릴 수 없었다.
류진은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과일 중 하나를 집었다. 검은색 제복 바지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거 참외죠?”
“아, 맞아. 알아보네?”
“되게 비싸잖아요.”
“매년 물가 오르는 거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유난히 폭리가 심한 품목들이 있어. 뭐 우리야 식자재에는 돈을 안 아끼니까.”
참외는 귀한 과일이었다. 권세혁이 어릴 때 연못에 담가 뒀다 먹었다고 얘기한 기억이 났다. 류진도 어린 시절 딱 한 번이지만 참외를 먹어 본 적이 있었다.
광성에서 누나가 보내 준 선물이었다. 꽝꽝 언 채로 아이스박스에 포장되어 온 게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 당연히 껍질째 먹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껍질을 깎아 먹으면 훨씬 맛이 좋다는 사실은 나중에 책을 보고 알았다.
신예나는 물방울이 맺힌 과도를 신해범에게 내밀었다.
“예술적으로 깎아 봐.”
“귀찮은 일은 꼭 나한테 시키지.”
신해범은 불평하면서도 싱글거렸다.
류진의 품에서 강아지들이 몸부림쳤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땅으로 내려 주었다. 꼬리를 흔들며 모퉁이를 돌아 뒷마당으로 사라졌던 녀석들은 한 사람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삐죽빼죽 아무렇게나 자른 커트 머리.
남성용이 분명한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 맨발에 뒤축을 꺾어 신은 컨버스 운동화. 훌쭉하니 마른 몸에 무심한 눈빛.
강인혜였다.
전통복 스커트 자락을 끌어당긴 신예나가 마루를 두드렸다. 여기 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깼어?”
“…소리가 들려서요.”
“네가 확실히 먹을 복은 있다. 뭐 해? 여기 앉아.”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앉아. 서로 볼 장 다 본 사이에 뭘 껄끄러워하니.”
“부잣집 아가씨라 참외 정도론 안 혹한다?”
신해범이 말했다. 그의 손에서 노란 껍질이 떨어지고 있었다. 왼손 엄지에 핑거 스프린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했다.
강인혜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니고요. 아까 맨손으로 공구 만지시던데 그 손 그대로 과일 깎고 계시잖아요. 아무리 비싼 과일이면 뭐 해요. 눈에 안 보이는 세균이랑 미생물이 우글거리는데.”
“…….”
“손 씻으셨어요?”
“우리 지켜보고 있었나 봐? 방 안에서 창문으로.”
“…….”
“생각보다 음침한 성격이군.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선 몰라.”
“이보세요!”
“하긴 강인우도 그랬지. 겉과 속이 다른 거로는 올림픽 부전승 감이야. 옛말에 부모를 보면 자식을 알 수 있다고….”
“그만해, 그만!”
류진은 신해범의 팔을 붙잡았다. 강인혜가 신해범의 따귀를 갈길까 봐 무서웠다.
“당신은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지려고 들어?”
“알겠어. 입 다물 테니까 이따가 빨아 줘.”
신예나가 중얼거렸다.
“말뜻을 알아듣는 내가 싫다.”
침묵이 흘러갔다. 개 짖는 소리, 매미 우는 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신예나가 담배에 불을 붙여 깊숙이 한 모금 빨았다.
“아직도 매미가 우네.”
“가을까지는 시끄럽지. 산속이라서 더 그래. 그건 뭐야?”
신해범은 신예나의 반지에 관심을 보였다. 평범한 실반지처럼 생겼는데, 중앙의 고리 장식을 쭉 잡아당겨 올리니 담배를 끼울 수 있었다. 같은 흡연자로서 무척 편리해 보였다.
대답한 사람은 강인혜였다.
“손가락에 담배 냄새 배면 잘 안 빠져요. 손톱 밑까지 구석구석 씻어도 냄새가 난다고요.”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줘서 고맙군.”
“내가 개발한 것도 아니고 기성품인데 너무 질투하진 말죠. 무지가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강인혜는 그렇게 말하더니, 신해범이 주먹을 휘두를까 봐 좌불안석인 류진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으, 응?”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신해범이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쪼그만 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죠?”
류진은 감탄했다. 강인혜는 대단했다. 완전히 신해범을 가지고 놀았다.
신해범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배짱에서 뒤지지 않았다. 말솜씨도 그렇고.
광성으로 돌아온 직후 신해범은 감기 몸살을 앓았다. 본인은 환절기 탓이라고 했으나 류진은 그가 번아웃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오른쪽 눈도 문제였다. 세상에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는 증상이 사라지고 시력도 차츰 되돌아왔으나, 정밀 검사 결과 이전보다 눈이 나빠진 게 확인됐다. 최유신은 보안경을 권했다.
그러나 신해범은 안경을 쓰고 다니지 않았다. 불편하고, 챙기기 귀찮다는 이유였다. 류진이 보기에 그건 핑계가 아니었다. 신해범에게는 자기 신체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강인우가 풍기 교육대 지하에서 의식을 찾았다. 권세혁이 복귀할 예정이었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충용절이 다가올수록 장승희 총통 부인은 초조해했다. 그는 수시로 풍기대를 찾아와 신해범을 볶아 댔다. 권세혁이 날짜에 맞춰 복귀할 수 있을지,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서 다리를 절뚝거리지 않을지에 대해 걱정하다가 귀하디귀한 총통 후보를 해적들과 싸우게 만든 아버지에게 분노했다. 저주를 한바탕 쏟아 낸 다음에는 어김없이 신해범의 ‘봉사’가 시작됐다.
류진은 12층에서 지냈다. 급하게 마련된 생활 공간은 신해범과 진치우의 사무실에서 멀지 않았다. 명칭은 ‘특수 취조실’이지만 진짜 취조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방음이 부실했다.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들려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 대리석 바닥을 힘차게 짓이기는 장승희의 하이힐 소리, 복도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 여닫히는 소리.
연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해범이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이 뒤집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류진은 혼란스러웠다. 자기가 장승희를 질투한다는 사실에.
그는 권세혁의 어머니였다. 물론 장승희에게 기우희, 신예나와 같은 친근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껏 류진에게 ‘어머니’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본인의 성장 과정에 결핍된 존재였기에 더욱 아련하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류진은 자기가 누군가의 ‘어머니’를 질투한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심지어 그 원인 제공자는 신해범이었다.
신해범은 장승희를 밖에서도 만났다. 그건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신해범의 향수 냄새에 섞인 장승희의 화장품 냄새를 맡으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매번 신해범을 떠밀었고, 그때마다 신해범은 거칠게 부딪쳐 왔다.
류진은 언제나 신해범과의 실랑이에서 졌다. 고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부관에게 이 정도도 못 해 주느냐는 실로 어이없는 협박은 신해범의 신기술이었다. 그도 자신에게 밴 장승희의 냄새가 싫다고 했다. 그렇다면 냉큼 목욕을 할 것이지, 왜 애꿎은 사람 붙잡고 좆질 하려 드는지. 류진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권주혁.
장승희가 신해범을 붙잡고 늘어진다면, 그 늙은이는 기우희를 타깃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전화만 연결됐다 하면 유미현 수석 전략가의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낸다는 이야기를 윤태금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기우희가 왜 복귀한 성재경이 아닌 윤태금을 곁에 두는지 류진은 몰랐다. 성재경은 이유를 간절하게 알고 싶어 했지만 류진으로서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기우희의 직속인 하채경 하사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류진은 그저 윤태금이 성재경 앞에서 우리 소령님, 소령님 하며 설치지 않기를 바랐다.
성재경과 윤태금.
두 사람 중에서 고르라면 당연히 성재경이었다. 하지만 류진에게는 윤태금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황효제의 시신이 발견된 예배당 지하실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온전하게 보존된 서류 가방이 나왔다. 해당 가방의 열쇠는 최유신이 부검한 시신의 몸속에서 발견됐다.
서류 가방에 든 건 한 묶음의 종이 뭉치였다. 내용물은 설계도로 판명되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형태를 띠는지, 용도는 무엇인지 분석하는 사람이 윤태금이었다.
류진은 윤태금이 누나의 억울한 죽음에 관련된 뭔가를 찾아낼 거라고 믿었다. 사람은 가벼워도 머리는 똑똑하니까.
문득 윤태금과 강인혜 둘 중 누가 더 똑똑한지 궁금해졌다. 예선 탈락한 선수도 결승전의 결과는 궁금하니까.
류진은 웃으면서 강인혜를 마주 보았다.
“그러게. 낯이 익다. 진짜 어디서 만난 적 있었나?”
“꼬꼬야.”
대꾸하지 않았다. 류진은 신해범이 좀 더 초조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승희를 만나고 온 신해범은 정말 심한 짓을 하니까. 정말 아프게… 초조하게… 사람 못살게 구니까.
“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죠.”
강인혜는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시원해서 기분 좋았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고등학생 때처럼 긴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긴 머리였을 때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강인혜는 마당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노는 강아지들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기계 같은 솜씨로 반듯하게 참외를 자르던 신해범이 고개를 들었다.
“나? 왜?”
“저 그 사람 만날래요. 만나고 싶어요.”
강인혜는 강인우를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스무 해 동안 오빠라고 믿었던 사람이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줄곧 생각했다. 그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오빠? 아빠? 단어로만 보면 한 끗 차이였으나 의미는 전혀 달랐다.
강인혜는 계속 고민했으나,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류진은 강인우를 정확한 명사로 지칭하지 못하는 강인혜를 이해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괴감과 슬픔이 휩쓸고 간 폐허에 남은 혼란과 분노를. 오빠가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인데, 사실은 그 살인자가 자길 낳아 준 친아버지였다. 그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신해범은 풍기대 간부 주차장에서 레인지로버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류진은 그가 일부러 자리를 비켜 줬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해범치고는 대단한 배려였다. 밀폐된 공간에 자신을 강인혜와 함께 두다니.
“…괜찮아?”
그는 야무지고 의연했으나 호월루에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고, 도착한 직후에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류진은 강인혜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인혜의 옆을 지켰다. 그의 한 손을 꼭 잡은 채.
“힘들면 만나지 않아도 돼. 너한테는 선택권이 있어.”
코를 훌쩍인 강인혜가 말했다.
“죽기 전에 얘기해야죠.”
불과 한 살 차이였다. 심지어 강인혜가 연하였다. 류진은 그의 냉정함과 용기가 어디서 솟는지 궁금했다. 교육과 경험의 차이인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인가?
류진은 강인혜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어쩌게요.”
“아니 그냥, 다른 거 생각 말고. 지금 너만.”
“저 뭐요?”
“그러니까… 음… 사는 게 견딜 만하냐고.”
강인혜가 푸훗, 소리를 냈다. 류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볼 캡을 최대한 깊이 눌러쓰는데 그가 말했다.
“견디게 되더라고요.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아요.”
“…….”
“좀 경멸스럽죠?”
“왜?”
“저는 제가 그랬거든요. 제 몸이요. 기본적인 욕구들 있잖아요. 수면욕, 배설욕, 식욕 같은 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게 느껴지나 싶어서.”
고개 숙인 강인혜의 옆얼굴이 창백했다.
“제가 되게 괴물 같았어요. 사실은 지금도 좀 그래요. 부모님… 아니, 가족을 잃은 슬픔이… 그게,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영원히 치유하지 못할 상처처럼 묘사되던데, 저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강인혜는 자기가 상처를 덜 받았음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주먹으로 자기 빗장뼈를 탕, 때렸다.
“이제 눈물도 별로 안 나요. 악몽도 안 꾸고요. 밤에 잠은 설치지만 새벽에는 잘 수 있어요. 굳이 약 안 먹어도요.”
“…….”
“오빤 제가 괴물 같아요? 사이코패스?”
“넌 괴물이 아니야.”
“누가 딱 정해 줬으면 좋겠어요. 왜 옛날에는 그런 전통이 있었잖아요. 몇 년 동안 화려한 옷 안 입고 고기반찬 안 먹고, 그렇게 슬퍼하고 나면 죄책감 안 느껴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게 차라리 낫겠어요.”
류진은 볼 캡을 벗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또박또박 말했다.
“넌 괴물이 아니고, 가족을 잃은 것도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책임이 있어요.”
강인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람은 저를 구하려고 했어요.”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돌이켜보면 옛날부터… 오빠는 아버지 같았어요. 인제 와서 그런 생각은 소용없지만요.”
“나도 누나가 엄마 같았어.”
“친구들이랑 가족 얘기할 때마다 뭔가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긴 했어요. 그래도 그냥, 요즘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자매가 드물잖아요. 그래서 걔들이 이해 못 하나 보다 했죠.”
“응.”
“근데 정말 웃기지 않아요? 어떻게 그걸 그렇게 감쪽같이. 제가 지금껏 학교 다니면서 가족 관계 조사서를 몇 번을 썼는데. 혈액형 검사도.”
강인혜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류진은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흔들림이 전해져 왔다.
“그 사람 사랑해요. 하지만 그만큼… 원망도 한다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은 년이겠죠?”
신해범은 담배를 피우면서 손가락 한 마디쯤 열린 차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류진과 강인혜의 대화를 전부 엿들었다. 과연 강인우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범죄자에게는 과분한 별칭일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강인우에게는 운이 따랐다. 독이 바짝 오른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었음에도 손가락 하나밖에 끊어 내지 못했다.
애초에 강인혜의 출생 비밀이 스무 해 동안이나 지켜졌다는 게 기적이었다. 게놈 지도의 단 하나만 어긋났어도, 강인우나 오은정 둘 중 한 사람의 입이 조금만 가벼웠어도, 이웃 중 남의 집안에 관심 많은 야매 탐정이 한 명만 있었어도, 똑똑한 강인혜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에게 아주 약간의 의혹만 느꼈어도, 거짓으로 쌓아 올린 탑은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거대한 빙산도 수면 밖에서는 끄트머리만 보인다. 그건 곧,
신해범은 바닥에 떨어뜨린 담배를 짓밟았다. 강인우가 의식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평생을 운 좋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가능한 한 크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절망해라. 그러면 정류진을 잃어버렸을 때 내가 느낀 고통의 크기를 절반이나마 이해하겠지.
강인우는 면회를 거부했다. 보안계장을 내보내고 면회실 내부 CCTV 가동을 중지하며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음에도 불구하고 고집불통이었다.
기막혀하는 강인혜와 그를 위로하는 류진을 대신해 신해범이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이제 호월루의 잡일꾼이 아니었다. 제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빗어 올리고, 매끈매끈 광낸 군화를 갖춰 신은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이었다.
유리창 너머에 강인우가 있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았고, 양손이 각각 팔걸이에 수갑으로 묶였으며,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이봐.”
들어온 사람이 딸이 아님을 눈치챈 뒤에야 목석이 반응했다. 신해범은 천천히 고개를 드는 강인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선명했다.
그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검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원래도 반삭에 가까운 머리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삭발이었다. 볕에 그은 얼굴과는 달리 두피는 하얬다. 그동안 강인우가 감추고 살아온 비밀 같았다.
“만나고 싶지 않아.”
“왜?”
신해범이 키들거렸다.
“겁이 나나? 아니면 지금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
“…….”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만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내가 오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러시겠지.”
그는 노골적으로 강인우를 조롱했다.
“무슨 말을 해 봤자 변명이니까, 입 다무는 게 그나마 남은 자존심 지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나?”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
강인우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날 죽이고 그 애를 살려. 나보다 훨씬 어리고 똑똑하니까. 성장 가능성이 충분하니 잘 키우면 도움이 될 거야.”
“어디에?”
“어떤 분야든. 그 앤 뭐든지 잘해. 뭘 시켜도 평균 이상이야. 타고난 재능이지.”
“좋은 걸 타고나면 뭐 하나. 성장 환경이 개판이라 정신이 망가졌는데.”
“망가진 거 고쳐 쓰는 게 주특기잖아.”
“상당히 수고가 들어가는 작업이야. 아무한테나 베푸는 게 아니지.”
“유미현과 이야기하고 싶다.”
“주제에.”
“뭐라고?”
“아, 들렸어?”
신해범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혼잣말이었는데 그렇게 궁금하다면야.
“자기 딸 얼굴도 못 쳐다보는 주제에. 유미현 수석은 무슨.”
“나를 화나게 만들려고 하는군.”
“환지통 없나?”
최유신은 강인우의 회복이 놀라울 만큼 빠르며, 정신적으로도 양호하다고 말했다. 취조가 가능하다는 의도로 한 말이었겠지만 신해범은 어이가 없었다. 남들 다 정신병 걸리게 만들어 놓고 자기 혼자 멀쩡하다니.
어쩌면 그런 것까지 하성록을 닮았을까. 과연 하신성의 스페어타이어다.
신해범은 헛기침을 했다. 기침에 가래가 섞여 나왔다. 감기는 나았지만 지긋지긋한 편두통은 여전했다. 최유신은 감기 때문이 아니라 양안 시력 차가 커져서일 거라고 했다. 그러니 보안경을 쓰고 다니라고….
빌어먹을. 생각하니 억울했다. 나만 다쳤어? 나만 나이 먹어? 왜 여기저기 삐걱거리고 난리야. 아직 정류진 각하와 함께 갈 길이 구만리인데.
“너한테 쥐어 터져서 시력이 나빠졌어.”
“고작 그런 거로 불평하지 마. 나는 곧 죽을 목숨이야.”
“고작? 지금 고작이라고 했나?”
신해범이 주먹으로 유리창을 갈기자 사면이 둘러싸인 공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대원 두 명과 최유신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해범은 손을 휘휘 저었다. 별거 아니니까 나가.
최유신은 마지막까지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신해범은 입 모양으로 ‘손 조심해’ 하고 말하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우리 의사 선생은 걱정도 팔자야.
문이 닫혔다. 신해범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흥분했다고 네가 이긴 건 아냐. 착각하지 마라.”
강인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를 낼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니까.”
“…….”
신해범은 담배 하나를 꺼냈다. 유리창에 난 여러 개의 작은 구멍 중 하나에 꽂았다. 대화의 편의를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이 왜 담배 한 대가 꼭 들어가는 크기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강인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신해범은 휠체어에 묶인 그가 턱을 들어 힘겹게 필터를 무는 모습을 우뚝 서서 내려다보았다.
“하신성이 죽었을 때 알았지. 자기 손을 쓰지 않고 죽이는 게 힘이라는 걸.”
그가 자살하도록 몰아갔다. 호흡기는 정류진의 손으로 제거했다. 생명이 꺼진 뒤에는 그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팔아 치웠다.
“그놈의 비참한 최후가 늙은이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면, 그래, 나름대로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신해범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강인우가 필터를 힘껏 빨았다. 그의 얼굴 근육이 느슨하게 풀렸다. 니코틴의 힘이다.
“그래서 난 내가 하성록을 이겼다고 생각해.”
내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야. 정류진 뒤에 있는 사람도 나고. 늙어 뒈진 늙은이는 이제 아무것도 못 하지만, 난 앞으로 산을 차지할 거다.”
용이 지배하는 황금 산을 흰 사자와 붉은 호랑이가 오르려 했다. 늙은 사자는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한때 사자의 발에 머리를 짓밟혔던 호랑이는, 떨어져 죽은 사자의 사체를 뜯어 먹고 배를 채웠다. 위로 올라갈 힘을 얻었다.
“너랑 하성록의 공통점은 그거야. 지 자식새끼만 귀하단 거.”
“너도 아이가 생기면 날 이해할 거다.”
“저주라면 대성공이야. 천년의 발정이 식는군.”
신해범의 두 손이 유리창을 짚었다. 그는 강인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너흰 제 자식새끼만 중한 이기적인 놈들이야. 세상에 그것 말곤 아무것도 안 보이지.”
자식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상처를 받지 않는 천하무적들.
곰곰이 생각해 봤다. 강인혜를 강인우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강인우의 정신을 파괴하고 무너뜨릴 수 있을지.
“원망받아 봐. 너의 최선이 네 자식에겐 최악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 봐. 네가 죽는 건 그다음이다.”
기우희는 성악설을 믿었다. 곰의 앞발 내려치기 한 번에 대가리가 박살 나는 연약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진즉 멸종되었어야 할 종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만한 수단을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타고난 본성이 악해 자연의 섭리를 거부했다. 살아남겠다는 욕망을 발휘했다.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무기를 만들고, 사냥 방법을 고안했다. 언제나 더 많이 가지길 원했다. 욕구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신해범 또한 인간이 악하다는 의견에 동의했으나, 그의 믿음은 기우희의 주장과는 결이 달랐다. 세상은 악한 기질을 타고난 인간 반, 살기 위해 악을 학습한 자들 반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정류진 같은 돌연변이가 탄생한다.
나는 그 돌연변이가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 애 들여보내지 마. 혀 깨물고 죽어 버리겠어.”
“그렇게 못 할걸.”
강인우는 그런 짓 못 한다. 딸에게 더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을 테니.
“넌 네 자식을 지키려고 했고, 난 내 사랑을 지키려고 했어. 어느 쪽의 마음이 더 크고 절절했는지는 결판이 난 것 같은데. 결과를 인정하나, 제군?”
“정류진을 어떻게 꾀어냈어?”
“오, 내 구애 방식이 궁금해?”
신해범이 으스댔다.
“나를 꾸미지 않고 여과 없이 보여 줬지. 내가 얼마나 치사하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개새끼인지.”
나를 움켜쥐고 지배한다면 남은 인생,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강인우가 픽 웃었다.
“왜?”
“불쌍한 새끼.”
“뭐라고?”
강인우는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진심으로 신해범을 동정했다.
신해범은, 이 치사하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개새끼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었다.
너는 태양 아래 살아가라. 나는 네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해치우며 밤길을 걸을 테니.
그렇게 산 세월이 이십 년이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정류진은 내 자식이 아니야. 나를 부려 먹을 준비도 돼 있지. 아무것도 모르고 네 헌신에 휘둘린 가엾은 누구랑은 달라.”
신해범은 유리창 구멍에 꽂힌 담배를 뺐다. 강인우가 물었던 필터를 송곳니로 세게 씹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자가 피우는 마지막 담배 맛이 늘 궁금했었다.
면회실 인근 비상계단으로 끌려왔다. 벽에 등을 부딪치자마자 신해범의 입술이 덮쳐 왔다. 류진은 그의 어깨를 떠밀었으나, 신해범은 막무가내였다. 몸부림에 벗겨진 모자가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우… 으….”
허리를 더듬는 손이 급하다. 류진은 바지에서 셔츠 자락을 끄집어내는 신해범의 손을 붙잡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뜨거운 숨이 섞였다.
“하지 마.”
“여기 CCTV 사각지대야. 왜게?”
여러 의미로 간절한 사람들이 담당자에게 교섭을 시도하기에 맞춤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강인우만 좋은 일 시켜 줄 것 같아?”
“강인혜는 이런 짓 안 해…!”
“그렇겠지, 부녀지간이니까. 근데 너는 내 새끼가 아니잖아.”
입술이 부딪혔다. 혀가 엉키고 타액이 뒤섞였다. 류진은 신해범의 어깨를 떠밀던 손을 옮겨 뾰족한 귀를 만졌다. 귓바퀴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을 헤치고 임파선 부위까지 쓰다듬었다.
여길 건드리면 신해범의 목 빗근이 도드라지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류진은 그 소리가 좋았다. 자기가 느끼는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을 신해범도 느낀다고 생각하면 혀 밑이 뜨거워졌다.
“그럼 내가 뭔데.”
“직속 상관.”
검은색 제복 셔츠가 구겨져 올라갔다. 드러난 맨살에 신해범이 웃었다.
“얼씨구.”
류진은 목을 움츠렸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게 실수였다. 동절기용 셔츠는 하절기용에 비해 원단이 두껍고 색도 어두워 굳이 내의를 받쳐 입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니고.
신해범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꾹 눌렀다.
“복장 불량.”
“까, 깜박했어.”
“잊어버린 게 아니라 귀찮아서겠지.”
“아니야. 진짜야….”
신해범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싱글벙글했다. 류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깔끔 떨고 젠체하더니 결국 이런 거 좋아한다. 발정 난 개새끼.
류진은 유두를 건드리는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짐짓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하극상이야.”
“영창 갈게. 가서 정류진 사진 보면서 자위해야지.”
기가 막혔다.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류진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아!”
신해범이 무릎을 쳐올렸다. 류진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하지, 하지 마…!”
“기분 좋아?”
“안 좋아, 으!”
“살짝 아픈 게 좋은 거거든.”
“이, 익… 비켜!”
벌어진 입술에 셔츠 자락이 쑤셔 박혔다. 바로 뱉어 버리려 했으나 신해범이 허락하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상반신에 열렬한 시선이 꽂혔다.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달아올랐다. 꼿꼿하게 선 젖꼭지를 신해범의 단단한 손끝이 누르면 류진은 명치에서부터 옆구리까지 찌르르 번지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겨드랑과 가슴을 오가며 주무르는 손길은 상냥하지 않았다. 한없이 급하고 무자비했다.
신해범이 가슴을 만지며 관자놀이 흉터를 핥을 때, 류진은 자기가 <힐 스톤 그로우>에서 본 톰슨가젤 같다고 생각했다. 빠른 다리와 뾰족한 뿔을 가지고 있지만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에게는 당해 내지 못한다.
신해범의 두껍고 단단한 몸에 짓눌리면서, 류진은 그가 자신의 머리부터 자근자근 씹어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신해범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항상 굶주려 있었다. 좆을 뿌리까지 쑤셔 넣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우으… 응.”
양손이 머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류진은 다리 사이를 누르는 신해범의 허벅지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다.
발뒤꿈치가 들렸다. 장딴지에 힘이 들어가고 무릎이 긴장했다. 마침내 딱딱한 워커 앞코로 바닥을 지탱하고 서게 되었다.
“읏. 응.”
신해범은 집요하게 유두를 잡아당겼다. 가슴이 퉁퉁 부어올라 발갛게 물들어도 멈추지 않았다. 아프다고 사정해도 봐주질 않았다. 가히 맹목적인 집착이었다.
류진은 신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신해범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렇게 만진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몸이 점점 더 밀려났다. 등 뒤는 이미 벽이었다. 앞을 가로막힌 힘이 위로 치솟았다. 류진의 두 발이, 간신히 바닥을 지탱하고 서 있던 발이 허공에 들렸다.
류진은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깡말라 볼품없는 체격이긴 하지만 신해범이 허벅다리 하나로 지탱할 만큼 종잇장은 아니었다.
오판이었다. 신해범은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흐으… 응… 읏.”
그가 손을 거뒀을 때 류진의 양 가슴은 온통 불그스레했고, 신해범의 시선은 단단하게 솟은 젖꼭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예뻐.”
그가 중얼거렸다.
“너무 예뻐. 정류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지금 신해범이 제정신인지, 아니면 반미치광이 상태인지.
눈빛은 몸뚱이를 베어 먹을 것처럼 싸늘한데 목소리는 열정적이다. 손길은 거칠고 급한데 말투는 다정하다.
나는 당신의 의중을 모르겠다.
류진의 벌어진 입술에서 셔츠 자락이 떨어졌다.
“저리 가….”
“왜 자꾸 가라고 그래?”
“싫어. 당신이 이러는 거….”
“정말?”
신해범이 키득댔다.
“정말 내가 싫은 거야? 아니면 여기가 무서운 거야?”
그가 밑으로 내려오는 셔츠 자락을 들치면서 말했다. 또다시 가슴을 더듬는 손길에 류진은 고개를 홰홰 저었다.
“하지 말라니까…!”
“가슴 예쁘다고 잘난 척 엄청 하네.”
“내가 언제?!”
뚱딴지같은 소리에 화가 치밀었다. 신해범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어쩌겠어. 목마른 놈이 우물 파야지.”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니까 저따위 헛소리나 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 몸의 변화가 무서웠다. 신해범과 피부를 맞대자면 찌르르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 번졌다. 관자놀이도 지끈거렸다. 입 안이 뜨끈뜨끈해지고 숨이 턱까지 찼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원래도 성적 흥분감과 공포의 경계는 모호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두 개가 완전히 뒤섞여 버린 상태라면… 나는… 뭐지?
우리는 뭐지?
손목이 풀려났다. 류진은 두 팔로 신해범의 머리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몸이 더 위로 들렸다.
발이 땅이 닿지 않아서 불안했다. 퉁퉁 부은 가슴에는 신해범의 더운 숨이 닿았다. 류진은 어깨를 움츠리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감아 봐.”
네 다리를 내 허리에.
간단한 요구였다. 그러나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워커는 무거웠고, 류진은 불안했다. 신해범은 배신의 달인이었다. 그를 믿고 모든 걸 맡겼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특히 섹스에 있어서, 신해범은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얼른.”
왼쪽 유두를 깨물렸다. 류진은 허겁지겁 무릎을 올렸다.
“으으… 응.”
“그래.”
“어떡, 어떻… 게. 모, 못 해.”
류진의 셔츠 자락이 신해범의 정수리를 덮었다. 그는 킥킥 웃으면서 혀를 내밀었다.
정류진의 가슴은 꿀맛이다. 가끔은 그냥 콱 물어뜯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꿀단지를 깨뜨리면 그 순간은 단맛의 황홀경에 빠지겠지만,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제한다.
신해범이 말했다.
“나한테 매달려.”
“응. 응.”
벌써 울고 있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일 것이다.
신해범은 류진이 매달리는 벼랑이 되고 싶었다.
두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고 힘주어 주물렀다. 볼깃살을 벌리듯 하는 손놀림에 허연 등허리가 움찔움찔했다.
“너 팬티 입지 마라.”
“싫어.”
“왜? 빨랫감만 늘잖아.”
오른쪽 어깨가 지끈했다. 장진에서 다친 부위를 정류진이 꽉 잡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상큼한 애교에 웃음이 나올 뿐.
“그냥 속옷 입지 말고 살아. 바지 벗기고 바로 넣게.”
“싫다고…! 당신이나 그렇게 해!”
신해범은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류진의 두 다리, 오금을 잡고 힘껏 들어 올렸다.
“헉.”
마른 몸뚱이가 경련했다.
“예쁘다.”
신해범의 입술이 붉어진 유륜을 덮었다. 한참을 쭙쭙 소리를 내며 빨았다. 마침내 그가 입술을 뗐을 때, 류진의 젖꼭지에서는 타액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허벅지에 힘줘.”
“으….”
“말 타 봤어?”
허리를 감아 조이는 힘이 느껴지긴 했지만 헐거웠다. 신해범은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는 류진의 다리를 잡고 끌어 올렸다. 몇 번이나.
정류진은 할 줄 알아야 했다. 알몸으로 계단참에 엎어져 강간당하고 싶지 않거든.
“승마해 본 적 없어?”
“없어. 없어… 흐윽. 있겠냐…!”
“그럼 내가 네 퍼스트네.”
진치우가 어릴 때 폴로를 했었다. 주니어 토너먼트 챔피언 기록을 보유한 진혜림 부사장의 뒤를 이어서였다.
신은 공평하셨다. 챔피언의 동생은 승마에 재능이 없었다. 진치우는 스틱을 휘두르기는커녕 말안장 위에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아 있지도 못했다. 신해범도 승마 천재는 아니었다. 말을 가장 잘 다뤘던 사람은 하신성이었다. 그러나 하진주 회장이 훈련을 반대했다.
그는 하나뿐인 자식에게 시키기에는 위험하다는 이유를 댔지만, 진짜 이유는 출신 성분의 한계였다. 승마에 재능을 보인 하신성이 폴로 선수를 꿈꿨다가는 후에 좌절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승마는 귀족 스포츠였다.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진혜림 부사장조차 주니어 챔피언 기록을 마지막으로 승마를 그만두었다.
정류진의 훌쩍거림이 거북한 기억을 밀어냈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처음이 되고 싶어?”
“처음은 필요 없어.”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난 마지막이 좋아.”
두드러진 쇄골에 이를 박았다. 류진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류진아… 정류진.”
“으응. 응.”
신해범은 기다렸다. 류진이 완전히 매달려 오기를. 자꾸만 흘러내리는 다리를 힘껏 끌어 올리고, 양 발목을 엇갈려 겹쳐서, 두 몸뚱이가 완전히 밀착되기를.
“그래. 이렇게 하는 거야.”
신해범이 중얼거렸다.
“나한테 매달리면 돼.”
“흐윽.”
“안심되지?”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무서워. 내려 줘….”
“안 돼.”
“나 좀 그만 괴롭혀…!”
“안심돼. 류진아.”
신해범의 팔 힘이 더해졌다.
“널 안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류진은 신해범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언제 비상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 안심이 된다니.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 신해범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는 정말 차분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 저기 계단에. 응? 내려 줘….”
“좀 더 이러고 있자.”
신해범이 투덜거렸다.
“넌 오프에 일하는 부하가 불쌍하지도 않냐?”
“당신은 하나도 안 불쌍해. 당신은.”
불쌍한 건 벽과 신해범 사이에 낀 채 허공에 들린 자신이었다.
“나 안 할 거야…!”
“진짜 하고 싶다.”
“안 돼. 안 돼.”
“너도 섰잖아.”
“아니…!”
“아니기는.”
불룩하게 솟은 아랫도리가 신해범의 몸에 밀착된 채였다. 류진은 벌어진 입으로 아, 아, 했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안 돼….”
류진은 신해범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지금 안 돼. 이렇게는 안 해.”
“이렇게는?”
신해범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상대방이 실제로 한 말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싹 날려 버리는.
“그럼 다른 자세로는 해도 돼?”
류진은 아차 했다. 말실수였다. ‘이렇게는’이 아니라, ‘당신이랑’ 섹스 안 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류진은 차가운 벽에 얼굴을 짓눌린 상태로, 벨트를 풀려는 신해범의 손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 마. 안 된다고…!”
“엉덩이 잘 흔드네.”
몸을 피하려는 걸 그딴 눈으로 보는 신해범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류진은 신해범의 악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벨트가 풀어지고 바지 지퍼가 내려갔다. 거침없이 파고든 신해범의 손이 속옷째 성기를 덥석 쥐었다.
“아!”
“따뜻하다.”
축축한 혀가 귀를 핥았다. 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잡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속옷 안으로 침입한 손가락이 체모를 빗듯이 쓸어내리다가 냅다 잡아당겼다.
“악!”
“면도해 볼래?”
“싫어!”
“깨끗하게 밀면 우리 꼬꼬의 늠름한 거기가 잘 보일 텐데.”
신해범은 대놓고 입맛을 다셨다. 때마침 비상문 밖이 떠들썩해지지 않았다면 그는 기어이 류진의 팬티를 끌어 내리고 엉덩이를 벌렸을 터였다.
지금부터라도 아버지라 불러야 할까, 모르는 척 얼굴에 철판 깔고 하던 대로 할까?
강인혜는 결정하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 결심이 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결심은커녕 생각했던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책상 앞에 붙여 뒀던 문구가 떠올랐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오래돼 너덜거리는 종이를 떼어 내자 벽지 색이 달라져 있었다. 그 종이를 내가 어떻게 했더라….
“돌아가.”
강인혜는 고개를 들었다. 자기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강인우는 머리를 박박 밀었고, 얼굴 곳곳에 상처가 많았다. 볼은 홀쭉하게 파였고 모가지는 길어졌다. 각진 어깨가 축 처졌다.
단순히 살이 빠진 게 아니었다. 사람이 쪼그라들었다.
강인혜는 한사코 시선을 피하는 상대방의 인중을 노려보았다. 삐죽빼죽 돋아난 수염이 사람을 한층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 같네.”
“…….”
“돌아가라니. 방금 들어온 사람한테 너무한다.”
“…….”
“나랑 얘기 안 할 거야?”
강인혜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취조실 문 앞에서 신해범에게 받았다. 아직 많이 남았고 라이터도 깨끗했지만, 그는 돌려줄 필요 없다고 했다.
흡연은 처음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담배를 접하기 쉬운 환경에 있었다. 낳아 준 아버지, 키워 준 아버지 둘 다 흡연자였고 어머니도 이따금 2층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게다가 모범생의 일탈은 또래 친구들의 흥미와 묘한 동경심을 유발했다.
명문대는 가고 싶었지만 입시에 목매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걱정하는 친구들에게는 적당한 흡연이 암기에 도움이 된다고 얼버무렸다.
어떤 동급생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다 갖춘 애라는 평가였다. 부유한 집안에 나이 차가 큰 오빠는 군인, 미인형 얼굴에 성적은 톱.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교사들을 당당하게 비난하는 배포까지 갖췄으니 실로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인재’ 가 아니겠느냐고. 너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그때 강인혜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쑥스러운 척 웃어 보였다. 그렇게 오만했다. 삶을 원하는 대로 끌고 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담배 끊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해?”
“건강에 나빠.”
“피우는 거 전혀 몰랐어?”
강인혜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세게 뱉었다. 유리창의 구멍을 통해 냄새가 충분히 전해지도록.
“그건 아니지?”
위생과 냄새에 신경을 많이 썼다. 호월루의 신예나에게 추천한 반지도 일찍부터 손에서 담배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알고 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였다.
강인혜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나는 흡연을 한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어쩌면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학교 친구들 말고.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충격받을 만한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잠들지 못하는 밤에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귀뚜라미 울음을 들었다. 아득한 불야성을 뚫고 들려오는 그 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강인혜는 마당으로 뛰쳐나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이 더러워져도 괜찮았다. 입 안으로 흙먼지가 날려 들어오는 것도 상관없었다. 두 팔을 뻗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면 그래도 잠깐은 숨통이 트였다.
밖에서 신선한 공기를 쐬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래서 책을 가지고 나갔다. 별관 마당의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였다.
강인혜는 책을 읽지 못했다. 문맥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책을 한참 들여다보고, 어절을 끊어서 생각해야 했다. 몇몇 단어는 그 의미가 떠오르지 않아 국어사전까지 찾아봤다.
글을 읽는 방법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직도 주변에는 털어놓지 못했다. 신예나는 여전히 자기가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줄 알았다.
유미현과는 아직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인혜는 담배 연기와 한숨을 내뱉었다.
출생부터가 거짓이었던 삶을, 내가 이끈다고 믿었으나 그렇지 않았던 삶을,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아득함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강인혜는 입술을 달싹였다.
“세상에 없었던 걸 새로 만드는 일과 망가진 걸 다시 고치는 일, 둘 중에 뭐가 더 어려울까? 난 모르겠어.”
“…….”
“뭐라고 불러야 해?”
“…….”
“아버지라고 부르면 되나?”
“애쓰지 않아도 돼.”
“응. 힘들어. 그래도 곧 죽을 사람한테, 내가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어?”
싸늘한 목소리로 공격해야 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면.
“말해 봐. 내가 뭐라고 불러 주면 좋겠어?”
“지금… 그대로가 나아.”
“그대로? 지금까지처럼?”
강인혜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가능해?”
“…….”
“그건 불가능해. 그런 건, 그런 건 타임머신이 개발돼서 시간을 돌릴 수 있어야 가능해.”
“그래.”
“궁금한 게 있어.”
가능한 한 천천히,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도 감정을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했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이야?”
“…….”
“말해. 대답하지 않으면 다시 올 거야.”
강인혜는 눈꺼풀을 쉴 새 없이 깜박거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나 지금 호월루에서 살고 있거든? 거기서 여기까지 매일 올 거야. 걸어오든 차 얻어 타든 어떻게든 와서, 풍기대 본관 앞에서 면회 가능 시간까지 죽치고 기다릴 거야.”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고 내뱉었다.
“사형 날에도 올 거야. 공개 처형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죽고 싶으면 지금처럼 입 다물어. 그게 싫으면 말해.”
“…….”
“침묵은 나를 위한 게 아니야.”
강인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담배를 든 손가락이 떨렸다.
“내 일을 내가 모르는 건 질색이야. 정말… 지겨워.”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았다. 그게 누구를 위한 행위였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워서 화가 났다.
강인혜는 대답하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호소했다.
“요즘 내가 어떤지 알아?”
능숙하게 지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생의 배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뱃머리가 빙산에 처박혔다. 찢어진 선체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막을 길이 없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숙한 배에는 안전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배는 침몰했다. 바닷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지금 나는….”
강인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바닷속에 있는 기분이야.”
“오지 말지 그랬어.”
“그딴 소리를 왜 하는 거야?!”
“인혜야.”
“그 이름은 진짜야?”
“뭐?”
“출생 신고서에 적힌 내 이름이 강인혜가 맞아? 나이는? 생일은? 나, 내가 사실 스무 살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연기를 잘못 삼켰다. 강인혜는 온몸을 떨면서 기침했다. 배가 아프고, 숨을 쉬기 힘들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눈물이 나왔다.
그토록 참으려고 애썼음에도.
자기가 눈물 흘리고 있음에도 무덤덤한 상대가 원망스러웠다.
“날 사랑했어? 아니면 부정을 속죄하기 위해서 키운 거야?”
“…….”
“그동안 날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강인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줬지. 어렸을 때부터. 이유도 묻지 않고서.”
“…….”
“내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생각이 같다고. 목표가, 사상이… 꿈이. 남들한테는 말하기 어려운 거 말이야.”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활자만 못 읽게 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언어 구사 능력까지 상실한 모양이었다.
담배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조그만 물건조차 들고 있기 힘들었다. 재떨이에 힘껏 비벼 불을 끄는데 머리 위로 익숙한 음성이 떨어졌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나 같은 놈한테서 네가 태어났는지.”
강인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돌아가.”
“어디로?”
강인혜는 외쳤다.
“어디로 가라고?! 그 살인 사건 현장으로?!”
“…….”
“거기 가면 누가 있는데? 대체 누가 날 기다려 주는데!”
“어디든, 누구든.”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어?!”
“누구든 널 받아 주고, 필요로 하는 데가 있다면 협조하고 몸을 의탁해. 이제 <백사자>는 없으니까. 신념 같은 건 집어치우고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 다른 건 모조리 내가 뒤집어쓸 테니까, 너는….”
“나한테 명령하지 마! 자기가 한 짓이나 돌려놔!”
강인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인혜는 그가 자신을 원망하지 않음에 더 화가 났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오빨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내게 의지해서 좋았어. 날 믿어서 기뻤다. 내가 네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이게 도움 된 거야?”
강인혜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서 울었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 그냥 쌤쌤으로 할까.”
응?
“서로의 인생을 망친 거로.”
“…그래.”
“뭘 그렇게 하자는 거야! 오빤 지금 죽게 됐는데!”
그때 강인우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갑이 휠체어 팔걸이와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강인혜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뭐야?”
강인우의 오른손이 이상했다. 응당 다섯 개가 붙어 있어야 할 손에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다. 강인혜는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손이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우리….”
강인우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우리를 위한 일.”
“뭐?”
“네가 그렇게 말했다. 이건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뭐라고?”
“내 귀엔 들렸어.”
강재상을 죽이고, 감시자들과 격투하고, 오은정의 시신을 외면하며 집을 나서는 동안.
폐차장 사장을 죽이고, 맹수가 득시글한 숲으로 숨어들어 왕자에게 총을 쏘고, 정류진을 납치하는 내내.
강인우는 재차 말했다.
“내가 한 짓은 너와 나,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일이었어. 그래서 나는 후회 안 해.”
“자기가 옳았다고 생각해?”
“어떤 살인에는 이유가 있지. 용서할 수 있는 이유.”
강인혜는 입을 벌렸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물론 그건 독재자인 권일혁 총통,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는 귀족들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 쓰라고 가르쳐 준 게 아니었다.
“오빠의 살인에도 이유가 있었어?”
“우리를 위한 일이었어.”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상대를 힐난했다.
“엄마를 죽인 게? 그게 우리를 위한 일이었다고?”
강인우는 눈을 감았다.
오은정은 자살했다. 인혜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벌어지는 입술을 힘주어 닫았다. 그는 딸을 살리고 싶었다. 강인우는 강인혜가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했다.
그 모습을 죽어서라도 보고 싶었다. 자신은 천국에는 가지 못할 테니,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에서라도.
따지고 보면 오은정을 자살로 몰아넣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를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하지 못한 자기 잘못이었다.
“왜 죽였어?”
“방해됐으니까.”
오은정은 다리에 총을 맞았다. 뛸 수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게 된 그는 자기가 방해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딸의 인생을 구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죽음을 선택했다. 스스로.
명백한 자살이었다. 시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해범은, 또 유미현은 필요하다면 진실을 감추는 자들이었다. 거짓된 정황과 기록. 역사는 승리자가 기록하는 것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나를 원망함으로써, 네가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면.
“어떻게 죽였는데?”
그렇다면 나는 악인이 될 수 있다. 모든 걸 뒤집어쓰고 죽을 수 있다.
“말해 봐!”
유리창이 흔들렸다.
“나한테 말해 보라고!”
강인우는 눈을 떴다. 눈앞에서 딸이 울었다.
“엄마를 어떻게 죽였어?”
부릅뜬 두 눈이 빨갰다. 흰자의 실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강인우는 딸의 눈을 주시했다. 흑갈색으로 보이는 눈은 햇빛을 받으면 희미하게 적색을 띠었다. 불꽃을 닮은 눈이었다.
아기였을 때는 눈동자에 붉은 기가 더 심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모든 게 작았었다. 힘주어 잡으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아기였다. 그 조그만 고사리손에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어 보았던 어느 여름날, 타오르는 저녁놀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밝았던 방 안에서 강인우는 속으로 맹세했었다. 앞으로 너를 위해 살겠다고.
너를 위해 살아서 행복했다.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기쁘구나.
강인우는 유리창 앞 선반에 머리를 찧었다. 있는 힘껏, 몇 번이고 들이받았다.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고 묻는 강인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 이내 허공을 찢는 비명이 되어서 울려 퍼졌다.
대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들은 강인우의 어깨를 붙잡고 휠체어에 눌러 앉혔다. 누군가가 다가와 상처를 지혈하려고 했으나, 강인우는 고개를 휘저어 그 손을 떨쳐 냈다.
피가 더 많이 흘러내렸으면 좋겠다. 시뻘겋고 뜨거운 피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다. 강인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킬킬 웃었다.
***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고등학생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였다. 배구부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린 다음부터였다. 그때 어머니는 자기가 배구부를 그만두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사람 같았다.
처음에는 회유였다. 그렇게 운동을 하고 싶으면 전담 코치를 구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단체 생활이고, 같은 학교 부원들과 한 팀에서 뛰고 싶다고 거절하자 회유는 협박으로 바뀌었다.
권세혁은 운동선수들이 노출되는 각종 사고와 부상 후유증에 대해 속속들이 꿰게 되었다. 어깨, 허리, 무릎, 발목, 참으로 다양한 부위의 골절. 운동선수들의 영원한 숙적인 인대 파열. 심지어 후두부에 공을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당사자의 이름도 출처도 알려지지 않은 괴담 같은 이야기까지 들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총통의 아들이라고 피해 가는 게 아니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응원보다 걱정이 앞선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서운함은 원망으로, 원망은 오기로 발전했다.
권세혁은 하루빨리 주목받는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초조함은 자신 없음의 다른 말이니까.
그때는 지금만큼 유명해지기 전이고, 유력 총통 후보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귀한 신분의 소유자가 결과에 집착하는 건 좋지 않았다. 이번이 생의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추했다. 왕족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국격이 떨어졌다.
지금 그런 것은 상관없다. 앞뒤로 재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류진의 옆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곳은 원래 내 자리였다. 신해범 따위가 아니라.
권세혁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두 개의 알루미늄 크러치가 얌전히 벽에 기대서 있었다. 그는 높이를 조절하는 여섯 개의 구멍을 빤히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알루미늄 소재가 차갑다.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권세혁은 정수헌의 자기 방에 머무르지 않았다. 별관에 집중 치료실을 만들어 주겠다는 외조부의 제안도 거절했다. 별관은 류진과 함께할 미래를 상상하며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그 문 앞에 서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옥죄었다. 고통스러웠다.
권세혁은 정수헌의 수많은 손님방 중 하나에 틀어박혔다. 류진과 함께 지내던 방도, 기우희가 쓰던 방도 아니었다. 그곳은 정수헌 본관의 구조 특성상 햇빛이 가장 덜 드는 방이었다.
불을 켜지 않으면 대낮에도 어둑한 방에서 치료도 받고,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잠도 잤다. 권세혁은 당장 어릴 때 쓰던 방으로 옮기라는 외조부의 역정을 무시했다.
지금껏 마음속에만 담아 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권세혁은 정수헌에 처음 왔을 때 류진을 손님방이 아닌 자기 방에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과거에 자신이 쓰던 방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외조부의 방에 영향을 주는 자리에 있었다.
집안의 고용인들 중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류진을 한사코 3층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건 류진이 기우희와 떨어지는 걸 꺼렸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든 없든, 정수헌의 주인에게 영향을 줄 만한 자리에 ‘출신 성분이 낮은’ 외부인이 머무는 일 자체가 문제여서였다.
만약 류진의 출신 성분이 귀족이었다면.
권세혁은 그가 충분히 자기 방에서 지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어두운 손님방에서 외롭게 지내는 건, 그래서 오히려 한시름 놓이는 건, 정수헌에서 지내는 동안 류진에게 느낀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렇게라도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다면.
그러면 류진을 다시 만났을 때 당당해질 것 같았다. 나는 형에게 못 해 준 것만 생각나서 괴로웠어. 형도 나한테 한 일을 후회하지? 우리 하나씩 주고받은 셈 치고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아침저녁으로 정체불명의 수액 주사를 맞았다. 식후에 먹는 약은 종류가 너무 많아서 세기도 귀찮았다. 약쑥, 홍삼 달인 물,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걸쭉한 즙도 먹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다. 하지만 식사를 거부하면 목까지 시뻘게진 외조부가 쳐들어왔다. 권세혁은 꾸역꾸역 먹었다. 사람들이 물러가고 사위가 조용해지면 화장실로 기어갔다. 변기를 끌어안고 속을 게워 냈다. 위 속에 집어넣었던 걸 도로 꺼내듯이, 시간도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깨끗하게 한다는 게….
차라리 굿을 하는 게 어떨까. 소금물 목욕이라든지.
풍기대에서 지낼 때, 하루에 일 리터씩 마셔 댔던 소금물을 생각하자 비참한 기분이 됐다.
권세혁은 심호흡을 하고 크러치를 움켜잡았다.
신중하게 바닥을 짚었다. 무게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 발짝 내딛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겨우 세 발짝 걷는데 식은땀이 났다.
“아….”
권세혁은 문까지 걸어가는 일을 포기했다. 침대 가까이 있는 소파에 앉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왜 수술 후 재활 치료가 필수인지 알겠다. 힘든 여정이 될 거라던 의사의 말은 자기를 겁주려는 게 아니었다.
몸이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으려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일 년, 아니 그 이상이 걸릴 가능성도 있었다. 평소에는 멀쩡해도 비가 오면 다리가 쑤실지도 모른다.
권세혁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피식 웃었다. 별안간 스무 살은 더 먹어 버린 기분이었다.
스무 살….
내가 신해범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류진이 형의 상처를 눈치채고 감싸 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권세혁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봤다. 태양이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창문은 꼭 닫혔지만 투명한 유리 너머 타오르는 저녁놀이 보였다. 하늘을 뒤덮은 뭉게구름이 역광 때문에 잿빛이었다.
류진이 신해범에게 끌린 이유를 안다. 그는 자신과 여러모로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류진은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권세혁 왕자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반대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이끌리는 결과는 낳은 것이다.
권세혁은 확신했다. 신해범을 좋아한다는 류진의 감정은 착각이었다. 그는 지금 스스로를 속이는 중이었다. 나는 신해범을 좋아한다고.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또한 신해범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였다.
류진에 대한 신해범의 마음이 여전하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타고난 언변과 처세술로 숙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에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류진을 구워삶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류진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참 너다운 생각이네.’
권세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여자 목소리였다.
“끄지라.”
‘그 새끼 약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게 누군데?’
차모은. 류진에게 무조건적인 분노를 쏟아 냈던 그 여자의 혼이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응? 솔직하게 말해 봐, 우리 왕자님.’
“닥치라고 했다… 좀.”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거나, 동정심에 호소해서 발목 잡는 거나. 그게 그거 아니야?’
권세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차모은의 비아냥에 수긍하지 않았다.
전자는 집착이지만, 후자는 선택권을 주는 거였다. 류진은 자신을 거절할 수 있었다. 마음만 독하게 먹는다면.
‘걘 마음이 약해.’
“…….”
‘그걸 이용하려는 게 누구냐고.’
“조용히 하라고… 내 말이 안 들리나?”
‘왜 이래, 왕자님. 몸도 성치 않은데 열 내지 마. 죽은 사람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데 내가 왜 그쪽한테 붙어 있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다. 당신이 내게 달라붙어 주절대는 지금이 그렇다.
‘피차 같은 입장인데 솔직해지자구.’
“같은 입장?!”
권세혁은 크러치를 집어 던졌다. 우당탕탕 큰 소리에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수헌의 고용인이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외조부는 도대체 나를 편하게 해 주려는 건지, 감시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아직 어린애였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소년이었다
“왕자님?”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두 손으로 쟁반도 겨우 드는 어린애가 하인이랍시고 자기 주위를 맴도는 상황에.
아이는 기껏해야 무혁이 또래로 보였다. 동생이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편이니 실제 나이는 더 어릴지도 모르겠다.
권세혁은 한숨을 삼켰다. 외조부가 자신에게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아이를 하인이랍시고 붙여준 이유를 짐작했다. 정을 붙여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정류진보다 더 어리고, 예쁘고, 순종적인 아이가 많으니까. 열 살이 넘는 나이 차이는 흠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다.
통나무집에서 생겼던 일이 떠올랐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창문을 부수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류진의 모습이.
외조부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권력으로 약자의 몸을 취하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권세혁은 외조부의 전두엽에 박혀 있는 생각이 역겨웠다. 자신의 비대해진 상상력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속이 답답해질 뿐이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차모은이 웃어 댔다. 권세혁은 머리를 감쌌다. 자기가 미쳐 버린 게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손톱을 세워 어깻죽지를 긁었다. 피가 날 정도로 힘껏 할퀴었다. 아무리 긁어도 차모은의 손가락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왕자님!”
“개안타! 기냥 넘어졌다. 같잖시럽게 유난 떨지 말아라.”
“하지만….”
“됐다 캐도!”
밖이 조용해졌다. 아이가 자리를 뜬 것 같지는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느새 차모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고요 속에서 어렴풋이 휴대폰 진동 소리를 들었다.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모친과의 통화는 반갑지 않았다. 좋은 말을 들을 것 같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언쟁이 무섭진 않아도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여 발신자를 확인했다. 액정에 뜬 이름은 신해범이었다.
권세혁은 벌떡 일어났다. 상처가 벌어지는 통증에 무릎이 푹 꺾였으나 간신히 테이블을 짚고 버티어 섰다. 그는 진동하는 휴대폰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협탁으로 손을 뻗쳤다.
“왕자님. 잠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신해범이 말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더럽게 사람 말을 안 듣는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제발, 정말 싫다고 했는데도 기어이 권세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를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강인우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보고.
물론 그는 죽지 않았다. 최유신 또한,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기는 하지만, 강인우가 딸 앞에서 진심으로 죽으려고 하진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면회실에서의 기행은 ‘보여 주기용 쇼’였다.
왜? 정을 떼려고. 누구에게? 강인혜에게.
본인이 처형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니까.
최유신은 한숨을 쉬며 자살에 괜히 도구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어중간하게 시도했다간 감당해야 할 고통만 늘어난다.
충격받은 강인혜를 호월루로 데려간 사람은 진치우였다. 류진은 그가 자진해서 나섰다는 사실에 놀랐다.
고마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류진이 보기에 진치우의 호의는 대단히 수상했다. 그가 강인혜를 어느 야산에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류진은 신해범에게 ‘당신이 데려다주라’고 말했으나, 그는 웃으면서 어깨만 으쓱했다. 지금 강인혜가 가장 꼴 보기 싫은 얼굴이 자기 낯짝일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12층으로 끌려와 사무실로 처넣어졌다. 류진은 진치우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PC 모니터가 켜져 있었는데 실수로 마우스를 건드리자 화면 색이 바뀌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물론 류진은 진치우 PC의 패스워드를 몰랐고, 그의 업무를 훔쳐볼 생각도 없었다. 진치우의 책상으로 몸을 피한 건 웃으면서 다가오는 신해범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신해범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고, 류진이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치우가 노크 안 하고 들어올 수도 있잖아.’
류진은 신해범이 진치우를 호월루로 보낸 이유를, 그리고 자기를 사무실로 밀어 넣은 이유를 깨닫고 분노했다.
‘뭐, 노크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면회실에서 그 난리를 치르고도 그 짓거리 할 생각이 남아 있다는 게.
단단한 손끝이 쇄골 중심에서 명치를 지나 아랫배까지 내려갔다. 셔츠가 벗겨져 드러난 맨가슴에 꽂힌 시선이 따갑다.
“목숨은 확실히 붙어 있습니다.”
권세혁이 강인우의 생존 여부를 물은 모양이었다.
“예. 애초에 성공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저희 그렇게 허술하지 않습니다.”
소파 가죽이 등에 쩍쩍 달라붙었다. 목덜미와 등에 배어난 식은땀 때문이었다.
류진은 고개를 우로 돌렸다. 허공에 들린 허리와 벌려진 사타구니가 아팠다. 한껏 팽창한 구멍에 귀두가 걸쳐졌다. 두툼하고 묵직한 그것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것만 같았다.
진치우의 책상에 뚜껑이 열린 채 팽개쳐졌던, 레몬 향이 물씬 풍기는 젤 크림이 엉덩이를 적셨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신해범은 언제나 양이 많았다. 윤활제로 쓰는 것도, 몸에서 나오는 것도.
“으응… 응. 읏.”
목구멍에서 숨이 튀었다. 소리를 참으려 애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류진은 신해범이 싸움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잔뜩 붉어져 벌어진 입구에 귀두를 밀어 넣고서 한 손으로는 성기를 잡고 주무르는 걸 보면 틀림없었다. 정말 한판 해보자는 거였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류진은 한 손을 아래로 뻗어 남의 성기를 제멋대로 주무르는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신해범이 소리 없이 입술로 ‘왜’ 했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뭐를.’
소리를 낼 수 없어 눈동자만 굴렸다. 의미를 알아챈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이거?’
체모를 빗듯이 쓰다듬고, 기둥을 주무르고, 뿌리를 손끝으로 살살 긁으며 사정을 유도한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으읍….”
신해범은 류진이 가는 모습이 좋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예뻐.’
예쁘면 그만이지. 사랑스러우니 장땡이지. 정류진의 아름다운 모습을 권세혁에게 실시간 영상통화로 보여 줄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 곧 복귀할 것 같다. 걷는 데도 지장 없어.
“그것 참 기쁜 소식입니다. 대관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 할배가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왕자님 건강이 호전되면 될수록, 대관께서도 한시름 더실 텐데요.”
- 그쪽이 우리 할배랑 안부 주고받을 짬은 안 되는 거로 아는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신해범은 상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루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뵙길 고대하겠습니다.”
- 알면 됐고… 류진이 형 어떻게 지내나?
“정류진 이병 말씀이십니까?”
신해범의 입꼬리는 올라가고, 시선은 밑으로 내려갔다. 발개진 얼굴로 흐느끼는 류진을 보고 있자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왜 그러는 거야! 왜!”
류진은 신해범의 얼굴을 때렸다. 그의 목과 어깨, 가슴팍, 옆구리며 장딴지까지 손이 닿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후려쳤다. 신해범은 순순히 맞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는 낯으로.
“그만해. 나 아프다.”
말은 그런데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저렇게 말해 봤자 하나도 진심 같지 않았다. 류진은 확신했다. 신해범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마! 내가 얼마나…!”
“무서웠어?”
“그래!”
“그래도 안 들켰잖아.”
달짝지근한 목소리였다.
“안 들켰어요. 각하.”
류진이 목을 움츠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
“왜? 베갯머리송사 같고 좋은데.”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류진은 신해범의 눈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검은자가 번들거린다. 욕망에 젖은 얼굴이었다. 그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럭 겁이 나, 류진은 신해범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잠깐만. 밑에… 잠깐 빼 봐.”
“미쳤어?”
“아파서 그래, 아파서…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끝이 제일 두꺼워서 그래.”
“그러니까 잠깐만.”
“끝까지 들어가면 안 아파.”
바보도 안 속을 거짓말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뱉는 신해범이 미웠다. 사람 물로 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신해범이 움직일까 봐 무서웠다.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던 류진은 신해범의 목을 끌어안았다.
“으응… 잠깐만….”
목덜미에 뺨을 비비자 신해범이 웃었다. 지금 그에게서는 류진에게 한없이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간지러워.”
“빼 줘… 아파….”
“너도 내 말 무시했잖아.”
“내가 언제.”
“방금.”
류진의 울먹임은 신해범의 입술에 삼켜졌다. 깊은 입맞춤 끝에 신해범이 말했다.
“자기는 나 실컷 때려 놓고서. 겨우 이거 넣었다고 엄살이냐?”
“그건 당신이, 위험한 짓을 하니까…!”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
“뭐라고?”
“우리 각하 불주먹에 맞아 죽는 줄 알았다고.”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류진은 신해범의 귓불을 콱 깨물었다.
“아야.”
“아흐냐?”
“그래. 아프다.”
귀를 놔주고 씩씩대는 류진의 얼굴을 신해범의 큰 손이 어루만졌다.
“너 때문에 아파.”
여기가.
퍽, 치고 들어왔다. 류진의 턱이 위로 들렸다.
“흐윽!”
커다란 손바닥이 뒤로 넘어가는 조그만 머리를 받쳤다. 마디가 두드러진 긴 손가락이 까만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류진은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몸속에서 요동치는 살덩이, 그 기둥에 두드러진 핏줄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아… 앗…!”
목덜미에 송곳니가 박혔다. 류진은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이로 찢어 낸 상처를 핥는 혀가 따뜻하고 축축했다.
신해범의 몸통을 다리로 감았다. 점점 더 깊이 들어오는 성기를 느꼈다. 이물감에 몸서리치는 육벽을 거침없이 밀어젖히며 깊게, 더 깊게 파고들어 왔다.
“으….”
내장들이 밀려나고 횡격막이 긴장했다. 류진은 신해범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멱살을 쥐고 끌어당기듯이 했다.
“나쁜 새끼! 개자식!”
“잘 아네.”
마른 몸뚱이에 가슴우리가 도드라지는 모습을 보며 신해범은 입맛을 다셨다. 류진의 입술 사이에서 가쁜 숨이 터졌다.
“흐으으… 읏!”
시선이 마주쳤다.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류진이 내뱉는 가파른 숨과 신해범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엉켰다.
“당신… 진짜 싫어.”
류진은 신해범의 희고 매끈한 이마를 응시했다. 검은색의 짙은 눈썹, 그 아래 날카롭게 뻗은 눈매도 보았다. 신해범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 밑에 속눈썹 그림자가 졌다.
“울어도 돼.”
신해범의 혀가 류진의 감은 눈꺼풀을 쓰다듬었다.
“난 정류진이 우는 게 좋더라.”
“씨발 새끼…!”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굵고, 길고,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 두 개가.
놀라서 깨물어 버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신해범은 류진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침없이 입천장을 쓸고 혀 밑을 건드렸다. 침샘을 누르자 타액이 입술 밖으로 넘쳤다. 류진은 눈에서, 입에서 체액을 쏟으며 헐떡거렸다.
바윗덩이나 거목에 깔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성을 붙잡으려고 애써도, 결국은 온몸의 관절이 풀려 버렸다.
“예쁘다.”
신해범은 만족했다. 그 혼자만 즐거워했다. 류진은 혼자만 잘생기고 근사한 신해범이 얄미웠다. 이 나쁜 새끼, 천하제일 개새끼. 자긴 멋있으면서 나만 망가뜨린다.
몸속에서 부피를 키우는 성기가 무서워 오금까지 땅겼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가락을 부지런히 빨고 핥으며 제발 움직이지 말라고 애원했다.
“왜.”
“배 아하. 너무 아하….”
“여기?”
신해범의 손이 류진의 명치를 더듬었다.
“아닌가?”
넓고 단단한 손바닥이 밑으로 내려갔다. 아랫배가 짓눌리는 감각에 류진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 시러!”
울부짖는 순간 성기가 더 깊이 박혔다. 땀과 젤 크림으로 젖은 볼깃살에 체모가 확 쓸렸다.
“아아!”
탱탱한 불알이 철썩, 부딪혔다.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는 것 같았다.
“으아아. 아.”
류진은 신해범의 손가락을 물고 끅끅댔다. 자신의 모든 게 망가지고 있었다. 위도, 아래도. 전부 그가 원하는 대로.
“힘들어?”
신해범이 웃었다.
“힘, 그러. 나. 이에, 그마….”
“승마할래?”
류진은 고개를 휘저었다. 신해범의 위로 올라가 봤자 소용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체중 때문에 더 힘들었다.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쳤다. 뭐?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어쩌고 어째? 정복감은 무슨, 그런 거 맛보지도 못했다!
“그마. 그마안. 흣.”
위협적으로 부푼 귀두가 내벽을 긁으면서 나갔다. 끄트머리가 구멍 입구에 툭, 걸쳐졌다가 도로 진입했다.
“아아! 아!”
몸속을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불에 잔뜩 달궈진 몽둥이가 몸속을 마구 헤집었다. 가만히 담고만 있어도 버거운데,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로 쑤셔 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러. 시, 이러… 나, 흐으, 그마…!”
가죽 소파가 등에 쩍쩍 달라붙었다. 피부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신해범의 손가락이 혀를 붙잡아 당겨 류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술 밖으로 넘친 타액이 턱을 적시면서 흘러내렸다.
류진은 노력했다. 어떻게든 허리를 움직여 보려고, 신해범의 속도에 맞추려고.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한 뒤에는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신해범의 몸통을 조였다. 조금만 천천히 하라고. 그렇게 세게 처박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신해범은 류진의 간절한 바람을 모른 척했다. 무자비한 허리 짓은 거세져만 갔다.
“아아! 아! 아으으, 우으!”
달아오른 엉덩이에 체모가 쓸렸다. 음낭이 볼깃살에 부딪힐 때마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류진은 당장 행위가 끝나도 팬티를 입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너 팬티 입지 마라.’
‘그냥 속옷 입지 말고 살아. 바지 벗기고 바로 넣게.’
류진은 혀를 내밀고 헐떡거렸다. 거칠게 구는 신해범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
이 나쁜 새끼….
신해범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가 복수하듯 세게 꽂았다. 성난 귀두가 스팟을 뭉개면서 밀고 들어왔다.
“응, 흣!”
신해범이 움직일 때마다 혹사당한 내벽이 비명을 질렀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흐읏. 흐… 아! 아…!”
신해범의 낮은 웃음소리가 눈물로 젖은 뺨에 닿았다.
“정류진.”
대답할 수 없었다. 혀를 붙잡아 당기는 신해범의 손가락 때문에. 류진은 젖은 눈으로 신해범을 올려다봤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나 죽을 때까지 할 거야.”
뭐?
“나… 죽을 때까지 이 짓 할 거야. 정류진이랑 좆나 많이 할 거야. 이건, 진짜, 말이 안 돼… 무슨 이런 게 있어.”
신해범의 숨이 가빴다. 목소리도 평소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너 뭐야? 어디서 왔어? 누가 보냈어? 너.”
하는 말도 이상했다. 지금 신해범은 류진을 모르는 사람처럼, 마치 오늘 처음 섹스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너 나 미치게 하려고 왔지. 누가 내 계획 다 망치라고 했어? 누구야. 누가 시켜서 온 거야, 너! 말해!”
류진은 입을 벌린 채 흐느끼며 신해범의 가슴팍을 마구 떠밀었다.
이 개새끼가 남의 몸속 쑤시다가 돌았나. 왜 아무것도 안 한 나한테 지랄이야. 난 당신하고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말해! 정류진! 너 누구 꺼야!”
혀뿌리에 강한 자극이 전달되는 순간, 류진은 허리를 확 비틀었다.
“아아아…!”
신해범의 셔츠 아랫부분에 정액이 뿌려졌다. 몇 방울은 그의 가슴팍으로, 또 몇 방울은 핏줄이 불뚝거리는 목으로 튀었다.
“하아… 아….”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신해범의 목 빗근을 따라 흘러내리는 정액 방울이 보였다. 류진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대단히 만족한 표정의 신해범이 물었다.
“잘 쌌어?”
류진은 안심했다. 지금 신해범은 제정신이었다.
입 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류진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으나, 신해범의 손이 턱을 잡고 얼굴을 원위치시켰다.
“입 벌려.”
시키는 대로 했다. 싫다고 말할 기운도 없어서.
신해범이 웃으면서 타액을 떨어뜨렸다. 류진은 순순히 받아 마셨다. 꼴깍꼴깍 얌전히 받아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해범은 더는 류진을 괴롭히지 않고 그의 안에 사정했다.
한 번에 전부 쏟아 내지는 않았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서, 류진이 느끼는 지점을 기둥으로 뭉갠 채, 류진의 몸속 이곳저곳을 쉼 없이 찔러 대며 한참 동안 사정했다.
한껏 달아오른 내벽이 정액으로 흠뻑 젖었다. 신해범은 사정을 마치고도 성기를 바로 빼지 않았다.
“그만… 흐윽. 나가….”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좆이 느껴졌다. 류진은 신해범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한 번 더.
응? 한 번만 더.
“연습했지?”
오금을 붙잡아 올리며 신해범이 말했다.
“네 학습 능력을 증명해 봐.”
증명하고 싶지 않았다. 류진은 눈물을 닦으면서 항변했다.
“안 할래. 힘들어.”
“지금이 딱 좋아. 예쁘게 젖어서… 응? 꼬꼬야.”
신해범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류진은 벽과 신해범 사이에 낀 채 한쪽 다리를 그의 허리에 억지로 감았다.
“안 하고 싶어….”
“그러지 말고. 꼬꼬야. 얼른.”
류진의 울먹임에 아랫도리가 더 무거워진 신해범이 재촉했다.
“반대쪽도. 얼른 끝내고 쉬자.”
“못 해. 이거. 나 이렇게 못 해….”
“잘할 거야, 우리 꼬꼬는.”
“안 할래. 싫어.”
류진은 시선을 내렸다가 울컥했다. 허벅지가 정액으로 푹 젖어 있었다. 아까 신해범이 싸지른 것이었다.
“한 번 했잖아. 이제 오늘은….”
“한 번으로 어떻게 끝내냐.”
신해범은 되려 류진을 원망했다.
“너 지난번에 호텔에서 했을 때. 거울로 네가 어떤지 봤지?”
“흐윽.”
“내가 정신 왔다 갔다 하는 게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네가 너무 예쁘고 그러니까 사람이 회까닥 도는 거야. 근데 지금 그만하라고? 한 번밖에 못 했는데 여기서 끝을 내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신해범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꼬꼬야. 나 좀 봐 봐. 응? 지금 내 꼴이 어떤지 좀 봐.”
류진은 훌쩍이며, 신해범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좆이 위협적으로 끄덕대는 중이었다.
“이걸 나 혼자 어떻게 해결하냐.”
“혼자 해…!”
“어떻게?!”
“그냥, 할 수 있잖아!”
“못 해!”
“당신이 못 하는 게 어딨어!”
“정류진이랑 한 번으로 끝내는 거!”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류진은 신해범을 12층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나 진짜… 하기 싫어. 안 하고 싶어….”
신해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가 한참 만에 말했다.
“알았어.”
“그럼…!”
“돌아서.”
“뭐?”
“이대로 하는 거 무서우면 뒤로 넣을게. 됐지? 내가 하나 양보했다. 그러니까 대.”
“싫…!”
“싫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해라!”
신해범의 눈에 불이 일었다. 류진은 눈물을 닦으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차가운 벽을 두 손으로 짚기 무섭게 엉덩이 사이에 성기가 닿았다. 곧추선 귀두가 입구를 파고들어 왔다.
“잠깐! 잠깐만!”
“야!”
황급히 고개를 돌린 류진이 말했다.
“반만 넣어.”
“뭐라고?”
“당신 그거… 반만 넣으라고. 할 거면.”
“진짜 죽는다!”
“아악!”
어깨를 붙잡혀 벽으로 밀어붙여졌다. 류진은 차가운 벽에 뺨을 짓눌린 채 신해범의 좆이 엉덩이 사이로 들어오는 감각을 느꼈다.
여전히 난폭했다. 아프고 힘들었다. 그에게 몇 번이고 당하면서 확실히 느낀 건, 도저히 저 크기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아아…!”
신해범이 안에 싸 놓은 정액이 밖으로 튀었다. 젖은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앗. 앗. 아앗.”
양말밖에 신지 않은 류진의 발뒤꿈치가 들렸다. 신해범은 더 세게 밀어붙였다. 두드러진 골반을 움켜잡고 하반신을 꽉 붙였다. 이대로 불알까지 쑤셔 넣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
“음?”
“이 나쁜, 개, 새끼….”
“잘 받고 있으면서 뭘.”
신해범이 허리를 움직이자 구멍이 더 벌어졌다. 류진은 헐떡이며 욕을 내뱉었다.
“개새끼! 이기적인 새끼! 나쁜 놈아!”
“안 힘든가 보네. 말 잘하는 거 보니.”
허윽. 류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부은 엉덩이에 음낭이 철썩 부딪혀서 아팠다.
“이, 씨발… 돌빡 새끼가.”
“뭐?”
“이, 돌두꺼비 같은… 나쁜 놈!”
신해범이 킥킥댔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그러니까 힘 좀 빼. 신해범은 류진의 골반을 잡은 양손을 흔들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겠어. 지금.”
“움직이지 맛!”
신해범의 뜨거운 한숨이 류진의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이건 뭐….”
“움직이지 말라니까!”
“예, 예.”
신해범은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는 데 있어서 선수였다. 그가 성기를 반쯤 뺐다가 힘껏 처박은 바람에 류진의 이마가 벽에 부딪혔다.
“아이고, 이런. 실수.”
“으아…!”
“많이 아파?”
신해범이 킥킥거렸다.
“그러니까, 반만 넣고 하라는, 그딴 소리를 왜 해.”
“흐윽. 흑.”
“네가, 나한테, 잔인한 짓 해서, 응? 그래서 벌 받은 거야.”
류진은 이마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신해범에게 지배당하는 뒤쪽에 모든 신경이, 감각이 쏠렸다.
내벽을 긁으면서 빠져나갔던 성기가 힘껏 치고 들어왔다. 두툼한 귀두가 스팟을 뭉갤 때마다 류진의 성기에서 정액이 튀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사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달아서, 계속해서 연약한 속살을 유린당했다. 류진은 신해범의 숨이 관자놀이에 닿는 족족 신음했다. 숨을 고르기가 힘이 들었고, 폐가 가슴을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으며,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으으으… 읏! 읏!”
“기분 좋은데. 쫀득하게 달라붙는 게.”
“우, 아….”
“얼마나 기다렸으면, 응, 이렇게 찰싹 붙어서 안 떨어진대.”
신해범이 움찔거리는 볼깃살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아아!”
“새빨갛게 잘 익었다. 사랑스러워.”
신해범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정류진을 바닥에 엎어 놓고 이 탐스러운 볼깃살을 한입 깨물어 먹는 상상을. 입 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차오를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어떻게, 너는 어쩌면 이렇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류진에게 어떤 찬사를 던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얼굴, 몸, 목소리, 심지어 반만 넣고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도.
“기분 좋아.”
그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지금 죽어도 돼….”
잘 달리던 트랙이 갑자기 끊어진 느낌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류진의 엉덩이 사이에 박아 넣는 일을 제외하고는. 정말이지, 지금 당장 하는 일만 보였다. 살면서 이렇게 모든 걸 잊고 집중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인내심을 발휘하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정류진의 몸을 즐기기에는 좆대가리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흡사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저 앞에 결승선인 상황이었다. 당연히 선수는 기진맥진했고, 숨이 턱까지 찼다.
“흐으윽, 으윽. 흑.”
그런데 이상했다. 결승선을 통과했는데도 계속 뛰었다.
정류진과 함께 있으면 그랬다. 어디가 끝인지 몰랐다. 신해범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울고 싶다, 진짜.”
눈앞의 결승선은 그저 하나의 선일 뿐, 진짜는 저 멀리 있었다. 아직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뛰어도,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도.
“류진아. 윽… 얼굴 보여 줘. 응.”
“흐읏, 으응. 으, 아, 아!”
“가슴 보여 줘. 응. 류진아, 젖꼭지 빨게 해 줘.”
“싫어. 싫어…!”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성기를 거칠게 뽑았다.
“아!”
그가 안에 싸 놓은 정액이 류진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신해범은 스르르 무너지는 류진의 팔을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마른 몸이 대리석 바닥을 뒹굴었다.
“악! 미친 새끼야!”
양말밖에 신지 않은 알몸이었다. 다리 사이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나쁜 새끼! 자기 맘대로…!”
신해범은 류진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면서 웃었다.
“사슴 같다. 정류진.”
정확히는 덫에 걸린 사슴이었다.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낑낑거리는 모습이 꼭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냥꾼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신해범은 류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말라깽이가 없었으면 나는 내 몸 물어뜯다가 위아래 치아만 남은 괴물이 됐을지도 몰라.
버둥거리는 몸을 덮쳐눌렀다. 다리를 벌리고 파고들었다. 양다리를 어깨에 걸친 뒤 곧장 삽입했다. 허억, 큰 숨을 들이켜는 얼굴을 핥자 단맛이 났다.
“맛있어.”
정류진의 몸에서는 단맛이 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먹고 싶어.”
“흐으윽… 미친 새끼….”
“미친 새끼랑 하는 기분이 어때? 좋지?”
신해범의 이마에 맺힌 땀이 류진의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응? 좋잖아, 지금.”
그는 보드라운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볼깃살을 안으로 모았더니 성기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심해졌다. 류진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좋아. 안 좋아…!”
“왜? 아파서? 무서워서?”
류진의 성기를 확인한 신해범은 웃었다. 누가 봐도 발기한 상태였다.
“좋구만, 뭘.”
“아니야아…!”
“예쁘니까 봐준다.”
몸을 숙여 류진의 가슴을 입술로 훑었다.
“으읏!”
꼿꼿하게 선 유두를 빨았다. 입술을 오므려 세게 빨았다.
“어때?”
류진의 젖꼭지를 문 신해범이 웅얼댔다.
“기분 좋아?”
“흐으, 응. 응. 읏.”
신해범이 잠시 입술을 뗀 틈을 타 류진은 재빨리 양팔을 겹쳐 가슴을 가렸다. 퉁퉁 부은 유두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 그만.”
“왜에.”
신해범이 보챘다.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왜 못 빨게 해?”
“아파. 그만해!”
“배고픈데.”
류진은 두 팔에 힘을 줬다. 신해범이 손목을 붙잡고 떼어 내려 하는 걸 어금니를 악물고 버텼다.
“이제 여긴… 안 돼…!”
“보기만 할게.”
“안 속아!”
신해범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진짜. 진짜 보기만 할게.”
지나가는 개를 속여라. 류진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신해범을 노려봤다. 또 힘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면, 장진에서 다친 오른쪽 어깨를 물어뜯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해범은 류진의 생각을 간파했다.
그는 류진의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붙잡아 꺾는 대신 한껏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류진아… 가슴 보여 줘.”
“싫어. 이제 안 돼….”
“보기만 할게… 으응? 류진아. 네 이쁜 젖꼭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 버릴 거 같아. 류진아아.”
“…….”
“류진아. 류진아. 예쁜이 정류진 대장군 각하님아.”
“으….”
“각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진짜 죽겠습니다. 예?”
“시끄러. 안 돼….”
“각하, 정말 너무하십니다!”
신해범이 하반신을 흔들어 댔다. 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몸을 가린 두 팔이 덜덜덜 떨렸지만 지기 싫었다. 신해범은 충분히 자기 욕구를 채웠고 이제는 멈춰야 할 때였다.
“당신은. 당신은.”
꺼칠한 체모가 볼기를 할퀴고, 불알이 철썩철썩 부딪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류진이 울었다.
“당, 신은… 왜….”
“예?! 뭐라고요?! 각하, 잘 안 들립니다!”
“왜, 그렇, 그렇게 이기적이야….”
그 말에 마음 약해질 신해범이 아니었다. 그는 흐느끼는 류진의 얼굴을 부지런히 핥으면서 말했다.
“각하. 각하. 저 죽겠습니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예? 각하. 시키는 거 다 하겠습니다. 젖꼭지 조금만 빨게 해 주시면.”
“흐윽. 윽.”
“예? 각하.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이 신해범이가 평생을 바쳐서 충성하겠다 이겁니다!”
듣기 싫었다. 류진은 가슴을 가린 팔에 힘을 뺐다. 신해범의 눈빛이 번뜩이는 그 순간,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각하?”
류진은 신해범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처박았다.
“흐… 하하.”
“이제 됐어?!”
이제 만족하냐고! 류진이 와악 울음을 터뜨렸다.
“예.”
류진의 젖꼭지를 입술로 덮은 신해범이 중얼댔다.
“만족합니다. 각하.”
“제발 닥쳐!”
“이제 살 것 같아요….”
뜨거운 입술이 유두를 잡아당겼다. 류진은 신해범의 머리를 안고 신음했다. 발기한 좆이 근육으로 꽉 짜인 신해범의 단단한 몸에 비벼져, 자극에 무릎이 덜덜 떨렸다.
“진짜, 좋아… 알아? 너 여기 엄청, 엄청 맛있어.”
“몰라. 으응, 몰라…! 아아, 앗!”
이로 유두를 물고 잡아당긴다. 살갗이 쭉 당겨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봤다. 보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아!”
신해범의 입술이 젖어 있었다. 갈매기 모양 윗입술과 붉어진 아랫입술. 류진은 그 속으로 자신의 젖꼭지가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아아아!”
아랫배가 축축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신해범이 쿡쿡, 웃는 소리가 귓바퀴에 감긴 다음이었다.
“하, 아… 아….”
“잘 싸네.”
신해범의 눈매가 슬그머니 휘었다.
“예쁘기는.”
“흐윽!”
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난폭하고 거칠었다. 류진은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이는 신해범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바닥이 꺼질까 봐 무서웠다.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생생하다 못해 지독했다. 볼깃살을 쥐고 주무르는 신해범의 손가락도, 까칠한 체모도, 철썩 달라붙었다가 잠깐 떨어졌다가 또다시 때리듯이 부딪쳐 오는 음낭도. 박을 때마다 부피를 키워 가는 성기가 무서워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원망스러웠다. 저놈은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을까. 나는 이미 모든 걸 내줬는데. 몸이 완전히 열렸고 수없이 유린당했고, 이제는 거부할 힘도 없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그만. 그만.”
그렇게 빨아도 나오는 거 없어. 류진은 신해범의 머리카락을 잡고 훌쩍였다.
혀끝으로 유두를 톡톡 두드리던 그가 대꾸했다.
“아냐. 뭐 나올 거 같아.”
덜컥 겁이 났다. 류진은 제 가슴을 내려다봤다. 신해범의 타액으로 흠뻑 젖어서 번들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뭔가가 방울져 흐를 듯했다.
“아….”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켜, 잇, 저리 가…! 아!”
“미쳤어?”
나 아직 안 갔어. 신해범이 징징댔다.
“그만, 좀…! 조옴!”
스팟이 정통으로 눌렸다. 순간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류진은 발버둥을 치며 또다시 사정했다.
“아아아…! 싫어어!”
앞서 사정한 탓에 정액량이 적었다. 색도 옅고 냄새도 흐렸다. 그래도 신해범의 탄탄한 몸을 적시기에는 충분했다.
“우리 꼬꼬….”
신해범이 웃었다.
엉덩이가 긴장했다. 류진은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좆을, 스팟을 긁어 대는 귀두를, 잔뜩 예민해진 내벽을 후려치는 기둥을 느꼈다.
“흐아. 아. 아으. 아.”
“류진아. 류진아.”
“앗! 앗! 아악!”
온몸에 소름이 돋고 팔다리가 저렸다. 헛구역질까지 치밀었다. 오늘에야말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어금니를 악문 신해범이 흐으, 소리를 내더니 정액을 쏟아 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천천히, 느릿느릿. 몇 번에 걸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류진은 몸속을 적시는 신해범의 체액을 느꼈다. 고개가 왼쪽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기분, 좋아….”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나도 좋아.”
“…….”
“정류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너무 지쳐서.
신해범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들리지 않았다. 류진은 눈을 감은 채 젖은 뺨은 쓰다듬는 신해범의 손가락 감촉을 느꼈다.
“소파로 갈래?”
푹신한 곳에서 쉬게 해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류진은 신해범의 목에 팔을 감고 중얼거렸다.
“응….”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의식이 멀어지고, 신해범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류진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양다리는 활짝 벌려진 채였다. 신해범의 크고 단단한 몸이 그 사이에 있었다.
“악!”
넓은 손바닥이 아랫배를 눌렀다.
“깼어?”
허리가 붕 뜬 상태였고 엉덩이 사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뭐, 뭐…!”
“아파?”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평소에 거치적거린다며 쓰지 않는 보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괜찮아. 그냥 누워 있어.”
구멍이, 또다시 벌어졌다. 주먹 같은 귀두가 이미 진입한 뒤였다.
“으아!”
신해범은 꾸역꾸역 좆을 밀어 넣었다. 삽입하는 속도에 맞춰서 손바닥을 움직였다. 류진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어디까지 들어갔나? 여기까진가? 아니, 더 들어갈 수 있겠는데?
“아냐. 아니야… 싫어. 싫어!”
“걱정하지 마. 잘 들어가고 있으니까… 안에 싸 둔 게 많아서.”
미소 지은 신해범이 덧붙였다.
“촉촉하고 산뜻해요.”
류진은 신해범이 한 말을 알아들었다. 최근에 자주 나오는 화장품 광고였다. 텔레비전 속 아름다운 배우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웃으며, 하얀 크림이 든 병을 흔들면서 말했다. 촉촉하고 산뜻해요.
왈칵 울음이 터졌다. 나는 화장품 같은 게 아닌데.
“흐으윽….”
“왜 울어?”
류진은 신해범이 양손에 든 것을 보았다.
“뭐야? 그거 뭐야?!”
“제모 크림.”
신해범이 오른쪽 눈을 찡긋했다. 모서리가 둥근 은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오싹했다. 신해범은 안경을 써도 지적인 학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이코패스 과학자라면 모를까.
“우리 꼬꼬를 내가… 깨끗하고, 보드랍게 만들어 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오케이?”
“싫어!”
절대 ‘노’였다. 물론 신해범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지 마. 하지 마! 그런 거 너나 해!”
“너 아까 내 어깨 때렸잖아. 꿰맨 데.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그게 뭐!”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봤다.
“기억 안 나.”
“하긴. 원래 폭력은 맞은 놈만 기억하지.”
“그런 소리를 당신이…!”
하는 게 안 웃기냐,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몸속에서 신해범의 성기가 꿈틀거려 류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차오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신해범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 꼬꼬 엉덩이는 매끈매끈 보들보들. 좆도 매끈매끈 보들보들.”
“하지 마… 개새끼야. 하지 말라고,”
치덕치덕 크림이 발라졌다. 차갑고 질척했다.
“참고로 이거, 치우 꺼다.”
“안 궁금해!”
“그래? 나름 고급 정본데.”
“고급 정보…!”
“걔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 진치우 그놈도 외모에 신경 엄청 써. 웃기지 않냐? 나한테는 화장 중독이라고 하면서. 이거는 뭐, 본인 말로는 샤워할 때 쓰는 건 줄 알았다는데, 글쎄….”
신해범은 한 손에 플라스틱 주걱을 들고 있었다. 하얗고 반투명한 제모용 스틱이었다. 그는 류진의 성기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크림을 구석구석 꼼꼼히 발랐다. 체모가 완전히 덮일 정도로 두껍게 바른 뒤에야 씩 웃었다.
“생일 케이크 같다.”
“하지 마아…!”
크림을 닦아 내려 뻗은 양손이 붙잡혀 머리맡에 고정되었다.
“오 분 기다려야 해.”
“싫다고! 안 한다고! 이잇…!”
신해범이 허리를 움직였다.
“흑!”
그가 몸을 숙이자 더운 숨이 얼굴로 쏟아졌다. 익숙한 향수, 익숙한 스킨로션 냄새. 신해범이 혀를 내밀어 류진의 콧등을 핥았다.
“얌전히 있으면 나도 안 움직일게.”
“흐윽….”
“조건 괜찮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불기둥 같은 걸 몸속에 담고 있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이기적인 신해범 혼자만 좋아했다.
신해범이 스틱으로 류진의 젖꼭지를 건드렸다.
“아!”
“귀엽다.”
“하지 마!”
“아주 먹음직해.”
“으….”
“감옥에서 계속 생각날 거 같아.”
“뭐?”
신해범의 얼굴이 흐릿했다. 두 눈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스틱이 아랫도리를 건드렸다. 크림을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긁어냈다. 신해범은 연신 우와, 우와 감탄했다. 깨끗하게 잘 된다면서.
류진은 소파를 부서져라 움켜쥔 채 모욕을 견뎠다.
“거울 보여 줄까? 너 얼마나 깔끔해졌는지.”
눈을 감고 도리질했다. 신해범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스틱을 집어 던진 그가 오른손으로 성기를 붙잡았다.
“헉.”
“기분 좋게 해 줄게.”
제모 크림 때문에 신해범의 손바닥은 미끄러웠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류진은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들썩거렸다.
“하… 아아. 앗.”
신해범의 눈빛에 숨이 막혔다.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은 관자놀이를 다 아프게 했다.
“제발… 그만. 놔줘.”
“좆나 예뻐 정류진.”
신해범이 한탄했다.
“진즉에 이럴걸.”
그럼 늙은이도 더 좋아했겠지.
신해범은 류진의 알몸을 천천히 훑었다.
권주혁의 주름진 얼굴에 야비한 함영재가 겹쳐졌다. 그는 정류진이 경험한 첫 번째 남자였다. 사진 속 정류진은 정말 마르고, 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눈은 가려졌고, 입에는 지폐 뭉치를 물고 있었다.
그 사진은 신해범의 보물 2호였다. 1호는 여기 있는 실물이고.
성기를 단숨에 뽑았다. 불뚝거리는 기둥을 손으로 훑어 정액을 내보낸 다음, 손바닥을 넓게 펼쳐 류진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빨갛게 부은 가슴에 정액을 꼼꼼하게 발라 주었다.
“…최고다.”
맛있는 정류진이 완성되었다. 자신의 최고 역작이었다.
음식이든 공예든, 항상 욕심이 많았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신해범은 자기 작품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해도 그때뿐, 늘 성공에 목이 말랐다.
그 욕심이 이걸 만들기 위해서였나 보다.
체모 한 가닥 없이 말끔해진 성기가 반투명한 액을 내뿜었다. 사정한 여파로 떠는 류진의 골반을 붙잡아 당기며, 신해범은 입구에 귀두를 맞췄다.
“그만, 그만! 싫어어…!”
삽입을 인지한 류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신해범은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더.”
“짐승 새끼야! 이 나쁜 놈아! 그만해! 그만!”
“진짜 마지막.”
“싫어! 빼! 당장 빼!”
악에 받쳐 소리치는 류진을 내려다보며, 신해범은 그의 오금을 붙잡아 높이 들어 올렸다. 마른 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아악…!”
“이해해 줘. 너도 먹는 거 좋아하잖아.”
“뭐라고…?!”
“넌 네 입에 들어간 닭 다리, 뱉으라면 뱉어? 아니지? 사람 다 똑같아.”
사이코패스 과학자처럼 보이는 신해범이 웃었다. 류진은 그의 뾰족한 귀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비타민 영양제가 든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사무실로 들어가자 엄지손가락에 핑거 스프린트를 끼우고 있던 신해범이 맞아 주었다.
“왔어?”
“엉.”
진치우는 신해범의 왼손을 보고 말했다.
“그걸 왜 자꾸 꼈다가 뺐다가 하냐. 뼈 안 붙게.”
“냄새나서 그래. 부상 티 내기도 싫고.”
“손가락 결딴난 마당에 그게 문제냐?”
신해범은 테이핑을 꼼꼼하게 해서 괜찮다고 둘러댔다.
“어디 안 부딪히게 조심하고 있어.”
“너는 뼈 잘못 붙어도 누구 탓하지 마라.”
“예나한테 말한 거 아니지?”
“안 했다, 안 했어!”
“살짝 금 갔다고 했으니까, 혹시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
“걔가 바보냐? 너 자존심 생각해서 모르는 척해 주는 거지.”
진치우는 비닐봉지를 신해범의 책상에 올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보드카를 꺼냈다.
“한잔?”
“얼음 많이.”
“밍밍하게….”
진치우는 투덜거리면서도 얼음을 한 컵 가득 채웠다.
“야.”
“땡큐.”
소파에 걸터앉은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누워 있는 류진에게 꽂혔다.
“쟨 지 방 놔두고 왜 여기서 처자냐?”
털이 북슬북슬한 겨울용 담요를 목까지 덮었다. 에어컨 때문에 추운가 보았다. 잔뜩 웅크린 모양이 겨울잠 자는 새끼 동물 같았다.
진치우는 무심결에 내뱉었다.
“그래도 잘 때는 이뻐.”
“뭐?”
술을 마시던 신해범이 눈을 부라렸다. 진치우는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흠칫했다. 최유신이 정류진의 엉망이 된 ‘뒤’를 살피러 왔던 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눈을 부라리던 신해범은 정말 유치했다.
“아니 나는.”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 우리 꼬꼬는 울 때가 제일 예뻐.”
“너는 대체 뭐가 문제냐?”
신해범이 피식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자 진치우는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의 침묵은 진치우가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에 끝이 났다.
“이거 뭔 냄새야?”
“뭐가.”
“내 로션 냄새 아니냐?”
“모르겠는데.”
진치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는 신해범과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는 류진을 번갈아 보았다.
“…….”
“야.”
“…….”
“야. 신해범이.”
“왜.”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없는데.”
진치우가 유리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신해범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친구를 황급히 불렀다.
“치우, 있잖아 내가….”
“야! 이 양심 없는 새끼야!”
쓰레기통을 뒤져 텅 빈 플라스틱 통을 꺼내 든 진치우가 포효했다.
“쟤랑 떡 치느라 내 꺼 썼냐?!”
“급한데 눈에 띄는 게 그거였어. 미안.”
“미안하다면 다야?”
“새것 사 줄게.”
“말 쉽게 한다? 이거 좆나 비싼 거거든?”
따지자면 그렇게 고가 브랜드 제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해범과는 달리 화장품에 큰돈 들이지 않는 진치우에게는 충분한 ‘지름’이었다.
“비싼 거야? 몰랐지.”
신해범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책상 위에 뚜껑 열려 있던데.”
“그건 내가 깜빡해서…!”
진치우는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신해범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아야 했다.
“지금 남의 물건 훔쳐 쓰고 내 탓 하는 거냐?”
“아, 그냥 내 꺼 줄게. 내 로션이 더 비싼 거야.”
“니 껀 아저씨 냄새 나서 싫어.”
“뭐라고?”
이제는 신해범이 분노할 차례였다.
“말이 심하다. 치우. 같이 나이 먹는 처지에 표현을 왜 그렇게 해?”
“끝까지 잘했다 이거지? 엉?”
신해범은 한숨을 푹 쉬었다.
“미안. 미안하다. 다시 한번 사과할게. 내가 백 번, 천 번 잘못했으니까 그만 화내고 와서 앉아.”
진치우는 투덜대면서도 소파로 돌아왔다. 신해범은 싱긋 웃으며 진치우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뭐야, 꺼져.”
“치우.”
진치우의 어깨에 팔을 턱, 걸친 신해범이 말했다.
“꼬꼬 잔다. 목소리 좀 낮춰.”
“염병하네.”
“난 네가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참 좋아.”
“작작 해라. 진짜 언제 한번 날 잡고 뒤지게 패 버린다.”
“오우. 우리 진치우 중령님 카리스마에 오금이 벌벌 떨리네요.”
“너 쟤한테도 이런 식으로 하냐?”
신해범은 진치우의 술잔을 건네주며 싱글거렸다.
“우리 꼬꼬랑은 더 재밌게 놀지. 그렇고 그런 짓 하면서….”
“아으! 씨발!”
그래도 저것만 들켜서 다행이었다. 반 이상 써 버린 제모 크림은 욕실 선반 안쪽 샴푸 통 뒤에 숨겼다.
신해범은 진치우의 무릎에 자기 무릎을 꼭 붙였다.
“미안하다니까. 새 로션 꼭 사 줄게. 더 좋은 거로 사 줄게.”
“넌 친구도 아냐, 새끼야.”
“보상한다니까. 화 풀어. 그리고 있잖아, 웬만하면 예나한테 물 먹은 거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진짜 없어 보이거든.”
“뭐 이 호로자식아?”
“왜 이 호로새끼야.”
신해범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하도 복귀를 안 하기에 호월루 술독에 빠져 죽었나 했다. 어휴, 튀김 냄새. 너 음식값은 내고 다니냐?”
“술안주 남은 거라 그래서 조금 주워 먹었다! 왜! 공짜로 주는 것도 못 먹냐!”
“네가 너무 늦어서 우리끼리 피자 사 먹었잖아.”
“뭐 피자?”
“남은 거 냉장고에 있어. 아까 못 봤어?”
“몰라. 얻다 뒀는데?”
“제일 밑 칸에 비닐봉지.”
진치우는 냉장고를 뒤져 피자 두 조각과 치즈스틱 하나, 어니언링 하나, 치킨너겟 하나를 찾아냈다.
“알차게도 처먹었다. 응.”
“그래도 하나씩 남겨 놨다. 너 와서 맛보라고.”
“나 생각해 주는 척하지 마라. 짬 처리인 거 다 안다.”
“아니야. 거기 스파게티는 새거야.”
“보나 마나 존만이 새끼가 안 처먹은 거겠지.”
신해범이 실실거렸다.
“내 친구가 언제부터 저렇게 똑똑했지?”
미니 오븐에 스파게티를 밀어 넣은 진치우가 돌아섰다.
“니들 둘이 먹었냐?”
“기 소령도 초대하려고 했는데, 11층 분위기가 말이 아니더군.”
“사람이 갑자기 너무 늘었다니까.”
진치우는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를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가뜩이나 기 소령 원 맨 팀이라 충성도가 높은데. 하채경이가 완전 물먹었지.”
“뭘 물 먹은 것까지야….”
“걔가 성격이 과묵해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성재경 자리 노린다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더라. 이번에 거의 확정이었고.”
“애초에 중사는 휴가 간 거였잖아.”
“그대로 내뺄 것 같았지, 솔직히. 그리고 기 소령 성격에 한번 박차고 나온 놈 다시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음….”
“그리고 걔 뭐냐, 마강희? 걔 장두현 사병이었다며. 내가 봤는데 확실히 다르긴 다르데.”
“그래 봤자 이병이야. 하채경이 긴장할 군번은 아니지.”
“치고 올라오는 거 한순간이다. 그 정도 실력이면 동기, 아니 동기가 뭐냐. 위 기수도 다 먹지.”
진치우는 마강희를 높게 평가했다.
“걘 진짜 좀 괜찮은 거 같아. 같이 온 놈, 그 사투리 심한 놈이 적응을 못 해서 그런지 더 비교돼.”
오븐에서 띵 소리가 났다. 신해범은 스파게티를 꺼내는 친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럼 너도 긴장해야겠다, 치우.”
“야!”
진치우는 하마터면 뜨거운 스파게티를 떨어뜨릴 뻔했다. 돌아선 얼굴이 벌겠다.
“넌 지금 내가 이병한테 먹힌단 소리냐?”
“하극상엔 계급이 없어.”
신해범은 잠든 류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가득했다.
“나 완전 먹혔잖아.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해.”
“그건 네가 병신 호구라서고.”
투덜거리며 소파에 앉은 그가 그릇 뚜껑을 열었다. 스파게티 소스 냄새가 확 퍼졌다.
“으하, 치즈 쭉쭉 늘어난다.”
“성 중사 말이야. 아직 정식으로 복귀한 건 아니지?”
“따지고 보면 그렇지.”
성재경은 복귀 신고서를 제출했고 스케줄에 맞춰 출근 중이었으나, 그가 제출한 서류는 기우희 선에서 결재가 멈췄다.
신해범은 기우희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성재경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건 확실했다. 갓 입사한 마강희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도 성재경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결과적으로 하채경을 열 받게 만들었지만.
진치우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하채경이랑 마강희 있잖아. 난 걔들 좀 불안하다. 여자끼리 경쟁에 불붙으면 진짜 전쟁 나잖아.”
“뭔 뜻이야?”
“여자는 태생적으로 권력욕이 많아서.”
진치우는 스파게티를 둘둘 말아 입에 넣었다. 뜨거운지 후하후하 해 가며 먹었다.
“옛날에 우리 누나도 그렇고, 기 소령이나 유미현도 그렇고. 그리고 걔, 강인혜. 존만이보다도 어린 게 아주 물건이야.”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신해범이 검지로 미간을 긁적였다.
“잘 데려다줬어?”
“애가 울다가 탈진해서 제정신이 아니긴 하더라. 그리고 호월루에, 아, 내가 이 얘기를 괜히 하나 싶은데….”
“얘기해.”
“권주혁 밥 먹으러 왔더라.”
“으음.”
“올 때부터 표정이 안 좋았다던데.”
짐작한 대로였다. 이제는 새삼스레 놀랍지도 않았다. 식사가 들어올 때부터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대더니 2부 영업에서나 가능한 요구를 해 대기 시작해 결국 신예나가 들어갔다. 권주혁은 기생 중 류연비와 닮은 여자가 있는지 찾았다고 했다.
“기가 막히는군.”
“임찬영 대가리 깨졌더라. 주전자 맞아서.”
“주전자?”
“왜 그 조그맣고 허연 주전자 있잖아. 도자기.”
“식전 차 내오는 거. 알아. 그런데?”
“예나가 그 비서 새끼 이마에 약 처발라 주더라. 자기 손으로 직접.”
“걔 간호학교 나왔잖아. 그러니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신해범은 움찔했다. 진치우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넌 그 새끼 편이냐, 내 편이냐?”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권주혁 얘기 하다가?”
“갑자기가 아니지!”
진치우는 유리컵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손등으로 입술을 쓱, 닦은 그가 투덜거렸다.
“이 새낀 지만 잘나가면 그만이야. 좆나 이기적인 새끼.”
“취했어, 치우?”
“아니!”
신해범은 화내지 않았다. 진치우가 호월루에서 행패를 부리는 권주혁을 얼마나 유능하게 컨트롤했을지 알기 때문에.
하지만 진상은 처리하고 난 다음이 문제였다. 곱씹을수록 모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해범은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체득했다. 진치우는 지금껏 신해범의 뒤에서 보호받았고, 그 때문에 권주혁의 패악질에 면역력이 약했다. 개인의 위기 대처 관리 능력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임찬영에게 신예나의 주의를 빼앗겼으니. 신해범은 별관 대청마루에 주저앉아 식어 빠진 튀김을 씹으며 울분을 달랬을 진치우를 생각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웃냐?!”
“그럼 안 웃기냐?”
그렇게 받아친 사람은 신해범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하고 눈을 비비적거리는 류진이었다.
“넌 또 뭐야!”
“조용히 좀 해. 자는데 시끄러워.”
“여기 우리 사무실이거든?”
“신해범이 여기서 자라고 했거든!”
두 사람이 동시에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범아 네가 말해 봐!”
“당신이 얘기해!”
신해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사람 살려.”
“그냥 죽어!”
진치우가 꽥 소리치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식물이 신해범의 뺨에 철썩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류진이 발딱 일어났다.
“더럽게!”
“뭐, 더러워?!”
진치우도 지지 않고 일어섰다.
그는 워커를 신고 있었고 류진은 맨발이었다. 진치우는 자신의 눈높이가 상대방보다 높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다가 문득 신해범 몰래 워커에 쑤셔 넣은 삼 센티미터 깔창이 생각나 울적해졌다.
신해범은 진치우가 체격이 커 보이기 위해 하는 일들, 예컨대 모자에 종이를 구겨 넣거나 재킷에 ‘어깨 뽕’을 집어넣는 행위를 덮어놓고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화에 깔창만큼은 용납하지 않았다. 뛰어다닐 때 불편하니까.
작전 중에는 당연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괜찮지 않나. 모든 현장에 동원되던 시절은 지났다. 평소에 고작 이, 삼 센티미터짜리 깔창이 불편하면 얼마나 불편하다고.
자기는 쓸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그냥 다 싫었다. 권주혁은 당연히 싫고, 괜히 그 앞에 서 있다가 주전자에 대가리 깨진 임찬영도 싫었다. 임찬영만 돌봐 준 신예나에게도 서운했다.
진치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뜩이나 유미현 때문에 어수선한 풍기대였다. 신해범은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장진에서 신병들을 데려왔다. 사병 티가 나는 마강희는 그나마 쓸 만했지만, 나머지는….
윤태금을 생각하면 뒷골이 찡하게 땅겼다. 그는 윤태금과 정류진을 한데 묶어서 강에 던져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그 둘을 풍기대로 끌어들인 원흉이 누군지 깨달았다.
진치우는 소파에 앉은 신해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네가 문제야! 네가!”
“악!”
진치우는 냉장고로 걸어갔다. 보드카를 꺼내 병째 들고 마셨다. 뒤에서 신해범이 말했다.
“치우, 술 그렇게 마시지 마.”
“시끄러! 새꺄!”
“권주혁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예나도 사실은 너한테 엄청 고마워할걸? 강인혜도 데려다줬잖아.”
“그럼 주례 서 주든가.”
“그럴 정도까진 아냐.”
소파에 풀썩, 앉은 류진이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어딜 감히. 넘볼 데를 넘봐라.”
그 소리가 진치우의 귀에 들어갔다. 신해범은 빈 술병을 도깨비방망이처럼 흔들며 달려오는 친구 앞을 막아섰다.
“한 번만 봐줘, 치우. 우리 꼬꼬가 예나를 누나처럼 따르잖아.”
“비켜 봐! 비켜 봐! 저년 진짜 뒤지게 처맞아야 정신 차려!”
“죽여 봐라! 신해범이 가만 안 있을걸!”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개새야!”
“안 궁금해! 지금 신해범은 날 좋아해!”
신해범은 손등을 뺨에 대고 있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서.
“우리 꼬꼬도 참….”
수줍게 선 그를 바라보는 류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진치우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빼앗았다. 그가 내게 그랬듯이.
“신해범한테 일 순위는 나야. 당신은 그다음이고.”
“저게 진짜 주먹을 부르네!”
“쳐 봐. 그럼 당신은 신해범한테 죽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설치냐?!”
“누구긴 누구야?”
류진은 턱을 쳐들었다.
“이제 인정하시지. 현실 부정 그만하고.”
진치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목뒤 잡고 넘어갈 기세였다.
“아, 저년 진짜 딱 열 대만 패고 싶다.”
보다 못한 당사자가 중재에 나섰다. 신해범은 류진을 담요로 둘둘 말아서 번쩍 안아 올렸다.
“가자, 닭장으로.”
“뭐야! 왜 내가 나가! 싫어!”
“여긴 나랑 치우가 같이 쓰는 사무실이잖아.”
진치우가 옳다구나 문을 열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얼른 꺼져라, 웬만하면 기어 나오지 마라, 했다. 류진이 신해범의 얼굴, 목, 어깨를 마구 때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신해범은 류진을 특수 취조실로 밀어 넣었다.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바로 뛰쳐나가려는 류진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지금 치우가 너 봐주고 있잖아. 쟤 주먹맛을 못 봐서 그래?”
류진은 코웃음 쳤다.
“봐주는 건 진치우가 아니라 나야.”
“오, 그래? 네가 치우를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당신한테 때려 달라고 할 건데.”
신해범이 웃었다.
“나한테?”
“엉. 당신은 진치우랑 싸워서 이길 수 있잖아.”
“이길 수야 있지. 근데 꼬꼬야.”
그가 팔짱을 턱, 끼었다.
“지금 치우한테 화난 거야, 아니면 나랑 치우 사이가 결딴나는 걸 원하는 거야?”
“…….”
류진은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곡을 찔려 버렸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신해범과 진치우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걸. 그 둘은 앞으로도 영원한 친구라는 걸.
“진치우 질투해?”
“내가 왜!”
“단짝 친구 있어서. 너는 없잖아.”
“왜 없는 거 같아?”
류진의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신해범은 웃으면서 류진을 껴안았다.
“알아. 진치우 좆나 나쁜 새낀 거.”
“…….”
“근데 내가 더 개새끼다. 알지?”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류진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해범 냄새가 났다.
“미친개가 사람 물면 주인이 책임져야 하잖아. 난 우리 꼬꼬가 치우한테 돈 뜯기고 싫은 소리 듣는 거 못 봐.”
그러니까 진치우 안 때릴 거야. 신해범이 말했다. 류진은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쳤다.
“핑계 대지 마.”
“핑계 아닌데.”
“답답해! 꺼져!”
키득거리는 신해범에게 명령했다.
“콜라 갖다줘.”
“응?”
“콜라. 아까 피자 먹고 남은 거. 진치우가 먹어 버리기 전에 얼른!”
모든 게 당당했다. 콜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표정도. 신해범은 류진을 깨물어 먹고 싶은 충동을 삼키고 웃었다.
“따르겠습니다, 각하.”
“좀! 좀! 그런 거 좀 하지 말라고!”
신해범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콜라를 갖다 바치고 돌아오자 스파게티를 바닥까지 긁어 먹던 진치우가 말했다.
“저게 이제 우리들 머리 위에서 논다.”
“위대한 정류진 대장군 각하셔.”
신해범이 쿡쿡 웃었다.
“줄 바꾸고 싶으면 서둘러라. 근데 치우 넌 이미지 세탁하려면 오래 걸리겠다. 워낙에 지은 죄가 커서.”
“너만 하겠냐? 저놈도 참 속이 없는 건지, 바보인지….”
진치우는 방금까지 류진이 누웠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정신병 걸렸나.”
“일종의 가벼운 수면 장애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일종의, 가벼운?”
진치우가 조소했다.
“꼭두새벽에 지하실 내려가서 시체 옆에서 자는 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
“…….”
“그럼 넌 진짜 대가리에 문제 있는 거야, 새끼야.”
“정신병자는 상대방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덤비지. 상식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도 말이야. 그런 점에서 나랑 정류진, 꽤 닮지 않았어?”
진치우는 숨을 들이마셨다.
“또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신해범은 커피를 내렸다. 샷을 세 번이나 추가한 커피를 진치우에게도 권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사약 커피 너나 처먹어.”
“하여튼….”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가지고 소파에 앉았다. 정류진이 웅크려서 자던 곳이었다. 아직 녀석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신해범은 진치우에게 미소를 보냈다.
“오늘은 푹 잘 거야.”
“이유 안 궁금하니까 말하지 마라.”
“그럼 변명 하나만 들어 주라. 네 화장품, 원래부터 조금밖에 안 남아 있었어. 진짜야. 아무렴 나도 정도를 아는 사람인데, 꼬꼬 한 사람 상대로 그렇게 몰아붙이겠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아니. 제발 닥쳐.”
“욕실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깨끗이 청소했으니까.”
“아, 좀!”
신해범이 웃자 찻잔에서 검은 물이 흘러넘쳐 손가락을 적셨다. 진치우가 재빨리 티슈를 뽑아 건넸다.
“야.”
“고마워. 칠칠찮은 날 아껴 줘서.”
“미친놈.”
신해범이 눈을 깜박였다.
“정류진은 괜찮아. 최유신 걱정이 과한 거야. 아는 게 많아서 그렇지. 가진 게 많아서 뭐 하나라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랑 똑같아.”
진치우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엄승원이 만나 보고 싶어 하는데. 정류진.”
엄승원은 진치우의 관리를 받으며 안전 가옥에 머물고 있었다. 같은 ‘최초 발견자’로서 묘한 동지애를 형성한 성재경과 설계도를 분석하는 윤태금이 때때로 그곳에 드나들었다.
“성 중사는, 윤태금이랑도 사이가 별로지?”
“말해 뭐 해.”
진치우가 손을 휘휘 저었다.
“윤태금 걔는 우리 애들이 다 싫어해.”
“하하.”
“웃을 일이 아니다. 너는 걔 뭘 보고 데려왔냐? 정수헌 보안 담당이라서?”
“그것도 그런데, 예전부터 군에 관심이 많았어. 사이코 같은 면이 있는 건 나도 알지만….”
“그래! 사이코!”
“음?”
“걔 별명이 사이코라고.”
진치우는 확실히 윤태금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놈 머리 좋은 거 맞냐? 말하는 거 듣고 있으면 대가리에 나사못 하나 빠진 거 같아.”
“천재들이 원래 좀 독특하잖아.”
“넌 안 그러잖아.”
“난 천재가 아니니까.”
“…….”
“에디슨과라고 생각해. 누가 알아? 기막힌 발명품으로 이 나라 군사력 증강에 기여할지.”
“어이구, 퍽이나!”
진치우는 풍기대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성재경과 윤태금의 분위기가 안전 가옥에서는 풀어지는 이유로 엄승원을 꼽았다.
“중간에서 쿠션 역할을 잘하나 보던데.”
“그래?”
의외였다. 신해범은 보기보다 예민한 체질과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엄승원을 떠올렸다.
겁을 줘서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알레르기를 이용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본디 믿음보다 강력한 게 약점인지라. 신해범은 말뿐인 맹세나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약속은 믿지 않았다.
“사이코 성격이 엄 돼지랑 있을 때 좀 누그러진다고 해야 하나, 균형이 맞아.”
“음….”
“그러니까 정류진이랑도, 모르잖아? 의외로 궁합이 괜찮을지.”
“그건 아닐걸.”
진치우는 울컥했다. 단칼에 거절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걔, 예전에 류연비 때문에 하도 시달려서. 기자라면 질색을 할걸.”
“물어는 봤냐?”
“안 물어봐도 빤해. 잘 알면서 왜 그래? 치우. 우리는 어릴 때 그런 일 없었나?”
“내가 조심하라고 말할게.”
“…….”
“그래도 안 되냐?”
“…….”
“야, 너는 허락도 없이 내 기사 막 내보냈잖아! 기 소령이랑 둘이서 작당하고!”
“널 위해서였어, 치우. 그때로 돌아가도 난 똑같이 할 거다.”
진치우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만, 신해범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정류진을 설득하려면 이유가 필요해. 엄승원에게 류연비 얘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
“…….”
“뭐 알아낸 게 있어?”
신해범은 진치우를 재촉했다.
“확실한 게 아니어도 괜찮아.”
몸을 앞으로 기울인 진치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그대로 정수리까지 쓸어 올렸다. 왁스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그 설계도. 황효제 백에서 나온 거.”
“음.”
“…나야 그런 거 볼 줄 모르니까 못 알아본 게 당연하지만. 너랑 기 소령도 갈피를 못 잡는 게 이상하다, 싶긴 했어. 그게 물건 하나가 아니더라고.”
“하나가 아니라니?”
“자료 두 개가 섞여 있었어. 순서도 그렇고.”
순서가 뒤죽박죽이어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장, 한 장 스캔해서 확대한 뒤 가장자리까지 꼼꼼히 살펴보니 여백에 조그맣게 연필로 적어 놓은 코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전부 다는 아니고… 종이 자체가 오래돼서. 특히 가장자리 부분은 변색도 심하고, 또 몇 개는 찢어져서 아예 확인이 안 돼. 그런 건 따로 빼놓으라고 했다.”
“그래.”
“사이코 말로는 하나는 이동 수단, 다른 하나는 건축물 같대.”
그것만으로는 범위를 좁히기 어려웠다. 지금은 자가용 한 대가 왕실의 자랑이던 19세기가 아니었다. 이동 수단은 육해공 전반에 걸쳐 수없이 많고, 건축 양식은 수 세기 동안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신해범은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라고 채근했다.
“열차야.”
진치우는 한숨을 쉬었다. 강렬한 흡연 욕구에 무릎까지 떨렸다.
“꽤 구식이래. 지상 통근 디젤 동차 기억나냐? 우리 어릴 때 있었잖아. 난 한 번도 타 본 적 없지만.”
신해범은 하얀 바탕에 빨간색과 금색 두 줄을 파도 모양으로 도색한 열차를 떠올렸다.
그가 어렸을 때도 이미 노후한 차량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최초의 동차형 열차로서 의미가 있었고, 출퇴근길과 등하굣길 이동 수단으로 쓰는 승객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물론 신해준은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어린아이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학교에서 배운 것, 교과서에 나온 것을 그대로 따라 해 보고 싶을 나이였다.
“요즘도 다녀. 하루에 한 대뿐이고 노선도 짧지만.”
“그 정도면 대중교통이 아니라 관광 상품인데.”
“뭐 그렇지.”
탑승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신해범은 눈을 감았다. 진눈깨비가 휘날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평소에 열차를 탈 일이 없으니 일회용 승차권을 사야 했다. 지금은 기계화가 잘되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잔고장이 잦고 속도도 느렸다. 사람들은 발권기보다 그 옆의 창구를 더 많이 이용했다.
창구에 사람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어린 신해준은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성인 한 명, 어린이 한 명 승차권값에 딱 맞춰 준비한 돈이었다. 동전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신해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날, 열차를 타고 어딜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다지 먼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버스 서너 정거장 거리였겠지.
그렇게 인상적인 추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떠올리려 해도 자세하게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하지만 그날 맡았던 냄새 하나는 뚜렷하게 기억났다. 군고구마 냄새였다.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달큼한 군고구마 냄새를 맡았다. 평소에 간식으로 즐겨 먹던 말린 고구마 과자와는 다른 냄새였다.
“사양은 그 열차랑 비슷한데, 내부 구조가 좀 수상하댄다.”
신해범은 눈을 뜨고 진치우를 바라보았다.
“어떤 부분에서?”
진치우는 열차라면 당연히 있기 마련인 창문과 비상 개폐 장치가 없다고 말했다.
“한번 타면 안에서 못 열게 돼 있는 구조야. 운전하는 기관사만 제어가 되고. 뭐 이건 화물 운송 목적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런데. 뭐?”
“천장에 관(管)이 설치돼 있어. 사이코 말론 냉난방 시설이 아니래. 그리고 열차 맨 뒤 칸이랑 연결이 됐는데, 그것만 화물칸이야. 꽤 크고. 내부에는 시멘트를 이십 센티미터나 발라 놨다네.”
신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사이코는 뭔가 위험한 걸 운반하려는 목적이 아니냐고 하는데.”
시멘트를 이십 센티미터 두께로 발라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것.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유독 가스?
신해범은 피식 웃어 버렸다.
“류연비가 일루미나티였나 보군.”
“…….”
“그 설계도, 혹시 영화 소품은 아니었겠지?”
“내가 장난치는 거로 보이냐.”
한동안 침묵하던 신해범이 말했다.
“치우, 나 담배 좀.”
“내 서랍에 새거 있어.”
신해범은 소파에서 일어나 진치우의 책상으로 갔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면서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을 때, 움직임을 감지한 마우스 때문에 절전 상태였던 모니터가 반짝 켜졌다.
모니터 불빛이 신해범에게 쏟아졌다. 진치우는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류연비, 위험한 일에 엮였던 거 같다.”
“엮인 게 아니라 본체일 수도 있지. 주동자 말이야.”
류연비에게는 힘이 있었다. 대중을 매료시켜 뜻대로 좌지우지하는 힘을 나쁘게 말하면 선동력, 좋게 말하면 정치력이라고 한다.
게다가 류연비의 옆에는 곽재헌이 있었다.
“글쎄.”
진치우가 코웃음 쳤다.
“본체는 곽이 더 가능성 높지. 류연비는 그래 봤자 연예인, 곽재헌은 진짜 정치인이야. 기억 안 나? 총통이 경계했을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잖아. 지금 권이랑 유가 다이 다이 뜨는 거랑은 비교도 안 돼.”
“알아.”
권일혁 총통은 곽재헌의 세가 커지는 걸 두려워했다. 그래서 선동 능력이 탁월한 동생 권주혁을 끌어들였다.
권주혁은 무엇이 대중을 자극하는지 알았다. 무엇이 정치에 관심은커녕 글자도 모르는 촌구석 무지렁이들까지 입 모아 떠들게 만드는지를. 곽재헌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류연비와의 불륜을 보도한 건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전형적이라는 건 빤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효과가 검증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먹히니까 계속 쓰는 방법이었다.
신해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권주혁은 류연비가 사이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류진을 권주혁의 아가리에 처넣던 날, 그날. 권주혁은 지쳐 널브러진 정류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네 누나는 말이다… 신이 되려고 했어.’
정류진에게 숨겨진 여자 형제가 없는 이상, 그건 류연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권일혁 총통이 백조교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안다. 그는 사이비 교주와 그 신자들을 몰살하기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도 갖다 바친 인간이었다.
“범아?”
진치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해범은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세게 내뱉었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혈관에 독이 스미는 기분이었다.
***
최유신은 환자를 깨우거나 그 앞에 나타나지 말고, 뒤따라가더라도 소리를 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문을 잠가 봤자 안에서 열고 나왔다. 최유신은 문밖에서 자물쇠를 채우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해범은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당사자가 깨어나면 분명히 이유를 물을 테니까.
그는 류진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당사자가 불미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는 건 더 싫었다. 어차피 금방 나을 테니까.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젠데 굳이 나쁜 소식을 알려서 여러 사람 머리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잖아. 누구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건 사실이었다. 몽유병 상태의 류진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딱히 소란을 일으키지도, 위험한 곳에 접근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일어나서,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용히 지하로 내려갈 뿐이었다. 황효제의 시신이 보관된 곳으로.
최유신은 안치실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과연 의사는 의사였다. 그래도 겁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안치실 문가에 정체불명의 부적들을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어째 볼 때마다 늘어난다?”
신해범이 웃자 최유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비웃지 마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네 시 오십 분. 최유신은 새벽 다섯 시가 되기 전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면서 담요를 둘둘 만 채 실내화를 찍찍 끌면서 의무실을 나와 이곳으로 왔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면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던 새벽형 인간 됐다. 류진이 덕분에.”
류진의 몽유병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그였다. 최유신은 복도 끝에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몽유병 상태의 류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군대에서 몽유병은 생각보다 흔한 질병이었다.
경중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만일의 경우를 고려한다면 전역을 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신해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류진을 가둬 두지도 않았다. 신해범의 대응은 몽유병 환자의 가족들이 흔히 취하는 조치와는 달랐다.
처음에는 기척을 죽이고 뒤에서 따라갔다. 행동반경을 파악한 지금은 아예 자기가 먼저 내려가 버렸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앞을 가로막는 구조물을 치우거나, 행여 다른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을 차단했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라고 일축했다. 내가 며칠만 성가시지 뭐.
최유신은 신해범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그게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하면 류진의 정신 질환이 저절로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신해범은 천하제일 바보 멍청이였다. 아니면 현실 부정에 도가 텄거나.
최유신은 류진이 카드 키를 대고 안치실 문을 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해범이 소리 없이 도어 스토퍼를 내렸다. 최유신은 신해범의 어깨를 툭 치고 속삭였다.
“고생이다. 우리 둘 다.”
“그래서 돈으로 보상하잖아.”
“내가 돈 때문에 이렇게까지…! 됐다. 말을 말자.”
신해범은 한숨 쉬는 최유신을 보면서 웃었다.
황효제는 스테인리스 침대 위에 얼굴만 내놓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흰 천으로 덮은 목 아래는 부검으로 인해 엉망이었다.
류진은 시신에 손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망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신해범은 류진이 기도하는 사제 같다고 생각했다. 황효제의 명복이라도 빌어 주고 싶은 걸까. 착해 빠진 놈이 가지가지 한다.
최유신이 뭔가를 내밀었다. 받아 드니 차가운 이온 음료였다.
“아까 뽑아 뒀다.”
신해범은 음료수를 받았다. 마시지는 않았지만, 캔이 시원해서 기분 좋았다.
그는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혹사시키면 지칠 줄 알았다. 몽유병은커녕 다음 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몰아붙이면 죽은 듯이 잠잘 줄 알았다.
그러나 정류진은 오늘 밤도 움직였다. 걸음걸이가 불안하긴 했지만 끝끝내 일어서서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안을 들여다보던 최유신이 혀를 찼다.
“황효제랑 모르는 사이라며. 뭐가 저렇게 애틋하냐.”
“저게 애틋하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뭐, 나도 처음에는 으스스했다. 근데 저것도 계속 보니까….”
“보니까?”
“좀 눈물이 나.”
최유신이 담요를 꽁꽁 여몄다.
이제는 밤에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쌀쌀했다. 낮밤의 일교차가 큰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신해범은 첫눈 내릴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최유신이 중얼거렸다.
“오죽 누나가 그리웠으면 저럴까 싶어.”
“저기 누워 있는 건 류연비가 아니잖아.”
“그래서 더 슬픈 거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애 같아서.”
신해범은 최유신의 말을 무시하고 안치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인마…!”
바닥을 차는 군화 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신해범은 정류진이 지금 자는 상태라며, 억지로 깨우지 말라고 어깨를 잡는 최유신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류진의 뒤에 섰다.
“꼬꼬야.”
정류진이 돌아본다. 멍한 얼굴.
멱살을 움켜쥐고 뺨을 한 대 갈기고 싶어지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잔인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최유신이 보고 있는 건 상관없었다. 다만, 몽유병 상태의 정류진을 때려 봤자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정류진.”
“…….”
몽유병 환자 중에는 수면 상태에서도 말을 걸면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다.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래도.
“류진아.”
“…….”
“뭐라고 말 좀 해.”
그래도 침묵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멍하니 서서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는 정류진을 보는 것보다는, 미친 헛소리를 듣는 게 백 배, 아니 천 배는 나을 것 같았다.
신해범은 류진을 끌어안았다. 최유신이 뒤에서 숨을 들이켰다.
“일어나.”
이런 상태의 정류진에게 손을 댄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기절해 쓰러질 만큼 혹사시켰는데도 일어난다면, 더는 비밀을 지킬 수 없었다.
신해범은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류진을 깨웠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어나!”
“…….”
“일어나라고! 정류진! 일어나!”
마른 몸이 차갑다. 지척에 놓인 황효제와 별다를 게 없겠다, 싶을 정도로 몸이 찼다. 게다가 맨발이었다. 자면서도 길을 그렇게 잘 찾으면서 슬리퍼 하나 챙겨 신지 않은 모습에 화가 났다.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걸어왔다. 지상 12층에서 이곳 지하까지.
네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최유신은 잠자코 문을 닫고 나갔다. 담요를 꽁꽁 여미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자기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이미 신해범에게 경고했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정류진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진 게 아니었다. 실어증은 사전 경고였다. 자신은 전문적인 치료를 권했다. 그러나 의사의 조언을 무시한 건 신해범이었다.
최유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신해범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다치면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상처를 내서 앞선 통증을 잊어버리는 게 치료 방법이라고 믿는 놈이었다.
돌연 권일혁 총통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전에 느껴 본 적 없는 격렬한 분노였다. 그 인간은 자기가 몇 사람의 인생을 조져 놨는지 알까. 그렇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최유신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비상구 유도등을 응시했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신해범은 류진을 업고 12층까지 올라갔다. 특수 취조실 문을 열자 이불이 훌떡 젖혀진 침대가 보였다.
그는 침대에 류진을 눕히고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자라.”
침대에서 일어나는 신해범의 손목에 류진의 마른 손가락이 감겼다.
“어디 가?”
“사무실.”
“집에 안 가?”
“지금 시간을 봐.”
“…….”
“나도 집에 가고 싶지. 토끼 같은 자식이나 여우 같은 마누라는 없지만, 살쾡이 같은 친구 놈이 기다리거든.”
진치우와 살림을 합친 데에는 죽은 하신성의 영향이 컸다. 서로 큰마음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리 막역한 친구 사이라도, 아무리 넓은 집이라 해도 생활 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신해범은 집에 들어가는 날이 드물었다. 오늘처럼.
“집에 안 갈 거면 여기 있어.”
“나 일해야 하는데.”
“아직 출근 시간 남았잖아! 그리고 당신이 뭐,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일했다고…!”
류진은 말끝을 흐렸다. 신해범이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깎아 가면서.
“왜. 지켜 줄까?”
“됐고… 그냥 있어.”
류진은 꾸물꾸물 돌아누웠다.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그래도 싱글 침대는 싱글 침대라, 신해범이 들어가 눕기에는 공간이 부족했다.
“난 밤새워도 돼.”
“…….”
“장진에서도 잠 안 자고 버텼어.”
“그러면 일찍 죽어! 멍청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은 류진이 씩씩거렸다.
“왜 갑자기 소릴 지르고 난리냐.”
신해범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다리를 꼰 그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빙그레 웃었다.
“밤에는 소리 더 크게 울리는 거 모르냐?”
“나 이상한 거, 왜 얘기 안 했어?”
“이럴까 봐 얘기 안 했지.”
“사람이 이상하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왜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신해범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얼굴은 태연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잖아.”
“…….”
“너는 강한 사람이야, 정류진. 나보다 더. 최유신 같은 겁쟁이는 너를 이해 못 해. 그래서 자꾸 전문적인 치료가 어쩌고저쩌고 나발을 불지.”
신해범은 검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 일도 아니야.”
“뭐가 큰일이 아냐. 내가 만약에 사고라도 냈으면…!”
“내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괜찮아.”
한계를 모르는 당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그런 말 하면 내가 감동할 줄 알아?”
“맞잖아? 너 완전 안전했잖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 때문에 누가 다쳤어?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
신해범의 표정이 익살스러워졌다.
“네가 이럴까 봐 얘기 안 한 거다.”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사실은 조금 기대했어. 네가 시체 옆에서 잔다기에, 혹시 내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성적 취향이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뭐, 뭐?”
“왜 그 서양 공포물에 자주 나오는 거. 시체 성애자. 네크로필리아.”
베개가 날아왔다. 신해범은 상체를 기울여서 피했다.
“…왜 울고 그러십니까, 각하.”
“이럴 때만 각하지!”
신해범은 침대 가장자리로 옮겨 앉았다. 등을 홱 돌려 피해 버리는 류진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돌려 앉혔다.
“꼬꼬야.”
“꺼져!”
그는 몸부림치는 류진을 끌어안았다. 견갑골이 도드라진 등을 토닥였다.
“넌 이상하지 않아. 미치지도 않았어. 아무렴, 우리 정류진이가 얼마나 강한데.”
“모르겠어. 언제 끝나?”
마른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신해범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놓치느니 부수는 게 낫다. 부수면 조각조각 이어 붙일 기회라도 있으니까. 그러나 놓치면, 빼앗기면, 거기서 게임 끝이거든.
“무서워. 누나가 날 미워할까 봐. 내가 살아서. 내가, 내가 누나를 따라 죽지 않아서!”
숨이 턱 막혔다.
“누나가 나 싫어하면 어떡해? 내가 필요 없다고 하면 어떡해? 내가 누나 인생의 걸림돌이었으면? 그러면 난 진짜, 진짜, 진짜로….”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황효제의 시신은 정류진 안에 있던 류연비에 대한 죄책감을 폭발시켰다.
징글징글했다. 류연비는 죽어서도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정류진은 평생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정류진의 일 순위가 될 수 없겠지.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하신성도, 권세혁도 아니었다. 하물며 하성록도 아니었다. 정류진의 마음을 오롯이 차지하기 위해서 밀어내야 할 상대는 류연비였다.
산 넘어 산, 강 넘어 강. 신해범은 한숨을 푹 쉬었다.
“모르겠어. 난 누나가 뭘 했는지, 이젠 진짜 모르겠어….”
곽재헌과의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류진은 자기 이름으로 된 택배를 하나 받았다.
양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상자가 컸다. 안에는 새 운동화와 옷, 고급 과자, 학용품이 꽉 차게 들었다. 택배 상자 생김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광성에서 누나가 보낸 선물이었다. 편지나 카드는 따로 없었다.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다 류연비가 스케줄 중이라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만 받았다.
전화가 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 류진은 소포에 들었던 물건 중 얇고 납작한 카드 모양의 USB에 대해 물었다.
예상대로 그건 선물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여러 물건을 포장하다가 섞여 들어간 류연비의 개인 물건이었다.
신해범의 머리는 류진의 티셔츠 속에 있었다. 한쪽 유두를 빨면서 다른 쪽 젖꼭지를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신해범을 밀어내려고 버둥거리던 류진은 포기한 채 누웠다. 가끔 티셔츠 위로 신해범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누나는 미완성곡이 들어 있다고 했어. 자기한테 엄청 중요한 물건이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어. 택배로 다시 부치면 분실 위험이 있으니까, 보관해 주면 직접 찾으러 오겠다고.”
간지러워. 류진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알았다고 했어. 나는 사실, 누나가 집에 온다는 게 좋아서. 다른 생각은 못 했어.”
이동식 디스크를 컴퓨터에 꽂아 보긴 했다. 그러나 폴더에 비밀번호가 걸렸기에 류진은 빠르게 포기했다. 설령 비밀번호를 안다 해도 열어 보지 못했을 터였다. 류연비가 작곡에 쓰는 고사양 프로그램은 집 컴퓨터에 깔려 있지 않았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었는데….”
류연비의 미완성곡. 신해범은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건 확실했다.
신해범은 류진의 옷 속에서 물었다.
“주변에 얘기 안 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게 뭐야?”
대답이 없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옷 속에서 후퇴했다.
“응?”
그는 팔 안에 류진을 가두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누나는 억울하게 죽었어. 누가 뭐래도 난 그렇게 믿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거든.”
그때 류진의 주변에는 류연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신해범은 박진아, 정성현 부부조차 류연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 당시에는.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그래.”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걸 일부러 감췄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였다.
“당신도 우리 누나 안 믿잖아.”
“글쎄.”
신해범은 웃으면서 한 손으로 류진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맞춘 그가 말했다.
“각하께서 생각하는 게 맞겠지요.”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애초에 옳고 그름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이기는 거였다. 승리한 자의 신념에 따라 역사가 기록되고, 진실과 옳음이 결정된다.
나는 너와 함께 간다. 네 신념이 진실로 기록되는 세상에 서겠다.
신해범은 류진의 이마에 다시 한번 키스했다.
맞춤법을 틀리던 시절에도 악보는 매끄럽게 읽었다. 전부 누나 덕분이었다.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오케스트라가 펼쳐지는 절대 음감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류진은 학교 음악 수업에서 높은 점수를 어렵지 않게 따냈고, 때로는 혼자 힘으로 짧은 노래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기초도 안 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재밌었거든.”
칭찬은 들은 적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누구에게도 자작곡 악보를 보여 주거나 연주해 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류연비가 쓰다 만 곡을 이어받거나 편곡한 것 정도가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는 노래였다.
“부끄럼이 많았나 봐?”
“잘 모르겠어.”
변명할 거리라면 많았다. 어설픈 자작곡으로 누나 얼굴에 똥칠하고 싶지 않았다거나, 류연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음악은 의미가 없었다거나. 취미를 취미 생활로서 남겨 두고 싶었다는 이야기도 가능했다.
하지만 류진은 변명하지 않았고, 신해범도 한심하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인정받기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벽에 부딪혀도 금방 일어섰던 경험이 그에게도 있었다.
“누나가 죽은 다음에… 그런 생각을 했어. 혹시 누나가 미완성 악보에 어떤 메시지를 담은 게 아닐까. 누나는 스캔들이 터지기 전부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한테 그걸 보낸 게 아닐까. 내가 악보를 볼 줄 안다는 걸 누나도 알았으니까.”
“그래서 뭘 알아냈어?”
“아니….”
류진은 신해범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쉬는 더운 숨이 맨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잃어버렸어.”
신해범의 체온에 안심하게 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류진은 기억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가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책상 서랍 첫째 칸에 넣어 뒀는데.”
다른 곳은 아니었다. 확신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각자의 생활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낡은 집에는 비밀을 보관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류진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공간’은 책상 서랍 첫 번째 칸, 열쇠로 잠기는 한 칸이 유일했다. 류진은 누나에게 중요한 물건을 아무 데나 굴리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전화로 얘기했단 말이야. 서랍에 넣고 잠갔으니까 안심하라고. 누가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왜 보면 안 되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
류진이 발끈했다.
“누가 우리 누나 노래 베끼면 어떡해.”
“미완성곡이라며.”
“미완성이니까 더 문제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는 류진의 얼굴에는 묘한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은 음악 안 해 봐서 몰라.”
얼씨구.
신해범은 웃음을 참기 위해 숨을 삼켰다. 그 사실을 모르는 류진이 말을 이었다.
“누나는 언제 찾으러 온다고 말을 안 했어. 나도 안 물어봤고.”
그때 류진은 어렸지만 충분히 인지했다. 류연비가 구체적인 날짜나 시간을 얘기하지 못할 만큼 바쁘다는 걸.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류진은 서랍 안쪽에 넣어 둔 USB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곽재헌 게이트가 터졌다.
“그때는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집에 잘 들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 이해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그래.”
신해범은 류진의 젖꼭지를 입술로 덮었다.
당시의 아수라장에 대해서는 정성현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채권자들이 집으로 몰려와, 어린 정류진은 상담 센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귀가가 가능해진 건 그들이 철수한 늦은 밤이나 새벽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확실한 건, 나는 그걸 집 밖으로 들고 나간 적이 없어. 할머니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
류진은 다짐하듯이 재차 말했다.
“나는 원래도 누나 물건 함부로 안 만졌어. 그러니까….”
그거야 모르지. 사람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본인이 바라는 대로 왜곡되기도 하니까.
물론 신해범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계속 찾았어… 계속. 그걸 못 찾으면 나는 다른 데로 갈 수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그토록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집을 떠나서 살지 않겠다고.
결과는 방화로 인한 외조모의 사망이었다. 그건 박진아의 정신이 무너지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해범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정류진의 내면에 뿌리 깊은 자기혐오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겪는 불행들을 속죄라고 생각했을까.
정류진이라면 했을 것 같았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
“당신, 지금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아닌데.”
“거짓말.”
“진짠데.”
신해범은 류진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꼭 달라붙었다. 이 이상은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아!”
신해범의 오른손이 류진의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속옷에 감싸인 엉덩이를 거침없이 주물렀다.
“하지 마! 지금 진지한 얘기 하잖아!”
“각하께서 너무 무게를 잡으셔서 숨도 못 쉬겠습니다. 긴장 좀 풉시다, 우리.”
“그렇다고 변태 짓…!”
“USB 훔쳐 간 거 황효제 아닐까.”
그 안에 들었던 것도, 사실은 미완성곡이 아니라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예컨대 유독 물질을 싣고 달리는 열차 설계도.
“뭐라고?”
“어디다 보관했는지 류연비한테 전화로 말했다고 했지?”
“그래.”
“그럼 류연비의 심부름이었겠군.”
“말도 안 돼.”
류진이 코웃음 쳤다.
“그럼 누나가 나한테 얘길 했겠지!”
“황효제 가방에서 발견된 설계도. 류연비 USB에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을 가능성이 커. 미완성곡 같은 건 이미 문제가 아니야, 정류진.”
“무슨 설계돈데? 윤태금이 알아냈어?”
“대충. 아직 전부는 아냐. 일단은 굉장히 수상하다는 것만 알아 둬.”
“지금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놀랍지? 나도 방금 들은 따끈따끈한 소식이야.”
“그럼, 누나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야?”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류진의 몸을 신해범의 강철 같은 팔이 붙잡아 도로 눕혔다.
“아!”
신해범은 류진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저항하는 두 손을 잡아 머리맡에 짓눌렀다.
“뭐야!”
류진이 허리를 비틀었다.
“이거 놔!”
“너도 인정했잖아. 류연비가 너한테 모든 걸 털어놓지는 않았었다고.”
“그건 어차피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의식 과잉이지. 어리고 촌뜨기인 동생은 세련되고 화려한 연예계 이야기 해 줘 봤자 못 알아듣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널 얕잡아 봤겠지.”
“누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류연비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신해범은 자신이 본 류연비의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독재 정권의 끄나풀인 군인을 대하는 태도와 본인이 업어 키운 친동생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콧대 높은 톱스타도, 엄마 같은 누나도 류연비였다. 결국에는 동일 인물이었다. 신해범은 류연비가 동생에게도 마냥 따뜻한 누나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할 땐 엄하게, 챙길 땐 챙기는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를 합쳐 놓은 것처럼.
“꺼져! 무거워!”
“이런 시나리오는 어때?”
신해범은 류진의 손을 놔주었다. 그의 귀 양옆에 팔꿈치를 세우고 상반신을 지탱했다. 가슴과 배가 맞붙어 서로의 체온이 전해졌다.
“또 무슨 설계 질이야!”
“류연비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어. 네가 위험해지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지.”
“내가 왜 위험해지는데.”
“본인도 알았던 거지. 자기가 갖고 있는 게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
“어떻게든 안전하게 감추긴 해야 하는데, 그때 마침 생각난 게 광성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 집.”
“…….”
“류연비가 선물, 얼마나 자주 보냈어?”
일정한 주기가 없었다. 굳이 생일이나 여타 기념일이 아니라도 류연비는 광성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질 좋은 물건들을 수시로 보내 주었다.
돈도 부쳐 줬지만 생필품이 훨씬 이득이었다. 광성에서만 판매되는 물건을 중간 유통업자를 통해서 구하면 최초 판매가의 두 배 가격을 지불해야 했고, 그마저도 정품인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 업자들은 운송료를 아끼기 위해 사설 택배를 이용했는데 류연비는 상대적으로 배송이 빠르고 분실률도 적은 광성택배만 썼다.
무엇보다 선물이었다. 종이에 불과한 돈보다는 당장 눈앞의 내용물이 더 크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상자 속에 든 물건들을 ‘전부’ 누나가 ‘직접’ 골랐다고 믿던 시절. 류진은 물건이 전화로 이야기했던 것과 다르더라도, 특히 자기 몫의 옷이나 신발 사이즈를 틀려도 개의치 않았다. 누나가 바빠서 실수했나 보지 뭐.
이야기를 듣던 신해범은 류진의 눈가에 입술을 댔다. 축축하고 짠맛이 났다.
“네 잘못 아니야.”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만약 신해범의 말이 맞는다면. 그가 말하는 게 사실이라면. 류진은 소리 죽여 흐느꼈다. 누나의 USB에 들어 있던 게 사실은 미완성곡이 아니라 보유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어떤 것’이었다면….
“내가 할머닐 죽게 만든 거지?”
“그건 방화범이지. 네가 아니라.”
신해범은 류진의 입술을 찾았다. 힘없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서로의 치열을 핥고, 혀를 섞었다. 타액을 삼켰다. 신해범은 촉촉하게 젖은 류진의 아랫입술을 세게 빨았다. 그러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자책보다 원망하는 법을 배워. 넌 그럴 줄 알아야 해.”
“윤태금이랑 얘기하고 싶어.”
훌쩍이면서도 꿋꿋하게 말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 설계도가 뭔지 알아야겠어. 당신은 말 안 해 줄 거잖아.”
“알게 되면, 더는 황효제 안 찾아갈 거냐?”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왜 마음대로 안 돼?”
류진이 한숨을 쉬고 눈을 감자 신해범은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비켜… 숨 막혀.”
“수갑 차고 잘까. 너 한쪽, 나 한쪽.”
“싫어.”
“그럼 목줄 어때. 너한테 손잡이 줄게. 개 목걸이는 내가 차고.”
“더 싫어.”
“날 부려 먹는 거 아니었어?”
“사람 취급 안 하겠다는 소리가 아냐. 그럼 날 개처럼 굴린 당신이랑 똑같아지니까.”
신해범은 부정하지 않았고, 류진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어우, 잘난 척.”
“불만이면 꺼져라!”
류진이 버둥거렸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신해범의 무게가 더해졌다. 숨이 막히고, 당장이라도 가슴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류진은 버텼다. 신해범의 체온과 냄새와 숨결과 심장 박동을 느꼈다.
천장이 무너져도 살아남을 것 같았다. 신해범이 내 위에 버티고 있으면.
“황효제 시신. 최초 발견자가 둘이라고 얘기했었나?”
“진치우랑 재경이 형.”
“사실 치우는 후발 주자야. 성재경이랑 콤비 먹었던 놈은 엄승원.”
“엄승원?”
“풍기대에 관심 많은 기잔데 내 팬이었어.”
“거짓말 치네. 기자가 무슨 당신 팬이냐?”
“진짜야. 예나한테 물어봐. 그리고 은근히 기자 중에서 유명인 따르는 사람 많아.”
“…….”
“꼬꼬야?”
“밥 처먹고 할 짓도 없나 봐? 그 사람은. 직업도 거지 같은데 취미도 쓰레기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신해범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면전에서 저 말을 듣고 상처받을 엄승원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생각났다. 하긴 정류진 성격에 당사자 앞에서는 저런 말 못 하겠지만….
“심하긴.”
류진이 꿍얼거렸다.
“내가 옛날에 기자들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당해서 화내는 거 아니잖아.”
“뭐?”
“류연비 때문이지.”
신해범의 입술이 류진의 가슴을 덮었다. 유두를 빨면서 반대쪽 가슴과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살짝 땀이 맺혀서, 피부가 착 감기는 촉감이 예술이었다.
“하지 마아….”
걱정이 앞섰다. 감옥에 들어가면 이 몸이 그리워서 어떻게 살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풍기 교육대장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해도 모자랄 판에 총통 부인과 불륜 저지른 간 큰 놈답게 감방에서도 자위한다는 소리 듣게 생겼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 응? 말해 봐, 류진아.
쭙쭙 소리를 내며 한참을 빨았다. 어둠 속에서도 빨갛게 부은 가슴이 보였다. 한껏 달아오른 피부와 팽창한 유륜, 꼿꼿하게 솟아 먹음직스러운 젖꼭지. 신해범은 자신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그곳에 뺨을 문댔다.
“아, 아파.”
“좋다… 류진아….”
류진의 몸부림이 멎었다. 그는 말없이 신해범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정류진. 류진아.”
신해범에게 이름을 불리면 목이 메었다.
호월루의 가르토, 아니 준이가 떠올랐다. 녀석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던 말도 생각났다. 약물로 비대해진 심장을 고칠 수 없다고 들었다. 원래 시력을 되찾지 못하는 신해범의 오른쪽 눈처럼.
“나, 그 기자한테 누나 얘기는 안 할 거야. 사적인 거 물어보면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온다고?”
“아니? 때릴 건데?”
신해범은 그제야 웃었다. 류진은 안심했지만, 자기가 왜 안심하는지는 몰랐다.
***
안전 가옥이라는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가 꽤 강렬했다. 신해범이 도착했다며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 류진은 땅속에 파묻힌 지하 벙커, 아니면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는 강철 벽으로 만들어진 은밀한 주거 공간을 상상했었다.
“여기야?”
“그래. 치우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마련한 안가다.”
류진은 주택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이층집은 주황색 지붕에, 창문마다 나무판자로 된 덧문이 붙은 20세기 영국풍이었다. 안가라기보다는 차라리 고향인 함풍 2도의 문화 회관 같았다.
생각보다 평범한 집이었다. 고풍스럽긴 하지만 눈에 띄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당이 무척 넓어서 애완동물을 키우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잔디밭에 잡초가 무성하고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는 지저분했지만, 사람 손이 닿으면 풍치 있게 탈바꿈할 좋은 집이었다.
시내에서 떨어진 위치라 조용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인근에 다른 주택들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담이 높고 나무가 울창해서 사생활이 보호되었다. 차가 있으면 인근 편의 시설을 이용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한마디로, 주거 환경으로는 최적이었다.
류진은 신해범을 돌아보았다.
“나도 여기서 지내고 싶어.”
“안 돼.”
“왜?”
신해범은 트렁크에서 과일 상자를 꺼냈다. 잘 익은 사과가 가득 들었다. 류진이 달려가 한쪽을 잡아 주려 했으나, 신해범은 몸을 홱 돌렸다. 트렁크 문은 저절로 닫혔다.
류진은 디딤돌을 따라 걷는 신해범을 좇아갔다.
“왜? 왜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MVP 오기 전에 풍기대 가면 되잖아.”
“귀신 나오는 집이래, 여기.”
“뭐라고?”
“그래서 치우가 나한테 손 안 벌릴 수 있었지. 귀신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집값이 많이 떨어졌거든.”
최석준의 숙청으로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된 사람이 여럿이었다. 급전을 당기려는 자들이 헐값에 부동산을 내놓았고, 시세 파괴나 다름없는 가격에 근거 없는 소문이 속출했다.
실은 그 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 가까이 가면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여기 사느냐고 묻더라. 밤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잠을 아무리 자도 개운하지가 않다던데…. 소문은 돌고 돌아 부풀려져 최종적으로 ‘귀신 나오는 집’이 되었다.
“내가 애냐? 그런 말을 믿게?”
신해범은 장난치지 말라고 투덜대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저 조그만 머리통을 콱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나오면, 뭐 어쩔 건데? 나는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을 엄청 많이 봤거든요.”
“각하의 용맹함과 기개가 하늘을 찌릅니다. 당연히 저도 지켜 주시겠지요?”
“뭐라고 하냐. 당신이 날 지켜야지.”
현관 앞에 섰다. 류진은 초인종을 눌렀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고장 났어.”
“왜?”
신해범은 대답 대신 현관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톡, 톡, 토도독 톡.
문이 열렸다. 성재경이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는 신해범에게 경례를, 류진에게는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했다.
류진은 하마터면 성재경을 껴안을 뻔했으나 꾹 참았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돼지우리 같을 줄 알았는데.”
거실 소파에 앉은 신해범이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하고 사네. 분위기 아늑하군. 좋아.”
“감사합니다.”
성재경은 사과 상자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식사는 어떻게 하나?”
상자에서 사과 몇 개를 꺼내 씻던 성재경이 고개를 쭉 빼고 대답했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본인은 밖에 못 나가고. 배달 음식도 안 되고. 중사가 매번 챙겨 주기도 어렵잖아?”
“요새 레토르트 식품이 워낙 잘 나와서, 엇!”
긴장한 성재경의 손에서 사과가 미끄러졌다. 젖은 사과는 부엌을 벗어나, 거실에 섰던 류진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류진은 사과를 주웠다. 제복 셔츠에 쓱쓱 닦고 있는데 성재경이 걸어 나왔다.
“여기.”
“응. 고맙다.”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쉬고 있어.”
“같이 해.”
류진은 신해범을 곁눈질했다. 그는 운전하는 동안 착용하던 보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미간을 마사지하는 중이었다.
“형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많잖아.”
“무슨….”
“소령님 얘기.”
성재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류진은 그가 묵묵히 사과를 씻는 사이, 찬장에서 플라스틱 접시를 꺼냈다.
“점심 때 같이 커피 마셨어.”
“그래?”
금일 오전, 신해범과 진치우가 나란히 외근이었다. 시사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한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음식은 충분히 있었지만, 류진은 점심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신해범이 야속했다. 혼자서 마음대로 아래층에 내려갈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새삼스레 감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괜찮았던 건 끼니때마다 찾아와서 함께 식사해 준 신해범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느껴져서 더 울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류진은 신해범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는 까다롭고 엄격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젓가락질을 지적하고, 씹는 소리를 내지 말라 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반찬을 접시 한쪽으로 밀어내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식사하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혔다. 게다가 신해범은 류진이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각종 영양제를 쥐여 주었다. 액체 홍삼. 단백질 환. 소화를 돕는다는 양배추즙과 흑염소 진액까지.
류진은 그것들이 싫었다. 단순히 쓰고 맛없어서가 아니었다. 왜 나만 이 맛없는 약을 잔뜩 먹어야 하냐는 거였다. 신해범은 분명 자기 몫으로 들어온 영양제 선물을 먹기 싫어서 떠넘기는 거였다. 이 약은 놈….
그래도 먹어야 했다. 신해범이 돌아왔을 때 오늘 점심분의 영양제가 그대로 있는 걸 보면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몰래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우니까.
기우희는 류진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양배추즙을 들이켤 때 왔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는 블랙, 다른 하나는 휘핑이 잔뜩 올라간 화이트 초콜릿이었다. 류진은 한눈에 자기 몫을 알아보았다.
“소령님도 원래 블랙커피만 드셔?”
“내가 알기론. 가끔 설탕 들어간 캔 커피도 드시긴 해. 그런데 정말 가끔이라서 권하긴 어렵지.”
성재경은 과도 대신 주머니에서 꺼낸 군용 나이프를 휴지로 닦았다. 류진은 그가 능숙하게 사과 껍질 벗기는 모습을 구경했다.
“형 잘한다.”
“그냥 하는 거지 뭐.”
“있잖아, 소령님 윤태금이랑 별로 안 친해. 장진에서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윤태금이 붙임성 좋은 건 인정하는데, 소령님하고는 맞는 성격이 아냐. 내가 보기엔 형이 훨씬 나아.”
“말이라도 고맙다.”
“진짜야.”
성재경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류진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같은 기분을 예전에도 느낀 적 있었다. 곽현우와 차모은 때였다. 자신을 하신성과 비교하며 초라하다고 느끼던 곽현우의 표정이 꼭 저랬다.
“형.”
“응?”
류진은 과일을 깎는 성재경의 손을 잡았다.
“왜, 왜 그래? 류진아?”
“나 계속 얘기할 거야. 소령님 곁엔 형이 있어야 한다고.”
“…….”
“윤태금은 보좌관 역할에 안 어울려. 머리 좋은 거랑 상관을 잘 모시는 거랑은 다르다고 생각해.”
“…….”
“진심이야.”
성재경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자기는 이미 상관의 신뢰를 잃었다고. 복귀 신고서가 처리된다 한들 기우희와 예전처럼 가까이 지내지는 못할 거라고. 내게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다고….
“형?”
성재경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았다.
왜 그때 참지 못했을까. 사람이 다치고 죽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기우희의 극단적인 해결 방식에 딱히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때는 참지 못했을까.
서지운의 일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풍기 교육대원의 가족도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났었다.
류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형.”
“네가 왜?”
“형이 휴직하고 함풍 간 거,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이잖아.”
“그런 거 아냐.”
“맞아. 내 잘못도 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양팔을 벌리고 상대방을 얼싸안기 직전이었다. 그 분위기를 결딴낸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이건 또 무슨 그림이지?”
박수를 치며 부엌으로 걸어 들어온 그가 말했다.
“신파극 치곤 감정 연기가 부족한데, 좀 더 목소리를 떠는 게 좋겠군.”
성재경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류진은 입을 다물고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물론 신해범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중사는 사과로 용이라도 조각하나?”
“아닙니다.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성재경이 과일 접시를 챙겼다. 신해범이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래. 중사는 저기서 달달 떠는 기자님 좀 챙겨 줘.”
기자? 엄승원?
류진은 성재경의 뒤를 따라 나가려 했으나 신해범에게 가로막혔다.
“자네는 나랑 얘기 좀 하지.”
“…왜.”
“중사랑 무슨 얘기 했어?”
“그런 게 왜 궁금한데?”
“당연히 궁금하지. 우리 꼬꼬 애절한 목소리가 저어기 거실까지 다 들렸는데.”
류진이 한숨을 쉬었다.
“다 들어 놓고 뭘 또 물어봐.”
“중사를 그렇게 꿀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당연히 의심하지.”
“의심…!”
기가 막혔다. 자기는 대놓고 총통 부인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주제에.
류진은 입을 꾹 다물고 신해범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소령님 얘기 했어. 형이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됐지? 비켜.”
“참 어려운 길 돌아간다.”
“뭐?”
“네가 기 소령한테 알랑거리면서 사정하는 거랑, 내가 깔끔하게 한마디 하는 거랑, 어느 쪽이 중사의 고민 해결에 더 효과적일까?”
류진은 신해범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당신이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는데?”
“보통 청탁이라고 하지, 그런 걸. 당연히 공짜로는 안 되고.”
류진은 허리께를 더듬는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지랄. 꺼져라.”
“야.”
“진지하게 들은 내가 바보지. 이 변태 새끼.”
신해범이 양 뺨을 부풀렸다.
“너도 가만히 보면 사람 차별 엄청 해.”
“내가 뭘?”
류진은 턱을 쳐들었다. 아침에 진치우와 희희낙락하던 신해범에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었다. 방송 나간다고 좋아하기는. 그런 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면서, 뭘 새삼스럽게….
생각하니 속에서 울분이 치밀었다. 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신해범을 밀치고 거실로 나가려는데 그가 또다시 앞을 막았다.
“진짜 왜 이래?”
“예쁘다 정류진.”
“지랄하지 말고.”
“이따 복귀하는 길에 호두빵 사 줄게.”
“뭐?”
“호두빵.”
류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뜬금없이 웬.”
“모르는 척 안 해도 돼. 오는 길에 노점상 구경하는 거 다 봤다. 참, 길거리에서 빙수 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조금 쌀쌀해졌다고 벌써 겨울 음식이 나온다. 그치?”
“나 안 그랬거든?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괜찮아, 꼬꼬야. 네가 하루 이틀 먹보인 게 아닌데 뭐가 부끄러워. 그리고 난 우리 꼬꼬가 볼때기 미어터져라 먹을 때 기분 좋더라. 꼭 내 거기 빨아 주는 얼굴 보는 거 같아서….”
류진의 손이 신해범의 턱을 움켜잡았다.
“헉.”
“한마디만 더 하면 뒤지게 맞는다.”
신해범의 발음이 뭉개졌다.
“꼬꼬야.”
“당신은 자기가 엄청 잘생긴 줄 아나 봐.”
“왜 그래. 화났어?”
“좆나 잘난 척. 치명적인 척. 재수 없어 꼰대 새끼.”
오랜만에 듣는 욕이었다. 신해범은 얼얼한 턱을 문지르며, 거실로 향하는 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허.”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 성재경이랑 시시덕대는 거 눈감아 준 게 누군데.
신해범은 엄승원의 코앞에 대고 손가락을 튕기고 싶었다. 그러면 정류진의 옆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 놈이 제정신을 차릴 듯싶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은 우리 기자님께서 하고 계시죠.”
엄승원이 목뒤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류진은 그가 덩치에 비해 소극적인 성격이라는 데 안심했다. 가만 보니 얼굴도 그렇게 험상궂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보다 더 긴장한 눈치였다. 한여름도 아닌데 땀을 줄줄 흘리고 있어서 목을 꽉 조인 셔츠 단추가 답답해 보였다.
류진은 왜 신해범이 좀 더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지 의아했다. 허리를 쭉 펴고 두 손을 주먹 쥔 채 양 무릎에 올려놓는 게 힘들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형, 혹시 에어컨….”
“덥나? 이병?”
성재경에게 속삭였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들은 신해범이 말했다.
“우리 이병과 기자님을 위해 에어컨을 켜야겠군. 난 지금 실내 온도가 딱 좋지만 말이야.”
류진은 대놓고 눈치 주는 신해범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됐고.”
엄승원의 얼굴에 서렸던 희망이 사라졌다. 류진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치사한 신해범. 이기적이고 못돼 먹은 신해범. 자기 좋을 때만 대장군 각하, 대장군 각하, 하더니 결국은… 아, 이걸 어떻게 엿 먹이지?
“저기, 정 이병.”
“예?”
“제가 엄승원 기잡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존칭 안 쓰셔도 됩니다. 이름으로 부르셔도 괜찮아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류진은 슬쩍 신해범의 눈치를 봤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어차피 저에 대해서 아시잖아요.”
“사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류연비 동생이라서요?”
엄승원이 마른침 삼키는 소리는 이곳의 전원이 들었을 만큼 컸다. 자신도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줄 몰랐는지 엄승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콧등에서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어올리면서 헛기침을 했다.
류진은 엄승원에게 재차 질문했다.
“직접 보니까 어때요? 많이 닮았습니까?”
닮았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류연비의 키와 체격을 좀 더 늘리고, 남성 호르몬을 한 수저 떠 넣으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가까이 있는 신해범이나 성재경과 비교해 한없이 마른 몸인데도 빈티가 없었다. 제복 차림만 아니라면 두 사람을 거느린 귀족 도련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신해범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한 사람 안 왔습니다만, 먼저 이야기 시작하지요. 손가락 빨면서 기다릴 시간은 없으니.”
류연비가 죽기 전에 남긴 설계도의 정체는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입수 경로였다. 설계도가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목적과 용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거센 물살을 가르고 강 상류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연어가 된 기분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엄승원의 콧등에서 미끄러지는 안경만 보았다.
그는 테이블에 벗어 놓은 보안경을 찾아 들었다. 가장자리 은테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내 것이 더 멋진데. 정류진 미적 감각이 엉망이구먼.
류진은 누나의 어린 시절이나 사적인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안심했다. 이 부분은 신해범이 사전에 주의를 준 것 같았다. 엄승원은 대화하는 내내 깍듯하게 선을 지켰다. 류진은 과거에 자기가 보고 겪었던 무례한 기자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물론 엄승원 한 사람만으로 뿌리 깊은 부정적 이미지가 뒤집히는 건 아니었다.
기자라서 그런지 말은 잘했다. 엄승원은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류진은 그가 황효제의 시신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넘어지는 연기를 했다는 말을 과장된 몸짓을 곁들여서 늘어놓을 때,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피식 웃어 버렸다.
신해범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엄승원의 손에는 펜과 수첩이 있었다. 딱히 메모를 하지 않음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인터뷰할 때의 습관인 모양인데, 본인이 말하지 않을 때는 볼펜 끝으로 턱을 눌렀다. 그래서 살찐 턱에 볼펜 끄트머리 모양으로 동그란 자국이 선명했다.
신해범은 엄승원의 손에서 볼펜을 빼앗아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잠자코 있는 건 그가 류진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과, 이전에 음식 가지고 장난질한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옻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겁을 줬던 일.
신해준이라면 음식 가지고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해준이라면 정류진을 고문하고 강간하지도, 뱀에게 던져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또다시 약탈당하는 입장이 되는 건 싫다.
신해범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엄승원이 볼펜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황효제가 류연비 씨 고향 집에 침입했을 거라는 준장님 추측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집에 도둑이 든 적은 없습니다.”
류진은 곧장 반박했다.
“그랬다면 현관이든 창문이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있었겠죠.”
“정 이병, 그때 집보다는 인근 상담 센터에서 지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할머니도 계셨고, 이모랑 이모부도 자주 찾아오셨고, 또 집 근처가… 시끄러워서. 누가 몰래 들어가는 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랑 카메라맨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거든요.”
엄승원은 입을 다물었다. 무차별적이고 야만적인 취재 방식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신해범이 말했다.
“그래도 기회가 아예 없진 않았을 거다.”
사전에 류연비로부터 들은 내용이 있다면. 그가 질문했다.
“현관 도어 록이 어떤 거였나?”
평범한 열쇠 문고리였다. 늙은 조모가 비밀번호나 지문 인식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고, 전자 도어 록은 설치하는 비용이 비싸서. 류진은 그 현관문 열쇠도 한번 바꾼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류연비가 현관 키를 황에게 넘겨줬을 가능성이 있어. 그럼 굳이 집에 침입할 필요가 없지.”
자연스럽게 현관문 열고 들어가면 되니까. 자기 집인 것처럼.
전자 도어 록도 없는 평범한 가정집에 가정용 CCTV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황효제는 그렇게 조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류연비의 첫 번째 매니저이기도 했지만, 그를 찾아낸 스카우터이자 데뷔시킨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신해범은 황효제가 류연비의 고향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걸 섬세한 도둑이라고 해야 하나, 도둑이지만 도둑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신해범은 흙발로 집 안을 돌아다니거나 정리된 살림을 흩뜨리지 않으려고 애썼을 황효제를 상상하고 웃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집 안에 몰래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에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류연비가 시킨 일이라 해도.
신해범은 류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얼굴을 가까이했다.
“자네가 USB를 보관한 위치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 서랍에도 열쇠가.”
“서랍 열쇠는 어디다 보관했지?”
“현관문 열쇠랑 같이 갖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류진은 주눅 든 목소리로, 해당 서랍 열쇠를 류연비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애초에 그 서랍장을 물려준 사람이 류연비였다. 최초에 가구를 구입했을 때 받은 서랍 열쇠 두 개를, 류연비가 집을 떠나면서 동생에게 하나 준 것이다.
황효제는 USB가 보관된 서랍장을 파손할 필요가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류진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엄승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스캔들 이전부터 커넥션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겠군요. 애초에 황 씨는 연예계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엄승원은 표현을 골랐다.
“줄곧 류연비 씨의 뒤에 있었던 걸 수도.”
달의 뒷면이 생각났다.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운석 충돌로 인한 크레이터 때문에 곰보라고도 불리는 달의 뒷면.
어쩌면 황효제는 류연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담당하는 매니저였을지도 몰랐다. 부모나 일가친척의 도움 없이, 오롯이 자기 혼자 힘으로 험난한 연예계를 헤쳐 나가야 했던 류연비의 비밀 병기. 숨은 조력자.
류연비가 곽재헌과 돈독한 친분을 쌓은 것도 프로듀서로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고 이곳저곳에 인맥을 터 두었던 황효제의 보이지 않는 활약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신해범이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졌다.
“자의로 그림자를 자처했을까.”
“아마 그랬을 겁니다.”
엄승원은 거의 확신한다는 투로 말했다.
황효제가 업계에서 사라진 건 류연비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데뷔 초부터 인기를 끌었다 해도 신인은 신인. 위계질서가 철저한 연예계에서 마땅한 뒷배도 없고, 연차가 쌓인 원로 가수도 아닌 류연비가 신분 상승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황효제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는 어려웠다.
신해범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무슨 목적으로?”
류연비의 그림자가 됨으로써 황효제에게 떨어지는 이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신해범이 보기에, 황효제는 달의 뒷면이 되면서 잃은 것만 많았다.
“그건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인데.”
엄승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별다른 이득을 취한 정황이 없다면… 일반적인 비즈니스 파트너 사이가 아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류진이 공격적인 목소리를 냈다. 신해범이 제지하자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목소리 낮춰. 이병.”
“지금 기자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잖습니까!”
엄승원은 자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었다는 사실을 알고 머뭇거렸다. 성재경의 얼굴에도 당황이 스쳤다.
분노하는 류진을 향해 엄승원은 황급히 말했다.
“확신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런 특수한 사례,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바깥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조금 특수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경우일 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 특수한 경우라는 게!”
류진의 손바닥이 테이블을 쳤다. 놓여 있던 접시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지금 누나가 황효제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얘기잖습니까!”
“아뇨, 아뇨! 남녀상열지사가 아니라 권력 관계 말입니다!”
“그게 그 뜻이잖아요!”
“다릅니다!”
신해범이 씩씩대는 류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신분 차이, 권력 차이를 떠나서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을이야. 매달리고 애원하고 헌신하게 만드는 희한한 힘이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서 상대가 말하지 않은 것도 나서서 해 주고 싶은 마음. 난 자네도 그런 사람 겪었다고 생각하는데.”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지금 상황에 권세혁을 생각나게 하는 그가 미웠다.
“당시 기획사가 류연비 원 톱이었다는 사실도 생각해 봐야 해. 스타 한 명 띄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제 말이 그겁니다.”
엄승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들었다.
“황효제는 류연비 씨에게 각별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반드시 띄워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을 테고.”
“…….”
미인이 노려보는 시선은 괴로웠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그 마음이 두 사람의 권력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죠.”
“누나는 사람을 도구처럼 쓰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건 정 이병 관점에서고.”
“진짜!”
엄승원은 성재경에게 눈짓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설계도를 가져와야 할 윤태금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급한 건 아니나 류연비 이야기로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에, 이미 정류진 쪽은 언성이 높아졌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윤태금이 설계도를 가져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윤태금은 나타나지 않았고, 정류진은 흥분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정류진이 아직 어려서 쉽게 흥분하는 탓도 있지만, 역시 류연비의 가족이기 때문에….
“짝사랑이 아니었을까요.”
불쑥 끼어든 성재경에게 전원의 시선이 쏠렸다.
“그게 자기 가수를 어떻게 해 보려는 불순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자기 꿈을 이뤄 낸 사람을 향한 동경… 같은 거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신해범이 다리를 꼬면서 질문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중사?”
“동경은 사랑으로, 사랑은 충성심으로 발전하기 좋은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승원은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맞다. 바로 그거다. 류연비에 대한 황효제의 감정은 충성심이었다.
검열국의 간섭으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기획사를 기적적으로 소생시켜 준 류연비는 황효제 자신의 손으로 만든 기적이었다. 데뷔하기 전 어려운 연습생 시절을 함께했기에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지켜 주고 싶었겠지.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었으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효제는 류연비를 만나기 전에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솔직히 옛날엔 연예계 화류계 구분이 모호했죠. 이래저래 알아보니 스카우터, 프로듀서 이런 사람들, 밤무대 가수나 기생 같은 접대부들 관리하다 시작하는 경우 많았답니다. 뭐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조폭까진 아니고요.”
류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런 얘긴 굳이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진정하고 앉아. 이병.”
“저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앉아.”
성재경이 일어나 류진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신해범의 목소리는 차분해서 무서웠다.
“잠깐 물이라도 마시고 와.”
“필요 없습니다.”
엄승원은 숨을 쉬기가 힘들다고 느꼈다. 투명한 벽이 사방에서 일제히 간격을 좁혀 오는 느낌이었다.
정류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황효제 이야기는 이 이상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엄승원은 변명하고 싶었다. 황효제의 과거사를 내뱉은 건 그의 과거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물론 류연비에 대한 모욕도 아니었다. 단지 황효제가 류연비를 자사 소속 연예인 이상으로 신성시하고 있었음을, 그렇게 된 상황적 배경을 설명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정류진은 황효제의 부끄러운 이야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유명 연예인의 가족들은 유명인의 이름을 팔아서 부당 이득을 취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기 행동거지로 인해 유명인인 가족이 피해를 볼까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경우도 있었다. 정류진은 확실히 후자였다.
엄승원은 자신을 노려보는 마른 남자아이가 안쓰러웠다. 죽은 류연비가 구설에 오르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신해범이 툭 내뱉었다.
“왜요. 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엄승원과 성재경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신해범, 지금 열 받은 거 맞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매만지던 류진이 말했다.
“…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떤 부분이 그런지 말씀해 주시면.”
“황효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게 왜 중요합니까?”
고개를 류진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저는 그 누구도 도마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설계도의 입수 경로를 알아내는 일에 왜 황효제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나.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설계도를 만든 사람이 황효제 본인도 아닌데.
하기야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범죄자의 처형 날짜보다는 사건 현장의 처참함, 그리고 피해자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궁금해하더라. 남들 이야기로 밥 먹고 사는 기자들은 특히 더….
류진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엄승원에게 화풀이하지 않으려면 이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신해범이 문제였다.
“물 마시러 가나? 이병?”
뒤를 돌아보았다. 신해범이 왼손을 한들한들 흔들고 있었다.
“가라고 할 땐 필요 없다더니. 꼭 이렇게 뒷북을 쳐. 응?”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지 모르겠다. 류진은 그의 왼손 엄지부터 손목까지 감싼 테이핑을 뜯어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수시로 감기 걸려 골골대는 약골이라고 소리치거나.
하지만 신해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했던 모든 말이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류진은 도로 등을 돌렸다. 부엌으로 가지는 않았다. 2층 계단을 쿵쿵 뛰어올라 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성재경에게는 미안했지만 너무 화가 났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자 콧등이 시큰해졌다.
신해범, 이 나쁜 새끼….
제가 뭔데 질투를 해.
내가 다른 부하 만들어서 예뻐해도 어쩔 수 없지요, 하고 조용히 뒷방에서 눈물 훔쳐야 할 놈이 어딜 건방지게.
현실에서는 그 역할이 바뀌어 있었다. 지금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신해범이 아니라 류진 자신이었다.
설움을 삼키려 애쓰는 류진의 시야에 창문이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창문을 밀어 올리고 덧창을 여는 순간, 류진은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트렌치코트를 차려입은 윤태금이었다.
윤태금의 흑갈색 서류 가방에서는 새로 장만한 태블릿과 종이 설계도 사본이 여러 장 나왔다. 지각한 이유는 전문가의 자문이 늦어져서라고 했다.
“그 친구가 지금 독일 현지에 있거든요.”
윤태금이 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던 독일인 엔지니어는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이었으나, 학창 시절 소위 천재로 불리며 각종 대회를 휩쓸어 졸업하기 전부터 많은 회사의 러브 콜을 받았다. 지금은 올마이티 본사에 재직 중이라고 했다.
친구 자랑을 마친 윤태금은 열차 설계도와 함께 발견된 건축물의 용도가 수용 시설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수용소?”
신해범이 눈살을 찌푸리자 윤태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의 면적이나 밀집률, 수도 시설, 또 내부 상세 도면으로 확인 가능한 조명이나 붙박이 가구를 보면….”
조금 생각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베를린에서 구체적인 설계 도면이 발견됐었죠. 그게 한참 전에 일반에도 공개가 됐고요. 저도 자세한 부분은 잘 모릅니다만, 아무래도 그 친구는 국적이 그렇다 보니.”
“그래서 뭐라고 둘러댔나? 이런 걸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봤을 텐데.”
“게임 그래픽….”
“믿던가?”
“사실 저희 눈에는 이게, 툭 까놓고 말씀드리면 조악한 수준이라서요. 겉보기엔 그럴싸한데 자세히 보면 디테일한 부분에서 아마추어티가 납니다. 요즘 이런 식으로 도면 안 그려요.”
예상했던 범위 이내였다. 열차 설계도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추측에 확신이 더해지며, 신해범의 머릿속에 권일혁 총통의 얼굴이 떠올랐다.
국립 은행에서 발행되는 기념주화에 새겨지는 이목구비 뚜렷하고 안광이 부리부리한 중년 남성의 얼굴.
물론 지금 권일혁의 외모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이 기억하는 총통은 기념주화 속 그 얼굴이었다.
현기증이 밀려와 신해범은 눈을 감았다.
개새끼들 생각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 사탄이 꿈에 나타나 지령이라도 내리나.
시기상, 권일혁은 백조교 신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이런 걸 구상했을 가능성이 컸다.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밀폐된 공간에 몰아넣고.
사후 뒤처리도 확실하게.
실제로 이것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시설물이 만들어졌다면 ‘백조교 사태’는 그런 식으로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만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신해범은 그 바탕에 곽재헌과 류연비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권일혁 총통이 백조교 신자들을 학살한 방법은 총살이었다.
총통은 사격술에 능한 군인들로 구성된 척살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백조교 신자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백조교 내부에 프락치를 심어 기도회장을 알아내고, 포교 활동을 벌이거나 기타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모이는 비밀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찾아냈다.
개중 악명 높은 ‘백조교 사태’는 광성 근교의 중학교 강당에서 벌어진 무차별 총격 사건이었다. 당시 밖에서 현관과 뒷문, 창문의 덧문을 모조리 걸어 잠갔고 세 차례에 걸친 총격이 끝난 뒤에는 강당 건물에 불까지 질렀다.
나무로 지어진 구건물이라 활활 잘도 타올랐다는 게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우유 급식소 근로자들의 증언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의 정규 수업이 없는 날이었음에도 불구, 청소를 위해 출근했다가 백조교 신자로 몰려 당국의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엄승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장님, 괜찮으십니까?”
신해범은 대꾸할 수 없었다. 찌푸린 미간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래,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면 방화만 한 것도 없다.
자강 1도의 대마밭, 함풍 2도의 문화 회관. 그리고 예배당.
권일혁 총통과 똑같은 짓을 했다. 그 사실을 두고 변명은 않겠다. 개새끼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이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대장님.”
성재경이 일어섰다. 신해범은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상하다. 점심때 약은 제대로 챙겨 먹었는데. 감기 기운이 도지려고 이러나?
그때 류진이 벌떡 일어섰다.
“배고프다. 배고픈 사람?”
“…….”
“없습니까?”
신해범은 웃어 버렸다. 그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쿡쿡거렸다.
신해범이 웃으니 덩달아 긴장이 풀린 엄승원과 윤태금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성재경 혼자만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희로애락이 소용돌이치는 거실 한가운데서 류진 혼자만 태연했다.
태풍의 눈이 되라는 건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까 보니까 찬장에 밀가루랑 식용유 있던데. 그거로 뭐 해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신해범은 포기하고 일어섰다. 밀가루와 식용유로 뭐라도 만들어 내라고 각하께서 명령하셨다.
여럿이 함께 먹을 전을 부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프라이팬이었다. 분명 식료품을 박스째 사며 사은품으로 딸려 온 조리 기구다. 몇 번 쓰고 나면 코팅이 다 벗겨질 싸구려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신해범은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플라스틱 그릇에 달걀을 깨 넣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젓고 있는데 등이 묵직해졌다.
“왜?”
“…….”
“밥?”
지금 하는 중이잖아.
신해범은 입 안에 고인 말을 내뱉지 못했다. 허리를 감아 조이는 팔 힘이 생각보다 강해서.
꽉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말라깽이가….
“기분 거지 같은 건 난데, 왜 당신이 풀이 죽어?”
“내가?”
“아까 그랬잖아.”
“네가 잘못 봤겠지.”
“아니야.”
목덜미에 숨이 닿았다. 신해범은 귀가 떨리는 걸 느꼈다.
“꼬꼬야.”
돌아서려는데, 나무막대기 같은 두 팔이 허리를 놔주지 않았다.
“정류진.”
“부르지 마. 나 쳐다보지도 마. 그냥 하던 일 해.”
“이거 불 올려야 하는데.”
그래도 꼼짝하지 않았다. 신해범은 백사장의 게처럼 옆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를 껴안고 있던 류진도 덩달아서 옆으로 움직였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지단 익는 냄새가 퍼졌다.
“…누나가 왜 그런 걸 가지고 있었을까.”
“곽 때문이겠지.”
친서민적 이미지로 유명했어도 정치인은 정치인이었다. 입 속에 독니를 감춘 뱀들.
“현우 형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잖아.”
“정치하는 작자랑은 안 엮이는 게 나아.”
신해범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의 아버지가 정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패자 부활전이 없었다. 지면 죽는다.
명예나 재산은 잃어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목숨은 한번 잃으면 돌이킬 수 없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깨달았을 터였다. 그래서 아들이 자신의 복수에 칼을 갈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살아남은 고모는 그렇지 않았고, 운명도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당신도 정치랑 엮여 있잖아.”
“내가 중간에 있으니까 너는 아니지.”
“나 말고 당신 말이야.”
부엌살림이 상당히 부실했다. 그 흔한 뒤집개 하나 없었다. 신해범은 프라이팬을 흔들어서 지단을 뒤집었다.
“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단 끄트머리가 안으로 말려 버렸다.
“이런.”
이건 엄승원 아니면 윤태금 몫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지단을 부치는데 허리를 죄는 힘이 더해졌다. 신해범은 컥 소리를 냈다.
“척추 꺾기? 지금 네 힘으로는 안 돼.”
“하나만 확실하게 말해 줘. 우리 누나, 나쁜 사람 아니지?”
그렇지?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신해범은 지금 류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았다. 예의 그 불쌍한 표정. 따귀를 갈겨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마른 등허리를 깔고 앉아 셔츠를 잡아 뜯어 버리고 싶어지는….
신해범은 류진을 때려눕히는 대신 묵묵히 두 번째 지단을 뒤집었다.
“나쁜 건 총통이지. 류연비는 좀 멍청했던 거 같고.”
“뭐야?”
“백조교랑 관련이 없진 않아. 네 누나.”
그건 인정하지? 신해범이 물었다.
류진은 깍지 낀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예전에 권주혁이….”
“그래.”
신이 되려고 했다는 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누나가 정말 사이비 신자였다고 생각해?”
“사이즈 크게 보자. 그래도 류연비인데.”
“무슨 사이즈?”
“최대 교주, 최소 간부급.”
“그래서 우리 누나가 얻는 게 뭔데?”
“사람.”
“사람을 얻으면 신이 돼?”
“정확히는 대중의 인정과 환호를 받는 거지.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으면 출신 성분이 별로여도, 엄청난 부자가 아니라도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자는 필수적으로 하나의 방법을 고르게 된다.
공포로 지배하느냐. 평화로 사랑받느냐.
권일혁 총통은 공포로 국민을 지배했다. 류연비는 어느 쪽이었을까.
신해범은 찬장에서 라면을 꺼냈다. 면을 끓이고 물을 버린 뒤 가루수프와 밀가루를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달걀도 하나 깨서 넣었다.
“뭐 하는 거야?”
“신세계를 보여 주지.”
“으… 맛없어 보여.”
“먹어 보지도 않고?”
“안 먹어 봐도 알아. 누가 라면을 이렇게 해 먹냐?”
“부족하다고 삐치지나 마. 너랑 엄승원이 제일 걱정돼.”
“뭐야?!”
류진은 신해범의 오금을 무릎으로 찍으려 했으나,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잽싸게 다리를 피했다. 류진의 무릎은 애꿎은 싱크대와 부딪혔다.
“악!”
“그러게 누가 장난치래.”
“이…!”
류진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현우 형 아버지는 나쁜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신해범은 프라이팬에 새로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올렸다.
“그냥 곽재헌이라고 불러. 고인한테까지 질투하게 만들지 말고.”
“나랑 현우 형 그런 사이 아니야.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당신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나 진짜…!”
“네가 백번 아니라고 말해도, 상대방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어. 죽을 때까지 그래.”
류진은 지금 신해범이 누구 이야길 하고 싶은지 알았다. 하신성과 차모은의 얼굴이 머릿속에 번갈아 떠올랐다.
“어차피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사람은 진짜가 뭐든 간에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어. 그리고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는 제3자의 눈에는 힘 있고 목소리 큰 놈의 주장만 보이지.”
“그렇다고 포기해?”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계속 말해야 해. 아무도 안 믿어 줘도. 계속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닿을 거야. 닿게 돼 있어.”
“그래?”
“그래.”
“나는 아무도 안 믿어 주는 소리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미련한 짓은 안 해. 날 미치게 한 새끼가 들어갈 무덤을 파 놓고 기다리지.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내가 밀어서 처넣기도 전에 제 발에 걸려서 굴러떨어지더라.”
“…굴러떨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뭔가 느끼는 게 있었겠지.”
신해범은 피식 웃었지만, 류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기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차모은을 미워하면, 또 곽재헌을 원망하면, 언젠가 죽었을 때 곽현우를 볼 낯이 없었다.
“현우 형 질투할 필요 없어. 애초에 기준이 다른걸.”
“오, 그래?”
“그럼. 친구랑 부하랑 어떻게 같아?”
신해범의 기대는 무참히 꺾였다.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닭대가리한테 뭘 바라.”
“뭐야?”
“아냐, 아무것도.”
“방금 나한테 닭대가리라고 했잖아.”
“아닙니다, 각하. 제가 후두부에 총을 맞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망발을.”
“분명히 들었는데….”
신해범은 라면 부침개의 한쪽 면이 바싹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능숙하게 뒤집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가장자리가 탔을 것이다. 이 몇 초로 실력 있는 베테랑과 아마추어가 갈린다.
노릇노릇 부침개가 맛있게 익었다. 신해범은 가스 불을 껐다. 완성된 라면 부침개 가장자리를 한 입 크기로 뜯어내자 류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해범은 부침개를 어깨 너머로 내밀었다.
“먹어 봐.”
“응.”
까치발을 세워 부침개를 받아먹은 류진이 음… 소리를 냈다.
“어때?”
태연하게 질문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맛없다는 소리 들으면 슬플 것 같았다.
“정류진?”
먹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잠깐도 참기 힘들었다. 신해범은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류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맛있어.”
신해범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왜 그래?”
그는 류진의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조그만 병아리가 사랑의 표현 방법을 아는지는 미처 몰랐다.
나는 요리를 하고. 너는 맛있게 먹고.
그러고 나면 나는 배가 불러 누운 네 위로 올라가서….
“아야.”
신해범은 상상에서 깨어났다. 귓바퀴에 따끔한 통증이 있었다.
“뭘 꾸물거려. 사람들 기다리잖아.”
“예, 예.”
그는 프라이팬과 오 인분의 나무젓가락을 챙겼다. 그러면서 방금 류진에게 깨물린 귀를 살짝 쓰다듬었다.
라면 부침개와 달걀부침, 사과로만 준비된 조촐한 간식상이었다. 인원수와 먹성을 고려해 넉넉히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자기 몫의 달걀부침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놈들은 젓가락을 치켜들고 중앙의 프라이팬으로 달려들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라면 부침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윤태금은 프라이팬 가장자리에 남은 부스러기까지 집어 먹었다.
“이거 정말 괜찮은데요. 팔아도 되겠습니다.”
아마추어 요리사에게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해범은 씩 웃었다.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먹는 이들의 젓가락질 속도를 보면 알았다.
신해범은 자기 몫의 지단을 한 입 크기로 찢었다. 바로 옆에 앉은 류진의 접시에 무심하게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맞은편에 앉은 윤태금이 식사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젓가락을 잡는 방법부터 달랐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딱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고 난 뒤에야 말을 하든지 물을 마시든지 했다.
의식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습관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저마다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당첨된 이는 엄승원이었다. 성재경이 거들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윤태금은 테이블에 흩어져 있던 설계도 사본을 주섬주섬 모아 정리했다.
신해범은 윤태금의 등 뒤로 다가갔다.
“이봐.”
“으악!”
“뭘 그렇게 놀라?”
“이, 인기척 좀 내고 다니십시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간 건 소파에 웅크려 자는 류진을 깨우기 싫어서였다.
신해범은 윤태금이 가진 서류 가방을 응시했다. 흑갈색 소가죽에 박음질이 튼튼했다. 손잡이는 윤이 나는 뱀부, 잠금장치에는 스모키 쿼츠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신해범의 시선을 느낀 윤태금이 씩 웃었다.
“이것 말입니까?”
그는 가방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누님께서 맞춰 주셨습니다.”
“윤금강?”
“예. 그 뭐라더라, 아! 가방, 신발, 시계. 비즈니스맨은 이 세 개만 번듯하게 갖추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답니다.”
어디서도 꿀리지 않는 비즈니스맨이 잠들어 있는 류진을 보았다.
“잘 자네요.”
“밤에 잠을 설치니까.”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긴 하네요. 시신 부검은 제 일이 아니어서 무심했는데… 병원은 알아보셨습니까?”
“그렇게 유난 떨 필요 없어. 충격 때문에 그런 거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거다.”
“예?”
윤태금은 당황했지만, 신해범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최유신이 왜 골치 아파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해범이 소파 등받이에 걸쳐진 담요를 가지고 다가가 정류진의 어깨부터 다리까지 덮어 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되네….”
“식사 예절은 어디서 배웠나?”
“예? 아, 뭐 따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그래?”
“예.”
“자네가 같이 밥 먹으면서 식사 예절 좀 가르쳐 줘.”
윤태금은 신해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잠든 류진에게 꽂혀 있었다.
“혼자 밥 먹기 싫어해.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 진 중령과는 사이가 나쁘고, 기 소령은 잘 따르지만 그쪽은 일이 많아서 바빠.”
“준장님이 계시잖습니까?”
“내가 당분간 자리를 비워.”
윤태금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출장이라도 가십니까?”
“출장이라.”
신해범은 류진의 하얀 이마를 응시했다. 흐트러진 앞머리, 결 고운 까만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장승희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그와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소파에 앉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최근 들어서 안 좋은 버릇이 도지고 있었다. 만약을 생각하는 버릇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그랬다면? 이랬다면? 지금보다 결과가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신해범은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자세를 바꾸면 생각이 환기된다.
만약을 상상하는 일은 생산성이 없었다. 시간을 돌릴 방법도 없을뿐더러, 결국 후회하게 되니까. 후회하기 전에 두뇌 가동을 멈추고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게다가….
함풍 2도 사태로 조사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장승희의 덕을 본 부분이 많다는 건 신해범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주방에서 큰소리가 났다. 사색이 된 엄승원이 헐레벌떡 거실로 뛰어나왔다. 바퀴벌레가 나왔단다. 그는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발견됐다는 건 집 전체가 바퀴벌레에 정복당한 증거라는 말을 늘어놓으며 지금 당장 살충제와 덫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젖은 손을 요란하게 움직이는 탓에 신해범의 얼굴에까지 물이 튀었다.
윤태금이 혀를 찼다.
“밖에서 들어온 거겠죠. 소란은.”
“확신하십니까?!”
신해범의 대답은 차가웠다.
“확신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 묻어났다.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엄승원이 입을 다물었다. 부엌에서 성재경이 벌레를 잡았다고 소리쳤다.
윤태금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렸다.
“주택이라 어쩔 수 없어요. 오면서 보니까 이 주변에 나무가 많더라고요. 경치는 참 좋은데 벌레가 문제죠. 저 독일 살 때도 집 뒤가 숲이었는데….”
윤태금은 말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뭔가?”
“준장님 복귀 안 하십니까?”
신해범은 잠자는 류진을 바라봤다. 윤태금이 머뭇거렸다.
“왜?”
“제가 차를 안 가져와서… 아이, 제 사정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신해범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달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윤태금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질척거리면 사람 추해진다.
“아닙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성재경이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윤태금을 그를 지나쳐 현관으로 갔다. 그때 성재경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가까운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성재경은 윤태금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신해범의 허락부터 구했다.
“그래. 중사도 바람 쐬고 오지.”
뭐야? 무슨 일이야? 윤태금은 슬쩍 웃었다. 그러나 성재경은 무표정으로 헐렁하게 풀어 둔 군화 끈을 조여 맸다. 윤태금은 현관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성재경의 동그란 뒤통수를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줄곧 기우희 소령을 흠모했다지?
윤태금은 이마를 긁적였다. 성재경 중사는 괜한 오해를 했다.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해명하고 싶지는 않은 게, 쿨하지 못하게 꿍한 모습이 웃겨서. 저런 사람에겐 해명해 봤자 소용도 없었다. 어차피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을 테니까. 본인이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게 나았다.
그게 언제가 됐든,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
윤태금의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다.
엄승원은 2층 방에 자기가 쓰는 토퍼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류진을 거기서 재워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냥 두지요. 자는 사람 깨우면 짜증 내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죠.”
“가서 쉬셔도 됩니다. 저는 잠깐 앉았다 가겠습니다.”
“아, 예. 그럼….”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2층으로 올라갔다. 신해범은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잠자는 류진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햇살이 거실로 쏟아졌다. 소파에 웅크린 류진의 실루엣이 반짝였다. 신해범은 류진에게 다가갔다.
목까지 단추를 채운 제복 셔츠가 답답해 보여 하나를 풀어 주었다. 그러자 류진이 인상을 찌푸리고 웅얼거렸다.
하지 마. 라고 한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라 손을 떼거나 미안해할 터였다. 그러나 신해범은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고 옷깃을 젖혀 드러난 피부를 만졌다.
속살을 더듬던 손가락에 쇄골이 걸렸다.
신해범은 마른침을 삼켰다.
정류진의 옷을 벗기고 싶었다. 하얗게 드러난 맨가슴에 입술을 묻고 싶었다. 젖꼭지를 빨고, 옆구리와 배를 어루만지다가,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싶었다. 체모를 모조리 밀어 버려 부들부들해진 성기를 주무르고 싶었다. 입에 넣고 싶었다. 귀두를 혀로 굴리며 쭉쭉 빨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성기를 빨다 엉덩이 골 사이로 혀를 미끄러뜨리면 싫다고 울겠지. 좆은 발딱 세운 채 새빨개진 얼굴로 흐느끼며, 싫어어….
상상만으로도 침이 고였다.
할까?
엄승원은 2층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행여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방에서 나와 본다 해도, 정류진을 구해 주기보다 눈 감고 귀 막고 ‘난 아무것도 못 봤다. 못 봤다’ 자기 세뇌할 인간이었다.
문제는 성재경이 돌아올 타이밍인데….
“뭐 하냐.”
“음?”
“당신 지금 뭐 하냐고.”
“아.”
신해범은 류진의 셔츠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뻔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강간할까 해서.”
주먹이 날아왔다.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으악.”
쓰러진 신해범의 몸 위로 주먹질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미친놈아, 언제 정신 차릴래!”
“조용. 위층에 엄 기자 있다.”
“그래. 가서 기사 써 달라고 해야겠다.”
류진이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댔다.
“내가 다 말해야겠어. 당신이 얼마나 미친 변태 새낀지.”
“부하를 팔아먹다니.”
“이럴 때만…!”
신해범은 류진을 끌어안았다.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버둥거리는 류진을 끌고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화장실이었다. 신해범은 저항하는 류진을 욕조로 밀어 넣었다.
“뭐야! 비켜!”
그는 욕조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류진의 머리를 꾹 눌러 앉히고 샤워기를 낚아채 흔들었다. 찬물이 쏟아졌다.
“아악!”
“이제 못 나가겠지.”
“뭐 하는 짓이야!”
류진은 신해범에게 소리쳤다. 이 대책 없는 미친놈아. 이러고 어떻게 집에 가라고…!
집?
풍기대가 내 집인가?
“왜 갑자기 조용해지냐.”
류진은 무릎을 가슴께로 모아 안았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당신 때문이야.”
“뭐?”
“다 당신 때문이야!”
손으로 물을 움켜쥐어 확 뿌렸다. 신해범의 바지가 젖었다.
그는 씩, 하고 웃었다.
“그래. 잠이 확 깨지?”
“어떻게, 사람이 잠깐이라도 편하게 있는 꼴을 못 보냐?!”
“그러게. 사람이 이렇게 못돼 먹기도 쉽지 않은데.”
젖었으니 옷을 벗으라는 말에 류진은 고개를 홱 돌렸다.
“좋게 말할 때 꺼져라.”
“안 꺼지면?”
바가지가 날아왔다. 마른 때수건이 날아왔다. 아직 새것인 비누도 날아왔다. 신해범은 으악, 으악, 소리를 지르며 요리조리 피했다. 그럴수록 류진은 부아가 치밀어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집어 던졌다.
“그렇게 기운 빼면 밤에 잠은 잘 자겠다.”
“그걸 말이라고!”
“걱정이야. 네가 잠 설치는 거.”
물이 조금씩 온수로 바뀌었다. 가까이 다가온 신해범이 손을 뻗어 욕조 마개를 닫았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따끈하게 목욕하고 나면 잠이 잘 올 텐데.”
“…….”
“복귀하는 길에 호두빵도 사 줄 건데.”
류진은 신해범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젖은 제복을 벗었다.
성재경의 검은 지프는 갓길에 섰다. 버스 정류장에 체육복 차림의 남학생 한 무리가 있었다. 스포츠 백을 하나씩 멘 걸 보아하니 인근 고등학교 운동부인 모양이었다. 아직 고교생들이 하교할 시간이 아닌데. 외부 연습이라도 다녀오나?
성재경은 한 학생의 열린 가방에서 굴러떨어지기 직전인 야구 배트를 보았다. 길쭉한 손잡이에 거무스름한 손때가 선명했다.
윤태금이 내리기 전, 성재경이 불쑥 질문했다.
“우리 일에 낀 이유가 뭐지?”
“어려운 질문이군요. 또 많이 늦었고요.”
“늦었다니?”
“인제 와서, 라는 소립니다.”
윤태금은 손잡이를 놓고 바로 앉았다.
“계속 말 없으시기에 그런가 보다, 생각하시는 줄 알았죠. 첫날 브리핑을 준비했었는데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지금은 내용도 잊어버렸네요.”
“그렇게 얼버무리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아?”
“성재경 중사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저도 이 나라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동분자라고?”
“그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좀 불편하네요. 그저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 거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전쟁에는 무기가 필요하지.”
국가 간의 충돌이든, 국경선 안에서의 내전이든.
윤태금이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저를 장사치로 보시는 거죠?”
“우리 전투차 설계도를 원하나?”
“설계도가 있어 봤자 만들 여건이 안 되면 그림의 떡입니다.”
“너희 본사는 외국에 있잖아.”
“맞습니다. 정수헌에서 일했던 것도 맞고, 풍기대 전투 차량에 관심 무지하게 많은 것도 맞습니다. 그래도 조국의 군사 기술을 외국에 팔아넘길 만큼 막 나가진 않습니다.”
윤태금이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애초에 누님께선 제가 엔지니어 되는 일을 반대하셨습니다. 저를 회사로 불러들인 것도 골드 앤 아이언에서 일하면서 보석 쪽으로 관심을 돌려 보기 위해서였어요.”
“보석 회사는 눈속임 아닌가?”
“로비 목적으로 설립했다고요?”
윤태금은 속으로 웃었다. 성재경이 생각보다 똑똑했다. 힘쓰고, 큰소리만 낼 줄 아는 군인인 줄 알았는데.
“…그런 목적이 전혀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말입니다, 무기와 보석에는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높으신 분들이 사다 쟁이죠.”
“…….”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바다로 나가야 하는 법입니다. 폭풍우를 두려워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윤태금은 서류 가방 손잡이를 꽉 잡았다.
“외국에선 아무리 잘나가도 이방인입니다. 같은 유학생 그룹도 선진국 출신, 후진국 출신으로 갈려요. 차별의 양상이 옛날이랑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지배층은 오히려 피씨함을 증명하려고 야단입니다. 요샌 오히려 노예들이 계급 나누기에 혈안이에요.”
“왜?”
“이방인 그룹에서 큰 파이를 차지하면, 그러니까 피지배층의 대표 격이 되면 지배 계층에 한자리 낄 수 있거든요.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요즘 지배 계층은 피씨함을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다고요.”
성재경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윤태금도 그 사실을 아는지 더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직접 겪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
“나라가 잘살아야 해요. 나라가.”
윤태금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막 도착한 버스에 남학생들이 우르르 타고 있었다.
젖은 제복을 건조기에 집어넣고 나오는 길에, 신해범은 엄승원이 쓰는 방의 문을 슬쩍 열어 보았다. 그는 노트북을 켜 놓은 채 책상에 엎드려서 잠들었다. 새하얀 워드 창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자의 역할은 이야기를 써서 알리는 일이지, 만드는 게 아니니까.
신해범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큼지막한 타월로 몸을 감싼 류진이 볕이 드는 창가에 앉았다. 신해범은 잔뜩 구겨진 상태로 건조기에 들어 있던 티셔츠를 등 뒤로 숨겼다. 옷에 이름이 적힌 건 아니었지만, 사이즈가 딱 엄승원 옷이었다.
“왔어?”
류진이 몸을 돌렸다.
“뭐 찾았어? 입을 만한 거.”
“아니.”
신해범은 티셔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을 사용해 소파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류진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냥 볕에 말려.”
“옷 찾아 준다며.”
“나도 못 갈아입었어.”
신해범의 머리카락과 제복 소매, 바짓단이 축축했다. 류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게 왜 자꾸 장난을 쳐.”
“장난 아니고 진심이었는데.”
“진짜 그만 좀 해!”
신해범이 킥킥거리며 양말을 벗어 던졌다. 드러난 맨발이 희다. 류진은 그의 발등에 두드러진 푸른 핏줄을 바라보았다.
“발은 깨끗하네.”
“깨끗하게 씻으니까.”
류진은 신해범의 발을 만져 보았다. 정말인지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의 발을 잡은 순간, 류진은 발바닥 전체가 거칠고 딱딱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람 피부가 아니라 코뿔소 가죽 같았다.
“발바닥이 왜 이래? 너무 딱딱해.”
“육체노동자가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신해범은 뒤통수에 손깍지를 끼고 드러누웠다. 길게 뻗은 몸 위로 오후 햇살이 쏟아졌다.
“우리 늦는 거 아니야?”
“아직 괜찮아. 치우도 있고 기 소령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래도 당신이 있는 게….”
“내가 없으면 그 둘한테 의지해.”
“왜 감옥에 가는데?”
“…….”
“얼마나? 오래 있어? 지난번처럼 조사받는 거야? 권세혁 다친 거 때문이야?”
“…….”
“아니면.”
류진은 신해범의 감은 눈꺼풀을 응시했다.
“총통 부인 때문이야?”
옆으로 돌아누운 신해범이 류진의 몸을 감싼 타월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장진 일로 조사받는 거야. 지난번 함풍 때처럼. 그런데 이번엔 스케일이 조금 더 크잖아. 아무렴 MVP 다리에 총구멍이 났는데, 권이 나를 가만두겠냐?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묻겠지.”
“왜 매번 당신이 책임을 지는데?”
“중간이라서 그래.”
신해범은 씩 웃었다.
“확실히 해야지. 우리 대장군 각하 쪽으로 피해 안 가게.”
그는 자진 출두할 생각이었다. 권세혁이 복귀하기 전에 사건을 끝내고 싶었다. 그와 사전에 말을 맞춰 두긴 했지만, 신해범이 생각하기에 권세혁은 믿을 만한 동업자가 아니었다. 거짓말을 못 하고 쉽게 흥분했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권주혁이 조카를 엄하게 취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취조라기보다는 사정 청취에 가까운 절차였다. 이미 강인우의 처형이 결정된 마당에 부상 입은 권세혁을 불러다 앉혀 놓고 들볶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해범은 막판까지 주의를 늦추지 않았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두 사람의 진술이 어긋나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차라리 권세혁은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나았다.
권세혁이 말하지 않아도 되게끔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나 커버 쳐 주려고?”
신해범은 류진의 발목을 더듬었다. 도드라진 복사뼈가 만져졌다.
“장두현이랑 한 약속도 있고.”
“무슨 약속?”
전투 잠수함을 받기로 했다. 철갑상어 일을 입 다무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장승희와의 불륜이 발각될 경우, 신해범은 혼자서 그 책임을 뒤집어써야 했다. 장승희는 신분 상승을 노린 남자의 희생양으로 명예가 더럽혀진 불쌍한 여자가 되겠지.
정류진에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해범은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우리 꼬꼬가 그렇게, 모든 걸 자세히 알아야 할까? 그냥 앉아서 떡이나 받아먹으면 안 될까?”
신해범의 손은 어느새 류진의 무릎까지 올라왔다. 류진은 슬금슬금 허벅지로 뻗쳐 오는 손을 뿌리쳤다.
“안 돼.”
“…….”
“그럴 거면 애초에 힘든 내색을 말든가.”
“내가 언제 힘들어했다고?”
“그 사람 만난 다음에, 꼭 나한테 화풀이하잖아.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거 아냐?”
신해범이 웃었다.
“화풀이로 느껴져?”
“그럼 아니냐?”
“우리 꼬꼬 냄새가 좋아서 그런 건데.”
“지랄.”
신해범은 눈을 깜박거렸다. 만약 누군가가 권주혁의 뒤치다꺼리와 장승희의 명품 가방 노릇 중 어느 쪽이 더 고되냐고 묻는다면, 무슨 그따위 질문을 하느냐고 명치를 때려 주겠다. 그만큼 고르기 어려웠다.
그래도 차이점은 있었다. 권주혁 앞에서는 자존심을 굽히고 모욕을 견디면 되었다. 장승희를 대할 때는 총통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되 그가 원하는 남자로서의 매력도 발휘해야 했다. 정중하되 비굴하지 않아야 했다. 그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하니 현기증이 났다. 신해범은 자신의 이마를 더듬는 류진의 손가락 감촉을 느꼈다.
“류진아.”
“왜.”
“그 여자,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지킬 게 많아서 그래. 신해범이 중얼거렸다.
“가진 걸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 사람이 추해져.”
“…….”
“근데 그런 사람이 보호자면 인생이 진짜 편하다.”
권세혁과 그 동생을 보면 되었다. 장두현과 장승희가 추한 덕분에 형제는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다.
“유형은 좀 다르지만, 강인혜도 비슷한 케이스고.”
“난 당신이 강인우처럼 되는 거 싫어.”
“만약에 류연비가 살아 있었으면 너도 그랬을지 몰라. 누군가의 그늘 밑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당신이 누나처럼 되는 건 더 싫어!”
류진이 성을 냈다. 신해범은 씩씩거리는 류진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화내지 마.”
“왜 지금 그런 소리를 해, 불길하게?”
“나는 안 죽어. 우리 대장군 각하를 두고 벌써 나자빠지면 안 되지. 그런데, 정류진 대장군 각하는 강하고 멋진 사람 맞는데, 우리 꼬꼬는 마음이 좆나 약하잖아.”
“나는 약하지 않아.”
류진은 손등으로 눈 밑을 닦았다.
“나는 약하지 않다고.”
“MVP가 널 약하게 만들 거야.”
“걔가 왜?”
“아직 널 좋아하거든.”
권세혁은 정류진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반정부 단체 조직원이었다는 사실조차 묻어 줄 만큼, 스무 살 열혈 청년의 사랑은 뜨겁게 타올랐다. 신해범은 그 불에 정류진이 녹아 버릴까 봐 두려웠다. 정류진은 마음이 약하니까. 자기 때문에 총까지 맞은 권세혁이 애걸복걸하면 어쩔 수 없이 뒤돌아볼 테니까.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 류진이 말했다.
“당신은 나를 못 믿는 거네.”
“그런 뜻이 아니야. 꼬꼬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른쪽 어깨가 지끈해, 신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류진의 얼굴이 보였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MVP가 전략을 바꿀 것 같아서 그래.”
“무슨 전략?”
“그건 나도 몰라.”
신해범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도 하나만큼은 확신했다.
“네가 돌아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접근할 거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말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빨리 와서 나를 지켜 줘야…!”
“내가 늦을지도 모르니까 치우랑 기 소령한테 의지하라고. 곽현우 때문에 감정은 안 좋겠지만, 풍기대에서는 그 둘이 네가 전적으로 따라도 괜찮은 사람이야.”
류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신해범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애초에, 모든 걸 완벽하게 계산하는 신해범이 ‘늦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윤태금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고. 응?”
“…….”
“걔한테는 네가 배울 수 있는 것만 배워. 특히 식사 예절. 내가 입이 닳게 얘기하지? 어디 가서 무시 안 당하려면….”
“짜증 나! 잔소리 좀 그만해! 누가 들으면 내가 젓가락질도 못 하는 줄 알겠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젓는 류진을 보며 신해범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풍기대로 복귀하는 길에 따끈따끈한 호두빵을 세 봉지나 사 주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운전하는 동안 앉은자리에서 한 봉지를 해치웠다. 길거리 간식은 왜 먹으면 먹을수록 당길까? 딱히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먹기를 멈출 수 없었다.
신해범이 빵을 한 조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은 레인지로버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선 다음에야 알았다. 류진은 조심스레 호두빵 봉지를 내밀었다.
“먹을래?”
“빨리도 권한다.”
“당신 운전 중이었잖아. 사고 날까 봐 그랬지.”
“운전을 손으로 하지, 입으로 하냐?”
“먹고 싶었으면 달라고 말을 했어야지!”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 실망입니다, 각하.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인 줄 미처 몰랐네요.”
신해범은 핸들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버렸다. 당황한 류진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직 많이 남았어.”
“됐습니다. 각하 많이 드십시오.”
“진짜 이럴 거야?”
이제 신해범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 당신 투정 받아 주는 사람 아니다.”
“…….”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엄포를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신해범은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푸우욱, 푸우욱, 쉬어 댔다. 일부러 저러는 티가 많이 났다.
“아, 좀!”
단단한 어깨를 붙잡는 순간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가 조수석으로 달려들었다. 어느새 안전벨트가 풀려 있었다.
류진은 엉겁결에 차 문을 열려고 했다. 눈앞에서 짐승이 달려드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었다. 허둥지둥 문을 열고 내리려는 류진의 목덜미를 신해범의 오른손이 움켜잡았다.
“이거 놔!”
“어딜 가.”
뺨에 입술이 닿았다. 류진은 씩씩거리며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너무해.”
신해범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더러워?”
“당신이 너무해! 아까부터 계속 장난이나 치고!”
“꼬꼬야아.”
“하나도 안 귀여워! 꼴 보기 싫으니까 좀… 꺼져! 빵 망가져!”
있는 힘껏 버둥거렸으나 신해범은 떨어지지 않았다. 류진은 그의 단단한 팔에 끌어안긴 채 호두빵이 뭉개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우리 꼬꼬.”
이마를 더듬던 손가락이 관자놀이 흉터를 만졌다. 류진은 목을 움츠렸다. 눈꺼풀과 콧등에 신해범의 숨이 닿아서 간지러웠다.
“볼수록 더 예뻐지는 거 같아.”
“헛소리 그만해라.”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셔츠 단추에 손만 대 봐라. 다친 사람이고 뭐고 얼굴에 바로….
류진은 신해범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대신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하지 마.”
“내가 뭘 할 줄 알고?”
“안 봐도 빤하지. 내가 한두 번 당하냐.”
신해범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사람을 완전히 망나니 취급하는군.”
“자업자득이거든? 아무튼 하지 마! 진짜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이럴 수가. 너무 무서워.”
“지금 대낮이야. 누구 내려오기 전에 12층 가야 해.”
“그래서 일부러 구석에 댔잖아.”
“아, 좀! 괜히 사람들 눈에 띄어서 곤란해지고 싶어?”
“이렇게 조심성이 넘치면서 새벽에 잘도 돌아다녔다.”
“그거야 그때는… 사, 사람이 없으니까!”
“없기는? 야간 근무조 일하는데. 밖에 경비병도 있고.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최 대위, 밤에 수문장 노릇 하느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는데 네 눈에는 안 보이냐? 너 때문에 CCTV 몇 개는 작동도 안 돼, 지금. 점검 핑계로 껐어.”
신해범은 당황하는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대장군 각하는 용감해서 귀신 같은 건 안 무섭지. 눈앞에 강시가 나타나도 주먹으로 정수리를 찍어 버리지 않을까.”
“당연하지.”
“그치?”
류진은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난 당신이 귀신보다 더 무서워.”
“네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짓눌린 호두빵이 기어코 터져 버렸다. 기름종이로 만든 봉투에 크림이 고였다. 설탕을 듬뿍 넣어서 볶은 견과류 냄새. 레인지로버 안이 단내로 가득 찼다.
“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해범의 혀가 파고들었다. 류진은 눈을 감았다.
“나를 믿어.”
낮은 목소리가 아득했다.
“너나 나나, 인생 끝에서 다시 시작한 새끼들이야.”
류진은 그가 필사적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버텼다. 호두빵이 뭉개지든 말든, 신해범의 팔 힘에 숨이 막히든 말든, 눈을 감고 위에서 짓누르는 무게를 견뎌 냈다.
“…….”
머뭇거리다 신해범의 등을 안았다.
“오래 안 걸려. 약속해. 그러니까 너도, 남들이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류진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달콤한 호두빵 냄새에 가려진 신해범의 냄새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 그런 거 잘해.”
신해범의 옷이 구겨졌다.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었다.
“나 류연비 동생이잖아. 남들이 뭐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 나 그런 거 엄청 잘해.”
신해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참한데 행복했다. 그는 자기 몸속 혈관에 흐르는 피가 류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뭡니까?”
“호두빵. 벌써 겨울 간식이 나오더군.”
“예….”
“나야 뭐 길거리 음식에 관심 없어도, 우리 꼬꼬가 자네랑, 11층 직원들 꼭 갖다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기에.”
“…….”
기우희는 비닐봉지 속을 들여다보았다. 정류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호두빵이라고 할 수 없었다. 호두빵이었던 음식물 쓰레기였다. 이런 걸 다른 부관에게 받았다면 당장에 요절을 냈을 것이다.
신해범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기우희는 냉장고를 뒤졌다. 하채경과 성재경이 경쟁하듯 냉장고를 채워 둔 탓에 종류가 많았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걸 꺼내 보니 달콤한 매실 음료였다. 신해범의 취향은 아니었다.
꺼낸 음료수를 도로 넣으려는데 신해범이 킥킥 웃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블랙이 다 떨어졌습니다.”
“내가 커피 마시고 싶었으면 카페테리아를 갔겠지.”
기우희는 냉장고를 닫았다. 500ml 생수 한 병을 신해범의 앞에 턱, 내려놓았다.
“옛날엔 자네가 준 거 입에도 안 댔는데.”
생수병을 든 신해범이 빙글빙글 웃었다.
“치우는 말이야, 자네가 사람만 안 죽이고 전역했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땐 나도 상상 못 했지.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
신해범은 망설임 없이 물을 마셨다. 기우희는 그가 빈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미현이 최근에 새로운 취미가 생겼습니다.”
“무슨 취미?”
“국궁이랍니다.”
기우희가 활시위 당기는 포즈를 취했다.
“책상에서 펜이나 굴리던 여자가 줄은 당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기 소령은 유미현을 너무 무시하는 거 같아.”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면 차라리 사격을 배우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자네가 가르쳐 주려고?”
신해범의 앙다문 입술이 실룩샐룩했다.
“대장님.”
“미안해. 기 소령. 내가 요새 영계를 삶아 먹어서 그런가,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네.”
신해범은 상상해 버렸다. 유미현과 류진이 사격 연습장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기우희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탕! 탕!
유미현은 사랑해 마지않는 하이힐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신발을 신고는 제대로 총을 쏠 수 없으니까.
“우리 사격장, 모의 훈련장으로 옮기는 계획은 검토 중인가?”
고질적인 소음 문제였다. 최고 레벨의 방음 시설을 설치했으나, 격발 때마다 발생하는 음파가 조금씩이지만 건물에 영향을 준다는 전문가의 조언이 있었다. 마침 실외 사격장의 필요성도 느끼던 참이었다. 유미현은 시설 충원에 충분한 돈을 흔쾌히 내놓을 것이다. 풍기 교육대원들의 환심을 사고 권주혁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기우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 있는 사격장을 바로 폐쇄하면 대원들의 훈련에도, 개인 연습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그러니 기존 사격장은 그대로 개방하되 이용 시간에 제한을 두고 모의 훈련장에 더 큰 최신식 시설을 마련하는 방안이 좋겠습니다. 훈련장 시설이 완공되면 기존 사격장은 저절로 쓸모가 없어질 테니 그때 정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유미현은 뭐라고 하나?”
“군사 훈련에 필요하다면 진행하라는 주의입니다.”
유미현의 장점은 아랫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과감한 투자에 기꺼이 도전한다는 데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하성록과 손잡는다는 무모한 계획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금방 정신 차렸으니 된 건가?
“대장님.”
“음?”
“아무래도 자진 출두보다는 헌병대 측의 소환을 기다리는 게… 지금 별다른 얘기가 없는데 부지깽이로 들쑤실 필요 없다고 봅니다.”
“요새 기 소령 마음이 복잡한가 보군. 약한 소릴 다 하고.”
“…….”
신해범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아. 선생님이 부르기 전에 손들고 나가서 손바닥 내미는 게 덜 아파. 여기 눌러앉아 있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잖나. 지금까지는 부상 핑계로 시간 끌었지만, 막말로 권이 내가 이뻐서 봐줬을까? 총통 부인 눈치 봤지.”
장승희에게는 권세혁의 부재로 인한 불안감을 달래 줄 대상이 필요했다. 자기 뜻에 거스르지 않고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도 확실히 의지가 되는 상대.
나라에서 제일가는 여성 권력자임에도 불구, 왕자들의 양육에만 몰두해 온 장승희에게는 마음 터놓을 친구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내연남에게 더 깊이, 빨리,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소령.”
신해범의 목소리가 나직했다.
“인제 그만 성재경이랑 얘기해 봐.”
기우희는 침묵했다.
“하채경도 좀 더 여유를 갖는 게 좋아.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하사가 능력 되고 의욕 있는 건 알겠는데, 너무 빨리 달리면 에너지가 금방 소진돼. 자네도 잘 알잖아.”
“…….”
“하채경 쓰다 버릴 거야? 아니잖아. 잘 키울 거면 아껴야지. 몸이든 마음이든, 금방 축나지 않게.”
기우희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몸을 앞으로 내민 신해범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되는 법이야. 자네처럼.”
“왜 대장님이 전부 떠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 때는? 난 자네한테 몇 번이나 살해당할 뻔했어. 그때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어?”
신해범은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꾹 누르기까지 했다.
“내가 사람 하나 제대로 만들었어.”
“대장님.”
“아주 뿌듯해. 기특해. 자랑스러워.”
기우희는 웃어 버렸다. 신해범의 목소리가 돌연 차분해졌다.
“난 자네가 자랑스럽다. 기우희 소령.”
“예.”
“자네가 있어서 나는 소환되는 게 아니라 내 발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수 있어. 초장부터 헌병대 놈들 기를 팍 꺾어 놓을 수 있다고. 다 자네 덕분이야.”
한동안 말없이 있던 기우희가 말했다.
“정 이병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미현의 마음을 살 만하겠나?”
“류연비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솔직히, 정류진이 여자아이였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래도 정 이병을 내치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어리고 성질도 순하니 고분고분한 모습 보여 주면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유미현이 지켜 줘야 해. 나는 아직 권 앞에서 쪽을 못 써.”
기우희는 신해범이 그렇게 말함에 안심했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낮추는 이유는, 기꺼이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이거.”
신해범은 설계도 사본이 든 USB를 건넸다.
“유미현에게 전달해.”
“예.”
“자세한 얘기는 윤태금에게 듣고. 성 중사도 알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전문가 설명을 듣는 게 이해가 쉽겠지.”
“예.”
“질문 있나?”
“연지동이 말하길, 강인혜가 친부의 영구 수감을 바란다고 합니다.”
신해범은 웃음을 흘렸다. 사형이 아니라 영구 수감.
“그래도 아버지라고.”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었다. 이미 사형 날짜가 정해졌다. 강인혜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마지막까지 희망을 거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어리긴 어린 모양이었다.
“유미현은 불효녀를 더 좋아하는데. 그치?”
기우희가 픽 웃었다.
“현실은 비정한 법입니다.”
“그렇게 어른 되는 거지. 다들.”
강인우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강인혜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원한다고 전부 갖거나 이룰 수 없다는 것. 어리고 힘이 약하면 약탈당하거나, 죽임당하거나, 남이 주는 선택지에서 그나마 나은 걸 고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모욕의 세월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선택지를 받는 쪽에서 내는 쪽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아무나 해내는 일이 아니지만.
신해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기우희가 따라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가 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신해범은 부관이 따라오는 걸 막지 않았다. 기우희 한 사람의 배웅 정도는 받으면서 가고 싶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려고 했으나, 기우희는 부득불 1층에서 내려야 한다고 우겼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운전병 노릇 할 생각 말고, 자네 일 해.”
“제가 모셔야겠습니다.”
“왜 갑자기 고집을 부리지?”
“운전대를 잡으면 하늘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못 이기는 척 끌려 나왔다. 기우희의 흰 지프에 올라타기 전, 신해범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확히는 풍기 교육대 본관 12층을 올려다보았다.
정류진이 있는 곳.
보이지 않았지만 알았다. 지금 정류진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신해범은 한 손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이 아프도록 새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견고하게 선 12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것은 신해준이 희생한 대가였다. 그 자리를 차지한 신해범이 피와 고름을 짜내고, 뼈를 깎아서 쌓은 바리케이드였다.
그 꼭대기에 정류진을 올려놓았다.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해범은 빙그레 웃었다.
새파란 가을 하늘이, 거대한 12층 건물이, 정류진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1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