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인기척에 뒤돌아보니 패스트푸드점의 종이 쇼핑백을 든 진치우가 서 있었다.
“자살할 거면 딴 데 찾아봐. 사내 괴롭힘 때문에 죽는 거 아니라는 유서 써 놓고.”
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 면상 좀 봐. 자살 시도 3초 전이야.”
진치우는 자기 몫의 콜라를 꺼낸 뒤, 쇼핑백을 류진에게 떠안겼다.
“처먹어.”
“됐어. 배 안 고파.”
“개소리하지 말고 줄 때 처먹어. 애새끼가 안 어울리게 청승이야.”
“진짜야. 나 방금 호두빵 먹었어.”
빨대를 입에 물던 진치우가 꽥 소리쳤다.
“어쩐지 아래층에서 냄새가 진동하더라! 니들끼리 다 처먹었냐!”
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목에 핏대 세워 가며 싸울 기운도 없었다. 기우희와 함께 가 버린 신해범이 마음에 걸렸다.
그를 마지막까지 배웅할 수 없었다. 그저 12층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방에 숨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신해범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흔들리지 말라고 했다. 자길 믿으라고도 했다. 신해범은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번에도 약속을 지킬 거라는 데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마음이 불안한 건 별개였다.
얼마나 걸릴까. 많이 다치는 건 아닐까?
흔들리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한 건, 실은 자기가 흔들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신해범도 사람이었다. 다치고 아플 수 있는 사람. 두 번 다시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이것들은 꼭 나만 빼고 지들끼리 맛있는 거 먹어. 아니, 간식을 사 먹었으면 예의상 내 거 몇 개는 남겨 놔야 하는 거 아냐? 어? 요즘 노점상 단속 때문에 길거리 음식 먹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나는 콜라 하나를 사도 지들 생각해서 햄버거에, 커피에,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데 말이야….”
류진은 신해범이 보안경을 챙겨 갔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진치우에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말만 하면 광견병 걸린 개처럼 짖어 대니….
“야.”
“헉!”
광견병 걸린 개가 바로 뒤에 있었다. 류진은 하마터면 꽥 비명을 지를 뻔했다.
“좀…! 기척 좀 내고 다녀!”
“저기서 여기까지 걸어오는데 기척은 무슨. 너야말로 뭘 놀라고 난리냐? 내가 괴물이야? 유난은.”
“악! 왜 때려!”
“좆나 패고 싶게 생겼으니까.”
진치우는 여전히 포악했다. 이마를 얻어맞은 류진이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으나, 그는 가뿐히 피했다.
“펀치에 힘이 하나도 없어.”
“나쁜 새끼! 내가 뭘 어쨌다고!”
“넌 아무것도 안 해도 패고 싶어.”
“신해범 없다고 막 나가냐?!”
“펄펄 뛰는 거 보니까 우울증은 아니네.”
류진은 제멋대로 의자에 앉는 진치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콜라를 단숨에 마신 뒤, 남은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니가 그 새끼랑 좋아지낸다고 나한테 뭐 된 거 아니다.”
류진이 집어 던진 케첩이 진치우의 무릎에 맞고 떨어졌다. 진치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심한 새끼, 했다.
“던질 거면 봉투째로 던지든가.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음식 욕심은 더럽게 많아요.”
“아, 아까우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음식 함부로 버리는 거 아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류진은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기름진 냄새를 맡자 어쩔 수 없이 군침이 돌았다. 배고프지 않은데, 진치우가 사 준 건데,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류진의 손은 이미 햄버거 포장을 벗기고 있었다.
“배 안 고프다며?”
“몰라….”
“진짜 돼지 새끼 아니야? 이거?”
자기도 민망한지 대답하지 못하고 햄버거만 한입 가득 베어 무는 류진을 보며 진치우는 픽 웃었다.
“말라깽이보다는 돼지가 낫나.”
“신해범 얼마나 걸려?”
“글쎄.”
“거기서 정확히 뭐 하는데?”
“조사받겠지.”
“그건 아는데 좀 구체적으로. 조사 과정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류진은 감자튀김을 꺼내면서 말했다.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야 인마! 내가 그놈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세한 것까지 어떻게 알아? 애초에 그놈 대가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내가 이해 못 해.”
“바보에다 무책임해.”
“야!”
“그렇잖아. 신해범 배웅도 안 하고.”
“너는 했냐?”
“난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잖아! 그리고 나랑은, 따로….”
말하는데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따로 얘기했어.”
류진은 신경질적으로 감자튀김을 씹었다. 먹으면서 치즈스틱으로 손을 뻗쳤다. 입에 든 것을 채 삼키기도 전에 음식을 집어넣으니 순식간에 두 뺨이 퉁퉁해졌다. 목이 메고 숨이 막혔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진치우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건 사양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신해범 때문에.
목이 막혀 가슴팍을 두드렸다. 류진은 콜라를 찾아 들었지만 종이컵을 봉한 비닐이 잘 뜯어지지 않았다. 기름 묻은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다.
“저 등신….”
진치우가 다가와 뚜껑을 열어 주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가지가지 해.”
류진은 정신없이 콜라를 마셨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기침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누가 쫓아오냐? 뭔 걸신들린 사람처럼… 으이구. 범 새끼는 이런 거한테 무슨 놈의 테이블 매너를 가르치겠다고.”
햄버거 먹으면서 테이블 매너는 무슨.
튀어나오려던 핀잔은 턱에 흐르는 콜라를 닦아 주는 진치우의 행동에 놀라서 쑥 들어가 버렸다.
“…….”
“뭐. 왜?”
“지금 뭐 하는 거야?”
“엉?”
진치우는 자기가 류진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악! 뭐야! 꺼져!”
냅다 밀쳐졌다. 류진은 먹다 남은 햄버거, 감자튀김, 치즈스틱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컵에서 쏟아진 콜라가 가슴팍을 흠뻑 적셨다.
류진은 대리석 바닥에 쓰러진 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어우 씨. 소름 돋아.”
기가 막혀 진치우를 올려다봤다. 말이 안 나왔다. 사람이 너무나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턱, 막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손이 썩는다. 썩어.”
진치우는 티슈로 자기 손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바닥을 짚은 류진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 개새끼야아!”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 던졌다. 사람을 밀쳐 놓고 뻔뻔하게 뭐? 자기 손이 어쩌고 어째?
류진은 진치우에게 달려들었다. 이판사판이었다. 말려 줄 신해범도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결판이 날 것이다.
“뭐야?!”
“나한테 사과해!”
“뭐라는 거야, 미친년이!”
류진은 진치우와 함께 뒹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생각했다. 이놈과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신해범은 복귀하는 날, 필히 한 사람의 영정 사진과 마주하게 될 거라고!
“야.”
“놔 이거!”
류진은 진치우의 밑에 깔려 씩씩거렸다.
“놓으라고 개새끼야!”
“까불지 마. 넌 나한테 안 돼.”
양손이 머리 위에 고정되었다. 류진은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진치우가 반 박자 빨랐다.
“악!”
뼈 맞는 소리가 났다. 진치우의 딱딱한 무릎에 짓눌린 다리가 아파 류진은 울음을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랑 나랑은 수준이 다르다니까.”
신장이 비슷하고,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체격이라서 방심하기 쉬웠다. 그러나 사실은 류진도 알았다. 제복으로 싸인 진치우의 몸은 돌덩이 같은 근육으로 꽉 잡혀 있었다. 그리고 골밀도만큼은 진치우가 신해범 위일지도 몰랐다.
분해서 눈물이 났다. 절대로 제압당한 팔다리가 아파서는 아니었다.
진치우는 류진이 어깨와 허리를 비틀며 어떻게 해서든 구속에서 빠져나가려는 최후의 저항마저 그만둘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팔딱팔딱 생선 같네.”
“꺼져!”
“…그래, 그만하자. 애새끼 갖고 노는 것도 재미없다.”
순순히 물러난 진치우는 분을 못 이긴 류진이 집어 던진 감자튀김도 잠자코 맞아 주었다.
“바닥이나 치워라.”
“싫어! 나 잘못한 거 없어.”
“애초에 네가 식충이같이 굴지만 않았어도…!”
바닥에 주저앉은 류진이 움찔했다. 주먹을 쳐들었던 진치우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
“야.”
“뭐.”
“나 성격 장애란다.”
“뭐?”
“최유신이 그러더라. 나도 대가리에 문제 있다고. 그냥 성격이 급한 거려니, 다혈질이려니 하고 살았는데 약 먹어야 한대.”
그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너한테 이해해 달란 소리는 아니고. 그냥, 우리 싹 다 제정신 아니고 미친놈들 파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류진은 진치우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니가 꼬리 흔들어 대는 기우희도, 야 따지고 보면 걔가 젤루 미쳤어. 여기선 제일 정상으로 보이는 새끼가 최고 미친놈이야.”
“내가 언제 꼬리를 흔들었어?!”
“형님 충고 새겨들어.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니까.”
“소령님 욕하지 마!”
“들을 생각이 없구만.”
으이구, 소리를 낸 진치우가 류진의 팔뚝을 붙잡아 일으켰다.
“씻고 옷 갈아입어.”
“죽어도 사과 안 하지?”
“아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아주 씨발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근데 너 어디서 씻냐?”
“저기.”
류진은 방 안에 설치된 샤워 부스를 가리켰다. 진치우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좁아터졌네.”
그래도 최근에 설치해서 깨끗했고, 한 사람이 쓰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진치우는 류진을 밀어 넣고 문을 탕 닫았다. 안에서 류진이 낑낑거렸다.
“사람 짐짝 취급하지 마!”
“거 되게 시끄럽네!”
류진의 목소리는 샤워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에 묻혔다. 진치우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부스에 등을 기댔다.
“너 내가 업고 올라온 적 있는 거 모르지. 죽을 때까지 모를 거다.”
신해범의 감기가 오래가는 이유가 바로 저놈이었다. 가뜩이나 장진에서 몸이 상했는데 잠 설쳐 가며 인간 배달부 노릇을 했으니 골골대는 게 당연했다.
최유신의 카드 키로는 12층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했다. 물론 신해범은 한 번도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그놈을 돕는단 말이냐. 내가 아니면 누가….
“절대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야.”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진치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 시원하게 빨아 보려는 찰나.
“나가! 나가서 피워!”
한 손에 젖은 수건, 다른 한 손에는 제복 셔츠를 든 류진이 소리쳤다.
“넌 왜 담배 안 피우냐.”
“별걸, 다… 궁금해하네.”
말하는데 숨이 거칠다. 진치우는 헉헉대는 류진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겨우 그거 하고 힘드냐?”
“안 힘들어…!”
류진은 바닥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진치우였다. 그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어 소매 밖으로 드러난 류진의 팔꿈치를 가리켰다.
“더 굽혀.”
“이, 이렇게?”
“더. 팔꿈치 직각 되게.”
“지금 직각 아니야?”
“아니야.”
진치우는 담배를 문 채 류진에게 다가갔다. 소심하게 벌린 다리를 어깨너비로 넓혀 주고, 지나치게 위로 들린 어깨를 내려 주자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다.
“너 기초 체력 된다며. 어째 버티기도 못 하냐.”
“체력… 돼.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렇지.”
“원래부터 힘없었던 거 같은데.”
“아니야!”
버럭 소리치는데 상체가 푹 쓰러졌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진치우가 쯧쯧, 혀를 찼다.
“아니긴. 딱 봐도 뼈랑 가죽밖에 없구만.”
“아니야. 나 근육… 근육 있어. 많아.”
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약해 보이기 싫어서? 그러기엔 이미 밑천 드러난 지 오래다. 진치우는 부들거리며 일어서는 류진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툭 찼다.
“야야. 하지 마. 너 그러다 관절 깨져.”
“할 수 있어.”
이미 팔에 쥐가 난 게 보였다. 할 수 있다며 부득불 일어나는 건 근성이 아니라 의미 없는 고집이었다. 체력은 꾸준한 운동과 건강한 식단 섭취로 길러지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고강도의 트레이닝을 한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었다.
진치우는 류진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한쪽 팔로도 충분히 일으켜 세울 만큼 몸에 힘이 없었다. 기우희가 왜 군대 체질이 아니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넌 저격수도 못 하겠다. 무거운 거 잔뜩 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야, 너 지금 체중 얼마야?”
류진은 반올림해서 대답했다. 그랬는데도 진치우는 똥 씹은 표정이었다.
“너 안 돼. 십 킬로는 더 찌워야 해.”
엄승원의 체중을 정류진에게 조금 나눠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당사자도 비슷한 소릴 했다.
“엄승원 기자한테 살 좀 나눠 달라고 하면 되겠네.”
“너 엄 돼지 만났냐?”
“오늘 만나고 왔어. 신해범 가기 전에.”
그랬냐. 진치우는 이마를 긁었다.
“뭐… 괜찮았어?”
“괜찮지 않으면?”
“너 기자들 싫어하잖아.”
“내가 그런 얘기 했었어?”
“아니 범 새끼가. 너 어릴 때 좆나 시달려서 기자 만나기 싫어할 거라고. 아니냐?”
“…맞아.”
“하여튼, 그 새끼는 만날 최유신 욕하면서 지가 더 싸고돌아.”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신해범이 안 어울리는 짓을 할 때마다 관자놀이가 간지러웠다. 콧등이 시큰해져서 말을 돌렸다.
“근데 엄 돼지가 뭐냐. 사람을 무슨 그따위로 불러.”
“뭐 내가 틀린 소리 했냐?”
“자기 잘생겼다고 말 함부로….”
“엉?”
“…….”
“야.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나 뭐?”
“…….”
류진은 입을 꾹 다물었고, 진치우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씨발… 애새끼가 은근 귀엽네. 야. 야?”
“뭐!”
류진은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팔 굽혀 펴기를 하면 얼굴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이구. 애쓴다.”
진치우가 빈정거리는 소리는 무시했다. 류진은 누가 시간제한이라도 둔 것처럼 열심히 운동했다. 어깨와 옆구리가 아프고 팔꿈치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 밑이 뜨끈뜨끈했다. 류진은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들을 응시했다. 뭐가 땀이고, 어느 것이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물이 난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게 곽현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지금 곁에 없는 신해범 때문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복잡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한다고 몽유병이 낫겠냐….”
진치우가 큰 숨 가득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유미현은 자기가 다니는 활쏘기 연습장으로 오라고 했다. 그렇게 프라이빗한 공간은 아니지만, 오히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오픈된 공간이라 이야기 나누기에 더 편하다면서.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3층짜리 건물이었다. 주차장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부득이한 이유로 주차 시 요금이 발생한다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연습장 이용 시간은 6시부터 21시, 주차장 개방 시간은 5시 30분부터 22시까지.
기우희는 누군가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대신 입구에서 주차권을 샀다. 유미현에게 조금이라도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연습장 간판은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기우희는 읽는 법을 몰랐다. 유리문 앞을 서성거리는데 접수대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가 능숙했다. 운동하고 싶어서 찾아오긴 했는데, 막상 도착해서 등록을 망설이는 사람을 많이 본 모양이었다.
기우희는 접수대로 다가갔다. 신청서를 접수하러 온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회원 등록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누굴 찾아왔느냐는 질문을 예상하던 기우희는 당황했다.
“사실 누굴 좀 만나러 왔습니다.”
머뭇거리는 와중에 원세영이 나타났다. 그도 국궁을 함께 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에 기우희는 조금 놀랐다.
원세영은 활짝 웃으면서 접수대로 다가왔다. 소매가 좁은 전통 의상에 가슴 보호대를 찬 그가 직원과 이야기하는 동안, 기우희는 벽에 주르륵 걸린 사진을 구경했다.
전통 무술 대회 수상자들 사진이었다. 해당 연습장에 다녔던, 또 다니는 사람 중에 실력자가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원세영이 다가와 손깍지를 끼었다. 친근한 행동이 그렇게 거북할 수가 없었다. 냅다 뿌리치자 그는 대놓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네.”
“징그러우니까 붙지 마. 쥐어 터지는 수가 있다.”
“우리 꽤 친해진 거 아니었나?”
기우희는 웃고 있는 원세영을 노려보다가, 신해범이 하듯 입꼬리 한쪽만 쭉 끌어 올렸다.
“네가 출세하긴 했다. 이런 고급 취미도 다 하고.”
“와, 재수 없어.”
“방금 내가 너한테 느낀 감정이 그래.”
원세영이 혀를 찼다. 기우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어딨어?”
“얘기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한번 집중하면 누가 옆에서 말 걸어도 모르시거든.”
“그건 너한테나 해당하는 얘기고.”
기우희는 원세영이 가리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구 쪽에 캐노픽스가 드리워진 반 실내 연습장은 밖에서 가늠한 것보다 내부가 넓었다. 해가 저문 시간이라 조명탑을 켰는데, 새하얀 조명이 워낙 밝아 야간 연습에 문제가 없었다. 운동 경기가 치러지는 필드 같기도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네 개의 과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닥에는 잔디가 촘촘하게 깔려 있고, 화살이 연습장 밖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과녁 뒤로 높은 그물망을 세워 놓았다. 기우희는 주위를 둘러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국궁이라기에 전통적인 인테리어를 상상했는데, 의외로 풍기대의 사격장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유미현은 혼자서 연습 중이었다. 팔꿈치와 무릎에도 보호대를 찬 걸 제외하면 원세영과 똑같은 차림이었다. 평소보다 키가 작아 보이는 이유는 애용하는 하이힐이 아니라 밑창이 부드러운 러닝화를 신어서였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기우희는 그의 재킷 밑으로 살짝 보이는 검은색 물체를 응시했다.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짐작건대 권총이 든 홀스터였다.
“쟨 뭐야.”
원세영은 유미현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외국인 용병이라고 소개했다.
“참고로 우리말 못 알아들어. 괜히 목소리 낮추는 게 더 수상하니까… 알지?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기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활쏘기에 열중하는 유미현의 모습을 그의 대각선 뒤쪽에 서서 관찰했다.
금연 표지판이 없는 걸 확인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따로 허락은 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유미현은 신경 쓰지 않는다. 활쏘기에 집중하느라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뒷모습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 않는 거였다. 기우희는 내심 기대했다. 그래, 유미현 수석 전략가 활쏘기 실력 좀 볼까?
“…뭐야 저게.”
기우희는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력 죽이는군.”
유미현이 야심 차게 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과녁 바로 앞에 내리꽂혔다.
원세영의 실력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높은 점수를 따기보다는 과녁에 살을 꽂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유미현은 연습을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화살통에 살이 동날 때까지 할 셈인가 보았다.
기우희는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다. 뜻밖에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국궁을 만져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깡촌에서 자랄 때 대나무로 수제 활을 만들어 토끼를 잡는 방법을 배운 적은 있지만….
그걸 누가 가르쳐 줬더라?
기우희가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는 사이, 유미현은 화살통을 다 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팔꿈치와 어깨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수석님.”
원세영이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유미현은 의자에 앉자마자 가슴 보호대부터 풀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변명은….
기우희는 유미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았다. 자세는 좋지만 너무 긴장했다. 연습 시간은 활쏘기 교본에 실릴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자세가 조금 틀려도 화살을 과녁에 꽂는 일에 집중한다면 결과가 훨씬 나을 것이다.
유미현과 정류진은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그쪽은 자세가 심하게 엉망이라 문제였지만.
기우희는 유미현이 내려놓은 활을 만져 보았다.
“재능 있는 사람은 떡잎부터 다르다던데.”
120cm짜리 나무 활이었다. 손잡이를 소가죽으로 감쌌고, 가장자리는 뽕나무 잎사귀 무늬로 장식됐다. 초보자 입문용 개량 궁이지만 제법 무게가 나갔다. 무심코 한 손으로 들었을 때 팔 근육이 긴장할 정도였다.
“생각보다 무겁지?”
“글쎄.”
“관심 있으면 등록해. 같이 연마하면 좋잖아.”
“관심 없으니까 바람 넣지 마.”
“그런 것치고는 오래 만지는데?”
기우희는 활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야단인진 모르겠지만….”
유미현이 턱을 괴었다. 웃으니 눈꼬리에 주름이 잡혔다.
“오늘 입은 옷 잘 어울린다. 얼굴이 환해 보여.”
아이스 블루색 셔츠에 검은 바지였다. 제복 차림이 아닌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인가? 기우희는 유미현의 칭찬을 새겨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유미현과 비즈니스 파트너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았다. 황마 교도소 시절과는 별개로 그랬다. 인간관계 때문에 골치 아픈 건 성재경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진 출두했다는 얘기 들었다. 신계동 왕자 때문이지? 지난번 함풍 때도 그렇고, 우리 신 준장이 어린애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쁘네.”
기우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음에도 없는 위로는 관두지.”
“본가에서 쉬는 거 보면 상태가 많이 안 좋나 봐?”
“그래 봤자 허벅지 총상이야. 한 방. 급소도 아니었고. 겨우 그 정도로 죽네, 사네 난리 치는 게 더 웃겨.”
기우희의 거친 목소리에 유미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중요한 건 부상의 경중이 아니지. 누구 몸뚱이인지가 중요하지.”
“…….”
“우리 MVP, 손가락만 베여도 피눈물 흘릴 사람 여럿이야.”
원세영이 보온병을 가져왔다. 내용물은 끓인 우유였다. 유미현은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에 엄지 한 마디만큼의 꿀을 떠 넣었다. 티스푼으로 휘휘 젓자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한 잔?”
“필요 없어.”
기우희는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왜, 젖내 나?”
“…….”
“지금은 폼 잡아도 괜찮아. 그래도 멋있을 나이지. 그래도 내 나이 되어 봐라. 어쩔 수 없이 챙기게 된다니까.”
기우희는 신해범을 떠올렸다. 최근에 부쩍 몸이 약해졌다.
“그렇지만도 않아.”
“으응?”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유미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우희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재떨이를 찾았으나 마땅한 게 없었다. 기우희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힘주어 밟았다. 유미현의 시선이 뭉개진 꽁초에 닿았다.
“버릇 그대로네.”
“무슨 버릇.”
“뒤꿈치로 그렇게 밟는 거.”
“…스토커도 아니고.”
유미현이 웃었다. 기우희는 그의 눈꼬리에 잡히는 잔주름이 마음에 들었다. 운동할 때도 빈틈없이 화장한 얼굴에서, 대체 무슨 화장품을 발랐는지 땀을 뻘뻘 흘려도 흐트러지지 않는 얼굴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이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꿀 탄 우유를 한 모금 마신 유미현이 말했다.
“우리 이제 엄마, 딸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안 괜찮아.”
단칼에 거절했다. 엄마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감방 동기라면 모를까.”
“그건 상처가 되는 말이지. 우리 둘, 아니 셋한테.”
원세영은 무표정했다. 황마 교도소 시절을 함께 보낸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기우희는 피식 웃었다.
“난 내가 한 짓이 부끄럽지 않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지도자가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 몫이지.”
지도자. 기우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와는 지독하게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난 그런 이름에 관심 없어.”
절대 왕권에는 관심 없었다. 솔직히 총통 자리가 탐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증오스러운 친부의 몰락이었다. 어리석고 모자란 남자에게 이만한 권력을 쥐여 준 ‘철혈일성’ 그 자체였다.
총통 즉위와 동시에 신분제를 철폐할 것이다. 출신 성분 따위는 지나가는 똥개한테나 물려줘라. 기우희는 권씨 일가를 비롯한 왕족은 물론, 돈 되는 이권 사업을 모조리 틀어쥔 귀족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싶었다. 총통 자리는 꿈을 펼칠 수 있는 자격에 불과했다.
유미현은 반석이었다. 철혈일성을 무너뜨리고 들어설 차기 정부의 핵심이자 내각의 중심이 될 자였다.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다수의 미래를 위해.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우희는 유미현에게 품은 개인의 원한을 내려놓았다.
“혹시 불안한가? 내가 뒤통수칠까 봐?”
“우리 기 소령이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지.”
“알면 엄마니 딸이니,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마.”
유미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윤정에 대한 감정의 골이 아직 깊은가 보았다. 여태 모친의 성을 쓰기에 기대를 걸어 보았는데, 역시 갖다 쓸 만한 다른 성씨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멀리 떨어진 과녁을 응시하던 기우희가 말했다.
“사람 하나 만나 줘.”
“누구?”
“보호가 필요한 놈이야.”
“그러니까 누구? 누군지도 모르는데 승낙부터 할 순 없지.”
유미현의 눈꼬리 잔주름이 깊어졌다.
“이야기엔 순서가 있는 법이야, 소령. 특히 약속에 있어서는.”
기우희는 대답 없이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름부터 말하기 힘들면, 대충이라도 감 잡게 해 줘야지?”
“…….”
“위험 요소는 뭔데?”
“빅 브라더.”
권주혁의 이름을 들은 유미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흥미가 생기네. 그런데 우리 기 소령, 말 아끼는 거 보니까 수상한데? 뭐가 있나 보다?”
기우희는 주머니 속 USB를 만지작거렸다.
“그딴 거 없어. 맨입으로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털어놔 봐. 긍정적으로 고려할 의향이 있으니까.”
유미현의 웃는 얼굴에 편안함을 느끼게 될 줄 몰랐다. 사실은 아직도 마음은 무거웠다. 황마에서 지내던 소녀 시절 유미현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쳤던 친구들을 배신하는 기분이었다.
정류진도 우리에게 이런 기분을 느낄까.
과거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었다. 서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지만, 정작 마음의 짐이 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빨간 머리 정류진이 생각났다. 예나 지금이나 기가 찰 정도로 마른 몸이었다. 기우희는 조금 후회했다. 그때 너무 세게 패대기치지 말걸. 손목 관절 한번 망가지면 계속 아픈데, 그렇게 세게 비틀지 말걸….
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후회해 봤자 의미 없었다. 정류진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았다.
그거야말로 신해범이 자신에게 바라는 행동일 터였다.
진치우는 자기가 쓰던 공기계를 하나 갖다주면서, 휴대폰에 깔려 있던 게임도 알려 주었다.
류진도 어린 시절 즐겨 했던 테트리스와 같은 원리였다. 색이 같은 다섯 개의 구슬을 모으면 뿅, 하고 터지며 점수가 쌓였다. 구슬 색은 랜덤이었는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구슬이 내려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서 순간적인 상황 판단력이 중요했다. 구슬을 터뜨리지 못해 빈칸이 꽉 차면 게임 오버.
류진은 이보다 어렵고 복잡한 게임도 해 봤고, 무슨 게임이든 처음에만 재미있지 금방 질려서 그만두는 편이었지만, 진치우가 알려 준 풍선 게임은 오래 붙잡았다.
규칙이 간단해서 중독성이 있었다. 선명한 빛깔의 풍선이 터질 때마다 들려오는 뿅뿅 소리도 듣기 좋았다. 무엇보다 진치우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꽤 높은 레벨의 소유자였다.
류진은 게임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초보자 단계를 돌파했으나, 중급 단계부터는 레벨 업이 쉽지 않았다. 기계 뒤의 누군가가 내게 악감정을 품었나 싶을 정도였다. 풍선은 소나기처럼 내려오는데 색깔은 각양각색이었다.
몇 번이나 패배한 뒤, 류진은 중급자 단계부터 사용 가능한 유료 아이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임에 열중하는 진치우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가 아이템에 대해서 모를 것 같지 않았다. 류진은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한창 게임에 몰두한 진치우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야!”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면 12층 창밖으로 휴대폰을 던져 버리겠다고 협박한 뒤 결제 명세를 확인했다. 역시나였다.
류진은 진치우의 휴대폰을 돌려주며 빈정거렸다.
“사기 쳐서 레벨 올리니까 좋냐?”
“뭐 사기? 이게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야, 내가 내 돈 주고 아이템 결제했는데 뭐가 문제냐?”
진치우는 돌려받은 휴대폰을 꼼꼼하게 살폈다.
“왜. 기스라도 났을까 봐?”
류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창밖으로 던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진치우라면 휴대폰값과 통신 요금, 휴대폰을 새로 장만하는 동안 업무를 보지 못한 피해 보상에 본인의 정신적 피해까지 곱절로 쳐서 요구할 인간이었다.
“이거 할부다.”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쓰니까 정작 필요한 물건 살 때는 돈이 없지.”
“야.”
“사기꾼.”
“너 자꾸 말 그따위로 할래?”
“돈 써서 아이템으로 레벨 올리고. 그게 사기가 아니면 뭔데?”
“으이구, 이 철없는 것아.”
진치우는 턱을 쳐들었다. 뿌듯한 미소.
“나 같은 큰손 덕분에 게임 회사가 돈을 번단다.”
“뭐라는 거야.”
“너도 대가리에 피 마르면 알게 된다, 이 무식아. 이참에 충고 하나 해 주리? 사람이 어느 정도 레벨까지 올라가면, 그때부턴 스킬이 아니라 쩐으로 이기는 거야.”
류진은 진치우의 뒤통수에 각 휴지를 집어 던지려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쩐으로 이기는 거야.’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단순히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세상살이는 돈이 많아야 편했다. 사는 데 돈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문제가 결국 돈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 다녀온 안전 가옥의 주인도 진치우였다. 시세보다 싸게 매입했다고는 하지만 한두 푼이 아니었을 터다. 류진은 진치우가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했다. 대책 없는 망나니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달라 보였다. 동시에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설레었던 마음이 열등감과 실망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자신에게는 매매 자격도 없었다. 지금 신분으로는….
죽은 하성록이 어떻게 광성 소재지의 건물을 매입했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편법을 썼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불법을 저지르기 싫다면 신분이 기똥차게 좋거나, 돈이 억수로 많거나, 광성에서 오래 근무하며 이 도시가 돌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그나마도 최하 신분이면 오래 볼 것도 없이 서류 심사에서 탈락이었다.
신해범에게 부탁하면 실거주 목적의 주택 구매 자격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풍기 교육대의 이름을 앞세워서. 그래도 20평 이상, 방 세 개 이상인 아파트나 빌라는 어렵겠지. 마당 딸린 주택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류진은 소파에 앉은 진치우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질문 하나 해도 돼?”
“아니.”
“다시 태어날 때 돈이랑 출신 성분 중에 하나 갖게 해 준다면 뭐 달라고 할 거야?”
진치우는 돈 있는 놈이 이긴다고 단언했지만, 사실은 그도 알 터였다.
이곳은 출신 성분이 돈보다 우선시되는 세상. 첫째가 타고난 출신 성분, 둘째가 현재의 재정 상태, 그리고 개인의 잠재적인 역량은 가장 낮은 가치로 평가받았다.
“지랄하네.”
“뭐?”
진치우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난 둘 다 갖고 태어났고, 둘 다 잃었어. 그래서 그게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가치인지 잘 알아.”
이 개 같은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만약 하나를 골라서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면.
“친구 한 명이면 돼.”
“…….”
“둘도 필요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날 믿어 주고, 지지해 주고, 이끌어 주는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거 신해범 얘기야?”
“내가 이런 소리 했다고 말하지 마라. 좆나 창피하니까.”
“어. 알아서 다행이다.”
“야.”
이쪽을 돌아보는 진치우의 표정이 묘했다. 류진은 시선을 피했다.
“자격지심하고는.”
“뭐야?”
“야. 혼자 성내지 말고 일루 와.”
“싫어.”
“폰 반납할래?”
류진은 휴대폰을 등 뒤로 감췄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그러니까 와 보라고.”
진치우가 소파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백사자> 시절 좁은 숙소에서 부대끼며 지내던 조원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즐거운 추억보다 언성 높여 가며 다툰 기억이 훨씬 많았던 사람들이 생각날까. 안 좋은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미화되는 걸까.
진치우가 준 공기계는 비교적 최근 모델이었고, 중고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뒷면의 긁힌 자국만 제외하면 새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류진은 작게 한숨 쉬었다. 진치우는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보기보다 섬세한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할 듯했다.
머뭇거리며 그의 옆에 앉자 진치우가 자기 휴대폰을 내밀었다.
“너 아이디 입력해.”
“왜?”
진치우가 도끼눈을 부릅떴다. 류진은 목을 움츠린 채 진치우의 휴대폰에 금일 게임을 위해 생성한 아이디를 적어 넣었다.
“확인해 봐.”
“어?”
처음 보는 알림창이 떴다. 아이템 선물이었다. 류진은 화들짝 놀라 진치우를 바라보았다.
“이거 뭐야.”
“뭐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그쪽이 보낸 거 아닌가?”
“몰라.”
진치우는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렸다. 류진은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고맙다고 안 할 거야.”
“바란 적도 없다!”
진치우가 준 아이템은 컬러 체인지 찬스였다. 내려오는 풍선을 필요한 컬러로 바꿀 수 있었다. 기회는 총 세 번. 진치우는 슬로 모션 아이템도 하나 더 보내 주었다. 이건 풍선이 내려오는 속도를 늦추는 기능이었다. 제한 횟수는 컬러 체인지 찬스와 마찬가지로 세 번이었다.
“아껴 써라.”
류진은 무심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한동안 게임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각자의 휴대폰에 집중했다. 뿅뿅, 팡팡, 통통, 하는 경쾌한 효과음이 연달아 터졌다.
“야.”
“왜?”
“너 MVP랑 친했잖아.”
하나 남은 컬러 체인지 찬스를 사용한 순간이었다. 류진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풍선이 내려왔다. 필요했던 노란색 풍선이었다. 그러나 원하는 위치에 갖다 놓지 못했다.
찬스가….
날아가 버렸다.
류진은 게임을 종료했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진치우를 돌아보니 그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시선은 신해범의 책상을 향했다.
“…근데?”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냐?”
“…….”
“아니 그냥. 원수랑 친구 되는 거랑 친구랑 원수 되는 거랑, 둘 중에 뭐가 더 좆같은지 궁금해서.”
진치우는 류진이 대답하기 전에 말을 돌렸다.
“아니다. 못 들은 셈 쳐라. 나 오늘 여기서 잔다. 넌 네 방 가든지, 여기 있든지 마음대로 해.”
“굳이 안 그래도 돼.”
“뭘.”
“나 때문에 사무실에서 잔다는 거잖아, 지금.”
“애새끼가 눈치는 좆나 빠르네. 눈칫밥 먹고 살아서 그러냐?”
“신해범이 시켰어?”
“…그럼.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봉사 활동 하냐?”
“하지 마. 안 해도 돼. 하나도 안 고마워.”
“아까부터 징징대기는… 야. 어른이 뭐 해 준다고 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좆도 아무것도 아닌 새끼가 말이 많아.”
“그러니까 안 해도 된다고. 그냥 문 잠그고 가. 자물쇠 있잖아. 그걸로 밖에서 잠그면 여러 사람 안 힘들잖아. 어쨌든 내가 안에서 못 나오게 하면 되는 거잖아.”
“아, 이 단순한 성격. 이러니까 범 새끼가 마음을 못 놓지.”
“자꾸 애새끼, 애새끼 하지 마!”
류진이 벌떡 일어났다. 진치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자꾸 사람 무시해? 왜 나한테 죄책감 느끼게 만들어? 정신병 걸린 게 내 탓도 아닌데. 왜 내가 미안해해야 해? 내가 몽유병 걸리고 싶어서 걸렸어? 나도 남들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아. 빚지기는 더 싫고. 대충 가둬 놓으면 되는데, 왜 굳이 나한테 신경 써?”
“야.”
“적당히 해! 나한테 뭐 해 준다고 나오는 거 없어!”
“야, 앉아. 왜 갑자기 흥분하고 난리야.”
“애새끼 취급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들어!”
“너 어린애 맞아. 개 같은 새끼들이 너를 어린애로 안 봐서 그렇지.”
진치우는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신랄한 목소리였다.
“나야 당연하고, 범 새끼는 말할 것도 없고.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기우희도 마찬가지야. 우리 다 너한테 대가리 박고 사과해야 할 연놈들이다. 근데 다들 성격 개 같은 거로는 올림픽 금은동 싸그리 휩쓸 인간 말종들이라.”
“그래서 사과 안 하겠다고?”
“말로 하는 사과는 자기 마음의 안정 찾고 싶은 놈들이 하는 거지. 진짜 미안하면 미안하단 말도 못 해. 그런 말이 안 나와. 상대방 얼굴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서.”
“…핑계 대지 마.”
“죗값은 주둥이가 아니라 돈으로 치르는 거다. 새끼야.”
류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인제는 자신에게 진치우를 탓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곽현우의 모친을 만날 용기가 없는 건 피차일반인데.
류진의 어깨가 축 처졌다. 풀 죽은 목소리로 진치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착했어. 나한테 잘해 줬어. 그래서 좋아했어, 권세혁.”
“단순하긴.”
“질투도 했고, 미워도 했어. 그래서 약도 줬고….”
그런데 결국 용서한다는 말이 나왔다. 너는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까지 꼬리를 물고 나와 버렸다.
극한의 상황에서 절박한 마음에, 홧김에 내뱉은 소리는 아니었다. 류진은 진심으로 권세혁을 용서했다. 자신이 연좌제로 고통받았기에 권세혁의 억울함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부디, 내 용서를 기억해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바란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무치게 그리웠을 때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이 신예나와 권세혁이었다. 류진은 자기가 두 사람을 잊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앞으로 어디에 가서 살든.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
진치우가 꿍얼거렸다.
“이건 뭐 되다 만 보살도 아니고….”
“이해 안 해 줘도 괜찮아.”
“그래. 난 이해 못 하겠다.”
진치우는 두 눈을 감았다. 감은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는 류진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확실히 난놈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신성의 존재를 아예 지워 버린 자신에 비하면.
“그래도 범 새끼는 이해가 되네.”
“갑자기 신해범 얘기가 왜 나와?”
“걔가 너한테 목매는 이유 알 거 같다고.”
“내가 상관이야.”
“그래. 걔 완전 너한테 먹혔어. 그래서 말인데, 범 새끼 꼬셔 먹은 고 몸땡이로 유미현 수석 함 녹여 봐라.”
진치우는 오늘 저녁으로 갈비탕을 먹을래, 갈비찜을 먹을래, 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기 소령이 자리 마련했다. 범이 놈 부탁으로… 악! 야! 왜 때려?!”
진치우는 씩씩거리는 류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얻어맞은 것도 황당한데, 방심해서 더 아팠다.
“신해범이 그런 걸 시켰다고? 소령님이 자리를 마련해?”
“어! 뭐 잘못됐냐?!”
“말도 안 돼! 거짓말!”
“이게 멀쩡히 얘기하다가 풍을 맞았나. 왜 갑자기 지랄이야? 야! 나도 솔직히 유미현 아직 별론데, 그렇다고 그 여자가 아무나 막 만나 주는 사람은 아니야!”
진치우는 어리둥절했다. 의미를 전달하는 말이, 자신의 표현 방법이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권주혁은 적림부에서 쫓겨날 때, 자기가 쓰던 오동나무 책상을 가지고 나왔다. 적림부에 입성했을 당시 거금을 들여 무형 문화재에게 맞춘 명품이었다. 그러나 장인이 정성을 다해 만든 책상은 권주혁이 집어 던진 집기에 부딪혀서, 서랍을 하도 세게 닫아 이음매가 틀어져서 얻다 기부하려고 해도 가져갈 사람이 없을 만큼 낡아 빠진 고물이 되어 버렸다.
사실은 권주혁 본인도 알지 않을까? 천연 목재라 관리도 어렵고, 현대적인 사무실 인테리어와 어울리지도 않는 책상이라는 걸.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이걸 버리면 자신의 빛나는 성공 신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 같아서.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물단지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적림부에서 쫓겨난 권주혁은 헌병대 본부, 20층짜리 본관 3층에 둥지를 틀었다. 그에게 한 층을 내주기 위해 기존 3층에 있던 모든 시설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권주혁은 적림부에 있을 때보다 넓은 집무실을 얻었으나, 구조나 용도상 저층에 있어야 편리하고 안전한 시설들이 각 층으로 흩어져 혼선을 빚었다. 권주혁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새로 생겼고. 3층에 있는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뜻의 독삼장군(獨三將軍).
신해범은 그곳에 있었다.
취조실이 아니라 권주혁의 집무실이라는 사실에 안도하지는 않았다. 이건 전형적인 엿 먹이기였다.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주야장천 기다리게 만드는 것도 고문이었다.
태양이 떨어지고 낙조가 먹빛에 삼켜질 무렵 임찬영이 들어왔다. 그는 여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신해범의 앞에 커피 한 잔과 포장을 뜯지 않은 쿠키 몇 개를 내려놓았다.
“요기라도 하십시오.”
“잠깐 앉지. 피차 서로 적적한데.”
“장군님 금방 오실 겁니다.”
“요새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신가?”
신해범은 쿠키 포장을 뜯었다.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를 반으로 뚝, 잘라 임찬영에게 내밀었다.
그는 머뭇머뭇 쿠키를 받았다. 그래도 소파에 앉지는 않았다. 트레이를 옆구리에 낀 채 조심스럽게 쿠키를 입에 넣고 씹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요즘 여러 가지로… 복잡합니다.”
임찬영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신해범은 그의 이마를 두툼하게 덮은 거즈를 보았다.
“호월루에서 소동이 있었다고.”
“예, 뭐….”
제 딴에는 앞머리를 내려서 감추려고 한 것 같은데, 오히려 머리카락이 붕 떠서 우스웠다. 물론 신해범은 비웃지 않았다. 그는 예의를 아는 지성인이었다.
“원래 불행은 한꺼번에 와.”
“…….”
“성격 받아 내는 거 힘들지?”
임찬영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몸 아플 때 감정 노동 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임찬영이.”
신해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장군께서 버리실 것 같나? 우리 풍기대.”
문으로 향하던 임찬영이 그 자리에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실수도 세 번이면 고의라지. 나는 이미 두 번의 실수를 저질렀어.”
“그 셈이 맞는다면,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았군요.”
“내가 그 기회를 받을 수 있을까?”
신해범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빙그레 웃자 임찬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장군님께서는 이미 오랜 친구를 잃으셨습니다.”
최석준 전 정무국장 얘기였다. 권주혁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임찬영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군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균열이 생긴 건 확실했다. 눈에 보이고, 손끝으로도 만져졌다. 그러나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제의 원인을 모르니 고치지도 못했다.
임찬영은 트레이를 꽉 쥐었다.
모시던 주인이 망했을 때, 함께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비천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광성에서 쫓겨나 어디로 가란 말인가. 재산은 압류당하고, 명예는 진흙탕에 쑤셔 박히며, 내 가족과 친구들은 고통받는다. 배우자와 자식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처지가 된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트레이를 떨어뜨린 임찬영이 바닥에 손을 짚었다. 등을 둥글게 만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바늘로 찔러도 터지지 않는 공기주머니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뭐야?”
신해범이 일어섰다. 그는 임찬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다. 과호흡 증상이었다.
“임찬영. 괜찮아?”
커다란 손바닥이 등을 쓸어내렸다. 임찬영은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거북했다.
신해범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국가 1급으로 분류되는 범죄자였다. 연좌제를 직격으로 맞은 신해범이 총통 보좌관의 총애를 얻으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패기는 인정하는 바이나, 사람이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었다.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성공에 눈이 멀어도.
임찬영은 신해범을 밀어내고 일어서려 했으나 그의 손아귀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억지로 끌려와 소파에 앉았다. 신해범이 미적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건넸다.
“숨 좀 돌려.”
임찬영은 한숨을 쉬었다. 자기 손으로 탄 커피를 마시는 게 쑥스러웠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언제부터 이런 거야?”
임찬영은 마지못해 말했다.
“얼마 안 됐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해범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만병의 근원이지.”
임찬영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심코 이마를 만지는데 손가락에 거즈가 걸렸다. 신예나가 신해범과 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언제 처음 알고서 놀랐더라.
“장군께서는 아시나?”
“아셔야 합니까?”
“부관이 아프면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잖아.”
신해범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걸 권주혁은 하지 않았다. 임찬영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상처가 벌어질 걸 알면서도.
“인제 와서….”
사람인 척하지 마십시오.
침묵에 담긴 의미를 간파한 신해범이 웃었다.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공급보다 수요가 먼저야.”
“예?”
“수요가 없으면 공급이 사라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니까 쓰레기를 모아 처리하는 전문적인 직업이 생긴 것처럼. 마찬가지야. 개새끼는, 개새끼를 원하는 주인이 있으니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거야.”
신해범은 내가 공급자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뭐든 공급보다 수요가 앞서. 수요가 없으면 공급 자체가 사라지게 되어 있어.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는 놈들이 너무 많아.”
그는 임찬영의 어깨를 꽉 쥐었다.
“힘들면 좀 쉬는 게 어때. 극심한 스트레스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신해범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임찬영은 미련하고 약했다. 설령 처형의 칼날을 피한다 해도, 진흙탕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느니 조용히 가라앉아 질식할 남자였다.
잠깐 보여 준 나약한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지지는 않았다. 신해범은 기억하고 있었다. 권주혁의 발가락을 핥는 자신을, 임찬영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는지.
신해범은 이십일 시 정각에 취조실로 이동했으나, 조사는 고작 한 시간 만에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권주혁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컨디션 난조가 이유였다.
평소 권주혁의 측근으로 접대 자리에서 종종 얼굴을 마주쳤던 헌병대 간부가 들어왔다. 그는 ‘자진 출두를 하려거든 사전에 장군님과 약속을 잡았어야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신해범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복귀를 논의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느냐고 태연하게 응수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권주혁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권세혁의 부재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신해범은 사전에 말을 맞춘 대로 ‘여름휴가차 머물던 장진에서 해적과의 교전으로 부상을 당했다’고 했으나, 급조한 거짓에는 한계가 있었다. 적림부에 권세혁의 이름 석 자가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당사자의 평판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소문들이었다.
일각에서는 해적과의 교전은 말짱 거짓이며, 권세혁이 의무 복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자해를 했다는 추측까지 나왔다. 그나마 진상 규명을 위해 장진에 조사단을 파견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 아직 권주혁이 건재하기 때문이고, 장승희 총통 부인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 많으며, 장진에는 함풍과 달리 장두현이라는 거물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문제였다. 장두현은 장진에 머물고 장승희는 정계 주요 인사들과 맞서 싸울 그릇이 못 되니, 남은 사람은 권주혁이었다. 그는 권세혁에 대한 여론이 더 나빠지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권주혁은 여태 아무런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사건의 당사자를 조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입 다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장승희 총통 부인이 풍기 교육대장을 아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으니, 권주혁 딴에는 몸을 사리면서 상황을 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다만.
신해범은 권주혁이 호월루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호흡 증상을 일으키던 임찬영을 생각했다. 어쩌면 자기 생각보다 권주혁의 상황이 더 나쁠 수 있었다. 권세혁에게 특별히 신경 쓰기 어려울 정도로.
최석준만큼은 아니더라도, 김해국의 배신은 권주혁에게 치명타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공평했다. 하성록도 아들을 잃고 무너진 마당에 권주혁이라고 천년만년 굳셀 리 없었다.
죄 많은 자들이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거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신해범은 앉은자리에서 눈을 깜박였다. 시간의 복수는 버틸 능력이 되는 자라면 누구나 가능했다. 겨우 그걸로 만족하기에는 내가 빼앗긴 삶의 부피가 너무나 크다.
권주혁을 보면 장두현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아직 충분히 더 해 먹을 수 있음에도 광성을 떠난 이유.
손뼉 칠 때 떠나라.
가뜩이나 늙어서 추한 말년에 밑바닥 드러내기 싫으니까. 다 잃고 귀향한다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러나 욕심을 버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많이 가져 본 자일수록 더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빼앗기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장승희와 가까워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두현의 마음에 차는 딸이 아니었다. 강인한 아버지가 아니라 마음 약한 어머니를 닮아서.
딸에게 실망한 장두현은 권세혁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 믿었던 장손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을 실망시켰다.
신해범은 장두현이 갑자기 늙어 버린 이유를 알았다. 조부와 손자 사이에는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신뢰가 있었다. 믿음이 박살 났으니 어찌 맨정신으로 버티랴.
올라가는 데 십 년, 굴러떨어지는 데 한 달.
이제 장두현은 신룡관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장승희와 권주혁을 신뢰하지 않는다. 딸은 젊은 풍기 교육대장과 금지된 사랑 중이고, 권주혁은 유미현을 상대로 고전하느라 차기 총통이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니까.
신해범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두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별반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손자는커녕 아들도 없었지만, 자기 새끼만 중한 놈이라면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리고 항상 이겼다.
신해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직미러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인 뒤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총통 각하와 조국을 위해!”
손끝을 눈썹에 붙인 채 부동자세로 섰다. 보는 사람이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쿵.
신해범은 유리에 이마를 댔다. 킥킥 소리 내 웃었다. 이 매직미러 뒤에서 누군가가 인상을 찌푸리며 ‘미친놈’ 하고 말하는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헌병대 취조실에는 시계가 있었다. 재깍재깍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큰 아날로그 시계였다. 컴퍼스로 그린 것처럼 동그란 모양에 노란 테가 가장자리를 장식했다. 멀리서 눈을 흐릿하게 뜨고 보면 보름달 같았다.
“오늘 주무시고 가셔야겠습니다.”
“귀가는 안 되나?”
“저희 규정 아시지 않습니까.”
헌병 한 사람이 다가와 갈아입을 옷을 건넸다. 죄인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편한 운동복이었다. 운동화도 새것이었다. 속옷은 벗지 않아도 되었고 차 키나 휴대폰처럼 딱딱한 것을 제외한 개인 소지품은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자진 출두의 이점이었다. 심지어 놈들은 환복 할 때 몸을 가릴 수 있도록 바퀴 달린 가림막까지 끌고 들어왔다.
“필요하면 쓰십시오.”
“굳이?”
신해범은 웃어 보였다. 그는 가림막 뒤로 가기는커녕 헌병대의 눈을 피해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하면 저놈들이 알아서 눈을 내리깔 거란 사실을 알았다.
사람은 옷을 벗으면 움츠러든다. 제아무리 흉악 범죄를 저지른 죄수라도 처음 옥살이를 시작할 때는 한풀 꺾인 채 들어오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사회의 옷을 벗고 죄수복으로 갈아입는 과정에서 인권이 박살 나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건 본래의 기세를 얼마나 빨리 되찾느냐에 달렸다고, 황마 교도소를 겪어 본 기우희가 말했다. 기선 제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폐쇄적인 사회의 지배층이 될 수도, 야만족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고.
헌병대원 한 사람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은 신해범의 등에 꽂혔다. 돌덩이 같은 근육으로 다져진 몸이 움직일 때마다 허연 흉터가, 또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얼룩덜룩하게 남은 자국이 형광등 불빛에 도드라졌다.
“동작이 느려 미안하군. 보다시피 손이 좀 불편해서.”
“아닙니다.”
“늦게까지 고생하는데, 거기 지갑에서 한 장씩 꺼내 가.”
“예?”
“보통 알아서들 하던데.”
헌병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내 한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중앙 헌병대는 참고인을 상대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습니다!”
“싫어? 왜. 장군께 미움받는 놈한테 받았다간 부정 탈까 봐?”
“농이 지나치십니다!”
“엄살들은. 이리 와.”
신해범은 손수 지폐를 꺼낸 뒤 주춤주춤 물러서는 헌병대원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엇!”
“가만. 해코지 안 해.”
신해범은 그의 앞주머니에 든 볼펜을 낚아챘다. 그러곤 지폐에 사인을 휘갈겼다.
“이건 뇌물 아니야. 팬한테 사인해 준 거지.”
바지 주머니에 공평하게 한 장씩, 차례차례 찔러 넣어 주었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이라며 윙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해범은 헌병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는지 알았다. 별 미친놈의 새끼가 다 있다고 하겠지. 나잇값은커녕 자기 본분도 망각하고 장난질이나 친다고.
모쪼록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무해한 바보를 경계하지 않는다.
멍청이가 된 대가로, 신해범은 따끈따끈한 유치장 바닥에서 등을 지지면서 잠들었다.
유치장이라도 시설이 나쁘지 않았다. 신해범은 군용 담요와 베개만 있으면 어디서든 잠에 빠졌다. 비록 손바닥 두 개 펼쳐서 붙여 놓은 크기지만 창문도 제대로 달려 있었다.
기지개를 켜려면 대각선으로 누워야 했다. 신해범은 왼팔을 베고 누운 채 창문 너머 아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밝았다. 별도 많았다. 혼자 있으니 불쑥 서글퍼졌다.
정류진, 오늘도 잠들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려나.
불안한 건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진치우와 기우희가 있었다. 신해범은 두 사람을 믿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되지만, 너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아야 한다.
신해범은 눈을 감았다. 훌륭한 아버지에겐 성격적 결함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성실함이었다. 그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실함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 되지만, 너를 비웃는 건 안 된다는 식으로.
그 점만큼은 닮고 싶지 않았었는데.
신해범은 등을 말았다. 그의 웅크린 몸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차갑다. 새벽에 잠시 내린 비 때문에 아스팔트 도로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열린 조수석 창문으로 찬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뒷좌석에 앉은 류진은 두 팔을 문질렀다. 급하게 모자만 쓰고 나오느라 외투를 챙기지 못했다. 기우희는 옆에 있는 쇼핑백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으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왜?”
“오늘 소령님 휴무….”
“휴무래도 나와서 일하는 놈들 천지다.”
연말 평가가 다가온다. 원래도 업무량보다 근무자가 적은 기관이었다. 이맘때부터 해가 바뀌기 전까지가 가장 치열하다고, 기우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오늘은 내가 마련한 자리니까. 너야말로 아침 일찍부터 피곤할 거 같은데, 괜찮나?”
“저야 뭐….”
류진은 네이비색 랄프 로렌 카디건을 꺼내 걸쳤다. 옷에서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풍겼다. 자기도 모르게 옷소매를 코에 갖다 대는데, 룸 미러를 통해 그 모습을 본 기우희가 말했다.
“대장님 것 맞다.”
“예?”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던데. 최유신이.”
아….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기우희가 입기에는 옷이 크다, 싶었다.
문득 신해범의 부재에 안달복달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류진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저 그렇게 티 납니까?”
“많이 나.”
기우희는 앞으로 상체를 내민 류진에게 몸에 담배 냄새가 배면 곤란하니 똑바로 앉으라고 말했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들었다.
류진은 신예나가 쓰던 반지를 떠올렸다. 비슷한 거라도 어디서 살 수 없을까?
“어제 잠은 좀 잤고?”
“예. 잘 잤습니다.”
“푹 잔 사람 얼굴은 아닌데?”
류진은 멋쩍게 웃었다. 진치우에게 얻어맞은 따귀가 아직도 후끈했다.
“정신 차려 보니까 엘리베이터 앞이더라고요.”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채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던 진치우는 기가 막히게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최유신이 알면 기함하겠군.”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 안 할 겁니다.”
“자기가 맞아도 싸다고 생각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러 때린 것도 아니니까요.”
기우희가 차창 밖으로 담배꽁초를 내던졌다. 류진이 앗, 하고 소리쳤다.
“괜찮아.”
출근 시간도 전인 이른 아침. 좌우로 침엽수가 빼곡한 이 차선 도로를 달리는 차량은 기우희의 하얀 지프뿐이었다.
“소령님, 혹시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천성이 약해 빠졌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우희는 조수석 창문을 닫고 속력을 높였다. 바람이 차창을 거세게 두드렸다. 때마침 차가 커브를 급하게 돌아 류진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안전벨트를 꽉 쥐며 숨을 들이켜는데 기우희가 덧붙였다.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더군.”
“…….”
“너랑 성재경이 그런 과다.”
기우희는 성재경과의 면담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말 안 듣는 사냥개는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고 신해범에게 넌지시 암시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랬다.
성재경이 사전에 함풍 2도의 비밀을 알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황효제의 시신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고.
만약 그런 힘이 실재한다면, 그것이 그나마 기(氣)가 약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성재경을 예배당으로 이끈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나. 기우희는 피식 웃었다. 류진이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프 속력을 줄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차한 류진은 카디건을 여몄다. 바람이 생각보다 더 쌀쌀했다. 눌러 쓴 볼 캡이 바람에 벗겨질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류진에게는 앞서가는 기우희의 등만 보였다. 그러느라 이곳이 어딘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알았다.
체육관이었다. 그중에서도 활쏘기 연습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데스크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으나 기우희는 안으로 들어가는 카드를 갖고 있었다. 류진은 잽싸게 기우희를 따라 들어갔다.
복도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다행히 창문이 많아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그래도 만약 이 길을 혼자 걸었다면 공포 영화처럼 으스스한 기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우희는 회색 철문 앞에 멈췄다. 손잡이를 잡은 채 힐끗 돌아봤다.
“준비됐나?”
“예.”
진치우는 유미현이 류연비의 명예를 복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사람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이해했다.
같은 말이라도, 힘 있는 사람이 하면 느껴지는 무게가 다르다.
유미현은 비싼 얼굴마담이었다. 국민은 그의 의견과 결정을 신뢰했다. 신해범은 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비록 똑같은 철혈일성의 일원이라도, 유미현은 권주혁의 대항마로 권력의 수평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신해범은 끄나풀이었다. 유미현은 자기 능력으로 권주혁과 경쟁했지만 신해범은 권주혁의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보는 자였다.
실제로 듣는 유미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고개 들어라. 얼굴 좀 보자.”
류진은 허둥지둥 볼 캡을 벗었다.
유미현 수석 전략가는 대중에 노출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편한 운동복, 운동화. 류진의 생각보다 훨씬 친근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아침 일찍부터 오느라 고생했다.”
그의 손바닥 곳곳에는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굳은살이 있었다.
캐노픽스 아래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유미현과 함께 있던 젊은 여자는 비서 같았다. 그는 유미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담요를 갖다주고, 몸이 식지 않도록 따끈한 차를 따라 주었다.
기우희는 차를 거절하고 새 생수를 따서 마셨다. 류진은 기우희를 따라서 했다.
“애기가 피곤해 보이네.”
“예?”
류진은 당황했다.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날 보고 ‘애기’라니. 물론 카리스마 면에서는 한참 뒤떨어지지만, 그래도 기우희보다 키가 큰 자신을 상대로 ‘애기’라니. 이래 봬도 스무 살이 넘었는데….
항변하지는 않았다. 유미현과 자신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애기라는 호칭이 그렇게 어색한 건 아니었다.
유미현은 기우희를 쳐다보았다.
“어때? 아침 일찍 나오는 것도 괜찮지? 신선한 공기도 마실 수 있고.”
“오후에 약속 잡았어도 괜찮았어.”
“가장 중요한 일을 처음에 하는 게 좋아, 난.”
기우희가 유미현에게 반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아서 놀라웠다.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유미현이 기우희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달리, 기우희가 유미현을 껄끄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불편함보다는 성가심에 가까운….
엄격하고 자기 관리 철저한 어머니와 사춘기의 반항적인 딸.
류진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을 물과 함께 삼켰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안녕. 이거 먹을래?”
유미현의 비서였다. 지퍼 내린 운동복 안으로 깔끔한 셔츠가 보였다. 운동복만 벗으면 바로 출근 가능한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발도 굽 있는 하이힐이었다.
류진은 그가 내민 상자를 봤다. 도넛이었다. 설탕을 듬뿍 뿌린 것, 초콜릿 바른 것, 하트 모양….
누나가 좋아하던 단팥 도넛은 없었다. 하긴 이제 그런 건 시장에서나 사 먹는 간식이 됐다.
“커피도 있어. 수석께서 요즘 건강 관리 중이라 카페인은 가급적 자제하는데, 내가 아침마다 커피 사는 게 습관이 돼서 말이야.”
“먹어. 이병. 먹어도 된다.”
기우희는 두 번이나 말했다. 유미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류진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초콜릿 바른 도넛을 집었다.
“소령님.”
기우희를 불렀으나 그는 도넛 상자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류진을 제외한 누구도 도넛을 먹지 않았다. 유미현이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편하게 먹어라. 너 생각해서 준비한 거니까.”
“저를요?”
“장수는 전장에 나서기 전에 든든하게 먹어야 해. 그래야 힘을 내서 싸우지.”
유미현은 먹으면서 들어라, 하고 말했다.
“미스터 빅이 황 씨를 죽였다는 증거가 필요해. 그래야 확실하게 몰아넣을 수 있거든.”
류진은 도넛을 삼켰다. 미스터 빅?
비서가 귀띔해 주었다. 권주혁의 별명인 ‘빅 브라더’를 달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 설계도….”
“비누는 사망 시기를 정확하게 추측하기 힘들어. 미스터 빅은 분명 이걸 걸고넘어질 거다. 자연 상태에서의 비누화 자체가 특수한 상황이니까… 짧으면 2년에서 3년, 길면 10년에 걸쳐서 진행되기도 해. 그게 결국 환경의 문제라.”
황효제의 죽음에는 타임 리미트가 있었다. 최대 6년이었다. 만약 그가 죽은 지 7년째, 8년째라면 해당 사건의 용의자가 셋으로 늘어난다. 곽재헌과 류연비를 한 팀으로 묶어도 둘이었다.
권주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효제 살인 혐의에서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그리고 총통이 권주혁을 솎아 낼 가능성은 낮았다. 피로 이어진 형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태껏 너무 많은, 또 밝혀졌을 때 파장이 큰 비밀을 공유했기 때문에.
설계도의 진짜 주인은 권일혁 총통이었다. 용도는 백조교 일망타진.
최유신이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
유미현은 법의학자의 힘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기록은 진실과 달라서 밝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고.
“뭘 믿는지가 중요하단다.”
류진은 먹던 도넛을 내려놓았다. 기우희가 우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가 무슨 일을, 어떻게 말입니까?”
“어려운 거 아니야. 딱 한 마디만 해 주면 돼. 누나가 죽은 뒤에, 황 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
“증인은 무척 강력한 증거란다.”
그래서 위증으로 밝혀졌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났다.
“그건….”
“네 누나를 위한 일이잖니.”
류진은 유미현을 노려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가짜 증거를 요구했다. 그 말인즉슨, 류연비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누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 말을 수십 번 했겠지.”
유미현의 질문은 차가웠다.
“그런데 누가 들어주던?”
류진은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쥐고 있다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 기우희가 준비됐냐고 물어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유미현은 정치가였다. 류연비를 끝장낸 자들과 동류인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것조차 이쪽을 방심하게 만들 목적으로 의도한 거였다는 생각이 들자, 류진은 방금 먹은 도넛을 토해 내고 싶어졌다.
“내 누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
“그 표현을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 보라는 얘기야.”
“…….”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신해범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아남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생각났다.
위증….
그라면 하고도 남을 것이다. 신해범이라면 위증은 물론, 사람도 죽일 수 있었다.
“용기 있는 자가 트로피를 쥔다. 살을 내주고 뼈를 지킨다. 이런 판에 박힌 소리는 안 할게. 나도 안 좋아하거든. 그래도 애기야,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신해범 같은 사람을 얻으려면….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구나.
류진은 차가운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목이 메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게 다 신해범 때문이다. 신해범이 없어서 내가 이런 일을 겪는다. 지금 이 자리에 그놈만 있었어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을 텐데.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떨렸다.
“저는 그 사람을 만난 적 없습니다.”
“나도 류와 이야기해 본 적 없어. 하지만 그의 결백을 믿지. 어떻게 그럴 것 같니?”
유미현은 곧장 이어 말했다.
“내 꿈을 위해서.”
“…….”
“너도 네 꿈이 있지 않니.”
류진의 꿈은 류연비의 명예 회복이었다.
“…잘못을 저지르면 되돌려받게 돼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얘긴가?”
“그것도 맞는 말이고….”
“그래도 진실이 밝혀지는 건, 악인들이 누릴 것 다 누린 다음이다.”
불쑥 끼어든 기우희가 말했다.
“이미 가질 거 다 가지고, 해 볼 거 다 해 본 뒤에, 남은 생애 풍족하게 지낼 수단까지 마련해 뒀으니 뒤늦은 심판이 두렵지 않지.”
유미현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류진의 손을 잡았다. 류진은 움찔했으나 유미현의 손이 따뜻해서, 또 누나의 결백을 믿는다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 뿌리치지 못했다.
“우리 애기 정말 착하구나.”
“…….”
“그래서 많이 힘들었겠다.”
수도 없이 겪어 봤다. 누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 상대방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사람들. 찢어 버리고 싶은 주둥아리들. 잘라 버리고 싶은 손가락들. 압정을 꽂아 버리고 싶어지는 눈들이 살아 숨 쉬는 내내 쫓아다녔다.
복수의 순간이 왔다.
뒤에서 신해범이 받쳐 주고, 앞에서 유미현이 끌어 준다.
‘너는 태풍의 눈이 될 거야.’
어디선가 신해범이 속삭였다.
류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미현 앞에서 자기가 한 말을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운전석에서 기우희가 말했다.
“대장님과 상의 후 말씀드리겠다.”
담배를 물고 있어서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그게 자기가 유미현에게 한 말을 놀리는 것 같아서, 류진은 발끈했다.
“소령님…!”
기우희가 피식 웃었다. 류진은 볼 캡을 최대한 눌러써서 빨개진 얼굴을 감췄다.
“네가 그렇게 말할 때, 유미현 표정 봤어?”
“아뇨….”
못 봤다. 발끝만 내려다보느라.
류진은 유미현이 화를 낼까 봐 무서웠다. 먹은 도넛 토해 내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자기 대답 때문에 기우희가 곤란해진다면 견딜 수 없었다. 잘못을 빌어도 이미 늦었다. 유미현 같은 사람이, 자기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었다.
다행히 유미현은 화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년만년 기다려 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해도.”
기우희는 유미현의 인내심이 길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예….”
류진은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유미현과 잠깐 만난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런 사람들은 타고나는 걸까? 아니면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에 제비 넘기까지 겪는 동안 저절로 몸에 밴 카리스마일까.
누나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다.
무섭지 않았을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밉보여도 자기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 사람들과 지내면서 등 뒤가 서늘하지 않았을까?
“아.”
손톱 사이가 따끔했다. 거스러미 뜯긴 부위에 피가 맺혔다. 류진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무섭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무섭거나 힘들다는 걸. 외롭다는 걸.
누나는 원래부터 약한 티를 내는 걸 싫어했다. 약해 보이면 무시당하고, 주변에 이상한 사람만 꼬인다는 말을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 때문이었다. 누나는 약할 때에도 강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류진은 손가락에 남은 잇자국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헌병대 찾아가 면회 신청이라도 할 셈인가?”
“예?”
“대장님과 상의한다면서.”
“아… 저는….”
“할 말 없지?”
솔직히 그랬다.
“예.”
홧김에 지르긴 했으나 대책이 없었다. 류진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풍기대 건물 밖으로 나오는 것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금 신해범은 헌병대에 있었다. 아무리 자진 출두했다지만 조사받는 입장에서 헌병대를 풍기대처럼 자유롭게 나갔다, 들어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령님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나라면 수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기우희는 바로 이어 말했다.
“그런데 넌 내가 아니잖아. 나처럼 되지도 못하고.”
“…….”
“이런 말 듣기 서운한가?”
“아닙니다.”
“그래야지. 사실인데.”
한적한 도로를 벗어나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기우희가 담배를 끄고 차창을 닫았다. 류진은 볼 캡을 고쳐 썼다.
“잠깐 기다려.”
기우희는 지프를 갓길에 세웠다. 류진도 익히 아는 커피 전문점 근처였다. 익숙한 브랜드 로고가 눈길을 끌었다.
“금방 올 테니까.”
“예.”
바로 옆 보도블록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출퇴근과 등교로 거리가 한창 분주할 시간이었다. 기우희는 시동을 켜 둔 채 내렸다. 류진은 그가 운전석 문을 닫을 때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넛 가지고 생색은.”
어째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저게 예닐곱 살짜리도 아니고. 먹는 거로 꼬시려 들어.”
류진은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는 기우희의 등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몇몇 사람이 기우희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선팅된 차창 밖이 소란해진 걸 보면.
류진은 얼얼한 손가락을 만지면서, 유미현이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내 누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그 표현을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 보라는 얘기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별안간 차창이 흔들렸다. 충격이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류진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한 남자가 있었다. 얼굴이 창문에 달라붙을 기세였다. 짙은 선팅 때문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지, 두 손으로 햇빛 가리개까지 하고 눈알을 굴려 댔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남자에게는 일행이 있었다.
“야, 하지 마.”
“여기서 내리는 거 봤다니까?”
“어쩌라고! 커피 마시러 왔겠지.”
“여기서 기다리면 사인받을 수 있냐?”
“아, 좀 그냥 가자고! 남의 차에 대고 뭐 하는데. 좆나 민폐야.”
류진은 차 문을 잠그고 싶었다. 그러나 안에서 소리가 나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이다. 소리를 듣고 그냥 가면 좋겠지만, 호기심에 문을 열어 볼 가능성도 있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류진은 겁에 질린 채 두 눈을 꼭 감고 빌었다. 종교는 없지만 아무 신이나 듣고 있다면 도와주세요. 저들이 문손잡이를 건드리지 않기를….
신은 테이크아웃 캐리어와 종이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그 신의 이름은 기우희였다.
“남의 차에서 뭐 하나?”
“으악!”
차창에 달라붙은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대퇴부나 오금을 걷어차인 모양인지 지프에 몸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일행은 기우희를 보고 당황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대단히 결례를 범했습니다!”
류진은 창밖을 보았다. 기우희에게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대는 남자들의 목소리와 태도가 묘하게 어설펐다.
자세하게 살펴본 결과 그 이유를 알아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었다.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보인 건 흰색 셔츠와 황갈색 넥타이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넷이서 똑같은 가방을 들었고, 구두도 같은 디자인이었다. 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한 순간 울컥했다.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얌전히 가던 학교나 갈 것이지….
기우희가 성격을 많이 죽인 게 보였다. 보는 눈이 많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무리에서 가장 키가 작은 남학생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며 사진 찍기를 청했다. 기우희가 정중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 한 번만요. 예? 제가 진짜 풍기대 팬이라.”
집요하고 막무가내였다. 친구들이 그냥 가자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류진은 조마조마했다. 당장이라도 기우희가 아포가토를 학생의 안면에 투척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장 몇 시간 뒤 나갈 속보가 <풍기교육대 기우희 소령, 민간인에 묻지 마 커피 테러>일 것이다.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이미 충분히 기우희에게 폐를 끼쳤다.
류진은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꾸깃꾸깃한 일회용 마스크 하나가 잡혀 나왔다. 언제, 무슨 용도로 쓴 건지, 왜 여기에 넣어 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스크는 볼 캡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 하관을 덮기에 충분했다.
얼굴을 가린 류진이 손잡이를 잡은 순간이었다.
“거기 학생들! 모여서 뭣 하는 거야?!”
헌병대의 단속 차량이었다. 근무 차량이라고도 했다. 까만색이 대부분인 풍기대와는 달리 녹색, 검정, 갈색이 어우러져 진짜 ‘군용차’처럼 보였다. 류진은 황급히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어깨를 움츠렸다.
학생들이 허둥지둥 물러갔다. 길에 여럿이 모인 모습을 군인에게 들키면 단속 대상이 된다. 교복을 입은 이상 신분을 감출 수 없고, 학교로 공문이 내려가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오만상을 찌푸린 기우희가 지프에 탑승했다. 아니, 조수석에 커피와 쇼핑백을 던져 놓고 다시 내렸다.
차 안에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그러나 류진은 기쁘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기우희가 헌병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헌병대원은 성재경 나이쯤 되는 것 같았다. 군인치곤 순박한 인상이었으나, 류진은 그가 헌병대 제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돌아온 기우희의 얼굴이 밝았다.
“잠깐 만나게 해 준단다.”
“예?”
“원래 면회 안 되는데, 따로 얘기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대장님.”
“저 사람이요? 어떻게요?”
“운이 좋았지.”
신해범이 헌병대에서 새 친구를 사귀었다. 심지어 그는 신해범이 부탁한 커피와 옥수수 스콘을 사기 위해 해당 커피 전문점을 찾아왔다고 했다.
“예?”
류진은 당황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놀라웠다. 신해범이 유치장에서 어젯밤을 보냈다는 것도, 그새 심부름을 시킬 만큼 친해진 헌병대원이 있다는 것도.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말한 사람이 기우희가 아니라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기우희는 헌병대 차량의 뒤를 따랐다. 운전석 등받이를 붙잡은 류진이 물었다.
“지금 갑니까?”
“그럼 언제?”
“저는…!”
“얼굴 잘 가리고 있네.”
기우희의 얼굴에는 희열까지 깃들었다.
“안 됩니다! 들키면 큰일 나요!”
“왜? 일이 재미있어졌는데. 햇병아리 정류진 이병의 대모험.”
“지금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류진은 어렴풋이 느꼈다. 지금 기우희는 신해범을 놀라게 해 줄 셈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거나 먹어.”
아이스크림이 녹은 커피는 뜨뜻미지근했다. 그래도 달짝지근하니 류진의 입맛에 딱 맞았다. 그러나 맛있는 커피를 즐기기에는 앞으로 닥칠 일이 두려워서, 류진은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신분증 검사 따위는 없었다. 류진은 자기가 정가 상품인 기우희에게 붙은 비매품, 사은품 같은 존재이겠거니 했다. 아니면 투명 인간이나.
만남의 장소는 면회실이 아니었다. 신해범이 밤을 보냈다는 유치장도 아니었다. 헌병대원에게 안내받아 간 곳은 실제 군인들이 사용하는 흡연실 앞이었다. 손잡이에 수리 중 팻말이 걸려 있었다.
“좁고 외져서 저희는 잘 안 씁니다. 그래도 십오 분 안에는 나오셔야 합니다. 사람 없는 데서만 피우는 놈들 때문에… 표지판 걸려 있어도 보통 무시합니다.”
“명심하지.”
류진은 커피와 스콘이 담긴 쇼핑백을 들었다. 신해범 몫의 아침 식사였다. 신해범은 헌병대원에게 부탁했으나, 계산은 기우희가 했다. 그는 지갑에서 고액지폐 두 장을 꺼내 해당 대원에게 내밀었다.
지폐를 받아 넣은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입구 쪽에 있겠습니다.”
“십오 분. 정확하게 지키지.”
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자와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눈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신해범을 만나기 위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리를 모른 척하게 될 줄이야.
이 문 너머에 신해범이 있었다. 그를 만나면 소리치고 싶었다. 나를 책임지라고. 내가 당신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고.
나는 권세혁의 인생을 망치고, 위증을 요구받고, 눈앞에서 뇌물이 오가도 그러려니 하게 됐다고.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문이 열렸다.
신해범은 창가 쪽에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머리는 감지 못해 부스스하고, 겨우 세수만 한 얼굴은 창백했다. 쩍쩍 갈라진 입술에 담배를 문 채 이쪽을 돌아본 그가 ‘어’ 소리를 냈다.
두 눈이 끔뻑끔뻑.
“…헛것이 아니네.”
“당신.”
“그런데 이상하군. 내가 주문한 건 모닝커피와 무설탕 스콘인데.”
“여기.”
류진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처먹어.”
그렇게 아침밥을 기다렸다면 하는 수 없었다. 그래, 배가 고파서 나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류진은 신해범의 품에 쇼핑백을 안기고 기우희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괜히 왔습니다. 얼른 가요.”
“정 이병.”
“얼른 가요, 소령님… 우리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잖아요.”
“질문할 거 있잖아.”
“소령님이 말씀해 주세요.”
기우희의 목소리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어리광 부리지 마라.”
류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져, 이병.”
신해범이 손뼉을 두 번 쳤다.
“내가 알았어. 쟤 언제 한번, 기 소령한테 옴팡지게 혼날 줄 내가 알았다고.”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키득거리는 얼굴을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류진은 신해범에게 달려가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의자에 앉아 리드를 열고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병.”
기우희가 재촉했다. 류진은 쭈뼛쭈뼛 앞으로 나섰다. 신해범은 흡연실의 녹슨 철제 의자를 풍기대 12층 사무실의 검은 가죽 소파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야기 나누십시오.”
신해범에게 말한 기우희가 문을 닫고 나갔다. 류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신해범이 손짓했다.
“이리 와. 빵 먹어.”
“…안 먹어.”
“웬일이냐. 우리 먹보 병아리가.”
“장난치지 마.”
“기 소령 재주도 좋다. 저런 부관을 데리고 있는 나는 참 행운아야.”
“나는? 안 반가워?”
“안 반가워.”
“어떻게…!”
“걱정돼서 안 반가워. 그렇게 가려도 우리 꼬꼬 미모는 빛이 나거든.”
신해범이 씩 웃었다. 그는 커피만 마시고 스콘에는 손대지 않았다. 류진은 그의 입을 벌린 뒤 빵을 쑤셔 박아 주고픈 심정이었다.
먹어. 얼굴 다 상했잖아. 늙고 병들었으면 많이 먹기라도 하란 말이야. 그래야 체력이 돼서 버틸 거 아니야….
류진은 마스크를 내렸다. 모자도 벗었다.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과 신해범의 시선을 느꼈다.
“당신 옷 입어서 화났어?”
“아니. 잘 어울려.”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류진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나 유미현 만났어.”
“뭐라고 해?”
“나보고 위증을 하래. 그래야 누나의 결백을 확실하게 밝힐 수 있대.”
“뭐라고 대답했어?”
“당신이랑… 의논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신해범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류진을 응시했다.
“무슨 대단한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유미현은 정류진을 시험했다. 녀석이 우리 배의 선원이 맞는지.
그리고 이 병아리는, 자기가 정답을 골랐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어깨에 기댔다. 눈을 감으니 햇살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왜 정답인데?”
“네가 군인 신분이라는 걸 알려 준 게 되니까. 보안과 절대복종. 불복하면 사형.”
“그게 그렇게 중요해?”
“높은 사람들은 증명받고 싶어 해. 사냥개가 제멋대로 날뛰면 곤란하니까. 이런저런 이름으로 목줄을 채워 놓는 거지.”
“당신이 풍기대장인 것처럼?”
“바로 그거야.”
신해범은 웃으며, 손도 대지 않은 스콘을 류진에게 내밀었다.
“먹어.”
“배 안 고파. 도넛 먹었어.”
“네가 겨우 그걸로 만족할 그릇이야?”
류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신해범의 왼손을 보았다. 핑거 스프린트를 끼운 엄지손가락을 뺀 나머지 손가락을, 류진은 조심스럽게 모아 쥐었다. 신해범은 스콘을 도로 포장 비닐에 쌌다.
“그럼 가져가서 먹어라.”
“당신 먹으라고.”
“아침부터 밀가루 먹으면 살쪄.”
류진은 입을 벌렸다. 헌병대원에게 심부름시킨 걸 그새 잊어버렸나? 혹시 조기 치매?
정작 신해범은 자신의 유머에 만족하고 있었다.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면 알았다. 저 오만하고 귀족적인 얼굴.
류진은 신해범의 윤곽이 뚜렷한 윗입술을 응시하다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음?”
“담배.”
“음?”
“못 들은 척하지 말고. 하나 줘.”
“아니, 못 들은 건 아닌데.”
신해범이 싱글거리며 류진의 약을 올렸다.
“이게 귀한 돛대라서.”
“거짓말.”
“진짜야. 헌병 놈들하고 친해지려고 전 재산 털었어. 이제 뭐 하나 얻어먹으려면 빤쓰 벗어 줘야 해. 꼬꼬야, 소령한테 말해서 영치금 좀 두둑하게 넣어 줘.”
“지금 장난쳐?”
“진심이야. 완전. 매우. 간절하게.”
류진은 화가 났다. 그는 신해범의 손을 놓고, 관자놀이를 덮은 머리칼을 걷어 올려 동그란 흉터를 보여 주었다.
“나 이렇게 만들어 놓고, 담배 하나 주는 게 아깝냐?”
신해범은 웃기만 했다. 류진은 포기했다.
“그럼 지금 피우는 거 내놔.”
“안 되지.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돛대는 죽은 조상이 관짝 열고 나와서 아이고 후손, 나 그거 한 대만 주게, 해도 줄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물건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얼굴로 담배 연기가 쏟아졌다. 류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매워서 눈물이 찔끔 났지만 피하지 않았다. 숨을 참고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오.”
“개새끼야. 그거 내놔.”
류진은 신해범의 손에서 돛대를 낚아챘다. 그가 말리기도 전에 깊이 들이마시고, 세게 내뱉었다. 입 안에 고이는 타액을 삼키자 목구멍이 홧홧해졌다.
“내가 이런 것도 안 해 봤을까 봐?”
“안 하게 생겼어. 우리 꼬꼬는.”
“지랄.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당연히 기억하지.”
기억했다. 헝클어진 빨간 머리, 피어싱 자국 숭숭 난 귀. 헐렁한 가죽 재킷을 제외한 모든 옷가지가 헌 옷 수거함에서 꺼내 온 것 같았다. 새끼 수컷이 덩치 커 보이려고 온몸의 털을 반대로 빗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입성은 허름해도 얼굴에서 광채가 났지.”
“칭찬이야 뭐야….”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피우는 류진의 귓바퀴가 봉숭아 꽃잎 색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목도. 신해범은 고개를 숙여, 긴 모가지에 두드러진 푸른 핏줄을 혀로 쓸어 올렸다.
“아!”
“왜?”
“개가 핥는 줄 알았어.”
“야.”
“할 때마다 물어뜯잖아.”
신해범은 꿈꾸는 기분이었다. 지금 앉아 있는 곳이 헌병대의 낡은 흡연실이 아니라 넓고 세련되고 아득한 풍기 교육대 본관 12층의 자기 사무실 같았다.
딱딱한 철제 의자 대신에 푹신한 가죽 소파. 꼬깃꼬깃한 운동복과 발가락 뚫린 슬리퍼 따위가 아닌 각 잡힌 제복과 반짝반짝 잘 닦인 워커.
정류진과 함께 있으면 자기가 누군지 자각하게 된다.
“대장님.”
기우희가 들어왔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에게서 담배를 빼앗고, 마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을 떠밀었다.
“이제 가.”
“신해범, 나….”
“꾸물거리지 말고 가.”
신해범은 기우희에게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수석에게 전해. 이병은 위증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나서면 더 쉽게 해결될 문제다.”
“예.”
류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신해범은 구구절절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당신은 언제 와?”
신해범은 류진의 질문을 무시했다. 기우희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분명히 전해. 그 일은 내가 한다.”
“…알겠습니다.”
“어서 가라.”
류진이 떠밀리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그를 기우희가 앞에서 끌고, 신해범이 뒤에서 밀었다.
“잠깐만요. 소령님. 저 아직 할 얘기가…!”
“고집부리지 마. 이병.”
“그게 아니라!”
“우릴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문이 닫혔다. 신해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류진은 급하게 문에 매달렸으나,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헌병 때문에 황급히 볼 캡을 쓰고 마스크를 올렸다. 다행히 그는 기우희에게만 관심 있었다.
“어떻게, 이야기 나누셨습니까?”
“덕분에. 자리 마련해 줘서 고맙군.”
기우희가 또다시 지폐를 건넸다. 헌병대원은 조금 민망해하는 기색이었으나 현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프가 안전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도록 차단기를 수동으로 올려 주기까지 했다.
류진은 뒷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기우희에게 붙잡혔던 손목에 빨간 손자국이 선명했다.
“가서 파스 붙여.”
“괜찮습니다.”
“나도 처음이다. 뒷구멍으로 드나드는 거. 그런데 저놈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 사람 안 오는 장소도 그렇고, 아마 부대 내 CCTV 사각지대를 꿰고 있을 거다. 용돈깨나 쏠쏠하게 벌겠군.”
“예….”
“원래 이런 일은 부대장님 전문인데.”
“예….”
“내 애인으로 오해받아도 기분 나쁘진 않지? 직급 있는 놈 중에 무명 연예인, 가수 연습생 옆구리에 안 끼고 있는 놈이 없거든.”
“예… 네?!”
“내 말을 안 듣고 있군.”
류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반갑지 않았어? 대장님 만나서?”
기우희는 농담조로 말했으나, 류진은 도저히 맞장구칠 수 없었다. 신해범을 만났는데 반가움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의미로 자신을 불안하게 했다.
신해범이 기우희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수석에게 전해. 이병은 위증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나서면 더 쉽게 해결될 문제다.’
위증할 필요가 없다는 얘긴 안심이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 말이었다. 신해범은 자기가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설명해 주지 않았고, 언제 나오느냐는 물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소령님은 아시죠?”
“아니.”
“소령님, 제발.”
“나도 몰라. 모르는 걸 어떻게 말하나?”
기우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 날 취조하는 건가, 이병?”
“그런…!”
“그럼 입 닥치고 있어!”
류진은 흡연실에서 쫓겨나기 직전 신해범이 바지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어 준 빵을 꺼냈다.
비닐에 싸여 있었지만 다 뭉개지고 부서졌다. 하나도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꼭 비참하게 쫓겨난 자기 모습 같았다.
기우희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조수석 서랍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 류진이 앉은 뒷좌석으로 던졌다.
“그쳐.”
“죄송합니다. 죄송….”
“당장 그쳐! 꼴 보기 싫다!”
류진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한 울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힉, 힉,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기우희는 가슴에 금이 쩍쩍 가는 기분이었다.
신해범이 무슨 생각인지 알았다. 그는 자기가 위증을 할 셈이었다.
지금까지 권주혁을 보필한 부하로서.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간의 행보를 이용해서. 신해범은 권주혁을 황효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넣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황효제를 죽였다고 말하겠지. 권주혁의 사주를 받아서.
재판에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을 신해범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기우희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런 계획을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정류진에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뜩이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놈이 어떻게 나올지 불 보듯 훤하니까. 차라리 자기가 위증을 하겠다고 나서겠지.
하지만 그건 신해범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기우희는 핸들에 엎드려 버렸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한꺼번에 안고 가겠다는 뜻인가….
혼자서.
그건 지독하게 외로운 일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신해범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되었다.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기우희가 보기에는 그랬다.
복수를 위해 자존심을 내던진 것과는 달랐다. 요즘 신해범은 마구잡이로 부딪쳤다. 자기 몸뚱이가 뭐든 부숴 버릴 수 있는 미사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성록이 죽어서 상심했다고 생각했다. 쉬지 않고 일해서 허무함을 잊어 보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신해범의 방식이 달라진 건 그의 최우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복수만 바라보고 내달리던 자에게 보호하고픈 대상이 생겼다. 정류진을 자기가 서 있던 안전 구역으로 밀어 넣으니 정작 본인은 안전선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죽을 것 같다고는 생각했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복수 이외에는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 보여서.
그래서 끌렸다. 우리는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기우희는 신해범이 새로운 나라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속에서 솟구치는 덩어리를 삼키려고 애쓰니 빗장뼈가 덜컹거렸다.
“정류진.”
“예….”
그래도 저 애를 만난 걸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해범은.
지금껏 그의 행보를 보면 알았다. 눈알이 삐끗해서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안 보이나 싶을 정도로 정류진에게 치근대던 모습. 자기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녀석을 못 잡아먹어 안달을 했다. 병아리니, 꼬꼬니 하는 별명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람이 그렇게 유치해질 수가 없었다.
사랑에 눈멀어 다 때려치우고 정치 망명 신청하지 않는 건 다행인데.
그렇다고 산전수전 함께 겪은 부관의 면전에서 살인죄를 뒤집어쓰겠다니….
신해범 풍기 교육대장.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명령을 받아, 철혈일성의 존속을 위협하는 물증을 가진 생존자를 살해.
불명예로 얼룩질 이름을 생각했다. 기우희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휴지는 부여잡으라고 던져 준 게 아닌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소리도 못 내고 꺽꺽대는 정류진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이걸 미워할 수도 없고.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는, 저는. 제가….”
“근데 왜 울어? 정확히 이유가 뭐야?”
“모… 모르겠습니다.”
류진은 혼란스러웠다. 신해범에 대한 미움, 원망, 안타까움, 슬픔 등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정신을 못 차렸다.
내가 왜 이럴까.
왜 신해범에 대한 미움도, 믿음도 아닌 걱정이 앞서는 걸까.
기우희가 안전벨트를 풀고 하차했다. 잠시 담배라도 피우려나, 했지만 그는 류진이 있는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령님….”
“이리 와.”
기우희는 류진을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반대쪽 손으로는 어깨를 쓰다듬었다. 마른 몸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울지 말라고 다그치지 말 걸 그랬다. 기우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언제부터 대장님께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류진은 부정하지 못했다. 기우희를 민망하게 만들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 깨달았다. 헌병대 흡연실에서 신해범을 만났을 때, 그 까칠한 얼굴과 마주했을 때, 자신은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걸.
취조실로 들어가기 전, 기우희와 정류진을 데려왔던 헌병이 살짝 다가왔다. 그는 신해범에게 오전에 있었던 뜻밖의 사실 하나를 알려 주었다.
사십 년 경력의 마스터 테일러, 삼대에 걸쳐서 왕가의 예복을 지어 온 가문의 조광현이 처형당했다. 권주혁이 충용절에 입을 예복을 성의 없이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신해범은 왕족들이 가족의 기념일에만 착용하는 복잡한 디자인의 황금색 용포를 떠올렸다. 원단 짜기부터 시작하여 전통 방식의 복잡한 재단을 거쳐 기계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섬세한 자수까지 들어가는 예복이었다. 솜씨 좋은 테일러 너덧이 달라붙어도 석 달은 족히 걸린다고 들었다. 왕족조차도 생애 딱 두 번 맞추는 옷이었다. 결혼할 때, 그리고 죽음을 앞두었을 때.
살아생전 용포를 두 벌 가지는 왕족은 행운아다. 안정적으로 결혼하여 후계자를 생산했고, 제작 기간이 긴 용포를 맞춤한 시기에 완성할 정도로 준비가 된 상태에서 죽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왕족은 결혼할 때 맞췄던 용포를 입고 저승길을 걸어갔다. 신룡관에 전시된 용포의 소유자는 쿠데타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만백성의 지지를 받은 군주거나, 타고난 복이 있어 태평성대와 장수를 누린 자였다.
결혼하지 않은 권주혁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군복을 주로 착용했다.
시기와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가 용포를 맞추기로 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데드라인이었다. 권주혁이 요구한 날짜가 촉박하여 조광현은 자기 본점의 기계를 사용해 용포에 들어갈 자수의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 사실이 권주혁의 귀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지기에 가치가 있는 옷이었다. 그중에서도 용무늬 자수는 검증된 장인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는 것이 관례였다. 권주혁은 오랫동안 왕가의 예복을 만들어 온 집안의 마스터 테일러가 이를 모를 리 없으며, 그런데도 기계 작업을 했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격분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권주혁은 조광현의 얼굴에 용포를 내던지고, 조광현과 그의 아들을 권총으로 쏴 죽여 버렸다. 차와 다과를 가지고 들어갔던 하녀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는 이유로 따귀를 얻어맞았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헌병의 말에 따르면 권주혁은 무슨 약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그러니까 결국 조심하라는 얘기였다. 그가 헌병대 본관에 도착한 건 조광현과 그 아들의 시신에 온기도 식기 전이었으니까.
권주혁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신해범은 그가 던지는 라이터를 받아 불을 붙여 주었다. 양안의 시력이 맞지 않아 조금 실수했지만, 권주혁은 눈치채지 못했다.
잿빛 연기가 눈앞에 아른아른했다. 권주혁은 스피커를 끄고 블라인드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그는 비공개 조사를 진행할 셈이었다.
신해범은 권주혁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헌병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는 사람을 죽여 놓고 싱글벙글 웃는 셈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 그렇게 소름 끼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권주혁이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상태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조광현과 그 아들의 억울한 죽음은 참사였다. 미친놈이 말고삐를 쥐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참극의 다음 희생자가 내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신해범은 척추 끝에서 치미는 짜릿함에 몸서리쳤다.
“…왕자님은 자신의 섣부른 판단과 무모함을 깊이 뉘우치고 계십니다. 본인 일로 가족 간 불화가 생기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그게 전부야?”
“왕자님의 뜻은 그렇습니다.”
“장 대관은 뭐라고 하던?”
“그분은 장군께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겁니다.”
권주혁이 혀를 쯧, 찼다. 신해범은 그 뱀눈에 서린 안도의 빛을 보았다.
“장군과 부인께서 뭘 염려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대관께선 왕자님을 광성으로 보낸 걸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권세혁의 고교 진학 문제를 두고 장두현과 장승희의 의견이 엇갈렸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장승희는 장차 총통이 될 아들이 하루빨리 중앙 사교계 문화를 익히고 인맥을 쌓길 바랐고, 장두현은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길 바랐다.
결과는 장승희의 뜻대로 되었으나 권세혁은 어른들이 바라는 이상향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고교 생활 3년을 바친 배구는 빈말로도 상류층의 스포츠가 아니었고, 도핑에도 연루되었으며,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상대와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장두현은 딸이 손자 양육에 실패했다고 봤다. 그 책임은 조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권주혁에게도 있었다.
그는 장두현이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긴장했다.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자들이 서로를 원망하고 탓하는 것처럼.
신해범은 권주혁의 불안을 일시에 날려 줌과 동시에 그를 위로했다.
“대관께선 왕자님이 장진에서 겪은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장가에서 보유한 전투 잠수함 한 대를 풍기 교육대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모쪼록 장군께서 너무 심려치 않으셨으면….”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쓰겠냐?”
“예?”
권주혁이 활짝 웃자 한쪽 얼굴이 기괴할 만큼 심하게 일그러졌다.
“첨부터 은퇴할 깜냥이 아녔던 게지.”
“…….”
“잠수함 준다니까 헤벌레해 가지고는.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째!”
신해범은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꾸지람을 들었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다. 사람 좋은 척 야금야금. 유미현이랑 하는 짓이 똑같아.”
권주혁의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를 알겠다. 양면 색지 같은 두려움과 분노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장두현이 자신과 권세혁 사이에 끼어들어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태를 우려했다.
권주혁의 생각에, 장가의 전투 잠수함 기부는 풍기 교육대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초석 다지기였다. 그건 지금 유미현이 사격장을 새로 만드는 데 예산을 지원하는 일과 비슷했다.
신해범은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권주혁의 자의식 과잉이 아니었다. 어느새 풍기 교육대는 당대의 실세들이 앞다투어 참전하는 힘겨루기의 장이 되었다.
권주혁은 빼앗기느니 부숴 버릴 작자였다. 황금알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그가 황금 거위의 배를 갈라 버리지 않을까, 신해범은 그것이 염려스러웠다.
하성록의 허무한 죽음은 정계와 군부에서 상당한 화제였다. 신룡관에서는 반란군 수괴가 죽고 그들 집단이 해체되었으니 막대한 유지비가 드는 풍기 교육대를 축소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나오는 중이었다.
아직 적림부에서 논의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하성록의 죽음이 그토록 빨리 받아들여진 이유가 거기 있었다. <백사자>가 사라진 지금, 귀족과 정치가들에게 풍기 교육대는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풍기 교육대는 처음부터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사병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최근에는 유미현 수석 전략가의 개입으로 내부사정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권세혁 왕자의 의무 복무 기간이었다. 이유를 차치해도, 복무 기간 중에 소속 부대를 옮기는 건 왕자의 신상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었다. 권주혁이 그렇게 흠집 하나 없이 관리하고 싶어 하는 권세혁의 이미지.
본인이 그 부분까지 계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눈앞의 권주혁은 장두현에 대한 경계심으로 잔뜩 날이 섰다. 신해범은 저게 권주혁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권세혁 왕자의 총통 즉위라는 공공의 목표를 가졌으면서도 서로 힘을 합치거나 상대방에 고개 숙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독불장군 권주혁은 상황의 변화를 재빨리 눈치채고 영리하게 노선을 바꾸는 유미현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신해범은 눈을 깜박거렸다. 지금껏 권주혁의 곁을 지켜서 안다. 호탕한 척 웃음거리로 삼았으나, 기실 권주혁은 자신의 신체 콤플렉스에 민감했다. 그래서 자꾸만 상대방의 눈치를 봤다. 속마음을 읽으려 들었다. 눈빛이나 표정, 말투, 사소한 제스처에 일일이 트집을 잡고 의미를 부여했다. 비천한 출신 성분의 부하라도 의혹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그동안 무해한 바보처럼, 무식한 양아치 깡패처럼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고개를 든 신해범은 권주혁의 얼굴을 응시하다 문득 그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권주혁은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장두현을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화려한 외모도 한몫했다. 권세혁이 물려받은, 동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뚜렷한 이목구비. 큰 키와 건장한 체격. 결정적으로 장두현은 노화가 늦었다. 그것이 약물이나 시술의 힘이든, 축복받은 유전자든 간에.
장두현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반면 권주혁은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다. 신해범은 그것 또한 유전병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왕자께선 장군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십니다. 애초에 왕자께서 지금의 자리에 오르신 것도, 장군의 적극적인 원조와 믿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말이 나왔다.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환심을 살 수 있는지 알았다. 신해범은 권주혁의 자존심을 살려 주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했다.
“왕자님이 가장 방황하실 때 앞장서서 끌어 주고, 잡아 준 분은 장 대관이 아니라 장군님이십니다.”
“…….”
“똥개도 첫 주인은 기억합니다.”
“그걸 아는 놈이!”
권주혁의 입에서 타액이 분수처럼 튀었다. 신해범은 눈꺼풀 속으로 스미는 액체를 느꼈다.
“유미현이 주는 거 받아먹을 땐 좋았지?”
마냥 눈을 깔고 있으면 오히려 반항적으로 비친다. 신해범은 권주혁의 눈치를 보는 척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그년은 너한테 하등 도움이 안 돼. 지금이야 이것저것 퍼 주면서 니들 환심 사려 들겠지. 한데 그년 돈이 얼마나 갈 것 같냐? 유미현이는 장사꾼이야, 장사꾼. 투자해서 수익이 안 나오면 바로 팽이라 이 말이야!”
도떼기시장에서 생선 한 마리 팔아 본 적 없는 권주혁이 장사꾼을 의리 없는 족속으로 매도하는 게 우스웠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유미현에 대한 열패감은 잘 알겠지만.
신해범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장군.”
고개를 푹 숙였다. 권주혁의 손이 목덜미를 꽉 잡고 누르는 듯했다. 뱀 같은 시선에 정수리가 따갑다.
“어떻게 해서든 충용절 날짜는 맞추겠습니다. 왕자님께서도 복귀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셨습니다.”
“한때 바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예…?”
신해범은 눈을 크게 떴다. 가능한 순진한 목소리로, 비 오는 날 흠씬 두들겨 맞은 개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네가 알아서 처신한다고 하지 않았어! 신중하게! 불장난이 어쩌고 하면서!”
“무슨 말씀이신지….”
“내 형수!”
아.
신해범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권주혁이 장승희를 형수라고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신해범의 기억상으로는 그랬다. 두 사람은 족보로 이어진 가족이지만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였다. 권세혁을 매개로 맺어진 의리는 약간의 외압으로도 흐트러졌다.
신해범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장군!”
“네놈 때문에 나까지 작살 나게 생겼다!”
변명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권주혁의 화만 돋울 테니까. 정보의 출처도 묻지 말아야 했다.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보이니까.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귀 옆으로 담배꽁초가 떨어졌다. 신해범은 권주혁이 바닥으로 내던진 담배를 허둥지둥 맨손으로 덮어서 껐다.
손바닥이 뜨겁고 단백질 타는 냄새가 났다. 아프지는 않았다. 정류진에게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두현이 약속을 어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순순히 전투 잠수함 기부 의사를 밝혔을 리가 없다.
장두현을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권세혁이 유력한 차기 총통 후보로서 입지를 다지는 시기에 장승희의 부정을 밝혔다간 장가가 잃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철갑상어 포획이나 힐 스톤 그로우의 밀렵도 총통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손자의 몸이 채 낫지 않은 상황에서. 총통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는 충용절을 앞두고서.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장진을 빠져나가게 두지도 않았겠지.
최초에 권주혁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신해범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권주혁의 신뢰나 총애, 믿음 덕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권주혁은 이 부적절한 관계가 조용히 끝나고, 소리 소문 없이 덮이길 바랐다. 아무도 모르게.
권주혁은 부정한 남녀상열지사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원인제공자로써 된서리를 맞을 위치에 있었다. 권세혁을 풍기대에 집어넣음으로써 장승희와 풍기대를 이어 준 자가 바로 권주혁이었다.
신해범은 벌벌 떨면서 킥킥 웃었다. 이제 와 성을 내는 이유를 알겠다. 권주혁을 불안하게 만든 건 장두현이 아니었다. 장승희였다. 이제 권주혁은 장승희의 마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때의 지나가는 바람은커녕, 불장난 수준도 못 되기는커녕….
장진에서 돌아온 뒤, 신해범은 장승희를 부쩍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전부 이유가 있었다. 장승희는 장두현에게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부정한 관계를 그만두라는.
남편을 실망시키기 전에.
아들의 빛나는 미래를 망치기 전에.
장가의 명예와 존속이 너 때문에 위태롭다고.
장두현의 경고는 장승희의 화를 돋웠다. 뒤늦은 사춘기는 불붙은 다이너마이트였다. 장승희는 이제 어머니의 부정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했던 소녀가 아니었다.
“일어나 앉아라.”
신해범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권주혁의 따가운 시선에 뺨이 베일 것 같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장군….”
“쯧쯧….”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할복이라도 하라시면,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제 입으로 한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앉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장두현의 경고로 패닉에 빠진 장승희가 권주혁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건 아마 풍기 교육대장과의 관계를 지속해 달라는, 적어도 이 일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 달라는 청이었을 것이다.
권주혁은 장승희의 요구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권세혁의 풍기 교육대 입대를 밀어붙인 당사자였다. 그것만으로도 권주혁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풍기 교육대장과 총통 부인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을 테니.
신해범은 권주혁이 아랫입술을 씹으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멈출 수 없으면 끝까지 가야지.”
“…….”
“어차피 장 대관도 똑같아.”
신해범은 속으로 웃었다. 권주혁의 본의가 드러나는 말이었다.
어차피 장두현도 똑같다. 그도 딸의 부정이 조용히 묻힌다면, 총통의 귀에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입 다물 작자다.
권주혁이 사람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두현이 이 나라의 법도와 풍기를 중요시하는 자라면 혼자 불륜 죄를 뒤집어쓰겠다는 자신을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장두현은 잠수함을 내주면서까지 거래에 응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틀린 게 없다니까.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치는데 무릎이 후들거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놀라워서였다. 장승희가 권주혁에게 자신의 선처를 부탁할 줄은 몰랐다. 공범이 되자는 요청은 평생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데.
뜻밖의 은혜를 입은 것 같기도, 진짜로 여자 고혈 빨아 먹는 거머리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나를 지켜 주는 대가로, 장승희는 권주혁에게 뭘 약속했을까?
권세혁은 어젯밤 21시에 신계동의 자택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임찬영 편으로 전해 왔다.
부재중인 신해범을 대신해 기우희가 그를 만나러 갔다. 일조점호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출발한 기우희는 세 시간 반 만에 복귀했다. 진치우는 그를 12층으로 불러들인 뒤 권세혁의 몸 상태를 물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왜?”
장진에서는 왕자가 고귀한 혈통의 뛰어난 회복력으로 거의 완치되었으며,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할 뿐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물론 진치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왕족이든 귀족이든 다 똑같은 사람이었다. 요즘은 예닐곱 살짜리 아이도 총통이 날아오는 총알을 손으로 막는다거나, 아파도 하룻밤이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기우희는 잠자코 턱을 매만졌다. 권세혁에 대해 생각하는 눈치였다.
“소파에서 일어나지를 않더군요.”
“그래?”
“컨디션은 좋아 보였습니다. 확실히 회복이 빠른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대중 앞에 나설 수준이라고 하면, 글쎄요.”
“휠체어 타나?”
“있는 건 봤습니다.”
전동 휠체어와 알루미늄 크러치가 소파에 앉은 권세혁 가까이에 있었다.
진치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영구적인 장애는 아니겠지?”
왕가에서는 장애인을 총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외국인의 피가 섞인 혼혈도 마찬가지였다. 1차 공주의 난 이전에는 여성이 왕위를 승계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계보에 여자 왕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해당 세대에 남자 형제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재임 기간도 짧았다. 그래서 1차 공주의 난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MVP가 장애를 얻는다고 해도.”
기우희는 피식 웃었다. 설령 권세혁의 일신상에 문제가 생겨 총통 즉위가 불가능해져도, 권주혁이 다른 후보를 물색하는 걸 장씨 부녀가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제가 신룡관에 무혈입성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신계동 둘째는 가능성 없나? 권무혁이.”
“나이도 어리고, 타고나기를 몸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성격도 소극적이라 장가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진치우가 뒤통수를 벅벅 긁자 허연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기우희의 입매가 떨렸다. 아무래도 소파를 흰색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 신해범이 돌아오면 건의를….
진치우는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컨디션 좋아 보였다며. 그동안 잘 먹고 잘 쉬었나 보지.”
“부상은 운입니다. 호전되다가 갑자기 나빠진 경우를 많이 보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권세혁의 컨디션이 좋아 보였던 건 진통제 효과일 거라고 기우희는 말했다.
“얼굴 자체는 예전보다 수척해졌습니다.”
“살 많이 빠졌어?”
“예. 그리고 정 이병 소식을 묻더군요.”
장승희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였다. 권세혁이 대뜸 상반신을 앞으로 쭉 내밀어 기우희는 흠칫 놀랐다.
“대답은 못 했습니다. 총통 부인이 바로 돌아와서요.”
“하이고….”
진치우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정류진과 살이 쭉 빠져 수척해진 권세혁이 나란히 선 모습을 상상하고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지 않냐? 진짜 청춘이다, 청춘. 비뚤어진 청춘. 범 새끼도 그렇고 MVP도 그렇고, 두 놈팡이가 존만이 후장 맛에 환장해서는….”
“부대장님.”
“아,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가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진치우는 뭐라 항변하려다가 기우희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기우희는 손등으로 왼뺨을 눌렀다. 따끔따끔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신계동 저택에서 권세혁과 이야기할 때 동석했던 장승희의 시선이 닿은 부위였다. 눈빛이 말 그대로 살벌했다. 바짝 열 오른 말벌이 쉴 새 없이 독침을 쏘아 대는 기분. 심지어 장승희는 기우희가 일어나기 전, 권세혁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 주겠다며 가족 앨범까지 꺼내 왔다.
“뜬금없이?”
“자랑하려는 셈이었겠지요.”
“무슨 자랑? 우리가 이만큼 잘 먹고 잘살았다?”
“예.”
진치우가 허, 하고 혀를 찼다. 기우희는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어떻든?”
“뭐… 근사하더군요.”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스튜디오에서 특정한 콘셉트를 잡고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장승희는 그중에서도 잘 나온 A컷을 고르고 골라서 모아 놓았다. 확실히 세련되고 보관 상태가 좋은 앨범이었다.
“총통 부인의 젊은 시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MVP 얼굴이 그 집안 건데, 뭐.”
기우희는 알 것 같았다. 장승희가 자기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 준 이유가 뭔지. 그건 남편의 혼외 자녀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최근 장승희는 신해범에게 부쩍 집착했다. 만나는 횟수도, 만남에 소요되는 시간도 길어졌다. 총통 부인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이미 도를 넘은 상태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기우희는 장승희 또한 신해범이 헌병대로 자진 출두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신해범으로서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총통 부인의 집착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장승희는 이미 신해범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았다. 젊고, 건강하며, 신해범과 함께 일하는 여자 부관.
“무섭다, 무서워.”
진치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범 새끼가 누구한테 미쳐 있는지 알면….”
“게다가 정 이병은 MVP의 짝사랑 상대이기도 하지요.”
“걔한테 굿이라도 함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액막이굿 같은 거 말이야. 진치우가 중얼거렸다. 기우희는 그런 것보단 어떻게든 정류진을 신계동 자택으로 불러들이려는 권세혁을 방어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니, 왜? 자기가 오지?”
“총통 부인이 외출을 막는 모양입니다. 조기 전역 여부도 묻더군요.”
장진에서 보내온 권세혁의 진료 기록은 의무 복무 중단이 가능하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동정표 노리는 건가?”
권주혁과 유미현의 힘겨루기로 풍기 교육대 내부가 소란한 가운데 <백사자>도 해체되었으니 특수 부대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권세혁이 타 부대로 이동하게 되면, 이곳에서만큼의 특혜를 받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왕가의 망신이 되었다. 차라리 이번 부상을 계기로 깔끔하게 전역해 버리면 동정 여론도 형성되고 좋다. 지금이야 당사자가 부재중이라 철수했지만, 왕자에게는 여론 몰이가 가능한 팬클럽이 있었다.
문제는 권주혁의 찬반 여부였다. 권세혁의 조기 전역은 당사자에게만 좋은 조건이었다. 권주혁은 풍기대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조카를 붙잡아 두고 싶을 텐데, 장승희가 무슨 수로 그를 설득했을까….
“그리고 말입니다.”
기우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야기를 들은 진치우의 눈이 커졌다.
“뭐? 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인과 MVP 사이가 틀어진 건 분명합니다.”
두꺼운 화장으로 가렸지만, 전면 유리창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장승희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을 때 기우희는 분명히 보았다. 그의 왼뺨과 턱을 검붉게 물들인 멍을.
권세혁의 손등에도 눈에 띄는 상처가 있었다.
“설마 패륜? 그 MVP가?”
“지금 상황으로 짐작하자면 조기 전역 관련해서 의견이 엇갈렸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자존심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MVP가 외부인이 되면 관계자였을 때보다….”
“존만이 못 만나게 되니까.”
진치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어머니한테 주먹질을 해? 평소 MVP 성격으론…. 어우, 나는 상상이 안 되는데.”
기우희가 소리 없이 웃자 진치우가 질색을 했다.
“나는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오금이 저려.”
“핏줄은 못 속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습지 않습니까? 태어나 자란 환경이 달라도, 타고난 운명은 못 바꾼다는 게.”
“…공평하네.”
“그겁니다. 공평.”
웃는 낯의 기우희가 덧붙였다.
“전 매사에 공평한 걸 좋아합니다.”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진짜!”
진치우는 생각에 잠겼다.
광증이 시작된 걸까. 권세혁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일렀다. 하지만 그는 장진에서 보통의 스무 살이라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경험했다. 권세혁 또한 머릿속 어느 부분이 망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정류진이 몽유병 증상을 보이는 것처럼.
정류진은 통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권세혁은 아니었다. 신체적으로도, 권력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진치우는 기우희에게 당부했다.
“우리 긴장해야 할 것 같다.”
권세혁의 몸 상태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게 중요했다.
기초 화장품의 종류가 지금만큼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 백색의 호랑이 크림은 서경제약의 유명한 효녀 상품이었다.
본래는 겨울철 칼바람에 트는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연고였다. 하지만 아이 피부에도 바를 수 있는 순한 보습제로 입소문을 타며 아이 키우는 집이라면 한 통쯤 보유한다는 전설적인 ‘국민 아이템’이 되었다.
서경제약이 공식적으로 부도 처리되면서, 호랑이 크림을 비롯한 여러 의약 외품 제조법은 이름 없는 화장품 공장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화장품 방문 판매 사원들을 통해 빨갛고 납작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보습 크림이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제품명은 그저 보습 크림이었다. 브랜드명은 따로 없었다. 제조 공장에서는 퇴사한 지 오래되어 기록이 남지 않은 연구원의 작품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서경제약의 호랑이 크림과 질감, 향취가 똑같다는 건 해당 제품을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장승희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화장품이 즐비했다. 그는 화려한 외관을 뽐내는 화장품들을 제치고, 서랍 한구석에 넣어 둔 보습 크림을 꺼냈다. 빨갛고 납작한 뚜껑을 열었다.
장승희는 거울 속 자신의 멍든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짙은 화장을 지운 맨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눈을 감고 크림을 바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단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를 놀라게 했다.
“엄마.”
권세혁이 픽 웃었다.
“너무 놀란다.”
장승희는 의자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떨어뜨린 화장품 뚜껑도 줍지 않았다. 빨갛고 납작한 플라스틱 뚜껑을 주워서 화장대에 올려놓은 사람은 전동 휠체어에 앉은 권세혁이었다.
“그건 쓸 만하니?”
“응. 좋아. 팔십 노인 된 기분이야.”
“…….”
“나 전역해? 엄마?”
“숙부님이 결정하신 일이야.”
“엄마가 그러자고 설득한 게 아니고?”
장승희는 돌아앉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권세혁.”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 나.”
권세혁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내는 풍기대 관둘 생각 읎다.”
“그 다리로 뭘 어쩔 건데.”
“금방 인나서 멀쩡하게 걸어 다닐 끼다. 내 회복하는 속도, 윽수로 빠르단 야그 몬 들었나?”
“말 예쁘게 해.”
장승희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장진에서 네 할아버지랑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조심해. 도대체 옛날부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권세혁이 비웃었다.
“이쁘게 말하믄, 풍기대 보내 줄 낀가?”
“그건 이미 끝난 얘기야.”
“누구 맘대로!”
권세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누구 맘대로 그걸 결정하는데?!”
“숙부님이 허락하셨다. 풍기 교육대장에게도, 오늘 온 기우희 소령에게도 얘기 전했어. 뭐가 더 필요하니?”
권세혁은 비실비실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길게 자란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을 덮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다갈색 동공이 번뜩였다.
“내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하니까 좋아?”
“권세혁. 너 무슨 말을….”
“총통이라도 된 기분이야?”
“권세혁!”
“사실은 엄마가 되고 싶지? 총통.”
장승희는 말문이 턱 막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봐.”
권세혁이 휠체어를 조작해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장승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자 종아리가 화장대 다리에 부딪혔다.
권세혁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큰소리 안 내.”
“…….”
“무혁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잖아. 요새 엄마가 걔한테 관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젯밤의 소란에 놀라 자지러질 듯이 울어 젖히던 동생이 잠든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권세혁은 동생에게 미안했지만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내 인생을 방해하려고 기를 쓰는데, 이 집에 불을 싸질러 버리지 않는 게 용했다.
장승희는 창문까지 밀려났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새삼스레 아들의 얼굴을 살펴봤다. 수척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목덜미와 등으로 쏟아지는 볕이 따갑다.
권세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휠체어를 조작했다. 멀거니 서 있는 장승희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 배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
어리광부리는 목소리였다.
“솔직하게 말해 줘. 나. 풍기대로 복귀 못 하는 이유가 뭐야?”
“…….”
“엄마가 걱정하는 게 도대체 뭐야?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
“그래. 권세혁. 엄마는 네가 다치는 게 싫어. 거기 있으면 네가 잘못될 거 같아.”
“그래?”
권세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날 어리연함이랑 바꾼 거야? 신해범이랑 거래했어? 그거 받고 나 전역시켜 달라고?”
“아니야, 세혁아. 어리연함 문제는 너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그건 너무 말이 안 되지? 신해범이 뭔데.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 모가지 안 날아가는 게 용하지. 근데 엄마. 내가 장진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장승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를 죄는 팔 힘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권세혁이 고개를 들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살벌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표정과는 달리 어린애 같은 목소리와 말투로 그가 말했다.
“있잖아. 할아버지가 엄마한테 화냈잖아.”
권세혁은 작고 마른 체구로 소리 없이 정수헌을 돌아다녔던 소년을 떠올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을 너무나 훌륭하게 실천한 아이였다.
류진과 정말 많이 닮았었다. 스파이의 자질마저.
외조부에게는 아이가 정수헌에서 일하기에 너무 어리다고 했다. 나를 소아 성애자 취급하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덧붙여서.
그래서 내보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가 준 돈은 그 부모의 주머니로 들어갈 테고, 아이는 학교가 아니라 다른 집에 돈벌이 수단으로 팔려 갈 테니.
외조부는 아이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정수헌에서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계속해서 들고 나는 것이었다. 굳이 유지하려 애쓰지 않아도, 지천으로 널린 자원이 바로 사람이었다.
장승희는 권세혁의 어깨를 잡고 변명했다.
“화내신 게 아니라, 세혁아. 그건. 엄마 말 좀 들어 봐.”
“다 들었어. 다 들었다고!”
“…….”
“뭐가 그렇게 무서워?”
권세혁은 버석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신해범 건드릴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