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굿나잇 젠틀맨 上 (27/39)

하늘에 푸름과 붉음이 공존하는 시간. 기우희의 시선은 창밖에 꽂혀 있었다.

지평선의 이지러진 붉은빛이 마치 파란 옷에 번지는 핏물 같다. 태양이 사라진 곳에 혼자 남은 구름은 사람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잿빛이었다.

의무실 문이 열렸다. 권세혁의 곁을 지키던 햇병아리 의무병이었다. 격무에 시달리던 최유신이 보급 팀에서 하나 픽업했다. 그는 기우희 앞에서 죄지은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왜?”

의무병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구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기우희는 못 들은 척해 주었다.

“다녀와.”

“예.”

그는 복도에 나란히 머리를 박은 성재경과 하채경을 보더니,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기우희는 두 명의 부관을 내려다보았다. 등 뒤로 돌려 잡은 두 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소리 내지 말고 차렷.”

대답만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숨소리 하나라도 내는 순간 방금까지 했던 자세를 도로 취하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성재경과 하채경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땀범벅이 된 얼굴이 시뻘겠다. 머리로 피가 몰려서 그렇다.

기우희가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왜 너희한테 무전이 안 왔는지 모르겠다.”

강인우의 몸에 총구멍 두 개가 뚫린 뒤, 성재경과 하채경은 풍기대 본관으로 복귀했다. 기우희는 무음으로 돌려놨던 휴대폰을 확인하기 전까지 진치우의 부상 건을 보고받지 못했다.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고, 멀쩡하게 작동했음에도 그랬다. 기우희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동안 저 둘이 무슨 짓을 하는 중이었기에 자기가 음어 숙달이 덜된 윤태금에게 개인 휴대폰으로 상황을 보고받아야 했는지.

하채경이 오른손을 들었다.

“하사.”

“잠시 언쟁이 있었습니다.”

“뭣 때문에.”

패기 있게 손을 든 것과는 달리, 하채경은 말하기를 주저했다. 기우희는 기다리지 않고 성재경에게 질문했다.

“하사와 언쟁했나?”

“그렇습니다.”

“왜.”

성재경 또한 입을 다물었다. 기우희는 담배를 세게 빨았다.

“너희 사귀냐?”

“아닙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럼. 누가 내 라인 타는지 기 싸움 하느라 눈에 뵈는 게 없었나?”

하채경이 눈을 내리깔았다. 성재경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정곡이었다.

기우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연놈들의 대가리를 맞부딪혀 터뜨리고 싶었다. 이것들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기우희는 담배를 피우면서 충동을 억제했다. 부관들을 탓해 봤자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기였다. 신해범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쟤들이 뭘 보고 배웠겠어.’

입 안쪽 여린 살을 물어뜯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은연중에 진치우를 견제한 건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신용하지 못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신해범의 전우임과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기 때문이다.

신해범은 진치우와의 우정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에 어필하는 셀링 포인트로써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 온 죽마고우라는 대외적인 이미지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직 바깥의 이야기지, 조직 내부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다른 문제였다.

신해범은 항상 주의했다. ‘죽마고우’ 진치우에게 혜택을 준다는 소리가 불거져 나올까 봐. 능력이 아니라 인맥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라는 비난을 들을까 봐. 기우희는 그래서 더 진치우를 견제했다. 대장의 죽마고우든 뭐든, 하물며 직급이 더 낮아도 능력이 된다면 신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관들에게 어필해 왔다.

기우희는 손가락으로 눈썹 뼈를 꾹꾹 눌렀다. 형평성을 위해 진치우를 견제했던 자기 모습이 하채경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대놓고 하극상만 아니라면. 능력으로 앞지를 수 있다면.

작전 수행 중에 정신력이 못 버텨서 도망간 놈, 내가 먹을 수 있겠는데?

기우희의 입술이 비틀렸다.

“하채경.”

“예.”

“남자 밟고 올라가는 거 재밌지.”

“…….”

“괜찮아. 말해 봐.”

기우희는 성재경을 턱짓했다.

“너 이 새끼 제끼고 싶어서 죽겠지. 아주 몸 달아 미치겠지? 면상 볼 때마다 혈압 오르고 그러지 않냐?”

“…….”

“너 요새 하는 거 보면 답 나와. 이 새끼 언제 전역하나, 그 생각 하느라 정신머리가 딴 데 가 있어.”

“그런 사실 없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티 많이 나.”

“그런 사실….”

“진짜 죽을래? 너 성 중사 복귀하기 전에 숫자 틀린 적 있었어?”

하채경이 고개를 숙였다. 기우희는 그의 이마를 응시했다.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에 작은 점이 있었다. 기우희는 그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걷어 하채경의 귀 뒤에 꽂아 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냐.”

“…….”

“이놈 아니면, 마강희야?”

“그런 사실 없습니다.”

기우희는 눈물 흘리기 직전인 하채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패기만 넘치는 애 별로다. 위로 올라갈 준비가 된 사람을 좋아해.”

“예.”

“누구 제끼려고 아등바등할 필요 없어. 적어도 너는 말이야.”

낭패감이 짙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우희는 하채경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혼자 남은 성재경의 얼굴을 쳐다봤다.

“성재경.”

그는 벌써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고개를 푹 숙였지만 소용없었다. 기우희는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윽!”

“긴말 안 한다. 먹히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성재경은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지가 꺾인 눈을 한 채였다.

기우희는 한숨을 삼켰다. 폐쇄적인 조직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상관이 묵인해도, 동료와 부관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본래의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하채경은 이미 성재경의 역할을 대신했다. 위아래로 신임도 두텁고.

기우희는 담뱃갑을 꺼내 내밀었다. 성재경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빼 물자 손수 불까지 붙여 주며 말했다.

“네 복귀 신고서 처리해 줄게.”

“소령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하사랑은 잘 얘기해 봐.”

“감사합니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가 최선을 보여 줘도 쟤 마음이 쉽게 돌아서진 않을 거다.”

“예….”

“부관한테 머리 박고 기라고는 안 하겠다. 근데 하채경이 너 없는 동안 고생한 건 맞아. 그래서 욕심내는 것도 당연하고.”

“이해합니다. 그런 부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지. 사실 부족한 게 더 많아. 그래도 내가 널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어. 네 모든 단점들을 상쇄할 만한. 그걸 하사한테 보여 줘라.”

성재경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든 채 한참 동안 복도에 서서 흐느꼈다.

성재경의 흐느낌은 의무실 문을 닫고 들어온 뒤에도 이어졌다. 권세혁의 상태를 보기 위해 커튼을 젖혔을 때,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던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

기우희가 간이 의자에 앉으며 말을 붙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권세혁의 입술 사이에서 쉰 목소리가 샜다.

“류진… 형….”

“정 이병은 충격을 받아서 쉬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

“충격을 받아서 쉬고 있습니다.”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왕자님.”

기우희는 몸을 일으키려는 권세혁을 막았다.

“지금 정 이병과는 대화하실 수 없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리셨습니까? 진치우 중령 얘기가 아닙니다. 왕자께선 정류진 이병을 강간하셨습니다.”

“그건…!”

“아니라고 하시렵니까?”

권세혁의 찌푸린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렇다고 없던 우애가 솟아나지는 않았다. 동정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찾아가 변명하시겠다면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감히 충언하건대, 역효과만 날 겁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러셨겠지요.”

“아니! 정말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기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꼴만 봐도 알겠다. 바리캉으로 귀까지 밀어 버린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십니까.”

권세혁은 눈을 내리깔았다. 기우희는 자기 말을 믿지 않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풍기대의 모든 사람이 그럴 터였다. 당연했다. 내가 쏜 사람은 풍기 교육대 부대장이니까.

“왕자께선 음주 상태가 아니셨습니다.”

“술 안 먹었어.”

술이 아니라 다른 거였다.

“다른 거라니요?”

기우희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권세혁이 침묵하자 기우희는 무전기를 들었다. 누군가를 부르려고 하는 듯했다.

권세혁은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기우희가 든 무전기가 날아가 의료용품을 보관하는 캐비닛에 부딪쳤다.

기우희는 텅 빈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최유신의 냉장고로 다가갔다. 생수 한 병을 꺼내 권세혁에게 건넸다.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치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미안해. 하지만 내 얘기부터 들어 줘요. …누나.”

기우희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님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불쾌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감히 내게 혈육의 정을 구걸하다니.

“나 도핑 걸리면 안 돼.”

“그러시겠지요.”

“진짜 안 돼! 공급책 누군지 조사할 거란 말이야!”

기우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약쟁이의 양상을 보이는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누굴 보호하시려는 겁니까?”

“…….”

기우희는 입에 지퍼를 채운 권세혁을 응시했다. 재촉하지 않는 건 그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솔직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또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평소처럼 취조하면 권세혁은 마음을 닫아걸고 자신을 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곤 리볼버 방아쇠를 당기겠지.

진치우에게 했던 것처럼.

기나긴 침묵 끝에, 마침내 권세혁이 입술을 뗐다.

“무혁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기우희는 조금 놀랐다. 권세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정류진이 아니라는 데에 한 번, 그리고 언급된 대상이 권무혁이라는 데에 두 번.

“작은 왕자님 말씀이십니까?”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키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했다. 집 안에는 있어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고용인들과 자신, 그리고 동생뿐이었다.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이미 끊었다고 생각한 엑스터시가 집에 돌아다닐 거라고는. 어린 동생이 살짝 다가와 ‘이거 형이 좋아하는 사탕이지?’ 하고 말하기 전까지는.

첫눈에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작고 납작한 흰색 알약. 선명하게 새겨진 알파벳 W.

화이트 스완에서 판매하던 엑스터시가 어떻게 동생의 손에 들어갔는지, 권세혁은 알 수 없었다. 동생에게 자세히 묻지도 못했다.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충동이 되살아나서.

관자놀이가 펄떡이고 혀뿌리가 달아올랐다. 목덜미의 솜털이 섰다. 피부에 맺힌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가운데, 당장 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엑스터시를 입 안에 넣고 씹으면서 생각했다. 동생은 이걸 가지고만 있었기를. 단 한 번도 먹은 적이 없기를. 나처럼 되지 않아야 하니까.

권세혁은 재차 강조했다.

“무혁이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애초에 내가 관리를 잘못한 거야.”

권무혁은 종일 집에서 보냈다. 홈 스쿨링을 하는 아이에게는 집이 학교요, 놀이터요, 운동장이었다. 한창 자아가 형성될 나이에 또래와 교류하지 못한 채 건강 문제로 이렇다 할 외부 활동 없이 고립된 아이는 집 안 곳곳을 날다람쥐처럼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다른 구성원들의 물건에 손을 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훔치는 물건이 마음에 들고, 아니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애초에 권무혁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장승희는 권무혁의 도벽에 무심했다.

아이의 육체적 건강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그 이외의 것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물건 좀 없어진다고 문제가 되는 환경이 아니기도 했다. 정말 중요한 물건은 어린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나 특정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 보관했다. 잠금장치도 있었다. 설령 대체 못 할 물건에 손을 댄다 해도 상관없었다. 고용인들에게 찾게 하면 되니까.

집 밖으로 나갈 기회가 좀처럼 없으니, 집 안에서만이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두자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그래도 상담은 받았다. 권무혁이 주로 드나드는 곳이 친형인 권세혁의 개인 방이라는 사실이 포인트였다. 장승희가 해당 문제를 의논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형에 대한 애착, 그리고 형처럼 되고 싶다는 잠재적 욕구.’

권세혁 주먹을 꽉 쥐었다.

“나 보호해 달라는 소리 아니에요.”

부디 기우희가 이해해 줬으면 했다. 지금 자신의 엑스터시 복용 사실이 알려지면 두 사람이 크게 다친다. 최근의 공급책인 정류진, 약을 소장하고 있었던 권무혁까지. 장진에서의 프로포폴 투약 사실도 까발려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외조부와 정수헌에서 풍기대로 옮긴 윤태금도 위험해진다.

기우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작은 왕자님께 화살이 향하겠습니까?”

권세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리다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보호받는 세상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입 다물어 줄 수 있어요, 누나?”

“…대장님께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풍기대에서 발생한 일은 모두 신해범 준장 소관입니다.”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권세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진치우를 쐈으니까.”

“고의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우희는 눈썹을 찌푸렸다.

“고의로 쏘셨습니까?”

“…….”

“왕자님.”

“…….”

“제게는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그래야 왕자님을 도울 수 있습니다.”

“애초에 신해범이 그런 짓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예?”

고개를 든 권세혁의 두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날 미치게 만든 건 그놈이야. 애초에 자기가 처신을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진치우 중령도… 류진이 형도.”

내팽개치듯 말하고, 권세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기우희는 한숨을 삼켰다. 무책임한 태도와 더 뻔뻔한 대답. 총통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진즉 객사했을 애새끼. 권세혁의 얼굴을 후려갈기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식은땀이 다 났다.

기우희는 권세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화가 가능한 상태이긴 하지만, 몹시 흥분한 상태라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 입으로 엑스터시 복용 사실을 실토했고 거기에는 뜻밖의 존재가 엮여 있었다. 신계동의 작은 왕자 권무혁. 신해범은 머지않아 권주혁의 손아귀에 떨어질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권무혁의 이목구비는 먹구름에 가려진 달처럼 아스라했다.

신해범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락의 시간이 지나간 방 안은 싸늘했다. 그는 캐비닛에서 동절기용 담요를 꺼내, 소파에 쓰러져 잠든 류진에게 다가갔다.

마른 몸을 담요로 둘둘 말아서 안아 올렸다. 기특하게도 녀석은 부관이자 보호자인 자신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특수 취조실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머리카락을 젖혀 관자놀이를 드러내고 선명한 흉터에 입 맞췄다.

흘러내린 담요를 목까지 덮어 주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디 가…?”

“일하러.”

“무슨 일?”

류진에게 도로 돌아갔을 때, 곧장 셔츠 소매를 붙잡혔다.

“중요한 일이야.”

신해범은 류진의 지친 얼굴을 내려다보며 윤태금을 비롯한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 주었다.

“진치우는?”

“아직. 최유신한테 연락 없는 거 보면.”

“병원 안 가?”

“이따가.”

류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신해범은 구겨진 옷소매를 펴지 않았다.

“나 약.”

새벽에 수면 상태로 돌아다니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다. 류진은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다가, 아랫도리의 날카로운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파….”

신해범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먹어도 돼.”

“아니야. 필요해.”

“그 약이 나보다 더 효과가 좋아?”

류진의 뺨이 붉어졌다. 신해범은 그 얼굴을 쓰다듬으며 네가 깨어나기 전에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자.”

“…응.”

문을 나서기 전, 신해범은 진치우가 입원한 병원에 갈 때 자기도 꼭 데려가라는 류진의 당부를 들었다.

“알았어?”

목소리에 졸음이 뚝뚝 떨어졌다. 신해범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옐겠슴다.”

지하 취조실로 내려갔다. 경호원 둘은 사실상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들은 골드&아이언 소속으로 고가의 보석을 경호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그들이 오늘 권세혁을 맡은 건 장승희 총통 부인의 개인 의뢰였다. 윤태금은 그것이 일종의 고객 관리 서비스라고 설명하며, 손수 윤금강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적어 주기까지 했다.

- 저도 의아하긴 했습니다만.

윤금강의 목소리는 신해범의 기억보다 훨씬 저음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언뜻 정류진을 연상시켰다. 생김새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윤금강은 풍기 교육대장과의 일대일 통화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 왕자께서 다리가 불편하시고, 또 군용 차량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해범이 아는 장승희는 성격이 급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서두르는 일은 왕족의 품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총통 부인이었다. 그러나 윤금강이 말하는 장승희는 조금 달랐다. 그는 무언가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조바심을 냈고, 원하는 물건이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거나 컬렉션이 성에 차지 않으면 예민해졌다. 최근에는 특히 재촉이 심해져 관계자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윤금강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도 그러셨지요. 시간이 촉박하다고.

시간이 촉박하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윤금강은 권세혁의 조기 전역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기자들이 몰리면 통행에 어려움을 빚으니까.

- 왕자님 팬클럽도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권세혁의 팬클럽은 양날의 검 같은 세력이었다. 단순히 젊은 왕자의 인기를 증명하는 척도가 아니라, 젊은 세대로부터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권주혁과 장승희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했다.

문제는 권세혁의 일신상에 문제 혹은 변화가 생겼을 경우, 왕자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싶어 하는 팬클럽 내부에서 어떤 여론이 형성될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권세혁이 처음 입대했을 때도 그랬다. 그땐 왕자의 의무 복무를 반대하는 세력이 주류였지만, 그 안에서도 권세혁이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존경과 애정을 느끼는 세력이 존재했다. 갑작스러운 조기 전역 발표는 그들을 배신하는 격이었다.

출신 성분과 연령, 성별을 떠나 어떤 집단을 자극하는 일은 위험했다. 윤금강은 권세혁의 조기 전역으로 인해 풍기대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도 우려하는 중이었다.

신해범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뭘 상상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하나 그건 일개 보석 상인인 윤금강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신해범은 협조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긴장한 표정의 윤태금과 눈이 마주쳤다.

“뭐.”

“아, 아닙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

“누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신해범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딱히 아는 게 없더군.”

“그렇지요?”

윤태금이 활짝 웃었다.

“누님은 그냥 차랑 애들만 보내 준 겁니다.”

신해범은 윤태금의 웃는 얼굴을 외면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고 화내고 싶지도 않았다.

담배 연기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나는 원래, 금일 아침 일찍 복귀할 예정이었어.”

그러나 장승희가 나타났다. 신해범은 그에게 끌려다니며 봉사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동안 권세혁은 풍기 교육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신해범은 입 안에 고이는 쓴침을 삼켰다.

두 모자가 짜고서 일을 벌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장승희와 권세혁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해당 사태의 원인 제공자로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이 하나 더 있었다. 권무혁의 입양이었다.

신해범은 장과 권이 권무혁의 입양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는 이유를 예측했다. 권세혁이 반대할 게 빤해서였다. 그러니 두 사람은 충용절이 지나고 서류를 갖춰 절차를 밟은 뒤에, 권세혁이 나설 수 없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 놓은 다음에야 입양 소식을 발표할 것이다.

하지만 권주혁은 이미 자신에게 해당 사실을 오픈했다. 신해범은 이를 아는 게 자기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몇몇 측근들은 신계동 작은 왕자의 차후 행방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건 결코 권주혁의 입이 가벼워서가 아니었다. 장승희가 나중에 말을 바꾸는 상황을 염려해서였다.

권주혁은 구두 약속을 신용할 만큼 순진한 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신해범은 상상했다. 어쩌면, 권주혁과 장승희는 연판장을 작성했을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의 마음이 바뀌어 약속이 틀어지지 않도록.

그 과정에서 동원된 측근은 헌병대였을 것이고.

군인은 그런 존재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정된 위치에 서기만 해도 압박감을 줄 수 있었다.

신해범은 헌병대의 주요 간부로 꼽히는 몇몇 얼굴을 떠올렸다. 권주혁의 수족인 임찬영은 어떨까. 혹시 호월루에서 권주혁에게 대가리가 깨진 건 그가 권무혁의 입양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다고 총통의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신해범은 담뱃재를 털며 피식 웃었다. 모든 건 짐작일 뿐이었다. 그래도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니었다. 장승희가 윤금강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만에 하나 그가 군용 차량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동생이 입양 가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염려한 탓일지도 모른다.

윤금강을 재촉한 이유는….

신해범은 짧아진 담배를 힘껏 빨았다.

윤금강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었다. 인파가 몰리면 가뜩이나 다리가 아픈 권세혁의 움직임이 한층 불편해진다.

하지만 과연 이유가 그것뿐이었을까.

장승희는 내연남과 아들이 군에서 마주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아들의 스케줄을 건드릴 수는 없으니, 내연남이 본대로 복귀하는 걸 늦추려고 했을 것이다.

신계동 저택을 기준으로 헌병대는 풍기대보다 멀리 있었다. 장승희는 권세혁보다 먼저 출발해야 했다. 그래야 길이 엇갈리지 않았다.

경호원 두 사람의 진술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다. 장승희는 차량이 준비된 즉시, 기다렸다는 듯이 자차를 타고 외출했다.

권세혁은 장승희가 출발한 다음에 나타났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이동 중에 땀을 많이 흘렸고, 갈증을 호소했으며, 멀미 때문에 잠시 정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호원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상 때문에 몸이 안 좋은 줄로만 알았다.

신해범은 변명하듯 말하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설령 권세혁이 밴 안에서 마약을 씹어 먹었어도, 일개 경호원 두 사람은 일국의 왕자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신해범은 목을 한 바퀴 돌렸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고 아무리 자신을 타일러도 이번만큼은 소용이 없었다. 빌어먹을 ‘그래도’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경호원들이 권세혁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며 그를 다시 신계동 저택으로 데려다 놨더라면.

1층 로비에서 무기 소지 여부를 한번 확인했더라면. 조기 전역 발표까지 난 마당에, 왕자라고 무조건 길을 열지만 말고.

“준장님.”

“왜.”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안색이 많이 안 좋습니다.”

“자네는 장진에서도 그랬지. 쉬라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나?”

사흘도 버틸 수 있었다. 잠 안 자고, 밥 안 먹고.

윤태금은 무거운 눈두덩을 누르면서 말했다.

“어떻게든 단명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네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예?”

의자가 뒤로 거칠게 밀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해범이 명령했다.

“자네 식구들 데리고 돌아가. 누님께 사정 설명 잘하고. 보안상의 이유로 개인 휴대폰은 못 돌려줘. 그 정도는 자네가 알아듣게 납득시킬 수 있겠지?”

“예.”

윤태금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야기 마치고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복귀하긴 뭘 복귀해. 가서 잠이나 자.”

“예?”

“원래 남 걱정 잘하는 놈들이 자기 몸은 못 챙겨.”

신해범이 나간 자리에 휑하니 바람이 불었다. 윤태금은 그가 밀고 나간 철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수 교대네.”

권세혁이 말했다. 기우희가 앉았던 의자에 신해범이 앉는 모습을 보고서 하는 소리였다. 신해범은 의무실을 한 바퀴 쓱 둘러보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내 얼굴 똑바로 볼 수 있네요.”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보라고 배웠습니다.”

“그건 같은 출신 성분끼리 노닥거릴 때 얘기고.”

기우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최유신으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그는 진치우가 있는 병원으로 갈 것이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머리 모양이 가관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손을 뻗었으나 매정하게 내쳐졌다.

“함부로 손대지…!”

“기운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권세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서.

“소령에게 보고받았습니다. 그래도 심신 미약 상태를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소변 검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모쪼록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짜 미쳤어?!”

권세혁이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치웠다. 하반신을 움직이자 허벅지 상처가 쑤셨다.

“나 살자고 다른 사람 사지로 몰아넣는 짓은 안 해.”

신해범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담배를 피워 물자 권세혁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뭐라고?”

“왕자께선 약자를 보호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엑스터시 복용 사실을 묻어야 한다고 말하려던 찰나, 신해범의 훅이 권세혁의 명치를 강타했다.

“누굽니까? 왕자님께 사랑하는 사람을 강간하라고 가르친 사람이?”

응, 귀신.

이렇게 말했다간 아직 약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겠지.

권세혁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헛구역질 소리를 들은 신해범이 캐비닛에서 스테인리스 통을 꺼내 가지고 왔다. 뿌리치기에는 사정이 급했다. 자기가 쏟아 낸 누런 위액을 보는 권세혁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왕자님.”

신해범은 젖은 턱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는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제 사무실 서랍에서 총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총의 출처를 알려는 게 아닙니다. 왕자께서 취임도 전에 측근을 돌발 처형하는 냉혈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앞뒤 상황을 맞춰야 합니다.”

“…….”

“묻겠습니다. 누군가를 처형할 목적으로 가져오신 물건입니까?”

“…….”

“단순 협박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약실이 실탄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요. 빗나간 한 발은 벽에서 찾았습니다.”

권세혁은 신해범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진치우가 죽든지 살아나든지 그는 아무 관심 없었다. 그저 이 일을 무마해 주는 대가로 총통 부인과의 불륜을 용서받으려는 셈이었다.

친구의 불행도 자기 출세 수단으로 이용하는 놈. 류진은 이런 사람에게 속고 있다.

권세혁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창가에 기대서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한때는 저런 모습을 동경했다. 밑바닥에서 자수성가하려면 저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신해범은 자수성가의 화신도, 출신 성분을 극복한 성공 신화의 현신도 아니었다. 그냥 쓰레기였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몇 명이나 속였어?”

“예?”

“사람도 죽여 봤지?”

“공무 집행 중에는 여러 가지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지요.”

“그런 거 말고.”

권세혁이 손을 내밀었다. 신해범은 순순히 담뱃갑을 내밀었다. 불을 붙여 주는데 새삼스레 모멸감이 느껴졌다.

“출세하려고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지 마. 솔직하게 말해 봐. 신해범 준장, 출세할 목적으로 사람도 죽여 봤지?”

신해범은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최금호가 있었다. 눈꺼풀을 두어 번 깜박이자 그는 사라졌다. 침대에 앉은 건 최금호가 아니라 권세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분노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내게 살인을 하게 만든 놈들이 누군데.

함풍 2도에서 택시 일을 했을 때. 엄승원의 전속 기사가 되기 전 성재경이 자주 태웠던 손님은 바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응급 상황까지는 아닌 외상 환자가 가장 많았고, 검사 예약에 늦은 임산부도 있었다. 환자가 어린아이인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 보호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빨리,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 달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성재경은, 아니 성지한은 토박이 선배들의 충고를 새겨들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내비에 안 잡히는 지름길 외워 둬.

원하는 의료 시설 이름을 정확하게 대는 손님도 있었다. 대개 침통한 표정이었고, 개중에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었다. 성재경은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가까운 사이의 누군가가 임종을 앞두었거나 응급 상황인 모양이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월등히 비싼 택시는 함풍 2도 지역민들에게 친숙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살이라는 게 그랬다. 배차 간격이 길고 여럿이 부대끼는 대중교통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살면서 몇 차례는 생기기 마련이었다. 가계부에 구멍이 뚫리는 사태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

병원행 손님들을 태우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뒷좌석의 암담한 분위기가 운전석까지 전염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성재경은 손님을 가려 태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복잡한 감정에 매몰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도 누군가가 죽거나, 다쳤거나, 아프다.

성재경은 룸 미러로 뒷좌석의 기우희를 곁눈질했다. 차창을 절반 내린 채 담배를 피우는 얼굴이 창백했다. 창밖의 어딘가를 하염없이 응시하는 기우희는 유독 지쳐 보였다.

“성재경.”

“예.”

“부대장님 잘못되면, 너 이번에도 도망갈 거냐?”

“아닙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진치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고, 자신은 풍기대를 등지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는.

성재경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중령님은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기우희는 담배를 입에 물고서 두 손으로 눈썹 뼈를 문질러 마사지했다.

“앞이나 봐.”

“예.”

원무과 앞에 나란히 서서 신분증을 내밀었다. 직원은 진치우 중령이 중앙 수술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아직도.

성재경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기우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로 척척 걸어갔다. 중앙 수술실은 3층이었다. 전광판을 통해서 수술 중인 환자를 알아보았다.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빨간색의 주의 표시였다. 불투명한 문에 떡하니 쓰인 여덟 개의 글자도 눈에 들어왔다. 출입 제한 통제 구역. 그 밑으로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보호자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각자 가족이나 가까운 누군가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일 터다. 성재경은 기우희가 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전광판은 벽걸이 시계 밑에 있었다. 수술 중이라고 표기된 여남은 개의 이름 가운데, 성재경은 진치우의 이름을 찾아냈다. 좀 더 자세하게 보고 싶었으나 기우희는 빠른 걸음으로 전광판을 지나갔다.

성재경은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빈 의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문 바로 앞자리, 혹은 성인 두 사람이 앉기에는 비좁은 여분 자리밖에 없었다. 성재경은 망설였다.

그때였다. 대기실을 쓱 훑어본 기우희가 정수기로 가려져서 문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로 보무당당하게 걸어갔다. 거기에는 때아닌 반팔 티셔츠를 걸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등을 새우처럼 말았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어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심히 쳐다보니 풍기 교육대 제복 바지 차림이었다. 기우희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최유신이었다.

맨발에 꿰어 신은 슬리퍼는 발등 덮개가 찢어져서 너덜거렸다. 의자 밑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입구를 단단히 봉한 채 덩그러니 놓였다. 기우희는 그것을 냅다 발로 차 의자 밖으로 끄집어냈다. 최유신이 고개를 들고 픽 웃었다.

“…왔네.”

성재경은 후다닥 최유신에게 다가갔다.

“이것 받으십시오.”

풍기대에서부터 가져온 쇼핑백에는 녹색 아노락이 들어 있었다. 최유신의 물건은 아니고 성재경의 사복이었다. 얇지만 바람을 막아 주는 재질이라 따뜻했다.

쇼핑백을 들여다본 최유신이 웃었다.

“나 메뚜기색 안 받는데.”

기우희가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맞고 입을래? 그냥 갈아입을래?

대기실을 나서는 최유신의 어깨가 축 처졌다. 기우희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으나 금연 구역이었다. 기우희는 입맛을 다시며 담뱃갑과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엇.”

비닐봉지를 풀어 본 성재경이 얼굴이 굳었다. 피로 물든 가운과 풍기 교육대 제복 상의가 들어서였다. 의료인의 상징인 흰 가운이 얼룩덜룩했다. 성재경은 황급히 비닐봉지 입구를 조여 묶었다. 밀폐된 공간에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퍼지지 않게.

정수기 위에 누군가가 올려놓은 신문이 있었다. 그는 바닥에 신문을 펼치고 그 위에 앉았다. 이것도 사복 차림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성재경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수술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마취 시간까지 생각해도….”

“입 닥쳐. 부정 타.”

“예.”

하지만 기우희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화가 났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최유신은 아까보다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세수를 했는지 짧은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그는 아노락 주머니에서 자판기 캔 커피를 꺼내 주며 구내식당에서 요기라도 하고 오라고 제안했다. 보호자는 한 사람만 있어도 괜찮으니까.

“다녀와.”

기우희는 성재경을 보면서 말했다. 최유신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기우희는 피곤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 버렸다. 성재경은 멋쩍은 표정의 최유신을 바라보며 똑같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이럴 때의 기우희는 방해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앉았는데도 바지에 신문지가 들러붙어, 성재경은 대기실을 나갈 때까지 몇 번이나 엉덩이를 털었다.

식당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야 했다. 성재경은 맵게 끓인 두부찌개를, 최유신은 만둣국을 주문했다.

“너도 국물 좋아하냐?”

“아… 예.”

“요즘 날씨에는 따뜻하게 먹어야 좋지.”

그러는 최유신은 반소매 티셔츠 바람이었던 게 기억났다. 그의 가운과 제복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진치우의 상태는 심각했다.

성재경은 수술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말한 걸 후회했다. 제 딴에는 걱정이었지만, 기우희에게는 투덜거림으로 들렸을 것이다.

“대위님도 식사 안 하셨습니까?”

“못 했지.”

처음에는 얼이 빠져서, 나중에는 보호자를 찾을까 봐.

“누구 올 때까지 기다렸어.”

“그 전에 사람을 부르셨어도….”

“들려줄 만한 소식이 없어서.”

최유신이 수저로 만두를 쪼갰다. 씹는 감각은 있는데 아무 맛도 없었다.

김효성에게는 아직 진치우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아들이 생사를 넘나든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의 병세가 나빠질 수 있었기에.

최유신은 찌개를 앞에 두고 제사 지내는 성재경을 바라보았다.

“먹어. 니들도 종일 굶었잖아.”

“저보다는 소령님이….”

“그러니까 얼른 먹고 교대해야지.”

성재경은 수저를 열심히 놀렸다. 입에 들어가는 게 밥알인지 모래인지 알 수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씹고 삼켰다.

“걔는 괜찮냐?”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 최유신이 말했다.

“정 이병. 류진이. 걔 12층에 같이 있었잖아.”

“예….”

성재경은 말을 흐렸다. 최유신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대답을 듣지 못해도 알았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 정류진의 상태가 어떤지 충분히 알 만했다.

“걔는 뭐 전생에 나라 팔아먹었대냐?”

팔자 한번 사나워. 아주 고약해. 최유신은 밑반찬으로 나온 황색 단무지를 힘껏 씹었다.

엘리베이터로 3층까지 이동했다. 성재경은 기우희와 교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아침부터 쫄쫄 굶은 건 기우희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묘하게 공기가 묵직했다.

성재경은 혓바닥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최유신도 뭔가 느낀 모양인지 굳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의료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촉일까? 부디 긍정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기를….

수술실 앞에 기우희가 서 있었다. 대화 상대는 수술복을 입은 남자였다. 퍼런 수술복을 입은 남자는 물에 젖어서 축 늘어진 자루 같았다. 방금 대수술을 마쳤다는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기우희가 말했다.

“중령님 모친께서는 거동하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른 일가친척도 없고요.”

집도의는 기우희가 내민 신분증을 들여다보았다. 기우희는 어금니를 악물고 덧붙였다.

“어지간한 사람들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최유신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는 풍기 교육대 소속 군의관이라는 신분을 밝히면서 지원 사격에 나섰다. 진치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을, 분하지만 또박또박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성재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집도의의 까칠한 입술을 노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는 전우야. 서로의 보호자야.

뭐라도 좋으니까 사실을 말해.

성재경은 벽을 짚고 섰다. 무릎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집도의는 최유신에게 시선을 주었다. 딱딱한 얼굴로 의사의 말을 경청하던 최유신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기우희는 성난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성재경은 직속 상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았다.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 간단명료하게, 확실하게 요약해. 이 좆대가리들아.

눈이 쑥 들어간 집도의가 간단명료하게 요약된 한마디를 던졌다.

“가까운 사람을 부르시고… 마음 굳게 먹으십시오.”

“아직 안 죽었잖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최유신이 기우희 앞을 막아섰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에게 불행을 통보하며 어쩔 수 없이 생존 본능이 몸에 익었을 의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인간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기 전에 풋 스위치를 건드렸다. 잽싸게 수술실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출입 제한 통제 구역….

성재경은 그 여덟 글자를 부수고 싶었다. 감히, 주제넘게 질문하고 싶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느냐고.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느냐고. 인간 생로병사에 개입하는 자격의 권위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정신을 차렸을 때, 성재경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귀가 먹먹하고 시야가 뿌옜다.

함풍에서 서지운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손가락 세 개짜리 충격이었다. 그리고 진치우가 반송장이며,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소식은 손가락 열 개를 뛰어넘어 발가락까지 셈해야 하는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치우가 죽는다.

성재경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수술실 문이 열렸다. 최유신과 기우희가 이동 침대에 달라붙었다. 두 손으로 앰부 백을 짜던 젊은 의사가 말했다.

“중환자실로 갑니다. 보호자님 따라오세요.”

성재경은 죽을힘을 다해 일어섰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링거 줄 사이로, 진치우의 눈 감은 납빛 얼굴이 보였다.

“사람도 죽여 봤느냐….”

케케묵은 옛 법령이 떠올랐다. 왕족에게 거짓을 고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혀와 손을 자름으로써 용의 눈을 가리려 한 죗값을 치르게 한다.

“예.”

“뭐라고?”

“죽여 봤습니다. 출세하려고. 사람.”

최유신이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나간 책상 위에는 재떨이가 있었다. 신해범은 피우던 담배를 짓눌러 껐다. 순서가 엉망인 문장을 정리해서 다시 말했다.

“출세하고 싶어서 사람 죽였습니다. 전하.”

권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갈색 눈동자에 살의가 깃들었다. 신해범은 진치우의 몸을 꿰뚫은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건 총알뿐만이 아니었다.

“내는 인제, 네놈을 존중하지 않는다.”

권세혁이 내뱉었다.

“내는 니 같은 치들 잘 안다. 출신 성분 콤플렉스에 찌들어가 눈깔에 뵈는 게 없는 놈들. 속이 텅텅 빈 쭉정이 같은 새끼들. 꾸며 봤자 저급한 본질은 감출 수가 읎다. 내는 알아볼 수 있제. 왜냐믄, 왜냐믄 내는 니 같은 거랑은 다른 진빼이니께!”

거침없이 씹어뱉는 그의 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침대를 벗어난 권세혁은 다리를 절뚝이며 한 발짝, 한 발짝 신해범을 향해 다가갔다.

“내한테는 이 나라에서 제일로 고귀한 피가 흐른다. 이건 네놈이 평생을 걸고 뎀벼도 이길 수가 없는 기다. 네가 누구든. 을매나 대단한 공을 세웠든. 누구헌테 사랑받든!”

신해범은 뒤로 물러났다. 권세혁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가까워지면 주먹이 나갈까 봐 무서웠다. 인간의 신체는 무기와 달라서 술 한 방울, 마약 한 알 씹어 먹지 않고도 이성을 배반할 수 있었다.

“물러서십시오. 왕자 전하.”

“주디 닥치라.”

신해범은 한 발짝 더 물러섰다.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등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의료용품을 보관하는 캐비닛이 다시 한번, 벽이 진동할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사실은 니도… 알고 있제?”

“무엇을 말입니까?”

“니는 가짜. 내가 진짜다.”

멱살이 붙잡혔다. 신해범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권세혁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고, 주먹다짐으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신해범은 자기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해범이 형.’

한 마디 더.

‘존경해요.’

권세혁이 팔을 들어 올렸다. 신해범의 눈에는 아주 느리게 보였다. 주먹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 캐비닛을 강타했다.

비교적 얇다고는 하나 사람이 종잇장처럼 구겨 버릴 수는 없는 철문이 움푹 들어갔다.

권세혁의 손등이 까져 피가 맺혔다.

“숙부헌테 알랑거릴 때부터 알아봤다.”

“왕자님께도 공평하게 해 드렸는데요.”

“남의 거 가로채니 좋드나?”

“…….”

“보람이 느껴지드나? 저눔이 을매나 더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기분이었것제? 근디 말이다, 지금 여서 분명히 말하는데! 닌 그냥 짜가리다. 뭔 소린지 아나? 니는 내에 비하면 짝퉁이라 이 말이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발악을 내버려 두었다. 그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제풀에 지쳐서 목뒤 잡고 넘어가 줬으면 했다.

제발 입 닥쳐. 이 철딱서니 없는 왕자 놈아. 내가 총 안 가져온 걸 후회하기 전에.

홀스터를 풀어 놓고 온 이유는 권세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번 총질에 맛 들인 새끼는 정신 못 차린다. 훈련받은 군인이나 경찰도 그럴진대, 하물며 리틀 권일혁이라면.

권세혁이 그런 생각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신해범의 심장 한가운데 말로 된 칼을 꽂아 넣으면서 승리했다.

“싸구려에 진짜 값을 주는 빙신은 읎다.”

신해범은 숨을 골랐다.

박살 난 식기들을 생각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진치우를 생각했다. 수면 상태에서 복도를 헤매는 유령 같은 정류진을 생각했다.

권세혁은 모든 걸 부숴 놨다. 풍기 교육대 12층에서. 이곳만큼은 안전하리라고 믿었던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거침없이 들어와서.

누가 이놈에게 그럴 힘을 줬지?

“나가 약 좀 빨아 봐서 안다. 니 눈 밑이 꺼멓고 손이 찬 걸 보니, 혈액 순환이 영 안 되는 거 같다. 심장에 문제 있는 거 아이가? 각성제 한 대 놔 주까? 그거이 심장 펌프질에 제격이거든. 고 알량한 좆대가리 휘두르는 데두 도움 될 끼다.”

무력감이 덮쳐 왔다. 자신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할 말은 그게 답니까?”

“아니!”

권세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신해범의 가슴팍을 찔렀다.

“스물한 살짜리한테 고마 껄떡대라.”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로군.

신해범은 웃으면서 시선을 내렸다. 권세혁의 손목을 붙잡아 꺾었다.

“제가 누굴 보고 배웠겠습니까?”

뼈가 덜 붙은 엄지손가락이 경련했다. 아예 틀어져 버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세혁이야말로 이 기회에 알아야 했다. 약탈자가 누군지. 침입자가 누군지. 나 같은 놈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누구의 비호를 받아 성장했는지.

누가 나를 필요로 했을까?

출세의 동아줄이 절실한 사람이 있으면 뭐든지 해내는 심부름꾼이 필요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거래는 혼자서 할 수 없었다.

권세혁은 붙잡힌 팔을 반대쪽으로 휘둘러 신해범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미처 안전거리를 확보하기도 전에 일보 전진한 신해범에게 멱살을 붙잡혔다. 부릅뜬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

권세혁은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얀 커튼을 몸에 휘감고 쓰러진 권세혁이 허벅지를 붙잡고 신음했다.

쓰러지면서 침대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수술 부위가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아파도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 다친 건 나만이 아니니까.

분명히 들었다. 신해범의 왼손에서도 뼈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내랑 해보자는 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시선은 신해범의 얼음장 같은 얼굴에 고정했다. 권세혁은 비실비실 웃었다. 다리병신과 팔 병신의 싸움이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되더라도, 몸을 사리지 않는 쪽이 이긴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제?”

“아깝지 않습니다.”

신해범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지금까지처럼 말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뚜렷하게 기억했다. 자신의 ‘처음’이 언제였는지. 그날의 무엇이 자신을 이토록 미치게 했는지.

광장 시계탑, 피 묻은 기요틴, 쏟아지는 비, 군인이 읽어 내려간 선언문… 사람들. 카메라들. 빛과 소리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칼날 같았다. 고스란히 맞으면서 걸어갔다. 고모의 등만 바라보며 아득한 정신을 붙잡았다. 길 끝에서 같은 처지의 소년을 만났었다.

그때 하신성에게 말을 걸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공항에서 진치우를 배신했더라면?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생각이 증오스러운 이유는 하나였다. 애초에 권일혁 총통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후회였다.

진치우는 어떤 무기를 쥐었을 때보다 맨손일 때 강했다. 신해범은 그에게 싸움꾼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둘이 있을 때, 진치우는 까진 손등을 매만지면서 고백했다.

‘솔직히 난 겁이 많잖아.’

맨손으로 이기려면 잘 피해야 해. 피할 줄 모르는 놈은 싸울 줄도 모르는 놈이야.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쑥스러워서 괜히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대인 격투술을 하는 진치우의 모습을 꾸준히 관찰한 끝에 알게 되었다.

진치우는 겁이 많았다. 상대방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러니까… 진치우의 눈에는 보였다. 상대가 주먹을 쓸지 다리를 쓸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의 버릇은 뭔지. 공격했을 때 치명상을 입힐 만한 약점은 있는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자신보다 작았고, 지금까지도 키 작은 친구의 몸에 근육이 잡히고, 부풀고, 그렇게 다부져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진치우가 어려서부터 다혈질이긴 했어도, 홧김에 사람을 때려죽일 만큼 잔인한 성품은 아니었다. 또래 중에서 우월한 신체 조건도 아니었다.

신해범은 자조했다. 너도 나와 친구가 아니었다면 다르게 살았겠지. 적어도 원수의 아들에게 총 맞지는 않았겠지.

권세혁은 주로 측면을 노렸다. 정면에서 들어오기에는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용케 쓰러지지 않는 건 배구로 길러진 다릿심 덕분이었다. 어깨 회전력도 좋았다.

스무 살의 권세혁은 튼튼했다. 신해범의 눈에는 그가 팔꿈치를 뒤로 뺄 때마다 팽팽하게 땅겨지는 하부 승모근이 보였다. 수축했던 능형근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에 풀어지며 주먹에 힘을 실어 준다.

정말 좋은 몸이었다. 권세혁은 정말이지 다 갖추고 태어났다.

‘스물한 살짜리한테 고마 껄떡대라.’

늙어서 미안하다, 씨발 새끼야.

권세혁은 강했다. 강하기 때문에 방어가 서툴렀다. 공격에 치중해서 옆구리가 자주 비었다. 팔도 너무 길었다. 무엇보다 그는 몸을 숙이지 않았다. 웅크려서 상대방의 급소를 파고들지 않는 이유는 본인의 체격이 크고, 힘에 자신 있어서였다. 밀어붙여서 메다꽂을 자신이.

신해범은 주먹을 고쳐 쥐었다. 권세혁의 턱을 후려친 오른손이 뜨끈뜨끈했다. 본래는 그의 눈을 노리고 내지른 주먹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몸을 틀지 않았다면 지금쯤 명치를 얻어맞고 바닥에 엎어져 위액을 토하고 있을 것이다.

끌어 올린 입술이 경련했다.

“자세가 좋습니다. 전하.”

“개헛소리 씨불이지 마라.”

주먹질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어려서 검술도 배웠다고 들었다. 장두현의 방에 놓였던 전통식 칠검 좌대.

“부러워서 그럽니다.”

무용수에 뒤지지 않는 바른 자세를 그때부터 가졌을 것이다. 곧은 목, 꼿꼿한 등, 긴 팔다리는 사정거리가 길어야 유리한 검술 시합에 적합한 신체 조건이었겠지. 선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면 옷자락이 낙낙하게 펼쳐지는 전통 의상을 입고 이마에 황룡이 그려진 띠를 두른 채,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진검을 휘두르는 너를 본다면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생존 싸움이다.

너는 보여 주기 위해서 싸워 왔지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싸웠다. 그곳에는 시합 규칙, 대전 상대를 향한 존중 같은 게 없었다. 체급 구분은 엄살이었다. 육십오 킬로그램이 백이십 킬로그램을 상대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떤 지저분한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때려눕히는 놈이 이기는 세상에서, 우아함은 ‘개헛소리 씨불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권세혁이 주먹을 쳐들고 달려들었다. 신해범은 얼굴을 내주었다. 이마가 깨져도 소용없었다. 권세혁의 양어깨를 붙잡고 발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힘을 두 팔에 집중했다. 권세혁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으면서 무게 중심을 빼앗았다. 그가 휘청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최유신의 책상 위로 메다꽂았다.

“커헉!”

신해범은 오른팔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엄지손가락이 너덜거리는 왼손이 오른 손목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 때로는 팔꿈치와 무릎이 주먹이나 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바로 지금.

권세혁의 명치를 노리고 내리꽂으려는 순간, 인간 미사일이 날아와 자신을 끌어안았다.

“하지 마!”

목소리, 냄새, 촉감, 무게. 모든 요소가 한 사람을 가리켰다.

신해범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나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골 빈 물고기가 아닌데.

“하지 마. 그러지 마. 하지 마….”

신해범은 인어 공주가 아니었다. 왕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비슷한 인물을 꼽자면 인어 공주를 꾀어 목소리를 빼앗은 마녀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이상했다. 인어 공주가 왕자를 배신하고 마녀와 맺어지는 동화라니.

이런 이야기를 출판했다간 아이들의 동심이 박살 나고, 학부모들의 항의가 출판사로 빗발칠 것이다.

“그만해.”

따뜻한 두 손이 뺨을 감쌌다. 신해범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 그만.”

코끝이 스쳤다. 이마가 닿았다. 입술이 포개졌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같은 동작이 두 번 반복되는 동안, 신해범은 자신의 얼굴과 목을 부지런히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이상하다.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은 병아리 날개 속에 파묻혔다.

살갗을 할퀴는 칼날이 멈추고, 보드라운 깃털이 내렸다.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잿빛 하늘의 귀퉁이부터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해준아….’

눈 밑이 붉었던 담임 교사의 얼굴은 잊어버렸다. 이름도, 담당 과목이 뭐였는지도. 하지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 그날 입었던 옷은 기억했다. 밝고 따뜻한 빛깔이었지. 꼭 우리 병아리처럼.

“가지 마. 여기 있어. 그냥… 같이 있자.”

궁금한 게 한가득 넘쳐 났다. 언제 내려왔는지. 언제부터 지켜봤는지. 그러나 신해범은 질문할 수 없었다. 용암 덩어리 같은 울음이 목구멍을 틀어막아서.

진치우는 자주 그랬다. 신해범이 없을 때, 그가 몸에 안 좋다고 타박하는 분식이나 인스턴트 음식 따위를 12층 사무실로 싸 와서 먹었다. 하나같이 냄새가 퍼지는 음식들이었다.

진치우는 혼자 먹는 법이 없었다. 곽현우의 죽음과 크라이슬러 사건 때문에 서로에게 앙금이 많을 때였는데도 그랬다.

류진은 진치우가 부를 때마다 못 이기는 척 다가갔다. 거절하기에는 음식 냄새가 너무 좋았다.

진치우는 음식을 지저분하게 먹었다. 쩝쩝 소리도 내고, 소스나 부스러기를 자주 흘렸다. 심지어 음식을 먹으며 다리까지 떨었다. 신해범이 없는 자리에서만 그랬다.

류진은 그 모습이 참 꼴 보기 싫었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그러는 게 표가 났기 때문이다. 상류층의 슬럼가 콤플렉스.

진치우를 보면 알았다. 내가 죽자고 테이블 매너를 연습해 봤자 신해범에 못 미치듯이, 불량한 행동도 귀족이 하면 우스꽝스럽다는 걸.

류진은 진치우의 눈치를 보면서 먹었다.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서. 눈칫밥 먹는 사람의 노하우가 있었다. 떡볶이에 든 어묵이나 달걀, 당면은 건드리지 않았다. 진치우가 한입에 쑤셔 넣는 납작만두도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 맛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손대지 않았다.

‘배부르다. 너 다 처먹어.’

진치우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무젓가락을 내려놓으면 안심이 됐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더부룩해. 늙어서 소화 기능이 예전 같지 않다.’

진치우는 콜라를 좋아했다. 술도 좋아했다. 우아하게 커피나 차를 마시는 신해범을 두고 ‘총도 고상하게 맞을 새끼’라고 비아냥거렸다.

류진은 납작만두를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신해범이 총을 왜 맞아.’

‘나처럼 될까 봐.’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잇자국이 선명한 만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피 웅덩이 한가운데 안착했다. 류진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었다.

‘…나처럼 될까 봐.’

진치우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피가 흘러내렸다.

류진은 허둥지둥 그에게 다가갔다. 지혈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류진의 두 손은 유령처럼 진치우의 몸을 통과했다.

“아…!”

류진은 눈을 부릅뜨고 거친 숨을 터뜨렸다. 눈앞에 보이는 천장에 안심했다.

꿈이었다. 아주 지독한 꿈,

“…….”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했다. 류진은 다시 잠을 청하려고 돌아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 뒤척임인지 알 수 없었다. 류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써 보기도 하고, 베개 위치를 바꿔 보기도 하고, 아예 바닥에 내려가서 잠을 청해 보기도 했다. 죄다 소용없었다.

류진은 무서웠다. 신해범과 만나지 못하던 상황이 차라리 나았다고 생각할 만큼.

그가 이곳에 있는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신해범이 없는 12층은 더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

류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신해범의 카디건을 꼭 여미며 두 발로 바닥을 더듬어 슬리퍼를 찾았다.

윤태금이 놔두고 간 상자로 다가가는데 발에 뭔가가 툭, 걸렸다. 보라색 머그잔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류진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터면 아끼는 물건이 망가질 뻔했다.

손잡이를 잡고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는데 신해범의 ‘컬렉션’이 생각났다. 그렇게 아끼던 것들인데… 다시 구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을 텐데. 엉망진창이 돼서 상심했을 것이다. 많이.

류진은 코를 훌쩍였다. 신해범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식기들이 아까워서였다. 비싼 값을 주고 샀다면 비싸게 되팔 수도 있는 물건들이었다.

본드로 붙이면 안 될까? 어차피 자주 쓰지도 않았잖아. 보기에만 멀쩡하면 되는 거 아냐? 요즘 순간접착제가 얼마나 잘 나오는데.

그 정도는… 내 돈으로 사 줄 수도 있다. 위로의 뜻으로. 라면전과 호두빵 값이라고 생각하면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류진은 머그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선택지가 두 가지였다. 첫째, 신해범이 돌아오기 전에 접착제를 사 와서 고쳐 놓는다. 다 붙이려면 힘드니까 그나마 덜 망가진 것들만. 둘째, 신해범과 상의해서 본드 칠을 할지 말지 결정한다. 이유는 당사자가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수제 본드 칠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고.

골똘히 생각하는데 아랫배가 사르르 아팠다. 류진은 허둥지둥 샤워 부스로 뛰어들어 갔다. 빌어먹을 신해범이….

보이는 부위만 닦아 주면 뭐 하나. 정작 혹사당한 부위는 따로 있는데. 류진은 아픈 배를 그러쥔 채 신해범을 저주했다. 콘돔 좀 써라, 이 양아치 새끼야. 백날 싸지른다고 내가 네 새끼를 배겠냐.

덩어리져 뭉친 정액이 후드득 떨어지는 기분은 지독했다. 미처 손으로 닦아 내지 못한 것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샤워기 물로 하반신을 씻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젖은 바지를 꿰어 입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찻잔을 본드로 붙여 주네, 마네 했던 자신이 천하제일 바보였다. 이러니까 매번 휘둘리지.

그 잘난 신해범이 가르쳐 줬다. 분노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라고.

류진은 신해범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헐렁한 운동복 바지허리를 꽉 조여 매고, 슬리퍼를 고쳐 신고, 카드 키를 챙겨 엘리베이터로 돌진했다.

신해범을 찾아내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심산은 아니었다. 풍기대를 혼자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자각도 있었다. 다만 복통이 가라앉지 않았고, 잠을 자려면 진통제가 필요했다.

최유신이 의무실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하지만 류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비품이 든 캐비닛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최유신이 여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훔치는 건 아니었다. 쪽지도 제대로 써서 챙겼다.

꼭 필요한 것만 가져올 것이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내 돈으로 약을 사서 갚겠다.

의무실에 권세혁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류진이 그 생각을 한 건 이미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아니면 의무실 문이라도 살짝 열어 볼까.

애초에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류진은 이미 의무실을 향해서 걷는 중이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뭉그러진 소음이 등을 떠밀고, 창밖의 가로등 빛이 손을 잡아끌었다. 류진은 의무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말하지 마.”

권세혁은 류진 앞에 꿇어앉았다.

“내가 다 설명할게. 형이 이해할 수 있게… 내가 다.”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을 문질러 닦아 흔적을 지우려 해도 소용없었다. 핏방울은 닦아 내기가 무섭게 새로 떨어졌다. 권세혁은 필사적으로 두 손을 움직이며 차모은의 비웃음을 떨치려고 애썼다.

그의 두 손바닥이 피범벅이 되었을 무렵, 류진이 말했다.

“괜찮아.”

“어?”

“널 용서하겠다고 했잖아. 나는 괜찮아.”

그런데, 하고 류진이 말했다.

“너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 같다.”

“아니야.”

권세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형을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내가 좋아서 강간했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류진의 질문이 맞았다.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변명할 염치가 없어서 그랬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만큼 파렴치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내 마음 진심… 이야.”

“그래서 안 돼.”

“형. 제발.”

“난 싫어하는 사람한테 당하는 건 익숙하거든.”

류진은 손바닥으로 달아오른 눈두덩을 힘차게, 씩씩하게 문질렀다.

“내가 못돼서 그래. 나 진짜 개새끼거든. 너 속여 먹은 것만 봐도 알잖아. 나 진짜 드럽고 치사하고 못돼 처먹은 놈이야.”

“아니야. 형. 형 제발.”

“원래 못하다가 한번 잘해 주면 감동하고, 계속 잘해 주다가 한번 못해 주면 실망하잖아. 그런 거야. 내가 씨발 좆나 개새끼라서 그래. 그러니까 권세혁.”

듣고 싶지 않았다. 두 귀를 틀어막아도 스며드는 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싶은데, 귓구멍에 쑤셔 넣을 만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형, 제발….”

“이제 그만해.”

나를 그만 사랑해.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아니,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권세혁은 자기 몸을 꿰뚫는 총알을 느꼈다. 강력한 살상력의 탄환이 고속 회전하며 살을 찢고, 근육을 파괴하고, 뼈를 부쉈다.

“왜?”

그는 울부짖었다.

“왜!”

류진은 신해범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그만하라고. 같은 말인데 누구에게는 위로고, 누구에게는 사형 선고였다. 권세혁은 자기가 후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형.”

“내 말 알아들었으면 꺼져. 다신 돌아오지 마. 전역했다는 뉴스 봤어. 네 짐은 내가 빠짐없이 챙겨서 보내 줄게. 그게 내 마지막 성의야.”

“정류진! 제발 좀…!”

권세혁은 손을 내밀었다. 류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에게 매달리는 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까운 건 없었다. 애초에 권세혁은 결심했었다. 대등한 감정으로 맺어질 수 없다면 류진의 약한 마음이라도 붙들고 늘어지기로.

‘자기 손으로 망쳐 놓고.’

차모은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권세혁은 비로소 자기가 무슨 이야길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내가 잘못했어.”

권세혁은 손가락에 힘을 줬다. 도톰한 카디건은 류진의 옷이 아니었다. 섬유 조직 사이에 스며든 냄새가 답을 알려 주었다.

신해범의 옷을 입은 류진은 예뻤다. 정수헌에서 파티를 위해 차려입었을 때보다.

“내가 잘못했어… 전부.”

만회할 기회를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응? 류진이 형.”

권세혁은 소리쳤다. 신해범이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내가 나아. 아무리 봐도 내가 나아! 형 내가 더 잘해 줄게. 원하는 거 다 해 줄게.”

“그만해.”

“이렇게 무릎 꿇고 빌게. 가진 거 전부 내놓으래도 그렇게 할게. 벌거벗고 깡통 차고 거리 한복판을 달리래도 할 테니까!”

고개를 흔들 때마다 눈물이 튀었다.

“그만하라고 하지 마. 형이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나… 너무 힘들어.”

류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권세혁도 알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고 싶은 게 사랑이었다.

누가 뭐래도 상관없었다. 권세혁은 토해 내듯 중얼거렸다. 이게 내 사랑이라고.

“날 혼자 두지 마.”

“네 곁에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많아.”

“없어! 그리고 난 형이 아니면 안 돼.”

권세혁의 부르튼 입술 사이에서 흐느낌이 샜다. 류진은 그가 웅크리고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나만 아니면 돼.”

“아니야!”

“너는 나 때문에 불행해. 나는 너 때문에 아프고. 이게 무슨 뜻인지 사실은 너도 알잖아. 우리는… 아니야. 아닌 거야, 권세혁.”

인제 인정해. 인정하고 그만해.

권세혁은 눈을 깜박였다. 단두대 밑으로 떨어지는 목이 보였다.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패배자의 최후는 처형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차모은의 비웃음에 반박하지 못했다. 권세혁은 고개를 숙인 채 키득키득 웃었다.

차라리 그랬어야 했을까. 신해범이 없는 틈을 타서, 이 나라 총통의 아들로서 가진 힘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류진을 붙잡아 지하실에 처넣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달라졌겠지. 평생 저주당하면서 살겠지만.

‘할 수 있었으면서.’

류진을 강간했다. 거부하는 그를 힘으로 찍어 눌렀다.

‘한심하긴.’

기회는 자신이 쏜 총알과 함께 날아갔다. 지금 눈앞에는 신해범이 있었다. 그를 자기 힘만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방금 뼈저리게 깨달은 바였다.

“그쯤 하지. 이병.”

신해범이 앞으로 나섰다. 권세혁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신해범이 자신과 류진 사이에 끼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해범의 품속에서 류진은 편해 보였다. 정해진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류진이 자기와 함께할 때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나?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권세혁은 신해범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패배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정류진 이병은 왕자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말입니다.”

혼자서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디 가?’

‘이대로 끝이야?’

‘진짜 포기해?’

‘아, 저 병신!’

차모은을 이곳에 두고 가고 싶었다. 그가 신해범의 어깨에 올라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모든 걸 빼앗은 신해범이 나처럼 저주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권세혁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진 상태였다.

다 끝났다. 나는 아무것도 못 했다.

류진을 잡아다 가두기는커녕, 동정심에도 끝까지 호소하지 못하는 병신 중의 병신이었다.

“잠깐만.”

류진은 신해범의 품에서 벗어났다. 의무실 문으로 향하는 권세혁의 팔을 붙잡았다.

“권세혁.”

“…….”

“집으로 갈 거지? 차 있어?”

권세혁이 대답하지 않자 류진이 고개를 돌려 신해범을 쳐다봤다.

“…….”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권세혁을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의미였다.

신해범의 목구멍에서 숨이 튀었다.

“나서지 마라, 이병!”

류진은 신해범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뾰족한 귀를 잡아당겨 입술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바보 같은 소린 거 알아. 근데 당신도 쓰레기 같은 짓 많이 했잖아. 지금 상황에서 하나라도 착한 일 해야, 그래야 진치우가 괜찮을 거 아냐.

마지막 말이 신해범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신이 안 가면 내가 해.

“그래도 좋아?”

안 될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 좋은 사람 되겠다고 나섰다가 얻어맞고 강간당해 너덜너덜해진 모습이나 구경하자,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신해범은 류진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얻어맞고, 모욕당하고, 그런데도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세상을 저주하지 않는 모습이 예뻐서. 빛이 나서.

“할 수 있지?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지?”

신해범은 자기 뺨을 더듬는 류진의 손을 붙잡아 떼어 냈다. 뭐 이런 상관이 다 있을까. 명령하려면 밀어붙이고 불안하면 거둘 것이지,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하긴. 너도 네가 진치우를 위하게 될 줄 몰랐겠지.

신해범은 한숨을 쉬었다. 군인은 명령 앞에서 질문하지 않는다.

“먹어.”

권세혁은 류진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동글동글한 환약이 하나, 납작하고 길쭉한 타원형 알약이 하나.

“덱시야?”

“그런 거 아니야.”

진통제, 그리고 신경 안정제였다.

“나한테 마약 줘도 돼.”

류진은 못 들은 척했다. 약과 생수를 받아 든 권세혁이 픽 웃었다. 코피는 멎었지만, 마음에서는 여전히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형은 아직도 나한테 잘해 주네.”

“그래서 싫어?”

“응.”

“…….”

“차라리 두들겨 패면 좋겠어.”

“됐어. 누구 좋으라고. 뭐 해? 받아.”

권세혁이 약을 삼키기가 무섭게 신해범이 다가와 팔을 잡아끌었다.

“모시겠습니다.”

권세혁은 그에게 붙들려 나가면서 뒤돌아보았다. 침대에 앉은 류진에게 물었다.

“누가 더 잘해?”

“…….”

“형! 나랑 이 새끼랑 누가 더 잘해? 누구랑 하는 게 좋아? 응?”

신해범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류진은 고개를 돌리고 침묵했다.

둘 다 더럽게 못해.

우리 셋 중에선, 아마도 내가 제일 잘할 거야.

류진은 창문에 바짝 다가섰다. 기다리고 있으니 신해범의 레인지로버가 나타났다. 반짝이는 후미등이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안녕. 잘 다녀와.

엉망이 된 의무실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복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최유신이 더 걱정됐다. 그가 돌아와서 이 꼴을 본다면 기겁할 터였다. 어쩌면 이 무법 지대 같은 데서 일하기 싫다고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류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 된다. 그러면 맛 좋은 보리차를 더 마실 수 없다.

바닥에 무전기 한 대가 떨어져 있었다. 신해범의 것으로 보였다. 권세혁과의 난투 중 떨어뜨렸겠지.

류진은 무전기를 집어 들고 살폈다. 다행히 망가지지는 않았다. 확실한 건 통신을 해 봐야 알겠지만….

무전기를 앞뒤로 돌려보며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 신해범 대조, 이쪽 기우희 부조. 현 시사 부로 제 5성야 동명 바란다.

류진은 무전기를 떨어뜨렸다. 급히 도로 집어 들었으나, 응답하지는 못했다.

“그…!”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음어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건너편의 기우희도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신해범 대조?

기우희의 무전 내용 자체는 알아들었다. 신해범 대장, 지금 제 5 중앙 병원으로 오라.

- 위치 누구야?

그러나 대답이 문제였다. 류진은 이 무전기를 든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부터, 신해범이 권세혁과 일대일 격투를 벌였고, 결과적으로 그가 권세혁을 신계동 자택으로 데려다주게 되었으며, 진치우의 상태가 어떠냐는 질문까지 음어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무전기 너머에서는 기우희가 연신 신해범을 찾아 댔다.

결국 류진은 소리쳤다.

“위치, 아니 이쪽… 벼, 병아리입니다!”

무전기를 쥔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난 이제 죽었다.

레인지로버는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정차했다. 신해범은 핸들을 잡은 채, 권세혁이 앉은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왕자님.”

권세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자는 건 아니었다. 신해범은 그를 재촉하는 대신 운전하는 동안에 썼던 보안경을 벗었다.

미간 사이를 문지르는데 권세혁이 불쑥 말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 해코지할 생각 안 들었어?”

신해범은 케이스에 넣은 보안경을 수납함에 꽂았다. 안경 착용이 일상화되지 않은 사람은 분실하기 쉬우니 차에 하나 두고 다니라던 최유신의 충고가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맨눈으로 운전할 만했다. 시력이 여기서 더 떨어지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해코지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설마 제가 진심으로 왕자님을….”

“모르잖아? 류진이 형만 잘 구슬려서 입 다물게 하면.”

“자신의 목숨을 좀 더 소중히 여기십시오.”

“아까는 진짜로 죽일 기세던데?”

“왕자님은 그러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럼 내가…!”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머리가 지끈했다. 권세혁은 눈을 꾹 감았다.

“나 류진이 형 포기 못 해.”

꾸밈없이 솔직한 말이었다. 권세혁 같은 애송이에게 잘 어울렸다. 신해범은 세이렌 프로젝트가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본인이 의도한 노선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매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지만. 정류진은 왕자의 눈을 가리는 데 성공했다. 권세혁은 정류진에게 빠져서 많은 걸 놓치는 중이었다.

“나는 절대… 못 잊어.”

생각과 에너지가 오롯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었던,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던 미숙아는 사랑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만약 권세혁이 평범한 스무 살 남자아이였다면 그래도 귀여웠을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서툰 첫사랑은 찾아오니까. 문제는 미숙아가 입에 물고 태어난 권력의 젖줄이었다. 그게 주변의 애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

어쩌면 정류진이 <백사자> 소속이었다는 과거를 들킨 건 권세혁에게 배신감을 자극하기보다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되는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류연비의 동생이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았던 걸 보면.

애초에 권세혁은 부모 세대의 일과 자신을 분리하고 있었다. 그가 연좌제의 희생양이 아니었기에, 승리자의 자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자님은 정 이병에게 집착하고 계십니다.”

“집착이라도 상관없어. 나는….”

“그러느라 보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정류진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 건 선행을 베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권세혁을 용서하면 진치우가 벌떡 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놈을 정류진 옆에서 떼어 놓고 싶어서였다. 자기 손으로.

“다른 거?”

신해범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깨달았다. 정류진이 뭔가 불만이 있을 때 하던 행동을 자기가 따라 하고 있다는 걸.

쿵.

조수석 창문이 흔들렸다. 권세혁이 움찔했다. 그는 선팅된 차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며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단발머리 소녀를 보고 기겁했다.

“아직도…!”

신해범은 혀를 찼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어차피 밖에서는 안 보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가 자기 얼굴만 한 카메라를 꺼내 들이밀기 전까지는.

플래시를 터뜨리면 차량 내부가 찍힌다. 권세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신해범은 차를 출발시켰다. 소녀는 카메라를 든 채 따라왔다. 금방 뒤처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근성이 있었다. 뒤처지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신해범은 속으로 감탄했다. 혹시 육상 선수인가? 장래에 올림픽 메달을 노리나?

“이제 어쩔까요.”

신해범은 권세혁을 탓했다.

“그러게 얼른 들어가시지.”

이대로 저택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야 할지 몰랐다. 잠복하던 사생팬이 한 명뿐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신해범을 노려보던 권세혁이 말했다.

“…집 뒤에 차고. 조용히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어.”

“그렇습니까? 진작 말씀해 주시지.”

“나도 놀랐으니까!”

신해범은 이대로 핸들을 꺾어 권세혁이 앉은 조수석을 담벼락에 긁어 버릴까 하다, 이 차가 자신의 레인지로버라는 사실을 깨닫고 단념했다.

권세혁이 가르쳐 준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좌우의 가로수들이 가지를 길 쪽으로 뻗어서 본래 폭보다 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었다.

운전자에게 친절한 길은 아니었으나, 신해범은 호월루의 샛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깁니까?”

담쟁이덩굴이 크고 육중한 철문을 뒤덮었다. 지저분한 걸 방치했다기보다는 일부러 걷어 내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 여기서….”

“못 들었어? 차고라고. 집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해.”

권세혁이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그는 신해범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채 창밖으로 손을 뻗어 담쟁이덩굴 사이에 가려진 초인종을 눌렀다.

“놀랍습니다. 밖에서는 전혀 안 보이는군요.”

“신경 꺼.”

일은 시키는데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보면 볼수록 권주혁과 판박이였다.

신해범은 장승희가 아직 부재중이기를 바랐다. 불륜 남녀가 나란히 서 있는 꼴을 본다면 약 기운 덕분에 가라앉은 권세혁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를지도 모르니까.

그의 기대에 보답하듯 앳된 아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세요?

권세혁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무혁아. 형이야.”

- 형아?!

신해범은 창문을 내려 차 안을 환기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우수수 흔들렸다. 가지에서 떨어진 잎사귀 하나가 날아 들어와 신해범의 손등을 스쳤다.

“작은 왕자님 혼자 계십니까? 이 시간에?”

“조용히 해.”

권세혁이 짜증을 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건 집 안에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신해범은 권세혁을 본인의 방 침대에 얌전히 갖다 놓아야 했다. 의무실에서 그대로 나와 크러치도 챙기지 못한 권세혁이 행여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다행히 권무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집안일을 봐주는 고용인 한 사람과 함께 있었다. 막차가 끊길 때까지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굴렀다는 중년 여성은 권세혁과 함께 나타난 신해범을 구세주처럼 쳐다보았다.

신해범은 곧장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 여성에게 따라붙었다.

“총통 부인은 안 계십니까?”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군요. 저,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만.”

“네?”

“왕자께서 입때껏 요기를 못 하셨습니다. 뭐 과일이라도 있으면 좀.”

여성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신해범을 올려다보는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신해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웃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제가 요리는커녕 과일 깎기도 서툰 사내놈이라….

물론 말짱 거짓말이었다. 권세혁이 먹을거리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신해범은 넓은 저택에 권씨 형제와 자신만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아… 아아! 네!”

가방과 외투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후다닥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방금 잔혹 범죄 하나를 막으신 겁니다.

신해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넓은 대저택이라 해도 고용인들이 매일 스테이 인, 아웃을 반복하는 일은 번거로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승희는 왜 입주 고용인을 두지 않을까?

짐작 가는 바라면 있었다. 왕족이나 귀족의 저택에 머물며 일하는 고용인이 집 안의 식료품이나 조미료를 표가 나지 않을 만큼 조금씩 빼돌렸다가 휴일에 가지고 나가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관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몰래 도청기나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서 외부에 정보를 팔아 치운 일이 적발되어 처형된 사건도 있었다. 사생활 보호 문제도 있고.

하지만 사생활 보호는 외국인을 고용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필리핀 입주 가정부가 유행이었다. 도청기나 감시 카메라가 걱정이라면 총통 부인의 신분으로 군용 기술을 빌려서 방어할 법도 했다. 창이 날카로워지면 방패도 두꺼워지기 마련이었다.

결정적으로 오늘 같은 문제가 생겼다. 근무시간이 지난 고용인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아홉 살짜리 권무혁이 넓은 저택에 혼자 있을 뻔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 사는 게 싫어서인가? 아니면 입주 고용인에 배신당한 전적이 있거나?

권세혁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의 곁에 권무혁이 찰싹 달라붙었다. 카펫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 감은 형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아이는 인기척을 느끼고 신해범을 봤다.

“작은 왕자님.”

신해범은 주먹 쥔 두 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풍기 교육대에서 왔습니다. 준장 신해범입니다.”

“…….”

“저 기억하십니까?”

작은 얼굴이 끄덕였다. 신해범은 웃었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장님 자주 봐요.”

권무혁의 손가락이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그렇습니까?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해범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파에 앉았다.

“…….”

권세혁은 확실히 잠든 것 같았다. 허락 없이 소파에 앉았는데도 불호령이 없는 걸 보면.

남의 친구를 총으로 갈겨 놓고 잠이 오냐?

신해범은 권무혁의 머리둘레와 자신의 손바닥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물론 사람 머리를 손으로 터뜨려 죽이는 건 코미디 차력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상은 자유니까.

신해범의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권무혁은 무릎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갖고 싶으십니까?”

권무혁은 신해범의 커프스 버튼에 관심을 보였다. 신해범은 순순히 핀을 풀어 건네주었다. 어차피 한 짝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하나는 권세혁과 주먹다짐하는 중에 튕겨 나갔는지 어쨌는지 몰랐다.

권무혁은 반짝거리는 핀을 받아 들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가져도 돼요?”

“예. 저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우리 교환해요.”

“예?”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권무혁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신해범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신해범은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인기척에도 불구, 잠에서 깨지 않는 권세혁을 스쳐 지나며 생각했다. 정류진이 먹인 진통제 효과가 도는 모양이라고.

어린애 방은 맞는데, 묘하게 사이즈가 부풀려진 느낌의 방이었다.

캐릭터 이불로 덮인 침대는 성인 두 사람도 넉넉히 뒹굴 크기였다. 아동용 책상에 최신식 듀얼 모니터가 놓였고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은 각종 도서로 빼곡했다. 대부분 시리즈 만화나 어린이용 세트 도서였지만 군데군데 성인용 도서 몇 권도 끼어 있었다. 책이 꽂히지 않은 빈 공간에는 앙증맞은 스투키 화분이 자리했다.

신해범은 익숙한 책 제목 앞에서 멈췄다. 영국 작가의 장편 소설이었다. <파리 대왕>.

“이 책 읽으셨습니까?”

“네.”

“내용도 이해하셨고요?”

“네.”

“대단하십니다.”

신해범은 하드커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책을 있던 자리에 꽂아 놓고, 책상 밑에 쭈그려 앉은 권무혁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네모난 양철 케이스를 꺼내는 중이었다.

“왕자님?”

“여기에 좋은 게 많아요.”

선물용 양과자 케이스였다. 빨간 바탕에 드림캐처 무늬가 그려졌다. 뚜껑 가장자리가 녹슬어서 잘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낑낑대던 권무혁이 마침내 케이스를 열었다. 그러나 케이스를 세워서 힘껏 연 탓에 내용물이 죄 튀어나왔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이쪽으로 굴러가고 저쪽으로 날아갔다.

신해범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애초에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권세혁과 닮지 않은 용모에 잠시 마음이 누그러져서, 깡마른 팔다리가 어린 시절 정류진이 저랬겠지 싶어서…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시간을 질질 끌어. 대충 정리하고 일어나. 이 얼간아.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손가락에 뭐가 걸렸다.

납작한 틴 케이스였다. 가로 육 센티미터, 세로 구 센티미터. 손바닥에 착 감기는 케이스 안에서는 잘그락잘그락 소리가 났다. 무심코 열어 본 신해범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왕자님.”

“네?”

“이것 어디서 나셨습니까?”

신해범은 케이스를 내밀었다. <화이트 스완>에서 유통하던 엑스터시를 그도 참 오랜만에 보았다.

“아!”

권무혁이 활짝 웃었다. 너무나도 무해한 얼굴이었다.

“그건 사실… 형아 건데.”

신해범은 여기저기에 흩어진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어른 물건이었다. 여성보다는 남성이 쓸 법한 것들이었다. 넥타이핀이나 볼로 타이 같은 정장 액세서리부터 갱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팔찌, 반지도 있었다. 두 종류 다 권무혁 나이대의 소년이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훔치신 겁니까?”

권무혁은 입을 다물었다. 신해범을 바라보는 눈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괜찮습니다. 일러바치지 않습니다. 사실은 저도 이런 게 필요해서요.”

신해범은 틴 케이스를 흔들며 웃었다. 공범자의 미소였다.

“그럼 그거 드릴까요?”

“그래도 됩니까?”

“그런데 한 개만요. 왜냐면 일대일 교환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신해범은 권무혁이 보물 상자를 정리하는 걸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엑스터시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에 대한 답을 얻어 내려고 애썼다.

어린아이 상대로 유도 신문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어리다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친다.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던 권세혁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고교 시절, 권세혁은 학업과 배구부를 병행했다. 당연히 귀가가 늦었다. 권무혁은 넓은 집의 그 어느 공간보다 형의 개인 방을 좋아했다. 권세혁은 어린 동생이 자기 방에 드나드는 걸 막지 않았다. 세상과 격리된 동생이 가여웠기 때문이겠지. 뭐가 없어졌다 해도 새로 사면 그만이었다.

권무혁은 나름대로 용의주도했다. 컴퓨터 PC나 언제나 옆에 두고 아끼는 스포츠용품 같은 건 의도적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본인이 부주의해서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기 쉬운 것들을 노렸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 모양이 같거나 비슷한 종류가 많아서 개수를 헷갈리기 쉬운 것들.

권무혁은 엑스터시의 이름도 몰랐다. 다만 권세혁의 방이나 욕실 바닥에서 같은 것을 자주 주웠다. 희고 납작한 사탕은 권세혁의 외투 주머니, 스포츠 백에서도 나왔다.

“이거 드셔 보셨습니까?”

권무혁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쓴 건 싫어서요. 또.”

“또?”

“저는 뭐 함부로 먹으면 안 되거든요.”

권무혁의 조심성은 장승희의 과보호에서 비롯되었다.

“그래도 이건 형아가 항상 가지고 다녔고….”

신해범은 권무혁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 딴에는 형을 위하는 마음이었겠지. 언젠가 필요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왕자님.”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신해범이 자기 허벅지를 두드렸다. 권무혁은 순순히 다가와 앉았다. 아이는 가볍고 따뜻했다. 마치 작은 동물을 안은 기분이었다.

온실에서 자란 애정 결핍 소년은 자기 형만큼이나 크고 훤칠한 성인 남성에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빠져들었다.

“형아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요. 같이 있는 기분이에요.”

“들킨 적은 없습니까?”

권무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몰라요.”

아이는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하지만 장승희나 권세혁 당사자가 이 깜찍한 절도 행각을 아예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알고서도 덮어 두는 거겠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버릇이라고 생각해서.

“준장님은요?”

“이건 왕자님께만 해 드리는 이야긴데….”

신해범은 파오훼이 시절 자신의 절도 이야기를 들려줬다. 비참한 과거지만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재치 있게, 유쾌하게 꾸며 냈다. 뭐든 말하기 나름이었다. 현실은 <파리 대왕>이라도, 과장과 유머를 섞으면 <15 소년 표류기>로 둔갑할 수 있었다.

“텅 비었던 소대 곳간이 가득해지니 제 마음이 그리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멋져요. 의적 같아요.”

“그런 말도 다 아십니까?”

“책에서 봤어요.”

“대단하십니다.”

“여긴 어쩌다 다쳤어요?”

권무혁은 신해범의 왼손을 가리켰다.

“최근 임무에서 다쳤습니다.”

“무슨 일이었는데요?”

올려다보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신해범은 말없이 웃으면서 권무혁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왕자께선 숙부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숙부님요?”

권무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숙부님은 형아만 좋아해요.”

“이런….”

신해범은 안타까운 척했다.

“어쩌면 좋습니까. 그분이 곧 왕자님 아버지가 되시는데.”

“네?”

“아직 모르셨습니까? 장군님과 총통 부인 사이에서는 이미 결정된 이야기인데요.”

어린아이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에는 핵심이 있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악랄한 계부모 이야기가 반드시 하나쯤 끼는 것도 그 까닭에서였다.

아이의 세상에는 부모가 신이다. 신이 사라지는 것만큼 바뀌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새로운 신이 나를 사랑할지, 증오할지 모르니까. 내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도.

게다가 권무혁은 친형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빈말로도 닮지 않은 형제지간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공통점이 사라지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

권무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신해범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가엾게도.

어린것이 벌써부터 아는 것이다. 총통이 될 수 있는 자식과 될 수 없는 자식의 차이를. 왕이 되지 못한 왕자, 공주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려서 걸어간 길을.

“싫어… 싫어요.”

“이런.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신해범은 자기 품에 안긴 권무혁의 등을 토닥거렸다.

“저는 왕자님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니까요. 두 분이 불행해지는 건 싫습니다.”

“싫어… 싫어….”

권무혁은 눈물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아도 알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작은 왕자님께서 모르셨다면, 아마 큰 왕자님께서도….”

신해범이 말끝을 흐리자 권무혁이 매달려 왔다.

“말하지 마요. 형아한테는. 형아한테는 말하지 마. 날 보내는 게 낫다고 하면 어떡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해범은 작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권무혁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형아한테 도움이 안 되니까…!”

권무혁의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말이었다. 신해범은 한숨을 내쉬고 권무혁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가슴에 뭔가가 꽂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마음 아픈 소식을 전해 드려 죄송합니다.”

이 한마디는 진심이었다.

“준장님이 나 도와주면 안 돼요? 엄마랑 숙부한테….”

“저는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인과 장군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요.”

“그래도. 그래도.”

권무혁은 신해범의 셔츠를 쥐고 놔주지 않았다. 신해범은 어린애 손힘이 의외로 세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정말… 싫어.”

“왕자님, 용기를 내셔야 합니다. 용기를 내서 맞서 싸우세요. 자기 삶은 자기가 개척하는 겁니다.”

권무혁의 목에서 꿀꺽 소리가 났다. 신해범이 한 손으로 쥐어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목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면 되지요. 예를 들자면… 그래요. 숙부님은 훌륭한 통치자이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라는 걸.”

신해범은 울먹이는 권무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시선을 맞췄다. 겁먹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꼬여 내는 악마가 거기 있었다.

“왕자님… 저도 왕자님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요? 왜?”

“저는 나쁜 짓을 많이 해서요. 아까 말씀드렸지요? 물건을 훔쳐서 소대 곳간을 채웠다고.”

“그건!”

“왕자님은 저를 이해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도둑질이니까요. 들키면 무시무시한 벌을 받겠죠.”

“도둑질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잖아요.”

신해범이 웃었다.

“왕자님과 통해서 기쁩니다.”

그는 권무혁의 귀 가까이 입술을 대고, 아이만 들을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일, 비밀로 해 주실 거지요?”

그러지 않으면 너는 숙부의 양자가 된다. 지금껏 친형제였던 사람과는 하루아침에 사촌이 되고, 어머니도 더는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왕자님께 사실을 고한 저도, 이 신해범이도 무서운 벌을 받게 됩니다.”

권무혁이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범은 아이의 작은 손을 부여잡았다.

“우리 작은 왕자님….”

“알아요.”

권무혁이 코를 훌쩍였다.

“난 숙부님한테 가지 않을 거예요.”

신해범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자기 삶을 용감하게 개척하겠다고.”

과거에 아이였던 어른의 손과 훗날 어른으로 성장할 아이의 손가락이 얽혔다. 얽힌 손가락은 위아래로 두 번 흔들렸다.

신해범은 발소리에 주의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권세혁은 여전히 자는 중이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 과일 접시가 놓여 있었다. 고용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방과 외투도 사라진 걸 보아하니 또 불러 세울까 봐 후다닥 달아난 모양이었다.

신해범은 잠든 권세혁 앞에 섰다. 그를 목 졸라 죽이는 상상을 했다. 엄지손가락은 완전히 못쓰게 될 것이다. 그게 겁나서 실천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신해범의 시선이 과일 접시로 옮겨 갔다. 종류별로 참 예쁘게도 깎아 놓았다. 그는 꼭지가 예쁘게 잘린 딸기를 하나 집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서 촉촉했다.

입 안에서 과즙이 팍 튀었다.

***

중환자실 앞에서 손을 씻었다. 손톱 밑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신경 써서 닦았다. 간호사가 다가와 마스크와 모자, 가운을 건넸다. 전부 착용하니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면회 시간은 아니었지만, 예외는 있기 마련이었다. 신해범은 복도에 나란히 서 있는 수문장들을 바라보았다.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기우희, 최유신, 성재경. 그리고….

신해범은 성재경 뒤에 숨어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 이병. 이리 와.”

성재경이 몸을 비켰다. 류진은 잠자코 앞으로 나섰다. 함께 들어가자는 신해범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는데 신해범이 피식 웃었다.

“왜?”

“얼굴 먹히겠다.”

류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잘 데려다줬어? 길에 막 버린 거 아니지?”

“분부대로 임무 완수했습니다.”

“…잘했어.”

류진이 신해범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이 무전기를 두고 가서 내가 받았어. 음어 다 까먹어서 소령님한테 혼났어. 근데 괜찮아. 진치우 수술 잘됐대. 의사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대.

그 결과가 반송장이었다. 인공호흡기에서 들리는 거친 바람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비닐 한 장 너머에 누운 사람이 진치우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최선을 다했다고? 이게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말은 쉽지.

진치우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류진이 말했다.

“이번에는 호흡기 떼라고 시키지 마.”

신해범은 웃지 않았다. 류진은 황급히 덧붙였다.

“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런 건 진짜 죽는 사람한테나….”

“혼자서 숨도 못 쉬어. 죽은 거나 다름없지.”

가슴팍의 규칙적인 오르내림은 생존의 증거가 아니었다. 기계가 멈추면 사라질 희망에 불과했다.

류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소릴 했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눈이 그렁그렁했다. 부정적인 소리를 한마디만 더 했다간 손까지 바들바들 떨 것 같아서, 신해범은 마스크를 내리며 빙긋 웃었다.

“이미지 변신 좀 시도해 봤어. 안 어울려?”

“안 어울려.”

“이상하네.”

“뭐가?”

“네가 그랬잖아. 못하던 놈이 한번 잘해 주면 감동, 잘해 주던 놈이 한번 못해 주면 실망.”

“그게 당신이 헛소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신해범은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류진도 똑같이 했다. 그는 이때다, 싶어서 머리를 기대는 신해범을 밀쳐 내지 않았다. 말만 퉁명스럽게 했다.

“무거워. 귀찮아. 떨어져.”

“약한 모습 보이면 위로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신해범이 눈을 감았다.

“내 생각이 틀렸네. 꽝이다.”

류진이 투덜거렸다.

“위로 좋아하고 자빠졌네. 나는 약한 부하 안 받아.”

그러면서 신해범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강하니까 부하로 받은 거거든.”

“약해지면 버릴 거냐?”

“당연하지.”

“알았어. 버리기 전에 빼먹을 수 있는 거 다 빨아먹어.”

“당연하지.”

근데, 하고 류진이 말했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강할 거 같아.”

마주 잡은 손가락이 얽혔다.

“당신이 오래오래 강했으면 좋겠어.”

신해범은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류진의 손등에 입 맞췄다. 움찔하는 마른 손을 꼭 붙들고 웃으면서 질문했다.

“왜? 왜 내가 오래 강하면 좋겠어?”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피어싱 구멍이 선명한 귓바퀴가 붉었다.

“…늦게 버리려고.”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공호흡기에서 나는 쉭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류진은 신해범의 머리에 뺨을 기댔다.

“내가 물어봤는데. 이 병원이 총상이랑 화상 치료로는 국내 최고래. 왜 그럴 거 같아?”

신해범은 모르는 척했다.

“글쎄. 왜 그럴까.”

“근처에 학교가 많잖아. 이 앞에 대학교도 제1 종합이고.”

유미현과 강인혜의 모교였다. 아니, 강인혜는 자퇴했으니 전 학교인가.

“시위하다 다친 대학생들 많이 온대.”

“…….”

“근데 있잖아,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대학생들이 군인을 데려오기도 한대. 자기네 화염병에 맞았다고 업고 온 적도 있었대.”

“한심하긴.”

“당신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류진은 신해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있잖아… 만약에 있잖아. 당신이 내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으면, 당신이 풍기대 옷을 입었어도 난 당신을 살리려고 했을 거야.”

“절대 그러지 마.”

“왜?”

“그 개 같은 새끼가 정신 차리면 널 죽일 거야.”

“안 죽였잖아.”

“죽기 직전까지 패고 강간했지.”

“그러니까 만일이라고 했잖아.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야.”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류진이 울먹였다. 신해범은 킥킥 웃었다.

“울지 마. 울면 하고 싶어지니까. 아무리 나라도 혼수상태 친구 놈 앞에서 그 짓거리는 못 하겠다.”

“당신은 한 번도 안 해 봤어? 우리가 다르게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류진이 코를 훌쩍였다.

“나는 그런 생각 많이 해.”

신해범은 웃기만 했다. 한다고 말하면 정말로 그걸 바라게 될까 봐.

“재미없는 옛날얘기 해 줄까.”

“재미없는 얘기를 왜 해?”

“내가 헌병대에 있을 때. 어떤 가수가 위문 공연을 왔어.”

외부 행사장에서 간부들 대상으로 열린 특별 공연이었다. 일반 소대원들의 참석은 불가능했고, 소수의 운전병과 조리병만이 그 혜택을 누렸다. 신해범은 일일 회관병으로 자원해서 뽑혔다.

“그게 뭐야?”

“서빙 노예.”

노는 행사가 있는 날에만 출근한다는 고위 간부들의 참석 때문이었다. 기존 인원으로는 행사장의 모든 테이블을 감당할 수 없었다. 수준급의 서빙 실력을 갖추고 외모도 준수한 회관병이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 없었기에 출신 성분이 나쁜 신해범도 기회를 잡았다.

류진은 위문 공연 가수가 누구였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질문을 했다.

“가수 예뻤어?”

“지금 내가 모시는 상관이랑 똑같이 생겼어.”

“노래는? 잘했지?”

“솔직히….”

회관병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었다. 기존 인원은 무대와 가까운 테이블을 담당했으나, 일일 아르바이트나 다름없었던 신해범은 무대와 멀리 떨어진 외곽 테이블 담당이었다.

초청 가수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아도 소리는 잘 들렸고, 중간중간 벽에 기대서 쉬기도 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에는 무대에서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꽃가루가 날려 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음악 소리를 들으며, 신해범은 빛이 강한 곳에는 그림자도 짙다고 생각했다.

류진이 재촉했다.

“왜? 뭐야? 왜 말을 안 해? 노래 잘했냐고?”

“힘들어 보였어.”

“어?”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 키는 커도 많이 말랐더라고. 그런 몸으로 성량을 쥐어짜 내니 휘청거릴 수밖에 없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무대 뒤에는 임시로 마련된 가수 대기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해범은 산더미처럼 쌓인 박스를 뒤지며 까다로운 간부가 찾는 술을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었고, 류연비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들고 뛰었다. 그 와중에도 메이크업 담당이 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수건으로 훔쳐 주었다.

“가수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군.”

“꺼져.”

류진은 신해범의 머리를 냅다 밀었다.

“아야. 갑자기 왜 그래?”

“당신이 진치우랑 나란히 누워 있었으면 좋겠어.”

신해범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깐 오래오래 살라더니.”

“힘들게 노래해 준 사람한테 감사는 못 할망정….”

그날 예상치 못한 음향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바로 전 곡에서 점프 동작이 많은 댄스를 소화했던 류연비가 무반주 라이브로 고음 파트가 많은 곡을 부른 뒤 코피를 흘리며 내려왔었다는 이야기도 감췄다.

애초에 땡전 한 푼 받을 수 없는 위문 공연이었다.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왔을 터였다. 솔직히 대충할 것 같았다. 애초에 아이돌 가수가 노래를 잘해 봤자….

하지만 무대 뒤에서의 류연비를 본 뒤, 신해범은 궁금해졌다. 무엇이 한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지. 돈도 못 벌면서, 목에서 피를 토하면서까지 위문 공연 무대에 서려는 이유가 뭔지.

류연비의 전화 통화를 엿들은 일은 고의가 아니었다. 애초에 남자 화장실에 들이닥친 무뢰배가 그였다. 신해범은 후다닥 담배를 껐으나 나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류연비는 엿듣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통화를 이어 나갔다. 통화를 마친 뒤에는 닫힌 화장실 칸을 걷어차며 당장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류연비는 건장한 군인을 앞에 두고서도 태연했다. 오히려 그는 신해범을 협박했다. 방금 내가 통화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입 함부로 놀리고 다니면 진짜 큰일 나.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신해범은 류연비를 붙잡았다. 내가 누군지, 왜 군인이 되었는지, 앞으로의 계획이 뭔지 설명했다. 류연비가 침착하게 들어 줄 때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당신은 우리랑 안 어울려.’

뭐라고?

‘목적은 같아도 방식이 다르면 곤란해. 당신이 말하는 건 그 사람과 내가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일이야.’

‘아무래도 우린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겠어.’

확인사살까지 끝장났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거 아니래.’

네가 뭘 아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거대한 권력을 무너뜨리려면 내부자가 되어 안에서 부수지 않는 이상 누굴 배경으로 삼아도 바위로 계란 치기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은 그래 봤자 소용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류연비는 곽으로부터 새 세상의 여신 지위를 약속받았다.

“정류진.”

“뭐.”

“좋아해.”

“하지 마.”

신해범은 어쩔 수 없이 생각했다. 만약 나와 류연비의 방식이 같았다면. 류연비가 나를 곽재헌에게 소개해 줬다면. 나는 류연비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정류진, 아니 류연우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너는 나를 형이라고 불러 줬을까.

신해범은 피식 웃었다.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여태 정류진에게 해 온 짓거리를 생각하면 류연우를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자신은 분명 류연비 몰래 류연우에게 손을 댔을 테니까.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렸다며 길길이 날뛰는 류연비의 모습이 상상됐다. 천하의 파렴치한이라며 자신을 비난할 곽재헌도. 신해범은 어깨를 들썩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날 똥파리 취급해 줘서 고맙다, 류연비. 네 동생 좆나 예쁘고 좆나 맛있다. 지옥에서 얌전히 맞아 죽어 줄게.

신해범은 류진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하지 말라니… 까.”

류진은 자꾸만 치대는 신해범을 밀어내려고 했다.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뿐이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신해범이 말했다.

“나는 살 거야. 오래오래. 강하게. 그리고 네게 더는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 죽을게. 그때까지 알차게 써 줘.”

류진은 대꾸하지 않고 의문을 삼켰다. 당신은 왜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하는지.

***

작일 풍기 교육대 본관에서 발생한 총기 사고로 인해 풍기 교육대 부대장 진치우 중령의 생명이 위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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