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15장. 굿나잇 젠틀맨 下 (28/39)

권주혁은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새 지팡이가 손에 익지 않았다. 손잡이를 용 머리 모양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누구 하나라도 그립감이 좋지 않을 거라는 얘길 했다면 이렇게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주혁은 혀를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같이 겁만 많아서. 못난 것들….

권세혁이 지정한 약속 장소는 낯선 곳이었다. 권주혁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뷰티 아트 업종으로 분류되는 살롱과는 거리가 멀었다.

권세혁은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다른 손님과 마주치지 않도록 분리된 개인실이었다. 여섯 개의 크림색 벽으로 둘러싸인 룸은 복층 구조로, 천장이 높아 스와로브스키가 주렁주렁 달린 긴 샹들리에를 걸었다.

권주혁은 암갈색 소파에 앉았다. 눈앞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차가 놓였다. 직원이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 쳐 물러가고 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 권세혁의 머리 손질이 끝났다.

“왜요, 숙부?”

권주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마스크 무늬 커튼을 등지고 앉은 권세혁이 웃었다.

“놀라셨어요?”

“…군인 같구나.”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 봤어요.”

권세혁은 반삭에 가깝게 짧아진 머리를 만져 보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없었다. 이마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 느낌은 생소했다. 하지만 편하고 시원했다. 그는 새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죠? 숙부가 보기엔 어때요?”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설 생각이냐?”

“엄마랑 똑같은 말씀 하시네요. 역시, 두 분이 통하는 게 있나 봐요.”

“뚱딴지같은 소릴….”

무심코 말하던 권주혁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숙부.”

전동 휠체어 바퀴가 굴러왔다. 권주혁은 코앞에 있는 조카의 얼굴을 응시했다.

젖살이 쑥 내린 얼굴선이 날카로웠다. 눈 밑은 까맣고, 뺨에 녹색 혈관이 비쳐 보였다. 권주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놈이 이렇게 생겼던가.

“오늘 여기로 오시라고 한 건, 제가 그동안 두 분께 순종적인 자식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예요.”

권세혁은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충용절 행사가 중요하단 거 알고 있습니다. 이 모양으로도 어떻게든 사람들 앞에 나서려고 애쓰고 있죠. 저, 여기 오기 전에 신발 가게도 들렀습니다. 구두를 손봐야 했거든요. 쿠션을 덧대서 그나마 덜 절뚝거리게 해 준다더군요.”

“잘했다.”

“저 알고 있어요, 숙부.”

“무얼?”

“두 분이 저 모르게 모종의 거래를 하셨더라고요.”

“…….”

“엄마랑 숙부 말이에요. 아, 설마 모르는 척하시기에요?”

모종의 거래. 권주혁의 뱀눈이 미소를 머금었다. 권세혁은 어느새 이런 말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저로는 부족하셨나 봐요.”

어디서 말이 샜을까. 권주혁은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가장 큰 가능성은 장승희의 변심이었다. 모성애는 종잡을 수 없는 거니까.

애초에 장승희는 신뢰할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자기 행동이나 결정에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람의 무엇을 보고 믿는단 말인가. 신해범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넌지시 말을 흘려 놓은 이유가 거기 있었다. 장승희는 언제고 마음을 바꿀 만한 인물이었다.

생각하니 괘씸했다. 장승희는 줄곧 권력자의 그늘에서 살았다. 어려서는 장두현의 딸로, 커서는 총통 부인으로, 그리고 이제는 총통으로 즉위할 아들의 그림자에 숨어서.

사실은 알았다. 장승희 같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투쟁이 우습다는 걸. 그는 권세혁을 매개로 인연을 맺었을 때부터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는 걸.

권주혁의 얇은 입술이 실룩거렸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번복을 밥 먹듯이 한다. 어떤 길로 가든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상관없기 때문이다. 장승희의 목표는 오직 하나, 권세혁의 총통 취임이었다. 신해범과의 불륜 관계는 부수적으로 추가된 요소일 뿐.

애인에 대한 열정은 빨리 식는다. 장승희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인 것도 아니었다. 진짜 꼭대기는 권세혁이었다. 그리고 권세혁의 머리꼭지를 쥐려면 그가 아끼는 권무혁을 손에 넣어야 했다. 신해범에 대한 장승희의 흥미가 떨어지기 전에.

“무혁이 못 데려가십니다, 숙부.”

“그 애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니?”

권주혁은 조카를 설득하듯 말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인생을 너는 모른다. 그건 내가 잘 알아. 내가 무혁이한테 힘이 돼 줄 수 있다.”

“무혁이는 제가 키워요.”

“그 애가 네 옆에서 행복할 것 같으냐?”

“뭐라고요?”

“나는 안다. 알 수 있어.”

권주혁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평생을 열등감에 찌들어 살겠지. 나는 그걸 극복하는 데 오래 걸렸다.”

고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몸만 가진다면 왕의 아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시골 필부의 아들이라도 좋았다. 지식은 쌓을 수 있고 재산은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신체는 어찌해도 바꿀 수가 없었다.

권주혁의 지팡이가 바닥을 쿵, 찍었다.

“지금은 어려서 괜찮다. 지금은 괜찮아. 그런데 얼마 안 남았다. 열두 살이면 곧 사춘기겠구나. 슬슬 반항할 때지. 자아 형성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당연한 일이다만, 왕위에 오르지 못할 왕자에게는… 안 된다. 안 될 일이야. 그건 응당 거세해야 할 욕망이다.”

권세혁이 으르렁거렸다.

“무혁이 아홉 살이에요. 그리고 사춘기라고 다 반항하는 거 아닙니다.”

“그 애는 너와 다르지 않니.”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우린 형제예요. 똑같이 아버지 피를 이은 친형제란 말입니다. 무혁이에게도 이 나라 왕의 피가 흐르는데, 나는 되고 무혁이는 안 된다는 그 논리 자체부터가…!”

“말을 잇지 못하는구나.”

권주혁이 눈을 깜박이자 독기를 품은 뱀눈이 번들거렸다.

“나는 알지. 네가 동생을 아끼는 이유는, 그 애가 네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권세혁은 숨을 들이켰다. 목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형님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일찍이 백기를 들었지.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렸다. 위대하신 총통 각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시는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래서요.”

“이게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생존 방식이다. 이건 나만 알고, 또 나만이 가르쳐 줄 수 있어.”

“무혁이를 숙부처럼 만들려는 겁니까?”

“이게 그 아이의 최선이다. 내가 도와주마.”

권주혁의 지팡이가 또다시 바닥을 찍었다. 쿵.

“헤어지는 건 잠깐이다. 번듯하게 키워서 네가 필요로 할 때 돌려줄 테니, 지금은 내게 맡겨라.”

또다시, 쿵.

권세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숙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권주혁 왕자는 총통 보좌관이었다. 왕가의 족보를 통틀어 즉위하지 못한 왕자, 공주 중에서 그만한 권력을 누린 자는 드물었다.

친자식조차 사랑하지 않는 냉혈한의 신뢰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권세혁은 눈앞이 아득했다.

“날 믿어라. 내겐 기획력이 있어.”

권주혁은 스스로를 이미지 메이킹했고, 신해범도 키워 냈다. 능력이 검증된 설계자가 제안하고 있었다. 권무혁을 내가 키워 준다. 네 치세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만들어 주마. 그러니까 너는….

권세혁은 웃어 버렸다.

“거래는 됐습니다. 숙부.”

거래는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성사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는 숙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무혁이 팔아서 총통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왕이 돼서 그 애가 괴로워진다면, 평생을 열패감에 찌들어 산다면, 그런 건….”

권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싫다고요.”

동생이 자기보다 못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웠다. 권세혁은 어금니를 악물고 숙부를 노려보았다.

“먹음직스럽기도 하지.”

엉덩이를 움켜잡은 손의 주인이 신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류진은 팔꿈치를 휘두르지 않았다.

“무슨 얘기 했어?”

“왜 여기까지 와서 도망가? 오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내가 먼저 질문했어.”

“네가 먼저 도망갔지.”

“좀…!”

류진은 신해범을 돌아봤다. 빙그레 웃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김효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그랬다. 신해범에게 주스 상자를 떠넘기고 병실을 나와 버렸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복도 구석에서, 행여 들킬까 봐 벽을 보고 선 채, 류진은 조금 울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길 오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암담했다. 진치우의 모친을 봐도 이럴진대, 곽현우의 어머니는 무슨 낯으로….

류진은 등을 돌렸다. 뒤에서 신해범의 두 팔이 뻗어 왔다. 류진이 기댔던 창가를 짚은 그가 말했다.

“너 누구냐고 물으시던데.”

“뭐라고 했는데?”

“솔직하게 말했지. 상관이라고.”

“그 말을 믿으셔?”

“아니.”

신해범은 한쪽 팔로 류진의 어깨를 안았다.

“거짓말이고. 현장에 치우랑 같이 있었던 부관이라고 했어.”

“그렇게 말하면 어떡…!”

“오발 사고로 알고 계셔. 치우가 막지 않았다면 분명 누가 대신 다쳤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

“거짓말이잖아.”

“아들이 개죽음당했다는 소식 전해 드리는 것보다 낫잖아.”

“진치우 안 죽었어.”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 이병.”

류진은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진치우 안 죽어.”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우리 정 이병, 훌륭한 대변인의 자질이 보이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신해범은 류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비상구 문을 열어젖히고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덥석 끌어안았다. 류진은 잠시 버둥거렸으나 곧 신해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혼났어?”

“…….”

“친구 못 지켰다고?”

“혼날 줄 알았어.”

김효성은 화내지 않았다.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건 김효성이 아들의 삶을 포기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희생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대일의 신데렐라가 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처럼. 자식을 낳는 기쁨과 스스로의 건강을 등가 교환 한 것처럼. 감옥에 감으로써 아들을 지켜 낸 것처럼.

‘그래도 너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아들 대신 네가 죽으라고 폭언을 퍼부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마음 편히 유미현의 솔루션을 따랐을 터였다. 하지만 김효성은 신해범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앉은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만약에 진치우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서 화났다. 신해범은 류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숨 막혀…!”

“너 진짜 나랑 갈 수 있냐.”

“그거 얘기했어? 진치우 엄마한테?”

“내가 원래 좀 이기적이잖아.”

죽마고우 반송장 만들어 놓고,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살겠다고….

“개새끼 올림픽 금메달은 내 거다.”

“은메달은 내 차지네.”

류진이 키득거렸다.

“나도 현우 형 죽게 만들고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우린 더 악착같이 살아야 해. 우리가 힘들게 만든 사람들 책임지려면.”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신해범의 옷을 그러쥐고 있던 류진이 고개를 들었다.

“나 다시 들어가서 얘기해도 돼? 거짓말이라도 괜찮아. 그냥 죄송하다고, 그 말 하고 싶어.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

두 사람은 김효성의 병실 앞으로 돌아갔다. 신해범은 류진을 들여보낸 뒤, 대장군 각하의 분부대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틈새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류진의 주눅 든 목소리. 김효성의 작지만 차분한 목소리. 정류진은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신해범은 문틈 사이로 엿보았다. 진치우가 얼마나 좋은 상관이었는지,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설명하는 정류진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레인지로버는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신예나에게 빌린 회색 페라리 바로 옆에 주차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걷는데 느낌이 묘했다. 신해범은 앞서가던 류진을 불러 세웠다.

“왜?”

“주차 연습해 볼래?”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신해범의 손가락이 페라리를 가리켰다.

“여기 간부 전용이잖아. 드나드는 차량은 경비병이 대충 꿰고 있거든. 이번에 치우 일도 그렇고, 신경 예민해진 마당에 못 보던 차 있으면 괜히 시끄러워지겠지?”

류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

“그래. 그래서 말인데, 네가 직접 운전해서 옮겨 놔라. 알지? 지상 주차장에, 웬만하면 눈에 안 띄는 데다.”

“뭐?”

“할 수 있잖아? 면허도 있고.”

“저 차 페라리야.”

“나도 알아.”

신해범은 류진의 손에 차 키를 올려놓았다. 움찔하는 그의 손가락을 꼭꼭 접어 주기까지 했다.

“해 봐. 운전도 자꾸 해야 늘어.”

“그래도 페라리는… 예나 누나 건데… 이게 구석에 갖다 놓는다고 안 보이는 차도 아니고….”

운전석에 앉은 류진은 거의 고장 난 라디오였다. 연신 아랫입술을 깨물며 ‘긁으면 죽어. 난 예나 누나한테 죽어’ 했다.

페라리가 지하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갔을 때, 신해범의 대각선 뒤쪽에 있었던 차 문이 열렸다. 옆구리에 크러치를 낀 권세혁이 내렸다.

“류진이 형 차 사 줬어?”

“또 어쩐 일이십니까.”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주차 라인을 무시하고 가로로 세워 놓은 롤스로이스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차종이었다.

“경비병이 자리에 없었나 보군요.”

“약속이 있다고 하니까 열어 주던데.”

“확인 요청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권세혁은 고개를 기울이고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애꿎은 사람 머리통 날리진 않았으니까.”

“책임은 나중에 묻지요.”

“사람 좀 쳐다보지? 나 지금 벽이랑 얘기하나?”

“바라신다면야.”

천천히 돌아선 신해범의 눈이 커졌다. 권세혁의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두상도 잘생기셨습니다.”

“그래? 숙부는 마음에 안 든다는데. 준장이라도 좋아해 줘서 다행이야.”

“장군님 뵙고 오시는 길입니까?”

“무혁이 일로 할 얘기가 있었거든.”

“직접 운전하셨습니까?”

“나도 못 할 줄 알았지. 그런데 마음먹으니까 못 할 것도 없더라고.”

신해범은 속으로 비웃었다. 권세혁은 신의 은총을 받은 행운아가 아니었다. 다른 운전자들이 도로의 무법자 같은 롤스로이스를 알아서 피했기 때문에 사고를 면했을 뿐.

권세혁은 침묵하는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올라갈까? 보다시피 서 있기 힘들어서.”

“왕자님의 애마를 구경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군요.”

둘 다 서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닥치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이 후레자식아.

시동을 끄기 전에 몇 번이나 확인했다. 행여 실수한 건 없는지. 주차 라인에 맞게 집어넣었는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 문을 열려는 순간, 조수석이 벌컥 열리며 무뢰배가 난입했다.

“뭐야! 뭐야! 꺼져!”

놀라서 손부터 나갔다. 무작정 휘두른 주먹이 무뢰배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아악!”

그런데 상대방의 목소리가 낯익었다.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와 보석 박힌 서류 가방도.

“야 인마! 다짜고짜 주먹질이냐!”

윤태금이었다.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그가 울먹였다.

“좆나 아파. 아, 진짜 좆나 아파.”

“그러게 왜 갑자기 들어와!”

류진은 윤태금을 노려보았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주차 한번 하는데 아주 넣었다 뺐다, 쇼를 하기에 어떤 등신인가 싶어서 봤다. 백미러를 봐야지, 왜 자꾸 창밖으로 얼굴을 내미냐? 목 부러지고 싶어?”

“시끄러워. 자기도 못 하는 주제에.”

윤태금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포르쉐를 가리켰다.

“나 이제 운전할 수 있거든.”

“그거 자랑하려고 왔냐?”

“아니. 이거 돌려주려고.”

윤태금이 내민 건 시계 상자였다.

“왜? 가진다며.”

당황스러웠다. 갖고 싶다던 바쉐론 콘스탄틴을 왜 돌려주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이거 어디서 구했냐? 솔직하게 말해.”

류진은 침묵했다. 윤태금에게 권주혁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돌려주겠다면 받으면 될 일이다. 류진은 말없이 상자를 낚아채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때 윤태금이 손을 뻗어 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

류진은 버럭 소리쳤다.

“나 건드리지 마!”

“누님이 총통 부인 퍼스널 쇼퍼랑 친해. 그 바닥이 좁아서 알음알음 정보 공유가 다 돼. 높으신 분들 취향 맞추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서로 매물 알아봐 주고 도와주고, 그런 분위기란 말이야. 또 이런 건 세금도 왕창 매겨서 들어올 때마다….”

“시끄러워! 잔소리는 그런 말 알아듣는 사람한테 가서 해!”

“이거,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 매입했던데.”

류진은 어이가 없었다. 똑똑하고 인맥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냥 솔직하게만 말해 줘. 너 총통 보좌관이랑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 같은 거 아니야. 헛소리하면 죽여 버린다. 이거 놔!”

윤태금은 류진의 팔을 놔주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누님이. 누님이 걱정하셔서 그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령님 총 맞을 때 같이 있었던 경호원 애들, 우리 회사 애들이야. 그거 때문에 누님한테도 전화가 갔어. 뭐 누님이야 솔직하게 다 얘기했지. 총통 부인이 차량이랑 경호 요청해서 보내 줬다고. 근데 장승희가, 총통 부인이 누님한테 전화해서 지랄 지랄 한 거야.”

“왜? 거기가 뭘 잘못했다고?”

윤태금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우리 애들이 진술을, 왕자님 입장에서 좀 안 좋게 했어. 여기 올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땀도 많이 흘리고 멀미도 심했다, 뭐 대충 그렇게. 근데 지금 의혹 기사가 계속 나오잖아. 진치우 중령이 총기 사고가 아니라 그… 알지? 무슨 말인지.”

신해범도, 유미현도 정보 통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진치우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오게 했다. 먼지는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안전 가옥에 숨은 엄승원은 대필 기자 노릇으로 바빴다.

“그게 이 시계랑 무슨 상관인데.”

“현장에 나도 있었잖아. 준장님께 누님 개인 번호 알려 준 것도 나고. 우리 누님 입장에선 뭔가 싶지. 거기다 못 보던 시계까지 생겼으니….”

“어른 아니야? 누님이 그런 것까지 간섭해?”

“누님 눈썰미가 워낙 좋아서 그래. 아무렴 밥줄이 그건데.”

류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마다 누님, 누님 하는 윤태금이 부러웠다.

“그래도 네 얘긴 안 했어. 그럼 더 수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고마워 죽겠네.”

“비꼬지 마. 내 딴엔 신경 쓴 거야.”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태금이 돌려준 시계 상자만 만지작거렸다.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그럼 나도 누님한테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밖에 없어. 우리 누님 무서운 사람이야. 내가 거짓말하면 바로 알아.”

“…….”

“내가 곤란해지는 건 괜찮아. 근데 누님이 장승희 총통 부인이랑 딜러, 고객 사이니까. 솔직히 그게 문제야.”

윤태금은 주먹을 쥐고 말했다.

“난 죽어도 우리 일 까발릴 생각 없어. 나도 생각이 있어서 협조하는 거니까. 근데 누님이 괜히 알아본답시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다 보면… 우리, 보석 회사잖아. 도난 사건 추적 팀이 따로 있어. 걔들이 얼마나 집요한데.”

“그러니까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뒤져!”

류진이 윤태금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할 수 있다면 죽기 직전까지 패 주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꼴 보기 싫은 물건을 눈앞에서 치우는 데 급급해서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

윤태금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몰랐으면 다야?”

“그러니까 누님이 나서기 전에 이해시키고 싶어.”

윤태금은 서류 가방에 박힌 스모키 쿼츠를 만지작거렸다.

“너한테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솔직하게 말하면.”

류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안 그래도 누님이 결정했어. 총통 부인 보석은 충용절 세트까지만 한다고. 원래도 취향 까다롭고 감정 기복 심해서 맞추기 힘들었대. 그래도 돈이 되니까 견뎠는데, 이번에 전화 받고 머리끝까지 열 받았나 봐.”

류진은 땀이 밴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윤금강이 위험인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똑똑한 윤태금도 꼼짝 못 하는 상대로,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는 문제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미로 보였다.

동생을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을 사랑하는 만큼, 그와 관련된 사소한 문제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부럽다. 윤태금은 좋은 누나를 뒀다.

류진은 윤태금의 휴대폰을 확인하고, 그의 옷과 소지품,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트렌치코트에 달린 단추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항복하듯 두 팔을 위로 든 윤태금이 꿍얼댔다.

“녹음기 없어, 나.”

그는 자신의 서류 가방을 턱짓했다. 손바닥만 한 모양의 검고 납작한 사각형 기계가 들어 있었다.

“도청 방지기야. 군용만큼 성능이 좋진 않지만, 나름대로 원천 방지 시스템이라 쓸 만해.”

“이런 것도 가지고 다니네.”

“누님이 추천해서.”

비즈니스맨은 항상 조심해야 해. 윤태금이 덧붙였다. 류진은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

롤스로이스 운전석에 앉은 권세혁이 말했다. 신해범은 녹색 핏줄이 불거진 그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무혁이는 비밀을 잘 지켜. 주변에 말할 사람이 없거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걔가 자기 입양 소식을 알았으면, 내가 진즉 알아챘겠지.”

“그게 저라고 특정하시는 이유입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신해범은 잠자코 웃었다. 권무혁을 신뢰해서 입양 소식을 털어놓은 게 아니었다. 정보를 흘린 사람이 자기라는 게 알려져도 상관없다는 계산을 마친 다음에 한 행동이었다. 권주혁이나 장승희가 화를 내도 상관없었다. 용서를 구걸하는 일에는 익숙하니까.

용서받지 못해도 무관했다. 진치우가 사경을 헤매고, 권세혁 왕자에 대한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와중에 풍기 교육대장인 자신을 뭘 어쩌겠는가. 공개 처형? 광성의 전 병력이 투입되는 충용절이 코앞인데?

자국의 화려한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 주기 위해 초청한 외신 기자들만 한 다스였다.

“그 일로 장군님과 다투셨군요.”

“그런 일은 막아야 하니까.”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두 분은 작은 왕자님의 미래를 위해 신중히 의논하여 내린 결정일 겁니다.”

“그런 말을 귀에 못 박히게 듣고 오는 길이야. 설령 내 판단이 잘못됐고, 숙부 말이 맞다고 해도.”

권세혁은 힘주어 말했다.

“무혁이가 싫다면 아닌 거야. 그 애가 원하지 않으면 틀린 거야.”

“작은 왕자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차차….”

“준장도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힘겨루기에서 당기기만 하는 건 무식한 짓이었다. 한 번 당겼으면 다음에는 밀어내기였다. 힘을 아끼고 상대의 전략을 살펴보기 위해서.

신해범은 양아치처럼 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지금 왕자님 이야기를 들어 드릴 기분이 아닙니다.”

“기분? 지금 기분이라고 했어?”

“장군님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이라 하셨지요? 저는 진치우 중령의 모친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권세혁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정 이병을 데려갔습니다.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더군요. 자기 잘못이 아니었고, 본인도 왕자님께 심한 짓을….”

“닥쳐!”

클랙슨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입 닥쳐.”

권세혁의 어깨가 오르내렸다. 숨이 거칠다. 물론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은 왕자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잘도 연기했군.”

“왕자님께서 저를 과대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준장이 총통 부인한테 말해 줘. 둘째 왕자를 입양 보내는 건 정신 나간 미친짓이라고.”

권세혁은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존심 다 접고 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물론 공짜로 요구할 생각도 아니었다.

이 인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쟁반은 판이했다. 류진은 햄버거와 치즈스틱, 감자튀김에 밀크셰이크까지 주문해서 우물거렸지만, 윤태금의 쟁반에는 고작 오렌지주스 한 잔이었다.

윤태금이 문 빨대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그는 연신 주위를 살피는 류진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가게에서 먹으니까 좋다. 사람도 많고.”

류진은 윤태금의 트렌치코트에 기름이 묻지 않도록 조심했다. 눈에 띄는 풍기 교육대 제복을 가리기 위해서 빌려 입었다.

“그러냐.”

“얼굴이 왜 그렇게 죽상이야?”

“나도 그냥.”

“웃기시네. 내 얘기 듣고 그러는 거면서.”

류진은 자신의 풍족한 쟁반을 가리켰다.

“이거, 나 불쌍해서 사 주는 거잖아.”

“아니야.”

“그럼?”

“형으로서 사 주는 거야. 동생한테.”

윤태금은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류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지금 상상하고 있지? 내가 그날 어떻게 당했는지.”

“아니야.”

“그럼, 생각하는 중이야? 그따위 더러운 짓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꼭 그렇게 해야만 했나?”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해.”

“괜찮아. 생각해. 생각하는 건 자유니까. 대신에 함부로 주둥이 놀리고 다니면 목 부러질 줄 알아.”

윤태금은 빨대로 주스를 휘저었다. 다 마셔서 얼음밖에 남지 않았다.

“용케 준장님 얼굴 보고 사네.”

류진은 피식 웃고 대답했다.

“복잡해.”

“그래 보인다.”

“혹시 마음 바뀐 거 아냐? 발 빼고 싶어졌어?”

“아니. 아니야. 준장님 제정신 아닌 건 나도 알았어.”

윤태금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좀 미친 상태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보거든.”

그는 한동안 류진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게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시끄러워서 빈말로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장소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거운 분위기가 반감되는 효과가 있었다. 잠자코 음식만 먹는 류진은 또래의 남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좀 다른 질문 해도 되냐?”

“뭔데.”

“사람 좋아하는 거. 어떤 느낌이야?”

류진의 입술에 붙은 양상추가 툭 떨어졌다.

“내가 신해범 좋아한다고 생각해?”

“아니야?”

“아니야. 신해범 혼자서 날 좋아하는 거지.”

“그게 다야? 준장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해.”

윤태금은 턱을 괴고 히죽 웃었다.

“준장님이랑 있으면 얼굴 뜨거워지고, 심장 두근거리고, 뭐 그런 느낌 아니야?”

“미친 개소리.”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부끄러워서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공포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밑천 다 들키고 설설 기지만, 신해범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서워질 수 있었다. 예전처럼.

섹스할 때 눈빛을 보면 안다.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그 눈빛. 류진은 신해범의 머릿속에서 해체되는 자신을 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정말로 하는 도중에 잡아먹힐 것 같아서, 신해범과 섹스할 때에는 안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류진은 햄버거 포장지를 구겼다.

“솔직하게 말해 봐. 친구 없지? 그러니까 나한테 연애 상담을 하지.”

“나 독일에 친구 엄청 많아.”

“그러면 거기 가서 살지, 왜 여기서 나랑 노냐?”

“유치하게 왜 그래.”

“듣기 싫으면 애초에 유치한 질문을 하질 마.”

류진은 눈을 내리깔고 감자튀김을 집었다. 두 번 다시 남의 연애 사업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윤태금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곽현우처럼 되길 바라지도 않았다.

“나한테 연애 상담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 없어.”

“그래도 연애해 보고 싶지 않아? 준장님이랑?”

류진은 밀크셰이크를 다 마셔 버린 걸 후회했다. 그걸로 윤태금의 머리를 감겨 줬어야 했는데.

“손바닥 내밀어 봐. 사람 이빨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할 기회 줄게.”

“형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다.”

“형님은 얼어 죽을. 얘기 끝났으면 가.”

류진은 남은 감자튀김을 입 안에 쑤셔 넣고, 치즈스틱은 잘 싸서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거 내 옷이라고 항변하는 윤태금을 무시하고 가게를 나섰다. 바람이 찼다.

“어으, 바람.”

윤태금이 어깨를 움츠리고 팔짱을 낀 채 달달 떨었다. 류진은 그런 그에게 페라리 차 키를 건네며 당당하게 지시했다.

“운전해. 잘하면 옷 돌려준다.”

“순 날강도야 날강도.”

윤태금은 투덜거리면서도 운전석에 앉았다. 류진은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신예나의 페라리에 단 일 밀리미터라도 흠집을 냈다간 죽인다.

“그렇게 안 봐도 되거든? 나 굿 드라이버야.”

“퍽이나….”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본 류진은 흠칫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빨갰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달아올랐다기엔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뛰는 심장이 설명되지 않았다. 혓바닥이 바짝바짝 마르는 와중에 신해범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신해범은 이마를 치면서 웃었다. 당황하다 못해 희한한 표정을 지은 권세혁이 노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웃어?”

“흐, 흐흐. 으흐흑.”

“지금 웃음이 나와?!”

권세혁이 휘두른 주먹이 핸들 봉을 직격했다. 자존심에 아프다는 내색도 못 하고 아랫입술만 꾹 깨무는 모습에, 신해범은 또다시 크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신해범 준장!”

“예. 아이고, 왕자님 손 아프시겠다.”

권세혁은 당장이라도 신해범의 턱을 후려갈길 기세였다.

“사람 조롱도 정도껏 해. 나 지금 참는 중이야.”

신해범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웃고 있던 얼굴이 싸늘해졌다.

권세혁은 어리석었다. 너무나 어리석고, 순진해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빗방울을 걱정하다니.

권세혁은 두 사람의 내연 관계를 눈감아 주겠다고 했다. 장승희 총통 부인과 신해범 풍기교육대장 간의 부정을 묵인하고 넘어갈 테니 권무혁이 숙부의 양자로 입적되는 걸 방해하라고 했다.

신해범은 차갑게 응수했다.

“예, 언론에 알리십시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정숙한 부인을 유혹하여 부정을 저지른 건 사실이니, 그 죗값 치르겠습니다. 내친김에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시지요. 총살입니까? 참수형입니까?”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아?”

“그런데 걱정되는군요. 유미현 수석 말입니다. 그분께선 진치우 중령 일이 오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여차하면 유미현에게 불어 버리고 자폭하겠다. 권세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길 협박하는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준장은 무서운 게 없나 보지?”

“무서워하는 거라면 차고 넘칩니다. 왕자님의 제안이 혹하지 않을 뿐이지요.”

“난 준장이 누굴 지키려고 하는지 알아. 류진이 형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은 나한테도 지켜야 할 게 생겼으니까.”

권세혁은 핸들을 붙잡고 정면을 응시했다. 굳이 정류진 이름 석 자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 신해범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도 그의 입장은 충분히 곤란해질 것이다.

“만나 봐서 알겠지만, 우리 엄마 집착하는 성격이거든.”

“왕자님은 못 하실 겁니다.”

“난 이미 류진이 형한테 거절당했어.”

“그런데 포기 못 하셨지요.”

신해범의 눈에는 권세혁의 수가 훤히 보였다. 동정심 유발 작전이 먹히지 않으니 방향을 튼 것이다.

정류진의 마음은 얻지 못해도 상관없다. 일단 몸뚱이만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꼬드기면 된다. 그사이에 어머니를 설득해서 숙부에게 입양될 위기의 동생도 지켜 낸다. 신해범과의 관계가 끝나서 마음이 허무해졌을 테니 어머니의 생각이 바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게 바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기.

신해범은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권세혁의 수가 훤히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롤스로이스 내부는 넓고 아늑했다. 하차하기 아쉬울 정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해져도 상관없어?”

“왕자님. 정류진 이병이 풍기대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하십니까?”

“그건 내가 호월루에서 류진이 형을 처음 만나서….”

“권주혁 총통 보좌관께서, 류연비의 친동생을 왕자님의 측근으로 두는 걸 그냥 허락했을 거라고 보십니까?”

권세혁에게 그 질문은 기습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괜찮습니다. 왕자님은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옅은 미소를 띤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군님도, 아직 어리신 왕자님께 그런 얘기를 굳이 하셨을 리 없고.”

“뭐야! 빙빙 돌리지 말고 알아듣게 말해!”

“정류진 이병은 왕자님의 측근이 되기 위해 권주혁 총통 보좌관 각하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신해범은 알았다. 어떻게 웃어야 비열해 보이는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부술 수 있는지. 그는 권세혁의 눈이 확장되고,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권세혁의 주먹이 뺨을 강타했다. 어금니를 꽉 물어서 혀가 동강 나는 사태는 면했다. 그래도 뺨 안쪽 살이 찢어지는 상처는 면할 수 없어서 순식간에 입 안 가득히 피가 번졌다. 입술도 찢어졌다.

“다시 말해 봐.”

“권주혁 장군은 정류진 이병을 하룻밤 상대로 갖고 놀았습니다.”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다. 신해범은 피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봐.”

“이후로도 기우희 소령을 통해 몇 번의 호출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기어이 코피가 터졌다. 뇌가 두개골 속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신해범은 네 번째로 날아오는 권세혁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왕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 다시. 말해 봐라.”

“왕자님.”

“와?! 처맞으니까 정신이 드나?!”

각오했던 일이기에 놀라지 않았다. 이만한 통증이 견디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날 정류진은 훨씬 아팠을 것이다.

“아까처럼 씨불여 바라! 호로새끼야!”

멱살을 잡혀 흔들렸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손목을 붙잡아 꺾었다. 엄지손가락에서 뼈 틀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거짓말.”

“이미 늦었습니다.”

권세혁의 손을 내던지듯 풀어 주었다.

“전혀 모르셨습니까? 제가 장군님을 보필하는 방법. 여기저기서 많이들 떠들고 다니는데. 아, 왕자님 앞에서는 다들 입을 조심했던 모양이군요. 과연 자랑스러운 우리 헌병입니다.”

“…….”

“믿기 어려우시면, 특별히 왕자님께만 현장 기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권세혁은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신해범은 말없이 턱을 적시는 피를 닦았다.

그러게 왜 본전도 못 건질 싸움을 걸어. 어쭙잖은 설계로 덤비니까 모르고 끝날 수도 있었던 사실까지 알게 되잖아.

“니는 참말로 죽일 놈이다.”

“장군님도, 정 이병도 각자 원하는 게 있었습니다. 저는 중간에서 이해관계를 조율했을 뿐입니다.”

“그래가 지금 잘했다는 거가!”

“과정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정 이병이 결국 왕자님의 측근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저는 어쨌든 왕자님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드렸습니다.”

“닥쳐! 닥쳐!”

신해범은 발악하는 권세혁의 어깻죽지를 붙잡고 당겼다.

“전부 왕자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정류진 이병을 왜 만나셨습니까? 왜 그를 풍기 교육대로 끌어들이셨습니까? 사실은 처음부터 그가 <백사자> 조원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그래서 장진에서의 일을 겪고도 이병을 감싸 주시는 것 아닙니까?”

“뭐라?!”

“저도 거기까진 억측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신해범의 턱에 맺힌 핏방울이 권세혁의 허벅지를 감싼 깁스에 떨어졌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전하. 시야가 이렇게 좁으니 계속 장군님께 당하는 것 아닙니까. 왕자님이 분노해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제 위죠.”

권세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다갈색 눈이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신해범은 그의 눈알이 정말로 빠져나오면 젓가락으로 집어서 고이 넣어 줘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스물한 살에 불과한 이병을 능욕한 장군께서, 이번에는 아홉 살배기 작은 왕자님께 손을 뻗쳤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

“왕자님!”

신해범은 시선을 피하려는 권세혁의 턱을 붙잡아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왕자님을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제가 미우시겠지만, 저보다는 제 위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신해범은 계속해서 권세혁을 자극했다. 권주혁에 대한 분노로 뇌가 타 버리도록. 비극적인 상상이 연쇄 폭발을 일으켜 그의 넓은 들판을 태워 버리도록. 폐허가 된 마음에 차가운 결심이 설 때까지.

치즈스틱은 오는 길에 전부 먹어 치웠다. 손가락을 물티슈에 닦은 류진이 꾸물꾸물 트렌치코트를 벗었다.

“옷 줄게.”

“됐다. 너 해.”

“어?”

“입고 가. 잘 어울리는데.”

“…진짜? 이 옷, 나 준다고?”

“그래.”

윤태금은 사과의 의미라고 했다.

“나 때문에 힘든 얘기 했잖아. 그거 미안해서 그래.”

“수상한데. 나중에 덤터기 왕창 씌워서 돌려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새것도 아니고 입던 옷 주면서 그렇게까지 하겠냐?”

류진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윤태금을 노려보다, 반쯤 벗었던 외투를 마저 벗었다.

“마음만 받을게.”

“진짜 주는 건데.”

“괜찮아. 미안하게 생각하면 그걸로 됐어. 그리고 나도 비슷한 옷 있어.”

류진은 신예나가 사다 준 캐러멜색 트렌치코트를 떠올렸다.

윤태금이 돌아간 뒤, 류진은 혼자서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레인지로버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신해범은 이미 올라간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카드 키를 댄 순간, 지금쯤 12층에 있는 줄 알았던 신해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꼬야.”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윤태금이 연애니 어쩌니 하는 말로 사람을 들쑤셔 놔서.

류진은 말없이 귀를 후볐다.

“꼬꼬야. 어디 봐.”

반대쪽 귀도 후볐다.

“나 여기 있는데.”

“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류진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대신 몸을 돌려 뒤를 살폈다.

“뭐야….”

아무도 없었다. 류진은 오싹한 기분에 휩싸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었다.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낸 건 기껏 잡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 버린 다음이었다.

“당신 뭐 해?”

류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해범이 벽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낄낄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외쳤다.

“서프라이즈!”

“지랄!”

신해범의 안면으로 날아가던 류진의 주먹이 허공에 멈췄다.

“…….”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해범이, 야비한 성격에 내세울 건 외모뿐인 얼굴마담이, 유일한 자랑거리가 피떡이 된 채 눈앞에 선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교통사고 당했어?”

류진은 신해범의 양쪽 귀를 붙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참혹했다.

“어떤 새끼야. 어떤 놈이 당신 얼굴 밟았어.”

“네가 나 걱정해 주니까 좋다. 앞으로 종종 들이받아야지.”

“지금 장난칠 때야? 누가 이랬느냐고!”

신해범은 류진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CCTV 사각지대에 숨어서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힘주어 주무르자 류진이 신음했다.

“아파!”

“MVP가 왔었어.”

“…그래서 나 보낸 거야?”

“굳이 마주치게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럼 그렇지. 너를 배려해서 그랬다는 소리를 할 리 없지.

류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하 주차장에 멀쩡히 잘 있는 페라리를 굳이 지상으로 옮겨 놓으라는, 번거롭고 쓸데없는 심부름을 의심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맞았어?”

“어때 보여?”

“개떡 같아.”

류진은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부드러운 방한 마스크를 꼭꼭 뭉쳐서 신해범의 코를 틀어막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해범은 류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부축해 달라며 어리광을 부렸다.

“진짜 가지가지….”

류진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12층으로 간다는 신해범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의무실로 데려갔다. 최유신은 신해범의 손부터 봤다.

“뼈 다 틀어졌잖아!”

의사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해범은 기우희와의 전화 통화에 열중했다.

“MVP가 권을 찾아갈 거야. 자네가 먼저 가서 붙어 있어. 충용절 얘기도 좋고, 저녁 식사 핑계도 괜찮고. 자리는 지키되 웬만하면 나서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 명심해, 기 소령. 난 자네가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권주혁에게 제출한 <파에톤>에는 명확한 날짜를 기재하지 않았다. 권세혁의 추궁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파에톤>이 밝혀지는 자리에 기우희가 있다면 더욱 안심할 만했다. 그리고 권주혁은 조카의 추궁에 정류진과의 일을 부정하거나 회피할 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포식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설령 조카의 앞에서라도.

그는 오히려 약자를 잔인하게 취하는 포식이 권력자의 특권이라며,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할 작자였다. 권주혁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가 성불구라는 사실을 대중에 공개했던 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콤플렉스로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뒤에서 마음껏 즐기고 있기에 가능한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네깟 놈들이 나를 고자라고 비웃어 봤자, 내가 받는 쎅쓰의 질이 훨씬 높거든.

포식 행위에 동원되는 남성들이 장신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군인인 것도, 권주혁이 그들의 젊고 건강한 육체에 자신을 대입하기 때문이었다. 권주혁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지점도 평범한 사람과는 달랐다. 신해범은 자기가 피식자를 학대하면 할수록 좋아하던 권주혁의 뱀눈을 기억했다.

더, 더 해 봐. 더 울리고 비명 지르게 만들어 봐. 고년 목구멍까지 자지를 쑤셔 넣고 흔들어 봐. 그래야 내가 느낄 수 있잖니.

신해범은 자신의 성적 취향이 권주혁을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정류진을 시도 때도 없이 주물러 대는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뭐, 이것도 진심이 아니라서 하는 소리지만.

“신해범.”

“…….”

“신해범!”

“음?”

“전화 끝났으면 휴대폰 내려놔.”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정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핀셋을 든 최유신의 손은 허공에 멈췄다. 신해범은 자기 주변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웃었다.

“아주 넋들이 나갔구만. 나 보느라 정신없지?”

“헛소리하지 말고 손바닥이나 펴.”

헌병대 취조실에서 얻은 화상이었다. 최유신의 처치를 옆에서 들여다보던 류진이 물었다.

“어쩌다 이랬어?”

“좀 됐어.”

“당신은 도대체 왜 그래?”

“내가 원래 좀 저돌적이잖아.”

류진은 킬킬거리는 신해범을 노려봤다.

“재밌어? 다치니까 좋아?”

“꼬꼬가 나 걱정해 줘서 참 좋다.”

최유신은 침대 머리맡에 베개를 두 개 겹쳐 놓았다. 코피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고개를 앞으로 숙이라고 당부했다. 얼음주머니도 만들었다.

“이건 왜?”

“대고 있어. 내일 얼굴 땡땡 붓기 싫으면.”

신해범은 얼음주머니를 들고 꿍얼댔다.

“여기 병원 서비스가 왜 이러냐. 무슨 의사가 저렇게 불친절하지? 다음부턴 오지 말자, 꼬꼬야.”

“당신 진짜 왜 그래? 머리 잘못 맞았어?”

“아니 그렇잖아. 환자한테 말하는 것 좀 봐.”

“선생님한테 시비 걸지 마. 기껏 치료해 준 사람한테…!”

“내버려 둬라.”

최유신이 말했다.

“쟨 기분 더러우면 말도 안 되는 개그로 사람 웃기려고 하더라.”

“지금 내 유머 감각을 비하하는 건가, 최 대위?”

“봐. 찔려서 바로 계급장 들이미는 거.”

“이봐….”

“류진이 보리차 마실래?”

최유신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류진은 고맙다고 말하며, 최유신에게 삿대질하는 신해범을 침대로 밀어 넣었다. 류진은 그가 순순히 눕는 모습을 본 다음에 커튼을 치고 나왔다.

“죄송합니다.”

“왜 네가 사과를 하냐.”

“선생님 보리차 맛있어요.”

한 모금 꿀꺽한 류진이 멈칫했다.

“맛이….”

“좀 바뀌었지? 살짝 업그레이드했거든. 동절기 버전으로다가.”

“좀 다르긴 한데, 이것도 맛있어요.”

“비결은 엉겅퀴야. 이거 귀한 거다. 힘들게 만들었으니까 남기지 말고 쭉 다 들이켜. 나 이거 한다고 뜨거운 주전자 앞에 한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야.”

커튼 너머에서 신해범이 빈정댔다.

“그런 좋은 게 있으면 이 대장님께 갖다 바쳐야지, 자기들끼리만 먹고 있네.”

“아이고, 예, 지금 갑니다!”

최유신이 너스레를 떨었다. 류진은 최유신의 책상에 놓인 휴대용 미니 라디오를 바라보았다. 전원이 켜져 있었다. 볼륨을 높이니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충용절 퍼레이드에서 최초 공개 예정인 전투 잠수함 3호 ‘어리연’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어리연함은 신룡관에서 보유한 백룡급 잠수함인 ‘수련’과 ‘창포’의 자매함으로서… 권세혁 왕자 전하의 이름으로 풍기 교육대에 기부… 권주혁 총통 보좌관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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