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젖히는 소리와 함께, 아침 햇살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응….”
류진은 꾸물꾸물 돌아누웠다. 크고 따뜻한 손이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몽롱한 의식 저편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잘래?
“으응….”
류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불이 젖혀져 드러난 몸이 추웠다. 어젯밤, 신해범과 한 침대에서 잠들 때 류진은 잠옷을 입지 않았다. 팬티 하나만 달랑 걸친 몸을 신해범의 큰 손이 어루만졌다.
“추워?”
“응.”
신해범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등에 착 달라붙은 그가 두 팔을 앞으로 뻗어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류진은 신해범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따뜻해?”
“응.”
“그래. 십 분만 더 이러자.”
“응….”
등 뒤에서 신해범이 웃었다.
“더 조르면 안 돼.”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 신해범은 침대를 벗어나 옷장으로 갔다. 말끔하게 다려진 기동복이 걸려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고려해서 호텔 서비스는 이용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난 신해범은 화장실에서 류진의 옷을 손으로 문질러 빨았다. 헤어드라이어로 말리고 스팀다리미로 다렸다. 그 고생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누 냄새 물씬 풍기는 옷을 본 류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거야?”
“새 옷보다 낫지. 이 정도면.”
신해범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요리도 잘하고 빨래도 잘해.”
“그래, 잘해서 좋겠다.”
“왜 내가 좋아? 너한테 좋은 거지.”
당당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침마다 입을 옷 다려 줄게. 속옷이랑 양말, 원한다면 운동화 끈까지 매일 바꿔 줄 수 있어.”
“됐어! 유난은.”
“유난 아냐. 나 애기 때 그렇게 살았어.”
블랙커피에 설탕을 두 개나 털어 넣던 류진이 말했다.
“그거는 옛날이고. 요즘 누가 그렇게까지 하냐. 내가 무슨 어린애냐? 그리고 애초에, 당신 피곤해서 그렇게 못 해.”
“정류진 알몸 상상하면 하나도 안 피곤해.”
“야!”
신해범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류진이 설탕물에 가까운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제복을 입었다. 장승희가 좋아해 마지않는 행사용 정복이었다. 이제 단추를 한 손으로 잠그는 일도 익숙해졌다. 착장을 마친 신해범이 침대에 앉은 류진의 앞으로 갔다.
“어때?”
“…뭐가.”
“이 옷. 나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물어봐? 원래 당신 옷인데.”
“그렇긴 해도.”
신해범이 웃었다. 유달리 목깃이 높은 셔츠는 입을 때마다 목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편리함과 기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제복. 장승희가 특히 좋아했던 옷.
“이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 묘하다.”
“잘생겼어.”
“그래?”
“이 말 듣고 싶었던 거 아냐?”
신해범은 류진의 기동복을 들고 침대로 갔다. 보라색 머그잔을 잡은 손가락이 희었다. 이 손에 흑단 목봉이나 저격 소총을 쥐여 주는 스스로가 싫었다. 하지만 그런 자괴감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반드시 마지막이어야 한다.
“옷 입자, 아기야.”
“하지 마라.”
류진은 투덜거리면서도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신해범이 손수 세탁한 옷은 향긋하고 따스했다.
모가 풍성한 브러시가 얼굴을 쓸었다. 손목 안쪽과 셔츠 깃에 향수가 뿌려졌다.
권세혁은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저, 왕자님….”
“모자는 됐어요.”
권세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페도라를 들고 있던 디자이너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단단히 이른 모양이었다. 저런 까까머리로 나오게 하지 말라고.
보통 때라면 못 이기는 척 모자를 받아 썼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짧게 자른 머리는 상징이었다. 당신들 뜻대로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외침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측근들 중 아무도 귀국 사실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함께.
권세혁은 숙부의 그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최근의 일들로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다. 어른들 말 믿지 마. 너를 위해서라는 달콤한 설득을 믿었다가는, 눈 뜬 채로 코와 귀와 두 입술까지 베이게 되니까.
노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권무혁이었다. 풍성한 퍼가 달린 캐러멜색 코트를 입고 같은 색의 모자를 쓴 동생은 꼬마 병정 같았다. 발등까지 꼭 조인 구두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권세혁은 활짝 웃으며 동생을 맞이했다.
“잘 어울린다, 무혁아.”
“형아도.”
권무혁은 벽에 기대 놓은 비취목1)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권세혁은 동생이 건네주는 지팡이를 받으면서, 모자를 들고 선 디자이너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여유 시간 좀 있죠?”
“예.”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았다. 권세혁은 손바닥을 펼쳤다. 권무혁이 건네준 건 지팡이뿐만이 아니었다.
작고 희고 납작한 알약이 하나, 아이의 손바닥에 덩그러니 놓였다.
권세혁은 동생의 말투를 흉내 냈다.
“형아 먹어?”
“응.”
“너는 먹은 적 없지?”
“형아한테 필요하니까.”
“그래. 이건 형 거니까… 아껴 줘.”
고작 엑스터시 한 알이었다. 혀 위에서 천천히 녹여도 취하지 않는다. 그래도 약간의 흥분감은 맛볼 수 있었다. 죄책감이 정수리를 무겁게 했지만, 권세혁은 고개를 저어 그것을 털어 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뚜렷하고 냉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날.
“좋다….”
권세혁은 동생의 작은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형아.”
“응.”
“류진이 형아가 누구야?”
“…….”
“어제 자면서 불렀어. 류진 형아.”
“내가 그랬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대답 대신이었다. 권세혁은 동생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무혁아. 형은 첫사랑을 했어.”
“첫사랑?”
“보통 이루어지기 힘들어. 왜냐면 서툴거든. 처음이라는 게 그렇더라.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고서야… 마음이 앞서고, 찰나의 감정에 눈이 멀어서, 정작 중요한 걸 못 보게 되더라.”
“류진 형아가 첫사랑이야?”
권세혁은 눈을 깜박였다. 이제 눈물은 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단지 숙연해질 뿐이었다. 류진은 자기가 과거에 묻은 열정 같았다. 포기한 배구 선수의 길.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권무혁의 작은 손이 권세혁의 머리를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형아?”
“괜찮아.”
권세혁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흰 뺨을 쓰다듬었다. 부디 동생의 눈에 비치는 자기 얼굴이 슬퍼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우리는 괜찮아.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거야.”
“난 형아가 결혼 안 했으면 좋겠어.”
“안 해.”
“진짜?”
“응. 형은 결혼 안 할래.”
“류진 형아랑도?”
“류진 형아는… 다른 사람 좋아한대.”
권세혁은 동생이 그 ‘다른 사람’에 대해 물을까 봐 걱정했지만, 권무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용절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른 아침부터 도로 양옆으로 사람이 빼곡했다. 물론 신룡관으로 향하는 군대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오후에 시작될 퍼레이드를 위해 꾸려진 환영단이었다.
창밖을 보던 류진의 옆에서 신해범이 말했다.
“적림부에서 각 부처에 할당량을 분배해. 그러면 부처에서 하위 공공 기관에 문서를 보내지. 성별과 연령대, 인원수를 구체적으로 적어서.”
심지어 용모 기준도 있었다.
“기관에서 머릿수를 맞추는 방법은 한정돼 있어. 이곳저곳에 연계된 큰 기관이라면 내부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만, 보통은 아니야. 대부분 민간 업체에 의뢰해.”
“그래서 옷 색깔이 다른 거야?”
“자기네 고용인을 알아보기 위해서.”
“옷이 너무 얇아. 추울 거 같아.”
“복장 규정이 있거든. 모자나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안 돼. 날이 추워도 목도리, 장갑 착용 불가. 털 부츠도 안 돼. 무조건 코트랑 가죽신이어야 하는데, 업체 입장에서는 돈을 아껴야 하니 최대한 싼 것을 고르지. 그래서 방한이 하나도 안 되는 거야.”
풍기대 진압 차량을 향해 황룡 깃발을 흔드는 여자아이와 류진의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 주기에는 차량이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린애도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유미현이 불만 많더군. 적림부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예산을 책정하는데, 중간에서 꿀꺽하는 도둑들이 너무 많다고.”
류진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적어도 하늘이 흐리거나 먹구름이 꾸물꾸물하지는 않았다. 햇볕도 적당히 내리쬐었다. 그러나 계절감은 어쩔 수가 없어서, 찬 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한껏 붙어 섰다.
완전 무장 상태의 헌병들이 군중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단속했다. 류진은 한 젊은 남자가 헌병의 발길질에 채여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왜 때리는 거야? 저 사람이 뭘 잘못했어?”
신해범은 창밖을 보지 못했다. 목봉의 가죽 손잡이를 교체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운전석에 앉은 기우희가 신해범 대신 말해 주었다.
“주머니가 불룩하잖아.”
“주머니요?”
“폭탄일 수도 있으니까.”
신해범이 픽 웃었다.
“핫 팩일 거야. 추운 날에 얇은 옷 입고 버티려면 별수 있나.”
“그 정도는 봐줘도 되잖아.”
“물병도 안 되는데 오죽하겠냐.”
류진은 신해범이 건네주는 목봉을 받았다. 똑바로 세우면 제 키보다 컸다. 그래도 겁이 나진 않았다. 어제 실수하지 않았으니 오늘도 잘할 것이다. 잘해 내야만 한다.
문이 열리기 전, 류진은 위장 크림 바른 얼굴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이마에 두른 띠도 풀어지지 않게 꼭 묶었다.
신해범이 성재경에게 당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 끝날 때까지는 자네가 정 이병 보호자야. 절대로 일행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
신해범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해서 혀끝이 아렸다. 그래서 성재경의 뒤를 따라 대기 장소로 갈 때 뒤돌아보지 않았다. 신해범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길 바랐다.
왜냐면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서로를 돌아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교환할 필요가 없었다.
“긴장했어?”
성재경이 질문했다. 류진은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개회식 십 분 전에 나타난 권주혁은 평소보다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무겁고 불편한 예복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찬영은 그가 새벽에 일시적인 팔다리 마비 증상을 겪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주치의는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각하께서 사전 통보 없이 귀국하신 게….”
신해범은 한사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임찬영을 바라보았다. 권주혁의 건강을 걱정하는 그의 얼굴도 흙빛이었다. 속으로 얼마나 갈등하고 있을까? 충용절이 끝나는 즉시 권주혁 군벌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리느냐, 마느냐.
빈말로도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신해범은 평소에 임찬영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저놈이 목숨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태블릿으로 뒤통수를 한 대 갈겨 주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쪽을 대하는 눈빛, 말투, 목소리를 들으면 알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임찬영의 흙빛 얼굴을 보자니 싱숭생숭했다.
권주혁의 뒤 닦아 주며 쌓은 전우애였다. 비참하고 우울하지만 어쨌든 같은 처지였었다.
신해범은 한사코 기우희에게만 심부름을 시키는 권주혁을 바라보았다. 곧 잡아먹을 사냥개에게 간식을 주는 주인은 없다. 그래도 짐승은 감각이 예민해서 주인의 심경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법인데, 저렇게 티를 팍팍 내서야.
신해범은 고개를 들었다. 권주혁은 총통의 최측근이었다. 그래서 무대가 잘 보이는 중앙 상석을 차지할 수 있었고, 그 위치는 유미현보다도 좀 더 좋았다. 권주혁은 유미현의 곁을 지키는 풍기 교육대원들을 보고서도 별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컨디션이 나쁜 모양이었다.
북소리가 커졌다. 선녀의 날개옷 같은 전통복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줄지어 무대에 올랐다. 무대 중앙에는 연꽃무늬 석탑이 설치되었다.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성화를 들었다.
본관 쪽에서 축포가 터졌다. 군악대의 연주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뽀얀 연기가 가실 무렵, 오색 빛깔 풍선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신해범은 본관을 향해 열과 성을 다하여 손뼉을 쳤다. 굳게 걸어 닫혔던 황금 문이 열리고 있었다.
육중한 문이 좌우로 개방되며 들리는 ‘끼익’ 소리는 기실, 사전에 준비한 효과음을 타이밍에 맞춰 내보내는 것이었다.
군악대의 연주가 멎었다. 일렬종대로 늘어선 의장대가 총을 들어 하늘에 쏘았다. 연달아 세 번을.
행사장의 모든 사람이 목청껏 외쳤다.
“총통 각하를 뵙습니다!”
붉은 카펫 위에 눈부신 백마가 서 있었다. 왕가의 황금빛 예복을 차려입은 권일혁 총통이 고삐를 잡았다.
그는 높은 관을 썼다. 길게 늘어진 보석이 백마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찰랑찰랑 흔들렸다.
신해범과 기우희는 총통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총통의 움직임을 쫓았다.
붉은 바탕에 금색 장식이 들어간 가마가 총통의 백마를 따랐다. 정방형 바닥에 황금 의자, 차양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 바람에 너울대는 붉은 천. 이 전통식 가마는 들어 올리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할 정도로 무거웠다. 신해범은 장승희가 보여 줬던 옷과 머리 장식, 보석들의 무게만 해도 상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신룡관의 허가를 받은 방송사 카메라가 붉은 카펫 가장자리를 미끄러지듯 걸었다. 지금쯤 아침 뉴스로 생방송이 나갈 터였다. 하늘에서도 헬기가 돌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길 장식의 실크 오건디가 펄럭거렸다.
신룡관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아름답게 지어졌다고 한다. 죽어서 승천한 선대들이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라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총통의 자리는 이곳에 마련된 테이블 중 가장 넓었다. 장승희는 혼자 힘으로 가마에서 내릴 수 없었다. 선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내린 그에게 권일혁 총통이 오른손을 내미는 모습은 신해범이 선 자리에서도 보였다.
축사는 총통 부부가 자리에 앉은 뒤에 시작됐다. 첫 주자는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었다. 기우희가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부축했고, 신해범과 임찬영이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권주혁은 자꾸만 휘청거렸다. 뒤에서 보니 어깨가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원래도 지팡이를 짚어야 할 정도로 무릎이 좋지 않았는데, 새벽에 마비 증상을 겪은 데다 그 몸에 무겁고 치렁치렁한 왕가의 예복을 걸쳤으니 절뚝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자기 발로 걷는다는 사실에 의미를 둬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기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권주혁은 무대 앞에서 멈춰 섰다. 계단 때문이었다.
신해범은 임찬영이 주먹 쥐는 모습을 보았다. 권주혁의 안색을 살핀 기우희가 돌아보았다.
망설이는 임찬영을 제친 신해범이 앞으로 나섰다. 권주혁을 둘러업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술렁임은 이내 박수와 감탄, 웃음으로 바뀌었다.
권주혁을 찍던 카메라맨은 감동한 눈치였다. 그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전 국민에게 보여 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 신룡관에서 사전 고지한 촬영 안전거리인 삼 미터 코앞까지 다가왔다. 임찬영이 황급히 손을 들어 카메라맨을 저지했다.
“해범아.”
“예, 장군.”
“미안하다.”
신해범의 입술이 꿈틀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더 살고 싶다.”
신해범은 두 손에 힘을 풀고 싶었다. 권주혁을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는 무뎌졌다고 생각한 살의가 끓어올랐다.
나는 더 살고 싶다.
그러니까 네가 죽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기도 힘이 들었다.
“오래 사실 겁니다. 장군.”
“그래야지. 오래 살아야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인내심을 발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권주혁은 무대 중앙으로 갔다. 성화가 타오르는 연꽃무늬 석탑 앞에 섰다. 마이크를 받아 든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신해범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기우희와 눈이 마주쳤다. 살며시 웃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왕족, 귀족, 각 부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언권을 가진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곳곳에 카메라도 많이 와 있었다. 권세혁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저 위에서 내뱉은 말이 별도의 편집 과정 없이, 아침 뉴스를 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뜻이었다.
말이 좋아 축사지, 순수한 의미의 축하는 형식적인 몇 마디로 끝났다. 체감상 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뜻깊은 자리를 빌려서….”
결국은 정치가의 서열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했다. 비록 신해범의 등에 업혀서 올라오긴 했으나 권주혁은 아무나 걸칠 수 없는 왕가의 예복을 입었고, 일등으로 마이크를 잡음으로써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평생 어버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던 제게, 위대하신 총통 각하의 은총이 내려 조만간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려 드릴 수 있겠습니다. 간만에 이 노장의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권세혁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숙부가 자기를 얼마나 허수아비로 여기는지 알 만했다. 자신은 입장을 분명히 표시했다. 동생의 입양은 결사반대한다고.
그는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어려도 알 건 알았다. 자신이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권세혁은 몸을 숙이고 동생에게 말했다.
“괜찮아, 무혁아. 그냥 하는 얘기야.”
“응….”
권주혁은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여전히 걸음걸이가 불안정했지만, 굴러떨어져서 목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저런 자리가 발언자에게 유리한 점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사실이 발표되기 전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그럴듯한 가설이 양산된다. 그렇게 화제성을 가져간다.
권주혁의 다음 타자는 유미현이었다. 권세혁은 무대로 뛰어올라 가고 싶었다. 유미현의 손에 들린 마이크를 빼앗아 방금 있었던 권주혁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숙부가 고자로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운명에 순응하고 아버지의 정 따위는 다시 태어나서 깨우치라고.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유미현의 행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권세혁은 그가 읊어 대는 형식적인 축사에 환멸까지 느꼈다. 정치가들이 공유하는 모범 답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비서들이 사전에 말을 맞추는 것이다. 아, 이 멘트는 좀 겹치는데 그쪽에서 바꾸시죠? 다음번에 우리가 양보해 드릴게. 그 전까지 댁네가 숙청당하지 않는다면.
권세혁은 의자 뒤의 헌병에게 손짓했다. 그는 잽싸게 유리잔을 가져왔다. 멸균 처리를 거친 일회용 손수건으로 권세혁이 보는 앞에서 컵 안쪽과 입술이 닿는 부분을 닦은 뒤, 마찬가지로 새것인 생수를 따라 주었다.
권세혁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동생에게 건넸다.
“무혁아. 물 마셔.”
“응….”
“추워? 안으로 들어갈까?”
“괜찮아.”
권무혁은 괜찮다고 했지만, 권세혁은 동생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 모습을 본 외신 기자 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었다. 금발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왕족을 촬영하면서 웃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해동문국 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 해도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권세혁은 외신 기자를 두들겨 패고 행사장 밖으로 쫓아내는 대신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주었다. 형의 웃는 얼굴을 본 권무혁도 따라 웃었다.
그저 변덕이었다. 기껏 차려입은 날이니 동생과 나란히 앉아서 웃는 사진 한 장쯤은 남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외국의 어느 신문 한구석에는 실리겠지. 동북아시아 왕정 국가의 로열패밀리로.
권세혁이 카메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무대 위의 유미현이 폭탄을 떨어뜨릴 준비를 마쳤다.
“위대하신 총통 각하와 부인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더불어서,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빛내러 온 각하의 따님, 풍기 교육대의 기우희 소령에게도 환영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신해범은 기우희를 돌아봤다. 그에게는 부하가 도망가거나 테이블 밑으로 숨지 못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올라가, 소령.”
“꼭 저렇게 말해야 합니까?”
“유 수석이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자네 공주 맞잖아.”
파오훼이 시절의 반항적인 눈빛이 반가워, 신해범은 하마터면 기우희를 껴안을 뻔했다.
“기우희 소령은 비록 왕실의 적통은 아니나, 험준한 환경에서 자력으로 생존하여 우리나라와 국민에 헌신해 왔습니다.”
유미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감정이 복받치는 연기 실력이 일품이었다.
“저는 그 기개를 높이 샀습니다.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존경하는 각하께 왕녀님의 결의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권주혁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의자에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임찬영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신해범은 그를 어깨로 밀쳐서 바닥에 쓰러지게 했다. 왕족이 앉은 테이블에 허락 없이 손을 올리면 처벌받을 수 있었다. 특히나 권주혁의 기분이 저기압일 때에는.
“저… 지금… 유미현이 저게 지금 뭐라는 거냐?”
지금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철퇴를 맞았다. 장승희와 권주혁.
신해범은 유미현의 유쾌함에 손뼉을 치고 싶었다. 이거야말로 최고의 이벤트였다. 총통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는 날에, 총통의 혼외 자녀를 차기 총통 후보로 지지한다는 뜻을 밝히다니.
“응? 우희야, 해범아. 유미현이 지금 저 말이 무슨 뜻이야?”
기우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무대를 향해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좌중이 떠들썩했다. 누군가 바늘로 찌르면 터져 버릴 풍선 같았다. 유미현의 선언은 앞선 권주혁의 발언을 모든 이의 머릿속에서 사장해 버리고도 남았다.
총통의 딸, 기우희. 그 이름을 풍기 교육대의 기우희 소령과 곧바로 매치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귀족들의 시각은 편협해서 무대에 오르는 제복 차림의 기우희를 보면서도 옆 사람에게 누구냐고 묻거나, 심지어 지정석에서 벗어나 무대 쪽으로 다가가기도 했다. 개중에는 총통 각하께서 자리를 뜨기 전까지 지정된 구역에서 벗어나지 말아 달라는 경비병의 정중한 제지에 노발대발하는 치도 있었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신해범은 권주혁의 주름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유미현 수석 전략가가 기우희 소령을 차기 총통 후보로 지지한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물으셨잖습니까?”
권주혁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빨개졌다가, 퍼렇게 질렸다가, 이내 풍기 교육대 지하실의 비누 인형처럼 새하얘졌다. 전신의 혈류가 멈춰 버린 사람 같았다. 신해범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권주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헉.”
임찬영이 숨을 들이켰지만 무시했다.
“해범이 너…!”
“장군.”
신해범은 역정 내려는 권주혁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어 그가 말을 잇지 못하게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지요.”
임찬영이 일어섰다. 그가 장군께 무슨 짓이냐며 신해범의 팔을 붙잡았다. 신해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임찬영의 명치를 쳤다.
“야.”
“지, 지금, 이게, 무슨. 무슨 짓입니까.”
“살고 싶냐?”
“허억, 헉.”
“그럼 정신 차리고 앞을 봐.”
무대 위의 기우희와 유미현은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었다. 권주혁은 물론, 오늘의 주인공인 총통 부부까지 압도했다.
불꽃이 타오르는 연꽃 석탑 앞에 기우희가 섰다. 마이크를 잡은 그가 총통 부부를 향해 축하 발언을 하고 있었다.
임찬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유미현 수석 전략가가, 그 신룡관의 숙청 여제가 자신의 발언권을 일개 소령에 불과한 기우희에게 넘겼다.
그는 눈을 깜박거렸다. 저곳에 있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뭔가가 오는데, 느껴지는데,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신해범이 줬다.
“잘 봐 둬. 저게 힘이 움직이는 모습이다.”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신해범의 목소리는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말이 안 나온다고 한다. 심지어 화를 내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저 멍하니 눈물을 흘리거나, 웃거나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한다.
장승희는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채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마음 같아서는 무대로 뛰어올라 가고 싶었다. 두 계집년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어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거니와, 총통 부인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했다. 바로 옆에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사지 육신 멀쩡하게 앉았다.
옷소매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분노로 경련하는 손을 감출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랫입술이 찢어져 맺히는 피는 감추지 못했다. 장승희는 황급히 다가와 화장을 고치려는 손길을 쳐 냈다.
남편의 잔이 비었다. 장승희는 차를 따라 주는 척하며 총통의 얼굴을 보았다.
권일혁 총통은 웃었다. 심지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총통은 그럴 만했다. 옛날부터 쭉 그런 태도를 고수해 왔다. 나는 자식 교육에 일절 관여치 않는다. 내 씨가 확실하다면, 누구의 배를 빌어 태어났든 괘념치 않는다.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비겁한 수단을 쓰더라도 알 바 아니다. 나는 결과만 보겠다. 형제자매를 짓밟고, 정상을 차지한 한 명에게 왕관을 넘겨주겠다.
장승희는 남편이 정신 이상자라고 생각했다. 권일혁 총통은 정말로 머리에 문제가 있었다. 지속적인 두통과 환청에 시달리던 그가 뇌 검사를 받았을 때 뉴런의 길이가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짧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대뇌 앞쪽의 세포 활동이 약하다는 결과도 나왔다. 게다가 유전병.
권주혁이 고자라는 점은 쉬쉬할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이 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 나라 왕족을 지배하는 유전병에는 기묘하리만치 적중하는 규칙이 존재했다. 정신병은 첫째, 육신의 병은 둘째.
국혼을 올리고 나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유산을 경험했을 때, 장승희는 울지 않았다. 슬픔이나 죽은 아기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안심이 앞섰다. 첫 아이를 하늘에 바쳤으니 다음 아기는 완벽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권세혁은 완벽했다.
그 애는 정말로 축복이었다. 어미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첫 번째 합방 날에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효자였다.
물론 출산은 고통스러웠다. 성장 과정에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권세혁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기대를 충족하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권무혁의 결함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저주를 피해 가지 못했어도 괜찮았다. 차남은 실패작이지만 장남이 훌륭하니까. 총통이 될 재능과 능력이 충분하고, 우리 집안은 이 애를 왕좌에 올려놓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장승희의 꿈은 허황한 게 아니었다. 그는 총통의 정부인이었다. 옛날 법도대로라면, 권세혁은 백치로 태어났어도 왕이 되었을 아이였다. 설령 기우희가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성군의 재목이라도.
남편이 비참한 왕자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식들로 서바이벌 게임을 하겠다는 적자생존법을 용납했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받아들였다. 그러느라 인생의 좋은 시절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보내 버렸다. 그런데 하나뿐인 인생,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걸고 싸운 결과가 이거라니.
일언반구 없이 돌아온 남편. 나날이 세가 꺾여 가는 시숙. 장진의 친부는 건강 악화를 핑계로 충용절 당일까지 입성하지 않았다. 물론 장승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의 끄나풀이 자기 주위를 맴돈다는 것도 눈치챘다. 오늘 장두현의 부재는 복수였다. 아직도 신해범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괘씸한 딸을 응징하기 위한.
장승희는 턱에 매달린 핏방울을 닦았다. 예복 소매에 핏물이 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앞서 떠올린 모욕들은 견딜 수 있었다. 장승희는 자기가 남편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모든 걸 때려 부수는 정신 이상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미현과 기우희를 향해 기립 박수를 보내는 아들놈은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총통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권세혁의 순진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총통이 되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 네가 싸고도는 동생도 죽는다. 너를 낳아 준 어미도 죽고, 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진의 외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정권 교체란 그런 것이다.
새 시대의 주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들 치세에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장승희는 과거의 유괴 사건을 잊어버려서 언급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권세혁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자극할까 봐 조심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러지 않은 걸 후회했다. 진즉 말해 줬어야 했다. 기윤정의 딸을 스스럼없이 누나라고 부를 때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세상에 네 형제는 단 한 명뿐이라고. 배가 다른 형, 누나, 동생들을 가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장승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은 비단 무거운 머리 장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모든 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각하께선 기우희 소령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그럼.”
“모친을 죽인 것도요?”
총통이 불쑥 고개를 돌려, 장승희는 흠칫했다.
“알지. 놀라운 일이었어.”
태연하게 내뱉는 총통의 정신 상태가 놀라웠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아이를 천거한 게 권 장군이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찾아오라고 했지.”
“예?”
“보고 싶었거든. 나를 많이 닮았다기에.”
“누가 그런 소릴 했나요?”
“윤정이.”
볼수록 놀랍고, 알수록 치가 떨리는 사내였다. 아무리 뒤에서 귀족들이 어린 연놈들과 뒹굴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식을 싸질러도, 그래도 이 나라는 일부일처제 국가였다. 그렇게 벤치마킹하려고 안달인 권숙빈 총통의 업적이었다. 그런데 정부인과의 결혼을 축하하는 날, 부인의 면전에 대고 옛날 옛적에 죽어 나자빠진 애인 이름을 꺼내다니.
“각하께서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잊을 만하면 꿈에 나오더군.”
장승희는 남편을 도발했다.
“각하의 첫 여자였다지요?”
“부인.”
그제야 권일혁은 장승희를 보았다. 눈초리가 매섭다.
“귀한 날이니 웃으면서 보냅시다.”
“세혁이가 각하의 적통입니다.”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나?”
장승희는 궁금했다. 아버지는 딸에게서 아내를 본다는데, 그렇다면 남편도 기우희에게서 죽은 기윤정을 보고 있을까? 그래서 귀한 날에 이따위로 구는 걸까? 머릿속에 개미 들어간 사람처럼 웃으면서?
총통의 웃는 얼굴은 조금도 안심되지 않았다. 신해범의 화사한 미소와는 천지 차이였다.
“응? 왜 말이 없어?”
목덜미에 식은땀이 솟았다.
“아닙니다.”
“아니면?”
“…기억해 주셔서 다행이라고, 방금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장승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포효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온 세상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은 날.
앉은자리에서 분노를 삼키느라, 장승희는 이어지는 축사는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권주혁에 이은 유미현의 융단 폭격으로 이미 신룡관은 쑥대밭이었다.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 주지 않는 와중에 마이크를 잡은 이만 가엾을 따름이었다.
풍기 교육대원들에게 주어진 대기실은 신룡관 본관, 용금문과 가까운 응접실이었다.
내부는 안락하고 따스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보안이 철저하고 안전도 면에서도 마음 놓을 만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창문이 가려져 바깥을 내다볼 수 없었으며, 위병의 허락과 동행 없이는 응접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우리가 무슨 죄수냐고, 차라리 무대 뒤에 줄 세워 놓지 그러느냐고 불평하던 대원이 말했다.
“그런데 좀 시끄럽지 않습니까? 밖에 말입니다.”
“귀족님네들이 지루해서 몸 비트는 소리겠지.”
“축사를 도대체 몇 명이나 하는 거야? 순서 기다리다가 우리 다 늙어 죽겠다.”
류진은 성재경 쪽으로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리허설은 밤에 했는데, 실전은 대낮이네.”
“낮에는 높은 분들 일하니까.”
“우리는 놀아서 이거 하나 뭐….”
“그래도 휴대폰 받으면 좋잖아. 노트북이면 더 좋고.”
성재경이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외국에서 자리 잡히면 연락해.”
“형도 놀러 올 거야?”
“스케줄 봐서.”
류진은 짓궂게 웃는 성재경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놀러 와. 꼭 와. 우리 빵집 할 건데 꼭 놀러 와. 내가 형한테는 공짜로 줄게.”
그리고, 하며 류진은 기동복 앞주머니에 든 물건을 보여 주었다.
“나 휴대폰 생겼어.”
비록 중고에, 지금은 고장 나면 수리조차 받기 어려운 구형이지만. 어쨌든 휴대폰은 휴대폰이었다. 게다가 류진은 이 물건이 마음에 쏙 들었다. 신해범이 신예나와 별도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 쓰던 것이기에.
“그래, 뭐.”
성재경은 다른 대원들도 보는 곳에서 태연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휴대폰의 본질이 그거잖아. 전화 통화. 그거만 돼도 큰 문제 없지. 안 그러냐?”
화장실에 갔던 하채경이 돌아왔다. 무대를 앞두고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위병과 함께 돌아온 그는 소파에 풀썩 앉았고, 앉자마자 바깥에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하채경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사람이 모였다.
“유미현 수석이 축사 도중에 소령님을 불렀다.”
“예?”
“그게 무슨 뜻인지는,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하채경은 벽에 서 있는 위병을 의식한 듯 말끝을 흐렸다.
“대충 알 거라 믿는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 일만 잘하면 돼. 어제보다 오늘이 더 쉬울 거다. 해도 중천이고, 바람도 별로 안 세. 야외지만 난방 설비는 다 돼 있어. 우리는 오히려 더울 거다.”
“예!”
“다들 일어나라. 인원수 체크하게.”
하채경은 중간 관리자로서 좋은 자질을 지녔다. 부하들을 깔끔하게 통제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은 성재경에게 넘김으로써 상관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류진은 황급히 일어나 목봉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자신에게 주어진 번호는 서른이었다.
“멋지지 않습니까, 장군?”
신해범은 권주혁의 손을 꼭 잡았다. 잔디밭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였다.
미소 띤 얼굴에 나긋한 목소리는 덤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기우희는 권주혁 옆으로 오지 않았다. 이미 유미현과 그를 위시한 적림부 인사들에 둘러싸였다. 낯빛이 핼쑥한 임찬영이 어떻게든 그 틈바구니에 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멀리서도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저기, 나 유미현 수석님께 소개 좀 해 줘. 제발 나 좀 살려 줘, 기우희 소령. 우리 이래 봬도 한배를 탄 사이잖아….
같은 경호 1팀 소속인 성재경은 무대 위에서 열정을 다해 춤추었다. 공연을 마친 그가 위장 크림을 지우고 제복으로 환복한 뒤 경호 1팀에 합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지금 권주혁의 옆에는 신해범뿐이었다.
충용절 직후에 숙청할 계획이었던 부하의 손에 목숨을 맡긴 기분이 어떨까? 신해범은 궁금해서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장군? 어디 불편하십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혹시 제가 준비한 공연이 성에 차지 않으십니까? 아이고, 이를 어쩌나. 진즉 보여 드리고 컨펌을 받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입 닥쳐.”
“잘못했습니다, 장군. 부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어 이 못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닥치라고 했다!”
접시를 들고 다가오던 위병이 움찔했다. 얼굴에 솜털이 보송한 게 병아리 또래였다. 신해범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두고 가.”
“예.”
“평소에 이런 분이 아니신데, 반주를 약간.”
핑계였다. 이제 갓 입대한 애송이도 눈치챘다. 중요한 자리에서 만에 하나 불상사가 불거질까,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는 한 방울도 제공되지 않았다.
신해범은 도망치듯 물러가는 위병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권주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 알고 있었니.”
“그럼 제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사형수를 소대원으로 받았겠습니까? 아무리 고기 방패 신세여도 말입니다.”
신해범은 권주혁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소령이 감옥에서 풀려난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말입니다. 각하께선 왕녀, 왕자님들이 치열한 다툼 끝에 왕위를 쟁취하길 원하십니다. 거저 주어지는 권력으로는 이 나라를 이끌 지도자의 자질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권일혁 총통은 싸움을 원한다. 형제자매 간의 잔인한 골육상잔을,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는 온몸에 피를 묻힌 승리자가 신룡관의 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 앞에 서길 바란다.
그래서 기우희를 살려 준 것이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서도. 어쩌면 한 발짝 더 나아가, 총통은 딸이 저지른 일에 감명받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노역 시설이 아니라 군대에 들여보낸 걸 보면 알 만했다. 총통은 기우희의 성장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훌륭한 딸에게 쓰레기 같은 아버지는 필요 없다는 사실이었다.
신룡관 주최의 행사가 특별한 이유는, 물론 그 규모와 예산이 타 주최와 비교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관계자들 사이에 도는 암묵적인 룰 때문이었다. 신룡관 행사에는 연예인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적림부에서는 연예인 공연이 왕실의 기강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댔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진 않았으나, 누구라도 생각해 낼 이유였다. 류연비 스캔들.
사실상 국가의 연예인 보이콧이었다. 그건 공공 기관 행사는 물론 기업과 학교에서도 연예인을 부르지 않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소속 연예인의 행사 수입이 운영 자금의 대부분이었던 작은 기획사가 줄줄이 폐업했다. 많은 업계 종사자가 빚더미에 앉거나 실업자가 되었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크게 기사화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 침체했던 업계가 활기를 띠고, 공공 기관에서도 관련 행사에 연예인을 동원하는 일이 껄끄럽게 느껴지지 않는 지금도 연예인에 대한 신룡관의 태도는 냉랭했다. 물론 그 덕분에 구시대의 유물 취급받던 국립 예술단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긴 했다.
권무혁은 꿈결을 걷는 표정이었다.
“멋있다….”
풍기 교육대의 무술 시범이었다. 서른 명의 남녀가 목봉을 휘두르며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녔다. 격렬한 움직임에도 불구, 동작이 칼처럼 딱딱 맞아떨어졌다.
“저거 풍기 교육대지? 형아 갔었던.”
“응. 맞아.”
권세혁은 동생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허벅지가 지끈했지만 참을 만했다. 그는 권무혁의 발이 테이블 밑에 설치된 난방 기구에 닿아서 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최대한 동생의 시야를 높게 해 주었다.
“형아, 아까….”
“왜 박수 쳤냐고?”
권세혁은 동생을 꼭 안았다.
“우희 누나랑 풍기대에서 알고 지냈거든.”
“친했어?”
“그럼, 누난데. 친했지. 우리 집에도 왔었잖아.”
“…….”
“왜?”
“형아가 다른 사람이랑 친한 거 싫어.”
권세혁은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노골적인 의사 표현이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첫사랑 이야기가 문제였던 것 같다. 권세혁은 후회했다. 자면서 류진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대충 이해할 만큼 설명한다는 것이 동생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형은 너랑 제일 친해.”
“하지만 류진 형아….”
“무혁아. 형이 부탁이 있는데, 그 사람 이름 얘기하지 말아 줄래? 다른 사람들한테도. 별로 알리고 싶지 않거든.”
“왜?”
“말했잖아. 첫사랑이 좀 그래. 형이 아직 좀 힘들어.”
“그럼 결혼 안 할 거지?”
권무혁은 대담하게도 약지를 내밀었다.
“절대로. 절대로 형아 결혼 안 할 거지?”
권세혁은 동생의 도발을 받아 주었다.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어차피 정류진 같은 사람은 다시 못 만난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도 싫었다.
지금 권세혁이 원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어린 동생을 지키는 것.
결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과는 달리, 권무혁은 류진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그래도 류진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어떤 형아였어?”
“착했어. 강하고. 힘들다는 내색을 정말 안 했었어. 그리고… 자기를 많이 희생하는 사람이었어.”
“잘생겼어?”
권세혁은 웃어 버렸다.
“그런 게 궁금해?”
“말해 줘. 그 형아 잘생겼었어?”
“…응.”
부정할 수 없었다. 정류진은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이었다. 물론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그만큼 독보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어떻게 그럴까 상처 입고, 아파서 울어도, 꼴사납기는커녕 우아해 보인다니.
“키는? 키도 컸어?”
“형보단 작았어.”
“…다행이다.”
권무혁의 중얼거림은 박수 소리에 묻혔다. 아이는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는 풍기 교육대원들을 가리켰다.
“저기서 누가 제일 비슷해?”
“키 말이야? 음….”
유난히 류진의 키에 집착하는 동생이 이상했지만, 권세혁은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는 대열의 맨 끝에 서 있는 대원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
대원 개개인의 얼굴을 알아보긴 힘들었다. 이마에 동여맨 띠와 위장 크림 때문에. 하지만 신장은 비교적 멀리서도 분간이 가능했다.
권세혁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류진 형이 딱 저만했어.”
“나도 저만큼 키 클래.”
권무혁은 부드러운 빵을 맨손으로 뜯었다. 게살이 들어간 크림수프에 찍어 먹었다. 권세혁은 전에 없이 식욕을 드러내는 동생의 입술에 묻은 수프를 엄지로 닦아 주었다.
“형은 네가 더 크면 좋겠는데.”
“형아보다 커지긴 싫어.”
“그럼 딱 백구십? 어때?”
권무혁은 고개를 홰홰 저었다.
“싫어. 그 형아만큼만 클래.”
이만하면 눈치채지 못하기도 힘들었다. 동생은 류진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딱 하나. 그가 자신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깜찍한 질투심에 웃음이 나왔다. 권세혁은 전복 요리를 집어 내밀었다.
“이거 싫은데….”
“키 크려면 편식하지 말아야지.”
머뭇거리던 권무혁이 입을 벌렸다. 권세혁은 동생의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대열의 끝에 있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얼굴은 잘 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키와 체격이 류진과 비슷했다.
“…….”
권세혁은 고개를 들었다. 무대 쪽을 보았다. 그러나 이미 풍기 교육대원들은 퇴장한 다음이었다. 가장자리로 옮겨진 연꽃 석탑에서 타오르는 불꽃만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채경의 인솔하에 풍기대원들은 신룡관 회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러 갔다. 하지만 성재경은 할 일을 마치고 편한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는 류진을 데리고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진압 차량으로 돌아갔다. 류진이 의자 밑에서 생수와 클렌징 시트를 꺼냈다.
“여기.”
“땡큐.”
성재경은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마음이 급했다. 얼른 제복으로 환복하고 경호 팀에 합류하고 싶었다. 신해범은 천천히 준비하고 오라 했지만,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느니 일 초라도 빨리 상관의 눈앞에 나타나는 게 마음 편했다.
게다가 옆에는 류진이 있었다. 그에게는 류진을 최유신에게 ‘안전하게’ 보내야 하는 역할까지 주어졌다.
“가자, 류진아.”
“형 턱에. 아직.”
성재경이 손등으로 턱을 문질렀다. 채 닦이지 않은 위장 크림이 묻어 나왔다. 류진은 클렌징 시트를 새로 꺼내 성재경의 얼굴을 구석구석 꼼꼼히 문질렀다. 그러느라 얼굴이 가까워 숨결이 섞였다.
성재경은 새삼스레 류진을 바라보았다. 참 예쁜 동생이었다. 귀엽고. 외모만 보고 좋아한 건 아니지만, 이 애가 있으면 주위가 밝아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예쁜 얼굴을 가리고 살았다. 언제나 모자를 코까지 눌러쓰고,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로 마스크를 쓰고, 그래도 누가 쳐다볼라치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류연비 동생임을 알아볼까 봐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애틋했다.
성재경은 몸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더 챙기고 가르쳐 줄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실은 그렇게 잘해 주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게 그랬다. 오늘이 먼 훗날 회상하게 되는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가슴이 저몄다.
“너무 어리다. 류진이.”
“어?”
“다음에 만나면 형이랑 술 먹자. 윗사람들 끼지 말고 우리끼리.”
의미를 알아차린 류진이 웃었다.
“응!”
“대위님 다 오셨지?”
류진은 신해범에게 받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본관 후문 쪽인데 지프에서 대기 중이래. 여기 못 들어오게 하나 봐.”
확실히 경비가 삼엄하긴 했다. 경호 팀으로도 참여하는 풍기 교육대 소속 군의관의 출입을 막다니.
그래도 예상 범위 이내였다. 최유신은 경비대에 항의함으로써 분란을 일으키는 대신, 몸이 좋지 않은 우리 대원이 행사장 밖으로 나올 때까지만 기다리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유신이 끌고 온 지프 뒷좌석에는 귀한 담배가 몇 보루나 들었다.
“우리가 후문까지 가야겠네.”
“그러면 형이 나 부축해 주면….”
“아니, 그냥 업혀.”
“어?”
“봉 내려놓고 형한테 업혀. 그게 더 빨라.”
“나 무거워.”
성재경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웬만하면 축하 공연 끝날 때까지 참으라고 할 놈들이야.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거 아니면 안 보내 줄지도 몰라.”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류진은 조금 망설였지만 순순히 성재경의 등에 업혔다.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면서 신해범을 떠올렸다. 얼른 만나고 싶다….
류진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너무 긴장해서 체했다고 할까?”
“뭐라고 하든 네 연기력에 달렸지.”
“아, 진짜 뭐라고 해? 복통? 두통? 아니면, 어, 무대 끝나고 내려오다가 삐었다고 할까? 발목 말이야. 내가 그래서 대타로 들어왔잖아.”
성재경은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글쎄, 내 생각엔 솔직히….”
물어보지 않을 것 같았다.
날이 쌀쌀해서 다행이었다. 콧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식혀 주니까. 긴장했다는 사실을 드러나지 않게 해 주니까.
성재경의 예상이 적중했다. 출입 통제 구역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는 헌병들을 발견했다. 어디서 났는지 맥주 캔을 든 자도 있었다. 그들은 CCTV 사각지대에 교묘하게 숨었고, 교대로 주위를 오가며 농땡이 피운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연기했다. 어쭙잖은 위장이었으나 잔머리 굴리는 재주는 있었다. 과연 자랑스러운 해동문국 헌병대.
류진은 성재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옷 더럽혀서 미안.”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해.”
헌병들 사이에 끼어 있던 최유신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그는 한 손을 번쩍 들고 다가왔다. 그래도 명색이 경비대인데, 술과 담배 선물을 받아 기분 좋은 헌병들은 그 어떤 질문이나 의심 없이 류진을 지프에 타게 해 주었다. 대로변으로 빨리 나가는 지름길이 어느 방향인지도 알려 줬다. 심지어 제복 차림의 성재경에게 고생하신다며 맥주 캔까지 건넸다.
류진은 창밖으로 눈만 빼꼼 내민 채, 멀어져 가는 성재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네.”
류진은 지프 뒷좌석에 고쳐 앉았다. 슬픈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인사를 못 해서 아쉽다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성재경도 ‘안녕, 잘 지내. 건강해라’ 같은 소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형이랑 술 먹자.’
마실 것이다. 많이 마실 것이다.
그 자리에 신해범은 데리고 가지 않겠다. 성재경과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인 끝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흐느적거리면서,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릴 신해범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할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가게에서 술을 먹고 길거리를 돌아다닐 날이 올 것이다.
최유신은 힐튼 호텔로 차를 몰았다. 류진은 빠르게 움직였다. 위장 크림을 지우고, 땀에 젖은 기동복을 갈아입었다. 최유신이 챙겨 온 옷은 예전에 신예나가 사다 준 사복이었다.
류진이 트렌치코트와 가죽 재킷을 들고 망설이는 사이 지프는 호텔에 도착했다.
최유신은 아직도 망설이는 류진에게 조언했다.
“왼쪽에 가죽옷. 그걸로 입어라.”
“네.”
“잘 어울리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최유신은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으면서 조수석에 있던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얼른 가서 먹자. 나도 점심 아직이야.”
방은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침에 나갈 때 표시를 해 뒀다. 류진은 최유신이 창가에 설치된 총을 보고 놀랄까 봐 걱정했지만, 그는 태연하게 소파에 앉았다.
“안 놀라세요?”
“대충 얘기 들어서. 그쪽에 저격수가 있다며.”
“네.”
“군인이 아닌가 봐? 숨어서 경호하는 거 보면.”
“군일일 가능성도 있어요. 원래 저격수는 숨어 있잖아요. 임무 중에 위치를 벗어나는 행동도 안 하고요. 자기 위치가 노출됐을 때 빼고.”
최유신은 쇼핑백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꺼냈다.
“네가 총을 쏘긴 쐈구나.”
류진은 최유신이 건네준 샌드위치를 먹지 않고 내려놓았다. 배고팠지만 입맛이 없었다.
창가로 다가가 신룡관을 찾았다. 햇볕에 반짝이는 황금 지붕을 한눈에 찾아냈다.
층수가 더 낮았으면 좋을 뻔했다. 물론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가 신해범의 최선이었다. 나머지는 MK15의 유효 사거리와 자신의 실력에 달렸다.
류진의 뒤에서 최윤이 말했다.
“알고 있지? 저거 안 쓰는 게 가장 좋다는 거?”
“네.”
신해범에게 충분히 들었다. 섣불리 행동했다간 모든 일을 망치고 최유신까지 위험에 빠뜨릴지 모른다.
사실은 류진도 알았다. 오늘 저 자리에서 총통을 암살할 것도 아닐진대, 굳이 총통의 저격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스나이퍼 역할을 자청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류진은 진치우 때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기 싫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숨어 있는 일.
명칭에 ‘왕실’이 들어가는 부대에는 남달리 유복한 집안에 출신 성분이 좋은 이가 많았다. 특히 군악대나 기병대가 그랬다.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실력이 있어야 군 생활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악기도, 승마도.
유미현이 그들의 제식 시범을 앞 순서에 배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길고 긴 축사에 몸을 비틀던 손님들이 다시 행사에 관심을 두고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조금 떠들썩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요했다.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 지루해할 틈이 없으니까.
그러나 행사 분위기는 유미현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갔다. 다름 아닌 유미현 자신의 축사 때문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귀족의 테이블일수록 야단이었다. 평소 적림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 없다가, 이제 와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쓰며 허둥거리는 꼴이 볼만했다.
당황한 자들의 짜증은 만만한 곳으로 향했다. 귀족들의 불평이 시작됐다. 식사하는데 말 냄새가 난다는 둥, 먼지가 날리고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는 둥.
원세영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가 이번 행사 준비의 담당자였다. 귀족들의 클레임이 쌓이면 실제로 책임을 물지도 몰랐다.
“어떡할까요. 수석님. 각 테이블에서 불만이 많은데요.”
“내버려 둬.”
“네?”
“이미 진행 중인데 어쩔 수 없잖아, 내버려 둬.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와서 따지라고 해.”
유미현 옆자리의 기우희가 덧붙였다.
“아니면 말발굽에 대가리 깨지든지.”
“그것도 괜찮고.”
원세영은 웃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특히 총통 부부 테이블이 그랬다. 장승희의 적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뜻밖인 건 오히려 권세혁 왕자 측의 반응이었다. 그는 정말로 총통 자리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원세영이 초조해하거나 말거나, 기우희는 디저트로 나온 셔벗을 한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잘 먹었어. 덕분에 배 채웠군.”
“잠깐만.”
“왜.”
유미현이 웃었다.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데, 더 앉았다 가. 사진도 찍고.”
“충분히 찍혔잖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한 시 방향에 금발 여자.”
“뭐?”
유미현은 고개를 돌리려는 기우희의 손목을 꽉 잡았다.
“눈만 굴려서 봐. 카메라 의식하는 거 알면 공주답지 못하다고 씹어 댈 놈들 많으니까.”
“누구보다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놈들이?”
“왕녀에게 요구되는 소양은 왕자들이 요구받는 것과 다르잖아.”
장승희의 꼴을 보면 알았다.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신세. 집채만 한 머리 장식과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서 입도 벙긋 못 하는 중이었다.
굳이 신분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온몸에서 ‘나 외국에서 온 기자요’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다가왔다. 영어로 말할 줄 알았는데 서툰 우리말이었다. 나는 영국에서 왔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
기우희는 유미현이 나설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나선 사람은 원세영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낀 태블릿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뒷면에 볼펜으로 뭔가를 적어서 건넸다.
“뭐야?”
“장소와 시간. 얘기가 길어질 테니까.”
“따로 약속을 잡았어? 외신에 그럴 필요까지 있어?”
“너한테 하라고 안 하니까 그만 째려봐.”
유미현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나도 알리바이는 확보해 놔야지. 내가 신 준장 해코지한 거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해. 하지만 알잖니, 관계자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져.”
그래서 일면식 없고, 남의 나라 정치에 개입할 이유가 없고, 특정 정치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이유가 없는 사람이 필요한 거였다.
기우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기 살 구멍을 뚫어 놓을 인물이었다.
“이제 가도 되지?”
아쉬운 기색이었으나, 유미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우희는 잔디밭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움직임에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어쩔 수 없이 거북했다. 방송 활동에 적극적이던 진치우는 ‘네가 안 해 봐서 그렇지, 한번 맛 들이면 못 멈출걸?’ 같은 소리를 했지만, 역시 이건 적성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소령님!”
임찬영이 쫓아왔다. 기우희는 인상을 팍 구겼다.
“왜 따라와?”
“잠깐이면 됩니다. 저랑 얘기 좀.”
“외신이랑도 얘기 안 한 거 못 봤어?”
“풍기대에서 장군님을 치는 겁니까? 먼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기우희는 임찬영을 노려보았다.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인제 와서 멈추는 방법 따위 모른다.
“입조심해. 함부로 떠들고 다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놈들 많아.”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왜 내가 너를 살려 줘야 하는지 말해 봐.”
“그래도 저희….”
“순진하게 왜 이래, 임찬영.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리고 난 남한테 목숨 구걸하는 사람 싫어해.”
임찬영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는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 자락을 그러쥐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턱이 떨렸다.
“그날 일… 준장님께 유리한 증언 하겠습니다. 그날 같이 있었던 헌병 애들 제가 다 기억합니다.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신해범은 죽을 건데. 풍기 교육대 12층에서 불에 탄 시체로 굴러 나와, 내 발길질에 턱뼈가 으스러질 텐데.
하지만 기우희는 임찬영을 받아들였다. 권주혁의 측근인 임찬영이 신해범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면 추후 바닥으로 떨어진 그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서서였다.
임찬영이 마음만 먹으면 연기를 못 할 인물도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충격으로 새파래졌지만, 젊은 나이에 총통 보좌관의 비서관 자리를 꿰찬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단순히 시대를 잘 타고나서가 아니었다. 본인의 능력이 되지 않으면 운이 좋아도 성공하지 못한다.
일을 시켜 보고, 못하면 그때 버려도 괜찮다. 기우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임찬영에게 구명조끼를 던져 주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구명조끼를 껴입은 임찬영이 따라붙었다. 기우희는 차갑게 대꾸했다.
“내 일 하러.”
권주혁의 테이블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의미를 파악한 임찬영이 머뭇거렸다.
“왜. 미안해서 전 주인 얼굴을 못 보겠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담이 작아서 줄을 어떻게 바꾸려고.”
그러니까 입때껏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신해범이 말한 것처럼 도망이라도 쳤다면 살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높게 쳐주었을 텐데.
그러나 임찬영은 그마저도 못 했다. 눈앞에서 이변이 발생하고 나서야 살길을 찾았다. 그런데도 구명보트를 잡아탔으니, 임찬영에게는 운이 따른다고 할 만했다. 나중에 관상을 한번 보든가 해야지.
“무서우면 내 뒤에 있어.”
“그럼 오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좀 해 봐.”
하지만 임찬영은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권주혁이 패닉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옆에 신해범과 무대를 마치고 복귀한 성재경이 섰다. 기우희는 안심했다. 성재경이 여기 있다는 건 정류진이 안전하게 호텔로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신해범이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오셨습니까. 공주마마.”
“하지 마십시오.”
“좀 과한가?”
“예. 많이.”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한 손이 권주혁의 의자 등받이를 잡고 있었다. 기우희는 긴 예복 소매에 가려진 권주혁의 손을 응시했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우희, 너….”
“예. 숙부.”
고개를 돌린 권주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언제부터 유미현이랑 내통했냐.”
“내통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우희는 몸을 숙여 권주혁의 의자 팔걸이를 붙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추한 낯짝이었다.
“내통은 숙부님과 제가 했지요.”
기우희는 눈으로 신해범을 올려다봤다.
“신 준장을 언제든지 버릴 패로 여긴 건 숙부입니다.”
“너는 아니었어!”
“제가 바봅니까? 부관을 소모품 취급하는 상관을 믿게? 그래도 내 취급은 다를 거라고 자위하면서?”
임찬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멍청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숙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널 감옥에서 꺼내 준 게 누군지 기억해라.”
“예, 기억합니다. 아버지죠. 존경하는 총통 각하.”
“네가 진정 이 나라 지존이 될 셈이냐?”
“못 할 건 뭐랍니까?”
북소리가 커졌다. 기우희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신해범에게 배운 미소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상대방을 열 받아 미치게 만드는 방법을 그로부터 배웠다.
“숙부는 내가 누군지 알잖아.”
음악이 멎었다. 박수 소리는 크지 않았다. 기우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세상에서 못 할 게 없어.”
몸을 일으키는데 신해범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한 말을 들은 눈치였다. 빙그레 웃는 얼굴이 짓궂다.
제식 시범이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총통의 답사는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그는 신룡관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서일 것이다. 총통은 분명히 의사를 밝혔다. 강하기만 하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많은 사람이 그 말을 권세혁을 두고 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장남이고, 외가의 세력은 어지간한 귀족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으며, 권세혁 본인도 준수한 외모를 갖춰 국민의 사랑을 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총통은 승계 전쟁이 이토록 쉽게 끝나는 걸 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직 피에 굶주렸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피 맛에 중독됐거나.
신해범은 경례를 한 채 총통을 바라보았다. 피를 원한다면 피를 보여 주겠다. 다만 총통은 왕좌를 탐내는 자식들의 몸에서 솟구치는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기우희는 권일혁의 격투 게임 아바타가 아니었다.
바로 그때 장승희가 몸을 돌렸다.
신해범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장승희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게 거짓이었다.
답사를 마친 총통은 백마에, 장승희는 가마에 탔다. 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본관을 향해 갔다. 퍼레이드를 앞두고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원세영이 공들여 선택한 꽃길 장식은 아름다웠지만, 그 길의 주인공들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무대에는 국립 무용단이 올랐다. 화사한 전통복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줄지어 등장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권주혁은 공연에 관심이 없었다.
“어쩌시렵니까?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데, 자택으로 모셔다드릴까요?”
신해범이 너스레를 떨었다. 권주혁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더 이상 기우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싫든 좋든 임찬영뿐이었다.
임찬영은 기우희의 손길에 등을 떠밀려 나왔다. 그는 있는 힘껏 권주혁을 부축했지만, 아까보다 더 심하게 비틀거리는 통에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묵직하고 긴 예복도 거동을 불편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임찬영 외에 다른 손이 필요했으나, 근처의 위병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로 정신이 없었다.
기우희가 성재경에게 명령했다.
“거들어.”
“예. 소령님.”
성재경은 비로소 ‘경호 1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기우희는 팔짱을 낀 채, 임찬영과 나란히 권주혁을 부축하고 걸어가는 성재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놈은 예나 지금이나 나를 똑같이 대한다.
옆에서 신해범이 말했다.
“우리 일이 없어졌군.”
경호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 권주혁의 컨디션도 컨디션이지만, 그는 자기가 주목받는 상황을 피하고자 도망쳤을 확률이 높았다. 장승희나 권세혁으로부터. 그리고 유미현과 기우희의 관계를 알고 있었느냐고, 몰랐다면 왜인지, 알게 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앞으로 어쩔 계획이냐고 질문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지금쯤 머리가 터져 나갈 것이다. 권주혁이 장승희에게, 권세혁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상당한 군벌을 소유한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권주혁은 최석준 일로 관료들의 신임을 잃었고, 풍기 교육대는 유미현의 지분 잠식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유미현이 풍기대 간부인 기우희를 전면에 내세웠으니, 사실상 권주혁은 군대를 빼앗긴 상황이었다.
“임찬영이 살고 싶다더군요.”
“거둬 줄 셈인가?”
“부대장님은 비싼 차일수록 꼼꼼히 봐야 한다고 하셨죠. 옵션 확인하고, 시승도 해 보고.”
“그래야지.”
“한번 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신해범은 대답 없이 웃었다. 기우희는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풍기대로 가실 겁니까?”
“그러려고.”
“저흰 아무래도 폭발이랑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두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같은 곳을 보았다. 저 멀리 우뚝 솟은 힐튼 호텔, 저곳에 그가 있었다. 풍기 교육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폭탄 테러범.
류진은 스코프에서 눈을 뗐다. 한쪽 뺨이 벌게졌다. 개머리판에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탓이다.
최유신이 생수를 내밀었다.
“여기 물 좀 마셔, 류진아.”
“괜찮아요….”
“마셔. 너 지금 많이 긴장했어.”
제식 시범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맥이 빠지냐면, 절대 아니었다. 류진은 사정거리 내 어딘가에 숨었을 스나이퍼만 찾은 게 아니었다. 신해범과 기우희 주변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특히 신해범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가 그쪽으로 발길만 돌려도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걸 참느라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켜야 했다.
“그렇게 불안하냐?”
“조금요.”
류진은 물을 한 모금만 마셨다. 수분을 섭취하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니까. 격발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맺혔다. 더웠지만 장갑은 벗지 않았다.
“너도 참….”
“제가 괜한 걱정 하는 거 알아요.”
류진의 어깨가 처졌다.
“아니, 내가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네 말을 못 믿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네가 쉬지도 못하고 힘든 게 보여서.”
“저 그냥 폼 잡고 싶어서 총 달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류진은 웃었지만, 목소리에 배어나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류진아.”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심각한지 모르겠어요.”
류진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유신은 그가 둥근 스코프 너머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
“저격수는 표적이 방심했을 때를 노려요. 여긴 안전하겠지, 지금은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 방아쇠를 당긴대요.”
여기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 진치우도 12층의 자기 사무실에서 총에 맞았다.
“그래… 그렇지. 세상에 백 퍼센트 안전한 곳은 없지.”
최유신은 스코프 너머를 볼 순 없었다. 그래도 류진이 권일혁 총통을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짐작했다. 총통은 류진에게서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누나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지금, 류진에게는 신해범이 있었다.
신해범도 그 두려움을 이해하기에 총을 내줬을 것이다. 이걸 가지고 있음으로써 떨어진 시간을 견뎌 낸다면.
과거에 정류진은 누나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다. 지금은 총을 잡은 저격수였다. 실제로 격발을 하든, 못 하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부여받은 역할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최유신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류진 몰래 총알을 전부 빼놓으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 류진이 방에 돌아오자마자 총 앞에 가 앉을 줄 몰랐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기회를 노리려고 한 자신이 안일했다.
“류진아, 나 잠깐 화장실.”
“네.”
류진은 대답하면서도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 신해범이 확인하지 못할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최유신은 샤워기를 틀어 놓고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 무슨 일이야, 최 대위.
“총알 못 뺄 거 같다.”
- …….
“애가 창가에서 떨어지질 않네.”
신해범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권주혁이 총통의 답사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귀가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예복까지 차려입고 나와 퍼레이드 행렬에도 나설 예정이었던 권주혁은 유미현의 융단폭격에 완전히 매몰되었다.
“그래서 넌. 지금 어디서 뭐 해?”
- 난 풍기대로 복귀할 거고, 소령은 경호 2팀에 합류할 예정이다. 권주혁 쪽으로는 성재경이 갔어.
예정보다 이른 복귀 소식이었다. 최유신은 속으로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복귀하는 길에 잠깐 들를 수 없겠냐?”
- 왜?
“나 솔직히 불안하다.”
- 무슨 일 있어?
“아직 그런 건 아니고… 애가 많이 불안해해. 아까부터 물도 안 마시고 총만 붙잡고 있는데, 진짜로 무슨 일 터질까 봐 걱정된다.”
- 그래서 같이 있으라고 한 거잖아. 그런 애 케어하라고.
“잠깐 얼굴만 보고 가. 잠깐만 류진이 신경 끌어 주면 내가 총알 빼놓을 수 있다.”
- …….
“가깝잖아.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고.”
최유신은 애원하다시피 했다. 정말 잠깐이면 돼. 나도 상황을 아는데 너를 오래 붙잡고 있겠냐.
신해범은 무릎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전에 세워 둔 계획을 바꾸는 것도, 계획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도 취향이 아닌데.
신해범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퍼레이드 시작하고 총통이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면, 걔 탄창에 총알이 있든 없든 무용지물이야.”
최유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았다. 류진은 윤금강이 데려가고 싶어 할 정도로 심한 PTSD를 겪었다. 몽유병은 이미 신해범도 인정한 바였다. 부정할 수 없는 환자가 총을 잡았으니 불안한 게 당연했다.
총알을 내가 뺐어야 했나…….
아니다. 아침에 호텔을 나서기 전, 정류진은 MK15의 상태를 확인했다. 탄환이 없다면 바로 눈치를 챘을 것이다.
신해범은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나랑 통화할 시간에 병아리 모이나 주는 게 어때?”
- 물도 안 마시는 애가 딴 거라고 입에 대겠냐.
“좀 설득해 봐. 어린애 하나 못 꼬드겨서 어떻게….”
- 걔가 이런 말을 하더라. 저격수는 표적이 방심했을 때를 노린다고.
최유신의 목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정류진이 학습한 사실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진치우가 깨어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오늘 아침에도 씩씩하게 굴었고, 시범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쳐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정류진은 의연한 척했을 뿐이다.
차가운 총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지독한 불안과 싸우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가슴이 빠개질 것 같았다.
“잠깐 들를게.”
- 고맙다.
신해범은 지프 핸들을 돌려 본관을 벗어났다. 지휘마를 가져가는 건 기우희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출입을 통제하던 위병은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 방금 빠져나갔으니 얼른 뒤따라가라는 말로 신해범을 웃게 했다.
“누나.”
기우희는 몸을 돌렸다. 가장자리에 황금 테가 둘린 거울 속에 권세혁이 있었다. 다크브라운색 캐시미어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었다.
“여자 화장실입니다. 왕자님.”
기우희는 비치된 티슈를 뽑아 젖은 얼굴을 훔쳤다. 모든 게 반짝반짝한 신룡관은 티슈에서도 꽃향기가 났다.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서. 우리 둘이.”
“우리 둘이라.”
권세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팡이 반대쪽에 혹을 달았다. 권무혁.
기우희는 형의 옷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꼬마를 바라보았다. 죽은 동생들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다. 기우희의 기억 속 동생들은 언제나 꼬질꼬질했다. 버짐이 핀 뺨,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
“안녕하십니까, 작은 왕자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권무혁은 배다른 누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시선을 피해 버렸다.
기우희는 악수를 위해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권세혁을 지나쳐 화장실을 나가려 했다.
“사람이 되게 쿨한 줄 알았는데.”
“…….”
“그게 다 연기였다니 놀랍네요. 정말 놀라워. 신해범도 그렇고, 풍기대 사람들은 다 그런가? 따로 훈련받아요? 다들 그냥, 하나같이 구밀복검의 달인들이야.”
“총통 자리에 미련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없어요, 미련. 그래서 축하해 줬잖아.”
기우희는 무대 위에서 보았다. 권세혁이 손뼉 치는 모습을.
“나, 누나 방해할 생각 없어요. 오히려 반대야. 지난번에 차에서 대화한 거 기억해요? 난 숙부가 무혁이 건들지 못하게 할 수 있으면….”
“지금 제게 힘을 보태 주겠단 말입니까?”
권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우희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유미현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았다. 무대에 잠깐 같이 올라갔을 뿐인데, 임찬영에 이어 권세혁까지 꼬리 흔드는 걸 보니.
기우희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웃었다. 생애 처음 맛본 뒷배경의 힘이 달콤했다. 권세혁은 이 맛을 모를 것이다.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아마 숙부님은 입양 계획을 철회할 겁니다. 그래야 왕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력을 재정비할 테니까요.”
“그러다가 또 자기 욕심을 드러내겠지.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이미 숙부님께서 마음이 떠난 모양입니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문제의 동영상을 말하는 거였다. 그걸 생각하면 기우희도 입 안이 텁텁해졌다. 권세혁이 왜 정류진에 권무혁을 이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숙부와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별안간 이복동생들이 예뻐 뵈는 건 아니었다. 임찬영은 신해범의 명예 회복에 쓰임새가 있어서 거뒀을 뿐, 기우희는 자신에게 주렁주렁 달라붙는 모든 사람을 천거할 생각이 없었다.
권씨 형제는 독재 정권의 수혜자였다. 그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기우희는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권세혁이 동생의 앞을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왕자님, 중요한 걸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뭐를?”
“진치우 중령 말입니다.”
권세혁은 여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가 화풀이 대상으로 쏴 버린 진치우에 대해서. 기우희의 화를 돋우는 지점이 바로 거기였다.
최유신의 말이 맞았다. 류진은 총에 철썩 붙어 있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뒤에서 불러도 꼼짝하질 않았다. 신해범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크게 뜬 두 눈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풍기대 가는 거 아녔어?”
“알면서 보고 있었냐.”
“소령님은 아직 계시잖아. 퍼레이드 지나갈 때까지는….”
“그래서 보고 있겠다고? 계속?”
“알면 조용히 해. 집중력 흐트러져.”
잠시 고개를 들었던 류진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최유신이 고개를 흔들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옆에 앉았다.
“나도 좀 보자.”
“방해하지 마!”
“기 소령은 괜찮아. 유미현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제 그냥 소령이 아니라 총통 후보야. 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됐다고.”
“더 위험해진 거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권주혁이, 권세혁이, 또 권세혁 엄마, 그 총통 부인이 소령님을 가만히 두겠어?”
“그건 네가 유미현이랑 기 소령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신해범은 류진의 관자놀이를 만지려 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괜히 왔어, 신해범. 일이 일찍 끝났으면 소령님 옆에 있든가, 아니면 풍기대로 가든가. 굳이 여기 올 필요 없었어.”
“예. 이 사람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장군 각하.”
“능청 떨지 마. 나 철수 안 해.”
최유신이 정곡 찔린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감거나 샤워한 것도 아닌데… 아, 샤워기를 좀 오래 틀어 놓긴 했다.
“그래, 철수하지 마. 나도 억지로 끌어낼 생각은 없어.”
“그럼 가.”
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라고. 사람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우리 꼬꼬가 많이 긴장했네.”
신해범은 총을 잡은 류진의 손을 더듬었다.
“건드리지….”
“손이 덜덜덜 떨리는데.”
“안 떨어!”
“그럼, 내가 떠는 건가?”
류진이 총에서 손을 떼고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 집중하는 거 안 보여?”
“방해하는 거 아닌데. 용기 내라고 이러는 건데.”
“그게 무슨…!”
“조준경 봐. 정류진.”
신해범은 뭐가 보이느냐고 질문했다.
“네 표적이 나타났어?”
“아직.”
유리창에 비친 최유신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놈의 총을 빼앗아도 모자랄 판에 부추기다니.
“저기.”
“조용히 해, 최 대위. 우리 꼬꼬 집중했어.”
음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가 점점 증폭되더니, 이내 호텔 인근의 사람들이 목을 빼고 신룡관 쪽을 바라볼 만큼 커졌다. 이제 곧 시작이었다.
기우희가 나간 화장실에서, 권세혁은 한참을 가만히 섰다.
진치우의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우희가 그 이름을 말할 때까지 권세혁은 진치우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은 각성 상태였고, 사건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잊어버렸다는 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우희는 차갑게 내뱉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고.
그건 우리가 앞으로 싸우게 될 거라는 소리로 들렸다. 각자의 지지자를 등에 업고, 총통 자리를 가운데 두고.
“형아….”
권무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권세혁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두 팔로 동생을 가뿐하게 안아 올리고 싶었으나, 한 손에 든 지팡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대신 장갑을 벗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희 누나 무섭다.”
“아니야. 원래는 친절한 사람이야. 지금은 형이 풍기대에서 했던 일 때문에 그래.”
권무혁은 형의 손을 꼭 잡았다.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화장실을 나왔다. 다행히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형제가 나란히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변명은 둘째 치고 가문의 망신이었다.
형제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넓은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그 아저씨 안 죽었다며.”
“응.”
“근데도 형한테 화내?”
권세혁이 우뚝 멈췄다.
“내가 잘못한 거 맞아. 무혁아.”
“하지만 형아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일부러 그랬어.”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권무혁은 우두커니 선 형을 올려다보았다.
“어?”
짧은 머리에 군인처럼 목까지 셔츠 단추를 채운 모습이 새삼스레 낯설었다.
“일부러 그런 거야. 실수가 아니었어.”
“뉴스에선 사고라고 했잖아.”
“사고 아니야.”
권세혁이 고개를 저었다. 참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은 일부러 그랬어. 왜냐면 어떤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이상하지. 상처 주려던 사람을 통해서 중요한 걸 알았어.”
“중요한 거?”
“너 말이야.”
아이의 눈이 커졌다. 권세혁은 동생의 손을 고쳐 잡았다. 막 한 걸음 내디디려는데 복도 맞은편에서 위병 한 사람이 빠르게 걸어왔다. 경례를 올린 그는 총통 부인께서 왕자님을 급히 찾으신다는 소식을 전했다.
장승희는 빨간 벨벳 소파에 반쯤 누워, 퉁퉁 부은 발을 족욕기에 담그고 있었다. 권세혁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이 자리에 없었다.
“어디 있었니. 찾았는데.”
“화장실.”
“둘이 갔니?”
“무혁이 도움이 필요해서.”
권세혁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쳤다. 장승희가 전통 의상 차림의 여자들에게 손짓했다.
“무혁이도 누나들이랑 나가 있어.”
“아니, 얜 나랑 있을 거야.”
권세혁은 동생의 어깨를 안았다. 장승희는 반항하는 장남을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이내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라. 그럼.”
“왜 찾았는데?”
“숙부님이랑 화해해.”
“싫어.”
“권세혁.”
“싫다고. 엄만 그 영상 보고 아무것도 느낀 게 없어? 숙부님이 한 짓이, 그게, 엄마, 나는 진짜로….”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니까. 게다가 바로 옆에 권무혁이 있었다. 동생이 무서워하지 않게 하려면 자기가 당당해야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목이 멨다.
장승희는 풍성한 옷소매를 걷었다. 팔에 매단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권세혁은 동생의 앞을 막아섰다. 눈앞에서 엄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너는 안 그럴 줄 아니.”
“그러니까 총통 안 한다고.”
“똑같은 짓이라도 힘 있는 사람이 하면!”
장승희가 소리쳤다.
“그건 더러운 짓이 아니야.”
“뭐라고?”
“이유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엄마, 지금… 그 말….”
“네 아버지도, 숙부도, 나도 알아서 자기 몫 챙기면서 살았어. 너도 그렇게 살면 돼.”
“엄마.”
권세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그게 아들한테 할 말이야?”
“우리 인생을 부정하는 건 지금 너잖니.”
우리 인생.
네 글자가 가슴을 후벼 팠다.
“들킬까 봐 무섭니? 욕먹을까 봐 무서워?”
권세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려서.
“어떻게 좋은 소리만 들으면서 살겠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걸. 그래도 세혁아, 권력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아. 그게 너를 지켜 줘.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합당한 이유가 된다고.”
“…….”
“이해가 안 되니? 괜찮아, 지금은. 지금은 몰라도 일단 총통이 되고 나서 천천히 알아 가면 돼. 그런데 중요한 게 뭔지 아니? 네가 총통이 되면, 정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라도 내려올 수 있지만, 기우희 걔가 그 자리 올라가면 우리 다 죽는다.”
죽으면 다 끝이야. 장승희의 일갈은 날카로웠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돌이킬 방법이 없어.”
“엄마가 숙부 싸고도는 이유 알아. 신해범 때문이잖아.”
권무혁이 움찔했다. 권세혁은 동생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솔직하게 말해 봐. 지금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야? 내가 아니라 엄마잖아. 아버지 돌아오셨지, 우희 누나가 총통 한대지, 외조부님은 오지도 않았고. 지금 궁지에 몰린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한테 무섭냐고 물어보는 거야, 지금?”
“권세혁, 반항하지 말고 엄마 말 들어.”
이전에는 느낀 적 없었던 감정이 솟구쳤다. 가슴이 어찌나 벅찬지 심장이 목구멍에 올라온 것 같았다.
“숙부는 엄마의 방패이기도 해. 왜냐면, 숙부에 비하면 엄마가 한 짓은 그렇게 나쁘지도 않거든. 막말로 아버지도 그렇잖아? 나랑 무혁이 말고 수두룩하잖아? 그거 참고 산 세월이 얼만데, 고작 외도 한 번을 이해 못 해 주시겠어?”
장승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권세혁은 모친이 한 말을 되새김질했다. 내가 자기들 인생을 부정하고 있다고.
“…틀려먹은 인생을 나쁘다고 말하는 게 잘못인가?”
“권세혁!”
“내는 그렇게 살기 싫다!”
내뱉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허벅지가 아프거나 말거나, 권세혁은 몸을 굽혀 한쪽 팔로 동생을 안아 올렸다. 가느다란 두 팔이 목에 감겼다.
“이래 살란다.”
권세혁은 몸을 돌렸다.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걸었다. 분노한 모친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묻히게.
커다란 흑마를 탄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좌우로 칠 수 있는 북을 메고 있었는데, 스피커를 따로 설치한 모양인지, 악기 소리가 호텔까지 들렸다.
흑마는 천천히 행진을 시작했다. 뿔 나팔을 든 의장병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길게 악기를 불었다.
신룡관의 거대한 정문이 열렸다. 퍼레이드의 시작이었다.
“와.”
창문에 손을 얹은 최유신이 감탄했다. 류진은 그러지 못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마칭 밴드도,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제식 시범을 보이는 의장대도, 신기하리만치 아무 감흥이 없었다.
류진은 차가운 눈으로 스코프를 응시했다. 이른 아침부터 추운 날씨에 떨며 기다린 사람들이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총통 부부가 탑승한 퍼레이드 카가 나타났을 때도 움찔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탄 헌병대가 의전 차량을 호위했다. 천천히 나아가는 차를 뒤따르는 건 그야말로 집채만 한 얼음 조각이었다.
최유신이 혀를 찼다.
“저거 높이가 십칠 미터래.”
매끈한 뿔이 아름다운 두 마리 용이었다. 서로의 몸을 얽으면서 하늘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녹는 시간을 늦추고자 표면에 특수 처리를 한 얼음은 다이아몬드처럼 번쩍거렸다. 햇살을 받지 않아도.
“매년 커지는 거 같아.”
“여름엔 저런 거 못 하니까?”
최유신과 신해범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때 류진이 끼어들었다.
“소령님이 왜 저기 계셔?”
“뭐?”
류진은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수석님 뒤에. 저게 잠수함이야?”
신해범은 제복 안주머니를 뒤져 보안경을 꺼내 썼다.
“맞아. 어리연함.”
예상보다 큰 잠수함이었다. 멀리서 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매함인 수련이나 창포보다 폭도 넓고 길이도 길었다. 백룡급 이상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왕복 팔 차선 도로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신해범은 혀를 찼다. 저만한 덩치는 시가지로 못 나간다. 아마도 폭이 좁아지는 길목에서 멈춰 설 것이다.
얼음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육교와 고가 도로가 복잡하게 얽힌 도시 한복판으로 끌고 나가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단 하루, 고작 몇 시간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 건 역시 보여 주는 데 목숨 거는 왕족들이기 때문이리라.
최유신은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저거 핵잠이야?”
“아냐. 디젤이야.”
괜히 잠수함 세 대가 자매인 게 아니었다. 디젤 잠수함은 실전에서 세 대가 필요했다. 한 대가 전방에서 활약할 때 다른 한 대는 보급 및 대기, 마지막 한 대는 보수 작업을 받으면서 전방에서 싸우는 언니가 다쳤을 때 즉시 교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반드시 세 대여야 하는 건 아니었으나, 최소한 세 대는 있어야 해상 전투에서 승리를 노려볼 만했다. 그래서 권세혁은 저 어리연함을 증표로 여긴 거였다. 전투에서 이기려면 시모와 며느리가 힘을 합쳐야 했으므로.
“근데 왜 유미현 수석이 저기 있느냐고.”
“권주혁 대신이야.”
컨디션 난조로 귀가한 권주혁의 자리를 유미현 수석 전략가가 메웠다. 어쨌든 이 나라에서 권주혁 다음가는 실세니까. 그래서 유미현을 호위하는 경호 2팀에 합류한 기우희가 저기 있는 것이고.
신해범은 장승희에게 애도를 표했다.
“오늘의 주인공이 우습게 됐군.”
자세한 내막이 어쨌든, 어리연함은 풍기 교육대에 기부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권주혁이 이끄는 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권이 자기 의무를 팽개치고 도망간 지금 유미현은 유일무이한 대체 인력이었다. 한편으로 장승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처참한 상황이었다. 장가에서 만든 잠수함을 원수 같은 계집이 호위하게 됐으니.
헬기가 상공에서 꽃가루를 뿌려 댔다. 웅장하다 못해 장렬한 음악, 사람들의 환호.
류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정신이 아득했다. 어리연의 검은 몸뚱이를 덮은 국기와 가랜드가 바람에 펄럭였다.
역시….
나는 저런 거 못 받는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무겁다.
신해범은 안심했다. 곧 총통 일행이 MK15의 사정거리를 벗어난다. 그러면 정류진도 더는 저격에 집착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이제 되었다’는 의미로 최유신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총통의 퍼레이드 카가 사정거리를 벗어나기 전, 전례 없는 일이 발생했다.
장승희가 차 뒷좌석 가장자리에 섰던 의장병을 떠밀었다. 오픈카에서 일어선 상태였던 의장병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차량 밖으로 떨어졌다.
장승희는 의장병에게서 빼앗은 윈체스터를 겨눴다. 총구는 높이 십칠 미터인 얼음 조각의 틈새를 조준했다. 붉은 코트를 차려입은 의장대를 넘어, 전통 의상을 입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왕실 무용단을 넘어, 말에 올라타 잠수함 앞에서 행진하는 기우희를 향해서 불을 뿜기 직전이었다.
류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가락과 방아쇠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두 발의 총소리가 세상을 쥐어 터뜨렸다.
“떨어져!”
신해범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위치가 노출되었다. 그는 류진을 총 앞에서 밀쳐 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류진은 충격으로 얼어붙어, 최유신이 침대가 있는 곳까지 끌어낼 때까지 덜덜 떨고만 있었다.
“신해범, 나….”
꽉 쥔 주먹이 경련했다. 신해범은 커튼을 치고 총과 바이포드를 분리했다. 탄환을 전부 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거 가져가.”
“어.”
최유신은 침착했다. 방 안의 장비를 전부 챙겨 막 문을 나서려던 그가 뒤돌아보았다.
“차 있어?”
“지휘마 가져왔어.”
“그래. 이따 조인해.”
소음기는 총성을 완전히 흡수하는 신의 도구가 아니었다. 위치가 노출되기까지의 시간을 벌도록 소리를 ‘분해’해 주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최유신을 먼저 보낸 이유는 무기를 없애는 일이 최우선이기 때문이었다. 소리로 위치를 특정한 헌병대가 호텔로 들이닥치기 전에.
“소령님 총 맞았어?”
신해범은 창밖을 내다봤다. 아수라장의 지옥도였다. 여기서 특정 누군가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우리 가야 해.”
“알아. 뛸 수 있어.”
류진은 신해범의 손을 꽉 잡았다.
“그냥 손만 잡아 줘.”
안아 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기우희도, 너의 선택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감싸고서 키스하고 싶었다.
신해범은 그 모든 감정을 담아, 류진의 손을 꽉 잡았다.
충용절 퍼레이드는 중단되었다. 신룡관 본관에서 이 킬로미터도 채 벗어나기 전이었다.
권일혁 총통이 쓰러진 아내를 지혈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총통 부부의 모습은 송출이 끊겼다. 현장의 처참함 때문인지, 발 빠른 언론 통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뉴스보다는 라디오 채널에서 전해지는 소식이 많았다.
장승희는 출발 전부터 심한 두통과 손발 경련을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증상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를 한 뒤 퍼레이드 차량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할 상황에서 자신을 무리하게 혹사한 장승희는 결국 일시적인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켰다.
평소 장승희는 왕족으로서 지속적인 암살 위협에 시달려 왔다. 그런 그에게 신룡관을 벗어나는 퍼레이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기쁜 일이다. 국모로서 응당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사태로 하여금 충용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 보아야 하겠다.
류진은 멍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어떤 채널이든 마찬가지였다. 다들 똑같은 얘기만 했다. 언론은 장승희를 변호하고 유미현을 공격했다. 유미현이 공격받는 이유는 그가 적림부의 총책임자로서 이번 행사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정말 그 이유였다. 총통 부인의 컨디션을 생각하지 못하고 스케줄을 짠 죄.
신해범은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라고 했다. 류진도 동의했다. 그럼에도 손을 뻗어 라디오를 끄지 못하는 건, 장승희의 어깨에서 솟구치던 붉은 피와 맥없이 쓰러지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장승희가 누구를 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매스컴에서는 정신 착란에 의한 일종의 ‘묻지 마 총격’으로 몰아갔다. 최근 풍기 교육대에서 발생했던 총기 ‘사고’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었다. 그때는 권세혁 왕자가 관련되었다는 점이 연결 고리로 작용했다.
하지만 생방송을 통해 유미현의 축사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장승희가 왜 후방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기우희를 죽이려 했다.
신해범은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계획범죄는 아니었을 것이다. 뒷수습을 고려했다면 절대 못 할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퍼레이드 현장에서의 장승희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신해범이 기억하는 장승희는 그랬다. 의외로 충동적이었고, 의외로 생각이 짧았다.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억지를 쓰는 부분도 존재했다. 어쩌면 퍼레이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권일혁 총통의 행보를 돌이켜 보면 두 사람이 부부 싸움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해범은 조수석의 류진을 바라보았다.
“기 소령은 괜찮대.”
“응….”
기우희는 신해범에게 직접 촬영한 동영상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무사 안전을 알렸다. 비록 말에서 떨어질 때 어딘가에 부딪힌 충격으로 무전기가 박살 나긴 했지만, 기적적으로 사람은 멀쩡했다.
류진은 신해범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지옥 같았다. 삼십 초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현장의 처참함을 짐작해 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비극적이었다. 총성에 놀라 도망치다 깔려 죽은 사망자가 벌써 다섯이었다. 이것도 눈앞에서 사망자를 본 생존자들의 신고로 접수된 건이니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많을 터였다. 류진은 예상했다. 사망자와 실종자, 부상자 수는 실시간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라고.
난리 통에 십칠 미터짜리 얼음 조각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중심을 잃고 기울어져 4층짜리 상가 건물을 덮쳤다. 부서진 용머리가 포탄처럼 날아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었다. 그의 진술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현장에서 삼 킬로미터 떨어진 공원에서도 발견되었다.
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무 심하지 않아?”
기우희가 무사하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마냥 기뻐하지 못할 만큼 상황이 나빴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단지 퍼레이드를 보러 나왔을 뿐인데.
모든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류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심해.”
“왜 그런 것 같아?”
신해범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한 공포 때문이라고 했다.
<백사자> 소탕 이후 시위가 눈에 띄게 줄고, 이제는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총소리 듣는 게 드문 일로 여겨질 만큼 시국이 안정되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테러에 대한 트라우마와 공포가 자리했다.
게다가 오늘은 충용절이었다. 총통 부부의 실물을 일반 시민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모든 조건이 참사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영상 속 기우희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파오훼이 시절에 쓰던 수신호로 이야기했다. 나는 괜찮다. 유미현의 삐라 살포 작전은 실패다. 12층 폭발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그리고….
고맙다.
류진은 확신했다. 장승희의 어깨를 맞춘 건 자기였다. 신해범은 확실치 않다고 했지만, 방아쇠를 당긴 당사자로서 알았다. 그런 건 헷갈릴 수가 없었다.
“안전 가옥으로 가. 지난번에 가 본 데. 기억하지?”
신해범이 말했다. 그는 제복 안주머니에서 폭스바겐 키를 꺼내 류진에게 건네주었다. 차 번호와 정확한 주차 위치도 알려 줬다. 풍기 교육대 본관 근처에 있는 영광빌딩 지하 주차장이었다.
“오늘 참 스펙타클하다. 그치?”
류진은 그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낸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놓고 위로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네 탓이 아니라고 해 봤자 마음에 닿지 않을 테니까.
폭스바겐 키를 만지작거리며, 류진은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이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고, 밖에서. 밖에서 기다린다고. 당신 올 때까지.”
“어디서?”
류진은 우물쭈물했다.
“그냥… 사람들 눈에 안 띄는 데? 당신이 생각해 둔 장소가 있을 거 아냐. 내가 거기 차 대고 기다리면….”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신해범은 단호했다.
“따로 가는 게 안전해.”
“호텔에서 선생님 먼저 보낸 것처럼?”
최유신은 한발 앞서 풍기대로 복귀했다. 교통 통제 때문에 길을 돌아가긴 했지만, 먼저 출발한 만큼 두 사람보다 일찍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풍기대 내부도 어수선했다. 기우희가 총통 후보가 됐다는 소식과 총통 부인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직 헌병대 측에서 지원 요청은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최유신은 혼란을 틈타 총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지금은 의무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좋아하는 보리차로 놀란 마음을 달랠 모습이 능히 짐작되었다. 신해범은 류진을 설득했다.
“봐, 혼자 움직이니까 빠르잖아. 너도 네 한 몸 건사하는 것만 생각해. 그게 나한테 도움 되는 일이야.”
“당신은 무섭지도 않아?”
핸들을 잡은 신해범이 웃었다.
“내가 왜 무서워?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무서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데?”
“물 틀어 놓고 울었잖아.”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려?”
“…….”
“가. 서둘러야 해. 가뜩이나 교통 통제 때문에 막히는데, 검문이라도 시작하면 차 끌고 움직이기 힘들어져. 여기서 안가까지 걸어가고 싶냐?”
“당신이랑 있으면 못 할 것도 없지.”
신해범이 질색했다.
“어우, 난 싫어. 아저씬 이제 나이 들어서 무릎 나가.”
“뭐야?”
그는 류진에게 반드시 폭스바겐을 몰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줬다.
“거기에 우리 돈 있어.”
“돈?”
“녹색 가방 기억나? 방수 소재로 된 거.”
류진이 끄덕였다. 신해범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에 돈이랑, 내 신분증, 관련 서류 일체가 들어있어. 네가 책임지고 안가까지 가져가. 누구한테 돈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어?”
“그런 건 나도 알아!”
“우리 꼬꼬, 알아주는 베스트 드라이버잖아. 어떻게든 도착만 해. 오늘 피곤했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자. 한숨 푹 자고 나면….”
신해범이 웃었다.
“다 해결돼 있을 거다.”
“거긴 안전해?”
“이름부터 그렇잖아.”
“세상에 백 퍼센트 안전한 데는 없어.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은 엄승원 기자뿐인데,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지금 나한텐 총도 없는데…!”
“유미현 용병들이 가 있어.”
“어?”
“우리 꼬꼬는 할 일을 다 했어. 이제 남은 일은, 안가 도착해서 엄승원한테 밥해 달라 하고, 유미현 용병들이 경비 설 동안 잠이나 한숨 푹 자는 거야.”
신해범은 뒷좌석에 있는 류진의 가방을 집어다 안기고, 손수 조수석 문까지 열어 주었다.
“가. 얼른.”
떠밀리듯 내렸다. 류진은 가방을 끌어안고 돌아보았다. 미련 없이 닫히는 차 문 사이로 황급히 다리를 끼워 넣었다.
“왜?”
“나한테 다 맡기는 거지?”
“그래.”
“그래도 돼? 진짜 괜찮아?”
“괜찮지 않을 이유는 뭔데?”
“당신은 내가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 안 해 봤어?”
신해범이 웃었다. 억지로 끌어내는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웃겨서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뭐가 웃겨?”
“도망가고 싶으면 가.”
“뭐라고?”
“가도 돼, 정류진. 근데 한 가지만 기억해. 네가 돈이랑 여권 들고 튀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 네가 중국, 아니 독일, 아니 어디 아프리카 오지에서 원주민들이랑 휘파람 불고 있어도 난 너 찾아낸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신해준이랑은 못 보는 거야.”
“…….”
“평생 신해범이랑 살고 싶으면, 뭐, 도망가 보든가.”
이번에는 류진이 웃음을 터뜨릴 차례였다. 신해범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넌 뭐가 웃기냐?”
웃긴 게 아니었다. 좋아서 웃는 거였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서 좋아.”
만약 신해범이 자길 버리고 가도 된다고 말했으면 류진은 결코 이 지프에서 내리지 않을 터였다. 끝끝내 12층까지 함께 갈 것이다. 신해범에게 짐이 되는 한이 있어도, 그를 잃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류진은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썼다. 인파에 섞여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겁에 질린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사건 발생 직후라 오만 가설이 다 있었다. 테러다, 암살이다, 사고다, 뭔가를 덮기 위해서 짜고 하는 연극이다….
사실 확인이 안 된 결과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벌써 백 명이 죽었다더라. 건물이 수십 개 무너졌다더라. 도로 한복판에 싱크홀이 뚫렸다더라. 사실 <백사자>의 하성록이 죽지 않고 오늘을 기다리며 이를 갈았던 거였다더라. 이번에야말로 나라가 망할 것 같다.
류진은 가방을 고쳐 멨다. 사람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건물 가까이 붙어 걸었다.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부재중 통화 세 통이 쌓였고, 메시지도 들어왔다. 발신자는 신예나였다.
「괜찮아?」
「뉴스 봤어. 확인하는 대로 답장 줘」
익숙하지 않은 자판을 꾹꾹 눌러 답장을 보냈다.
「저 류진인데 괜찮아요. 신해범도. 소령님도」
영광빌딩 경비 초소는 비어 있었다. 류진은 유유히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고만고만한 승용차들 사이의 새카만 폭스바겐은 눈에 띄었다. 류진은 운전석에 올라타 가방을 조수석에 던졌다.
한 손에 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다행이다」
신예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그도 뉴스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라디오를 듣는 중일까. 류진은 부디 신예나가 많이 놀라지 않았기를 바랐다.
「지금 안전 가옥 가요」
「그래. 조심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메시지 하나가 더 들어왔다.
「사랑해, 류진아」
메시지를 들여다보는데 콧등이 시큰했다. 답장을 보내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류진은 결국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일 초라도 빨리 안전 가옥에 도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거야말로 신예나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또 안심시킬 수 있는 일일 테니.
그리고 신해범에게도.
신해범이 알려 준 주소로 내비게이션을 찍으려는데, 절반도 채 입력하기 전에 자동으로 위치가 떴다. 경로를 선택한 류진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음성에 웃어 버렸다.
꼬꼬네 집으로 경로 안내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