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진치우 (31/39)

황효제의 시신과 함께 발견된 설계도는 권일혁 총통이 고안했던 ‘달리는 살인 가스실’과 ‘시체 처리장’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필리핀에서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던 총통이 쇼크를 일으키게 했다.

심장 이식 수술.

미국으로 심장 수술을 받으러 갔다던 총통의 비밀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귀국했다. 회복은 빠르고 순조로웠다. 하지만 총통의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기우희가 총통의 친위대로부터 기밀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권일혁의 몸속에 든 것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인공 심장이 아니었다. 총통이 미국에서 받은 수술은 심장 혈관 수술이었고, 그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예후가 좋지 않았다. 수술이 끝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총통은 길어 봤자 육 개월, 짧으면 이 개월 안에도 돌연사할 수 있다는 현지 의사의 진단에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권일혁 총통은 필리핀으로 갔다. 그곳에서 심장을 샀다.

“지랄이 심했다네. 스물여섯 이상으로는 절대 안 받는다고.”

“염병하네.”

“그치?”

진치우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신예나는 그가 윤태금이 주고 간 꽃다발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십 송이 붉은 장미.

“이거? 윤 군 왔었어.”

“알아. 오는 길에 차 봤어.”

진치우는 윤태금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갓길에 차를 댄 채 기다렸다고 했다.

“왜 안 들어오고?”

“그냥.”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신예나가 꽃다발을 들고 일어섰다. 하필이면 붉은 장미였다. 장미 꽃다발과 케이크. 반지 하나만 있으면 딱 청혼 3종 세트였다.

“주방에 두고 올게. 물에 안 담가 두면 시드니까.”

“예나야.”

“거기 케이크 먹어. 독일에서 온 거야.”

좀 특별한 셰프가 만들었어. 이따가 자세히 설명해 줄게. 그렇게 말하고 계단으로 향하는 신예나의 뒤에서 진치우가 말했다.

“국가 원수가 타국에서 인신매매를 저질렀어. 공개 처형감이야.”

진치우가 가진 도청 방지 장치는 라이터처럼 생겼다. 그래서 담뱃불을 붙이려는 실수를 많이 한다고 했다.

라이터를 빼닮은 기계를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진치우는 재차 말했다.

“증인도 확보했다. 이나활.”

“장승희 쏜 애?”

신예나가 돌아섰다. 두 눈이 동그랬다.

“타갈로그어라고, 필리핀 고유 말인데 걔가 할 줄 알거든. 브로커들이 말하는 거 다 알아들었다나 봐.”

“걔가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몰랐네.”

“아버지가 필리핀 사람. 엄마는 우리나라 간호사였는데 외화벌이. 약간 윤태금 집안이랑 비슷한 케이슨가 봐. 근데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실질적으로는 미국 사람이야.”

“혼혈이었어?”

이나활의 외모를 떠올린 신예나는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가지런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다. 미남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인상이 흐릿했다. 동남아시아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쿼터도 아닌 하프란다. 유전자 조합이 그렇게 될 수 있나?

신예나는 꽃다발을 안은 채 돌아와 앉아 진치우의 말을 경청했다.

“친위대긴 한데, 출국할 때 데리고 나간 놈이 아니라 미국에 체류할 때 만난 놈이야.”

“엄청 예뻐했나 보네. 본국까지 데리고 들어왔을 정도면.”

“본인은 필리핀 브로커들이 하는 얘기 알아들었을 뿐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이상인 거 같아.”

“그 이상?”

“그놈이 수술 브로커인 거지. 자의든 타의든.”

“…….”

“총통만 철석같이 믿고 왔는데, 이십 대 건강한 심장으로 갈아 치워서 천년만년 더 해 먹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똥줄 탈 만도 하지.”

“믿을 수 있는 얘기야, 그거?”

“그건 기우희 결정에 달렸지.”

권세혁에게 총격당했던 진치우는 몸을 회복한 뒤 자진해서 군복을 벗었다.

사람들은 그가 돌아갈 곳이 없어져서 그랬다고들 했다. 하지만 신예나가 아는바, 진치우에게는 알게 모르게 러브 콜이 많았다. 유미현이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고 기우희가 장군 계급을 약속했다. 진치우는 유미현 군벌에 입적하는 일을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권주혁의 죽음으로 몸을 사리게 된 귀족들이 각자의 사병 키우기에 열을 올리면서, 다들 해체된 풍기 교육대의 인원을 끌어가려고 야단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신(新) 공주의 난’ 초기, 권주혁의 사병 집단이나 다름없는 풍기대 놈들을 깡그리 총살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던 게 이 나라 왕족, 귀족들이었다. 태세 전환이 곽재헌 때와 똑같았다.

하긴. 그때도 저런 식으로 살아남았을 테니 행동이 같은 것도 당연했다.

사태는 유미현이 풍기 교육대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풍기대는 자진 상장 폐지 수순을 밟았다. 최대 주주 유미현과 그 측근들은 폭탄 배당으로 투자 원금의 145%를 회수했다.

그러나 진치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당사자의 입으로 들은 적은 없지만, 신예나는 그게 진치우가 옷을 벗은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계급을 막론하고 누가 누구 밑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면 용병 시장 시세가 출렁였다. 가짜 풍기 교육대 출신이 판을 쳤고 경매가 치열해졌다. 풍기 교육대 소속이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든 당사자를 무대에 세워 놓고 월 급여를 점차 높여 가는 식이었는데, 그 광경을 실제로 본 원세영은 노예제가 부활한 현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래 봤자 ‘진짜배기’는 경매 시장에 나오지도 않는데.

자존심을 지킨 자들은 기우희의 명령에 따라 중앙 헌병대에 귀속되었다. 돈을 좇은 자들은 소개의 소개로 알아서 살길을 도모했다. 지금 경매 시장에 도는 ‘전직 풍기대’ 출신은 정식 대원이 아니거나, 대원이었어도 말단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진치우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군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우희 ‘장군’의 비공식 오른팔이었다.

사생아 공주의 군벌에서 진치우는 ‘소장님’이라고 불렸다. 군 계급이 아니라 ‘해결소장’의 준말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과거 풍기대가 안전 가옥으로 쓰던 주택이었다. 엄승원이 머물렀던 바로 그 집.

진치우는 기우희를 한 번도 공주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과거 계급을 넘어섰을 때도, 신해범과 같은 별 하나가 된 지금까지도.

신예나는 진치우의 그런 태도가 불안했다.

진치우의 장점은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하다는 데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신해범과 큰 트러블 없이 군 생활을 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친구일 때는 친구로, 부관일 때는 부관으로. 말은 간단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신예나는 진치우가 기우희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진치우는 단 한 번도 기우희를 공주나 장군이라고 일컫지 않았다. 기우희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였다. 만약 진치우가 기우희를 신해범만큼 신뢰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신예나는 불안했다.

한 번쯤은 불러 줄 법도 한데. 장난으로라도.

신예나는 붉은 장미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장미는 향이 강한 꽃이다. 짙은 꽃향기가 공기를 타고 부유했다.

“우희가 뭘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오빠는 따를 거야?”

“이나활?”

진치우는 딱 잘라 말했다.

“난 그놈 별로야. 애새끼가 영악해.”

“성격이?”

“어른 앞에서 대가리 빡세게 굴리는 게 보여. 어떻게 해야 윗사람한테 예쁨받는지도 알고. 내가 좆나 꼬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난 그렇게 수 쓰는 애새끼 보면 내장이 뒤틀려.”

“그런가?”

신예나가 담배를 꺼내 물자 진치우가 얼른 불을 붙여 주었다.

“궁금해지네. 어떤 앤지.”

“차라리 정류진이 나아. 걘 싸가지를 밥에 말아 처먹었긴 해도 솔직했거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그게 확실했어.”

“지금 그 말, 윤 군 편에 전해도 돼? 류진이가 들으면 좋아할 것 같아.”

“절대 안 돼.”

“부끄러워서 그래?”

“야.”

흐흐흥, 하는 소리에 진치우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벌겠다.

“하여튼, 정류진 보면 열불이 터지긴 했어도 복잡하게 머리 쓸 필요는 없었어. 근데 이놈은 아니야. 고분고분하긴 한데 좀 달라.”

잠시 생각하던 신예나가 말했다.

“…해범 오빠랑 비슷한 거 아니야? 영악하다는 거 말이야. 오빠 어렸을 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잖아.”

“아냐.”

진치우는 딱 잘라 부정했다.

“범 새끼는 지능적이었어. 일단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고, 자기가 원하는 건 나중에 말했다고. 솔직히 그게 더 경우가 나빠. 이미 뭘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니까.”

“함정에 빠진 느낌이지, 그런 거.”

“맞아. 근데 그래도 그 새끼 방식이 기분 나쁘지 않았던 건 걔가 질척대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거 싫으면 저건 어때? 저거 싫으면 이건? 이런 식으로 사람 간 보기는 안 했어.”

“사람 간을 본다라….”

“거절당하면 상대방이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들면서 같은 조건을 다시 제시하는 놈이랑 뭐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하나 걸리면 됐다, 하는 놈이랑은 느껴지는 무게감이 달라. 후자는 신뢰가 안 간다고.”

“오빠랑 같이 일하겠다고 했구나?”

진치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예나의 촉은 날카로웠다.

“우희가 자기 친위대로 안 받아 줬어. 유 수석도 그렇고. 그래서 오빠를 고른 거야. 공주님 최측근이지만 정식 군인이 아니니까. 상대적으로 쉬워 보였겠지.”

“나를 얼마나 좆밥으로 봤으면.”

진치우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기우희도 말은 안 하지만, 그 부분에서 빈정 상했을걸.”

“우희가 오빠를 좀 많이 아끼잖아.”

“아끼기는…!”

“그래서 선택권도 준 거지. 오빠를 못 믿었으면 애초에 자기 선에서 잘랐겠지. 우희는 오빠를 하찮게 생각 안 해. 적어도 유 수석이랑 동급이야. 그러니 같은 기회를 준 거야.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

신예나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덧붙였다.

“공평하게.”

진치우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이나활, 나한테는 안 왔잖아. 내가 오빠나 유 수석급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야, 그런 건.”

“맞아. 냉정하게 생각해.”

“…….”

“오빠가 거절하면 나한테 올지도 모르겠지만.”

신예나의 표정과 목소리는 담담했다. 진치우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혼자서 결정하기 어렵구나.”

“난 혼자 일하는 게 편해.”

“오빠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의외다.”

“이젠 나도 독립해야지.”

아직 못 벗어났다는 이야기였다. 신해범으로부터. 그의 곁에서 알게 모르게 보호받았던 시절로부터 진치우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일 년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새로운 인생에 적응하기에는.

“오빠. 그 사람 죽었어.”

“…….”

“이젠 안 돌아와. 돌아와서도 안 되고.”

“그래도 계속 개입하잖아.”

진치우는 윤태금이 <달가해>에 들어왔다 나가는 모습을 봤다. 신예나는 둘러대지 않기로 했다. 단순히 개들만 데리러 왔다면 윤태금이 이곳에 머무른 시간은 훨씬 짧았을 것이다.

“무슨 얘기였어?”

“오빠는 사람 간 보지 않아서 좋아.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하잖아. 맨입으로 정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진치우는 상대방의 패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카드를 먼저 뒤집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이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해범의 방식이다.

“나, 함풍 2도에 가. 정성현 만나러.”

***

김효성의 기일은 4월 11일이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던 겨울이 가고 마른 나뭇가지에 초록 잎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제1 중앙 병원의 개인 병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때 김효성의 곁에는 신예나가 직접 꽃꽂이를 한 프리지아 화병이 있었다.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선물이었다. 신예나는 이후에도 여러 번 꽃꽂이를 했지만, 여태 프리지아와 튤립, 개나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신해범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알고서 갔다. 그것만이 두 사람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진치우는 고인의 이름 석 자가 적힌 항아리와 살아생전 마지막까지 쓰던 물건들, 작은 액자에 담긴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이 입장이 반대가 됐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식의 생존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이 끝내 자기보다 먼저 죽은 자식의 이름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슬펐다.

아직도 꿈을 꾸었다. 권세혁에게 총을 맞았던 날의 꿈.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는 날이 여전히 있었다. 그때마다 수술 부위를 움켜쥔 채 호흡을 골랐다.

누구에게 도움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롯이 혼자서 견뎌 내야 했다.

권세혁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했지만, 지금은 저택에 갇혀 감시당하는 왕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욕이 쑥 들어가곤 했다.

장승희 총통 부인의 처형이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권세혁을 동정한다거나 동질감을 느끼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비슷한 시기에 모친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를 선뜻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권세혁에게는 어린 동생까지 딸려 있었다.

그게 본인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오빠.”

진치우는 고개를 들었다. 안치실로 들어서는 신예나가 보였다.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든 채였다. 그의 등 뒤로 자동문이 스르륵 닫혔다.

“웬 코코아?”

“꽃다발 자판기 옆에 있더라. 동전 없어서 못 뽑을 줄 알았는데, 여기 직원이 공짜라고 알려 줬어.”

신예나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신해범을 닮았다.

코코아는 진하고 달았다. 진치우는 뜨거운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셨다.

“달다.”

“응. 달아서 좋아.”

신예나의 한 손이 모피 주머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꽃은 뭐냐?”

“이거? 카네이션.”

납골당에 비치된 꽃다발 자판기에서 샀다고 했다. 한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작은 꽃다발이었다. 포장지 뒷부분에 접착제가 있어서 칸을 열지 않아도 조문할 수 있었다.

신예나는 김효성의 이름 옆에 꽃다발을 붙여 놓고 물러섰다.

“언제 소식 전할 거야?”

“글쎄….”

“영원히 숨길 수 없다는 건 알지?”

“안 되나?”

“오빠.”

고개를 숙인 진치우는 한 손을 바지에 꽂고 구두코로 바닥을 쿵쿵 찧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는 모습이 수상했다.

“뭐 좋은 얘기라고.”

“그래도 그건 도리가 아니지.”

진치우가 남은 코코아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종이컵이 와락 구겨졌다.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기껏해야 먼 데서, 숨어서 혼자 눈물 짜는 정도겠지. 아니, 그 새끼라면 눈물 한 방울 안 흘릴지도 몰라. 차라리 그게 낫나.”

횡설수설이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신예나는 진치우가 생각보다 더 신해범을 아낀다는 사실을 새삼, 새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신해범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왜 기우희한테 장군님 소리 안 하는 줄 알아?”

“왜.”

“나한테 장군은 그 새끼 하나뿐이니까. 둘은 없어.”

툭. 신예나의 어깨에 진치우의 팔이 걸쳐졌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나 기우희 쌩 안 깐다. 호칭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미 옷도 벗었겠다, 범 새끼도 없겠다, 씨발 나도 이젠 내 인생 살아 볼 거다.”

“어이구….”

“뭐. 왜.”

“소식 전해. 언젠가는 그 사람 귀에도 들어가니까. 그때 오빠가 감췄다는 사실 알면 여기 사람들한테 느끼는 배신감이 장난 아닐걸.”

“지가 무슨 자격으로?”

진치우가 투덜댔다.

“그놈은 팔자 폈지. 난 이 나이 먹고 뭣도 아닌 새끼한테 저울질당하는 처진데, 누구는 밤마다 따끈따끈한 보신탕 끓여 먹고 회춘할 거 생각하면….”

“어후, 좀!”

신예나의 팔꿈치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지금 되게 노땅 같은 거 알지?”

“그러냐?”

“어. 그것도 완전 밝히는.”

“으윽.”

망자의 앞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나란히 로비로 나갔다. 평일이라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신예나가 카네이션 꽃다발을 산 꽃다발 자판기를 지났다. 공짜 코코아를 뽑은 자판기도 지나쳤다. 로비의 직원과 목례로 인사를 나눈 뒤 출입문을 나선 두 사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치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우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납골당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진눈깨비여서 지금쯤 그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눈이네.”

신예나가 말했다. 모피 코트는 두툼하고 풍성했지만, 물에 젖는 슬립온이 문제였다. <달가해>에서 납골당까지 차로 이동했기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도 뭐…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멀지 않으니까.

눈이 쏟아지는 세상으로 한 걸음 나서려는 순간, 진치우가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서 등을 내밀었다.

“야. 업혀.”

“뭐야?”

“오랜만에 오빠가 업어 준다.”

“어우, 싫어. 비켜.”

“업히라고 할 때 업혀라. 나중에 동상 걸리지 말고.”

“됐어. 여기서 차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얼마 안 되니까 업어 주는 거지. 내 허리 조질 일 있냐?”

신예나는 연신 진치우의 어깨를 때리며 헛짓거리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했다. 하지만 진치우는 꿈쩍하지 않았다.

“나 옛날에도 너 업어 줬었어.”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었다.

“넌 어려서 기억 못 하겠지만.”

“우리 나이 차 얼마 안 나거든요?”

“그럼 까먹었나 보지.”

뭐 해, 얼른 업혀! 다리 저려! 진치우가 재촉했다. 신예나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숙였다. 진치우의 등은 넓고 따뜻했다.

“부담스러워.”

“부담은 무슨. 그냥 범 새끼라고 생각해.”

함박눈은 금세 쌓였다. 진치우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신예나는 그의 등에 뺨을 댄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나활 써.”

“내가?”

“오빠가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게 좋겠어. 무슨 꿍꿍인지 모르니까.”

“그래.”

“필리핀 혼혈이라는 것도 진짠지 알아봐. 그 얼굴로는 도저히 견적 안 나오니까.”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라는 건 알았다. 알지만, 확실히 해야 했다. 일각돌고래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아야 했다.

임찬영과 같은 경우라면 좋겠지만….

진치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신해범과 함께 일하면서 날카로운 감을 몸에 익힌 자였다. 그런 그가 약간이라도 꺼림칙해한다면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어쩌면.

이나활 또한 권일혁 총통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었다. 어머니가 자국민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외화벌이로 출국한 간호사라면 기록이 있을 거야.”

기우희의 모친이 생각났다. 총통의 아이를 가진 기윤정은 장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뒷배가 없는 처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아이들과 함께 시골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기우희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기윤정은 결국 발각되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왔다는 군인은 장가에서 보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장두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지만….

만약 이나활이 총통의 자식이라면. 이나활의 모친은 그래도 기윤정보다는 사정이 좋았던 것 같다. 출국하면 장가의 손아귀에서 한층 자유로워지니까. 해동문국 국경선 안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그날이 떠올랐다. 신해범이 죽고 기우희가 새로 태어나던 날. 그곳에 새끼 잠룡이 하나 더 있었다고 생각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부디, 일각돌고래가 뿔 잘린 용들의 무기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알았다. 내가 알아볼게.”

“각자 할 일이 생겼네.”

당분간 심심하지 않겠다.

신예나의 속삭임에 진치우의 어깨가 굳었다. 범 새끼랑 똑같아서 소름 끼친다고 말하면 싫어하겠지.

진치우의 검은 벤츠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신예나는 백미러 위를 손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많이도 쌓였다.”

“잠깐만.”

진치우가 트렁크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전면 유리를 덮은 눈을 쓸어 내는데 신예나가 뭔가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오빠, 이것 좀 봐.”

“뭔데?”

“눈사람이야. 누가 만들어서 두고 갔나 봐.”

신예나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고 귀여운 눈사람이었다. 나뭇가지로 눈과 입, 두 팔까지 만들어 달아 놓았다. 브이 자로 웃는 입 모양이 귀여웠다. 신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직원인가?”

“직원이든 누구든. 왜 남의 차에 이런 걸 두고 가냐.”

“왜, 귀엽잖아.”

이벤트 같아서 기분 좋은데. 신예나가 웃자 진치우는 아무렴 어떠랴, 하는 표정으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가자. 길이나 안 막힐랑가 모르겠다.”

광성 시내 곳곳에서 대중교통 전용 도로 개설이 한창이었다. 기우희는 기존의 버스 노선을 확대하고 버스 대수를 늘려 배차 간격을 줄임으로써 대중교통 편의성을 높였다. 명확한 규정이 없어 바가지요금이 성행했던 택시 업계도 바로잡았다. 이동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요금을 계산하고,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야간 할증을 추가할 수 없도록 했다. 기름값을 승객에게 부담시키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했다.

비록 업계의 반발이 심하고, 아직 광성에 한정된 정책이긴 했지만, 무리하여 렌트 차량을 이용하던 국민들의 숨통은 틔었다. 환경 문제 개선도 눈여겨볼 부분이었다. 기우희는 잠깐이나마 택시 기사로 일했던 성재경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운전석에 앉은 진치우가 말했다.

“여기서 거기 가까운데.”

“어디?”

“서경관.”

권주혁의 사후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건 로더 벨트 타워만이 아니었다. 과거 신영산이 전액 출자한 광성 식물관은 서경관이라는 명패를 되찾았다. 로더 벨트는 원(ONE)빌딩이 되었다. 과거 이름인 하나빌딩은 이미 동명의 건물이 많아진 탓이다.

“여기서 가까워? 몰랐네.”

“온 김에 들르자. 20분밖에 안 걸려.”

눈이 오는 날씨를 생각해도 삼십 분이면 도착할 거라고, 진치우는 자신 있게 말했다.

“지금 계절에 뭐 볼 게 있으려나.”

“왜 없어, 실낸데.”

신예나가 픽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구경하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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