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웠던 사무실에 조명이 켜지고, 원세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 씨발 깜짝이야.”
기우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조용히 등을 돌려 앉았을 뿐. 그는 손님용 소파도, 의자도 아닌 원세영의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였다.
그래도 원세영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벽으로 다가가 환풍기가 켜졌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 정도 매너는 있었다. 늦은 시간에 슬그머니 찾아와 주인 없는 사무실에서 담배까지 피우는 망나니 공주에게도.
“내년 이맘때 제사상 받을 뻔했네.”
원세영은 책상에 프라다를 던지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뭔데? 또 뭐길래 여기까지 와서 청승이야?”
“여긴 보는 눈이 없으니까.”
“없긴. 보안 시스템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는데.”
“지겨워.”
“응?”
기우희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진작에 자를 때가 지나 앞머리가 눈을 찌르고 있었다. 바리깡으로 밀어 버리겠다는 걸 ‘죄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만류한 사람은 유미현이었다.
“지겹다고. 아직도 귀 모양 가지고 물고 늘어져.”
“의심하라고 해.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나.”
원세영이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길게 뱉는 모습을 보며 기우희는 입 안에 고인 쓴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화끈했다.
“차라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뭐?”
“농담이야.”
“하나도 재미없어. 후회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앞으로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절대로.”
“얻다 대고 명령이야.”
“어우, 다행이다.”
원세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둘이 있을 때 모욕적인 언사를 하지 않으면 기우희가 아니었다.
발견된 시체가 신해범이 아니라는 주장은 끊임없이 불거졌다. 신예나와 불에 탄 시신의 DNA를 대조해 보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묵살되었다. 그날, 풍기 교육대 12층에서 발견된 시체는 준비된 퍼포먼스를 마친 뒤 후딱 화장되었다. 모든 절차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해치웠다. 지금이야 그렇게 했다간 큰일 나겠지만, 그때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기에 날치기식 일 처리도 어렵지 않았다.
요란한 퍼포먼스가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탓일까. 신해범의 죽음은 권주혁을 밀어젖히고 최근 해동문국에서 가장 핫한 음모론이 되었다.
향년 서른셋이었다. 살아생전 뛰어난 외모를 자랑했던, 굴곡 많은 인생사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팬이 많았다. 남들 앞에서 감히 내색할 수는 없지만.
신해범이 권주혁의 밑에서 저지른 수많은 악행과는 별개로 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무수했다. 그는 과거 류연비와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신해범과 류연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의미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짧은 시간 동안 뜨겁게, 화려하게 타올랐다. 그 빛에 매료된 자들은 불꽃이 꺼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부지깽이로 잿더미를 뒤적이며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그거 기억나? 신해범 살리기 운동.”
원세영이 키들거렸다.
“그날 죽은 사람은 가짜고 진짜 신해범은 어디 깊은 감옥에 숨어 있다, 사태 잠잠해지면 어디 시골에 조용히 숨어 살 거다. 돈이야 풍기대에서 축적한 게 있으니 평생 먹고사는 덴 지장 없을 거고.”
“별….”
“웃기지?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원세영은 눈으로 말했다. 보낼 거면 확실히 보내 버려야지. 바다 건너 이국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그 사람은. 우리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 본인이 선택한 길이라고. 끝.”
기우희가 실소했다. 원세영의 말이 맞았다. 신해범은 죽었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이었다. 그러니 깨끗하게 잊어야 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인제 와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마 오늘 결심한 일 때문이겠지.
“총통을 죽일 거다.”
“어?”
“죽일 거라고. 내 아버지를. 내 손으로.”
기우희는 입고 있던 제복 코트를 젖혀 안주머니를 보여 주었다. 내용물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룩했다.
“…술 마셨니?”
“그게 질문이야?”
“냄새는 안 나는데.”
원세영이 코를 킁킁거렸다. 기우희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으로, 다가오는 원세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밀었다.
“아야.”
“치대지 마.”
“술 마신 거 아니면 뭐야? 약이라도 했어? 아님 장난?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건가?”
“다 틀렸어.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있잖아….”
의자를 밀고 일어선 원세영이 창가로 갔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두꺼운 방탄유리에 손을 얹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패륜은 안 된다고 수석님이 당부하셨지 않나?”
“저대로 놔두면 죽어.”
“그래. 그냥 두면 알아서 죽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야. 왜 굳이 네 손을 더럽혀서 평판을 망치고, 뒷방 늙은이들 총알받이가 되려고 해?”
기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원세영은 허공을 바라보는 기우희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시선이 닿지 않는다는 건 불안하다.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건 비참하다.
원세영은 요란하게 굽 소리를 내며 기우희에게 다가갔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보였다. 방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여자의 눈이었다.
“지금 자기가 엄청 잘나간다고 생각하지?”
“뭐?”
“패륜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생각하잖아. 그래도 나는 왕좌에 오를 수 있다고. 날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국민들도 내 편이니까.”
“…….”
“웃기지 마. 기우희.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웃긴데.”
“넌 내가 수석님 한 사람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냐. 지금의 나는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이 만든 결과야. 너도 그렇잖아?”
원세영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도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의 네가 있기까지, 신해범 한 사람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
“지지율 같은 건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어린애야? 왜 이 나이 먹고도 합리적인 생각을 못 해?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을 가겠단 거야?”
이해가 안 돼. 원세영이 읊조렸다.
“이해를 못 하겠다, 난.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방법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잘 보이는데.”
“합리적인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다. 우리는.”
말문이 턱 막혀, 원세영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게 무슨….”
“우린 늘 무모했어. 남들은 위험하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꾸미고 실행에 옮겼어. 그 결과가 이거야.”
기우희가 두 팔을 벌리고 웃는 모습은 일국의 공주라기보다 황량한 무대에 홀로 서 있는 광대 같았다.
“편한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원세영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자기가 기우희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신해범보다도 더.
어린 시절 황마 교도소에서부터, 풍기 교육대를 지나,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물론 신해범은 기우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기우희의 인생 전체를 놓고 생각해 보면 뜻밖에 신해범이 차지하는 부피는 아주 작을지도 몰랐다. 기우희가 삼십 대에 요절할 것도 아니니까.
최후의 승자는 나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원세영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신해범은 떠났고 유미현은 나이가 많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제왕이 자리에 누워 파란만장했던 삶을 회상할 때, 그 옆을 지키는 사람은 나일 거라고.
신예나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긴 하지만….
방해된다면 결혼시켜 버리면 된다.
목영 신씨 가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 말이 옳았다. 신영산도, 신해범도 사랑 때문에 망했다. 신예나라고 해서 다를까? 그 여자의 혈관에도 같은 피가 흐른다.
어차피 신예나는 정계에 입문하지 못한다. 능력은 인정하지만 권주혁의 하수인 노릇을 한 과거가 평생 발목을 잡을 테니까. 어쨌거나 공주 신분인 기우희와는 달랐다.
그래서 원세영은 안심했다. 기우희와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는, 유미현과 자기라면 기우희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기우희는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표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편한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참고 기다리면 왕좌에 앉을 수 있는데, 직접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이유가 존재했다. 기우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복수였기에.
그가 원하는 이름은 찬탈자였다. 왕위의 계승자가 아니라.
“그건 도박이야.”
원세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 아니면 도라고. 지금까지 쌓은 전부를 잃을 수도 있는데 그 위험 부담을 감수할 거야?”
“전부 잃거나, 전부 따거나. 둘 중 하나라면 후자를 기대하겠어.”
미소 띤 기우희가 덧붙였다.
“우린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리고 늘 이겼지.”
“열 번 이겨도 한 번 지면 망하는 게 도박이야.”
“너도 도박에 인생을 걸어 봤잖아.”
“내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충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냐.”
기우희가 웃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야. 자기 눈을 믿어야 하거든. 진짜배기를 알아보는 안목이 내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잠시 말끝을 흐렸던 기우희는 곧 뚜렷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게 우리 공통점이야. 꼭 너랑 내 얘기만은 아니야. 각자 어떤 방식으로든 똥통에서 기어 올라온 놈들한테선 비슷한 냄새가 나.”
원세영은 담뱃불을 껐다. 니코틴 공급이 끊기자 허기가 밀려왔다. 위가 배배 꼬이는 것 같은 통증은 단순히 식사를 걸러서만은 아니었다.
기우희에게 인정받았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배 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육감이 곤두서서, 파우치 속에 든 립스틱이라도 으적으적 씹어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
기우희에게 인정받으면 생존 본능이 치솟는다. 유미현과 함께할 때의 안정감과는 정반대였다. 그건 기우희가 위험하고 무모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부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저런 상관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을 걸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언제나 눈앞에 기우희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필사적으로 뭔가를 말했다.
원세영은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여기는 동시에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세상에는 제왕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그래서 지금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내가 네 생각을, 결정을 이해해 줬으면 해?”
“맞아. 내일이면 유미현이 미친개처럼 날뛸 거야. 그때 날 변호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네 말이면 끝까지 들을 테니.”
“스스로 변명도 못 하니?”
“못 해.”
신기하게도 오만해 보이지 않았다. 기우희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들렸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 무슨 설명이 왜 필요해?
원세영은 책상에서 일어선 기우희의 팔을 잡았다.
“실패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생각은 네 머릿속에 없지?”
“당연하지.”
“문을 여는 사람은?”
“이나활.”
“걔가 얻는 건 뭔데?”
“권무혁의 호위 무사 자리.”
원세영이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대놓고 들려서, 기우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놀라워?”
“내정자가 있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그래? 누군데?”
“하란재성. 정확히는 그 사람의 장남.”
기우희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오른 다리가 불구인 유미현의 용병.
하란재성을 처음 만났을 때, 기우희는 유미현이 용병 세계와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풍기 교육대를 해체한 데에는 본인의 책임이 있었으므로 유미현의 방식을 비난하지 못했다.
풍기대를 개편하지 않은 이유는 진치우가 더는 군부에 몸담고 싶지 않아 한 것도 있지만, 근위대에 새로운 얼굴들이 필요해서였다.
신룡관을 지키는 위병은 유사시에 가장 먼저 움직이는 인력이었다. 기우희는 자기 가까이에 풍기 교육대가 있었으면 했다.
친위대라는 명칭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유미현은 본인의 사병을 확보하지 못했다. 기우희는 유미현이 자신에게 양보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눈감아 준 것이다. 인생의 최대 가치가 금전인 자들에게 절대 그르치면 안 되는 중책을 맡기지만 않는다면.
그런데 하란재성이라니. 심지어 당사자도 아닌 그의 아들이라니.
“장남?”
“윤이라고, 열여섯인데 지금 마구동 도축장 다녀.”
“열여섯.”
“어리긴 하지. 그런데 알잖아?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
중요한 건 환경이었다.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과.
그러나 기우희의 대답은 냉정했다.
“내가 그런 놈을 앉힐 거라고 생각했어? 그 중요한 보직에?”
“아직 열여섯이니까. 거기다 흑해자. 수석님이 제일 좋아하는 타입이야.”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해.”
최종 결정권자는 나다. 유미현이 아니라.
원세영을 노려보는 기우희의 눈빛은 매서웠다.
“유 수석이 미는 인재라도 내 성에 안 차면 아웃이라고.”
“알아. 하지만….”
“알면 가운데서 중재나 잘해. 임찬영이랑 의자 바꾸고 싶어?”
기우희는 코웃음을 쳤다. 백번 양보해서 하란재성의 딸이라면 생각이라도 한번 해 보겠지만.
원세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장군이자 공주의 옷깃을 잡았던 손가락이 경련하고 있었다. 왜일까.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떨리는 걸까.
기우희가 실패할까 봐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달랐다. 지금 원세영이 느끼는 공포는 더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훗날 뼈저리게 후회할 것 같은….
“이나활은 못 믿을 놈이야.”
“나도 그놈을 믿는 건 아니야.”
“그런데 왜 협력해? 왜 그런 놈이랑 거래를 하냐고.”
뒤돌아섰던 기우희는 고개만 돌려 원세영을 봤다.
“성조기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는 남의 나라에서 전쟁했기 때문이지. 어떤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에 무기를 파는 놈이 떼돈을 벌어.”
무기라는 말에 떠오른 사람은 윤태금이었다. 그는 올마이티 그룹 최고 경영자의 처남이었다. 윤금강은 비록 CEO의 정식 부인은 아니었으나, 아끼는 세컨드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잠깐의 불장난도 아니었다. CEO는 이 남매를 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보석 회사를 만들어 주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만큼.
“…윤태금이랑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여러 가지 의논하는 일은 많지만, 윤 씨랑 이 씨는 서로 관계없어.”
“그럼?”
기우희가 쿡쿡 웃자 그가 입은 ‘장군 코트’ 어깨에 붙은 견장이 흔들렸다. 원세영은 춤추는 금색 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이나활이 한 얘기 안 믿어. 필리핀 혼혈같이 생기지도 않았고, 미국인이라는 것도 이상해. 어머니 이름은 왜 숨기는데? 외화벌이 간호사라며. 애국자 아들이 뭐가 부끄러워서?”
“이나활은 믿을 수 없는 놈이지. 나도 알아. 그래도 쓰임새 하나는 확실하거든. 총잡이에, 출세욕이 큰 놈.”
“그게 쓸모 있는 거야? 위험한 게 아니라?”
“내 양자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
원세영은 눈을 깜박였다.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뭐라고?”
“자길 양자로 삼아 달래. 다음 대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
“미, 미친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멍청한 새끼. 기우희가 읊조렸다.
“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모르니까 그딴 걸 거래라고 제시하지.”
후대가 없는 왕은 불안하다. 임기 내내 후사를 만들라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
기우희는 불임이었다. 산부인과 전문의의 진단은 조기 난소 부전. 호르몬 치료는 편두통과 안면 홍조 증상을 유발해 중단했다. 최유신은 어린 시절 영양 불균형과 극도의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꼽으며 식이 요법과 심리 치료를 권했으나 기우희는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감각했다. 해당 사실을 아는 이들이 당황스러워할 만큼.
기우희 왈, 무월경은 불행이 아니었다. 그건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도, 군에 있을 때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맹세컨대 한 번도 불편했던 적 없었다. 원망한 적도 없었다. 많은 여성이 생리로 인한 고통과 불편함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다음부터는 축복이라고도 생각했다.
이나활은 그걸 몰랐다.
그는 기우희에게 당연히, 지극히 당연히 모성애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기우희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틀에 박힌 잔머리를 굴리는 참새가 봉황의 큰 뜻을 알 리가 없었다.
이나활은 기우희의 야망을 몰랐다. 기우희에게는 모성애가 아니라 ‘내 대에서 끝낸다’는 신념이 자리했다. 저주받은 왕가의 핏줄은 여기서 끊는다. 왕실은 해체되고, 귀족들의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어 국민 정부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알량한 신분과 명예로 연금 타먹는 뒷방 늙은이들은 기요틴이나 영접해.
그런 신념을 가진 여자에게, 불임은 손톱만큼의 타격감도 없었다.
기우희 총통의 다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나활의 설계는 근본부터가 틀려먹었다. 기우희에게는 자신의 대를 이을 아이가 필요 없었다. 친자가 없으면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 기어이 누군가를 내세우던 지금까지의 왕족들과는 달리.
그걸 친절하게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적의 착각은 이쪽에 엄청난 무기니까.
원세영은 쯧쯧 혀를 찼다.
“헛발질 제대로 하네.”
“보안이나 확실히 지켜.”
“최 닥터가 어련히 잘하겠지.”
“그런데 이나활… 해결소장한테 가는 줄 알았는데.”
“진치우는 감시 역이야. 그리고 이나활을 통해서 권씨 형제와 가까워질 수 있지.”
기우희는 원세영도 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권세혁은 약에 취한 상태에서 진치우를 쐈다. 풍기 교육대 본관, 12층 사무실에서.
“진치우의 태도만 나쁘지 않다면 권세혁은 미안해서라도 잘해 줄 거야. 그렇잖아? 불륜 커플도 죽었겠다, 이제 화해할 때도 됐어. 그 둘.”
기우희는 무심히 말했다. 원세영은 당황했다. 신해범을 ‘불륜 커플’이라고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계획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형태의 인맥 지도라서.
이나활을 진치우의 밑에서 일하게 만든다….
진치우의 측근인 이나활을 권무혁의 호위직에 앉힘으로써, 이나활의 상관 격인 진치우가 권씨 형제의 생활 전반에 관여하게 된다. 군인도 뭣도 아닌 신분의 진치우가 왕자들과 단숨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원세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뛰어난 총잡이에 출세욕 넘치는 이나활을 자기 친위대로도, 유미현의 사병으로도 두지 않은 것이다.
기우희는 이나활을 꺼린 게 아니었다. 그의 쓰임새를 고민했다.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을 어디에 둬야 제 기능을 다할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나, 궁금한 게 있거든.”
“뭔데?”
“이나활이 권세혁을 어떻게 생각할지 보고 싶어.”
권세혁은 총통의 진짜 아들이었다. 수많은 자식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랐던 총통 후보였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다고 하나 여전히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국민들에게도 사랑받았다. 권주혁의 이미지 메이킹 실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증거다.
“싸움 붙이려는 거구나.”
권세혁은 태어날 때부터 높았다. 불임인 기우희의 아들이 되어서라도 높은 곳에 가고픈 이나활에게는 질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원세영은 아까 기우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성조기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는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에 전쟁이 발발하면 그 나라에 무기를 파는 놈이 돈을 번다.
“그래.”
기우희가 끄덕였다.
“그게 내 계획이야.”
성가신 놈이 하나라면 싸워서 이기면 된다. 그러나 둘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꺼번에 두 놈과 싸울 수도 없고, 그 둘이 힘을 합치면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나빠지기에.
그래서 신해범은 상대방의 눈을 가리는 방법을 활용했다. 나를 제외한 두 놈이 신경전을 하도록 수를 썼다. 주의를 엉뚱한 데로 돌려서 진짜 중요한 사실을 보지 못하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성재경이 넘어진 정류진의 팔을 잡았다가 권세혁에게 어떤 눈총을 받았는지….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둘 다 지면 금상첨화고.
기우희는 이나활을 끊임없이 자극할 생각이었다. 진치우를 통해서든, 요설이 술술 나오는 유미현의 입을 빌려서든, 자기가 직접 움직여서든. 출신 성분을 감춰야만 하는 놈이 ‘진짜 왕자님’에 대한 질투심으로 미쳐 버리게.
권세혁은 따로 손보지 않아도 된다. 이미 자기방어 본능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다. 외조부와 모친이 그렇게 갔는데,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평안 장씨를 비난하는 선전 방송에 동원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유미현이 슬쩍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왕자를 개인적으로 원하는 자들도 있었다.
좀 더 긍정적인 가능성을 점쳐 보자면.
이나활의 존재는 권세혁이 자신에게 매달릴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누나, 제발 부탁인데 그 새끼 좀 내 동생한테서 떼어 내 줘… 하고.
기우희의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원세영은 그가 웃고 있음을 보았다.
“동족 혐오라고 해도 괜찮다.”
“너 걔가 누군지 아는구나.”
바람이 불었다. 아니, 바람이 분다는 착각이 들었다. 사무실의 문과 창은 전부 닫혀 있었으니 찬바람이 새어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 원세영은 자신과 기우희 사이에 칼바람이 분다고 느꼈다.
“맞지?”
“…….”
“너, 이나활이 누군지 아는 거야.”
기우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힘차게 쳐들었다.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까 말했잖아. 동족 혐오.”
“그 새끼가 총통의 아들이야.”
“그 새끼도.”
기우희가 정정했다. 목소리에 비웃음이 그득했다.
“장두현은 삽질한 거야. 국내에 있는 놈들만 색출해 파묻으면 뭐 하겠어. 어느 날 갑자기 해외에서 떡하니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요즘 세상에 친자 검사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번거롭지도 않았다. 자기가 총통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이 진실이라면, 또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기우희는 최유신을 신룡관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권일혁의 머리카락과 구강 세포, 손톱을 채취했다. 이나활은 스스로 협조했다. 검사 결과는 친자였다. 이나활은 권일혁 총통의 아들이었다. 필리핀 아버지는 애초에 없었다. 어머니 홍이금은 외화벌이 목적으로 출국한 간호사가 맞았으나, 현지에서 근무한 이력이 없었다.
홍이금과 기윤정은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은둔처가 해외냐, 국내냐에 따라 총통의 배다른 아이들은 각각 다른 삶을 살았다.
기우희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기선혁은 급성 충수염으로 죽었다. 제때 수술만 받았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아니, 보호자가 좀 더 유식하기만 했다면. 그냥 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초기에 알아차렸더라면.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선혁의 병사는 기선화의 처참한 죽음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나활은 적어도 그런 위험에서는 벗어났을 것이다. 어머니가 간호사였으니까. 미국에서 자랐으니까. 거긴 아동이 적절한 보호와 교육을 받지 못하면 안 되는 나라다.
타갈로그어는 필리핀 가정부로부터 배웠단다. 집안에 고용인까지 있었다는 얘기다. 기우희는 그때 깨달았다. 홍이금을 가엾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걸. 그는 기윤정보다는 장승희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그 새끼가 싫어.”
“그래.”
“꼴 보기 싫은 놈들끼리 엎치락뒤치락하는 거 보고 싶어. 그리고 나중에, 지루해졌을 때 한 번에 쓸어서 치워 버리고 싶어.”
“알았어.”
원세영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유미현이었어도 같은 말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더는 기우희를 잡지 않았다. 잡는다 한들, 자신에게는 막을 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원조를 요청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기우희가 이 일을 혼자서 계획한 이유가 뭐겠는가. 자기 군벌의 모든 사람이 반대할 것을 알아서겠지.
원세영은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기우희의 등을 응시했다.
반드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위험 부담을 지지 않는 쪽이 현명했다. 하지만 평화에 익숙해지면 나태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우희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정말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해 못 하지만.
“그래도 혼자는 아니지?”
원세영은 부탁하듯 물었다.
“내가 같이 가 줄까?”
기우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원세영은 그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총통의 침실이 흡연실이냐? 같이 가 주게?
그래도….
원세영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친구잖아.
어릴 땐 아니었지만, 결국 황마에서 살아남아 성공한 사람은 우리 둘이다. 유미현은 인생의 출발선부터 달랐으니 논외로 치고.
“넌 외롭지도 않니?”
“전혀.”
“지금 여기에 내가 아니라 옥채윤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
떨리는 말끝을 감추려고 활짝 웃었다. 원세영은 그렇게 괜찮은 척했다.
“아니.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
“나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기우희는 다른 의미로 어이없어했다.
사무실을 나서기 직전,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원세영을 돌아봤다.
“난 혼자가 아냐. 성재경이 같이 간다.”
성재경을 데려가는 그가 풍기대에서부터 함께한 전우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성재경은 신해범이 권주혁을 처형하는 순간에 함께 있었다. 물론 그곳엔 임찬영도 있었으나, 실질적인 뒤처리는 성재경이 했다. 그는 이미 이 분야의 프로였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그래.”
원세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성 대위라면 믿음이 간다.”
기우희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넬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문이 닫혔다. 원세영은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래….”
손바닥으로 대리석 바닥을 짚었다.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가슴팍까지 모아 안았다.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아주 긴 밤이.
***
장군도 사병과 같은 군화를 신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기우희는 그 말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여전히 풍기 교육대 소령 시절 신었던 워커를 신고 다녔다.
대부분의 장군은 지퍼가 달린 부츠를 신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가죽 부츠. 종아리를 타이트하게 조이고 밑창에 철 조각을 덧대서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소리가 나는 것.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왕실 의장대나 위병들이 주로 신는 것.
보기에도 멋스러운 롱부츠는 많은 군인의 로망이었다. 그러나 발소리가 요란하고, 급박한 와중에 지퍼가 고장 나면 수습이 어렵기 때문에 현장에서 일하는 군인들은 좀처럼 착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롱부츠는 높은 계급의 상징이었다. 불편한 신발을 신어도 괜찮은 사람. 일선에서 뛰지 않아도 되는 사람.
하지만 신해범은 달랐다. 그는 행사용 정복을 갖춰 입을 때가 아니면 다른 병사들과 동일하게 짧은 워커를 신었다. 그건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라. 언제라도 뛰어나갈 준비가 돼 있으니.
고집까지 느껴지는 자세였다. 기우희는 그 이유를 알았다. 원인은 최금호였다. 그는 신해범의 트라우마이자 절대 닮아서는 안 되는 최악의 상관이었다. 기우희는 신해범이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자기 앞에 고기 방패 세워 놓고 뒷짐 지고 헛기침 큼큼하는 짓은 안 해. 절대로.
“나도.”
“예?”
옆에서 함께 걷던 성재경이 물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그냥 바람 소리다.”
“예….”
바람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러려니, 하고 끄덕이는 성재경을 보며 기우희는 피식 웃었다.
“떨리냐?”
“아닙니다.”
“개쫄았네.”
“장군님….”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참는 것보단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정말 괜찮습니다.”
성재경은 다급히 덧붙였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쇼크를 일으킨 총통은 찬란관에 머물렀다. 신룡관 부지의 여러 별관들 중 옛 모습을 가장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과거에는 총통의 정실부인과 그 아이들이 머물렀다. 경우에 따라 정실 소생이 아닌 왕자녀가 들어와 살았던 경우도 있지만, 그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실부인이 아닌 측실이 들어앉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연식과 편리를 떠나, 찬란관은 역사적으로 특별하고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권일혁 대에 찬란관은 빈집이었다. 빈집은 어쩔 수 없이 관리가 소홀해진다. 오랫동안 비었던 찬란관은 권일혁, 권주혁 형제가 어린 시절에 쓰던 방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었지만, 곳곳에서 세월의 흐름이 도드라졌다.
단순히 오래전에 지어져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옛것의 냄새가 났다. 현세의 교훈으로 삼거나 귀하게 여겨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낡고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부패한 옛것의 냄새가.
기우희는 이 냄새의 원인을 알았다.
“준장님.”
성재경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경계했다. 새하얀 눈밭을 비추는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찬란관의 흑단 나무 대문 앞에 이나활이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불경하긴.”
“그렇습니까? 바로 끄겠습니다.”
소년같이 천진한 목소리였다. 기우희는 이나활이 눈밭에 담배를 떨어뜨리고, 굳이 발로 짓이길 필요가 없음에도 확인 사살을 하는 모습을 봤다. 주위에 쌓인 눈을 끌어다 담배꽁초를 감추는 모습까지.
“각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재에 가셨습니다. 곧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긴 한데, 모르지요. 노인들은 잠이 없으니까요.”
기우희는 일국의 총통이자 낳아 준 아버지를 노인이라고 부르는 이나활의 말투를 꼬집지 않았다. 저만하면 양호했다. 이쪽은 ‘노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오만 가지 저주를 퍼부었다.
이나활이 목소리를 낮췄다.
“총 가져오셨습니까?”
“질문 가려서 해라.”
용케 알아들은 성재경이 주의를 줬다.
“경거망동은 일을 망쳐.”
“예. 알겠습니다.”
두 발짝 앞서간 이나활이 문에 손을 댔다. 검고 오래된 나무 문은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우희는 서슴없이 문지방을 넘었다.
“각하께는 아직 말씀 안 드렸습니다.”
“내가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삼십 퍼센트 정도는?”
다음 순간, 이나활은 성재경이 머리끝까지 열받아 할 만한 행동을 했다. 기우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혀를 쏙 내민 것이다.
“이놈이!”
“목소리 낮춰. 대위.”
기우희는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뽀얀 입김이 검은 하늘에 구름처럼 번졌다.
별도 달도 없는 밤이었다. 세상은 아득하리만치 고요했다.
“각하께서 머무는 곳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우희는 고개를 든 채 입을 벌렸다. 입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눈을 맛봤다.
어린 시절부터 겨울이 좋았다. 겨울에는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렸다. 비록 차갑고, 입에 넣으면 녹아 버리지만, 그릇에 가득 담으면 고봉밥을 올린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진짜 밥이라고 생각하면서 먹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권일혁 총통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내 동생들보다 비참했을까?
기우희는 웃었다. 활짝 웃으면서 눈앞에 우뚝 선 건축물을 올려다봤다.
찬란관은 넓었다. 도면상으로는 2층이지만, 각 층고와 기단이 높아 최근에 지어지는 건축물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곡선이 아름다운 기와로 빈틈없이 덮은 지붕 가장자리에는 용이 아로새겨진 수막새. 저것 하나만 떼다 팔아도 넉 달은 배곯을 걱정 없었다.
그러니까… 투정이란 얘기다. 당신의 소년기를 지배했던 고통은.
장사치들에게 구걸하는 아버지가 부끄러웠겠지. 자기가 어른이 됐을 때 응당 차지해야 할 왕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겠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는 소리는 핑계다. 그건 왕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명칭조차 호화로운 찬란관에 들어앉아 있든, 지역명을 말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데가 있어?’ 하는 산골짜기에 숨어 살든.
암살 위협에 시달린 모든 왕족이 독재자였던 것도 아니었다. 해동문국 역사에도 성군은 존재했다. 자기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 백성들에게 사랑받은 왕은 분명 있었다.
당신이 그렇지 않았을 뿐이다.
하물며 당신에게는 자식의 앞날을 위해 구걸하는 아버지라도 있었지.
성재경과 이나활이 양 날개 문을 하나씩 맡아 열었다. 기우희는 검고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메마른 나무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인기척을 자동으로 감지한 조명이 켜졌다. 응접실 곳곳에 놓인 꽃이 보였다. 옛것의 냄새는 싱싱한 생화 향기로도 감출 수 없었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양탄자를 밟았다. 붉은 바탕에 똬리를 튼 황룡의 머리를 짓이기고 섰다. 눈보라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서재는 안쪽입니다.”
이나활이 다가와 말했다. 찰나의 질투심이 기우희의 전두엽을 스쳤다. 네가 이곳에 먼저 들어왔구나. 왕후와 그 아이만이 머무는 집에.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권씨 형제도 이곳에는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준장님? 왜 그러십니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이나활이 당황했다. 기우희는 잠자코 그의 이목구비를 관찰했다.
모계 혈통이 짙다는 건 생김새를 보면 알았다. 이나활은 권일혁 총통과 닮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눈매가 비슷한 정도일까. 그래도 겉모습만으로는 모른다. 이놈에게는 무슨 유전병이 있을지.
고자였으면 좋겠다. 함부로 씨 뿌리고 다니지 못하게. 거세시켜 버려도 그만이지만, 그것도 얻을 게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그렇잖아. 불알 떼는 것보다 머리통 날리는 게 더 쉬운데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이나활이 알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기우희는 피식피식 웃었다.
“준장님.”
성재경의 팔이 어깨에 닿았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평소라면 당연한 소리 말라고 쏘아붙였을 질문도, 심기에 거슬렸을 체온도 싫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성재경의 목소리와 온도는 지금 기우희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이나활을 앞세우고 걸었다. 복도의 센서 등이 차례로 켜졌다. 기우희는 무심코 유리창을 봤다. 길고 검은 코트를 입은 자기 모습이 비쳤다.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유미현이 말한 적이 있었다. 총통이 찬란관에 틀어박힌 이유에 대해서.
몸도 마음도 약해져서였다. 찬란관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일혁 총통이 어른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시기에 살던 집이기도 했다. 지금 권일혁의 마음 한편에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존재했다. 당사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기우희는 조금 다른 의미로 유미현의 생각에 동의했다. 총통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그가 원하는 지점은 ‘어른들의 보호를 받았던’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 총통이 원하는 건 쇼크를 일으키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젊고 건강한 새 심장을 얻어서, 앞으로 삼십 년은 너끈히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때.
친위대를 물리치고 이나활만을 곁에 두는 까닭이었다. 한심한 착각이다. 심장 이식을 받을 때 함께한 자와 단둘이 있다고 새 심장을 얻었을 때와 같은 건강을 회복하는 게 아닌데.
어쩌면 설계도로 인한 쇼크가 아닐지도 몰랐다. 단순히 거부 반응이 늦은 걸지도. 비록 어떤 의사에게서도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기우희는 신의 존재를 믿을 의향이 있었다. 리볼버에 들어가는 탄알 여섯 개의 무게만큼은.
기우희는 걸으면서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손등을 절반만 덮는 가죽 장갑이 피부에 착 감겨들었다.
앞서가던 이나활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음악 소리군.”
기우희가 말했다.
“저쪽이 서재야.”
“예. 맞습니다.”
희미한 음악 소리를 따라갔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 방음 설비가 완벽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선율이 선명해졌다.
서재 문은 닫혔지만, 바닥과 문 사이가 떠 있었다. 어린아이가 손바닥 하나를 밀어 넣을 정도의 틈이었다.
기우희는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응시했다. 희망을 연상시키는 노란색이었다.
음악과 조명만으로도 알았다. 이 문 너머에는 따스하고 아늑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용서할 수 없으면 끝내는 수밖에.
차가운 문고리를 움켜잡고 돌리면서, 기우희는 나지막이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