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성재경 (34/39)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그때 신해범, 기분 좋아 보였나?’

기우희와 성재경의 진급은 같은 날 이루어졌다. 모든 절차와 축하 파티, ‘아는 사람들’끼리만 한다는 뒤풀이까지 모조리 마친 뒤 단둘이 남았을 때, 기우희는 신해범에 대한 질문을 했다.

‘예?’

‘권주혁 죽일 때.’

그때 기우희는 성재경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남들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비록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 찰나의 순간에도 성재경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그래서 기우희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생각 못 했다. 그저 본 대로, 자기가 느낀 대로 털어놓았다.

권주혁을 죽일 때의 신해범.

‘해범아! 내가 너를 아들로 생각했다.’

‘나는 너 같은 아버지 둔 적 없어!’

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재경이 침대 커튼을 젖히고 뛰어 들어갔을 때, 신해범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버둥대는 권주혁과 사투 중이었다.

신해범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재경은 권주혁의 두 다리를 붙잡아 눌렀다. 그게 신해범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라고 생각했다.

권주혁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신해범이 목적을 이루기를 기다리면서, 성재경이 느낀 건 슬픔이었다. 죄책감이나 괴로움이 아니라.

신해범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나는 너 같은 아버지를 둔 적 없다는 외침에 목구멍이 조였다. 위액이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개새끼’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매사에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신해범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어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후련해 보이지도 않았다.

모든 일을 끝내고 권주혁의 저택을 떠날 때, 신해범은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바탕 울고 나서 자신의 목숨을 ‘진짜로’ 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뛰어나갔다. 막 출발하려는 포르쉐 앞을 막았다. 어디든 좋으니 신해범을 데려다 놓고 싶었다. 안전한 곳으로. 그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신해범에게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는 혼자서 안식처를 찾아갔다. 그곳의 이름은 정류진이었다.

어쩌면 그때, 이미 포르쉐에는 정류진이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신해범을 삶으로 끌어당겼는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진 않았습니다.’

‘그럼. 슬퍼하기라도 했나?’

‘슬프긴 슬픈데, 죽은 사람 때문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 너한테 말해 줬어?’

‘아뇨. 그냥 제 짐작일 뿐입니다. 하지만 죄책감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슬픈 마음이요. 그리고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 제 생각 말씀드려도 됩니까?’

‘해.’

‘오늘 이후로도 살게 돼서, 그게 기뻐서 슬퍼 보였습니다.’

‘…뭔 소리야.’

성재경은 멋쩍게 웃었다. 기우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으니까. 그러나 정말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신해범 당사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본인이 느낀 감정이 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리고 기우희는, 권주혁을 처단했을 때 신해범이 느낀 감정을 궁금해했던 기우희는, 오늘에야말로 해답을 찾을 터였다. 성재경은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의 장군을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기우희의 우뚝 선 콧대와 매끈한 오른뺨을 응시했다.

“글자가 눈에는 들어오나 봐.”

“책을 읽고 있으면 주위가 조용해진다.”

권일혁이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렸다.

“너도 해 보련?”

“글줄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이 시간까지 남아서, 여긴 무슨 일이냐.”

“왜? 딸이 늦게까지 밖에 있으니까 걱정돼?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집구석에 안 기어들어 가고, 이런 생각 들어?”

이나활이 재빨리 말했다.

“긴히 전할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낮에는 각하께서 주무시고 오후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행여나 불필요한 소리가 나올까 봐….”

“됐다.”

총통은 이나활의 변명을 듣기 싫어 했다. 그렇다고 주눅 들 기우희가 아니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은 건강에 나빠. 의사들이 그런 소리는 안 하나?”

“대낮은 시끄러우니까.”

“시끄럽다고? 여기가?”

기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찬란관이 방음에 취약한 구건물인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머무는 사람이 불편함을 호소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임시 대피소의 천막 텐트도 아니고.

애초에 찬란관 주변에서는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게 누구든, 이유가 뭐든. 총통이 지내는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위병에게 가차 없이 끌려 나간다.

그러니까… 핑계였다. 몸이 아픈 내 밤낮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핑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성가시게 한다는 투정.

성재경은 기우희의 바로 옆에 있었다. 그래서 권일혁의 얼굴과 행동이 잘 보였다.

총통의 움직임은 느렸다. 독서대에 놓인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짓이 나무늘보 같았다. 쇼크를 일으키기 전과는 천지 차이였다. 심장 수술, 아니 이식을 받은 후 폴로 경기까지 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권일혁 총통은 늙었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안경알 속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할 얘기가 뭐냐.”

“세혁이가 아버지 보고 싶어 해.”

사전에 준비되지 않은 말이었으나, 겁먹은 이나활이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말과는 달랐다. 권세혁은 꾸준히 아버지와의 만남을 요청해 왔다. 기우희 선에서 묵살했을 뿐.

“용서를 빌고 싶은가 봐.”

“용서? 그 애가 나한테?”

“당연히 화는 나겠지. 근데 동생을 위해서는 그게 낫다는 생각쯤은 머리에 있을 거거든. 장씨네 가문이 복권되지 않은 채 내가 즉위해 버리면 걔네 출신 성분 개똥 되는 거잖아.”

“원하는 게 있으면 자기 힘으로 쟁취해야지. 엎드려 구걸할 게 아니라.”

권일혁이 중얼거렸다.

“약한 건 죄다.”

“이제 겨우 스물한 살짜리가 뭘 알겠어?”

“내년이면 벌써 스물둘이다.”

“내년까지 살아 있으시게?”

책상이 흔들렸다. 양 팔꿈치를 책상에 턱, 올려놓은 기우희가 얼굴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때 성재경은 봤다. 총통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뭐야.”

“내 얼굴 좀 보라고.”

“쓸데없는 짓이나 할 거면 돌아가라.”

“그러지 말고, 좀 봐. 자세히 뜯어보면 알겠지. 본인을 제일 많이 닮은 애새끼가 누군지.”

“기우희.”

“내 이름 말인데, 하나 새로 지어 줘.”

이제 총통은 불편하다는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기우희를 노려보았다. 성재경은 총통이 돋보기가 분명할 안경을 벗고 희미하게 자국이 남은 콧등을 지그시 누르는 모습을 봤다.

“이름 말이냐.”

“그래. 돌림자 넣어서.”

“여아에게는 의무가 아닌데.”

“의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해 왔지. 그동안.”

지금 왕가의 돌림자는 혁(奕). 한번 정해지면 5대가 우려먹어야 하는 만큼 작명에는 유도리가 있어서, 이름에 해당 한자가 들어가기만 한다면 순서는 상관없었다. 성을 제외한 이름이 세 글자인 경우도 허용했다. 또 공주의 이름에는 돌림자가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우희가 생각하기에, 그건 배려나 친절이 아니었다. 의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행되어 온 암묵적인 배제였다. 부정할 수 없는 차별이었다.

유미현이 말해 줬다. 권세혁 왕자 세대를 포함한 왕실 3대 족보에서, 이름에 클 혁(奕)자가 들어간 공주는 딱 한 명뿐이라고. 그나마도 어릴 때 병으로 죽었다. 신국천후 권숙빈의 딸이자 권일혁 총통의 고모가 되는 권혁정 공주.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서인지, 불치병으로 죽었다지만 이런저런 의혹이 많아서인지, 권혁정에 대한 기록은 전무했다. 권숙빈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드라마에서 그는 소아암으로 죽었다. 그러나 실제 권혁정의 진료 기록을 살펴보면 종양이 아니라 근육계 질환이었다. 10세 미만 소아의 근육병은 유전성일 확률이 높다.

“이름이라.”

권일혁이 웃었다.

“인제 와서 바꾼다 한들, 그게 너한테 무슨 의미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그중에서도 제일 큰 건 아버지가 날 딸로 인정했다는 거. 나도 권씨 왕가의 일원이라는 거.”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은 순간이 없어.”

총통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형을 면했을 때 깨닫지 못했니?”

“날 고기 방패 구덩이에 처넣었잖아.”

“네게 타고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줬지.”

“타고난 능력?”

기우희는 웃어 버렸다.

“낳아 준 어미를 죽이는 게 재능이면, 당장 날이 밝는 대로 전국의 존속 살해자들을 특별 사면해 줘. 지엄하신 총통 각하의 특명이니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특사받은 전원을 중앙 헌병대에 귀속해서 다른 놈들이 꺼리는 작전을 시키는 거야. 이름은 파오훼이 소대가 좋겠군. 고기 방패라는 뜻이야.”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왜?”

“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지 마라.”

총통의 목소리에는 한 점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양육 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라.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면서. 그래야 강해지니까.

약한 건 죄다. 성장하지 못한 것도 죄다.

타고난 환경을 원망하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으니, 어금니 악물고 올라와서 이 아비의 신념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다오!

“…이기적이네.”

기우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총통은 그를 위로했다.

“너는 잘하고 있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돼?”

총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우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성재경은 그의 오른뺨에서 불뚝거리는 녹색 핏줄을 봤다.

“가성비로 자식 농사 짓고 싶었다고, 국고 상태가 개판이라 애새끼들 먹이고 입힐 돈이 없었다고 하면, 백번 양보해서 납득은 했을 텐데.”

“그게 무슨 망언이냐!”

“아니 정말 그렇잖아.”

기우희는 권일혁의 책상에 엎드렸다. 수업 시간에 몰래 웃는 학생처럼 어깨를 들썩거렸다. 기우희의 웃음소리가 길어질수록, 높아질수록, 권일혁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었다. 깊게 팬 주름 사이사이로 용암 같은 분노가 흘렀다.

마침내 고개를 든 기우희가 말했다.

“괜찮아. 말해 봐. 나는 가성비 좋은 자식이었지?”

“너….”

“왜, 정곡 찔리니까 쪽팔려? 아냐.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 쟤는 아버지랑 미국에서부터 함께한 사이잖아. 아메리카. 아뭬~ 뤼카.”

기우희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리고 얘는, 소개할게. 우리 성 대위. 저번에 나랑 같이 진급했어. 풍기대 때부터 같이한 사이니까 믿어도 돼. 솔직히 소령 달아 주고 싶었는데 사람이 워낙 겸손해서.”

성재경은 자신에게 향하는 총통의 시선을 느꼈다. 지금 기우희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말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장군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각하.”

“그렇다니까.”

기우희가 목을 움츠리고 흐흐, 웃었다.

“암만 정신병자 계보를 이었다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글쎄다. 내 눈에는 무리하는 얼굴인데. 지금도.”

총통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두 손의 움직임이 꽤나 신경질적이었다.

성재경은 이나활이 따뜻한 차가 든 컵을 총통에게 건네주지 않았다면 정신이 사나워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오, 내 얼굴 봐 주고 있었어?”

“아까부터 계속.”

총통이 든 컵은 크리스털 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보이게 만든 플라스틱 컵이었다. 진짜 크리스털은 무게 때문에 들지 못했다. 떨어뜨려서 깨질 우려도 있고.

“피곤해 보이는데, 그만 돌아가라.”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진 않은데.”

“높은 사람일수록 쓴말에 귀 기울여야지. 산골짜기 필부도 단 말만 듣진 못해.”

한쪽 눈썹을 쓱, 올린 기우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래. 내가 제일 아버지를 닮았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슬픈 거야. 이상하잖아. 제일 많이 닮았는데, 누가 봐도 자식새낀데 왕가의 성씨가 아냐. 이름에 돌림자도 없어. 겨우 그것 때문에 나는 존재 가치도 없는 뒷방 늙은이들한테 비웃음을 사.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모든 일과는 별개로.”

“그렇다면 네 힘을 더 보여 줘라.”

“노력해서 말이지?”

기우희는 재차 말했다.

“노력.”

“그래.”

“언제까지?”

성재경은 확신했다. 총통이 차를 마신 이유는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였다.

“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어. 아버지가 도와줘야 해.”

기우희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름 세 글자면 돼. 그게 가장 쉽고 빠른 일이야. 그 세 글자로 닥치게 할 수 있는 주둥이가 많다는 거, 아버지도 알잖아?”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지 마라. 누가 뭐라고 하든지. 너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줄 알았는데.”

“생각해 둔 이름도 없어?”

총통의 목울대가 꿀꺽했다. 기우희가 키득댔다.

“재활용이라도 좋아. 장승희 임신했을 때, 설마하니 작명가가 권세혁 하나만 덜렁 내놓진 않았을 거 아냐. 무혁인지 무말랭인지 때도 그렇고.”

“스스로를 모욕하면 마음이 편해지냐?”

기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봐도 어색했다. 신해범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허술한 연기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위협적이었다.

“왜? 재활용이라고 해서? 어우, 난 괜찮아. 원래 여자애들 인생은 잔반 처리야.”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구나.”

“실망도 기대가 있어야 하는 건데.”

“그래. 난 네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이나활은 뭣 하러 여태 데리고 있어?”

총통의 안색이 창백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정작 지목된 당사자는 담담하게 차를 따라 내고 있는데.

비밀을 가진 자와 모든 걸 털어놓은 자의 차이다.

성재경은 기우희의 얼굴에서 불뚝거리는 핏줄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느니, 자진해서 기요틴에 목을 밀어 넣는 게 낫다고.

“응? 왜 아직도 안 돌려보내고 데리고 있냐고?”

“그건.”

“내가 자만할까 봐? 아니면 기다리지 못할까 봐?”

전자라면 딸이 즉위하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후자라면 딸이 자기를 죽이고 즉위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이나활은 자신의 출생을 감추었지만 그건 안전하게 입국하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뿐이었다. 여차하면 드러낼 수 있는 무기였다. 그리고 권일혁 총통의 ‘안전한 죽음을 위한’ 노후 대비 수단이기도 했다.

이나활은 단순히 총만 잘 쏘는 저격수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총통의 피를 이은 자식이었다. 새로운 종의 출현은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법. 돌연변이는 기존의 최상위 포식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알고 있었냐.”

“그럼.”

“그래서 내게 실망했구나.”

“실망? 아니.”

기우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실망도 기대가 있어야 하는 거라니까. 방금 말했잖아.”

이나활이 쿡, 하고 웃었다. 공기의 흐름을 감지한 총통이 일어섰다. 그때 손을 뻗어 총통의 어깨를 붙잡아 도로 앉힌 건, 바로 곁에 서 있던 이나활이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맞은편으로 이동한 성재경이었다.

그건 본능이었다. 기우희의 명령이 아니었고, 성재경의 계획에도 없었던 행위였다. 애초에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용기였다. 아니, 무모함.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각하. 아직 장군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타이밍을 놓친 이나활은 기우희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따귀 얻어맞지 않으려거든 그거라도 해야 했다.

“다 좋아.”

기우희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다 좋다고. 아버지의 자식 농사. 어쨌든 씨 뿌린 건 당신이고, 농부에겐 작물이 잘 자라든, 말라 죽든, 신경 쓰지 않을 자유가 있으니까.”

총통이 기침했다. 목구멍에서 가래 끊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있잖아.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잖아. 작물을 돌보지 않았으면 수확할 자격도 없어. 말라붙은 땅에 겨우겨우 달라붙어서 물도 거름도 없이 힘들게 자란 작물을, 씨를 뿌렸다는 이유만으로 뽑아 갈 권리는 없다고.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총통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기우희가 연신 뿜어 대는 담배 연기 때문에 눈도 똑바로 뜨지 못했다. 책상에 벗어 둔 안경은 이나활이 슬쩍했다.

“휴먼 드라마가 사람들 다 망쳐 놨어. 특히 당신 같은 무책임한 부모들의 훌륭한 자위 도구야.”

기우희의 신랄한 말투는 신해범을 닮았다.

“애새끼 클 때는 관심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니 애비다, 한다고 감동할 놈이 어디 있어? 그런 건 환상이야. 핏줄의 힘? 웃기지 마. 만난 순간 불꽃이 파바박 튀는 일은 없어. 감동도 눈물도 없어. 그렇지 않냐, 동생아?”

“예. 누나.”

“장군님이라고 불러. 누나라고 부르다가 입에 붙으면 고치기 힘들다.”

“예. 장군님.”

이나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원하는 바를 이룬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물론 기우희는 배다른 동생의 꿈을 이뤄 줄 생각 없었다. 감히 내 생식 능력을 약점 삼아 거래를 제안해? 완전히 잘못 짚었어.

“윽!”

성재경이 총통의 오른 손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조그만 기계는 왕실 근위병들을 불러들이는 용도였다. 하단에서 조그맣게 빛나는 빨간 불이 보였다. 평소에는 녹색일 터였다.

기우희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책상에 놓여 있던 독서대가 날아갔다. 여태 흐르던 음악 소리가 사라졌다. 기우희가 내던진 독서대가 레코드판을 직격해 끔찍한 소음이 서재를 채우고 흔들었다.

“난 기회를 줬어, 아버지.”

기우희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무슨, 기회를… 말이냐!”

총통이 버둥거렸다. 성재경은 지난번과 같다고 생각했다. 권주혁이 죽었을 때. 그래도 역할은 조금 변했다. 과거에는 신해범과 함께했고, 자신이 그를 돕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재경 자신이 권일혁 총통을 제압하고 이나활이 돕는 중이었다.

사람이 이렇게도 성장하는구나.

이런 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재경은 고개를 숙인 채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되도록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나중에 떠올리게 되니까. 그때 이렇게 했으면, 저렇게 했으면 더 나았을 거라는 무의미한 상상 때문에 잠 못 이루게 되니까.

“무슨 기회냐고? 진짜 몰라서 물어?”

기우희의 검은 손끝이 은색 총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썅년이고, 아버지는 불쌍한 왕으로 남을 기회. 이 일이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로 역사에 기록될 기회 말이야.”

“쿠데타?”

총통이 인상을 찌푸렸다. 쿠데타는 지배 계급 내부에서의 권력 이동이었다. 왕자나 공주가 아버지를 몰아내거나, 귀족이 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옹립하거나. 그 때문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왕은 정치적 행보와는 별개로, 도덕적인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주군을 배신한 변절자. 한쪽이 비난을 받을수록 반대쪽에게는 동정의 시선이 가기 마련이었다. 쿠데타로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왕은 쫓겨날 만한 이유가 있을지언정 측근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역사가들의 은근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한 현상의 바탕에는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도 ‘어차피 기존의 기득권층’이라는 인식이 깔렸다. 쉬운 말로 ‘그 나물에 그 밥’. 원래 잘 먹고 잘살던 놈들끼리의 왕관 주고받기.

그러나 혁명은 아니었다. 혁명은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반전이었다. 혁명으로 쫓겨난 모든 왕이 처형당하는 건 아니지만, 국가의 주체가 바뀜으로써 근본적인 사회 변혁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혁명으로 쫓겨난 왕은 동정표를 받지 못했다. 실제보다 더한 폭군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기우희는 그걸 말하고 있었다.

“내가 새 이름 지어 달라고 한 거 말이야. 그거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냐. 이 나라에서 성과 이름은 내 생각보다 더 중요했어.”

권씨가 아닌 기씨라서. 이름에 돌림자가 들어가지 않아서. 권주혁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뒷방 늙은이들에게 무시당할 정도로.

기우희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그래도 고마워. 아버지. 내 부탁 거절해 줘서. 내가 기씨가 아닌 권씨고, 왕가의 돌림자를 가지고 있었으면, 오늘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로 기록되겠지. 내가 손쓸 수 없는 미래의 역사에.”

권씨가 권씨를 죽인 건 의미가 없었다. 공주가 왕을 죽여 봤자 어차피 왕조는 그대로였다. 국민들은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씨가 권씨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다면.

“나라가 뒤집힌다고 말하지. 그런 걸.”

기우희는 리볼버를 총통의 머리에 겨냥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

“이유 많아. 근데 안 들어줄 거잖아.”

총통은 친위대를 불렀다. 머지않아 그들이 찬란관에 들이닥칠 것이다.

“어차피 이해도 못 할 벽창호한테 내 불행한 과거사 읊어 댈 만큼 멍청하지 않아. 그래도 딱 하나만 말할게. 선화는 그렇게 죽어선 안 될 애였어. 걔는 정말….”

인상을 찌푸린 기우희가 말했다.

“생각이 안 나네. 걔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미간에 주름이 파이도록 얼굴 근육을 찡그렸지만, 눈물은 맺히지 않았다. 이미 다 말라 버려서일 것이다. 그 파멸의 날에.

총통의 격렬한 몸부림에 성재경과 이나활이 애쓰는 중이었다. 기우희는 총을 고쳐 잡았다. 이상하게 손가락이 무거웠다.

한때는 어머니의 성씨가 싫었다. 출생증명서에 적힌 이름자를 보면 분통이 터졌다. 왜 나는 권씨가 아니고, 왕실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권일혁은 비겁자였다. 그는 강한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 자식들을 내팽개친 게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권일혁에게는 후계자를 키울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모친에게 양육의 책임을 떠넘기고, 그걸 승계 전쟁이니 뭐니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다.

유치하다. 책임감도 없다. 그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당신이 불쌍하지는 않다. 불쌍한 건 응당 받아야 할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죽어 간 아이들이다. <힐 스톤 그로우>에 묻혀 버린 수많은 아이들. 여자들. 그 일에 관계된 다른 목숨들.

<힐 스톤 그로우>는 무덤이었다. 장두현의 제국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의 뼈가 나왔다. 그곳을 조사하기 시작할 무렵, 장두현은 전부 동물 뼈라고 주장했으나 현대 의학 기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숲을 깎고 드넓은 부지를 파헤치면서 드러난 사실이었다. <힐 스톤 그로우>에는 사람 뼈가 더 많이 묻혀 있었다.

얼마나 쉬웠을까. 평안 장씨의 앞날에 방해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게.

장두현은 치밀하게 시신을 처리할 필요도 없었다. 그곳에 풀어 둔 짐승들이 알아서 해 줬다.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존재 불가능한 생태계가 유지되는 이유도 그거였다. <힐 스톤 그로우>의 포식자들에게는 특식이 있었다. 힘들여 사냥하지 않아도 거저 주어지는 고기. 죽은 사람의 내장과 살점.

“그건 네 원대로 해 주지 않았냐!”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나를 위해서야. 아버지의 자존심 문제였지.”

기우희는 개구쟁이 소녀처럼 키득거렸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고. 내가 없는 좆까지 빠지게 뺑이 치는 동안, 아버진 뒷짐 지고 구경만 했잖아.”

“나는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지원을…!”

“그건 유미현이 했지. 장두현 영혼의 단짝들을 하나하나 찾아간 것도 그 여자고. 유미현도 아버지 밑에서 고생 많이 했더라. 본가니 분가니, 내가 그런 거 말로만 들었지 실상은 잘 몰랐는데.”

지금도 떠올리면 어금니가 갈렸다. 장두현 제국을 무너뜨릴 때, 장승희가 처형당할 때. 권일혁은 철저히 자기만을 보호했다. 그는 삶에 배신당한 표정으로 침통함을 토로했다. 자기가 몸져누운 동안 외척의 세도 정치가 극에 달했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그 와중에도 미국행, 아니 필리핀에서 받은 심장 이식 수술은 철저히 감췄다.

장승희의 처분을 논하기 시작했을 때는 한층 가관이었다. 권일혁은 아내를 보호하기는커녕 본인이 나서서 강력한 처분을 논의했다. 여성 인권 단체의 분위기를 살펴야 하는 입장의 유미현이 당황스러워할 정도였다.

해동문국 역사를 통틀어 부정을 저지른 국모는 많이 있었다. 비천한 신분의 남성이 대다수였지만 동성애자도 있었다. 남편의 형이나 동생과 동침한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부정한 관계만으로 극형에 처한 경우는 드물었다. 전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아주 옛날이었다.

왕실 변호사는 총통에게 장가를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자고 했다. 장가의 모든 걸 ‘합법적으로’ 빼앗고, 오랫동안 왕실의 외척으로 군림하며 덩치를 불린 세도가를 끝장낼 기회였다. 그러나 총통은 모든 절차를 거부하고 자기 식대로 해결했다.

사실상 즉결 처형이었다. 판결이 정해져 있는 재판이었다. 그때 많은 국민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 장승희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총통 부인이 풍기 문란죄로 죽을 줄이야.

온 세상에 가득했었다.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는 탄식이.

“왜 그렇게까지 했어?”

총통의 눈이 어두워졌다. 성재경에게 붙잡힌 상황에서도 고개를 흔드는 게, 뭔가를 부정하는 모양새였다.

“신해범 질투했지?”

기우희가 스위치를 정확하게 눌렀다. 총통의 몸을 잡은 성재경이 단박에 알아챘다.

권일혁 총통은 아내의 불륜 상대가 신해범이라는 사실에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상처라고 할까. 애새끼처럼 징징 짜며 감정적으로 구는 게 딱 ‘상처받은 남자’의 표본이었다.

“신해범 살려 준 거 후회했지?”

총통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신영산의 아들을 살려 줌으로써 공포 정치 독재자라는 타이틀에서 한 발자국 비켜났지만, 그 한 발자국이 급소를 걷어차는 킥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으리라.

기우희는 자존심 세울 필요 없다고 말했다.

“후회해. 아버지 인생에서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 중에 하나니까.”

하나는 신해범을 살려 준 것. 둘째는 나를 군대에 집어넣어 신해범과 만나게 한 것.

기우희는 생각했다. 지금껏 이렇게 머리를 굴려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처절하게 생각했다. 권일혁 총통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죽은 동생들이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장승희도, 권씨 형제에 대한 것도.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최대한 저열하게. 비겁하게.

권력의 정점에 오른 남자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만한 말이, 도대체 뭐가….

기우희는 몸을 숙이고 리볼버 총구로 총통의 이맛살 주름을 꾹꾹 눌러 폈다. 그렇게 속삭였다.

“신영산 와이프도 어렸는데.”

“우희야.”

“똑같이 어린 여자 꼬셔서 결혼했는데, 신영산 아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당신 딸은 패륜을 하네.”

“우희야!”

“당신은 신영산한테 졌어.”

성재경은 눈을 감았다. 기우희의 중얼거림은 총성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붉고 뜨거운 세상이 의식의 저편으로 훌쩍 물러났다가, 도로 성큼 다가섰다.

기우희의 두 손이 성재경의 양 뺨을 감싸고 있었다.

“정신 차려.”

귀가 먹먹했다. 성재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방금 살인을 저지른 여자였다.

“다친 줄 알았잖아.”

“…아닙니다.”

피 냄새가 지독했다. 죽음의 기운이 자욱했다. 성재경은 기우희에게 와락 안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책상 밑에 웅크려 있던 이나활이 일어섰다. 그는 총통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연신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가 말했다.

“어쩝니까. 유언이 ‘우희야’입니다.”

총통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성재경과는 달리, 이나활은 약간의 핏방울을 제외하면 말쑥했다. 책상이 방패가 되어 준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한 말이 딸 이름이라니. 정말 본새 안 나네요.”

“인정하지 않은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하면 되지.”

기우희가 자조했다.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눈으로 망자를 보았다.

“오고 있군.”

왕실 근위대였다. 위병들이 곧 서재로 들이닥칠 터였다. 물론 그중에는 기우희의 친위대도 있었다. 전직 풍기 교육대원들을 근위대에 끼워 넣는 수고를 괜히 감수한 게 아니었다.

“내 뒤에 서 있어.”

기우희가 턱짓했다. 이나활은 냉큼 물러섰지만, 성재경은 두 발에 힘을 주고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있겠습니다.”

“뒤로 가.”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각하를 찾으라는 명령 같은 웅성거림이,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철컥철컥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뒤로 가라, 대위. 아니면 네 머리에도 바람구멍 난다.”

기우희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버지의 터진 머리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책상을 적신 피가 기우희의 옷자락에도 스며들었다.

“대위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성재경이 이나활의 손을 뿌리친 순간, 굉음과 함께 서재가 열렸다. 각하를 외치며 들어올 줄 알았던 근위대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오.”

기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난장을 쳐 놨구나.”

근위대의 필두에 원세영이 서 있었다.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상황을 파악한 그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 한숨을 푹 쉬었다.

기우희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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