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최유신 (35/39)

권일혁 총통의 사인은 기우희 준장이 직접 이마에 대고 쏜 탄환 한 발이었다. 두개골을 관통한 총알은 산산조각 난 채 총통의 뇌 속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우희는 절명한 총통을 찬란관 지하로 끌고 가 그곳에 있던 AK 소총을 난사했다. 시신은 한순간에 벌집이 되었다.

새벽 두 시에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 최유신은 기우희가 총통의 사인을 감추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시신을 구태여 훼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우희는 총통의 사인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육신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권일혁 총통의 심장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최유신은 기우희가 총통의 시신을 훼손한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권일혁의 시체는 반드시 부검되어야 했다. 총통의 몸에 상처가 하나뿐이라면, 그래서 누가 봐도 사인이 명확하다면, 아직 총통으로 취임하지 못한 기우희로서는 시체를 부검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왕족의 시신에 손을 대는 일은 귀족의 경우보다 까다로워서, 직계 혈족의 동의가 있어도 부검하기 쉽지 않았다.

반면에 사인이 애매하다면 복잡한 절차 없이 메스를 댈 수 있었다. 총통의 시체는 크게 훼손되어서 검안만으로는 사인과 사망 시간 추정을 정확히 알지 못할 상태였다.

기우희는 처음부터 본인이 총통을 쐈고, 머리에 쏜 최초의 한 발이 사망 원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왕실파는 계속해서 이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기우희의 왕위 계승 자격은 인정하면서도 어머니의 출신성분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었다. 무정부 상태를 확보한 뒤 자기들의 ‘고급스러운’ 취향에 맞는 왕위 계승자를 찾아내려는 속셈이었다. 기왕이면 지지기반이 없어서 자기들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놈으로.

지금 기우희는 인기가 너무 많았다. 풍기교육대의 내부 고발자이며, 현 시국 압도적인 정치력을 자랑하는 유미현을 등에 업은 그는 이 나라 왕족과 귀족들의 존속에 위협적이었다. 기씨와 유씨는 친서민적인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왕실파는 총통의 시신을 부검하는 자리에 본인들이 참석해야 한다는 다소 ‘불경스러운’ 요구를 해 왔다. 정확한 사망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총통의 장례를 치를 수 없으니. 임시방편에 불과한 시간 끌기였으나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기우희는 왕실파의 모든 요구를 승인했다. 

신룡관에 카운터가 설치되었다. 특수 부검실을 뜻하는 ‘카운터’로 왕족과 귀족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왕실 의료 팀을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했다. 유미현은 그들이 데려온 각자의 주치의를 검시관 자격으로 부검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불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감 놔라, 배 놔라, 말 많은 놈들은 정작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총통의 부검일 하루 전, 왕실 의료 팀 소속 의사들이 대거 사퇴했다. 총통의 몸에 메스를 댔다가 후일 어떤 덤터기를 뒤집어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제일 컸다. 암묵적인 의료계 카르텔도 문제였다. 왕실 의료 팀의 노후 대비 수단이 변방의 왕족이나 귀족가의 주치의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건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 자리는 개인의 실력보다는 인맥으로 얻어지는 자리였다.

밉보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후일 누구의 몸을 모시게, 아니 돌보게 될지 모르니까.

결과적으로 왕실 의료 팀에 남은 의사는 둘이었다. 팀 내 왕따였던 최유신과 유미현의 뒷배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한 공다현.

공다현은 여성이기 때문에 총통을 부검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풍기 교육대 출신 의사’ 최유신이 권일혁 총통을 부검하는 상황이 되었다.

병리학 전공이 아닌 의사가 왕족을 부검하는 일은 최초였다. 그 때문에 거센 논란이 일었으나, 최유신에게는 황효제를 부검한 이력이 있었고 유미현과 인연이 있는 법의학자 천우원이 ‘총통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검시관으로 참여했다.

천우원은 좋은 의사였다. 그는 뒷짐 지고 구경하는 다른 검시관들과는 달랐다. 비록 총통의 몸에 손을 대진 않았으나 적극적으로 최유신을 보조했고 법의학자로서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선배의 말을 들으며, 최유신은 유미현이 왜 그를 황효제 부검 때 부르지 않았을까 의아해했다. 이유는 다섯 시간에 걸친 부검이 끝난 뒤에 알았다.

천우원은 불과 삼 년 전, 센터장으로 근무하던 기관에서 화학 약품 테러를 당한 뒤 두 손을 심하게 떨었다. 보조 기구까지 동원해도 메스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 천우원이 근무하던 센터는 자살자들을 주로 부검했는데,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유가족이 센터 내에 산업용 세척제 ‘벤더마일’을 살포했다.

공장에서 오래된 기계들을 세척하는 용도의 벤더마일은 녹을 제거하고 부식을 방지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직접적으로 섭취하지 이상 인체에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정 사용은 불허하고, 공장 직원들이 사용할 때도 전원이 마스크와 작업복, 장갑을 착용해야 하는 유해성 약품으로 분류되었다.

천우원은 센터의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각 층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 오염된 공기에 장시간 노출되었고, 건물 내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구조되어 목숨은 건졌다. 다만 중추 신경계 손상을 입어 지금껏 심한 수전증에 시달렸다. 최근까지도 똑바로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어려웠다 하니 황효제 부검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도 이해가 됐다.

그래도 천우원은 훌륭했다. 비록 손은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뇌에 박힌 총알이 직접적인 사인이라는 기우희의 말이 진실임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의 몸속에 든 심장이 특별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곳의 모든 검시관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개중에는 총통이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받은 일을 아는 자도 있었지만, 그게 ‘심장 이식 수술’이라는 핵심은 누구도 몰랐다. 직접 총통의 가슴을 연 최유신도 기겁했다. 한평생 법의학자로 일하며 별의별 시체를 봐 온 천우원만이 간신히, 정말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최유신을 대신해 천우원과 공다현이 브리핑했다. 카운터 밖에서 기다리던 왕족과 귀족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각자의 주치의들, ‘카운터’에 들여보낸 검시관들에게 매달리다시피 했으나 검시관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을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는 노릇이었다.

그때 이미, 총통의 사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비밀리에 심장 이식을 받았다는 점만이 중요했다. 기우희는 충격에 빠진 사람들을 적림부로 불러들였다. 그곳에는 총통의 비밀을 밝혀 줄 이나활과 두 가지 선택지를 구비한 유미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최유신은 적림부로 향하지 않았다. 그곳으로 갈 만큼의 에너지가 더는 없었기에. 공다현은 적림부로 들어가 기우희의 옆에 섰지만, 천우원은 최유신의 옆에 남아 주었다. 그렇게 최유신은 천우원의 아픈 과거를 알게 되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삼 년 전이면 그렇게 옛날도 아니고, 그만한 사태라면 충분히 이슈가 됐을 텐데….”

“뉴스는 나왔었어. 그런데 이슈는 안 됐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원래 사람들은 그런 일에는 관심 없어. 연예인 스캔들 같은 게 훨씬 재미있지. 자네도 그렇지 않나?”

“선배님, 저는….”

“난 괜찮아.”

천우원이 웃자 얼굴의 주름이 깊어졌다. 최유신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천우원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웃을까. 웬 정신병자의 만행으로 인생이 망가졌는데.

“나도, 직원들도 보상받았어. 수석 각하가 큰 도움 주셨지.”

최유신은 천우원이 건네준 핫팩을 주물렀다. 유미현이 국가 유공자 지원 재단 책임자임은 알았지만, 의료계에도 선행을 베풀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오늘 와 주신 거군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천우원이 있어서 부검을 끝까지 마쳤다. 최유신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전혀. 손 떠는 늙은이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얼마나 되겠나.”

최유신은 오늘, 솟아오른 불꽃처럼 보일 만큼 새빨간 정장을 입고 온 유미현을 떠올렸다. 재킷의 숄더 패드가 얼마나 두꺼운지 가까이 갔다가는 찔릴 것 같았다.

“솔직히, 저는 수석 각하가 무섭습니다.”

“왜?”

“뭐랄까… 정이 안 가는 사람입니다. 너무 완벽해서 그런가.”

천우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신해범에 대한 이야기는 엄금이었다. 그래도 유미현에게 정이 안 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유 수석이 그런가?”

“인간미가 없지 않습니까? 사석에서 만나면 숨 막힐 거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은 있네만.”

천우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 수석이 계산적인 사람이라도, 나는 좋아.”

“예?”

천우원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미현이 내민 도움의 손길이 순도 백 퍼센트의 선행은 아니라는 걸. 그 역시 필요에 의해서 위기에 직면한 센터를 도운 거였다. 사업가와 정치인은 결코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는다.

“위선이라도 좋다, 이 말이야.”

유미현에게 ‘개인적으로’ 법의학자가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아직 일할 수는 있지만 몸이 망가져서 그 어디서도 받아 주지 않는 불량품은 유미현이 원하는 조건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뭐라도 괜찮았다. 유미현의 선행이 위선이라도. 동정이라도. 은혜 갚는 까치가 될 준비는 되었으니.

천우원은 최유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수전증이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의 손은 거짓말을 못 하는데, 병 때문이라는 이유로 거짓말을 해내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병이라는 이유로 감췄다.

“내가 불쌍해 보이나?”

“아닙니다. 선배님.”

“솔직히 말해도 되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최유신은 눈을 깜박거렸다. 기우희나 진치우, 신예나와는 달리, 그는 유미현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다. 그건 신해범을 배신하는 행위 같았다.

다른 이들을 탓하는 건 아니다. 최유신은 자기가 기우희, 진치우, 신예나보다 신해범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신해범이 유미현에게 밀려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천우원의 케이스도 그랬다. 정치인은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는다. 결코.

기우희의 옆자리는 신해범의 몫이었는데.

신해범이 받은 정착 지원금이 코딱지만 한 수준이라는 것을 안다. 그나마 기우희와 신예나가 긁어모아 준 돈이 아니었다면 신해범은 정말 무일푼으로 해동문국을 떠날 뻔했다.

유미현이 신해범에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해범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새 신분을 위조하는 수고로움 이상으로 많은 걸 얻었다. 앞으로 더 많이 얻을 터였다. 기우희의 성장 속도에 맞춰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그러니까 유 수석도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너무 깊이 듣진 마십시오. 제가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최 선생. 이것 받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천우원이 꺼낸 건 담배였다. 그는 신룡관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

최유신은 에라이, 했다. 어차피 총통은 죽었다. 지금 앉은 자리도 계단참의 양옆이라 문을 지키는 위병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한 대 피우겠습니다.”

천우원이 말했다.

“민심이 천심이다. 유 수석은 그걸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살아온 이유가 있지. 내 생각에 이 나라에는, 곧 민주주의가 들어설 거네.”

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거친 바람이 회색 연기를 흩뜨리고 휩쓸었다. 천우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주주의.”

최유신은 천우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나이 든 신사는 옛 공화당의 일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경제약과 대일전차, 유성식품의 3대 기업이 나라를 먹여 살리던 시절. 권일혁의 무자비한 군부 독재가 나라를 집어삼키기 전.

“괜찮으십니까? 그런 말씀 제게 하셔도.”

“최 선생도 솔직하게 말했잖아. 유 수석이 무섭다고. 나는 굳이 따지자면 그 사람 좋아하지만, 가끔 등골이 서늘할 때가 있어.”

천우원이 담배 연기를 내뿜고 클클 웃었다.

“그리고 최 선생, 자네도 이 바닥 사람이잖아.”

이 바닥 사람.

최유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걸터앉은 계단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온몸이 물에 젖은 자루처럼 축축 늘어졌다.

기우희가 총통을 죽인 날, 그날은 눈이 내렸다. 세상을 덮은 눈이 채 녹지 않아 길 곳곳에 얼어 있었다. 최유신은 뉘엿뉘엿 지는 태양 빛에 반짝이는 얼음 조각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지만 감지 않았다.

“이쪽, 맞지?”

“예. 저도 뭐… 그렇지요.”

“기 장군이랑 풍기대에서부터.”

“잘 아시네요. 선배님.”

“최 선생도 알음알음 유명해. 군사 학교 나왔다면서.”

“예. 거기서 신해범 만났죠.”

무심코 내뱉은 최유신은 아차 했지만,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신해범이라….”

“친구였습니다. 그 군사 학교에서 만났고요. 풍기대는 그 인연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최 선생 솔직하네.”

“숨길 것 있습니까? 어차피 다 알려진 얘긴데요. 알음알음.”

“그래도 말하기가 쉽지 않아. 사람 심리가 그렇잖나. 자기 허물처럼 보이는 일은 되도록 감추지. 꼭 털어놔야 할 상황이 아니면.”

“허물이요?”

최유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도 너울댔다.

“풍기대도, 신해범도 저한텐 허물 아닙니다.”

“소중한 추억인가?”

“제 군의관 인생을 통틀어서, 그때가 제일 살 만했습니다.”

몸이 편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의료인의 직업 특성이 그랬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편하면 일할 맛이 났다. 마음이 편하려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했다.

신해범과도 마냥 하하호호 웃으면서 지낸 건 아니었다. 의견 충돌도 있고 걱정도 됐다. 특히 정류진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최유신은 신해범이 답 없는 고집쟁이라고 생각했다. 저 독불장군을 바로잡을 방법이 있겠냐고 한숨 쉬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최유신은 신해범이 단명할 줄 알았다. 방법은 아마도 자살. 빠르면 서른다섯 살 이전에, 늦어도 마흔은 되지 못하고.

타인의 목숨을 함부로 가늠하면 안 된다지만….

최유신은 핫팩을 꽉 쥐었다. 이제는 아무리 주물러도 더 뜨거워지지 않았다. 달아오를 만큼 달아올라서 식을 일만 남았다.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이 꼭 그랬다. 잡으면 손이 델 정도로 뜨겁지만, 어째서인지 식을 일만 남은.

신해범의 온도는 충용절이 정점이었다. 그날 두 사람이 죽었다. 신해범과 권주혁. 두 사람 다, 원래는 그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다. 정류진이 아녔다면.

정류진은 신해범을 더 빨리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신해범이 차갑게 식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최유신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지금쯤 신해범의 온도는 어떨까. 너무 뜨겁지도, 딱딱하게 굳을 만큼 식지도 않은 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좋은 친구였나 보군. 신해범이 자네한텐.”

“어디 가서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요.”

“신해범 라인으로 들어왔는데, 용케 기 장군이랑 같이하게 됐군.”

“따로 얘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까라면 까는 거지.”

최유신은 그렇게만 말했다. 신해범을 변호하는 일은 무의미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기우희가 국민들의 믿음, 신뢰, 인기를 단숨에 사로잡은 이유는 신해범이 개새끼라서였다. 신해범과 권주혁의 악행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기우희와 유미현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특히 기우희의 인기가 단기간에 급속도로 수직 상승 했다. 이미 다년간의 정치 생활로 인지도와 지지율을 확보한 유미현의 보좌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기우희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공주였다. 그의 인생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지 메이킹 가능한 요소가 차고 넘쳤다.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건 구설수에서 벗어날 틈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도 좋다. 호기심은 관심이 되고, 관심은 호감이 되니까. 기우희는 자신의 ‘사연 팔이’에 거부감이 없었다. 불행한 과거사를 떠벌리기 좋아하는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신해범의 방식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유신은 기우희의 옆에 제 의지로 남았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이유로 억지로 붙들리지도 않았다. 기우희는 현존하는 해동문국 권력자들 중 신해범과 가장 많이 닮았다. 지금의 기우희를 만든 건 유미현이 아니라 신해범이었다.

기우희 옆에 있으면 신해범이 보인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순 없기에, 최유신은 능청을 떨었다.

“그래도 말입니다, 기 장군 옆에 있으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습니다. 선배님도 이참에 광성에서 자리 잡으시는 게 어떠….”

최유신과 천우원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총소리지?”

“총성입니다.”

한 발이 아니었다. 두다다다, 하는 연발 사격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신룡관 지붕에 앉아 있던 새 떼가 무리 지어 날아갔다.

“이게 대체….”

“적림부로 가지, 최 선생.”

두 개의 담배꽁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리의 진원지는 적림부였다. 신룡관 집무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 선생!”

위병에게 가로막힌 천우원이 소리쳤다. 뒤돌아본 최유신은 그의 표정과 손짓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어서 가라.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

최유신은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뒷문으로.

적림부로 들어설 방법은 정문 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었다. 관계자들 사이에서 ‘뒷문’이라 불리는 동문과 서문. 물론 그곳에도 위병은 있지만, 정문에 비해 경비가 철저하지 않아 드나들기 쉬웠다. 천우원이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유신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위병과 실랑이할 때 얻어맞은 왼쪽 광대뼈가 얼얼했다. 내일, 아니 몇 시간만 지나면 시꺼멓게 멍이 올라올 터였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었다.

위병은 총을 들었지만 최유신이 왕실 의사로 일하며 알게 된 몇 가지 중 하나는 단순 경비를 서는 위병들의 총에는 대부분 실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대답이 달라서. 탄환을 아끼기 위해서일 수도, 오발 사고 방지 목적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를 아는 덕분에 최유신은 무장한 군인에게 적극적으로 덤볐다. 그러나 천우원은 아니었다. 그는 나이가 많고 수전증도 심한 노인이었다.

최유신은 자기가 그의 몫까지 해야 한다고 느꼈다. 총성과 피비린내는 영혼의 단짝 친구였다. 비록 양손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최유신은 의료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적림부의 문은 열려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활짝.

그리고 최유신은 가슴팍을 움켜잡고 바닥에 쓰러진 늙은 귀족과 눈이 마주쳤다.

“…….”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던가. 최유신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한 손으로 피가 솟는 상처를 움켜쥐고 다른 한 팔로 힘겹게 바닥을 기는 귀족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피를 뒤집어쓴 얼굴이 본래의 이목구비를 짐작 못 할 정도로 일그러져서. 부릅뜬 두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으… 어어….”

최유신은 자신에게 뻗어 오는 손을 응시했다. 주름진 손가락에 낀 반지가 보였다. 멀어서 무슨 보석인지는 몰랐다. 다만 알이 크고, 샹들리에 불빛에 반짝거린다는 점만 인지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겨우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최유신은 환부를 쥐고 쓰러진 귀족에게 다가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절명했을 것이다.

“이게… 이게….”

정신이 아득했다. 고막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최유신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성한 적림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기에.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아니면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건가?

그래서 고사포로 이, 생지옥을 만든 거야?

“이 미친….”

상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최유신의 부르짖음은 기우희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사포의 연발 사격에 일시적으로 청각이 마비되었다. 정신도.

하지만 두 눈은 멀쩡했다. 기우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베레타를 빼 들었다. 이미 걸레짝이 되었지만 희한하게도 숨이 붙어 비척거리는 반송장의 뒤통수를 겨냥해 쐈다. 송장은 최유신의 바로 앞에서 쓰러졌다.

“…….”

얼굴이 후끈후끈했다. 최유신은 무심코 뺨을 닦았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흠뻑 뒤집어썼다. 지독한 피 냄새에 코가 마비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선생님.”

화들짝 놀라서 손을 뿌리쳤다. 최유신은 눈꺼풀을 빠르게 서너 번 깜박였다. 어쩐지 낯이 익은 근위병이었다. 그는 이 생지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최유신을 창가로 이끌었다.

두꺼운 방탄유리가 온통 시커먼 색이었다. 녹은 타르를 처발라 놓은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뭐가 묻은 게 아니라 밖에서 가린 거였다. 근위병은 지시를 받고 대기하던 인원이 덧창을 내렸다고 말했다.

“계획? 이게?”

“그렇습니다.”

최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무심코 손등으로 눈을 비비려다가 위험한 행동임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근위병의 낯이 익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이 자의 이름은 마강희였다. 신해범이 장진에서 데리고 온 인원 중 한 명이었다.

“누구 계획? 언제부터?”

“보시다시피 장군님과 수석 각하의 뜻입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길게 풀어서 말했지만, 본인은 모른다는 얘기였다. 마강희는 어디까지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졸(卒)이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긴 웃대가리를 쑤셔야 들을 수 있겠지.

“선생님!”

마강희가 소리쳤다. 최유신은 무시했다. 그는 적림부 대회의장의 최고 상석으로 돌진했다. 그곳에 기우희와 유미현이 있었다. 원세영과 공다현의 모습도 보였다. 고사포의 총격으로부터 벗어난 안전지대. 그곳은 학살자의 바로 뒤였다.

달려가면서 몇 번이나 넘어지고, 굴렀다. 두 손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로 흠뻑 젖었다. 무릎 아래가 푹 젖어서 무거웠다.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기도 여러 번이었다.

최유신은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은 살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기 장군!”

마침내 도달했다. 기우희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 위치에.

“나 좀 봐!”

최유신이 선 곳은 고사포의 바로 앞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목숨을 걸고 나선 거였다.

“나야 나! 최유신! 밖에서 소리 들었어!”

구태여 이름을 밝힌 건 기우희가 피로 물든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서였다. 최유신은 고사총에 너덜너덜해지기 싫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해!”

베레타를 집어넣은 기우희가 눈을 감았다. 최유신은 기다렸다. 무슨 말이든 들을 생각이었다. 기우희니까.

하지만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최유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네….”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자조도 아니었다. 기우희는 자기가 벌인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최유신은 눈을 깜박였다. 마강희에게 붙들려 창가로 가면서, 그는 피로 물든 문을 봤다. 스치듯 잠깐이었지만 똑똑히 봤다. 문고리에 굵직한 쇠사슬이 끊어진 채 주렁주렁 매달렸다.

문을 안에서 잠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필사의 힘으로 끊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게 적림부의 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에 펼쳐진 참상이나 코를 찌르는 피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유신은 부정하고 싶었다. 기우희가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이게 뭐가 달라.

권일혁 총통이 저지른 ‘백조교 사태’와 다를 게 뭐냐고.

“선생님.”

최유신은 자신을 붙잡는 마강희를 밀치고, 단숨에 기우희의 앞에 섰다. 그의 멱살을 붙잡자 원세영이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다.

“닥쳐! 이 꼬라지나 설명해!”

“…무슨 설명이 필요한데.”

“뭐라고?”

“내가 이럴 줄 몰랐어?”

기우희의 목소리는 푹 잠긴 채였다. 최유신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라 들여다봤다. 차라리 눈이라도 풀렸으면 했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니까.

그러나 기우희는 멀쩡했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을 뿐, 술 한 모금 하지 않은 상태였다. 백 퍼센트 맨정신이었다.

“이것도 오래 참았어.”

“참았다고? 이러려고? 그동안?!”

“사실은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

유미현이 끼어들었다. 최유신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뭐라고요?”

“총통 취임식 다음이었어야 했다고. 오늘 같은 일은.”

또각, 높은 굽 소리가 뇌리에 박혔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유미현은 최유신의 굳은 얼굴을 보며 기우희를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오래된 숙원이라.”

그러고는 기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유신은 아연했다. 유미현이 이런 일에 공모했을 줄이야.

“왜. 충격인가?”

“그럼!”

최유신은 다시 한번 기우희의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역공을 당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이 허공으로 떴다. 군사 학교에서 익힌 호신술을 써먹을 틈도 없었다. 최유신은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엎어진 꼴로, 오른팔이 뒤틀리는 고통에 소리 질렀다.

“아아악!”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잘못이지.”

기우희는 최유신을 완전히 깔고 앉았다.

“세 번째는 뭐게?”

“몰라! 아악!”

“고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세 번째는 용서하지 말란 거야.”

기우희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최유신은 왼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고 비척비척 일어나 섰다. 원세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뒷문으로 나가시죠.”

“싫어. 안 가. 못 가!”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지 마시고.”

“싫다고! 가려면 댁네들이 가! 난 이게 무슨 대참산지 알아야겠어!”

“보면 몰라?”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기우희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어정쩡하게 선 마강희에게 넘겼다. 마강희는 곧장 주머니에서 마른 손수건을 꺼냈다.

기우희는 오랫동안 손을 닦았다. 손톱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문질러 닦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다는 아니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옛날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굴지는 않거든. 난 선택권을 줬어. 여기 있는 수석 전략가가 증명할 수 있어. 그렇지?”

유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선택권을 줬다’는 게 무슨 뜻인지 설명했다. 총통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을 적림부로 불러들여 이 대회의장에 앉혔을 때, 기우희는 그들에게 살 기회를 줬다. 권일혁의 죄와 그에 따른 처분을 받아들이고 새 총통을 맞이할 것인지, 말 것인지.

대회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린 자들은 성재경의 친절한 호위를 받아 동문으로 나갔다. 두 개의 ‘뒷문’ 중에서 동문이 출구였던 이유는 서쪽 복도에서 육중한 고사포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림부의 문이 걸어 잠겼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바깥의 위병들이 덧창을 내렸고, 기우희는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이번 안내자는 이나활이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잘못이지.’

난장이 된 적림부에서 죽어 나간 이들은 두 번째 기회를 잡지 않은 자들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을 텐데도.

“…대공 화기를 실내에서 쓰다니.”

“탱크는 아니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최유신은 풀썩 주저앉았다.

“신룡관이 무너질 뻔했어.”

“원래는 지하실 쓰려고 했어. 근데 거기까지 끌고 가기도 일이라.”

기우희가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훼손이 심하진 않은데.”

“이게 안 심해?!”

“피랑 시체 때문에 그래. 저것들만 치워도 봐 줄 만할걸.”

이제 최유신은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기우희가 내민 손을 멀거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어.”

“그래. 나쁜 게 아니고 무식했지.”

“나 피 묻어서 더러워.”

“그럼 이렇게 할까.”

기우희는 최유신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성인 남성을 한 손으로 가뿐히 일으켜 세우는 모습에 원세영이 감탄했다.

“흐느적대지 말고 똑바로 서.”

“이 상황에 미치지 않은 것만도 용하거든?”

최유신은 이제 어쩔 셈이냐고 물었다. 기우희는 태연히 대꾸했다.

“우리의 전 지도자는 국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필리핀 정부에 용서를 구하는 건 둘째 치고, 이 일이 국민들에 알려지면 가뜩이나 류연비 설계도 때문에 열 받은 민심이 폭발해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 난 그런 사태를 사전에 막았어.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련하시겠어. 우리 기 장군.”

원세영이 무심코 끼어들었다가 유미현의 눈총을 받았다. 그는 냉큼 입을 다물고 공다현과 함께 물러나 섰다.

“칭찬.”

최유신은 허탈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이건 단순히 사고를 쳐 놓고 나중에 수습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고. 어? 여기 죽은 사람들 봐.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진짜 싫은데, 왕족이나 귀족은 일반인들하고 달라. 마음에 안 든다고 따다닥 해 버려도 되는 레벨이 아니라고.”

“풍기대에서도 그렇게 오지랖 부리더니. 이제는 날 가르치려 드는군.”

무심코 반박하려던 최유신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기우희는 정말로 신해범 같았다.

평생 이렇게….

이 망할 독불장군들 뒤치다꺼리하면서 살아야 하냐.

최유신은 웃어 버렸다. 참담함과 허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밑바닥에 기쁨이 있었다.

“그래. 가르치면서 살란다.”

“너무 설치지 마. 저 꼴 되기 싫으면.”

기우희가 턱짓으로 지옥을 가리켰다. 최유신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겁 안 나.”

허세가 아니었다. 기우희에게는 돌아갈 곳이 필요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던 독고다이에게 신해범이 무리를 만들어 주었다. 기우희가 왕좌에서 내려왔을 때 그를 맞이할 사람들은 과거의 붉은 호랑이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최유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상석에서 바라보는 적림부는 처참했다. 산을 이룬 시체와 피 냄새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내부는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여길 재건하려면 고생깨나 하겠다. 물론 내가 아니고 유미현이.

공다현이 천장을 가리켰다.

“저거, 저거….”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용케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그 상태로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게 영 불안했다.

“으응?”

원세영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차례로 유미현이, 기우희가 고개를 들었다. 최유신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돌렸다. 샹들리에는 정확히 붉은 카펫 한복판에 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크리스털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충격이 어찌나 센지 바닥은 물론 벽과 천장까지 흔들렸다.

“어흐어….”

최유신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손을 허리에 얹은 유미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일이 너무 많아.”

“불평하지 마. 얻는 거 제일 많잖아. 내가 정치를 알아, 뭘 알아? 결국 다 누구 손에 들어가겠어?”

기우희가 빈정거렸다. 반쯤은 자조였다.

“참 이상해. 자기 손 안 더럽히는 놈들이 제일 많이 처먹어. 내가 그거 싫어서 치를 떨었는데, 지금도 똑같아.”

“처먹은 만큼 값을 하잖니.”

유미현이 은근슬쩍 팔짱을 끼려 했지만, 기우희는 냅다 뿌리쳤다. 옆에서 보던 최유신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유미현은 상처받지 않았다. 겉으로는 저래도 신해범의 신분을 만들어 준 자신에게 고마워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했지. 평생 기우희의 목덜미를 잡을 기회라는 걸 알았으니까.

폭주를 눈감아 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것도 원세영이 미리 언질을 줬으니 이해한 거다.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게 나 모르게 진행된다면….

유미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기우희를 좋아했다. 기우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상에 섰을 때, 그게 아주 잠깐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충신 역할을 해야 했다.

그래서 최유신의 발언을 터치하지 않은 거였다.

‘그래. 가르치면서 살란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건 친구도 아니었다. 그건 우정이 아니라 맹목적인 헌신이니까. 유미현은 기우희를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한심했다. 여태 신해범에게 목매는 놈들을 보고 있으면.

그만큼의 카리스마가 있었던가….

뭐, 권주혁을 제거해 준 일은 고맙지만.

유미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언젠가부터, 온 세상이 입을 모아 욕하는 ‘독재 정권 부역자 신해범’의 제스처를 버릇처럼 따라 한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유미현의 눈앞에는 거울이 없었다. 동쪽 입구에서 걸어오는 성재경과 이나활만이 있을 뿐.

“있잖아, 기 장군.”

유미현은 기우희 쪽으로 몸을 숙였다.

“홍이금의 외가 쪽 성씨가 이가더군.”

“그럼….”

“한 번 꼬아서 지은 이름이야. 그래 봤자 한 다리 건너면 들통날 위장이지만.”

“가명인 줄 알았는데.”

“미국 이름은 따로 있어. 그게 가명이란 소린 아니고. 이나활은 본명이야. 어머니 성을 따르면 금방 들킬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흔한 성씨도 아닌 데다가… 외국에선 더 눈에 띄니까. 오히려.”

“그런가?”

“홍이금 본적이 홍유화랑 같다는 건 알았어?”

“뭐?”

유미현은 기우희의 날 선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홍이금이 백조교랑 관련이 있을 거 같진 않아. 홍유화랑은 촌수도 멀고, 외화벌이로 나가기도 했고. 미국 현지에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던데 딱히 수상한 포교를 하는 거 같지도 않아.”

유미현이 팔짱을 끼었다.

“본적만 같지 사실상 남남. 그래도 쟤가 정치에 입문했을 때 물어뜯을 약점은 될 거야.”

“그게 말이 돼?”

“정말 사소한 거로도 물고 늘어지는 바닥이잖아.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 누가 누구 생트집 잘 잡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백조교랑 관계없으면 그만이야.”

“쟤가 왜 너랑 겨루지 않았을까? 권일혁의 총애를 받는다면 가능한 일인데. 너랑 내가 무서워서? 아니.”

유미현은 기우희에게 주의를 줬다. 이나활을 얕잡아 보지 말라고.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나활은 국내 정세에 무지하지 않았다. 그간 공부를 했다는 뜻이다. 그는 어머니인 홍이금의 성씨가 해동문국에서 치를 떠는 사이비 종교 교주와 같으며, 이 사실이 ‘부모의 나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발목을 잡으리란 점을 인지했다.

고작 성씨. 본적만 같은 남남.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상관없을 문제였다. 하지만 이나활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유미현은 그가 기우희에게 납죽 엎드린 이유를 알았고, 그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나활이 심심해서 권무혁의 호위 자리를 탐낼까?

권씨 형제는 이나활의 보험이었다. 기우희가 자기를 배신했을 때를 위한. 또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발판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기우희든, 권씨 형제든.

내가 네 꿍꿍이를 모를 줄 아니. 젖비린내 나는 총잡이 애송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나활을 바라보며 유미현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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