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동(魔丘洞).
이름만 들으면 아홉 마리 말이라는 의미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귀 마에 언덕 구, 요사스러운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였다. 풍수지리를 맹신하는 부촌 어르신에게는 빈말로도 어여쁜 땅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도시 개발 계획에서 소외되었고,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강인혜는 회색 페라리 핸들에 엎드린 채 선팅된 차창 밖을 응시했다. 마구동 도축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강인혜는 부촌으로 분류되는 호성동 출신이지만 이런 동네에도 익숙했다. 제1 종합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 덕분에. 지금은 가급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유미현의 출장 심부름을 선뜻 수락한 이유는 <달가해>가 있는 구마동과 이름을 헷갈려서였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지만 정말 그랬다. 구마동이 아닌 마구동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원세영을 통해 약속을 취소하려 했지만, 신예나가 선뜻 차를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그도 출장을 준비하는 중이었으나 함풍은 여기보다 훨씬 멀었다. 스포츠카보다는 튼튼한 레인지로버가 더 편하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신예나는 페라리에 기름을 가득 채워 주고 호신용 권총까지 내줬다. 강인혜는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굳이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다.
신예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선뜻 ‘고맙다’고 말할 수 없는 건 무책임한 신해범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다. 세상의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결국 자살로 인생 끝?
처음에는 당황했고, 나중에는 화가 났고, 지금은 허망했다. 모든 게 다.
기우희가 권일혁을 죽였다는 소식을 알고도 무덤덤했을 만큼.
강인혜는 미끄럼 방지 커버로 싸인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새벽부터 싸락눈이 내렸지만 차 안은 따뜻했다. 바깥의 사람들은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고 종종걸음을 쳤다.
샷을 두 번 추가한 블랙커피를 마셨다. 강인혜가 확인한바, 마구동 종합 도축장은 오전 여섯 시에 기지개를 켰다.
과거에 도축장은 광성 내곽에 있었다. 갓 잡은 신선한 고기를 왕궁으로, 또 광성 곳곳의 고급 음식점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운송 수단과 보관 방법이 점차 발달했다. 더는 부지, 수도, 위생 등 여러 문제를 감수하면서 ‘혐오 시설’을 중심지에 둘 필요가 없어졌다.
도축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폐쇄되거나 바깥으로 밀려났다. 도시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난 끝에 지역 경계선 너머로 떨궈졌다. 도축장이 이전하면 육류와 부산물 거래소인 축산물 시장도 함께 옮겨 갔다. 고기를 얻기 위한 첫 단계인 도축뿐만 아니라 그다음 공정인 발골 및 세척 등도 혐오 행위로 분류되는 탓이다. 짐승의 고기와 내장을 오픈된 공간에서 판매하는 일 또한 비위생적이었다. 그건 기품 있고 우아한 광성 시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도축장은 아파트와 빌라가 빼곡한 생활 구역으로부터 이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냄새가 이 정도였다. 싸락눈이 휘날리는 한겨울인데도. 그렇다면 여름이나 장마철에는?
안 봐도 뻔했다. 인근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쇄도할 터. 마구동 도축장의 이전도 머지않은 일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강인혜는 심호흡 끝에 차 문을 열었다. 동시에 코트 주머니로 손이 들어갔다.
허겁지겁 포장을 뜯어 마스크를 착용했다. 광성에서 구입했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가 혹시나 해서 집어 든 방역용 마스크는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걸었다. 바람이 불어 헐겁게 맨 목도리가 휘날렸다.
강인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스크로 호흡기를 막은 채 비포장 언덕길을 오르려니 숨이 찼다.
마구동. 요사스러운 언덕.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가 갔다.
강인혜는 나무에 손을 짚고 섰다. 새삼스레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롭게 도전한 군사 학교 시험은 최종 불합격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원세영의 말에 의하면 1차 서류 심사는 최상위권이었으나 체력 테스트에서 부적합이 떴다고 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원세영도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다. 군사 학교 측에서 관련 정보를 엄격하게 관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강인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원세영의 말을 백 퍼센트 믿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올해 경쟁률이 치열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다름 아닌 신해범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부터 유명했지만, 자살하면서 남긴 기록과 여러 가지 의문점을 불씨 삼아 사후에 한층 유명해졌다.
죽은 신해범 준장이 군사 학교 졸업으로 부족한 학력 조건을 채워서 ‘별’을 달았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상식적으로라면 신해범이 졸업한 군사 학교에 대한 인식이 땅에 떨어져야 할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종의 블레임 룩 효과였다. 이제 군사 학교는 단순히 ‘사관 학교 못 가는 출신 성분’들의 대체재가 아니었다. 패륜아, 독재 정권 부역자, 총통 부인과 놀아난 희대의 내연남이 졸업한 학교가 되었다.
원래도 입학 커트라인이 높긴 했다. 하지만 추천서 제도 때문에 경쟁률 자체는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군사 학교는 설립 이후 최고치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신해범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그리고 강인혜는 장렬히 패배했다. 신해범의 모교가 아닌, 기우희가 졸업한 여자 군사 학교였는데도.
최근에 이 ‘신해범 효과’에 대해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봤다. 진행자와 패널들은 신해범 효과가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동시에 신해범 같은 악인이 추앙받고 유명해지는 사회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신해범의 외모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인혜는 그날 프로그램이 끝난 뒤 인터넷을 찾아봤다. 신해범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장승희를 이해한다는 내용의 글들은 얼마 안 가 블라인드 처리되었다. 작성자들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신해범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신해범은 류연비와 닮았다.
정류진은 어디로 갔을까….
“후우.”
강인혜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기가 안 좋았다.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이렇게라도 여기지 않으면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사관 학교 발표가 남아 있으니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언덕길은 경사가 가파르거나 돌부리가 곳곳에 튀어나온 험한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힘든 이유는 비교적 원만한 경사가 끝없이 이어져서였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보다 S자형 도로가 운전하기 힘든 건 상식. 도보 이동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늘은 눈까지 내렸다. 일전에 내린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강인혜는 마스크를 고쳐 썼다. 그 잠깐에도 악취가 코점막에 달라붙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묵묵히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떻게 이 냄새를 맡으면서 출근하는 거지? 매일같이?
그 순간, 자전거 한 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엇.”
“죄송.”
자전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강인혜는 숨을 들이켰다. 두 눈으로 보고서도 놀라웠다.
눈 오는 날 자전거로 산길이라니. 심지어 산악용 바이크도 아니었다. 얇고 가느다란 바퀴에, 녹슨 짐받이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털털거렸다.
강인혜는 걸음을 재촉했다. 멀어지는 자전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기 위해서였다. 원세영은, 아니 유미현은 오늘 만날 아이가 열여섯 살 소년이라고 했다.
“하란 윤.”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걸었다. 분명 자전거 소년과 인상착의가 일치했다. 그 찰나만으로 알 수 있을 만큼 하란 윤은 눈에 띄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큰길로 차 타고 오셨으면 됐는데.”
도축장에 도착한 직후 찾아간 사무실에서 들은 소리였다. 강인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직원이 내미는 종이컵을 받았다.
“큰길이 있습니까?”
“예. 올라오신 길 반대편에 화물차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 오는 길 그대로 따라와서.”
“아이고. 추운 날 고생하셨습니다. 사람들 다니는 길도 험한데.”
강인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뜨거운 우롱차를 한 모금 마시자 언 몸이 녹으면서 손끝까지 따스해졌다.
“아침 일찍부터 수고 많으십니다. 식사는 아직이시죠? 저희 식당 가셔도 되는데. 고기반찬 원 없이 나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가볍게 때우고 왔어요.”
커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이었지만, 강인혜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현장을 보면 토할 것 같다는 속내는 밝히지 않았다.
직원 휴게실에 딸린 사무실은 좁았다. 민무늬 셔츠에 양털 재킷을 걸친 남자 직원은 젊었다. 현장 작업자는 아니고 행정과 간단한 회계 업무를 본다고 했다. 명함에 유준영이라는 석 자가 보였다.
강인혜는 잠자코 우롱차를 마시며 좁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무직원은 둘인가 봅니다.”
“아, 예. 김연희 씨라고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직원은 아니고 사무직 아르바이트생인데 이따 아홉 시에 올 겁니다. 저어기 아파트 단지 사는 주부예요.”
“직원들이 다들 가까운 데 사시나 보죠?”
“뭐 다들 비슷합니다. 동네 사람들이라 그런 건 편해요.”
동네 사람들이라서 편하다는 건 뭘까.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니 행동거지를 더 조심하게 된단 뜻일까?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관심 없던 강인혜로서는 낯선 얘기였다.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코트를 벗자 목에 건 공무원증이 흔들렸다. 물론 가짜였다. 원세영이 대충 위조해 준 가짜.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공문도 미리 넣어 주었다. 위생 상태 점검차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시설 평가가 아니니 준비 서류는 필요 없었다.
그래도 나름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강인혜는 유준영의 책상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헛수고시킨 게 미안하니 대충 훑어보는 척이라도 할까.
하란 윤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겸.
강인혜는 직원 명단을 요청했다. 퇴사자는 제외하고.
유준영은 생각보다 얇은 서류철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미성년 근로자는 있습니까?”
“예. 세 명 있습니다.”
강인혜의 입매가 굳어졌다. 유준영이 얼른 덧붙였다.
“보호자 동의서는 받아 두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잘하셨습니다. 미성년자 고용이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지만, 여기 시설 특성도 그렇고 나중에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다 준비했습니다.”
강인혜는 서두르지 않았다. 행여 특정 누군가를 찾는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아, 이 친굽니다. 열아홉 살인데 동생 둘을 극진히 챙겨요.”
“미성년 근로자들끼리 친한가요?”
“셋이 아주 딱 붙어 다니죠.”
하란 윤의 근로 계약서는 더 뒤에 있었다. 사진은 없지만 자필로 쓴 신상 정보와 서명이 보였다.
“이 친구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말꼬리를 흐렸다.
“윤이요. 모범 직원입니다. 어린놈이 일하기 힘들 텐데, 여태 지각 한번 안 하고 일하는 게 기특해서 지난달에 상여금도 나갔습니다.”
코웃음이 쳐질 만큼 약소한 금액이었다. 그래도 하란 윤은 매우 고마워했다고 한다. 강인혜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가던 소년의 허름한 옷차림을 떠올렸다.
“그럼, 현장 볼까요.”
“예.”
유준영은 특이하게 생긴 마스크를 꺼내 썼다. 산소 호흡기처럼 생겼는데 정화통 비스름한 것도 달렸다.
사내자식이 유난은….
코트를 입은 강인혜는 목에 힘을 주고 힘차게 일어섰다. 가급적 현장 사진을 찍어 오라는 원세영의 말이 떠올랐다.
유미현이 마구동 도축장의 실태를 궁금해해서는 아니었다. 현장을 점검하는 공무원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었다. 유준영은 그다지 똑똑한 타입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 공무원처럼 하는 게 좋았다. 잘한 건 칭찬해 주고, 부족한 점은 가볍게 지적도 하면서.
강인혜는 코트 주머니 속 휴대폰을 한번 꽉, 잡았다가 놓았다.
이마부터 콧등까지 거뭇거뭇한 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강인혜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성인 한 사람이 어깨를 움츠려야만 똑바로 설 만큼 좁다란 우리에 우두커니 자리한 돼지는, 욕심 많고 부패한 사람에게 돼지라는 별명을 붙이는 게 죄스럽게도 지친 모습이었다.
작업복 차림의 몰이꾼이 전기봉을 휘둘렀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험악하지는 않았다. 유준영은 돼지가 본디 온순한 동물이라 사람에게 덤벼들지 않는다고 했다. 길도 좁고.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순 없습니다. 가끔 덩치 큰 놈들은 다르거든요.”
“물려고 하나요?”
“그래서 꼭 전기봉을 쓰라고 합니다. 일반 몽둥이에 비해서 무거워도 여차할 때 안전하니까요.”
마구동에서는 다양한 육류를 생산했다. 정확히는 종류를 불문하고 도축했다. 소와 돼지, 말과 염소. 닭이나 오리를 잡는 ‘라인’도 별개였다.
오전에 그 많은 작업장을 다 돌아볼 수는 없었다. 돼지 작업장을 찍어서 보겠다고 한 이유는 원세영의 지령 때문이었다. 하란 윤의 파트가 돼지 방혈대라고 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스치듯 흘린 말이라는데, 강인혜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 돼지 작업장을 다 훑어보기로 했다.
돼지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강인혜는 신기할 정도로 순순히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돼지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본 비건 지향 캠페인이 생각났다. 동물도 죽을 때가 다가오면 그걸 느낀다는데, 알면서도 죽음을 향해 가는 기분은 어떨까.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목소리가, 이름이 떠올랐다. 강인혜는 뜨거운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저놈들은 덩치가 크네요.”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강인혜는 돼지 무리로 주의를 돌렸다. 아까보다 덩치가 배는 큰 놈들이 좁은 통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유준영이 아, 하고 말했다.
“모돈(母豚)입니다. 번식용이었는데 폐기되는 거죠.”
새끼를 낳을 만큼 낳아 더는 출산을 하지 못하는 돼지들이었다. 그래서 일반 비육돈보다 덩치가 크고 육중했다. 하지만 폐기 처분인 만큼 고기가 질겨, 일반 구이용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등급 외’였다.
모돈은 모든 돼지를 통틀어 가장 낮은 등급의 고기였다. 그래서 가격이 쌌다.
“대패삼겹 드시죠? 대패삼겹. 그게 저겁니다.”
“아뇨.”
“예?”
“제가 비건입니다. 아시죠? 채식주의자.”
아니었다. 강인혜는 평소에 돈가스를 즐겨 먹었다.
“아하… 예.”
유준영이 멋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강인혜는 자기가 필요 이상으로 단호했다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표정과 목소리를 바꿨다.
“그래서 제가 온 거죠. 고기 먹는 사람들은 이런 거 보면 밥맛 떨어지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별생각 없이 동의하는 티가 났다. 강인혜는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식당을 운영하는 신예나가 대패삼겹살은 사 먹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땐 단순히 고기가 싸서, 저렴한 만큼 맛이나 영양가가 떨어지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모돈은 사육 기간 내내 항생제를 오랫동안 자주 맞아서, 도축 뒤에도 체내에 그 성분이 남아 있을 확률이 컸다.
“뭐 그것도 다 예민한 사람들이나 따지죠. 보통 사람들은 알지도 못해요. 관심도 없습니다. 애초에 항생제 주사는 목에다 놓는데.”
전기 충격으로 기절한 돼지가 방혈대로 나왔다. 이곳에서 대기하던 작업자가 돼지의 멱을 땄다. 기절해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라 다행이었다. 강인혜는 최악의 경우,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짐승의 숨통을 끊는 할랄식 도축 장면을 보는 일도 각오했었다.
유준영은 여기부터가 ‘진짜 현장’이라고 했다. 경동맥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잘라야 피가 싹 빠져서 고기 맛이 깔끔하다는 설명을 들으며 강인혜는 자전거 소년, 아니 하란 윤을 관찰했다.
강인혜가 선 곳에서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래도 움직임에 따라 옆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마스크를 착용했음에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감출 수가 없었다. 시판되는 검은색 면 마스크가 유달리 작아 보이는 건 얼굴 크기에 의한 착시 현상 때문이겠지. 강인혜는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 좀 찍겠습니다. 근로자들 얼굴 안 나오게.”
“예.”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찰칵찰칵 소리가 났다. 강인혜는 무음으로 바꾸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그 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리죠?”
강인혜가 되물었다.
“예?”
“저 친구요. 아까 말씀드린 모범 직원입니다. 지난달에 상여금 나갔다는.”
“아. 그 미성년 중 하나라는.”
“아직 열여섯 살인데, 돼지 멱따는 실력이 기가 막혀요.”
유준영은 본인이 현장 작업자인 것처럼 말했다. 강인혜가 쳐다보았더니, 그는 특유의 멋쩍은 표정을 지은 후 덧붙였다.
“평소에 얘기 많이 듣습니다. 실수가 하나도 없다고, 삼촌들 칭찬이 자자해요.”
“그래요?”
강인혜는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만 관심을 드러냈다. 그건 타인에게 들은 말을 본인이 보고 듣고 느낀 것처럼 표현하는 이 남자에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저 친구 아버지가 중국 사람인데, 본인은 흑해자랍니다.”
“그, 호적이 없다는?”
“예. 그런데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그리 됐다기보다는….”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마스크에 가려진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으려면.
“아버지가 무식했죠. 아버지가.”
“저 친구 아버지 말인가요? 무슨?”
“가족한테 속아서 조카를 자기 자식으로 올려 줬답니다. 그랬으니 나중에 본 자기 자식을 호적에 못 올리는 거죠. 참, 무슨 놈의 집안이 그 모양인지.”
“벌금 낼 형편이 안 됐나 보죠?”
“안 되니까 집안에서 수를 썼겠죠. 그때 둘째, 셋째 낳으면 벌금이 어마어마했다던데.”
“…….”
“애초에 그 아버지란 사람이 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무식한 것도 무식한 건데, 그거 말고도 좀….”
유준영의 표정이나 목소리에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했다더라’ 식의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게 본인 얘기여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할진대, 하물며 다른 사람 이야기는.
강인혜는 한숨을 삼켰다. 본래 성격대로라면 함부로 떠들다 큰코다친다고 쏴붙여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트러블을 일으켰다간 곤란해지는 건 원세영뿐만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마스크에 감춰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궁금했다. 하란 윤의 집안 사정은 원세영으로부터 듣지 못했다. 어쩌면 원세영이나 유미현이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전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게 내 의무를 다하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
유준영 말을 들은 강인혜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눈치챘다. 묵묵히 작업에 열중하는 하란 윤이 자기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의 여러 소음으로 인해 잘 들리지 않을 뿐.
점심시간, 강인혜는 유준영과 함께 직원 식당으로 갔다. 고기는 원 없이 먹는다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성 근로자가 드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강인혜는 이곳에서 닭과 오리도 도축한다는 점을 떠올렸다. 돼지 라인에서 직원 식당으로 오는 길에 언뜻 봤다. 추운 겨울이지만 냄새 때문인지 문을 다 열어 놓아서.
거대한 벽 같은 쇠창살에 닭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자세히 보니 하나의 창살이 아니라 같은 크기의 쇠창살을 쌓아 놓은 거였다.
창살 하나는 성인 여성 한 사람이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릴 만한 크기였다. 그 하나의 쇠창살에도 닭이 빼곡했다. 여유 공간이 전혀 없을 정도로 꽉꽉 밀어 넣었다. 창살 밖으로 닭 날개나 다리가 튀어나와 덜렁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밝은 식당에서 보는 작업자들은 현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말쑥해 보였다. 하지만 고된 오전 근무에 지친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근로자 대부분이 고기반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식당에서 제일 인기 있는 반찬은 후식으로 나오는 과일이라고 했다.
근로자 대부분이 흡연자였다. 강인혜는 식사를 후다닥 해치운 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흡연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 뒤를 따랐다. 안내역인 유준영은 일부러 따돌렸다. 이유는 단 하나. 하란 윤과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아까는 들켰다는 생각에 움찔했지만, 식사를 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찬스였다. 사과라는 명목으로 말을 걸면 되니까.
이게 바로 사고의 전환이다. 씨발.
문제는 하란 윤이 혼자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는 식당에서부터 쭉 두 명의 직장 동료와 함께했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둘 다 유준영이 말한 ‘미성년’ 근로자일 터였다. 모두 하란 윤보다 연상으로 보였다.
어떡할까.
강인혜는 주머니에 넣은 손을 꿈지럭거렸다. 고급 슝마오 담뱃갑을 만지다가, 과감하게 꺼내 들고 무리에게 다가갔다.
“불 빌릴 수 있어요?”
“여기요.”
여자아이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낡은 터보 라이터는 강인혜가 몇 번이나 헛손질하고 나서야 켜졌다.
“좋은 거 피우시네요.”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랐다. 강인혜는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이게 웬 떡이냐고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의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하란 윤만 빼고.
“괜찮아요. 하나 해요.”
“우리 아까 만났죠?”
“오~ 하란 윤~ 공무원 언니한테 작업 거냐?”
“아냐. 진짜 만났어. 두 번.”
두 번. 어쩐지 그 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아서, 강인혜는 피식 웃었다.
“자전거에 치일 뻔했지.”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건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소년이었다. 강인혜는 아이라기보다 성인에 가까운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는 열아홉 살일 터였다. 함께 일하는 동생들을 끔찍이 위하는.
강인혜는 활짝 미소 지었다. 인간 삶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혐오 시설이라며 이래저래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도축장 직원이라 저자세로 나오는 듯했다. 그렇다면 경계심을 낮춰 줄 필요가 있었다.
무해한 엘리트 공무원 여성. 유복한 집안에서 성실하게 자라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
실제로 이런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연기하는 건 가능했다. 이런 삶을 상상해 본 적 있기 때문에.
“괜찮아요. 다친 데도 없고, 사과받자고 온 거 아니에요.”
강인혜가 손을 흔들자 하란 윤이 말했다.
“왜 큰길로 안 오시고?”
“윤아.”
“나 따지는 거 아니야. 형. 그냥 궁금해서.”
“차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따로 있는지 몰랐어요. 초행이라 사람들만 따라왔거든.”
내비게이션에 최단시간 도착 거리를 찍었다. 목적지를 도축장 ‘입구’로 찍었다면 안내가 달랐을까.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냥 아침 운동 한 셈 치세요. 그쪽 길, 큰길이라고 해 봤자 그렇게 좋지도 않아요. 화물차 많고. 취향 고약한 아저씨들 천지에.”
좋지 않다는 건 길이 잘 닦이지 않았다는 뜻일까. 강인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흙먼지가 뽀얗게 날리는 대로 위라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고기를 사고파는 일이 문제가 된다는 것도 알았고.
“취향 고약한 아저씨들?”
마음이 걸리는 부분이었다. 강인혜가 묻자 담배를 휴지에 말아 셔츠 앞 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던 소녀가 대답했다.
“도박이요.”
“화주야.”
“아, 왜. 내가 없는 말 지어내나. 오빠도 싫다고 했잖아.”
“도박이라뇨? 여기서 무슨… 포커? 마작?”
“그런 거면 차라리 다행이죠.”
시니컬한 목소리로 대꾸한 사람은 하란 윤이었다. 강인혜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투계요. 닭발에 커터나 유리 조각 같은 거 붙여서 싸우게 해요.”
“사무실에서 몇 번이나 주의 줬어요. 불법이고, 다른 사람들 보기 불편하니까 하지 말라고. 근데 뭐….”
동생들의 합동 진술에 리더도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놓인 페트병에 침을 퉤, 뱉고 말했다.
“삼촌들은 사무실 직원 말 안 듣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그런 거 불법이죠? 공무원 언니.”
강인혜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았다.
“미안해요. 그쪽은 내 담당이 아니라서.”
예전 같았으면 지식 없는 지식 총동원해 정의의 사도를 자처했겠지만, 지금 강인혜는 알았다. 가끔은 무능해지는 게 낫다는 것을.
“아. 뭐예요. 공무원이라서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강인혜는 픽 웃었다. 화주는 솔직한 아이였다. 그래서 대놓고 실망하는 말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끗힐끗, 화두를 던져 놓고 반응을 살피면서 사람을 파악하려 애쓰는 하란 윤에 비하면.
“그냥 왔던 길로 내려가세요. 큰길 쪽에서 사고도 많이 났어요. 공무원 언니야 알아서 조심하겠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초행인데.”
“사고? 큰길에서?”
“제가 본 것만도 열 번 넘어요. 보통은 차끼리 접촉 사곤데, 진짜 사람 죽은 일도 있었어요. 너 알지?”
하란 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표정에서도 여실히 묻어 나왔다.
짧은 휴식이 끝났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강인혜는 유준영이 기다리고 있을 사무실로 향하는 대신 하란 윤의 뒤를 쫓았다.
작업장은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직원들만 아는 지름길이 따로 있나?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이라도 들르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별안간 하란 윤이 몸을 돌렸다. 강인혜는 흠칫했지만 놀란 기색을 감추고 그 자리에 섰다.
“왜요?”
“사과하고 싶어서. 아까 일하는데 뒤에서 다른 직원이랑 얘기한 거 말이야.”
뒤돌아선 하란 윤의 표정이 묘했다.
“상관없어요. 원래 사람은 둘만 모여도 남의 얘기 하니까.”
“그래도 신경 쓰이지?”
“신경 쓸 것도 없어요. 방금 우리도 그랬잖아요? 남의 이야기.”
하란 윤은 특별히 강조해서 말했다.
“유언비어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난.”
“네 아버지가 형수랑 붙어먹었다며.”
강인혜는 과감하게 패를 던졌다.
“진짜니? 그래서 아무렇지 않아?”
하란 윤의 입매가 굳어졌다. 꾹 한번 감았다 뜬 눈이 차분했다.
“뭐…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니까. 맞아요. 저는 형수랑 붙어먹은 패륜아의 자식입니다.”
강인혜는 그 표정의 정체를 알았다. 깨닫는 순간 심장이 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하란 윤은 오은정을 닮았다. 외부에서 어떤 공격이 들어올 때, 맞서 싸울 칼이 아니라 본인을 방어할 방패를 쳐든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 방패의 이름은 냉소였다. 네가 아무리 짖어 봤자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관심 없다. 그러니 혼자 기운 빠질 때까지 짖다가 창자 터져 뒈져라.
본인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기 전, 강인혜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에게 순종적이었다. 나이가 많이 나는 부부여서 그렇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어머니의 직업은 교사였다. 일확천금을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배울 만큼 배웠고,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부족함 없이 살 사람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는 밀린 월급 달라는 말 못 하는 파출부처럼 굴었다.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본인을 향한 은근한 모욕과 멸시를 참고 견뎠다.
지금은 어머니가 그랬던 이유를 안다. 지켜야 하는 게 비밀뿐만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낯간지럽지만, 거기에는 사랑도 있었다.
그래서 오은정은 칼을 뽑지 않았다. 그 대신 방패를 견고하게 다듬었다. 공격이 들어오는 즉시 꺼내 들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의 분노한 모습도 감출 만한, 그런 방패를.
그러나 견디는 건 극복하는 게 아니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강인혜는 왜 유준영이 그토록 거리낌 없이 떠들었는지 깨달았다. 하란 윤이 ‘왜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느냐’고 자신에게 와서 따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아서였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나이 차이, 직급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란 윤이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였다. 삶에 대한 개인의 태도.
하지만… 왜?
강인혜는 눈을 깜박였다. 하란 윤은 고작 열여섯이었다. 이미 나이도 있고, 집안의 평화와 자식을 지키려 했던 오은정과는 달랐다.
하란 윤은 좀 더 공격적이어도 됐다. 본인이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보다는 자신이 명예를 지키려고 투쟁해도 괜찮았다. 또한 그런 게 더 어울렸다. 하란 윤은 열여섯 살이지만, 아까 본 열아홉 살짜리와 큰 차이가 안 날 만큼 키와 체격이 월등했다. 외모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런데 왜?
넘어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에, 남들은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요소들을 타고났으면서, 왜 이렇게 냉소적이냐, 넌?
강인혜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상하게 화가 치밀었다.
조용히 보고 오라는 원세영의 지시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지금 강인혜의 뇌리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물렀다. 하란 윤의 냉소적인 태도를 부수고 싶었다.
“가족한테 속아서 자기 호적에 조카 이름 올려 줬다던데. 정말 속아서야? 지은 죄가 있어서 갚은 건 아니고?”
“영화 같은 얘기죠?”
“더 복잡하지. 영화나 드라마에선 가족에 버림받은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새 삶을 개척하는 결말로 끝맺을 수 있잖아. 하지만 현실은 해피 엔딩이 어렵지. 어쨌든 계속 살아가니까.”
“그러네요. 현실.”
하란 윤이 말했다.
“영화에선 사랑에 목숨 건 주인공이 망하고, 후회하는 것까지는 안 보여 주죠.”
“아버지를 원망하니?”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은 해요. 가끔.”
이번에는 그가 질문했다.
“평범한 공무원이 아니네요. 누나.”
“…….”
“아버지가 말했어요. 이제 돼지 멱따는 일 안 해도 된다고. 좋은 일자리를 알아봐 뒀다나 뭐라나. 그런데 전 아버지 성격 알거든요.”
내던지듯 말하고는 웃는다. 어쩐지 포기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아버지 성격이 어떤데?”
“물고기도 안 잡았는데 전 부칠 준비 하시죠.”
“그러다가 허탕 치면? 낚싯대 탓하고?”
“애초에 마땅한 도구도 없었는데요, 뭘. 보통은 만만한 자식새끼 때려잡는 거로 스트레스 풀죠. 그게 아버지가 실패를 만회하는 방법이에요. 자존심이 회복되니까.”
강인혜가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가 주먹 쓰니?”
“술 마시면 그래요. 깨어나면 미안하다고 울고. 가끔은 아예 기억이 날아가기도 해요.”
“기억을 못 한다라….”
“만취 상태에선 그럴 수도 있다는데, 솔직히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쇼하는 것 같아서 영.”
의외였다. 하란 윤은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산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 체격 조건의 소유자였다. 보이는 곳에도 상처 하나 없었다. 겨울이라 팔다리를 죄 가리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알면서도 자주 놓치는 진리 중 하나였다. 강인혜는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그 일자리 말인데, 불발되면 너 많이 힘들겠니?”
“그 순간에는 괴롭겠죠.”
시니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보면, 신분 상승 불발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지금도 그러고 있거든요.”
“그건 무슨 뜻이야?”
하란 윤의 음성이 차가운 바람에 실려 왔다. 강인혜는 휘날리는 목도리를 잡아 끄트머리를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누나가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한텐 기술이 있어요. 지금 직장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거죠. 그걸 밝히고 실력을 증명하면 지금 월급의 네 배는 받아요. 그래도 전 그렇게 안 해요.”
“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하란 윤이 미소 지었다.
“사람한테는 분수가 있거든요. 타고난 분수가. 운명이 점지한 것 이상으로 취하려 하면 문제가 생겨요. 반드시.”
강인혜는 하란 윤의 마지막 말을 속으로 따라 했다. 반드시.
어지간한 확신이 없는 한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누나가 유준영한테 들은 얘기요. 얼추 맞지만 디테일이 좀 달라요. 축하드려요. 누나가 추측한 내용이 더 사실이에요.”
“그게 날 축하할 일이야?”
“전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진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눈빛은 집어치워요.”
하란 윤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은 채 말했다.
“호적 문제는 아버지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본인은 속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데, 애초에 지은 죄도 있고, 본인이 제의했으니 순진한 피해자는 아니죠. 그거로 형한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웃기지만.”
“자기 아이가 생길 줄은 몰랐던 거야?”
“부인이 임신 못 하는 몸이었대요. 저 낳아 준 사람 말고 아버지랑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요.”
강인혜는 한숨을 쉬었다. 언뜻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국의 한 서민 가정에서 벌어진 이 모종의 거래가 윤곽이 보이는 듯했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 문제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갔고, 남자는 형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형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이에 넉넉하지는 않아도 화목했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남자는 후회했다.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그래서 속죄의 뜻으로 형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달콤한 제안을 했다.
형수가 아이를 낳으면 내 호적에 올리자. 어차피 나는 내 피를 물려받은 자식을 못 보니 일석이조 아니냐. 형 부부는 벌금을 면하면서 당의 명령을 따라서 좋고, 우리는 자식을 얻어서 좋고.
처음에야 남자의 형은 반대했다. 하지만 옥문이 열릴 무렵에는 마음을 바꾸었다. 평범한 서민 노동자에게 고액의 벌금 면제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당시 사회적 인식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벌금을 납부해도 당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가족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지금 중국의 한 자녀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당시에는 그랬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은 해요.’
바람을 등지고 선 하란 윤이 자조했다. 강인혜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달을 내 놓고서도, 두 번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 하란 윤의 아버지와 그 형수는 부정을 멈추지 않았다.
“…이해가 안 돼.”
“저도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하란 윤은 자신을 가리켰다.
“증거가 있잖아요.”
부정의 증거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저는 큰아버지가 한 짓을 이해해요. 백 번, 천 번 이해하고도 남아요.”
최초의 한 번은 용서했다. 두 번째는 아니었다. 분노한 남자의 형은 배신자들에게 날붙이를 휘둘렀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형수를 보호했다.
남자의 형이 휘두른 도끼가 오른 다리를,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곧바로 처치했다면 접합 수술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행운의 신은 남자의 편이 아니었다.
최초에 남자는 부정을 용서받기 위해 자신의 호적을 팔았다. 그다음은 다리 한쪽이었다. 비록 이성을 잃고 도끼를 휘두르긴 했으나 다리 하나를 잃은 남자를 본 형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하란 윤은 그렇게 태어났다. 출생 신고는 하지 못했다. 한 자녀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전의 유혈 사태로 인해 온 동네에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남자와 형수는 지역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당했다. 공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하란 윤에게 희망은 있었다. 조부모였다. 부정을 저지른 건 그네들이지 태어난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는 조부모 밑에서 하란 윤은 그럭저럭 보호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형수와 ‘붙어먹은’ 남자의 부인. 불임인 것을 결혼한 뒤에야 알았기에 집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여자는 남편의 부정과 그에 따른 수모를 모조리 감내했다. 형님 부부의 아들을 호적에 올렸고 그 후에 태어난 ‘부정한 아이’도 돌봤다. 그럼에도 인내의 항아리가 바닥나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고야 말았다.
세 번째였다. 다리 하나를 잃고도 반성하지 않은 남자와 형수는 다시금 가족들을 배신했다. 이번에는 심지어 쌍둥이였다.
당시에 남자의 형은 동생과 간통한 아내를 보기 힘들어 다른 성에 직장을 구하고 그곳에서 숙식까지 해결했다. 명절에도 본가를 방문하지 않을 정도로 집안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그 덕분에 비밀이 지켜졌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난 비밀의 대가는 처참했다.
쌍둥이의 출생으로 집안의 세 사람이 죽어 나갔다. 첫 번째는 남자의 아내였다. 그는 형님이 재차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외부에 폭로하기를 도모했다. 그마저도 시부모와 남편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쌍둥이가 태어난 날, 남자의 아내는 안방에서 목을 맸다. 그게 최후의 방법이었다.
“모두가 은폐하려고 애쓰는 비밀은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야지만 세상에 알려져요.”
하란 윤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강인혜는 그가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님을 알았다.
“기억하니?”
강인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람이… 목을 맨 모습.”
“아뇨. 어떻게 알겠어요. 그땐 저도 아기였는데.”
하란 윤은 부정했지만, 강인혜는 어쩐지 그가 뭔가를 봤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좌우로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알아챘다. 자신에게도 익숙한 제스처였다. 떠올리기 힘든 기억을 털어 내려고.
“그 사람 죽었을 때, 저는 겨우 두 살이었어요.”
고작 두 살. 사리 분별은커녕 겨우 뛰어다니기 시작할 나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히 인지하거나 뚜렷하게 기억할 수 없는 때이긴 했다.
“그래도 예외는 있잖아.”
강인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라고.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말도, 과학적인 근거는 없으나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는 까닭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제가 힘든 건 이거 때문이에요.”
소년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엄지와 검지가 권총을 연상시켰다.
“여기서 계속 상상을 하니까. 그게 악몽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계수의 장례를 위해 본가로 돌아온 남자의 형이 그 불행한 죽음의 원인을 미리 인지했는지, 돌아와서야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범죄를 계획한 상태였다는 사실이었다.
남자의 형은 쌍둥이를 출산한 아내를 식칼로 살해했다. 그리고 난도질당한 시신 앞에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다. 계획범죄의 증거에는 ‘나는 윤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죽었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참극에서 살아남은 남자는 도망쳤다. 자신의 피가 섞인 세 아이를 데리고. 하란 윤은 그때라고 확신했다. 귀신 셋이 자신에게 들러붙은 날이.
“고화주네 엄마가 무슨 종교까지는 아니고, 점 보는 사람인데 이런 얘기 하더라고요. 피 보는 직업 가져서 다행이라고.”
“피?”
“동물 피가 액을 막아 준대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쌍둥이는 피바다 속에서 울부짖으면서 살아남았다. 하란 윤은 본인이 아버지의 죄를 짊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두 살 차이지만, 어린 동생들보다는 자기에게 오는 게 나았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죠.”
하란 윤은 그렇게 말했다. 아까와 같은 말이었지만, 인제 강인혜는 그 말에 숨은 속뜻을 알았다. 확실히 이해했다. 하란 윤은 속죄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큰돈을 벌어도 안 되고, 쾌적한 환경에서 일해도 안 됐다. 그래야만 동생들에게까지 죄가 내려가지 않았다.
“그게 이런 의미였어?”
“이해는 안 바라요. 그래도 제가 끝내야 하거든요.”
“윤아. 네 아버지는….”
“알아요. 어디 가서 이런 얘기, 절대 안 하죠. 장애 있는 몸으로 세 아이 키우는 가장 이미지에 치명타니까.”
하란 윤은 열여섯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인혜는 그가 원세영, 그리고 유미현의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착한 귀족은 불쌍해 보이는 사람한테 일자리를 줘요.”
엄밀히 따지면 유미현은 귀족은 아니었다. 그래 봤자 아버지의 죄를 짊어진 열여섯 살 소년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죠. 그런데 이거 한 가지는 알고 계세요.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거. 특히 동정으로 맺어진 계약은, 위험해요.”
위험해요. 강인혜가 눈을 깜박였다.
“어떤 위험?”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드니까요. 그건 분노 중에서도 굉장히….”
하란 윤은 표현을 골랐다.
“치명적이거든요.”
바람을 등지고 선 소년이 말했다. 강인혜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꽉 쥐고, 그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한텐 비밀로 할게요. 누나는 안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전부 보고하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큰소리였다. 하란 윤이 우뚝 멈춰 섰다.
“그래서 네 아버지의 일자리에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이 널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것도 치러야 할 죗값이라면. 기꺼이요.”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죄책감을 해소하는구나.”
“죄짓고도 떵떵거리는 놈들보단 양심 있지 않아요?”
“혹시 노리고 있는 건 아니니?”
“노리다니요?”
강인혜는 고개를 돌려 하란 윤의 얼굴을 봤다.
“네 아버지가 폭발하기를.”
그래서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지금껏 네가 혼자서 감당해 온 죄의 무게가 가벼워지기를.
“네 얘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진짜로 죽었어야 할 사람은 네 아버지잖아. 다른 하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강인혜가 말한 ‘다른 하나’는 하란 윤의 어머니였다. 시동생과 몇 번이나 부정을 저지르고, 끝끝내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비참하게 숨진 여자.
“그런 거 아니에요.”
하란 윤은 부정했다. 그는 강인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피식 웃고 걸음을 재촉했다.
“다 보고할 거야!”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너와 네 가족들에 대해서 전부!”
아이가 손을 들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머리 위로 든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강인혜는 어금니를 악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증거가 있잖아요.’
부정의 증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인혜는 하란 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눈을 부릅떴는데도 눈동자가 시리지 않았다.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너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란 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무렵, 강인혜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유준영이 한참 찾았다고, 길이라도 잃은 건 아닌가 걱정했다고 말을 걸기 전까지.
“안 맞아요.”
히터는커녕 싸늘한 공기가 부유하는 페라리 안에서, 강인혜는 원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안 맞는다니?
“누구 뒤치다꺼리할 성격이 아니에요. 도축장에서 일 잘하는 건 다른 사람이랑 굳이 말 섞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거고. 안 맞아요. 다른 사람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 그 정도니?
“못 믿겠으면 직접 와서 봐요. 언니 눈으로 보면 알겠죠.”
원세영은 침묵했다. 강인혜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한참 만에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네가 본 게 맞겠지.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몰라요. 가족이 하는 말은 신뢰성이 전혀 없고요. 자기 자식을 좋은 자리에 꽂을 수 있는데, 부모 되는 사람이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그렇네, 하고 대답하는 원세영의 목소리는 울적했다. 기대에 어긋난 결과가 나와서 실망한 눈치였다.
“대체 뭘 기대한 거예요? 걔한테?”
- 좀 편하게 해 주고 싶었어.
“자선 사업 해요?!”
착한 귀족은 불쌍해 보이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다. 하란 윤의 목소리가 떠올라 강인혜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죄송해요. 그냥 좀….”
이내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 걔하고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보고만 오랬잖아.
“멀리서 구경만 하는 거로 뭘 파악할 수 있는데요? 언니, 보기만 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없어요. 내가 여기까지 걔 얼굴 구경하러 왔어요? 아니잖아요?”
- 인혜야.
“난 뭐라도 알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강인혜는 말했다.
“애비한테 일러바치지는 않는다니까.”
- 몇 시쯤 도착할 것 같니? 언니랑 저녁 먹자. 수석님한테는 따로 얘기 안 하고. 우리 둘이서만.
“죄송해요. 좀 피곤해서요.”
- 무슨 일 있구나. 너.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강인혜는 전면 유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 혹시 알고서… 나랑 그 애 만나게 한 건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나 두 번 죽인 거예요.”
- 뭐?
입 안을 연신 맴돌고 있었다. 하란 윤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가. 그 아이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죄의 무게가.
네가 짊어질 필요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느낀 무력감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 한들 강인혜는 선뜻 입을 열 자신이 없었다. 타인에게 충고할 만큼의 확신이 없어서였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부정한 아이….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안 되겠다. 도착하면 전화해. 내가 집으로 갈게.
“아뇨. 그러지 마세요.”
강인혜는 힘주어 말했다.
“언니 보면 더 복잡해질 거 같아요. 생각이.”
- 괜찮아?
“그냥… 혼자 정리할게요.”
휴대폰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원세영이 낸 건 아니었다.
“지금 밖이에요?”
- 아, 응. 잠깐 누구 만나고 들어갈 거라서.
“저녁 식사 약속 아니고요?”
- 아니야. 잠깐 커피만 마실 거야.
원세영은 거듭 말했다. 만나서 얘기하자고. 오늘 보고 싶다고.
강인혜는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지만, 안심시켜 주고 싶지는 않았다. 고약한 심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힘차게 문질렀다.
“그래요. 사람 잘 만나요.”
- 도착하면 전화 줘. 난 언제라도 괜찮아.
“…네.”
예스라고 대답했지만, 강인혜는 원세영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요량이 없었다. 사실 그 정도 불안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탄생과 삶 자체가 ‘부정한’ 자신에 비하면.
강인혜는 전방을 노려봤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하란 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는 운명론자였다. 타고난 분수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난 그렇게 안 살아.
풀어 헤친 목도리를 조수석으로 던졌다. 양손으로 핸들을 부둥켜 잡았다. 충분히 예열된 페라리가 벌떡 일어섰다.
그르렁거리는 은빛 늑대개의 주인을 생각했다. 신해범과 권주혁의 사후, 신예나는 전 국민적인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호월루가 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권주혁의 자금 세탁자’ 신예나의 패망을 손꼽아 바랐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비록 예전만큼의 명성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굴곡도 많았지만, 신예나는 부활했다. 그게 백 퍼센트 유미현의 원조 덕분일까?
아니었다. 신예나는 스스로 일어섰다. 그건 그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죄를 짊어지고 참회하지 않을 만큼. 왜 너는 뉘우치지 않느냐, 왜 잘 먹고 잘사느냐고 비난하는 놈들에게 어퍼컷을 날릴 수 있을 만큼.
강인혜는 슬그머니 웃었다.
나는 부모의 죄를 짊어지지 않을 거다. 평생 한 가지 직업에 목매지 않을 거다. 나는 그저 태어났을 뿐이고, 내 인생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 이기적인 썅년이라 비난하는 새끼들은 고사포로 날려 주겠다.
기왕이면 하란 윤, 너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도 아직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서 누구한테 충고할 입장이 못 되어서.
강인혜는 속력을 높였다. 폭풍 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언제가 됐든, 다시 만나면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삶의 방식이 옳았는지. 아니 더 현명했는지.
몸과 마음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강인혜는 목에 힘을 주고 전방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