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혁의 식이 요법이 꽤 화제였죠. 지금이야 심장 이식 때문이었다는 게 뽀록났지만.”
원세영이 태블릿에서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싱글거리는 윤태금이 서 있었다. 원세영은 태블릿을 끄고 고개를 까딱했다.
“앉으세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주문하시고.”
“원 보좌님이 사시는 거죠?”
그는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 배가 고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원세영은 그래서 디저트와 커피를 함께 파는 카페를 골랐다며 웃는 얼굴로 받아 주었다. 예정에 없던 입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즈니스도 아닌 이코노미로, 여행용 보스턴백 하나 덜렁 들고.
“저 그날 문국에 있었는데.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도 몰랐습니다. 사전 지시 받은 거 없기로는 매한가지예요. 일부러 왔다 갔다 하게 만든 거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아니 뭐 오해까지는. 저 그렇게 쩨쩨한 놈 아닙니다. 그래도 오늘은 보좌님이 사세요.”
테이블 담당 서버가 다가와 서고, 윤태금은 가격이 따로 표기되지 않은 메뉴판에서 신나게 음식을 골랐다. 원세영은 잠자코 블랙커피를 마셨다.
“개들은 잘 배달됐나요?”
“건강하게 잘 갔습니다. 공항 도착하자마자 영통으로 보여 줬어요.”
“그쪽도 건강하고?”
“여기서 걱정하는 게 무색할 만큼요.”
윤태금은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웃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완전히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어요.”
“언어 문제는요. 그게 제일 걱정됐는데.”
“처음에나 좀 헤맸지, 지금은 뭐. 큰 쪽은 이제 원어민 수준입니다.”
“그래요?”
“언어 습득 능력이 좋아요. 거기에 본인이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어서. 매일 꼭두새벽까지 공부하는데 실력이 안 늘면 그게 이상하죠.”
원세영이 웃었다.
“작은 쪽은요?”
“그쪽도 나쁘진 않아요.”
윤태금은 찬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암기가 약해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곧잘 합니다. 아무래도 같이 공부하는 상대가 있다 보니까. 엄마 오리 따라 하는 새끼 오리 같았죠.”
“다행이네. 잘 적응해서.”
“회화 실력이 빨리 늘었어요. 아무래도 애가 호감상이다 보니 주변에서 많이 다가가더라고요. 본인이 배우려는 열정도 있고.”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디저트라고는 하지만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없는 게살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윤태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음, 음, 하면서 만족스러워하는 모양새가 ‘아주 맛있다’는 의미 같았다.
“많이 허기지셨나 보네.”
샌드위치를 꿀꺽, 삼킨 윤태금이 대답했다.
“이상하게 이 나라에만 오면 배가 고프더라고요.”
“그래요?”
“밥이 맛있어서 그런가?”
윤태금은 능청을 떨며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단맛이 적은 당근 케이크도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먹었다.
팔짱을 낀 원세영이 말했다.
“신룡관이 소란하긴 하지만, 올마이티 측에서는 개의치 마시고 합작 프로젝트에 열중해 주세요. 방송 계획도 차질 없이 진행 예정입니다.”
“저희야 매 순간 총력을 기울이지요. 나라도 뒤집힌 마당이라 이젠 위선이다,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전쟁광들의 국제적인 음모다, 이런 말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서 속이 다 시원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군요.”
“괜찮습니다. 그런 넋두리라도 해야 살맛이 나겠죠.”
윤태금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기부야 삼시 세끼 챙겨 먹는 일만큼 꾸준히 하지만, 기술로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전 이쪽을 더 좋아해요. 돈은 한번 퍼 주면 끝인데, 기술은 계속 남으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게 훨씬 값지고 뿌듯한 일이죠.”
올마이티 그룹의 인체 보조기 지원 사업. 그건 기우희가 국민들의 호응을 얻는 데 한몫을 톡톡히 했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칭찬만 들은 건 아니었다. 위선이라는 소린 너무 익숙해져서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국제적인 스케일의 음모론부터 인체 보조기를 지원받은 사람들이 올마이티 측에 강제로 DNA를 제공해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작용에 시달린다는 둥의 도시 괴담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유미현이 선전 방송을 계획하는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었다. 헛소문이고 우스갯소리지만, 기정사실화되면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방송 프로그램 말입니다. 이건 아직 누님께도 말씀 안 드렸고,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윤태금이 자리에 고쳐 앉았다. 원세영은 눈을 크게 떴다.
“말씀해 보세요.”
“우리 권세혁 왕자님이요.”
권세혁.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다리 상태 어떻습니까?”
“아아.”
알 것 같았다. 원세영은 푸흐흐, 웃어 버렸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네. 진짜….”
“와우. 우리 통한 거?”
원세영은 윤태금이 윙크하며 사랑의 총알을 쏘기 전에 말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 목적이 같아서겠죠.”
“아. 이렇게 선 그으시네.”
“지금 당장은 어려워요. 멀쩡히 움직이는 다리를 교체하자고 할 순 없잖아요.”
“당연하죠. 저희 그런 회사 아닙니다.”
“그래도 가능성은 확실히 있다, 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윤태금이 주문한 마지막 디저트는 치즈 감자 그라탕이었다. 버터 향이 솔솔 풍기는 으깬 감자는 고소하고 아낌없이 뿌린 치즈는 부드럽게 늘어났지만,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메뉴를 하나 더 주문했다.
“많이 먹는 남자는 매력 없는데.”
“먹보라서 죄송합니다. 매일 이렇진 않아요.”
윤태금은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었다. 원세영이 자신의 얼굴과 옷차림을 훑어본다는 점을 눈치챘다. 이쪽에 관심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마 공항에서 바로 온 게 맞는지 가늠해 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유미현은 신해범을 이 세상에서 끝장낸 뒤에도 예의 주시 했다. 행여 이쪽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독일과 해동문국을 오가는 자신은 동업자이자 요주의 대상이었다. 윤태금은 그 사실을 알기에 사소한 것 하나라도 원세영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원세영은 유미현의 망원경이었다.
무거운 보스턴백을 구태여 낑낑대며 들고 온 것도 비행할 때 입었던 군청색 코트를 벗어서 넣기 위해서였다. 그 코트는 한이와 명이를 데려다주러 ‘스페셜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입었던 외투였다. 잠깐 소파에 걸쳐 놓았는데 아뿔싸, 정류진이 신해범의 옷으로 착각해 옷장에 집어넣었다. 식사를 대접받고 귀가할 때 꺼내자 신해범의 향수 냄새가 흠뻑 스민 채였다.
그 냄새를 풍기며 원세영 앞에 나타날 순 없었다. 사소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뒤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른다.
윤태금은 그라탕을 우아하게 잘라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정치인 다 됐다니까, 진짜.
“가능성이 있다는 얘긴, 조만간 우리 왕자님이 헬프를 친단 말입니까?”
“최근에 신계동을 방문했습니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격렬한 운동은 어려워 보이더군요.”
윤태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총상이 덧난 겁니까?”
“그것보단 후유증이 심한 것 같습니다. 본인은 내색 안 하지만요.”
“의사는 뭐래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재활을 제대로 못 한 게.”
“어우 다행이다.”
원세영이 눈썹을 찌푸렸다. 윤태금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그게, 절대로 잘됐다는 뜻이 아니고요. 어우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절대 아닙니다. 그게 사실, 제가 정수헌 있을 때 왕자님께 그… 좀 드려 가지고. 무슨 얘긴지 아시죠? 보좌님?”
“모르겠는데요.”
“아이, 왜 그러십니까.”
“아니 진짜 모르겠어요.”
윤태금이 울먹이기 직전이 되어서야 원세영은 피식 웃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누구 탓할 입장이 아니시거든요. 지금.”
“아직도 하십니까?”
“약 없이는 못 사는 몸뚱어리죠.”
“허어.”
윤태금은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가, 방금 되게 아저씨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했다. 큼큼 헛기침을 한 그가 말했다.
“폐인 된 건 아니겠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겉보기에는 말짱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대외 활동 스케줄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약물로 연명하다 보면 티가 아예 안 날 수가 없는데. 특히나 방송 쪽 사람들은 예민하잖아요.”
“왕자님께는 실력 출중한 코디 팀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 마세요.”
원세영의 표정이 변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질문, 방금 폐인 운운한 것도 그렇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우리가 무슨… 매음굴 포주들인 줄 알겠다.”
“아이고, 아닙니다. 설마요.”
윤태금은 손사래 쳤다.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다행히 원세영은 웃으면서 답했다.
“농담입니다.”
윤태금은 권세혁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딱히 호감도 아니지만. 이미 많은 걸 잃어버린 그가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지기는 원하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생각났다. 장두현에게 신세 진 일이, 정수헌에서 지낸 때가. 그래서 기왕이면 권세혁이 부활했으면 했다. 이전과 같은 권력을 갖는 건 불가능하지만, 기우희에게 순종하며 그럭저럭 살아갔으면.
죗값은 장두현과 장승희가 충분히 치렀지 않나.
장두현을 변호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윤태금은 기억했다. 장진 사람들은 장두현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특히 기성세대는 장진이 잘사는 이유가 전부 평안 장씨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장두현을 따랐다. 솔직히 장진 사람들은 장두현의 죄목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태어난 고향을 발전시키는 일이 뭐가 나빠? 어차피 총통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관심 없잖아.
고향을 위해 노력하는 어르신이 현상 유지를 위해 약간의 법을 어기는 일 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지.
비단 기성세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더 무서운 건 어려서부터 평안 장씨를 칭송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젊은이들이었다. 윤태금은 정수헌의 사병들이 지역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기억했다. 물론 그 안에도 상하가 있었고 장두현의 잔혹성에 치를 떠는 마강희 같은 사람도 존재했지만, 바깥에서 보는 모습은 번지르르했다. 사실상 정수헌의 고용인들은 그 지역 공무원과도 같은 대접이었다.
당연히 장진 사람들은 기우희를 싫어하는 반면, 권세혁을 가엾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우리 왕자님. 가족을 잃은 상심이 얼마나 크실까. 우리라도 그분께 힘이 되어 드리자.
기우희는 그래서 장진을 압박했다. 장진의 지하수를 염화천룡도의 천연가스와 비교하며 하는 ‘장진 땅에 해동문국의 사활이 걸렸다’는 소리는 듣기 좋은 허울이었다. 기우희는 장진을 망하게 할 셈이었다. 그 땅의 자원을 뽑아 먹을 만큼 뽑아 먹고 버릴 작정이었다.
장두현의 꿈을 부수는 게 기우희의 마지막 복수였다. 그리고 유미현은 그에 따르는 희생을 묵인했다.
국내 최대 항구 도시에서 사막화된 도시. 윤태금은 장진의 미래를 능히 짐작해 냈다. 지하수는 무한한 자원이 아니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체감할 수 없을 뿐. 하지만 피부로 느낄 즈음에는 이미 늦었다.
기우희는 장진을 살리지 않을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소금물,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면 주민들은 인근 지역으로 옮겨 살아야 했다. 당장 식수가 모자란 상황에서 선택권은 없었다. 고향에 남고 싶어도, 살려면 가야 했다. 하지만 인근 지역 주민들이 그들을 환영할까?
당연히 아니지.
지역감정은 뿌리 깊었다. 한 세대 만에 씻은 듯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과거 장두현이 진한 3도에 한 짓을 생각해 보라. 그는 바다거북 양식장을 빼앗긴 어부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원세영은 자기도 권세혁에게는 악감정이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이해관계였다. 내 주인의 적은 내게도 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실, 짹짹이가 좀 힘들어해요.”
“짹짹이?”
“우리 병아리요.”
“아.”
윤태금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신해범은 본인이나 정류진의 상태에 대해 해동문국 사람들에게 입 벙긋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 본인도 자신을 시켜서 류연비를 파고 있지 않은가. 정성현을 조져 보라는 오더는 분명 정류진 몰래 시키는 일이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정류진은 진실과 마주할 수도, 영영 모른 채 신해범의 둥지에서 살 수도 있었다.
신예나는 아직 출발하지 못했다. 기우희가 권일혁의 머리에 리볼버를 갈기고 적림부를 고사포로 작살 내 놓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시간문제였다. 신해범이 기다리는 결과는 머지않아 자기 손에 들어올 테고, 그러면….
윤태금은 원세영을 쳐다봤다.
“왕자들이 처형되지 않는다는 소식 전했을 때, 안심했습니다. 그놈. 그다음부터 불면증이 개선됐고요.”
“그래요?”
“케어를 담당하는 저로서는 신계동의 안전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백 퍼센트 짹짹이를 위해서예요. 효과가 눈에 보이니까요.”
“애가 착하네.”
원세영이 웃었다. 윤태금은 숨을 들이켰다.
“조만간 짹짹이 컨디션을 크게 흔들 일이 생깁니다. 저는 그때를 대비해서 카드 한 장을 깔아 두고 싶은 겁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한 가지씩 있으면 결과는 제로다. 정류진의 상태가 좋아지지는 않아도, 더 나빠지는 일은 막는다. 윤태금은 그래서 권세혁의 무사 안전을 바랐다.
“그 카드가 뭔가요?”
“잘 살고 있다는 사진 몇 장이면 충분합니다. 대중 매체에 소개된 모습 말고,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거 말고, 좀 더 자연스러운, 아 이건 진짜 꾸밈없는 일상생활이다, 생각 드는 거로.”
“일상 사진이라.”
“부탁드립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은 원세영이 손깍지에 턱을 괴고는 빙긋 웃었다.
“너무 눈치 보시는 거 아니에요?”
“짹짹이가 망가지면 그 사람이 움직입니다.”
정류진은 신해범과 있으면 괜찮지만, 신해범과 있을 때만 괜찮아서 문제였다. 정류진 본인이 말한 바 있었다. 사실은 권세혁에게 미안하다고. 그를 미워하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고. 이곳에서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가 자기에게 잘해 준 일들만 생각난다고.
“그 사람이 움직인다. 라….”
원세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윤태금은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미쳤다고 쌍방 자폭 합니까? 절대로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 마십시오. 단지 최전방에서 비위 맞춰야 하는 제 입장도 생각을 좀.”
“사진이야 드릴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건 아시죠?”
“잘 압니다. 이건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가는 길이지요.”
미소 지은 원세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왕자님 다리 상태 물어봤구나.”
“보좌님은 통한 거 아니라고 하셨지만, 전 압니다. 우리가 속으로 같은 생각 하고 있단 거.”
권세혁을 올마이티 그룹이 후원하는 휴먼 드라마에 출연시킨다. 그는 평범한 출연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급력의 소유자였다. 국제적인 무기 회사와 훤칠하니 잘생긴 왕족의 감동 컬래버레이션. 이만한 스케일이면 해외에서도 충분히 먹힌다.
“내수용과 수출용, 두 버전으로 제작하면 좋겠습니다.”
“일이 두 배로 늘겠군요.”
“우리 그룹 전체의 이미지를 바꿔 보고 싶어요.”
윤태금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지금 올마이티 그룹 하면 생각나는 건 무기죠. 총, 미사일, 전투기, 뭐 그런 것들이요. 물론 전 우리 회사도, 우리 제품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데가 없는 베이비들이죠. 하지만 변화가 없으면 미래도 없어요.”
“변화와 미래.”
“경쟁에서 이긴다는 건 경쟁사보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것도, 거물 투자자를 사로잡는 것도, 새로운 유통 루트를 개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거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한다는 얘기죠? 그러지 못한 놈들은 도태되고.”
“보좌님도 아시는군요. 역시 우리는 통한다니까요.”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
원세영은 태블릿을 켜 방금 들은 말을 메모했다. 변화와 미래.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놈들은 도태.
기우희 시대의 슬로건으로 적합했다. 원세영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태블릿을 껐다.
“그래서 우리 파트너는, 파괴와 재건을 동시에 하고 싶으시군요.”
“위선이라 하셔도 괜찮습니다. 맞는 말이니까요.”
“인체 보조기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 테고. 그 이상 뭐가 있겠죠?”
“저는 예나 지금이나 로봇에 진심입니다.”
윤태금은 원세영의 눈을 응시하며 재차 말했다. 내수용과 수출용.
“장군님께는 제가 더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보좌님께서는 수석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이건 권세혁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정류진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그건 ‘궁극적으로’ 신해범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정류진이 신해범과 있을 때 괜찮은 만큼, 신해범은 정류진이 안정됐을 때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
기우희는 신해범을 위한 일을 마다하지 않을 터였다. 설령 그게 권세혁의 인생을 구제하는 일이라 해도.
“역할 분담 확실히 된 겁니다?”
“저는 아직 좋다고 말하지 않았….”
윤태금은 웃었고, 원세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이라는 말을 주워 담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윤태금이 키득거렸다.
“아직.”
“거참.”
“솔직하면 좋죠. 뭘.”
권세혁이 단순히 목숨을 부지한 것도, 선전 방송에 이용되고 버려지는 것도 아니라 그럭저럭 지원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을 정류진이 알면. 윤태금은 그게 정류진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신해범도 그 정도는 용납해 줄 터였다. 정류진을 위한 일이니까.
그 애한테 한 짓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심장이라도 꺼내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정작 당사자 앞에서는 ‘후회 없음’ 네 글자로 일관하지만.
언젠가는 진심을 밝힐 때가 오겠지. 윤태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의 조명이 아득했다. 긴장이 풀리고 배가 차자 졸음이 쏟아졌다.
“플러스 카드는 알겠고. 마이너스 카드는 뭐죠? 짹짹이 컨디션이 무너질 정도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지만, 역시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윤태금은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미리 생각해 둔 소리였다.
“우리 귀염둥이한테는 역린이 있죠. 세상에 유일한.”
원세영은 그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류연비의 사진을 본 윤태금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알면 하지 마세요.”
“옙.”
“누가 건드려요? 신경 쓰일 만큼?”
윤태금은 잘 알고 있었다. 신해범이 신예나를 움직였다는 게 유미현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 이건 어디까지나 윤태금 자신과 신예나의 합작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위대한 지도자, 피의 혁명가 기우희를 위해서.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게 있어서는 안 돼.
이 정도면 유미현도 이해해 줄 터였다.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윤태금이 무엇보다 신경 쓰는 부분은 유미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일이었다. 유미현은 기우희가 신해범에게 약간이라도, 설령 본의가 아니더라도, 아주 사소한 거라도 도움을 받는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터였다. 유미현은 당하고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는 무슨 방법으로든 신해범에게 ‘나서지 말라, 까불지 말라, 다치기 싫으면’ 하는 경고를 보낼 터였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정류진이 받는다.
정류진은 신해범이 다치면 우니까.
윤태금은 고개를 좌우로 한 번, 가볍게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여기서 감히 여신님 일 들쑤실 사람 없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제 성격이 워낙 이래요. 한번 마음에 걸리면 해결될 때까지 밤에 두 다리 뻗고 잠을 못 자요.”
“예민하시네요.”
“기왕이면 섬세하다고 생각해 주세요.”
원세영에게 한 이야기는 처음에 신예나를 설득했던 내용과 같았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먼젓번 때보다 횡설수설하지 않고 조리 있게 말했다.
신해범의 뜻을 타인에게 전달하면서 윤태금은 느꼈다. 신해범은 남을 설득하는 일에 익숙했다.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온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 체력 낭비가 아니길 바랄게요. 저도 언 땅에 삽질했다는 소리 듣긴 싫거든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세영은 태블릿으로 스케줄을 확인하고 말했다.
“힐튼 호텔이죠? 내일 오전 중으로 차가 갈 겁니다.”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고 말했다. 윤태금은 내일 보자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가방과 외투를 챙겨 든 원세영이 덧붙였다.
“조식 맛있게 드세요.”
일찍 일어나서 옷매무새에 신경 쓰라는 뜻이었다. 윤태금은 빙그레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세영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미리 세어 둔 지폐를 건네며 ‘미터기 없이 갑시다’ 하고 말하자 친절한 택시 기사는 캐리어도 아닌 보스턴백을 호텔 로비까지 들어다 줬다. 윤태금은 예약한 룸의 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젊은 부부가 함께 탔다. 윤태금은 보스턴백 손잡이를 고쳐 잡고 아기에게 손을 흔들었다. 볼살이 통통한 아기가 배시시 웃었다. 부부 사이에서 오가는 언어는 중국말이었다.
젊은 부부는 윤태금이 비선호하는 저층에서 내렸다. 창밖 풍경보다는 룸의 크기와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중요시하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었다. 윤태금은 무심코 신해범과 정류진을 생각했다.
본사에는 두 사람을 형제라고 소개했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그보다 단단한 인연으로 묶인 의형제.
그건 당사자인 신해범이 내놓은 의견이었다. 동양에서 온 게이 커플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는 아니었다. 독일에 처음 정착할 때, 신해범은 남몰래 생각했던 것 같다. 정류진에게 다른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을 자기가 차단하면 안 된다고.
윤태금은 헷갈렸다. 신해범이 정류진의 무엇이 되려 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부모? 형제?
누가 봐도 연인이었다. 정류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신해범도 사실은 그걸 바랐다. 윤태금의 눈에는 다 보였다.
그러나 신해범은 이기적이게도, 뻔뻔하게도, 염치없게도 정류진의 보호자 역할을 하며 연인이라는 단어와는 거리를 두었다.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세상 어떤 아버지가 밤마다 아들내미 발가벗겨서 물고 빠냐?
정류진이 신해범에게 화내는 데는 이유가 확실했다. 다만 신해범의 굿 맨 연기에는 모두가 껌뻑 속아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류진이 신해범을 함부로 대한다고 여겼다.
주말에만 문을 여는 베이커리 단골들은 특히나 신해범을 좋아했다. 맛있고 건강한 빵을 만드는 것 외에도 그에겐 어필할 거리가 많았다. 그는 자신의 약점까지 셀링 포인트로 써먹었다. 오픈 시간에 줄을 서지 않으면 빵을 살 수 없다고 불평하는 동네 주민 앞에서 사실 왼손이 불편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모습을 봤을 땐 속으로 감탄했다. 다소 어눌한 발음이나 단순한 어휘 구사력이 뜻밖에 플러스 요인이 됐다. 이곳 사람들에게 신해범, 아니 유해준은 동생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고생한 끝에 겨우 자리 잡은 젊은이였다. 독일 국민으로서 지지해 주고 보호해 줘야 할.
확실히 신해범은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베이커리 일과 관련해서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얼굴을 붉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그럼 다른 집 가든가…’ 하는 정류진과는 달랐다.
다만, 칭찬에 한해서는 정류진의 반응이 더 볼만했다.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활짝 웃는 얼굴을 그때 볼 수 있었다. 정작 빵을 만드는 신해범은 자기 실력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는 늘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주 2회 오픈에, 대량 생산도 불가능한 베이커리임에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였다. 신해범은 자신의 레시피를 제과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레시피 하나가 완성되면 정류진이 그걸 컴퓨터로 옮겨 문서화했다. 기록이 유실되지 않게끔 하는 조치였는데 파일 비밀번호는 두 사람만이 공유했다. 윤태금은 이따금 레시피 하나만 달라고, 요새는 주력 메뉴 하나로도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고 졸랐지만 소용없었다. 둘 다 어찌나 황소고집이신지.
약속한 사진은 윤태금이 힐튼 호텔에 도착해 예약한 룸에 들어가 샤워 준비를 마쳤을 때 도착했다.
“오.”
그는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태블릿을 확인했다. 선전 방송의 ‘비하인드 컷’ 정도로 보이는 사진들이 주르르 떴다. 윤태금은 그중 하나를 선택해 확대했다.
사진 속 권세혁은 세련되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값비싼 명품은 아니지만, 옷걸이가 워낙 좋으니 노 브랜드 정장도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윤태금은 권세혁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약물에 찌들어 있다면 조금이라도 티가 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한참 들여다보다 포기했다.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후보정을 거친 사진이었다. 원세영 선에서 한번 ‘걸러진’ 권세혁의 모습이었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는 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냐. 어쨌거나 겉으로 행복해 보이면 그만이었다.
윤태금은 이를 닦으면서 태블릿 속 사진들을 넘겨 봤다. 원세영의 셀렉이 꽤 괜찮았다. 특히 신계동 자택으로 보이는 곳에서의 일상 사진들은, 동생과 있을 때 권세혁은 정말 자연스럽고 즐거워 보여서…. 윤태금은 어쩔 수 없이 정수헌에서의 날들을 떠올렸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건과 환경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지금 권세혁이 어떤 성격으로 변했을지, 다시 만난다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할지, 윤태금은 궁금했다. 그 때문에 권세혁의 얼굴에서 손을 떼기 힘들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 깜빡 잠들었으나 물이 식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윤태금은 감기 걸릴 뻔했다고 생각하며 욕조를 박차고 나왔다.
벨이 울린 건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였다. 윤태금은 가운 끈을 조이면서 문으로 갔다.
“와.”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테이블에서 충전 중이던 휴대폰이 마구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었다. 발신자는 성재경이었다. 욕실에서는 전자 기기를 갖고 들어가지 않아서, 나온 뒤에는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미처 몰랐다. 윤태금은 혀를 차며 전화를 받았다.
“내일 낮에 뵙기로 했는데.”
- 지금 문 앞이다.
“어이구, 성격도 급하셔.”
바깥의 찬 공기를 휘감은 군인 둘이 윤태금의 아늑한 호텔 방에 들이닥쳤다. 성재경이 품에 안은 종이봉투는 갈색이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는 보르도 와인 한 병이 나왔다.
“와우.”
“오는 길에 샀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기우희는 그렇게 말하며 코트를 벗었다. 윤태금은 와인을 앞뒤로 돌려 보며 좋은 거 골라 오셨네요, 하고 웃었다.
“술이 당기기도 하고.”
“밖에 야경 좋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윤태금은 서둘러 잔을 세팅하려 했으나, 성재경이 턱짓으로 ‘너는 옷이나 챙겨 입어’ 했다. 머쓱하게 웃은 윤태금은 와인을 열어 티 포트에 콸콸 붓는 성재경을 보고 뜨악했다.
“대위님! 지금 뭐 하십니까?!”
“왜. 뜨끈하게 마시자고.”
기우희가 말했다. 무거운 워커를 벗어 던진 그가 창밖을 보았다.
“우린 겨울에 이렇게 마셔.”
성재경이 끄덕였다. 윤태금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우희가 무슨 마음으로 여기 찾아왔을지 알았다. 얼마나 설렜을까. 오랜만에 긴장 풀고 마시는 게.
윤태금은 포트기를 바라보는 성재경의 옆에 가 섰다. 선반에 놓였던 감자칩 포장을 뜯어 안주로 내놓았다.
“룸서비스 시킬까요?”
“필요 없어. 장군님도 식사 생각 없으시다.”
“단호하시네요.”
“여기까지 오는 데 눈에 안 띄려고 조심했어.”
“이해합니다. 우리 공주마마, 아니 장군님 정도면 은밀하게 움직이기가 쉽지 않죠.”
“지금 비꼬나?”
“아뇨. 그냥,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실까 봐요.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신경 쓰지 마.”
“어깨에 힘 좀 빼십쇼. 제 앞에서는 안 그래도 됩니다.”
성재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물론 윤태금은 그 정도로 주눅 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성재경의 지위와 체질로 봤을 때 친구 사이까지는 어려웠다. 그래도 기왕 한배를 탄 사이인데. 긴장 풀고 편하게 지내면 좋겠구먼.
윤태금은 정말로 기우희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그렇고 그런 마음을 품은 쪽은 오히려 성재경이었다.
왜 나를 경계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그건 자기가 물어다 주는 신해범 소식 때문이었다. 말해 봤자 성재경은 겉으로만 알았다고 할 것 같았다. 윤태금은 작게 한숨을 쉬고 뜨거운 와인을 따라 기우희에게 가져갔다.
“이렇게 마시면 도수 날아가는데.”
“그래서 약이 되는 거야.”
기우희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윤태금은 그의 얼굴에 서린 그리움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짹짹이 감기 걸렸을 때 이런 거 마셨습니다. 과일이랑 계피 잔뜩 넣어서.”
“펄펄 끓는 냄비 앞에서 한참 기다렸지. 재료 손질도 오래 걸렸어. 과일 제대로 안 씻으면 농약 그대로 먹는 거랑 똑같다면서.”
“장군님은 효과 보셨습니까?”
“나는….”
기우희는 신해범이 처음 술을 건네줬을 때, 무슨 독을 처넣었나 싶어서 냅다 뿌리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파오훼이 소대에 적응하기 전이었다. 신해범이 주는 거라면 뭐든 색안경을 끼고 쳐다봤을 때.
다행히 신해범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기우희의 차례가 마지막이었고, 진치우의 빠른 응급 처치 덕분에. 하지만 기우희는 똑똑히 봤다. 신해범의 손등이 빨갛게 부어오르던 모습과 다른 대원들의 원망 섞인 눈빛을.
그때는 당사자보다 진치우가 더 화를 냈다. 자신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훗날 사과와 레몬 향이 물씬 풍기는 싸구려 와인 맛을 그리워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면 입 닥치고 받아 마셨을 텐데.
“맛이 없군.”
기우희가 잔을 흔들었다. 성재경의 눈꼬리가 눈에 띄게 처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윤태금은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래도 뜨끈한 게 들어가니 좋네요. 우리 대위님도 한잔하시면 좋을 텐데.”
“쟤는 운전해야 하니까.”
기우희는 성재경을 보며 감자칩을 가리켰다.
“이거라도 먹어.”
“예.”
빈말로도 과자에는 관심 없었지만, 성재경은 기우희의 말을 잘 들었다.
“병아리가 아팠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환절기에 옷 얇게 입고 다니다가 된통 걸렸죠 뭐.”
윤태금은 가죽 재킷 이야기를 꺼냈다. 올가을, 정류진은 신해범과 함께 간 쇼핑센터에서 마음에 쏙 드는 아우터를 구입했다. 고가의 명품은 아니지만 이십 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였다. 베이직한 디자인의 가죽 재킷은 정류진에게 잘 어울렸다.
문제는 정류진이 그 옷을 한겨울에도 입고 다녔다는 점이었다. 보온이 될 만한 다른 잡화도 없이. 나 감기 걸리고 싶소,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꼴이었다.
신해범의 전화를 받은 윤태금이 의사와 함께 ‘시크릿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정류진은 연보라색 이불에 둘둘 말린 채 뜨거운 뱅쇼를 마시는 중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쌕쌕거리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윤태금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두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뭘 혼자 실실거려.”
“미인은 아플 때가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취향 고약하기는.”
“아무렴, 우리 쉐도우 맨만큼 하겠습니까?”
“현지에서 그렇게 부르나 보지?”
“저랑 누님만요. 본인은 듣고 웃었습니다.”
“유치하니까.”
“그래도 퍼스트 솔저보다는 세련되지 않았습니까?”
기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입조심해, 하는 표정이었다. 윤태금은 테이블에 올려 둔 도청 방지 장치를 가리켰다.
“이거 성능 잘 아시면서.”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여기선 긴장 풀고 계세요. 그러고 싶어서 오셨잖아요.”
“…….”
“전 정말 괜찮습니다.”
윤태금은 잠깐 고민하다 덧붙였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별로.”
“일 년이나 지났습니다. 위아래로 비밀 잘 지킬 테니까….”
“연지동도 참고 사는데, 내가 뭘.”
신예나의 홈그라운드는 연지동이 아니라 구마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옛 별명으로 불렸고, 본인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의 입에 붙어 버린 이름이었다. 어쨌거나 호월루는 신예나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낯설어할지도 모르니까.
기우희가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권일혁 사망 소식 들었을 때 ‘쉐도우 맨’이 뭐라고 했는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셨죠. 생각보다 빠르다면서요. 그런데 제가 출국 전에 자세한 내용 전해 드렸을 땐 장군님과 어울리는 파격적인 행보라며 함박웃음 지으셨습니다.”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나?”
“뉴스요. 아나운서 같지 않습니까?”
“아나운서가 다 얼어 뒈졌군.”
“매정하시네요. 국제 사회 반응은 좀 살펴보십니까?”
“내가 왜?”
윤태금의 눈이 동그래졌다.
“관심 없으십니까? 지금 전 세계가 장군님을 주목하고 있는데요? 철혈일성을 무너뜨리고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왕족들, 귀족들 싸그리 숙청하신 당사자가 바로 장군님 아닙니까?”
“지랄 염병.”
“장군님.”
성재경이 기우희가 내려놓은 와인 잔을 거둬 갔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기우희가 고작 이 정도에 취할 리 없다는 걸.
그러나 지금 기우희는 취하고 싶어 했다. 취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보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성재경은 그 마음을 이해했다. 윤태금은 아니었다.
“긴장 풀라는 얘긴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 모르십니까? 우리 해방자께서….”
“뭐, 해방자?”
기어코 웃음을 터뜨린 기우희가 소파에 등을 묻었다.
“날 그렇게 부르나?”
“정말 신경 안 쓰시는 모양이네요.”
“신경 안 써. 옛날부터 그랬어.”
그는 대외적인 부분은 유미현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꼭 감은 눈꺼풀이 경련했다.
“괜찮으십니까?”
윤태금은 기우희의 눈 밑이 꺼멓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겨울바람에 피부가 까칠해졌다고 얼버무릴 수 없을 만큼 기우희는 수척해진 상태였다.
“장군님. 피곤하십니까?”
“허무해.”
윤태금과 성재경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느꼈다.
빌어먹을.
“그 사람도 이랬겠지.”
“…….”
“허무했을 거야. 간단해서. 오랫동안 이를 갈았는데, 어이없을 만큼 쉽게 끝나서.”
기우희가 눈을 떴다.
“솔직히 죽고 싶었을걸.”
하지만 신해범에게는 정류진이 있었다. 그래서 죽을 수 없었다. 지독하게 상투적이지만, 사랑의 힘이었다. 그렇게밖에 설명 못 할 기류가 그날 두 사람 사이를 붙들었다.
“잘 사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나름대로 고민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어느 날 갑자기 픽 쓰러져 그대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걱정 안 해요.”
“여기선 그렇게 보였나?”
“아슬아슬했지요.”
윤태금은 고민하지 않았다. 기우희에게 이 말을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장군님 모습처럼요.”
“내가?”
“정계든 재계든, 팔 한번 들어 올리면 적이 생기는 사람에게 지켜야 할 누군가가 생기면 위험하죠. 약점이 되니까요.”
“잘 아네.”
“그런 건 안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있어도 정말 그 사람을 위한다면 자기 마음을 감추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을 바꿨어요.”
“왜.”
“약점이 위안이 돼요. 아이러니하죠. 내 인생의 오점, 방해물,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장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
“그래서 저는 우리 병아리가 참 좋아요. 그 짹짹이가 투덜거리는 모습만 봐도 웃음이 납니다. 저도 이러는데, 당사자는 오죽하겠습니까?”
신해범은 위선자였다. 그는 정류진의 연인임을 에둘러 부정하고 가족을 자처하지만, 정작 정류진에게 누군가가 나타나면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윤태금은 그 치사한 심리를 한눈에 꿰뚫어 봤다. 당사자인 정류진도 알았다. 요즘 정류진의 최대 고민거리는 정체기에 빠진 독어 실력과 연인임이 분명하지만 그 사실을 제 입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해범이었다. 그렇게 실랑이하느라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게 삶이었다. 그렇게 견딘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인 결과가 지금이었다. 신해범은 살아 있었다. 정류진의 곧은 몸에, 가늘지만 그 자리에 뿌리박고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기둥에 철썩 달라붙어서.
윤태금은 기우희가 신해범처럼 되길 바랐다. 불꽃이 꺼진 뒤의 어둠을 견디는 법을 신해범이 가르쳐 줬다.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전령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나 만드세요. 장군님.”
윤태금은 성재경을 쳐다봤다. 기우희가 모른 체할 수 없도록 대놓고. 성재경은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윤태금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 나한테 빚졌다. 앞으로 형님이라 불러.
“어이가 없군.”
“무측천도 말년에는 어린 소년들과 잠자리를 함께했죠.”
“그게 정적들에게 공격당할 여지를 제공했고, 연인의 배신으로 지저분한 꼴을 봤지.”
“강요는 않겠습니다. 제가 어찌 장군님께 그런 결례를 범하겠습니까. 그래도 생각은 해 보세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윤태금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기우희는 그런 윤태금을 한 대 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이거나 전해 줘.”
“서신입니까?”
겉봉에 아무것도 없는 흰색 민짜 봉투였다. 종이가 제법 빳빳하고 도톰했다. 방수가 되는 재질이다.
입구는 단단히 봉해졌고, 한번 열면 표시가 나는 실링 왁스도 붙었지만, 기우희는 열어 봐도 상관없다고 했다. 윤태금은 피식 웃었다.
“제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아시면서.”
“그래서 주는 거지.”
“이것만 전해 드리면 됩니까?”
윤태금은 편지 봉투를 앞뒤로 돌려 보았다. 정말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그냥 편지였다.
“이런 건 내일 찾아뵀을 때 주셔도 괜찮았을 텐데.”
“내일 신룡관에 올 필요 없다. 지금 마주 보고 앉아서 얘기하잖아.”
“원 보좌가 차 보낸다고 했는데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조용히 그거 갖고 나가.”
“알겠습니다. 그래도 식사 한 끼 정도는 할 수 있겠죠? 비행기 시간도 있고.”
“왜. 함풍에서 정성현 조졌는지 확인하려고?”
윤태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고 계시네요.”
“연지동이 나 모르게 뭐 할 사람으로 보였나?”
“화나신 건 아니죠? 들어서 아시겠지만, 그거 제 생각 아닙니다. 우리 쉐도우 맨의 스페셜 오더죠. 그리고 아직 출발도 안 한 거로 아는데요. 우리 장군님이 거하게 놀아 주신 덕에.”
“정성현, 지금 함풍에 없어.”
“예?”
“연지동에겐 내가 말했으니 따로 연락할 필요 없다. 지금 정성현은 함풍에 없다. 장진으로 일하러 갔거든.”
“장진이면… 아.”
윤태금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성현이 지하수 사업 노동자입니까?”
“그래 봬도 관리직이야.”
“박진아 씨는요. 류진이 이모. 시설에 있다고 들었는데.”
“장진 소재 요양원에 자릴 알아봐 줬지. 부부가 손잡고 사이좋게 갔어. 지하 저수지 완공 전까지는 거기 있을 거다. 시설 인근에 집도 얻어 줬고, 다달이 돈도 부쳐 주니 불만 없겠지.”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은혜 갚는 까치 노릇이지.”
기우희는 안다고 말했다. 작년 충용절, 장승희를 저격함으로써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는 동시에 기우희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이나활이 아니라 정류진이라고. 이나활의 거짓 주장을 알면서도 속아 주는 ‘척’한 이유는 이나활에게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기우희가 권일혁 총통에게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말 그게 답니까?”
“물론 다가 아니지.”
윤태금은 한숨을 쉬었다.
“뭐가 있군요. 정성현.”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게 군다, 싶을 땐 뒤가 구린 법이야. 연지동은 그놈이 자기 사는 데 급급해서 조카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정성현은 황효제를 만난 적 있음을 자백했다. 그러나 요양원에 있는 아내를 걸고 맹세하는데, 황효제를 죽인 건 아니라고 했다.
황효제는 스스로 함풍에 왔다. 그는 예배당 지하실의 존재를 알았다. 류연비에게 정계의 무서움을 강조하고 중요한 물건을 몰래 보관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는 곽재헌이었다.
황효제는 류연비가 곽재헌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랐다고 말했다. 예배당에 현지인들도 모르는 비밀 공간을 만들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겠으나, 그 당시 정성현은 사람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상태였다. 정성현의 귀에 황효제의 말은 ‘네 조카딸이 곽재헌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정도로 들렸다.
정성현은 황효제를 협박했다. 동네 사람들을 부르기 전에 꺼지라고. 그리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황효제는 시골 필부의 협박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류연우를 만나겠다고 했다. 당신이 날 돕지 않으니 그 어린애 손이라도 빌려야겠다고, 누나를 사랑하는 동생이라면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려 할 거라고.
정성현은 황효제를 믿지 않았다. 살아생전 류연비와 가까웠다며, 본인은 류연비의 편이라며 유족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목적은 특종이 될 만한 정보였다. 황효제가 찾아왔을 때 정성현은 이미 그런 치들을 수두룩하게 겪은 다음이었다.
류연비의 명예를 위해 움직인다면서 그 애 동생이 개명한 것도 모르나 보지?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성현은 황효제를 해코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 정성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조카와 이 사람이 만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적어도 정성현, 본인의 주장은 그랬다.
“살의가 없었다는 얘길 강조하더군.”
“그게 중요하단 걸 알았나 보네요.”
윤태금은 곰곰이 생각했다. 정성현이 원래부터 법에 빠삭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마 사고를 쳐 놓고 공부했겠지. 대비할 시간이라면 충분했으니.
정성현은 황효제가 말하는 ‘지하실’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다. 황효제는 그곳을 보여 주면 정성현이 자길 믿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예배당으로 갔다. 그리고 정성현은 동네 사람들도 모른다는 그 비밀의 공간에 황효제를 가둬 버렸다.
정확히는 수면 유도 성분이 있는 약초를 우려낸 물을 그에게 마시게 한 뒤, 힘이 빠진 그를 지하실로 밀어 넣고 입구를 봉쇄했다.
“황을 거기 가뒀다고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가?”
“고의는 아니었다더군.”
“그게 어떻게 고의가 아닙니까? 입구도 막았다면서요.”
“잠에서 깨면 스스로 나올 줄 알았다는데. 황 씨 체격이 건장해서.”
허. 윤태금은 혀를 찼다.
“무슨…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 그래요, 그게 사실이라고 칩니다. 황의 보복은 무섭지 않았답니까? 그런 짓을 해 놓고?”
“그 반대야. 그런 일을 겪으면 겁을 먹고 이 동네에 발붙이지 못할 줄 알았다더군. 그래서 협수초 달인 물을 먹였고.”
협수초는 해동문국 산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생 식물이었다. 예로부터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있어 민간에서 널리 이용했다. 특히 협수초 잎을 푹 끓인 뒤 볕에 말려서 빻은 다음 꿀에 버무려 만든 환은 긴장과 어지러움을 해소하며 두통을 가라앉힌다고 하여 우황청심환 대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협수초는 생김새가 대마초와 비슷했다. 언뜻 봐서는 구분하기 힘들었다. 또한 수면 유도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한때 마약성 진정제로 분류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야생에서 자란 협수초를 관공서에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포상금이 주어졌다.
다행히 두 식물을 구분하는 가이드라인이 생겼고, 협수초에 중독성이 없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지만, 아직도 기성세대 중에는 협수초를 대마와 동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성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중독성이 있든 없든, 환이든 가루든 물이든, 수면제 효과가 있는 약물을 황효제에게 먹였다는 게 중요했다. 고의성은 이미 거기서 성립했다. 윤태금은 골치가 아팠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성현? 류진이 이모부? 함풍에서 류진이 붙들고 펑펑 울었다는 그 남자? 진짜 그 사람이 황효제의 죽음에 관련됐다고?
“그런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황은 겨우 그 정도로 겁먹을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열받았으면 받았지. 그 뒷감당은 생각 못 했답니까? 아니, 류진이한테 접근 못 하게 할 셈이었다면서요?”
“나도 정성현 안 믿어.”
기우희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누가 그런 헛소릴 믿어. 겁주려는 목적으로 협수초 물을 먹였다는 게.”
“그렇죠. 그게 독극물도 아니고.”
“잠재운 다음에 어떻게 할 생각이었겠지. 덩치로는 상대가 안 되니까.”
“그런데… 아시잖습니까? 황 시체에는 치명상이 될 만한 상처가 없었어요.”
“용기가 없어서 그만둔 거야.”
살인을 저지를 용기. 기우희는 그럴 만하다고 빈정거렸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 가둬 놓고 알아서 나오기를 기대했다고? 고작 그 정도로 겁을 먹고 다신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몇 년간 머리 굴려서 생각해 낸 핑계가 겨우 그거라니. 웃기지. 안일하기 짝이 없어. 이치에도 안 맞고.”
차라리 어린 정류진이, 류연우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다. 그만큼 정성현의 주장은 어린애나 할 법한 미숙한 대응이었다.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가진 게 없어도 정성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기우희는 정성현의 어쭙잖은 설계를 단숨에 간파해 냈다.
한숨을 푹 쉰 윤태금이 말했다.
“고의성 없음을 증명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애매모호한 얘기가 된 거군요.”
“왜 없음을 증명하려고 하겠어. 있었으니까 그렇지.”
고의성이.
살의가.
황효제에게 협수초를 먹인 순간부터, 그와 ‘아무도 모르는 공간’으로 단둘이 간 순간부터. 정성현에게는 고의성이 존재했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 겁만 줄 작정이었다고 해도.
하지만 정성현은 완강했다. 류연비와 곽재헌 이야기에 두렵고 화가 나서 황효제를 지하실에 가둬 버리긴 했지만, 그곳에서 죽을 줄은 몰랐다고.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지하실에 가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날 이후 예배당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로는 ‘그런 데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댔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말이 되긴 해. 그때 상황이 정신없었던 건 사실이라.”
황효제가 정성현을 찾아왔을 때는 정류진이 열여덟 살 때였다. 함영재 패거리에게 윤간을 당하고, 지역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고소를 취하하라고 협박당했을 때.
“그래도… 괘씸한데요. 뭐에 신경 쓰는지 보여서.”
“괘씸하지.”
그러나 그게 본능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꾀를 쓰는 인간의 본능.
기우희는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예전에도 만난 적 있어. 정성현.”
함풍에서 함씨 일가를 숙청했을 때. 그때 정성현은 예배당으로 달려와 정류진을 찾았다. 기우희는 정류진을 혼자 보낼 수 없어 성재경과 동행시켰다.
성재경이 다가와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와인을, 기우희는 아무렇지 않게 꿀꺽꿀꺽 마셨다. 윤태금은 기우희의 혓바닥이 무쇠로 만들어졌는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성현은 성재경을 기억하지 못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정류진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어서. 정성현은 조카를 데려온 군인의 생김새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기우희가 정성현의 발언 중 그나마 신뢰하는 대목이었다. 나머지는, 글쎄.
그래도 성재경은 정성현에게 관대했다. 그는 정성현이 정류진을 안고 울며 용서를 빌던 모습이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정성현은 예배당이 훼손된 모습을 보고서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날, 그 장소에서 정성현이 토해 낸 것은 슬픔이었다. 정류진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 순수한 슬픔.
애초에 예배당의 지하실에 시체를 숨겼다면 무슨 이유로든 그곳이 훼손되었을 때 도망갔어야 마땅했다. 시체가 세상에 나타나면 응당 범인을 찾아야 하니까. 하지만 정성현은 도망가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발로 찾아왔다. 심지어 그는 함씨 일가 숙청이 끝난 뒤에도 고향에 남았다. 황효제가 지하실에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못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성현은 정말로 황효제가 하룻밤을 ‘푹 잔 뒤에’ 지하실을 빠져나갔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성현의 생존력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고 한 방어 본능이, 진실이 진실로 드러나는 때를 한참 뒤로 밀어 버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황효제의 몸속에서는 설계도 가방의 열쇠가 나왔다. 가방이야 빼앗아 부수면 그만이지만, 증거물이 든 열쇠를 삼켰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정성현은 황효제의 마지막 보루였을지도 모른다. 혼자 힘으로는 류연비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가 도움을 청하려 했던.
그러나 시기가 나빴다. 황효제는 좀 더 빨리 정성현을 찾아갔어야 했다. 그가 온 세상을 증오하게 되기 전에. 류연비를 거론하며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기 전에.
기우희는 성재경과 달랐다. 그는 정성현에게 고의성이 있었다고 봤다. 그 당시 정성현이 황효제에게 한 실제 행동과 그에게 느낀 분노의 감정, 또 정성현 주변의 열악한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정성현은 황효제를 죽일 생각으로 지하실에 가뒀다.
사실 기우희가 밝히고 싶은 건 진실이 아니었다. 황효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진실’이 뭐든 결과는 바뀌지 않아야 했다. 류연비는 성녀고 권주혁은 썅놈이라는 오늘날의 ‘사실’은.
다만 기우희는 궁금했다. 그래서 정성현을 몰아붙였다.
“그 인간으로 알 수 있을 줄 알았어. 평범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의 심리.”
기우희는 상상했다. 정성현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류진을 찾기 전, 그는 본능적으로 예배당의 파손 정도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지하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한 다음에’ 정류진을 찾아 못난 이모부로서의 참회를 한 게 아닐까?
정성현과의 거래는 황효제 일에 대해서 입 다무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윈윈 게임이었다. 고의든 실수든 정성현은 자신의 과오를 감추고, 기우희는 현상 유지를 한다. 만에 하나 ‘뱀의 시대 수혜자’가 이 일에 의문을 품고 덤벼들면 정성현을 이쪽에 유리한 증인으로 써먹는 것도 가능했다.
윤태금은 한동안 얼굴을 마사지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와 미간을 오가며 꾹꾹 눌렀다. 이러면 조금이나마 편두통이 가셨다.
“그래서… 본인 주장은요? 병아리보다 예배당이 우선이었답니까?”
“죽어도 아니라고 발뺌하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더군. 그땐 조카애 생각에 넋이 나가서 자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는데, 그래도 용케 예배당 찾아온 걸 보면 선택적 기억 상실이야.”
“어이구.”
순간 성재경이 움찔했다. 윤태금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기우희는 뜨거운 와인을 냉수처럼 들이켜느라 성재경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 서신에 그 내용이 담겨 있겠군요.”
테이블에 올려 둔 편지로 시선이 갔다.
“그래.”
“이것, 수신인이 누굽니까?”
편지를 받았을 때는 당연히 신해범이라고 생각했다. 기우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헷갈렸다. 봉투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황효제의 죽음에 얽힌 ‘사실’을 적은 이 편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우희는 누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은 걸까.
윤태금이 고개를 저었다.
“제발.”
애원이 절로 나왔다. 그 힘든 결정을 내게 떠넘기지 말라고. 그러나 기우희는 빈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성재경이 기우희의 코트를 가지고 왔다.
“아! 좀!”
황급히 기우희를 따라갔다. 이렇게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 기우희는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장군님.”
“나는 이것 말고도 고민할 문제가 많거든.”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아니긴. 쉐도우 맨 지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잖아. 이건 네가 결정해야 할 몫이다.”
“이렇게 가시면 안 돼요.”
윤태금은 기우희를 잡으려 했으나 성재경에게 가로막혔다. 문 앞에서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윤태금은 성재경과 눈을 마주치는 데 성공했다.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전화해.’
할 얘기가 있다면, 나한테 전화해.
작업 멘트가 아니라는 사실은 양측 모두 알았다. 그리고 성재경은 전화를 걸어왔다. 기우희가 끝끝내 결정을 떠넘기고 나간 뒤 세 시간이나 흐른 한밤중이었다. 체념한 윤태금이 휴대폰을 부여잡고 침대로 들어갔을 때.
“여보세요.”
- 나와.
“예? 지금? 갑자기?”
- 사람 많은 데서 얘기하고 싶어.
“아… 그건 좀. 방금 자려던 참인데.”
- 잔말 말고 튀어나와.
툭. 전화가 끊어졌다. 윤태금은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포효했다. 이놈 이거,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였다. 군인이라고 숙여 줬더니 사람을 호구로 알아!
성재경이 지정한 장소는 호텔 내부나 인근 시설이 아니었다. 기우희가 거주하는 신룡관 근처도 아니었다. 애초에 윤태금은 광성에 머무는 동안 부현동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도착하니 슬럼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상자 같은 빌라가 빼곡히 들어찬, 낙후한 서민 동네를 지날 때 예상은 했었다. 살면서 슬럼가를 겪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장진은 광성만큼이나 빈부 격차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촌과 빈촌이 갈렸다. 그게 비단 이 나라만의 문제인가? 어딜 가든 그 나라만의 언어로 ‘부자 동네, 가난한 동네’라는 명사가 있었다.
알면서도 충격받은 이유는 성재경 때문이었다. 윤태금은 그가 이런 곳에 드나들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여 눈이 아플 지경인데 거리에는 악취가 진동했다. 갓길에는 터진 쓰레기봉투가 널렸고 취객과 노숙자가 아무 데나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노리는 범죄자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에 숨어 있다가 먹잇감이 보이면 귀신같이 낚아챘다.
윤태금은 알았다. 슬럼가의 포식자는 달랐다. 눈빛이, 사소한 행동거지가. 밤거리의 분위기나 유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었다. 열에 아홉은 약에 찌들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윤태금은 포르쉐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좁은 길 앞에서 차를 돌렸다. 성재경의 판단은 잘못됐다. 젊은이들끼리의 대화를, 격식 차릴 필요 없는 장소에서 나누고 싶었다면 다른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덴 아니었다. 성재경이 이런 거리의 클럽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기우희가 알면 당사자는 물론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터였다. 윤태금은 기우희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살면서 적으로 만들면 안 될 인물 2위였다. 1위는 뭐….
쿵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볼 캡을 코까지 눌러쓴 남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롱 패딩 차림이었다. 가슴께에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선명했다. 윤태금은 차창을 조금만 내렸다.
“그러고 입장하게?”
“차는 주차장에 두고 왔어야지.”
“주차장 못 봤는데.”
“역 앞. 여기서 걸어서 3분이다. 두고 와.”
“아익, 야!”
“야?”
“그래 야. 너 이런 동네 드나드는 거, 장군님은 아시냐?”
“가끔 같이 와.”
태연한 응답에 정신이 멍했다. 윤태금은 순간 성재경이 불리한 상황에서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애당초 약점이라면 자길 이곳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성재경은 정말로 ‘눈에 안 띄는’ 장소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번듯한 군인이 드나들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곳. 사람 많고 정신없고 시끄러워서 도청 방지기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곳.
그래도 기우희와 함께 온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다. 윤태금은 군청색 코트 깃을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재경이 에너지 음료 캔을 건넸다.
“뭐야?”
“…….”
“야, 우리 성 대위 숙맥이네. 맨정신으로 입장 못 하겠어?”
“헛소리하지 말고 마셔. 그 분위기에서 목마르면 술 생각 나니까.”
“술 사 주는 거 아녔어?”
“내가 왜.”
“아니, 여기까지 불렀으면 당연히 술 한잔하자는 뜻 아냐? 대리 부를 생각 하고 왔는데.”
성재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빈 캔을 밟아 납작하게 만든 뒤 전봇대 밑에 산처럼 쌓인 쓰레기봉투 사이에 끼웠다.
“따라와.”
성재경은 앞만 보고 걸어갔다. 윤태금은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가며, 그가 확실히 이 거리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꽂고 척척 걸어가던 성재경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윤태금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야.”
마시던 에너지 음료 캔이 바닥에 떨어졌다. 성재경이 돌아봤다.
“왜?”
“여기 골목길이잖아. 왜 이런 데로 가?”
“이쪽으로 가야 나오니까.”
성재경이 픽 웃었다.
“무섭냐?”
“무섭긴! 개뿔… 처음이라 그러지. 이쪽이 지름길이냐?”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네온사인에 의지해 앞서 걸었다. 윤태금은 귀를 쫑긋 세웠다. 성재경이 잘 따라오나 뒤돌아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다행히 성재경은 도망가지 않았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실골목에 자신을 쑤셔 넣고 미리 부른 ‘친구들’과 함께 린치하지도 않았다. 윤태금은 클럽 입구에 늘어선 줄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두 사람은 줄의 끝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성재경은 롱 패딩을 벗으면서 입구로 직행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대자 바로 입장됐다.
“서지운이 누구야?”
“…풍기대에 같이 있었어.”
“아아.”
성재경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윤태금의 신경은 고막을 때리는 음악 소리에 온통 쏠렸다.
“여기서 뭔 얘기를 해! 하나도 안 들려!”
“2층으로 가.”
“어엉?!”
윤태금은 성재경의 검은 셔츠 등판만 보고 움직였다. 피크 타임이 아닌데도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윤태금은 어휴, 어휴, 하면서 움직였다. 눈앞에서 휴지가 날아다니고 스파클라가 번쩍였다. 조명도 부실한 클럽에서 어찌나 신나게들 노는지, 하마터면 야광봉에 콧등 얻어맞을 뻔했다. 윤태금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키던 스태프에게 손목에 찬 종이 띠를 보여 줬다. 1층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손목 띠와 색이 다르다는 것은 여기까지 걸어오며 확인했다.
“빨리 와.”
“뭔 어린애들만 있냐?!”
“어린애들 노는 데 맞아. 예전부터 그랬어.”
“취향 한번 저렴하다.”
계단을 오르던 성재경이 멈추더니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아까 봤어?”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뭐를?”
“여기 상호. <화이트 스완>이야.”
과거 반정부 조직 <백사자>가 운영한 클럽 <화이트 스완>. 물론 그 <화이트 스완>은 아니었고, 건물주가 두어 차례 바뀐 끝에 기존 상호 그대로 문을 연 곳이었다. 간판은 그대로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새로 했다고 한다. 기존의 상호를 유지하는 까닭은 딱히 정치적인 게 아니라, 과거 <화이트 스완>의 폐업 이후 경쟁 가게로 떠난 손님들을 불러들이기 위함이었다. 서지운은 이곳에서 바텐더 일을 하고 있었다.
“전직 풍기대 병장님이 클럽 바텐더. 파격적인 변신인데.”
“단체 생활은 지긋지긋하대.”
“음, 그럴 수 있지. 나도 가끔 조직 생활이 답답해 미칠 때가 있어.”
윤태금은 난간을 짚고 섰다. 2층은 아래보다 소음이 덜했다. 가까이서 나누는 대화는 그럭저럭 통했다. 목청 터져라 소리 지르지 않아도.
“뭐 더 알고 있지? 정성현에 대한 거.”
“장군님 말씀이 사실이다.”
성재경이 볼 캡을 벗자 녹색 조명이 그의 이목구비를 훑고 갔다.
“황을 거기서 죽게 만든 건 정성현이야. 직접 손을 써야만 살인자인 게 아니야. 목을 조르거나 무기를 쓰거나, 독극물을 먹이지 않아도 여러 요인이 겹치면 사람은 잘못될 수 있어. 황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거야.”
정성현이 인정한 사실은 본인이 황효제를 지하실에 밀어 넣었고 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부정하는 건 황효제에 대한 살의였다. 협수초 달인 물은 어디까지나 황효제의 힘을 뺄 목적이었다. 일대일로 붙어서 이길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협수초는 독초가 아니었다. 대마초와 생김새가 같아 수모를 겪었을 뿐, 인체에 유해한 독성은 없는 식물이었다. 정성현은 그래서 황효제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하룻밤 노숙으로 죽을 리는 없으니까.
“난 그 사람이 한 말 믿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그래.”
“있잖아, 성 대위….”
윤태금은 시선을 내렸다. 1층에서 춤추는 사람을 바라봤다.
“나 어릴 때, 아마 스무 살 생일 파티 때였던 거 같은데, 누님이 이런 얘기 했어. 위에서 머리만 봐도 연령대가 보인다고.”
“뭐?”
“그땐 안 믿었는데, 지금은 알 거 같다. 진짜 보이네. 여기 애들 대충 몇 살인지.”
성재경이 웃었다. 담배를 건네는 그에게서 에너지 음료 냄새가 풍겼다.
“그런 말 하는 저의가 뭐야?”
“병아리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정성현 감싸는 거.”
심장이 쿵쾅거렸다. 니코틴의 각성 효과 때문이 아니었다. 고막을 찌르는 음악과 비트 사운드도 이 세찬 심장 박동의 원인은 아니었다. 윤태금은 자신이 성재경의 정곡을 찔렀음을 알고 있었다. 가차 없이.
“내가 우리 병아리 상담 기록을 받아 보고 있거든. 의료법 위반이니, 환자 프라이버시 침해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사전에 다 안내하고 계약한 거니까. 그래서 내 나름대로 자세히 알아.”
윤태금은 담배 연기를 내뱉은 후, 성재경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우리 성 대위님. 병아리랑 절친이었잖아.”
“…….”
“걱정하지 마. 발뺌 안 해도 돼. 병아리가 특정인 유추되지 않게 말했으니까. 이름, 나이, 성별이랑 계급. 그래도 풍기대 사정 좀 아는 내 눈에는, 대충 보이지. 부럽다.”
진심이었다.
“나도 병아리랑 짱친 되고 싶은데. 걔 나한테는 아직도 선 그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위로도 못 해 주냐?”
“병아리 때문에 감싸 주는 거 아니야. 나는 봤다. 정성현, 그때 정말 류진이한테만 신경 썼어. 그게 연기라면 정성현은 장진에서 일할 게 아니라 연예계에 입문해야 해. 세기의 명배우가 될 수 있어.”
“고의성 없음에 동의한다는 얘기야?”
“그래. 정성현이 무죄라는 뜻은 아니야. 살인자는 아니지만 황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지. 그건 본인도 인정했어. 그러니까 거래에 응한 거고.”
“장군님과 생각이 다르군.”
“내가 그분께 반기를 든다고 생각하지 마라. 난 여전히 그분을 존경하고 따라. 장군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보고. 하지만 장군님은 그 모습을 못 봤잖아. 정성현이 류진이한테 참회하는 모습.”
참회. 성재경은 눈을 깜박였다.
그날 운 건 정성현 혼자만이 아니었다. 정류진 또한 아파했다. 겨우 슬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아이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성현이 황효제를 때려죽인 것도 아니었다. 그건 정말 사고였다. 여러 환경적 요인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사고.
별안간 성재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져, 윤태금은 움찔했다.
“왜. 왜?”
“그 편지 내용을 바꿔 줘.”
“뭐?”
“진실을 조작하라는 뜻이 아냐. 정성현에게 고의성, 그러니까 살의가 있었다는 부분만.”
윤태금은 눈을 부릅떴다. 음악 소리 때문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성재경의 말뜻을 이해한 순간 분노가 솟구쳤다.
“어떻게 늬들은 나한테!”
소리 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라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성재경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대화 장소를 골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해결사도 아니고! 이렇게 힘든 일을 맡기면 어쩌라고! 나더러 그 책임을 어떻게 지라고!”
“류진이, 아니 병아리를 생각한다면.”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성재경이 그대로 짓밟았다.
“그때 정성현은 하나도 불안해하지 않았어. 황효제가 빠져나갔을 거라고 믿고 살아왔다는 증거야. 장군님은 다른 의도로 해석하셨지만, 난 정성현이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
성재경은 거듭 말했다. 자신은 정성현의 무고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고. 정성현은 무해한 얼간이가 아니었다. 그건 신예나가 알아낸 사실로 증명됐다.
정성현은 조카를 버렸다. 그는 부처의 현신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 방법을 도모하고 득실을 따지는 평범한 사람. 본인의 이득을 원하고, 취하려 들 수 있는 사람.
모든 인간은 사악함을 지녔다. 대부분은 자신의 악함을 안으로 감추고 살아간다. 국가와 사회가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다만 권력자들은 자신의 악함을 표출해도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았고, 악함을 드러낼 기회 또한 많았다.
정류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정성현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성현을 비난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완벽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세상에 있던가.
윤태금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철제 난간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
“살의가 없었는데도 사람을 죽일 수 있나?”
“그럴 수 있어.”
“그래. 정성현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자. 그럼 황효제는 뭣 땜에 죽었는데? 이십 대 팔팔한 나이도 아니지만 갓 태어난 신생아도 아니었는데, 겨우 하룻밤 지하실에 갇혀 잤다고 어떻게!”
“면역 쇼크.”
“뭐?”
음악이 바뀌더니 시야가 암전됐다. 클럽 내부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이 찬 팔찌나 LED 야광봉 같은 자그만 불빛만 남았다. 성재경은 당황한 윤태금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블랙아웃 타임이야.”
외국 클럽에도 이런 거 있잖아, 하고 말하는 성재경의 옆에서 윤태금은 말없이 난간을 꽉 잡았다.
면역 쇼크….
인체는 매우 똑똑하다. 환경이 달라지면 기막히게 알아차리고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음식, 물, 심지어 공기까지.
윤태금은 상해에서 물 알레르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피지 라인을 따라 뾰루지가 우다다 올라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석회질 물 때문이었다. 함께 체류하던 윤금강의 상황은 더 나빴다. 잦은 탈색과 염색을 반복한 머리카락이 손가락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빳빳해져서, 그 숱 많은 장모를 생수로 감느라 고생했다.
베를린에서 약을 하던 모습을 들켰을 때, 누님은 무조건 다그치지 않았다. 그도 한때 엑스터시에 빠졌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애들 심리를 잘 알았다. 그래서 갱생원에 끌려가는 대신 주의 사항 집중 강의를 들었다. 윤태금은 누님이 특히 강조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즐기는 건 좋은데, 네 복용량을 정확히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휴양지에서 마약 관련 사고가 특히 많이 발생하는 까닭이 그것이었다. 환경이 바뀌면 인체는 예민해진다. 평소의 정량을 투여하더라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아주 약간의 항원이 생명에 위협을 가할지 모른다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윤태금은 그때부터 약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끊은 건 아니었고 공급책 노릇도 종종 했지만 예전의 그 왕성했던 호기심은 사라졌다. 자기 몸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건 질색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에 휘말려 인생 종 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장진에서도 몸 사렸지. 프로포폴이나 돌리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황효제가 면역 쇼크를 일으켰다면 유력한 원인은 협수초였다. 독성이 없다 해도 면역력이 높아진 상태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황효제는 광성 사람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증거물을 지녔었다. 류연비의 적들, 예컨대 권주혁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제대로 잠을 자거나 식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딱히 지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윤태금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어두운 공간에서 음악 소리는 한층 크게 들렸다. 바로 옆에 성재경이 있었다.
“사람은 죽었는데 살인자는 없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어.”
블랙아웃 타임이 끝났다. 일제히 조명이 커지고, 음악도 바뀌었다. 윤태금은 밝아진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1층에서 페이즐리 셔츠를 입은 스태프가 양손에 술병을 들고 흔들어 댔다. 병목에 폭죽이 붙었다. 모쪼록 단단하게 고정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게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대참사다.
윤태금은 성재경의 눈을 응시했다.
“정성현이 USB에 대해서도 말했어?”
“그런 얘긴 없었다.”
류진이 어린 시절 택배로 받아 서랍장에 보관했다는 USB. 류연비는 자신의 미완성곡이 들어 있다고 했다. 류진은 그것을 류연비가 죽은 뒤 잃어버렸다. 도난이었다. 그리고 신해범은 황효제를 용의자로 꼽았다.
정성현은 USB의 존재를 모른다. 그렇다면 황효제 선에서 처리했다는 얘긴데.
폭죽놀이가 끝났다. 병목에 붙은 폭죽을 빼 내던진 스태프가 무대 가까이에서 몸을 흔드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시작했다. 윤태금은 공짜 술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못 찾나?”
“못 찾았어.”
적어도 지하실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황효제의 시신 속에서도. 류연비의 유품을 없앴는지, 어딘가에 감췄는지, 그건 죽은 자만이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장군님은 묻고 가려고 하셨다.”
“…….”
“애초에 그 편지, 장군님은 쓰고 싶지 않았어. 그분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넌 모를 거야. 그건 현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병아리를 위해서야. 그 앤 치료 중이니까.”
황효제의 죽음에 정성현이 어떻게든 관련되었다는 걸 알면, 분명 정류진은 충격받을 터였다. 기우희는 그래서 이 일을 묻으려 했다. 권주혁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고. 하지만 신해범 쪽에서 파기 시작한 이상 기우희는 비밀을 삼키지 못하게 되었다.
윤태금은 착잡했다. 과거, 의료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원인 불명의 돌연사로 판정되던 것들도 현대에 이르러 종종 외부 요인에 의한 면역 쇼크였음이 밝혀지곤 했다. 어쩌면 황효제의 죽음도 미스터리가 될 수 있었다. 생전에 그의 우상이자 꿈이었던 류연비와 함께.
“장군님은 잘못 없어.”
윤태금은 울컥했다.
“상관을 무조건 감싸는 건 충신이 아니야! 착각하는 간신이지!”
“그렇다면 떠난 직후에 조사를 했어야지!”
녹색 조명이 성재경의 얼굴을 양분했다. 윤태금은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속마음을 읽어 냈다.
신해범도 고민했다. ‘함풍 2도에서 정성현을 조져 보라’고 말하기까지. 사실은 그도 진실이 밝혀지는 걸 두려워했다. 류연비가 나쁜 년일까 봐. 정류진의 믿음이 부서질까 봐.
“우리 다 똑같아. 류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 왜 그런지 알아?”
성재경은 거의 덤벼들 기세였다.
“우리, 풍기대 시절에, 걔한테… 진짜 못된 짓 했거든. 다 알고도 모른 척했거든. 그런 건 용서 못 받아. 아무리 뉘우쳐도, 잘못했다고 빌어도. 병아리가 착해서 말 안 하는 거지. 우리 다 개새끼들이야.”
윤태금은 성재경이 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다 범죄자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 하나 세뇌시켜서 목적을 이뤘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걔가 행복한 착각 속에서 살기를 바라. 영원히.”
영원히.
양의 털옷을 입은 호랑이와 함께.
“미안하다.”
성재경이 말했다. 윤태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사죄하는 대상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음악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와중에도 성재경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부탁이다. 편지에 손댔다는 얘긴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 정성현을 보호해 줘.”
윤태금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류진을 걱정하는 성재경의 마음을 이해해서였다.
하지만 그도, 사실은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런 짓 못 해.”
성재경이 고개를 숙였다. 윤태금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는 그런 짓 못 한다고. 해서도 안 되고. 알지?”
장군들의 일에 병졸이 개입하면 안 된다. 성재경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가락이 저렸다.
성재경이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누가 보면 취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성재경은 온몸의 긴장이 탁 풀려 잠시 쉬어야 하는 것뿐이었다.
윤태금은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나는 류진이가 걱정돼. 뭐라도 해 주고 싶었어.”
“이해한다.”
정류진은 행복해야 한다. 성재경은 몇 번이고 그 말을 되풀이했다.
“나도 그래. 그래서 에어백 하나 준비했어. 우리 짹짹이, 마음 약해서 권세혁 왕자 걱정하거든. 잘 지내는 모습 보면 기분 괜찮아질 거야.”
인생은 원래 희극과 비극의 연속이잖아. 윤태금이 말했다. 성재경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 병아리, 그렇게 약하지도 않아. 적응력이 얼마나 빠른데.”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야.”
“걔는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부분은 우리 대장보다도 나아.”
윤태금은 힘주어 말했다.
음악 소리가 멀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도 하늘로 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도.
“나 믿어?”
“아마도.”
윤태금은 화내려다 말았다. 겁 없이 기우희의 편지를 검열해 달라고 요구한 놈을 상대로 이만큼 온 게 어디냐 싶었다.
“그럼, 얘기 끝난 거다. 오늘 우리가 이런 대화한 걸 무덤까지 가져가라. 알았냐?”
고개를 끄덕이는 성재경의 얼굴 위로 녹색 불빛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