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신해범과 정류진 (39/39)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신해범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공기 청정기의 미약한 소음이 선명하게 들릴 만큼 고요한 방에서 눈을 감고 뜰 때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안심했다.

품에 안은 정류진의 마른 몸은 부드럽지도, 기분 좋게 몰캉거리지도 않았지만 사랑스러웠다. 오후가 다 되도록 껴안고 뒹굴 만큼.

류진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비누 냄새가 아직도 났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희미한 땀 냄새도 느껴졌다.

솜털이 보송한 뺨에 입술을 댔다. 새벽이든 아침이든,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이었다. 이미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 버릇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어서, 신해범은 매번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젯밤, 달빛 아래 흰 몸뚱이를 드러내고 흐느끼던 류진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

필사적으로 다른 상상을 하려 했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면 답이 없었다. 새벽의 여운이고 뭐고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뛰어들어 가야 했다. 에탄올과 락스, 각종 청소 도구를 넣어 두는 서랍에 정류진의 사진 한 장을 숨겨 놓았다.

올봄에 찍은 것이다. 노란색 셔츠를 입은 정류진이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필름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때만 해도 신해범은 이 사진을 자위용으로 쓰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인화된 사진을 보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글러 먹었다. 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진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고작 파괴욕이라니. 이 예쁜 얼굴을 후려갈겨 쓰러뜨리고, 셔츠를 찢어 벗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다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신해범은 기꺼이 추해지기로 결심했다. 그게 정류진을 괴롭히지 않는 방법이었다. 잠든 녀석의 다리를 벌렸다가 울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신해범은 지금껏 몇 번이나 맹세했다. 내가 한 번만 더 그 짓거리 하면 닭대가리라고. 학습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고.

게다가 오늘은 휴일이었다. 이십사 시간 내내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데, 급하게 굴다가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신해범은 류진의 흐트러진 모습만큼이나 즐거워하는 모습도 좋아했다. 정말.

단것으로 구슬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니까….

들킬 걱정은 안 했다. 정류진에게는 절대로, 하늘이 무너져도 욕실 청소를 시키지 않으니까. 그래도 자위를 마친 뒤 밀려오는 허무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방비하게 잠든 실물을 두고 사진으로 그 짓거리 했다는 좌절감이 생각보다 컸다.

신해범은 그래서 참았다. 류진에게서 풍기는 비누 냄새를 맡으며 필사적으로 아침 식사 메뉴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이었다. 호밀빵에 버터크림을 바르고 슬라이스 햄, 모차렐라 치즈를 얹는다. 하이라이트는 당근과 양파를 썰어 넣은 도톰한 계란 부침. 야채를 도통 먹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먹여야 한다.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시뮬레이션을 했다. 여전히 뻐근하지만, 아랫도리 열감이 한결 가셨다. 신해범은 류진의 이마에 키스하고 일어났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지를 꿰입고 방을 나섰다. 기지개를 켜니 목부터 어깨, 옆구리까지 시원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정류진의 얼굴을 보았다. 연보랏빛 이불에 푹, 파묻힌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입 안에 군침이 고일 만큼.

탁.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류진은 속으로 십 초를 센 뒤 천천히 눈을 떴다.

“…….”

손바닥이 땀으로 촉촉했다. 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해범의 눈길이 닿은 얼굴 곳곳이 따가웠다. 아직도.

“왜 사람을 그렇게 봐….”

아침부터 짐승같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손등으로 뺨을 눌렀다. 화끈화끈했다.

신해범이 샌드위치 세 개를 완성하고 슬슬 바닥을 드러내는 자몽청을 박박 긁어 에이드를 만들 무렵, 2층에서 내려온 류진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깜짝이야.”

“안 놀랐으면서.”

“응. 하나도 안 놀랐어. 근데 놀란 척을 해야 우리 꼬꼬가 내일도 안아 줄 거잖아.”

“안 해도 할 거거든.”

류진은 신해범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당신도 당해 봐야 알지. 이게 얼마나 숨 막히는지.”

“와, 정말 답답하다. 숨 막혀 죽을 거 같아.”

놀리기는. 류진의 입술이 삐죽였다.

“오늘 아침 뭐야?”

“식탁에 샌드위치. 가서 먹어.”

식탁에 양손을 짚은 류진이 물었다.

“왜 세 개밖에 안 만들었어?”

“우리 꼬꼬가 보통 세 개 먹지 않나?”

신해범이 에이드를 내려놓으며 반문했다.

“왜, 배고파? 하긴. 너 어제 많이 울더라.”

“좀! 당신 먹을 게 없어서 하는 소리잖아!”

“난 생각 없어.”

신해범은 윤태금이 ‘집들이 선물’로 안겨 준 커피 머신 앞으로 갔다. 가정용이 아니라 유명 커피 브랜드에서 쓰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능숙하게 원두커피를 내린 그가 식탁으로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샌드위치 하나를 먹어 치우고 두 개째에 손을 뻗던 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피만?”

“난 우리 꼬꼬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

“지랄. 하나 남겨 줄 테니까 먹어.”

류진은 선심 쓰듯 샌드위치 접시를 신해범 앞으로 밀었다.

“자.”

“누가 보면 네가 만든 줄 알겠다.”

“나 아니었음 만들지도 않았을 거잖아?”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류진이 웃었다. 신해범은 음식을 먹느라 볼록거리는 류진의 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걸 한 입만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맛있을까. 세상 어떤 밀가루 반죽보다 부드러울 텐데.

“꼬꼬야.”

“뭐.”

“예쁘다.”

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왜?”

신해범이 웃었다.

“갓 태어난 새끼 양 같아.”

“밥 먹는데 진짜!”

“왜? 너 울 때도 그런 소리 내잖아. 낑낑거리면서.”

“닥쳐!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어?!”

벌떡 일어난 류진이 씩씩거렸다. 하얀 티셔츠로 감싸인 마른 어깨가 거칠게 오르내린다. 누가 봐도 화난 모습이었으나 신해범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류진이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 안심이 됐다. 면전에서 음담패설을 듣고도 피식 웃거나 당신 또 헛소리한다, 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그건 징조였다. 정류진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증거.

오늘은 ‘당첨’이 아니었다. 신해범은 기뻤다. 겨울이지만 햇볕이 짱짱하게 내리쬐는 휴일에, 꼬꼬의 컨디션도 최상.

“꼬꼬야. 꼬꼬댁.”

신해범은 텔레비전이 있는 거실로 가는 류진의 뒤를 따랐다. 화내면서도 샌드위치와 에이드는 챙긴 모습이 깜찍해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어제 나 죽을 뻔했잖아. 복상사. 아니다, 뒤로 할 때였으니까 배상사(背上死)인가? 아무튼. 눈앞에서 우리 꼬꼬 뽀얀 등허리가 흔들리는데 어후, 정신이 혼미한 게….”

“그래서 아침부터 사람 째려봤냐?”

류진이 홱 돌아섰고, 신해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그래! 발뺌하지 마. 나 깨 있었어.”

“정말? 근데 왜 눈 안 떴어?”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거실로 갔다. 조그만 뒤통수에 ‘따라오지 마’라는 말풍선이 매달린 것 같았다. 물론 신해범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블랭킷이 덮인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류진의 발치에 털썩 앉았다. 블랙커피가 든 보라색 머그 컵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안전하게. 정류진이 아끼는 물건이니까.

“응? 꼬꼬야. 대답해 줘. 내 열렬한 시선을 모른 척한 이유가 뭐야?”

“…….”

“먹는 척하지 말고. 너 평소에 그렇게 꼭꼭 안 씹어 먹잖아.”

“…….”

“너무하네, 정류진. 누군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개들 챙겨, 쌓인 눈 치워, 아침 만들어, 우리 꼬꼬 일어나서 기분 좋으라고 온 집 안에 꽃향기 진동하게 해 놨는데. 새 캔들 마음에 들어?”

신해범의 손가락이 슬금슬금 류진의 맨발로 향했다. 발가락을 톡톡 건드리다 발등을 타고 올라가 복사뼈를 더듬었다. 류진의 발목은 신해범의 한 손아귀에 다 들어왔다.

“닭발 이거… 왜 이렇게 땡땡 얼었어. 바닥이 차서 그래. 슬리퍼 어디 갔어? 저번에 이케아에서 산 거 있잖아. 안에 털 달린 거. 내가 꼭 신고 다니랬지?”

“좀! 좀! 조옴!”

샌드위치를 꿀꺽, 삼키고 에이드까지 야무지게 마신 류진이 소리쳤다.

“잔소리할 거면 저리 가!”

“듣기 싫으면 네가 말해 줘. 왜 자면서 모른 척했는데?”

“그렇게 알고 싶냐?”

“응. 궁금해.”

신해범의 눈매가 휘었다. 류진은 시선을 피했지만, 발목을 죄는 악력에 놀라 신해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거 놔라.”

“솔직하게 말해 주면.”

“누, 누가 몰라?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는데 자다가도 깨지. 당신은 뭐 안 그럴 줄 알아?”

“응. 나는 안 그래. 우리 꼬꼬가 날 그렇게 바라봐 주는데 미쳤다고 자는 척을 해? 아… 상상만으로 흥분된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류진이 버둥거렸다. 신해범은 몸을 빙글 돌려 류진이 앉은 소파로 올라갔다. 무릎을 움켜잡고 양쪽으로 확 벌리자 비명이 터졌다.

“아!”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입맛을 다셨다. 류진의 다리 사이가 눈에 띄게 불룩했다. 얇은 잠옷 바지라서 한눈에 티가 났다. 류진은 재빨리 다리를 오므리려 했으나, 신해범이 다리 사이에 제 허리를 끼우고 상체를 기울여 꼼짝도 못 했다. 소파와 신해범 사이에 완전히 끼어 버렸다. 당황한 류진이 더듬거렸다.

“뭐, 뭐… 어쩌라고!”

“괜찮다, 아기야. 네 나이 땐 어쩔 수 없단다.”

“할아버지 말투 쓰지 마!”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다. 표정도 짓지 말라, 말투도 쓰지 마라, 나는 뭐 밥해 주고 청소해 주는 기계냐? 로봇이야? 너무 까다로우십니다, 도련님.”

신해범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이러시면 집안 하인들 다 도망갑니다.”

“하인 같은 소리…!”

“모르시죠? 다들 도련님 앞에선 애기 투정 받아 주니까. 그런데 있잖습니까, 뒤에서는 말이에요, 정류진 저거 좆나 따먹고 싶다고 합니다.”

“좀! 좀!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드라마 찍냐?!”

“도련님이야말로 가만히 계세요, 좀.”

신해범은 버둥거리는 류진의 바지춤을 움켜잡았다. 속옷째 끌어 내리자 비명이 터졌다. 새끼 양이 우는 것 같은 미약하고 힘겨운 소리였다. 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해범은 바지를 도로 올리려는 류진의 손을 쳐 낸 뒤, 옷과 속옷을 한데 뭉쳐 저만치 던졌다. 그러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발목을 붙잡았다.

“아!”

양 발목을 잡아 활짝 벌렸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해범이 희고 마른 다리를 소파 팔걸이에 걸쳐 놓았다. 시선이 절로 그곳에 꽂혔다. 발기한 좆을 보면서 다시금 입맛을 다셨다.

“보지 마!”

“예뻐졌네. 정류진.”

“아니야! 미친놈아! 꺼져!”

신해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오므리려는 류진의 무릎을 잡아 눌러 팔걸이에 고정시켰다.

“매일 봐도 안 질려. 너무 예뻐.”

더운 숨결에 발끝이 곱았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면 좋겠지만 신해범은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해범이 국부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단단해진 성기에 뺨을 비비며 그가 물었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돼?”

“아니야. 아니야.”

“너, 나 나가고 한 발 뺐지.”

“아니… 으아. 하지, 하지 마. 그거 하지… 아!”

신해범이 입을 벌려 성기를 단숨에 삼켰다. 능숙하게 뿌리까지 빨아들였다. 어쩐지, 이 맛난 걸 먹으려고 아침 생각이 없었나 보다.

“안 돼. 안, 지금 안 해, 안 할 거야…! 나!”

나 안 해… 류진이 고개를 젖히고 흐느꼈다. 신해범이 멈추지 않을 것을 알았다. 아침에는 잘 참았다, 싶었지만 신해범은 신해범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젠틀한 척, 신사인 척 하지만 집 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밝히는.

천장의 물결무늬가 이지러졌다. 손에 힘이 풀려 유리컵이 떨어졌다. 컵이 우드 플로링 바닥에 구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기를 빨아 대는 신해범에게 온 신경이 쏠려서.

“으아아….”

류진이 신해범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양다리가 부들거렸다. 아랫배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기에 감전된 양 찌릿찌릿했다.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게 거실의 푹신한 소파가 아니라 레이싱 경기에서 선두를 달리는 차의 조수석인 것만 같았다. 운전석에는 신해범이 앉았고,

“안 돼. 그마… 아아!”

숨을 들이켰다. 눈 밑이 달아오르고 콧등이 시큰거렸다. 달아오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만… 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있는 힘껏 쥐어뜯으면 그만둘 것도 같은데. 밑에서 신해범이 웃었다. 국부를 간질이는 숨결에 오금이 저렸다.

“아. 아. 아아.”

끝까지 빨려 들어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류진은 덜덜 떨며 손을 움직였다. 신해범의 귀를 붙잡았다. 양쪽의 모양이 다른 귀. 왼쪽만 눈에 띄게 뾰족해서, 어쩔 수 없이 튀어서, 윤태금이 진지하게 귀 성형 수술을 권하기까지 했다.

“으으응….”

류진이 허리를 굽혔다. 아랫배가 뜨끈뜨끈했다.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신해범의 머리에 떨어졌다. 입을 벌리고 헐떡이며 그가 조금만 천천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살. 귀두를 한입에 삼키고, 기둥을 뜯어 먹을 것처럼 무자비하게 빨아 대지 말고. 나도 참고 싶단 말이야….

신해범이 윤태금의 수술 제안에 뭐라고 답했는지는 모른다. 듣고 싶지 않아서 도망쳤다. 투정 부릴 생각은 없었다. 신해범의 귀 모양이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보다 눈에 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막상 신해범이 귀가 복원된다고 생각하니 서운했다.

내가 만든 상처인데.

세상에 단 하나뿐인데.

시간을 돌려 그대로 돌아가도, 같은 모양으로는 만들 수 없는데….

관자놀이 흉터가 지끈했다. 류진은 눈을 꼭 감고 신음했다.

“수술해.”

신해범의 머리를 안았다. 기둥을 쓸어 올리는 혓바닥이 따뜻하다. 류진은 무릎을 곧추세웠다. 밑에서 치미는 자극이 버거워,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 나갔다.

“근데 나는, 안 할 거야. 나는… 내 흉터, 안 없앤다고. 누가 뭐래도.”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팔걸이를 잡은 신해범의 손이 보였다. 손등에 불거진 푸른 핏줄이 팔뚝까지 이어졌다.

“계속, 이러고 살 거야. 계속.”

신해범이 웃는다.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류진은 알았다. 그의 목구멍이 귀두를 조였다. 류진은 맥없이 흐느꼈다. 신해범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갓 태어난 새끼 양 같아’.

내가 왜 그렇게 우는지, 충분히 없앨 수 있는 흉터를 왜 내버려 두는지, 사실은 당신도 알지?

“당신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전류가 전신의 모세 혈관을 깨우고 세포들을 날뛰게 했다. 이 자극이 지나가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신해범은 자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흐물흐물해져서 침대에 맥없이 널브러진 모습을 좋아했다. 벗은 몸 여기저기에 키스하며 예쁘다고, 환상적이라고 타령을 해 댔다. 하지만 눈빛은 거짓말을 못 했다.

류진은 신해범의 위선에 웃음이 나왔다. 예쁘다는 무슨. 그냥 잡아먹고 싶다고 해. 내가 아직도 당신 속을 모를까 봐?

귀두가 신해범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셨다. 오므린 발가락이 달달달 떨렸다.

“하으. 아. 아.”

처음에는 무서워서 울었고, 지금은 쾌감을 주체할 수 없어서 눈물이 났다. 신해범은 두렵고 대단했다. 혓바닥 하나로 자신을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가 땅에 메다꽂았다가 했다. 류진은 눈을 부릅뜬 채 어깨를 움츠렸다. 한계가 보였다. 극한의 흥분 상태, 곧이어 제어되지 않는 근육 이완. 세상의 시작과 끝이 거기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을 보면서 사정했다.

신해범의 고갯짓이 느껴졌다. 정액을 남김없이, 한 방울까지 짜내 마시기 위함이었다. 류진은 그의 머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하아아….”

지금쯤 신해범의 아랫도리가 얼마나 부풀었을지 눈에 선했다. 쓸데없이 버둥대서 그를 자극하기보다 신해범이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류진은 흥분 상태의 신해범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소중한 휴일을 짐승 같은 상태로 보내게 되니까.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신해범이 다리 사이를 마음껏 빨도록.

“류진아.”

탐닉하던 맹수가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올라온 그가 소파를 무릎으로 눌렀다. 두 손은 등받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매번 느끼는 건데….”

“응.”

“내가 너보다 먼저 죽어야 돼.”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먼저 죽으면, 나는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못할 거야. 경찰이나 구조대, 의사, 뭐 그런 사람들 말이야. 물론 전화는 하겠지. 근데 걔들이 왔을 때 이미 넌 뼈밖에 없을 거야. 내가 다 먹어 버려서….”

“미친놈.”

“난 감옥 가기 싫어. 정신 병원도 취향 아냐. 그러니까 정류진, 너, 무조건 나보다 오래 살아.”

“지랄한다! 또!”

“지랄 아니고 진심인데.”

류진은 키득거리는 신해범의 목을 껴안았다.

“개소리야… 맨날….”

신해범은 바보였다. 맹수 호랑이가 아니라 미련 곰탱이였다. 그냥 좋다고 하면 되지, 꼭 저렇게 헛소리를 한다. 원래도 그랬지만 갈수록 심해진다. 독일어를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가 보다. 류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두 다리를 신해범의 허리에 감았다.

“딱딱해.”

“많이 거슬려?”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자신에게 코알라처럼 매달린 류진을 껴안고 일어났다.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쪽 손으로는 마른 등을 토닥였다. 주방으로 갔다. 그는 식사를 준비했던 흔적이 남은 식탁에 류진을 내려놓았다. 오금을 잡고 하반신을 들어 올리자 류진이 신음했다.

“으.”

어젯밤을 떠올리게 하는 입구를 더듬었다. 발갛게 부은 입구가 빠끔거린다. 신해범은 방금 사정한 류진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만지지 마.”

류진이 손을 뻗어 신해범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당신… 하고 싶은 거 해.”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건데?”

신해범은 뻔뻔하게 웃었다.

“이게 내 촉감 놀이야. 정류진 몸뚱이 말곤 주물럭대고 싶은 거 없어.”

한숨을 푹, 쉰 류진이 손에 힘을 뺐다. 가느다란 두 팔이 식탁 위에 늘어졌다.

“이러려고 샌드위치 만들었지?”

“아니야. 난 정말 순수하게 우리 꼬꼬가 맛있는 걸 먹길 바라서. 알잖아, 나 먹을 거로는 장난 안 쳐.”

“안 치기는…!”

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간 온갖 재료를, 특히 제빵에 쓰는 크림을 내 몸에 치덕치덕 처바른 건 다 잊어버렸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 놓고 비싼 재료를 ‘너 때문에’ 낭비했다며 그만큼의 양을 정액으로 싸 내라는 비상식적인 요구까지 했다. 신해범은 이런 사람이었다.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 인간에게 자신은 왜 하릴없이 휘둘리는지 모르겠다.

“으아!”

하반신이 번쩍 들렸다. 아침에도 불구,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해범이 벨트를 풀어 성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류진은 그의 윗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젖어서 촉촉해진 입술이 달싹였다.

‘가슴 보자.’

예상했던 말이었다. 이번만큼은 홀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가고 마는 멘트였다.

류진은 머뭇머뭇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신해범의 자칭 ‘열렬한 눈빛’에 허리가 들썩였다.

“젖꼭지 발딱 세웠네.”

“추워서! 추워서 그래!”

“핑계는. 몸이 야해서 그런 거지.”

입구를 만지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버터크림 냄새가 훅 올라왔다. 류진은 아까 먹은 샌드위치를 생각했다. 이제 내가 신해범의 ‘아침거리’가 되는구나.

두 다리가 더욱 들렸다. 류진은 티셔츠 자락을 쥐고 웃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한 신해범의 크고 단단한 몸이 뜨겁다. 성기를 쥐고 입구에 맞춘 그가 빙그레 웃었다.

“인정하지? 정류진 야한 거.”

“안 해. 못 해.”

“착각은 세상에서 제일 잘해.”

류진은 숨을 들이켰다. 쿠퍼액으로 젖은 단단한 귀두가 저항하는 속살을 밀어젖혔다. 이물감에 빠끔대는 구멍을 벌리고, 꾸역꾸역 밀면서 들어왔다. 몸이 열리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팍이 부풀었다. 티셔츠를 걷어 올려 고스란히 드러난 맨가슴으로 신해범의 손이 뻗어 왔다. 마디가 두드러진 긴 손가락. 청결을 위해 항상 짧은 손톱을 유지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식 동물의 발톱 같은 손가락이었다.

“으으… 읏.”

“옷 물어도 돼.”

류진은 허겁지겁 티셔츠 자락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응… 살살. 괜찮지?”

괜찮지 않았다. 신해범도 알면서 묻는 거였다. 류진은 옷자락을 물어뜯으면서 생각했다. 신해범은 귀 성형이 아니라 성기 축소술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진지하게.

“움직, 이지… 마.”

“음? 이대로 있자고?”

신해범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 절반도 들어가지 않았다며 빙그레 웃었다.

“우리 꼬꼬, 또 엄살 부리지.”

“엄살 아냐! 진짜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고, 긴장 풀려고 해 봐.”

나한테 강요하지 말고 당신 좆을 어떻게 해 봐, 하고 말하려던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향긋한 버터크림과 함께 묵직한 살덩이가 퍽, 치고 들어왔다. 여리고 민감한 부위를 방망이로 얻어맞는 기분. 류진은 허공에 까치발을 든 채 벌벌 떨었다.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파들거렸다.

“우우으…. 아.”

“힘 빼. 힘 빼. 어제 잘했잖아.”

“그건! 아!”

한 번에, 뿌리까지 쑤셔 박혔다. 류진이 옷자락을 놓치고 헐떡였다. 신해범은 허공에서 흔들리는 마른 다리를 잡아 허리에 감은 뒤, 류진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혀로 핥았다.

“그건, 뭐?”

“아아아, 하으, 으읏. 아!”

“꼬꼬야. 류진아. 류진아. 좋아해.”

신해범은 어리광처럼 칭얼거렸다.

“좋아해. 사랑해. 너는 나 어때?”

“아아. 앗. 앗.”

“좋아한다고 말해 줘. 응? 나 좋다고 해 줘.”

“좋아. 좋아….”

류진이 흐느끼며 신해범의 귀를 만졌다.

“어제는… 당신이, 너무. 너무.”

“내가 뭐?”

“나를 너무… 당신이….”

훌쩍이며 말을 잇는 류진이 사랑스러워 신해범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정류진이 울어도 하는 수 없었다. 적어도 기둥에 착착 달라붙는 쫀득한 속살을 즐기고 있으면 녀석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이 사라지니까.

“당신이 나를, 너무 오래… 핥아서….”

“내가 그랬어? 어제?”

신해범이 웃었다.

“미안해. 우리 꼬꼬가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

“오늘도. 아침도!”

“그래도 아직 안 잡아먹었잖아.”

신해범에게 ‘잡아먹었다’는 말은 섹스를 의미하지 않았다. 동사 그대로의 포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를 터였다. 관계할 때마다, 류진은 신해범에게 머리부터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붙잡혀 속수무책으로 정복당했다.

“여기에 진짜 뭐 있는 거 같아.”

신해범은 손을 내려 빈틈없이 틀어 막힌 입구를 더듬었다.

“건들지 마…!”

“안에 약이라도 발라 놨냐?”

“뭐?”

“아니, 이상해서. 내가 진짜 밝히는 사람이 아닌데.”

“당신 밝혀! 엄청! 많이!”

류진은 빽빽 소리를 치며 신해범의 얼굴을 때렸다. 주먹에 힘이 없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신해범은 키득키득 웃었다.

“이대로 뒈져도 좋겠다.”

“난 싫어…!”

“왜? 창피해?”

신해범은 뭐가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 어차피 우린 죽은 다음인데. 산 새끼들이 뭐라고 비웃든 알 게 뭐야.”

“싫다고…! 개소리할 거면 빼!”

“말도 안 되는 소리.”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내부를 넓혔을 뿐이다. 쫀득한 속살이 기둥에 탄력 있게 달라붙도록.

“너 아까 기분 좋았잖아. 나도 즐겨 보자. 좀.”

신해범의 팔꿈치가 류진의 귀 옆에 놓였다.

“뭘 즐겨! 지금까지 해 놓고!”

“나 아직 한 번도 못 갔거든?”

그릇에 남아 있던 버터크림을 전부 썼다. 구멍 입구는 물론 뽀얀 엉덩이까지 크림으로 미끈미끈해졌다. 신해범은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류진의 하반신에 자신을 파묻었다. 마음껏.

“아! 아! 아아아! 앗!”

손바닥에 땀이 괴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허리를 놀렸다. 크림 묻은 손으로 허벅지를 주무르고 무릎을 어루만진 탓에 기름 범벅이 된 다리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미끄러질 때마다 붙잡아 들어 올렸다. 잠시 다물렸던 구멍이 도로 벌어지자 류진이 신음했다.

“우으아… 아….”

“예쁘다. 예뻐.”

작은 얼굴이 새빨갰다. 사과나 토마토나 뭐 그런 것 같았다. 뺨을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과즙이 팍 하고 터질 것처럼 생겼다. 신해범의 입술이 벌어졌다. 흰 치아와 붉은 혀가 날름댔다.

“미치겠다. 정류진. 예뻐. 너 너무 예뻐.”

“흐으, 으. 으아. 앗.”

있는 힘껏 끝까지 쑤셔 박았다, 아슬아슬하게 귀두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빼내기를 반복했다.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깜찍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하던 녀석이 무너지는 모습은 황홀했다. 앙다물던 입술이 벌어지고, 혀를 내밀고 헐떡거리는 모습. 맑던 눈동자는 눈물로 흐려진다. 온통 새빨개진 얼굴로 숨이 넘어갈 듯 쌕쌕거리다 온몸을 파르르 떤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생명체가 또 있을까?

신해범은 고민했다. 몸이 열린 채 흐트러져 우는 류진을 볼 때마다 햄릿에 버금가는 갈등에 시달렸다. 이걸 정말 살려 두는 게 옳을까? 절정의 순간에 숨통을 끊어서, 박제하여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남기는 게 인류의 역사에 이바지하는 일이 아닐까?

파괴 욕구로 흐려진 그의 눈앞에 류진의 하얀 손이 흔들렸다.

“신해범. 신해범.”

가냘픈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신해범은 눈을 깜박였다. 가냘프고 아름다운 백합 한 송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얼굴, 얼굴 보여 줘.”

“그래. 여기.”

신해범은 류진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나 여기 있어.”

매일 아침 네가 먹을 음식을 만들면서 너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미친놈 여기 있어.

신해범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웃었다. 지금 류진에게 필요한 말은 따로 있었다.

“나랑 하는 거야. 나랑만 할 거야. 넌 내 거야.”

“응. 응.”

“이 구멍 주인 있어. 그게 나야. 이 신해범이가 주인이야. 그러니까, 류진아, 딴 새끼가 쑤시려 들면 총 쏴 버려. 상관없어. 뒷수습은 내가 해.”

“신해범. 가지 마. 가지 마.”

“딴 데 안 가. 뒈질 때까지 여기 있어.”

“진짜? 진짜? 나, 나아… 우아, 아아!”

스팟을 마구잡이로 찍어 눌렀다. 정류진의 안에서 절제는 불가능했다. 내부의 극점을 마구 할퀴고, 쑤시고, 짓뭉개야만 아랫도리의 열감이 가셨다.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절반도 만족할 수 없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에 송곳니를 박았다.

“내가 다… 먹는다고.”

정류진의 눈물 한 방울, 정액 한 방울도 못 내준다. 아끼다 썩히는 한이 있어도.

“흐….”

류진이 목을 떨었다. 신해범은 자신의 잇자국이 선명한 피부에 입술을 묻었다. 힘주어 빨자 연약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파…!”

“괜찮아. 겨울이야.”

땀으로 촉촉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류진의 이마에 키스한 신해범이 웃었다.

“스웨터 입으면 돼.”

“창피하단 말이야.”

“왜? 어차피 나만 볼 건데? 설마 누구 보여 주려고…?”

“아니야! 아!”

“누구야. 어떤 새끼야?!”

“아니… 씨발! 아니라고, 왜 이래… 아, 아! 아아앗!”

류진의 두 손이 식탁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신해범에게 꿰인 채로 그와 함께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좀! 아… 신해범, 신해범, 나, 아파! 살살! 아흐! 아!”

“그 새끼 나보다 잘생겼어?”

“개소리, 집어, 치워…! 아악!”

식탁이 흔들렸다. 단순히 뒤로 밀려나는 수준이 아니라 무겁고 굵은 나무다리가 바닥을 쿵쿵 찧어 댔다. 류진은 아래층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이 단독 주택이 아니었다면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을지도 모르겠다. 안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하고.

신해범은 남자 둘이 사는 집에 구태여 8인용 원목 식탁을 고집했다. 시중에 그의 ‘고급스러운 취향’에 부합하는 제품이 없어 윤금강이 목재 가공 공장까지 소개해 줬다. 의자도 신해범이 직접 디자인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가구가 도착한 날에 알았다. 신해범은 식탁을 또 다른 침대처럼 썼다. 류진은 여태 침실에서 한 횟수가 많은지, 주방에서 한 횟수가 더 많은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럴 거면 식탁에 담요라도 한 장 깔아 놔라, 쏘아붙이고 싶게 만드는 신해범이 떼를 썼다.

“그 새끼 좆 커? 길고 두꺼워? 나보다 더?”

“아아, 그마, 그만! 이잇, 그마… 아!”

“귀두에 다마라도 박았나? 그래? 그럼 나도 할게. 아주 그냥 한 바퀴 두를게. 위아래로 쑤셔 넣고 링도 끼울게, 나. 그러니까 딴 새끼 쳐다보지 마라.”

“지랄, 개소리… 미친놈!”

“내 자국 숨기지 마. 나 부끄러워하지 마.”

“당신은 줄여!”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좆을 처박던 신해범이 멈췄다.

“뭐?”

“다, 다, 당신은….”

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줄이라고! 자르든지! 씨발 새끼! 다마 좋아하네! 또 누, 누굴 고생시키려고 헛소리야!”

주먹이 날아왔다.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그래도 신해범은 웃었다. 빨간 얼굴로 쌕쌕대는 류진이 예뻐서, 사랑스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류진의 관자놀이를 엄지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안 아파.”

“나쁜 놈…!”

“응. 사랑해.”

“나만 아파! 맨날! 당신 때문에 나만, 나만… 으허엉….”

“내가 더 많이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씨발, 여기서 더 크면… 아예 안 들어가지… 미친놈이.”

“미칠 만큼 사랑해요. 우리 아기.”

“지랄, 또라이냐고, 진짜….”

신해범이 웃으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부드럽게 진입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는 류진이 느끼는 지점을 정확하게 자극하며 내부를 긁었다.

“너무 좋다…. 우리 꼬꼬….”

잔뜩 예민해진 속살이 쫀득쫀득하게 달라붙어 왔다. 눈앞에 불똥이 튈 만큼 짜릿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됐다. 아차 하는 순간 싸 버리니까. 그러면 꼼짝없이 좆을 빼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침이었다. 잠자리에서도 네 번 이상은 안 된다고 버티는 정류진이 순순히 엉덩이를 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버릇이었다. 최대한 오래 끌면서 사정을 늦추는 일. 잔머리 굴려 봤자 손바닥 안인 ‘병아리’가 제발 빨리 싸라고, 힘들어 죽겠다고 울 때까지.

“흐아아….”

신해범은 류진이 흐느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꼿꼿하게 솟아 있는 유두로 손을 뻗쳤다.

“기분 좋아?”

기둥에 돋은 핏줄이 꿈틀했다.

“느끼고 있어?”

“몰라. 아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빠, 빨리 싸기나 해.”

고개를 돌린 얼굴이 붉었다. 흥분감 때문인지, 부끄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기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신해범이 말했다.

“사랑해. 사랑한다. 류진아.”

신해범은 몸을 일으켰다. 양 손바닥을 펼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류진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따뜻하다.”

“무거워….”

“힘 하나도 안 줬어. 엄살은.”

“엄살 아니야.”

류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 만지고 이제….”

살짝 허리를 흔드는 모양새가, 인제 그만 싸라는 뜻이었다. 신해범은 미소 띤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으음. 아직.”

“이 씨…!”

류진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 너무 오래 끄는 것도 별로야! 개새… 윽!”

신해범이 퉁, 허리를 쳐올리자 류진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참는 거도 힘들어.”

“안, 안 참으면 되잖아…!”

“널 보면 오르톨랑 생각나.”

“그게 뭔데.”

발갛고 조그만 얼굴에 기대가 어렸다. 분명 세계 최고의 미남이나 전설 속 신을 상상할 테다. 하지만 신해범은 류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그는 성기를 느리게 빼냈다가 힘껏 쑤셔 박았다.

“흐윽!”

“촉새 요리. 맛이 기막혀서 신이 내린 음식이라고 불렸는데, 조리법이 너무 잔인해서 금지됐대.”

“씨발! 그게 뭐야!”

“프랑스 대통령도 좋아했던 요리라는데. 냄새까지 아까워서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먹었대. 대체 무슨 맛일지 상상도 안 가. 비슷한 게 있는지도 모르겠어. 지금 그거 먹으려면 암시장에서 촉새 사냥꾼 찾아야 한대. 처벌받을 거 각오하고.”

“자꾸 헛소리할래…?!”

류진이 허리를 비틀며 구멍을 조였다. 신해범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꺼지게 해야 했다. 아니면 내가 죽는다. 이 짐승 같은 짓거리의 끝을 볼 때가 왔다.

“와. 정류진. 테크닉 죽이네.”

느긋하게 웃으면서 말해 봤자 하나도 진심 같지 않았다.

“이렇게 섹시한 병아리 처음 봐.”

“지랄!”

“사진 찍고 싶은데, 카메라 가져오면 너 없겠지?”

“당연하지.”

류진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화장실에서 문 잠글 거야.”

“거봐.”

신해범이 손을 움직였다. 그는 버터크림으로 번들번들해진 가슴을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욕망이 그득했다. 류진은 가능한 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지 마.”

“이렇게 돼서?”

가슴을 만지던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류진은 다급히 신해범의 손목을 잡았다.

“건들지 마.”

“건들고 자시고, 이미 섰어요. 꼬꼬야.”

너도 눈이 달려 있으니 이거 보라며 신해범이 웃었다.

“같이 가면 딱 좋겠다.”

“안 좋아!”

신해범의 한 손은 류진의 허벅지를, 반대쪽 손은 성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제 류진은 말할 수 없었다. 성기를 쥔 신해범의 손목을 잡은 채 헐떡이는 일이 고작이었다.

“옛날엔 오르톨랑 먹어 보고 싶었어. 돌 맞을 생각인 거 알아. 그런데… 사람 심리가. 내가 많이 간사해서. 책에도 나오고 그렇게 찬양을 해 대니 호기심이 생기데. 비슷한 요리 찾아보려고 했어.”

“그래서… 찾았어?”

“없었어. 애초에 그 요리가… 그렇게 맛있는 건 조리 방식이 잔인해서라. 새의 고통만큼 맛있는 음식이었어. 그래서 비슷한 건… 없어. 있으면 안 되지.”

하반신을 움직이며 말하는 신해범은 웃고 있었다. 류진은 그의 뚜렷한 윗입술을 응시했다. 단단해진 성기가 아팠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신해범의 손가락이 입구를 막았다.

“많이 찾아봤어. 오르톨랑 먹어 본 사람들의 평가. 묘사. 나중엔 꿈에 나올 지경이었어.”

류진이 신음했다.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성기가 출입할 때마다 하얀 몸 위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슬퍼?”

신음 섞인 질문이 날아왔다.

“음?”

“슬프냐고… 그거, 못 먹어서.”

젖은 입술이 달싹였다. 신해범의 시선이 그곳에 못 박혔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 사이, 빨갛게 반짝이는 혀끝.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이제 필요 없지. 나한텐.”

신해범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틀어막았던 요도구를 해방시키자마자 류진이 목을 뒤로 젖혔다. 크게 치뜬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아아!”

류진은 식탁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정했다. 마른 몸뚱이가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신해범도 사출했다. 류진이 목을 움츠렸다.

“아. 아.”

모조리 털어 낼 때까지 놔주지 않았다. 크림으로 미끌미끌해진 볼깃살을 꽉 쥐고 안으로 모았다. 거친 체모에 쓸려 벌게진 엉덩이가 아픈지 류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따가워….”

“그까짓 아르마냑 절임보다 훨씬 맛있어. 우리 꼬꼬가.”

신해범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두 손으로 류진의 골반을 잡은 채, 일 초가 일 분처럼 느껴질 만큼 공들여 성기를 뺐다. 정액과 버터크림 덩어리가 후드득 떨어졌다.

류진의 두 다리가 축 늘어졌다. 신해범은 류진이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허벅지를 잡아 누르고 다리 사이를 빤히 보았다.

“보지 마….”

류진이 눈을 가렸다.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사정해 늘어진 성기에 입을 맞췄다. 귀두에 ‘쪽’ 소리 나게 키스한 그가 싱긋 웃었다.

“천하제일 진미.”

오르톨랑은 흔히 ‘신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음식’이라고 했다. 만드는 방식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라서. 오죽하면 오르톨랑을 먹는 사람이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는 이유가 신으로부터 자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르톨랑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음식’이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그만큼 엄청난 맛과 풍미를 자랑했다.

탐닉하는 자신의 얼굴을 가려야 할 만큼 잔인하지만, 동시에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는 음식.

그게 정류진이 아니고 뭔가.

신해범은 픽 웃었다. 그는 류진의 벗은 몸을 내려다보며 하반신을 정리했다. 방금 류진이 쏘아 낸 정액이 셔츠에 묻었다. 지난번 플리 마켓 쇼핑에서 류진이 직접 고른 옷이었다. 이건 당신 색이야, 하며 건네준 보라색 셔츠는 사실 신해범의 취향이 아니었다. 색은 괜찮은데 스타일이 애들 같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홈 웨어가 되었다. 신해범은 그 부분에 대해서 류진에게 둘러댄 바 있었다.

‘뭐 묻을까 봐 밖에는 못 입고 나가겠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덜렁대잖아.’

내가 좀 덜렁대잖아.

스스로도 우스웠던 핑계를 떠올리며, 신해범은 류진의 몸 위로 올라갔다. 식탁에 널브러져 눈을 감은 모습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그는 긴 목에 피멍처럼 남은 키스 마크를 핥았다.

“나 아직 배고픈데. 그래도 남은 건 밤에 먹을게.”

“진짜…?”

“진짜.”

그제야 류진의 얼굴이 풀어졌다. 안도의 미소였다.

신해범은 한동안 류진의 가슴만 어루만졌다. 아래로 손을 뻗치고 싶었지만, 한사코 치부를 가리는 손에 가로막혀 후퇴했다. 지금은 먹음직스럽게 솟은 젖꼭지를 만지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많이 부었다.”

“당신 때문이야.”

“얼음찜질해 줄까?”

“됐어!”

류진이 눈을 흘겼다.

“당신 믿었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나 못 믿어? 꼬꼬야?”

“못 믿어. 안 믿어.”

류진은 꾸물꾸물 티셔츠를 잡아 내렸다. 신해범이 조금만 더, 조금만, 하는 것도 무시했다. 그의 무거운 팔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식탁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류진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악!”

바닥에 코를 박기 직전, 가슴과 배에 신해범의 팔이 감겼다. 류진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코앞에서 신해범이 웃고 있었다.

“걸음마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나.”

“지랄! 놔라!”

“싫어. 안 놓을래. 우리 목욕할까?”

류진이 버둥거렸다. 씻을 거지만 당신이랑은 안 해, 하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신해범은 욕실 문을 열었다. 2층 침실에 붙은 욕실보다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었다. 편백나무 욕조와 숲 쪽으로 크게 난 유리창도 마음에 들었다. 신해범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들어가 욕조에 더운물을 받았다. 좌변기에 앉은 류진이 꿍얼거렸다.

“만날 자기 마음대로야.”

“삼계탕 먹어야지. 우리 꼬꼬를 뜨끈한 물에 푹 고아서. 맛있겠다.”

“사람 앞에서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돼?!”

“왜. 삼계탕이 얼마나 맛있는데. 너도 좋아하잖아.”

“진짜 유치하게….”

류진은 킥킥거리는 신해범의 등에 대고 한마디 했다.

“치킨이 더 맛있거든.”

“이리 와, 깜찍이.”

여유로운 표정의 신해범이 손을 내밀었다.

“깜찍…!”

“맞잖아. 예쁘고 깜찍한 꼬꼬야. 이리 와. 씻자.”

류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 말라면 더 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당한다.

신해범의 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이끌려 욕조로 들어갔다. 류진은 두 팔을 위로 뻗었고, 신해범이 구겨진 티셔츠를 벗겨 주었다.

“아. 샴푸.”

이곳에는 신해범의 물건밖에 없었다. 류진이 평소에 쓰는 샤워 용품은 모조리 2층에 있었기에.

“잠깐 기다려.”

“가지 마.”

류진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는 신해범의 팔을 잡았다.

“그냥 당신 꺼 쓸래.”

“요 따라쟁이.”

“아니거든! 기다리는 거 귀찮아서거든!”

“무서워서가 아니고?”

퍽, 물에 젖은 주먹이 날아왔다. 신해범은 기쁘게 맞아 주었다.

“아퍼. 꼬꼬야.”

어깨를 문지른 그가 욕조에 버블 배스를 쭉 짜 넣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욕조 자체의 솔향기와 섞여, 욕실에 상쾌한 냄새가 퍼졌다.

“머리 기대.”

가장자리에 수건을 댄 신해범이 말했다. 류진은 거품이 넘실대는 물속에서 꾸물꾸물 움직였다. 신해범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았다.

“기분 좋다….”

“섹스할 때도 그런 말 좀 해 줘.”

“당신 좆 크기 줄이고 오면.”

“세상에 그런 수술이 어딨냐?”

“왜 없어? 귀 성형 수술도 있는데.”

두피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류진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신해범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대신 귀를 쫑긋 세웠다. 물소리, 신해범의 숨소리, 창밖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그가 뭐라도 말하기를 기다렸다.

“…….”

하지만 신해범은 입을 열지 않았다. 류진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신해범, 손 아파? 그럼 나 안 씻겨 줘도 돼.”

머리의 거품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무심코 손등으로 닦은 바람에 눈에도 들어가, 류진은 아악! 소리를 질렀다.

“물, 물!”

“어이구.”

“샤워기, 샤워기, 빨리! 닦아 줘!”

“이리 와.”

류진은 숨을 참고 기다렸다. 신해범이 한 손에 찬물을 받아 거품이 들어가 따가운 눈을 씻어 줄 때까지.

“으아아….”

“우리 꼬꼬는 내가 수술하는 게 싫은가 보다.”

“싫어.”

“솔직하네.”

“근데, 애새끼같이 징징댈 생각 없어. 윤태금 말이 맞아. 당신은 너무 튀어. 가뜩이나 동양인이라 눈에 띄는데.”

“세상에 칼귀 가진 사람이 한둘인가.”

“신해범.”

류진은 은근슬쩍 눈을 피하는 신해범의 얼굴을 잡아 자기를 마주 보게 했다.

“수술해. 좋은 기회잖아. 윤태금이라면 그 분야 넘버원 의사한테 수술받게 해 줄걸. 난 괜찮아. 그거로 당신이 더 안전해지는 거면….”

난 좋아.

류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거뒀다. 고개를 숙인 시야에 몽글몽글한 거품이 가득했다. 따뜻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거품.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아! 뭐야!”

신해범이 샤워기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는 버둥거리는 류진의 어깨를 꽉 잡고, 머리에 남은 거품을 씻어 냈다.

“으아! 아! 개새끼야! 저리 가아!”

“물에 젖은 생쥐 같다. 우리 꼬꼬.”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왜 그렇게 심각해. 겨우 귀 수술인데.”

신해범이 일어섰다. 옷을 입은 채 욕조로 비집고 들어오는 걸 온 힘을 다해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거품이 욕조 밖으로 흘러넘쳤다. 류진은 허겁지겁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왜 들어오고 지랄이야! 옷은 다 입고!”

“추워서.”

더운 김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그래도 신해범의 웃는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따끈따끈한 꼬꼬랑 같이 있을래.”

“싫어. 저리 가.”

“이이잉.”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신해범이 어깨를 앞뒤로 흔들어 댔다. 류진은 아연했다.

“윤태금한테 배웠냐?!”

“아니. 원래 내 실력이야.”

“그딴 게 무슨 실력이냐!”

소리치는 순간 발목을 붙잡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물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허겁지겁 수면을 박차고 나왔을 때는 목전에 신해범이 있었다. 류진은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껴안았다.

“씨발, 개새끼! 개새끼가!”

“물 많이 먹었어?”

“뒈질 뻔했잖아!”

신해범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류진은 그의 목에 이를 박았다. 신해범이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

신해범은 아파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류진의 젖은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 주었다.

“생각해 봐. 내 어디에 네 흔적을 남길지.”

“내 흔적?”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네 마음대로 해. 아파도 괜찮아.”

신해범은 류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왼쪽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여기에 칼자국은 어때?”

“뭐?”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우리 꼬꼬는 잘할 거야.”

“싫어.”

“무서워?”

“위험해.”

류진은 신해범의 심장 위에 주먹을 쥐었다.

“난 그런 짓 안 해.”

“그럼 어디가 좋을까.”

이번에 신해범이 가리킨 곳은 관자놀이였다.

“똑같이 할래?”

“내가 못 할 줄 알고 이러는 거지?”

“설마.”

신해범은 류진의 등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진심이다. 나 지금 절실해. 뭐든 좋으니까 네 흔적을 남겨 줘.”

귀가 원래 모양대로 돌아가면 허무할 것 같았다. 윤태금에게는 미안하지만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리라는 사실을 알아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해범도 알았다. 최대한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살아야 하는 입장의 그는 명확하게 설명되는 외모적 특징을 가져서는 안 됐다. 동양인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튀었다. 그래서 새로운 ‘흔적’은 옷으로 가릴 수 있어야 했다.

류진에게 관자놀이 흉터를 가릴 컨실러를 사 줬다가 포장도 안 뜯은 화장품으로 얻어맞은 기억이 생각나 신해범은 웃었다. 인제 와서 가리고 다니라고? 웃기지 마! 하던 목소리가 어찌나 앙칼지던지. 결국 컨실러는 서랍에 처박혔다. 윤태금한테나 줄까.

“생각해 볼게.”

“가능하면 수술하기 전에 결정해 줘. 많이 허전할 것 같거든.”

“재촉하지 마.”

“신중해야 하니까?”

신해범은 씩, 웃곤 류진에게 키스했다. 촉촉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맛있다.”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핥고,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어 잡아당겼다.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자 류진이 신음했다. 한 손으로 류진의 뒤통수를 받쳤다.

“으응….”

가냘픈 신음 소리에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려 했다. 신해범은 류진의 허리를 꽉 안아 끌어당겼다. 하반신이 꼭 붙었다.

“우으. 으읏.”

젖은 옷 위로도 무게감을 느꼈음일까, 류진이 버둥거렸다. 마른 다리가 물속에서 헛발질했다.

“괜찮아. 안 해.”

신해범은 류진을 안심시켰다.

“이걸로 참아 볼게.”

또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는 제법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하는 류진이 예뻤다. 귀여워서 아작아작 깨물어 먹고 싶었다. 신해범은 눈을 감고 혀를 얽으면서 생각했다. 우리 꼬꼬도 할 땐 한다니까.

마른 다리가 허리에 감겼다. 이제 류진은 신해범의 위에 앉아 있었다. 아랫도리의 자극에도 불구, 신해범은 류진을 끌어내 욕실 바닥에 엎어뜨리지 않았다. 류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정류진이 우는 모습은 좋아하지만, 배고파하는 건 보기 싫었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어도 깡마른 녀석이 배고프다고 울면 가슴이 찢어졌다. 당사자는 위선이라고 여기겠지만 진심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 저녁 식사를 푸짐히 준비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섹스 중에 배고파하면 가엾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밖에서, 멀찍이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개들이 짖었다. 일전에 윤태금이 데려온 녀석들이었다. 한과 명. 못 본 새에 성견이 다 되어서 류진이 개가 바뀐 게 아니냐고 윤태금을 다그쳤을 정도였다. 의심은 한과 명이 류진에게 달려들면서 사라졌다. 녀석들은 가족의 냄새를 기억했다.

류진이 신해범의 어깨를 밀어냈다.

“배고픈가 봐. 한이랑 명이….”

“쟤들이 너 같은 줄 아냐.”

장난치듯 말했지만 신해범의 주의는 바깥에 쏠려 있었다.

“여기선 안 보여. 당신이 나가 봐.”

“그냥 지나가는 거 아닐까?”

“그럼 애들이 안 짖겠지. 으응?”

류진이 허리를 비틀었다. 그 바람에 신해범의 급소가 정통으로 눌려 외마디 비명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신해범 괜찮아?!”

“이 꼴로 나가 보라고.”

“으아!”

거품이 사방으로 튀었다. 류진의 눈앞에 벌떡 일어난 신해범이 눈에 띄게 부푼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이미 젖은 옷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고! 나보고!”

“그, 그럼 어떡해?!”

손님이 맞았다. 차 소리가 멎고, 한과 명이 맹렬하게 짖는 걸 보면 알았다. 류진은 허겁지겁 욕조에서 나오려 했다.

“어디 가.”

신해범이 류진의 팔을 잡았다.

“우리 집 손님이잖아. 당신이 못 나가면 나라도 가야지.”

“여기 있어.”

욕조 밖으로 나간 신해범이 젖은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류진은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럽기는, 지금까지 많이 봐 놓고….

“하고 싶지?”

“뭐?”

“이따가 밤에. 나랑 날이 새도록 하고 싶지? 목욕재계하고 기다려. 아주 그냥 좆물이 마르게 해 줄 테니까.”

류진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당신 조기 치매야? 방금 우리가 식탁에서 뭐 했는지 잊었어?”

“너 같은 말라깽이도 하루 다섯 끼를 먹는데, 내가 1일 1회전으로 만족할 수 있겠냐?”

신해범이 킬킬댔다. 종아리를 걷어차 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지만, 그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기에 타박하지 않았다. 류진은 가운을 걸치는 신해범의 등으로 마른 수건을 던졌다.

“입 닥치고 대가리나 털어!”

“아! 정류진 가슴 보고 싶다!”

“저저…!”

신해범은 나가기 직전, 욕조에 있는 류진에게 윙크했다.

“등판에 네 알몸 그림 그릴까? 실력 좋은 문신사 찾아서.”

“싫어!”

문이 닫혔다. 류진은 멀어지는 신해범의 발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주말에 이 집에 올 손님이라야 빤했다. 윤태금. 윤금강은 너무 바빠서 무슨 일이 있어도 부하 직원을 대신 보내는 일이 많았다. 좋은 보석을 구하기 위해 세계를 날아다니는 윤금강은 각국에 친구들이 있었다. 관광객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곳도 데려가 준다는데, 류진은 여행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어릴 땐 비행기 한번 타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신해범만 있으면 돼.

“어?”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 심지어 소리 내 말한 것도 아닌데.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윤태금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한 신해범에게 ‘이 시간에 샤워입니까? 쉬는 날이라고 어지간히 늦잠 자시네요’ 했다.

류진은 쿡쿡 웃었다. 신해범의 누명을 벗겨 주려면 욕실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끈지끈한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서는데 신해범이 벗어 둔 셔츠가 보였다.

채도 낮은 보라색 셔츠.

플리 마켓에서 보고 한눈에 반했다. 중고라지만 택도 안 뜯은 새 상품이었다. 유명 브랜드 제품은 아니었다. 그래도 천이 좋고 박음질이 꼼꼼한 게 마음에 쏙 들었다. 류진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셔츠를 샀다. 그리고 고삐 풀린 말처럼 식기를 사들이는 신해범에게 내밀었다.

‘이건 당신 색이야.’

저도 모르게 한 소리였다. 신해범에게 선물이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하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그렇게 고른 옷은 신해범에게 잘 어울렸다. 기대 이상이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이 옷을 입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자꾸 웃음이 나왔고, 묘하게 등허리가 간질간질했다.

축축한 셔츠에 코를 묻었다. 신해범 냄새가 났다.

“이것, 장군님이 맡기셨습니다.”

“웬 봉투? 백지 어음이라도 들었나?”

“아뇨, 그냥 편지인데요.”

윤태금은 권일혁의 죽음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충용절을 앞두고 귀환하기 전 필리핀에서 비밀리에 심장 이식을 받았고, 기우희는 해당 사실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해동문국 국민은 국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를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권일혁 총통의 처형은 자국의 명예를 위해서도, 또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권일혁의 막장 행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젊고 건강한 심장은 해동문국 국내에도 지천이었다. 총통 각하를 위해서라면, 하고 제 가슴팍을 갈라 뜨거운 생명을 꺼내 놓을 이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권일혁의 측근들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총통은 조국의 의료 기술과 의료진, 결정적으로 자기 주변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시간보다는 신뢰의 문제였다. 권일혁이 결정적인 순간에 믿은 이는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이나활이었다.

그러나 권일혁은 믿었던 아들에게 배신당했으며, 복수의 칼을 간 딸에게 살해당했다. 아이의 성장기에 지원 한 푼 없었던 아버지의 말로였다. 윤태금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 이어진 기우희의 ‘피의 숙청’은 그로서도 조금 충격이었지만.

처형장은 적림부였다. 당시 기우희가 사용한 무기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았는데, 기우희는 그것도 숨김없이 대중에 공개했다. 고사포였다.

“그래?”

“무모하다고 생각하시죠?”

“조금. 그래도 기 소령답다고 생각해.”

신해범에게 기우희는 언제까지고 ‘소령’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윤태금은 숙연해졌다.

“수석께선 반대하셨다더라고요. 너무 잔인하다는 여론 생긴다고. 그래도 결국엔, 뭐. 공주마마 성격이 워낙 화끈하시잖습니까. 모 아니면 도. 이만한 충격을 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발목 잡힌다고 밀어붙이셨답니다.”

“사람은 안 변하는군.”

“안 변하죠. 원래 모습대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윤태금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신해범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나도 똑같아.”

“제가 바봅니까? 여기가 어떻게 남자 동거인 둘이 사는 집이에요? 신혼부부라면 믿겠네.”

거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휘 둘러본 그가 주방 쪽을 턱짓했다.

“그냥 침대 하나 들여놓으시죠?”

“저긴 성스러운 장소야. 우리 꼬꼬가 먹는 음식을 만든다고.”

“예에?”

윤태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젖은 머리에 가운 하나만 덜렁 걸친 신해범과 주방을 연신 번갈아 봤다.

“그렇게 성스러운 장소에서, 악!”

신해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통수를 감싼 윤태금이 뒤돌아봤다. 허리에 수건을 두른 류진이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야 인마! 어디 형님한테 돌팔매질이냐!”

“돌 아니거든?!”

돌이었으면 넌 이미 죽었어. 류진은 으름장을 놓으며 블랭킷을 어깨에 둘렀다.

“위에 올라가서 옷 입어. 꼬꼬.”

“싫어.”

“추워. 감기 걸려.”

류진은 윤태금의 옆에 앉아, 그가 들고 있는 테디 베어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당신도 옷 안 입었잖아.”

“입었는데?”

신해범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류진은 고집을 부렸다.

“목욕 가운이잖아! 내가 장님인 줄 알아!”

“아, 진짜 이 인간들!”

윤태금이 벌떡 일어났다.

“거참 사람 불편하게 만드네. 잡동사니 안 훔쳐 갈 테니까 둘 다 옷 입고 와요!”

“그러게 누가 아침부터 들이닥치래. 연락도 없이….”

“전화했거든?”

윤태금은 체크무늬 머플러와 와인색 캐시미어 코트를 벗으면서 말했다.

“안 받은 이유가 있었구먼요.”

“휴대폰을 쥐고 사는 성격이 아니라서. 나나 꼬꼬나.”

신해범은 2층 침실에 두고 온 휴대폰을 떠올렸다. 부재중 통화가 얼마나 쌓였을지 짐작도 안 갔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도 거의 도착해서 연락한 거라. 그나마 외출은 안 하셔서 다행이네요.”

“딱히 계획 없는 거 알고 왔겠지. 아닌가?”

신해범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블랭킷을 두른 류진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2층. 옷. 나 추워.”

“주방엔 들어가지 마.”

신해범이 류진에게 끌려가며 당부했다. 윤태금은 어휴, 알겠습니다, 하고 손을 흔들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소리도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윤태금은 소파에 풀썩 앉았다. 여전히 휑한 집이었다. 의식주에 필요한 가구와 약간의 가전만 갖춰 놓았다. 왜 신해범이 집을 볼 때 평수 욕심이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욕실이 딸린 부부 침실과 주방만 넓다면.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둘이 뒹구나….

신해범이라면 가능했다. 상상하니 기가 질려, 윤태금은 고개를 흔들었다. 닥터 크라우스가 정류진이 살이 찌지 않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사실을 안다. 단순 체질이라고 설명했고 건강 검진 결과도 이상 없었지만, 범상치 않은 식사량이 문제였다. 정류진은 정말 많이 먹었다.

윤태금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휴게실 소파에 누워 자던 류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깡마른 팔다리에 배만 볼록했다. 너무 먹어서 숨쉬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표정 하나만큼은 편안해서, 햇빛을 받으며 신해범의 손을 잡고 누운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윤태금은 류진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가 휴식 시간을 오롯이 신해범과 보낼 수 있도록.

윤태금은 류진이 놓고 간 테디 베어를 바라봤다. 아까 뒤통수로 날아온 놈이었다. 귀와 눈이 비뚜름하게 달렸고 팔 하나가 없는.

“아.”

올가을쯤이었나. 신해범은 손의 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핸드메이드를 시작했다. 테디 베어 패키지를 고른 이유는 ‘꼬꼬가 푹신한 걸 좋아해서’였다. 하지만 테디 베어 만들기는 손으로 일일이 바늘을 끼워야 했기에 한쪽 눈의 시력이 좋지 않은 신해범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는 작품 하나도 완성하지 못하고 뜨개질로 갈아탔다. 텔레비전 밑에 있는 바구니를 보아하니 뜨개질은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뽀송뽀송 노란색 털모자가 완성 단계였다. 누가 봐도 정류진 것이었다.

윤태금은 모자를 바구니에 집어넣고 창가로 갔다. 눈 덮인 마당에서 뛰어노는 개들이 보였다. 목줄을 채우지 않았는데도 주어진 공간에서만 활발히 노는 게, 신예나가 교육을 잘 했구나 싶었다.

“이 집은 손님한테 차 한잔 대접도 없네.”

신해범은 주방에 가지 말라고 했다.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였다. 윤태금은 뜨끈한 커피 한 잔과 신해범의 당부 사이에서 갈등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윤태금은 허겁지겁 거실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아 어색하게 다리를 꼰 순간 류진이 계단을 뛰어내려 왔다. 목을 감싸는 푹신한 회색 스웨터에 검은색 면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카락도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그러나 멀쑥한 차림새와는 달리 류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너도 아는 줄 알았지.”

“당신이 말 안 해 주는데 어떻게 알아?! 뉴스도 못 보게 하면서!”

윤태금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뭐든 간에 나한테 불똥 튀기지 마라.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 넘쳐 난다.

“뭡니까?”

“권일혁 뒈진 거.”

“아직 얘기 안 하셨습니까?”

“요즘 계속 날씨 흐렸잖아. 눈이랑 비도 오고. 우울해질까 봐.”

“또, 또.”

윤태금은 주방으로 뛰어들어 간 류진의 등을 한 번, 검은 셔츠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선 신해범을 한 번 바라봤다.

“그게 감춘다고 감춰질 일도 아니고, 나쁜 소식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그거랑 이건 다르죠. 보니까 류진이 현지 소식 궁금해하는 거 같은데. 굳이 숨기고 그러지 마세요. 지난번에, 권 왕자 때 엄청 싸우셨잖아요.”

신해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윤태금은 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류진이랑 합의 보신 거로 아는데… 뭐든 숨기는 일 없기로.”

“권일혁 뒈진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습니까?”

신해범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윤태금의 옆자리가 아니라 류진이 다리를 벌리고 앉았던 자리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장군님 대견해하셨잖아요.”

“쟤를 대체 언제까지 그 나라에 묶어 놔야 해?”

원망하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윤태금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되게 위선적인 거 아시죠?”

“쓰레기 같은 성격이 어디 가겠어.”

“그런 말씀 마세요. 류진이가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몸을 숙인 신해범이 소파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본래는 초콜릿이 들어 있었을 납작한 상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잊었으면 좋겠어.”

한참 만에 그가 말했다.

“다 잊고 살면 좋겠다고. 여기 시민권도 따서.”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윤태금은 신해범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에게 테디 베어를 건넸다.

“이거 안 버리십니까?”

“그냥 둬. 꼬꼬가 좋아해.”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시는 분이, 정작 류진이한테 중요한 건 뭔지 모르시네요.”

신해범이 웃었다. 자조적인 미소였다.

“알아. 아는데,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 말 안 해도 착잡해하는 거 보여. 우리 꼬꼬는 얼굴에 속마음이 다 드러나거든. 식사량도 확 줄어.”

“그럼 본인이 티를 내지 말았어야죠.”

윤태금은 냉정하게 말했다.

“권일혁 사망 소식에 싱숭생숭했을 거 뻔한데, 그게 표가 안 났을까요? 쟤가 바봅니까? 눈먼 소경이에요? 쟤요, 누구보다 대장님 언행에 예민합니다. 눈치가 빠르다고요.”

“…….”

“대장님만 류진이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류진이도 똑같이 대장님 걱정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너무 혼자서 앓지 마시라고요.”

“내가 강인우랑 똑같이 하고 있어.”

윤태금의 입술이 다물렸다. 뿌연 담배 연기가 신해범의 얼굴을 가렸다.

“정작 중요한 얘기는 감춰 두고, 어쭙잖게 보호자 행세 하면서 희생하는 척. 다 갖다 바치는 척. 병신같이. 그래서 결국 그 새끼가 어떻게 됐지?”

“슬슬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네요.”

“뭐?”

“대장님은 류진이 엄마가 아닙니다. 연인이죠. 좀 쿨한 표현으로는 파트너. 이건 꽤 수평적인 관계거든요. 서로에게 의지하고 보호받는.”

“…….”

“그런데 대장님은, 혼자서 류진이한테 필요한 모든 사람 역할을 다 하려 하시잖아요. 부모에 연인에 친구 노릇까지. 그러니까 인지 부조화가 오죠. 외부 요인에 의한 비밀이 자꾸 생기고. 대장님이 그 모양인데 류진이가, 가뜩이나 불안정한 애가 멀쩡하겠습니까?”

“다 하고 싶어.”

“대장님.”

“적어도 내가 없어질 때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싶다고. 그래서 그래.”

“사람이 어떻게 열 마리 토끼를 다 잡습니까.”

그리고, 하려다 윤태금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류진이 서 있었다. 웬 막대 사탕을 입에 물었는데 볼록 튀어나온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윤태금은 어안이 벙벙했다.

“야, 야. 너 왜 울고 그러냐.”

“내가 언제 다 해 달랬어?”

류진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내가 당신 짐이야?”

“네가 왜 짐이야. 내가 사는 이유지. 가슴 아프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신해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을 바꿨다. 아까의 착잡함은 온데간데없이 여유로운 미소가 줄줄 흘렀다.

“권일혁이 죽어서 슬퍼? 설마?”

“아니야! 미쳤어?”

“그럼 됐어.”

담배를 재떨이에 뭉갠 신해범이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꼬꼬. 좀 안아 보자.”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면서도 다가와 안겼다. 신해범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목에 매달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기였다. 키만 큰 말라깽이 아기. 입에 문 사탕은 또 어디서 났대.

신해범이 류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 꼬꼬는 우울하면 단거 먹어.”

“사탕도 직접 만드십니까?”

“생각보다 쉬워.”

윤태금은 가방을 열었다. 태블릿을 꺼내 신해범에게 안긴 류진에게 보여 줬다.

“뭐야.”

“권세혁 왕자. 넓은 집에서 동생이랑 잘 지낸다.”

“…….”

“옛날에 찍어 둔 거 아니고, 합성 아니야. 원 보좌한테 직접 받은 사진이니까 믿어도 돼.”

류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신해범의 눈치를 살펴서는 아니었다. 지금 권세혁이 살아 있고, 자국에서 처참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류진은 권세혁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다만 권세혁이 자신에게 보여 준 진심만은 기억했다. 어리고 순진하고 풍족했기에 타인에게 퍼부을 수 있었던, 그 무조건적인 애정.

행복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그래도 너의 무사 안전을 기도한다.

류진은 신해범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주방 들어가면 정면으로 찬장 보이거든. 거기 맨 오른쪽. 밑에서 두 번째 칸.”

“응?”

“사탕 하나 먹어도 돼.”

“크하!”

웃은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그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우리 꼬꼬가 먹을 거 양보하는 사람 몇 없는데, 하고 말했다.

“자넨 축복받았어.”

“아이고. 예….”

듣고 있자니 가관이었다. 그까짓 사탕이 뭐라고. 이런 거, 원한다면 백 개든 천 개든 사 먹을 수 있다.

윤태금의 생각은 이내 바뀌었다. 그는 신해범의 솜씨에 감탄했다. 겉모양은 평범한 과일사탕인데, 입에 넣자마자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혀가 아릴 만큼 달지도 밋밋하지도 않았다. 윤태금은 가느다란 나무 막대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레시피 하나를 얻어 내야겠다고.

“대장님.”

“음?”

“오늘 드린 편지, 류진이랑 같이 열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신해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노란 털목도리를 휘날리며 개들과 눈싸움을 하는 류진에게 꽂혀 있었다. 영하의 날씨지만 햇볕이 들고 바람은 세지 않아서, 밖이라도 그럭저럭 앉을 만했다.

“어차피 류진이도 본 것 같던데, 편지봉투. 그러면 나중에 추궁당할 일도 없고요. 대장님도 입 아프게 설명 안 해도 되잖습니까.”

“나를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려고?”

“아이,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선택지 하나를 제시하는 거예요.”

“충고 고맙군.”

“물론 결정은 대장님이 하시는 거죠.”

윤태금은 신해범에게 자기 결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이미 답안지를 제출한 이상 문제를 상기하지 말자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시험은 끝났다. 시험관에게 울며불며 매달려 봤자 결과는 바꿀 수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음 시험을 공부하는 게 낫다.

최초의 출제자는 기우희였다. 정답이 없는 문제의 선택지는 둘이었다. 1번 신해범, 2번 정류진. 자신은 도박보다 안전성을 택했다. 이로써 문제를 푸는 쪽이 출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시험지를 앞에 둔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무거운 진실이 돌고 돌아 그의 앞까지 왔다.

“요즘도 뱅쇼 만드십니까?”

“뱅쇼? 아아.”

“장군님께 들었습니다. 옛날에 종종 해 주셨다고.”

“별걸 다 기억하는군.”

신해범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맛이 기막혔나 보죠? 지금은 그때보다 좋은 재료 많을 텐데,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보세요.”

“내가 자네 요리사야?”

“저 말고 류진이 위해서요. 저한테는 류진이가 먹고 남은 거 한 잔이면 됩니다.”

“쟤는 음식 안 남겨.”

“냉정하시네요.”

“남겨도 자네한텐 안 줄 거야. 차 끌고 온 사람한테 술은 안 되지.”

“사람 부르면 되죠. 오늘 하룻밤 자도 괜찮고. 이 집에 남는 방 많잖아요? 손님방 하나만 인심 쓰세요.”

“스물 넘어서 엉덩이 걷어차여 본 적 없지?”

안 되겠다. 윤태금은 깨끗하게 단념했다. 신해범은 정류진을 위해서만 요리한다.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만드는 모든 것의 주인은 정류진이었다.

정류진이 명령하면 불지옥에라도 뛰어들 인간이다. 그건 반대로 생각해서, 정류진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해범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 목표가 없었다. 심지어 자기 인생의 핸들을 타인에게 넘겨주었다. 정류진에게.

정류진이 가는 곳에 신해범이 간다. 신해범은 정류진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러니까 정류진만 꽉 잡으면 된다. 선하고 맑은 아이 하나를 돌봐 주는 대가로 악마를 조종할 수 있는데 이런 투자를 누가 마다해.

윤태금은 끙, 하고 일어섰다. 집안에 들어가 가방과 머플러를 챙겨 나왔다. 신해범이 스모키 쿼츠 박힌 서류 가방을 곁눈질했다.

“아까 꼬꼬한테 보여 준 사진, 전부 진짠가?”

“조작 한 스푼도 넣지 않은 진짜입니다. 원 보좌한테 특별히 부탁했지요. 우리 꼬꼬 컨디션 좋아질 만한 컷으로.”

별안간 신해범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해준이느은~ 꼬꼬가 권세혁 소식에 안심할 때마다 질투 나!”

“아휴. 원래도 어리고 잘생긴 남자 경계하시잖아요.”

“맞아. 그래서 우리 꼬꼬 절친이 태금이라 참 행복해! 완전 안심 백 퍼센트~!”

맞잡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어깨를 들썩들썩하는 신해범은 누가 봐도 장난치는 모습이었다. 윤태금은 그의 방어 기제를 알기에 능숙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신해범은 신해범이었다. 윤태금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하늘을 한 번,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정장 구두 앞코를 한 번 바라보고 신해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졌습니다. 서로 상처 주는 말은 그만하죠.”

“왜? 재미없나?”

“재미없습니다. 진짜. 완전. 매우. 굉장히.”

“일 절만 해도 알아들어.”

미소 지은 신해범이 일어나 섰다. 기둥에 등을 기댄 그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질투한단 말 사실이야.”

“그래도 티는 안 내시죠?”

“자제하려고 최선을 다하지. 어린놈한테 부들대는 것만큼 추한 짓 없으니까. 그리고 나한텐….”

신해범의 시선 끝에 정류진이 있었다.

“쟤만 있으면 돼.”

오싹했다. 윤태금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선택적 정보 전달은 하지 마세요. 류진이는 대장님께 의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무조건 기대는 게 아니라요.”

“거참 말 많네.”

윤태금은 굴하지 않았다.

“모쪼록 감추지 마시고, 대화 많이 하세요.”

“예, 선생님.”

담배를 피우는 신해범을 뒤로했다. 차고로 걸어가는데 까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류진이었다. 눈밭에 뒹굴었는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다.

“가게?”

“엉. 간다.”

류진의 뒤를 따라 개들이 왔다. 윤태금은 자기를 향해 짖는 한과 명에게 으이구, 으이구, 했다. 은혜도 모르는 개 놈들 같으니.

“아직 안 친해서 그래.”

류진이 멋쩍어했다. 윤태금은 류진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뭐야. 치워.”

“으이구.”

마구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묻은 눈을 털어 주려고, 조금 뒤에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촉감이 좋아서.

“아! 하지 마! 신해범한테 이른다!”

“어차피 다 보고 있거든.”

“알면서 그래? 겁대가리 없이?”

겁대가리. 윤태금은 픽 웃어 버렸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게, 도저히 얄밉지가 않았다. 이 핑계 저 핑계 대 가며 공부를 미룰 때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래. 나 겁대가리 없다. 왜.”

윤태금은 웃었다. 류진의 어깨 너머 이쪽을 바라보는 신해범과 눈이 마주쳤다. 기둥에 기대선 채 담배를 피우던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윤태금은 자세를 고쳐 잡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윤태금!”

조수석 창문이 흔들렸다. 류진이 서 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윤태금은 차창을 내렸다.

바깥의 찬 공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왜?”

“혹시 화났어? 내가 고자질한다고 해서?”

“아, 어. 나 완전 삐졌어. 그래서 다신 안 오려고.”

“괜찮나 보네.”

“아니? 화났다니까?”

“이거 가져가.”

류진이 차 안으로 던져 넣은 건 사탕이었다. 기름종이에 싸인 알사탕 몇 개가 조수석 시트에 후드득 떨어졌다. 하나 집어서 살펴보니 아까 얻어먹은 막대 사탕과 같은 종류였다. 신해범의 수제 과일 사탕.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니야. 한이랑 명이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아껴 먹어.”

“그래. 고맙다. 근데 너, 아직도 주머니에 군것질거리 넣고 다녀?”

류진이 발끈했다. 올여름의 악몽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주머니에 초콜릿이며 사탕을 넣고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먹어 대는 모습을 본 윤금강이 치과 진료를 권했다. 싫다고 버텼지만 신해범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윤금강의 예리한 눈썰미에 박수를 치며 자신을 치과로 끌고 갔다.

윤금강이 사전에 말해 뒀고, 직접 의료 통역까지 했기 때문에 진료 과정에 문제는 없었다. 벌벌 떤 게 민망하게 치아 상태도 좋았다. 다만 평소 식습관이 좋지 않으며 어금니 쪽 충치에 유의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 밤, 류진은 꼼짝없이 신해범에게 붙들려 앉아 ‘올바른 양치질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놈의 치실….

“치, 치과에서 문제없었으면 됐지!”

윤태금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들 말 좀 들어라. 이 왕창 썩어서 나중에 고생하지 말고.”

“나도 어른이거든? 자기도 치실 안 하면서 잔소리야.”

“해! 누가 안 한대. 감히 누가 날 모함해?”

“금강 누나가.”

류진이 턱을 쳐들었다. 어때? 할 말 없지? 하는 표정에 윤태금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못 살아… 진짜, 애한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귓불이 뜨끈뜨끈했다. 지금은 양치도 가글도 치실도, 빠짐없이 잘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구차했다. 다행히 신해범이 와 주었다. 대화가 길어져서 불안한 모양이었다. 윤태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류진에게 복수했다.

“대장님, 류진이 주머니에 사탕 잔뜩!”

“야악!”

“밤에 치실 하는지 꼭꼭 확인하십쇼!”

“저 웬수! 가만 안 둬!”

류진은 멀어지는 후미등을 보며 씩씩거렸다. 뒤에서 류진을 붙잡은 신해범이 웃었다.

“진정해, 꼬꼬야. 사탕 안 뺏을게.”

그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개들이 물고 가지 않도록 재빨리 발로 밟았다.

“윤태금 머리 좋아. 말발도 있고. 너 쟤한테 못 당한다.”

“당신까지 이럴 거야?! 사람 열 받게 하려고 환장했어?!”

“너한테 환장했지.”

신해범은 류진을 껴안은 채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노란 털목도리에 밴 냄새가 좋았다. 정류진 냄새.

한과 명이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다.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리는 게 더 놀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신해범은 나지막이 말했다.

“들어가자. 춥다.”

“응….”

“너한테 보여 줄 것도 있고.”

“응.”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신작 레시피는 아니야. 혹시 기대할까 봐.”

“알아.”

이번에는 신해범이 침묵할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손등을 덮는 류진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윤태금이 주고 간 거….”

“맞아. 꼬꼬야.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당연하지.”

“기 소령이 보낸 편지야.”

“소령님이? 우리한테?!”

신해범이 웃었다.

“그래. 우리한테.”

그는 류진의 손을 잡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이번에 윤태금, 개들 데리러 문국 갔잖아. 그때 내가 따로 부탁한 게 있었어. 뭣 좀 알아봐 달라고… 그런데 이게 웬걸, 기 소령이 선수 쳤더라고. 나보다 훨씬 먼저.”

신해범은 어리광 부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류진이 킥킥 웃었다.

“이제 소령님이 당신 이기네.”

“이겨야지. 그럼.”

뒤돌아선 류진이 말했다. 두 팔을 신해범의 허리에 감은 채.

“나 배고파. 간식 줘.”

“그래.”

“나 먹을 때 옆에서 읽어 줘. 소령님이 뭐라고 썼는지.”

“알았어.”

류진이 웃었다. 조그만 얼굴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신해범이 손바닥으로 걷었다. 류진의 흰 이마가 드러났다.

“뭐 먹고 싶은데?”

류진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특정 메뉴를 댔지만,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방금 신해범은 사랑한다고 말한 거였다.

한과 명이 꼬리를 흔들며 따라왔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떨지 마.”

“내가?”

“뭐든 괜찮아. 당신이 나한테 숨기지만 않으면.”

류진은 조금 생각하다 덧붙였다.

“우린 같이 감당할 거잖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신해범이 웃었다. 류진은 그의 눈에 담긴 자기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싶을 만큼 믿음직했다. 모쪼록 그도 같은 생각이기를.

신해범은 류진이 바란 답을 내놓았다.

“고마워.”

심장이 두근거렸다. 연인의 눈동자 속 자신이 웃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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