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2화 (2/103)

<2화>

하니(Honey) 스트리트 171번지 라즈베리D, 에일로.

1,609년간 영업을 해온 카페, ‘루나커피 1호점’의 주소랍니다. 루나커피 1호점의 창업주는 ‘바바라 무스케이크 블랑슈’라는 유명한 여류작가였어요. 무스케이크라니, 중간 이름이 좀 독특하죠?

그 이름 때문인지 바바라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었는데요. 하나는 직업 소설가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커피점을 차리는 거였어요. 그녀는 결혼 후 틈틈이 연애소설을 썼는데 주로 자신의 경험을 담은 내용이었죠.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녀는 상상력이 그다지 풍부한 편은 아니었어요. 히트작 두 편을 낸 다음에는 밑천이 떨어져서, 결국 소설로 번 돈을 모아 두 번째 소원이었던 커피점을 차렸답니다.

가게 이름을 굳이 ‘루나커피 1호점’이라고 지은 이유는, 가게가 크게 성공해 떼돈을 벌게 되면 2, 3호점까지 낼 생각이었거든요.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떼돈을 벌 정도는 아니었어요.

어느덧 할머니가 된 바바라는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지자 아들에게 가게를 맡겼어요. 그 아들이 바로 저의 부친 ‘필립 블랑슈’랍니다.

부친은 사실, 아버지를 이렇게 표현하기 좀 뭣하지만, 백수건달이었어요. 원래 백수건달이란 대부분 게으르기 마련이죠. 물론 놀러 다니는 일에는 부지런합니다만.

저의 부친 역시 게을러터졌지만 놀러 다니는 일에는 열심이라, 툭하면 어린 저에게 가게를 맡기고 나가버리기 일쑤였어요. 처음 가게를 맡아볼 때의 제 나이는 280세, 음…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는 대충 열네 살쯤 됐을 때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군요.

부친과는 달리, 이것 역시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저는 매우 부지런한 아이였어요. 남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모계를 이었다고들 했죠.

대대로 우리 가문은 여자들이 부지런하고 유능해 한량인 남자들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집안의 예외였지요.

어릴 때 저는 키가 몹시 작았기 때문에 카운터에 발 받침대를 놓아두고 일해야 했어요. 엄청 위험한 커피 기계를 척척 다루고 있는 저를 보고 할머니는 노발대발하시곤 했답니다.

그 원인을 제공한 부친은 820세나 된 주제에 툭하면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서야 했지요. 두 팔을 번쩍 들고 말이에요.

그건 조금 쌤통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는 부친이 저에게 가게 일을 맡기는 게 싫지는 않았어요.

발 받침대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제 키가 자라자, 할머니도 더 이상 화를 내시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할머니는 손끝도 야무지고 손님들 기분도 곧잘 맞춰준다면서 저를 칭찬해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360세가 되었을 때 정식으로 가게를 물려주셨죠.

그로부터 얼마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부친은 고양이로 변신하고 말았어요.

느닷없이 웬 변신이냐고요? 그건 일종의 저주였어요. 할머니의 저주.

우리 행성 사람들은 간혹 노인이 되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죽기 직전에 마법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얻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린 마법이 바로 제 부친을 고양이로 만드는 거였답니다.

아무리 게으르다고 해도 아들인데 너무한다고요? 글쎄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어요. 아마도 할머니는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평생 게으름만 부리고 즐거움만 쫓은 벌로, 이제부터는 얌전히 루나의 곁을 지키라는 게 할머니의 유언이었으니까요.

아, 루나는 제 이름이에요. 루나 블랑슈. 얼핏 여자 이름 같지만, 우리 행성에서는 남자 이름으로도 많이 쓰인답니다. 그 이름은 할머니가 지어주신 것으로 돌아가신 제 조부의 이름을 물려받았어요.

조부모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는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거의 동시에 서로의 이름이 새겨져 맺어진 커플이었어요.

아,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플럼버 사람 대부분은 때가 되면 짝이 될 사람의 이름이 신체 어딘가에 새겨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열 명에 일곱 명 정도랄까요.

물론 이름이 새겨지더라도 당장에 그 이름의 주인이 곁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플럼버인들은 평생 운명의 상대를 찾으려고 무척 애를 쓰지요. 배필을 찾아주는 직업도 따로 있어요.

그러니 조부모의 경우는 대단한 행운이랄 수 있지요. 바로 곁에 있는 소꿉친구의 이름이 몸에 새겨졌으니까요. 심지어 금슬도 좋아서 조부께서 돌아가실 때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곧 만나요, 내 사랑.’이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고 해요.

그렇게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면 좋겠지만, 기껏 이름의 주인을 찾았는데 그 사람이 죽도록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답니다. 그러니 이름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러면 그냥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만나면 되는 거니까 오히려 속이 편할 수도 있는 거죠.

물론 독신으로 살 수도 있답니다. 플럼버는 지구보다도 훨씬 더 고도화된 문명사회이므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각자 원하는 대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독신을 선택했답니다. 제 몸에는 어떤 이름도 나타나지 않았고, 보통 지구 나이로 18세가 넘으면 시간이 더 지나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그러니까….

운명의 상대가 없다면 차라리 혼자 살겠다, 뭐 이런 심정인 거죠. 이해하시겠어요? 이해해주시면 기쁠 것 같네요.

그렇게 저는 루나 블랑슈로서 할머니의 사칙을 준수하고 루나커피 1호점을 운영하며 살아왔어요. 지구인들 눈엔 어떨지 몰라도 저로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삶이었답니다.

고양이로 변한 부친은 어떻게 됐냐고요? 후후.

혹시 그거 아세요? 바람둥이에 한량인 아빠를 둔 아들이라면 ‘제발 우리 아빠가 말썽 좀 부리지 말고 가만히만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걸요. 어떤가요?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행운아예요. 당신의 부친이 성실한 분이라는 뜻이니까요.

어쨌든 저는 할머니의 저주에 매일 감사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고양이가 된 아빠가 크게 말썽부려봤자 새끼 고양이를 줄줄이 낳아오는 것 정도밖에 없으니까요.

새끼 고양이라면 백 마리도 키워줄 수 있으니 상관없어요. 물론 그 새끼 고양이들을 동생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함정이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그 또한 다행이랄까요.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찜찜하지만, 아빠는 네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낳아 데려온 후로 어찌 된 일인지 무정자증이 되어버렸답니다.

그래서인지 성욕도 다소 줄어든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요즘 우울증을 좀 겪는 모양인데, 워낙 낙천적인 사람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어요.

그렇게 우리는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제 나이 420세,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21세 정도가 되었을 때 느닷없이 제 어깨 뒤에 이름 하나가 나타났어요.

어깨, 어르신들은 어깻죽지라고 하지요? 고개를 완전히 오른쪽으로 돌려서 눈을 최대한 내리깔면 겨우 보이는 그곳이요. 거기에 이름이 나타난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반가웠어요. 저는 운명을 믿는 편이거든요. 조부모의 영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저는 배필이란 하늘이 맺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단서조차 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는 행운이 제게는 주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때부터 저는 플럼버 행성을 몽땅 까뒤집고 다녔어요. 어떻게 까뒤집었냐고요? 커피숍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행정청에 거주 이동 신청서를 제출했어요.

거주 이동 신청서가 통과되면 플럼버 행성에 속한 285개국 중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거든요. 하니 스트리트 171번지 전체를, 플럼버의 중앙 행정청에서 지정한 장소이기만 하면 어디로든 통째로 옮겨놓고 거기서 지낼 수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루나커피 1호점이 있는 땅덩어리를 삽으로 폭 떠서 정해진 좌표에 옮겨다 놓는 거죠. 물론 허가 신호가 떠야 실제로 이동되지만 말이에요.

다행히 신청서는 통과되었고, 우리는 285개국 중 열한 개의 나라를 돌아다녀 봤답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에요. 번거롭기도 하고, 비용도 꽤 들지요. 허가증 발급 명목으로 나라마다 수수료를 따로 받아 챙기거든요.

그리고 카페의 단골손님을 만드는 걸 포기해야만 해요. 당연히 매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그래도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부양가족이라고는 고양이 필립, 그러니까 제 부친과 새끼 고양이, 아니 동생들 네 마리뿐이니까요.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순간이동을 하던 어느 날 플럼버의 달 하나가 바다 밑으로 침몰해버린 거예요. 참고로, 우리 행성에는 달이 세 개 뜬답니다. 달 하나가 떨어져 버린 그 순간에 하필이면 우리가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단 말이죠.

아무튼 그 바람에 좌표가 흔들리고, 세 개의 달 사이에 균형이 깨지면서 우리는 엉뚱한 곳에 도착하고 말았답니다. 푸른 가스로 가득한 시골… 아니, 지구라는 별에 말이죠.

기막히게도 이곳에도 그게 있었어요.

그거요, 그거. 하늬로 171번지.

지구라는 별의, 코리아라는 나라의, 서울이라는 도시에 그런 이름의 거리가 있었던 거예요. 아마도 그래서 좌표 이동에 혼선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니와 하늬.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요.

당연히 우리는 여기 떨어지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별짓을 다 했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지구라는 별이 플럼버 행성과 아무런 교신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지구상의 어떤 똑똑한 과학자도 플럼버 행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도요.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당연히 고양이가 된 아빠는 눈만 깜빡거릴 뿐이고, 제 머리 역시 더 나을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이곳에 우리와 같은 플럼버인이 몇 명 있었답니다. 우리처럼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클럽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고, 저 역시 소식을 듣자마자 가입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회장인 로저의 말에 따르면, 월식 때 플럼버로 가는 좌표가 뜬다고 해요. 그러나 월식 때라고 교신에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늘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말은 너무 후한 표현 같아요. ‘가끔 성공’하는 게 아니라 ‘거의 실패’하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지구에 떨어져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무도 돌아가지 못해서, 클럽의 회원은 지금도 변함없이 아홉 명이랍니다. 그동안 월식이 네 번이나 있었는데도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표류한 채로 지구라는 섬마을, 아니 행성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플럼버 행성이 있는 은하계와는 달리 지구의 한 해는 말도 안 되게 짧다는 거였어요. 그 말은 곧 지구 시간으로 20년쯤 지나더라도 우리는 별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또, 20년쯤 후에 플럼버에 돌아가도 우리가 알던 것과 시대환경이 별반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지구의 3년은 우리에게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지만, 대충 적응기가 지나자 지구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월을 체감할 수 있었어요.

그 외에도 많은 낯선 것들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그럭저럭 지구의 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 노력이 전부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요. 정말이지, 이건….

아놔, 진짜… 신인지 뭔지, 거지발싸개 같은…. 이런 건 반칙 아닙니까?

“우리가 왜 온 우주를 돌아다녔는데!”

운명의 상대를 찾으려다 우주 고아가 되었건만, 그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요?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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