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꿈을 꾸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분명 눈을 뜨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곳’에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확신했다.
채 잠에서 깨지 않았기에 뭔가를 본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공기, 냄새, 공간감 같은 것은 그냥 느껴지는 것도 있지 않나. 눈을 뜨기 직전의 ‘그곳’은 절대로 이모네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은근한 꽃향기와 꽃잎을 태우는 듯한 냄새, 간간이 스미는 커피향기, 몸에 닿는 물의 따뜻한 감촉, 무엇보다 누군가의 숨결.
분명 나는 실신했을 텐데, 그 묘한 공간에 들어선 순간 잠으로 바뀌었다. 달콤하고 아늑한 잠 말이다.
그런 잠을 자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자면서도 신기했다. 간간이 꿈을 꿨는데, 그날 밤 내가 본 것이 그대로 재현된 꿈이었다. 다만 내가 관찰자의 시선에서 나를 포함한 주변 상황을 지켜봤다는 것이 현실과 다를 뿐이었다.
나는 화면 밖에서 처참한 내 몰골과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몰골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남자의 모습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래서 아마 잠든 채로 울다가 웃다가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밀려든 불안감에 흠칫 몸을 떨며 간헐적으로 깨어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넘실대는 시야에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은회색 눈동자가 잡혔다.
그 눈빛은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더불어 나를 순식간에 안정시켜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수증기가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남자의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수심이 가득했다. 그 얼굴은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저 내 희망 사항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나를 걱정할 리는 없으니까. 아니, 이 세상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기대를 품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이다. 그 기대야말로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 나와 운명으로 이어진 사람, 그게 바로 이 사람이기를. 제발 눈앞의 이 사람이 내 어깨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이기를.
내 마음은 반으로 나뉘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루나 블랑슈라는 확신으로.
확신 쪽이 더 몸집을 키웠다. 그의 얼굴이 곧 이름이었다. 달처럼 아름다운 이 남자가 루나 블랑슈가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래, 이 모든 것이 루나의 마법이었다.
나는 마법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러니 내 소망은 이미 이루어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애당초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이 아름다운 남자를 다시 볼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배시시 웃었다. 향기로운 숨결이 내 콧등을 간질였다.
“후우….”
응…? 이 사람이 한숨을 쉰 걸까? 한숨마저 달콤하다니….
그런데 그 순간 생각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씻기고 있어?
그 말은 내가 발가벗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씨발.
내 알몸을 이 남자가 봤다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피했다. 그래서 또 기절했던 것 같다.
내 목이 앞으로 픽 꺾일 때 나는 생각했다. 좀 더 푹 자고 아침에는 기운 차리자. 그리고 눈뜨자마자 이 사람 이름을 물어볼 것이다.
아직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천사님, 루나세요?’라고 물었을 때 남자의 표정은 좀 묘했다. 얼핏 아무 표정도 없어 보였지만 그가 자신의 희고 가냘픈 손을 꼭 쥐는 것을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건 아침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도 나를 찾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를 찾아다니느라 그 집이 거기에 동동 떠 있었던 걸 거다. 나를 찾으려고 온 세상, 아니 우주를 돌아다녔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는 그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몸에 그의 이름이 나타난 이유 말이다.
그렇게 나는 내 확신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있지?”
눈을 뜨자 나는 이모네 집에 누워있었다. 집을 빠져나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 같았다.
나는 골방에 갇힌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당연히 나는 순간적으로 잠들기 전의 모든 게 꿈이었다고 생각해버릴 뻔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창문에 비친 내 얼굴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티셔츠를 걷어보니 멍이 심했던 옆구리에도 치료한 흔적이 있었다. 더불어 그 달콤한 잠 덕분인지 지친 몸도 비교적 가뿐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방으로 나를 옮겨놓은 거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은 내가 이 집에 산다는 사실도 안다는 건데, 대체 정체가 뭘까? 진짜로 마법사?
하긴, 백 미터를 순간이동하는 사람인데 당연히 마법사겠지. 분명히 그는 하늘 위에 있다가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으니까. 게임을 해본 적은 없지만 어드벤처 게임에 나오는 던전 진입 순간이동, 뭐 그런 기초적인 마법일 것이다.
루나커피 1호점.
분명 간판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1호점, 1호점이라. 그럼 2호점도 있다는 뜻인가?
“체인점인가?”
이모네 집도 그렇고, 이 동네 집은 거의 다 망치로 몇 번 두들기면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단층 주택이었다. 골목 왼편에는 주택 몇 채와 정체 모를 가건물이 있고, 그 끝에는 고물차 몇 대가 노상 주차되어있는 공터가 자리했다. 그리고 오른편은 논두렁으로 이어진 동네였다. 길 어귀에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운영하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을 뿐 이 동네에 가게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커피 체인점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말이 안 되었다.
그나저나 당장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는 이모 부부가 퇴근하면 그대로 잡혀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지? 어떻게 여기서 다시 빠져나가지?’
창문을 깨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방범창이 있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녹이 슬어 부식된 상태라, 방구석에 쌓인 잡동사니 중 묵직한 것을 골라 몇 번 치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고물 더미를 뒤지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촌 동생 준이가 아장거리며 들어왔다.
“벼라(별아). 밥 죠.”
나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열려 있었어?”
“밥.”
준이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해가지고 몸을 흔들며 칭얼거렸다.
밉살스러운 데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동생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배고프다고 징징거릴 때는 내 처지도 잊은 채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 아이도 부모 복은 지지리 없는 놈이었으니까.
부부는 이 녀석을 때리고 싶을 때도 나를 때렸다. 내가 없으면 이 녀석이 처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쓸데없이 마음이 아파 왔다.
도망치더라도 밥은 먹이고 도망치자. 결국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나갔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거기 있는 음식이라고는 신 김치와 잘 붙지도 않는 랩을 대충 씌워놓은 족발뿐이었다. 어젯밤 부부가 먹다 남긴 족발일 것이다.
부부는 들어올 때 시장통에서 떨이로 파는 먹거리를 사가지고 TV 앞에 앉아, 소주 안주 겸 저녁으로 먹고는 했다. 아마 나를 패는 것을 빼면 그게 그들의 유일한 낙일 것이다.
나는 이 아이에게 뭘 먹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족발과 김치를 꺼냈다. 어차피 그것밖에 없었다. 밥솥은 역시나 비어있었다.
이모는 평생 쌀 한번 씻어놓는 법이 없었다. 밥통에 밥이 있으면 밥솥째 꺼내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고는 한두 숟갈 남은 걸 그대로 내팽개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모가 남긴 밥을 씹으며 욕도 씹었다. 썅X.
아직 퇴근 시간이 되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불시에 이모가 돌아올까 봐 초조해하며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밥이 되는 동안 족발을 잘게 잘라 김치와 함께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 끓였다. 대충 김치찌개 비슷한 것이 완성되자 때맞춰 밥솥이 김을 뿜었다. 나는 족발 김치찌개를 갓 지은 밥과 함께 상에 올렸다.
“자, 밥 먹자.”
내가 말하자마자 동생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음식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찌개가 엎질러졌다. 찌개에 손등을 덴 동생이 빼액 울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동생을 안아 들고 싱크대로 가 수돗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식혀주고 있는데, 오늘도 환상의 타이밍을 자랑하며 이모가 들어왔다.
“야, 이 새끼야!”
이모의 고함에 동생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준이는 원래도 이모만 보면 울었다.
그럴 만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준이가 울면 나는 그 때문에 더 처맞을 때가 많았다. 하긴, 동생이 안 울었으면 다른 핑계를 찾아내 때렸을 테지만.
그래, 전부 내 탓이다. 배가 고프건 말건 제 어미가 있는데 내가 왜 걱정을 처하고 지랄했나 모르겠다. 아까 그냥 도망쳤어야 했는데.
무슨 육상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날듯이 뛰어 들어온 이모가 쌍욕을 씨부리며 내 품에서 제 아들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무시무시한 손바닥을 날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뭐지…?
날아오던 손바닥이 타임 워프에라도 걸린 건가? 아무 소리도, 아무 통증도 없었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희한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만…. 이걸 어디서 봤더라? 그래, 분명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언젠가 학교에서 영어 시간에 영화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얼음 나라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영화였는데, 성의 주민들이 저주에 걸려 돌로 변하는 장면이 있었다.
지금 이모와 사촌 동생이 딱 그 주민들처럼 돌로 변해 있었다. 동생은 아기 악마처럼 악다구니를 쓰는 얼굴로, 이모는 내게로 손바닥을 휘두르며 벌게진 얼굴로 딱딱하게 굳은 채 멈춰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모습이라서 나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대체 뭐지?
아니, 고민할 때도 아니다. 생각 따위는 나중에 해도 되었다. 우선 도망부터 치고 봐야지! 기회를 또 날려버려선 안 된다.
무작정 뛰어나가려던 나는 문득 멈춰 섰다. 이모의 팔에 걸린 조그만 손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모의 지갑에는 늘 돈이 들어있었다.
마귀할멈 같은 얼굴을 보니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그 집에서 봉사한 것을 생각하면 그 거지 같은 집을 통째로 훔쳐 가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니 여비 정도는 가져가도 문제없겠지.
태권도장 다니는 애들 수강료가 들어왔는지 손가방 안에는 지폐가 제법 있었다. 나는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고 그대로 집을 뛰어나왔다.
검푸른 하늘 아래 세상은 모든 색을 잃고 시커먼 짐승처럼 웅크려 앉아 있었다. 억수 같은 비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나는 진창이 된 골목을 냅다 뛰었다.
바람산으로 가야 했다. 아까 그 산기슭, 거기로.
아직도 있을까? 없으면, 찾아내야만 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루나….”
나는 그게 결코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부쩍 자랐지만 내가 목격한 것을 믿지 못할 만큼 자란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니, 거기에 없더라도 어딘가에 실재할 것이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루나커피 1호점.”
그리고 거기에 있을 그 남자. 내 운명을 가진 남자, 루나 블랑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