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6화 (6/103)

<6화>

제 어깨에 이름이 나타난 후 저는 매일 밤 달콤한 꿈을 꾸었답니다.

지구에 불시착했다는 심란한 상황에서도 그 꿈은 변함없이 이어졌지요. 아니, 어떤 점에서는 더 열심히 꿈을 꿀 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플럼버에서는 기이한 이름이었지만 이곳에 오니 그 이름과 비슷한 게 자주 눈에 들어왔거든요. 한국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이름인 것 같았어요.

Eun Byeol(은별).

“후우….”

그리고 드디어 이름의 주인을 만났는데, 뼈만 앙상한 몸을 씻기면서 제 마음은 만감이 교차했어요. 아이의 불쌍한 처지가 당황스러울 정도였죠. 거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까지 보태지니 착잡하기 그지없었어요.

‘어째서 이 꼬마가 내 배필이라는 거야? 하필이면 왜?’

솔직히 말하면 저는 어여쁜 연상의 누나 정도를 상상해왔답니다. 왜 연상이냐고요? 제가 연상을 좋아하니까요.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그런지 조금 어른스러운 여성을 만나 애교도 부려보고 싶었고, 또….

“드르렁… 코-”

낯선 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어요. 코 고는 소리네요. 얼마나 지쳤는지 씻기는 동안 아이가 깊이 잠들었어요. 아이를 수건으로 감싸 안아 침실로 나왔어요.

침대에 눕히고 상처를 치료해준 다음 잠시 아이를 지켜보았어요.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서 얼굴 모습이 잘 파악이 되지는 않았어요.

조용히 이불을 덮어준 다음 거실로 나왔어요. 필립은 여전히 테라스 난간에 앉아있었어요. 저는 그 옆에 나란히 섰어요.

검은 호수로 변한 논두렁 위로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어요. 뉴스에서는 긴급속보가 나오고 야단났던데,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원래 평온한 호수였던 것처럼 보여요.

“아빠.”

“야옹?”

“저 꼬마 어깨에 내 이름이 있어요.”

“응?”

“루나 블랑슈(Luna Blanche).”

“헐….”

평소에 별로 놀라는 법이 없는 필립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어요.

“그럼 네 어깨에 있는 이름이?”

“저 꼬마 이름일 가능성이 크겠죠.”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은별(Eun Byeol).”

“그럼 성이 은이고 이름이 별인 거냐?”

“아니, 그냥 이름만이에요.”

“은별이?”

“응.”

필립은 고개를 저었어요.

“키가 너무 작아.”

후우, 나 역시 고개를 저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직 꼬마라고요. 그것도 남자아이.”

“그래서, 죽였니?”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왜 애를 죽여요.”

“거의 다 죽었던데. 조금만 찔러보지 그랬어?”

“농담 마세요.”

“나는 농담 같은 거 안 한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꼬마잖아요. 코흘리개 꼬마요. 설마 그 꼬마가 내 배필이라는 뜻은 아니겠죠?”

필립은 생각에 빠진 듯 거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아빠가 생각이란 걸 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지금도 그저 하는 척만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답니다.

“네임만 아니면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돌봐주고 싶을 만큼 딱한 아이예요.”

필립은 그 말에 되묻지는 않았어요. 제게는 사람의 눈동자를 5분쯤 들여다보고 있으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이를 ‘리딩’이라고 해요.

플럼버 사람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능력이 아니에요.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처럼 익힐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물론 누구나 습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플럼버인은 생물학적인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언어를 학교에서 배운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대충 이해가 갈 거예요.

지구인 중에서도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 하는 사람이 있듯, 플럼버인들의 리딩 실력도 각자 천차만별이에요. 그런 차이입니다. 저는 특별히 리딩에 재능을 타고난 축에 속하는 거고요.

그런 연유로 저는 아이의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어요. 리딩은 기본적으로 현재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 수 있는 스킬이지만, 그가 평생 보아온 기억을 훔쳐볼 수도 있답니다.

물론 이 부분은 개인정보를 염탐하는 것이 될 수 있기에 플럼버에서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요.

만 14세 이상의 플럼버인들은 무료로 칩을 주사할 수 있는데, 이 칩에는 개인정보를 포함한 비밀스러운 생각들이 리딩에 노출되지 않게 해주는 보호 장치가 내장되어 있답니다. 그 칩은 인체에 악영향을 주지 않고 뇌세포에 스며들어 뇌파에 잠금장치를 부여해주지요.

범죄자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이 칩을 강제로 제거해 리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되어 있어요. 간혹 뛰어난 리더들은 이 장치를 뚫기도 하지만, 플럼버인 중에는 그 정도로 사악한 인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저 역시 일부러라도 리딩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아니,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저는 절대, 네버 에버, 다른 이를 리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제 이름을 가진 아이이니 당연히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이의 상태가 지나치게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리딩 후에 즉시 후회하고 말았어요. 아이의 길지 않은 인생이 너무나 비참했던 탓이었어요.

하긴, 반드시 리딩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몰매를 맞은 게 분명한 그 모습이면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요.

세상에, 이 조그만 아이를 참혹하게 때린 것은 생판 남도 아닌 이모 부부였어요!

“와, 와, 와. 신고할까?”

하지만 저는 지구의 수사기관과는 거리를 두고 싶은 외계인이랍니다. 당장에라도 아이를 구하고 싶었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이를 데려가면 이렇게 조그만 아이가 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니까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늘 운명의 상대를 기다렸는데 이건 악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적절한 상대를 만나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는 단순한 신념이지요. 이런 경우는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사실 생각해볼 필요도 없답니다.

“이 아이와 나는 애초에 만난 적이 없는 거야.”

무엇보다 이 아이가 저를 만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해야 했어요. 악마들의 소굴로 아이를 돌려보낸다는 건 도저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가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앨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저는 가게로 내려와 어둠에 갇혀버린 창밖을 내다보았어요. 텅 빈 가게의 적막과 쏟아지는 빗소리가 제게 이성이라는 것을 도로 찾아주었어요.

결국 저는 결연한 다짐을 외치며 벌떡 일어났어요.

“내 코가 석 자다.”

이런 꼬마와 네임 따위로 엮여서는 안 될 일이죠. 안 그런가요?

저는 아이를 안고 순간이동을 해버렸어요. 고민 같은 건 더 이상 할 필요도 없었거든요.

아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으로 좌표를 맞췄더니, 도착한 곳은 정말 끔찍한 방이더군요.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 퀴퀴한 냄새가 났어요.

저는 아이를 안은 채 한참 서 있었어요. 나를 만나기 전으로 아이의 기억을 되돌려 놓으려면 여기에 두고 가야 하는데, 이 광경을 보니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때였어요. 아이가 제 목을 턱 안으며 잠꼬대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으응…. 루나… 블랑시…유.”

“헉!”

그 이름을 제 귀로 들으니 정신이 퍼뜩 들었어요!

저는 아이를 방에 놓아두고 순식간에 루나커피로 돌아왔어요. 심장이 몸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어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요.

“헉헉헉….”

“왜 이래, 뭐 죄 졌냐?”

“흐억!”

필립은 눈부시게 하얀 털을 뾰족한 혀로 고르면서 테라스 난간 위에 앉아있었어요.

“죄, 죄라니! 아, 아이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왔을 뿐이에요.”

“죽인 건 아니고?”

“아빠! 왜 자꾸 죽였냐고 그래요? 내가 왜 애를 죽이겠어요?”

“두고 봐라.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테니.”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요.”

“플럼버인은 쉽게 죽지 않지. 잊었나 본데 여기는 미개 행성이야. 저들은 바이러스 하나로도 쉽게 죽어버린다고.”

“그 애는 그렇게 약한 아이가 아니에요.”

그러자 필립이 굉장히 사악한 얼굴로 키들거렸어요.

“야옹-. 배필이라고 벌써 편드냐?

“말조심하세요!”

“가만, 둘 다 남잔데 누가 와이프를 하는 거냐?”

“필립 블랑슈!”

“노상 앞치마 입는 놈이 와이프 하는 게 좋겠다, 그치? 킬킬킬.”

“미치겠네!”

저는 화가 나서 방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저렇게 야비한 고양이가 제 아빠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말이죠. 야비한 ‘사람’이 아니니 천만다행이잖아요? 할머니, 고맙습니다.

그렇게 겨우 화를 삭이며 창문 너머 빗속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을 올려다봤어요.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루나커피의 좌표 안에는 맑은 밤하늘뿐이었어요. 그 하늘에는 휘영청한 달과 별무리가 가득 차 있답니다. 그 달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플럼버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지요.

비록 거울의 상일 뿐이지만, 플럼버의 달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 달이 없으면 위치를 잡을 수 없어 영영 우주를 떠돌게 되거나 5차원 공간에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여기가 정말 고향처럼 느껴지네요. 늘 평화롭기만 하던 그때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랐던 것 같아요. 언제쯤 이 불안감을 떨치고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네임의 주인을 찾으려고 그토록 노력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랬다면 지금쯤 우리는 고향에서 아무 걱정도 없이 저 달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고요.

“후우….”

심란한 나머지 저는 방 안을 서성이다가, 괜히 침대에 반듯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가, 결국 테라스로 나갔어요.

이 집의 방은 모두 같은 쪽을 보게끔 위치해 있어서 테라스를 공용으로 사용해요.

필립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은 채 털을 고르고 있었어요. 몸치장에는 늘 부지런한 그 모습에 저는 마뜩찮은 시선으로 고개를 저었어요.

그런데 그때, 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아이의 상황이 보였어요.

테라스 창에 설치된 일종의 반사경으로, 달의 상에 초점이 모이면서 원하는 좌표를 찾아주거든요. 그러면 거울처럼 상황을 보여주지요. 어떤 상황이든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해당 정보가 어느 정도 있어야만 해요.

플럼버의 달은 가끔은 대상의 뇌파를 읽어 들이는 기능도 한답니다. 그래서 제 뇌파가 달의 상에 흡수되기라도 한 걸까요? 달이 제 마음을 읽어버린 걸까요? 당연히 그랬을 거예요.

제 눈에 보이는 아이는 저보다 조금 더 작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어요.

그때 더 작은 아이가 시뻘건 찌개 그릇에 손을 데고 말았어요. 그리고 마침 이모라는 여자가 들어와 아이를 막 때리려고 달려들었어요.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나도 모르게 좌표 안으로 이동해버렸어요.

“루나! 어디 가….”

필립의 목소리가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저는 어느새 그 초라한 집 거실에 서 있었어요. 다행히 아이는 여자의 손이 날아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있어서 날 보지 못했지요.

저는 아이의 시간을 빼고 그 집안에 타임 낫(time knot: 시간을 묶는 것)을 걸었어요. 그렇게 하면 아이가 최소한 맞지 않고 방이든 어디든 도망칠 수는 있을 거예요.

저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재빨리 모든 일을 끝내고 테라스로 돌아오자, 필립이 또 고개를 살살 저었어요.

“그냥 데려오지 그랬냐?”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애가 잘살면 몰라도 고생만 죽어라 할 게 빤히 보이는데, 네 배필을 그런 짐승 소굴에 놔두고 너 혼자 잘 살 수 있겠어?”

“배필이라니 자꾸 누가 누구 배필이라는 거예요!”

“어차피 넌 지구 나이로 20년에 한 살 먹는 거잖아. 애가 스무 살쯤 먹는 건 금방일 테니 상관없는 거 아냐?”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예 다 커서 만난 거라면 모를까, 저렇게 어린 아이를 봤는데 아무리 애가 스무 살이 된다고 해도 제가 배필로 맞을 수 있겠어요?”

“왜 안 돼?”

“아빠는 뭐든 간단한 사람이라 좋겠네요. 난 그럴 수 없거든요. 저 애가 스무 살이 되면 난 440살이 되는 거예요. 무려 420살 차이라고요! 아시겠어요?”

제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한 건지, 필립은 입을 한껏 가늘게 벌리고는 아시겠어요? 라는 제 말을 흉내 내며 이죽거리더니 다시 털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저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느닷없이 그가 부러워졌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날 회원 중 두 명이 도킹에 성공했어요.

로저가 근처 폐가로 회원들을 안내했다는데, 모두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도 그중 두 명만 성공한 거예요.

로저는 어째서 모두 도킹하지 못한 건지 원인을 분석해봐야겠다고 했어요.

남은 회원들은 거의 장례식 분위기였다고 해요. 로저는 도킹에 성공한 회원이 우리를 찾아낼 방법을 알아봐 줄지도 모른다고 위로했지만 소용없었대요.

한편 로저는 일부러 도킹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는 도킹 장소를 물색해준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갔대요. 실패한 회원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로저의 집은 밤새 눈물바다였다나 봐요.

“왜 그랬어요, 로저?”

“난 루나커피와 함께 갈 거야.”

그동안 정이 들기는 했지만, 그 말은 조금 터무니없이 들렸어요.

그나저나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어요. 도킹을 포기한 이상,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원래 루나커피가 안착해있던 지구의 하늬로 171번지로 돌아가야 했으니까요.

거기에는 지금 페이크 루나커피가 있는데, 아직 한밤중이고 영업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당장은 괜찮겠지만 날이 밝기 전에는 돌아가야 해요. 만에 하나 누군가 페이크 루나커피의 문을 두들기기라도 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답니다. 문 두들기던 사람이 빈 홀에 빠져버릴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못했기에 그곳은 메워지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맨홀 같은 공간이 되어버린 거예요.

“아빠. 흔들릴지도 모르니까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 말에 필립이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로 몸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막 난간에서 뛰어내리려던 그가 귀를 쫑긋 세우며 몸을 길게 늘였어요. 아몬드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그가 나를 돌아보았어요. 그리고 음침하게 야옹거렸죠.

“꼬마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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