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7화 (7/103)

<7화>

그깟 5만 원.

이모 지갑에서 꺼낼 때는 당당했는데 도망치고 있어서인지 도둑질을 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훔쳤나? 아니면 만 원만 훔칠 걸 그랬나. 돈 모자란다고 준이 밥 굶기면 어쩌지?

그때였다. 엄청난 굉음에 내 발이 절로 멈췄다.

돌아보니 블록버스터 영화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 펼쳐졌다.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구릉이 갈라지면서 해일이 몰려들었다. 어느 집인지 축대가 무너지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였다.

도망치는 주제에 나는 처지도 잊고 잠깐 넋을 잃었다. 어둠에 잠긴 산, 낮은 농지와 흙길, 그 너머로 이어지는 기슭이 한입 크게 베어 먹은 것처럼 떨어져 나가더니 이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범람한 강물이 몇 채 안 되는 집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헉…!”

다시 도망치려던 나는 준이를 떠올렸다. 이모가 뒈지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 어린 것이 물에 빠져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냉정해지자, 정은별! 이성적으로 생각해. 내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같이 죽자는 거 아니면 뛰어.’

그런데도 망설이고 있는 내가 등신 같아서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는 사이 수마는 눈 깜짝할 사이 골목을 덮치고, 논밭을 덮치고, 나를 덮쳤다. 순간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발이 들리는 순간 뭔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바로 옆에 누군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헐, 돼지다.”

정말 돼지였다. 꿈이라면 돼지꿈이니까 차라리 좋을 텐데, 이건 실사다. 어느 농가의 축사가 휩쓸린 모양이었다.

저 멀리 또 다른 돼지가 보였다. 돼지는 살겠다고 꽥꽥거리며 조그만 하이힐 같은 발로 타이어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타이어는 좋은 구명보트였다.

“실례!”

나는 돼지와 도란도란, 은 아니지만 아무튼 함께 타이어를 잡고 호수 위를 허우적거렸다.

자동차, 리어카, 떨어진 문짝 등이 내 옆으로 둥실둥실 떠내려갔다. 골목 어귀의 구멍가게 간판도 내 옆을 지나갔다. 그 가게 이름은 그냥 ‘슈퍼’였다.

그 할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귀도 어둡고 허리도 많이 굽어서 이 수마를 피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할머니와 특별히 친한 건 아니지만 가끔 심부름을 가면 빵이나 막대사탕 같은 것을 쥐여줄 때가 있었는데.

“아앗!”

내가 두리번거리는 사이 돼지가 물에 빠져버렸다.

돼지는 꿀꿀거리며 버둥거리다가 물속으로 잠겨버리고 말았다. 전기 콘센트 같은 코가 제일 마지막에 빠졌다.

슬프지는 않았지만 두려웠다. 이게 현실인가? 혹시 꿈 아닐까? 순식간에 온 세상이 호수로 변했다니.

“여기가 어디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정표 구실을 해줬던 풍경들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호수로 변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오한이 들자 그것은 너무나 현실이었다. 턱이 조금씩 떨리더니 앞니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추워….”

이제 온몸이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소 한 마리가 움메, 울부짖으며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멀리 떠내려가던 소는 어느 지점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사라졌다.

순간 나는 그 소가 부러웠다. 죽어서 좋겠다.

‘죽고 싶다.’

이제 열두 살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던 것 같다.

아빠가 집을 나갔을 때도, 엄마가 날 버리고 떠났을 때도, 이모네 부부한테 온갖 학대를 다 당했을 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그런데 드디어 죽고 싶었다.

무거운 머리를 타이어에 내려놓았다. 끝없는 수평선이 세로로 누웠다. 물에 잠긴 전봇대에서 별보라 같은 불꽃이 튀었다.

그 곁을 아슬아슬하게 지나는데도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렇구나. 죽고 싶어지니까 무섭지 않았다. 나는 늘 무서웠는데.

더 이상 춥지도 않았다. 오히려 따뜻해졌다. 요람 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고 온몸이 노곤해졌다.

아, 나는 웃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면 되는 거였다. 거기에 행복이 있었다.

달콤한 잠의 날개 속으로 빠져들 무렵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꼬마가 왔다.

나는 움찔 놀라 얼굴을 들었다. 기묘한 목소리였다.

저승사자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요정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물속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저 먼 하늘로부터 날아온 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잠은 완전히 달아나버렸다. 다시 오한이 들었다.

삶으로 돌아오니 고통이 시작되는구나.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빨리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났다.

살아야 한다. 내 몸에 새겨진 이름을 위해서.

“루나 블랑슈.”

그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데, 지척에서 나와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게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10분만 더 있다간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그때 급물살이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어딘가로 휙 던져버렸다. 급물살은 소용돌이가 되었고, 내 몸은 분해되어 셰이크가 될 판이었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내 머릿속도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진 순간, 갑작스레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으아아!”

다행히 첨벙 떨어진 곳도 호수라서 특별히 다친 데는 없었다. 한참 첨벙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일어서보니 물이 깊지는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은 장대비 사이를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온 세상이 호수로 변해버린 마당에 이정표 따위가 있을 리 없는데도, 내 눈은 바로 그곳에 꽂혔다.

빗줄기 사이 부옇고 어른거리는, 온통 검은 물바다 위로 그것이 다시 떠올랐다. 마치 내가 소망하기만 하면 거기가 어디든 기꺼이 나타나 주겠다는 듯이 둥실.

이제 그것은 내게 조금도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물바다가 된 논두렁, 헤엄치는 돼지, 난파당한 바람산보다도 현실적이었다.

노랗고 투명한 달빛 속에서 루나커피는 휴식 중인 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 경쾌한 정경을 향해 내 쉰 목소리가 냅다 외쳤다.

“루나 블랑슈!”

내 목소리는 물의 세상 위로 끝도 없는 메아리를 생성하며 퍼져나갔다.

망설이고 있는 걸까. 나를 도와주는 한편 피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재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적어도 안달복달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다. 떼를 쓰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내게는 확신이 있었다.

내장까지 물에 불어있는 것 같은 내 꼬라지가 그 말끔한 남자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걱정될 뿐,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과연, 그가 나타났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느닷없이 코앞에.

엉망진창인 꼬라지를 언제 걱정했는가 싶게 나는 그의 눈에 바보처럼 보일 게 분명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그를 다시 본 게 너무나 기뻐서 내숭을 떨 여력조차 없었다.

“안녕하세요.”

븅신. 안녕하세요, 는 얼어 죽을.

역시나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처음과는 달리 불만이 서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곤란한 얼굴이었다.

내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내가 너무 어려서? 너무 초라해서? 아니면, 내가 그냥 싫어서? 이런 그의 표정을 보니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는 달콤한 희망은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운명으로 이어져 있음은 변함없었다. 그러자 내게 배짱이란 게 생겼다.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남자의 가늘고 섬세한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든 할게요. 커피숍이죠? 알바 안 필요해요?”

이제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뭐든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라며 나는 계속 지껄였다.

“갈 데가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해졌다. 어딘가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아픈 표정. 그는 진심으로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올올이 내게 느껴졌다.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닌데 동정 따위나 받는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지만 당장은 별수 없었다. 동정심을 일으켜서라도 일단 들러붙어야 했으니까.

“배가 고파요.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옳지, 잘했다!

그 말은 결정타였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거의 이틀간 내 위는 비어있었으니까.

나를 향한 은회색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촉촉해졌다.

그 순간 나는 이미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그가 보기 좋게 도톰한 입술을 자그마한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그 세심한 행위가 내게는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인지 그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살굿빛 입술의 매끄러운 광택과 촉촉한 타액의 반짝임 등을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를 자세히 지켜보는 것, 그 비밀스러운 행위는 미래의 내게 은밀한 유희로 자리 잡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가 보기 좋은 입술을 벌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기에 나는 그 안에 들어앉은 토실토실한 혀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왠지 딸기 사탕 맛이 날 것 같았다.

드디어, 그가 목소리라는 것을 들려주었다.

“따….”

확실했다. 이건 고작 내 짐작이 아니었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따라와.”

혀뿐이 아니었다. 목소리도 딸기 사탕 같았다. 높낮이가 크지 않은, 그래서 듣기 좋은, 차분하고 어딘지 달빛과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지나는 길에 모세의 바닷길처럼 물길이 생겼다. 그렇잖아도 그는 온통 보송보송했다. 머리카락도 나풀거렸다. 역시 그는 마법사였다.

아니, 요정처럼 생겼으니 요정인가? 그럼 나는 요정과 소울메이트네! 이렇게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그를 따라잡아 냉큼 손을 잡았다. 이럴 때는 능청만이 살 길이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배시시 웃는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사실은 정말로 아랑곳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조금만 예쁜 아이이기를, 이렇게 엉망으로 얻어터진 몰골이 아니라 반듯하고 깨끗한 얼굴이기를, 안 그래도 넝마주이 꼴인데 그나마 홍수에 떠밀리느라 누더기가 된 차림새가 아니기를, 결정적으로 비록 내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남자답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직은 어떻게든 시치미를 떼야만 했다. 본능이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더욱더 배시시 웃었다.

기가 막히는지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손을 맞잡았다.

“내 이름은 정은별이에요.”

대답은 없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는 것에서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도 내 이름이 있는 것이다.

“영어로도 쓸 수 있어요. Jung, E, u, n.”

분명 그의 몸에 새겨진 내 이름은 영문일 것이다. 내가 가진 그의 이름도 영문이고, 뭣보다 그가 한국인일 리가 없으니까. 처음 짐작했던 대로 프랑스인일까?

그런데 이제 그는 진짜 울상을 하고 있었다.

“B, y, e, o, l이에요. 철자는 영어 선생님이 알려주신 건데 좀 복잡하죠?”

벌집 같은 내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지는 것을 그는 황망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설탕을 살짝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로 설탕 가루가 흩어질 것만 같았다. 울상인데도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아니 참, 사람이 아니었지. 요정이었지.

나는 주제도 모르고 방긋거렸다.

우리 양쪽으로 파 뿌리 같은 물줄기가 짧게 용솟음치며 갈라졌다. 우리 시선의 끝에는 커다란 보름달에 자석처럼 들러붙어 있는 루나커피 1호점이 있었다. 빗줄기가 그것을 비껴서 쏟아졌다. 루나커피는 휘황한 달빛 아래 둥실 떠 있었다.

저기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정녕 무사히 저기에 닿을 수 있을까? 내일 아침 나는 저곳에서 눈을 뜰 수 있을까? 모레 아침은? 글피는? 이 모든 게 정말로 꿈이 아닐까?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먹구름을 배경으로 그의 모습이 달처럼 빛났다. 그는 하늘이 내게 준 단 하나의 운명이었다. 나는 절대로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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