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플럼버의 달에는 인어가 산다네
달의 바다에 풍덩 빠져 호호 웃는 그녀
식탐이 많아서 물고기가 남아나질 않는다네
그녀가 낳은 아이들은 무지갯빛 비늘을 가졌다네
반짝이는 것에는 죄가 없으니
물고기는 그만 잊고 그녀를 칭송하자
- ‘인어의 바다’, 플럼버의 노스 독 오렌지 디스트릭트의 민요.
루나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노래는 정말 이상했다. 그런데도 멜로디가 묘하게 머리에 남아서 자꾸 흥얼거리다 보니 노랫말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물고기는 그만 잊고 그녀를 칭송하자♬♫”
아침 내내 흥얼거리고 있자니 루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 노래가 마음에 들어?”
“중독성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점에서?”
“음… 자꾸 흥얼거리다 보니까 탐욕스러운 건 인어 쪽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인어는 그냥 물고기를 잡아먹게끔 태어난 거잖아요. 식탐이 많다는 기준도 맞는 건지 잘 모르겠고. 그런데 인어가 식탐이 많다고 지적하는 건 노래를 지어낸 사람이잖아요? 무지개 물고기를 낳은 인어니까 칭송하자는 것도 그 사람이고요. 진짜 악인은 노랫말에는 나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 생각을 조종하려는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와!”
루나는 정말로 감동 받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짝짝 쳤다. 나는 아주 우쭐해져서 흐뭇하게 웃었다.
“은별이 대단하구나! 정말 똑똑해.”
“히히. 제가 그간 제대로 못 해서 그렇지 공부는 잘하는 편이에요.”
“이제 못하게 하는 사람 없으니까 네 맘껏 실-컷 공부하려무나!”
땡!
이건 오븐의 타이머 소리였다.
지금은 새벽 5시 45분, 우리는 2층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방 일은 생각보다 내게 잘 맞았다. 식기세척기가 있지만 초벌 설거지를 하는 정도는 도울 수 있었고, 버터를 녹이거나 블렌더나 거품기를 사용하는 것도 곧잘 하게 되었다.
오늘 루나는 여름 한정 메뉴로 오렌지 타르트를 팔기로 했다. 이름만으로도 맛있을 것 같은 빵이었다.
“꺼낼까요?”
“뜨거우니까 장갑 끼고, 조심해.”
“네!”
성가셔하지도 않고 심부름도 곧잘 시켜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주방에 있는 오븐은 열두 종류의 빵을 한 번에 구울 수 있었다. 칸마다 온도 설정을 따로 할 수 있는데, 루나가 직접 개조한 거란다.
식빵, 롤빵, 바게트, 파니니용 빵, 컵케이크, 슈크림, 치즈케이크 등이 구워지는 중이고 지금 꺼낼 빵은 비장의 신메뉴 오렌지 타르트!
“우와!”
찻잔 접시만 한 타르트가 한 칸에 열 개씩, 두 칸에서 구워져 나왔다. 향긋한 오렌지 향기가 끝내준다.
“크림 짜 봐도 돼요?”
“좋아.”
루나는 선선히 짤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걸로 내가 거품을 올린 헤이즐넛 크림을 둥글게 짜서 올리면 완성된다.
“잘하네.”
“재밌어요!”
루나가 솜씨도 좋게 슈가 파우더와 오렌지 필을 뿌렸다. 그리고는 한 개를 접시에 담아 카운터 위에 놓아주었다.
“자, 먹어봐.”
“먹어도 돼요?”
“당연히. 맛이 어떤지 말해 줘.”
그는 잔에 우유를 따라 내 앞에 놔주고 건너편에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타르트를 손으로 집어 후후 불고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향긋하고 상큼한 오렌지 필과 달콤하고 고소한 헤이즐넛 크림이 부드럽고 바삭한 파이 크러스트와 함께 입안에서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정말?”
“네. 자! 형도 한입.”
그는 빙그레 웃고는 내가 내민 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거리는 그의 입술은 정말 앙증맞았다. 그가 갈매기 눈을 해가지고 웃었다. 어유, 사랑스러워.
“맛있네.”
“끝내줘요!”
“야옹-”
마침 필립이 주방으로 들어오기에 나는 그에게 접시를 들어보였다.
“너도 한입, 아니 참. 필립도 한입 드세요.”
“야옹- (됐어, 살쪄.)”
필립이 카운터 위로 풀쩍 올라와 오렌지 타르트가 놓인 쟁반을 킁킁거렸다. 루나가 물었다.
“먹기 싫은 건 아니고요?”
“필립이 뭐래요?”
“응, 살찐다고.”
“에이, 맛있는 건 0칼로리래요.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데 살이 왜 쪄요?”
“내버려 둬. 원래 필립은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내가 다 먹을게요. 얌!”
필립이 거들먹거리듯 꼬리로 바닥을 툭툭 쳤다.
“야옹- (미오는 언제까지 가둬놓을 거냐?)”
“열병이 그렇게 빨리 식는 게 아니잖아요.”
“야옹-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사랑도 못 해본 녀석이.)”
“그게 무슨 사랑이에요? 그런 건 불장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야옹- (불장난이건 뭐건 사랑은 사랑이야. 모든 사랑은 주체가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랑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무슨 권리로 제삼자가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흥! 개똥철학 집어치우세요.”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곰곰이 들었다. 물론 필립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루나의 말만 들어도 어느 정도 대화의 요점은 파악할 수 있었다.
“야옹-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애비를 무시하지 마라.)”
“아빠는 미오가 인생을 함부로 살아도 상관없어요?”
“야옹- (애가 애인 보고 싶어서 상사병 났어. 벌써 반나절이나 굶고 있다고.)”
“고작 반나절 굶는 걸로 안 죽어요.”
필립은 루나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가릉거리더니 주방을 나가버렸다. 그동안 나는 빈 접시와 우유 잔을 씻어놓고 머랭도 만들어놓았다.
“은별이가 일을 아주 잘하는구나.”
여전히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루나에게 인정을 받아서 기분 좋았다.
6시 30분쯤 되자 주방 일은 대충 끝났다.
“뒷정리 제가 할게요.”
“그럼 부탁할까? 형은 이거 가져다 놓고 올게.”
“네!”
루나는 빵이 든 쟁반을 둥실 띄우고는 주방을 나갔다.
나는 부지런히 빈 오븐을 닦고, 도넛 모양의 로봇 청소기를 돌린 다음 식탁을 닦았다. 밥까지 안치고 나니 루나가 돌아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메뉴로는 계란말이랑 아욱 된장국, 숙주나물을 해볼까 봐.”
“그렇게 많이요?”
“반찬 세 가지인데 뭐가 많아.”
“아침엔 바쁘니까 빵 먹어도 돼요.”
“아냐. 성장기에는 특히 아침이 중요하대. 학교에 가게 되면 더 중요할 거야.”
나는 뭘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어쩐지 루나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단순히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일까? 어쨌든 나는 그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 그건 아주 빨리 습관이 되어서 이내 우리의 일과로 자리 잡았다.
문득 언젠가는 내가 루나에게 아침밥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게 다 그때를 위한 실습처럼 여겨졌다. 루나는 웬만한 일을 아주 빠르게 해내기 때문에 배우려면 눈을 마구 굴려야 했다.
20분 만에 식탁이 차려졌고, 그날도 우리는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그는 내가 잘 먹는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어떨 때는 턱을 괴고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게 좀 너무 보호자 같아서 약간 떨떠름했지만, 아무튼 그와 아침마다 겸상하는 건 매일의 축복 중 하나였다.
저녁에는 고양이들도 함께하거나 심심찮게 로저와 로터리클럽 회원들이 찾아오기도 해서 루나와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아침이 유일했다.
“너무 맛있어요.”
“뭐든 잘 먹어서 예뻐.”
“루나가 워낙 잘해서 그래요. 요리 천재.”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루나는 또 특유의 갈매기 눈을 하고 웃었다. 그 얼굴은 정말 깨물어주고 싶게 예뻤다. 루나의 모든 것이 좋고 루나의 모든 얼굴이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좋은 얼굴 중 하나였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설거지를 했고 루나는 반죽을 시작했다.
“어? 빵 다 구운 거 아니었어요?”
“아, 이건 엑스트라. 오늘 토요일이라.”
“엑스트라?”
“매주 한 번 이렇게 따로 구워가지고 밤손님에게 주고 있어.”
“밤손님이요?”
밤손님이란, 루나커피의 영업이 끝난 후 빵을 가지러 오는 손님 아닌 손님을 말한다.
이야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나커피의 영업이 끝나고 정리가 한창일 때였다. 무심코 밖을 본 루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령 같은 그림자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건 유령이 아니라 아기를 업고 있는 엄마였다.
한눈에 아기엄마가 굶주려있다는 걸 알고 그녀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그는 아기엄마가 기분 상하지 않게, 남은 빵이 많아서 그러는데 맛을 보겠느냐고 물었다. 아기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루나커피에는 빵이 남을 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루나는 주방으로 들어와 초능력을 사용해 5분 만에 다섯 종류의 빵을 구워 음료수와 함께 내왔다. 아기엄마는 말없이 빵을 먹었고, 루나는 정리를 계속했다.
아기엄마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나 루나는 남은 빵을 봉지에 넣어 건네고 그녀가 낸 지폐도 돌려주었다. 아기엄마는 덕분에 아이 젖을 줄 수 있겠다고 말하고는 한사코 돈을 돌려주었다.
루나는 손에 들린 지폐를 보았다. 모두 3천 원이었다. 여기서 더 거절하면 아기엄마의 기분을 정말로 상하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절하는 대신 그는 다음 날 밤에도 여분의 빵을 구워놓고 기다렸다.
“그래서, 다음 날에도 왔어요?”
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초조하게 물었다.
“아니.”
“왜 안 왔을까요?”
“나도 무척 궁금했지. 그래서 좌표를 보려고 했는데, 아기엄마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 찾아지질 않더라.”
“어떻게 됐을까요?”
“잘 살 거라 믿어야지.”
“그런데도 빵을 계속 구우신 거예요?”
“음. 언젠가 또 올지 모르니까. 그날이 토요일이었거든. 그래서 매주 토요일에 여분의 빵을 구워서 작은 봉투 여러 개에 나눠 담고, ‘시장하시면 드세요’라는 팻말과 함께 가게 문고리에 걸어두는 거야.”
“그 아기엄마가 꼭 가져가야 하는데.”
“꼭 그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든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어.”
“그래서, 배고픈 사람이 가져갔어요?”
그 말에 루나가 환하게 웃었다.
“응. 폐지 줍는 할머니, 편의점 알바생, 고시원 학생, 새벽같이 일 나가는 행인, 다양한 사람들이 골고루들 가져갔지.”
“어떻게 알아요?”
“이런 덴 필립이 전문이야. 뭐든 잘 보고 잘 듣거든.”
“그럼 그때 이후로 매주 이렇게 토요일마다 빵을 따로 굽는 거예요?”
“어쩌다 시작한 일이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멈추기가 힘들더라.”
나는 그게 루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어쩜 이런 사람일까. 아니, 천사일까?
당연히 루나는 천사다. 첫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나는 결코 천사가 아니고 천사가 될 소지도 없는데 내 연인은 천사였다.
나는 루나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지만 그 누군들 루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나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그러기 싫어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도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기분이 너무 벅차서 눈물이 핑 돌았다.
루나가 반죽을 오븐에 넣고는 장갑을 벗었다.
“이제 장사하러 가야겠다.”
그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별이 왜 울어?”
나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는 루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는 비비적거렸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너무 좋아서요.”
“응?”
“형이 너무 좋아요.”
그가 훗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나도 은별이가 좋아.”
“형 말이라면 뭐든 잘 들을게요.”
“내 말 잘 들을 게 뭐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그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아! 하나 해줄 게 있다.”
“뭐든 시키세요.”
“미오 말이야. 감시 좀 해줘.”
“미오…요?”
“응. 아무래도 필립이 호시탐탐 풀어주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아… 알았어요.”
“그 녀석 아주 그냥 발랑 까져서 큰일이야. 이럴 때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놔야 하거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그….”
“그래. 그럼 부탁한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주방을 나갔다. 루나가 거실로 나가자 새장 안에서 미오가 구슬프게 울어댔다. 루나의 험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