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22화 (22/103)

<22화>

“정은별, 너….”

생각해보면 저는 그때 좀 돌았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은별이 덩치의 아래에 깔린 채로 저를 돌아봤어요. 한쪽 눈이 벌써 부어올랐어요. 진짜 짜증 나!

제가 혼낼까 봐 그러는지 은별이 변명을 늘어놓았어요.

“사정이 있었어요! 이 자식이 루나 사진을…!”

“너 괜찮아?”

“네…?”

괜찮을 리가 없죠! 눈이 저렇게 찌그러졌는데.

저도 모르게 은별이 위의 덩치를 확 밀어버렸어요. 그것도 온 힘을 실어 힘껏! 나쁜 녀석! 굳은 채로 넘어진 녀석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렀어요.

타임을 걸어놓고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사실 일종의 반칙이에요. 게다가 상대는 어린아이이니 방금 제가 한 짓은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짓이지요.

하지만 말했듯이 그 순간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솔직히 그냥 미는 것만으로는 화난 마음이 반의반도 풀리지 않았답니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눈탱이도 밤탱이로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은별이 얼떨떨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종류의 분노는 처음 느끼는 거라서 저도 얼떨떨했답니다. 아이한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영 글러 버렸어요.

가만 보면 은별이한테는 어른답지 못한 모습을 자꾸 들키게 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번 생은 좋은 어른이 되는 건 포기해야 할까 봐요.

“겨우 아물었는데 또 부었잖아!”

“괜찮아요. 별로 아프진 않아요.”

“이렇게 부어터졌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잖아. 아픈데 못 느끼는 거야.”

“진짜 괜찮은데.”

“넌 뭐가 그렇게 맨날 괜찮아? 이런 건 괜찮으면 안 돼.”

“알겠어요.”

“이 녀석이 잘못한 거야?”

“네.”

“좋아! 선생님이랑 상담해서 법대로 할 거야.”

“왜 싸웠는지 안 물어봐요?”

“쟤가 잘못했다며?”

“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땡!

이건 명백히 오류죠. 싸움은 대부분 쌍방의 과실일 때가 많고 그러니 쌍방의 말을 들어봐야 공정한 판단이 가능한 거잖아요. 내 아이라고 무조건 믿는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죠.

헐, 지금 제가 ‘내 아이’라고 했나요?

나 왜 이래? 저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어요.

“일어나.”

은별이 제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히죽거리며 턱 잡았어요. 제가 팔을 당기자 그 웃음은 금방 찌그러졌어요.

“아야야.”

“안 아프다며?”

“안 아픈데.”

저는 은별이를 번쩍 안아 들었어요.

“앗!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가만히 있어.”

저는 은별이 모르게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의 엉덩이를 뒷발로 한번 툭 차고는 그대로 교실을 나와 버렸어요.

“쟤들 저대로 놔두고 가요?”

“아!”

은별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이 카오스를 그대로 두고 가버릴 뻔했어요.

몇 분 지나면 묶어둔 시간(time knot)은 저절로 풀리기는 하지만, 그 전에 교실 밖 누군가가 이 광경을 발견하면 큰일이지요.

저는 서둘러 시간의 매듭을 풀고는 재빨리 빠져나왔어요. 한바탕 소음이 터졌지만 우리는 이미 루나커피 2층 거실에 도착한 후였지요.

“우와! 우리 지금 순간 이동한 거예요?”

저는 은별이의 말에 일상적인 대꾸를 해줄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소파에 아이를 내려놓았어요. 내 화난 얼굴을 보자 은별이 우물쭈물 시선을 피했어요.

“죄송해요.”

“왜 싸운 거야?”

“그게, 녀석이 루….”

“아냐! 말하지 마.”

“네…?”

저는 잠시 심호흡을 했어요. 만약 싸운 이유가 별것 아니면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았거든요.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자 은별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어요.

“녀석이 루나 사진을 도촬해서 멋대로 애들한테 전송하고, 돌려보고….”

“뭐라고…?”

제 반문에 은별이 언제 얌전을 뺐냐는 듯 흥분하기 시작했어요.

“최지환 그 새끼가 감히 루나 사진을 몰래 찍어서 막 돌렸다니까요! 그거 범죄예요. 그죠?”

“내 사진 말이야?”

“네!”

“내 사진은 왜?”

“우리 학교에서 루나 엄청 유명하던데, 몰라요?”

“몰라.”

“어유, 그것도 몰라요?”

“아무튼, 그래서 그것 때문에 주먹다짐까지 했다고?”

“당연하죠! 기분 나쁘게 왜 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어요?”

“그러게. 그건 명백히 초상권침해인데.”

“그죠? 초상권!”

“음…. 그런데 상대는 어린아이잖아? 이상한 사진도 아닐 거고, 특별히 악의가 있었을 거라고는….”

“어우, 다분히 악의적이었다구요.”

저는 조막만 한 애들이 악의가 있어봤자 뭐가 있으려나 잠깐 생각해보았어요. 하지만 아이들 눈에는 그저 제가 이방인처럼 생겨서 신기한 것뿐이겠죠.

가게 손님 중에도 그런 질문을 해 오시는 분들이 간혹 있거든요. 왜 서양인이 여기에 와서 커피숍을 하느냐고요. 그리고 한국말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고요.

처음에는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플럼버에는 ‘인종’이라는 말 자체가 없거든요.

참고로, 플럼버에는 정말 다양한 종족이 어우러져 살아요. 플럼버인들은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지 않아요. 사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분류하죠. 플럼버의 에일로, 라즈베리 D(District) 거주자, 이런 식으로요.

또한 플럼버인들은 지적 능력이 지구인보다 훨씬 뛰어나서 언어를 비롯한 모든 기호학에 능하답니다. 저도 뇌 과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머릿속에 번역 장치가 내장되어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때문에 우주의 어느 은하계에 떨어져도 언어장벽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되어요.

하지만 지구인들은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인종과 언어에 대한 손님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동안 의아했답니다.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결국 저는 꼬마들의 악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어요. 제 사진을 가지고 아이들이 저지를 악행이라니,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거든요.

“어떤 악의를 말하는 거야?”

“루나가 너무 예쁘니까!”

“응…?”

“다른 새끼들 눈에도 루나가 너무 예뻐서 그렇단 말이에요!”

헐…. 이건 또 뭔 소린가요?

낯간지러운 건 둘째치고 적잖이 난감했어요. 말문이 막혀서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은별이가 점점 흥분하고 있었어요.

“우리 학교 애들이 몽땅 다 루나 팬이란 말이에요! 자식들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아이가 나름 박력을 떨고 있어서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꾸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남자 새끼고 여자 새끼고 몽땅 다 루나 사진을 핸드폰에 넣고 있었단 말이에요! 나도 아직 루나 사진을 못 가졌는데!”

“아…!”

그 말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어요.

“네 핸드폰 사 왔는데.”

흥분하던 은별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물론 멀쩡한 한쪽 눈만요.

“핸드폰?”

“응. 필요할 것 같아서.”

“정말 나한테 사주는 거예요?”

“볼래?”

“네!”

은별이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어요.

우리는 일어나서 은별이 방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은별이 벌써 저만치 달려가 버렸네요. 번개돌이가 따로 없어요. 아이가 많이 다친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에요.

“우와!”

뒤따라 방에 들어가 보니 은별이는 책상 앞에 서 있었어요. 책상이 문을 등지고 놓여 있는 탓에 아이의 뒷모습만 보이네요.

움직임이 없어서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걱정이 되었어요. 같이 가서 고를 걸 그랬나…?

저는 조금 쫄아서 살그머니 다가가 몸을 굽혔어요. 아이 눈치를 살피려고 말이죠.

“엇…!”

아이가 저를 와락 끌어안았어요.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아이가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은별아, 울어?”

“아이어어흐응흐으어어흐어허엉-.”

“응…?”

“나 태어나서 이런 선물 처음 받아 봐요.”

“선물이라기보다 필수품이니까.”

“핸드폰만으로도 감동인데 태블릿이랑 노트북까지, 생각도 못 해봤어요.”

“마음에 들어?”

“당연하죠.”

“공부 열심히 해.”

“네!”

뭐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에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걸 듣고 나니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기분 나쁘게 왜 자꾸 학부모 같은 마음이 되는 걸까요.

은별이 고개를 들어 저를 봤어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담긴 눈물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지네요.

“하나 더 있는데.”

“뭔데요?”

저는 창문을 가리켰어요. 아이가 잽싸게 뛰어가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어요.

“저 자전거요?”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아이가 테라스로 통하는 외벽 계단을 향해 사라졌어요. 저도 서둘러 뒤를 쫓았죠. 그런데 순간이동을 한 걸까요?

“완전 빨라.”

아닌 게 아니라 은별이는 초능력자인가 싶게 벌써 마당에 내려가 있었어요. 제가 내려갔을 때는 이미 자전거에 올라타고 있었죠. 앞에 달린 바구니에는 미오와 나나가 여전히 들어앉아 야옹거리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두 녀석은 거기를 본거지로 삼은 모양이에요.

은별이 자전거에 올라타 손을 흔들었어요.

“루나! 진짜 근사해요!”

“자전거 탈 줄 알아?”

“아뇨.”

“형이 가르쳐줄게.”

저는 아이에게 페달 밟는 법과 브레이크 잡는 방법을 알려준 후 뒤를 잡아주었어요.

“자, 천천히 페달 밟으면서 중심을 잡아 봐.”

“어어….”

우리는 화단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어요.

“와…. 나 달린다! 달리고 있는 거죠?”

“그래.”

“놓으면 안 돼요, 루나!”

“알았어.”

“놓지 마요!”

“알았다니까.”

“달린다! 달린다! 놓지 마요!”

“어유, 알았다고.”

아시겠지만 저는 한참 전에 손을 놓았어요. 아이는 신나게 화단을 돌고 있네요. 제가 달맞이꽃 화단 앞에 서 있는 걸 보면서도 은별이는 같은 말을 외쳐댔어요.

“놓으면 안 돼요! 신난다! 놓지 마요!”

“야옹-.”

뭐든 빨리 배우는 아이예요.

조그만 오솔길에 아이의 웃음소리와 고양이들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키 낮은 나무의 무성한 이파리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어요. 막 맺히기 시작한 올리브와 살구 열매가 방울처럼 흔들거려요. 오후의 햇살이 하늘색 자전거에 부딪혀 반짝거려요. 무엇보다 해맑은 아이의 얼굴이 눈부시네요. 한쪽 눈이 찌그러졌는데도 천사처럼 예뻐요.

저런 걸, 축복이라고 하는군요. 아이는 존재 자체가 축복이네요.

은별이는 백 번도 넘게 정원을 돌았는데 그걸 지켜보는 저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저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에 아이의 모습을 담아봤어요. 은별이 웃고 있는 오후는 너무나 눈이 부셔요. 오래도록 저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저는 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평화로움은 좀 더 특별했어요. 뭔가 반짝거리기까지 하는 것 같았어요.

불청객 필립이 소리를 빽 지르기 전까지는요.

“야옹-! (가게가 폭발 일보 직전인데 둘이 한가하게 깨를 볶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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