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24화 (24/103)

<24화>

루나커피 주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저는 한동안 일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애들이 말이야, 애들이.”

“야옹, 왜 그래?”

“아직 애들이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사악할 수가 있느냐 말이죠!”

“너도 이제 외계인처럼 굴지 말고 지구인인 척 생각하면서 살아.”

“당장 이 거지 같은 행성에서 떠나고 싶어!”

“야옹- 동지들이 왔다.”

출근 시간이 끝나고 루나커피가 가장 한가한 시간 오전 10시, 플럼버 클럽 회원들이 왔어요. 로저와 나 이외에 모두 다섯 명인데 오늘은 네 분이 오셨네요. 회원들은 각자 나이대도 거주지도 다양하답니다.

오늘은 희상이 오전에 공강이라며 아침부터 와줬는데 잠시 후 세윤이도 왔어요. 실기시험이 있는 날인데 일찍 끝나서 시간이 남았다고 하네요. 마침맞게 잘 됐어요.

“그런데 저분들은 사장님 친척들인가요? 아니면 친구?”

세윤이 호기심을 보이며 창가에서 떠들고 있는 회원들을 가리켰어요.

“고향 친구들이야. 그럼 난 손님들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 뒷마당에 있을 거니까 일 있으면 전화해.”

“넵!”

“네에!”

로저가 알아서 회원들을 뒷마당으로 안내했어요. 마실 것을 준비하려는데 로저가 도우려고 주방에 와주었어요. 저는 궁금해서 물었어요. 이렇게 회원들이 한 번에 다 모이는 일은 많지 않았거든요.

“로저.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다음 달에 월식이 있어서 의논할 겸 소집했어.”

“아….”

로저와 저는 음료와 케이크를 나눠 들고 뒷마당으로 나왔어요.

“안녕하세요.”

“안녕, 루나.”

“안녕.”

분주하게 인사말이 오간 후 로저가 물었어요.

“오시는 길에 별일은 없었나요?”

우리는 지구상의 어디든 좌표를 통해 드나들 수는 있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은 모두 밀입국 및 불법체류인 셈이라 주의를 요한답니다.

“걱정 마세요.”

“그걸 눈치챌 정도면 지구인이 화성도 못 가고 쩔쩔매지는 않았겠지.”

“맞아요.”

“에릭과 조르주가 아직 안 왔네요.”

에릭 블레어는 로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으로, 런던에 살고 있어요. 조르주는 940세로 갈색 머리에 키가 큰 중년 남성이에요. 현재 프랑스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어요.

“조르주는 몸이 좋지 않아서 못 온다고, 나중에 통화하기로 했어. 아마 에릭은 오는 중일 거야.”

좌표로 움직일 때는 정확한 지점을 지정하기가 힘들어서 대략 근처에 도킹이 되어요. 에릭은 오늘 조금 먼 곳에 도킹이 된 모양이에요.

로저가 말했어요.

“에릭에게는 나중에 내가 전해주기로 하고, 회의 시작합니다. 다음 달 27일에 월식이 있습니다. 각자 좌표를 맞춰도 좋고 루나커피로 오셔도 됩니다. 혹시 도킹하지 않으실 분 없죠?”

저는 좀 당혹스러웠어요. 제 무릎 위에서 꼬물거리던 필립이 손, 아니 앞발을 들었어요.

“야옹, 우린 좀 생각해봐야 할 듯.”

로저가 미간을 잔뜩 모으며 필립을 보았어요.

“무슨 말이야?”

“우리 집에 업둥이가 들어왔잖아.”

“설마 또 그 아이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이야?”

“애가 너무 어려.”

“그럼 이번에도 루나커피에 모이면 안 되겠네요.”

엘리아 폭스의 말이었어요.

엘리아는 옆에 앉은 아치볼트 셀던과 연인 사이에요. 두 사람은 플럼버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인데, 지구에 표류하는 바람에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아치볼트는 540세, 갈색 머리의 훈남이고 엘리아는 490세의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고요. 두 사람 다 지구인으로 치면 20대 중반 정도예요.

엘리아는 조그만 잡지사를 운영하고, 아치볼트는 뚜렷한 직업은 없지만 주식 투자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어요. 그 재산은 플럼버로 가게 되면 다 날리는 거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아요. 플럼버에서도 부자였으니까요.

“우리도 대충 알아. 그 꼬마가 루나의 배필이라며.”

프레데릭 워튼의 말이었어요.

프레데릭은 1,520세의 남성으로 직업은 여행 작가예요. 그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데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어요. 처음에 회원들은 그가 저지른 행위에 모두 반대했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도록 할게요.

그 역시 주식이나 부동산 등의 투자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우리들은 지구인들보다 수명이 훨씬 길기 때문에 학습효과라는 것도 그만큼 많은 셈이거든요. 게다가 지적 능력이며 시신경, 청력, 감각 등이 발달해서 뭐든 빨리 배우고요. 그러니 돈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는 거지요. 셀던이나 워튼 씨 정도는 아니지만 저 역시 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상당하답니다.

그나저나 제 배필이라니, 대체 누가 소문을 내고 다닌 거죠?

“워튼 씨! 누가 그런 말을 해요?”

“필립이.”

“로저가.”

“필립이.”

“로저가.”

네 사람이 엇갈린 대답을 하고 있네요.

어쨌든 로저가 네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어요. 이제 회원들 모두 알아버렸지만요.

저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필립과 로저가 딴청을 피웠어요. 로저가 제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어요.

“프레데릭에게 잘못된 네임이라는 말을 하다가….”

“로저, 입 다물어.”

“은근 입이 가벼우신 것 같아요.”

“엘리아. 섭섭하군.”

“그래, 엘리아. 로저는 워튼 씨의 네임에 대해 말하다가 무심코 한 말이니까.”

“아치볼트. 우리는 네임이 없어도 사랑에 빠졌잖아. 그러니 네임이 있어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엘리아. 내 말이 그 말이잖아. 워튼 씨의 네임은 1300년 전에 나타난 거니까 이제 유효기간도 지난 셈이야.”

“젠장. 로저! 닥치라는 말 못 들었어?”

“죄송합니다, 워튼 씨.”

“내 이야기를 소설에 써먹은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그, 그저 영감을 얻었을 뿐입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자, 잠깐만요, 여러분. 전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어요. 워튼 씨의 네임이라니요?”

“몰라도 돼.”

“워튼 씨. 이제 다 아는데요, 뭘. 루나만 모르는 건 좀 그렇잖아요.”

“야옹- 엘리아. 루나한테도 분명 말했어. 근데 요즘 얘가 꼬마 신랑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빠! 조용히 하세욧!”

로저가 제 눈치를 보며 워튼씨에게 은근하게 물었어요.

“워튼 씨. 이왕 입 싼 놈으로 낙인찍혔는데 제가 루나한테 설명해줘도 될까요?”

“빌어먹을 놈.”

“루나. 워튼 씨는 플럼버에 살 때 배꼽 근처에 네임이 나타났대. 그게 200살 좀 넘어서라니까 굉장히 빨리 나타난 거지.”

로저가 해준 이야기는 대충 이랬어요.

프레데릭 워튼 씨는 소년 시절에 네임을 갖게 되었고 그 이름의 주인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대요.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그사이에 다른 연인이 생긴 거예요.

워튼 씨는 결혼해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낳았어요. 농산물가공업체를 운영하던 워튼씨는 출장이 잦았어요. 930살이 되던 해에 여객선을 타고 먼 나라로 가게 되었죠.

그때 풍랑을 만나 배가 크게 흔들렸는데, 마침맞게도 그는 뱃멀미 때문에 갑판에 나와 있다가 바다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지구로 표류된 거예요.

그가 정착한 곳은 캐나다의 밴쿠버였어요. 금방 플럼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어느새 590년이나 지구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후우….”

엘리아가 울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어요.

“590년이라니, 정말 끔찍해요.”

아치볼트가 울적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어요. 로저가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그런데 워튼 씨가 최근에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네임의 주인공을 만나셨어.”

“오!”

저는 진심으로 놀랐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런 이야기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얽히고 얽힌 사랑 이야기요.

역시 좀 유치한가요? 그래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아마 잘 안 되었을 거예요. 제 눈이 나도 모르게 왕방울만 해져가지고 워튼 씨와 워튼 씨의 배꼽 근처를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야옹! 루나 좋아 죽는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래서요? 그다음 이야기를 빨리 해주세요.”

로저는 워튼 씨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상대는 워튼 씨와 비슷한 또래의 할머니신데, 워튼 씨는 그분이 아주 어릴 때 지구에 표류한 플럼버인일 거라고 추측하고 계셔. 왜냐 하면 그분은 고아에 10살까지의 기억이 없는데다가 5개 국어를 하신다나 봐.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제죠?”

“그분도 가정이 있으시단 말씀이지.”

“오!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그걸로 끝이지!”

워튼 씨가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저를 향해 외쳤어요.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봐요. 조금 아쉽네요. 뭔가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았는데. 하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불륜은 불륜이죠.

그때 아치볼트가 뒷문 쪽을 가리켰어요.

“에릭이 왔군.”

에릭은 740세의 남성으로 로저와 나이도 비슷해서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이에요. 연한 금발에 키가 크고 아주 미남이에요. 런던에 살고 미술품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됐어요.

우리들은 위조된 신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딘가 집단에 소속되어 일하기엔 곤란한 부분이 많답니다. 말했듯이 지구인과 혈액형이나 지문도 다르니까요. 혈액형은 입원하기 전에는 검사할 일이 없지만 지문은 만들어야 해요. 이 일은 로저가 도맡아서 해줬어요.

지구인들의 지문 데이터를 해킹해서 여러 개를 섞어 적당한 지문을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피부와 비슷한 필름에 입혀 손가락에 붙이는 거지요. 데이터로 저장해놓고 필요할 때마다 붙이고 다니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모두 범법자인 셈이에요. 신분, 혈액형, 지문, 모두 위조한 거고 그 과정에서 해킹까지 해야만 했으니까요.

만약 이런 일이 들통 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로 힘들어질 거예요. 그러니 향수니 회귀 본능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귀향은 우리에게 생존이 달린 문제랍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생존권 자체가 없으니까요.

“잘들 지냈어요?”

에릭이 활발하게 인사를 하며 정자로 들어왔어요.

“이 시간에 오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가게에 학생들이 있던데.”

“아르바이트생들이에요.”

“키가 나만 하고 머리 짧은 학생 이름이 뭐지?”

“둘 다 키 비슷하고 머리 짧은데요.”

“코가 동글동글하고 잘 웃는 학생.”

“아! 희상이요?”

“희상?”

“네. 김희상. 여기서 일한 지 꽤 됐는데 처음 보셨어요?”

“응. 강아지처럼 서글서글한 게 귀여워.”

로저가 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어요.

“에릭. 지금 불륜 얘길 좀 하고 있었네.”

“흥미진진하군.”

“왜 자꾸 내 네임 이야기를 불륜으로 끌고 가는 거야?”

“아아, 워튼 씨. 그런 뜻은 아니고요.”

“대체 언제쯤 도킹 이야기를 마칠 수 있나요?”

엘리아가 짜증스럽게 외쳤어요. 로저가 코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어요.

“아, 미안합니다. 그럼, 다음 달 27일 밤 11시까지 모이기로 하죠.”

“루나는 안 간다면서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요, 엘리아.”

“야옹. 너는 못 가.”

“필립. 루나에게 강요하지 말게.”

로저가 필립을 나무랐어요.

“루나커피는 거주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도킹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 같아요. 지난번에 두 사람만 도킹이 된 것도 그 장소 자체가 불안정하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엘리아의 말은 일리가 있었어요. 일전에 로저도 비슷한 말을 했었거든요. 거주 이동 허가를 받은 루나커피는 좌표에서 한 덩어리의 객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5차원 공간에서 분열이 생기지 않는다고요.

“엘리아. 그렇다고 루나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에릭.”

에릭과 엘리아가 입씨름을 벌이자 로저가 말리고 나섰어요.

“아무튼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모이는 걸로 하지.”

“좋아요. 로저. 좌표를 알려주세요.”

아치볼트의 청에 로저가 좌표를 열고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그 먼 행로의 정확한 좌표를 여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에요. 가까운 좌표는 누구나 쉽게 열 수 있지만 플럼버와 지구의 좌표는 아주 복잡하답니다. 각종 파장의 간섭도 많아서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는 구간의 좌표를 발굴해야 해요.

로저는 플럼버에서 항공국에 근무했기 때문에 전문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에요.

아무튼 새로운 고민이 생겼어요. 이렇게 빨리 은별이와 떨어지게 되다니, 과연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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