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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커피 2호점-26화 (26/103)

<26화>

열두 살짜리 아이가 혼자 살아가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여기가 플럼버라면 이건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거예요.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고아와 노인을 보살피는 일은 플럼버인에게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지구니까 사정이 많이 다르지요. 일단 지구는 어린아이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답니다.

“야옹. 혼자 살게 두지도 않아.”

“그러니 어쩌죠?”

“다음에 가.”

“아빠는 플럼버가 그립지도 않아요?”

필립은 우아한 포즈로 소파 등받이를 서성이는 중이랍니다. 거드름을 피울 때마다 저렇게 요염하게 걸어 다니죠. 인간일 때도 폼 잡는 것 하나는 선수였는데 지금도 별 다를 바 없네요.

저럴 때는 꼭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속으면 안 돼요. 필립은 생각이란 걸 잘 하지 않거든요.

“야옹. 그립지. 그래도 우리는 다 함께 있잖아.”

플럼버에 가족을 두고 온 다른 회원들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이제 지구도 많은 부분이 암호화되어가고 있어요. 플럼버 정도는 아니더라도 디지털화된 로그가 많아지면 질수록 눈속임은 더 어려워져요.”

“야옹. 그래봤자 미개 행성이야. 대충 은별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엄청난 변화는 없을 거다.”

“은별이가 성인이 되려면 7년이나 있어야 해요.”

“야옹. 우리에게 7년은 별로 긴 시간도 아니잖아.”

저는 좀 짜증이 나서 마시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어요. 필립이 놀라서 미끄러졌어요.

“야옹! 깜짝이야!”

“생각 좀 해보세요. 지구의 고양이는 수명이 길어야 20년이에요. 지금 아빠는 지구의 고양이 나이로 10살 정도….”

“야옹! 아니거든!”

“7년 후에도 외형이 지금 그대로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아니, 아빠는 그렇다 쳐도 인간 외형인 나는요? 지금도 희상이나 세윤이는, 내가 생긴 건 스무 살인데 하는 것만 보면 마흔쯤 돼 보인대요. 이게 바로 지구인과 플럼버인의 시간상 괴리라고요.”

“야옹. 벤자민 버튼이라고 우겨.”

“필립 블랑슈! 제발 진지할 수 없어요? 이건 생존이 달린 문제예요.”

“야옹. 그래서 하는 말이잖아. 은별이한테도 생존이 달린 문제니까.”

이것 역시 말했듯이, 필립은 생각이라는 걸 잘 하지도 않는 주제에 가끔 뼈 있는 말을 툭 던지곤 한답니다.

“야옹. 이렇게 놔두고 가면 살려주고 도로 죽이는 꼴이야. 난 내 아들이 그런 몹쓸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너도 마음이 불편하니까 애먼 나만 달달 볶는 거잖아.”

저는 뭔가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입을 벌렸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이런 걸 말문이 막혔다고 하는 거지요.

저는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어요. 머리가 아팠거든요.

“야옹. 그 얼굴을 그대로 그린 그림이 있던데. 우리 뭉크랑 이름이 똑같은 화가가 그린….”

“됐어요!”

결국 저는 아무런 결론도 짓지 못하고 생각하는 걸 내일로 미루기로 했어요.

필립은 고양이들과 장난을 치기 시작했어요. 필립은 아기고양이들과 놀아줄 때면 주로 싸움을 붙인답니다. 슬슬 시끄러워지고 있으니 침실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났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를 않네요. 심신을 안정시키는 달맞이꽃 향초를 백 개쯤 피웠는데도 말이죠.

파자마를 입고 주방으로 나왔어요. 아이스티를 한잔 만들어 마시려고요. 필립과 아기고양이들은 이제 킥복싱을 하고 있어요. 상사병 걸린 미오만 텐트 안에서 나오지 않네요.

테라스로 나와 시원한 아이스티를 마시니까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아지네요. 레몬 한 조각을 띄웠는데 잘한 것 같아요. 얼음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기분 좋아요.

그나저나 어제보다 훨씬 더운 밤이네요. 장마가 지나고 나니 여름 냄새가 완연해요. 은별이는 자고 있나, 궁금해서 아이 방 쪽을 돌아봤을 때였어요.

“어, 은별아.”

뭘까요? 은별이 테라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굳이 난간 구석에 말이죠.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흘금 올려다보는 눈이 촉촉해 보여요. 혹시….

필립과 하는 얘기를 들은 걸까요?

필립의 말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제 말은 들었을 테니 대충 상황을 알았을지도 몰라요. 이내 눈을 내리까는 게, 아무래도 다 알고 있는 눈치예요. 난감하네요.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솔직히 툭 까놓고 물어볼까 봐요.

그런데 뭘 어떻게 물어보죠?

저는 글라스를 흔들며 어색하게 서성이다가 은별이 방 창 앞에 놓인 벤치를 가리켰어요.

“잠깐 와서 앉을래?”

대답이 없기에 먼저 벤치에 앉아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어요. 그런데 은별이는 온몸을 바짝 웅크리고는 부루퉁한 얼굴을 휘휘 저었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응…?”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좋아요.”

“그게 무슨 말이니?”

“가끔 제가 두더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건 알지?”

“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들어가서 자든지.”

“나한테는 과분한 침대라서요.”

“그건 또 무슨 말이니?”

“그렇게 편안한 침대에 습관 들면 나중에 골치 아파지잖아요. 언제 지하철 바닥에서 자게 될지 모르니까요.”

허… 제 짐작이 맞는다면, 불쌍해 보이려는 전략인 것 같아요.

“뭐 마시는 거예요?”

“응? 이거? 아이스티. 너도 마실 것 좀 줄까?”

“아뇨. 밥도 굶고 살았는데 음료수씩이나 마실 수 있나요. 그냥 시원해보여서요.”

“헐…. 잠깐만 기다려. 뭐 마시고 싶어?”

“됐어요. 저한테 자꾸 그런 거 주지 마세요. 익숙해지면 저만 힘들어요.”

“자, 잠깐만 기다려.”

저는 주방으로 이동해 재빨리 음료수를 만들어왔어요.

“자, 이리 와서 마셔.”

은별이 흘긋 돌아보더니 몸을 돌리고는 더 웅크렸어요.

“뭔데요?”

“탄산수에 청포도랑 파인애플, 망고를 넣고 갈았어.”

“그렇게 비싼 과일들은 12년 동안 구경도 못 했어요.”

이쯤 되면 속셈은 확실히 알겠어요.

“정은별.”

역시나 정색하고 부르니 눈동자를 슬금슬금 굴리는 게 보이네요.

“할 말 있으니까 이리 와.”

그제야 꼬물거리며 일어나더니 제 옆에 앉았어요. 음료수를 마시더니 기분이 좋아진 걸까요, 두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는 나를 흘금 보네요.

“너무 맛있고 시원해요.”

“다행이네.”

“이런 거 입맛 들이면 곤란한데.”

“은별아.”

“네.”

“우리 얘기, 들은 거지?”

역시 대답이 없네요.

“떠나게 되면, 말해주기로 했잖아요.”

“그, 그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는 건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

“나 때문은 아니죠?”

“왜 아니라고 생각해?”

“형한테 내가 그 정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아서.”

이것도 좀 전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략일까요?

분명 눈치가 빠른 아이인데 모를 리가 없어요. 요즘 루나커피의 일상은 정은별이라는 꼬마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음, 형아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넌 지금 루나커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단다.”

“있단다있단다.”

“쉿.”

“…….”

“이렇게 하자.”

“…….”

“이번에는 가지 않을게.”

은별이 저를 향해 고개를 반짝 들었어요. 제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은별이의 한쪽 눈이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거든요!

“아니, 뭐야? 너 얼굴이 왜 이래?”

기겁해서 물었더니 은별이 깜짝 놀라서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아니겠어요? 불쌍해 보이려던 게 아니라 얼굴이 이 모양이라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나 봐요.

“야! 이렇게 좀 해봐.”

“넘어져서 그래요.”

“이게 무슨 넘어져서 생긴 상처야. 붓고 터졌잖아!”

“진짜 넘어졌다니까요!”

“알아서 한다더니 이게 알아서 하는 거야?”

“잘 될 거예요! 오늘은 간 본 거라구요!”

“야야! 어딜 도망쳐! 난 또, 계획이 있다길래 뭔가 했더니 최지환한테 뭇매 맞는 게 네 계획이었어?”

“아니거든요. 나도 솔찬히 때렸거든요!”

“솔찬히 좋아하네! 솔찬히가 무슨 뜻인데?”

“충북 금성시에서는 자주 쓰는 말인데.”

“사투리야?”

“몰라요.”

“그러고 보니까 네 말투 억양이 좀 이상했는데 사투리 때문에 그렇구나.”

“아니거든요! 난 절대 사투리 안 써유!”

“어쭈! 아무튼 이리 와봐. 좀 보게.”

은별이 거실로 뛰어 들어오자 고양이들이 차례대로 야옹거렸어요.

“하던 말이나 마저 해줘요. 그래서, 나 때문에 안 가기로 한 거예요?”

“어유, 얘가 몸에 기름을 발랐나. 잠깐 보자는데 왜 자꾸 도망쳐?”

“보건실에서 치료했고, 집에 와서 씻고 약 발랐어요. 지금 너무 못생겼으니까 붙잡지 마세요.”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못생긴 게 문제야?”

“굉장히 문제죠!”

“야옹! 잘 시간에 왜 이렇게 떠들어? 사랑싸움이냐?”

“필립! 끼어들지 마세요!”

“야옹! 싸가지 없는 눔! 툭하면 애비한테 필립이래!”

“필립! 은별이 잡아요!”

“내가 무슨 수로?”

그 사이 은별인 계단 난간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어요.

“히히히! 재밌어! 루나, 나 잡아봐라!”

“저 녀석이! 거기 안 서?”

“사랑싸움 맞네. 야옹!”

난데없이 추격전이에요. 그냥 놔두면 되는데 애가 자꾸 도망치니까 저도 모르게 휘말리고 말았어요.

우리는 어느새 웃고 떠들면서 루나커피를 오르내렸어요. 아기고양이들까지 신이 나서 잡기 놀이에 합세하는 바람에 소동은 한참 더 이어졌어요.

웃기는 일이에요.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왜 재미있는 거죠?

온통 찌그러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웃으니까 은별이는 정말 별처럼 예뻐요.

오늘따라 플럼버의 달은 더 환하네요. 이번에는 필립 말이 옳았어요. 안 간다고 마음먹으니 편해졌어요. 그게 정답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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