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이란 걸 느껴봤다.
루나커피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빠르게 행복해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완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루나가 떠나버리면 나는 다시 혼자니까. 루나는 플럼버인이라 언젠가는 꼭 떠나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데 안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루나가 나를 위해 그렇게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나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에게 루나가 단 하나뿐인 남자이듯 그에게 나도 단 하나뿐인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예감. 물론 아직은 내가 그에게 그저 귀여운… 아니, 고구마 같은 꼬마일 뿐이겠지만, 지금의 반죽이 30분 후에는 먹음직스러운 빵이 되는 것처럼 그의 감정에도 분명 변화라는 게 생길 거라는 예감.
그걸 나는 확실히 느꼈다.
땡!
“아! 꺼내는 건 내가 할게. 뜨거워.”
우리는 지금 2층 주방에서 아침 빵을 굽고 있었다.
이제 나는 꽤 쓸모 있는 주방보조라고 자신한다. 필요한 도구와 재료를 미리미리 준비해놓고 사용이 끝난 것들은 재빨리 치운다. 내 자랑이지만, 오븐에서 갓 구워진 빵을 맛보는 데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다.
오늘 아침 주력상품은 레몬 크림 브리오슈라는, 이름도 고급진 빵이다. 참고로 크림은 내가 저었다.
“우와! 맛있어요.”
“괜찮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빵이 너무 보드랍고 촉촉하고, 크림이 단단해서 좋아요.”
크림 칭찬도 슬쩍 끼워 넣어서 내 능력도 조금 강조했다. 아무튼 루나의 제빵실력은 전국, 아니 세계 최고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저 얼굴도 세계 최고.
“다행이네. 딴 거 먹고 싶은 거 없어?”
“배불러요. 오늘 아침은 더 못 먹을 것 같아요.”
“그럼 빵을 싸가지고 가. 넉넉히 싸줄 테니 출출하면 친구들이랑 먹어.”
“이 귀한 걸 나눠줄 만큼 친한 친구는 없어요.”
“아직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뭐… 하나 있기는 하지만 아직 친한 친구라고까지는….”
“처음부터 친할 수 있니? 점점 친해지는 거지. 이런 거 나눠 먹으면서 정도 붙이고 그러는 거야.”
“루나는 플럼버에 친구가 많아요?”
“아주 많지는 않아. 난 어릴 때부터 장사를 했거든. 그래서 친구랑 놀 틈이 없었어. 그래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좀 있었지. 가게 손님으로 만난 친구도 꽤 있었고.”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루나가 살던 동네 이름은 뭐예요?”
“플럼버의 에일로라는 나라에 라즈베리D라는 도시가 있거든. 그 도시의 하니 스트리트.”
“우와, 이름도 예쁘다. 그런데 하니 스트리트라고요?”
“그래. 이 거리 이름이랑 비슷하지? 아마 그래서 난데없이 여기에 떨어진 것 같아.”
“오…. 그렇구나.”
그나저나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루나의 얼굴이 추억을 회상하는 표정이 되었다. 자꾸 플럼버를 그리워하면 곤란한데.
이거야 선녀 옷 숨기는 나무꾼도 아니고, 애초에 루나한텐 내가 숨길 날개옷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앗! 뜨거.”
“엇! 조심해!”
괜스레 오븐 팬을 쥐었다 놨는데 그새 식어버려서 별로 뜨겁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순진한 루나는 놀라가지고 내 손을 꽉 잡아 찬물샤워를 시켜주었다.
개수대 앞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흘러들었다. 어김없이 눈부신 얼굴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루나와 눈을 맞추기에 내 키는 너무 작았다.
그 순간 지난밤부터 충만한 행복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헉!”
“응? 왜, 아파?”
“아,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그래. 많이 데이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아프면 연고 발라.”
“네.”
갑자기 굉장히 불안해졌다. 지금 내 키는 루나의 절반까지는 아니지만 가슴에 닿을까 말까 했다. 작년보다 훨씬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 우리 반에서 다섯 번째로 작다. 이러다 영영 키가 안 크는 거 아닐까?
“여긴 다 끝났으니까 너도 들어가서 학교 갈 준비해.”
“네….”
“얼굴색이 갑자기 왜 그래?”
“아니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싸우면 안 돼.”
“걱정 마세요.”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형이 걱정할 일은 절대 안 해요.”
루나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서 가.”
방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안쪽 계단을 내려와 루나커피를 통해 밖으로 나오고 보니, 응…?
고양이들이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필립과 얼룩이 삼종 세트 뭉크, 베리, 나나였다. 내가 너무 시무룩해보여서 그러나?
필립이 이죽거렸다.
“야옹. 아까까지 깨 볶더니 왜 또 입이 쑥 나왔냐?”
나는 별로 말할 기분이 아니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오픈 전이라 가게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걷기 시작했다.
행복이란 크림 비슷한 것인 모양이다. 구름처럼 부풀었는가 하면 금세 푹 꺼져버리고, 다시 폭신해질까 싶다가도 질척하게 녹아버린다. 단순한 실수 하나 때문에도 폭삭 가라앉을 만큼 연약한 크림.
“야옹-”
얼룩이 한 마리가 필립에게 뭔가 묻는 듯했다.
“야옹, 아니, 뭉크. 얘 이름은 은별이야. 고구마가 아니고.”
뭉크와 베리의 말은 못 알아먹겠는데 필립의 말은 잘 들렸다. 언제부터였더라? 어제부터였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계속 안 들리는 척하는 게 어떨까?
오예- 아주 좋은 생각!
재미있을 것 같았다. 몰래 듣고 있으면 내 욕을 하는지 어떤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야옹. 루나 남편감이야.”
헐! 뭐라고? 남편감?
“야옹?”
“야옹!”
“야오옹!”
“야옹. 자식들, 놀라기는.”
뭐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노골적이잖아! 나도 루나도 남자니까 ‘남편’ 같은 단어는 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리니….
굉장히 좋잖아!
“야옹, 지금은 군밤같이 생겼지만 로저 말로는 스무 살 전에 발현할 거라고 하더라. 그럼 좀 쓸 만해질 거야. 원래 알파들은 때깔이 좀 나거든.”
발현? 알파? 이건 또 뭔 소리냐?
“야옹. 내 맘에 드느냐고? 그게 뭔 상관이야? 루나 맘에 들어야지. 아무튼 관상을 봤을 땐 집사로는 괜찮아.”
아니, 집사라뇨. 아버님. 사윗감으로 어떠냐고요. 크크.
스쿨버스가 와서 아쉽게도 재미난 대화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필립, 안녕.”
“야옹, 바보.”
“아가들도 안녕.”
“야옹. 얘들도 아가라고 하면 싫어해. 너랑 똑같이 올챙이라고.”
이야, 이거 대박이다. 필립의 말을 다 알아듣다니, 흥미진진. 그런데 알파가 뭐지? 물어볼 수도 없고.
“아! 검색.”
내게도 검색할 도구들이 있다는 걸 또 잊었다. 버스에 올라타 빈자리에 앉자마자 폭풍검색.
마침 개나리가 알은체를 하며 내 자리로 건너왔다. 어김없이 운전사 아저씨의 질책이 날아왔다.
“운전 중에 움직이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아저씨.”
개나리가 투덜거렸다.
“정은별. 네가 내 옆에 앉으면 운전사 아저씨한테 핀잔 안 먹잖아.”
알파라는 단어에 꽂혀있는 내게 개나리의 투덜거림이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개나리. 너 혹시 알파가 뭔지 알아?”
“알파? 알파알파… 대파 쪽파, 그런 건가?”
“푸우…. 됐다.”
개나리는 도움이 안 되니 다른 사람한테라도 물어봐야겠다. 스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교차로를 건너온 이선호가 다가오기에 나는 반갑게 불렀다.
“이선호!”
“정은별, 네가 웬일이냐? 날 반가워하게.”
“너 알파가 뭔지 알아?”
“알파?”
개나리가 끼어들었다.
“정답! 알배기 배추!”
“음, 그런 거 아니야. 알파는 뭐랄까, 요정족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이선호는 개나리와 달리 알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선호. 너 진짜로 알고 하는 소리야?”
“야, 계나리. 내가 이래봬도 좀 잡학 다식한 타입이야.”
“설마.”
“아무튼 알파는 희귀인종이야.”
희귀인종?
“그게 뭔 소리냐?”
“희귀인종이라고. 일종의 천재란 말이지.”
“그러니까, 원래 그런 게 있다는 말이지?”
“우리나라에선 알려진 예가 없는데, 외국에선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대.”
“왜 우리나라엔 없어?”
“없다기보다 나 알파다, 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알려지지 않은 건지도 모르니까, 실제로는 있을 수도 있어.”
“헤…?”
“응? 왜?”
“아, 아냐.”
이선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여러 가지 부분에 있어서 천재적인 종족이었다. 얼굴이나 체격, 체력, 두뇌, 심지어 정신력까지 천재란다. 그들 대부분은 사춘기부터 성장이 끝날 무렵인 만 19세 사이에 발현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선호는 또 다른 정보를 알려주었다.
“알파도 있지만 오메가도 있어.”
“그건 또 뭐야?”
“알파의 짝이라고 보면 돼. 알파는 오메가랑 천생연분인데, 오메가가 되면 알파에게 완전 끌리게 된다나 봐.”
나는 무슨 말인지 알듯 모를 듯해서 더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이선호에게도 그 이상의 지식은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 하나는 알아냈다. 알파는 능력자다!
오메가 역시 사춘기 시절 발현하게 되는데, 알파가 없으면 살기가 힘들단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메가로 발현하면 머리가 좀 나빠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알파가 등쳐먹고 그러나?
그런 점에서 루나가 오메가가 아닌 것은 다행인 것 같았다. 천생연분도 좋지만 루나가 바보가 되는 건 좀 그랬다. 루나의 매력은 어여쁜 얼굴만큼이나 똑똑한 머리에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열여덟에 알파로 발현한다고 로저가 그랬다는데 정말일까? 로저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런데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 나.”
“응? 아….”
하, 이 귀신. 이선호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개코였다. 그리고 루나커피 김희상만큼이나 빵돌이였다. 좋다. 알파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알려줬으니 귀한 빵을 먹을 자격이 있었다. 나는 가방을 풀어 빵이 든 봉지를 꺼냈다.
“우와! 맛있겠다!”
꽤 많은 양이라서 이선호와 개나리를 비롯해 근처 애들 여럿에게 돌렸더니 인기폭발이었다. 루나의 빵은 특별하니까. 게다가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다 팔려서, 빵 나오는 시간을 딱 맞춰 오지 못하면 가게에서 사 먹기도 힘들었다.
저 돼지도 먹고 싶은가? 최지환이 흘긋 돌아보기에 약 올리듯 한입 크게 빵을 베어 물었다.
“아우! 맛있어.”
약간 치사한 행동이었지만 기분은 좋아졌다. 저 하마 같은 면상! 만약 내가 알파로 발현하면 저 자식부터 콱 밟아주는 건데.
그날은 조용히 지나갔다. 다만 내 머릿속은 종일 부산했다.
아무튼 바람직한 날이었다. 새벽엔 행복하고 아침엔 불안하고 점심 땐 희망에 부풀었으니 괜찮은 편이다.
내 상상 속에서는 알파로 발현한 내가 최지환의 목을 한 손으로 콱 잡아들고 루나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루나는 그저 멋있다며 나한테 넋을 잃고, 나는 그런 루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기, 나 어때?’
‘너무 멋져. 지금 나 심장 터질 것 같아, 은별.’
‘히힛.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딴 상상을 하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것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