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28화 (28/103)

<28화>

“어이, 초등학생.”

“헛?”

놀라는 걸 보니 저를 아는 눈치예요. 아이가 머뭇거리며 다가왔어요.

그곳은 체육관 근처 도토리나무가 우거진 뒤뜰 쪽이었어요.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간간이 드나들고 있어요.

은별이 얼굴이 부어터진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에요. 조금 전 저는 우연히 좌표에서 은별이 농구공에 머리를 맞는 걸 봤어요. 요 녀석이 일부러 조준해 던진 거였어요. 아주 질이 나쁜 녀석이에요.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너 이름이 최지환이지?”

“네.”

“은별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그 말에는 조그만 눈을 요리조리 굴리기만 하고 대답은 없네요.

저는 다정하게, 최선을 다해 다정해보이도록 미소를 지었어요. 하는 짓은 밉지만 어린아이를 미워하면 안 되죠.

“우리 은별이랑 사이가 좋지 않다면서.”

여전히 눈만 굴리고 있네요. 자식이.

“억지로 사이좋은 척하라는 건 아니다만, 은별이가 많이 맞았잖니? 자꾸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은별이의 보호자로서 형도 참고만 있을 수는 없단다. 똑똑한 아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제법 인상을 쓰네요.

제가 신이 아닌 이상 아이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일반적인 추론을 해보자면, 이 아이는 남을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것에 재미가 들렸으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지 않으면 못된 어른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그러니 어른으로서 그냥 두고 보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정은별이 먼저 시비 걸었거든요?”

“은별이가 형 사진이 여기저기 나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그게 범죄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만, 아무튼 상대가 싫다는 일을 일부러 하는 건 나쁜 행동이야.”

“형이 은별이 친형도 아니잖아요.”

“지금 그게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잖니?”

“더럽고 치사해서 사진 다 지웠거든요.”

허! 요놈의 자식 말본새 좀 보세요.

이 아이가 느닷없이 제게 미움이란 걸 가르쳐주네요. 지구에 와서 저도 미움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여러 가지 형태를 띠며 실생활에 깃들어있는지 잘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직접 누군가를 미워해보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아요.

상대가 어린아이이니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어떻게 대처해야 이 아이가 우리 은별이를 괴롭히지 않을까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건 택도 없겠지요?

“우리 은별이랑 잘 지내달라는 의미에서, 너를 루나커피에 초대하면 어떨까?”

반응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거든요.

“오전 8시, 오후 12시, 오후 4시에 빵이 나오는데 제빵사가 나 혼자라서 금방 동이 나거든.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빵을 먹어보고 싶어서 줄 서는 손님들이 꽤 많단다. 지환이를 위해 몇 개 빼놓을게. 학교 끝나고 오면 어때?”

“오늘요?”

“언제든.”

“그럼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도 돼요?”

“물론이지.”

“친구 데려가도 돼요?”

“그럼.”

“많이 데려가도 돼요?”

“그러려무나.”

“커피도 마셔도 돼요?”

“엄마가 커피 마셔도 된대?”

“아뇨. 집에서는 못 마셔요.”

“그럼 비밀로 해줄게.”

“우와! 형 짱이다!”

“좋아. 그럼 너도 약속하는 거야. 우리 은별이 괴롭히지 않기로.”

“내가 안 괴롭혀도 은별이가 날 싫어해요.”

“우리 은별이는 무턱대고 사람 싫어하는 애 아냐. 오해가 있어서 그랬던 거니까, 나도 잘 타이를 테니 너도 노력해주면 좋겠다.”

“알겠어요.”

“은별이한테는 내가 왔었다고 말하지 말고.”

“왜요?”

“은별이는 내가 자기를 과잉보호한다고 생각해.”

“오…. 알겠어요.”

“그래. 그럼 이따 보자.”

아이는 언제 부루퉁했냐는 듯 활발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어요. 애는 애네요.

이게 바로 마태복음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인 거죠. 혹은 플라톤의 책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는 상황인 걸지도요.

아무튼 쉬운 일은 아니네요. 세상에 저와 지환이만 있다고 가정해볼게요. 제가 뭘 했을까요? 지환이 꼴통, 아니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을 거예요.

그동안 제가 악을 몰랐던 것은 내 안에 악이 없어서가 아니었어요. 악을 대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뿐이죠.

그러고 보면 제 마음속에는 온갖 것들이 다 묻혀있는 모양이에요. 선, 악, 도덕, 부도덕, 정의, 배신, 미, 추 등등. 그리고 그것 중 어떤 것이 갑작스레 툭 튀어나와서는 저를 당황하게 만드는 거예요. 느닷없이 제 인생에 은별이가 나타난 것처럼 말이죠.

그나저나 한가한 시간이기는 해도 대책 없이 여유를 부리고 있었네요. 서둘러 교차로를 건너는데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어요.

“에릭!”

런던에 사는 에릭 블레어 씨예요. 지난번 플럼버 클럽 모임 때 지각했던 분요. 오늘 에릭은 무척 멋지게 차려입었네요.

“오, 루나.”

“에릭, 그 프록코트 멋진데요.”

“그래? 좀 고상해보이나?”

“그게 목적이라면, 네. 성공하셨어요.”

“아주 기쁘군.”

“그런데 웬일이세요.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쪽으로 좌표 이동하신 거예요?”

“아….”

에릭이 얼굴을 조금 붉히는 것 같았어요. 뭘까요?

“이쪽으로 이민 오려면 절차가 복잡하겠지?”

“흐음. 각자 정착하기까지 힘들었잖아요. 그 과정을 또 반복하려면 힘 빠지지 않을까요?”

“옳은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민은 왜요?”

“오늘도 아르바이트생이 있나?”

“가게에요? 어떤 알바생이요?”

“희상.”

“아, 네. 지금은 있지만 이제 곧 일 끝나겠네요. 만나려면 어서 가요.”

“그래.”

부지런히 걷다 보니 뭔가 의아해졌어요.

“그런데 희상이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대답을 들을 새 없이 가게에 도착했어요. 문을 열자마자 마침 희상이 활발하게 인사를 하네요.

“어서 오세요, 루나커피입니다!”

“가게가 다 환해지는군!”

에릭이 감탄하기에 저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렇죠? 희상이는 저 웃는 얼굴이 예술이에요.”

“맞아, 예술!”

제일 한가한 시간이라 희상이는 밀린 설거지를 하고 있었어요. 저도 서둘러 카운터로 들어가 앞치마를 걸쳤어요.

“미안, 희상 씨. 이제 가도 돼.”

“이거 다 하고요.”

“강의 없어?”

“한 시간이나 남았어요.”

“캠퍼스 넓잖아. 강의실까지 가는 시간 꽤 걸리지 않아?”

“그래도 넉넉해요. 그런데 저 손님은….”

“아, 지난번에 봤다고 하시던데.”

에릭이 카운터 앞에 앉았어요.

“에릭, 시원한 음료 좀 드릴까요?”

“좋지.”

희상이 조금 수줍은 얼굴로 에릭에게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하세요.”

“안녕, 희상 군. 지금 내가 뭘 마시면 좋을까?”

“우리 여름 메뉴로 오렌지 크림 아이스티를 팔고 있는데 반응이 엄청 좋아요.”

“그럼 그걸로.”

응…? 그런데, 왜 때문에 분위기가 묘하게 느껴질까요?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제가 할게요, 사장님.”

“응? 안 가도 돼?”

“이것만 해드리고 가죠, 뭐.”

“그래? 그럼 부탁해. 난 잠깐 주방에.”

“네!”

“좀 이따 보세, 루나.”

뭐죠? 제가 주방에 가는 걸 두 사람 모두 굉장히 반가워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아리송해서 주방에 들어와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필립이 사악한 얼굴로 키들거렸어요.

“야옹. 둘이 정분났다.”

“정분…. 그게 뭔데요?”

“야옹. 눈 맞았다고.”

“네에?”

“놀라긴. 청춘 남남이 눈도 맞고 그러는 거지, 야옹.”

“아니, 에릭은 엄밀히 말해 청춘은 아니죠. 7백 살이 넘었잖아요.”

“정확히 742.7세지. 아직 한창때지 뭘 그래.”

“희상인 겨우 스무 살이에요.”

“야옹, 가만 보면 나이 엄청 따져. 그게 네 존재의 탐구적 구성요소의 전부냐?”

“허튼 소리 마시구요. 아무튼 난 이 커플 반대예요.”

“허! 별꼴을 다 보겠네. 가만 보면 나이만 엄청 따지는 게 아니라 독선적이기까지 하단 말이야. 네 할머니가 이런 너를 모르고 떠나셨지, 야옹.”

저는 한숨을 푹 내쉬었어요.

“은별이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희상이는 얘기가 다르잖아요. 우리 생활을 아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면 좋을 게 뭐예요?”

“그렇다고 너나 나에게 두 사람을 반대할 권리는 없다, 야옹.”

“에릭도 참, 7백 살이나 먹었으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자제를 해야죠. 막말로 희상이랑 둘이 사귄다고 쳐요. 헤어지지 않고 쭉 가란 법 있어요? 만약 희상이가 우리 일에 대해 알게 되면, 그리고 둘이 헤어지면,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겠어요?”

“야옹, 이기적인 놈. 사랑이란 게 그렇게 재고 따지고 맘대로 되는 게 아냐.”

“왜 안 돼요? 절제력과 이성을 갖춘 성인인데!”

“너도 사랑을 해보면 알게 된다.”

“그럼 사랑이란 건 악의 근원이네요!”

“사랑이란 선과 악 그 너머에 있는 관념이야. 굳이 말하자면 본능의 관념이지.”

“그러니까 짐승의 관념이라는 뜻인 거죠?”

“야옹-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필립이 사라지고 나서 저는 냉수를 한잔 벌컥거리고는 괜스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였어요. 이것 역시 새로 생긴 감정이에요. 괜스레 치밀어 오르는 화라니, 420년 동안 그런 게 세상에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제 마음속은 늘 호수처럼 잔잔했거든요.

이건 명백히 좋지 않은 신호예요. 혹시 지구에서 지낼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른 건 아닐까요?

“후우….”

슬슬 바빠질 시간이니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카운터로 나갔는데….

허? 아주 그냥 꿀이 뚝뚝 떨어지네요.

“미술품 투자를 전문으로 하신다고요? 그것도 런던에서?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세요?”

“한국말 말고도 8개 국어를 그만큼 잘할 수 있네.”

“우와! 혹시 우리 사장님이랑 친척이세요?”

“왜?”

“그냥, 사장님도 영국분인가 해서요”

“아니, 루나는 한국인이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루나는 인기가 아주 많지.”

허! 저건 또 뭔 소린가요?

“그래서 눈이 굉장히 높아.”

“아, 네.”

도무지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네요. 제 인기가 많다는 말은 왜 나오는 거죠? 그리고 제가 무슨 인기가 많다는 거예요? 아, 피곤해.

“혹시 그림 갖고 싶어?”

“그림이요?”

“응. 큰 건 가져오기 힘들지만 요만한 건 가져올 수 있어.”

“정말요? 그런데 전 그림 잘 몰라서.”

“돈 될 만한 걸로 하나 가져다줄게.”

“괜찮아요. 그런 걸 어떻게 받아요.”

“아주 올바른 청년이로군. 마음에 쏙 들게.”

“네? 하하하. 너무 재미있으세요.”

어우, 닭살도 돋고, 왜 이렇게 생활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죠? 뭔가 급속하게 평화가 깨지는 기분이에요.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은별이 씩씩거리며 들어왔어요. 그 뒤로 엄청난 개구쟁이 부대가 뒤따라 들어왔어요.

헐.

“어서 오세….”

희상도 놀랐는지 새까만 꼬마 손님들을 향해 눈만 뎅그렇게 뜨고 있어요. 에릭이 휘파람을 불었어요.

“오, 역시 루나커피는 장사가 잘돼. 그런데 손님의 연령대가 터무니없이 낮군. 쟤들도 카드결제일까?”

잘 지내라고 초대한 건데 최지환 요 앙큼한 꼬마 녀석이 5학년을 통째로 들고 온 모양이에요. 은별이가 씨근덕거리며 소리를 빽 질렀어요.

“형이 얘들 다 초대한 거 맞아요? 뻥이죠?”

당연히 뻥이지만 뻥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네요. 이런 걸 말려들었다고 하는 거겠죠?

“하하…. 초, 초대한 거 맞아.”

“네에? 왜 그랬어요?”

저는 아이스티를 쪽쪽 빨고 있는 에릭에게 속삭였어요.

“좀 도와주실 수 있죠?”

“좋지. 빵을 구울까?”

희상이 얼굴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말했어요.

“와, 빵도 구울 줄 아세요?”

눈치 9단인 희상이가 갑자기 좀 얼빠진 것처럼 보이네요. 지금 에릭이 빵을 구울 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희상인 강의가 있어서 퇴근시켰고, 에릭은 빵 굽는 일에는 젬병이었어요. 할 수 없이 로저를 불러 인간 공장처럼 빵을 구워야 했죠.

그래서 잘 됐냐고요?

다음날 은별이 최지환과 또 한 판 붙는 바람에 그날 제 노력은 허사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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