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29화 (29/103)

<29화>

요즘 내 관심은 여름방학에 꽂혔다.

루나가 여름방학에 무려 닷새나 문을 닫고 제주도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게 월식이 있는 날을 포함하는 기간이라서 나는 더 기뻤다.

루나는 한번 약속한 일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원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확인까지 시켜주니 감동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방학 때 가족여행 가는 것도 큰 공부가 된다고 하더라.”

“가족…이요?”

“이제 우리가 은별이 가족이지.”

가족이라니, 그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받아준 걸 잘 아는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루나가 생각하는 가족이 내가 생각하는 가족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아 그 부분은 아주 조금 찜찜하지만 어쨌든, 기뻤다.

원래도 그러려고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필립을 비롯한 고양이들도 내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생겨서인지 최선을 다해 보살피고 싶어졌다. 그래서 필립과 고양이들을 욕조에 집어넣고 목욕을 시켜주려다 물벼락만 맞았다.

필립은 험악하게 가릉거리며 나를 ‘올챙이 베이글 같은 녀석’이라고 욕했다. 올챙이는 알겠는데 올챙이 베이글은 뭐야?

어쨌거나, 드디어 방학이 시작되었다.

징그러운 최지환 새끼와도 당분간 결별이다. 그 녀석은 루나가 초대했다는 걸 빌미로 가게를 초토화하려다가 실패했다. 어디서 말 뼈다귀 같은 놈들을 매수해가지고 들이닥쳤는데 빵을 다 먹어치우고 장사를 말아먹게 하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루나가 마법을 써서 엄청난 양의 빵을 구워냈고 에릭 블레어 씨와 로저가 도와줬지만 하마 친구들이라 그런지 몽땅 다 하마 새끼들이라 고까짓 걸로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뜻밖의 사람들이 나서주는 바람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바로 루나커피의 오랜 단골손님들이었다. 그분들이 합심해서 아이들을 내쫓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복도에서 마주친 최지환이 나를 한껏 내려다보며 거들먹거렸다.

“루나 사장이랑 너 무슨 사이냐?”

“뭐, 이 미친 새끼야?”

“나 이 동네 토박인데 너 어느 날 갑자기 루나커피에 나타났잖아. 꼭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뭐냐고.”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말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리고 거기 외국인이 왜 그렇게 많아?”

“요즘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한둘이야?”

“혹시 루나 사장 외계인이냐?”

“딸꾹.”

느닷없이 딸꾹질이 나왔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이 개쉐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거기 그 남자들도 외계인이지?”

“딸꾹딸꾹.”

“그런 게 아니면 초미남들이 왜 거기만 득실거려?”

후유…. 깜놀해서 자폭할 뻔했네! 이 망할 놈의 쉐이를 콱!

“관심 끄고 면상 치워.”

“어유, 이 땅꼬마가-”

최지환이 하마 발 같은 손을 들어 한 대 치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턱을 바짝 쳐들고 대들었다.

“오오, 그래. 어디 한번 제대로 쳐봐라. 저기 CCTV도 있겠다, 잘됐네!”

녀석이 하마 발로 치려는 걸 샤샥 피해서 한 대 치려는데 녀석도 샤샥 피했다.

권법이고 뭐고 짜증 나서 한바탕 들러붙어 뒹굴고 있는데 이선호가 뛰어와 끼어들었다.

“야야! 왜 또 그래! 야, 이것들아! 와서 좀 말려!”

몰려든 아이들이 소리쳤다.

“선생님 오신다!”

아이들이 다 함께 떼어놓는 바람에 싸움은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그냥 뒀으면 내가 이겼을 텐데. 아무튼 당분간 그 하마 같은 얼굴을 안 본다고 생각하니 살 것 같았다.

여행 가방이란 걸 처음 싸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 로저가 내 방문을 노크했다.

“엇, 로저.”

“잠깐 들어가도 되니?”

로저는 오늘도 까만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내 방을 이리저리 서성이더니 창가에 기대서서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그가 마음인지 머리통인지를 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눈빛이 탐탁지 않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생각 함부로 읽지 마세요.”

그가 눈썹을 쫙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읽어. 걱정 마.”

“진짜요?”

“그래, 날 믿어.”

믿음이 안 가서 떫은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내 눈치를 보았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가 한껏 뜸을 들이며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조건이 아주 좋단다.”

“뭐가요?”

“월식 말이야.”

“아저씨는 가실 거죠?”

내 말이 몹시 거슬린다는 듯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저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지 않아요.”

지금 비웃음을 참는 거냐? 섹시하기까지 한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굉장히 거슬리는 입술 모양 때문에 나는 인상을 잔뜩 썼다.

잘생겨서 짜증 날 정도란 말이야.

“좋다. 그럼 편히 말할게. 이건 루나는 물론이고 누구한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얘기야.”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 아니라….”

“엇! 마음 안 읽는대놓고!”

“어이구, 미안. 습관이 돼서.”

“와! 습관적으로 걸고 다니는 거예요?”

“거, 걸긴 뭘 걸어? 아무튼 안 그럴게.”

“좋아요. 그런데 나 아저씨랑 마주 보고 오래 말하는 거 불안하거든요? 빨리 말씀하세요.”

“그게… 기웃거리는 이가 있어.”

“뭐가 있다고요?”

“기웃거린다고. 우리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네…? 설마… 외계인인 걸 들킨 거예요?”

“내가 파악한 바로는 대충 3주 전부터인 것 같아.”

“3주? 클럽 회원들 모였을 때잖아요.”

“음….”

“그러게 왜 자꾸 루나커피에 드나들어요? 그리고 그냥 수수하게 비행기나 자동차 타고 오든지, 아니면 영상통화를 하던지. 영국이니 미국 같은 데서 좌푠지 뭔지로 드나드니까 꼬리가 밟힌 거 아니에요?”

“지금 어른한테 따지는 거니?”

“그 좌표 지구인한테 안 보이는 거 확실해요? 내 눈에는 훤히 보이던데?”

“음….”

“아씨! 음음만 하지 말고요!”

“버릇없는 녀석.”

“지금 버릇이 문제냐고요!”

로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지금 말다툼이나 하고 있을 문제가 아니다. 갑자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어떡해요?”

“가능한 빨리 떠나야지.”

“네…?”

그 말에는 식은땀이 아니라 현기증이 났다. 느닷없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런 나를 로저가 측은하다는 듯이 보았다.

“이번 도킹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흘려보내기에는 기회가 너무 좋을뿐더러,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루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나를 위해 남아달라고 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돼요?”

“너도 어느 정도 파악했겠지만 루나는 은근히 고집이 세단다. 한번 결심하면 여간해선 번복하지 않아. 아마 이번에도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지 않을 거야.”

“제가 설득해볼게요.”

“아니, 네 말은 더더욱 듣지 않을 거야. 네가 루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 테니까.”

“그럼 어떡해요?”

“제주도에서도 월식을 볼 수 있거든. 그쪽에서도 도킹할 수 있다는 얘기지. 우리가 처음부터 같이 가는 것보다 나중에 합류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동행을 원하는 회원들이 다 함께 말이야. 그리고 그곳에서 루나와 고양이들까지 데리고 도킹할게.”

너무나 잔인한 말이었다. 그다음에, 혼자 남은 나는,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너한테는 미안하다. 하지만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 준비해놓으마. 내 재산을 모두 너한테 줄게. 너를 상속자로 지정해 전담 변호사를 고용해 놓을 거야. 내 계좌에서 규칙적으로 송금하도록 해놓을 테니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걸 사용하도록 해. 그걸로 전부 해결될 순 없겠지만, 넌 영리한 아이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로저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그런 것이 내게 필요할 리 없었다. 나는 로저가 읽을 수 없도록 애써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고맙게 받을게요. 그럼 전 여행 준비 마저 해도 되죠?”

“너, 괜찮아?”

“그럼요. 이래봬도 저 엄청 씩씩해요.”

“알지. 선선히 들어줘서 고맙다. 그럼 여행가는 날 보자.”

“안녕히 가세요.”

로저가 나가자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일찍, 이별이라니.

비겁한 나는 도킹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로저의 말을 떠올렸다. 그럴 가능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루나가 위험한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란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거야말로 잔인하고 배은망덕한 생각인데, 그런데도 그 말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파자마 차림의 루나였다.

“은별, 뭐해? 아항, 짐 싸는구나.”

“아, 네. 왜요?”

“그냥. 다 했으면 나와서 TV 보자고.”

“좋아요.”

루나는 늘 환하게 웃지만 그날 밤은 유달리 더 환하게 웃었다.

거실 테이블에는 과일과 비스킷, 음료수가 차려져 있었다. 루나와 내가 소파에 나란히 앉자 고양이들도 슬슬 기어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TV에서는 인기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루나는 드라마를 무척 좋아한다. 장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다음 목욕 후 간식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게 루나의 취미생활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드라마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루나와 함께 앉아 있는 데에 재미가 들려 덩달아 좋아졌다. 가끔 감정이 복받치면 루나는 나를 얼싸안는다. 재수가 좋은 날에는 이마나 볼에 뽀뽀도 해준다.

그날의 드라마는 경비행기가 북한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북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 CEO의 이야기였다. 여주의 안전을 위해 남주가 여주를 남한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왔다. 그동안엔 건성으로 봤는데 갑자기 감정이입이 마구 되면서 드라마의 결말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폭풍검색을 해봤다. 방영 중인 드라마의 결말에 대해 나오는 정보는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게 되었다. 저런 류의 로맨스 드라마는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너무 슬프다…. 흑.”

루나가 내 머리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필립이 야옹거렸다.

“야옹. 저게 뭐가 슬퍼? 어차피 둘은 만나게 되어 있어.”

“어떻게 만나게 될까요?”

“야옹. 그걸 알면 내가 작가 하지 여기서 야옹거리겠냐?”

“작가 하더라도 거기서 야옹거려야지 아빠가 별 수 있어요?”

“이놈의 자식이.”

“어…? 은별이, 울어?”

“아니에요.”

“야옹! 우는고만 뭘!”

“은별이도 슬펐어?”

“필립 말이 맞아요. 둘은 반드시 만날 거예요.”

“그럴까?”

“야옹. 안 만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발이겠죠.”

“저 들어가서 잘게요.”

“그래, 은별아. 잘 자.”

내가 울적해보여서인지 둘은 내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문을 닫기 전 필립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 저 녀석 금방 내 말 알아들은 거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필립 말이 맞다고 하지 않았어?”

이런, 실수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문을 조금 연 채로 귀를 기울였는데 루나가 필립보다는 눈치가 덜 빨라서 다행이었다.

“음….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나랑 대화하는 거 듣고 때려 맞춘 거겠죠.”

“그런가?”

“애가 영 기운이 없네.”

“씨암탉이라도 잡아 먹이렴. 곧 복날이니까, 야옹.”

“씨… 뭐요?”

거기까지만 듣고,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침대로 기어 들어왔다. 눈이 말똥말똥한 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루나가 없는 세상.

“루나가 없는 세상.”

루나가 없는 세상, 그런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루나의 안전을 위해 쿨하게 루나를 보내준다. 그리고….

“나도 따라갈 거야.”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루나 없는 세상에 혼자 남는 것보다는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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