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30화 (30/103)

<30화>

고백할게요.

지구에 온 후로 여행은 처음이라서 어린아이처럼 설렜지 뭐예요. 은별이 때문에 가려던 여행인데 제가 더 설레는 것 같아요. 은별이는 의외로 침착한데 말이죠.

고양이들을 모두 데려가는 게 좀 힘들 줄 알았는데 국내 여행이라 별 문제없이 해결되었어요. 다만….

“야옹! 감히 나를, 화물칸에 집어넣는다고?”

“애들도 같이요.”

“싫다! 안 가! 못 가!”

“어, 그럼 집 지키실래요?”

“야옹!”

“뭐라고요?”

“싫어, 싫다구!”

결국 따라갈 거면서 끝까지 투덜거리기는.

필립은 새로 장만한 케이지에 들어갈 때도 앙탈을 부렸답니다. 새끼 고양이들은 선선히 잘도 들어가는데 아빠가 돼서는, 쯧.

비행기라는 걸 처음 타봐서 저는 좀 흥분해 있었던 것 같아요. 플럼버에도 비행기와 같은 운송수단이 있지만, 일부러 그걸 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오히려 여객선처럼 크고 안락한 배는 관광용으로 인기가 있지만 비행기는 공간이 비좁고 답답해서 레저를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오로지 교통수단으로서의 용도라면 그냥 좌표로 이동하는 편이 낫거든요.

그런데 비행이라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물론 비행시간이 짧아서 그랬겠지만요. 제주공항에서 숙소까지 렌터카로 이동했는데 가는 길에 야자수가 많아서 외국에 온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얻은 숙소는 감귤과 파인애플농장에서 운영하는 펜션이에요. 근처에 바다가 있어서 시원하고 산책하기도 좋답니다.

똑같이 생긴 다섯 채의 오두막 중 하나가 저희 숙소네요. 2층에 있는 침실 하나에서 다 함께 자야 해요. 인테리어는 조금 조악했지만 그럭저럭 귀여운 집이에요. 집 앞 테라스에 파라솔이 달린 식탁이 있어서 바비큐 요리를 할 수도 있어요.

“우리 장 보러 갈까? 저녁에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으면 좋을 것 같아.”

“좋아요.”

“감귤이랑 파인애플 따기 체험도 할 수 있다니까 있다가 해볼까? 주스도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 그치?”

“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요? 어쩐지 은별이 얼굴이 시무룩해 보여요.

“은별아, 피곤해?”

“아뇨. 그런데 이거 필립 소리 아니에요?”

“엇! 내 정신 좀 봐.”

집 구경하느라고 케이지를 현관에 놔두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필립이 털을 바짝 세우고 튀어나왔어요. 어유, 무서워.

“이 후레자식! 애비를 저 코딱지만 한 가방에 가둬놓고 잊어버려?”

“죄송해요. 그런데 아기들은 참 잘도 자네요. 새 케이지가 마음에 드나 봐요.”

“야옹! 걔들은 나 안 닮아서 아주 둔하다고.”

“화 푸세요. 저녁에 아빠 좋아하는 소고기 구워드릴게요.”

“흥!”

“다녀올게요.”

저는 은별이를 데리고 렌터카에 탔어요. 펜션 주인에게 물어봤는데 차를 타고 조금 나가야 가게가 있다고 하네요.

도로는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타원형으로 이어져 있어요. 쭉 달리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지요.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은별이 엉뚱한 말을 하네요.

“반지 같네요.”

“응? 오, 그러네.”

비슷하긴 하네요. 반지도 끊이지 않는 원형이라, 끝나지 않는 사랑을 뜻하는 징표로 쓰이는 거니까요.

10분쯤 달리니까 마을이 나오고, 큰길에 ‘마트’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가 있었어요. 다행히 거기서 소고기도 살 수 있었어요. 고기를 산 다음 채소를 고르고 있는데 은별이 말했어요.

“저 잠깐 옆에 다녀와도 돼요?”

“옆에?”

“문구점이 있어서요.”

“문구용품 살 거 있어? 이거 사고 같이 가.”

“아니, 잠깐이면 돼요.”

“알았어. 딴 데 가지 말고 곧바로 와야 해.”

“네.”

은별이 후다닥 가버리고 저는 채소와 쌀, 음료수를 골라 계산대에 섰어요. 계산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은별이 돌아와 짐 싸는 것을 도왔어요.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은별이 말했어요.

“형.”

“응?”

“잠깐만 차 좀 세워줄 수 있어요?”

“왜, 쉬 마려워?”

“아니거든요!”

무심코 한 말인데 버럭 성을 내네요.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는 질러….”

“저 아무 때나 쉬 마려운 그런 애 아니에요.”

어우, 쉬가 아무 때나 마렵지 뭔 소리야…. 까칠한 녀석.

갓길에 과일 가판장이 있고 꽤 넓은 공터가 있기에 거기에 차를 세웠어요. 은별이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어요.

“이게 뭐야?”

“그냥, 루나한테 꼭 주고 싶어서.”

조그만 손바닥에는 반짝이 종이로 포장한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어요. 노란 스마일 아이콘이 찍힌 은색 반짝이 종이가 귀엽네요. 크크.

저는 은별이를 한번 쳐다봤어요. 혹시 스프링 인형이 톡 튀어나와 코에 후춧가루 같은 걸 뿌리지는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이 녀석, 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걸까요? 눈이 마주치니 어색하게 웃는 건 또 뭐죠? 궁금해지네요.

포장지를 뜯어보니, 헐?

“은별아. 이건, 반지네?”

말랑한 젤리로 만든 것 같은 꽃 모양 반지 두 개였어요. 하나는 노랑, 하나는 파랑.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냐고?”

무슨 뜻일까요…?

“달맞이꽃처럼 생겼죠?”

“그, 그러네. 그런데 이거….”

설마… 커플링이라는 생각으로 산 건 아니겠죠?

“손 좀 줘 봐요.”

“응…?”

허, 이 녀석. 제 손을 덥석 잡더니 씩씩하게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있어요. 그리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걸 내려다보네요.

미치겠다….

“잘 어울려요.”

“그, 그래. 예쁘네. 고맙다.”

“마음에 안 드셔도 안 빼면 좋겠어요.”

“응? 으응.”

“약, 속.”

“응…?”

새끼손가락을 내밀고는 나를 빤히 보고 있으니 안 걸어줄 수도 없고.

“약속.”

그제야 종일 시무룩하던 얼굴에 화색이 좀 돌아왔어요. 왜죠? 이 상황에 제가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어이구…. 저건 또 뭔가요. 이제 파란색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우고 있어요. 손가락을 들어 요리조리 살피면서 히죽거려요. 저는 왜 소름이 올라오는 기분이죠?

“이거면 됐어요.”

“응…? 뭐가?”

“그런 게 있어요. 이제 가요.”

요 녀석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요? 리딩 한번….

어허! 이러면 안 되죠. 안 되고 말고요.

그동안 귀여운 동생처럼 굴더니 이럴 때면 능글맞다고 할까, 아무튼 엉뚱한 건 환상특급 수준이에요.

그러고 보니 요즘 은별이 분위기가 뭔가 좀 달라졌어요. 정확히 어떻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뭘까요?

숙소에 돌아와서는 이것저것 하느라 은근히 바빠서 더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우리는 감귤 농장으로 가서 과일을 땄답니다. 그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필립과 고양이들도 합세해 숨바꼭질도 하고 그러는 덕분에 시간은 엄청 잡아먹었지만요.

우리는 파인애플 한 통과 감귤 한 봉지를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어요. 엄청나게 배가 고팠기에 서둘러 저녁 준비를 시작했어요. 밥을 짓고, 그릴 팬에 숯을 넣어 불을 피우고, 샐러드를 만들고, 감귤과 파인애플을 썰어 음료수도 만들고.

그러고 나니 어느새 하늘은 남청색으로 변했고 둥근 달과 별무리가 몰려와 있었어요.

“우와! 하늘 좀 봐요.”

“서울보다 하늘이 훨씬 더 넓고 청명하네.”

“야옹, 배고파. 고기는 언제 구울 거야? 난 레어로 해줘.”

“보채지 좀 마세요. 그냥 날것으로 드실래요?”

“야옹!”

“제가 구울게요. 형은 앉으세요.”

은별이 제법 안정감 있는 폼으로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나를 도와 주방 일을 꽤 해서 그런 걸까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공부에 더 관심을 갖도록 해야겠어요. 기말시험 성적이 그저 그랬거든요. 아직 초등학생이고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당연하지만 아주 조금 실망했답니다. 물론 은별이한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요.

“은별이, 주방 일에 공부할 시간을 너무 뺏기는 거 아니니? 그런 거 안 해도 되니까 그 시간에 공부나 하려무나.”

“네에!”

대답은 넙죽넙죽 잘하네요. 칫.

“야옹, 남편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 거 아니다.”

“시끄러워요!”

은별이 우리를 돌아보며 생긋 웃네요. 필립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흠…. 저렇게 웃는 걸 보면 성적이고 뭐고 다 잊게 돼요.

“자! 다 구웠어요.”

은별이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어요.

“오! 고맙다, 은별아. 맛있게 잘 구웠네.”

“야옹! 손도 크네. 너무 많잖아.”

“그러게. 다 구운 거야? 남을 것 같은데.”

“안 남아요.”

“그래? 아무튼 얼른 먹고 들어가자.”

“왜요?”

“씻고 드라마 봐야지.”

“야옹! 드라마에 환장한 놈.”

“여주가 떠나는지 어떤지 봐야죠.”

“떠나더라도 다시 만날 거라니까요.”

사실 저도 두 사람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이 되네요.

“빨리 만나야 할 텐데.”

“왜요?”

“난 슬픈 걸 못 참는 성격인 것 같아.”

“정말요?”

“응.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져서 눈물 흘리는 꼴을 잘 못 보겠어.”

“형.”

“응?”

“어디서 들었는데요, 사랑은 돌아오는 거래요.”

“그거 어디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 같은데.”

“야옹! 아주 오래된 드라마다. 그 녀석이 엄마 뱃속에도 없었을 때.”

옆에서 필립이 보충 설명을 했어요. 그런데, 은별이 표정이 좀 이상하네요.

“형…. 한번 안아봐도 돼요?”

“응…?”

은별이 제 겨드랑이를 파고들더니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어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은별이 마음이 느껴졌어요.

저도 어릴 때 드넓은 밤하늘을 바라볼 때면 밑도 끝도 없이 외로워지곤 했답니다.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두렵기도 했어요. 저 광활한 우주에 나 홀로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에 훌쩍훌쩍 울기도 했죠.

그래도 그때 제게는 할머니도 있었고, 비록 하루도 집에 붙어 있는 날은 없었지만 아빠도 있었어요. 그런데 은별이는 정말로 혼자잖아요.

그 생각을 하자 은별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저는 아이가 몹시 측은해졌어요.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마주 안아줬어요. 그랬더니 저를 더 꼭 안으며 코를 킁킁거리네요. 간지러워.

“야옹, 벌써 애정행각이냐?”

“조용히 하세요.”

“야옹, 가만. 너네 손가락에 그거 커플링이야?”

“아, 아니에요. 이런 건 그냥, 음…. 재밌는 문구점 반지라고 해요.”

“그래, 재밌는 커플링이네.”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세요.”

“무슨 분위기?”

“커플링 맞아요.”

“야옹! 진도 빠르네.”

“아빠, 닥치세요.”

“뭐? 이 배은망덕한….”

“형. 사진 찍어도 돼요?”

“사진? 좋아.”

은별이 별의별 포즈를 요구하는 바람에 백 장쯤 사진을 찍었어요. 혼자도 찍고 둘이도 찍고 다 같이도 찍고. 마지막에는 다 함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 했는데, 지지대가 없어서 아무도 안 볼 때 눈치껏 휴대폰을 띄워놓고 마법으로 찰칵. 근사한 가족사진이 생겼어요.

“잘 나왔네.”

“이거 현상해서 우리 집 벽난로 위에 걸어놔요! 크게 확대해 액자에 넣어서요!”

“그럴까?”

신나서 떠들던 은별이 갑자기 굳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어요.

“왜?”

“아, 아니에요.”

“아무래도 너 오늘 이상해. 아니 엊그제부터 이상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어요.”

그때 숙소 앞에 렌터카 한 대가 섰어요. 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어요. 누군지 확인한 저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