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31화 (31/103)

<31화>

“로저, 에릭, 조르주!”

루나는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로저와 에릭, 조르주라는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조르주 리는 갈색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40대 남자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인상에 비쩍 마른 체격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포도 농장을 경영하는데, 플럼버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고 한다. 그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 이렇게 들이닥쳐서 미안해.”

“아뇨. 그런데 다들 웬일이세요?”

에릭이 대답했다. 에릭 블레어. 그와는 일전에 루나커피에서 통성명을 한 사이였다. 그때도 느꼈지만 미소를 띤 입매가 매력 만점인 남자였다.

“아, 우리도 마지막으로 지구에서의 여행을 즐겨보려고. 로저가 여기에서 도킹해도 된다고 하더군.”

“아….”

루나는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어떤 표정인지 보이는 듯했다. 애써 명랑한 척 미소를 짓고 있겠지. 다들 고향으로 간다는데 섭섭하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

“엘리아와 아치볼트는요?”

“내일 온다고 했어.”

“우리가 껴도 방해 안 되려나?”

“방해라뇨, 조르주. 그런데 어쩌죠? 오두막에 침실이 하나뿐이라서.”

“그건 걱정 말게. 로저가 숙소를 따로 잡아놨으니까.”

“휴가철이라 예약 안 하면 빈방 구하기 힘들다던데, 역시 로저는 다르네요.”

로저가 내 쪽을 흘긋 보았다. 어른에게 예의를 지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반가운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멀뚱하니 서 있기만 했다.

루나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식사하세요. 우리도 막 시작했어요.”

“그럴까.”

“조르주가 와인을 가져왔어.”

“와! 고마워요.”

조르주가 울상을 하고 필립을 쓰다듬었다. 다시 보니 울상이 아니라 웃는 거였다.

“필립, 오랜만이야.”

“봉수아, 조르주.”

필립과 인사를 나눈 조르주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 소년이 은별이인가?”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하자 그가 또 울상을 하고 웃었다.

“귀여운 소년이군. 플럼버에 두고 온 아들이 생각나네.”

“야옹, 은별이가 알고 그런 것처럼 고기를 잔뜩 구워놨어.”

그 말을 들은 로저가 나를 향해 비밀스러운 윙크를 보냈다. 나는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피했다.

“와인 맛이 정말 좋네요.”

루나는 조르주가 가져온 와인을 정말 많이 마셨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루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리 인사할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언젠가 플럼버에서 만나요.”

루나가 마신 와인이 내게로 옮겨와 취기가 오르기라도 한 걸까. 내 입에서 말이 툭 나와 버렸다.

“플럼버에 대해 알고 싶어요.”

잠시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저도 플럼버를 보고 싶어요. 직접 가서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땅을 밟아보고 싶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루나가 느끼는 향수까지 내게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플럼버가 내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순간 몸살 나게 그리웠으니까.

심지어 나는 주정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질질 짜기 시작한 것이다.

“훌쩍…. 얼마나 아름다우면 여러분이 그토록 못 잊는 건지 궁금해요. 거리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려 있고 꿀벌 로봇이 붕붕거리고….”

물론 이건 루나가 말해준 이야기였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플럼버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어떤 것은 하도 자세히 얘기해줘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생생했다.

한참 훌쩍거리며 헛소리를 주절대다가 문득 보니 모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감수성 예민한 루나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로저와 에릭도 훌쩍거렸고 조르주는 급기야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조르주는 플럼버에 아내와 아들이 있다고 했다. 새로 개발된 포도 품종을 구경하러 박람회에 참석하려고 여객선에 탔다가 잘못된 좌표에 걸렸단다. 처음에는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지구 시간으로 24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번 도킹에도 별 기대가 없단다.

“이번에도 갈 수 없을 거야.”

루나가 그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아니에요, 조르주. 이번에는 확률이 아주 높대요.”

“로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네. 24년간 월식이 수도 없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기회는 오지 않았어.”

로저가 부루퉁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번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그 둘은 운이 하늘에 닿았어. 그 실낱같은 운에 기대기에는 좌표며 코드며 너무나 불안정해. 게다가 행운이란 연거푸 오지 않는 법일세.”

“이번에는 확실해요. 조르주. 모두 함께 갈 수 있을 겁니다.”

“로저, 난 큰 욕심 없네. 그저 플럼버에서 죽어 묻히고 싶을 뿐인데….”

조르주는 이제 대성통곡했다. 옆에 앉은 나는 보고만 있기 뭣해서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고 폭포수 같은 눈물을 콸콸 쏟았다.

“제이미! 아빠가 잘못했다!”

“켁, 아즈씨… 숨 막….”

“진정하세요, 조르주.”

루나가 말렸지만 조르주는 더욱 막무가내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누군가의 말에 작은 소동은 금세 잦아들었다.

“난 갈까 말까 생각 중이야.”

말을 뱉은 것은 에릭이었다.

“뭐라고?”

깜짝 놀란 로저가 되물었다. 조르주도 놀랐는지 울음을 뚝 그쳤다. 겨우 그에게서 해방된 나도 에릭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 귀를 기울였다. 좀 취한 건지, 그는 평소의 밝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독신이라 플럼버에 가족도 없으니까.”

“하지만 에릭.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루나도 안 가잖아.”

“저야….”

루나가 나를 흘긋 보았다. 나는 다시 울적해져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로저가 그런 나와 루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플럼버인은 플럼버에 가지 않으면 안 돼. 알잖아. 조르주를 봐. 우리도 조르주만큼 여기서 오래 살게 되면 우울증에 걸리고 말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루나. 어떤가?”

“뭘요?”

질문은 루나에게 던져놓고 뜬금없이 에릭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곧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런, 난 채식주의자인데 고기를 먹어버렸네.”

“자네가 언제부터 채식주의자였나?”

“몰랐나, 로저. 일주일쯤 됐는데.”

갑자기 분위기 생활밀착형인 게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 얘기를 하려다가 말고 화제를 돌린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호기심 많은 루나가 대화를 포기할 리 없었다. 역시나 그가 잊지 않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거예요, 에릭?”

“아아, 뭐였지? 음, 그래.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어.”

루나는 예의 그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왜 그런 걸 나한테…. 저도 모르죠.”

끝말을 흐리며 그가 곁눈으로 내 눈치를 슬쩍 보았다.

“사랑은 말이야,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 사랑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로저가 냉정한 어조로 일침을 놓았다.

“난 찬성할 수 없네.”

“그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그게 순수한 사랑이라면 그렇지 않지. 하지만 당사자라 해도 그게 진실한 사랑인지 아닌지는 꽤 오랜 세월을 겪어봐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훗날 사랑을 잃고 후회하는 날이 왔을 때 누가 책임지지?”

그 주제에 대해서는 로저도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루나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에릭에게 물었다.

“가만, 에릭. 혹시, 희상이 때문이에요? 희상이 때문에 안 간다는 거예요?”

에릭은 뜨끔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대답이 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그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필립이 야옹거렸던 것이다.

“야옹!”

“필립, 뭐라고요?”

“야옹. 출입문 쪽에서 이상한 놈이 이쪽을 보고 있어. 돌아보지 말고 좌표를 열어 봐.”

로저가 좌표를 열었다. 테이블 위에 투명한 액정이 나타나고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울타리 근처가 보였다. 과연 어둠이 내린 입구, 연한 실외등 불빛에 수상쩍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 남자가 관목 사이에 숨어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담배 같은 것을 물고 있는 게 내 눈에는 기묘해보였다. 그 남자의 뒤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어쩐지 루나커피 이웃인 치킨집 오토바이와 비슷해 보였다.

“야옹, 먼 거리라서 대가리가 잘 안 읽히네. 내가 가까이 가볼게.”

고양이가 된 후로는 능력이 많이 줄었지만, 필립도 리딩을 할 줄 안다고 했다.

“괜찮을까요, 아빠?”

“난 일단 보기엔 고양이잖아. 저쪽에서 경계할 리가 없지.”

“어! 저기 뭉크가….”

어디서 놀고 있었는지 뭉크가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그 남자에게로 가고 있었다.

“야옹, 저 녀석 왜 저래?”

나는 재빨리 일어났다.

“내가 데려올게요.”

“은별아, 잠깐!”

“야옹! 뭉크!”

“가만, 뭐 하는 거야!”

“납치다!”

“야! 거기 서!”

갑작스러운 소동이었다. 남자가 뭉크를 안아 오토바이 박스에 집어넣더니 시동을 걸었다. 우리는 일제히 그 남자의 뒤를 쫓았다. 순간이동 기술 보유자가 넷이나 있었지만 각종 부작용에 노출된 실외에서 그걸 써먹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약속한 듯 재빨리 자동차에 올랐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두 대의 자동차가 오토바이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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