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35화 (35/103)

<35화>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차원 이동을 직접 체감하니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짜릿했다.

어느새 좌표의 구체가 점점 커지더니 오두막을 먹어버렸다. 오두막과 휘영한 달은 투명한 구체안에 들어있었다. 유리 돔 위로 수많은 숫자가 현란하게 오르내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굉음과 함께 오두막이 뿌리째 뽑혔다. 내가 바람산 기슭에서 루나커피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흡사한 모양으로 오두막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회전은 빨라져 이내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주위의 나무와 관목들이 휘청거리며 잎을 날렸다. 농장의 열매들이 회오리바람이 만들어낸 고리 안으로 흡수되어 회전운동에 동참했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자 에릭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한쪽 눈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구체 위를 휩쓸던 숫자가 모두 사라지고 0이라는 숫자만 남았다.

그러자 모든 바람이 멈췄다.

구체가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 안의 오두막도 사라졌다. 비행기 엔진처럼 윙 하는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마지막 바람과 함께 그 소리도 끝났다. 갑자기 적막이었다.

한참 후에 에릭이 나를 놓아주었다.

“무슨 짓이야!”

루나의 목소리였다. 그 와중에도 로저가 루나를 끌어안고 있어서 기분이 언짢았다. 루나가 로저를 밀치고는 내 앞에 섰다.

“날 따라올 생각이었다고? 내가 말해줬잖아. 넌 지구인이라 좌표이동을 시도하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고. 내가 똑똑히 말해줬잖아!”

에릭이 루나를 말렸다.

“루나. 흥분하지 말게. 아이가 잘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아뇨, 에릭. 은별이는 다 알아요. 알고도 그럴 생각이었다구요!”

“정말이니?”

나는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에릭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치미 떼지 마!”

루나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봐서 난감하기는 했지만, 그가 화를 내는 걸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꿈만 같았다. 그래서 배시시 웃었더니 루나의 눈이 좌표 구체처럼 점점 커졌다.

“허! 얘 웃는 것 좀 봐요. 정은별! 너 형이 우스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감해서 할 말을 잃었는데 다행히 타이밍 좋게 필립이 폴짝 뛰며 외쳤다.

“야옹! 저게 뭐지?”

모두 필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걸 본 우리는 모두 함께 외쳤다.

“헐!”

오두막은 제자리에 얌전히 놓여있었고, 오두막 옆의 버드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여기저기 흩날리던 나뭇잎이나 열매도 온데간데없었다. 모든 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놀란 건 아니었다. 그보다 매우 부자연스럽게도, 버드나무 가지 위에 워튼 씨가 앉아있었다. 이번에도 모두 함께 외쳤다.

“워튼 씨!”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워튼 씨가 소리쳤다.

“지금 기가 다 빠져서 순간이동이 안 되네. 누가 나 좀 도와주겠나?”

“잠깐만요!”

로저가 다람쥐 뺨치게 날렵한 동작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워튼 씨 옆에 도착했다. 눈 한번 깜짝한 순간 두 사람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에릭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워튼 씨. 못 간 건가요?”

“아니, 안 갔네.”

“왜요?”

루나가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

“헉, 알겠다! 그 할머니 때문이죠?”

워튼 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뺨만 발갛게 물들였다. 그 얼굴이 대답인지라 우리는 모두 그저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야옹,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필립이 앞발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남자 울음소리 같았다.

“야옹, 워튼 씨만 못 간 게 아닌 것 같은데.”

우리는 일제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내가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갈 때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치볼트! 조르주!”

다락방에는 낙뢰를 맞았나 싶게 머리카락이 곤두선 아치볼트와 조르주가 서로에게 기댄 채 앉아있었다. 울고 있는 사람은 아치볼트였다.

로저가 그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우리도 몰라. 마지막에 문이 닫혔어.”

“엘리아는?”

“엘리아와 워튼 씨만 도킹에 성공한 것 같아.”

“아니, 워튼 씨도 밖에 있어. 가지 않았어.”

“그럼, 엘리아만 간 건가?”

그러자 아치볼트가 더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루나가 털썩 주저앉더니 덩달아 눈물을 터뜨렸다.

“세상에, 아치볼트! 엘리아와 이렇게 어이없이, 헤어지신 거예요?”

아치볼트는 고개를 저으며 흐느꼈다. 조르주는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가지 못한 것은 정말 유감이었다. 누구보다 플럼버를 그리워하던 사람인데.

“정말 안 됐어요. 하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로저?”

“당연하지, 루나. 엘리아가 성공했다는 건 좋은 징조야. 지난번에도 두 명이 성공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건 행운이 아니라 과학적 결과인 거야. 아직 우리가 모르는 법칙이 있는 게 분명해. 지난번과 이번 도킹의 특징을 면밀히 살피면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네.”

“그런데 같은 공간에 있었고 좌표 내에 들어가 있었는데 어째서 누구는 도킹이 되고 누구는 안 된 걸까요?”

“그 수수께끼 역시 곧 풀리지 않겠나?”

“앗! 조르주!”

루나가 채광창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순간이동을 했는지 어느새 조르주가 채광창 너머에 서 있었다. 그것은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 저래?”

“내가 가볼게.”

에릭이 로저에게 말하며 사라졌다. 잠시 후 에릭이 조르주 곁에 서 있는가 싶더니 둘 다 다락으로 내려왔다.

조르주는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눈이 퀭한 게 어쩐지 좀비처럼 보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루나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조르주. 저기서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아요. 괜히 골절상만 입는다고요.”

“제이미…?”

조르주가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벙긋벙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조르주의 품에 안겨있었다.

“제이미! 내 새끼…!”

“아저씨! 저 은별이에요!”

“진정해요, 조르주. 다음에는 꼭 갈 수 있을 거예요.”

“내 손을 놨어.”

마지막 말은 우리 뒤에서 들렸다. 모두 돌아보니 아치볼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요, 아치볼트?”

루나의 질문이었다.

“야옹, 손을 놨다고 했어. 설마, 엘리아가 손을 놨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거야, 필립.”

“야옹?”

“엘리아가, 마지막에 내 손을 뿌리쳤어. 난 똑바로 봤어. 좌표를 통과해 홀 안으로 들어갈 때 그녀의 모든 입자는 웃고 있었어.”

그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조르주까지 놀라서 아치볼트를 쳐다보았다. 그 틈에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얼른 루나의 뒤에 숨었다. 루나가 내 손을 꼭 잡고는 말했다.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아치볼트는 눈물을 콸콸 쏟으며 오열했다.

“아니, 절대 아니야. 그녀는, 나를 버렸어! 아니, 내팽개쳤어!”

그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작 나는 이 부분에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로서는 ‘엘리아의 모든 입자가 웃고 있었다’는 말이 훨씬 더 놀라웠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한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회원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나가 입을 턱 막으며 중얼거렸다.

“오 마이 갓…. 플럼버인이 어떻게 그런 짓을…!”

*

야단법석이었던 여행이 끝나갔다. 남은 일정은 매우 조용히 보냈다.

조르주는 즉시 프랑스로 돌아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남은 휴가를 함께 보내자며 다 함께 말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치볼트가 그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조르주에게는 오히려 약이 된 것 같았다. 아치볼트를 위로하느라 여행 내내 조르주는 밤마다 먹는 우울증 약을 먹기도 전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아무튼 낮에는 모두 함께 시간을 보냈다. 주로 바닷가에서 수영과 일광욕을 하거나 관광지를 돌고, 유명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두막에서 저녁을 먹는 식이었다.

분위기는 늘 차분했다. 누군가 재미있는 농담을 하면 와하하 웃다가 이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아치볼트와 조르주는 와인이나 맥주를 홀짝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플럼버는 지금쯤 여름이겠지?”

“아뇨. 겨울이죠.”

“알 수 없지.”

그렇게 마지막 밤이 왔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가고 필립과 고양이들도 이른 잠이 들었다. 나는 테라스 식탁에 앉아 며칠 전보다 이지러진 달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나가 과일 향이 나는 차 두 잔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내 앞에 머그잔 하나를 놓아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둘이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시간이 꽤 오랜만이었다.

우리는 차 몇 모금을 홀짝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루나가 입을 열었다.

“다신 그런 짓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찻잔을 응시했다.

“대답 안 해?”

“알았어요.”

또 한동안 차 홀짝이는 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그가 나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네가 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라도 나면.”

나는 그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도 나를 보았다.

“나는 어떻게 될지 생각 안 해봤어?”

나는 무슨 말인지 생각하느라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별만 생각하느라 루나의 입장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가 그것을 이별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헤어져서 슬픈 쪽은 나뿐일 거라고 당연히 믿었던 것 같다.

“아…!”

루나는 원망하는 눈으로 나를 흘긋 보더니 다시 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그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러니까 네가 꼬마라는 거야.”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형이, 그 정도로 날 소중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고요.”

루나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너… 그 정도 눈치도 없어?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그것도 몰라?”

“알아요. 아는데….”

“됐어!”

갑자기 그가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당황해서 따라 일어났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

“됐다고.”

“아 진짜,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네가 짧은 게 한두 가지니?”

“뭐라고요?”

“흥!”

뭐야, 지금 내 다리가 짧다고 무시하는 거야?

“아씨! 치사하게!”

“뭐야?”

“아니에요. 용서해주세요.”

“흥!”

루나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서둘러 뒤를 쫓았다.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던 필립이 야옹거렸다.

“야옹! 시끄러워서 깼잖아! 왜 떠들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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