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야단법석 제주도 여행이 끝났어요.
“후유….”
애들… 아니, 애랑 고양이들 데리고 여행 다니는 게 쉽지는 않네요. 하긴, 제일 힘들었던 건 도킹에 실패한 어른들 위로하는 거였어요. 애랑 고양이들은 의외로 속 썩이지 않았죠.
우리는 공항에서 다 함께 미니밴을 타고 서울로 왔어요. 조르주는 어딘지 유체이탈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아치볼트는 여행 내내 술을 달고 다녀서 하품만 해도 술 냄새가 차 안에 퍼졌어요.
워튼 씨 역시 착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어요. 뭔가 큰 결심을 한 것일까요?
“루나커피다!”
제 뒷자리에 앉아있던 은별이가 외쳤어요.
“은별이, 루나커피가 반가워?”
“네! 엄청 그리웠어요. 여행도 좋지만 난 루나커피에 돌아온 게 더 좋아요.”
기특한 녀석. 어쩜 하는 말마다 저리도 살갑죠?
저 역시 루나커피가 그리웠나 봐요. 겨우 닷새인데 아주 긴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에요. 당연한 일이에요. 태어나 이렇게 오래 루나커피를 비워둔 적이 없었거든요.
“다들 2층으로 올라가실래요? 정자에 앉으신다고요? 그럼 마실 것 가져올게요. 아뇨, 아치볼트. 술은 그만 드세요. 대신 럼을 조금 넣고 시원한 차를 만들어올게요.”
홀로 들어오자 잠들어있던 카페의 기계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어요. 은유법이 아니랍니다. 은별이도 들었나 봐요.
“와, 나 지금 기계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 뭐라고 하던?”
“왜 이제 오느냐고요.”
제가 내려다보자 은별이도 방긋 웃네요. 우리는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우리가 있을 자리는 여기라는 마음 말이에요.
우리는 잠시 가게가 기지개를 켜는 것을 지켜보며 서 있었어요. 하암, 하품하는 소리도 들리고 쌓아놓은 찻잔들이 미세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렸어요. 뭔가 오케스트라 같네요. 제목을 붙이자면, ‘커피와 기계, 의자와 탁자의 사육제’정도랄까요.
*
“혹시 최근 들어 엘리아가 이상하지는 않았나?”
워튼 씨가 아치볼트에게 물었어요.
우리는 뒷마당 정자에 둘러앉아 있어요.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은별이는 2층으로 올려보냈답니다.
“아뇨, 워튼 씨. 우린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정말입니다.”
“아니, 여자들은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 좋은 말로 섬세하고 나쁜 말로 쪼잔하다고. ”
가만히 듣기만 하던 저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그건 편견 같은데요.”
“루나도 내 나이만큼 살면서 여자를 겪어보면 알게 될 거야.”
“저도 루나 말이 맞다고 봅니다, 워튼 씨. 여자라고 다 쪼잔하지는 않아요. 혹시 그 할머니가 쪼잔하신가요?”
에릭의 말에 워튼 씨가 발끈 성을 냈어요.
“무슨 말이야! 그녀는 조르주의 포도 농장만큼이나 마음이 넓다고.”
로저가 박수를 짝 쳤어요.
“그래서요, 워튼 씨. 그다음 얘기를 하시죠.”
“아, 그래. 아치볼트. 최근에 소소하게라도 다툰 적 없나?”
그 말에 제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주도에서도 아치볼트가 엘리아에게 뭐라고 핀잔 주셨잖아요.”
“내가? 난 기억 안 나는데.”
“분명 아치볼트가 엘리아를 혼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안 그래요, 로저?”
“나도 기억나는 것 같아. 잘 생각해보게, 아치볼트. 최근 말다툼이 잦지는 않았나?”
“아니요….”
아니라고 하는 말끝이 어쩐지 길게 늘어지네요. 모두의 시선이 아치볼트의 입에 집중되었어요.
잠시 눈동자만 굴리던 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어요.
“사실은….”
아치볼트가 뜸을 들이자 모두의 목이 쭉 늘어났어요.
“엘리아가… 잠자리를 계속 거부했어요.”
“헐!”
“그거네!”
“…전 부끄러워서 더 못 듣겠어요.”
“그럼 루나는 이만 올라가 보게.”
“아, 아니에요. 그래도 들어야죠, 중요한 문젠데.”
에릭이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어요.
“난 루나가 무척 듣고 싶다에 백 원 걸겠어.”
“무, 무슨 말씀을! 그런데 겨우 백 원이라고요?”
“자, 그만 방해하고 좀 들어봅시다!”
로저가 또 한 번 박수를 짝 쳤어요. 덕분에 겨우 말을 잇는 아치볼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무척 핼쑥했어요.
“한번은 내 입에서 냄새가 난다며 키스를 거부한 적도 있어요.”
“입 냄새 때문에요?”
그건 정말 끔찍하네요.
“거짓말이야.”
“아니, 아치볼트. 거짓말은 아닐걸? 자네 입에선 늘 술 냄새가 난다고. 결혼생활을 너무 얕잡아본 것 아닌가? 부부 사이에도 기본적인 매너를 지켰어야지.”
“날 알코올 중독자로 몰지 마세요, 로저. 그리고 잊으셨나 본데, 우린 아직 부부가 아니에요. 정식 결혼은 플럼버에 가서 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런 걸 사실혼이라고 해.”
저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워튼 씨는 고개를 저었어요.
“로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엘리아는 명백히 아치볼트를 버렸어.”
워튼 씨의 말이 맞긴 했어요.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사실혼 관계든 아니든 이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로저도 수긍했어요.
“그런 것 같네요, 워튼 씨.”
에릭이 중얼거렸어요.
“플럼버인같지가 않네요. 그렇게 갑작스럽게 연인을 차버리다니.”
“지구에 아주 잘 적응한 것 같군.”
조르주의 말이었어요.
다들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문득 아치볼트가 중얼거렸어요. 섬뜩한 어조로 말이죠.
“플럼버에 돌아가면 죽여 버리겠어!”
모두 깜짝 놀라 일제히 그를 쳐다봤어요.
아치볼트는 저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젊은이예요. 지구 나이로 치면 스물 일고여덟 정도. 술을 너무 좋아해서 그렇지 나쁜 구석은 없는 사람이에요. 플럼버인이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뭔가 당황스럽네요. 이런 걸 지구에서는 뭐라고 하던데. 특히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는 감정 중 하나죠.
“애증.”
로저가 말했어요. 아, 진짜….
“로저. 또 내 생각 읽으신 거예요? 정말 이럴 거예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그것도 문제죠. 여러분! 로저가 남의 생각을 막 리딩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죽여 버리겠어!”
아치볼트의 말에 로저가 깜짝 놀라 외쳤어요.
“뭐?”
“진정하게, 아치볼트!”
워튼 씨가 그렇게 외친 건 아치볼트가 괜스레 유리컵으로 이마를 탁 쳤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이마도 컵도 깨지지는 않았고 얼음만 왈그르 쏟아졌어요.
보다 못한 로저가 영 상태가 안 좋다며 아치볼트를 하룻밤 맡기로 했어요. 아치볼트가 하도 주접… 아니, 소란을 떠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조르주는 조금 덜 우울해 보였어요. 그나저나 아치볼트 때문에 워튼 씨와 할머니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네요.
다들 피곤해서 다음을 기약하고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어요. 저도 피곤하네요.
2층으로 올라오니 은별이가 주방에 있었어요.
“은별아. 뭐 해?”
“저녁 먹어야죠.”
은별이가 식탁 위에 턱 내려놓은 냄비에는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어요.
“오, 파도 넣고 계란도 넣었네? 그런데 라면을 사둔 기억이 없는데.”
“슈퍼 가서 사 왔죠. 어서 먹어요.”
“그럼 먹어볼까.”
우리는 식탁 앞에 마주 앉았어요.
“필립도 줄까요?”
“맵고 짠 거 먹이면 안 좋아.”
“술도 마실 수 있다고 하던걸요.”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해. 아직도 자기가 사람인 줄 안다니까.”
“형은, 라면 싫어해요?”
“처음 먹어봐서 모르겠어. 그런데 맛있네. 후룩.”
“귀여워.”
“뭐라고?”
“아, 아니에요.”
잘 못 들었는데 설마 귀엽다고 한 건 아니겠죠?
아니, 잠깐. 그런데…?
“가만, 너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 필립이 뭐라고 했다고?”
“그런 말 안 했어요.”
“분명히 했는데.”
“김치 어때요?”
“어? …그러고 보니 김치 어디서 났어?”
“사 왔어요.”
“이것도 처음 먹어보는데 아주 맛있네.”
“다행이다.”
우리는 오순도순 라면을 나눠 먹었어요. 다음 휴일에는 김치를 담가봐야겠어요. 톡 쏘는 매운맛이 일품이네요.
라면을 먹으면서, 저는 정자에서 나눈 대화를 은별이에게도 대충 들려줬어요.
“사랑이 변하면 형은 어떨 것 같아요?”
“음…. 잘은 모르지만 아주 슬프겠지. 하지만 복수심이 들 것 같지는 않아. 물론 엘리아처럼 노골적으로 버린다면 어떨지 잘 모르겠어. 화가 날 것 같기는 해.”
“난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거예요.”
“좀 더 자라거든 다시 말씀하시죠, 정은별 님.”
은별이가 조그만 입을 삐죽이네요. 눈곱만한 게 사랑이 뭔지 알고나 하는 말인지, 귀여워서 안 웃을 수가 없어요.
“은별이가 요리했으니까 설거지는 형이 할게.”
“그럼 같이 해요.”
그릇 몇 개 된다고 극구 함께하자고 하네요. 제가 그릇을 씻으면 은별이가 행주로 물기를 닦았어요. 시간이 두 배는 걸리지만 은별이가 즐거워하니 좋아요.
“형, 고마워요.”
“응?”
“나를 위해 남겠다고 결정한 거요.”
“별말씀을.”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같이 자도 돼요?”
“뭐라고?”
“그냥, 오두막에서처럼 같이 자고 싶어서.”
“아니. 오늘은 네 방에서 얌전히 자는 거야.”
그 말에 요 녀석이 ‘고마워요’는 어디다 팔아먹고 입이 한 냄비 나왔네요. 행주를 비틀어 짜는 폼이, 왜 제 목이 비틀리는 기분인 거죠? 탁탁 터는데 왜 제 어깨가 움츠러들죠? 요게 제법 카리스마를 부리네…?
“그럼 가서 잘게요.”
“정은별. 그 태도 뭐야?”
“뭘요. 괜히 트집 잡지 마세요.”
“허!”
“안녕히 주무세요!”
팩 돌아서서 나가버리는 품이…. 저것도 애증의 한 단면일까요?
그런데 이건 또 왜 생각나는 걸까요? 아치볼트의 말이요.
“엘리아가… 잠자리를 계속 거부했어요.”
“헐! 미쳤나?”
그날 밤 저는 은별이와 아치볼트의 얼굴이 뒤섞인 ‘몬스터’가 이를 갈며 달려드는 악몽에 시달렸어요.
‘죽여 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