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엘리아와 아치볼트의 이야기는 플럼버 회원들에게 꽤 큰 충격이었나 보다. 그들은 다방면으로 그 문제를 분석하며 수차례 토론의 장을 가졌다.
솔직히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연인끼리 사귀다 헤어지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 법석인 거지? 하지만 내가 나서서 그게 뭐가 그렇게 충격이냐고 물으면 다들 더 충격받을 것 같은 분위기라서 잠자코 있었다.
“워튼 씨는 언제 오시나요, 로저?”
루나가 물었다. 루나는 아치볼트뿐 아니라 워튼 씨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가만 보면 로맨스 드라마만큼이나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연락했는데 일이 많다고 하시더군.”
원래도 그랬지만 제주 여행 이후 로저는 거의 매일 루나커피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한술 더 떠서 이제 에릭까지 달고 다녔다.
에릭은 여행 이후 로저의 집에서 묵고 있었다. 아무래도 눌러살 모양인 것 같았다. 들키면 불법체류라고 말은 하면서도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가뜩이나 다들 외모도 눈에 띄는데 저러다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원, 쯧.
루나 말로는 에릭과 희상이 형이 사귄다는데 헐, 안 어울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되게 잘 어울린다.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라고 할까, 감귤과 헤이즐넛 크림처럼 말이다.
루나커피 ‘관계자’ 중 최연소이지만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나는 엘리아가 아치볼트를 버렸느니, 아치볼트가 애증의 포로가 되었느니 하는 이야기에는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에릭과 희상이 형의 연애는 좀 충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충격이라기보다 초조해졌다고 할까, 왠지 선수를 뺏긴 느낌? 아무튼 좀 떨떠름했다.
그나저나 에릭은 볼수록 매력 쩌는 남자였다. 객관적으로 로저만큼 미남은 아니지만, 상대를 유연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좀 능글맞은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가만 보면 그럴 때마다 희상이 형이 얼굴을 붉히는 것 같았다.
내가 본 것만 열 번도 넘게 희상이 형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눈에 핑크하트를 담아 에릭을 쳐다보곤 했다. 쉽게 말해 홀딱 반한 표정이었다. 에릭은 한 마디로, 꼬시는 기술이 뛰어난 남자였다.
‘배울 점이 있어.’
아무렴, 사람은 늘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에릭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희상이만큼 날 사로잡는 이는 없을 거야.”
가끔 느끼한 발언을 일삼기도 하고 느긋하게 상대를 보며 슬쩍 웃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희상이 형은 어쩔 줄 모르고 웃어댔다.
희상이 형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에릭이 나를 발견했다.
“정은별 꼬마.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처음부터요.”
“처음이라면, 로저와 내가 여기 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
“네.”
말을 나누면서도 내 예리한 눈은 에릭의 행동과 표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어딘지 느끼하면서도 시선을 끄는 아우라의 실체는 외모 말고도 여유로운 저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한 손. 두 손도 아니고 꼭 한 손만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저 사람은 늘 저러고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아주 약간만 기울이고 실실 쪼개는….
“은별아. 뭐 하고 있어? 공부 안 해도 돼?”
주방에서 나온 루나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지금 하고 있어요.”
“지금? 무슨 말이야? 그냥 주머니에 한 손 찔러 넣고 웃고 있는 것 같은데.”
똑같이 한 것 같은데, 내 아우라에는 기름기가 안 흐르나?
루나는 이내 내게서 주의를 돌렸다.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로저와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로저는 루나의 일을 돕는 척하면서 그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방에서 새로운 메뉴를 만드는 중이었다.
“워튼 씨 이야기를 못 들어서 계속 궁금증이 남아있어요. 무슨 생각으로 안 간 걸까요?”
“당연한 거 아냐? 그 할머니와 잘해볼 생각이겠지.”
“정말 낭만적이네요!”
나는 주방이 훤히 보이는 쪽의 카운터에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정하게’ 주방을 나왔다. 내 곁을 스칠 때 내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이씨.”
“이리 와. 루나가 새로운 디저트 시식하잔다.”
“오! 사장님. 저도 먹어도 돼요?”
희상이 형이 물었다. 대답은 루나보다 에릭이 더 빨랐다.
“루나가 못 먹게 하면 내가 사주지.”
“아하하! 사장님은 절대 그런 분 아니에요.”
어우…. 으웩이다. 안 그래도 루나와 로저의 표정도 나만큼이나 썩은 빵 씹은 표정이었다.
아무튼 새 디저트라니, 쭐레쭐레 쫓아가 루나의 옆에 앉았다. 에릭과 희상이 형은 카운터에서 따로 먹겠다며 접시를 들고 가버렸다. 둘은 딱 붙어 서서 케이크 한 개를 굳이 포크 하나로 번갈아 가며 나눠 먹었다.
우리 셋은 똑같은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다가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새로운 케이크를 한입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런데….
“우와! 이거 뭐예요? 엄청 맛있어요!”
“그래? 마스카포네 크림치즈를 넣은 초코 퍼지 브라우니인데, 이름을 아직 못 지었어.”
“사랑을 녹여 만든 디저트!”
“오!”
“제법이군.”
“우리 은별이가 이렇게 영리하다니까요.”
루나는 몹시 흥분하면서 나를 머리 위에 올려놓을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가 기뻐하는 건 좋지만 아들 잘 둔 학부모 흉내를 내는 건 좀 그랬다.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기에 루나는 테이블을 떠났고, 나는 로저와 둘이 남았다. 나는 로저를 흘긋 보고는 여행 이후 줄곧 말하려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한테 주신 거 돌려드릴까요?”
“몽땅 다 말이냐?”
“네.”
로저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쿨한 척하지 마라.”
“난 원래 쿨한데요.”
그가 피식 웃었다.
“도킹에 실패하면 절반만 돌려받겠다고 했다.”
“절반이나 거저 주겠다니, 그렇게 부자세요?”
“반으로도 충분해. 서류를 봤으면 알 것 아니니?”
“안 봤어요.”
“왜?”
“내 거라고 생각 안 했으니까.”
“오성전자 주식만 돌려줘.”
“그것만 빼고 드릴게요.”
“못된 녀석.”
나는 고소하고 재미있어서 키들거렸다. 로저가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로저는 심통 맞은 얼굴로 포크를 집어 들더니 사랑을 녹여 만든 초코 퍼지 마스카포네 디저트를 한입에 쓸어 넣었다. 그런 내 마음까지 읽은 게 분명했다.
“메일로 보내드리면 돼요?”
“후견인 설정한 것만 철회하면 돼. 그리고 네게 절반을 양도한다는 서류를 다시 작성해 줄게.”
“필요 없다니까요. 오성전잔지 육성전잔지도 농담이에요. 다 가져가세요.”
“자식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생각해.”
“후회 안 해요.”
그만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로저가 창밖을 보더니 오만상을 찡그렸다.
“저 자식이야.”
“네?”
“제주도 치킨집의 그 뿔테안경.”
“어디요?”
“쉿! 쳐다보지 마.”
나는 눈동자만 옆으로 살살 굴렸다. 골목에 주차된 차들 사이에 갈색 안경을 쓴 남자가 보였다.
“리딩 좀 해보세요.”
“거리가 너무 멀어.”
“가능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데요?”
“리딩은 아주 가까워야 해. 지금 너와 나 정도.”
“오! 이제부터 아저씨랑 얘기할 때는 멀리 물러나 있어야겠구나.”
“멋대로 리딩 안 한다고 했잖아.”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로저는 머리를 넘기는 척하며 창밖을 슬쩍 보았다.
“미행해 봐야겠다.”
“저 사람이 진짜 수사관이면 호락호락 미행당하겠어요?”
“모르나 본데, 난 플럼버에서 항공국에 근무하기 전에 잠깐 경찰 일을 했어.”
“헤? 진짜요? 그거 루나도 알아요?”
로저가 비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네가 툭하면 루나라고 부르는 걸 루나도 아니?”
그 말을 마치고 그가 문을 향해 빠르게 걸었기에 반박할 틈도 없이 나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조카인 척하고 따라갈게요. 그럼 저 사람도 의심 안 할 것 같지 않아요?”
“흠, 좋아.”
우리는 루나커피를 나와 남자의 뒤를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봐도 외모와 복장은 그저 평범한 아저씨 같았다.
“근데, 뿔테안경이 좀 깨요. 원래 수사관들은 저런 안경 잘 안 쓰지 않아요?”
“누가 그래?”
“경찰이 안경 쓴 거 못 본 것 같아서요. 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 말이에요.”
“현실과 드라마는 달라.”
“하지만 총 쏘거나 막 뛰고 그럴 때 안경은 불편하지 않을까요? 렌즈가 더 편할 텐데.”
“솔직히 네 말이 맞아.”
“쳇,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맨날 타박부터 하시는 거죠?”
“엇! 저 자식, 눈치챈 건가?”
로저의 말에 흠칫 놀라 쳐다보자, 진짜로 남자의 행동이 이상했다. 우리가 쫓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골목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은별이 넌 가게로 돌아가라!”
“싫어요.”
“에잇, 이판사판이다. 거기 잠깐!”
로저가 크게 외치며 뛰기 시작했다. 나는 죽어라 그를 쫓아 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짧은 다리를 실감하는 또 하나의 증명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뒤처지고 말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낯선 골목이지만 어차피 집 근처라서 별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나는 뛰던 방향을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오가 다 되어갔다. 정수리가 따가울 정도로 햇빛이 뜨거웠다. 어느 집에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걸어갈수록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에 문득 나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벼라… 어엉… 엉…. 벼리 형아….”
내 발이 멈췄다. 아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다시 뛰었다.
“형아… 어어엉….”
숨이 턱까지 찼다. 울음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준아! 준이니?”
내가 외치자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골목 양옆으로 자동차가 빈틈없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차들 사이를 살피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준아!”
차 밑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벼라.”
정말로 준이였다.
준이를 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아이의 몰골이 너무 처참해서였다. 몇 달 전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 지저분한 얼굴이 며칠 제대로 씻지도 못한 것 같았다. 나처럼 얻어맞은 얼굴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준아!”
준이는 나를 향해 뛰어오다가 넘어질 뻔했다. 서둘러 달려가 아이를 안아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군데군데 버짐이 핀 뺨을 타고 지저분한 눈물이 흘렀다.
“벼리 형아… 진짜 형아지?”
“어떻게 온 거야, 너 혼자야?”
“엄마가….”
“이모가?”
“루나커피에 형 있다고, 기차 타고….”
“이모랑 같이 왔다고?”
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모가 루나커피를 알아? 나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그보다 이모는 어디 있어?”
그 질문에 준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면서 또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로저였다. 지금은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도와주세요, 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