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38화 (38/103)

<38화>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에릭이나 희상이나 똑같아요. 둘이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네요. 사무실에서 한참 시시덕거리더니 나와서도 딱 붙어가지고, 남의 영업장에서 무슨 짓이죠?

“에릭. 손님이신데 테이블에 가서 앉아 계세요.”

“엇, 루나. 내가 손님이라니? 난 우리가 한 식구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바쁠 때 서로 돕는 게 식구잖아. 안 그런가?”

“지금은 그 정도로 바쁜 시간은 아니에요.”

“그럼 잠시 쉬지 그러나.”

“네에?”

“그래요, 사장님. 잠깐 쉬세요.”

허! 희상이까지. 완전히 에릭한테 넘어간 것 같아요. 에릭이 몇 살인지 알아도 희상이가 저렇게 헤벌쭉할 수 있을까요?

“루나. 여긴 우리한테 맡기고, 필립 좀 데리고 들어가지 그래? 저기서 계속 뭉개고 있는 게 영 수상쩍은데.”

“헐!”

아니, 저건 또 무슨 못된 장면일까요? 에릭의 말에 돌아보니, 필립이 손님 무릎 위에 앉아 품에 얼굴을 부비부비하고 있어요. 저 손님은 분명 길 건너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이에요. 거의 매일 루나커피에 오는 단골손님 중 하나랍니다. 이름이 뭐였지?

“이체….”

“응?”

“이름이 이체… 뭐였는데.”

“이름도 알아?”

“저 앞 은행에 근무하는 아가씨거든요. 우리도 이용하는 은행이라서 잘 알아요.”

“오호. 은행원이라 이름이 ‘이체’야?”

“필립이 재롱 좀 떠는 게 왜 수상쩍어요?”

희상이의 질문이었어요. 에릭이 저를 흘긋 보고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어요.

“아, 그게…. 필립은 어쩐지 바람둥이 고양이일 것 같아서 말이야. 예쁜 여자만 보면 저렇게 엉기잖아.”

“하하하. 진짜 재밌어요.”

“내가 또 우리 희상일 웃겨줬나?”

하! 우리 희상이? 어우, 어우.

저는 슈크림 세 개를 접시에 담아가지고 이체, 뭐라는 아가씨의 테이블로 다가갔어요. 그리고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아가씨의 이름이 생각났어요.

“안녕하세요. 이채영 씨죠?”

“어머! 루나 사장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요.”

함께 앉은 두 여성이 박수까지 치며 부러움을 표현해주시네요.

“채영이 너 출세했다.”

“나도 자주 왔는데…. 회사가 좀 멀어서 매일은 못 오지만.”

제가 이름을 기억해준 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일인 걸까요? 훗…. 우쭐한 것은 아니랍니다. 저는 이런 일로 일일이 우쭐해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자주 와주셔서 감사의 뜻으로, 이건 서비스입니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사진, 사진부터! 루나 사장님 서비스라고, 태그 잊지 마.”

화려한 리액션과 함께 손님들께서 ‘아름다운 슈크림’에 휴대폰을 들이대는 동안, 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채영 씨의 품에서 뭉그적거리는 필립을 안아 들었어요.

“우리 필립이 너무 귀찮게 해드리네요.”

“아, 괜찮은데. 너무 귀여워요.”

“충분히 귀여워해주셨어요.”

“야옹!”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버둥거리는 필립을 꽉 끌어안고 저는 서둘러 돌아섰어요. 빠릿빠릿하게 사무실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필립의 목덜미를 턱 잡았어요.

“아빠, 좀!”

“야옹! 이 불효막심한 놈! 애비 모가지를 막 잡아들어?”

“진짜 이럴 거예요?”

“내가 뭘?”

“저 아가씨 가슴에 막 부비부비하는 거 다 봤거든요.”

“그게 어때서? 난 고양이잖아.”

“이럴 때만요? 평소에 고양이라고 하면 할퀴려고 덤비면서!”

“야옹야옹.”

“뭐라고요?”

“말이 안 통한다고.”

“누가 할 소리를!”

“엇,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딴청 피워봤자 소용없어요.”

“진짜야. 위층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우리 애들 목소리는 아니야.”

미심쩍었지만 제 귀에도 살짝 들린 것 같았어요.

저는 필립을 옆구리에 끼고 2층으로 올라갔어요. 그랬더니, 믿어지지 않네요. 도둑이 들어왔지 뭐예요.

“야옹. 라라가 왔구나.”

“태평하게 말씀하실 일이에요?”

“다급하게 말해봤자 그게 그거지.”

“저 아줌마가 이제 무단침입까지 하네! 진짜 배운 데가 없잖아.”

저는 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소파 옆으로 갔어요. 고양이 텐트 옆 새장에는 미오가 들어있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또 탈출을 감행하는 걸 보고 도로 가둬놓았거든요. 미오와 라라, 두 고양이가 창살을 사이에 두고 슬픈 연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네요.

“아줌마!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막 들어오고, 혼나고 싶어?”

불륜 커플이 뭘 잘했다고, 시끄럽게 합창을 하네요.

“야옹야옹.”

둘이 한꺼번에 떠드니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아빠.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야옹,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달라는데?”

“이것들이,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고 했지? 미오! 너 자꾸 이 아줌마 끌어들이면 이 아줌마 털을 홀랑 밀어버릴 거야!”

흐억! 귀가 따갑게 야옹거리네요. 필립이 제 손등을 콱 물었어요.

“아얏! 아빠! 왜 물어요?”

“남의 집 귀한 딸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라라도 한때는 자기 아빠 딸이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네가 드라마를 너무 봤다.”

“그건 내가 할 소리죠. 저것들이야말로 드라마를 너무 봤다고요!”

“애까지 생겼는데 뭘 어쩌겠다는 거야?”

“막말로 그 애가 미오 애인지 어떻게 알아요?”

헐, 그 말에 라라가 승냥이처럼 울부짖네요. 아주 그냥 생쇼를 해요.

“좋아요. 라라 주인한테 가서 일러야겠어요.”

“아니, 잠깐. 루나….”

“야옹!”

필립이 저를 말리려는 듯 버둥거렸지만 저는 이미 라라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 순간이동을 해버렸어요.

잠시 후, 저는 양 옆구리에 고양이를 한 마리씩 끼고 라이프주택 304호 문 앞에 서 있었어요.

“야옹, 뭘 어쩌려고? 이건 실례지!”

“이게 왜 실례예요? 이 집 주인도 자기 고양이 행실이 어떤지 정도는 알아야죠.”

저는 씩씩하게 초인종을 눌렀어요. 안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어요.

- 누구세요?

“아, 저는 큰길에 있는 루나커피 사장인데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 어머나! 루나 사장님이시라고요? 잠깐만요.

이내 문이 열렸어요. 젊은 주부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반색을 해주시네요.

“어쩜! 진짜네. 저 거기 가끔 들르는데.”

“정말요? 그러고 보니 안면이 있네요.”

“절 기억하세요? 어쩜, 너무 영광이에요.”

말했듯 저는 이런 일로 우쭐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반겨주시니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사장님이 우리 집에는 무슨 일로?”

주부님의 질문에 저는 잠시 눈을 굴렸어요. 여기 왜 왔더라…? 아, 그렇지! 순간 잊을 뻔했지만 양손이 묵직하니 금방 다시 생각났어요.

“아! 이 고양이 때문에 왔어요.”

“어머! 라라. 너 언제 또 나갔어? 얘가 요즘 자꾸 밖에 나가네요.”

저는 주부님에게 라라를 건네 드렸어요.

“어떻게 사장님이 우리 라라를…? 우리 집 고양이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일전에 우리 고양이가 이 집에 온 걸 봤거든요. 실은 라라가 우리 고양이 중 하나와 사귀고 있어서요.”

“정말요? 설마 이 예쁜 고양이랑?”

주부님이 제 옆구리에 끼인 필립을 가리켰어요. 필립의 눈에서 광선이 나오네요.

“야옹!”

“아, 아뇨. 이 고양이의….”

“야옹! 너 이눔 자식이, 나한테 고양이랬어?”

“새끼 중 한 마리요.”

“정말요? 그럼 라라가 밴 새끼의 아빠가…?”

“우리 미오랍니다.”

“어머나! 정말 잘됐네요!”

“네에…?”

“그럼 이 고양이가 우리 라라의… 시아버지?”

“야옹!”

“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보다 제 눈에 흙이….”

“웬일! 그럼 우리 사돈지간인 거예요? 호호, 세상에!”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우리 미오는 아직 청소년….”

이럴 수가! 주부님은 수다 신공인가 싶게 말이 많았어요. 존경스럽네요.

“어쩜! 라라가 날 닮아서 눈이 높다니까. 새끼 낳으면 분양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데려가서 키우실 거예요? 저희는 보다시피 연립이고 공간이 넓지 않아서….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사장님을 이렇게 세워두고. 잠깐이라도 들어오세요. 차라도 한잔하세요. 아니 참, 차나 커피는 매일 실컷 드시죠? 그럼 식혜 좀 드셔보세요. 친정엄마가 이 동네 사셔서 자주 만들어주시거든요. 자, 들어오세요. 어서요.”

“아니, 지금 그럴 시간이….”

“식혜 한잔 마시는데 시간이 뭐 오래 걸리나요. 커피숍에서 이런 건 안 하시잖아요. 드셔보시면 반할 거예요.”

우선 말해두는데, 식혜라는 음료는 저에게 신세계였어요. 정말 맛있었답니다.

주부님은, 아. 주부님에게는 이제 막 돌 지난 아들이 있는데 이름이 샘이라서 샘이 엄마라고 불러 달라고 하셨어요.

샘이 엄마 님은 친절하게도 친정엄마한테 식혜 만드는 법을 물어봐서 꼭 알려주신다고 하셨답니다. 대충 들어도 복잡해 보였지만 꼭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결국 30분이 넘게 수다를 떨다가 나왔답니다. 애초에 뭣 때문에 그 집에 갔는지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까먹었어요.

“야옹, 바보.”

“그런 음료는 처음 먹어봐요. 어떻게 생강 맛이 나죠? 진저브레드나 생강 쿠키 같은 원리일까요?”

“눈에 들어간 흙은 어떻게 된 거냐?”

“눈에…. 어우, 당연히 흙이 들어가도 안 되죠.”

“그놈의 흙은.”

“아빠는 벌써 할아버지가 되는 건데 괜찮아요?”

“야옹! 안 돼!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앙대! 앙댄다고!”

“아이, 시끄러워.”

쳇, 그동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더니 시아버지 소리는 듣기 싫은지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마냥 흥분하네요.

“미오, 이 불효막심한 놈! 새파랗게 젊은 애비를 벌써 할애비로 만들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바람직하게 화를 내시네요.”

“야옹?”

떠들어대던 필립이 앞발을 들어 뭔가를 가리켰어요.

“저거 봐라?”

우리는 막 골목을 빠져나오는 참이었답니다. 필립이 가리킨 큰길 어귀에는 택시가 한 대 정차 중이었죠.

“어? 은별이다.”

“야옹? 로저잖아.”

묘한 장면이었어요. 로저가 은별이를 택시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어요. 이내 택시는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무슨 일이죠?”

“굉장히 급해 보이는데?”

“좌표를 열어볼까요?”

“지구방식으로 전화를 해보지 그러냐?”

“오! 그럼 되겠네.”

“바보.”

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어요. 필립이 제 휴대폰 화면을 흘긋 보고는 귀를 쫑긋 세웠어요.

“야옹! 그거 뭐냐?”

“왜요?”

화면에는 ‘깨물고 싶게 귀여운 은빛아가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어요. 은별이 번호랍니다.

“캬오! 유치해.”

“쳇! 별꼴 다 보네. 내 휴대폰에 내 맘대로 이름 짓는데 뭘 유치하고 말고 해요?”

그때 신호가 멈추고 은별이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 여보세요.

“어, 은별아. 너 지금 어디 있어?”

- 아, 저…. 그, 골목에서 친구를 만나가지고… 걔네 집에 가는 중이에요.

“친구…?”

- 네. 이선호라고, 아시죠? 머리에 힘주고 키만 멀대같이 큰 애.

“어어. 알지. 걔네 집이 어딘데?”

- 가, 가까워요.

“그래. 저녁 먹을 때까지는 올 거지?”

-네, 그럼요.

“알았어. 잘 다녀와.”

굉장히 서두르는 것처럼 전화가 끊겼어요. 참 묘한 일이네요.

“왜 거짓말을 하죠?”

“야옹, 둘이 바람났나?”

“아빠. 제발 아무 말이나 막 던지지 좀 마세요.”

“그러게. 아무리 봐도 로저랑 은별이는 아닌데.”

“시끄럽고, 빨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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