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40화 (40/103)

<40화>

참 이상하기도 하지요.

“선호랑 잘 놀았어?”

“네.”

“그게 다야?”

한껏 시치미를 떼는 얼굴이, 호… 제법 그럴듯하네요. 거짓말에 소질이 있나? 은별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저를 쳐다봤어요. 전혀 찔리는 얼굴이 아니에요.

“야옹, 벌써부터 슬슬 마누라를 속이고 다니네.”

“아빠, 조용히 하세욧!”

너무 쏘아붙였나? 저도 모르게 필립에게 건넨 말이 너무 쌀쌀맞았나 봐요. 엉뚱하게 은별이가 움찔 떠네요. 슬슬 눈동자를 굴리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지 궁금해 죽겠네. 슬쩍 리딩 한 번…. 어허, 안 되죠. 그럼요.

그런데 은별이가 이내 이실직고하지 않겠어요?

“저…. 실은 로저네 집에 다녀왔어요.”

오, 역시. 그럼 그렇지. 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필립을 ‘꼬나’ 봤어요.

“야옹, 왜? 뭐?”

“은별이랑 얘기 중이잖아요. 아빠는 좀 나가 계세요.”

“야옹, 여기가 뒷마당인데 어디로 나가?”

“그래서, 은별아. 갑자기 로저네 집에는 왜?”

“그게…. 실은 루나를 플럼버로 보내기로 했을 때 로저가 재산을 제게 양도한다는 서류를 줬거든요.”

“으흥.”

“그걸 돌려준다는 말을 하려고요.”

뒤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다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얘기를 하려고 택시까지 타고 로저네 집에 갈 필요는 없잖아요.

거짓말이 분명한데 자꾸 거짓말을 하니까 점점 더 궁금해졌어요. 분명 별 것 아닐 걸 알면서도 말이죠. 그래도 아이를 자꾸 윽박지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믿는 척해주기로 했어요. 차라리 로저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알았어. 그만 올라가서 쉬어.”

“네!”

“야옹….”

“쉿!”

은별이는 제 목소리에 방문을 열다가 뭔가 찔리는 얼굴로 돌아봤어요. 저는 필립의 꼬리를 슬쩍 밟으며 손짓했어요.

“아냐, 어서 들어가. 어서.”

“야옹….”

은별이가 방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저는 본격적으로 눈동자를 굴렸어요.

“뭐죠?”

“야옹, 꼬리는 밟고 난리야! 후레자식!”

“로저한테 전화해볼까요?”

“둘이 짰겠지. 바른대로 대답하겠어?”

“짰다고요? 뭘, 왜요?”

“낸들 아냐?”

아무튼, 세윤이를 보낼 시간이 다 되어서 가게로 들어왔어요.

오늘따라 세윤이도 뭔가 초조해보였어요.

“세윤 씨. 일 있으면 일찍 가봐.”

“30분 남았는데요….”

“괜찮아. 그런데 진짜 무슨 일 있어?”

“실은…. 오늘 오디션 있어요.”

“뭐? 왜 그 말을 이제야 해!”

“아직 시간은 넉넉해요.”

“그래도, 그런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에 일이 손에 잡히겠어? 어서 가봐.”

그 말에 세윤이 반가운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네요.

“감사합니다! 내일 30분 더 할게요.”

“괜찮으니까 시험이나 잘 봐. 행운을 빈다.”

“네!”

세윤이가 가고 나니 은근 바쁘네요. 단골손님이 들어오셨어요. 거의 매일 퇴근 시간에 들르는 회사원이세요.

“사장님. 아아랑 양파 베이글 하나 주세요.”

“네에-”

“포스 찍을게요.”

“그래. 고맙….”

설거지하던 중이라 고무장갑을 벗는데 엉뚱한 목소리가 들리네요. 어느새 은별이가 카운터 안에 들어와 있었어요.

참, 일전에 뒷마당에서 은별이가 고사리손으로 망치질을 하고 있기에 뭔가 했더니 포스기 아래에 놓아둘 발 받침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계산대를 사용하려면 키가 모자라서 제 딴에는 고민했던 모양이에요. 아래에 바퀴를 달아 집어넣을 수도 있게 만들었답니다.

손재주도 좋고 눈썰미도 있고, 뭣보다 성실해요. 저 나이에 성실하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예요.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할까요?

“더블 샷 내릴게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치고 들어오니 하지 말랄 수도 없고, 손님들 반응도 좋고 말이죠.

“은별이 바리스타 다 됐네요.”

손님께서 어느새 은별이 이름까지 기억하신 모양이에요.

“애가 부지런해서 놀 줄을 몰라요.”

“그러게요. 볼 때마다 기특해요. 우리 애도 은별이처럼 크면 좋겠어요.”

“아이가 있으세요?”

“네. 초등학생이에요. 한창 손이 갈 나이라 일하랴 육아하랴 힘드네요. 집에 가서 저녁 준비할 때까지 힘내려고 루나커피 빵이랑 커피 한잔 사서 운전할 때 먹는 게 일과 중 제일 즐거운 시간 중 하나예요.”

“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뿌듯하네요.”

“아이스아메리카노랑 따끈따끈 양파 베이글 나왔습니다.”

은별이가 씩씩하게 외치자 주위의 손님들이 다 돌아보며 웃네요. 하긴, 누가 봐도 귀엽죠.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왜 거짓말을 하는 거죠?

*

은별이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영업을 마쳤고, 문 닫을 시간이 되었어요. 손 빠른 은별이는 벌써 대걸레로 바닥을 밀고 있었어요. 저는 문을 닫아걸고 블라인드를 친 다음, 플럼버 식으로 청소를 시작했어요. 대걸레가 저절로 움직이자, 은별이는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손뼉 치며 좋아했어요.

“와! 볼 때마다 신기해. 해리포터 같아요!”

“올라가자. 우리도 저녁 먹어야지.”

우리는 나란히 2층으로 올라갔어요.

“미오가 또 새장에 갇혔네요.”

새장 안의 미오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어요. 필립에게 뭐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데 필립은 소파에 길게 누워 구시렁거리고 있었어요.

“야옹, 낸들 힘이 있냐? 네 형 고집 몰라? 너 풀어줬다간 애비 털이 깎인다고.”

흥! 말을 섞을 가치가 없어서 주방으로 직행했어요.

“은별이, 오늘은 뭐 먹고 싶어?”

“뭐든 좋아요.”

“에이. 이제 너도 의견을 말해 봐. 형이 웬만한 요리는 다 할 줄 알아.”

“음…. 그럼 김치찌개?”

“그건 간단하잖아. 그럼 오늘은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좋아요! 제가 쌀 씻을게요.”

가게에서도 주방에서도, 어느새 우리는 각자 포지션이 생겨서 흐름에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어요.

빠르게 움직여 찌개를 다 끓이니, 쌀을 씻던 은별이가 킁킁거리네요. 찌개 냄새가 좋긴 한가 봐요.

“맛 좀 봐줄래?”

“와, 진짜 맛있어요.”

“처음 끓이는 거라 걱정했는데.”

“끝내줘요.”

“언젠가 로저도 김치찌개 얘기를 했거든. 식당에서 사 먹었는데 홀딱 반했다고 하더라.”

“그 식당 것보다 이게 더 맛있을걸요. 계란은 몇 개 깰까요?”

“필립도 계란은 좋아해. 넉넉히 하자.”

저는 채소를 다지고, 밥을 안친 은별이는 계란말이용 계란을 깨서 풀었어요.

“그래, 그래서 로저가 그 동물용 피리의 비밀은 풀었다던?”

“네? 아, 아뇨. 아직.”

“로저 집 엄청 깔끔하지?”

“형도 가봤어요?”

“응. 주로 루나커피에서 모이지만 가끔 로저네 집에서도 모이거든.”

“그럼 다른 회원들 사는 곳으로는 안 가나요?”

“로저는 여러 번 가봤나 본데, 난 여간해서는 루나커피에서 멀리 나갈 마음이 없어서.”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어느 순간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어요. 제가 계란 물을 프라이팬에 부었거든요.

이렇게 긴장한 이유가 있답니다. 계란말이 첫 도전이거든요.

“후아, 나 떨려.”

“형은 할 수 있어요.”

“그럴까?”

“그런데 왜 마법을 쓰지 않아요?”

“이건 마법이 아니라니까. 마법은 알지도 못하는 기술을 척척 해내는 건데 플럼버인들은 자기가 할 줄 아는 일들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 것뿐이야. 그러니 나에게 미지의 영역인 계란말이의 스킬은 한국인보다 조금도 빠르게 해낼 수 없는 거지.”

“그렇구나. 좋은데요?”

“뭐가?”

“뭐든 다 해내는 마법이란 건 매력 없잖아요.”

“우리 은별이, 그렇게 예쁘게 말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헤헤. 형만 보면 저절로 예쁜 말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은 요렇게 예쁘게 하면서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엇, 타겠다. 불을 줄일까요?”

“응? 응.”

“요기부터 시작해요.”

“요기부터 시작….”

저는 은별이가 가리키는 쪽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어요. 우리는 프라이팬 위에서 이마를 맞붙이고 있었어요. 젓가락으로 신중하게 포를 떠서 뒤집개를 계란 아래로 밀어 넣었어요. 이 부분이 중요하네요. 뭐든 첫걸음을 조심해야 하나 봐요.

“말린다, 말린다….”

드디어 말렸어요. 노랗게 익은 계란이 금세 도톰한 모양이 되었어요.

“와! 성공. 형은 대단해요! 이제 조금 끌어와서 계란 물을 마저 부으면 된대요.”

“부어, 부어.”

“야옹, 밥 줘.”

쳇, 팔자 좋은 고양이님이 납시셨네요.

“필립! 형이 계란말이를 성공시켰어요.”

“야옹, 누가 보면 금메달 딴 줄 알겠다.”

“이러다 형 한식 장인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곧 조심조심 완성한 계란말이를 능숙한 솜씨로 썰었어요.

“하나 먹어볼래?”

후후 불어 입에 넣어주니 오물거리며 맛있게도 먹네요. 앙증맞은 저 입으로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오늘 중으로 알 수 있을까요?

“우아! 꿀맛이에요.”

“야옹, 계란말이는 내 거야!”

“알았어요. 아빠 많이 드세요.”

어쨌든 기쁘네요. 계란말이는 처음 해봤는데 아주 재미있는 요리예요.

제가 식탁을 마저 차릴 동안 은별이는 고양이들 밥을 챙겨주고, 새장에 갇힌 미오에게도 밥을 가져다줬어요.

“형. 미오가 단식투쟁하는 것 같아요.”

“내버려 두고 와서 밥 먹어.”

제까짓 게 단식투쟁해 봤자지. 가소로워서 웃을 수도 없네요.

“야옹, 매정한 놈. 동생이 굶어 죽어도 상관없냐?”

“미오 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한번 보세요. 한 끼 굶는다고 안 죽어요.”

“그럼 나도 안 먹어!”

“계란말이도 안 드실 거죠?”

“그것만 먹을래.”

“트집 그만 잡고 어서 드세요. 은별아, 먹자.”

“…….”

그런데 은별이가 생각에 잠긴 듯 찌개 냄비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어요. 그 얼굴은 무척 울적해보였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거짓말을 한 것과 연관 있는 생각이겠죠?

“은별아?”

“네? 아, 네. 잘 먹을게요.”

“무슨 걱정 있어?”

“아니에요.”

대체 무슨 일인데 도통 말을 안 하는 걸까요? 사춘기인가? 그거랑 로저 집에 간 거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궁금해 죽겠네.”

“네?”

“아, 아냐. 어서 먹어.”

“정말 맛있어요.”

다행히 밥은 잘 먹네요. 혹시나 식사 중에 털어놓을까 했는데 은별이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궁금궁금….”

“뭐라고 했어요?”

“아냐. 나도 김치찌개가 좋아졌다고.”

“형이 너무 잘 끓여서 더 맛있는 거예요.”

“후후, 그런가?”

이렇게 마음씨도 고운데.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니? 응? 은별아.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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