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44화 (44/103)

<44화>

멀쩡하던 와플 기계가 고장 났지 뭐예요. 마침맞게도 은별이가 나가고 난 직후에 말이에요.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누군가의 일상이 이렇게 꼬여버리는 거랍니다.

“이런 거지 같은! 에잇!”

절로 포악한 언행이 튀어나왔어요. 조금 노력하면 욕도 튀어나올 것 같네요. 희상이도 놀랐는지 티스푼을 떨어뜨렸어요. 제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멀티탭 콘센트의 스위치를 켜주네요.

“…….”

그러고는 제가 민망할까 봐 그러는지 아무 말 없이 자기 포지션으로 돌아갔어요.

“누가 이걸 꺼놓은 거야? 필립이지? 필립!”

“필립은 오늘 한 번도 못 봤는데요….”

그때 타이밍 좋게 카페 문이 열렸고, 희번덕거리던 제 눈이 종소리가 울리는 쪽을 향했어요.

“흥! 에릭이네. 아주 그냥 참새방앗간이 따로 없구만!”

제 말투에 희상이가 또 한 번 몸을 떨었어요. 사실 희상이 들으라고 한 말이 맞았어요.

그나저나 저 꼬라지 좀 보라죠. 에릭 말이에요. 기름통에서 기어 나온 꼴이네요. 숱 많은 머리에 왁스를 처바르고 잘생긴 이마 자랑이나 하고 있다니. 몸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로 잘 빠진 몸매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요. 참 나, 눈꼴시어서 이제 에릭이 아니라 뺀질이라고 부를까 봐요.

“어이, 루나! 안녕.”

“또 오셨네요, 에릭.”

“어? 어쩐지 루나가 날 반기는 것 같군.”

“웃자고 하는 소리예요?”

“너무 그러지 말게. 이제 곧 절차를 밟을 거니까.”

“절차요?”

에릭은 그 말에는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싹 무시했어요. 그리고는 ‘연인’에게로 시선을 돌렸어요.

“안녕, 희상. 잘 잤어?”

“네. 에릭도요?”

목소리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는군요.

둘은 제 눈치를 슬슬 보면서… 할 거 다 하네요. 에릭이 카운터로 들어오더니 희상이 손을 잡는 게 아니겠어요? 악수하는 것처럼 잡는 게 아니라 그 뭐냐, 은밀하게 느끼하게 스르륵 잡는 거 말이에요.

그게 하도 뻔뻔해서 저는 일부러 고개를 쭉 빼고 그 꼴을 노골적으로 노려봤어요. 에릭이 제 시선을 눈치채고 흠칫 몸을 떨었어요.

“루나. 그렇게까지 쳐다보니 뭐라 할 말이 없군.”

“어딜 신성한 영업장에서 연애질이세요? 희상 씨. 주문받아.”

“네!”

당황한 희상이가 에릭의 손을 던지고 바쁜 척하네요.

“에릭. 손님이잖아요. 나가서 테이블 아무 데나 앉으세요.”

“흠. 루나가 날 질투할 리는 없고, 뭐지?”

“뭐가요?”

“어쩐지 심통이 잔뜩 난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의 루나는 처음이라 굉장히 흥미롭군.”

“흥미 같은 소리 하시네요. 지금 로저 집에서 오시는 길이에요?”

“그렇지.”

“런던엔 안 가실 거예요?”

“그것에 관해 이번 모임에서 할 말이 있네.”

“죄송하지만 전 빠질게요.”

그러자 에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왜요?”

“상당히 비슷하군.”

“뭐가요?”

“우리 엄마 갱년기 때 모습이랑.”

“뭐라고요?”

“아!”

에릭이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손가락을 튕겼어요.

“뭔지 알겠군.”

“알긴 뭘 알아요?”

“꼬마가 로저 집에 있던데.”

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에릭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어요.

“그거였군! 우리 상냥한 루나가 신경질쟁이가 된 이유.”

“무슨 말씀이세요? 손님 오시네요. 좀 나가세요. 아이, 성가셔.”

어, 그런데 또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어요. 뜻밖의 손님이 오셨네요.

“엇,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라의 주인이신 샘이 엄마였어요. 공교롭게도 라라를 안고 계시네요. 아니, 이건 공교로운 건 아닌가. 라라의 주인이니 안고 있을 수도 있겠죠.

허, 저 뚱땡이 아줌마 좀 봐. 라라가 저를 보더니 새침하게 눈을 내리까네요. 뭐야, 원한이라도 품었다 이건가?

“사장님. 저 바닐라 라떼 한 잔 주시고요, 블루베리 스콘 두 개만 포장해주세요. 그리고 이거.”

샘이 엄마가 어깨에 메고 있던 에코백에서 뭔가 꺼내 제게 내밀었어요. 받아들고 보니 1리터짜리 병에 담긴 하얀 액체…?

“이거 혹시…?”

“식혜예요. 친정엄마가 또 보내주셨는데 사장님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이렇게 귀한 걸!”

“사장님이 드신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다음에 또 가져다드릴게요. 그리고 이건 레시피예요.”

조그만 수첩을 건네주셨는데 식혜 만드는 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네요.

“어쩜 이렇게 잘 정리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쉽게 적으려고 해도 좀 복잡해요. 요즘 인스턴트로 나온 제품이 있다고 하니까 그걸로 해보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아뇨. 전 어머님 레시피로 해보고 싶네요. 이렇게 깊은 맛은 인스턴트로는 안 될 것 같아요.”

“어머! 젊은 총각이 말도 예쁘게 하시네요.”

잠시 후 희상이가 스콘과 커피를 내놓았어요.

“블루베리 스콘 포장과 바닐라 라떼 나왔습니다.”

샘이 엄마가 계산하려 지갑을 꺼내자마자 제가 얼른 말했어요.

“오늘은 서비스로 드릴게요.”

“어머! 그럼 안 되는데.”

“무슨 말씀을. 안 그럼 제 마음이 불편해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런데 사장님, 우리 언제 상견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야옹….”

라라가 저를 물끄러미 보며 야옹거렸어요. 제가 샘이 엄마 몰래 눈을 부라리자 무섭다는 듯이 주인 품에 얼굴을 묻어버리네요. 가증스러운 것!

“사장님 댁 그 하얀 고양이요, 미오라고 했나? 이제 애기 아빠잖아요.”

“풉!”

옆에서 샌드위치를 만들던 희상이가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어요. 카운터 앞에 앉아있던 에릭이 쉿! 하면서 키들거렸어요. 아주 그냥 쿵짝이 잘도 맞네.

“배 더 불러오기 전에 빨리 결혼시키자고요. 결혼식 장소는 루나커피가 좋지 않을까요?”

“그게, 샘이 엄마 님.”

“어머! 내 정신 좀 봐. 우리 샘이 우유 먹일 시간인데. 최근에 이 동네에서 아이가 납치됐대서, 아주 잠깐 집을 비우는 것도 무서워요.”

“납치요?”

“네. 젖먹이만 노린다는 말이 있어서 잠깐 뭐 하나 사러 나올 때도 안고 나오는데, 애가 감기에 걸렸거든요. 친정엄마가 애를 봐주고 계셔서 오늘은 나올 수 있었어요.”

“저런!”

“우리 라라는 얌전하고 털도 별로 없어서 샘이하고도 무탈하게 지낸답니다. 참! 라라가 온 다음에 우리 샘이가 생겼어요! 얘가 복덩이예요. 사장님 며느리 잘 보시는 거예요.”

샘이 엄마는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요란하게 웃어댔어요. 에릭과 희상도 맘 놓고 웃었어요. 당연히 저는 웃을 수 없었어요.

“그럼 또 들를게요. 상견례 날짜 생각해봐주세요!”

“그, 그게….”

“안녕히 가세요!”

제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희상과 에릭이 합창으로 인사를 하네요.

좋아요. 에릭 말이 맞아요.

저는 지금 갱년기 증상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제 마음을 제가 완전히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 말이에요. 어쩌면 제가 지구에 융합되는 과도기를 겪고 있는 걸까요? 불타는 드래곤이 자꾸만 탈출 시도를 하는 기분이에요.

저는 저도 잘 못 알아들을 말을 투덜거리며 앞치마를 벗어던졌어요. 뭣보다 아이 납치범이 돌아다닌다니 갑자기 불안해졌거든요. 젖먹이는 아니지만 은별이도 어디로 보나 오해의 여지 없는 꼬마니까요.

“에릭!”

“헉, 네?”

“저 대신 가게 좀 봐주세요.”

“오, 좋지!”

희상이가 동그란 눈을 해가지고 물었어요.

“어디 가시게요?”

“잠깐 친구 집에.”

이번에는 에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로저네 집에 가려고?”

“알 거 없어요.”

“거기 꼬마가 둘 있네. 알고 있나?”

“흥!”

저는 더 대답하지 않고 뒤쪽 복도로 향했어요. 화가 난 것은 아니에요.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 화가 나는 것과는 좀 달라요. 그럼 뭘까요? 저는 왜 이렇게 짜증을 내고 있을까요?

대문을 나와 미니밴에 올라타 로저네 집으로 향했어요. 대문 앞에 차를 세우기 무섭게 로저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어요.

- 루나? 어서 와.

저는 인사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어요. 차 문을 쾅 닫고 일부러 요란하게 대문을 열어젖혔어요. 아담한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벌써 야단법석인 집 안 풍경이 보이는 듯했어요.

“흥!”

현관문이 열리고 로저가 나타났어요.

“이 시간에 자네가 우리 집에 다 와주고!”

“죄송해요. 아무래도 제가 불청객인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루나는 언제나 환영이지.”

저는 쿵쿵거리며 로저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어요. 은별이와 준이가 나란히 서 있었어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손을 들어 보이네요.

“혀, 형….”

“여기가 선호네 집이야?”

“그게, 실은….”

제 화난 얼굴이 무서운 걸까요? 우물쭈물하는 은별이 뒤로 준이 슬쩍 숨었어요. 그걸 보니 더 부아가 치밀었어요.

“정은별.”

“네….”

“너 왜 나 속여?”

로저가 얼른 끼어들었어요.

“속인 게 아니라 루나, 은별이는 말일세.”

“로저! 저 지금 은별이랑 얘기하잖아요.”

“어어, 그, 그래.”

로저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멀찍이 물러났어요. 준이는 은별이 뒤로 아예 쏙 숨어버렸어요.

“형. 준이는 로저가 맡아준대요.”

“인마, 내가 언제…!”

깜짝 놀란 로저가 무심코 말을 내뱉는데 은별이가 비밀스러운 눈짓을 해보이네요. 하! 기막혀. 제 앞에서 저게 무슨 짓이죠?

“이모가 언제 풀려날지 몰라서, 그때까지만….”

“너 지금 뭐라는 거야?”

“그게, 형….”

은별이는 지금 문제의 요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거나, 자기 멋대로 파악했거나 둘 중 하나예요.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제 정신을 지배한 불쾌감은 그저 짜증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요. 바람이 폭풍으로 변하는 것처럼요. 알고 보니 그건 배신감이었어요.

저는 은별이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제게 먼저 의논했어야 할 문제를 얼토당토않게 로저에게 부탁하다니 말이 되나요? 제가 화를 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좋아! 그럼 너도 여기서 살아.”

“네…?”

“아니, 루나.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나한테 애를 둘이나 맡기면…!”

당황한 로저가 끼어들자 은별이가 성을 냈어요.

“아저씨는 가만 좀 계세요.”

“헐….”

“왜요, 로저. 은별이랑 아주 잘 통하는 것 같은데.”

“그런 말 말게.”

“은별이 너도 로저를 나보다 더 믿고 따르는 것 같으니 형도 이제 네 걱정 안 할게. 또 보자. 안녕.”

“엇! 형!”

저는 휙 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집을 나왔어요. 은별이가 쪼르르 쫓아오네요. 흥!

“형! 잠깐만요.”

“로저랑 준이랑 여기서 알콩달콩 재밌게 살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뭐!”

은별이는 제 앞을 막고 서서 절절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봤어요.

“저도 신세를 지고 있는데 준이 일까지 더해 형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랬어요.”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말 같지 않은 소리 마.”

저는 은별이를 밀치고 대문 손잡이를 잡았어요. 은별이가 제 옷자락을 잡고 서둘러 말했어요.

“실은!”

저는 입이 한 뼘은 나와가지고 부루퉁한 얼굴로 은별이를 돌아봤어요.

“실은, 뭐?”

“제 진심은요….”

흥! 진심 같은 소리 하네.

“진심이 뭐!”

“비웃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내가 왜 비웃어? 네 진심이란 게 대체 뭔데?”

젠장! 왜 이렇게 궁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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