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47화 (47/103)

<47화>

“쉿!”

루나가 내 입을 턱 막았다. 나도 모르게 몇 초간이나 비명을 지르고 있었나 보다.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는 귀신이 있었다. 그 귀신은 주방 한복판에 큼직하게 열려있는 좌표 안에 있었는데, 귀신치고는 지나치게 실감이 났다.

“그분이구나.”

“에…?”

루나는 주방을 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도 뒤를 쫓았다.

루나가 가게 문을 열자 얼핏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왜소한 몸집의 여자가 들어섰다. 품에 아기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10대 소녀인 줄 알았을 것이다. 여자는 퀭한 눈으로 루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루나가 이 여자를 은근히 기다렸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인지 루나는 여자에게 별다른 말은 건네지 않았다.

여자가 루나의 옆에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좀 묘했다. 나는 뭐지?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어쩐지 어색해서 얼른 인사를 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의자를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루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빵 좀 드릴까요?”

여자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아무거나 남는 거 있으면….”

“제가 가져올게요!”

나는 재빨리 주방으로 향했다. 어쩌다 돌아봤는데 그때도 여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주방에 들어온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소시지 페이스트리와 도넛, 애플파이를 접시에 담고 큰 잔에 우유도 가득 따랐다. 가지고 나오니 루나는 홀 반대편을 걸레질하고 있었다.

나는 쟁반을 앞에 놓고는 여자가 안은 아기를 한번 보려고 고개를 쭉 뺐다. 아기가 꼼짝도 하지 않아 왠지 궁금했던 것이다.

애플파이를 집어 들던 여자가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아기를 숨기듯이 가슴에 안았다. 나는 좀 의아했다.

“아기 이름이 뭐예요?”

그 질문이 마음에 드는지 여자의 눈에서 경계하는 빛이 사라졌다.

“한…새.”

“한새요? 귀여운 이름이네요.”

그때 종이 달랑거리더니 로저가 들어왔다. 준이는 여전히 고목의 매미처럼 그의 목에 매달려있었다. 그동안 연적이라고 그를 너무 몰아붙였나 싶기도 하고, 새삼 로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로저는 아이를 안고 있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몹시 안 어울렸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나 대신 루나가 그를 맞았다.

“로저. 왜 또 오셨어요?”

“아, 이 녀석이 운동화 한 짝을 떨어뜨렸다는데.”

테이블 아래쪽을 살피던 루나가 곧 운동화 한 짝을 집어 들었다.

“여기 있네요.”

운동화를 본 준이가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처럼 예쁜 운동화를 신어서 좋은 걸까.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속도 없이 마냥 좋으냐? 불쌍한 놈, 저 녀석도 복대가리는 먹고 죽을래도 없는 놈이다.

“귀여워.”

이건 한새 엄마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준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한테도 저런 얼굴이었는데 준이를 보는 눈은 강도가 좀 더 센 것 같았다. 뭐랄까, 갖고 싶은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눈이 점점 놀라운 빛을 띠더니 가뜩이나 퀭한 눈이 더 퀭해졌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로저가 눈을 부릅뜨고 한새 엄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못 볼 걸 본 사람들처럼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뭔지 몰라서 루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루나 역시 나만큼이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새 엄마가 허둥지둥 일어서며 말했다.

“저, 저… 얼마죠?”

“네? 아, 처, 천원이요.”

“네?”

“천 원….”

한새 엄마는 5천 원짜리 지폐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는 황급히 일어났다. 깜짝 놀란 루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다 못 드신 빵은 가져가세요. 포장해드릴게요.”

그런데 한새 엄마의 얼굴이 순간 험악해지더니 루나의 팔을 표독스러울 정도로 뿌리쳤다.

“놔요!”

보기에도 그 힘이 셌는데 아니나 다를까 루나가 비틀거렸다. 한새 엄마보다 루나가 두 배는 더 키가 큰데 말이다.

“엇! 형!”

나는 재빨리 루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딜 우리 루나를 밀어! 나는 화가 치밀었다.

“저 여자 뭐죠?”

한새 엄마는 꽁지에 불이 붙은 암탉처럼 파드득 뛰어나가 버렸다. 루나는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왜 저러지?”

내 눈에 고목처럼 버티고 서있는 로저가 잡혔다. 준이는 영문도 모르고 로저의 우뚝 선 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로저의 저 표정은 내 머리를 리딩할 때의 얼굴이었다. 루나도 로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루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로저… 설마…?”

로저가 준이에게 코를 잡힌 채로 루나에게 되물었다.

“응? 뭐?”

“예전에 헤어진 여친이에요? 그럼 저 한새라는 아기가 혹시…?”

내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헐….”

내 감탄사를 오인한 루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신이 난 어투로 떠들었다.

“그치? 은별아, 너도 그 생각 했지?”

나는 열렬히 고개를 저었다. 번지수가 단단히 잘못됐다고요!

“무, 무슨 말인가, 루나! 왜 자꾸 나를 바람둥이로 못 만들어서 안달인가!”

“아, 아니에요?”

굉장히 신박한 생각인 줄 알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루나가 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심하다는 티를 잔뜩 내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무래도 형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아요.”

“넌 그렇게 생각 안 했어?”

“당연히 안 했죠. 나보다는 형이 더 오래 아저씨 사는 꼴 봤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정은별. 나 사는 꼴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로저의 말에 즉답하지 못하자 루나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로저. 제가 잘못 짚었다면 사과할게요. 그럼 뭔데요? 왜 그렇게 놀라서 한새 엄마를 쳐다보신 거예요?”

“납치범이야.”

뭘 잘못 들었나? 나와 루나는 거의 동시에 귀를 후볐다.

“뭐라고요?”

“납치범이라고. 애를 셋이나 납치했어.”

“네에?”

“아저씨. 확실해요?”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두려워서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데 아기는 포기 못 하겠나 보더군.”

“세상에! 말도 안 돼! 그럼 지금 안고 있는 저 아기도?”

“저 아기는 인형이야.”

“네에?”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나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그 여자와 납치당한 아기들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당황할 만큼 이기적인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역시 아저씨는 늘 리딩을 걸고 다니시는군요. 길거리 다니면서 정신 사납지 않으세요?”

“뭐?”

로저가 황당하게 되묻든 말든 나는 이판사판이라는 태도로 따졌다.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신고하실 거예요?”

“그래야 하지 않겠니? 아기들을 납치하다니, 저런 괴물을 마음대로 나다니게 놔두면 안 되잖아.”

“신고해서 뭐라고 하실 건데요?”

당황한 루나가 내게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은별아, 왜 그래?”

“아저씨가 실은 플럼버에서 온 외계인인데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읽을 줄 안다, 그래서 그 여자 머릿속을 좀 읽어봤더니 납치범이더라, 그러실 거예요?”

로저는 나를 쳐다볼 뿐이고 대답은 루나가 했다.

“그렇다고 납치범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아기들 부모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겠어.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고. 안 그래, 은별아?”

나는 두 사람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가 위험해지는 건 상관없다 이건가?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못된 아이인가.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맞는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고 남의 일에 관여하는 건 역시 어리석은 일이니까.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루나를 올려다봤다.

“난 아기들 부모를 모르거든요.”

“응?”

“난 얼굴도 모르는 아기들 부모보다 형이 더 중요하거든요.”

“나…?”

“아저씨가 쓸데없이 리딩만 하지 않았으면 우린 몰랐을 거잖아요.”

로저가 끼어들었어요.

“그래서, 모른척하자는 거냐?”

나는 매서운 눈으로 로저를 올려다보았다.

“네.”

“뭐?”

“은별아, 그건 아니야. 그래서는….”

나는 의도적으로 루나의 말을 끊었다.

“경찰에 연루돼서 좋을 것 없다면서요. 그런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자꾸 경찰에 연루될 일만 만들고 계시잖아요. 저희 이모 일로 경찰이 드나드는 것만 해도 머리 터지겠는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일까지 들쑤셔야 해요? 그냥 모른 척해요.”

그러자 왜인지는 몰라도 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울먹울먹, 훌쩍훌쩍하더니 급기야 빽빽 울어댔다. 나는 갑작스레 녀석이 밉살스러웠다.

“조용히 해!”

내 목소리에 놀란 루나가 움찔 떨었다. 준이도 놀라서 즉시 입을 다물었다.

“너 때문이잖아! 운동화만 아니었으면 지금 아저씨가 여기 안 왔잖아! 그럼 그 여자 머리를 리딩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너 때문에 일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알아? 그러니까 함부로 울지도 말고 떼쓰지도 말고 죽은 듯이 있어! 알았어?”

보다 못한 루나가 언성을 높였다.

“은별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어린 애한테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면 놀라잖아!”

“걱정들 말게.”

로저가 침착한 어조로 소동을 진정시켰다.

“내가 해결하겠네. 그러니 은별이 너도 준이한테 성질부리지 마. 애가 무슨 죄니?”

“부모 잘못 만난 것도 죄예요.”

루나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야, 은별아. 그가 마음으로 속삭이는 게 들렸지만 나는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넌 모든 일에 있어서 함부로 결단을 내리기엔 아직 어리다.”

어우 씨! 저 아저씨가 할 말 없으면 꼭 나이로 치고 들어오네! 그런데 뭐냐? 루나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저 말씀이 맞아. 알았지, 은별아? 우리가,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게.”

칫, 내 키가 150cm만 됐더라도 루나까지 맞장구를 치지는 않을 텐데.

“그럼 내일 연락하겠네.”

그렇게 말하고는 훌쩍거리는 준이의 등을 토닥이며 로저는 바람같이 나가버렸다. 나는 씨근덕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곧 죽어도 날 어린애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야.”

“은별아. 로저가 준이도 봐주고 있는데 그럼 못써.”

“나도 좋은 마음으로 대하려고 하는데 자꾸 성질을 돋우잖아요!”

“그, 그런 말도 로저 입장에서는 황당할 거야.”

“왜 아무나 막 리딩을 하고 다니냐고요! 이건 준이 일로 고마운 거랑은 별개의 문제잖아요. 안 그래요?”

“그, 그렇지.”

그때 2층에서 필립이 날듯이 뛰어 내려왔다.

“야옹! 큰일 났다. 빨리 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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