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실종된 조르주만 빼고 플럼버 회원들이 모두 모였다.
조르주의 실종도 실종이지만 아치볼트의 상태에 모두 충격을 받았다. 로저나 에릭처럼 말끔한 미남은 아니었지만 아치볼트도 나름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아치볼트 맞으세요? 울버린인 줄 알았잖아요. 왜 면도를 안 하시… 아얏!”
필립이 루나의 발등을 깨물었다. 안 그랬으면 내가 발을 밟았을 것이다. 아치볼트의 몰골이 하도 험악해서 잘못하면 손톱이 쑥 튀어나와 우리를 긁어놓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아치볼트는 수세미 같은 수염을 쓰다듬고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도 여기 온다고 샤워는 했어요. 보름 만에 씻은 거예요.”
“웩.”
“야옹.”
로저가 준이의 손을 내게로 건네며 말했다.
“은별아. 준이 좀 봐줘. 어른들 회의하는 동안 둘이 놀고 있어.”
이쒸. 이 양반을 그냥.
“여기서 조용히 있을게요. 저도 루나커피의 가족으로서 알 건 알아야죠.”
“그래요, 로저. 우리 은별이는 똑똑해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요.”
루나의 말에 로저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준이와 함께 작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치볼트와 대조적으로 워튼 씨는 오늘따라 아주 우아해 보였다. 말끔한 양복에 왁스를 발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걸 보고 있던 루나가 이번에도 대뜸 물었다.
“워튼 씨. 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잘 되시는 거죠?”
나더러 지나치게 직선적이라고 했지만 루나야말로 그랬다. 그것도 매우 유아적으로 말이다. 워튼 씨는 쑥스러운지 찻잔을 집어 들며 딴청을 피웠다.
“로저가 새로운 걸 발견했다고 해서 부랴부랴 온 거야.”
“조르주한테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도 없나요?”
로저의 질문에 워튼 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농장 사람들 말이, 조르주가 정신이상인 것 같다고 하더군.”
“무슨 근거라도 있대요?”
“3주 전쯤의 일인데, 값비싼 와인을 쏟아버리고 술통을 굴려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까지 끌고 가더니 그 안에 들어가더래. 통이 굴러가는 걸 이웃 사람이 발견하고 겨우 잡았다는 거야.”
로저와 에릭, 루나가 서로 쳐다보더니 똑같이 외쳤다.
“설마!”
“좌표?”
“도킹?”
소파에 깊이 앉아있던 아치볼트가 몸을 일으켰기에 모두 그를 보았다. 무슨 의견이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그가 내게 빈 주스 잔을 내밀었다.
“꼬마야. 콜라 좀 주라.”
“야옹, 은별이 꼬마라고 부르지 마라.”
“아아, 그래. 은별아, 콜라 있지?”
“없는데요.”
루나가 약간 싸늘한 투로 말했다.
“우리 집에는 콜라나 사이다처럼 몸에 좋지 않은 음료는 없답니다. 주스나 한잔 더 드세요.”
“콜라나 사이다가 몸에 좋지 않다고 누가 그래? 루나커피의 디저트에 잔뜩 처바른 동물성 크림보다 더 나쁠 것도 없지 않아?”
“뭐라고 하셨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자 로저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어어, 왜들 이래? 아치볼트. 지금 우리끼리 다툴 때인가?”
“루나가 먼저 날 무시하잖아.”
“내가 언제 아치볼트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아무튼 예쁜 것들은 몽땅 다 기분 나빠!”
“뭐, 뭐가 어째요?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죠?”
“어허! 대체 왜 이래? 아치볼트. 이럴 거면 당장 가버리게!”
로저의 말에 에릭이 거들고 나섰다.
“로저 말이 맞아.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잖아.”
나는 재빨리 아치볼트의 잔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탄산수 가져다드릴게요.”
아치볼트는 나를 흘긋 보고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내가 주방으로 향하자 준이도 졸졸 쫓아왔다.
“형아. 저 사람들 누구야…?”
“쉿.”
나는 한가하게 준이의 옹알이를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음료수를 준비하면서도 내 귀는 거실로 향해 있었다. 새 잔을 꺼내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식혜가 있었다. 그걸 일곱 잔 따르고 얼음을 동동 띄워가지고 나갔다. 워튼 씨가 말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조르주는 혼자서 좌표와 코드를 연구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
“그럼 도킹에 성공했다는 건가요?”
에릭의 질문이었다.
“확실한 거야 내가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안 나타나는 걸 보면 어디로든 이동한 것이 아닐까 싶어.”
“그 아저씨 우울증이잖아요. 자살한 거 아니에요?”
아치볼트가 식혜에 손을 뻗으며 건성으로 말을 툭 던졌다.
“자네 같으면 굳이 와인 통에 들어가 바다로 뛰어드는 번거로운 방법을 써서 자살하겠나?”
“그건 모를 일이죠. 아시다시피 저는 조르주가 아니잖아요?”
워튼 씨는 고개를 저으며 잔을 집어 들었다. 무심코 한 모금을 마신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이거 뭔가? 굉장히 맛있는데.”
“그러게요. 묘한 맛이네요.”
에릭과 로저도 신이 나서 건배까지 했다. 준이도 생글거리며 홀짝였다. 루나가 말했다.
“아, 우리 손님께서 알려준 레시피대로 제가 만든 거예요. 식혜라고 한국 전통 쌀 음료예요. 콜라나 사이다와는 달리 몸에 좋은 발효식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좋아하실 줄은 몰랐네요.”
“아주 맛있군.”
“엘리아가 좋아하는 맛이야.”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아치볼트였다. 건들거리는 투가 아니라 아주 음울한 투로 그가 식혜를 노려보며 말했다.
“엘리아는 한국 음식을 좋아했어. 이건 엘리아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아치볼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윽고 워튼 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엘리아는 몸도 마음도 자네를 떠났잖은가. 그러니 이만 털고 일어나게. 젊디젊은 자네가 그깟 실연 한 번으로 뭘 그리 오래 괴로워하나.”
“누가 괴로워한다고 그러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치볼트는 입을 삐죽이며 훌쩍거렸다. 워튼 씨가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두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같기란 하늘의 별 따기야. 인연이 아니면 오래 만나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지. 그러니 잊어버리게. 내가 겪어보니 사랑이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군.”
루나가 눈을 빛내며 재빨리 물었다.
“워튼 씨는 그분과 잘 되신 거죠?”
워튼 씨가 헛기침을 하고는 아치볼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뭐…. 지금 그것보다 더 급한 일로 모인 것 아닌가? 내 얘기는 나중에 해주지.”
루나가 눈과 귀를 쫑긋 세웠다.
“나중에 언제요? 오늘 밤에요?”
루나의 집요한 종용에 워튼 씨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한 루나가 나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런 그가 귀여워서 나도 웃었다.
아치볼트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이죽거렸다.
“어디 실연당한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리고는 눈동자만 굴려 로저와 에릭에게 동조를 구했다.
“안 그래요?”
로저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에릭은 실연이 아니라 열애 중일세.”
“농담이죠?”
“왜 농담이라는 건가?”
“에릭은 결벽증 있잖아요. 그래서 독신주의라고….”
“키스 잘만 하던데 결벽증은.”
로저의 말에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저! 에릭이 희상이랑 키스하는 거 봤어요?”
“응.”
“헐!”
“야옹, 루나 좀 진정시켜라.”
“그래. 그만 좀 하고 로저, 애스터코드 얘기나 해보게.”
“네, 워튼 씨.”
로저가 소파에서 일어나 테라스 앞에 섰다. 그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쓰윽 문지르자 좌표가 나타났다. 모눈종이 무늬 위로 자잘한 숫자가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자, 이것이 그 피리에 심어진 애스터코드입니다.”
“애스터코드가 뭐예요?”
아치볼트가 한 질문이었다. 플럼버인인데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으므로 나는 내심 반가웠다.
“애스터코드는 숫자 네 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교신암호입니다. 0과 2분의 1, 1과 2분의 1, 0, 1, 이렇게 네 개. 이 정도는 알겠지, 아치볼트?”
“몰라요. 전 이공계랑은 담 쌓고 사는 사람이에요.”
크크. 나 대신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잘됐다고 생각하며 나는 로저의 설명을 기다렸다.
“음악으로 치면 도레미파솔라시도라고 생각하면 되네. 이 여덟 개의 음만 가지고도 다른 느낌의 곡을 수없이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거랑 비슷한 거야.”
오오, 나는 흥미진진해서 집중하고 있었는데 준이가 칭얼거렸다.
“배고파, 형아….”
“가만 좀 있어.”
로저가 나를 흘긋 보더니 설명을 계속했다.
“이 피리에 적용된 코드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동물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음을 차용한 겁니다. 이걸 굳이 인간의 말로 번역하자면 ‘빨리 와, 여기 맛있는 먹이가 있어.’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형아, 바압….”
“이 먹보야, 좀 참으라니까.”
나는 귓속말로 야단치며 준이의 허벅지를 톡 때렸다. 그것을 또 한 번 흘긋 본 로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준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당장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식사하고 합시다.”
멍하니 앉아있던 루나가 벌떡 일어났다.
“앗! 내 정신 좀 봐. 식사 시간 지났는데 시장들 하시죠? 금방 준비할게요.”
“내가 도울게.”
로저의 말에 내가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는 준이 좀 보고 계세요. 저 혼자 충분히 도울 수 있으니까요.”
“메뉴가 뭔가?”
에릭이 즐거운 듯 싱글거리며 물었다.
“청국장이요.”
루나의 대답에 워튼 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게 뭐야?”
“오 마이 갓…. 나 그거 뭔지 아는데.”
에릭의 여유 있던 미소가 삶은 콩처럼 곤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