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53화 (53/103)

<53화>

루나가 위스키 소다를 만들고 있을 때 나는 슬쩍 돌아와 물었다.

“얼음이랑 레몬 가져올까요?”

“오! 우리 은별이 센스 쩌는 것 좀 보세요. 고마워.”

“별말씀을.”

크크. 이렇게 사랑스러운 루나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쏘냐. 조금 전에 미성년자라며 쫓아냈던 것도 잊어버리고 루나는 내 도움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내친김에 나랑 준이가 마실 레몬주스도 따라가지고 꽁지에 딱 달라붙은 준이를 달고 루나의 뒤를 졸졸 쫓았다.

“워튼 씨. 거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야옹, 아주 신났네, 신났어.”

“어, 그런데 은별이랑 준이….”

루나가 나와 준이를 돌아본 순간 다행히도 테라스에 에릭이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에릭 아저씨 오시네요.”

역시나 루나는 즉시 에릭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볼수록 은근, 아니 매우 단순한 루나였다. 그런 그가 귀여워서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에릭. 지금까지 통화하신 거예요?”

“음.”

“에릭 블레어라는 분이 여기에 계셨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네요.”

“위스키 소다인가? 내 것도 있나?”

“아뇨.”

“그럼 내가 만들어오지.”

그동안 워튼 씨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필립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기고양이들도 여기저기 올라앉았다. 루나가 워튼 씨의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준이와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에릭은 조금 떨어진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워튼 씨가 음료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꾹 참고 기다렸던 루나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워튼 씨가 허공을 향해 아련한 시선을 던지며 아주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녀의 이름은 나탈리라네.”

“야옹!”

“이름 예뻐요!”

“이름만큼이나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쁜 여자일세. 70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뻐. 아니 사실은, 누가 봐도 70대 할머니이기는 한데 할머니로서 정말 예쁘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럼요! 그래서요?”

이럴 때 루나는 뭐든 끌어안으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은근슬쩍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쿠션으로 착각했나 싶은 자세이기는 했지만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칫 오해를 살 것 같아 이런 말 하는 게 좀 꺼려지지만, 나탈리의 남편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 심근경색에 당뇨가 있는데 최근 합병증으로 입원했대. 그렇다고 내가 그가 죽기를 기다린다는 파렴치한 생각은 하지 말아주길 바라네.”

“야옹, 유니콘을 보지 말라고 하면 유니콘만 보이지.”

“필립. 계속 이죽거릴 거면 나는 이 이상 말하지 않겠네.”

그러자 루나가 안달복달했다.

“앗! 워튼 씨, 안 돼요. 아빠,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그래서요? 워튼 씨, 계속 말씀해주세요.”

“사실 우리는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어. 내가 그녀에게 버스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 바로 그 순간에 말이지. 그리고 그녀가 열심히 길을 가르쳐주려고 내게서 고개를 돌린 순간 귀 바로 아래에 새겨진 그 조그만 글씨가 내 눈에 보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루나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내 귓불을 마구 잡아당겼다.

“하아! 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워튼 씨!”

사실 나는 몹시 아팠지만 눈물을 삼키며 소리 내지 않았다. 괜히 아프다고 했다가 루나가 내 존재를 알아채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할지 몰라서였다.

“형아, 졸려….”

나는 준이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 눈치 없는 녀석이 빼액 비명을 질렀다. 마침 그때 로저가 테라스를 통해 거실로 들어왔다. 에릭이 물었다.

“어디 다녀와?”

“아아, 아치볼트를 재워놓고 오는 길이네.”

“혼자 둬도 될까?”

워튼 씨의 질문에 로저는 그의 곁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아치볼트는 한번 잠들면 잘 안 깨거든요.”

루나가 초조한 듯 발을 콩콩 굴렀다.

“로저. 워튼 씨의 그분 이름이 나탈리래요.”

“알아.”

“로저는 모르는 게 없군요.”

워튼 씨가 싸늘한 눈으로 로저를 흘긋 보았다.

“다음 얘기는 로저, 자네가 해주게나.”

“제가요? 나탈리에 대해서요?”

“그래. 내 머릿속을 다 읽었으니 훤히 알 것 아닌가.”

“말도 안 됩니다. 워튼 씨 머릿속의 잠금장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거짓말 마.”

로저는 겸연쩍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때 이후로 워튼 씨를 리딩한 일은 없었습니다.”

“믿기지 않는군.”

루나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워튼 씨! 두 분 로맨스가 궁금해서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그래서요, 나탈리는 어떤 분인가요?”

“내가 하도 뚫어져라 쳐다보니까 그녀가 어리둥절해했지. 그때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아나?”

“무슨 말인데요?”

“준이는 왜 울먹거리고 있니?”

“준이는 왜… 아니, 이게 아닌데.”

로저가 끼어드는 바람에 워튼 씨의 다음 말이 꼬였다. 루나가 준이를 돌아보기에 이제 쫓겨나나 싶었는데….

“우리 준이 착하지? 까꿍. 나탈리가 뭐라고 했는지 잠깐만 들어보자, 응?”

루나가, 쫓아내는 대신! 상냥하게 달래자 준이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튼 씨, 빨리요. 준이 또 울기 전에.”

“내가 물었지. 혹시 당신 이름이 나탈리인가요?”

“꺄악!”

이번에는 목을 조르는 시간이 다소 길어진 관계로 한참 캑캑거리다 보니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가슴에 완전히 안기는 순간 말이다. 이렇게 안겨 있으니 달맞이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후아….”

“후아후아- 빨리 말해주세요, 워튼 씨! 그래서요?”

“야옹.”

필립도 몰입한 듯 야옹거렸고 에릭도 맞장구를 쳤다.

“흥미진진하네요.”

“그렇죠, 에릭. 전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루나의 열렬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워튼 씨가 슬쩍 웃었다.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한동안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나탈리가 이렇게 말했어. 당신이, 프레데릭 워튼인가요?”

“으악!”

“우오!”

“야옹!”

“헐.”

“흐음.”

나 역시 소름이 돋았기에 이번에는 루나와 얼싸안고 발을 굴러댔다. 필립과 고양이들도 소파 여기저기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뒹굴었다.

워튼 씨는 흡족한 얼굴로 위스키 소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녀를 이미 만났던 것 같았어.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확신했지.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어.”

“네에? 왜요?”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프레데릭 워튼을 찾았다는 거야.”

“정말요? 어떻게요?”

“그녀는 프랑스인이고, 프레데릭 워튼은 영국에 많은 이름이지. 하지만 영문 이름인 만큼 미국인일 수도 있고 호주인일 수도 있으니, 혼자서 그 이름의 주인을 찾는다는 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불가능한 미션이었지.”

나탈리는 ‘프레데릭 워튼’을 찾기 위해 여행사에 취직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여행사를 차렸고 여행사를 때려치운 후에는 여행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워튼 씨도 여행 작가잖아요?”

“그러니까, 그것까지 천생연분 같아서 기분 묘하더군.”

워튼 씨는 볼까지 발그레해져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에 잘 웃지 않는 그였기에 그 미소는 더 진실해 보였다.

“나탈리의 책은 미주지역에도 판권이 수출되어 팔리고 있었어. 나 역시 본 적이 있는 책들도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지.”

그런데 그녀는 평생 20명도 넘는 프레데릭 워튼을 만났다고 한다.

“세상에!”

“흔한 이름이잖나.”

“그래서요?”

“그들 중 누구와도 아주 약간의 친밀감도 느낄 수 없었다고 하더군.”

그렇게 해서 나탈리는 자신의 몸에 나타난 이름에 뭔가 다른 뜻이 있는 모양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이는 마흔이 넘었고, 직장 상사이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편은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니 전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나탈리는 이혼을 생각했지만, 그즈음 아이가 생겼다.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갖게 된 아이라서 애착이 더 강했다. 결혼생활은 이어졌고, 늦둥이 아들 키우는 재미로 지금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가정은 가정이니, 처음에는 나와 나탈리 둘 다 이렇게 만난 걸로 됐다,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헤어졌어. 그리고 캐나다로 돌아와 버렸는데 나탈리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거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최근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좌표에 나탈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게 보이지 않겠나!”

루나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 너무 슬퍼요! 그래서, 그길로 달려가셨나요?”

“아니. 난 그다지 충동적인 사람이 못 돼. 자네도 알잖나.”

“그럼요?”

“나탈리가 내게로 왔어.”

“꺄악! 난 몰라!”

“야옹, 쌈박한 할머니네.”

“우히히.”

우히히는 루나가 내 정수리와 이마에 열렬히 입을 맞춰주는 바람에 내가 무심코 내뱉은 웃음이었다. 다행히 루나가 하도 꽥꽥거리는 바람에 아무도 듣지는 못했다.

“나도 여행 작가라는 걸 알려줬었는데 내 책을 찾아내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해 연락처를 알아냈다는 거야. 정말 멋진 여성이지 않나?”

“누가 아니래요! 전 이제 나탈리 팬이에요!”

그렇게 두 사람은 사춘기 때도 못 해본 플라토닉 러브에 푹 빠져있었다. 결국 그 이야기에 19금 장면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에릭과 로저는 잠든 준이를 데리고 돌아갔고, 워튼 씨도 좌표를 열고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필립과 아기고양이들이 텐트로 들어간 후 루나와 나도 각자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지구 나이로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운명의 상대와 만나게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잘은 몰라도 나는 좀 화날 것 같았다. 그 숱한 세월을 흘려보내고 뒤늦게 만나다니 억울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래. 바로 오늘, 이 시간의 마음도 중요한 거 아니겠어?”

짐짓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베개를 안고 테라스로 나갔다. 루나의 방 창문을 두들기자 파자마 차림의 루나가 문을 열었다.

“은별이, 왜?”

“오늘 같이 자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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