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혈육이야말로 복불복이다. 인연 중에 가장 질긴 인연이 혈육인데 그걸 잘못 타고난 인간이야말로 세상 제일 불운한 자 아닌가. 그런데 그게 바로 나다. 이모부라는 작자가 납치범으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내 말 못 알아들어? 그 노랑머리 기생오래비가 진짜 재벌이냐고 묻잖아!”
“씨발, 누가 재벌이야!”
“이 새끼! 그동안 머리 좀 굵어졌다고 버릇이 더 없어졌네!”
익숙한 주먹질이 날아왔다. 이제 진짜 못 참겠다. 나도 미처 몰랐는데, 허구한 날 밤고구마로 살았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지만 모처럼 말끔한 얼굴이 돼보고 났더니 미모에 대한 집착이 엄청 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 얼굴을 지키기 위해 더 길길이 날뛰었다.
“씨발! 왜 때려! 니가 뭔데 여기까지 와서 남의 얼굴을 막 때리고 지랄이야!”
“이 도둑놈의 새끼가 미쳤나!”
이모부는 두 손이 자유로웠고, 나는 뒤로 꽁꽁 묶인 상태였다. 이럴 때 대들면 나만 손해라는 걸 깜빡했다.
내 몸이 붕 날아가 구석에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내 얼굴은 벌들이 쑤시고 지나간 벌통이 되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루나가 플럼버로 떠날까 봐, 누군가 루나와 회원들을 괴롭힐까 봐, 영원히 키가 안 클까 봐. 그런저런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행복했나 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과거의 일을 송두리째 잊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달콤한 꿈에서 한순간 깨어난 것 같았다. 아니면 도로 끔찍한 악몽 속에 빠져버렸든지.
이선호의 집에서 한 시간쯤 게임을 하고, 걔네 누나랑 셋이서 치킨을 시켜 먹었다. 선호는 자기 누나랑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성격까지 똑같아서 그 누나랑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엄청 재밌게 놀았지만, 저녁 먹고 가라는 선호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루나와 두 시간만 놀다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지켜야 했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혀를 빼물고 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졌다. 정신줄을 놓는 순간 길가에 수상쩍은 봉고차가 주차되어 있었던 걸 본 기억이 났다.
그 차의 번호판이 가려져 있다는 것, 그 차가 ‘금성 태권도 학원·도장’의 봉고차와 흡사하다는 것과 그 글씨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자연스러운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너무 늦은 후였다.
눈을 떴을 때는 낯익은 차 안이었다. 내 손목은 등 뒤에서 테이프로 묶여있었고 발목도 녹색 테이프로 묶여있었다. 사위가 지나치게 캄캄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문에 온통 차량용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급하게 붙였는지 온통 울퉁불퉁하고, 어떤 부분은 검정색 테이프로 대충 때워두기도 했다. 이런 차를 타고 다니면 금방 눈길을 끌 것 같은데, 대체 경찰은 뭐 하는 거야?
그보다 이모부가 뭘 원해서 나한테 왔는지가 문제였다. 루나에 대해 알아보고 한밑천 잡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우악스러운 손이 내 머리채를 잡았다. 고개가 위로 들렸다.
“악!”
아파서가 아니라 끔찍한 얼굴이 보여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리부리한 눈, 굵은 콧방울, 튀어나온 광대까지. 점점 악인의 얼굴이 되어가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이제 악인이 아니라 비인(非人)처럼 보였다. 유령이나 좀비 같은 거.
그가 휴대폰과 워치를 내 코앞에서 흔들었다.
“이런 비싼 것도 들고 다니고, 걸친 것도 죄다 명품 옷에 운동화까지 고급브랜드던데. 그 기생오래비 같은 새끼가 이 정도로 너한테 잘해주는 이유가 뭐냐?”
씨발, 이 개새끼가 감히 루나한테 욕을 하게 놔둬야 하나? 내가 덩치만 좀 컸어도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내 키는 아직도 150이 안 되냐!
“아들처럼 생각한다기에는 그 녀석도 어리던데. 커피숍 사장 확실해? 그 새끼가 주인 맞아?”
이 개새끼…. 준이 아빠고 뭐고 이제 안 참아준다. 이모랑 이놈이랑 둘 다 빵에서 수십 년 썩게 만들어줄 테다!
“그 건물만 해도 돈이 꽤 되겠던데 그 새끼 거 맞아? 아니면 전세야? 너 알긴 아는 거냐?”
“씨발, 몰라!”
“이 새끼가, 다리 한쪽 부러뜨려놔야 얌전해질래?”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해?”
“그 새끼가 돈이 좀 있어야 협상을 할 거 아냐.”
“무슨 협상?”
“네 친부모도 아닌 내가 널 이만큼 키워줬으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할 거 아냐.”
이 씨발 새끼를 어떻게 따돌려야 할지 난감했다. 손발이 묶여있으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원래도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는데 지금 눈을 보니 동공이 풀린 게 약이라도 했나 싶었다.
말뿐이 아니라 틈을 보이면 정말 내 몸 어딘가를 해할 것만 같아 겁도 났다. 무엇보다 루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죽을 것처럼 초조했다. 나를 미끼로 루나를 유인한다거나 하면, 아무리 루나가 플럼버 인의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불시에 덮치면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어떻게든 도망쳐야만 했다. 잘될 것 같지는 않지만 감정에 호소해볼까?
“준이는, 안 궁금해?”
“준이? 네 이모란 년이 데리고 있잖아.”
“이모, 경찰에 잡혀서 구치소 들어간 게 언젠데.”
“그럼 준이는 어디 있어?”
“궁금하기는 해?”
싸대기가 날아왔다. 모처럼 맞으니 심하게 아팠다.
“이 건방진 새끼. 눈구멍을 확 파줄까 보다, 씨발.”
개새끼. 제 자식이 굶건 죽건 그것도 별로 관심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모라면 이 자식보다는 준이 생각을 했을 텐데. 준이도 안 통하면 대체 뭘 미끼로 던져야 하지?
“대답해라. 그 노랑머리 새끼 정체가 뭔지.”
그 순간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루나는 좌표를 통해 나를 금방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되는 게 우선이어야 하지만.
내가 약속한 건 두 시간.
완벽한 루나에게 부족한 것 딱 하나, 융통성.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거의 없다.
그러니 두 시간에서 5분만 지나도 전화든 문자든 할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거의 다 되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이모부의 손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내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월영이형’이라고 쓰여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볼까 봐 ‘내 사랑’이니 ‘나만의 루나’ 같은 이름을 입력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새끼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부의 손가락이 멋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루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은별이니?
그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루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원래 루나는 전화해서 ‘은별이니?’라고 묻지 않으니까. 루나는 전화하면 주로 ‘응, 형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게다가 내가 궁금하면 좌표를 띄워보면 그만이니 먼저 전화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모부는 비열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미친개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몫 챙긴 얼굴이었다. 그가 입 모양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대답해.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이모부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싸대기가 한 대 더 날아왔다. 비명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 은별아!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이모부가 직접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여기 은별이가 있긴 있는데.”
- 누구세요?
“은별이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내 자식 못지않게 키워놓은 사람이야.”
- 은별이 이모부세요?
“은별이는 내가 데려가야겠으니 그런 줄 아쇼.”
- 그게 무슨 말이죠?
“젊은 사람이 귓구멍이 처 막혔나. 내가 말했잖아, 자식같이 키웠다고. 내 자식 내가 데려간다고.”
- 그거 납치예요.
“뭐가 납치야. 내 조카 내가 데려가는데. 당신이야말로 멀쩡한 남의 자식 누가 맘대로 데려가랬어? 너야말로 유괴범이야.”
- 원하는 게 뭐죠?
“남의 조카 데려다가 뭘 하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우리 은별이 데리고 있고 싶으면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지.”
- 얼마를 원하는데?
“아 참, 내 아들 준이도 네가 데려갔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데서 들려왔다.
“아니, 그 꼬마는 내가 봐주고 있어.”
휴대폰이 아닌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이모부는 바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내 눈이 그의 바로 뒤, 운전석을 향하자 그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모부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코앞에 로저의 얼굴이 있었다. 사실 운전석에는 좀 전부터 로저가 앉아있었다.
“당신 누구….”
이모부는 질문을 끝내지 못했다. 로저의 주먹이 그의 눈두덩에 박혔던 것이다. 컥 소리도 채 내지 못하고 이모부는 굳고 말았다. 낫이 걸린 것이다.
이모부의 표정이 하도 볼만해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로저가 투덜거렸다.
“그 꼴을 하고 웃음이 나오냐?”
“좀 빨리 오시지.”
로저는 눈을 흘기면서 턱짓했다. 루나가 시간을 지울 때와 똑같은 동작이었다. 로저는 이내 사라졌고 거의 동시에 경찰차 사이렌 소리와 함께 차 문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곧 문이 열리고 루나가 나타났다.
“은별아!”
“형!”
루나의 뒤로 경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이 차의 양쪽 문을 활짝 열었다. 이모부는 막 낫에서 풀려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금방 그 외국인 남자…. 나 때렸….”
경찰들 사이에서 박 형사의 얼굴이 나타나더니 이모부에게 수갑을 채웠다.
“당신을 아동 납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하는 말은….”
“갑자기 나타났어요. 은별아, 너도 봤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고용할 권리가 있으며….”
경찰이 할 일을 하는 동안 루나는 내 팔다리의 테이프를 풀어주고는 나를 얼싸안았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겁에 질린 척 울부짖었다.
“말 안 들으면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했어요! 눈구멍도 파버린다고 했고, 월영이 형한테 돈도 뜯어낼 거라고 했어요.”
정신이 반쯤 나간 이모부는 경찰차에 쑤셔 박히기 전까지 소리를 질렀다.
“야! 정은별 이 병신새끼야! 너도 봤지? 금방 그 남자!”
루나는 그동안 내가 본 적 없을 정도로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모부를 노려보며 박 형사에게 말했다.
“친족 간 아동 폭행죄도 낱낱이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