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섯 살이면 알 거 다 알아요. 나중에 은별이가 해준 말이에요.
저는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 자신의 경험이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튼 제가 준이 나이일 때를 떠올려보면 저는 한심할 정도로 아무 생각 없었던 것 같거든요. 눈치도 좀 없는 편이었고요. 은별이는 제가 고생을 안 해봐서 그런 거래요. 나 참, 이러나저러나 저를 웃겨주는 건 은별이랍니다.
에릭이 그러는데 지구별 어린이들은 플럼버 어린이들에 비해 조숙하대요. 그만큼 살기 힘든 아이들이 많아서 그렇다나요.
아무튼 저는 준이 때문에 조금 놀랐답니다. 준이는 로저의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짤막한 다리로 소파를 기어 내려와 다소곳이 섰어요. 솔직히 저는 준이가 우리 대화를 모두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말조심해야 했는데 혹시 우리가 부주의해서 아이가 상처받지는 않았나 걱정되었죠.
준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어요. 은별이도 저도 아닌, 로저에게 말이죠.
“준이도 벼리형초롬 다 하쑤 이쏘여.”
로저가 은별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어요. 그 눈은 묻고 있었죠. 뭐라는 거냐? 지구상의 어떤 언어도 다 알아듣는 로저인데 아이 옹알이는 알아듣지 못하나 봐요. 은별이가 대답, 아니 통역해줬어요.
“준이도 저처럼 다 할 수 있대요.”
로저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어요.
“뭘…?”
“준이도 벼리형 하는 고초롬 다 하쑤 이쏘여.”
이번에는 우리 모두 알아들었기에 은별이 통역은 필요하지 않았어요. 준이의 큼지막한 눈이 촉촉해졌어요. 이 조그만 아이의 몸에서 큰 것이라고는 저 눈밖에 없네요. 그게 너무나 안쓰러워서 제 눈가도 젖어 들었어요.
“아즈씨 토께 해주심 앙대여…?”
“아저씨 돕게 해주시면 안 되냐고요.”
“알아들었다.”
“준이 우지도 앙코 테쓰도 앙코 자라께여. 요기 이께 해주심 앙대여?”
“뭐라는 거냐?”
“준이 울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고 잘한대요. 여기 있게 해주시면 안 되냐고요.”
꼬리만 잘근거리던 필립이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어요.
“야옹- 불쌍해!”
이 작은 천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어느새 똑같은 얼굴로 준이를 보고 있었어요. 저는 당장에라도 준이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준이가 대답을 원하는 사람은 로저였기에 손톱만 물어뜯었어요. 준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준이 자라께여! 아즈씨 잘 토께씀이다. 밥토 초콤만 모그께여. 제발 요기 이께만 해추세여. 네? 아즈씨-”
급기야 아이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어요. 우리도 똑같이 울었어요. 진짜랍니다. 누구보다도 로저가 압권이었어요. 저도 울기 바빠 처음에는 못 봤는데, 어쩌다 보니 저보다 더 심하게 울상인 거예요. 그 와중에도 그 얼굴을 보고 웃을 뻔했지 뭐예요. 저는 너무나 격하게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역시나 로저가 안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애써 참았어요.
그런데 이 멋대가리 없는 아저씨는 그건 생각지도 못하는지 저 울기만 바빴어요. 급기야 준이가 알아서 로저에게 안겨버렸답니다. 로저는 엉엉 울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거실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통곡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잦아들었어요. 준이도 준이지만 은별이가 너무 서럽게 울어서 저는 조금 걱정이 되었어요.
“은별아. 로저가 준이 데리고 있을 거야. 그만 울어.”
“아뇨, 그게 아니에요.”
“응? 뭐가…?”
은별이는 주먹을 꼭 쥐고 눈물을 쓱쓱 닦아냈어요.
저 지금 쫄았나요? 사실 그랬어요. 저는 이미 은별이의 저 얼굴을 잘 알고 있거든요. 저렇게 야무진 표정을 지으면 뭐든 고집을 부리겠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적어도 저로서는 그 고집을 꺾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답니다.
역시나 저 조그만 입에서 표정만큼이나 똑 부러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네요.
“김준! 너 지금 울고 있잖아.”
어른들뿐 아니라 준이도 은별이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으앙…?”
“금방 울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는대놓고 지금 울고 떼쓰고 있잖아. 이따위로 어리광이나 부리는데 아저씨가 잘도 있으라고 하겠다. 나 같아도 너 같은 떼쟁이는 쫓아내고 싶을 거야!”
준이의 눈에 두려움이 잔뜩 서렸어요. 아이가 고개를 내젓자 눈물방울이 이리저리 흩어졌어요.
“아이야…. 형아. 준이 안 우께. 진짜 안 우께. 잘모태쪄….”
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입을 틀어막았어요.
“오 마이 갓….”
“야옹….”
눈물이 흘러서 아이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야옹! 로저, 울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아빠의 말에 로저를 돌아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지 뭐예요. 시뻘게진 얼굴에 눈이 팅팅 부어가지고 하염없이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평소 잘생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성난 말 한 마리가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죠. 그래서 넋을 잃고 쳐다보는 바람에 은별이가 준이의 손을 잡아끄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답니다.
“자! 가자.”
“으앙-”
그제야 저는 당황해서 물었어요.
“은별아. 어딜 가는 거야?”
“고아원이요.”
“뭐라고?”
“얼른 데려다주고 와야겠어요. 여기 더 있으면 자꾸 계속 있고 싶을 거 아니에요?”
저는 다급하게 준이의 팔을 잡았어요.
“은별아, 진정해. 어른들이 얘기 좀 하게 잠깐만….”
“형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줄 모르죠? 준이처럼 부모 복 지지리 없이 타고난 애는 소원을 품는 것 자체가 죄악이에요. 얘는 벌 좀 받아야 한다고요. 제까짓 게 감히 욕심낼 걸 냈어야죠. 며칠 신세 진 것만도 큰 행운인데 이러면 배은망덕이잖아요, 안 그래요? 자! 가자! 김준!”
“으아앙, 형아! 내가 잘모태쏘! 나 앙갈래!”
“김준! 너 미쳤어? 너 따위가 어디 이런 집에서 저렇게 멋진 분이랑 살 주제가 된다고 생각해? 어서 와!”
“으아앙!”
“은별아! 대체 왜 그래!”
저는 은별이를 붙잡았어요. 그런데 애가 얼마나 힘이 센지, 한번 뿌리쳐지고 나니까 소파에 도로 앉아버리게 됐어요.
“로저! 뭐 하고 있어요? 은별이 좀 말려요!”
로저는 주먹으로 눈두덩을 쓱 훑고는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어요.
준이는 은별이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주저앉았어요. 로저가 그런 준이를 번쩍 안아 들었어요.
“정은별.”
은별이는 대답 없이 반질거리는 눈동자로 로저를 올려다보기만 했어요. 로저가 말을 이었어요.
“넌 알아들었잖아. 이렇게까지 안 해도 내가 키우려고 했어.”
그러자 은별이가 앙칼지게 쏘아붙였어요.
“저 얼마 안 있으면 어른이에요.”
“야옹?”
“그때까지 준이 안 버리고 데리고 계실 수 있어요?”
로저는 훌쩍거리는 준이의 등을 토닥이며 은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어요. 우리도 기다렸어요.
“가끔 미운 짓 해도 안 미워하고, 아니. 미워도 그냥 참고, 구박 안 하고 저 어른 될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냐고요.”
“네가 어른 되면 뭘 어쩌게?”
“제가 키울 거예요.”
“풉!”
“풉!”
“야옹!”
아이가 아이를 키운다는 말에 안 웃을 수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이내 안 웃은 척했어요. 은별이가 뱁새눈을 하고 우리를 쓰윽 쳐다봤거든요. 눈매가 제법 매섭네요.
“됐으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
“확실히 약속해주세요.”
당돌한 말에 로저는 은별이를 내려다봤어요. 필립과 저도 왠지 긴장이 되어 로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로저는 이미 준이를 맡겠다고 했지만, 설령 이제 와서 로저가 맡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있으니 준이를 시설에 보낼 일은 없어요. 그래도 뜻밖에 준이가 로저를 굉장히 따르는 것 같아 저 역시 로저가 맡아줬으면 싶었답니다.
로저가 천천히 입을 열었어요. 그 입이 열리는 속도에 따라 저와 필립의 ‘모가지’도 조금씩 위를 향해 늘어났어요.
“정은별. 안 됐지만….”
그 와중에도 저는 감탄했어요. 로저가 작가라는 사실을 툭 하면 까먹곤 했는데 가끔씩 결정적으로 그걸 일깨워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 말이죠. 드라마에서도 클라이맥스가 중요하잖아요? 절정에 달하면 모든 게 시원하게 해결되기를 원하지만 적절히 뜸을 들이는 것도 중요해요.
그리고 결정적인 대사 한 마디.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어. 내가 여기 있는 한 준이를 버리는 일은 없다. 됐니?”
저와 필립은 얼싸안고 탄성을 내질렀어요.
“오!”
“야옹!”
준이도 울음을 터뜨렸어요. 아이는 로저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어요. 그런데 은별이는 그저 로저를 올려다보고만 있네요.
은별이는 로저가 준이를 맡아주기를 바랐던 거예요. 하지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요.
가끔씩 은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래요. 짐작은 하지만 은별이의 깊은 속마음이 궁금하답니다. 리딩의 유혹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순간이지요.
아무튼 다 잘 됐어요.
아마도 로저 역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칭찬하고 싶어질 때가 올 거예요. 모두가 행복하니 은별이가 옳았던 거예요. 은별이가 그렇게 오버하지 않았다면 로저 성격에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준이를 떠나보냈을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제가 그렇게 두지는 않았겠지만요.
그나저나 누구보다 준이가 신기하네요. 어떻게 로저를 좋아할 수가 있죠? 로저는 잘생기기는 했지만 무뚝뚝한 인상 때문인지 아이들은 로저를 무서워하거든요. 로저도 애들을 싫어하고요. 아무래도 천생연분, 아니. 전생에 부자지간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