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60화 (60/103)

<60화>

우여곡절 끝에 결혼시키긴 했는데, 정작 그날 오후부터 더 이상 결혼식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박 형사와 조 형사가 또 찾아왔거든요.

“오늘은 정은별 어린이 때문에 왔습니다.”

마침 은별이도 가게에 있었기에 그 말을 듣고 인상을 팍 썼어요. 어린이, 꼬마, 이런 말은 은별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거든요.

“김병찬이 정은별 군을 납치하려던 정황은 확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속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물론 폭행이나 도박 등에 대한 범죄행위는 확실합니다만, 뭣보다 우월영 씨는 친인척이 아니고 김병찬은 이모부이기 때문에 우월영 씨로부터 김병찬이 아이를 납치하려 했다는 게 좀 이상하다고….”

“말도 안 돼요!”

은별이가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쳤어요. 정말 말도 안 되네요. 제가 물었어요.

“그래서요? 아이를 납치해 제게서 돈을 뜯어내려 한 통화 내역도 있는데 이게 증거가 안 된다면, 김병찬은 납치에 대한 죗값은 치르지 않게 되나요?”

“몰래 한 통화 녹취는 증거자료로 삼을 수가 없어서요. 확실한 것은 법원의 판결이 나와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황당하네요.”

“제 얘기는 소용없나요?”

두 형사가 은별이를 돌아보았어요. 조 형사가 물었어요.

“어떤 얘기 말이니?”

“이모부는 분명 저를 억지로 차에 태워서 제 손발을 테이프로 묶고, 월영이 형한테 저를 키워준 값을 뜯어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납치가 아니라고요?”

“피해자의 진술은 정황증거로 분류될 때가 많아서. 하지만 네가 납치 피해자이고 네 진술이 일관적이면 아무리 정황증거라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는 할 것 같구나.”

“그 사람들은 벌 받아야 해요.”

결국 두 형사는 수긍했어요.

“좀 피곤할 거다. 몇 번 진술도 해야 할 거고.”

“상관없어요.”

저는 은별이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로 했어요.

“은별이가 원하니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죠. 그런데 볼 때마다 대단한 꼬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 웬만한 아이들은 겁을 집어먹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게 일반적인데, 아무래도 은별이는 예사 꼬마가 아닌 것 같아요.”

“꼬마 아니거든요.”

눈치코치 없는 형사들이에요. 은별이가 일관성 있게 꼬마 아니라는데도 또…. 쯧쯧. 좀 얄밉기도 해서 저는 겸사겸사 쌀쌀맞게 말했어요.

“죄송하지만 용건 끝나셨으면 돌아가 주시겠어요? 이제 곧 바쁜 시간이거든요.”

“아니, 저기요….”

“어젯밤에도 보고, 우리 너무 자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안녕히 가세요, 형사님들.”

저는 두 형사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사무실 밖으로 내쫓았어요. 문을 쾅 닫고는 은별이에게 물었어요.

“전에는 이모네 부부 신고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번 사건으로 마음이 바뀐 거야?”

“그땐 이런 일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으니까요. 처음에는 경찰이 우리한테 관심 갖게 하지 않으려고 그런 건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벌 받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보다 그 인간들, 금방 나오면 또 찾아와서 해코지할 것 같거든요. 내가 형을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지 감옥에서 푹푹 썩는 편이 나아요.”

이건 또 뭔 소린가요…? 엉뚱한 녀석.

“은별아. 지금 위험한 건 너야. 누가 누굴 지켜준다는 거야?”

“내 걱정은 마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준이도 그 인간들하고 있는 것보다 로저랑 있는 편이 나을 거예요. 로저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로저는 돈도 많고 시간도 많으니까 지금은 조금만 미안해할래요. 내가 얼른 커서 갚아주면 되니까요.”

“훗….”

저도 모르게 또 웃어버렸네요. 은별이가 미간을 잔뜩 좁히고 절 노려보는 바람에 웃음을 꿀꺽 삼켰어요.

“미, 미안. 웃겨서 그런 거 아니고, 너무 귀여워서.”

“뭐라고요?”

“아, 아냐. 취소.”

그때 필립이 열린 문틈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야옹, 루나! 한창 바쁜데 사무실에서 둘이 뭐 하는 거냐! 할 말이 있는데, 정은별 이 깜찍한 꼬마 녀석이…. 야옹!”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은별이가 요란하게 일어나더니 필립을 번쩍 안아 들었거든요.

“내가 필립 돌볼게요! 형은 얼른 나가봐요!”

“야옹!”

“갑자기 뭘 돌본다는 거야?”

“그, 그런 게 있어요! 잠깐 실례!”

후다닥 나가는 꼴이 영 수상쩍었지만 바쁜 시간이라 금방 잊고 말았어요.

정신없는 오후가 지나가자 희상이가 제게 말을 건넸어요.

“저, 사장님.”

희상이 얼굴만 봐도 저는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어요. 당연히 에릭의 일이겠죠.

“에릭이 같이 살재요.”

“뭐?”

“저 때문에 이민 오신대요.”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았어요. 이민이라니, 가짜 신분으로 정착한 주제에 이민까지 오려 하는 건 분명 좋은 생각은 아니에요. 제발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되나.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오! 잘했어. 오랜만에 신통한 소리를 하네, 희상 씨.”

“제가 런던으로 가면 되니까요.”

“뭐라고?”

“그게 더 쉬울 것 같아서요. 에릭은 돈이 아주 많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신세 좀 지려고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뭘 괜찮아?”

희상이는 부끄러운 듯 제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어요.

“아시다시피 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요. 유학비용은 엄두도 못 내거든요. 그런데 에릭은 평생 다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돈이 많다고 해서, 조금 의지해도 되려나 싶다가도…. 그래도 그건 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에릭의 돈으로 유학 가서 에릭이랑 동거하겠다, 이거야?”

저는 얼핏 희상이를 의심했어요. 에릭을 호구로 아나? 하긴, 호구로 알아도 괜찮을 정도로 쓸데없이 돈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연인을 빙자해 등쳐먹는 사람과 사귀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자 제 머리가 교활한 방향으로 돌아갔어요. 희상이가 그런 사람이면 에릭도 정이 떨어지겠지? 하고 말이죠. 그런데 희상이는 제가 짐작도 못 한 말을 덧붙였어요.

“에릭이 이민 오는 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응…?”

아무래도 희상이가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저도 당장 남남끼리 뭘 해볼 용기는 없어서요. 제게는 소중한 부모님인데 느닷없이 충격받게 해드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 당장은 유학이라는 절차가 최선이지 싶어서요. 그래도 될까요?”

“희상 씨, 혹시…?”

희상인 제 언질에 대해서는 알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어요.

“저희 아빠가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 앉게 말씀하셨거든요. 없이 살아도 남 신세는 지면 안 된다고.”

“…….”

“그런데 저, 에릭이랑 살고 싶어요. 신세를 지고 말고 하는 건 우리 사이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릭이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로 돈이 많다면 더더욱 말이에요. 제 생각이 틀린 걸까요?”

자꾸 괜찮을까, 틀린 걸까, 하고 묻는다는 건…. 그래요, 이 아이는 제게서 그래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저는 좀 울상이 되었지만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사,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관없지…. 뭐….”

“진짜로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

제 말에 희상이는 정말 행복한 웃음을 지었어요. 발그레한 볼이 사과처럼 예쁘네요. 이 아이, 에릭을 정말 사랑하나 봐요. 뜨거운 마음이 저에게까지 전해졌어요. 이래서 에릭도 반한 걸까요? 이렇게 올바르고 이렇게 다정한 아이라서 말이죠. 우주를 넘어와 만난 사랑이라니 축복해주지 않을 수가 없네요.

*

며칠 후 로저와 준이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준이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거든요. 아울러 로저의 ‘꼴’이 괜찮은지도 궁금했고요.

“와! 이것이 그 유명한 11첩 반상이로군.”

“그냥 한식이에요.”

우리는 주방 식탁에 둘러앉았어요. 준이는 말끔한 모습이었어요. 하룻밤 새 얼굴이 환해졌네요. 로저는 좀 마른 것 같지만 생각만큼 형편없는 몰골은 아니었어요. 모처럼 왕성한 식욕을 보이네요. 하긴, 오늘 저녁 식탁은 제가 봐도 완벽하기는 해요.

“김치찌개가 정말 훌륭하군! 배달해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데!”

“김치찌개는 간단한데 왜 시켜서 먹어요? 만들기 귀찮으면 저희 집에 와서 드세요.”

“그렇잖아도 앞으로 종종 신세 지게 될 것 같네. 요 녀석이 은근 한식파더라고.”

그 말에 준이가 토끼 같은 얼굴을 하고는 옹알거리네요.

“아니에여. 쭌이는 반찬트종 안해여. 뭐든 잘 모그꼼니다.”

은별이가 로저에게 물었어요.

“통역 안 해드려도 돼요?”

“됐다. 이제 다 알아들어.”

은별이가 동그랑땡 접시를 동생 앞으로 밀어주었어요. 준이가 방긋거리며 동그랑땡을 젓가락으로 콕 찔러 입에 넣네요. 둘 사이가 좋으니 제 마음도 편해졌어요.

“낮에 워튼 씨와 통화했는데, 조르주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대.”

“그 와인 통은 발견됐대요?”

“전혀. 그렇잖아도 절벽 아래에 좌표를 던져봤는데 통은커녕 코르크 마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군.”

“정말 도킹에 성공한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로저의 얘기가 끝나자 저는 희상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에릭과 런던에 가겠다던 이야기 말이에요.

“그 학생 말이 맞는지도 몰라. 이쪽에서 런던으로 유학 간다면 우리로서도 별로 걱정할 게 없을 거야.”

“그런가요?”

“내가 보기에 그 희상이라는 청년은 믿을만한 사람 같아. 루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어요. 은별이가 물었어요.

“희상이 형이 에릭에 대해서만 아는 거예요, 우리 모두에 대해 아는 거예요?”

“잘 모르겠어. 자기가 알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더 못 물어봤거든.”

“내가 한번 읽어보지.”

로저의 말에 저와 은별이가 찌릿한 시선을 던졌어요. 로저가 눈썹을 쓰윽 올렸어요.

“왜? 리딩은 이럴 때 하는 거야.”

“아저씨는 시도 때도 없이 하시잖아요, 뭘.”

“그러게 말이야. 정말이지 배울 만큼 배우신 분이 너무 무개념이세요, 로저. 하지만 희상이 머리는 꼭 좀 읽어 봐주세요.”

“허어. 루나도 가만 보면 무척 타산적일 때가 있더군.”

“제가요?”

그때 필립이 어슬렁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왔어요.

“야옹.”

“아빠! 저녁 내내 어디 계셨어요?”

“마실.”

“밥은 먹고 다녀요?”

“야옹, 청키 크런치 닭가슴살이라는 걸 먹었지.”

“어디서요?”

로저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어요.

“커피숍 손님 집에 가서 뭉개다 온 모양이네.”

“야옹.”

“아빠! 설마 이채영 씨 집에 갔던 거예요?”

“야옹. 거기 주인만큼 예쁜 페르시안 고양이가 있더라.”

“그, 그래서 주인도 사귀고 고양이도 사귀고, 뭐 그런 이중 카사노바를 꿈꾸는 건 아니죠?”

“야옹,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때 은별이가 키들거렸어요. 필립이 은별이의 의자 등받이에 펄쩍 뛰어올라 털을 바짝 세웠어요.

“그렇지! 글쎄 이 앙큼한 녀석이 말이다, 루나. 지금까지 내 말….”

은별이가 서둘러 필립의 말을 막았어요.

“어엇! 그 페르시안 고양이 이름이 뭔데요?”

“야옹, 크림.”

“맛있는 이름이네요.”

그 순간 저는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로저가 끼어드는 바람에 잊어버렸어요.

“그렇지. 희상 군과 에릭 이야기를 필립에게도 해주지 그러나?”

“그럴까요?”

저는 같은 이야기를 필립에게도 해주었어요.

“야옹, 위대한 사랑의 힘이구만.”

“그놈의 사랑이 뭔지, 그것 때문에 일이 자꾸 꼬이잖아요.”

그때 제 앞치마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어요. 꺼내보니 휴대폰 액정에 뜻밖의 번호가 떠 있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