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62화 (62/103)

<62화>

산다는 게 뭘까요?

이것만은 내 생각이 옳아. 이것만은 내 의지대로 할 거야.

견고하다고 여겼던 그 생각도 알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고, 의지라는 것 역시 그저 모순일 뿐인 경우가 허다해요. 자신만의 믿음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어떻게든 좌절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런 게 인생일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저와 생각이 다를 때 아무리 굳센 의지로 제 생각이 옳다고 믿으려 해도 자꾸만 포기하고 싶어진다는 거예요. 또 그건 어쩔 수 없다는 점이에요. 그들이 옳은지 제가 옳은지, 흑백의 논리는 번외로 하더라도 말이죠.

로저 말로는, 이런 건 흑백논리를 문제 삼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필립은 제가 툭하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려 드는 게 문제라고 했어요. 에릭은 뭐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어요. 워튼 씨는 세월 지나면 별일도 아닌데 괜히 힘 빼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은별이. 그 아이가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상황을 정리해줬어요.

“미오가 너무 행복해해요.”

역시 우리 깨물고 싶게 귀여운…. 얼굴이 김병찬한테 얻어맞는 바람에 새삼 또 밤고구마가 되었지만, 어쨌거나 귀여운 우리 은별이가 제 마음을 제일 편하게 해주네요.

“라라도요. 둘이 진짜 사랑하나 봐요.”

아닌 게 아니라 둘이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부비부비하고 있어요. 뚱보, 아니. 라라는 하얀 면사포를 쓰고 있어요. 은별이와 제가 밤새 만든 그 면사포예요. 솔직히 사랑스럽네요. 미오는 목에 하얀 보 타이를 매고 있고요.

“와하하! 진짜 귀여워요, 사장님!”

세윤이가 전문가용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와 사진사를 자청했어요. 오랜만에 뒷마당이 오픈되었는데 카페 손님들까지 들어오시는 바람에, 나가라고 할 수도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 왕왕 벌어졌답니다.

“잠깐만요! 오렌지에이드는 떨어졌어요. 희상 씨, 라임 좀 썰어줄래? 세윤 씨, 아까 주문한 탄산수 도착했어? 잠깐만요, 관계자만 입장 부탁드릴게요. 죄송해요. 웨딩케이크 들어가니까 조금만 비켜주세요!”

5단짜리 웨딩케이크 님이 입장하시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어요. 제가 만들었지만 솔직히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기는 해요. 새하얀 머랭 코팅에 설탕에 감귤즙을 섞어 반죽한 달맞이꽃과 고양이 장식 두 개를 화룡정점으로 장식했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케이크는 손님들에게 제 솜씨를 뽐내기 위한 것이고요, 신혼부부 고양이들을 위한 케이크는 따로 만들어뒀답니다. 고양이들이 먹을 수 있는 고구마와 연어 젤리로 만든 케이크예요. 별로 예쁘지 않아서 신혼 방에 놔뒀지요.

“사장님! 케이크 사진 찍어도 돼요?”

“나두!”

찍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 사진이 될 테니까요.

한동안 차륵차륵,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겨우 식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의자는 당연히 모자랐기에 하객들은 대충 바닥이며 잔디밭, 계단, 장독대, 화단 앞, 자전거 등에 알아서 걸터앉았어요. 그 과정에서 은별이가 자전거를 사수하느라 약간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죠.

“죄송하지만 이 자전거에는 앉으시면 안 돼요!”

정자 안에는 ‘신랑 신부’와 관계자의 자리가 마련되었어요. 저는 은별이와 샘이 엄마와 나란히 앉았어요. 오른쪽 벤치에는 로저와 준이, 필립과 에릭이 앉았고 왼쪽 벤치에는 희상과 세윤, 워튼 씨가 앉았어요.

로저가 단상 앞에 섰어요. 그 단상은 기다란 화병을 뒤집어 놓은 것이랍니다. 오늘 로저는 늘 입는 까만 옷 대신 하얀 슈트를 차려입었어요. 솔직히 좀 오버다 싶지만 고맙기는 하네요.

“여름의 막바지에 이른 오늘, 주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뜨거운 사랑을 불태운 두 사람, 아니 두 고양이가….”

와하하, 웃음이 터졌어요. 당연히 저는 웃지 않았어요. 은별이도 웃지 않네요.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 손을 꼭 잡아줬어요. 철모르는 준이와 필립은 수준이 딱 맞는지 우리 옆에서 투덕거리고 있어요.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야옹.”

“저희 친구 프레데릭 워튼 씨의 주례사가 있겠습니다.”

워튼 씨도 여름 양복을 입고 오셨네요. 고마운 일이에요. 아치볼트와 엘리아, 조르주도 참석했다면 좋았을 거예요. 엘리아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대체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요즘은 문득문득 불안해요. 언젠가 엘리아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여기서는 늘 불안하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고 산다고 말이죠.

“저는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는 프레데릭 워튼입니다. 오늘 이 특별한 결혼식의 주례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웃음과 박수가 터졌어요.

“저는 1천 5백… 아니, 일흔이 훌쩍 넘었습니다만, 요즘에 들어서야 겨우 사랑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오로지 두 사람의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경우에도 맺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상대에게만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상황이나 방해꾼 때문에 맺어지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슬픈 일이죠.”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까요? 아니면 본인의 이야기일까요? 둘 다일 가능성이 높네요. 갑자기 심사가 뒤틀려서 벌떡 일어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이 결혼 안 된다’고 외쳐보고 싶어져요.

“여기 이 두 고양이 님은….”

와하하 또 웃음이 터졌어요.

“격한! 반대를 무릅쓰고!”

또 한 번 요란한 웃음이 터졌어요. 다들 내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며 웃느라 바쁘네요. 쳇.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으로 축복해줍시다!”

와아- 외치며 모두 기립박수를 날려주네요. 은별이도 꼭 잡은 내 손을 흔들며 일어났어요. 칫, 어쩔 수 없네요.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드는 드라마 속 시아버지가 딱 이런 맘이려나요.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은 배역인데 말이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쳤어요. 미약하나마 미소도 짓게 되네요.

그러나 금세 경악하고 말았어요.

“미오 블랑슈!”

은별이가 뛰어나갔지만 때는 늦었어요. 저는 약간 이성을 잃고 외쳐댔어요.

“너희들 케이크는 신혼 방에 있단 말이야! 그건 형의 작품이야, 작품! 마스터피스!”

하지만 신랑 신부 고양이들이 이미 케이크로 뛰어든 후였답니다. 엄청난 함성과 함께 크림 범벅이 된 두 고양이는 마찬가지로 크림 범벅이 된 은별이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제 소중한 케이크는 당연히 곤죽이 되었답니다. 씹….

*

“후유-”

이렇게 요란하게 결혼식을 치를 생각은 없었는데 일이 정말 커졌지 뭐예요. 결혼선물을 주고 가시는 손님도 계셨고, 심지어 축의금을 두고 가신 손님도 계셨어요.

신혼 방은 손님방에 꾸몄답니다. 새로 장만한 핑크색 텐트에 꽃장식과 풍선도 달고, 고양이용 웨딩 케이크와 함께 부부 디너로 우유랑 연어 스테이크도 준비해놓고요.

은별이가 신랑 신부를 자전거 바구니에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어요. 바구니에는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한 풍선이 둥실거렸으니 누가 봐도 신혼부부였겠죠. 그렇게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부부는 신방에 들어갔어요.

“새끼 낳으라고 고사 지내는 거잖아요.”

“야옹, 이왕 결혼시켰는데 부부 금슬 좋으면 좋지 뭘 그러냐.”

“라라는 임신 중인데 둘이 떼어놔야 하지 않아요?”

은별이가 슬쩍 끼어들었어요.

“오늘 그 드라마 마지막 회던데.”

“내가 뭐 드라마에 환장한 사람이니?”

그렇게 대답하고 소파에 앉았어요.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피곤해서 그런 거고요. 은별이가 슬그머니 TV를 켰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큰일 날 뻔! 막 시작했네요.

어느샌가 저는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새우 과자를 집어 먹으며 몰입하고 있었어요. 목이 말라 벌컥벌컥 마신 건 알고 보니 맥주였어요.

“결국 해피엔딩이네요.”

어떻게 된 걸까요? 은별이가 제 침대에 기어 들어가면서 그 말을 했어요.

“너 왜 거기로 들어가?”

“어? 좀 아까 같이 자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어유, 금방요, 금방.”

내가 그랬나? 설마 조기 치매라는 병은 아니겠죠? 그 병은 지구에나 있는 병이랍니다. 플럼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병이에요. 감염병도 아닌데 플럼버인인 제가 지구에 왔다고 그 병에 걸린 건 아닐 텐데 말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맥주를 마셨더군요. 몇 캔이나 마신 거지…?

안 된다고 하기도 귀찮아져서 그냥 침대로 올라갔어요. 은별이가 제 맘대로 제 팔을 펴놓고 베개 삼아 베고 눕네요. 능청은 타고났어요.

“라라와 미오도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에요.”

“넌 좋겠다. 누구보다 두 녀석을 맺어주고 싶어 했잖아.”

“사랑하면 꼭 맺어져야죠.”

“세상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워튼 씨가 사랑은 결국 맺어지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시끄러. 어서 자.”

제 입에서 나온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제 팔은 은별이를 꼭 끌어안았어요.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눈을 감으니 어김없이 평화라는 놈이 찾아오네요. 이런 시간 때문이겠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요.

“형.”

한동안 쌔근거리기만 해서 잠든 줄 알았는데 은별이도 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에요.

“왜…?”

“운명은 의무일까요?”

“운명이, 의무냐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운명은 의무인 것 같다고요.”

“하기 싫어도 억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이라면, 아니야.”

“아뇨. 전 그랬으면 좋겠어요.”

“무슨 뜻이야?”

“제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왜?”

“모두 그런 걸 찾으려고 하잖아요. 장래 뭐가 되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거요. 그게 이미 정해져 있다면 축복일 것 같아요.”

“넌 저 고양이 커플이 서로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벌써 둘이 할퀴고 싸우고 있는지도 몰라.”

“에이, 그럴 리가요. 둘이 얼마나 사랑하는데.”

“쳇!”

은별이가 킥킥거리며 웃었어요.

“왜 웃어?”

“처음엔 완벽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형, 엄청 귀여워요.”

“뭐라고?”

“으악! 잘못했어요.”

“늦었어!”

은별이가 까르르 웃으며 제 마수를 피하려고 데굴거렸어요. 어림없지요. 저는 오늘 받은 스트레스를 은별이에게 간지럼 피우기로 풀 작정이에요.

우리는 한동안 깔깔거리며 뒹굴다가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면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죠. 은별이가 내 배 위에 올라타고 있어서 저는 마치 아기 주머니가 달린 캥거루 엄마가 된 기분이었어요. 은별이는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봤어요. 그리고는 앙증맞은 입으로 말했어요.

“사랑해요, 형.”

솔직히 말하면, 그때 저는 조금 움찔했어요. 등에 닿은 카펫에서 정전기가 일듯이 짜르르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거든요. 그게 어쩐지 네임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은별이 얼굴을 보니 ‘소오름’은 금세 가라앉았어요. 저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형도 은별이 사랑해.”

은별이는 피식 웃으며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어요. 늘 그렇듯 제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거리면서 말이죠. 저는 간지러워서 웃고 은별이는 킁킁대면서 웃었어요. 우리는 또 카펫 위를 뒹굴며 장난을 치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잠들어버렸어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으, 은별아, 너…?”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저는 정말 조기 치매라도 걸린 걸까요? 아니면 맥주를 백 캔쯤 마셨던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