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최지환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어도 변함없이 못된 아이더군요. 대체 은별이와 무슨 악연이기에 저기서 또 부딪히는 걸까요.
그런데 우리 은별이도 예전의 은별이가 아니잖아요? 키도 그다지 차이 나지 않고 말이죠. 그나저나 최지환 저 녀석, 농구알못인 제가 봐도 명백하게 반칙을 일삼고 있네요. 안 그래도 관중석에서도 비난이 쏟아졌어요.
“뭐야, 저 최지환이라는 학생!”
“퇴장시켜요!”
“허! 다섯 번이면 퇴장인데 네 번까지만 하려나 보네.”
“어린 나이부터 저렇게 야비하면 어떡해.”
관중의 비난에도, 심판의 경고에도 녀석이 은별이를 물고 늘어지는 순간이었어요.
은별이 등에 날개가 솟아난 것 같았어요. 언젠가 로저의 집에 떨어진 플럼버의 유니콘처럼 말이에요. 정말로 그 유니콘이 날개를 달고 나타난 줄 알았답니다. 은별이가 도약한 순간 은빛 날개가 활짝 펴지더니 눈 부신 빛이 쏟아졌어요.
그 순간 시간이 병렬로 늘어선 것 같았어요.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슬로우모션처럼 말이에요. 초 단위로 잘린 시간의 프레임에 은별이의 멋진 도약이 차례대로 새겨졌어요. 저는 숨도 못 쉬고 그 프레임들에 넋을 잃고 말았어요.
정신 차리고 보니 그 프레임들은 제 손에 들린 휴대폰의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어요. 정말 다행이지요! 멍하니 있다가 그 멋진 장면을 찍지도 못했다면 저는 정말 억울해서 팔팔 뛰었을 거예요.
시간의 파노라마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소리가 체육관을 뒤덮었어요. 관중석의 모두가 일어나 함성을 질렀어요. 관중은 물론이고 선수며 관계자들까지 소리를 지르고 서로 얼싸안고 발을 굴러대며 환호했어요. 프로농구 경기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루나 블랑슈의 시간만 멈춘 것 같았어요. 충격이 너무 심했어요. 물론 그 충격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는 정반대였지요. 그야말로 환희의 충격이었어요. 정말이지 환희라는 건 이런 거였어요!
은별이가 날아올라 덩크슛을 완성한 그 기적 같은 순간, 저는 그날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날. 은별이가 저에게 온 날 말이에요. 그 조그만 아이가 저렇게 성장하다니 이거야말로 마법 같았죠. 그날 밤 생각을 하니 은별이의 성장이 신기하면서도 그것과는 별개로 또 뭔가 착잡해지네요.
필립은 늘 말하곤 해요. 지구인에 비해 순박한 성향의 플럼버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가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말이죠. 저도 동의하는 바예요. 다만 저는 제가 속한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을 알아야 할 필요를 느낀 적 없었을 뿐이에요. 누군들 온 세상을 다 아나요? 그리고 아무리 제가 온 세상을 다 아는 사람이라 해도 어린아이와의 네이밍을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건 식견과는 상관없는 문제니까요.
그동안 저는 은별이와 함께 사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은별이를 조카나 동생처럼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우리 사이에 가장 어울리는 관계의 정리라고 말이죠.
지구 시간으로 겨우 2년이 흘렀을 뿐이에요. 2년은 제게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랍니다. 그 시간 동안 은별이는 저렇게 훌쩍 자랐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앳된 동생이랍니다.
함께 했던 다정한 아침, 왁자지껄 카페의 일, 햇살 쏟아지는 공원에서 자전거 타기, 좋은 일, 나쁜 일, 심장 쫄깃해지는 사건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저는 단 한 번도 운명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적어도 저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그렇답니다. 저는 여전히 우리에게 점지된 운명을 인정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지금 이건 뭘까요?
은별이가 유니콘처럼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비상한 순간,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덮친 그 순간에, 저는 들었어요. 체육관을 뒤흔드는 그것들을 뚫고 거세게 뛰는 제 심장 소리를 말이에요.
*
“무슨 일 있나?”
오늘도 로저는 준이를 달고 왔어요. 준이는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네요.
“손님 많았어요?”
“정신없었지.”
“죄송해요. 글 쓰실 시간도 부족할 텐데 자꾸 가게 일 부탁해서요.”
“별 소리를 다 하는군.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필립은요?”
“위층에. 아기들하고 놀고 있을걸.”
손님이 뜸해질 시간이라서 저는 로저에게 커피나 한잔하자고 했어요. 우리는 카운터에 기대선 채로 커피를 홀짝였어요.
“무슨 일 있나? 혹시 은별이 팀이 졌어?”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은별이가 덩크슛을 넣어서 근사하게 이겼어요.”
“오, 정말? 녀석, 제법인데. 그런데 왜 얼굴이 죽을상이야?”
“만약 로저는 준이와 네이밍이 된 사이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풉!”
로저가 마시던 커피를 뿜었어요. 저는 그가 찬물을 들이키는 것을 시큰둥하게 지켜봤어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하나?”
“그렇죠? 끔찍하죠?”
로저가 제 표정을 살폈어요.
“은별이 때문에 고민하는 건가?”
“모르겠어요. 고민해야 하는 것도 같고.”
“정확히 고민하는 요점이 뭔데?”
“네이밍이 된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척하면 운명은 비껴갈까요?”
로저는 조금 울적한 얼굴을 하고 저를 지켜보더니 비로소 입을 열었어요.
“은별이가 덩크슛을 넣는 걸 보고 심장이 뛰던가?”
저는 실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어요.
“진짜 이러실 거예요?”
로저는 고개를 살살 저었어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묻지는 않았어요.
“남의 생각 자꾸 읽지 말라고요.”
“안 믿겠지만 안 읽었어.”
“거짓말.”
“진짜야. 자네가 말해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뭐하러 리딩을 하나?”
“내가요?”
“그래. 은별이가 멋진 슛을 넣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자네 표정이 어둡다는 건 말해주는 바가 딱 하나밖에 더 있겠나.”
눈치도 더럽게 빠르네요. 저 같으면 그런 유추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알겠어요. 그래서요?”
“자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운명을 거스르며 살아가네.”
“진짜요?”
“그래.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불행해지는 건 아니야.”
“정말 그럴까요?”
“야옹, 아니야.”
어느새 필립이 우리 발치에 와 있었어요. 자기 멋대로 끼어드는 게 필립의 주특기이니 놀라지는 않았어요. 로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필립을 내려다봤어요.
“뭐가 아니라는 건가, 필립?”
“운명을 거스르면 불행해진다고. 반드시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그러하네.”
“자네가 봤나? 불행해지는 사람들.”
“봤지. 보고말고.”
“아빠. 여전히 제가 은별이를 배필로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안 그러면 야옹이야.”
마침 손님이 오셨기에 대화는 중단되었어요. 몇 시간 후 알바생이 오고 나서야 다시 이야기할 틈이 생겼어요.
“로저,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아니면 좀 기다렸다가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은별이 축하도 해줄 겸 고기나 구울까 해요.”
“루나.”
“네?”
로저는 잠시 나를 보기만 하더니 고개를 저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럼 시간 너무 많이 뺏기는 거 아니에요?”
“급한 마감은 없어서 괜찮네.”
“그럼 준이랑 올라가서 좀 쉬세요. 종일 서 계셨잖아요.”
결국 로저는 영업이 끝날 때까지 일을 도와줬어요.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나가고 셔터를 내리는데 때마침 은별이로부터 문자가 왔네요.
[깨물고 싶게 귀여운 은빛아가별] 이제 농구부 뒷풀이 끝났어. 금방 갈게.
천천히 오라고 답장을 보낸 다음 돌아서니 로저가 바로 옆에 서 있었어요. 그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왜요, 로저?”
“루나.”
“네.”
“루나.”
“왜 자꾸 부르시는데요?”
“루나.”
“어허.”
“그깟 네이밍이 중요한 게 아니야. 사람에게는, 특히 성인 남자에게는, 네이밍 따위가 아니라 잘 맞는 상대가 필요하지 않겠나?”
“잘 맞는 상대요?”
“예를 들면, 나는 어떤가?”
“농담 마시고요.”
그때 다행스럽게도 빼액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돌아보니 준이가 사무실 문간에 서서 울고 있었어요. 로저가 놀라서 뛰어갔어요.
“준이 왜 울어?”
그러자 준이가 목에 매달린 휴대폰을 내밀었어요. 휴대폰의 화면에는 ‘엄마’라는 이름이 떠 있었어요.
“네 엄마한테 전화 온 거니?”
준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허….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우는 아이라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말했듯이 지난 2년간 준이는 자신이 했던 약속대로 잘 울지 않았어요. 눈치를 보는 면이 좀 안쓰럽기는 해도 제법 밝게 웃고 나름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았답니다.
은별이의 짐작은 정확했어요. 아이라면 질색하던 로저가 이제는 준이를 친조카처럼 귀여워하게 되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준이가 저렇게 우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솔직히 준이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필립 말대로 로저가 제게 마음이 있는 모양인데, 참 곤란하게도 저는 로저를 좋아하지만 연애 감정이 들지는 않거든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하기는 해요. 로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미남이고, 누나는 아니지만 나이 많은 형 같고, 어찌 보면 제 이상형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게 진짜 친형 같기만 하니 문제네요. 편하고 의지가 되고 가까이에서 늘 함께했으면 싶어요. 로저도 제게 연애 감정 말고 친동생 같은 감정을 느껴줬으면 하는 소망이에요.
아무튼 준이 덕분에 적어도 오늘은 좋은 친구를 잃지 않았어요. 다행이에요.
인생은 이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뢰를 피해 나가는 것일까요? 겨우 그런 것일까요? 어쩐지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