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오늘 아침 어떠셨습니까? 저는 어제의 감동이 고스란히 남아 내내 설렜는데요, 학우 여러분도 정은별의 덩크슛을 떠올리며 맛점하세요. 좀 오래된 노래지만 1학년 7반 이영우 후배님이 아버지가 좋아하신다며 신청해주셨네요. 코요태의 비상. 오늘 딱 어울리는 곡 같아요.]
정은별이 덩크슛으로 슈팅스타가 된 날이자, 루나에게 완벽하게 커밍아웃한 다음 날이었다. 방송반에서까지 저런 멘트를 날려주다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마주치는 애들마다 죄다 호들갑을 떨며 휴대폰을 들이대거나 사인 요청을 해댔다. 여러모로 쑥스러운 하루였다. 이선호는 종일 내 곁에 들러붙어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정은별, 네 키가 150cm도 안 됐었을 때 얘긴데….”
“야, 닥쳐.”
“웬 촌뜨기가 밤고구마 같은 꼴로 나타나서는 우리 다 깜놀했잖아. 계나리, 너도 기억나지? 첫날 교탁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았잖아? 그때도 고구마였는데, 최지환한테 얻어터진 다음에는 얼굴인지 발인지도 분간하기 힘들… 컥!”
이선호는 내 팔에 목을 졸려 더 이상 수다를 떨 수 없었다. 계나리는 같은 반도 아닌데 자기 반 애들까지 몰고 오는 바람에 한동안 교실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인증샷 좀 찍자며 끈질기게 휴대폰을 들이대는 녀석들 때문에 우쭐하던 기분은 반나절 만에 바람이 빠져버렸다.
“개나리. 너도 그만 꺼져.”
계나리의 동그란 눈이 확 찌그러졌다.
“너 그거 컨셉이야?”
“뭐가?”
“나쁜 남자.”
“누가 나쁜 남자야?”
“너, 정은별!”
이선호가 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컨셉 맞아! 용의주도한 놈.”
“헛소리 좀 그만하지 못해? 개나리, 너도 친구들이랑 가서 밥이나 먹어.”
개나리는 삐죽거리면서 돌아섰고 이선호는 내 무릎에 엉덩이를 처맞으면서 폴짝폴짝 급식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수선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나니 심적으로 피곤해서 한시라도 빨리 루나커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농구부 연습은 당분간 없고 그 시간에 자습을 해야 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떼먹고 서둘러 자전거에 올랐다.
집에 도착해 대문 도어록을 풀면서 루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뒷마당에는 고양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미오와 블링이 반가운 듯 다가와 꼬리를 흔들었다.
녀석들의 등을 쓰다듬어준 다음 막 뒷문을 열었을 때였다. 동그랑땡 같은 아저씨가 문 앞에 서 있는 바람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손님이라는 걸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혹시 화장실 찾으세요? 반대편 복도로 가셔야 하는데….”
“아항! 미안해요.”
“아닙니다.”
남자가 조그만 눈을 빛내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재미있는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눈이었다. 쿠키맨에 박힌 초코 칩만큼이나 작은데도 무척 영리해 보이는 눈이었다.
“여기 살아요?”
“네? 네.”
“그럼 혹시, 정은별이라는 학생?”
“저를 아세요?”
“우와! 세윤이 말대로 여기가 맛집이네!”
“네…?”
“나는 이노마라고, 세윤이가 소속된 황금달 엔터테인먼트 대표예요. 좀 이따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홀에서 기다릴….”
그때였다. 그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말의 다리로 보이는 거대한 기둥이 나타났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부서진 건물 파편들이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내가 서 있는 문간을 빼고 건물이 부서져 내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기가 막혀서 굳은 채 서 있었다.
1초도 안 되어 화들짝 놀란 루나가 뛰어왔다. 그 역시 황당해서 말도 못 하고 나와 쓰러진 이노마 대표, 그리고 그를 밟고 있는 말발굽만 쳐다보았다. 그 말발굽의 주인은 유니콘이었다. 잠시 후 필립과 고양이들이 뛰어왔다.
“야옹! 살인사건이냐?”
필립의 말에 정신을 차린 루나는 유니콘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천진난만한 유니콘이 까르르 웃으며 발을 들었다. 그사이 나는 재빨리 이노마 대표를 끌어냈다. 그 와중에 머리 위에서 또 한 번 왈그르르 소리가 들리더니 벽돌 무더기가 쏟아졌다. 유니콘이 엄청나게 큰 날개를 퍼덕이는 바람에 건물 어딘가가 부서진 모양이었다.
유니콘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두 배는 커졌고 날개는 몸집보다 더 컸다. 은빛 비늘 같은 날개는 물론이고 뿔이 돋은 얼굴이며 미끈한 몸체까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으나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녀석이 한 번만 뛰거나 날개를 퍼덕이면 루나커피가 초토화될 판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루나가 유니콘에게 낫을 걸었다. 그리고는 가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홀 안은 조용해졌다. 사색이 된 얼굴로 그가 물었다.
“…죽었니?”
아닌 게 아니라 이노마 대표는 조그만 눈을 반짝 뜬 채라서 꼭 눈뜨고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코에 손을 대보았다.
“아뇨. 죽지는 않았어요.”
나는 이노마 대표의 팔을 목에 둘러 일으켰다. 자그마해서 가벼울 줄 알았는데 몸무게는 꽤 많이 나가는 남자였다. 내가 그를 정자의 벤치에 눕혀놓는 동안 루나가 좌표를 띄우고 로저를 불렀다. 상황을 본 로저는 헉, 탄성을 내지르고는 즉시 나타났다.
“오 마이 갓. 이 녀석이 왜 또 나타난 거지?”
“이제 날개까지 돋았어요. 덩치도 더 커졌고. 어쩌죠?”
로저가 정자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 다쳤나?”
“아! 잠깐만요.”
루나가 고갯짓을 하자 주위가 조금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노마 대표가 사라졌다. 루나가 시간을 3분 전으로 되돌린 것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이노마 대표가 죽었다면 시간을 되돌려도 살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 TV를 보다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몇 분 전에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루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할 수 없어. 시간을 되돌려도 죽은 사람의 시간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에게 속한 시간은 끝났기 때문이야.”
3분 전으로 시간이 돌아가자 루나가 나에게 뒷문을 가리키며 손짓했고, 나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이노마 대표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너무 반갑게 인사를 해버렸나? 사실 굉장히 반가웠다. 하마터면 죄 없는 사람이 죽을 뻔하지 않았나.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노마 대표는 새까만 단추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정은별 학생?”
“아, 네네.”
“우와! 세윤이 말대로 여기가 맛집이네!”
“네네.”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는 그가 무척이나 예뻐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노마라고, 세윤이가 소속된 황금달 엔터테인먼트 대표예요. 좀 이따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홀에서 기다릴게요.”
“네네. 그런데 화장실은 이쪽이 아니라 반대편 복도예요.”
“아항! 미안해요.”
“아닙니다.”
“좀 이따 봐요. 기다릴게!”
“네네.”
이건가? 루나가 말한 ‘시간을 지우는 일의 난점’이란 것은. 낯선 사람이 얘기하자고 하면 평소의 정은별은 생까고 본다. 그런데 심하게 친절해버렸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패스.
이노마 대표가 복도를 따라 멀어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둘러 뒷마당으로 나가보니 유니콘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보낸 거예요?”
로저가 대답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산속 좌표 안에 가둬놨다.”
“야옹,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아빠. 정신 사납게 촐싹거리지 좀 마세요.”
로저가 약간 울상을 하고 말했다.
“오래 묶어둘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지금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은별아, 우리 집에 가서 준이를 좀 봐주겠니?”
“네! 지금 바로 가볼게요.”
루나가 로저에게 물었다.
“산으로 가서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요?”
로저가 조금 더 울상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지. 도대체 어디서 꼬인 건지 알 수가 없군.”
“설마, 그 애스턴지 부스턴지 하는 코드로 또 뭘 하신 거예요?”
“응? 으응….”
“뭘 하셨는데요?”
“그냥… 놀자고 했네.”
“유니콘한테, 놀자고 했다고요?”
“아니! 벌새처럼 작은 동물을 부를 생각이었지.”
“야옹, 저 유니콘이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 혹시 로저 자네를 사랑하는 거 아닐까?”
“닥치게!”
“지금 수다 떨 상황이 아니에요. 어서 가보세요, 로저.”
“그, 그래.”
로저는 즉시 사라졌고 나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준이한테 가볼게!”
루나가 말했다.
“은별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 그리고 준이 여기로 데리고 와.”
“알았어.”
서둘러 집을 나서서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루나커피의 창가에 이노마 대표와 허세윤이 보였다. 눈이 마주쳐버렸기에 손을 흔들어보였는데, 이노마 대표가 유리창에 코를 박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죄송해요!”
나는 그렇게 외치고 그들을 무시하고서 로저의 집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집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준이였다.
“뭐야? 여기도 유니콘이 나타났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마음이 초조해서 기다리지 못하고 대문을 마구 두들겼다.
“준아! 준아!”
짧은 순간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또 다른 유니콘이 나타났을 것 같지는 않고, 설마 플럼버의 맹수가 나타났나? 아니면 그새 강도라도 들었나?
위험에 처했다면 준이는 문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원래도 인터폰에 키가 잘 닿지 않아 버튼 누르는 데 시간이 걸리는 아이였다.
그냥 담을 넘기로 했다. 담장이 농구 골대보다 훨씬 낮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반대편 집의 담장까지 물러났다. 대충 거리가 10미터는 되었다. 쏜살같이 달려 훌쩍 뛰어오른 다음 벽을 밟고 도움닫기를 했다. 비록 공은 없었지만 환상의 덩크슛 포즈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람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