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사랑이란 뭘까?
어쩌면 사랑은 빵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굽기 위해 반죽을 할 때는 이게 과연 성공할까 실패할까 설레고, 잘 구워지면 뿌듯하고 못 구워지면 짜증 나고, 그러나저러나 먹고 나면 그걸로 쫑인 것. 물론 루나의 빵은 아주 오랫동안 여운이 남지만.
엘리아를 보며 내가 떠올린 것은 드라마 속 악녀였다. 그녀는 아치볼트의 손을 뿌리친 사실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치볼트에게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아치볼트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회원들을 향해 절규했다.
“보세요! 이 여자는 저한테 미안해하지도 않는다고요!”
그 말에 엘리아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왜 미안해요? 뭘 미안해해야 하죠? 난 그저 그 손이 역겨워서 뿌리친 것뿐이에요.”
아치볼트의 얼굴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핼쑥해졌다. 그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내 손이 역겹다고? 내가, 자기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역겨워?”
엘리아가 매서운 눈으로 일어나 아치볼트 앞에 섰다.
“내가 하는 말마다 토 달고 무슨 말만 하면 심드렁해하던 사람이 누구지?”
“뭐? 내가 언제 그랬단 말이야?”
“그뿐인 줄 알아? 당신, 나랑 TV 보면서 여배우 칭찬을 얼마나 해댔는지 기억나?”
“내가 언제!”
“늘 이런 식이야. 나는 당신 하는 말에 상처받고 종일 그 생각만 하면서 화내고 있는데 정작 맘먹고 물어보면 아치볼트, 당신은 기억도 안 난다고 둘러대.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내 손을 잡은 루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귓불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오 마이 갓….”
흘긋 보니 루나는 예의 그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라마에 빠져 넋을 잃고 있을 때면 늘 짓는 표정 말이다. 엘리아와 아치볼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두 사람의 상황이 좀 웃겼는데, 루나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루나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가 서둘러 입술에 힘을 주었다.
어쩌다가 로저와 에릭과도 눈이 마주쳤는데 그 두 남자도 나와 똑같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급기야 에릭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만 워튼 씨는 안타깝다는 듯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연륜이 느껴지는 표정이랄까, 함부로 남의 상황을 비웃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런데 이쯤 되면 진흙탕 싸움 아닌가?
“엘리아. 고작, 그게 나를 버린 이유야?”
“누가 당신을 버렸다는 거야! 난 당신이랑 다정하게 플럼버에 갈 생각이 없었을 뿐이야. 당신과의 인연은 이 지겨운 행성에서 끝낼 생각이었어. 각자 갈 길 가자는 뜻이었는데 뭐가 잘못됐어?”
“하지만…. 우리 좋은 짝이었잖아. 그런 마음이었으면 진작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수없이 말했어. 우리 XX할 때 당신이 내 XX에 XX을 XX는 바람에 내가 화냈던 거 기억 안 나? 그때도 분명히 말했어. 우리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루나가 내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곁눈으로 보니 그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져 있었다. 나는 웃겨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런 건 나뿐만이 아닌지 급기야 로저도 잠깐 실례, 라고 말하고는 욕실 쪽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거기서 실컷 웃고 나올 것이다.
필립은 모처럼 신이 나는지 벽난로 위로 뛰어 올라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그곳은 이른바 ‘경기’를 관람하기에 명당자리였다. 바로 앞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철모르는 준이와 고양이들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싸움이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기에 워튼 씨가 중재에 나섰다.
“좋아! 두 사람 일은 지금 결론 낼 수 없다는 걸 충분히 알았네. 그만 휴전하게. 나중에 둘이 싸우든지 하라고.”
“그럼 회의 시작할까요?”
세수까지 하고 나온 로저가 박수를 짝 쳤다. 아치볼트가 워튼 씨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가볼게요.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꺼져야 하는데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사람은 엘리아니까요.”
그가 로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중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말해주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게.”
아치볼트가 테라스로 나가자 모두 약속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아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정말이지 질긴 인연이네요. 저 인간을 또 보게 되다니.”
“그렇게까지 아치볼트가 지겨워진 거예요?”
루나의 질문에 엘리아가 그를 슬쩍 보더니 질문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좋은 인연을 만난다는 건 최고의 행운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엘리아?”
루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지만 엘리아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로저가 벽난로 앞에 서서 좌표를 띄웠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아는 좌표 이동 중 다른 차원으로 떨어진 것 같아. 이번에 루나커피에 떨어진 유니콘도 그렇고.”
“참. 그 유니콘은 어떻게 됐어요, 로저?”
루나의 질문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방법으로 보냈네.”
그가 모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급하게 코드를 사용해 위험한 일을 벌였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결과니까요. 이제 검증이 끝나기 전에는 섣불리 코드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 로저.”
“에릭 말이 맞네. 우리한테 죄송할 건 없어. 큰일 당할 뻔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워튼 씨, 에릭. 그럼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엘리아가 떨어진 곳은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도 속하지 않은 곳인 게 분명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이윽고 로저가 말을 이었다.
“엘리아를 보세요. 몇 달이나 굶은 사람처럼 보이나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도킹 시도를 했던 날로부터 벌써 시간이 꽤 흘렀는데, 엘리아는 제주도에서 봤을 때보다 수척해보이기는 했으나 아사 직전의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만약 우리 말고 누군가 좌표를 이용해 다른 차원을 열었다면, 어떨까요?”
로저의 그 말에는 모두 동요했다.
“혹시 먼저 도킹에 성공한 두 회원이 플럼버의 공관에 건의해 우리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게 아닐까?”
워튼 씨의 말에 로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고 있지만 그런 시도가 있었다면 제가 보낸 애스터코드에 대해서 뭐가 됐든 응답이 왔을 겁니다. 이건 분명 지구에서 만든 좌표예요. 무엇보다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어요. 지나치게 불완전한 거죠. 그래서 엘리아도 이상한 종유석 동굴에 떨어졌던 걸 거예요.”
루나가 물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우리가 연 좌표를 교란했다는 말이에요?”
“정확해. 그 와중에 엘리아가 우리와 교신에 성공했고, 내가 보낸 코드 덕분에 겨우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것 같네.”
내가 물었다.
“그럼 역시 제주도의 그 뿔테안경 짓일까요?”
“그를 포함한 그들의 짓인 거지. 특수한 시설을 가진 집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집단의 짓이라면, 그래서 엘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린 건가요?”
우린 다 죽을 거야…. 결국 다 죽을 거야….
엘리아가 고개 대신 꼬아놓은 다리를 까딱거렸다.
“맞아요.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고,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정말 끔찍했죠. 나는 바깥에서는 죽은 게 되지만 실상 영원히 죽지 않고 혼자 그곳에 갇히는 거예요. 그냥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삭제될 뿐인 거죠.”
“세상에! 정말 끔찍하네요.”
루나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내가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손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에릭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정말 그렇군. 그리고 굉장히 기분 나빠. 줄곧 감시당했던 것 같은 기분이야.”
“우리의 눈과 귀를 속일 정도면 상대 역시 우리와 비슷한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니면 굉장히 뛰어난 장비를 가졌든지.”
워튼 씨의 말에 로저가 대답했다.
“에릭 말이 맞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아까부터 나는 줄곧 생각했다. 이런 식의 대화는 대부분 도킹을 서둘러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나곤 한다. 이제 내 덩치가 루나보다 크니까 어려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루나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우리의 운명은 여전히 살얼음판에 놓인 디딤돌이었다.
*
모두 돌아간 후 우리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필립은 고양이들과 잠들었는지 텐트에서 나오지 않았다.
“형.”
루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너 두고 안 가.”
우리 사이는 평행선이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행성을 우리는 나란히 돌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원이지만 우리 둘에게는 그저 직선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 떠나야 하고 내게는 그를 잡을 수 있는 어떠한 힘도 없었다. 그를 잡으면 그가 여기서 위험해지는 걸 눈만 뜨고 보겠다는 뜻이니,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우리의 이별은 운명처럼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왜일까?
“전에는 내가 형을 사랑하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루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 손안에 안긴 루나의 손만 응시했다.
“그런데 이제는 의무라고 생각해.”
그게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언젠가 그를 잃고 난 후에 세상을 증오하고 인생을 증오하고 나 자신을 증오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빵을 굽도록 만들어진 게 오븐인 것처럼, 정은별이라는 놈은 루나 블랑슈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고장나 버려져도 오븐은 오븐인 것처럼 루나가 떠난 후에도 정은별은 루나를 사랑하는 정은별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바보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히틀러 같은 독재자도, 나폴레옹 같은 영웅도 아니다.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 그가 제일 강한 자다, 라고…. 어느 소설에 나오는 문구를 본 적 있었다.
“생각해봤는데 나는 늘 그걸 꿈꿨던 것 같아.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기분. 그 의무감을 느끼고 싶어 했나 봐.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았으니까.”
“은별아.”
“그런 내게 형은 너무나도 극적으로 와주었어.”
가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그럼에도 내가 루나의 이름을 가진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서로가 없어도 이름은 남을 테니까. 더불어 지금 이 찬란한 시간도 남을 테고 말이다. 혼자 남은 나에게 이 추억은 밥보다 더 밥이 돼 줄 것이다.
루나가 내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눈을 맞추면 입 맞추고 싶어질까 봐 나는 고집스럽게 그 손만 응시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루나가 내 손등을 짝 때렸다.
“아야야….”
“정은별.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사랑? 운명? 의무가 뭐 어째? 너 죽을래?”
“앗, 꼬집지는 마.”
“요게, 군기 잡은 지 한참 됐지. 응?”
그때 필립이 텐트에서 툭 튀어나와 외쳤다.
“임신했어!”
루나가 보름달만 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 뭐요?”